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니 한숨만 나오네요.;
9.
유비가 오고 있다는 소식이 도착한 순간 한수의 나루터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배와 그물을 수선하고 짐을 부리고 흥정을 하느라 바쁘던 사람들이 소식을 들은 차례대로 일감마저 내버려둔 채 몰려나갔다. 곧 북쪽에서 열댓 명 가량의 기병이 가벼운 속도로 달려왔다. 기병들은 유(劉)자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었다. 예주목이 탄 마차를 기다리며 목을 빼고 기병들의 뒤편을 살펴본 행인들은 나루터의 붙박이장사치들이 엉큼하게 웃으며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주목은 업무 차 급히 말을 타고 여행길에 오른 지방관처럼 꾀죄죄한 차림으로 기병의 선두에 있었다. 유비를 따르는 기병들도 차림이 썩 좋진 않았다. 무구는 형주병들처럼 번쩍거리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숫자가 너무 적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유비가 정말 빈곤한가 보다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저 무리는 가짜고 진짜 예주목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다 듣고 있으면서도 유비는 자신의 군영을 돌아보는 것처럼 태연하고 당당했다. 코앞에서 유비를 본 사람들은 그래서 유비인가 보다고 묘하게도 수긍했다.
나루터에 들어선 유비는 구경꾼들이 달라붙는 틈바구니를 지나 준비된 배가 매인 곳으로 곧장 향했다. 잔교에 이르렀을 때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빠져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유비보다 앞서 주위를 경계하며 나아가던 조운은 그 사람을 알아보고 칼자루에 올리던 손을 멈췄다.
이적은 크게 허리를 굽혀 읍했다. 갖춰 입고 나온 예복이 나루터의 질흙에 더럽혀지는 걸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유비는 본래 이적을 만나기로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웃으며 마주 예를 갖췄다.
“기백 선생. 미리 나와 주셨구려. 유형주로부터 전언이라도 있는 것이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가 유예주를 양양까지 모시고 싶었습니다.”
이적은 눈이 퀭했고 신야를 방문한 때보다 마른 것 같았다. 유비는 말없이 같이 가자는 손짓을 했다. 이적은 유비 일행과 함께 배에 올랐다. 사람에 군마까지 모두 실리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적은 속이 타는 낯으로 단출하기 짝이 없는 유비 일행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배가 출발했다. 잔교 끝까지 따라온 구경꾼들로부터 적당히 멀어졌을 때 이적이 입을 열었다.
“양양에서는 최소한 사흘은 유예주를 대접하겠다며 넉넉하게 준비 중입니다. 갈아입을 옷이라든가, 예물이라든가, 유예주께서 준비할 물품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무례를 범하려는 것은 아닌데 저어, 유예주께서는 설마 지금 이대로.”
“나에게 무슨 여유가 있겠소. 그 정도는 유형주께서 다 마련해주실 거요.”
“그럼 사람이라도 더 데려오셔야 하지 않았습니까? 장군들이라든가, 자중 선생이라도요! 양양의 유지들은 서주의 명사인 자중 선생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언제 성이 위태로워질지 모르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며칠이고 자리를 비울 순 없소. 형주의 귀인들도 잘 아실 것이오. 조공은 이 유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직접 군사를 끌고 온다고.”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가벼운 풍랑이 일면서 배가 흔들리는데도 유비의 태도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렇지만 뱃전에 선 조운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입을 꾹 다문 채 유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적은 조운을 잘 몰랐지만 조운이 지금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신야에 남은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야에서 양양을 경계하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적은 혹시 유비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졌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기가 이적을 부른 것은 겨우 이틀 전 저녁의 일이었다. 이적이 집에 틀어박힌 어제 하루 동안 유기가 다른 사람을 신야로 보냈을 가능성은 낮았다. 이적이 아는 유기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역시 이 자리에서 말해야 한다.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말해야 하지만,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적은 위험하다는 것만 알 뿐 정확히 어떤 음모가 준비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양양은 배 위에서도 성벽이 보일 만큼 가까웠다. 잘못 말을 전하면 유비는 여기서라도 발을 돌릴지도 모른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돌아가 버리면 유비는 무례한 사람으로 찍힐뿐더러 유표의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겨우 열댓 명에 불과한 수행원으로 양양에 가는 것은 호랑이굴에 뛰어드는 짓이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던 이적은 말이 우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배 뒤편에 실린 군마들은 익숙하지 않은 배 위에서 풍랑에 흔들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이적은 멍하니 말을 쳐다보다 말고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제가 최근 상마에 관한 책을 구했습니다. 저 말을 보니 어쩐지 거기서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이 떠오릅니다.”
유비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적을 따라 일어섰다. 이적이 가리킨 것은 유비가 나루터까지 타고 온 말이었다.
“상마라. 이 말은 여남에서 적으로부터 빼앗은 거요. 뭔가 특이한 상이라도 보이시오?”
뱃전에 있던 조운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보더니 이편으로 건너왔다. 조운은 이적을 완전히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아주 바람직한 태도라 생각하며 이적은 유비의 말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마에서부터 입을 지나 앞니까지 흰 반점이 이어지는군요. 이런 상을 유안(楡雁)이라 합니다. 맙소사, 이 말은 적로입니다.”
“적로?”
“이런 말을 주인의 아랫사람이 타면 객사합니다. 주인이 직접 타면 기시(棄市)에 처해집니다. 유예주,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명공께서 이런 흉마 중의 흉마를 타고 오신 게 대단히 불길합니다.”
유비는 신기한 듯 말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으음, 반점이 그 정도로 긴 것 같진 않은데. 중간에 끊어지는 것 같고.”
“아닙니다! 틀림없습니다. 혹시 먼젓번 주인도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제 주인을 죽일 말을 타고 오시다니 이 땅에서 무슨 변이라도 당하지 않으실까 염려됩니다.”
“설령 변을 당한다 해도 내가 당하는 건데 왜 선생이 사색인지 모르겠소.”
유비의 부드럽게 건네는 말을 듣고서야 이적은 자신이 진땀에 젖은 것을 깨달았다. 무수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고서야 이적은 목소리를 냈다.
“혹여 양양에서 명공께 흉사가 일어나면 누구에게 그 허물이 돌아가겠습니까?”
갑자기 조운이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경계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자신이 전하려는 뜻을 이해했다. 이적은 간절한 눈으로 유비를 쳐다보았다. 유비는 달라진 것이 없는 낯으로 차분히 마주보았다. 이적은 유비의 속을 읽을 수 없었다.
“선생, 고맙소. 그러나 고작 말 한 마리로 좌우될 명이라면 하늘은 아주 오래전에 나를 죽였을 거요.”
이윽고 입을 연 유비는 이적을 향해 가볍게 머리 숙여 읍했다. 자리로 돌아가면서 유비는 마침 다가오던 수행원에게 풍랑으로 도하가 더뎌지니 지루하다며 말을 걸었다. 입술을 깨문 이적에게 조운이 나직이 말했다.
“유예주께서는 저렇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모두 들려주십시오.”
“큰공자의 전언입니다. 연회장에 지나치게 많은 병졸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양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조장군, 부디 장군의 주공을 한시도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조운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운을 돌아본 이적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다. 조운이 두른 분위기는 신야의 관우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짓누르듯이 무거웠다. 천천히, 조운의 입이 열렸다.
“선생은 처음에 공자 유기를 위해 오셨고 다음에는 유형주의 사자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선생을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불현 듯 이상하게 퉁명스럽던 관우의 태도가 떠올랐다. 유표와 유기 사이에 있는 미묘한 태도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 일도 떠올랐다. 처음에는 남의 이목을 조심하며 허름하게 나타났던 이적이 두 번째 방문 때는 화려한 치장을 하고 등장하자 유비의 사람들은 그가 유기에서 유표로 갈아탔다고 해석한 모양이었다. 이적은 이마를 짚으며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그런 건 나중에 따집시다. 장군께서는 유예주를 구할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뭐요?”
“…좋습니다. 누구입니까?”
“아직 일의 전말이 분명치 않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밖에는 큰공자께서도 아시는 게 없습니다. 의심이 가는 것은 모두 의심하셔야 합니다. 일단은 채씨를 주의하십시오. 채군사는 유형주와 유예주 바로 다음에 앉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운이 눈길을 거두자 스멀거리는 한기도 물러났다. 이적은 뱃전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키 큰 무장을 노려보았다.
건너편이 가까워졌다. 채모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직접 나루터에 나와 있었다.
“선생은 우리가 떠나고 나서 내리시오. 자룡이 말을 남겨줄 거요.”
유비는 중얼거리듯 말하고 뱃전으로 건너갔다. 이적은 긴 소매 속에 숨긴 손수건으로 젖은 손바닥을 닦고 재빨리 유비를 뒤따랐다. 유비의 바로 뒤에 선 이적은 마치 유표의 명령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미소까지 띠고 턱을 쳐들었다. 이적의 볼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본 유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비가 짐은커녕 마차조차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고 채모는 미리 준비한 수레를 불렀다. 여기서부터는 유표가 직접 대접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유비는 웃으며 수레에 올랐다. 조운은 유비의 말고삐를 잡고 이적에게 자신의 말을 내줬다. 이적은 조운의 어깨 너머로 채모를 훔쳐봤다. 말에 오르던 채모가 우연처럼 이쪽을 쳐다보면서 눈이 마주쳤다. 채모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순간만으로는 이적을 본 채모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읽을 수 없었다. 유비 일행과 이적은 채모의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양양으로 향했다.
성문 앞에서는 유기와 유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에서 이적을 발견하고 유기의 눈이 커졌다. 크게 밝아진 낯은 유비의 수행원들을 보더니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유종이 쳐다보자 유기는 서둘러 웃는 낯을 꾸몄다. 수레가 잠시 멈췄다. 간단히 인사를 전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말이 오갔다. 인사말이 끝나고 잠깐 화제가 끊겼을 때 지나가는 것처럼 채모가 말을 흘렸다.
“과연 유예주의 인망은 명불허전입니다. 유형주를 따르던 선비들이 지금은 유예주께 몰린다더군요. 신야에 들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유비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이적이 말 위에서 손을 모으며 나섰다. 채모는 이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유형주를 대신해 나온 제가 유예주께 직접 아뢰고 있는데 감히 끼어드는 자가 있군요. 저야 이런 무례를 참을 수 있지만 여러 귀인들 앞에서는 혹시라도 유예주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채군사야말로 우리 주공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조심하시지요. 선비의 충의를 의심하는 것은 여인의 정절을 의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무례입니다!”
“뭐라?”
비로소 채모는 잔뜩 찌푸린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적은 말이 얌전히 있어주길 바라며 허벅지로 말 옆구리를 꽉 죄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저는 주공의 명으로 유예주를 찾아뵌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연회를 위해서였지요. 제가 사자로 다녀온 분이 오시기에 인사를 드리러 조금 일찍 나갔기로서니 제 마음을 의심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제가 유경승께 의탁해 전란을 피하는 은혜를 입은 것은 양양의 모든 선비들이 압니다. 만에 하나 제가 두 마음을 품었더라면 부끄러워서라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있지 이렇듯 양양의 성문 앞까지 따라올 순 없습니다.”
“이런 선비가 따르는 분이라니 유형주께서 덕망이 높음을 새삼 알게 되는군!”
잠자코 듣던 유비가 짐짓 크게 외쳤다. 이적은 속으로 유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채모는 못마땅해 하며 이적을 노려보다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에도 통행이 빈번한 성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유비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내가 언제 그대의 충의를 의심했다는 건가? 아무튼 그대는 내가 모셔야 할 분의 일행은 아니라는 것이군. 그대가 초청된 곳은 연회장이지 빈객께서 머무실 처소가 아니다. 주공의 귀빈을 공경하는 태도는 가상하나 지금은 물러가라.”
채모는 기세에서 밀린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내뱉고 눈짓했다. 채모의 수행원은 이적이 탄 말을 행렬 바깥으로 정중하게 유도했다. 구경꾼들 앞까지 밀려난 이적은 수행원의 머리 너머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행렬을 바라보았다. 유기는 엷은 두려움이 밴 눈으로 채모를 노려보았다. 유종은 웃고 있었는데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 농담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수레가 성문을 통과하기 직전 유비는 이적을 쳐다보았다. 이적은 말 위에서 읍했다.
행렬을 전송한 후 이적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성문 앞의 떠들썩한 소리가 멀어졌다. 오한 같은 식은땀 때문에 등이 더웠다. 채모 앞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기 위해 내세운 말발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법이었다 싶어 자꾸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적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서쪽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방금 전의 일로 확신했다. 채모는 이적을 그다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예의주시하는 상대라면 방금처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별 것 아닌 꼬투리를 잡다가 쉽게 물러날 리 없는 것이다. 채모가 정말로 기선을 제압하고 싶었던 상대는 역시 유비. 어쩌면 내내 하얗게 질려있던 유기 또한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날 이적을 협박한 자들은 누구인가. 왜 하필 유표와 태수들이 보는 앞에서 유비를 해치려 한단 말인가. 그렇게 위험한 일을 준비하는 자들이 왜 쉽게 정보가 새나갈 만큼 치밀하지 못한 것인가. 갖가지 의문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적은 땅바닥을 살폈다. 그림자를 보니 연회가 시작되려면 약간 시간이 있었다. 이적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말의 옆구리를 조심스레 박찼다. 말은 어리둥절해했지만 곧 순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한가한 긴 언덕길을 따라 번쩍거리는 갑주를 입은 병졸들이 劉의 깃발을 받들고 도열했다. 언덕을 올라간 이적은 누대 앞에서 가로막혔다. 누대의 주위에도 무장한 병졸들이 빽빽하게 둘러서있었다. 병졸들은 유표가 써 보낸 초청장을 확인하고서야 이적을 통과시켰다. 대기하던 시종이 말고삐를 넘겨받으면서 감탄했다. 이적이 타고 온 말은 형주에서 흔히 보는 짐말보다 월등하게 골격이 튼튼한 하북의 군마였다. 자신의 말이 아니라는 게 신경 쓰인 이적은 시종을 따라 말을 두는 곳으로 가려 했다. 초청장을 확인한 병졸이 막아섰다.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귀빈들께서 흩어지시면 저희가 경계하기 어렵습니다.”
주목과 태수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모이는 자리라지만 누대에 부속된 건물로 건너가는 것도 통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적은 항의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을 데려가는 방향만 확인했다.
한수에서는 거침없이 불어 닥치던 바람이 신기하게도 언덕 위에서는 잠잠했다. 한낮의 양양은 바람만 불지 않으면 그럭저럭 가을 같은 날씨였다. 누대를 둘러쳤던 칸막이는 대부분 시선이 닿지 않는 천장으로 묶여 올려 졌고 대신 휘장이 늘어뜨려졌다. 휘장에 스며든 볕이 연회장 안으로 어스름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등잔을 모두 켜야 할 정도로 어둡진 않았지만 밀담을 나누거나 남의 눈에서 잠시 벗어나 움직이는 데는 충분해 보였다. 상석은 유난히 어두웠다. 유표의 자리가 연회장의 북쪽에 놓인 데다, 연회장을 압도하듯 커다란 병풍이 둘러쳐진 탓이었다. 좌우로 병풍이 끝나는 곳에는 두꺼운 휘장이 드리워있어 그 뒤편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기백, 이쪽이오!”
이적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아는 선비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한산한 연회장 한구석에는 일찍 도착해 술을 마시는 선비들이 모여 있었다. 면면을 둘러본 이적은 모두 자신처럼 바깥에서 들어와 유표에게 의탁한 이들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 정도의 연줄은 있지만 유명한 친족이 있거나, 부유하거나, 학문적인 성취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비교적 명성이 낮은 이들이었다. 아마도 참석자들에게 유표가 선비들 사이에서 떨치는 명망을 보여주려고 머릿수를 채우는 의미에서 초대되었을 것이다. 이적은 자신도 이쪽으로 분류될 거라 생각했다.
“먼저 오셨군요. 오랜만에 뵙는 분도 있고. 잘 지내셨습니까?”
“그러는 기백 선생도 일찍 오셨구려. 연회장이 좀 한가하지요?”
“하하, 귀인들이 시간을 너무 잘 지키면 아랫사람이 고달프잖습니까. 그분들은 천천히 오시는 게 덕을 지키는 길이지요.”
“옳소. 덕분에 우리는 상석을 신경 쓰지 않고 맛있는 술을 먼저 거덜 낼 수 있는 것이오.”
선비들이 껄껄 웃으며 잔을 권했다. 덩달아 웃으며 잔을 비운 이적은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경비가 제법 삼엄하군요. 과연 유예주가 안심할 만합니다.”
“유예주가? 혹시 선생 또 유예주한테 다녀오셨소?”
“그건 아니고 오기 전에 채군사가 모셔가는 걸 봤소. 수행원이 열댓 명 정도 밖에 없더군요. 관운장이라든가, 미자중 같은 이들도 오지 않은 듯하고.”
선비들은 가벼운 탄식을 뱉었다. 관우나 미축처럼 허도에서도 유명한 이들이 오지 않는다니 아쉬운 것이다. 술이 한 순배 더 돌았다.
“그럼 유예주는 중신을 하나도 데려오지 않은 거요?”
“부곡장 한 사람이 따르긴 하더군요.”
“허, 태수 급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명사 하나 데려오지 않으면 세간에 어찌 보일 줄 알고. 유예주 그 사람, 배짱인지, 객기인지, 그냥 생각이 없는 건지.”
“기백 선생, 듣자하니 유현덕이 신야에 들면서 몇 가지 요구한 게 있는데 유경승은 대답을 다 보류했다던데요. 혹시 그거랑 관련 있는 건 아니오? 이를테면 일부러 지나치게 소탈한 태도를 가장해 오기를 부린다던가.”
“난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유경승이 제꺽 들어주지 않는 건 이 동네 유지들이 양보하질 않아서요. 그 두 유씨가 실은 서먹한 거 아니냐는 말도 슬금슬금 돌고 있지 않소. 그래서는 품에 뛰어든 객이든 받아준 주인이든 입장 난처하지. 두 유씨는 정말로 화목한 사이라서 약자인 유현덕이 아무 준비 없이 나타나도 괜찮다, 이렇게 보여주려는 걸지도 모르지요.”
“그래봐야 다 추측질 아니오? 본인들을 직접 만난 이기백한테 들어봅시다.”
선비들이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리고 일제히 이적을 돌아본 순간 입구에서 우르르 발소리가 몰려왔다. 형주에서 명성을 떨치는 나이든 선비들이 도착했다. 선비들은 잡담을 멈추고 입구로 몰려갔다. 존경받는 어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줘 출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인평을 들으려는 것이다. 이적은 선비들 사이에 묻혀 인사만 드리고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시종이 이적에게 안내한 자리는 입구 앞의 말석이었다. 자리에 앉은 이적은 상석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상석은 아득히 멀어 거기 앉을 이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듯했다. 상석의 뒤편에 둘러쳐진 병풍으로 다시 눈길이 갔다. 시종이 간단한 안주와 술을 가져왔다. 이적은 술을 한 잔 따라들고 연회장을 둘러보는 척 어슬렁거리며 상석으로 걸어갔다. 상석 앞에 선 이적은 잠시 등 뒤를 살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명사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말을 걸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다.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후 이적은 병풍으로 다가갔다.
병풍에는 가슴께에 격자 문양으로 문살이 들어가 있었다. 격자 사이에는 장식 삼아 구멍을 뚫은 부분도 있었다. 이적은 슬그머니 구멍 안을 훔쳐보았다.
병풍 저편은 대낮인데도 캄캄했다. 연석과 달리 칸막이를 치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몇 번인가 눈을 깜빡거린 이적은 갑자기 눈앞을 휙 지나가는 기척에 놀라 소리를 낼 뻔했다.
“뭘 그리 열심히 들여다보는가? 안에 서시라도 있나?”
고개를 휙 돌리니 잘 아는 지인이 이적의 어깨 너머로 병풍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돌아선 이적은 머쓱하게 웃었다.
“글쎄, 잘 모르겠군.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데.”
“이 사람, 선생 한 분이 또 오셨네. 이런 데서 한눈팔 때가 아니야.”
지인은 선심 쓰듯 같이 가자는 손짓을 했다. 이적은 허허 웃으며 지인을 따라 연석으로 돌아갔다. 긴 소매 밑에 넣은 손은 벌써 습기가 밴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속속 도착하는 명사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느라 자리에 앉을 틈이 없었다. 이적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히 어울리는 척하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빛 한 톨 없는 어둠 속에서 움직인 것은 몸에 갑주와 비슷한 윤곽을 두르고 있었다. 유기는 채모가 그곳에 필요 이상의 병졸들을 둘 거라고 말을 흘렸다.
자신이 자객이라면 유표의 빈객으로 가장하고 술을 권하는 척 혼자서 접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곳곳에 장애물이 있고 사람도 많은 실내에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병기를 휘두르면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될 것이다. 양양 안팎의 명사들이 보는 앞에서 유표가 일단의 병졸들을 지휘해 요란하게 유비를 처치하고 조조에게 귀의할 뜻을 밝히는 장면을 상상해본 이적은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관도의 싸움이 있기 전부터 조조에게 귀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어떤 고관은 유표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 젊은 날 당고의 금에 휩쓸려 화를 당할 뻔했던 유표가 환관의 호적에 든 조조에게 자진해서 머리를 숙일 리는 없었다. 형주 굴지의 대호족들이 아무리 조조에 대해 호의적이라 해도 유표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에는 유비를 쫓아낼 수 없다. 조조를 제외한다면 형주에서 유비를 죽여야 할 동기를 떠올릴 수 없었다. 동기를 모르니 진짜 주모자가 누구인지,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도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유기가 귀띔한 터무니없는 음모를 통찰하기에는 가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아. 온다, 온다.”
밖에 나간 선비가 종종걸음 쳐 들어오면서 뱉은 말에 공기가 급변했다. 뒤따라 들어온 시종이 입구에 서서 귀인들의 입장을 소리쳐 알렸다. 시종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선 선비들 사이로 형주의 태수들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입장했다. 인재를 천거할 권한이 있거나 거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눈앞을 지나가자 젊은 선비들은 조바심을 숨기지 못했다. 고관들이 앞쪽으로 안내되어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진남장군 성무후 형주목과 좌장군 의성정후 예주목께서 드십니다!”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눈앞으로 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기척은 느낄 수 있었다. 슬슬 허리와 고개가 뻐근해진다 싶을 무렵에야 유표가 상석에 이른 것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들면서 이적은 재빨리 상석을 훑어보았다. 잠시 눈을 의심했다. 유비는 몇 번 본 허름한 차림을 벗고 일개 주의 주목에 어울리는 훌륭한 의상을 갖추고 있었다. 본래 그런 차림이었던 것처럼 태도가 자연스러워 이 자리에서 처음 유비를 보는 태수들이 스스로 유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유비의 옆, 단 아래에 칼을 차고 시립한 조운도 마찬가지였다. 아랫사람이라는 걸 의식하듯 화려함을 억누른 차림이었지만 풍채 자체가 근사해 은근한 멋이 있었다. 그런 남자가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비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그 유비인가, 유비를 따라온 자는 누구인가 감탄하고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이적은 예복을 준비한 이들이 유비와 조운을 꾸며주면서 보람을 느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유표였다. 올해에 예순이 된 노인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키가 8척이나 되는 당당한 풍채만이 아니었다. 유표에게는 난세 중에도 10년 가까이 형주를 지켜내고 번성케 한 주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위엄이 걸음을 옮기는 작은 움직임에까지 배어있었다.
유표의 축사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태수들이 유표의 주도로 유비와 인사를 나눴다. 인사가 끝나자 무희들이 나와 연석 사이의 공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누군가는 즐거워하며 음악에 박자를 맞췄고 누군가는 상석을 흘끔거리며 가까이 앉은 이들끼리 소곤거렸다. 상석에 접근할 기회를 기다리며 정보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적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간혹 누군가가 말을 걸면 건성으로 대꾸하고 잔에 입을 대는 시늉을 했다. 머릿속이 자꾸 멍해졌다. 주위의 부산한 흥겨움이 먹먹하게 되울리며 귓바퀴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양양의 호족들, 어쩌면 유형주한테까지 미움을 살 걸 무릅쓰고 큰공자의 경고를 전해주지 않았는가.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나와 관계없다. 하늘이 행하는 것이다.
유종은 유기에게, 유기는 이적에게 일을 떠넘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적에게 양양에서의 평온한 삶을 포기해가며 유비를 도와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무희들이 하늘거리는 무대를 핏발 선 눈으로 응시하는 이적에게 누군가가 다시 말을 걸었다.
“기백, 우리도 가세.”
고개를 드니 친한 선비 몇이 잔을 들고 엉거주춤 서있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이동했다. 명사들은 상석으로 다가가 인사했고 선비들은 명사들의 자리를 기웃거렸다. 상석에서 돌아온 명사들이 저쪽에서 나눈 이야기를 풀어놓고 거기에 선비들이 맞장구치는 소리가 말석까지 건너왔다. 이적은 일어섰다.
명성이 높을수록 상석에 가까운 자리를 받는다. 다른 선비들과 함께 잔을 권하며 자리를 돌다 보니 이적은 점차 상석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상석에서 오가는 말소리가 음악과 잡담 사이에 뜨문뜨문 섞이기 시작했다.
“유비는 어리석어서 중대사를 앞둘 때면 언제나 주위 사람들과 같이 의논한 후에야 결정합니다. 그 사람들을 모두 신야에 두고 온지라 지금 바로 대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적은 상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유표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유기가 유비를 쳐다보았다. 곧 유표를 향해 돌린 눈은 조심스러운 기대를 내비쳤다. 신야에서 감히 유비의 결정에 토를 달 자가 있을 리는 없다. 이적에게는 유비의 말이 이 자리가 아니라 신야에서 이야기하자는 것처럼 들렸다. 양양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유기가 가게 될 것이다. 유비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불러 신야에서 이야기하면 유표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걸 위해 일부러 관우와 미축을 두고 온 것인가 추측하자마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적은 그 전에 유표와 유비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도 알지 못했다.
“선생, 뭐하는 거요? 선생 차례요.”
소곤거리는 말에 깜빡 정신이 돌아온 이적은 얼른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었다. 눈앞에 앉은 명사가 이야기를 들으러 온 선비들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묵직해진 잔을 내려다보면서도 귀는 허둥지둥 상석을 향했다.
“이 사람은 호위무사 같은 게 아니라 내 휘하에서 기병을 지휘하는 장수라오.”
“그렇습니까. 오, 문장군, 적당한 때에 와줬네. 이쪽으로.”
이적은 가득 찬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긴 소맷자락 너머로 상석을 곁눈질했다. 괴월의 부름을 받아 상석으로 향하는 남자를 가리키며 누군가가 문빙이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유표의 신임을 얻어 근래에 한수를 지키는 군영으로 영전되었다는 장수인 듯했다. 내키지 않는 낯으로 잔을 바라보는 조운에게 유비가 받아들이라 권했다. 조운은 유표가 최초에 축배를 들 때부터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잔을 나누자 괴월은 흡족해했다.
“양가가 이렇듯 친분을 나누니 보기 좋습니다. 장소가 좁은지라 무인들은-”
바로 옆에서 큰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황급히 잔을 기울인 이적은 얼결에 술을 모두 비워버렸다. 그 태도가 호기로워 보였는지 사방에서 손뼉을 치며 재차 잔을 권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이적은 다시 한 번 잔을 말끔히 비웠다. 이적과 이적의 가족들은 양양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유표의 진의는 둘째치더라도 양양의 유지들의 뜻을 거슬러가며 유비를 보호해봤자 득이 될 것은 없다. 게다가 유비는 위험하다. 조조가 건재하고 유비의 목숨이 남아있는 한 중원에서는 계속 전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서 유비가 사라지는 것이 천하를 위해서는 더 이로울지도 모른다. 설령 유비가 살아있는 쪽이 천하에 더 도움이 된다 해도, 이적이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둘러선 선비들이 한 방향을 따라 눈길을 움직였다. 뒤늦게 선비들의 시선을 쫓아간 이적은 조운이 바로 등 뒤를 지나는 것을 깨달았다. 조운은 굳은 낯으로 문빙을 따라 연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적은 당황했다. 상석의 유비는 이제 정말로 혼자인데도 상황을 모르는 것처럼 태평하게 담소하고 있었다.
“신야의 그 조그만 나루에서 어찌 수군을 키우겠소? 우리는 그저-”
”그러니까 위에서 적이 물을 타고 내려올 경우에 신야에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걸 유예주께서도 인정하시는 거지요. 어차피 신야로 흐르는 하천은 모두 한수로 접어들고 한수는 장강으로 가니 장강과 한수를 통할하는 유형주께서 그 지류도 같이 돌보시는 것이 합당하다 여겨집니다. 양양에도 투함 정도는 있고, 여차하면 강하에서 지원이 올 수 있지요.”
"허, 강하요. 물론 만에 하나 적이 물길을 탄다면 그때는 유형주께 의지해야겠지요. 우리는 수군이 아니라 나루터를 오가는 백성들을 위해 요구하는 것이오. 신야의 나루터니 신야에서 관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이적은 유비가 잘도 웃음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강하에서 양양까지의 뱃길도 하루 만에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괴월의 말은 조조가 내려올 경우 형주병은 신야가 아니라 양양을 중심으로 방어한다는 걸 당연한 전제로 하는 소리였다. 아니, 본래 그걸 위해서 신야를 내준 것이긴 했다. 유비가 독자적으로 신야에서 방어하고, 부족하면 양양의 유표가 지원한다. 전방의 객장이 전장을 담당하고 형주의 전력은 가능한 한 보존하는 방략은 수 년 전 보다 북쪽의 완에 장수가 객장으로 머물던 때에도 쓰였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비는 수군을 부릴 수도 없는 나루터를 왜 원하는 것인가? 이적은 유표와 채모를 눈여겨보았다. 유표는 몸을 돌린 채 태수들과 대화중이었고 채모는 흥미롭다는 듯 유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괴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근방을 관할하는 것은 저, 괴월입니다. 제가 잘 다스리면 자연히 신야도 안정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유예주께서는 제가 미덥지 못하신 게 아닌지요.”
“그럴 리가 있소? 괴이도의 명성은 허도에도 알려져 있소. 다만 손톱 다듬는 칼로 할 수 있는 일에 삼 척이 넘는 큰 칼을 대는 것 아닌가 싶소. 신야의 나루터에 일이 생겼을 때는 남양보다는 신야에서 움직이는 편이 빠르지요.”
“작은 웅덩이에서 고기를 잡을 때는 통발로 충분하지만 바다에서는 배보다도 큰 그물을 치는 법입니다. 신야의 일은 형주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기에 넘치는 듯해도 온 힘을 기울여 돌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괴월은 유형주의 신하로서 주공의 빈객인 유예주께 온 힘을 다해 협력할 것입니다. 나루터에 있는 제 수하들에게도 이미 최대한 공조하라 엄명을 내려뒀습니다. 유형주를 신뢰하신다면 저, 괴월도 신뢰해주시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소? 헌데, 우리도 이제 갓 신야에 든 처지라 아직은 주변 상황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중이란 말이오. 이 일은 내 사람들의 말도 들어보고 나서 논의할 생각이오.”
유비는 빙그레 웃으며 괴월에게 잔을 권했다. 이적은 비로소 이해했다. 양양과 신야는 나루터를 두고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맨손으로 보호를 청하러 온 사람이 기 싸움이라니 제법 뻔뻔하지 않은가.”
같이 상석의 대화를 훔쳐듣던 선비가 소리죽여 낄낄 웃었다. 이적은 뒤늦게 입매만으로 웃는 시늉을 했다. 바라는 것이 기 싸움에서 이기는 것뿐이라면 유비는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이적은 유비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미축은 유표를 거치지 않고 나루터를 드나드는 백성들로부터 직접 정보를 얻고자 한다고 말했다. 무언가, 희미하게나마 실마리가 보인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채모가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커험, 험. 나루터에는 북쪽의 백성들도 드나듭니다. 백성들로부터 적의 동향 같은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겠지요. 헌데 백성들이란 무지해서 겉으로 드러난 것밖에 보지 못합니다. 완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다는 식으로 백성들이 말을 흘렸다 칩시다. 유예주께서는 확인도 없이 그 말만 믿고 행동할 요량이십니까? 그게 첩자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허도에 사절도 보내는 우리 쪽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취하고 있다 생각됩니다만. 제 단견으로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시기보다는 우선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낼 만큼의 힘부터 키우셔야 할 듯싶습니다. 유예주께는 군사가 1천 밖에 없지 않습니까. 조공이 지금이라도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기라도 하면.”
채모는 가까운 곳에 놓인 등잔을 가리켰다. 조그만 불빛은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흩날려 가물거리고 있었다.
“유예주께서 진실로 명(命)을 보존하시려면 당신의 실지가 사실 저 등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인지도 모르게 연회장의 바깥을 가리는 칸막이가 모두 내려져있었다. 모든 등잔에 불이 오르고 화로마다 빨갛게 불길이 솟았다. 창문도 없는 실내에 명암이 뚜렷해지면서 구석마다 도사린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히죽 웃는 채모의 낯은 일렁이는 음영이 드리워지면서 기괴하게 보였다. 이적은 아찔해졌다.
-젠장.
갑자기 이적이 벌떡 일어서자 주위의 선비들이 깜짝 놀랐다. 이적은 두 손으로 아랫배를 부여잡고 우물거렸다. 선비들은 점잖게 모른 척 해줬다. 이적은 몸을 움츠리고 연석 뒤를 지나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낮 동안에는 잠잠하던 바람이 이제 다가오는 밤의 냉기를 머금고 슬금슬금 들이치기 시작했다. 난간을 붙잡고 잠시 호흡을 고른 이적은 그릇을 나르는 시녀를 불러 무인들이 모인 곳을 물었다. 시녀가 가르쳐준 곳은 연회장보다 아래쪽에 있는 조촐한 건물이었다. 이적은 잰걸음으로 누대를 내려왔다. 건물 사이의 공터마다 서성이는 병졸들이 수상쩍어하는 눈으로 이적을 쳐다보았지만 이번에는 막는 자가 없었다.
열린 문으로 뛰어들자마자 째지게 웃어젖히는 소리가 양쪽 귀를 두드려댔다. 무희들이 있어야 할 곳에서 무장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모종의 겨루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악사들은 구석에서 악기를 매만지며 눈치를 살폈다. 무희들은 일찌감치 도망친 모양이었다. 조운은 그 난장판의 한복판에서 거추장스런 예복 겉옷을 벗고 칼까지 치운 간단한 차림으로 서있었다. 포위하듯 에워싼 무인들을 둘러보며 깜빡이는 눈은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손님께서 술을 못한다고 잡아떼는 통에 대신 벌칙을 주는 거요. 남자라면 뭐든 센 걸 보여줘야지!”
대답한 무장은 크게 웃으며 술잔으로 상을 두드렸다. 이적에게는 조운이 취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것이 중요했다.
“조장군. 이보오, 잠시만 지나갑시다. 조장군!”
이적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근육을 드러낸 무장들 틈에서 버둥거리며 난장판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상석에 앉은 늙수그레한 무장이 이적을 쳐다보았다.
“선생은 누구시오?”
“산양의 이적입니다. 조장군, 유예주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가시지요.”
“잠깐. 우리 손님을 그냥 빼앗기라고? 우리 대접은 이제 시작인데?”
누군가가 억울해하며 발을 굴렀다. 둘러선 무장들도 큰소리로 동조했다. 이적은 구석에 널브러진 서너 명의 무장들이 술에 취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할 수 없지요. 유예주께서 부르신다지 않습니까. 보내드립시다. 대신 다음번에는 꼭 우리 쪽에서 제대로 대접해줍시다.”
조운을 에워싼 무장들 사이에서 문빙이 걷어붙인 소매를 주섬주섬 내리며 말했다. 무장들은 불만을 터뜨렸지만 그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채모와 관련된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조운은 손을 모아 예를 표하고 옷과 칼을 챙겨 나왔다. 이적은 조운이 겉옷을 입는 걸 기다려주지 않고 잡아끌었다.
“어서요!”
이적이 초조해하는 것을 본 조운은 뛰다시피 걸음을 서둘렀다.
“무슨 일입니까? 주공께서 저를 부르신다고요?”
“그건 거짓말이고, 제가 뭐라 했습니까? 여기서 유예주가 믿을 사람은 장군뿐이란 말입니다. 빨리 돌아가서 자리를 지키십시오. 어서요.”
조운은 한달음에 계단을 올라갔다. 옷깃을 여미며 연회장을 들여다보는 눈이 서늘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이적은 숨을 헐떡이며 조운의 뒤에 숨어서 연회장을 엿보았다. 유표는 그새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비는 고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여상스레 웃고 있었다. 유기와 유종도 각각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유기는 양양 바깥에서 온 고관들이 인사하러 오자 매우 기뻐하며 주위를 살피지 않을 정도로 대화에 열중했다. 다른 고관들도 조금씩 선비들의 자리로 이동하면서 연회장은 웃고 떠드는 소리로 야단이 났다. 벌써 얼큰해진 취객이 몇 명 보이는 걸 제외하면 위험한 공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조운에게는 여태껏 봐온 이적의 행동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당황하는 이적의 앞에서 조운은 상석에 시선을 둔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은 이 땅에서는 객이시지요. 유예주를 돕는 것이 선생에게는 이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유예주의 안위를 신경 쓰는 것입니까?”
“양양에서 일어난 변고로 유형주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단순한 무부라 그런 설명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라 한 건 선생입니다. 제가 선생을 의심하기 전에 먼저 저를 설득하십시오.”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르려는 소리가 턱까지 울컥 치미는 것을, 마른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그 대신 유기 앞에서 도망친 밤부터 오늘 아침 유비 앞으로 나서는 순간까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왔다. 밥을 먹을 수 없고 잠을 잘 수 없도록 뱃속에서 들끓던 감정들까지 뒤엉키자 목구멍이 터질 것 같았다.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한 끝에 이적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굶주림과 수탈을 참다못해 도적이 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한편에는 똑같이 굶주려도 도적이 되지 않은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도적들이 둘러쓴 누런 두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도적이 기어코 백성의 땅에 쳐들어왔을 때 어느 빼어난 영걸이 놈들을 물리치고 항복까지 받아냈지요. 그런데 도적떼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하긴 했을 겁니다. 100만 명이나 되는 도적떼를 모두 참수하거나 추방할 순 없으니까요. 도적들은 직전까지 살인하고 약탈하고 방화하던 땅에 눌러앉아 그 영웅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도적이 되지 않았던 백성들은 도적에게 땅을 내주고 군량이라며 양식까지 대줘야 했습니다. 그 일을 할 때 영웅은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연한 일이지요. 어느 군주가 백성들에게 물어보고 일을 결정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처음에 조조가 의도한 것은 연주에 쳐들어왔다가 항복한 100만 명의 황건적을 백성으로 되돌려 정착시키는 것이었으리라. 그걸 위한 사업이라면 연주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수긍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황건적을 받아들이자마자 조조가 일으킨 첫 번째 사업은 서주와의 전쟁이었다. 그것도, 대규모의 양민학살이 동반된.
불만이 폭발한 연주 사람들은 마침 여포가 나타나자 그를 받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순욱과 하후돈 같은 이들이 최대한 빠르고 현명하게 대처했지만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확보한 성은 세 개 뿐이었다. 조조는 서주를 치러 데려간 군사들로 연주를 공격해야했다. 그리고, 연주에서 조조와 여포가 가장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운 곳은 산양이었다. 이적은 손바닥으로 메마른 이마를 쓸었다.
“어떤 이들은 유예주가 없어지면 형주가 영원히 평화로워질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동탁 한 사람이 주살되었다 해서 난이 종지되진 않았습니다. 난세가 어찌 한두 사람만의 탓이겠습니까? 조공은 천하의 난을 평정하고자 하는데 유예주가 없다 해서 이곳을 내버려두겠습니까? 게다가 유예주가 없으면 그분만 바라보는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 불쌍한 이들의 말까지 귀를 기울여주는 이는 유예주 밖에 없으니까요.”
남의 땅에서 객이 되어 연명할 수는 있다. 단지, 그것뿐이다.
잃을 것이 많은 이들은 난세의 원인에 대한 관심은 없이 무조건 전란이 빠르게 끝나기만을 바란다. 그렇지만 가진 것이 목숨뿐인 이들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난세가 끝나더라도 이전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전란이 길어지든 짧아지든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삶을 천명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살다 죽지만 어떤 이들은 악을 쓰며 일어선다.
난세에도 살아갈 희망을 바라기에.
솔직해지자면 이적은 유비를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하는 미축이 존경스럽긴 해도 그 사람처럼 행동할 자신은 없었다. 유비의 길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조조조차도 적으로 둘러싸인 중원에서 세력을 키우는 동안에는 사방에서 전란을 일으키고 다녔으며, 지금도 하북에서 전쟁 중이었다. 유비가 뜻을 버리지 않는 한에는 조조가 그렇듯 가는 곳마다 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명분이 무엇이든 전란이 길어지면 사람들의 삶은 총체적으로 피폐해진다.
그렇지만.
“말해두는데 전 유형주를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유예주가 살아있는 편이 어떤 이들에게는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유예주를 구합시다.”
그러니까 어떻게, 라고 대꾸하려는 순간 조운은 이미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뒤를 돌아본 조운은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적은 기둥을 붙잡았다. 수상한 기척을 느낀 곳이 어디인지 말해주지 않았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조운은 연석 뒤편을 통해 움직였다. 불빛이 잘 미치지 않아 어둑한 데다 커다란 화로가 간격을 두고 놓여있어 그 뒤로 다니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조운이 상석에 이를 때까지도 눈치 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유비는 드디어 기회를 잡은 명사들이 앞 다퉈 권하는 잔을 하나하나 응대하느라 바빴다. 자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모는 괴월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천히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은 이야기 도중에 이따금 유비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사람들을 지켜보던 조운이 갑자기 움직였다. 한순간 상석에 모여든 사람들이 엇갈려 움직이고 무희들의 긴 소맷자락이 빠르게 원을 그리며 시야 가득 휘날렸다. 눈을 깜빡였을 때 조운의 모습은 사라져있었다. 이적은 입을 조금 벌린 채 황급히 상석 주변을 훑어보았다. 조운이 어떤 식으로든 병풍 뒤의 공간을 눈치 채고 그쪽으로 건너갔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대기하는 병졸들에 둘러싸여 소리도 내지 못하고 칼에 찔리는 장면이 그려졌다. 이적은 새파래진 낯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거 유예주는 한 분이고 선비들께서는 여러 분인데 그렇게 한꺼번에 잔을 권하면 어떡합니까? 연회는 내일도, 모레도 열립니다. 기회는 많으니 천천히 하십시다. 손님께서 우리 때문에 숨 넘어 가시겠소.”
웃음기마저 띤 굵은 목소리가 흥청거리는 공기를 가로질러 울려 퍼졌다. 채모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유비에게 정신없이 술을 권하던 명사들뿐 아니라 아래쪽에 있던 선비들까지 농담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유비도 가볍게 웃었다. 팔걸이에 기대며 이마를 괴는 움직임은 어딘지 둔하고 피곤해보였다. 채모가 유비에게 다가가면서 건넨 말은 다시 높아진 연석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유비는 손으로 이마를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가 일어서려 하자 채모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축했다. 상석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뒤편으로 돌아갔다. 이런 때에 유기는 자신의 자리로 찾아온 고관들 때문에 조금씩 기웃거리는 선비들을 큰소리로 불러 세우느라 유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적이 턱을 덜덜 떨며 기둥 밖으로 반쯤 몸을 내민 때였다.
유비를 부축해가던 채모가 멈칫 물러섰다. 상석 주변에서 주춤하는 사람들을 비집고 조운이 걸어 나왔다. 연회장 밖으로 내보냈던 조운이 갑자기 등장하자 채모는 놀란 듯했다. 조운은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몇 마디 말이 오가고, 채모가 낯을 찌푸리더니 시종들을 불렀다. 불려온 시종 두 명이 조운을 떠밀었다. 조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운을 밀친 시종들이 튕겨나가자 채모는 황당해하며 언성을 높였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틈에 부축에서 풀려난 유비가 입을 꾹 다문 채 채모를 쳐다보았다. 점차 웅성거리는 소리가 말석으로 번졌다.
“분위기가 왜 이런 건가?”
흠칫 돌아보니 옷을 갈아입은 유표가 서있었다. 이적은 예를 갖출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유표를 올려다보았다. 유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연회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적은 유표를 따라온 시종들에 섞여 상석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거기 모여서 뭣들 하나?”
악사들은 연주를 멈췄고 무희들은 연석 뒤편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연회장이 싸늘할 만큼 조용해졌다. 허둥지둥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사람들 앞으로 채모가 웃으며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주공. 아무 일도-”
“내가 나이 탓에 잘못 보고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자네가 여기서 언성을 높이는 것 같았단 말이지. 설명해보게.”
“허허, 주공께서는 젊은이처럼 정정하십니다. 제가 목소리를 높이긴 했습니다. 헌데 불미스러운 일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는 주공의 덕에 이끌려온 이들이 이렇듯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니, 허허, 가까이 있는 이들끼리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은지라. 별 일은 아니고, 유예주께서 취하셨기에 제가 뒤편으로 모시고 가 잠시 쉬게 해드리려 했습니다.”
유표의 주름진 눈매가 기묘한 표정을 띠고 좁혀졌다. 조운이 나서려는 것을 유비가 눈짓으로 제지했다. 유표의 앞, 연회장 한복판으로 나온 유비는 크게 허리를 굽혀 읍한 후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는 가운데 유비가 입을 열었다.
“유형주. 채군사의 말이 맞습니다.”
“채군사가 자네를 잠깐 쉬게 해주려 한 거란 말이지. 별 일 아니라고. 그런데 자네는 지금 왜 무릎을 꿇은 거지?”
“형주의 보존에 제 목이 필요하다면 이 자리에서 기꺼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채모조차 입을 벌린 채 말문이 막혀있었다. 조운의 손이 칼자루 부근에서 꿈틀거렸다. 조운이 빠르게 훑어보는 시선을 쫓아간 이적은 무장한 위병들이 소리 없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연석 뒤편의 어둠에 묻히듯이 서있는 병졸들은 본래 바깥에 있던 자들인지 병풍 뒤에 숨어있던 자들인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할 자는 없는 것인가?”
유표의 목소리에 노여운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괴월이 채모를 거들려는 듯 한 걸음 나서자 이적은 서둘러 유표와 유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유예주께서 대동한 부곡장이 직전까지 채군사와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정확히 알 듯합니다.”
곳곳에서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적은 주위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유표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운이 유비의 앞으로 나와 부복했다.
“채군사가 유예주를 모시려는 것을 소장이 가로막았습니다. 유예주께서 혼자 뒷방으로 가시는 것은 위험하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무례한 놈! 아까부터 네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아는 것이냐? 뭐가 위험하다는 것이냐? 네놈이 지금 누굴 의심하려고!”
채모가 벌컥 화를 냈다. 조운은 칼을 잡으며 일어섰다. 사람들이 엇 소리를 냄과 동시에 위병들이 발소리를 내며 몰려왔다.
“시급한 일인지라.”
“저놈 잡아!”
돌아선 조운은 당황해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을 뚫고 빠르게 전진했다. 눈 한 번 깜빡한 사이에 상석까지 들이닥친 조운은 칼집 째 빼든 칼을 두 손으로 높이 붙잡아 올렸다. 병풍 한 귀퉁이가 우지끈 박살나면서 잇대어진 폭도 잇달아 쓰러졌다. 공기가 크게 술렁였다. 병풍의 절반이 넘어지면서 등잔 하나 없이 사방이 칸막이로 가로막힌 공간이 드러났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조그만 문으로 무장한 병졸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앞사람 때문에 채 빠져나가지 못한 병졸 몇이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멈추지 못할까!”
유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병풍으로 향했다. 나가지 못한 병졸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공손하게 읍했다. 부서진 병풍 앞에 선 유표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옆에서 순순히 위병들에게 붙잡힌 조운은 칼을 빼앗기고 팔까지 등 뒤로 꺾였다. 위병들이 병졸들을 데려와 유표 앞에 무릎 꿇렸다. 차가운 낯으로 병졸들을 내려다보던 유표가 갑자기 채모를 돌아보았다.
“채모. 이자들은 자네 부하들이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귀인들의 호위를 위해 제 병졸들 중에서 특별히 선발한 자들을 누대에 배치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해란 말입니다, 주공. 유예주와 유예주의 부곡장은 제가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한 모양인데.”
“저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유예주께서 수하를 거느리지 않고 혼자 무장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시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채군사는 제가 유예주를 수행하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이런 답답한 인사를 봤나. 이건 그냥 만일을 위한 위병이라 하지 않았나! 그리고, 이런 연회석에서 귀인들끼리 만나면 으레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기 마련이다. 취하셨다, 사람이 적은 데서 쉬셔야겠다, 그런 말을 내가 왜 했다고 생각하나? 왜 내가 직접 모셨겠느냔 말이다. 촌부 같으니라고.”
채모가 비아냥거렸다. 조운은 채모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다물린 입 안에서 이를 악물었는지 턱이 긴장되어 있었다. 이적은 조운이 입 안에 가둔 말이 무엇인지 알 듯했다. 채모의 목적이 밀담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그렇다 해도 유비 한 사람만을 무장한 병졸들이 가득한 장소에 데려가는 것은 협박과 다르지 않다. 채모는 조운이 동행하려는 걸 거부하기까지 했다.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채모는 자신에게 향할 의혹을 흐리기 위해 조운을 지배층의 규칙도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시도는 제법 성공적이어서 유비 휘하의 이름 없는 부곡장이 성급한 짓을 했다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적의 등 뒤에서도 들렸다. 이적은 착잡한 낯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수군거리는 자들이 대부분 양양의 지배층에 속하진 않는다는 것이 모순적이긴 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던 유기와 눈이 마주쳤다. 유기는 옆 사람과 소곤거리며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유표는 넌더리를 내며 조운을 풀어주라 명했다. 조운은 유비의 곁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유표는 다시 한 번 채모를 쳐다보더니 쯧 혀를 찼다.
“유예주, 이번에는 귀공이 대답해보시게. 형주의 보존에, 뭐? 이 자리에서 누가 자네의 목을 원한다는 것인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어?”
“이 난세에 형주가 10년이나 보존된 것은 형주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유형주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형주의 의론이 사방으로 갈리며 형제끼리도 원수처럼 다투고 있다 합니다. 저, 유비 때문입니다.”
유비는 딱히 유기와 유종을 지칭한 게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이적은 형제의 거동을 훔쳐보고 있었다. 유기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찌푸린 낯을 가로저었고 유종은 싫은 것을 대하는 눈으로 유비를 쳐다보았다. 형제는 아직 사이가 나쁘지 않지만, 앞날은 알 수 없다. 채모를 비롯해 이전부터 유비에 대해 부정적이던 명사들은 억지로 웃고 있었다. 유표는 알겠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서 채군사가 따로 보자는 걸 무슨 위험한 음모라도 숨겨진 것처럼 생각한 것인가? 그렇더라도 비약이 심하구먼. 누가 감히 내 땅에서 내 손님을 해쳐.”
“사람의 앞날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 한 사람의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저로 인해 형주의 백성들이 위태로워진다 생각하면 참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미 유형주께 의탁했으니 제 목숨도 유형주께 맡길까 합니다. 그래서 이렇듯 유형주께 무릎을 꿇습니다. 다만 저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해가 돌아가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이 사람, 취해서 지금 정신이 없구먼. 당장 일어나게!”
유표는 말로 그치지 않고 직접 유비를 붙잡아 일으켰다.
“이 자리에는 형주의 귀인이 모두 모여 있네. 여기에 불이라도 나면 형주는 오늘로써 끝나는 게야. 그러니 평소보다 경계에 신경을 쓴 게지. 안 그런가, 덕규?”
“무, 물론입니다. 주공.”
“형주와 예주는 같은 목적을 위해 하나 되기로 이미 맹약했네. 아직은 서로를 잘 몰라서 사소한 오해가 끼는 일도 있지만 나 유표가 살아있고 현덕이 배반하지 않는 한 형주가 먼저 초지를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야.”
유표의 말 한 마디에 상석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별 것 아닌 오해가 되었다. 채모는 소리 없이 한숨을 뱉었고 조운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유비와 맞잡은 손을 높이 쳐들며 유표는 사람들을 향해 온화하게 웃었다.
“유현덕은 나와 같은 유씨이고 종친이네. 나와 피를 나눈 혈육이고 내 아우 같은 사람이란 말일세. 아우를 해하려는 자는 곧 나를 적대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적은 유비가 지나칠 정도로 대담한 말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연회가 파하고 머리가 식으면 사람들은 채모가 연회장에 수상한 병졸들을 숨겨둔 일을 떠올리며 유비의 발언을 곱씹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형주의 의론을 이끄는 명사들이니 그들의 생각이 형주 전역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유표는 체면 때문에라도 형주 전체를 향해 직접 유비를 보호한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 유표가 오해라고 못을 박은 이상 채모의 진의는 밝혀낼 수 없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유비에게는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수습되었다. 의외로 교활한 사람이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든 이적의 낯에 문득 의아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유표에게 이끌려 상석으로 가는 유비는 결코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자자, 오해라는 게 밝혀졌으니 잘 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연회의 흥이 깨진 것도 사실입니다. 오해를 일으킨 두 분이 시원하게 벌주를 드시면 분위기도 살고, 사소한 오해 또한 술 한 잔과 함께 잊혀지겠지요. 어떻습니까?”
괴월의 제안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동조했다. 유비와 채모 앞으로 잔이 나왔다. 조운이 나섰다.
“소동을 일으킨 건 소장입니다. 사죄하는 뜻에서 유예주의 벌주는 소장이 받겠습니다.”
“장군은 한 잔이 아니라 석 잔이라도 받아야 할 거요. 장군이 부순 병풍은 유형주께서 무척 아끼시는 거란 말요.”
누군가가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술을 권해도 받지 않던 조운이 연거푸 세 잔을 비우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시종들이 부서진 병풍을 치우고 여분의 칸막이와 휘장을 가져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회가 재개되었다. 사람들은 이전처럼 잔을 들고 바쁘게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이적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거는 선비가 없었다. 채모의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이적을 주시하는 눈초리가 따끔했다. 말석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무 자리에나 끼기에는 눈치가 보여 머뭇거리는 이적을 유비에게 호의적인 명사 한 사람이 불렀다. 이제부터 이적은 완전히 친 유비파로 분류될 모양이었다. 채씨의 문객들과 교류하는 일도 한동안은 눈치가 보이겠다는 생각에 쓰게 웃으며 이적은 불러준 명사의 자리로 향했다.
“자네는 내가 감싸주지 않으면 어디 마음대로 산보도 못 가겠구먼. 난 자네가 좋은데 우리 아랫사람들은 생각이 좀 다른가보이.”
명사와 명사의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예를 갖출 때 유표의 목소리가 귀에 잡혔다. 이 자리는 지나치게 상석에 가까웠다. 이적은 떠듬떠듬 감사의 말을 하려 했지만 정신이 흐트러져 제대로 문장을 지을 수가 없었다. 명사는 웃으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잡담하는 시늉조차 접은 채 상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별말씀을. 채군사의 일은 저와 제 아랫사람의 오해가 아닙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난 말일세, 우리가 그때 나눈 맹약을 생각하고 있었다네. 자네 사정이 급해서 세세한 걸 정하진 못했지만 한 가지는 하늘과 땅에 분명히 맹세했더랬지.”
“언젠가는 형주와 예주가 연합해 허도를 치고 함께 천자를 보필하자고 했지요.”
“내가 앞장서고 자네는 나를 따르겠다고도 했네. 그러고 보면 신야는 지금 병력이 겨우 1천에 불과해.”
“그렇습니다.”
“조만간 내 병졸을 약간 보태주지. 그리고 나루터 말인데.”
잔에 입을 대는 시늉을 하면서 이적은 상석을 쳐다보았다. 유표는 유비의 자리로 건너가 같은 상에 앉아 있었다. 표정이 불분명한 미소를 띤 채 유비는 유표가 따라주는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표의 은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우의 부탁이니 들어주고는 싶네만 괴군사나 채군사의 말도 일리가 있어. 형주의 강은 형주에서 관리하는 게 좋겠네. 이 이상 형주 사람들과 자네 사이가 불편해지지 않았으면 해서야. 우리가 받아주지 않으면 갈 데도 없지 않은가.”
유표의 잔이 비었다. 유비는 말없이 유표의 잔을 채웠다. 이적은 나루터를 두고 괴월이 한 말을 어슴푸레하게 떠올렸다. 형주의 목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유표의 말은 어딘가 불편하게 들렸다. 유표는 아직 가득 차있는 유비의 잔을 넌지시 눈짓했다.
“자네는 신야의 힘을 키울 생각만 하면 돼. 때가 되면 내 반드시 자네를 부를 테니까. 그때까지 아우는 그저 나를 믿고 따라주면 되는 거야. 알겠는가?”
유표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유비는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낯으로 눈을 내리깐 채 마주 잔을 들어보였다. 기묘한 불편함이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이적이 만난 유비는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의 말을 저렇듯 순순히 듣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가까이 앉은 선비가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 이적의 손에 잡힌 잔이 한편으로 기울면서 앞섶에 술을 흘리고 있었다. 이적은 갑자기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이었다. 선비가 소매를 잡아당기고서야 술을 흘린 걸 깨달은 이적은 잔을 내려놓고 손수건을 꺼냈다. 젖은 옷을 닦아 내는 손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채모는 유비가 나루터를 원하는 이유에 어느 정도 근접하고 있었다. 유비는 조조의 움직임에 대비하기 위해 나루터를 오가는 백성들로부터 직접 정보를 얻고자 했다. 노리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객으로 전락한 처지인 이상 유비의 행동은 유표에게 매일 수밖에 없다. 유표의 허락이 없으면 유비는 신야 밖으로 군사를 낼 수 없고 허도로 돌격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관도에서 1년이 넘도록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이 조조가 꾸준히 승기를 타고 나아가는 지금에 와서 쉽게 출병을 결정할 리는 없다. 유표가 끝내 허락하지 않으면 유비는 신야에 갇힌 채 천천히 말라갈 것이다.
나루터를 통해 독자적으로 정보를 얻으려 한 것은 유비가 그런 유표에게 완전히 종속되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유표는 부드러운 말 몇 마디로 유비의 자그만 반항을 무시해버렸다. 하긴, 처음부터 유비의 발버둥 따위는 유표의 안중에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유표는 기회가 온 김에 분명히 해둔 것뿐이리라.
주인과 객이라는 것은 그런 관계였다.
연회장은 직전에 깨진 흥을 회복하려는 것처럼 금방 떠들썩해졌다. 경쟁하듯이 악기의 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그릇과 그릇이 부딪치고 곳곳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불콰하게 취한 이들끼리 가벼운 시비가 붙어 주위에서 뜯어말리는 소리도 들렸다. 상석에서만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유표는 방금 시녀가 내온 생선요리에서 뼈를 발라내는 데 열중했고 유비는 취기가 잔뜩 오른 것처럼 눈을 감다시피 내리깐 채 두 손으로 잡은 술잔을 어루만졌다. 긴 대화를 나눈 이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찾아온 것 같은 차분한 침묵이었다. 엿듣던 이들이 머쓱한 시선을 나누고 이적이 젖은 옷을 대충 닦아낸 무렵, 유비가 불쑥 입을 열었다.
“형주는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롭군요. 이곳에 있노라면 어려운 일, 바깥의 근심은 잠시 잊고 싶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밝은 주인을 만난 덕이겠지요.”
“허, 그렇게 치사(致辭)하지 않아도 난 섭섭지 않게 대접해줄 걸세. 형이 아우에게 베푸는 호의 아닌가? 그러니 자네도 사양하지 마시게.”
유표는 젓가락으로 유비의 잔을 가리켰다. 유표가 채워준 잔은 아직까지도 입을 대지 않은 채였다. 이적은 조그맣게 입을 벌린 채 유표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것처럼 유표가 눈을 돌렸다. 웃음을 띠어 가늘게 좁혀진 눈매가 잠시 이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유비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유비가 깨끗이 비운 잔을 뒤집어 보이자 유표는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그 순간 상석 아래에 조용히 서있던 조운이 목울대를 움직이며 눈을 감았다. 이적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든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가득 들어찬 책의 무게에 짓눌려 부서지기 직전인 낡은 책장 아래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유표가 웃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슬금슬금 상석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잔과 술 주전자를 들고 일어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자 유비는 곤란해 하는 웃음을 띠며 일어섰다.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무릎이 꺾였다. 상 위로 쓰러지는 유비를 유표가 붙잡았다. 조운이 급히 상석으로 올라오려 하자 유비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팔걸이를 짚고 다시 일어선 유비는 머리를 홰홰 내젓더니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내려왔다. 유비의 얼굴은 열이 오른 것처럼 붉은 기가 번져있었다.
“즐거운 기분에 이거, 너무 마셨나 봅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사람들이 반쯤은 예의 삼아 지르는 아쉬운 탄식을 들으며 유비는 출입구로 향했다. 조운은 상석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대신 예를 갖춰 보이고 뛰어가 유비를 부축했다. 유비의 퇴장으로 분위기가 다시 깨질 것을 염려했는지 고관들과 명사들 몇이 거의 동시에 잔을 들고 움직였다. 덕담이 오가고 잔을 권하고 시를 읊으며 빙글빙글 웃는 소란 속에서 이적은 슬그머니 일어섰다.
연회장을 나오자 갑자기 쌀쌀한 바람이 덮쳐들었다. 가득 찬 달이 언젠가처럼 머리 위로 창백한 빛을 떨어뜨렸다. 잠시 달을 바라본 이적은 곧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키고 선 위병에게 물어보니 누대의 서편을 가리켰다.
칸막이와 난간 사이의 골마루를 따라 모퉁이를 돈 이적은 순간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칸막이 뒤에 숨어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적은 살그머니 눈만 내밀어 모퉁이 저편을 내다보았다. 아직 달이 서녘으로 넘어오지 않아 저편의 난간은 짙은 그림자에 잠겨있었다. 유비는 난간을 넓게 짚고 상체를 기울인 모습으로 서있었다. 유표가 준 긴 겉옷을 벗어 난간에 걸고 소매는 걷어붙인 차림이었다. 한 걸음 옆에는 조운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이적은 그렇게 많던 위병이 반으로 줄어든 것을 깨달았다. 채모가 숨겨둔 병졸들이 들키면서 먼저 도망친 자들을 쫓아갔을 가능성을 생각해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는 이 이상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누군가가 위병의 일부를 물린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맹덕은 당하는 내가 시원할 정도로 정면에서 나를 박살내버리곤 했지. 유경승은 좀 복잡한 분이군.”
그렇더라도 이 거리에서 들릴 정도로 유비가 소리를 낮추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적은 식은땀을 느끼며 칸막이에 바짝 몸을 붙였다. 칸막이가 가볍게 부르르 떨리면서 연회장의 소란이 피부로 전해졌다.
“주공, 송구합니다. 제가 성급하게 나선 탓에.”
“자네는 할 일을 했어. 나머지는 내 불찰이다.”
“하오나.”
“양양에 머무는 며칠간, 아니 앞으로 형주에 있는 동안 뭘 주의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이제 분명해졌네. 자네야말로 눈치 없는 촌부 취급을 참느라 고생했지. 잘 참아줬어.”
조운은 어깨가 구부정했다. 조운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드러난 유비의 낯은 사소한 잘못에 크게 놀라 풀이 죽은 아우를 달래는 형처럼 멋쩍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적은 조운의 태도가 답답했지만 내심으로라도 조운에게 핀잔을 줘도 되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조운은 이적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취기 때문에 정신이 없군. 잠깐 말을 타고 주변을 돌다 오겠네.”
“이대로 귀환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돼.”
조운은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땀이라도 닦아내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자네는 여기 있게.”
“주공.”
“괜찮아. 여기에 나를 죽이려는 사람은 없네. 그럴 거면 자객을 쓰지 저렇게 허술한 짓을 할까. 뭐, 내가 겁먹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제법 있는 듯해.”
조운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이편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비의 말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유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걱정 말래도. 잠깐만 나대신 자리 지켜주게. 그렇지, 자네 나 때문에 술을 삼가고 있었잖은가. 이제부턴 마셔도 돼. 자네가 술이라면 질색하는 것 같아도 실은 익덕한테 단련되어 잘 마시는 거 안다고.”
“단련이라니요. 익덕 때문에 질색하게 된 겁니다.”
유비는 킬킬 웃으며 조운의 어깨를 두드리고 난간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쪽에 계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비는 위병들이 드문드문 도열한 흙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멀리서 희미하게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혼자 서있던 조운은 긴 한숨을 뱉더니 난간에 걸린 유비의 옷을 주워 차곡차곡 갰다. 옷을 옆에 끼고 모퉁이를 돈 조운은 이적을 발견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대로 지나가려는 조운에게 이적이 말을 걸었다.
“정말 따라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유예주께서 동행을 허락할 사람이라면 그분의 의제들 정도일 것입니다.”
한순간 조운의 낯이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눈을 깜빡이니 조운은 평소 같은 얼굴로 이적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읍하고 있었다. 이적은 황망해하며 맞절했다.
”그보다 제가 선생께 사의를 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의라뇨. 아니.”
“선생께서 제때에 저를 불러내지 않았더라면 유예주께서는 채모에게 붙들려 더한 수모를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깊이 머리를 숙이는 키 큰 무장을 내려다보면서 이적은 뱃속 깊은 곳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조운이 이적과 마주쳤을 때 보이리라 상상한 반응은 이게 아니었다. 입을 열자 사과하려고 준비한 말들이 제멋대로 헝클어진 채 튀어나갔다.
“제가, 제가 정확히 알아보지 않고 말을 전한 탓에 유예주께서 불리해진 것은.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화를. 앞으로. 그러니까.”
“선생께서는 유형주의 객이십니다. 그럼에도 유예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주셨습니다. 저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조운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적을 지나쳐 연회장으로 뚜벅뚜벅 향하는 등은 꼿꼿하고 빈틈이 없었다. 마치 전장으로 향하는 것처럼. 조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이적은 한 걸음 물러나 칸막이 사이의 기둥에 뒤통수를 찧었다.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줬다고? 내가?
목 아래에서부터 열이 올라 낯이 달아올랐다. 이적은 기둥에 등을 붙인 채 주먹으로 기둥을 쿵쿵 내려쳤다. 광인처럼 소리를 질러대지 않은 것은 선비로서의 자존심이 아니라 흉한 꼴을 들켜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는 소심한 조심성 때문이었다.
-하루가 더 있었다. 큰공자가 나를 불러낸 다음날, 바로 어제, 어느 때고 신야에 갈 수도 있었다. 하다못해 채씨의 문객에게 정확한 동향을 물어볼 수는 없었는가? 나는 겁에 질린 채 집에 숨어서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쿵! 이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새끼손가락부터 손목까지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이적은 입을 숨기듯이 틀어막았다. 새하얗게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유표, 유기, 채모, 유비, 양양, 신야, 산양, 가족들, 그 모든 것들이 하얗게 흩어지고, 오로지 그 하루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와 부끄러움만이 몸뚱이를 안에서부터 터뜨릴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좀 더 일찍 알렸더라면, 달라졌을까?
다음날 아침에 열린 연회에는 유비가 나오지 않았다. 유표와 함께 연회장에 도착한 조운은 유비의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사과했다. 유표는 유비가 자신의 저택에서 쉬고 있으니 그쪽으로 병문안을 오라 전하고 하루 동안 잡힌 연회를 모두 취소했다.
느지막한 오후 무렵 주가로 간 이적은 선비들이 인사를 건네는 태도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좀 더 경의를 표하거나, 어딘지 차가웠다. 이적을 대하는 태도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선비들이 갈라져 앉은 자리마다 어색한 대화가 몇 마디씩 오가고 끊기기를 반복했다. 평소 한 말이 무엇이든 따르는 주인의 생각을 좇아 자리를 고른 이가 있었고, 그렇더라도 자신이 품은 생각을 포기하지 못해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이도 있었다. 이적은 이전처럼 멍한 낯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예감했다. 아마도, 언젠가 유비가 형주를 떠난 후에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다고? 그게 아니오. 그 사람이 전장에서는 제법 도망을 다녔다지만 어제는 그런 게 아니오.”
이적의 손을 가리키며 어찌 된 일인지 묻던 선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적은 선비의 어깨너머를 흘끔 넘겨다보았다. 양양의 호족들과 유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다 자처하는 선비들이 모여 앉은 자리였다.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주가에 있는 선비들은 모두 큰 소리로 떠드는 선비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네 뭘 근거로 그렇게 단정 짓는가?”
“단정 지을 수밖에. 어제 마지막으로 유예주를 본 자한테 직접 들었거든.”
“정말이오? 어찌 된 일이오? 유현덕이 소문처럼 제 부하마저 내버려두고 도망친 거요, 아니면 정말로 갑자기 병이 난 거요?”
“그 사람 감기 걸렸소.”
선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히 유표의 저택에 찾아갈 용기가 없거나 그만한 지위가 되지 않아 주가에 죽치고 있던 선비들은, 사실 유비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말도 믿지 않고 있었다.
“영웅호걸도 감기는 걸리는구먼.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하룻밤 새 몸져누운 거요?”
“서쪽에 단계(檀溪)라고 하천이 하나 있지 않소? 어젯밤 거기로 해서 양양에 온 장사치가 들려준 말이오. 처음엔 웬 단기필마가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굉장한 속도로 달려왔다더군. 그러다 강 앞에서 멈췄는데, 글쎄, 이 말에 탄 사람이 그냥 강 한복판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더라는 거요. 장사치가 누가 자결이라도 하나 싶어서 쫓아가보니 다름 아닌 유예주가 강 한복판에 있었더랬소. 아무리 양양이 따뜻하다 해도 지금 겨울이오. 그 사람, 그 추운 밤에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1각이고 2각이고 흘러가는 강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요.”
“왜 그런 거지? 어제 채군사와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었다는 말이 있던데 혹시 그것 때문인가?”
“낸들 알겠소. 연회에 간 이의 말로는 혼자 몸도 못 가눌 만큼 대취해서 술 깨러 나갔다던데.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괴팍한 주벽이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오.”
“그러고 보니 무슨 오해가 생긴 것도 유예주가 취해서라 들었소. 주벽이라. 내, 장익덕에 대한 소문이 하나 떠오르는데 말이오.”
선비들이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직접 보고들은 것보다는 남에게 전해들은 소문만으로 신나게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른손을 천으로 싸맨 젊은 선비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선비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에필로그 하나 남았습니다. o<-<
개인적으로, 단계 이벤트에 대해서는 손성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스펙타클한 사건이 있으니까 연의가 재미진 것이겠죠. 그래도 날로 가져다 쓸 순 없었습니다. 연의에서는 그 바로 다음에 유비가 수경선생과 만나는 대사건이 벌어지니까요. 해서, 멋대로 뻥을 끼워가며 짜맞추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도 제가 뭘 끄적인 건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