2000/7/28
"어서 오세요. 수고들 많았습니다."
많았지. 나 말야, 나. 저 작자들 등쌀에다가 하이네센이라는, 이 미친 여행의 대장께선 내가 아스피린을 몽땅 축내게 했단 말이다. 그들에 대한 첫인상은 너무도 실망스럽고 기분이 나빴다.
- 그런데 기대한 것도 없으면서 왜 실망한걸까? 그, 글쎄...;
누덕누덕 기웠다는 표현이 적합할 선체의 외형은 고사하고, 시설마저 역시나 말이 아니었다. 어디서 굴러다니던 구닥다리 장비들을 주워온게 분명하다. 이착륙 조종 장치와 항법, 중력과 관성 제어장치 같은 아주아주 기본적인 것들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관제실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허어.
"하이네센.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 가보세요."
그 썰렁하기 짝이 없는 관제실에서 한 여자가 말했다. 적갈색의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에 매우 차가운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전혀 의외의 손님인 나는 관심도 없다는 듯 용건만 말하고 메인 컴 앞에서 뭔가를 계속했다.
순간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신은 내가 공화주의의 산 역사를 견학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다.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뒤로 끌려갔다. 굳게 닫히는 문 너머로 구엔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야야, 뭐하는 거야. 좋게 말로 끌고가면 안 돼?"
"말로 하란 소리인가? 글쎄, 말로 해서 가능했다면야 그랬겠지."
언제 들어도 매몰찬 민츠의 말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녀석이 주먹을 휘둘러 돌려세운게 아니라는 건 감사해야 할 듯한 분위기였다. 배우들이 짜증나는 성격인데 글이 짜증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시끄럿!)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끌리듯 걷다가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민츠는 그때서야 손을 놓고 거의 구보에 가까운 속력으로 걸었다. 그의 뒤를 하이네센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웬지 따돌림 당하는 기분인데, 이건 괜한 생각이지?
"어이. 어디 가는거지?"
"회의실."
허어.
그러니까, 시설은 이따위여도 하나 쓸데없어 보이는 회의실은 구비되있다. 이거냐?
"회의실도 있어요?"
"공화주의는 회의를 바탕으로! 라는 모토를 누가 세워놓는 바람에 말입니다. 물론 다수의 의견을 존중해야니 당연히 해야는 것이기도 하지만."
등을 돌린 자세로 하이네센이 말했다. 나는 약간 당혹감을 느꼈다.
다수의 의견을 존중해? 그런식으로 나가자면 위기때 빨리 대응할 수 없을 텐데. 회의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몽땅 종합하고 정리해서 결론내야니까. 거기다가 한 번 대립의견이 나오면 정말 날새는 줄 모르고 하던데말야.
군시절 회의의 악랄함(?)을 처절하게 경험했던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가 움츠러 드는 것을 느꼈다.
로엔그람 영감님 오기 이전의 사령관은 정말 죽여줬다.
지휘관인 자신이 알아서 다 할 것이지 부하들 의견을 다 들어보겠다며 며칠간을...회의실에서 지새운 일은 장교들 사이에선 블랙 유머로 퍼지기도 했었다.
- 그런 귀찮은 일을 뭣하러...
갑자기 하이네센이 멈추는 바람에 나는 그의 뒤통수와 정면충돌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앞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노려봤다.)
작은 문이 열리자 공화주의자들의 회의실이 나타났다. 탁 트인 공간은 다른 곳과는 달리 비교적 좋았다. 조명도 그렇고 원탁도 비교적 근래의 것이고 컴도 요즘 것 같았다. 왜 '같았다' 라고 했는지는 묻지 말라. 멀리서 세세한 것까지 다 볼 정도로 내 눈은 좋지 않다.
그래, 물건들은 새것 같단 말씀이야. 그런데 왜 이 안에 있는 인간들은 반세기전의 영감들이지? 그것도 7, 80명은 되겠는데.
"좀 늦게 도착했군. 어쨌든 무사히 온 걸 축하하네. 그런데 뒤의 젊은이는..."
"이자크 폰 센코프, 근래 오딘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친구죠. 래클란 씨."
하이네센이 앉은 건너편에서 웬 할아버지가 나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시선 집중! 뭐야뭐야, 당신들 사람 처음 봐? 뭘 그렇게 훑어보셔? 앉을 자리를 못찾는게 그렇게 우스워 보이쇼? 앙?!
"뭐, 어떻습니까? 루돌프가 시대를 역행하며 만든 전제주의라는 감옥을 탈출했으니 환영해야죠. 떨거지 귀족의 지위를 포기해 가며 우리의 고난에 찰 여행에 참여할 결심을 했다니, 정말 용감한 분입니다..
자, 여러분! 박수로 환영해 줍시다."
순간적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앞의 대사는 좋았어. 생각은 안나지만.
그런데 끝에 그건 뭐냐? 떨.거.지. 귀.족?! 나는 생존을 포기하는 선언을 한 작자를 빗겨 바라보았다. 2, 30대로 보이는 남자다. 녀석은 만면 가득 부드러운 - 정확히는 낯간지러운 - 미소를 띠고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 공허한 울림은 이내 회의실에 가득 찼다.
나는 민츠가 잡아끌어 앉힐때까지 허공을 노려보았다. 이 많은 자들을 일일이 상대할 만큼 한가한 몸이 아니다, 나는. 어쨌든 어떻게 돌아가나 한번 볼까?
먼저 그 래클란이던가 하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발견된 행성은 분명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판명났소. 하지만 난 그 행성을 그냥 지나쳤으면 합니다. 제국과 너무 가깝습니다."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이 발언권을 얻었다.
"하지만 우린 추격을 잘 따돌렸고 지금쯤 그들은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손놓았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우린 평범할 뿐인 40만명의 시민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먼저 이 행성에 일시적으로 정착해서 장거리여행에도 끄덕없도록 완벽하게 준비한 후 다시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제국군부는 당신과 같은 무사안일주의자를 더 원한다. 글쎄, 정말로 모를까?
반박하려는 듯 다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아직은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더 멀리 가야는 겁니다."
"우린 인간이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주역으로 나가는 거요.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할 지 누구도 알 수 없소. 준비가 과해서 실패하는 경우는 없으니 잠시 멈춥시다."
의장인 듯 손을 깍지끼고 앉아있던 하이네센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다른 의견 있으신 분?"
없었다. 난 웬지 싱거운 걸 느꼈다. 그런 거라면 지도자 = 하이네센이 알아서 결정해도 상관없지 않나? 당신들은 목숨이 초단위로 왔다갔가 하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의 법칙을 따라 회의하고 앉아있을 건가?
나라면 확실한 지도자 하나가 알아서 하게 하겠어. 그 편이 위기 때 대응이 빠르니까.
좌중은 조용했다. 다들 두 의견 중 하나였나 보다.
"그럼 표결에 들어갑니다. 정착하고자 하는 분은 O, 지나치자는 분은 X를 적어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또 뭐야? 적어내라고? 어, 어허허.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을 좋아하는 뮤젤같은 작자들이 쫓아올 수 있는데 종이나 세고 있겠다는 거야?
나는 민주주의는 골치아프고 비현실적이라고 머리에 새겼다. 내 앞에도 어김없이 종잇장은 놓였고, 난 안보이게 인상을 찌푸리며 X를 쳤다.
"투표라는 거다. 원래대로면 전 시민들이 직접 해야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간접투표를 하는거지..난 마음에 안들어."
뭐가 마음에 안드는 건가, 민츠? 그는 내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종이를 두 번 접었다. 이름따윈 안 쓴 것 같군. 무기명이란 건가? 그럼 의사표현에서 비밀은 보장된다는 뜻이니 결정은 간섭없이 내 맘대로..인가?
..이건 괜찮군. 하지만 어느 세월에 세고 앉아있을래? 비효율적이야!
여드름이 가득한 18, 9쯤 되보이는 꼬마가 모자를 돌렸다. 다들 거기에 종이를 넣었다. 나도 눈치보며 익숙한 척 따라했다. 내가 민주주의 초짜라는 건 아직까진 민츠만이 눈치챈 비밀이니라. 우하하.
일 끝났나 싶어 일어설까 했지만 주변 인간들이 석고상마냥 꼼짝도 않길래 나도 얌전히 앉아있어야 했다. 심심해진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어 인생 따위 꿈도 희망도 없고 그런 지금의 YORE LIFE에 만족하는가..? 앗..이 노래가 왜 나오는거야.;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소리가 나온 건 중간중간 갑자기 노래부르는 걸 잊어먹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부르기를 세 번쯤 했을 때였다. 나는 자세를 고쳐잡으며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나 구경했다. 하이네센은 일어서서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저 뒤까지도 충분히 들릴 만큼 울렸다)
"O 19표, X 67표, 기권 2표로 총합 88표, 과반수가 넘었으므로 지나치자는 의견을 택하겠습니다. 해산합니다."
후아-.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닌 일 가지고 엄청난 쇼를 벌인 민주주의의 중역들은 각자가 탄 배로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민츠 뒤를 따라갔다.
좁은 복도에선 발 울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홍차색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한동안 거주할 데를 둘러보라는 하이네센의 말에 관제실에 있던 아가씨가 내 안내를 맡게 되었다. 아아 황홀해. 음. 설마 오딘에서 날리던 내 가 여기 와서까지 그렇게 되는 건..헉, 내가 무슨 생각을.
아무튼 나는 그녀의 등으로 시선을 옮겨 걸었다.
이상하군. 저 홍차색 머리는 좀 낯이 익은데...왜 떠오르지 않는 거지?
..착각일거다. 홍차색 머리는 길거리를 지나면서 세보면 몇 번 마주칠
수 있다. 그냥 괜한 생각일거다.
하지만 분위기는...뭐야. 만난지 한 시간도 안된 사람보고 이런 감상갖는 건.
"..센코프 씨. 뭘 생각하시는지?"
응? 방 앞이네? 그녀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흠.
"아아, 잠시 옛추억에..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자넷 카젤느. 앞으로는 편한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눈빛이 그렇게 차디차면 말걸려던 남자들 다 주눅들어 버려요. 응? 잠깐. 처음 만났는데 기혼인지 아닌지 어떻게 단정지어? 뭐 내 여자보는 눈은 정확하니까. 아가씨 맞아. 분위기가 그렇잖아.
난 머릿속이 복잡해지려 하자 지체없이 들어갔다. 카젤느는 그걸 확인하자 돌아서서 복도 저편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콘솔로 가서 냉수 한 잔 들이키..려니 물이 없군. 이 배가 난민 수용소나 진배없다는 걸 또 깜빡했다. 젠장.
지금 당장 할 일은 없다. 무료함이란 사람을 정신이상자로 만들어버린다. 난 뭘 할까 생각하기 위해 구석에 침대 대용으로 놓인 해먹에 누웠다..뭘 더 바라리. 이 배는 초호화 여객선이 아니잖아. 하지만 폐기 직전의 군함보다도 못한 시설...그만!
그나저나.
"편한 여행 되길 바란다라..."
아주 어려서부터 별의별 험한 일에 휩쓸려 떠돌다가 겨우 정착한 곳이 군대. 하지만 또 시류에 떠밀려 이름은 커녕 인간의 발길조차 닿은 적 없는 우주를 헤매는 현재. 인생을 여행에 비교한다면 난 그리 순탄하게 보내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앞으로는' 편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