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4일 개시 ~ 10월 29일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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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으로 한 100년은 어떤 이도 찾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산 울창한 숲속에 론누 한 자루 들고 통나무를 찍어내 한칸짜리 집을 짓고는 몇주, 몇달이고 사람의 말을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사는 회백발 여자. 그리고 그로부터 1년쯤 지날 무렵 기어코 그 우울한 은둔자를 찾아낸 풀색머리 남자

숲속에서 사냥하던 도중 실수로 불청객을 죽일 뻔하곤 1mm 앞에서 간신히 론누를 콱 움켜쥐어 멈춘 와론이 얼굴을 확인하고서도 아무 말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우스는 지우스대로 자신을 깔고 앉아 제압한 회백발 여자의 처음 보는 낯을 올려다보면서 입술을 살짝 떨 뿐 아무 말도 못 꺼내는.

머릿속에서는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있어 언어를 잃은 적이 없지만 입과 목청을 움직여 말소리를 내본 게 하도 오랜만이라 말을 할라치면 동시에 진행하던 몇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뒤섞인 채 튀어나가고, 그래서 몇 단어 뱉다가 머쓱하게 입을 도로 닫아버리는 와론.

와론에게 시간이 필요한 걸 이해하기도 하고 굳이 세상을 등진 사람을 찾아와 방해하는 자신을 환대해줄 거란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았기에 와론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와론이 눈짓손짓으로 허락하기 전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우스.

해가 저물어가고 눈발이 날릴 듯 축축하고 시린 바람을 느끼면서, 여전히 견습 수준으로 약한지 이 정도 추위에 코가 벌게진 지우스를 작지만 아늑한 한칸짜리 오두막에 밀어넣고 숲속으로 저벅저벅 사라져버리는 와론. 작은 화덕 겸 난로에 불을 피워놓고 와론이 보낸 은둔자의 삶을 그려보는 지우스.

해가 지고 얼마 안 가 급격히 기압과 기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지더니 곧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함. 조그맣게 끼워놓은 유리창에 낀 성에가 살얼음으로 바뀌고 난로를 떼는데도 집안에서 허연 입김이 남. 왠지 오늘밤은 와론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지만,

열심히 불을 떼며 집안의 온기를 유지하려 애쓰는 지우스. 자신이 추워서이기도 하지만, 와론이 손수 지은 듯한 이 집이 눈 속에서 외롭게 고립된 채 얼어붙는 광경 자체가 몸서리쳐지게 싫었음. 그것이 기사의 몰락을 막기 위해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애썼지만, 세상은 고마워하지 않고

기억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듯이 조용히 사라진 와론의 지금 모습처럼 느껴져서였음. 그게 정말로 당연한 거라면, 정말로 "와론"의 목적과 역할이 거기서 완수된 거라면, 왜 자신과 마주쳤을 때 회백발 여자는 우울한 눈을 하고 있었을까.

묵직한 털옷의 텅 빈 채 축 늘어진 소매 한쪽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면서 지우스는 점점 초조해짐. 오두막을 둘러싼 나무와 돌들이 바람결에 온갖 곤두서는 소리를 내고 순식간에 쌓인 눈이 지붕을 짓누르는지 서까래 위쪽에서 음산한 소리와 녹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탓도 있을 것임.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저 밖의 어둠 속 어딘가에 와론이 있다는 것임. 지우스는 론누를 들고 나간 와론이 동사하거나 낭떠러지에서 헛딛고 추락하거나 마수한테 잡아먹히거나 할 걱정은 하지 않았음. 그냥, 자신을 마주하느니 저 거친 산에서 혼자 있겠다는 듯한 묵묵함이 천길 절벽 같아서.

네가 불편해하고 어쩌면 원망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나는 끝내 너를 찾아냈으며, 너에게서 어떤 대답을 들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거라고. 네가 이 새까만 어둠 속에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란 각오를 알리고 싶어서라도 불을 활활 지피면서 창 밖으로 환한 빛이 퍼지게 하려 애쓰는 지우스

 

 

 

2.


(이제부터 진짜 적폐 고고씽) 그런데 자미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음. 바로 자신의 몸 상태. 1년이 지나긴 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잃은 팔은 여전히 거기 있는 것처럼 환상통을 일으키곤 했음. 의사들이 열심히 처치해주긴 했지만 이런 추위 속에선 예전엔 두터운 근육으로 보호받았던 뼛속으로

절단부위를 통해 차가운 외기가 직접 스며 속부터 얼어붙는 기분임. 게다가 자미는 의수를 맞추긴 했지만 아직 재활이 끝나지 않은 데다 익숙하지 않아서 짐에 넣어놓고 착용은 미루는 중임. 이성과 거리가 먼 어떤 충동적인 이유로 닭과 재회했을 때 아무 일 없었던 척 하고 싶지 않은 탓도 있었음

왜냐면 그때 닭이 간절히 원하던 다른 것을 자신이 방해한 결과니까. 목적을 달성했다고 중얼거리고 그 자리에서 "새까만 닭"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듯이 날아드는 죽음 앞에 무방비로 몸을 드러내고 있던 닭을 억지로 구하려 뛰어들었던 결과니까. 그때 깨진 투구 틈으로 보였던 닭의 눈은..

아픈 절단부위를 남은 손으로 감싸 통증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침울한 회상에 잠겨있을 때 기척이 나더니 문이 삐걱 열리면서 눈발이 쏟아져들어옴. 걸어다니는 눈사람 같은 몰골로 문을 닫고 서서 눈을 거칠게 털어내는 닭을 자미는 멍하니 쳐다봤음. 닭이 오늘은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집주인 등장에 예의바르게 불 앞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자미한테 닭은 다시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섰음. 문은 하나뿐이니 퇴로가 차단된 셈임. 조그만 단칸방 오두막에 건장한 기사-그렇게 불릴 수 있을까, 자미는 쓰게 웃었음- 둘이 말없이 마주보니 단번에 공기가 긴장됨

자미가 입을 열려 하자 닭은 한 손을 들어 제지함. 눈 그치면 가라. 그 한 마디였지만 자미는 닭이 지금껏 뭐 하다 온 건지 알아차림. 닭은 이 눈폭풍 속에서 자미가 내려갈 길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온 것임. 그건 유예된 축객령이었음. 하지만 설마 대화마저 하지 않을 셈일까?

자미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닭이 들어올린 손으로 허공을 쥐어짜듯 주먹을 콱 쥐었음. 여기서 뭐하는 거지? 새로운 시대의 영광스러운 기사님들을 이끌어야 할 새로운 영웅께서. 대답하지 마. 그냥 다물어라. 자미는 좌절한 신음소리를 내며 남아있는 손으로 미간을 짚었음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자미는 그렇게 소리지르고 싶었음. 다른 사람들이 멋대로 갖다붙이는 소리는 아무래도 좋지만, 그걸 닭에게서만은 듣고 싶지 않았음. 영웅은 너잖아. 자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닭의 멱살을 잡고 그렇게 고함치고 싶었음.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임.

그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이 자미로 하여금 치료와 재활을 하던 지난 1년 내내 남들 모르게 닭이 있을 곳을 찾은 이유였음. 미간을 짚던 자미의 손도 어느새 손등에 핏대가 두드러지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음. 이윽고 자미는 그 주먹을 펼치면서 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음

그리고 식지 않도록 화덕 옆에 둔 솥의 뚜껑을 열고 탁자에서 나무그릇을 집어 국을 뜨고는, 닭에게 내밀었음. 우선 몸부터 녹여. 주인이 없는 동안 멋대로 찬장을 뒤져 고기국을 끓인 걸로 모자라 그냥 닥치고 있으라는 닭의 명령을 과감히 무시하는 행동이었지만, 자미의 눈과 손은 흔들리지 않았음.

자미의 눈과 그릇을 한번 번갈아보더니 회백발 여자의 낯이 일그러졌음. 닭이 온전히 맨얼굴을 드러낸 모습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닭의 저런 표정을 보는 것도 자미에겐 생전 처음이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음. 당연하다면 당연했음. 자미에게 닭은 언제나 저 사람이었으니까.

닭은 뭐라고 역정을 낼 것처럼 이를 드러낸 채 입가를 움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뱉지 않고 빼앗다시피 그릇을 가져갔음. 그 순간 자미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크게 공기를 호흡함. 축축하게 얼어붙은 공기가 폐로 한껏 밀려들면서 자미는 다시금 추위와 환상통을 느낌.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한 주제. 덜덜 떠는 자미를 찌푸린 낯으로 주시하면서 내뱉더니, 닭은 입을 대지 않은 그릇을 탁자에 놓고 다가왔음. 응? 감히 네가 내 생을 판단하고 내 결말마저 결정할 것처럼 굴더니 말이야. 꼴 좋다. 닭의 크고 거친 손이 어깨 아래의 절단부를 덮었음. 이게 무슨 꼴이냐.

식은땀이 밴 채 눈을 든 자미는 닭이 이마가 거의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걸 깨달았음. 낯선 얼굴, 낯선 표정. 화가 난 건 분명한데, 왜 슬퍼 보일까. 자신을 보자마자 죽이려 들 가능성도 희박하긴 하나 0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왜 뼛속 깊이 얼어붙으면서 동시에 불이 붙은 것 같던 절단부에서

닭의 손이 감싸쥔 데서부터 고통을 둔하게 덜어주는 것 같은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일까. 격통으로 머릿속마저 혼미해지면서 핑 도는 가운데 자미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던 이의 생각과 감정을 해석하려 애썼음. 그러면서 불빛이 일렁이는 저 눈을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음...

그날, 자신의 생명까지 담아 마지막으로 폭발시킨 힘은 하늘 높이 솟구쳐 폭우를 쏟던 구름마저 흩어버리고 피와 비로 젖은 대지에 빛을 드리웠음. 그 빛살 속에 우두커니 선 새까만 기사가 투구를 벗으면서 갈색의 짧은 머리칼이 사락 쏟아졌음. 자신을 쳐다보는 전혀 낯선 얼굴에 자미는 몸을 떨었음

...흠칫 떨며 눈을 뜬 자미는 자신이 깜빡 잠들었던 걸 깨달음. 절단부는 아직도 저리고 쑤셔서 이젠 없는 손끝부터 많이 상한 어깨죽지까지 꾹꾹 눌러 주무르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닭을 기다리며 혼자 추위에 떨던 때에 비하면 통증 자체는 상당히 둔해져서 훨씬 기분이 나아졌음.

문제는 그쪽이 아니었음. 자신은 누워있을 텐데 이상하게 머리가 무겁고 천장이 핑글 도는 것 같았음. 뱃속에선 은근하게 토기가 치밀락말락 했음. 어라. 이거 무슨 증상인데. 뭐였지. 자미의 볼에 축축한 바람이 닿으면서 용케 살아남은 눈송이 하나가 툭 닿음. 천장 부근에 덧문 같은 게 열려있었음

고개만 들어 주위를 둘러본 자미는 자신이 단칸 오두막 구석의 이불도 깔개도 없던 나무상자 같은 침상에 누워있는 걸 확인함. 그래, 이불 같은 건 안 보였는데 낡은 새까만 망토가 이불처럼 자미의 몸을 덮고 있었음. 자미는 옷을 벗은 기억이 없는데 망토에 덮인 몸은 상의가 벗겨져있었고,

환부엔 약이 발리고 깨끗한 붕대가 솜씨 좋게 묶여 있었음. 저쪽의 불가에선 여기까지 오는 동안 흙투성이가 됐던 자미의 외투와 상의가 빨랫감처럼 걸린 채 물방울을 떨어뜨렸음. 그리고 그 옆에서 등을 돌리고 앉은 회백발 여자가 뭔가를 마시고 있었음. 자미가 끓인 국의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았음

아직도 눈폭풍이 한창이라 열린 덧창으로 이따금 살얼음 같은 바람이 웅웅 불어닥쳤고 바람에 채여 비수처럼 날려온 잔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했음. 불빛이라곤 닭 앞의 화덕에 지펴진 자그마한 불꽃 뿐이었음. 자미는 자신이 잠든 게 몇 시간 안 됐고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듯하다고 결론을 내림.

바람이 드나드니 허름한 오두막은 불을 피워도 기온이 영하였음. 자미는 익숙한 닭의 체취가 밴 망토를 코끝까지 끌어올리며 웅크렸음. 그런데 왜 갑자기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것인지? 고통이 심한 날에는 오히려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리고 닭은 왜 자미를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인지?

내 집에서 자살이라도 할 셈이었나? 관심 끄는 수단이 자해인 건 어떻게 변하질 않냐? 제정신 아닌 새끼. 자미가 생각하느라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등을 돌리고 앉은 닭이 차갑게 내뱉었음. 자미의 정신이 대번에 맑아졌음. 연기 중독. 현기증의 원인은 환상통이 아니었음

닭이 때맞춰 돌아오지 않고 이 밤 내내 밖에서 눈을 맞으며 자미를 외면했더라면 눈이 그친 후 닭은 자미의 시체와 마주쳤을지도 모름. 그런데 자미는 닭이 그날 그 자리에서 죽일 것처럼 론누를 겨누고도 죽이지 못한 채 스스로 떠나야 했던 인물이었음. 자미는 그 이유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음.

비록 다른 이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만의 사고와 방식에 기반하긴 했지만, 닭은 기사를 지금보다는 덜 미운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뼈를 깎으며 싸워왔음. 그 과정의 끝에서 닭은 자신이 가장했던 "새까만 닭"의 투구를 벗고 그 속의 회백발 여자를 지워버리려 했었고.

타인을 믿지 않는 닭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첫째로 불의 아이가 대안을 보여줬기 때문이고, 둘째로 닭은 처음부터 자신이 해온 일들을 이어 마무리할 "기사"로 자미를 점찍어두고 그에게 새 시대의 기사들을 위한 어떤 역할을 떠넘기기 위해 움직였던 듯함. 모두 끝난 지금 보니 알 것 같음.

그러니 닭이 연기에 중독되어 위태로워진 자미를 구하고 둘 사이의 숱한 다툼과 신경전과 그럼에도 전장에서 등을 맞댔던 역사의 결말인 잘린 팔에도 친절하게 필요한 처치를 해준 건, 닭에게 아직 자미가 필요하고 쓸모 있기 때문일 것임. 그런 이유여야만 한다고, 자미는 눈을 감으며 생각함.

 

 

 

3.

 

다시 눈을 떴을 때 자미는 날이 밝고 눈폭풍도 그친 걸 깨달음. 실내는 똑같이 어두컴컴했고 조명이라곤 화덕에 지펴진 작은 불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기사의 날카로운 감각은 기압과 기온과 습도가 달라진 걸 감지함. 다 마른 옷은 자미가 이불처럼 두른 새까만 망토 위로 홑이불처럼 덮여있었고

닭은 없었음. 자미는 한 손으로 익숙하게 주섬주섬 옷을 꿰어입으며 어두운 단칸 오두막을 주의 깊게 살펴봄. 사실 볼 건 없었음. 화덕, 솥, 물통, 필요에 따라 서랍과 의자와 탁자의 기능을 병행하는 나무상자 몇 개 정도 빼면 삭막하리만치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자들은 비어있지 않았음

화덕 옆에 있는 상자는 자미가 왔을 때 이미 열려있었고 딱 봐도 식량보관용이었음. 자미는 나머지 상자들이 궁금했음. 닭은 기사 생활을 하는 내내 주거가 불분명했고 무슨 마법의 화수분이라도 가진 것처럼 여기저기서 불쑥 엉뚱한 물건을 꺼내곤 했음. 생각해 보면 집이 없으니 필요한 물건은

그때그때 조달하고 그 밖에는 당장 몸에 지닐 수 있는 것들로 소지품을 한정해 어딜 가나 들고 다녔던 것임. 회백발 여자는 "새까만 닭"에게 지급된 카톤 같은 기사보급품도 일절 손대지 않았으니, 그의 소유물은 정말로 걸친 옷과 론누, 투구, 목걸이가 전부였던 것임. 그럼 이 상자들은 뭘까?

자미가 상자들을 바라보며 굉장히 큰 유혹을 느끼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도(?) 닭이 방금 쪼갠 장작을 한아름 들고 들어옴. 닭은 자미한테 냉랭한 눈길을 한번 주고는 화덕 옆에 장작을 와르르 쏟음. 눈 그치면 가라고 했을 텐데. 이제 내 말은 사람 말로 취급하지도 않나 보군.

자미는 으르렁거리듯이 한숨을 뱉었음. 갈 거야. 대답 하나만 듣는다면. 닭은 이를 드러냈지만 잠자코 있었음. 자미는 필사적으로 얼마 없는 정보를 조합했음. 자미가 투구를 쓴 기사를 마지막으로 본 날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지만, 우선은 쫓겨나지 않아야 그런 것도 시도해볼 수 있는 것임.

닭의 팔짱을 낀 팔 위에서 톡톡거리는 손가락의 박자가 슬슬 빨라질 때 자미는 조금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음. 운석 사냥. 나도 데려가줘. 손가락이 딱 멈춰음. 닭이 짜증과 노기를 숨기지 않은 낯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음. 감시하고 있었냐? 내가 알아서 뒈지겠다는 걸 억지로 살려놓은 주제.

자미는 얼간이처럼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음. 그럴 리가. 그냥 기사가 아닌 너는 뭘 할지 생각을 좀 해봤어. 자미가 아는 닭은 배우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생명의 무게를 아는 인물임. 갑자기 삶이 "목적"이 사라졌을 때 닭이 간단히 제 목숨을 버리려 한 건

닭이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마저도 목걸이의 주인에게 오롯이 바치려 했기 때문이었음. 자미의 참견으로 그 마지막 계획이 조금 틀어지고 나서 닭이 홀연히 사라졌을 때 자미는 그가 시체도 찾을 수 없는 데서 다시 자결하려는 걸까봐 정말로 무서워했지만,

팔을 치료받으며 상태가 안정된 후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 닭에 대해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사실들, 그리고 새침한 금발머리 제자놈이 문병 와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인 닭에 대해 한 말들을 생각하면서 왠지 닭이 다시 그런 시도를 하진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음

그 예감 하나에 매달려 닭이 살아있다면 지금 하고 있을 법한 일들을 추측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까마귀를 통해 우연히도 운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단서가 됐음. 일확천금이지만 매우 희귀한 행운인데 요즘 연구자들과 대장장이들이 공급받는 운철 물량이 평소보다 조금 늘어났다는 것임

운철이란 말을 듣자마자 자미는 닭이 사용하던 최종기 별 내리기를 떠올렸고, 자미가 아는 닭은 투구 때문에 티가 나지 않을 뿐 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홀로 밤을 새곤 하는 사람이었음. 그리고 닭의 나린기인 론누는 별하늘을 관찰하거나 별똥별이 떨어질 때 추적하기에 꽤 적합한 기능이 있었음

물증 없이 논리의 비약으로 정보를 이어붙여 억지로 쥐어짜낸 희망이었지만 자미는 필사적으로 희망을 쫓았고, 그 결과가 이 첩첩산중의 오두막에서 닭과 독대하고 있는 것이었음.. 닭은 짜증과 초조함이 섞인 낯으로 엉뚱한 데를 쳐다보며 혀를 찼고, 자미는 참을성있게 기다렸음.

사실 자미는 조금 겁을 먹고 있었음. 닭이 다짜고짜 힘으로 쫓아낼 가능성도 있었기에 일부러 자신이 닭의 소재를 추적할 수 있고 여차하면 예전처럼 그 정보로 닭을 이용할 거라 암시해 닭을 고민에 빠뜨린 거지만, 내심은 닭이 단호히 거부하면 그냥 떠날 생각이었음. 그것 말고 무슨 선택이 있겠음?

이윽고 한숨을 뱉은 닭이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가로저었음. 수작질은 관둬. 아무튼 넌 여기 있어선 안 돼. 네 역할은 니젤에 있다. 자미는 실망하지 않았음. 영리한 닭이 간파할 거란 것도 당연히 예상했음. 실은 코끼리가 닭을 만나러 가겠다는 자미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들었던 이유도 저거였고.

내 역할, 그걸 위해 지금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면? 자미의 대꾸에 닭은 낯을 찌푸렸음. 말해두는데 난 기사질 같은 거 생각 없-/그게 아냐. 내 '힘'은 아직 쓸 수 있다. 기어스는 그대로니까. 그런데 방법을 못 찾고 있어. 열쇠는.. 감일 뿐이지만, 네가 쥐고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해. 그래서 온 거다.

그 말을 하면서 자미는 낯이 뜨거워지지 않았길 바랐지만 귀뿌리에는 이미 조금 더운 느낌이 들고 있었음. 닭이 고개를 들어 자미를 빤히 쳐다보았음. 오늘 아침 말 몇 마디를 나누는 동안 닭이 자미와 눈을 마주친 건 지금이 처음이었음. 다행히도 닭은 자미의 낯이 붉어진 걸로 놀리거나 하진 않았음

단지 닭은 뭔 소리야 라고 써붙인 듯한 얼굴이었고 닭의 입에서 실제로 나온 말소리도 그거였음. 뭔 소리야? 그리고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그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구나 같은 한가로운 생각을 했음.

 

 

4.

 

어쨌거나 닭이 물었으니 자미가 좀 더 설명을 하려고 입을 뻐끔거리자 닭이 바로 한 손을 딱 들어 제지함. 네가 갖다붙이는 변명은 아무래도 좋아. 요는 내가 거절할 걸 알아도 여기 있고 싶다는 거잖아. 자미는 입을 다물었음. 닭은 미간을 찌푸렸음. 바다에 빠뜨려도 기어서 돌아오겠군. 참 나.

닭은 회백발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밖으로 나갔음. 자미는 닭이 이미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허락했다는 걸 알아챘지만 혹시 모르니 확실히 하려고 닭을 따라나갔음. 새까만 닭, 하고 부르려다 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어 호칭을 생략했음. 밥값은 하겠어. 네 운석 사냥을 돕지. 그냥, 머물게 해줘.

닭은 대답 없이 론누를 들고 오두막을 한 바퀴 빙 돌았음. 주위를 살피고 눈 덮인 땅을 바라보며 흠 하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음. 닭은 생각 없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었음. 자미는 잠자코 기다렸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뭔가를 살피던 닭이 잠시 후 자미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더니

자미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두막 오른편을 론누로 가리켰음. 남쪽? 자미가 그렇게 생각할 때 닭이 론누를 크게 휘둘렀음. 어찌 보면 귀찮아하는 기색마저 있는 가볍고 느릿한 (어디까지나 닭의 힘을 아는 자미가 볼 때 느릿한) 휘두름에 풍압이 일면서 바닥에 쌓여있던 눈이 순식간에 날려감.

한순간에 제법 넉넉한 너비로 젖은 흙을 드러낸 바닥이 생겨났음. 닭은 턱짓으로 그 땅을 가리켰음. 네 집은 네가 지어. 자미는 귀를 의심함. 닭이 눈을 치워놓은 땅은 오두막의 벽에서부터 시작되었음. 다시 말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집을 지으려 했다간 몸을 누일 공간도 나지 않을 터였음.

닭은 벌써 자미를 냅두고 혼자 숲에 들어가고 있었음. 자미는 한숨을 푹 쉬곤 바닥을 내려다봤음. 닭은 집을 어떻게 지으라는 지시까진 하지 않았음. 그럼 자미 맘대로 지어도 된다는 이야기임. 무엇보다도, 이건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이었음. 자미는 그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음.

두어 시간 후 두 어깨에 거대한 곰 한 마리를 짊어지고 돌아온 닭은 자미가 한 손에 잡힐 굵기의 나무 몇 그루를 분질러서 가져다 쌓아놓고 대강 가지만 쳐낸 후 닭의 오두막 지붕에 비스듬히 기대어 늘어놓는 광경을 목격했음. 자미는 닭의 오두막 한 면을 자신이 지으려는 집의 한 면으로 삼고

이걸 기준으로 앞에서 보면 직각삼각형 꼴의 삼각기둥을 이루도록 지붕을 만든 후 남은 두 개의 면 중 하나만 벽체로 막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방을 짓고 있었음. 굵은 통나무를 서슴없이 쓰러뜨려 쌓아올린 닭의 오두막에 비하면 장작을 보관하는 헛간이나 다름없는 무언가였지만,

닭이 도와주지 않고 도구도 재료도 없으며 본인이 손을 하나 밖에 쓸 수 없는 상태에선 현명하고도 힘을 덜 들이는 선택이었음. 애초에 닭은 자미가 혼자 힘으로 독립된 오두막을 지을 수 없는 걸 알았기에 반쯤은 심술을 부리는 마음으로 이런 선택지를 준 거였지만...

그렇지만 바닥도 다지지 않은 데다 지붕이고 벽체고 생나무를 그대로 써서 틈이 벌어져있었음. 이 산의 추위와 폭설을 경험해봤으면서 무슨 생각인 건지. 저 수수깡 같은 구조물이 무너지거나 자미가 병이 나거나 산짐승이 습격해도 닭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배짱인 건지 뭔지.

어쨌든 자미는 닭이 온 걸 흘끔 보고도 일절 도와달라는 소릴 안 했음. 닭은 코웃음치곤 아직 몸이 굳지 않은 곰을 오두막 앞마당에 마련해놓은 나무틀에 거꾸로 매달고 손질하기 시작했음. 각자 묵묵히 작업에 매진하는 소리가 적막한 산속에서 요란하게 울렸음.

자미는 자미대로 자신의 지식과 기력과 깡다구를 총동원해 집을 지어보려 애쓰고 있었음. 애초에 기사는 부수고 때리고 죽이는 훈련을 받지 뭔가를 짓고 만드는 사람이 아님. 야생에서 맨몸으로 버티고 말지 자기 손으로 사람이 살 집을 짓는 자들이 아니란 말임. 그래도 자미는 기쁘게 일했음

아니, 정말로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이었음. 제 머리로 궁리하고 제 손으로 땀 흘려 목적한 걸 생산해내는 행위, 노동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음. 500년 전 제시된 명예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게 된 현 시대의 기사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이런 경험일지도.

한참을 작업에 골몰해 지붕과 한쪽 벽면을 완성한 자미는 쳐놓은 나뭇가지로 지붕의 얼기설기한 틈을 덮은 후 그 헛간 같은 자신의 '방' 안에 앉아봤음. 앞쪽은 아직 안 막아놔서 찬 바람이 솔솔 드나들었고 흙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음. 방 크기는 드러눕거나 앉아서 뭔가를 하기엔 적당했지만

침구와 낮은 책상 정도 외의 가구를 넣을 각이 나오지 않았음. 불 피울 공간 만들기도 무리였고. 약해졌어도 기사니까 바람만 피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생각한 자미는 우선순위를 조정해 전면에 진흙 섞은 벽을 세운 후 문을 다는 작업부터 하기로 하고 밖에 나왔음. 해지기 전에 끝내야 했음.

그때 닭이 저벅저벅 다가와 자미가 지은 공간 안에 불쑥 들어왔음. 닭은 '방'을 한번 둘러보곤 그대로 돌아서 나가더니 다시 숲으로 사라졌음. 자미는 의아했지만 내버려두고 나무를 몇 그루 더 끊어와 전면의 벽을 채우고 진흙을 개어다 틈을 메꾸며 바삐 작업했음.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음.

마지막으로 남은 나무줄기를 엮어 문짝 비슷한 걸 만들어놓고 경첩이 없어 그냥 비스듬히 세워놓고 있자니 닭이 돌아왔음. 뒤를 돌아보는 자미에게 닭이 뭔가를 불쑥 떠넘겼음. 집들이 선물. 그리고는 자미가 작업하면서 생긴 나뭇조각들과 잔가지를 모아다 이제 두 칸이 된 오두막 앞에 불을 피웠음

자미의 품에 안긴 건 묵직하고 푹신한 곰가죽이었음. 자미가 직접 무두질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게 며칠씩 걸리는 일인 건 알고 있음. 자미가 묻고 싶어 하는 걸 아는 듯 닭은 등을 돌린 채 불에 식재료가 든 솥을 걸면서 말했음. 사온 거야. 닭이 어느 틈에 마을에 가거나 사냥꾼을 만난 모양임

론누 비행은 아무튼 사기란 말임. 여하간. 자미는 대답할 말을 바로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한팔로 서툴게 곰가죽을 몸에 둘러봤음. 묵직하고 제법 따뜻했음. 아니 기사 기준으론 덥다고 해야 할 것임. 고마워. 닭은 계속 등을 보인 채 요리를 하고 있어서 자미의 말에 닭이 지었을 표정은 알 수 없었음

오늘은 눈폭풍이 오진 않았지만 사방이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어 무척이나 추웠음. 자미는 돌을 몇 개 주워 닭이 피운 모닥불에 집어넣고 그 앞에 앉았음. 닭은 고기를 넣고 끓인 죽을 자미에게 건네고 조금 거리를 둔 옆에 앉았음. 슬쩍 본 자미는 자기 그릇엔 고기가 있었지만 닭의 그릇은 그렇지

않은 걸 깨달았음. 닭이 고기를 싫어했던가? 반대였음. 자미가 기억하는 닭은 먹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먹었고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뭐든 거절하지 않았음. 그러고 보니 자미가 어제 국을 끓이면서 살펴본 식료품상자는 건량 위주였고 고기는 국내기 용에 불과한 듯 한줌 밖에 안 되었음.

자미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닭이 불쑥 입을 열었음. 내일은 날 밝기 전에 일어나서 산을 탈 거야. 못 따라와도 안 주워줘. 자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으려던 것을 깊숙이 갈무리했음. 대신 목을 가다듬으며 좀 더 평범하게 들리는 질문을 했음. 저 집은 네가 지었나? 닭은 응. 하고 대답했음

유성은 세상 어디에도 떨어질 수 있잖아. 운석 사냥을 하려면 계속 떠돌아야 할 텐데. 자미의 질문에 닭이 싱긋 웃었음. 언제 물어보나 했다. 맞아. 정주할 순 없지. 하지만 매년 주기적으로 유성우가 쏟아지는 시기가 있거든. / 유성우? / 응. 이 부근이 그거 관측하기 좋아. 닭은 다시 입을 다물었음

그러고 보면 이상했음. 운석은 발견하기 어렵고, 상품성이 있는 운철은 그 안에서도 더욱 희귀함.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건 물론임. 운철을 한두 개만 팔았어도 닭이 쥔 현금이 제법 두둑할 텐데 돈을 모아 어디에 쓰려는 걸까? 자미가 아는 닭은 물욕이 없었고 살풍경한 오두막이 이를 증명함.

닭이 운석을 찾는 목적이 돈은 아닐 것임. 그렇다면 역시 별똥별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걸까? 왜? 어느 틈에 자미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닭의 가슴께로 향했음. 늘 그 자리에 있던 광택 없는 수수한 녹색 목걸이가 불빛을 머금고 있었음. 자미는 닭의 목걸이에 대해 묻고 싶어 하는 입을 힘주어 다물었음

그건 닭의 몸상태에 대한 질문보다도 더욱 건드려선 안 되는 주제였음. 그렇지만 닭은 눈이 밝고 지나치리만치 영민한 사람이었음. 그만 힐끔거려라. 그렇게 안 봤는데 음흉하네~ 그게 닭이 원하는 반응이란 걸 알았기에, 자미는 그런 거 아냐. 라고 시무룩하게 뱉었음.

"새까만 닭"이 아닌 회백발 여자는 자신의 몇 안 되는 소유물 중에서 투구를 이미 잃었음. 자미는 이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묻고 싶었지만 대신 입 안에 든 고기를 힘주어 씹으면서 가까스로 삼켰음. 닭이 언제까지 자미를 허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모를 일임.

조촐한 식사가 끝나고 닭이 먼저 자기 오두막에 들어가 문을 닫은 후, 자미는 자신이 얼기설기 엮은 방에 달궈진 돌을 들였음. 언젠가는 문짝이 될 나무뭉치로 입구를 막고 나니 새까만 어둠 속에서 자기 손바닥도 볼 수 없었음. 자미는 닭이 선물한 곰가죽을 두르고 닭의 오두막 벽에 기대어 앉아

어둠을 응시했음. 수도에 있는 기사들과 견습들은 사고 안 치고 자미가 남긴 계획과 과제를 잘 따라가고 있을지? 한 손으로 '힘'을 사용할 새로운 방법은 왜 닭과 관련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인지? 닭은 왜 별똥별을 찾아다니는 것인지? 등을 기댄 통나무벽은 우연히도 닭이 침상처럼 쓰는 상자가

쌓여있던 방향이었음. 한뼘이 조금 넘는 이 벽을 사이에 두고 닭이 누워있을 터였음. 닭은 이미 잠들었을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여줬을지. 마지막에 닭이 당했던 부상은 잘 치료한 건지. 천천히 정리해야 할 생각거리가 많았지만, 종일 힘써 일한 몸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음...

 

 

 

5.

 

볼을 툭툭 치는 손길에 눈을 뜬 자미는 닭의 무척이나 심술궂어 보이는 얼굴을 대면함. 하도 안 깨서 돌아가신 줄 알았다. 동화처럼 뽀뽀라도 해줘야 하나 싶었네~ 자미는 닭을 흘겨보곤 기지개를 폈음. 밖은 한새벽이라 깜깜했지만 공기가 바삭한 게 아주 쾌청하고 추운 날씨가 될 거란 걸 직감함

닭은 이번에도 자기 오두막의 화덕이 아니라 오두막 바깥의 모닥불에 솥을 걸고 어제 저녁에 남은 음식을 데워서 나눠줌. 불을 쬐며 빠르게 식사하면서 자미가 질문함. 매년 특정 시기에 유성우가 쏟아진단 말이지. 그럼 이번에 관측하고 떠났다가 내년에 다시 오는 건가? 닭은 어깨를 으쓱임.

기본적으론. 그래도 여기가 공기도 맑고 전망이 좋거든. 거점으로 제격이야. 자미는 별 생각 없이 듣다가 문득 깨달음이 온 얼굴(아차 하는 얼굴)로 닭을 쳐다봄. 닭은 씩 웃었음. 조수 노릇 하겠다며. 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그 느린 발로 뛰어다녀야 할 거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는데~

나야 환영이지. 하지만 '힘'의 열쇠를 찾을 때까지만이야. 그건 너도 나한테 협조해야 할걸. 자미는 일부러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음. 닭은 코웃음치곤 대답하지 않았음. 이러니 마치 특수2기 임무를 앞두고 둘이 약속을 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음. 자미는 일부러 헛기침을 해 감상을 지움

저 멀리 능선 너머 눈 덮인 깎아지른 바위봉우리를 향해 절반 이상은 얼어붙은 바위를 기어올라야 하는 길이 시작됐음. 그치만 둘 다 별다른 장비 없이 가볍게 올라갔음. 기사는 기사니까. 그래도 자미는 닭이 자꾸 빠르게 앞서가버려서 따라가기가 벅찼음. 일부러 심술을 부린다기엔,

닭이 걷는 내내 어떤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그냥 동행이 있고 그 인물이 평상시엔 견습 수준으로 약한 자미라는 걸 까먹은 것뿐인 듯했음. 자미는 일부러 힘든 걸 내색하지 않고 헉헉거리며 열심히 따라갔음. 도중에 점심쯤 되어서야 멈칫한 닭은 하늘을 흘끔 보고 해의 높이를 어림하다가

저 아래쪽에서 자미가 헉헉거리며 털썩 주저앉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돌아봤음. 어? 어. 미안하다. 훌쩍 뛰어내려와 자미한테 물통을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서 꺼낸 것인지..?) 건넨 닭은 정말로 미안해 보였음. 물을 힘겹게 마시며 숨을 돌린 자미는 약간의 원망을 담아 닭에게 물었음.

너라면 나를 데리고 론누로 날 수 있잖아. 혹시 하루 종일 걸어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닭은 엄지로 어깨너머를 가리켰음. 저기 한번 올라가면 해뜰 때까지 못 내려온다. 불빛은 무조건 금지다. 준비가 필요하다고. 닭이 가리킨 방향을 올려다본 자미는 눈덮인 돌무더기를 발견함.

자세히 보니 반쯤 지은 작은 돌집 같은 거였음. 닭은 정상까지 가는 길 중간중간에 저런 식으로 거점 같은 걸 만들면서 가려는 모양이었음. 그러니까 닭 정도 되는 기사에게 그게 왜 필요한 것인지? 석연치 않은 설명이었지만 자미는 더 묻지 않았음. 그보다 닭이 이번에도 대화 내내 자신과 눈을

직접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게 신경 쓰였음. 투구를 벗은 지 1년은 넘었을 텐데 투구 없이 사람과 마주하는 데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달지. 하긴, 목적 하나만 달성하고 그대로 남 모르게 죽어버릴 작정으로 수년간 투구를 벗지 않고 살아온 사람의 삶과 심정을 남이 어떻게 알겠음.

자미는 그것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일단 눈앞의 과제에 집중했음. 베이스캠프에 도달해 돌집 마저 짓기. 휴식장소부터 다시 1시간을 등산해 닭이 짓다 만 돌집에 도달함. 그간 닭이 왔다갔다 하면서 재료로 쓸 수 있는 돌을 가져다놨기에 쌓기만 하면 됐음. 안쪽엔 식량과 장작도 준비돼있었고.

일손이 셋()이니 금방 작업이 끝남. 원래는 한 사람만 쓰는 걸 상정하고 지은 조그만 돌집에 들어가 불을 피워놓고 앉으니 어쩔 수 없이 둘이 어깨와 몸을 붙여야 했음. 물론 아무리 기사라도 체온을 계속 잃는 건 위험하니 닭과 몸을 붙이고 앉는 것 자체는 싫지 않았음. 그보다 신경쓰이는 게 있었음

쉬면서 자미는 닭의 상태를 곁눈질로 살폈음. 좁은 돌집 안에서 망토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조금 수그린 닭은 왠지 지쳐 보였음. 자미가 지치는 건 당연하지만, 닭이 지치다니. 자미는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그날 닭이 배를 관통당하고 쓰러져 즉사한 것처럼 피를 쏟던

모습이 캄캄해진 눈앞에서 섬광 터지듯 떠올랐음. 너무 많은 피가 흘렀음. 상처에서도, 투구 속에서도.. ..린. 기린, 야! 뭔가가 볼을 가볍게 찰싹 때리는 감각에 자미는 정신을 차렸음. 후드에 반쯤 가려진 닭의 눈이 불빛을 머금어 반짝이면서 자미를 바라보고 있었음. 너 갑자기 왜 그래?

닭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자미는 그럴 수 없었음. 소맷자락으로 코 밑을 훔치면서 자미는 고개를 돌렸음. 뭐 좀 생각하느라. 다시 슬쩍 곁눈질하니 닭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낯이 되어 있었음. 자신이 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자미는 일부러 짜증내듯 내뱉었음. 못 따라간다니까, 좀 천천히 가.

닭은 입매만으로 희미하게 웃는 시늉을 하곤 다시 고개를 수그려 후드 속에 얼굴을 감췄음. 잠시 후 닭이 일어나 불을 밟아 껐음. 가지. 닭이 돌집에서 사용한 만큼 물자를 보충해놓고 (그러니까 어디서...?) 둘은 다시 등반에 나섰음. 그리고 해가 지평선에 걸려 하늘이 온통 검붉게 물들 무렵

정상에 도달했음. 눈만 대충 치우고 털썩 주저앉은 닭은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음. 자미가 조심스럽게 닭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닭이 도리질치며 크게 숨을 들이켰음. 그런 거 아니니까 상관 마. 그리고는 품에서 모눈종이 몇 장과 펜을 꺼내 자미에게 건넸음. 이제 부를 때까지 얌전히 있어.

자미는 손에 쥔 종잇장에서 닭의 체온을 느끼며 기다렸음. 닭이 바닥의 눈을 치우자 정사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는 네 개의 돌 같은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게 드러났음. 닭은 위쪽에 사각형의 액자 같은 틀이 달린 지지대를 꺼내 (어디서...) 돌에 맞춰 다리를 펼쳐놓고 고정시키곤 자미한테 그 아래에서

닭이 시간을 알려줄 때마다 사각형 틀에 보이는 모든 별을 위치 그대로 표시하라고 지시했음. 그러니까 닭이 자미에게 시킨 것은 성도를 그리는 것이었음. 벌써부터 목에 디스크가 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자미는 시키는 대로 했음. 곧 해가 가라앉고 군청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동쪽 하늘부터

별이 드러나기 시작했음. 닭은 한 시간 간격으로 때를 알렸고, 자미는 닭의 핀잔과 재촉과 잔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1분 이내에 사각형 액자 같은 틀 안에 보이는 모든 별의 위치를 그대로 그리려고 무진 애를 썼음. 나머지 시간 동안엔 둘 다 말 없이 기다렸음. 기다리고 또 기다렸음.

겨울의 늦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 마지막 시간대의 별지도를 그린 직후 닭이 벌떡 일어섰음. 그리곤 말도 없이 론누를 던져 타고 쏜살같이 날아갔음. 허둥지둥 일어서다 관측틀에 머리를 부딪친 자미는 욕을 중얼거리면서 이미 저만치 날아간 점이 된 닭을 바라보았음

한순간이었지만 자미는 닭이 론누를 던지기 직전 작은 빛살이 그 방향으로 그어지는 걸 본 것 같았음. 별똥별. 그 단어를 떠올리자 닭이 어디에 뭘 하러 간 건지 이해됐음. 까닭 없는 허탈감을 느끼면서 자미는 지지대를 접어 옆구리에 끼고 그 밤 내내 그린 성도를 품에 넣어 산을 내려왔음.

어디에 얼마나 먼 곳에 별똥별이 떨어진 건지는 모르지만 닭이 그걸 확인하고 돌아오려면 며칠은 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음. 어제 닭이 큰 곰을 사냥해 고기를 마련하고 가죽이불도 갖다 준 건 자미가 오두막에서 굶거나 얼어죽진 않게 해주겠다는 최소한의 배려였나 봄.

그렇지만 이럴 계획이란 설명은 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몸도 좋지 않아 보였는데. 투구를 벗고 자신이 격기사가 아님을 드러낸 지금도 닭은 옛 기사처럼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려는 걸까. 뛰어내리다시피 달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짧고 격렬했음. 베이스캠프를 그냥 지나쳐 달린 자미는

새로 밝은 해가 다시 기울어져 공기에 붉은빛이 짙어지고 있을 무렵 오두막에 도착했음. 역시 닭이 오두막에 들른 흔적은 없었음. 자미는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관측틀과 성도를 자기 오두막에 갈무리해놓고는 앞마당에 불을 피워 혼자 먹을 저녁을 차렸음. 닭의 오두막엔 발도 들이지 않은 채.

 

 

6.

닭은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돌아옴. 자미의 씁쓸함이 노기로 바뀌고 노기는 다시 속이 메슥거리는 걱정으로 바뀌려던 즈음이었음. 그 사이 눈이 한번 더 왔기 때문에 자미는 실내에서 불을 피울 수 있도록 자기 오두막을 좀 더 보강하고 침상도 하나 짜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긴 했음.

그날도 단조로운 고기 식단의 탄단지 균형을 맞추고 무엇보다 식물! 식물을 섭취하고 싶어 숲을 돌아다니며 겨울 먹거리를 채집하다 돌아온 자미는 자신의 허술한 오두막 앞에 선 닭의 너덜너덜한 뒷모습을 발견함. 기척을 느낀 닭은 돌아보더니 안 갔네? 하고 빙글빙글 웃으며 자기 오두막에 들어감

자미는 잠잠해졌던 씁쓸한 울분이 스멀스멀 치미는 걸 느끼며 달려가 닫히려던 닭의 오두막 문을 잡음. 얘기좀 해. 닭이 찌푸린 낯으로 돌아봄. 뭐. 사과하라고? 너 버리고 간 거? 어 미안. 닭이 다시 들어가려는 걸 자미가 문을 꽉 잡고 놓지 않음. 대화를 하자고. 성도, 받기 싫어? 닭은 코웃음쳤음

새끼. 협박질하던 버릇 나오네. 닭이 힘으로 문을 잡아당기자 질질 끌려간 자미는 아예 몸을 날려 하나 남은 팔을 문틈에 끼워넣었음. 닭이 문을 쾅 닫으려다 멈칫했음. 어둠 속에서 닭의 두 눈이 싸움을 앞둔 야생동물의 그것처럼 희미하게 빛을 뿜었음. 엷은 살기가 자미의 피부를 간지럽혔음.

대화를, 하자고 했어. 자미는 그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버티고 섰음. 닭은 짜증을 숨기지 않는 낯으로 자미를 내려다보다가, 문을 열며 밖으로 나왔음. 자미가 뒷걸음치지 않고 문 바로 앞에 버티고 서자 닭은 실낱만큼만 다가가면 이마와 몸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음. 그래 하자 대화. 뭘 원하지?

단도직입 묻는 닭 앞에서 자미는 마른침을 삼켰음. 어디 갈 땐 적어도 얘기를 하고 가. / 내가 나가는데 왜 허락이 필요하지? / 그게 아냐, 그냥 어디 가는지만이라도 알려줘. 까닭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리기 싫어. / 어쩌라고. 네가 무슨 권리로 그런 걸 요구하냔 말이다. 내 이름도 모르는 주제.

닭의 그 냉정한 말이 방금 자미를 얼마나 깊이 찔렀는지 닭은 알까.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던 감정을 오랫동안 연마한 자기통제로 억제하면서 자미는 허옇게 질린 주먹을 주머니 안에 갈무리하고 다른 말을 꺼냈음. 녀석이 재밌는 얘기를 하더군. 징크스라고 하던가. 기사의 기어스와 비슷한 원리라지.

닭의 낯이 굳었고, 혹시 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어 자미의 뱃속이 울렁거렸음. 그럼 나 때문인 거냐? 차분히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자미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말았음. 닭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음. 녀석은 징크스라고 부르는군. 뭐 명칭은 아무래도 좋아. 그래. 나는 조금 약해졌다.

진정해라. 정말로 요만큼일 뿐이니까. 그냥 기가 좀 허해진 느낌? 울컥하려는 자미 앞에서 닭은 엄지와 검지로 별 것 아니라고 손짓해보이며 장난스럽게 웃었음. 투구.. 보다 정확히는 내가 사람들에게 나의 벗으로 여겨지는 동안엔 점점 더 강해지는 느낌이었지. 지금은 그게 딱 멈춘 느낌.

회복 속도가 느려진 건가. / 잘 관찰했네. 뭐, 그렇게 됐다. 별 것 아냐. 내가 지닌 힘은 그대로거든. / 그렇지만 산에서 넌.. / 그건 심리적인 거야. 체력이나 회복력 문제는 아니었다. 거기까지 말한 닭의 낯에 잠시 후회하는 기색이 어렸음. 닭의 손은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음.

자미는 비로소 문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떨어뜨렸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어. 닭은 잠시 자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문을 닫으며 말했음. 나는 너에게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어. 조용히 닫힌 문을 자미는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음.

그리고 닫힌 문에 등을 대고 선 닭은 나직이 긴 한숨 같은 입김을 뱉었음. 닭은 투구를 쓴 초창기에 일찌감치 자신에게 격기사들의 기어스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뭔가가 생겨난 걸 특유의 예민한 감각과 영민한 관찰력으로 알아챘고, 기사들이 자기 기어스에 대해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그 기묘한 규칙이 작동하는 한 자신은 계속해서 더욱 강해질 거란 것도 알았음. 하지만 그날 자미가 죽어가는 닭을 살리겠다고 뛰어들어 허락 없이 투구를 벗겨버리면서 사람들이 회백발 여자의 얼굴을 본 날, 그 규칙이 깨졌음. 닭이 익혀온 힘과 기술과 경험은 그대로지만 스승 없이도 실전을 통해

학습을 할 수 있었던 밑천의 하나인 경이적인 회복력이 사라진 것임. 투구를 쓴 동안 기사 사냥 등 이런저런 실전이 곧 최고의 훈련이 되었지만 동시에 몸 여기저기, 특히 뼈와 내장을 자주 다칠 수밖에 없었는데, 회복력이 사라진 지금 그게 복리를 쳐서 돌아와 전체적으로 몸이 약해졌음.

다른 형태로 그런 규칙을 개발해서 긴 시간 지키면 다시 회복력이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갖고 있긴 하지만, 더는 기사로 살 생각이 없고 기사의 싸움을 할 이유도 없기에 닭은 그런 걸 새로 개발할 생각이 없었고, 이제 몸은 견습 수준으로 느리게 회복되었음. 징크스라, 이름 잘 붙였네.

닭은 먼지투성이 망토를 벗어 이불처럼 두르며 뻐근하고 쑤시는 몸을 조잡한 침상 위에 뉘였음. 싸움은 없었음. 그냥 미친 사람처럼 잠도 안 자고 광활한 지역을 빠르게 이동해댄 것뿐이지만, 무척 피곤했음. 그대로 잠들려던 참에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음. 뭐 좀 먹어둬. 문앞에 둘게.

자미의 목소리였음. 닭은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짜증을 내며 겨우 몸을 일으켰음. 터덜터덜 걸어가 문을 여니 나무판이 뚜껑처럼 덮인 그릇과 그 위에 돌로 눌러놓은 여러 장의 성도가 놓여있었음. 옆쪽에서 자미가 문을 닫는 소리가 났음. 닭은 쯧 혀를 차고 따뜻한 그릇과 성도를 집어 방에 돌아갔음



7.

이후 한동안은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음. 자미는 틈만 나면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자기 오두막을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개조했고 닭은 자기 오두막에 틀어박혀 있다가 식량이 떨어질 때쯤이면 사냥을 하러 나갔음. 자미를 데리고 다시 그 산봉우리에 가진 않았음. 자미가 그것에 대해 묻자,

닭은 성도는 한달에 한 번 간격으로 시기를 정해 그리고 있다고 대답했음. 그러니까 닭은 이 일도 외부와 연결 없이 어떤 자기만의 목적을 갖고 혼자 진행하는 거였단 얘기임. 유성은 날을 정하고 떨어지지 않는데 산에 오르지 않는 동안 떨어진 것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보자, 닭은 황당한 소릴

들은 표정으로 자미를 쳐다보더니 하루에도 수십 수백개씩 떨어지는 게 유성인데 자신이 어떻게 그걸 모두 주우러 다니겠냐고 대꾸했음. 맞는 소리니까 자미도 더 할 말이 없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였음. 그래도 시간은 흘러 본격적인 유성우의 날이 왔음.

이제 동지가 가까운 시기였음. 연중 밤이 가장 긴 즈음이니 별도 유성도 더 오래도록 관찰할 수 있음.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음. 눈구름이 스멀스멀 모여들다니 며칠째 대기가 불안정하고 산봉우리까지 접근하기도 위험했음. 닭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쭉 쳐다보더니 후드를 푹 눌러쓰곤

론누를 꼬나잡고 혼자 산봉우리 방향으로 걸어갔음. 장작을 패면서 곁눈질로 닭을 살피던 자미는 즉시 도끼를 멈췄음. 어디 가는지 말해줄 거지? 닭은 자미를 등진 채 말했음. 산에. 자미는 도끼를 놓고 이제 제법 그럴듯해진 자기 오두막으로 향했음. 같이 가. 닭이 어깨너머를 돌아봤음. 넌 오지 마.

성도 그릴 거 아냐. 자미는 문을 열어놓고 들어가 물건을 뒤지면서 큰 소리로 대답했음. 알아. 구름 위에서 대기할 거지? 나도 보여줘. 닭은 허, 하고 하늘을 향해 헛웃음을 흘렸음. 괜찮겠어? 나 예전 같지 않은데. 자미는 추위에 단단히 대비한 모습으로 나왔음. 그러니까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닭은 자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음. 요즘엔 닭이 자미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는 때가 늘었고 자미는 이것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은 채 그냥 가슴 속에 묻어놓고 있었음. 곧 닭은 짧은 한숨을 뱉고 앞장섰음. 저 위에서 떨어져도 난 몰라. 자미는 흥 코웃음치는 것으로 답하고 닭을 뒤따라 걸었음.

한낮이었지만 날씨가 너무 험악했음. 폭설이 오락가락했고, 안개가 얼어붙은 얼음결정이 공기 중에 떠다니다 휘몰아칠 땐 드러난 피부가 수백만개의 작은 바늘로 베이는 듯했음. 새하얀 순백으로 변한 시야는 코앞도 볼 수 없는 새까만 밤과 다를 바 없었음. 중간부터 닭은 자미의 허리에 줄을 묶어

자신의 허리에 연결하고 눈을 파헤치며 앞서갔음. 닭이 길을 손금보듯 잘 아는 데다 워낙 감각이 예민해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에 덮인 위험천만한 크레바스도 어찌어찌 잘 피해갔지만 이런 식으론 오늘 안에 정상까지 오르지 못할 것임. 새삼 자미는 닭이 요소마다 베이스캠프를 세운 이유를 깨달았음

몇 번 위험한 상황을 넘긴 끝에 눈에 파묻힌 돌집 중 하나를 파내어 간신히 대피소에 들어온 둘은 불을 피워놓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음. 오늘은 어려울지도 몰라. 자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닭이 자미를 째려보았음. 나 혼자 왔으면 달랐을지도~ 근데 누가 고집을 부려서 말이지~

자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지만 나름 반박할 말은 있었음. 글쎄, 너 혼자 갔으면 대피소도 들르지 않고 무리하다가 위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 넌 신중하다가도 한번 작정하면.. 자미는 입을 다물었음. 한동안 돌집의 천장 틈으로 눈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와 불이 탁탁 튀는 소리만 났음

닭은 대답하지 않았음. 둘의 어깨와 몸이 닿은 데서 옷에 엉겨붙은 눈이 녹아 축축하게 배어들었고, 돌 틈으로 스미는 시린 한기를 피해 서로 더욱 몸을 바짝 붙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대륙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음. 한참 후 닭이 입을 열었음. 너는 왜 나에게 집착하는 거지?

내가 아니어도 네 힘이 될 수 있는 기사들은 있었다. 내가 없어도 네 주변에는 늘 사람이 있잖아. 왜 이런 데서 나 하나를 신경 쓰며 네 의무를 방기하는 거야. 착 가라앉은 음울한 목소리는 자미가 익숙한 새까만닭의 목소리가 아니었음. 자미는 비로소 회백발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었음

운석을 찾는 이유, 물어도 될까? 자미는 한참만에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음. 회백발 여자는 목걸이를 매만지면서 대꾸했음. 내가 먼저 물었어. 자미는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풀려 애쓰며 대답했음. 말했잖아. 내 '힘'을 다시 사용할 열쇠가 너한테 있다고. / 딱히 열심히 찾는 것 같진 않던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 나한테 열쇠가 있다는 소리는 대체 뭐냐? 누가 예언이라도 하든? / 그런 거 아냐. 내 기어스니까 내가 아는 거지. 설명하긴 어려워. 그냥.. '힘'을 생각하면 네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뿐이야. / 나한테 허락 받던 것 때문인가? 근데 넌 맘대로였잖아.

자미는 고개를 돌려 닭을 빤히 쳐다보았고, 그만큼 닭은 고개를 뒤로 젖혔음. 뭐. 왜. 뭐. / ...아냐. 그리고는 다시 돌집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음. 장작이 반쯤 다 타고서야 닭이 다시 입을 열었음. 마족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고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별똥별이 떨어진다는 미신을 믿어.

마족? 서대륙의 마족 말인가? / 응. 내가 알던 사람은 마족도 아니면서 그 미신을 좋아했어. 황당한 소리였지. 별은 하늘 저편의 아주 먼 공간에서 돌덩어리나 기체덩어리가 빛을 내는 거야. 게다가 죽은 사람이 별이 된다면 하늘에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개씩 새로운 별이 생겨나야 할걸.

그 말을 하는 닭의 낯에는 표정이 없었음. 자미의 눈은 닭의 주먹 속에 감춰진 목걸이로 향했음. 그리고 닭이 육안으로 보이는 별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게 했던 성도를 생각했음. 단 하룻밤이었지만, 그 밤 내내 그린 성도를 비교해 별들의 움직임을 그려보면서 그렇게 많은 별이 생겨나진 

않는 걸 확인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음. 자미가 금방 발견한 걸 닭이라고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음. 그럼에도 너는 별똥별을 찾아다니는군. 자미는 조용히 말했음. 회백발 여자의 낯은 한순간 한꺼번에 10년은 나이를 먹은 지친 모습이 됐음. 자미는 닭이 자신보다 연상인 걸 어느 때보다 실감했음

나는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아.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곤 해. 닭은 손에서 목걸이를 놓고 몸을 일으켰음. 수다는 다 떨었으니 이제 움직여야 한다고 행동으로 말하려는 듯이. 자미는 묵묵히 닭을 도와 불을 끄고 물자를 갈무리하고 다시 눈밭으로 나갔음.

닭이 모두 말한 것은 아니지만 기사 생활을 시작한 거의 처음부터 닭을 알아온 자미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별똥별을 쫓고 운석을 줍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음. 운석이 발견된 곳 부근을 돌며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지 미친듯이 수소문하고 찾아다니는 회백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음.

한두 건만이라도 그런 사례가 확인된다면, 닭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걸 본인도 알 텐데. 바로 곁에서 호흡을 섞으며 몸을 맞대고 있지만 마음은 아스라이 멀리 있다는 점에서 자미에게 닭은 별과 다르지 않았음. 마족의 미신을 인용한다면 닭은 살아서 죽은 사람일지도.

자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음.

 

 

 

8.

하늘을 온통 가리는 눈폭풍 때문에 시간이 가는 걸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밤은 왔고 산봉우리까지는 아직도 한참 멀었음. 눈에 젖은 외투가 얼어붙으면서 묶어놓은 소맷자락이 얼음덩어리가 되고 어깨 아래의 절단부까지 얼어붙는 감각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음

힘든 티를 내면 닭이 두고 갈 테니까. 기사라도 자연에 대적하는 건 한계가 있었고 자미는 평상시엔 약한 기사였음. 그래도 말석일지언정 기사는 기사. 자미는 젊은 기사의 체력과 근성으로 이를 악물고 죽어라 걸었음. 눈을 헤쳐 길을 내며 앞장선 닭은 이따금 헉헉대는 자미를 곁눈으로 살피면서

별 말 하지 않았음. 그게 닭 나름의 자미에 대한 존중이었고 자미는 그로부터 다시 기력을 쥐어짜낼 수 있었음. 어찌어찌 산봉우리 아래의 마지막 돌집에 도달하자 닭은 거기서 멈추고 날씨가 바뀔 때까지 머문다고 선언했음. 바람이 좋은 방향으로 거세니 구름이 곧 흩어지고 날씨가 바뀔 듯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돌집에 들어가 앉은 자미는 닭이 언 장작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곯아떨어졌음. 곳곳에 만든 돌집들은 원래 혼자 쓸 생각으로 작게 지어서 여기서도 둘은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아야 했음. 자미의 머리에 어깨를 내준 닭은 그 무게와 호흡을 느끼며 아주 느리게 허연 입김을 흘렸음.

당초 닭은 자신이 일군 공과 영광은 오롯이 자미에게 넘기거나 아무도 모르는 그늘 밑에 묻어두고, 그래도 자신을 한번은 떠올릴법한 이들에게는 투구를 쓴 기사 "새까만 닭"의 인상만 남겨놓은 채, 그 속에 든 회백발 여자는 과와 함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작정이었음.

그러나 죽음이 임박해 혼수상태로 의식을 잃었던 그때 사람부터 살리고 보겠다는 자미의 쓸데없는 참견으로 닭의 의사와 관계없이 투구가 벗겨지는 바람에 회백발 여자가 세상에 드러나버리면서 목적의 추구부터 자신의 최후에 이르기까지 닭이 짜놓은 계획은 마지막에서 삐끗하고 말았음. 

다행히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그나마 닭에게 조금씩 우호적인 기억이 있어서 공을 인정하는 건 물론 기사 사칭이 일으킬 파란을 걱정해 입을 다물어줬지만, 의식을 회복하고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닭은 바닥까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음. 그래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말없이 사라졌음.

솔직히 닭은 목적을 이루고 난 후에 자신이 살아있는 풍경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음. 삶은 자기혐오로 가득했고 자신의 이름으로는 미련도 남길 것도 없었으니까. 벗을 만나기 전처럼 그저 사람을 피해 텅 빈 황야를 떠돌다가, 불현듯 손에 쥔 론누의 날 위로 몸을 던져버릴까 충동이 들곤 했음

머리로는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벗이 언급했기 때문에 죽은 이의 재탄생을 기원하는 마족의 미신을 검증하듯 별똥별과 아이의 출생 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보기로 작정하면서 억지로나마 목숨을 연장할 이유를 찾긴 했지만, 그 우울한 생각은 그림자처럼 어디든 붙어다녔음. 그랬는데,

자미가 따라온 지난 몇주간은 그런 생각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음. 지금도 자미가 잘못될까봐 조심해서 산을 타고 있었으니까. 왜인지는 닭 자신이 선명하게 잘 알았음. 아니까, 오래 전 저녁놀 비치는 창가에서 아직 풋내기였던 앳된 자미의 뒷모습을 보며 이미 마음을 굳혔던 것이지만...

곤히 자는 자미를 깨우지 않으려 자미가 기댄 반대편의 손으로 까칠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회백발 여자는 다시금 마음을 굳혔음. 기사 담청색 기린은 새로운 시대의 어린 기사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야 함. 이런 곳에서 산송장 때문에 세월을 낭비해선 안 되었음. 그러니 이번 유성우가 끝나면 반드시.

몇 시간 후 자미는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잠에서 깼음.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자미는 불그름한 잉걸불빛을 머금고 히죽 호를 그리는 입매가 눈앞에 있는 걸 보고는 잠이 확 깨 몸을 젖히다 돌집 벽에 정수리를 부딪쳤음. 집 무너진다~ 놀리는 닭을 힘껏 째려보면서 자미는 달아오른 표정을 숨겼음

지금 시간이? / 두 시간 조금 지났어. 일어나라. 날씨가 견딜 만해졌다. 닭이 끙 소리를 내며 굳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자 자미의 가슴 속에서 다시금 죄책감이 스멀거렸음. 그렇지만 닭은 곧 체력방전 따위 모르던 예전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불을 끄곤 돌집 밖으로 자미를 몰아내다시피 재촉했고,

산소가 희박한 얼어붙은 공기에 노출되자마자 자미의 머릿속에서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사라졌음. 바람이 여전히 거칠었고 한밤중이라 시야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폭풍은 지나갔고 가벼워진 구름층도 더 높은 상공으로 올라가 닭의 말대로 날씨가 훨씬 견딜 만했음. 닭은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다가,

구름층의 높이와 두께를 가늠하더니 자미를 돌아보았음. 자 마지막 기회- / 빨리 던지기나 해. 자미는 툴툴거리며 허리에 묶인 밧줄의 매듭을 확인했음. 닭은 소리 없이 쓰게 웃고는 론누를 던졌음. 거꾸로 흐르는 유성처럼 날아간 론누가 경로를 틀어 주인에게 돌아오자 닭은 자미를 한 팔에 안고

뛰어내리듯 몸을 던졌음. 론누는 익숙하게 손바닥에 감겼고 자미는 이런 취급이 당연한 짐짝처럼 닭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채 닭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음. 그렇게 론누에 매달려 흩날리는 가는 눈발을 지나 구름층에 뛰어들고, 몇 분간 흙탕물을 헤엄치듯 구름 속을 헤며 솟구치고,

그리고는 갑자기 온갖 색조의 별이 가득한 찬란한 밤하늘이 활짝 열렸음. 유성우의 극대기는 지난 때였지만 아직도 누군가가 이따금 툭툭 뿌리듯이 길고 짧은 유성의 빛이 하늘 한 방향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그어지고 있었음. 발 밑은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못할 새까만 심연 같고

머리 위는 높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이 멀고 깊어 문득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이 까마득한 허공에서 고산병까진 아니더라도 고소공포증 비슷한 떨림을 느끼지 않을 인간은 없음. 인간은 본래 지상에 두 발을 붙이고 자신이 가장 잘난 척 머리를 쳐들며 살아온 생물이니까.

현기증을 느낀 자미는 본능적으로 닭에게 꼭 매달렸음. 닭이 약간 어색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음. 올라가서 앉자. 기다려야 하니까. 닭은 론누에 매달린 한 팔의 힘만으로 자신과 자미의 체중까지 끌어올렸음. 곧 둘은 허공에 수평으로 고정된 론누 위로 한 뼘을 두고 나란히, 어색하게 걸터앉았음

고도와 환경에 적응하면서 좀 진정된 자미는 머리 위에서 발 밑의 어딘가로 떨어지는 숱한 유성을 바라보며 말이 없는 닭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음. 기록해두지 않아도 돼? 회백발 여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음. 예쁘지? 없던 미신도 생길만해.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자미는 그냥 입을 다물었음

잠시 후 닭이 쯧 혀를 차곤 말을 이었음. 확률과 통계 문제야. / 뭐? 갑자기 무슨.. 아. / 알아들었네? 좋아. 닭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고 자미에겐 설명이 필요 없었음. 자미는 닭이 서대륙 마족의 미신을 들려준 때부터 세세한 부분에 의문을 품고 있었고 닭의 대답은 대답이 되었음.

마족의 미신은 별똥별을 아이의 탄생과 연결했음. 그런데 언제가 탄생으로 정의되는가? 아이가 모체로부터 분리된 시점? 잉태된 시점? 별똥별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으면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목격자가 없으면 그렇지 않게 되는가? 또한 그 아이는 어디서 태어나게 되나?

더군다나 별똥별은 낮에도 떨어지지만 태양 때문에 볼 수 없음. 운석은 별똥별이 떨어진 가장 명확한 증거지만, 별똥별은 대개 떨어지는 과정에서 모두 타버리고 그 중 지상까지 도달해 운석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몹시 희귀함. 그래서 밤하늘의 별똥별을 전수조사하는 건 불가능함.

그렇기에 닭은 한편으론 밤하늘의 특정한 구역에서 보이는 별의 수와 위치를 기록해 별이 실제로 증감하는지 확인하고, 한편으론 운석이 발견됨으로써 별똥별의 낙하 사실과 시점,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 경우를 표본으로 삼아 근방의 마을을 수색하는 방식으로 조사해온 모양이었음. 

미신은 안 믿는다며 처음부터 전제고 결론이고 부정한 주제, 지나치리만치 성실하게 조사하는 격이었음. 닭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회의와 과학적 상식의 승리일까, 아니면 오랜 미신의 전설 같은 부활일까? 닭의 이성적 행동의 근간을 이루는 비이성적 동기라면 자미가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명백했음

그렇더라도, 닭은 그냥 산봉우리 아래 그 마지막 거점에서 구름 위로 론누를 던져올리기만 해도 유성우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왜 굳이 악천후 속에서 짐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동행을 허락하고 하늘 위에도 데려온 것일까? 어쩐지 닭은 자미가 조금씩 선을 넘어 밀어붙이는 대로 밀려주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왜 자신은 별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이 아름답고 먹먹한 별의 바다 속에서 인생에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방식으로 우주를 목격하는 기회를 누리면서도 한뼘 떨어진 거리에 함께 있지만 그 이상 다가가지 않을 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가?

야, 저거. 갑자기 닭이 자신의 무기처럼 한점으로 집중되는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내며 어딘가를 가리켰음. 흠칫 정신이 든 자미는 닭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서 유독 이글거리는 빛을 뿜는 긴 꼬리를 끌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발견했음. 닭이 활기차게 벌떡 (론누 위에서?) 일어섰음. 꽉 잡아라!

아 제발. 자미가 입 속에서 중얼거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미의 몸은 기계적으로 잽싸게 일어서면서 하나 남은 팔을 닭의 허리에 둘렀고, 론누는 줄이 풀린 사냥개처럼 뛰쳐나갔음. 그 고도에서 유성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광기에 찬 속도로 쏘아진 론누는 그 자체로 떨어지는 별과 같았음. 

눈도 뜨기 힘든 매서운 바람, 시시각각 뒤집히는 고도와 풍경, 마침내 론누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꽂히듯 딱 멈춘 순간 자미는 닭의 등에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속에 든 것을 그대로 다 게워낼 뻔했음. 저기 가서 토해! 닭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뛰어내려 허공에 뜬 론누를 잡아채고는 그대로 달렸음.

드디어 땅을 딛은 자미는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헛구역질을 하다가 억지로 일어서서 닭이 사라진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쫓아갔음.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은 추락(자미는 절대 그걸 비행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임) 중에도 자미가 기사니까 지닌 동체시력은 우렁우렁한 굉음과 비산하는 흙먼지와

갑작스레 불길이 번진 숲, 그리고 숲 복판에 닭 정도로 강한 기사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마어마한 크레이터가 파인 걸 놓치지 않았음. 운석이 떨어진 것임. 다행히도 숲 한복판이라 사람이 상하진 않았을 것임. 유성이 떨어질 때부터 보고 하늘을 날아온 닭보다 먼저 올 사람도 없었고.

 

 

9.

엄청나군. 운석이 떨어질 때마다 이 정도로 지형이 뒤바뀌나? 사람이 사는 곳에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자미의 감탄을 들었으면서도 닭은 반응하지 않았음. 슬쩍 보니 닭은 많이 놀라고 당황한 것 같은 낯이었음. 닭도 사람이고 당연히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긴 했지만,

투구 너머로 어림짐작되는 기색이 아닌 생생한 민낯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 들었음. 자미가 묘한 낯으로 쳐다보자 닭은 문득 정색하면서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음. 보통은 이렇게까지 크지 않아. 커봐야 십수 미터가 쓸려나가는 정도지. / 큰 운석이 떨어진 건가? / 운석이 무거울수록,

빠를 수록 운석공도 커지긴 해. 이 정도로 지표면이 박살나려면 운석 크기가 10미터 이상이어야 할 텐데. 닭이 말하는 투를 보니 뭔가 이상했음. 자미가 재차 질문하려는데 닭이 기다리지 않고 먼저 구덩이 안쪽으로 뛰어내렸음. 자미는 한숨을 쉬고는 그 뒤를 따라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갔음.

구덩이의 중심에 먼저 도달한 닭은 몸을 굽힌 채 어딘가 성마른 태도로 바닥을 살피고 있었음. 주위를 둘러본 자미는 닭이 말한 것처럼 10미터가 넘는 크기의 바윗돌 같은 건 볼 수 없었음. 얼씨구. 닭이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거리며 내는 소리에 자미는 잰걸음으로 달려갔음.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엉거주춤 버티고 선 닭은 론누를 땅에 꽂고 두 손으로 주먹만한 공 같은 돌을 힘겹게 허리께쯤까지 들어올리고 있었음. 야, 너도 만져봐라. 이거 차갑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본 자미는 닭의 말대로 돌이 얼음처럼 차가운 걸 깨달았음. 주위에 물이나 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별똥별에 수반되는 마찰열과 운동에너지가 한순간에 식어버릴 수도 있는가?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음. 돌은 깨지지 않은 흑요석처럼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고 완벽한 구체였음. 그리고 그런 크기에서 상상되는 것과 달리 닭이 쩔쩔맬 정도로 무거워 보였음. 닭은 맨손으로 건장한 성인을

공중 높이 가볍게 집어던질 수 있는 기사임. 겨우 주먹만한 크기의 돌이 닭 정도의 기사가 힘겨워할 정도로 거대한 질량을 지닐 수도 있는가? 운석에 대해 잘 모르는 자미가 봐도 이상하고 수상한 물체였음. 안 되겠네 이거~ 닭은 일부러 경박하게 내뱉으며 운석을 떨어뜨리고 론누를 집어던졌음.

핑핑 꺾이며 하늘을 크게 돌아 돌아온 론누는 닭의 바로 앞에서 걸터앉기 좋은 높이에 멈춰섰음. 닭은 다시 두 손으로 운석을 집어들려 하다 당황했음. 운석이 꼼짝도 하지 않았음. 절씨구? 손을 놓은 닭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음. 그리곤 공중에 떠있는 론누와 운석을 번갈아봤음.

자미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쯧 혀를 차고 일어선 닭은 론누를 잡아 땅에 내팽개치고 다시 운석을 들어올렸음. 무게 때문에 끙끙거리긴 했어도 이번에는 아까처럼 들어올릴 수 있었음. 자미는 닭이 말하지 않아도 모자를 벗어 돌에 덮어씌우고 바닥에 나뒹구는 론누를 주워들었음.

습관적으로 새까만 닭이라고 입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호칭을 혀를 깨물다시피 해서 붙들곤 호칭이 생략된 말을 뱉었음. 너도 그걸 생각하고 있겠지? 닭은 낯을 찌푸리며 대답했음. 아무래도 그거지. 크기에 비해 말도 안 되게 무거운 구체를 두 팔로 품에 안아든 닭은 여러 번 깊은 숨을 뱉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천천히 단단한 걸음으로 흙과 잔돌이 굴러떨어지는 경사면을 걸어 올라갔음. 자미는 하나 남은 손으로 론누를 지팡이처럼 짚고는 상체와 팔을 잃은 어깨로 닭의 등을 받치며 밀었음. 닭이 표정을 읽기 어려운 그 복잡한 낯으로 어깨 너머를 돌아보자 자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음.

왜? 빨리 뜰수록 좋잖아. 닭은 이제 짜증과 미소가 뒤엉킨 낯이 되더니 허! 하고 탄성을 뱉었음. 그때부터는 순순히 자미의 부축을 받으면서 경사면을 끝까지 올라갔음. 나무가 일제히 쓰러지고 여기저기서 잔불이 타는 지대를 벗어나 한참을 뚜벅뚜벅 걷다 보니 어느덧 날이 밝았고

둘은 운석 충돌의 충격 범위를 벗어난 숲에 들어섰음. 숲은 닭이 오두막을 마련한 산맥과 달리 완만하고 낮은 평야에 위치했고 기온도 겨울치곤 온화해서 기사에겐 얇은 옷으로 가볍게 운동이라도 하고 싶어질만큼 기분 좋은 수준이었음. 얼마 안 가 숲속에서 사람의 발길로 생겨난 오솔길이 나타났고,

정오가 가까울 무렵엔 숲머리 너머로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음. 그쯤에서 둘은 길을 벗어나 언제 나타날지 모를 행인들의 이목이 닿지 않을 숲 가운데로 자리를 옮기고 잠시 휴식을 취했음. 자미가 두 사람의 물통을 수거해 물을 찾으러 간 동안, 닭은 운석(?)을 내려놓고 몸을 쉬면서 하늘 높이 띄운

론누로 주위를 감시할 겸 주변 지형을 파악했음. 그러면서 눈을 감고 이 다음부터 할 일들을 생각했음. 자미가 가득 채운 물통과 배는 차지 않지만 기운을 잠깐 북돋고 싶을 때 씹는 향긋한 상록수 잎을 조금 채집해 돌아왔을 때 닭은 나무등걸에 한가롭게 걸터앉아 한 발로 운석(?)을 굴리고 있었음.

이제 어쩔 거야? 자미가 물으면서 잎을 건네자 닭이 거절하면서 건성으로 대꾸했음. 난 기사 아닌데. / 이게 나린기라면 엉뚱한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별천지에 신고해야 해. / 그건 네 일이고. 나는 내 일을 할 거다. 자미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음. 알았어. 그럼 저 마을부터 시작하는 건가?

응. 성벽도 있고 생각보다 크던데. 거기서 닭은 입을 다물었음. 성벽을 두를 정도의 규모라면 저곳은 산골의 마을이 아니라 도시일 것임.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면 태어나는 아이도 많을 가능성이 높았음. 고개를 수그리고 다리 사이의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닭의 모습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작아 보였음. 자미는 묵묵히 기다렸음. 한참 후 고개를 든 닭은 씩 비틀린 미소를 지었음. 같이 갈까? 내가 어디다 숨길지 알고 싶잖아. 이번엔 자미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을 피했음. 점심은 오랜만에 식당에서 먹고 싶은걸. 밥 먹으면서 얘기해줘. 그래줄 거지?

닭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음. 뱃속이 까닭없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자미는 닭을 흘끔 쳐다봤음. 회백발 여자의 낯에는 자미가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음.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본 닭의 미소는 아까처럼 비틀린 형태였음. 좋아. 네가 사라. 기사님이 사는 밥 한번 얻어먹어 보자고.

자미는 닭의 발밑에 있는 반사광도 명암도 없는 이상한 검은 구체로 눈길을 떨어뜨렸음. 두 기사는 그 수상한 운석(?)이 매우 높은 확률로 나린기라고 판단했음. 이것이 실렸던 별똥별은 혜성인가 싶을 정도로 눈에 띄게 빛을 뿜었음. 닭 정도로 빠르진 않았어도 사람들은 운석이 떨어진 걸 알 것이며,

특히 유성우 시즌이니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운석사냥꾼 등이 벌써 몰려오고 있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음. 일단은 그 크레이터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봐야 했기에 닭이 이때까지 혼자 돌을 나르며 고생한 거지만, 마을이 코앞인 지금은 더이상 그 무거운 걸 끙끙대며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욕심 많은 멍청이들에게 시비가 걸릴 필요는 없었음. 닭이 나린기일지도 모를 돌을 어딘가에 숨긴 후 자기 볼일부터 처리하러 가는 것은 매우 논리적인 판단이었음. 하지만 자미가 기사인 이상, 자미에게는 나린기로 추정되는 이 물체를 안전하게 별천지로 넘길 의무가 있었음.

물론 자미에겐 혼자 저 돌을 니젤에 가져갈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진 닭을 짐꾼처럼 부리며 기사의 총본산인 그 땅에 끌고 가고 싶지도 않았음. 그렇다면 방법은 닭이 돌을 숨긴 장소를 자미가 기억한 다음 닭과 헤어져 혼자 수도에 돌아가 별천지에 보고해서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이었음.

그게 올바른 판단이란 걸 자미도 알고 닭도 알았음. 바로 그 지점이, 자미의 마음 속에서 닭이 발견한 돌보다도 무거운 돌덩어리가 되어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음. 자미는 자신이 이번에 떠나면 닭을 정말로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음. 명확한 이유는 없고 별다른 근거도 없지만,

어제 새벽 오두막을 떠나 산을 오르기 시작한 때부터 구름 위에서 함께 유성우를 보던 순간조차 닭에게서 쭉 느껴지던 어떤 거리감이, 그리고 방금 한순간 눈의 착각이었나 싶었던 회백발 여자의 그 미소가, 자꾸만 뱃속을 뒤집고 옥죄었음. 자미가 '힘'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닭이 돕는 것?

자미가 기사로서 발휘하는 진짜 힘은 기어스에서 비롯된 그런 이상한 현상이 아님. 그 '힘'을 끝내 사용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중앙에선 한 팔이 없는 자미의 사직서를 반려한 채 계속 황궁에 붙들어놓고 기사와 관련된 중대한 임무들을 진두지휘하도록 맡길 것임. 그러니 그걸 돕겠다는 약속 같은 걸

한 적 없고 그저 집을 지어 머무는 것만 허락했던 닭은 아무런 의무나 부채감 없이 언제든 가볍게 자미를 떠날 수 있었음. 닭이 그에게 바란 것도 결국엔 기사로서의 역할이니까. 그래서 자미는 혀끝까지 치달은 말이 있는데도 입을 뗄 수 없었음. 내가 수도에서 돌아왔을 때 다시 나를 받아주겠냐고,

나는 내 오두막을 좀 더 집답게 고치려고 계획한 게 있으며 어서 돌아가 그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해야는데. 그렇지만 자미는 그러지 못했음. 그래. 집주인에게 신세를 졌으니 가끔은 갚아야겠지. 그렇게 겁쟁이처럼 머쓱하게 마른침을 삼키고서 약한 미소를 지으며 마음이 반만 든 말을 뱉을 뿐이었음

자미의 대답을 듣자마자 닭은 한 번도 피로를 느낀 적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몸을 일으켰음. 다녀온다. 그리곤 한숨을 푹 쉬더니 세상의 짐 같은 돌덩어리를 들어올려 어깨에 지고 숲 깊숙한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음. 곧 닭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머리 위 저 높은 하늘에는 론누가 느긋하게 떠있었고

자미는 닭이 자신을 지켜볼거란 걸 알면서도 하나 남은 손으로 모자가 없는 머리를 감싸쥔 채 후회하는 바보의 모습을 숨기지 않았음. 자미의 삽질은 오래 가지 못했음.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마을 쪽에서부터 점차 가까워지더니 용병처럼 잘 무장한 사람 두 명이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왔음.

그들도 자미를 보고 놀랐고 자미도 그들을 보고 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 속에 간수했음. 어, 안녕하쇼.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소. 그럼 이만. 두 사람은 자미를 지나쳐 숲 안쪽으로 향했음. 닭이 사라진 그 방향이었음. 자미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음. 도와주십시오! 여기가 어딥니까? 어디로 가야 하죠?

저 좀 숲 밖으로 데려가주세요! 두 사람은 자미를 흘끔 돌아보며 입을 꾹 다문 낯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음. 팔 하나가 없고 키도 평균보다 조금 작은 젊은 남자가 오랫동안 산야를 헤맨 너저분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하니 누가 봐도 조난자 같긴 했음. 그렇지만 그들의 우선순위가

조난자 구출은 아닌게 명백했음. 한 명이 도시 쪽 방향을 대충 가리켰음. 저쪽으로 쭉 가쇼. 바로 코앞이니까 알아서 하고. 그리곤 서둘러 닭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음. 자미는 그들이 언제든 무기를 뽑을 수 있게 꼬나쥔 채 사냥꾼처럼 흔적을 살피며 이동하는 걸 놓치지 않았음.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본 자미는 론누가 사라진 걸 깨달았음. 저들이 노리는 것은 값 나가는 운석일까, 아니면 설마... 뭐가 됐든 닭은 자미가 소란을 피워 잠깐이나마 저들의 발목을 잡는 행동을 하는 걸 론누로 봤을 것임. 기사급은 아닌 자들이니 닭 혼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닐 거라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 확신처럼 온몸에 들러붙었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회백발 여자에게서 투구를 쓴 기사를 떠올리지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무를 익혔다면 그가 기사급의 강자라는 건 알 수 있음. 그를 상대하면서 견습급에 불과한 용병 둘만 나서진 않을 거란 이야기임

판단은 빨랐음. 자미는 도시 쪽으로 달려갔음. 저들이 단순히 운석을 탐내는 도둑이면 닭은 호된 교훈을 주고 마지막 식사를 하러 올 것이며, 다른 이유로 자신을 노리는 거라면 나머지 무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도시에 들를 것임. 자미가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닭이 이대로 사라질 가능성도 있지만,

저들과 먼저 마주친 자미가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행동을 보였으니 상황은 파악했고 스스로 닭에게 휘말리러 달려들 거란 의사도 전달됐을 것임. 벌써 닭이 비난하는 소리로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었음. 아무래도 좋았음. 저들로 인해 닭이 반드시 자미를 찾아올 거란 것, 그것이 자미에겐 가장 중요했음

 

 

 

10.

과거에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날 그 사건 이후로 자미는 기사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젊은 영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음. 근 1년간은 어느 도시에서도 성문에서 본인확인에 10초 이상 걸리지 않을 정도였음. 그래도 일반인들은 벽보의 사진을 통해 자미의 얼굴을

대강 익힌 정도라 니젤을 벗어나면 실물이 눈앞을 지나가도 본인인 걸 눈치채는 경우가 흔하진 않았음. 그 사건 후로 자미는 치료와 재활 아니면 책상업무에 전념하느라 밖에서 이름과 사진이 나붙을 정도의 사건에 직접 엮이지도 않았기에 자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상당히 잠잠해지기도 했고.

그리하여 간단히 성문을 통과한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비밀임무라 둘러대며 자신이 나타난 걸 숨겨달라는 당부도 한) 자미는 낡은 외투에 달린 후드를 모자 대신 덮어쓴 후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인파에 섞였음. 사람이라곤 닭 밖에 없는 적막한 산속에 있다가 달포만에 사람이 가득한 거리에 나오니

은근히 정신이 사납고 살짝 어질어질해지기까지 했음. 자미가 기사 생활을 한 세월 동안 지도에서만 한두 번 이름을 본 작은 도시인데, 유성우 철이었기 때문인지 눈에 보이는 도시의 건물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 사람들의 상당수가 긴 여행 중인 외지인 같았음.

하긴 닭이 자리잡은 산은 하늘과의 거리만 따지면 제일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유성우 하나를 보겠다고 세계의 지붕 같은 험준한 첩첩산중에 들어가진 않음. 지상의 불빛만 차단된다면 근처에 산이나 높은 건물이 적어 지평선까지 시야가 확보되는 평지야말로 맨눈으로 유성우를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임

실제로 외지인 같은 차림을 한 사람들은 도시의 주민들과 구분이 될 정도로 들뜬 채 어디서나 간밤의 유성우와 근처에 떨어졌을 운석 얘기를 하고 있었음. 다만 개중에 단순 관광객이나 학자만이 아니라 못해도 견습에 준하는 정도는 되어 보이는 무력을 지닌 자들이 다수 눈에 띈다는 게 신경 쓰였음.

대개는 운석사냥꾼이나 의뢰를 받은 모험가, 부유한 관광객의 호위 같은 자들인 듯했는데, 자미의 주의를 끈 건 그런 일반인 동행이 없거나 유성우 이야기에 심드렁한 무장한 자들도 몇 명은 눈에 띄는 것이었음. 물론 그들은 주위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흘리고 다니진 않았지만,

사상 최강의 기사와 일상적으로 업무 이야기를 하고 견습 아이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던 자미에겐 몸놀림과 눈짓 같은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일반인들 사이에서 칼밥을 먹고 사는 자들을 골라낼 수 있었음. 그럼 저들은 왜 전투와 거리가 먼 이곳에 있는가? 왜 저들끼리 두셋씩 무리지어 다니는가?

도시경비대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데도 왜 성문부터 대로변, 시장, 관공서, 여관 거리에 이르기까지 순찰하듯 돌아다니는가?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미는 그런 '용병' 중 풋내기 같은 자 하나를 점찍어 멀찍이서 감시하다가 그가 활동을 마치고 여관거리로 향하자 뒤쫓았음.

자미는 눈 덮인 험한 산에 다녀온 티가 나는 비무장의 두툼한 옷차림에 오늘 면도를 못 한 데다 도중에 노점에서 산 음식을 봉투 가득 안고 어깨를 움츠렸기에, 대충 보면 잠깐 마을에 내려왔다가 주눅이 든 산사람 같았음. 외지인들 중 적잖은 수가 비슷한 행색이라 누구도 자미를 신경 쓰지 않았음.

그렇게 용병을 따라 들어간 여관은 주머니가 가벼운 외지인들로 북적거렸음. 남은 방이 한두 개라 선택지가 거의 없을 정도. 자미는 망설이다 그 중에서 가장 방값이 쌌던 2층의 1인실을 빌리고 그 방으로 갔음. 음식 봉투를 내려놓고 잠시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뻗고 있자니 절단부가 시큰거렸음.

감각이 어느 정도 마비되는 추운 곳에 쭉 있다가 오랜만에 따뜻한 실내에 들어온 탓일까. 마지막으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았던 게 그저께인 데다 어제는 동상에 걸리기 직전까지 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음. 그렇지만 지금은 이 낫지 않을 상처를 돌볼 때가 아니었음.

자미는 잠시 쉬며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음. 여느 여관이 그렇듯 이곳도 1층은 식당과 술집을 겸했음. 마침 이른 저녁무렵이라 식사하러 온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자미는 별 수 없이 모두의 눈에 띄는 바 앞의 스툴에 앉아야 했음. 하나 둘 복귀한 용병들은 구석 자리의

식탁 둘을 차지하고 이야기하며 식사 중이었음. 거기 모인 자는 다섯 정도. 그 중 넷은 견습 수준의 용병이었고 하나는 그냥 무술을 조금 익힌 일반인 같았음. 주변은 시끄럽고 그들의 대화는 조용했기에 자미는 방금 나온 그릇을 께작이며 기사의 예민한 감각과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려야 했음.

그리고 자미의 귀까지 드문드문 끊기며 건너온 단어들은 심상치 않았음. 사냥꾼, 마법, 운석, 늦어지고 있는 동료 걱정, 그리고 그 산맥의 이름. '기린'처럼 들리는 단어에 이르자 자미는 지금까지 그들을 향해 집중했던 감각을 반대로 뒤집어 그들의 감각이 자신을 향하진 않는지 조심스레 탐지했음.

자미는 코끼리 등 몇몇 기사에게만 알리고 닭을 찾아 조용히 수도를 떠났더랬음. 닭과 그 산에서 지내는 동안 오두막은커녕 그 둘이 돌아다니는 영역 근처에서라도 사람의 흔적을 본 적은 없었음, 애초에 사람이 찾지 않는 험준한 산중에 위치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자미가 있는 게 알려진 걸까?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기사 몇과 금발의 젊은 모험가 하나를 제외하면 닭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음. 그 밖의 사람들이 회백발 여자를 보면서 투구를 쓴 기사를 떠올려선 안 되었음. 하지만 적어도 기사들에겐 새까만 닭과 담청색 기린이 종종 한쌍으로 묶여 다니는 게 평범한 풍경이었고,

기사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별천지 직원들과 니젤의 주민들도 그 모습을 드물지 않게 목격했음. 설마 본의 아니게 영웅으로 알려진 자신 때문에 지금 함께 있는 회백발 여자가 주목을 끌었고 누군가는 그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새까만 닭일 가능성을 떠올린 것은 아닐까? 자미는 식은땀이 돋았음.

그때 용병들이 식사를 마쳤음. 일반인인 자가 위층에 올라가더니 잠시 후 천으로 둘둘 만 긴 칼 같은 것을 매고 내려왔음. 일반인 일행이 합류하자 용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몰려나갔음. 두 사람이 놈에게 당했다면 그것도 갚아줄 뿐이야. 누군가가 그렇게 짓씹듯이 내뱉으면서.

한창 저녁식사가 몰리는 시간대라 식당이 가장 북적일 때 일어섰기에 용병들은 의자 사이로 옆걸음쳐 빠져나가거나 뜨거운 그릇을 쟁반 가득 든 종업원에게 길을 비켜주며 굼뜨게 이동했음. 자연히 그들을 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여럿 있었기에 자미도 무심히 구경하는 척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음.

딱히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지만 그들 대부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음. 문제는 자미에겐 저들이 정말로 초면이란 것임. 대체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지 생각하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눈을 치뜨니 무기를 등에 맨 일반인이 자미를 쳐다보고 있었음. 의아해하는 시선은 그쪽에서도

자미를 어디서 본 적 있던가 생각을 하는 눈치였음. 자미는 태연히 눈을 맞추며 깜빡였고 그자는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일행과 함께 여관을 떠났음. 자미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그릇을 내놓고 서둘러 2층의 방에 뛰어올라갔음. 창문으로 엿보니 용병들은 이미 대로 끝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음

자정이 가까울 무렵 가볍게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자미가 대꾸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닭이 들어왔음. 재빨리 닭의 모습을 훑어본 자미는 닭이 전혀 상처입지 않은 듯하자 아주 조금 불안을 내려놓았음.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선 닭은 자미를 놀리지도 비웃지도 않았음. 너 걔들 만났구나.

자미는 긴장했음. 설마- / 안 싸웠어~ 내가 애도 아니고. 그냥 스토커랄지. 내가 좀 인기가 있었잖아? / 그자들은 '기사사냥꾼'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가득한 유족이야. 자미는 닭을 똑바로 쳐다보았음. 회백발 여자는 눈을 피하듯 발치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음. 그거야 걔들 마음이지.

의자가 쓰러지든말든 벌떡 일어선 자미는 한달음에 회백발 여자 앞에 서서 하나 남은 손으로 어꺠를 꽉 붙들었음.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이런 오해가 너를 위험에 빠뜨리니까...! / 그럼 유족 앞에서 네 형제자매를 살해해야 기사의 몰락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었다고 내가 변명해야 했을까?

자미는 말문이 턱 막혔음. 회백발 여자는 코앞까지 다가온 자미를 여전히 바라보지 않았음. 어떤 '진실'은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말해봤자 의미 없고 도리어 거센 반발을 일으킬 뿐임. 그런데 상대가 받아들이려면 그 '진실'을 알아야 함. 이것은 타인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임.

누군가는 명예롭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던 그 기사들이 저지른 것을 바로잡아야 했지만 자신이 영웅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기사들 사이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닭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음. 격기사가 아님에도 격기사를 위해, 격기사였던 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닭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가는 복수자가 등장하는 것도 당연히 일어나게 될 일로 받아들인지 오래였음. 닭은 어깨의 근육을 뚫고 뼈까지 파고들 것처럼 쥐어드는 자미의 손가락을 간단히 떼어냈음. 근데 왜 아직도 여기 있냐? 안 갈 거야? 별천지.

나린기는? / 잘 숨겼지. 도시 동쪽의 호수로 가. / 그 둘은- / 지금쯤 웬 사막에서 내 욕 하고 있을 듯. / 같이 가자. 잠시 몸을 숨겨. / 싫어. / 죽을 작정이냐? / 글쎄~? 자미는 충혈된 눈으로 회백발 여자를 노려봤음. 회백발 여자는 담담했음. 이것은 새까만 닭이 아닌 회백발 여자의 의지였음.

자미는 자신도 모르게 닭의 이름을 부르려다, 그것이 회백발 여자의 이름이 아니란 걸 떠올리며 혀를 깨물다시피 이를 악물었음. 회백발 여자는 한 손을 들어 자미의 소매가 텅 빈 쪽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쥐었음. 난 말이지, 너와 함께 쫓은 별똥별이 나린기인 걸 확인한 순간 이게 순리구나 싶었어.

담청색 기린, 니젤로 가라. 나는 오래 전에 내 할 일을 다했어. 너도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길 바라. 회백발 여자의 이마가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자미의 이마에 툭 닿았음. 자미는 속삭였음. 넌 지금도 기사를 싫어해? / 응. / 그 중에서 가장 싫은 기사는 나고? / 응.

그 말을 하면서 회백발 여자는 자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음.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그 투명한 눈에 붙들린 채 자미는 손을 더듬듯이 뻗어 회백발 여자의 손을 잡았음. 회백발 여자의 눈을 피할 수 없었던 자미는 자신의 눈을 감았음. 

이마와 볼을 간질이던 머리칼이 사라진 느낌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자미는 소리 없이 닫힌 문 앞에 홀로 서 있었음. 망연히 돌아섰다가 바닥에 쓰러진 의자를 발견하고 기계적으로 일으켜세운 자미는 문득 몇 시간 전 자신이 탁자 위에 놓아둔 불룩한 종이봉투를 깨달았음.

추적자가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식당을 피할 닭에게 주려고 노점에서 산 찐빵과 구운 알감자는 차갑게 식어빠진지 오래였음. 내가 사준 밥 먹고 싶다면서. 자미는 중얼거리면서 아직도 회백발 여자의 체온과 숨결과 촉감이 느껴지는 것 같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음. 이마, 눈, 코, 입.

회백발 여자가 머뭇거리다 그 손을 맞잡은 순간, 낙뢰가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관통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자미의 마음 속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떠돌았던 무언가가 명쾌한 확신으로 바뀌었음. 손바닥이 턱을 지나 가슴 앞으로 떨어지고, 주먹을 쥐었음. 자미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석양처럼 빛났음.

 

 

11.

닭은 즉시 니젤로 돌아갈 것을 명했지만, 자미는 그 도시에서 고집스럽게 며칠을 더 머물렀음. 극대기가 지났기에 매일 밤 떨어지는 유성의 양이 확연이 줄어들었고, 그 해의 유성우 철은 그렇게 끝났음. 딱히 볼 만한 건 없는 지역이라 외지인들은 들어오던 때처럼 나갈 때도 빠르게 우르르 흩어졌음.

그 사이 어느 운 좋은 자가 숲을 다 날려버린 거대한 운석공에서 모래알만한 운철 몇 조각을 주워 마법사들과 마스터피스 만드는 대장간에서 앞다둬 가격을 높여 부르며 줄을 섰다는 얘기도 있고, 좀 더 먼 황야 쪽에서 운철은 아니었지만 작은 운석을 주운 사람이 있다는 애기도 있었음. 

이전까진 의좋았던 동업자들이 우연히 커다란 운철을 줍고 칼부림이 났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었음. 그렇지만 어디서도 나린기 같은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음.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녹색 돌조각 같은 목걸이와 긴 창을 지닌 여자나 그 여자를 추적하는 무리에 대한 소문은 물론 어디에도 없었음.

하다못해 자미가 매일같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대놓고 얼굴을 비추는데 동경의 눈으로 볼지언정 자미의 행적과 목적에 관심갖는 사람조차 없었음. 그 용병들이 복수를 꾀하는 것 치고 무도한 사람들 같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혹시 자미를 인질로 삼을까 염려한 닭이 그들을 꼬리에 단 채

한참 전에 사람이 없는 어딘가로 멀찍이 떠나버린 것일까? 일주일째 되던 날 자미는 터벅이는 걸음으로 성문을 벗어나 도시 동쪽의 호수로 향했음. 작은 마을 정도 크기에 묘하게도 둥그런 형태, 호수를 둘러싸고 한 방향으로 튀며 넘치는 물방울 같이 형성된 야트막한 산세를 보니 그냥 호수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 생성된 거대한 운석공인 모양이었음. 지형을 본 것만으로 자미는 닭이 어디에 어떻게 나린기를 숨겼을지 알 것 같았음. 물속은 부력이 작동하는 공간임. 지상에선 닭이라도 그 지나치게 무겁고 고집 센 나린기를 들고 이동할 때 끙끙거려야 했지만, 그걸 짊어진 채 물속에 걸어들어간다면

몸은 가라앉아도 나린기의 무게는 오히려 어느 정도 덜 수 있을 것임. 물밑을 걷는다는 발상, 기사만이 가능한 힘과 폐활량, 시야가 나쁜 물속에서도 패닉에 빠지지 않는 배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일반인들은 알아도 따라할 수 없지만, 별천지에선 도와줄 기사들을 간단히 골라잡을 수 있을 것임

그리고 닭은 자미라면 당연히 이걸 알아낼 거라 신뢰했음.
한숨을 쉰 자미는 호수를 내려다보던 언덕에서 발길을 돌려 도시로 돌아가는 방향을 가늠했음. 언덕을 다 내려왔을 때, 기다린 것처럼 나무 뒤에서 꾀죄죄한 조난자 꼴을 한 사람 둘이 나타났음. 여. 마을 가는 길은 잘 찾았수? 기사 양반.

자미는 지금은 '힘'을 발동할 수 없어도 습관적으로 주머니 속에 꽂아둔 손을 슬그머니 주먹쥐었음. 자미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은 일주일 전 숲에서 나린기를 숨기러 가던 닭을 뒤쫓다가 자미와 마주친 자들이었음. 이들은 자미가 여관에서 본 기사사냥꾼을 쫓는 복수자들의 일행이었음.

자미는 닭이 이들을 사막 어딘가에 버리고 왔다고 했던 말을 간신히 떠올렸음. 그때 그분들이군요. 덕분에 길을 찾았습니다만.. 무슨 일이죠? 자미는 차분한데 쳐다보는 두 용병의 눈빛이 영 심상치 않았음. 숲속에서 자미에게 길을 알려줬던 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눈높이로 들어보였음.

끈이 달려있지 않은 광택 없는 녹색의 돌조각 같은 그것을 본 순간 자미는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바뀌었다가 아차 했음. 자미의 반응을 본 용병들은 엷은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음. 역시 이걸 알아보시네요. 담청색 기린님. 자미의 몸에 직접 손을 대거나 대놓고 협박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전달하려는 바는 명백했음. 겨우 견습 수준인 용병 몇이 뭉쳐봤자 그 닭이 패하는 그림 같은 건 자미의 머릿속에서 전혀 그려지지 않았음. 하지만 저 목걸이를 놓칠 정도로 어떤 예기치 못할 사태가 멀어진 건 확실했음. 아마도 이들은 닭을 그 정도로 몰아붙이고도 놓쳤기에 수색하다가

자미가 아직까지 이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걸 알게 되어 쫓아온 것 같았음. 자미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포착하는 순간이었음. 뭘 원하지? 자미도 공손한 태도를 버리고 본래의 성격을 드러냈음. 용병들은 긴장했음. 워워, 기린님. 우린 기사사냥꾼한테 핏값을 받아낼 권리가 있거든요

기사 새까만 닭은 죽었다. 1년도 더 된 일이야. / 그럼 이 목걸이의 주인은 누구죠? 유족이라도 된답니까? 아무도 그자의 얼굴을 몰라요. 투구만 벗으면 죄 없는 딴 사람인 척 잘 살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새 젊은 기사 애인을 사귀었을지도. 그 말을 하면서 자미를 노려보는 눈들은

극악무도한 살인마의 탈옥을 돕는 정신 나간 공범이라도 보듯 혐오와 경멸을 숨기지 않고 있었음. 자미는 다시 한번 천천히, 또박또박 물었음.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하지? / 목격자가 되어주십쇼.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그냥 가만히 계시면 기린님의 안전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 목격자? 무엇을?

자미가 캐물었지만 용병들은 더는 말을, 혹은 그들의 정보와 꿍꿍이를 넘기지 않겠다는 듯 얌전히 따라오기나 하라는 태도를 취했고 자미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음. 두 용병은 양옆에서 자미를 포위하고 호수를 둘러싼 숲 깊숙한 곳으로 향했음.

그 길 내내 자미는 용병들의 손에 들어간 목걸이를 생각했음. 현재 확실한 정보는 닭이 최소한 한번은 공격당했지만 빠져나가 지금까지 몸을 잘 숨기고 있다는 것. 닭이 그 괴물 같던 회복력을 상실해 이제는 견습 수준에 불과한 느린 속도로 낫는다는 사실이 머릿속 생각들을 헝클어버리는 걸

어떻게든 차단하려 애쓰면서 자미는 다시 목걸이에 집중했음. 복수자들은 누군가의 유족이기에 남겨진 자가 유품에 갖는 애틋함을 알았음.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새까만 닭의 수수한 목걸이를 눈여겨볼 줄 아는 자들이었음. 장례를 치르지 않을 정도로 죽음이 일상적인 기사들은

일상이 유품과 남겨진 자들로 둘러싸여 있고 스스로도 그 일부이기에 도리어 타인이 지닌 유품에 관심을 갖지 않았음. 그래서 닭을 늘 유심히 관찰하던 자미 정도가 아니고선 닭의 목걸이를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음. 일반인과 기사는 이런 사소한 태도에서도 상식이 어긋나있었음..

중요한 건 닭이 자기 뼈를 내줄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을 유품을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되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것임. 복수자들은 목걸이의 가치를 아니 이 돌조각 하나로 닭을 사지에 불러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음. 그럼에도 목걸이가 아니라 자미를 이용하려는 것이고.

복수자들이 기사라도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위험한 모종의 함정을 준비한 것인가? 혹시 닭이 심한 부상을 당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상태인 것은? 애초에 이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자미는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들려 하는 것을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생각을, 또 생각을 했음...

그날 밤 반쯤 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음. 닭은 누워있던 지붕 위에서 고개만 조금 돌려 우울한 눈으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음. 바늘을 숨기려면 짚더미에,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이 많은 곳에 보내면 됨. 복수자들이 엉뚱한 숲과 산을 뒤지는 동안 닭은 도시로 돌아와 숨죽이고 있었음.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음. 복수자들에게 당한 상처에서 며칠째 피가 그치지 않았으니까. 예전 같으면 하루이틀쯤 푹 자는 것으로 벌써 살이 차오르며 상처가 어느 정도 막혔을 텐데, 지금은 자신이 기사니까 즉사하지 않았을 뿐 숨을 쉴 때마다 살아있는 대가로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했음.

닭이 알고 자미가 알고 세간의 상식이 알듯, 보통은 견습 10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기사 1명을 잡을 수 없음. 닭은 복수자들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니젤 가는 길의 반대 방향으로 유유히 떠났더랬고. 그런데 며칠간의 빙글빙글 도는 술래잡기 후, 용병들은 결심한 듯 큰 소리로 자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닭이 지금 나오지 않으면 지금 그 도시에 있는 자미를 끌고 와 우리의 고통을 너도 눈앞에서 겪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허공에 대고 협박을 떠든 후 걸음을 돌려 도시로 향했음. 물론 숨어서 듣던 닭도 자신이 니젤로 가라고 말했는데도 남의 개인적인 일에 부득불 끼어들겠다고 고집부리며

자미가 그 도시에서 기다리는 걸 알고 있었음. 자미를 아는 닭은 그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음. 아무리 그래도 기사사냥꾼 잡겠다고 나온 복수자들이 사회적 자살을 할 생각이 아니고선 자기들을 정당화할 명분-명예와 정의-을 제 손으로 박살내버릴 짓을 하진 않을 터라,

자미를 이용하려 들 순 있어도 정말로 해치진 않을 거란 말임. 그래서 닭은 처음엔 용병들의 협박을 코웃음치며 무시했지만, 용병들의 아무말이 점차 자미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닭이 기사 사냥을 비롯한 여러 악행(?)을 저질러온 거란 식으로 사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왜곡된 내용이 되고

닭이 스스로 심판받으러 나오지 않으면 자기들이 자미를 그 거짓된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식의 말이 나오자 짜증과 더불어 특유의 호기심이 솟고 말았음. 저들은 닭의 행보를 지나치게 상세히 알았고, 자미가 새 시대의 기사들을 이끄는 기수가 된 데엔 닭의 공헌이 일부 있다는 것도 알았음.

닭은 자신이 사냥한 기사의 유족이 복수하러 올 때 반격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죽어줄 생각도 없었음. 혼자라면 남은 생 내내 잘 도망다니며 숨어있을 자신도 있었고. 하지만 자미가 휘말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짐. 자미는 새로운 기사의 시대가 안착하도록 길을 닦는 자가 되어야 했음.

500년에 걸쳐 내부에서부터 비틀어진 기사들의 새까만 업보에 흠뻑 빠진 자신과 더는 얽혀선 안 되었음. 자미와 둘이서 사람 없는 산과 황야를 떠돌고 이따금 별똥별을 쫓으며 나이를 먹어가는 삶은 어떨지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말을 걸듯이 목걸이를 한번 쥐어본 후 닭은 모습을 드러냈음

저들이 뭘 근거로 어떤 사고를 거쳐 무엇을 달성하려고 자미가 지닌 정당성을 공격하는지 알아내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중,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뭔가 메마르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그리고는, 갑자기 몸이 베여있었음. 휘청거리면서 닭은 푸르스름한 빛조각이 선형으로 흩어지는 걸 봤음.

닭의 유난히 뛰어난 시각은 빛의 창이 날아온 등 뒤의 수백미터 밖 언덕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피를 쏟으며 나자빠지는 걸 포착했음. 동료 용병들과 발맞춰 달리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하던 일반인이었음. 그가 지닌 작대기 같은 물건, 마법사들의 짧은 지팡이를 노인이 짚는 크기로

확대한 듯한 그것의 끄트머리에서 방금 푸르스름한 빛의 창이 발사됐고, 닭이 보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관통은 면했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해 옆구리에서 가슴께까지 크게 베인 후, 무기가 폭발해 일반인도 다친 거였음. 그것을 거대한 죽음 그 자체였던 마도병기와 연결하는 건 어렵지 않았음

목걸이가 사라진 걸 깨달은 건 남은 힘을 쥐어짜내 도망친 끝에 도시의 성벽을 몰래 넘어가던 때였음...
...얼어붙을 것 같은 찬 비를 온몸에 고스란히 맞으면서 닭은 목걸이가 없는 가슴 앞의 허공을 움켜쥐었음. 이건 이제 단순히 자신을 향한 눈 먼 원한을 적당히 상대해주는 문제가 아니었음.

이것은 기사와 마법사가 즉시 알아야 할 문제였음. 그리고 이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채 저 초인적인 기사들은 물론 서로에 대해서도 가공할 폭력을 휘두르게 될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대한 예고였음. 닭은 자미의 삶에서 영원히 떠나야 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자미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야만 했음

문제는 자미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였음. 닭은 가슴 위에 얹은 주먹의 텅 빈 허전함을 느끼면서 다른 손으로는 몸의 상처를 촉진했음. 피는 이제야 겨우 멈출락말락 했고 싸우는 건 무리였음. 하지만 다리를 당한 건 아니지 않은가? 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음. 결심을 했다면, 남은 것은 행동이었음.

 

 

 

12.

기사사냥꾼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이 복수자들은 자미를 데리고 그 도시로 돌아갔음. 아무리 기사사냥꾼이라도 일반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이는 바보짓은 안 할 테니 주민들을 방패로 삼으려는 것도 있었고, 자미는 모르는 이유로 크게 다친 동료를 치료하기 위해서도

도시로 가야 했음. 두 용병이 자미를 데려가는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복수자들이 두셋씩 합류했고 7명에서 더는 늘지 않았음. 기사사냥꾼한테 사냥당한 기사의 수는 두 자릿수가 넘는다고들 하는 소문을 떠올리면서 자미는 이 정도 밖에(?) 안 되어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떨지 가늠하기 어려웠음.

닭의 기사 사냥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누구를 왜 사냥했으며 그 수가 몇이나 되는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소문과 좀 달랐으니까. 닭이 마지막까지도 그것에 대해 변명하진 않은 탓에 자미가 아는 것도 여기저기서 정황적인 증거와 증언을 그러모아 겨우 대략적인 얼개만 짜맞춘 정도였음.

닭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자미가 그 정도인데 증오하는 자들은 어떻겠음? 그나저나 저 일반인은 어쩌다 저렇게 지근거리에서 뭐가 폭발한 것처럼 다친 것인지? 닭에겐 저런 무기나 기술이 없었음. 자미가 다친 일반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복수자들이 경계하는 태도를 보여서 더 수상했고.

그녀석에게 당한 건가? 자미가 평이한 어조로 물어보는데 아무도 들은 척 안 했음. 자미는 조금 더 찔러봤음. 새까만 닭은 강한 기사다. 녀석을 죽이고 싶다면 준비가 더 필요할 거야. 기사 한둘쯤은 가볍게 상대하는 녀석이니까. 복수자 중 하나가 자미를 휙 노려보았음.

당신이 우릴 걱정해? 왜, 기사사냥꾼이 우릴 다 죽이고 당신만은 구해줄 거니까? 그런 놈이 제 편이니 겁나는 게 없나 봐? 다른 복수자가 제지하는 손짓을 하자 그 복수자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다물었음. 정중하지만 때때로 자미를 향한 경멸과 증오를 숨기지 않는 복수자들의 태도를 보면

이들은 기사사냥꾼만이 아니라 자미에게도 진심으로 어떤 원망을 품은 듯했음. 그 부분이라면 자미는 이해할 수 있었음. 자미가 기사사냥꾼 소문을 흘리고 다니는 자와 붙어다니면서도 몇 년이고 살아있는 것이 그 자체로 기사 사냥은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이라도 명예롭고 정의롭게 이뤄진 거라는

반증이 되기에, 복수자들은 자미의 존재에도 원한이 있었던 것임. 이들이 하려는 게 복수라면, 어떤 식으로 하려는 걸까? 자미는 그게 단순히 닭이나 자신을 죽이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음. 그럴 거면 방금 자미가 지적했듯 아주 강력한 전력을 데려오든가 용후가 그랬듯 여론을 움직여

불명예스러운 기사 사냥이 실제로 있었단 식으로 고발을 하든가 할 일이었음. 그래, 저들은 사냥당한 기사들의 유족이고 그 죽음을 전혀 납득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복수를 원했음. 그럼에도 용후의 고발로 명예롭고 정의로운 기사 같은 신화가 박살나 여론이 악화되어 기회가 있었던 그땐 가만있다가

이제 와서 죽은 걸로 알려진 닭을 쫓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리고 이 견습 수준에 불과한 무력을 지닌 자들이 자기들의 한계를 알면서도 닭을 꾀어내고 있다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텐데, 그게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아직 니젤을 출발하기 전 들었던 어떤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뭔가가 폭발할 때 몸에 박힌 무수한 파편 중 큰 것 몇 개만 제거된 상태라 끙끙거리는 일반인 복수자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부축해 이동하는 복수자들을 보면서 자미의 머릿속에선 닭이 떠난 후 도시에서 기다리는 동안 떠올렸던 어떤 가설 하나가 수도 니젤의 풍경과 함께 구체화되었음.

기사에게 영광의 시대가 열렸다고들 하지만, 그것이 선언된 순간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지향하고 한마음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음. 사람은 자신이 익숙했던 사고와 문화와 습관을 바꾸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더러 혹자는 완고하게 바뀌지 않으려 하기도 하니까.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기사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지만 자미를 위시한 특수기수의 젊은 기사들과 견습들이 뭉쳐서 추진하는 개혁에 기성의 격기사 모두가 찬동하는 건 아니며, 용후나 동대륙 같은 세력과 내통해서라도 기사를 지금 즉시 무너뜨리려 안달했던 일반인 권력자들도 건재했음.

그리고 누군가는 대놓고 티내지 못할 뿐 자미를 거꾸러뜨리고 싶어 했음. 자미는 그걸 알며 500년 전처럼 한 명의 '영웅'이 체제를 결정하는 건 그 영웅이 사라지는 순간 지속성을 잃고 쉽사리 왜곡될 거라 생각해서 가급적 공훈이 있는 자들 하나하나를 부각시키고 자신은 덜 눈에 띄려 했음.

사라져버린 회백발 여자를 찾아 장기간 중앙을 떠난 건 개인적인 용무도 있었지만, 자미 없이도 기사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좌충우돌하며 새로운 체제를 체화케 하면서 자미에게 집중된 견제를 분산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음. 닭이 자미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싶어 하면서 즉시 쫓아내진 않은 것도

둘 사이의 복잡한 관계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에 대한 이해도 있기 때문일 터였고... 주머니 속 가장 깊숙한 곳에 대충 쑤셔넣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구겨진 휴지조각을 손가락 끝으로 굴리면서 자미는 어깨를 으쓱였음. 그리곤 지금껏 드랬듯 복수자들이 하는 행동을 차분하게 관찰했음.

그날 해가 저물 무렵 진눈깨비가 될락말락 한 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복수자들이 도시에 도착했음. 통금을 넘긴 시각이었지만 성문 경비병들은 자미가 동행하고 있으니 이들을 모두 간단히 통과시켜줬음. 복수자 중 하나가 다친 동료부터 도시에 사는 하나뿐인 의사한테 데려갔고,

나머지는 외투의 후드를 벗겨서 자미의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 데리고 사람 많은 곳 중심으로 도시 한 바퀴를 돈 후 여관거리로 돌아갔음. 관광객 등 외지인이 거의 다 빠져서 한산해졌어도 이곳은 관공서가 코앞인 도시의 중심부였고, 인근에 사람 사는 집이 밀집되어 있었음. 기사 사냥의 증거를

남기지 않고 교묘히 행적을 숨겨온 닭이라면 사람과 건물을 쉽게 파괴해버릴 수 있는 이런 데서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임. 거기까지 예상하면서도 바로 그 부분에서 닭은 무차별 살인마가 아니며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못 하나 비난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닭 본인이 '유족'의 마음을 헤아려

별 말 하지 않았던 일에 자신이 화를 낼 입장은 아니라는 이성이 필사적으로 작동한 덕에 자미는 말을 삼켰음. 복수자들은 미리 빌려둔 큰 홀로 들어가 가구를 벽 쪽으로 밀어서 다 치운 후 복판에 자미를 앉혀놓고 기다렸음. 이런다고 닭이 나타날 것 같진 않은데. 이미 떠났을 수도 있지 않아?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으면서 자미가 도발했지만 복수자들은 무시했음. 호수에서 자미를 데려온 용병이 주머니에서 회백발 여자의 목걸이를 꺼내더니 높이 던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받는 장난을 쳤음. 자미는 그 행동이 매우 거슬리고 싫었음. 그렇지만 자미와 닭의 관계를 모종의 형태로 단정짓고 

이쪽을 쳐다보면서 목걸이를 돌바닥에 떨어뜨릴말락말락 하며 손장난치는 도발에 넘어갈 순 없었음. 자미는 침묵했고, 다른 용병이 정신 사납다고 짜증내고서야 그 용병은 장난을 그만뒀음. 잠시 후 일반인 복수자가 복수심이 몸의 고통을 능가한 것처럼 창백한 낯으로 주위를 격려를 받으며 돌아왔음.

그가 준비가 끝났다고 하자 모두 침묵했음. 어떤 불길한 각오를 한 모습들이었음. 그들 중 하나가 자미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음. 기사사냥꾼은 기사가 기어스를 위반하게 만들곤 명예롭지 못하다며 싸움을 걸어서 살해했다죠. 어떤 자는 그게 증명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는데

(다른 복수자가 노골적으로 자미를 노려보며 발을 쾅 굴렀음) 사실이고 정말로 명예롭다면 자신이 아껴서 새 시대의 기수로 떠받든 자라도 예외는 아니어야겠죠? 자미는 안색은 변하지 않았지만 주머니 속에 든 손은 꽉 주먹을 쥐고 있었음.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 같은 무슨 상징이나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싸움에 쓸모 없고 지친 외팔이지. / 기사사냥꾼이 아무하고나 몇년이고 붙어먹진 않을 것 같은데요. 당신, 뒤로는 놈을 도운 거 아닙니까? / 아니, 하... 복수자가 홧김에 막 뱉은 말인 걸 알지만 자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을 수 없었음. ...멋대로들 상상해.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기어스를 위반하게 만들고 싶은가 본데, 알기나 하나? / 글쎄, 이제 알아볼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목걸이를 가지고 놀던 복수자가 그걸 바닥에 내팽개쳤음. 동시에 자미가 몸을 날려 목걸이가 돌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잡아챘음. 목걸이를 손에 쥐고 바닥에 쓰러진 자미를 내려다보면서

복수자들의 분위기가 조용히 험악해졌음. 빼앗아. 누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근처에 있던 복수자들이 자미를 걷어차고 짓눌렀음. 으득,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자미의 손에서 목걸이가 빠져나갔음. 이런, 이게 그자한테 진짜 중요한 물건인가 본데요. 기린님이 먼저 기어스를 말해주실지

이게 먼저 깨질지 한번 해볼까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복수자 하나가 밟히고 깔려 엎어진 자미의 눈앞에 목걸이를 놓더니 칼을 뽑았음. 목걸이를 한번 겨누곤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일반인이 혀 차는 소리를 냈음. 그만. 놈이 언제 올지 알고 장난질이야. 빨리 하자고.

칼을 든 복수자는 억울하다는 듯 자미에게 삿대질했음. 저 인간 얼굴을 봐. 그 유명한 담청색 기린이 울상이잖아. 역시 보통 사이가 아니었던 거지. 한놈은 명예로운 기사들을 학살하고 한놈은 덮어주고! 그래놓고 지금은 기사 개혁을 한댄다! / 그러게. 난 그 꼴 그만 보고 싶어.

일반인 복수자는 지쳐보였고 나머지 복수자들은 침묵했음. 하나 둘 일반인의 어깨를 감싸안거나 눈물을 보이기 시작함. 왜들 그래, 어차피 나 시한부인데. 일반인이 일부러 쾌활하게 구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음. 자미는 이들이 자신의 기어스를 이미 안다는 걸, 그리고 뭘 계획한 건지도 깨달았음.

눈을 비빈 복수자 몇이 자미를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히고 몸을 묶는 동안 자미가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했음. 너희는 새까만 닭과 나를 모두 죽일 셈이군. / 흥. 우린 누구한테 복수해야 하는지 정도는 압니다. 당신도 증오스럽지만 우린 기사는 아니어도 놈과 달리 명예를 알거든요.

당신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목격한 걸 증언해야 할 겁니다. / 그렇다 쳐. 그럼 녀석도 기사에게 정당한 복수를 한 거라면 어쩔 거지? 복수자들은 찡그리고 화난 낯으로 자미를 쳐다봤음. 이 사람 어디까지 추해지려고- / 그 목걸이는 유품이다. 녀석이 기사에게 빼앗긴 이의 것이지.

기사는 명예로운 영웅이다! 기사에게 죽었다면 악당인 거겠지! / 글쎄. 살해당한 이는 격기사였다. 고작 아이 하나를 지키려고 목숨도, 신분도 내준 것 같더군. 다시 말해 고작 아이 하나를 해치려고 같은 기사들이 그 기사를 죽인 거였다. 그럼 그 아이의 복수는 악하고 정당하지 못한 걸까?

자미의 말에 복수자들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엇갈렸음. 누군가는 더욱 차가워졌고 누군가는 어딘가 신중해졌음. 자미의 말은 진짜가 아니라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의 파편에 즉석에서 지어낸 거짓말을 보탠 거지만 (자미는 이런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써먹었고 자신에게도 가르쳐준 제자에게 감사했음)

복수자들을 흔들기엔 충분했음. 왜냐면 이들이 아는 건 새까만 닭이고 회백발 여자는 조금도 몰랐으니까.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일반인 복수자가 짜증스럽게 소리쳤음. 당신의 말은 진짜인지 뭔지 알 수 없죠. 근데 기사사냥꾼이 우리 가족을 죽인 건 진짜거든요. 내 동생은 놈보다 어렸으니까

당신이 말한 아이의 복수 대상이 될 수도 없고요! 그 말에 복수자들은 정신을 차린 듯 일제히 흉흉해졌음. 여기까지였음. 복수자들은 묶여있는 자미의 몸에서 팔만 빼내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길쭉한 작대기 몸체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석궁의 방아쇠처럼 튀어나온 길쭉한 쇠에 네 손가락을 걸게 했음.

그 기묘한 문양을 본 순간 자미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고, 동료들의 격려와 작별인사 속에서 일반인은 자기 이마에 작대기의 반대편 끝을 댔음. 자미가 온몸을 뒤틀며 저항하자 저쪽에서 예의바르게 손을 모으고 서있던 용병이 회백발 여자의 목걸이를 꺼내며 사납게 웃어보였음.

저한테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일반인이 속삭이며 작대기 끝을 이마에서 심장으로 내렸음. 작대기가 아래로 처지면서 팔이 부러져 힘이 전해지지 않는 손가락 위로 자연스럽게 방아쇠가 눌리고, 작대기 안쪽에서 뭔가가 윙윙거리며 빠르게 회전하는 진동이 울리고, 푸르스름한 빛이 차오르고,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문이 폭발하면서 쏘아진 론누가 일반인의 등을 찌르고, 푸르스름한 빛의 창이 거꾸로 흐르는 낙뢰처럼 천장으로 꽂히고, 론누가 꽂힌 시신이 자미 위로 쓰러지고, 의자째 뒤로 넘어가면서 자미는 피투성이가 된 회백발 여자가 홀 안에 새까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걸 보았음.

 

 

 

13.

일반인 복수자는 누가 봐도 그 자리에서 절명한 모습이었음. 론누에 가슴을 관통당한 상처 때문인지 목과 가슴 사이에 구멍을 내버린 소형 마도병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았음. 시신의 상태와 바닥을 구르면서 금이 간 틈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깜빡거리는 무기를 흘끔 본 닭이 나직이 빈정댔음.

너네, 마법사의 장난감을 몇 개나 갖고 있는 거냐? 어디서 돈이 펑펑 솟나봐? 아니다~ 누가 펑펑 퍼줬다고 해야 하려나. 복수자 몇이 무기를 움켜쥐었고, 누군가가 칼끝으로 바닥에 드러누운 자미와 자미 위로 엎어져있는 시신을 가리켰음. 놈은 적을 직접 죽였어! 기어스를 깬 불명예스러운 기사다!

어쩔 거냐, 기사사냥꾼? 너도 기사라면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복수자가 조롱하듯 외친 소리에 닭이 입매만으로 시익 웃었음. 뭐야. 기린 너 얘들한테 기어스도 털렸냐? 바보야? 자미는 지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음. 닭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오자 복수자들은 위압당한 채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섰음

몸 어딘가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건지 닭이 걸음을 뗀 자리마다 피묻은 발자국이 찍혔고, 기댈 론누가 없어 비틀거리는 몸짓은 누가 봐도 서있는 게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보였음. 몸을 감싼 큼직한 망토와 새까만 옷 때문에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자미는 닭이 바로 저 무기로 공격당해

부상당했고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걸 확신했음. 지금이라면 견습 수준의 무력을 지닌 자들도 머릿수로 덤비면 그 새까만 닭을 잡을 수 있었음. 복수자들은 1차적으론 자기네 동료를 희생시켜서라도 자미가 기어스를 위반하게 해 닭이 자미를 사냥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뜨리려 했고,

자미가 끝내 직접 살인하지 않거나 닭이 '기사 사냥'을 거부할 경우 2차적으로 직접 닭을 죽일 작정이었던 것임. 그래서 숲에서부터 닭을 저 무기로 공격해 약화시킨 상태에서 자미를 인질로 잡은 것이었음. 전부터 자미는 이런저런 일로 닭이 비난을 들을 때마다 나서서 대신 변명하며 감싸곤 했고

단독행동을 선호하는 닭이 어쩌다 다른 기사와 임무를 하게 되면 대개 자미를 동행으로 택한 걸 수도에선 잊지 않았다는 걸 자미는 절감했음. 닭을 건드리면 자미는 나설 것이며, 자미를 건드리면 닭은 어떤 형태로든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래, 이왕이면 우리 둘 다 한꺼번에 제거하고 싶겠지.

어느 쪽이든 후환은 무서울 테니까 말이야... 자미는 마음 속으로 자조했고, 닭은 겁을 주듯 복수자들을 향해 불쑥 몸을 내밀었음. 안 덤벼? 나 무기도 없는데. 닭은 천연덕스레 말하며 비어있는 두 손을 들어보였고, 복수자들은 이를 악물더니 각기 어떤 기사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들었음.

닭은 심하게 다쳤고 맨손이며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 실내라 공간을 크게 쓸 수 없는 악조건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짧고 빠르고 간결하게 움직이며 한방으로 확실하게 무력화하거나 빗나간 무기가 저들끼리 공격하게 만들었음. 건물이나 이 부근에 있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

순식간에 닭이 복수자들로 가로막힌 짧은 거리를 돌파해 자미에게 도달했음. 제압당한 복수자들이 바닥을 기고 부러진 곳을 부여잡으며 신음하는 가운데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닭의 눈이 전류 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비치는 자미의 샛노란 눈과 마주쳤음. 닭이 멈칫한 순간 자미가 소리쳤음. 폭발한다!

고개를 휙 돌린 닭은 바닥에 나뒹굴던 소형 마도병기의 몸체가 쩍쩍 갈라지며 푸르스름한 빛의 구체가 불길하게 회전하는 걸 발견했음. 급히 시신을 밟고 론누를 뽑으면서 닭은 출구가 사납게 웃는 복수자들에게 가로막혔으며 구멍 뚫린 천장으론 멀리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파악했음. 무기의 균열 틈으로 엿보이는 핵에 푸른 빛이 응축되는 기세가 아주 심상치 않았고, 폭발이 일어난다면 그때 언덕에서 일반인이 저격한 직후 무기가 폭발했던 것보다 규모가 클 것 같았음. 그때 일반인은 소형 마도병기에 응축한 마력을 제때에 발사했기에 불량하고 약한 무기의 몸체에

잔류한 불안정한 힘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방금 자미의 손에 눌려 발사된 무기는 힘이 충분히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발사되어 뭔가 고장나면서 지금도 핵이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 같았음. 론누로 자미와 자신은 지킬 수 있지만 복수자들과 부근의 무관한 주민들까지 지키는 건 무리였음

이 모든 관찰과 판단이 0.1초 이내에 이뤄졌고 닭은 론누를 세우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자미 앞에 버텼음. 닭의 선택은 분명했고 이로 인해 발생할 피해도 악명도 모두 자신이 감수하겠다는 결기가 이 자리에서 다 같이 죽더라도 기사사냥꾼과 자미를 제거하고 말겠다는 복수자들의 결기와 부딪쳤음.

그 등을 향해 자미가 속삭였음. 나를 봐. 명령이나 요구가 아닌 애원 같은 간청이었기에 회백발 여자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음. 자미가 부러졌지만 묶여있지 않은 팔을 길게 뻗고 있었음. 허락해줘. 다시 한번 자미가 속삭였음. 눈앞에서 웅웅 소리를 내며 불길한 푸른 빛이 시시각각 부풀어오르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렇지만 자미의 눈엔 어떤 확신이 있었음. 회백발 여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당하고 겪고 느꼈던 자미라는 사람을 알았음. 그것이, 바깥의 겨울비처럼 차가운 이성적 판단과 사방의 생기를 빨아들이듯 숨 막히도록 응축된 저 푸른 빛처럼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떠나

회백발 여자로 하여금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자미의 손을 맞잡게 했음.
"허락한다."
극도로 응축된 푸른 빛이 마침내 그 힘을 사방으로 폭발시켰고, 자미가 맞붙은 두 손바닥을 한쪽으로 끼릭 돌렸으며, 푸르스름한 빛이 깃들면서 미소짓는 눈을 보며 회백발 여자는 큰 소리로 광인처럼 웃고 싶어졌음

그리고는 투둑 끊어진 줄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자미는 온몸에서 담청색의 번개 같은 빛을 뿌리며 자기 몸으로 폭발하는 소형 마도병기를 덮치고 있었음. 지우스! 누군가가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자미는 자기 마음이 만든 상상일 거라 생각하며 1년 이상의 시간 동안 축적된 '힘'으로 폭발을 견뎠음.

눈을 뜰 수 없는 시린 빛이 작렬하고, 무기의 핵을 끌어안은 채 엎드린 자미의 몸이 덜컹 흔들리고, 뒤늦게 파동이 전해진 것처럼 건물이 부르르 떨렸음. 돌가루와 나뭇조각이 머리 위로 으스스하게 쏟아졌음. 위층에선 갑자기 바닥이 뚫려 확인하러 오던 민간인들이 지진이냐며 비명을 질렀음.

무릎을 꿇은 자미의 품에서 산산이 깨지며 폭발하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검게 그을리고 깨진 핵이 툭 굴러떨어지더니 곧 먼지처럼 바스라졌음. 어깨를 짚는 손길에 돌아본 자미는 자신이 두른 푸른 벼락 같은 빛 속에서 핏기 하나 없이 죽은 사람 같은 회백발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됐음.

자미가 산에서부터 두텁게 입고 내려왔던 외투와 상의가 폭발의 충격으로 다 찢겨져 넝마가 되어버렸고 군데군데 탄 자국도 있었지만 자미의 몸은 원래 지녔던 흉터와 약간의 그을음 말고는 아무 탈도 없었음. 하지만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었던 도박이었던 건 사실임. 무엇보다도 저 마도병기는

자미의 '힘'에서 힌트를 얻은 마법사가 그 원리를 응용해 설계한 장치였기에, 두 힘이 충돌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몰랐음. 다행히도 이 무기는 그냥 과열된 흑색화약처럼 혼자 폭발하고 말았지만... 자신을 응시할 뿐 꼼짝도 하지 않는 회백발 여자에게 자미가 뭐라 말을 건네려 애쓸 때

문간에서 우당탕 거리며 비명이 터졌음. 검고 붉은 인영이 기사도 눈으로 쫓기 어려운 잔상을 남기며 스쳐간 자리에서 복수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쓰러졌음. 그리고는 터덜터덜 게으른 느낌조차 있는 발소리가 널브러진 복수자들의 몸을 타넘어 홀 안으로 들어왔음.

웬일로 날 부르기에 하던 거 접고 오긴 했는데.. 이게 다 무슨 난리지? 새까만 옷을 입은 백발 남자와 붉은 옷을 입은 흑발 여자는 자미도 회백발 여자도 아는 자들이었음. 쩔그렁, 쇠가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회백발 여자가 쓰러졌음. 자미는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쳤음. 와서 돕기나 해!

피부로 접촉하고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음. 회백발 여자는 정말로 심각하게 회복력이 저하되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상태로 도시를 수색하고 자미를 찾아낸 것이었음. '기사사냥꾼'에게 복수하겠다며 자미를 잡아간 자들을 쫓으면서 회백발 여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열이 끓고 진득한 피가 끝없이 흐르는 몸을 끌어안은 자미는 다시 까마귀를 휙 돌아봤고 위협으로 받아들인 개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음. 괜찮으니 비켜줘. 진귀한걸? 위대하신 사령탑이 제정신이 아니야. 마치 그때 같은걸. 까마귀는 빈정거리며 바닥에 흩어진 소형 마도병기의 파편을 주워들었음.

'열쇠'는 찾은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며 자미의 온몸에서 파직거리며 흩날리는 푸릇한 빛을 흘끔 본 까마귀는 곧 그의 품에 안긴 채 의식을 잃은 회백발 여자로 눈길을 돌렸음.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치료용 카톤을 몇 장 꺼내 눈으로 보이는 가장 급한 상처부터 지혈했음. 

회백발 여자의 얼굴을 가급적 피하면서 입을 꾹 다문채 응급처치를 하는 까마귀의 얼굴에선 평소의 까불거림이나 날카로움을 찾을 수 없었고, 자미는 늘 그랬듯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았음. 그러는 사이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기웃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음. 어느 틈에 쓰러진 복수자들을 둘러보고

온 개가 까마귀에게 내민 손바닥에는 녹색의 광택 없는 돌조각 같은 목걸이가 놓여있었음. 개나 까마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미는 목걸이를 낚아챘음. 부딪친 손바닥이 아프다는 듯 살살 흔들면서 까마귀가 비로소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었음. 뭐,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도움을 줘야겠지. 가라. 

회백발 여자가 사람들에게 더 노출되어 좋을 일은 없었고, 까마귀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이 얽힌 이 일에 대해 많은 걸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 자미는 두 번 돌아보지 않고 한 팔로 회백발 여자와 론누를 안은 채 바닥을 박차 순식간에 거리를, 도시를, 숲을 벗어났음. '힘'의 시간이 다해가고 있었음.

 

 

 

14.

중앙에서는 근래들어 지하에서 암암리에 파란 불을 뿜는 작대기에 대한 소문이 도는 걸 포착하고 있었음. 까마귀가 이끌었던 마도병기 연구에 참가한 대륙 각지의 마법사들 중엔 그 잘난 머리로 마도병기를 건장한 성인이면 들고 다닐 크기로 소형화할 생각을 한 자들도 당연히 있었고,

그런 아이디어가 마스터피스에 응용되기도 했음. 그렇지만 애초에 까마귀가 마도병기를 개발한 건 인위적으로 국가 단위의 전쟁억지력을 창출하려는 거였지 일반인들이 초월적인 힘을 휘둘러 손쉽게 서로 죽이란 건 아니었음. 적어도 지금은 아님. 그래서 까마귀는 불법개조를 마구 때려잡는 중이었음

도시에서 닭을 기다리는 동안 자미는 수도에 자신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 복수자 무리의 일반인이 지닌 정체 모를 무기와 연결될 가능성을 떠올렸고, 오랫동안 잊어먹은 채 주머니 구석에 처박아놔서 아직 기능하는지 의심스러웠던 카톤을 꺼내 까마귀에게 연락했음.

자미가 도시에서 일주일을 소일거리 없이 머물렀던 건 한편으로는 닭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까마귀를 기다린 것이었음. 그리고 까마귀도 자미의 연락을 받자 수도에서 어떤 치졸한 무리가 자미한테 모종의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을 우려해 무작정 출발하기보다 조사부터 시작했고,

우려가 사실일 가능성을 포착하자 불법개조 마도병기를 때려잡을 겸 자미를 해치려는 음모의 증거와 증인을 잡을 겸 가장 발이 빠른 기사인 개의 도움을 받아 수도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거였음. 나중에 까마귀가 자미에게 설명해주기로, 자미로 대표되는 젊은 기사들의 개혁행보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그 극우스런 자들이 자미가 어떤 이유로 갑자기 장기휴직을 하고 코끼리가 보호하는 니젤을 벗어나 혼자 훌쩍 떠나자 기사 사냥으로 살해된 의혹이 있는 기사의 유족으로 견습 정도는 되는 무력을 지닌 자들과 접촉해 자미가 마지막까지 새까만 닭의 기사 사냥 의혹을 덮어줬으니

실은 협력자일지도 모른다고 의혹을 부추긴 후 그들로 하여금 불법개조 소형 마도병기를 들고 자미를 추적하게 한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음. 죽었다고 알려진 새까만 닭이 진짜로 투구를 벗고 자미와 함께 지내는 게 발각된 건 그 과정에서 정말로 우연히 얻어걸린 것이었음...

그런 전말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는 건 좀 더 훗날의 일임. 지금 자미는 의식이 없는 회백발 여자를 등에 업고 망토로 자신이 몸에 고정한 모습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음. '힘'이 발동한 5분 중 실제로 회백발 여자를 데리고 달리는 데 사용한 시간은 2, 3분에 불과했지만, 쌓인 힘이 1년치 이상이다보니

그 시간 동안 자미는 사상 최강의 기사인 순백의 코끼리가 그렇듯 말도 안 되는 힘과 속도로 뛰어오르고 달리는 것이 가능했음. 그 힘이 소진되어가는 0.001초도 아까워하며 자미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달렸음. 산을 뛰어넘고 물 위를 달리며 어떻게 한 건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질주한 끝에

시간이 아직 10여초 남았을 때 자미는 두 사람의 오두막에 도착했음. 겨우 7, 8일 떠나있었지만 불을 떼지 않은 두 채의 오두막은 눈과 얼음 속에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옹송그린 채 얼어붙어 있었음. 자미는 그때 이후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지 않았던 닭의 오두막에 과감히 들어가 불을 떼고

오래 전 자신이 누웠던 그 조잡한 침상에 닭을 눕혔음. 자미가 '힘'을 사용하면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동안 등에 묶여 있었던 회백발 여자의 몸에서 상처가 새로 터지거나 하진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꽁꽁 얼었던 오두막이 데워지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자미의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회백발 여자는

조금 돌아온 것 같던 핏기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음. 당장 뭐라도 없나 싶어 미친듯이 흩어진 상자를 열어본 자미는 그 안에서 운석인 듯한 돌 여러 개와 여러 지역에서 여러 날짜에 걸쳐 그린 성도, 그리고 운석을 주운 지역의 인구에 관한 기록만 찾아냈음. 약이나 기타 생필품은 하나도 없었음.

자미는 자신을 돌보는 일에 지극히 무심했던 회백발 여자에게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 오두막으로 뛰어가 얼어붙어 뻣뻣해진 곰가죽과 아주 조금 모아놨던 약초 전부를 들고 돌아왔음. '힘'의 남은시간이 0초가 된 순간 자미는 회백발 여자를 품에 안고 곰가죽을 덮어쓴 채

나란히 누워있었음. 1년치 '힘'을 한꺼번에 소진한 반동이 밀려들면서 더는 버틸 수 없었음.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메마르고 창백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까무룩 잠들었음...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자미는 온몸이 아파 끙끙거렸음. 힘의 반동 탓이기도 하지만, 복수자들에게 잡혀 두들겨맞고

하나 남은 팔이 부러진 걸 잊은 채 그 팔로 그 모든 힘 쓰는 일을 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음. 신음하던 자미는 눈을 뜨기도 전에 옆자리가 빈 것을 깨달았음. 회백발 여자의 침상은 관처럼 좁아서 두 사람이 누우려면 몸을 딱 붙여야 했기에 부재도 금방 알 수 있었음. 눈을 번쩍 뜬 자미는

미지근히 데워진 오두막에서 화덕의 불을 지켜보며 앉아있는 회백발 여자의 등을 발견했음. 가죽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선 자미는 자신의 몸에서 팔이 부러진 곳과 반대편 팔의 절단부에 새 붕대가 감긴 걸 깨달았음. 회백발 여자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것처럼 고개짓했음. 얜 대놓고 막 저지른다니까.

기사가 그래도 되냐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살아있었음. 자미는 주저없이 다가가 뒤에서 회백발 여자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음. 회백발 여자는 움찔하며 어색하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버려뒀음.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자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음.

사과해야 할 게 있어. 거기서 네가 곤란을 겪은 건- / 됐어. 어차피 나에게 돌아올 일이었고, 네 일이 그런 식으로 엮여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네가 사과하지 마라. 회백발 여자는 역시나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 그 영민함 덕에 둘 사이에서 많은 대화가 생략될 수 있었지만,

자미는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대화의 생략 또는 부재를 더는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생각했음. 자미는 포옹하던 팔을 풀고 그 앞으로 가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회백발 여자를 올려다보았음. 얘기좀 해. 그렇게 말을 걸면서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우울한 눈과 눈을 마주치려 애썼음.

회백발 여자는 정말로 우울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음. 가슴 앞의 텅 빈 공간으로 손이 가려다 흠칫하며 물리곤 그 손으로 푸석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리며 고개를 내젓는 식이었음. 넌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수도에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했잖아. 나를 그만 내버려둬.

자미는 주머니에서 잘 보관하고 있었던 녹색 돌조각을 꺼냈음. 닭이 얼어붙었음. 끈이 떨어졌지만 돌조각은 원래 모습을 거의 온전히 지니고 있었음. 자미는 목걸이를 닭의 손바닥에 쥐여줬음. 그런 말은 오래 전 그 실험대련 후 네가 나를 택하기 전에 했어야지. 닭의 낯에 혐오감이 어리자 자미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음. 내가 원해서 여기 있는 거야. 사실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난 여기 오기 전에 은퇴했어. / 뭐? 너 이..! / 한 명의 영웅이 모두 감당할 수는 없다는 걸 네가 가장 잘 알면서 왜 너는 그런 영웅이 되려 하는 건데. 너는 네 할 일을 다 했다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러 가라고?

기사 담청색 기린의 일은 이 팔을 잃은 순간 끝났어. 그 말에 닭이 자미의 멱살을 잡으려다 상의를 입지 않은 몸에서 잡을 곳을 못 찾고 허공을 움키며 으르렁거렸음. 자미는 하나 남은 손을 들어 자신의 것보다 조금 큰 그 주먹을 감싸쥐며 말을 이었음.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여기에 있어. 

네가 나에게 손을 빌려주면서 '힘'의 사용을 허락했을 때 비로소 나도 깨닫게 됐거든. 담청색 기린이라는 기사는 지독하게도 너를 속이고 이용했지만 (이새끼는 최악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회백발 여자가 헛웃음을 흘렸고 자미는 같이 웃으며 닭의 주먹에 이마를 맞댔음) 나란 놈은 말이야...

...그때 여관에서 손을 맞잡은 순간 자미는 자신이 '힘'을 사용하려면 닭이 있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이유를 깨달았음. 하지만 자미는 이것이 단순히 제 필요에 의해 멋대로 회백발 여자의 손을 쓰는 행위가 되는 건 결코 원하지 않았음. 자미가 진정으로 원한 건 닭의 "허락"이었으니까.

사상지평의 사용을 "허락한다." 곁에 있는 걸 "허락한다." 내일도 모레도 함께 살아가기를 "허락한다." 

기린은 기사이기에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가슴 속에서 끌어냈음. 네가 기사를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자신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내가 네 곁에 머무는 걸 허락해줘. 그 목걸이를 나도 함께 지키면 안 될까?

회백발 여자는 자미의 눈을 응시했음. 표정을 알 수 없어야 하는데도 어쩐지 무슨 표정인지 알 것 같았던 투구 속에서 회백발 여자는 늘 저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표정을 지었던 거구나, 새삼스레 자미는 그런 생각을 했고, 마침내 회백발 여자가 대답했음. 시간을 줘. 나는.. 아직 답할 수 없어.

자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백발 여자의 주먹에서 천천히 손을 뗐음. 회백발 여자는 잠시 목걸이가 든 주먹을 내려다보다 일어나 말없이 밖으로 나갔음. 자미는 안달하지 않았음. 회백발 여자가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니까. 그래서 자기 오두막으로 돌아가 옷을 찾아 입고 오두막의 안팎을 청소하기

시작했음. 어제 자신이 약 찾는다고 닭의 오두막을 뒤집어놨던 게 생각나 그쪽도 청소하고 정리하러 들어간 자미는 열어놨던 상자들이 대충 닫힌 채 벽 쪽에 치워진 걸 발견했음. 자미가 아직 자고 있던 아침나절에 회백발 여자가 먼저 치웠던 것.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떠올린 자미는

성도가 들어있었던 상자를 끌어내 기록을 찬찬히 뒤적였음. 어느 것이든 회백발 여자가 지난 1년 동안 쉬지 않고 별똥별을 쫓고 성도를 그리며 누군가를 찾았다는 증거였음. 그런데 가장 최신의 성도는 몇주전 자미가 그린 것이었음. 그 사이 성도를 그리는 주기가 있었는데도 회백발 여자는

업데이트하지 않고 넘어갔음. 왜냐면 회백발 여자는 자신이 알고 싶었던 걸-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걸 이미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 씁쓸한 기록들을 묵묵히 바라보던 자미는 이윽고 성도를 상자 안에 정리한 후, 뚜껑을 덮어 원래 자리로 치웠음. 그리고 남은 하루 동안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수를 끓이고 장작을 보충하고 저녁을 준비하며 분주하고도 느긋하게 하루를 보냈음. 해 저물녘이 되어 돌아온 닭은 자미가 오두막 앞의 모닥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걸 보더니 말없이 가져온 자루를 내줬음. 자미가 무척이나 먹고 싶어 했던 채소가 들어있었음. 물론 자미는 표정이 안 좋아졌음.

고맙지만 무리하지 마. 어제는 네가 죽는 줄 알았어. 자미가 염려하자 회백발 여자는 한숨을 쉬곤 모닥불 앞에 의자 용도로 둔 큼직한 나무토막에 걸터앉아 불 쪽으로 긴 다리를 쭉 뻗다가 웅크리며 아야야 하고 앓는 소릴 냈음. 무리 안 했어. 아는 사냥꾼이 근처에 있어서 교환해온 거야. 왜.

겁이라도 났어? / 당연히 무섭지. / 그런 것치고 평소처럼 뻔뻔한 낯인데. / 뻔.. 하... 됐어. 자미가 지끈한 티를 내며 채소자루를 가져가려 하자 닭이 팔을 뻗어 도로 채갔음. 앉아있어. 그리곤 론누를 오두막 벽에 기대 세워놓고 손을 씻은 후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음. 하긴 채소 다듬는 작업은

한 손으로 할 만한 일은 아니었음. 자미는 얌전히 도로 앉아 솥에 자신이 준비한 재료를 부었고, 회백발 여자는 빠르게 손질을 마친 재료를 갖다준 후 자미 옆에 나란히 앉았음.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나서도 둘은 그렇게 불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있다가, 밤이 깊자 각자 오두막으로 돌아갔음

오두막을 보강하고, 환기시설 같은 주거환경을 정비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런저런 세간을 제작하고, 낚시를 가고, 수액을 채취하고, 벽을 갈라 안쪽으로 두 오두막을 연결하는 문을 달고, 이따금 기상이 좋을 때면 같이 산봉우리로 올라가 별똥별을 찾거나 론누를 타고 천천히 비행하고,

땅이 녹을 무렵에는 텃밭을 만들고, 나물과 약초를 찾고, 밤에는 함께 불을 바라보고. 그 계절은 그런 식으로 지나갔음.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은 채 하루하루 주어진 것들로 살아가면서, 회백발 여자는 뼛속까지 기사인 자미가 언제까지 이 정적인 은둔자의 삶을 버틸 수 있나 시험하는 것도 같았음.

하지만 자미에게는 니젤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치러야 할 기사의 임무였음. 자미는 자신 없이도 수도에 남은 젊은 기사들과 견습들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몸에 익힌 것들을 모조리 발휘하며 치열하게 생각하고, 우당탕탕 좌충우돌하고 실수도 하고 퇴행도 조금 겪어보면서 꾸준히,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까지 포용하며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익힐 수 있을 거라고 믿어야 했음. 저 500년 전의 영웅도 인정한 기사인 회백발 여자가 스스로 그 삶에서 벗어나고 있다면, 자미도 못할 건 없었음. 자미는 회백발 여자가 "허락한다"고 말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음.

그리고 그 해의 마지막 눈이 그치고 마지막 겨울의 별자리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밤, 회백발 여자는 오랜만에 운석 사냥을 하려고 산봉우리를 올라갔음. 성도를 그리지 않은지 한참 됐고 한번 더 운석을 주웠을 때는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인구조사를 할 건덕지도 없었던 터라,

오랜만에 산에 올라 이따금 떨어지는 별똥별을 지켜보다 정말 오랜만에 지상으로 추락한 것이 확실한 걸 발견했을 때 회백발 여자도 자미도 다소 느긋하게 론누를 타고 날아갔음. 그렇지만 산맥을 떠나 추정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지상의 풍경이 확연히 심상치 않은 형태로 바뀌고 있었음.

적어도 영웅이나 닭 정도 되는 강한 기사들이 무리지어 싸움을 벌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형이 바뀔 정도로 지표면이 할퀴어졌고 이 지역에 있어야 할 작은 마을 두어 개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있었음. 이것은 방금 떨어진 운석이 초래한 게 아니었음. 누가 봐도 명백히 사람이 일으킨 짓.

이번 운석은 자그마해서 원래 여기 있던 바위가 깨진 자갈인지 하늘 너머에서 떨어진 돌인지 분간하기가 조금 어려웠고 운석공도 그렇게 크지 않았음. 이미 상자 가득 운석과 운철을 보유한 회백발 여자는 욕심내지 않고 주변을 더 둘러보고 싶어 했음. 회백발 여자를 따라가며 파괴의 흔적을 살핀

자미는 시신의 일부가 증발된 것처럼 크게 훼손된 흔적들을 발견하고 낯이 어두워졌음. 아무래도 까마귀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회백발 여자는 코웃음쳤음. 기사가 사라진 시대엔 마도병기를 든 병사들이 행진하겠지. 인간의 욕심을 안다면 그런 건 애초에 만들지를 말았어야지.

딱히 까마귀를 변명해줄 의리(?)를 느끼지 못한 자미는 어깨만 으쓱이고 아무 말 하지 않았음. 중앙에서는 나날이 빠르게 개량되고 소형화되는 마도병기로 무장한 보통의 사람들이 용후 사건을 통해 본질은 구름 위의 영웅이 아니라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인 걸 깨달은 기사를 상대로

또다시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충돌을 일으키고 있을 텐데.. 각자 이유가 있다지만 자신들이 정말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자미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깊은 호흡으로 다스리려 했음. 그때 회백발 여자가 멈칫하더니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음. 들려? 의아해하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인 자미는 곧

기다리지 않고 한발 먼저 뛰쳐나간 회백발 여자를 굳은 낯으로 뒤쫓아 달렸음. 마을이 있었던 잔해 사이에서 아주 희미했지만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음. 한달음에 소리의 진원지로 달려가 무너진 지붕을 조심스레 치우자 그 아래에서 부모인 듯한 어른들의 시신에 깔린 아이가 발견됐음.

회백발 여자는 말없이 망토를 벗어 흙먼지와 재를 뒤집어써 온통 잿빛으로 보이는 아이를 감쌌고, 자미가 한 팔로 아이를 안아 어르는 동안 물통을 꺼내 연신 기침을 뱉는 아이의 얼굴을 씻기고 머리에 앉은 먼지를 털어냈음. 이름이 뭐니? 자미가 팔에 안긴 아이한테 (딴에는) 자상하게 물었지만

아이는 콜록거리고 울면서 도리질할 뿐 대답을 못 했음. 이런 어린애를 론누에 태울 순 없어. 한동안 걸어야겠다. 아이의 얼굴을 마저 씻기면서 회백발 여자가 말했고, 자미는 고개를 끄덕였음. 그러다 아이가 갑자기 뚝 그친 걸 깨달았음. 아이는 울다가 대충 세수해서 엉망인 얼굴로 회백발 여자를

아니 회백발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가슴 앞에서 흔들리는 녹색의 광택 없는 돌조각 같은 목걸이를 쳐다보고 있었음. 아이가 목걸이가 신기한가 봐. 그렇게 말하며 눈을 든 자미는 회백발 여자가 아이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봤음. 자미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숙여

이제 대충 갈색으로 보이는 머리칼과 담청색 눈을 지닌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음. 아는 아이야? 자미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회백발 여자는 자미를 쳐다보았음. 그 투명한 눈동자와 마주친 한순간 자미는 깨달았으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확신을 느꼈음.

자미는 팔 하나를 잃은 걸 그리 아쉬워한 적은 없었지만, 남은 팔로 아이를 안았기 때문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지금만큼은 그것이 정말 아쉬웠음. 이 아이에겐.. 우리가.. 다시 한번 물어봐도 될까? 대신 자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허락을 구했음.
그리고 마침내 회백발 여자가 대답했음.

 

 



- 완전 적폐날조왜곡망상 지와지썰 끝. -

 

 

 

 

2023년 5월 19일 풀다 만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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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판, 난장판을 어찌어찌 마무리하고 둘이 은퇴해서 사람 발길 적은 숲속의 작은 집에 살림 차리고 한넘은 산지기 한넘은 약초꾼 노릇을 하며 조용히 지낸 때로부터 몇년 후. 우리의 최강자가 길을 헤매다, 산에서 마수를 만나 조난당한 여행자들 구조하러 온 수상한 산지기랑 마주치는 거 보고싶다

별다른 무기도 없이 그냥 다용도 손도끼로 마수를 간단히 해치우고 조난자들 구해서 올라온 그 키 큰 회백발의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어째선지 불쾌한 방향으로 익숙한 느낌이라 당황하고 설마설마 하는 최강자. 이 부근에 출몰한다는 풀빛머리 약초꾼과 어쩌면 걔랑 같이 있을 짜증나는 놈을

잡으러..아니 설득하러 온 건데 초장부터 속내를 드러냈다간 이 수상한 넘이 바로 튀거나 속을 긁을 것 같아서 최대한 모른 척을 하며 (그렇다. 세월이 흘렀다...!) 약초꾼 놈의 인상착의를 물으며 그넘이 한다는 약방에 데려달라고 주문하는 최강자. 수상한 산지기씨는 그 말엔 별 대꾸 안 하고

구조한 사람들부터 챙기는데, 부상자가 있기 때문에 어쨌든 결국엔 약방이 있는 작은 마을로 내려가고. 이 수상한 산지기씨가 v자연스럽게v 사람들과 인사하고 대화하고 웃는 걸 보며 이쪽도 세월이 흐르긴 흘렀다..기보단 내가 사람을 착각한 것 아닐까 고뇌하는 최강자.

잠시 후 흙투성이로 너무 신나게 놀고 있던 동네 애들이 몰려오는데, 그 중에서 회백발에 자신이 기억하는 금색 눈동자를 지닌 조그만 애를 발견하고 경직되는 최강자. 애가 엄마 부르며 산지기씨한테 폭 안기고, 산지기씨는 턱이 땅에 닿을 지경으로 떨어진 최강자를 무시한 채 애를 들어 안고서

애가 열심히 횡설수설 떠드는 말들을 들어주고.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그들을 따라가니 약방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한쪽 팔이 없어 소매를 묵어놓은 풀빛머리 약초꾼이 동네 사람한테 미리 소식 전달받고 부상자들을 도우러 준비하며 나왔다가 산지기씨랑 최강자와 딱 마주쳐버리기.

약초꾼도 최강자도 당장은 말을 못 있는데 산지기씨가 오늘 저녁은 손님이 있네. 나 먼저 간다. 라며 애 데리고 마을 외곽의 숲속으로 사라지고. 약초꾼이 대신 설명하겠지. 이 마을에는 여관이 없습니다. 지금 산을 내려가기엔 늦었으니 저희 집에서 하루 묵고 가시죠. ...코끼리님.

다행히도 여행자들의 부상은 심하지 않아서 이쪽 일은 금방 마무리하고, 약초꾼 따라 집으로 가는 내내 말없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심사를 표정으로만 드러내는 최강자. 집에 도착하니 먼저 빨랫대삼아() 땅바닥에 꽂아놓은 그 악마 같은 창이 보이고, 산지기는 손님방 마련하고 장작 패느라 바쁨

약초꾼은 익숙하게 한팔로 저녁 차리고, 애는 부모 둘 중 하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간단한 일을 거들거나 조잘대다가 이따금 멍하니 앉아있는 최강자 앞을 얼씬거리는데 눈 마주치면 도망가버림. 해서 저녁상이 차려지고, 애 붙잡아다 같이 씻고 나온 산지기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서는 최강자.

너...! 하고 말 걸려는데 손바닥을 들어보이는 산지기. 나중에. 라고 말하며 아이를 눈짓하는 걸 보고 최강자는 깨닫는 것이다. 이 둘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으며 애가 듣는 앞에선 그 이야기를 결코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아마도 여기 사람들은 이들이 기사라는 것조차 모를 거란 걸.

저녁식사는 일반인 기준으로 지극히 평범하게 단란해서 오히려 최강자는 어색하고 서툴러 하지만, 여튼 아는 사람들 근황 얘기와 바깥 세상 돌아가는 얘기 같이 아는 화제가 나오면 말은 할 수 있었음. 그러다 대화가 잠시 끊길 때마다 어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데 애는 천진하기만 하고.

약초꾼이 애를 달래서 재우러 간 사이 산지기가 집에서 담근 술을 꺼내옴. 우리 같이 술 먹는 거 처음이지? 물론 술은커녕 얼굴 보는 것도 어떤 의미로 처음인 사이지만 최강자는 묵묵히 잔을 받음. 말없이 술만 홀짝이다, 약초꾼이 방문을 닫고 예의 그늘진 낯으로 돌아오자 비로소 입을 여는 최강자.

너네, 복귀 어렵겠냐? 원래 최강자는 생에 미련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날뛰던 은퇴 전의 강력한 기사들만 기억하기에 문답무용으로 둘을 잡아다 수도에 끌고 갈 생각이었음. 하지만 이 집의 분위기를 겪고 아이까지 보고 나니 그래선 안 된다는 상식()이 제정신 아닌 자기 머릿속에서도 고개를 든 것.

그걸 말이라고 하냐? 웃음이 밴 어조지만 서느런 노기도 느껴지는 대답. 새삼스럽게도 쟤는 저런 말투 쓸 때 저런 표정이었군, 이런 생각을 하는 최강자. 잠시 후 손아귀에 쥔 빈 잔을 우그러뜨린 채 산지기가 다시 말함. 그럼에도 우리가 필요한 일이란 거겠지. 네가 직접 올 정도로.

묵묵히 듣고 있던 약초꾼이 하나만 남은 손을 산지기의 어깨에 얹고, 그 말없는 다정한 동작과 노기를 눌러참는 산지기를 보며, 아...씨. 라고 생각하는 최강자. 자신은 이 집에서 악당일 수밖에 없음. 일단 들어보죠. 하지만 우린 더이상 기사가 아니며 책임져야 할 다른 전장이 있습니다.

아이가 자는 방을 눈짓하는 약초꾼. 더군다나... 그리고 말을 주저할 때 다시 입을 여는 산지기. 중앙은 염치가 없는 것 아닌가? 아니, 원래 그런 것 없었지~ 까딱하면 얘를 이 꼴로 만든 게 너네는 아닌 줄 알겠어~ 그 노골적인 빈정거림과 분노에, 예전의 최강자였다면 바로 멱살잡아 메다꽂았겠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 수가 없음. 사령탑 중의 사령탑이었던 자비로운 기사와 다른 기사를 사냥할 정도로 강력하면서 올곧은 선을 지닌 기사가 은퇴를 선언하게 된 그 사건은, 누군가에겐 기사의 승리로 여겨지겠지만 적어도 최강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차라리 치욕스러웠으니까.

최강자는 나도 참 참을성 많아졌다. 안 그러냐 거북이? 내심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여는데.

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기린닭 5만자 연성 어디서 안 떨어지나아아아.... (도주)


 

 

 

 

 

<鳳毛麟角봉모인각 : 신수기린 앤솔로지>에 드린 축전.

취향에 따라 기린닭이든 지와지로든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네이버 웹툰 <잔불의 기사> 기반의 2차창작이며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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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략) 그러나 달에 도시를 건설하고 심해의 가장 깊은 해구를 답사하며 세계의 비밀들을 거의 남겨놓지 않은 이 시대에도 나린기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무기들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다. 그 무기들의 실물은 발굴되지 않으며 혹자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그것을 사용했다는 사람들과 … … , 해태, 기린, 봉황 등등 이른바 신수라 불리는 존재들, … … 나린기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한가. 하늘을 날고, 허공에 고정되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덮어쓰고 … … 기억은 잊혀지고, 기록은 소실된다.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 속에 숨겨짐으로써 지금까지도 살아남는다. 우리가 관측하고 기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실 속에 일말의 진실이 숨겨져있다면 (중략)

 

 … 그리하여 드론으로 수색하기도 어려운 황량한 사막을 조난자 꼴로 헤매는 신세가 됐지만, 현장연구란 원래 다 그런 법이다. 그래도 하루만 더 가면 된다. 도서관 다섯 군데 분량의 문헌조사와 소거법과 갖은 교차검증(저널 맨 뒷장 rd.66 메모 참고) 끝에 … … 침낭에 드러누워 토씨 하나 온점 한 개마저 외울 지경으로 들었던 136번 채록을 다시 재생한다.

 

 

#136.12-4. 그걸 죽여버린 게지. 사냥꾼 하나 지킨다고 금기도 어기고 사냥꾼이랑 한 약속도 어겨버린 거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신수가 왜 신수겠어, 그냥 짐승이 아니라 신령한 그거니까 그렇지. 근데 살생을 해버렸다고. 그러면 더는 신령한 게 아니지. 그러면 죽는 거야, 그냥. 그래서 기린이 병이 났어요. 비늘이 떨어지고 손끝 발끝부터 썩어들어가는데 하늘이 벌을 준 거라 신선이 와도 못 고치는 거요. 그럼 이제 사냥꾼은 어쩌느냐. 지 목숨 구해준 걸 죽으라고 냅둬? 약속 어겼으니까 그래버려도 누가 뭐랄 순 없는데, 근데 그거 하나가 빚이 됐나 봐. 그래서 신수를 미워하는 이 사냥꾼이 신수 하나 살려보겠다고 백방으로 애를 쓰게 됐는데 (하략)

 

 

 … 아직 해가 안 떴는데 벌써부터 뒷덜미가 타는 것 같고 입술이 갈라진다. 이 사막에 진입한 때부터 늘 그랬듯,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에 아침까지 최대한 달리고 4년 전 식생조사에서는 경이롭게도 그 나무가 여전히 홀로 살아있으면서 주위에 작은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고 했다. 이 사막은 과거에는 울창한 숲이었지만 지금은 기후재난으로 (중략) 낮잠을 잤는데도 지친다. 그래도 오늘 해질녘에는 도착하리라는 안내인의 말에 의지해 마침내 물이 마른 바위 협곡에 내려왔다. 이 협곡의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폐소공포증이 생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햇볕을 피하니 살 것 같다. 설화 속에서 신수사냥꾼이 죽어가는 기린을 부축해 지나간 길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숨을 돌리며 136번 채록을 듣는다.

 

 

#136.12-5. 사방에서 기린의 뼛조각이라고 주워 먹으려고 덤벼대니 당연히 다 실패했지. 사냥꾼이 괜히 신수사냥꾼인가. 그래도 100일을 그렇게 밤낮없이 싸우면서 기린이 태어난 그 신령한 숲으로 기린 데려가는 동안 사냥꾼이 아주 만신창이가 됐는데 다 죽어가는데도 둘이 그렇게 냉랭하고 모진 소릴 주고받으면서 하여튼 기린이 처음 그 숲을 나왔을 때 마주쳐서 쭉 같이 다닌 사이였으니까, 그 사냥꾼이.

 

 

 구전설화가 흥미로운 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화자가 마치 수십 대 이전 조상의 몸에 들어가 그때 일어난 일을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1만 년 전의 재난에 대한 원주민의 구전설화에 기반해 조사해보니 바로 그 시기에 설화에서 묘사한 그대로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사실이 확인된 사례도 있다(참고문헌 까먹지 말고 달아놓을 것). 그렇다면 신수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나린기 유물이 남아있지 않듯, 신수의 화석이 발굴된 적도 없다. 어떤 위대한 힘을 지닌 인간들을 영험한 동물에 비유하던 것이 어느덧 영험한 동물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 것은 (중)

 

 

#136.12-5. 그러니 사냥꾼이 꼭지가 돌아버린 거요. 여기까지 어떻게 살려서 데려왔는데 죽여달란 소릴 해. 근데 기린은 말요, 내가 말했잖어, 딴 신수들이 닭한테 한 짓 때문에, , 이 얘기 안 했어 내가? 새까만 닭요, 사냥꾼의 친구였던 영물. (136.18번대 채록 참고) … … 기린은 자비로운 신수요. 기린이 무서운 건 자기가 죽는 게 아냐. 이런 식으로 천벌을 받아 죽으면 자기가 악귀가 될 텐데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지, 사냥꾼이 전문가니까. 기린이 정말로 무서웠던 건 친구 때문에 신수를 미워한 사냥꾼이 자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들도 미워하게 될까 봐, 그니까 사냥꾼이 살아서 악귀가 되지 않게 하려고 (하략)

 

 

 ‘악귀라니 무슨 의미일까. 이 설화를 다룬 몇 안 되는 선행연구나 세부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는 다른 채록에서는 사냥꾼이 당연히 인간이라고 읽힌다. 하지만 136번 채록에서는 사냥꾼을 어떤 다른 존재로 보는 듯했다. 그것이 136번 채록의 특수성이자 (중략)

 

 … 수천 년을 그 자리에서 버텨온 장엄한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냥 잘 보존된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령 100년 안팎의 소박한 나무 같았다(사진 첨부). 그럼에도 함부로 접근하거나 침범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고요함이 있어 이 나무의 실제 수령이 수천 년은 된다는 사실을 … … 나무줄기에는 설화에서 전하듯이 뿌리께에서부터 길다란 창 한 자루의 길이만큼 세로로 크게 갈라진 구멍이 있었다. 동행한 식물학자와 고고학자가 시료를 채취하고 (중략)

 

 … 30분 후면 드디어 집에 간다. 손전등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새까만 새벽어둠 속에서 나린기의 설화가 얽힌 나무를 바라본다. 136번 채록의 마지막 부분이 떠오른다.

 

 

#136.12-6. 누가 봐도 기린은 죽을 때가 된 모습이었소. 마침내 사냥꾼은 기린을 품에 아기처럼 안아 든 채 숲으로 떠났고,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 계절이 네 번 바뀌고 나서 젊은 사람 하나가 숲에 들어가봤는데, 숲 제일 깊숙한 곳에서 전에 아무도 본 적 없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불쑥 자라있었대. 근데 그 나무줄기가 창 하나를 휘감고 있었단 거야. 마치 줄기 속에 사냥꾼의 창이 박힌 채로 자라난 것처럼. 그게 그 나린기의 이야기요.

 

 

 이 나무에서 발견되었다는 나린기는 하늘을 날며 세계의 삼라만상을 굽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새까만 닭이라는 신수’(그 설화에서는 인간도, 영물도 아니다)가 그 나린기의 주인이라 말하며, 여러 설화에서 언급된 그 나린기는 실제로 존재한 물건이 아니라 새까만 닭이라 불린 설화 속의 비극적 캐릭터를 가리키는 별명이 아닌가 추측하는 가설도 있다. 한편 신수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는 극도로 드물며, 새까만 닭이 변신한 다른 모습이거나 그 화신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설화에서나 위대하고 자비로우며 짧은 삶을 살다가 사라진 담청색 기린이라는 영웅적 캐릭터와 극도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문제는 사냥꾼(혹은 닭)의 그 몇 안 되는 설화에서 반드시 기린이 한 쌍의 짝으로 등장하곤 한다는 것이다. 서로 엇갈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진실의 편린일지는 (중략)

 

 … 연구자의 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논리의 비약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오래전 숲이었던 사막의 협곡 아래에 홀로 선 나무 앞에 서있자니 자신이 죽은 후 사냥꾼의 미래를 걱정한 신수와 자신이 미워한 신수의 마지막을 지킨 사냥꾼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 설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녹음기에서 136번 채록의 마지막 줄이 재생되고 있을 때, 일지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나무 위쪽으로 무심코 손전등을 비췄더니 그곳에 거대한 형체가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이나 커다란 영장류 동물이 앉아있는 줄 알았다. 어둠을 망토처럼 두른 그 알아볼 수 없는 형체가 나를 쭉 감시했던 거다. 나무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갔다간 … … 하필 그 타이밍이 기상 알람을 맞춰놓은 시각이었다니! 휴대폰 알람을 허둥지둥 끄고 다시 나무 위를 보니 그것은 없었다. 저 멀리, 동이 터오는 하늘을 등지고 밤을 쫓아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거대한 새의 형상이 언뜻 보였을 뿐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새까맣게 보였던 그 새는 새벽빛을 뒤집어쓰자 온통 하얗게 보였다. 그 새는 무엇이었을까? 136번 채록은 이렇게 끝난다.

 

 

#136.12-6. 그 후로 아주 가끔, 닭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닭은 절대 아닌 거대한 새가 한밤중에 그 나무로 날아와 깃들어있다가 새벽닭이 울기 직전에 떠나곤 했다더군. (녹음 종료)

 

 

 과학과 이성이 전통과 미신을 부정한 근대 이후에도 오래된 이야기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끊임없이 전하고 남겨서 언젠가는 모두가 듣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까. 이야기와 진실의 경계는 모호하며, 때로는 허구 같은 이야기가 진실 이상의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어떤 것들은 이성의 빛으로 밝히지 않은 채 영원히 어둠 속의 신비한 비밀로 두는 편이 더 좋다는 비과학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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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솔 제목이 鳳毛麟角인 게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치만  저 새가 무엇인지는 읽는 분의 생각에 달렸습니다.(웃음) 여튼! 신수기린au로 잔불 앤솔이 다 나오다니 정말 좋네요. 웹발행도 하신다 하니 회지를 구하지 못한 분들도 그때를 기대해주시고, 참가자 분들의 멋진 글과 그림 연성들을 즐겨주세요. 저는 간소한 축전을 바친 것으로 턴을 종결...!

 

 

 

 

 

 

릿포님께서 주신 단문 리퀘 주제는 "휴일" 입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캐릭 해석 등에 저의 적폐왜곡날조가 많습니다. 물론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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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힌셔는 휴일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할 말이 없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자신의 앞과 뒤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자신은 기사가 되고 싶다는 고민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으로 모든 시간과 노력을 집중했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 연인과 시간을 보낼 때도 무슨 화제로 시작하든 결국에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곤 했고, 감사하게도 -그리고 미안하게도- 연인은 힌셔를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도량을 지닌 이였다. 그랬던 자신이 원치 않아도 만인으로부터 최고의 기사라는 말을 듣게 된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기사의 임무마저 주어지지 않는 탓에 매일이 휴일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휴일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제는 할 말이 생겼는가? 솔직히, 힌셔는 지금도 휴일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휴일이라는 개념이 힌셔의 삶에는 주어진 적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때는 힌셔가 지닌 여러 “첫번째”라는 이름값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그래야 했다면, 지금은 만인이 영웅으로 우러르기에 그랬다. 사람들의 눈과 귀는 사상 최고의 기사, 악마기사를 처단해 기사의 본을 세운 기사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이 바라는 기사다움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강하지만 미숙하고 제어되지만 불완전하며 그래서 한계가 있는 기사들을 향해 알게 모르게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스치고 있는 현재의 시대에서 힌셔는 1초라도 그 기대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설령 지켜보는 자가 없더라도 기사라면 무엇이 기사다운 행동인가에 대한 고민을 1초도 멈춰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힌셔의 임무는 역설적으로 휴식도 퇴근도 휴일도 없었다.

 

 “최고의 기사께서는 24시간 연중무휴로구만.”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등 뒤편에서 놀리듯 툭 던져진 아는 목소리에 힌셔는 사인을 해주려고 들고 있던 필기구를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도 사상 최악의 기사, 두 번째 악마기사 같은 말을 듣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소문과 악명을 떨치는 기사가 불빛을 등지고 서서 계단 아래로 거대하고 불길한 새처럼 새까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본능처럼 곁눈으로 주변을 살핀 힌셔는 와론과 자신 사이에 있는 높고 폭넓은 계단이 기사들의 본산인 황제의 성과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구분하는 지리적 표지 중 하나라는 것을 인식했다. 힌셔의 붉은 망토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다가와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눈도 있다. 아무리 와론이라도 이런 곳에서 싸움을 걸 것 같진 않았다.

 

 그 사람들이 흰눈을 뜨며 슬금슬금 물러난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아 발을 멈추고 서성인다. 사람들은 힌셔가 유명한 문제아를 상대하면서 어떤 행동을 할지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계단 위쪽을 올려다보면서 힌셔가 자신을 본딴 예술품마다 똑같이 새겨져있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것은 그들이 기대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수도에는 퍽 오랜만 아니냐? 요즘 무슨 특수 임무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응.”

 

 와론은 자신이 서있던 제일 위쪽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단을 올라가 와론과 눈높이가 같아지는 지점에서 팔짱을 끼고 멈춰선 힌셔는 잠시 기다리다가 흠 하고 콧소리를 내며 무안해지려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먼저 말을 건 이상 부연하는 설명이든 그냥 시시콜콜한 잡담이든 뭔가가 좀 더 따라올 법도 하건만, 와론은 정확히 힌셔가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 이상의 말이 없었다. 의아해하며 와론의 기색을 살핀 힌셔는 속내를 종잡을 수 없기로 유명한 새까만 기사가 어딘가 풀이 죽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풀죽은 와론이라니, 그를 한번이라도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힌셔는 여러 의미에서 보통의 기사는 아니었다.

 

 “이거 어색하구나. 누구 기다리나?”

 “아니.”

 “그럼 뭔가를 기다리나?”

 “아니.”

 “혹시 갈 데가 없는 건가?”

 “하마. 바쁜 거 아녔어?”

 “그래. 난 바쁘지 않아...”

 

 와론과 달리 힌셔는 좌절감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와론은 으, 하고 목구멍 아래쪽에서 짜증 섞인 신음을 뱉고는 다시 침묵했다. 힌셔가 아는 와론은 아무 용건 없이 사람들, 그 중에서도 기사들 근처에 머무는 자가 아니었다. 풀이 죽다 못해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 태도로 다가왔으면서 용건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한 힌셔는 사람이 항상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더라는 걸 떠올렸다. 통찰의 눈 같은 이상스런 능력을 타고난 탓에 대화를 하던 상대보다 훨씬 정확하게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차렸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통찰의 눈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눈앞의 투구를 쓴 기사는 힌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뭔지 본인도 아직 종잡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의도가 뭐든 말을 섞어보면 알 일이었다. 마지막 계단까지 마저 올라간 힌셔는 친근해 보이진 않겠지만 목소리는 들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와론과 나란히 앉았다.

 

 “마침 잘 됐다. 잠깐 말상대나 해다오.”

 “괜찮겠어? 영웅님이랑 말 한 마디라도 섞고 싶어 안달난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직무유기 아냐? 영웅이 그래도 돼?”

 “말 섞는 게 귀찮다면 철이나 섞어보자. 나갈까?”

 “응 나중에~ 조만간 큰 건이 있을 것 같거든.”

 

 싸움을 사양하는 와론이라니 이것도 희귀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와론이 아까보다는 조금 차분해진 것처럼 느껴질까? 힌셔는 추측과 추리에 재미까지 느끼며 머릿속에서 아는 정보들을 열심히 뒤적였다. 새까만 닭이 참가 중인 특수 임무. 그러고 보니 동대륙에서 장군급이 넘어왔고 특수2기가 그자와 조우했다고 들었더랬다. 황제의 성에서 나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힌셔와 와론이 싸우면 대련이라 해도 가볍게 끝나지 않는다. 와론은 지금 그렇게 좋아하는 싸움 공부도 자제할 만큼 몸을 아끼며 대비해야 할 큰 전투를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싸우지 않을 때 와론은 무엇을 할까? 그러고 보니 힌셔의 머릿속에 있는  와론에 대한 기억은 싸우거나 싸움을 대비하는 모습들 뿐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순백의 코끼리가 오늘 낮에 재미있는 견습을 만났다면서. 네 제자냐?”

 

 힌셔가 들은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순백의 코끼리 칸덴티아가 낮에 겪은 어떤 해프닝에 곁다리로 수반된 것이었다. 와론은 무릎에 기대어 세워놓은  론누에 기대는 것처럼 머리를 기울였다.

 

 “제자는 무슨. 소꿉놀이지, 그냥.”

 “그 아이가 하필이면 너로 둔갑하는 재주를 부렸다고도 들었다만.”

 “보통은 견습이 그 코끼리한테 덤빈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냐? 그 편이 훨씬 흥미진진하잖아.”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서 물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새까만 닭으로 둔갑한 이야기는 새까만 닭 앞에서 해야 재미있지 않겠나.”

 “난 재미없거든.”

 “그러냐. 이번에 얼마나 머무나? 보고 겸 정비 때문에 들른 것이겠지?”

 “일주일. 맞아. 나 지금 휴가 중임.”

 “일주일이나?”

 “그니까 말야. 참 길지? 그치만 애들은 쉬긴 쉬어야지. 사령탑께서 이것저것 처리할 것도 있는 모양이고.”

 

 와론은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바닥으로 턱-투구의 옆면-을 괴면서 발치의 불빛 가득한 도시를 바라본다. 표정이 없는 투구임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이 저절로 상상된다. 불현듯 힌셔는 와론이 그답지 않게도 풀이 죽은 이유를 깨닫는다.

 

 “그런가. 뭘 하면서 보낼 생각이냐?”

 

 힌셔는 자신의 말이 차분하고 평범하게 들리길 바랐다. 표정을 숨기는 거라면 힌셔가 두 번째 천성처럼 잘하게 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필 상대가 예민함을 두 번째 천성처럼 지닌 자였다. 도시를 향하던 투구가 다시 한쪽으로 기울면서 이쪽을 빤히 바라볼 때 힌셔는 이번엔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힌셔가 와론이 말을 건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듯이 와론도 그 말을 뱉어놓고 스스로 자신의 평소같지 않은 상태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뭐냐?”

 “저기, 이거 좀 뻘쭘하다. 우리 이런 거 묻는 사이 아니잖아.”

 “...그냥 참고하려는 거다.”

 “당신은 친구가 없어?”

 

 자신을 숨기려고 일부러 상대의 약한 곳을 쿡쿡 찌르는 소릴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툭 던지는 것마저도 힌셔가 아는 밉살스런 기사로 완벽하게 돌아온 모습이다. 힌셔는 살짝 아쉬움을 -왜?- 느낀다.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팔짱을 끼면서 재치있게 받아칠 말을 열심히 궁리한다.

 

 자연스레 발치의 계단 아래쪽으로 눈길을 둔 힌셔는 기사의 본산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감히 발을 올릴 생각은 할 수 없어 그 앞의 광장에 두셋씩 모여 아직까지도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최고의 기사와 최악에 가까운 기사를 올려다보는 눈들에 담긴 것은 선망이기도 하고, 호기심이기도 하고, 의혹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눈, 사람들이 멋대로 퍼뜨리는 상상과 해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기사는 없다. 혹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기사가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꾸며진 모습이리라. 힌셔는 자신이 아는 이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모습을 가장 철저하게 꾸미는 기사, 자신과는 무척이나 다르고 반쯤은 적일지도 모르면서 친구에는 가장 가까운 기사에게 짐짓 심술궂은 말을 던진다.

 

 “네가 친구 삼고 싶은 인간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어서 다행이구나.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라.”

 “오, 삐졌다.”

 “안 삐졌다.”

 “삐졌구만 뭘. 그보다 슬슬 업무 복귀하셔야겠어. 팬들이 기다리잖아.”

 

 그리고 힌셔의 임무를 상기시키는 와론의 그 점잖은 대화종료선언만큼 아쉬움을 일으키는 것도 없었다. 등 뒤의 높다란 담장과 기둥에 걸린 불빛들은 두 기사에게 부드러운 빛을 씌우고 편안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계단 위를 쓸어내듯 불어든 상쾌한 밤바람이 화려한 금발과 우쭐거리는 붉은 투구깃을 둥실 띄워 흐트린다. 돌과 벽돌로 가득 채워진 도시에도 틈이 있는 곳마다 풀은 자라고 풀에 깃드는 벌레들이 아스라이 나른한 노래를 부른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다. 와론은 이미 일어나 툭툭 털고 있지만, 힌셔는 아직 일어서고 싶지 않다.

 

 “시간이 났을 때 할 일을 모르겠다면 언제든 들러라. 같이 생각해보자꾸나.”

 

 옷과 망토의 매무새를 정돈하면서 와론은 아직도 앉아있는 힌셔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짧은 침묵 후 와론이 한 손을 들어보였다.

 

 “난 필요 없는데? 그럼 수고~”

 

 긴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간 와론은 알아서 좌우로 갈라지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태연히 빠져나가 이윽고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늘 그렇듯 언제라도 어딘가로 혼자 훌쩍 떠날 듯한 가벼운 공기를 망토처럼 두른 채였다.

 

 가벼운 한숨을 뱉고 계단에서 내려온 힌셔는 다시 몰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혼자 있을 시간을 예의바르게 요청했다. 사람들은 눈치를 보고 아쉬워하고 심지어 억울해하면서도 순순히 비켜섰다. 사람들이 엿들을 수 없는 계단 위에서 두 기사가 나눈 어떤 대화 때문에 영웅께서 고민이라도 생긴 모양이라는 속삭임이 얼핏 귓가를 스쳤다. 힌셔는 어깨를 으쓱이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자제하면서 거처까지 이어지는 불빛이 환한 거리로 나섰다.

 

 자기만의 어떤 정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다 못해 밖으로 폭발시키곤 하는 저 문제적 기사에게는 휴일이 있을까? 아마 자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힌셔는 왜 자신이 그런 답을 떠올린 것일까 생각하면서 모처럼 생긴 여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워니얌님께서 주신 단문 리퀘 주제는 "잠입" 입니다. 캐릭은 별도로 지정하지 않으셨지만 제 맘대로 기린닭 선정합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캐릭 해석 등에 저의 적폐왜곡날조가 많습니다. 물론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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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다. 다워.”

 

 동대륙에 파견할 특임대가 확정된 날 그 임무에 참가한 기사들이 누구인지 듣자마자 와론이 내놓은 감상은 그것이었다. 가볍게 내뱉어진 두 마디는 언뜻 감탄처럼 들리는 어조였지만, 지우스는 와론이 생략한 빈정거림을 똑똑히 들은 기분이었다. 너네 잠입, 첩보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지우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미간을 짚었다.

 

 “어쩌라고. 그 셋 말고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어.”

 “애초에 왜 기사한테서 지원자를 받아? 잠입, 첩보잖아. 남들이랑 평범하게 섞이면서 튀지 않아야 한다고. 기사가 그게 가능해?”

 “이 일은 장군이라는 미지의 존재의 전력을 평가하는 게 목표야. 그건 기사가 나설 수밖에 없어.”

 “어차피 전쟁은 기사 대 장군의 싸움이다? 어련하시겠어요~”

 

 너희 기사들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고 힘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알지. 너희가 동대륙과의 전쟁을 어떤 태도로 준비하고 있는지 잘 알겠다. 또다시 와론이 생략한 냉소를 면전에서 들은 기분이 된 지우스는 잠시 자신에게 통찰의 눈 같은 전설적인 능력이 생기기라도 했나 스스로를 돌이켜보았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지우스는 와론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생략하면서 어떻게 발화하는지 파악할 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뿐이었다. 때때로 와론은 정말로 기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같은 기사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냉혹하게 비판했고, 지우스는 대개의 경우 그 생각에 반론할 말이 궁했다. 실은 대체로 동의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지우스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었고, 아무리 합리적인 계획을 공들여 준비해도 실무에서는 결국 정신없이 터지는 변수와 사건사고 가운데 당장 손이 닿는 수단만으로 꾸역꾸역 때워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더군다나 전쟁이 기사의 일이라면 보통의 사람들은 최대한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 -또는 사고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기사의 본능이나 다름없는 사고방식이다. 그 어떤 기사도, 심지어 지우스 자신도 장군과 대면해야 할지도 모를 위험한 임무에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을 보내는 것은 이런 지적을 듣기 전까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사로 살아오면서 신발 속의 모래알처럼 느끼곤 하던 자잘한 좌절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신, 지우스는 그 감정들을 그러모아 뭉툭한 말로 다듬어 와론을 쿡 찔렀다.

 

 “그렇게 잘 알면 네가 지원하지 그랬어.”

 “내가?”

 

 와론은 과장된 동작으로 자신의 투구와 론누와 크고 새까만 차림새를 가리켰다. 10리 밖에서도 누구나 기사 새까만 닭을 알아볼 수밖에 없는 유명한 모습이었다. 지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투구와 론누가 없으면 누구도 너를 알아볼 수 없을 거야. 의외로 신중해서 함부로 싸움을 걸지 않고, 이미 장군을 대면한 적이 있기에 장군급의 전력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으며, 여차하면 다양한 변수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강자. 생각할수록 너야말로 적임자였던 것 같군.”

 

 표정 없는 투구가 이쪽을 빤히 쳐다본다. 지우스가 농담을 하는 것인지, 진담이라면 의도가 무엇인지 톺아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으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해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당황한 것은 지우스도 마찬가지였다. 말장난이나 재치 있는 비아냥이라면 모를까, 이런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와론은 지우스의 말에서 어느 대목 때문에 신중해진 것일까? 와론의 침묵이 길어지자 지우스는 조심스럽게 한발 물러나기로 한다.

 

 “그냥 해본 소리야.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하면서 지우스는 와론의 투구를 눈짓했다. 소문에는 와론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세간에서는 기사 새까만 닭 와론의 투구를 두고 온갖 억측이 돌지만 중론은 기어스와 관련있을 거라는 추측이었고, 기사들은 그 정도면 납득했다. 기사는 떳떳하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싸우는 것을 명예로 여기지만 와론만큼은 예외다. 아무리 중앙대륙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 해도 지우스가 와론에게 투구를 벗도록 요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기사..네가 나를 면전에서 칭찬하는 건 거의 처음 아니냐? 이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무려 담청색 기린님이 나를 다 칭찬해주시고~”

 

 마침내 입을 연 와론은 론누를 짚은 쪽의 반대편 다리로 체중을 실어 몸을 기울이면서 고개를 까딱였다. 과장된 말과 어색한 몸짓에서 지우스는 와론이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을 느꼈다. 와론이 당황한 것도 그가 실제로 유능한 기사라는 건조한 사실을 지우스의 입으로 들었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상의의 주머니 속에 꽂아넣은 두 손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다. 이것은 기회다. 온 세상을 제 집처럼 활개치고 다니면서 정작 알려진 것은 거의 없는 저 투구 속에 숨은 이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빵부스러기처럼 흘리는 순간이다. 와론의 미묘한 반응과 몸짓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크게 뜬 지우스는 문득 와론이 지닌 새까만 색의 한복판에서 티끌처럼 덧없이 흔들거리는 녹색의 목걸이에 눈길을 멈춘다.

 

 소문이 맞다면 세상에는 와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다. 언젠가는 있었겠지만, 적어도 기사가 된 후로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눈앞의 이를 기사 새까만 닭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저 유명한 투구와 론누였다. 그렇다면 투구와 론누가 없는 새까만 닭은 새까만 닭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그 실없는 생각이 손길에 닳아빠진 돌조각 같은 목걸이를 바라보는 동안 지우스의 머릿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간다. 와론과 부대낀 지난 세월들이, 그가 직접 보고 겪은 숱한 시간이 어떤 그림을 이루며 재배열된다. 그 말은, 누구든 투구를 쓰고 론누를 들기만 하면 새까만 닭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눈앞의 이는 혹시 그런 식으로 기사들 사이에 잠입해 기사들을 관찰하며 매순간 어떤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누군가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뭐, 어쨌거나 걔들은 자원하기라도 했다는 점에서 다른 놈들보다는 낫긴 해. 그래도 아직 신입이나 다름없는 애송이들이니 교육할 게 많겠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는걸? 기린.”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선택한 길에선 제대로 해. 기사답게 책임을 지라고. 와론은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독설을 던진다. 방금 전의 미묘한 균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소의 와론, 지우스가 아는 와론이다. 지우스는 평소처럼 두통을 느끼듯이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답한다.

 

 와론은 도시전설이나 다름없는 색깔론의 예시가 될 정도로 손에 꼽히는 강력한 기사였다. 투구 속에 든 이가 누구든 사람들이 와론을 기사 새까만 닭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가 나린기인 론누의 인정을 받은 주인이자 격기사에 걸맞은 강자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이 와론의 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론누를 손에 잡더라도 와론의 힘만은 흉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사란,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좌절감과 과로 때문에 심술처럼 솟아난 별 것 아닌 망상이다. 지우스는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의 망상을 털어낸다.

 

 “잡담이 길어졌군. 난 다시 회의 들어가야 해서. 나중에 보자.”

 “오냐.”

 

 와론은 고개를 까딱이곤 팔짱을 끼며 근처의 기둥에 등을 기댔다. 몸을 반쯤 돌리면서 지우스는 와론의 키 크고 외로운 그림자를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사가 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하늘 아래에서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온갖 일들이 잘도 일어나고 있더란 것이다. 굳이 가능성을 따져보자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실은 그 사람이 아니더라는 일도 절대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우스는 투구와 론누가 없더라도 자신이 아는 기사 새까만 닭은 기사들의 부족함을 가차없이 비난하며 그들의 등에 창을 겨눌지언정 자신을 싫어하는 기사들 사이에 태연히 버티면서 기사의 일을 하는 눈앞의 여자 뿐일 거라고 생각한다.

 

 

 

 

 

 

 

악개빠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사저사매 하마닭" 입니다.

 *절대적인 메인은 하마닭이고 부수적으로 거미하마, 그노힌셔, 기린닭, 목와 요소 있습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캐릭 해석 등에 저의 적폐왜곡날조가 많습니다. 물론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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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힌셔님! 완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가 되자마자 트루디아는 활짝 웃으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힌셔는 마주 손을 흔들었다.

 

 “저번의 기사 최종시험 때 한번 보지 않았소? 그리 먼 옛일은 아닌 듯한데.”

 “그런가요? 전 그게 옛날 일 같은데. 시간이 엄청 빨리 가네요.”

 

 시간의 선후와 길고 짧고의 감각이 자꾸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달지, 이 몸으로 살아본 시간이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인 건지. 힌셔는 트루디아가 말하지 않은 말을 들었다. 현재의 불멸자는 다른 이로부터 믿기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을 살았던 기억을 물려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어쨌거나 또래의 세대에게 기대되는 본래의 수명도 다 살아보지 않은 젊은 사람이었다. 어제보다는 엷어진 성긴 눈구름에서 포슬포슬한 눈이 점점이 떨어지는 가운데, 트루디아는 한때나마 기사가 되기 위해 정식으로 훈련을 받으며 단련했던 이다운 경쾌하고 힘 있는 걸음으로 단번에 눈밭을 가로질러 그루터기를 올라왔다.

 

 “그래서 말씀하신 애들은요?”

 “아 싫다고오! 언니야가 하라고!”

 

 그루터기 안쪽에서 새된 소리로 고함이 터지고, 나직하고 조금 쉰 목소리가 야단치듯 뒤따른다. 툭탁거리는 소리도 조금 난 것 같다. 힌셔는 엄지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트루디아는 반사적으로 엑 하고 질린 낯이 되었다가 조금은 달관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우리 애보다 말썽쟁이겠어요?”

 

 잠투정으로 휘두른 한 방에 기사의 뼈가 금이 가게 만들었던 꼬마를 떠올리며 힌셔는 마주 헛헛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와 불멸자는 그루터기 안쪽으로 향했다.

 

 불이 피워진 나무 아래에서 백발의 아이는 토라진 티를 내며 등을 돌려 앉아있었고 갈발 아이는 딱딱한 낯으로 다치지 않은 손에 쥔 모포를 백발 아이에게 망토처럼 둘러주려 애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긴 여행을 앞두고 하나뿐인 모포를 누가 두르느냐의 문제로 싸운 모양이었다. 힌셔는 까닭 없이 낯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인데 흔쾌히 수락해줘서 정말로 고맙소. 지금은 저렇게 다퉈도 의좋은 아이들이라오. 잘 타이르면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거요.”

 “뭘요, 힌셔님이 아무 부탁이나 하시는 분이 아닌데 당연히 와야죠. 그리고 우리한테도 좋아요. 전부터 네프렌한테 친구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렇더라도 정처 없는 여행자의 삶인데 부담이 크진 않을지.”

 

 백발 아이가 벌떡 일어나 어깨에 걸린 모포를 둘둘 뭉치더니 갈발 아이에게 집어던졌다. 갈발 아이가 드디어 인내심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백발 아이가 두 그루의 얽힌 나무 뒤편으로 도망쳐버리자 갈발 아이는 자신이 몸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당장 쫓아가서 꽤나 아프게 해줬을 것이며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아프게 만들어줄 거라는 요지로 으름장을 놓았다. 백발 아이는 혀를 날름 내미는 것으로 대답했다.

 

 트루디아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싱긋 미소를 유지한 채 힌셔를 돌아보았다.

 

 “근데 제가 애들을 도중에 안 버리고 잘 돌봐줄 거라고 믿으시는 근거가 뭔가요? 전 집도 절도 없고 사실 애 키워본 적도 없는걸요. 그건 좀 궁금하네요.”

 “그대는 왜 수락했소? 그것부터 들어봅시다.”

 “. 에이. . 있잖아요, 제가 저 큰애만 한 나이였을 때. 그때도 오늘처럼 눈 오는 날이었어요. 집 없고 어디 취직하기엔 너무 어린 전쟁고아가 먹고 살 방법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터는 것 정도잖아요? 그때 만난 어떤 사람이 이따금 생각나서요.”

 “어떤 사람이었소?”

 “기사였죠. 힌셔님처럼 금발에 붉은 반망토를 걸친 사람이었어요. 나이도 별로 차이 안 나 보였는데 저를 대뜸 꼬마라고 불러서 그건 좀 그랬지만, 아무튼 엄청 강하고 대단히 올곧은 사람인 건 그냥 알겠더라고요. 그 사람이 저한테 해준 말이 있었거든요.”

 

 트루디아는 굳이 힌셔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연령대와 외모를 지닌 기사가 누가 있었는지 헤아려보던 힌셔는 트루디아의 뜻을 존중해 거기서 추측을 멈췄다. 그 기사가 트루디아에게 무슨 말을 해줬는지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 기사는 어린 트루디아에게 선을 권장하고 악을 제지하며 약자를 보호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줬을 것이다. 힌셔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대답하리다. 그대가 어리고 무력했을 때 도와준 이를 지금도 잊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트루디아는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냥, 제가 도울 수 있으니까 도우려고요.”

 

 말을 마치자마자 트루디아는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마주쳐 아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트루디아가 능숙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걸 보면서 힌셔는 다시금 간밤에 했던 생각들을 되새겼다.

 

 트루디아는 떠돌이인 고아가 처하게 되는 상황을 이해했고, 본인은 의사나 마법사가 아니긴 했지만 기억을 넘겨준 이로부터 의술과 마법의 지식을 이어받았기에 아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불멸자이기에 양측이 합의하거나 트루디아 쪽에서 포기하지 않는 한 아이들이 보호자를 잃을 일도 없었다. 존재가 널리 알려진 자는 아니며 그 어느 공권력과도 닿아있지 않기에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아이들이 그대를 잘 따르니 다행이오.”

 

 어쨌거나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힌셔는 그 사실을 납득하고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이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힌셔를 바라보면서 트루디아는 여전히 웃고는 있지만 미묘하게 흐려진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힌셔님도 역시 힌셔님이세요. 아이들이 원하는 걸 꺾어버리지 않으면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신 거요.”

 “나 혼자 생각해낸 것이 아니오. 도움을 좀 받았지.”

 “그 인간이요? 헤에... 말 나와서 말인데 새까만 닭은 어디서 또 무슨 짓 하고 있대요?”

 “그자는 빌린 걸 돌려주러 갔소.”

 

 닭은 동이 트자마자 의사의 가방을 끼고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 트루디아가 혹시라도 네프렌과 함께 올지도 모르기에 기다렸다가 얼굴은 보고 갔을 법한 자가 그런 핑계를 대며 그냥 자리를 비운 것은 아무래도 아이들 때문에 촉발된 닭 나름의 어떤 상념 때문인 듯했다. 힌셔는 그게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나면 닭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힌셔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그나저나 기사님들이 지금도 힌셔님한텐 임무를 안 주나 보네요.”

 

 무슨 이유에선지 또다시 말다툼이 붙을 듯 살벌하게 쏘아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숙련된 손길로 가져온 간식을 물려주면서 트루디아가 지나가는 말처럼 화제를 바꿨다. 힌셔는 이 젊은이도 통찰의 눈이라는 이능을 지닌 자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마침 닭도 없겠다, 힌셔는 팔짱을 끼고 나무에 편안히 기대서며 그 어떤 기사의 앞에서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 고민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내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그건 아닌 모양이라서.”

 “속상하시겠어요. 그냥 명예와 정의만을 따르는 일개 기사로 여겨지고 싶은 분인데. 그치만 힌셔님은 영웅인걸요.”

 

 힌셔는 녹은 눈을 묻혀온 발자국으로 지저분한 돌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영웅이라는 상징성이 지니는 무게 때문이든 임무 중에 흔히 발생하는 돌발상황으로 영웅의 이름에 흠이 날지도 모를 일을 완벽하게 차단하려는 것이든, 수도에서는 힌셔에게 기사의 임무를 주지 않은 채 그저 성벽 안에 머물면서 필요하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 정도만 요구했다. 500년 만에 수도에 복귀한 후로 힌셔는 기사로서 기사다운 일을 하고 있다는 효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 밖에 나왔다가 곤경에 처한 아이들을 마주친 순간 힌셔는 어떻게든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이용해 직접 보호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원치 않는 걸 알면서도 굳이 수도에 데려가고 싶었고 그것을 차선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닭은 힌셔의 가슴속에서 난폭하게 날뛰는 그 조바심과 좌절감을 꿰뚫어 본 것일지도 몰랐다. 바로 그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대련을 핑계로 이곳까지 데리고 나온 거라는 걸 이미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내가 요령이 없고 혼자서는 길을 찾지 못하고 싸우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으며 믿음을 줘야 할 어린아이들이 도리어 두려워하게 만든 자라는 걸, 영웅 같은 것이 아니라 고작 완전해지고자 애쓰는 한 명의 기사에 불과하다는 걸, 너만은 처음부터 똑바로 보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힌셔는 자신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닭이 틈만 나면 반은 놀리고 반은 비아냥거리는 조로 영웅이라 부르곤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기사사냥꾼이라는 소문이 떠나지 않는 저 치열하고 엄혹한 기사는 힌셔에게 영웅의 역할을 놓을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쭉 충고이자 경고를 하고 있었다. 고마운 노릇이지. 힌셔는, 그래도 닭이 그것으로 농담을 하려 들면 한 대 걷어차주고 싶어지는 마음 역시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냥 그런 식이었다.

 

 힌셔가 생각에 잠긴 사이 트루디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갈 채비를 하며 분주했다. 잠깐이지만 아이들을 잊은 게 부끄러웠던 힌셔는 트루디아가 가져온 두터운 외투를 아이들의 누더기 위에 입히고 단단히 여며주며 조그만 얼굴들을 머릿속에 새겼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크고 나서 다시 만난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힌셔는 자신에게 그 날을 볼 수 있을 만큼의 수명이 허락되고 또 그 세월 내내 한 점 부끄럼 없이 명예롭게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가볼게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또 뵈면 좋겠어요.”

 “종종 소식 전해주시오.”

 

 트루디아는 쇠약해져서 아직 먼 길을 걷는 건 무리인 큰 아이를 등에 업고 작은 아이는 손을 잡은 모습으로 산책이라도 가듯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거뭇한 나무바위들의 폐허를 지나 저 멀리 지평선 가득 들어선 숲으로 사라져가는 이들의 등을 바라보면서 힌셔는 트루디아도, 아이들도 한번 돌아보지 않는 것이 조금은 섭섭했다. 하지만 이것이 불멸자가 건네는 인사라는 것도 이해했다. 조만간 다시 볼 사람과는 거창하게 작별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눈이 곧 그칠 것처럼 약해질 무렵 닭이 돌아왔다.

 

 “잘 보냈나 보구만.”

 

 힌셔는 명상에 잠겨 정좌하고 있던 자리에서 두 눈만 살짝 치떴다. 힌셔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얽힌 나무들의 가지가 살짝 떨리며 얼음이 되기 직전인 눈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닭은 기사명에 어울리게도 둥지에 들어간 닭처럼 나무 위에 쭈그려 앉았다.

 

 “어떠냐. 좀 더 싸워볼 테냐?”

 “오늘은 딱히.”

 “동감이다.”

 

 힌셔가 자리를 털고 엉거주춤 일어선 그 순간 머리 위로 아찔하리만치 차가운 눈덩이가 우악스럽게 쏟아졌다.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 꼴로 선 힌셔는 머리 위에서 낄낄 웃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보려 했다. 그리고는 하마턱을 들었다. 얽힌 가지의 틈 사이로 츠츳 소리를 내며 빠르게 분출된 마력이 가지는 건드리지 않은 채 그 위에 쌓인 눈덩이만을 폭발시킨다. 졸지에 소규모의 거꾸로 된 눈사태를 맞은 닭이 벌렁 나자빠지며 나무에서 쿵 떨어진다.

 

 얼간이처럼 대자로 뻗은 닭을 내려다보면서 힌셔는 태연히 말을 걸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아이들과 작별조차 못 하지 않았느냐.”

 “아니이~ 영웅님이 이렇게 유치해도 돼?”

 “아무려면 어떤가? 이것도 나다.”

 

 힌셔의 대답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시원스러웠다. 잠시 힌셔를 올려다보던 닭은 곧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일어나 투구와 온몸에 들러붙은 눈을 털었다.

 

 “그보다 그거 그렇게 쓰는 거 재밌어 보이네. 올라서봐.”

 “올라서? 이렇게 말이냐?”

 “그래, 두 발로. 아까처럼 해봐. 공격용 말고 바람 빼는 것처럼, 그대로 위로. 어어, 앞으로 앞으로.”

 

 하마턱을 거꾸로 세워든 채 망치머리에 해당하는 두 개의 커다란 상자 같은 장치 위에 한 발씩 올리고 선 힌셔는 닭이 지시하는 대로 작동시켰다가 불안정하게 공중으로 솟구쳤다. 빙그르 돌며 흔들거리던 힌셔는 곧 감을 잡고 안정적으로 하마턱을 타며 공중에 둥실 뜨게 되었다. 끊임없이 츠츳 소리를 내면서 세계 어느 곳에나 편재하는 마력을 흡수하고 응집하여 방출하는 기계장치의 정교한 움직임이 발바닥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온몸으로 느껴진다. 발밑에는 닭과 두 그루의 얽힌 나무와 둥그런 그루터기의 잔해가 있다. 스승의 나무가 뿌리와 가지를 뻗었고 나중에는 불에 타며 무너져내려 땅속에 반쯤 파묻힌 흔적들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한 눈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에 그림자가 지면서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돌이 된 옛 나무들의 터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나무의 느린 걸음으로 좁혀오는 지금의 숲이 보인다. 힌셔는 정전기를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살짝 떤다.

 

 “훨씬 낫지?”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닭이 까닭 없이 얄미워진 힌셔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하마턱을 몰아가더니 그루터기의 위쪽 끄트머리에서 급격히 방향을 틀며 쓰러지듯이 몸을 눕혔다. 하마턱의 꼭지에서 불꽃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한 형태로 분출되던 푸르스름한 마력이 날카롭게 반원을 그리며 그루터기의 벽 위쪽에 쌓인 눈을 날려버린다. 아래쪽에 있던 닭은 다시 한번 눈을 뒤집어쓴다.

 

 투구의 정수리부터 장화까지 온몸이 눈덩이가 된 닭은 잠시 할 말을 찾는 듯 우두커니 서 있더니 이윽고 한 손으로 얼음결정과 물방울이 맺힌 면갑을 쓸어내린다.

 

 “그만하지? 내가 작정하면 왕눈싸움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왕눈싸움은 또 뭐냐?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인가?”

 “노땅 티 내기는. 근데 그거 내가 방금 만든 말이야.”

 “너 거기 딱 있어라.”

 “싫은데.”

 

 잠깐의 정적 후 힌셔는 닭의 머리 위로 맹금처럼 하강했다. 닭은 어느 틈에 집어던진 론누를 재빨리 잡아타고 맹금을 피해 도망치는 작은 새처럼 솟구쳤다. 힌셔가 뒤쫓는다. 론누와 하마턱이 수직으로 치솟고, 중력을 따라 뚝 떨어지고, 빙글빙글 꼬리를 쫓고, 경주하듯이 질주한다. 닭이 도발과 농담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소리친다. 하마턱에 매달려 당장이라도 전장에 뛰어내릴 것 같은 모습으로 날던 때와는 너무도 다른 자유로운 비행을 느끼면서 힌셔는 크게 소리 내어 야유하고, 받아치고, 웃는다. 그 뒤로 눈송이를 나풀거리며 푸른 빛의 궤적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추격을 피해 덩이진 눈구름 속으로 뛰어든 닭이 구름의 반대편으로 뚫고 나오자마자 론누를 멈췄다. 구름을 모조리 흩어버리며 뒤쫓아온 힌셔는 닭과 충돌할 뻔했다. 닭은 두 발로 서 있던 론누 위에서 머리를 짚으며 엉성하게 몸을 낮추더니 아예 바닥에 앉는 것처럼 털썩 걸터앉았다.

 

 “아 잠깐만. 나 멀미. 아오.”

 

 이겼다. 힌셔는 히죽 웃음을 꽈악 억누른 근엄한 낯으로 론누 옆의 공중에 하마턱을 세웠다. 닭이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머리-투구-를 감싸 쥐고 있는 동안 힌셔는 발밑의 풍광을 느긋이 구경했다. 잠시 후 닭도 투구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응시했다.

 

 산소가 슬슬 옅어지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지평선이 둥글게 보이며 머리 위로는 새하얀 해가 시린 빛을 내리쪼이는 창공에서 힌셔는 닭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소리 내어 묻지 않았음에도 질문을 이미 들은 것처럼 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가네. 빠른걸.”

 

 힌셔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최대한 눈을 가늘게 떴지만 닭이 가리키는 방향의 지표면에서 별다른 것을 볼 수 없었다. 저런 갑갑한 투구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닭은 남달리 눈이 좋은 기사였고, 저 멀리 설원 어딘가에서 바위인지 나무인지 물이 고인 진창인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점 중의 하나가 트루디아와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힌셔는 자신의 시력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아이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어때 보이느냐?”

 “너무 멀어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흠... 나빠 보이진 않네. 꼭 붙어있어.”

 “하도 절절해서 애틋한 사이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한시도 싸움을 멈추지 않더구나.”

 “다르니까.”

 “? 뭔가 말했느냐?”

 “저 애들은 우리가...”

 

 닭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건지는 몰라도 닭이 말한 우리에 힌셔는 포함되지 않았다. 힌셔는 알았다. 닭은 바위틈에서 아픈 아이를 처음 만난 때부터 어딘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까.

 

 닭이 힌셔의 스승에 대해 묻지 않듯이 힌셔는 닭의 목걸이에 대해 묻지 않는다.

 

 “..., 형제자매란 게 애틋하다가도 그렇게 싸워댄다잖아.”

 

 닭은 어디서 주워들은 세상의 지혜를 전하는 양 점잔을 빼며 말을 돌렸다. 힌셔는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통찰의 눈의 실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투구를 바라본다.

 

 “집에 가자.”

 

 그 말에 닭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불분명한 어조로 음, 하고 중얼거렸다. 잠시 후 두 기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하마턱과 론누의 방향을 돌려 수도로 향했다. 떠날 때처럼 돌아갈 때도 닭이 새까만 망토와 붉은 투구깃을 뽐내며 길을 선도하고, 힌셔는 그 뒤를 쫓았다. 싸움과 대화가 칼 같이 나뉘지 않았던 지난 며칠이 벌써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 같았다.

 

 자매간의 싸움이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힌셔는 생각한다.

 

 

 

 

 

그 후.

 

 수도에 복귀한 후로 성벽을 벗어난 일이 거의 없었던 영웅이 그 '기사사냥꾼'과 단둘이 성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때부터 수도의 사람들은 온갖 추측과 억측을 일삼으며 입을 쉬지 않았다. 며칠 후 돌아온 영웅과 와론이 겉보기에는 둘 다 멀쩡했고 심지어 둘이서 수도를 빠져나간 일조차 없었던 것처럼 멀뚱멀뚱 거리를 두며 각자의 일로 돌아간 후로도 그랬다. 호사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그 새까만 닭이 또다시 뭔가 영문 모를 일을 벌였고 그걸 알게 된 영웅이 일부러 날을 잡아 데리고 나가 교육을 한 것은 아닌가, 그럴 가치가 없는 새까만 닭도 포기하지 않는다니 역시 영웅은 다르다 같은 이야기였다.

 

 소문은 소문일 뿐. 지우스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 와론이 있는 곳으로 영웅을 안내하는 내내 지우스는 영웅의 전신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 와론도 당연히 눈치챘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격분한 영웅이 수도 한복판에서 누군가에게 하마턱을 휘두르기 전에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직접 상대하려 한 것 같았으니까. 적어도 지우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지금 황궁 복도의 꼭 닫힌 창문 앞에 선 지우스는 지저분한 눈이 쌓인 뜨락에서 기사들과 의원들이 말싸움을 벌이며 제각기 떠드는 온갖 소리들을 듣고도 침착한 영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언질을 받았는지 달잔이 거의 구보에 가까운 속도로 등장해 영웅과 무리의 사이에 끼어드는 것까지 본 후 지우스는 발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열어놓은 기억이 없음에도 활짝 열린 창문에 와론이 걸터앉아있었다.

 

 “그래서, 뭔데? 네 볼일이란 거.”

 

 지우스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방금 닫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유들유들하게 인사말부터 건네며 상대를 살피는 게 아니라 바로 본론을 찌르고 들어가다니, 평소의 와론이 아니었다. 하지만 심심한 것처럼 한쪽 다리를 흔들며 창틀에 앉아있는 와론을 찬찬히 살펴본 지우스는 와론이 딱히 부정적인 기분에 싸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때의 대화의 연장선.

 

 “기분은 좀 풀렸나 보군.”

 “뭔 소리야?”

 

 와론은 말에 그치지 않고 투구를 슬쩍 갸웃했다. 하지만 지우스는 와론이 딴청을 피우는 것이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지우스는 알고 있었다. 그날 어떤 이유로 자기만의 우울한 생각에 침잠한 와론이 수도 한복판에서 누군가에게 론누를 내지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처박혀 있었다는 것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영웅으로 불리는 기사와 기사사냥꾼이라는 소문이 있는 기사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별다른 상처 없이 평소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고 지우스는 만족했다.

 

 “뭐가 됐든 정리가 됐다면 됐어. 나랑 일 하나 해.”

 “싫어.”

 “들어는 보고 거절해.”

 “네가 몇 시간이고 날 찾아다녔다면서. 내가 꼭 필요한가 본데, 뭔진 몰라도 알뜰살뜰하게 굴려먹으려 들 속셈인 거잖아.”

 “기사의 미래에 관한 일이라면?”

 “관심 없-”

 “나는 특임대를 하나 더 만들고 내가 직접 이끌 생각이다. 먼저 동대륙으로 출발한 특임대가 특수1기라면, 우리가 하는 건 특수2기가 되겠지.”

 “뭘 자연스럽게 우리같은 소릴 해? 나 한다고 안 했-”

 “너에게도 그럴 가치가 있는 거래라면 어때?”

 

 달잔까지 포함하면 지우스의 특수2기에 대한 계획을 아는 자는 지금부터 세 명이 된다. 지우스는 이 계획에 와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영리한 와론이라면 수상쩍다고 생각해 바로 거절하리란 것도 예상했으며, 따라서 단계별로 촘촘하게 여러 개의 미끼를 준비했다. 우선은 진심을 슬쩍 내보이는 것부터.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임무에 신입이나 다름없는 젊은 기사들이 자원했지. 자기 손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들이 서투르기에 겪은 실수와 실패를 비웃는 놈들은 기사질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미래는 이미 글러먹은 놈들보다는 아직 자라나는 쪽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야.”

 

 하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자들도 기사다. 지우스는 지금의 기사들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들 영웅을 좋아하지만 영웅은 누구나 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영웅인 것이다. 지우스는 개개인을 놓고 보면 완전한 영웅이 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단점과 한계 투성이의 평범한 기사라도 여럿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면 영웅 이상의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한 명의 영웅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해낼 방법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특수2기다. 어때. 아이들을 가르쳐서 지금 세대보다는 훨씬 나은 기사로 키워보는 거.”

 

 하지만 지금의 기사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의 기사들은 기사를 모욕하느냐며 그저 반발할 것이다. 기사는 기사이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미신 같은 믿음이니까.

 

 와론은 그런 보통의 기사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와론을 설득하기 위해서든, 앞으로 기사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결과부터 제시해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든, 진짜 목적을 숨기는 당의정 전술을 쓰는 수밖에 없다. 우선 비교적 협력이 가능하며 믿을 수 있는 기사들을 일부 선별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거라 믿게 만들고, 다시 아이들을 매개로 기사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여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 동시에 아이들도 훌륭히 성장시킨다면. 그렇게 저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인 평범한 기사들과 아직은 어떻게 자랄지 알 수 없는 묘목에 불과할 아이들이 협력해서 지난 500년 동안 단 한 명밖에 없었던 영웅 못지않게 기사다운 일들을 이뤄내는 것을 다른 기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심지어 그 중심에 기사를 매우 싫어한다고 알려져있지만 진실은 조금 복잡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적 기사가 있다면.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투구가 지우스의 머릿속에서 바쁘게 오가는 생각들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한쪽으로 끼릭 쇳소리를 내며 기울었다.

 

 “이게 대놓고 날 구워삶으려 드네. 더더욱 수상한걸?”

 

 넌 내가 믿을 수 없어도 믿을 수밖에 없는 기사니까. 지우스는 늘 목구멍 밑에서 맴도는 그 말을 오늘도 조심스럽게 삼킨다. 지우스는 영웅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 와론을 택한 것을 믿고,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직접 보고 겪으면서 조금씩 퍼즐을 주워 모아 짜맞춰온 와론을 믿는다.

 

 그리고 지우스가 알고 있는 와론은 지우스의 입에서 미래에 대한 말이 나올 때면 농담을 하거나 툴툴거리긴 해도 싫어하진 않는 기사였다.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지만~ 네 진짜 꿍꿍이가 뭔지는 궁금한걸. 좀 더 해보라고. 거래 얘기.”

 

 기사 담청색 기린 지우스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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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닭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소재를 리퀘 주제로 주신 악개빠님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악개빠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사저사매 하마닭" 입니다.

 *절대적인 메인은 하마닭이고 부수적으로 거미하마, 그노힌셔, 기린닭, 목와 요소 있습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이번 편부터는 캐릭 해석과 핏빛 거미의 설정 등에 본격적으로 저의 적폐왜곡날조가 들어갑니다. 물론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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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눈구름 뒤편에서부터 흐릿하게 밝아오는 빛이 눈썹에 부서지는 걸 느끼며 힌셔는 이 바위가 동쪽을 향하려니 짐작했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밤새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책상다리로 앉아있었더니 기사라도 슬슬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호흡은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열은 어제보다는 조금 내린 듯한 느낌이었다. 약간의 희망을 품고 갈발 아이의 팔에 묶어놓았던 붕대를 슬쩍 풀어본 힌셔는 도로 암담해졌다. 기사보급품인 마법회로가 작동하면서 피는 그쳤지만 팔의 상처는 여전히 제대로 닫히지 않은 채였고, 언제 감염이나 동상이 일어날지 몰랐다. 기사였다면 간밤에 힌셔가 한 정도의 조치로도 벌어진 상처가 벌써 어느 정도 붙으면서 자연치유가 진행되고 있었겠지만, 아이는 기사가 아니었다.

 

 “언니야는 괜찮아? 나을 수 있어?”

 

 힌셔는 말의 무거움을 알았고 그렇기에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장담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하지만 간밤에 닭이 준 감자 말고는 먹은 것 없이 아침 끼니때를 넘긴 백발 아이가 절반 넘게 남은 식어 빠진 죽을 계속 흘끔거리면서도 손대지 않은 채 10분 단위로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점점 뭐라도 대꾸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가슴속에 꾸역꾸역 들어차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 언니는 도움이 필요하다. 닭이 돌아오는 대로 얘기를 해보마.”

 “네가 도와주면 안 돼?”

 “내가...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적구나.”

 

 힌셔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는 불이 있는 이곳에서 돌봐줄 어른이 절실했고 힌셔는 혼자 숲에 내려갔다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멀어지는 바람에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를 닭의 일을 두 배로 늘리고 싶지 않았다. 고심 끝에 행동 대신 이곳에서 아이들을 지키며 견디는 것을 택한 데 후회는 없지만, 힌셔는 스스로에게 한심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분을 읽은 것처럼 백발 아이가 힌셔의 무릎 위에 엎드려 빤히 올려다보았다.

 

 “동생은 떠난 거야? 언니 버리고?”

 “동생?”

 “까만 기사가 동생이잖아.”

 

 3초 후 힌셔는 자신도 모르게 얼간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평소의 근엄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힌셔는 아이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오해를 하여 그런 경악스러운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자와 나는 동기지간이 아니다.”

 “그게 뭔데?”

 “그러니까 자매, , 언니 동생 사이가 아니다.”

 “아니야? ?”

 

 애초에 부모가 다르다고 대꾸하려다 힌셔는 혀를 깨물다시피 하여 그 말을 삼켰다. 백발 아이와 갈발 아이는 한눈에 봐도 부모가 달랐지만 적어도 백발 아이 쪽에서는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보다도 깊은 정으로 갈발 아이를 대하고 있었다. 힌셔는 황급히 머릿속에서 단어를 뒤졌다.

 

 “...러니까 뭐라 해야 할지... 선배와 후배 사이라고는 할 수 있지. 기사로서, ...”

 

 스승이 오직 힌셔에게만 전수한 그 무술을 어째선지 500년 뒤의 사람인 새까만 닭도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 반골과 고민과 치열함과 오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에서 힌셔에게 너무나 익숙하고도 그리운 기사의 그림자를 보곤 하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자는- 그렇지만- 힌셔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엄지와 검지로 세로 주름이 깊이 새겨진 미간을 짚었다.

 

 “...아무튼 그런 친밀한 사이는 아니고. 그냥, 동료 기사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기사들은 누구나 존경하고 고개를 숙이는 전설의 영웅 앞에서 홀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존칭조차 붙이지 않은 채 불손한 언행을 서슴지 않는 닭을 몹시 싫어했지만, 힌셔는 그런 태도가 싫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닭은 의외로 싸우지 않을 때는 인격적으로 무례하게 구는 자가 아니었다. 단지 모든 기사 앞에서 너와 나 사이에 위아래 같은 건 없다는 듯이 행동했으며 힌셔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것이 힌셔가 지금의 동료기사들로부터 접하고 싶은 태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자가 있을까. 검붉은 하마 힌셔라는 기사와 임무를 함께 하거나 적어도 서로의 명예와 정의를 밝히며 말을 섞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500년 전부터 모두가 영웅으로 우러렀으니까 따르는 맹신과 맹종. 그보다도 현재의 기사들의 미숙함을 증거하는 것은 없었다.

 

 힌셔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이의 낯이 멍해졌다. 힌셔가 뭔가 좀 더 설명하려고 열심히 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때 탁 바위를 딛는 소리가 나면서 입구로 비쳐들던 빛이 새까맣게 가려졌다.

 

 “, 아직 있었네.”

 

 닭은 한 손에 론누를 들고 다른 손은 자신을 보자마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백발 아이에게 흔들어 보이며 집 앞에 산책을 나갔다 온 것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반가움과 안도감과 호기심과 야속함이 한꺼번에 가슴 속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힌셔는 핀잔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장실 한번 오래 갔다 오는구나.”

 “큰일이었거든~ 그새 나 보고 싶었어?”

 

 장작이 줄어들면서 어제보다는 작아진 모닥불 위로 뭔가가 둥실 날아가더니 백발 아이가 엉겁결에 내민 두 손 위에 떨어졌다. 큼직한 육포덩어리를 본 아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닭은 육포를 공격적으로 물어뜯느라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도 반응하지 않는 아이를 지나쳐와서 힌셔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아직도 끙끙거리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갈발의 아이를 들여다보는 투구에는, 당연하지만 표정이 없었다.

 

 “새까만 닭. 그대는-”

 “아무래도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야 싸울 맘이 들잖아. 그치? 근데-”

 

 싸운다는 소리에 벌써 육포를 절반이나 먹어치운 백발의 아이가 움찔하며 두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 전에 애기 데리고 산책이라도 하고 와.”

 “나 애기 아닌데?”

 “아닌데 애긴데?”

 “애기 아니라고오.”

 

 백발 아이의 매서운 주먹 한 대에 맞아주는 것처럼 등을 돌린 닭은 그렇게 몸으로 아이의 눈을 가리면서 어느 틈에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작은 가죽가방을 슬쩍 열어 보였다. 안을 본 힌셔는 바늘과 실, 붕대, 칼과 가위, 약으로 짐작되는 액체가 든 조그만 병 등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쓰는 치료도구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작고 낡은 가죽가방은 급하게 왕진을 가는 시골 의사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깨달음이 온 순간 힌셔는 저쪽에 치워둔 하마턱 대신 주먹으로 닭의 투구를 후려칠 뻔했다. 비행에 익숙한 닭이라면 아픈 아이를 안고 몇 시간 안에 니젤에 있는 최고의 의사에게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쯤 아픈 아이는 충분히 치료를 받으며 쉬고 백발 아이는 벽과 난로가 있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닭은 아이를 의사한테 데려가거나 의사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걸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한 것이었다. 힌셔의 충동과 생각을 감지한 것처럼 뻔뻔하게 똑바로 얼굴을 마주하는 투구, 그 안에 든 자의 눈동자를 감춘 철의 벽 앞에서 힌셔는 지그시 눈을 감고 분기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 자는 기사이고, 생각 없이 행동하지 않아. 그걸 믿자. 힌셔는 육포와 의사의 가방의 출처는 물론, 닭의 의심스러운 결정에 대해서도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말이다.

 

 “그런 재주도 있는 줄은 몰랐군.”

 “없지. 당장은 돌팔이라도 필요한 것뿐이지.”

 

 불현듯, 자신의 몸에 난 찢어진 상처를 훔쳐온 실과 바늘로 서툴게 꿰매는 사람의 모습이 힌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굴은 그가 숨어있는 어둠 탓에 흐릿해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가느다랗고 조그만 체구를 보면 아이인 듯했다. 눈을 깜빡인 힌셔는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는 투구와 다시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힌셔는 표정이 없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닭은 고개를 돌려 벌써 육포를 모두 먹어치운 백발 아이에게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였다.

 

 “애기야, 이 언니 되게 길 잘 잃어먹거든? 안 잃어버리게 잘 데리고 다녀~”

 

 백발 아이는 닭을 쏘아보더니 쌀쌀맞게 고개를 팽 돌렸다. 힌셔는 그때까지 자신의 반망토로 감싸 품에 안고 있었던 아픈 아이를 닭의 팔에 넘기고 일어섰다. 그걸 본 백발 아이가 당황하며 힌셔의 팔을 붙잡았지만 힌셔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등을 밀며 바깥으로 향했다.

 

 “알았다. 끝나거든 잠깐 나 좀 보지.”

 

 어쨌거나 생살을 꿰매는 광경은 어린아이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바위 밑 피난처를 떠나 비탈길 아래의 숲으로 내려가는 동안 발 닿는 대로 걸으면서 힌셔는 그늘진 낯으로 생각에 골몰했다.

 

 어제 내린 눈이 거의 무릎 높이까지 쌓인 탓에 눈을 밟아 길을 내면서 걸어야 했다. 힌셔가 닭에게 자기 친구를 넘긴 것이 배신으로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여차하면 뒤돌아 다시 바위로 달려갈 것처럼 거리를 둔 채 힌셔의 걸음을 따라 난 길로 따라오고 있는 백발의 아이는 검붉은 하마라는 기사의 이름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당연히 힌셔가 지닌 통찰의 눈이라는 이능에 대해서도 까맣게 몰랐다. 힌셔의 앞에 서면 고개를 숙이면서 의식적으로 눈을 내리까는 수도의 사람들과 달리 아이는 힌셔가 돌아볼 때마다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없이 자신의 분노와 원망과 속상함을 주장했고, 그러면 아이의 생각과 감정이 쉴 새 없이 힌셔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물이 그대로 얼어붙은 야트막한 개울에 다다를 무렵 힌셔는 백발 아이와 갈발 아이의 짧은 삶을 대강 알게 되었고, 머릿속은 휘몰아치는 상념으로 터질 지경이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마음이 강해지는 과정이에요. 그 말을 하며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대장간의 불과 쇠 냄새가 밴 따스한 손이 떠오른다. 힌셔는 목이 메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다.

 

 “! 버섯이다.”

 

 아이의 새된 외침에 힌셔는 마른 눈을 깜빡이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이가 힌셔를 앞지르더니 저편 기슭에서 쓰러져 얼어붙은 개울 위로 처박힌 나무에 쪼르르 달려갔다. 죽은 나무 위에 두 뼘은 되도록 쌓인 눈을 맨손으로 파낸 아이는 그 밑에서 납작하고 큼지막한 버섯 하나를 따 높이 치켜들어 보이며 의기양양해 했다. 힌셔는 미소를 지었다.

 

 “눈이 그렇게 쌓였는데 버섯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우리 언니야가 버섯 되게 잘 찾아. 언니야가 가르쳐줬어.”

 “이 나무가 버섯이 많이 자라는 나무인가 보구나.”

 “여기보다 더 많은 데도 있어. 가르쳐줘?”

 

 아이가 너무나 기대하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기에 힌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힌셔가 말리기도 전에 아이는 개울 저편의 자기 허리께까지 쌓인 눈으로 뛰어들었다. 깜짝 놀라 얼른 뒤쫓아간 힌셔는 아이가 지나갈 때마다 몸 주위에 아지랑이처럼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옷이나 몸이 타지 않도록 아주 얇게 불을 둘러달라거나, 자기 주변의 공기만 뜨겁게 온도를 높여달라는 식으로 친구들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이 대를 이어 공식으로 정리해온 마법은 배우지 않아 전혀 모르지만 마력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정도만큼은 틀림없는 천재였다.

 

 “저기도 있어! 저기도.”

 

 아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겨울에도 갓을 내민 버섯을 찾아냈다. 이미 수차례 다녀간 탓에 상했거나 너무 작은 버섯만 남은 곳을 보여주며 어떤 맛의 버섯이 있었는지 재잘대는가 하면 수상쩍은 모양과 색채를 자랑하는 건 피하며 -그래도 힌셔는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구분할 자신이 없었기에 아이 입에 들어가기 전에 꼭 기사인 자신이 먼저 시험을 하자고 다짐했다- 숲을 누비는 모습은 아이들이 사람을 피해 이 숲에서 몇 달째 숨어 살고 있다는 가혹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힌셔는 애써 밝은 화제를 생각해냈다.

 

 “버섯을 잘 찾는 요령이라도 있을까?”

 “! 버섯마다 좋아하는 나무가 달라. 봐봐, 얘는 소나무에서만 자라고 얘는 죽은 나무 북쪽으로 가면 많아. 그리구, , 버섯들은 땅속에서 뿌리가 있어.”

 “버섯에 뿌리가 있다고?”

 “뿌리, , 나무뿌리처럼! 땅속으로 엄청 크게 많이 연결돼있어. 그래서어 하나 찾으면 근처에 또 있어.”

 

 힌셔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기억 속에서 스승이 해줬던 이야기 하나를 가까스로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숲에서 수련여행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승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함부로 버섯을 채취해 먹으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면서 버섯의 정체는 곰팡이라는 것을 -힌셔는 그날 식사에 버섯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도 기억했다- 그리고 낙엽과 흙 밑에서 끈적한 거미줄처럼 온통 연결되어 있기에 버섯이 하나 보이면 근처에 같은 버섯이 또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던 것 같다. 아이는 숙달된 버섯채취가들이 그렇듯이 정령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땅밑으로 연결된 버섯의 지도가 훤히 읽히는 모양이었다.

 

 “버섯이 이리도 많으면 나무가 못 살겠구나.”

 

 힌셔가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 아이가 나뭇가지로 눈과 흙을 파헤치던 데서 잠깐 고개를 들었다.

 

 “아닌데? 버섯이 나무 도와줘. 나무랑 나무가 친구 하게 해줘. 쟤는 아팠는데 옆에 큰 나무가 쟤한테 밥 줘서 살렸어. 언니야가 그랬다고 가르쳐줬어.”

 

 힌셔는 아이가 가리킨 가느다란 나무와 수령이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큰 나무를 쳐다보았다. 두 나무 사이에는 못해도 십수 미터의 거리가 있었고, 수종도 달랐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렇게 떨어진 나무도 버섯의 뿌리...라는 걸 통해 서로 교류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냐?”

 “! 버섯 뿌리가 저 끝에서 저 끝까지 다 있어! 그래서 나무들이 나쁜 일 생기면 소문도 전한다? 그니까 숲에선 말조심하랬어!”

 

 아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스승이 버섯과 곰팡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날 들려준 또 다른 이야기 하나가 낚싯바늘로 엮인 것처럼 기억 깊은 곳에서 건져 올라왔다. 나무도 땅 위에서 보이지 않을 뿐 실은 모두 무언가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렇기에 원래 자라던 곳에서 뽑혀 다른 곳에 옮겨심어진 나무는 약해지고 쉽사리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무렵 수도에서 어떤 이유로 멀쩡하던 가로수를 뽑아버리고 새 나무를 심는 걸 스승이 심기 불편해했고, 실제로 관리가 소홀했던 몇 그루는 그 해가 끝나기 전에 말라 죽었던 것을 힌셔는 기억했다.

 

 원래 속하고 자라던 곳의 토양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연결망으로부터 뿌리째 뽑힌 채 500년 후의 모르는 숲 한복판에 억지로 심겨져 어디에도 연결될 곳을 얻지 못한 나무가 바로 자신의 꼴이 아닌가, 힌셔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언니야한테 버섯 보여주고 싶은데.”

 

 아이가 낡고 해진 옷자락에 넘치도록 모은 버섯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힌셔는 그만 산책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래. 돌아가자.”

 

 힌셔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나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눈밭을 헤치고 뛰어나갔다. 힌셔에게는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 얼어붙은 개울과 언덕과 바위와 나무를 지나 비탈길을 오르는 길은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이제 보니 바위틈의 피난처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모닥불을 지피는 동안 데워진 공기가 고드름 주변에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뭉게뭉게 수증기가 되어 피어오르는 탓이었다. 바위 앞에 나온 닭은 허리에 손을 얹은 모습으로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힌셔는 닭의 등 뒤에서 언제나 커다란 날개처럼 펄럭이던 새까만 망토가 없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론누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꺼림칙한 나린기는 닭의 눈을 대신해 하늘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 위를 흘끔 본 힌셔는 오후 늦게부터 다시 눈이 쏟아지겠다고 짐작했다.

 

 “나도 너도 아이들에게 망토를 빼앗겼군.”

 

 힌셔가 인사 삼아 건넨 말에 닭은 느릿느릿 엉뚱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걘 지금은 자고 있어. 오늘을 넘기면 어떻게든 될지도.”

 “정말로 의사 공부는 한 적 없는 거냐? 별 괴상한 지식을 많이도 알더니.”

 “불멸자가 그런 말 들으면 놀려요~ , 버섯이 풍년이네?”

 “넌 안 줘!”

 

 백발 아이는 버섯무더기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바위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밥은 먹이고 나서. 두 기사 사이에 말없는 동의가 이루어졌다. 짙어져가는 눈구름 아래 두 기사는 나란히 아이들의 피난처로 들어갔다.

 

 

 

 

 

5.

 

 닭이 어딘가에서 가져온 다른 육포 덩어리를 잘게 쪼개 넣어 국물을 내고 숲에서 채집한 버섯 -힌셔가 버섯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무작정 하나를 입에 넣으려 하자 직접 독버섯을 선별하려고 자세를 잡던 닭이 어디 계속해보라는 듯 빤히 쳐다봤고 힌셔는 조용히 버섯을 내려놓았다- 을 넣어 끓인 국이 늦은 점심으로 마련되었다. 싸움을 예감한 기사들이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덕에 배부르게 먹고 나자 백발 아이는 노곤노곤해져선 꾸벅이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도 어제보다는 국물을 수월하게 넘기며 조금은 목을 축였다.

 

 간밤부터 모닥불이 종일토록 바위틈을 데우면서 입구에 매달린 고드름의 길이가 길어졌고 장작은 다시 가득 채워져있었다. 여전히 무척 아프고 지쳐 보이는 갈발의 아이 옆에 백발의 아이를 눕히고 낡았지만 깨끗한 모포 하나-힌셔는 언젠가 닭에게 화수분 같은 동화 속의 마법주머니라도 갖고 있는지, 혹시 그런 거라면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꼭 물어보기로 결심했다-를 둘에게 덮어준 후, 이윽고 닭은 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검은 망토를 둘러 입으며 일어섰다. 밖에서 눈으로 취사도구를 닦고 돌아온 힌셔는 닭이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다소 허름해진 붉은 반망토를 어깨에 두르며 하마턱을 집어들었다.

 

 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탈길을 내려가는 동안 힌셔는 능선 너머 서쪽으로 레툰까지 펼쳐진 광활한 황야에 넘어가 하루 종일 닭과 실컷 싸워보려 했던 최초의 계획을 돌이켜보았다. 아픈 아이에게 힌셔와 닭이 해준 조치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이었고 백발 아이에게는 백발 아이대로 돌봄이 필요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낮잠에 든 백발 아이가 언제 깰지도 몰랐다. 일단 개입해서 자신의 책임 아래로 들인 아이들을 내버려 둔 채 자신의 사소한 욕심을 달래기 위하여 산을 넘어가는 것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었다.

 

 “새까만 닭. 사과하도록 하지.”

 “갑자기? 여기서?”

 “그래. 대련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너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 오지게 놀 기회야 다음에 또 있겠지.”

 

 하늘에서 소리도 없이 뚝 떨어진 론누가 닭의 손아귀 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래도 가볍게 몸은 데워보자고. 모처럼인데 그냥 돌아가면 아쉽잖아. 당신도 수도에 갇혀 있으면서 어지간히 욕구불만이었던 모양이고.”

 

 닭이 론누로 가리킨 곳을 본 힌셔는 눈 닿는 곳 어디나 빽빽하던 나무들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작은 운동장만 한 크기로 트인 땅을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싼 숲보다 지대가 조금 낮은 이 벌거숭이 땅은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나무를 뿌리째 쪼개버리고 바위를 조각조각 깨버리는 거대한 충격이 균일하게 가해진 끝에 본래는 들쑥날쑥 날카로웠을 바위들마저 판판하게 깎여있었다. 사물의 모습을 숨기고 모든 것이 그게 그거처럼 보이도록 혼란시키는 두터운 눈 때문에 조금 늦긴 했지만, 곧 힌셔는 이곳을 알아보았다. 이곳에 처음 온 날 하나뿐인 제자를 위해 직접 터를 닦았다며 자랑스럽고 조금은 쑥스러워하던 얼굴을 기억했다. 스승님.

 

 오래전에 버려진 숲속의 대련장 가장자리에서 닭은 론누를 땅에 꽂더니 어깨를 이리저리 틀어 관절을 풀며 중앙으로 걸어갔다.

 

 “맨손으로, 어때.”

 

 스승은 주먹 한 번, 목검 한 번 부딪쳐보는 것으로 제자의 상태와 기분을 단번에 파악하곤 했다. 스승과 제자의 대련은 자연스레 고민을 상담하고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대화의 자리가 되곤 했다. 힌셔는 그 대화가 지독하게 그리웠다.

 

 힌셔는 깃발 없는 깃대처럼 세워진 론누 옆에 기꺼이 하마턱을 거꾸로 세워두었다.

 

 “맞고 울지나 마라.”

 “어쭈. 먼저 우는 쪽이 지는 걸로 하고 삼세판?”

 “그럼 네가 세 번이나 울겠군. 손수건은 빌려주마.”

 “에헤이 아껴둬~ 난 울려도 안 빌려줌.”

 

 마주 보고 선 두 기사는 신호도 없이 동시에 바닥을 찼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고, 발이 허공을 베고, 이편에서 저편으로 어지럽게 치고 달리고 회전함에 따라 검고 붉은 망토가 찢어질 듯이 나부낀다. 순식간에 쌓인 눈이 모조리 날리면서 누군가가 아주 오래 전 공들여 고르게 깎은 바위 바닥이 드러나고 비산한 눈은 안개가 되어 자욱하게 깔린다. 공격이 방어에 가로막히거나 빗나가 돌바닥에 꽂힐 때마다 천둥이라도 치듯 숲이 쩌렁쩌렁 울린다.

 

 알고는 있었지만, 힌셔는 다시금 감탄했다. 두 기사가 처음으로 맞붙었을 때 닭은 힌셔와 맞상대가 되긴 하지만 조금은 아래라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1, 2년쯤 지났을까. 지금의 닭이 휘두르는 주먹은 그 사이에 또 어떤 전투를 치르고 다녔던 건지 좀 더 묵직하고, 좀 더 빨라져 있었다. , 나구나. 우리가 서로 죽일 각오로 임했던 마지막 싸움 때.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힌셔는 전술을 바꾸기로 했다.

 

 다음으로 주먹과 발이 교차한 순간 힌셔는 무게중심을 크게 낮추면서 들이받듯이 달려들어 닭의 허벅지를 두 팔로 끌어안고 넘어뜨렸다. 머리 높이로 크게 발차기를 날린 직후라 닭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입식 격투에서는 한 치도 밀리지 않았지만 그래플링으로 바뀌자 닭이 맞받아치는 반응이 조금 느려지면서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이것만큼은 타인에게 배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기술이니 독학으로 싸움을 익힌 듯한 닭은 잘 대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힌셔의 판단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그럼에도, 온몸으로 바닥에 깔린 채 꼼짝을 못하고 가능하리라곤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관절이 사정없이 꺾이는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접하자마자 눈을 번득이며 흠뻑 젖어들듯이 흡수하고 있는 자의 희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힌셔는 조금 더, 조금 더 가열차게 밀어붙이며 몇 가지 배워 익힌 기술들을 차례차례 닭에게 시전한다.

 

 다시 말해 닭은 온몸의 관절 곳곳에 돌아가며 멍이 들 정도의 부상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팔을 꺾는 기술로 돌아간 힌셔는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고집스레 저항하는 닭에게 소리쳤다.

 

 “이놈, 팔 부러진다. 포기해라!”

 “, !”

 

 조르다시피 깔아 누른 다리 밑에서 닭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위치를 바꾸며 몸을 뒤집었던 것 같다. 다음 순간 힌셔의 손아귀에서 팔이 빙글 돌며 빠져나가고, 닭은 힌셔의 등을 걷어차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꺾였던 팔꿈치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힌셔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방금 일어난 상황을 빠르게 복기했다. 닭은 그런 형태로 팔꿈치 관절을 잡혔을 때 풀려나는 방어 기술을 배운 적도 없을 텐데 스스로 깨우친 듯 얼추 비슷하게 움직여 빠져나갔다. 제대로 배웠다면 자신은 풀려나면서 역으로 힌셔에게 관절기를 거는 연계를 했겠지만 닭이 거기까지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스스로 파해법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했다. 힌셔는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싸움꾼-힌셔가 처음 떠올린 단어는 무인이었지만, 닭이 안다면 썩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 단어로 바꿔 생각했다-으로서의 닭은 나이가 어리지 않음에도 계속 성장하는 자였고, 그릇이 어디까지 깊어지고 얼마나 더 커질지 기대되는 자였으며, 정식으로 스승을 맞아 배웠더라면 지금 성취한 것이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 자였다.

 

 “욕구불만이, 내가 생각한 거랑 영 다른 방향이었나 봐? 좀 있으면 침대로 끌고 가는 거 아냐? 선배.”

 

 그 호칭을 실은 어조가 빈정거리는 투임에도 어째서 웃음을 그칠 수 없는 것일까? 시간의 얼음에서 풀려난 힌셔가 수도로 돌아가기 전의 짧고 격렬한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장난인지 모종의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투로 선배라고 호칭하곤 했던 닭은 수도에서 재회한 때부터 마치 만난 적 없는 사람인 것처럼 기사명만으로 힌셔를 부르고 있었다. 그랬던 닭이 지금 와서 다시 선배라고 호칭하자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레툰의 설원에서, 사막 한복판의 어느 동굴 부근에서, 핀타스 부근의 황무지에서 무기를 맞대며 마주 보고 선 때로 돌아간 것 같다. 힌셔는 500년 후 현재 기사들의 실상을 아직 모른 채 그저 기사 대 기사로서 정면으로 부닥치기만 하면 되었던 그때의 여정에도 자신이 향수를 느끼고 있음을 실감한다.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멀쩡하구나. 울면서 빌 때까지 해주마.”

 “어우, 영웅님의 이런 모습 애들이 볼까 봐 무섭네. 근데 진짜 뭐야? 500년 전 기술?”

 “그보다도 오래됐지. 최초의 기사가 등장하기 전에 육중한 갑주를 갖추고 싸우던 무인들의 기술이다.”

 

 닭이 방금 전까지 당한 걸 복기해 공략을 궁리하면서 체력을 회복하고 싶어 일부러 말을 거는 거란 걸 알면서도 힌셔는 술술 대답해줬다. 그 시절에는 갑주의 무게 때문에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둔해지는 걸 이용해 적장을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갑주를 씌울 수 없는 관절을 공격해 무력화하는 그래플링 기술이 무기를 다루는 법과 더불어 기본기나 다름없었다고.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지닌 기사들이 세상에 등장하고 뚫을 수 없는 금속이 없는 나린기가 점점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기사 앞에서는 인간의 기술로 제작한 방어구가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중론이 되었고, 힌셔가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던 무렵에는 이미 기본기의 지위에서 끌어내려졌다고. 이제 전장의 주인이 된 기사들의 싸움에서는 날이 갈수록 발달하는 무기가 훨씬 중요해진 반면 땅바닥에서 몸뚱어리를 맞붙이고 흙먼지를 먹어가며 뒹구는 그래플링 기술은 쓸 일이 없으니까 잊힌 것 같다고.

 

 물론 기술을 잊어버린 것은 기사들뿐이다.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으로서 군인이 된 자들은 두 발로 버티고 서서 강력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싸우는 기사들을 동경하기에 이런 품위 없어 보이는 기술을 부끄러워하지만, 여전히 기본기로서 익힌다는 듯했다. 힌셔는 원치 않아도 지난 500여 년간 기사들이 잊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어떠냐. 너도 해볼 테냐?”

 “. 이건 보는 것만으론 안 되고 당해봐야 감이 오는 부류 같은데. 당신 스승이 가르쳐준 건가?”

 “맞다.”

 

 스승은 최초의 기사를 직접 본 적이 있고 그가 등장하기 전 옛 시대 무인들의 기술을 기본기로 익힌 기사로서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했다. 아마 닭이 이런 기술을 익히더라도 기사나 장군과의 싸움에서 사용하게 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힌셔는 가르쳐주고 싶었다.

 

 “못 하겠으면 항복해도 된다.”

 “아직 아무도 안 울었는데. 첫판이 안 끝났다고. 선배.”

 

 500년의 세월을 넘어 벽공이라는 스승의 흔적을 공유하는 유이한 기사에게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뭐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다.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닭이 후 하고 긴 숨을 뱉더니 먼저 달려들었다.

 

 “그거 한 번 더 해봐.”

 

 힌셔는 기꺼이 자세를 낮추며 닭을 붙잡을 준비를 했다. 닭은 힌셔의 움직임을 매끄럽게 모방해 무게중심을 깊이 가라앉히면서 한쪽 팔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아직 서툰 감이 있었고, 힌셔는 간단하게 다시 한번 닭의 팔을 꺾으며 깔고 앉았다. 닭이 아까 했던 것처럼 몸을 뒤집으며 빠져나가려 하자 힌셔는 재빨리 팔을 놓으면서 몸에 익은 대로 팔다리를 바꿔 얽으며 닭의 다리를 잡고 무릎을 꺾었다. 닭이 짧게 신음을 뱉으며 다시 몸을 뒤집고, 다음 순간 힌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닭에게 걷어차여 비척이며 물러난 힌셔는 빠르게 눈을 깜빡여 눈에 들어간 흙먼지를 눈물로 씻어내려 애썼다.

 

 “너 이..!”

 “울었지?”

 

 새까만 닭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기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치졸해질 수도 있는 저 밉살스러운 자는 투구 밑에서 거칠게 숨을 뱉으면서도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힌셔는 끝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그래. 그렇게 동의했지. 첫판은 양보해주마. 내가 선배니까.”

 “여억시 영웅님. 이런 건 시원해서 좋다니까.”

 “두 번은 못 쓸 잔재주인 것도 알 테지? 각오해라.”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한 건지. 땅을 박찬 힌셔는 닭에게 실례를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주먹은 약간의 악감정을 담아 내질렀다. 첫판에서는 선공을 가져가려 다투고 반대로 당할 것 같으면 정면으로 맞받아치자마자 바로 반격하면서 공격적으로 임했던 닭이 이번에는 힌셔의 공격을 흘리고 피하는 데 주력하며 거리를 두다가 틈을 보아 날카롭게 치고 빠지기 시작했다. 힌셔가 전술을 바꿨던 것처럼 닭도 전술을 바꾼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공방이 오가는 사이의 탐색전이 길어지면서 서로 틈을 노리며 뱅글뱅글 도는 형국이 되자, 힌셔는 슬슬 때가 되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애들 말이다만. 네 생각은 어떠냐?”

 

 원래 하고 싶었던 대화는 이게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힌셔는 눈동자를 마주칠 일이 없는 투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닭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힌셔의 갑작스런 질문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방이 서너 번 더 오가고 맞붙었다가 다시 떨어진 후에야 닭이 입을 열었다.

 

 “예전이었으면 말토가 마법에 엄청 재능 있는 고아의 소문을 듣고 귀신같이 찾아내서 먹이고 입히며 마법사로 훈련시켰을 텐데~ 지금은 뭐, 저런 애들은 방치될 뿐이지.”

 

 힌셔는 닭이 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며 오해를 살 걸 알면서도 일부러 밉게 들리는 소리를 뱉곤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닭은 저 투구 속에 다 눌러 담지 못할 만큼 혼자 골몰하고 있는 어떤 생각들로 꽉 차 있는 자라는 것도 경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힌셔는 곧바로 의아함이나 황당함을 표하기보다는 닭의 영 뜬금없는 대답이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나온 말일지부터 생각했다.

 

 마법의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부모를 만나는 운이 그러하듯이 전적으로 우연이다. 그 재능을 연마하고 개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법에 재능을 지닌 아이가 실제로 제도권에서 스승과 동료들을 만나 정식으로 공부하고 수련하게 될 기회는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신기하고 기괴한 현상이 마법이라는 걸 알아보고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취해주는 어른이 곁에 있어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생 마법사를 만날 일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단순히 기묘할 정도로 날씨를 잘 맞추거나 불을 다루다 화상을 입는 일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테면 마을에 큰 불을 지르는 수준의 사고를 친 고아를 봤을 때 기사를 부를 생각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물론 기사들은 마법사의 존재를 잘 알았고 아직 뭘 잘 모르는 아이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 아이가 하필이면 너무 큰 재능을 지니고 너무 큰 실수를 저지른 탓에 이미 가망 없는 범죄자로 낙인찍힌다면 어떨까.

 

 시스템이 있어도 사각지대에 놓이는 약자는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 힌셔의 시대에도 아주 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는 소문이 들렸는데, 500년이 지났지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놈들이 존재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냥, 안타까워서 그렇지. 그런 썩은 동아줄조차도 쟤들한텐 사치라는 게.”

 

 닭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힌셔가 달려들었다. 선수를 내준 닭은 방어적으로 대응하며 다시 흐름을 가져올 틈을 노렸다. 하지만 대련장 바깥에 있는 것들로 생각이 옮겨가면서 두 기사의 공방은 갈수록 좀 더 가볍고, 좀 더 완만해진다. 부딪치고 피하고 다시 내지르며 주고받는 팔다리의 움직임이 싸움보다는 미리 합을 맞춘 시연에 가까워진다.

 

 “당신 생각은?”

 “작은 아이는 마법사의 그릇. 게다가 아직 한참 어리니 과거에 저지른 실수도 어느 정도는 참작이 되겠지. 수도의 마법사들에게 맡기고 내가 후견을 선다면 어떻게든 될 게다. 걱정스러운 건 큰 아이 쪽이구나.”

 “애기를 통찰했어? .”

 “본의는 아니었다. 그간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거두어 같이 도망 다녔더군. 그런데 큰 아이는 나이를 먹은 만큼 좀 더 오랫동안 혼자 생존하며 여러 일을 겪었고, 여러 일도 저질렀던 모양이다.”

 “그렇겠지. 저런 애들은 좀도둑질, 강도질 아니면 먹고 살 방법이 없어. 세상에 집 없는 고아는 흔하고 인심은 박하거든.”

 “그럼 잘 알겠군. 그렇다고 사람을 상하게 해서 경비대의 수배가 걸린 도시도 있을 정도면 더는 어린아이의 실수가 아니라는 걸.”

 

 말이 끝나자마자 힌셔는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부웅-! 힌셔의 머리카락을 벨 것처럼 차올리며 새까만 잔영이 흩어진다. 갑자기 싸움의 박자가 바뀌면서 쏟아붓는 공격에 선수를 빼앗긴 힌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수세를 취한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음에도 잡기 기술을 들어갈 틈이 없는 속도다. 자칫 살기가 실린 것으로 착각할 만큼 맹렬하게 집중된 공격들을 막고, 쳐내고, 또 막은 끝에 두 기사의 몸이 교차한다. ! 팔뚝과 팔뚝이 공격이자 방어인 형태로 맞물린 채 두 기사는 서로를 노려보고, 입술과 투구 사이로 거친 입김이 새어 나와 한데 뒤섞인다.

 

 “당신은 이미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 그럼 내 생각 같은 건 의미 없지 않나?”

 “아니, 난 네 의견을 꼭 듣고 싶다. 너는 나와 다르게 보니까.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떻지? 새까만 닭.”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힌셔는 간절히 묻고 싶다. 스승이여. 저만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답을 구하는 기사가 저와 진정으로 대화를 하게 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스승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500년 전 힌셔의 손으로 목이 베이고 매장되었다. 힌셔는 다문 입 속에서 어금니를 앙다물며 닭이 대답하기를 기다린다.

 

 그 순간 배에 툭 닿는 주먹이 느껴진다. 몸을 관통해 뒤편으로 빠져나가는 힘이 느껴진다. 여기서? 흠칫하며 등 뒤에서 닥쳐올 공격을 대비해 옆으로 빠진 힌셔는 아무런 충격도, 힘의 반동도 느끼지 못했다. 고개를 드니 닭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하늘을 올려다본 채 길게 허연 입김을 흘리고 있었다.

 

 닭이 사용한 기술은 분명 벽공이었다. 다만 힘이 접촉한 상대를 관통하는 단계에서 그치고 뒤편의 어느 벽을 통해 반사시키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것이었다. 이자가 날 놀렸군. 잠깐이었지만 자신이 눈앞의 상대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던 걸 들킨 것은 아닐까? 머쓱하게 자연체로 서면서 힌셔는 자신의 꼴이 꽤나 우습게 보였겠다고 생각했다.

 

 “, 사람들이 그렇잖아.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걸 보면 공격적으로 구는 거. 당신도 모르진 않을 것 같은데? 검붉은 하마.”

 

 그리고 다시 닭이 움직였다.

 

 도약 한 번으로 거리를 좁힌 닭이 오른주먹을 뒤로 당긴다. 그러면서 활짝 열린 닭의 오른쪽 옆구리를 힌셔가 노린다. 카운터가 들어가기 직전 난데없이 시력을 빼앗긴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진다. 힌셔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뻗는다. 주먹 끝이 노린 대로 닭의 옆구리에 꽂혔지만 다소 빗나가고 만다. 닭은 힌셔의 머리 위로 오른손에 잡은 새까만 망토자락을 뒤집어씌우면서 그대로 태클해 쓰러뜨리고 있었다.

 

 힌셔의 상체를 깔고 앉은 닭은 익숙하지 않은 그래플링 기술을 흉내 내는 대신 힌셔의 목에 걸린 붉은 반망토자락을 써서 목을 졸랐다. 그리고 속삭였다.

 

 “너희 기사들이 떠들어대는 악이라는 거, 사실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잖아.”

 

 깰 수 없는 맹세를 한 연인의 선물이며 약자를 수호하겠다는 기사로서의 다짐이 새겨진 붉은 망토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숨통을 조여드는 가운데 힌셔는 내심 쓰게 웃었다.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은 특수임무에 자원한 젊은 기사들의 등 뒤에는 우왕좌왕하며 여러 번 시험 임무에 실패한 그들을 비웃기나 하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사들이 있었다. 백발의 아이가 도저히 잊지 못하고 있는 기억 중에는 악마라고 소리치며 두 아이에게 삽과 쇠스랑을 휘두르는 가난한 농부들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에게만 들리고 보이는 것들이란 걸 몰랐기에 남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걸 사정없이 들춰내버리는 데다 한술 더 떠 여자애 주제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조그만 아이를 따돌리면서 가시 돋친 말과 생각으로 무수히도 상처를 준 보통의 사람들이 있었다.

 

 기사는 명예롭고 정의로우며 악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을 대하는 평범한 행동에도 악이 있으며, 그것은 기사의 저 강대한 힘으로도 일일이 맞설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기사들은 자기 자신이 바로 그런 평범한 악을 행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지금의 기사들은 자신이 기사이므로 악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명예로운 존재인 거라고, 그저 순진하리만치 믿고 있었다.

 

 완력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는 자가 그러는 대신 숨통을 압박하는 의도는 자명했다. 호흡이 달려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의지와 관계없이 생리적으로 눈물샘이 자극되는 가운데 힌셔는 코끝에 닿을 지경으로 늘어뜨려진 녹색의 광택 없는 목걸이를 본다. 그리고는 목걸이가 매달린 투구 밑, 쇠로 보호되지 않는 창백한 목이 보이는 틈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집어넣을 것처럼 뻗는다. 닭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후려치고, 목을 조르던 망토자락이 느슨해진 틈에 힌셔는 닭을 붙잡고 뒤집어 옆으로 구른다. 순식간에 위아래가 바뀐다. 닭의 등이 바닥에 닿기 직전 힌셔는 닭의 복부를 주먹으로 툭 친다. 닭의 등 뒤로 지표에서 투웅 하고 힘이 반사되고, 떠오를 듯 크게 들썩인 닭의 몸은 체중을 실어 온몸으로 내리누르는 힌셔 때문에 도로 바닥에 깔리고 만다. 힘이 벽에 반사된 거리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던 탓에 위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닭은 잠깐이나마 앞뒤로 두 개의 벽 사이에 낀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닭을 깔고 엎드리다시피 짓누르면서 힌셔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 악이 무서운 거다. 언제나 생각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누구나 쉽게 저지르고, 쉽게 정당화하니까.”

 “, , .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서 그 애를 악으로 규정하고 어른의, 규칙으로 처벌하는 게, , 타당한가는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저 아이들 때문에 집이 불탄 자들과 칼에 찔린 자들은? 피해를 입은 그 사람들을 위한 정의도 있어야지. 너도 그건 부정하지 않을 것 아닌가.”

 “내가 왜 말토 얘기를 한 것 같아? 빌어먹을 시스템은 결코 완벽하지 않아. 그게 죄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말토 같은 놈들이 번성하는 건 그런 틈으로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야. 장담하는데 저 애들은 공격당했기 때문에 공격하게 되었을 거다. 그걸 지워놓고 정의를 말하는 건 모순이다. 그런 게 당신이 생각하는 기사는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묻지 않나.”

 “그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퍽! 의식이 깜빡 끊겼다가 돌아오고서야 힌셔는 턱이 돌아갈 정도로 세게 강타당한 것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힌셔의 두 팔은 뇌와 별개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주먹을 내지른 닭의 팔을 잡아 몸에 배어 익숙해진 기술로 꺾고 있었다. 한순간이나마 의식이 끊긴 탓에 가감 없이 힘이 들어간 기술에 당하자 이번에는 닭의 입에서 끝내 고통에 찬 신음이 터지고 말았다.

 

 “, 항복. , .”

 

 힌셔는 즉시 팔을 놓고 일어섰다. 가까스로 부러뜨리진 않았지만 한동안 닭은 오른팔을 움직일 때마다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축축한 돌바닥에 축 늘어진 닭은 움직일 수 없는 오른팔 대신 왼손 손등으로 눈을 가리는 것처럼 투구의 면갑을 덮은 채 가슴을 들썩이며 불규칙해진 호흡을 고르려 애썼다.

 

 “결국에는 둘 다 수도에 데려가고 싶겠지.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건데? 뭐가 저 애들한테 최선이냐고. 우리가 멋대로 쟤들 미래를 결정해도 돼? 큰애는 마법사가 아냐. 잘못한 것도 있어. 작은애를 마법사들이 데려가면 둘은 반드시 갈라진다. 그건 아닌 것 같아. ... 아직은... 생각 중이야.”

 

 아직 움직일 수 없어야 하는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면서 움직이더니 광택 없는 돌조각 같은 녹색의 목걸이를 쥔다. 마치 주먹 속에 감싸 숨기려 하는 것 같다.

 

 그 단호하고, 분노로 가득하고,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한 동작을 보면서 힌셔는 비로소 닭이 완강하게 대답을 거부한 이유를 이해했다. 당초 힌셔가 닭에게 이 대화를 청한 이유는 아이들을 설득해 수도로 데려갈 방법과 아이들의 앞날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닭은 그것을 논하기 전에 두 기사 사이에서 대화의 전제가 먼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언제나 적대적인 어른들로부터 기사를 부르겠다는 협박을 들으며 살아온 저 아이들이 과연 기사를 따라 순순히 기사들로 가득한 수도에 가고 싶어 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 두 기사 중 누구도 아이들에게 묻지 않았고, 누구도 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겼지만, 힌셔는 이겼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네 말도 일리는 있군. 먼저 아이들이 뭘 바라는지부터 들어봐야 했다.”

 

 닭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도 섞기 싫은가보다고 생각하면서 힌셔는 괜시리 진흙투성이가 된 머리칼과 붉은 반망토를 탁탁 털었다. 어릴 적의 힌셔는 타인의 의지를 쉽사리 읽어버린 탓에 묻지도 않고 타인이 생각만 한 것에 맞춰 먼저 행동했다가 곤혹스러운 일을 겪곤 했다. ‘통찰의 눈이라는 이능 때문에 종종 저질렀던 그 실수는 스승의 지도와 말을 섞지 않으면 싸울 수 없다는 기어스를 받으면서 확연히 줄어들었다. 힌셔는 자신이 받은 기어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세 번째 판은 굳이 지금 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여기까지 할까.”

 “그럼 무승부인데.”

 “그런 걸로 하지. 언제든 이길 수 있는 자를 상대로 승패에 연연할 이유도 없고.”

 “글쎄? 조만간 승패에 연연하게 될걸.”

 “오냐, 언제든 덤벼보거라.”

 

 힌셔가 당연히 거절당하리라 생각하며 내민 손을 잡고 닭이 일어섰다. 힌셔는 멈칫했지만, 곧 오른팔을 부여잡은 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의 무기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힌셔가 악마기사의 목을 쳐서 명예로운 기사의 시대를 열었다면, 그노제스가 힌셔에게 선물한 최초의 마스터피스 하마턱은 기사들이 무기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시대를 열었다. 기사는 그 자신이 흉폭한 무기이긴 하나 기사 대 기사의 싸움에서는 추가로 무기 하나를 더 지니지 못한 쪽이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대세가 되고 500년이 흐른 후의 기사인 닭은 기발하리만치 창의적으로 자신의 나린기가 지닌 기능을 활용해 싸우는 자였다. 물론 무기 없이도 어지간한 기사를 제압할 수 있는 경지의 강자였지만, 언젠가 본인의 입으로 인정했듯이 강한 적 앞에서는 무기 없이 할 수 있는 게 무척이나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두 기사가 치른 맨손대련은 현재보다는 500년 전 기사들의 것에 가까웠다.

 

 하마턱을 집어들면서 힌셔는 문득, 스승의 숲으로 온 이 짧은 여행 내내 닭이 자신에게 맞춰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설마. 그리고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흩어버린다.

 

 올 때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탈길에 다다랐을 때 닭이 멈칫했다.

 

 “왜 그러느냐?”

 “입구가 너무 깨끗한데.”

 

 그 말에 고개를 든 힌셔는 바위에 매달린 고드름 부근에서 아지랑이도, 수증기 같은 연기도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의 짧은 해는 이미 능선에 걸려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눈구름은 곧 올 밤을 재촉하듯 얼마 안 되는 빛을 삼키며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오고 있었다. 하마턱을 사용한 도약으로 단번에 바위 앞까지 뛰어오른 힌셔는 모닥불이 꺼진 것을 발견했다. 공기는 벌써 휑했지만 사드라든지 얼마 안 된 재는 아직 따스했다.

 

 그곳에 아이들이 없었다.

 

 “이거, 애기가 따라와서 우리 얘기를 엿들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끝까지 듣진 않았어.”

 

 밖으로 뛰쳐나간 힌셔는 닭이 론누를 들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한 쌍의 조그만 발자국이 잘 걷지 못해 끄는 것에 가까운 조금 더 큰 발자국에 꼭 붙어 비탈 위쪽으로 향하고, 곧 모조리 눈이 녹아 흔적이 남지 않은 거뭇한 바위만이 올려다보였다. 잠시 후 먹구름 속에 묻힌 점으로 보일 높이까지 솟아오른 론누가 산과 숲을 모두 내려다보는 공중에서 창날을 아래쪽으로 향하고 꼿꼿이 섰다.

 

 “역시. 저건 속임수다. 보통내기가 아닌걸.”

 “그렇다면?”

 “산을 오르는 척하다 숲으로 내려갔다. 시야를 가리는 게 많고 곧 눈도 퍼부을 테니 론누로 찾는 건 한계가 있지. 긴 밤이 되겠어.”

 

 힌셔를 향해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이면서 닭은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눈을 마주칠 필요도 없었다. 힌셔가 지독한 길치이며 수색에 능숙하지 않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든 아이들의 처우와 관련하여 기사로서 지닌 철학 간의 충돌 때문이든, 힌셔는 닭이 곧 시작될 추적행에서 자신을 장애물로 여기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힌셔는 말없이 혼자 결정을 내리고 떠난 닭이 -스승이여, 당신께서 그때 그러셨던 것처럼- 언제 돌아올지, 돌아오기는 할지 알지 못한 채 지새운 긴 밤을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만. 나도 간다.”

 

 힌셔는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했다. 숲을 향해 날듯이 달리는 힌셔의 뒤로 쯧 혀 차는 소리가 나더니 곧 크게 망토가 펄럭이고, 닭이 길을 선도하듯 몇 걸음 앞질러 나아간다. 떨어지기 시작한 눈송이 몇 개가 기사들이 달리면서 일으킨 바람에 휘말려 어지러이 나풀거리며 떠오른다.

 

 두 기사는 안개와 밤에 잠겨 드는 헐벗은 숲으로 뛰어들었다.

 

 

 

 

 

6.

 

 얼굴을 때리는 눈이 갈수록 굵고 빨라지면서 그렇잖아도 갑갑한 호흡을 어지럽혔다. 이따금 바람이 마른 가지 사이로 웅웅거리면 가지마다 축 늘어지도록 쌓인 눈이 머리 위로 쏟아졌고, 어딘가에서는 눈의 무게를 못 이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힌셔는 만일을 위해 하마턱을 사용하는 마법의 횃불도 켜지 않고 오로지 기사 특유의 예민한 기감으로 앞서가는 이의 기척을 따라 걷고 있었다. 폭설이 쏟아지는 밤의 숲은 시각과 청각을 빼앗다시피 했고,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살을 에며 달라붙는 눈과 얼음에 피부와 몸의 말단이 얼어붙어 촉각도 잃을 판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닭이 도대체 어떻게 아이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인지 힌셔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 뭐가 좀 보이나?”

 “아무래도 숲 중심부로 향하는 것 같군. 숨을 데가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

 

 힌셔는 품에 버섯을 한가득 안은 백발의 아이와 바위틈으로 돌아가던 때에 닭이 론누로 어딘가를 보고 있던 광경을 떠올렸다. 닭은 눈이 그치고 어스름하나마 빛이 있는 낮 동안 숲 전체의 지형을 대강 살펴보면서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 넣은 모양이었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마치 이 어둠 속에서 훤히 보이는 것처럼 자신 있게 앞서가는 닭의 능력은 시력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이능이라도 있는 것일까 싶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대체 어떻게 찾는 게냐?”

 “사람이 둘이잖아. 하나는 아픈 애고, 눈도 많이 쌓였고. 흔적이 안 남는 게 이상하지.”

 “신통방통한 녀석.”

 “어휴, 눈으로만 보려 하지 말고 발밑을 좀 느껴봐.”

 

 어리둥절해 하던 힌셔는 잠시 후 닭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닭은 허벅지 높이로 쌓인 두터운 눈 속에서 허우적대며 새로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가 뚫고 가 눈이 파헤쳐진 대로 사뿐히 따라가고 있었다. 백발의 아이가 마법으로 일으킨 거대한 눈사람을 떠올린 힌셔는 왜 그때처럼 마법을 써서 흔적을 지우지 않은 것인지 의아해졌다. 어쩌면, 겨우 예닐곱살인 아이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아픈 아이를 돌보며 도망치는 데 모든 힘을 쏟느라 눈에 흔적이 남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이 저 춥고 어두운 숲 어딘가에 있다. 한 아이는 너무 어리고, 한 아이는 크게 다쳤다.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생각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서두르다가 닭과 두어 번 부딪치고서야 힌셔는 다시 닭의 걸음에 자신의 속도를 맞췄다.

 

 “아이들을 찾아도 문제다. 어떻게든 수도에 같이 가자고 설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이 상황이 수도에 가고 싶은 애들 태도 같아? 해석 재밌네.”

 

 걱정과 조바심은 쉽사리 짜증으로 전이되고 짜증은 뾰족한 말이 되어 지금 옆에 있는 이를 겨눈다.

 

 “작은 아이는 마법사의 지도가 필요하고 큰 아이도.. 나름의 지도가 필요하다. 돌팔이가 아닌 제대로 된 의사의 치료도. 수도가 아니면 어디서 그 일들을 모두 할 수 있나?”

 “그니까 왜 꼭 수도여야 하냐고. 의사든 마법사든 보호자 노릇 해줄 사람이든 딴 데서도 구할 수 있잖아? 애들이 떨어지지 않게 해줄 방법은 생각할 수 없어?”

 “그노제스에 맡기면-”

 “이보세요. 무책임한 짓이야. 아무리 당신 부탁이라도 수배 걸린 애 숨겨주는 건 부담된다고.”

 

 대장간 그노제스에서는 초대 그노제스 이래로 중앙대륙 어딘가에서 전쟁이 터질 때마다 소속 대장장이들이 달려가 전쟁고아들을 데려오고 이들을 키우며 기술을 가르쳐 대를 잇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지만 대장간 그노제스는 어디까지나 민간의 사업체이지 자선단체나 교화를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 권위 있는 자의 법과 명령이 통하지 않는 치외법권은 더더욱 아니었다. 힌셔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시대에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어디서 맡아주는지 잘 모른다. 그건 네가 나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 모르겠는데? 그딴 게 세상에 있었던 적이나 있어야지?”

 “그래? 대안이 있으니까 계속 딴지를 거는 줄 알았는데. 뭐든 말해봐라. 난 열려있으니까.”

 “생각 중이라고 했잖아. 차악 하나 내놓고 그걸로 자긴 최선을 다했다고 할 거야? 그렇게 해서 그 결과를 겪는 건 애들이다. 나나 당신이 아니라.”

 “차악이 아니라 차선이다. 그만. 이 이상 방해하면 참지 않겠다.”

 “뭐야. 말이 되는 방법 좀 찾아보자 했더니. 이제는 내가 악이다. 뭐 그런 거?”

 

 언젠가부터 두 기사는 걸음을 멈추고 마주 선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빛 한 톨 없는 어둠 속이라도 서로를 지그시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온몸에서 흘리기 시작한 은은한 살기는 모를 수가 없었다.

 

 악은 명예롭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것이다. 힌셔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그 말을 부정까진 하지 않겠지만, 한편으로는 뭔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으로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지 않냐며 석연찮아 하는 질문을 들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닭은 이미 힌셔에게 빈정거리는 것처럼 그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엉뚱한 도발이 걸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됐지만, 지금이라도 대답해야 한다면 힌셔는 각각의 상황에서 무엇이 명예롭고 무엇이 정의로운 행동인지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노제스, 생각이 많은 나를 긍정해준 그대. 나는 네가 있기에 기사가 될 수 있었어. 지금 힌셔는 견디는 게 고작일 만큼 분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도 닭의 행동이 명예롭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힌셔는 하마턱을 휘두르는 대신 닭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정녕 모르겠나? 내가 새까만 닭이라는 기사를 잘못 본 것이냐? 지금 저 숲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위험에 처해있는데 너는 고작 말다툼이나 하겠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알면 이걸 멈추지 마.”

 

 이마와 이마가 맞닿은 거리에서, 닭은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동작으로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투구-를 툭툭 두드렸다.

 

 “당신이 환멸감 느끼는 저 미숙한 기사들처럼 굴지 말라고.”

 

 악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무엇을 초래하게 될지,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새까만 닭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힌셔가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그것은 세간에서 의심 없이 영웅으로 여겨지는 존재인 기사보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에 가까웠다. 물론 기사의 명예와 정의는 각자 삶의 경험과 고찰을 통해 주관적으로 세우는 것이니 그런 생각을 자신의 정의로 삼은 기사가 있다면 그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게 힌셔의 생각이었다. 비록 힌셔가 스승의 목숨과 맞바꿔 기사의 정체성으로 정의한 명예에 지극히 회의적인 자라 해도, 서로가 서로를 거의 죽일 뻔했던 마지막 결투에서 힌셔는 닭의 기사됨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사로서의 닭은 부서질 지언정 물러서지 않을 자신만의 정의를 완성한 자였으며 기사들에게 격기사의 자격을 얻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될 것을 요구하는 자였다. 새까만 닭은 그것을 500년 전 모두가 영웅으로 인정한 힌셔에게조차도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는 매 순간마다 치열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힌셔가 500년 전의 영웅을 추앙할 뿐 스스로 완전한 영웅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기사들에게 실망한 것처럼, 새까만 닭이 현재의 기사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스승이여, 그대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완성을 추구하는 기사를 단 한 명 보았으나 하필이면 저놈이랍니다. 자신과 가장 다른 자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기사라는 것을 힌셔는 지금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질 때가 있었다.

 

 다른 기사들이 싫어하고 피하는 닭을 자신은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찾게 되는 걸 보면, 아마도 싫어하진 않는 것 같긴 했다. 힌셔는 움켜쥔 닭의 앞섶을 놓아준다.

 

 “그 생각이란 거, 아무리 늦어도 아이들을 찾기 전에는 내놓아야 할 거다. 너에게 대안이 없다면 나는 내 생각대로 하겠다.”

 “그럼 그때가 세 번째 판이 되겠군.”

 

 그리고 오늘 안에 세 번째 판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대화의 양념 삼아 맨손으로 붙은 앞서의 대련과 달리 철을 쥐고 한쪽이 완전히 패배할 때까지 치르는 결투가 될 것이다. 그 결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든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죽을지언정 항복은 선언하지 않을 것이다. 기사가 지닌 명예와 정의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자리라면, 다가올 대륙 간의 전쟁이나 두 기사가 그때 수행해야 할 역할 같은 것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문제가 된다.

 

 기사는, 우리는 본래 그런 자들이지.

 

 눈 내리는 수도에서 답이 없는 분노와 질문을 안고 그 격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상대를 찾아 몇 시간이고 헤매던 때의 기분이 되살아난다. 힌셔는 그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사실이 이상스럽게 마음 한구석을 갉는 것을 느낀다.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다툼을 끝으로 한동안 두 기사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새 또 한 겹 쌓인 눈이 발밑에서 뽀득이며 부서지는 단조로운 소리는 다시금 힌셔의 가슴 속에서 조바심을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고개를 든 힌셔는 몇 미터 앞에서 닭이 눈 때문에 폭 젖은 망토가 다리에 달라붙는 걸 성가셔하며 떨쳐내는 기척을 느꼈다.

 

 “갈수록 지형이 더러워질 거야. 애들 가까우니까 큰소리 내지 않게 조심하고.”

 

 닭이 사무적인 어조로 전달하는 말을 들으면서 느낀 게 무엇이든, 그중에서 가장 짙은 감정은 안도감과 자조였다. 힌셔는 자신이 심각한 길치이거나 야생보다는 도시의 삶에 더 익숙한 것에 딱히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닭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피부에 무수히 박히고 있는 조그만 얼음결정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힌셔는 닭이 등 뒤에 있는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걸 한 박자 늦게 떠올리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눈안개가 서린 짙은 어둠 속에서 언뜻 느껴지던 풍광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귀였다. 공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은 눈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떨거나 부딪치거나 부러지며 제각각 소리를 질러댔다. 그 살아있는 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그보다는 메마른 바위 사이를 빠져나가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암괴석이 흩어진 협곡을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다음으로 깨달은 것은 눈이었다. 하늘을 가리던 나무들이 뜸해지면서 어딘가 먼 곳에 있는 지상의 불빛을 머금어 조금은 뿌옇게 보이는 눈구름이 주위의 윤곽을 슬그머니 드러냈다. 과연 주위에는 끝이 뾰족하거나 뭉툭한 기둥 같은 것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거나 땅에 누운 채 흩어져있었다. 이 숲의 모든 곳을 가본 건 아니지만, 힌셔는 이런 곳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닭이 움찔하며 잠시 멈추는 기색을 느낀 힌셔는 서둘러 닭에게 다가가 어깨가 있음직한 높이에 손을 슬쩍 뻗었다. 닭이 돌아보는 것 같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힌셔는 닭의 망토자락이 뭔가에 걸려 부욱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방향으로 천천히 하마턱의 자루 끝을 내밀어본 힌셔는 곧 팅 하고 묘하게 경쾌한 소리를 내는 돌에 닿았다. 정말 묘하게도 꼭 가지 위쪽이 뚝 부러져 줄기만 남은 나무 같은 모양의 돌이었다.

 

 이제 허리 높이까지 다다른 눈밭에서 저런 나무를 닮은 바위 부근에 잠깐씩 쉬어갔던 흔적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지치고 힘겨워 보이는 흔적을 따라가면서 두 기사 사이의 공기가 삽시간에 긴장되었다.

 

 그 끝에서 눈구름 아래에 작은 폐가처럼 불쑥 솟은 형체가 나타났을 때 닭이 걸음을 멈췄다.

 

 “하마. . 이번엔 제발 살살.”

 “고약한 놈.”

 

 힌셔는 투덜거리면서도 하마턱을 신중하게 작동시켰다. 그노제스는 하마턱이라고 이름 붙이게 될 기계장치를 섬세하게 설계했지만 사용자가 0.01초 미만 단위에서 생사가 가름되는 전장에 서는 것을 고려해 작동법은 최대한 단순화시켰더랬다. 그리운 연인의 사려 깊고 세심하던 성격을 떠올린 힌셔는 닭이 주문한 걸 자신도 반드시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힌셔를 위해 하마턱을 만든 그노제스를 믿었다.

 

 그리고 하마턱의 꼭지에 촛불 크기의 조그만 마법의 불빛이 떠올랐다.

 

 “! 이거 봐라!”

 

 닭은 어쩌라고 라고 써놓은 것 같은 투구로 활짝 웃는 힌셔를 한번 쳐다보고는 폐가 같은 암괴를 향해 걸어갔다. 힌셔는 의식적으로 낯에서 웃음을 지웠지만 여전히 조금은 상기된 채 닭을 쫓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약하나마 광원을 지니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확실해졌다. 이 숲속에 난데없이 등장한 폐가처럼 보이던 바윗덩어리는 타고 남은 거대한 그루터기였다. 지금 남아있는 밑둥의 흔적만도 집채만 한 걸 보면 생전의 나무가 얼마나 거대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힌셔는 이 죽은 나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불에 타고 나서 석화된 거였군. 이 주변은 그런 거였어.”

 

 그루터기의 표면을 만져본 닭이 중얼거렸다. 뱃속이 뒤틀리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힌셔는 그루터기만 남은 스승의 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스승의 나무는 산처럼 거대한 만큼 가을마다 엄청난 낙엽을 떨궜는데,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나 제일 위쪽의 낙엽만 태우고 사그라드는 작은 산불이 없는 채로 몇 년을 쌓이다가 어느 날 아주 작은 불씨에 뿌리까지 타버릴 정도로 겉잡을 수 없이 큰 불이 난 모양이었다. 그런 재앙적인 화재가 한두 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번져간 불로 숲이 완전히 황폐해진 후, 불이 땅속까지 닿지 않은 곳에서부터 재를 양분 삼아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나며 그렇게 숲에 세대교체가 일어났을 것이다.

 

 아이들의 흔적은 그루터기의 세로로 쪼개지고 갈라진 틈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무 밑둥에 있었던 구멍이 사람 두 명쯤은 충분히 숙식을 할 수 있는 크기였던 걸 떠올리면서 힌셔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을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뿌리의 흔적인 경사지고 갈라진 바닥을 밟고 올라가 나무구멍의 입구였던 곳에 다다른 힌셔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조그만 마법의 불빛이 일렁이는 하마턱을 치켜들었다.

 

 스승의 나무는 화재를 겪고 세월의 풍상을 맞으면서 나무구멍의 천장을 이루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부러지고 무너져내렸던 것 같았다. 그루터기 안쪽의 공간은 벽만 남은 채 하늘이 열려있어 마치 지붕이 날아간 폐가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힌셔의 기억 속에서 사람이 없을 때면 텅 비어 있었던 공간 한복판에는 헐벗은 가지마다 무겁게 눈을 얹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 보통의 나무들은 가지를 뻗을 때 수종을 불문하고 서로 불가침조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경계를 사이에 둔 채 서로 얽히지 않도록 피해가며 자라난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떨어진 곳에 서 있으면서도 마치 처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때부터 치대고 싸워댄 것처럼 가지 일부가 얽혀있었다. 여름에 봤다면 나무 두 그루가 자연적으로 이룬 시원한 그늘막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름의 폭염 대신 겨울의 눈발을 막아 떠받치고 있는 두 나목 사이에는 그루터기 안의 다른 바닥과 달리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그곳에 아이들이 있었다.

 

 푹 젖은 눈투성이의 모포를 같이 두르고 벌벌 떨면서 웅크려 앉아있던 아이들은 가지 위쪽을 비추던 하마턱의 불빛이 내려와 자신들을 향하자 젖은 눈으로 두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갈발의 아이가 모포를 떨어뜨리며 일어섰다. 아이의 손에는 날이 빠진 단검이 쥐여 있었다.

 

 “결국... 기사님들이, 오셨네요.”

 “언니야 하지 마! 그러지 마!”

 

 덩달아 모포를 벗어버리고 일어선 백발의 아이가 애원하며 큰 아이의 옷자락을 연신 잡아당겼다. 퀭한 눈에 어두운 빛을 띤 갈발의 아이는 깨끗한 붕대가 감긴 팔로 작은 아이를 등 뒤에 숨기듯이 떠밀었다.

 

 “얜 제가, 시킨, 대로만 했어요. 저만 잡아, 가고, , 얘는, 좋은, 사람들한테, .”

 “무슨 소리야? 언니야가 왜 잡혀가? 내가 했어! , 내가 때리고 불 냈어! 다 내가 잘못한 거야!”

 

 한순간 갈발의 아이의 낯에 그 나이대의 아이가 지녀선 안 될 지친 표정이 스쳤다. 동생 같은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갈발의 아이는 뭐라 입을 열려다, 그대로 힘이 다했는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백발의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조그만 몸으로 갈발의 아이를 감쌌다.

 

 “데려가지 마! 도와준다고 했잖아. 제발 데려가지 마요.”

 

 백발의 아이가 소리 내어 오열하는 가운데 갈발의 아이도 내리깐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던 힌셔는 하마턱을 짚고 미동도 없는 동상처럼 망연히 서 있었다.

 

 닭이 옳았다. 아이들은 결코 수도에 갈 생각이 없었고, 서로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힌셔는 닭을 힐끔 곁눈질했다. 닭은 자신의 생각이 옳은 걸 확인했다 해서 기고만장해지는 자는 아니었다. 우두커니 서서 자기만의 상념에 잠긴 채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녹색의 돌조각 같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자신이 옳았다는 것에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힌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툭 나왔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밤을 나도록 하지.”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자. 날이 밝을 때까지만이라도. 힌셔는 닭을 향해 서툴게 화해를 청했다. 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닭은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며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를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곧 탁탁 소리를 내며 조그만 불이 지펴졌다. 벽처럼 둘러선 그루터기의 잔해 덕에 눈바람이 직접 들이치지 않는 데다 가지를 얽은 두 그루의 나무가 지붕처럼 쏟아지는 눈을 받아내고 있는데 불기까지 생기니 제법 아늑해졌다. 두 기사는 우는 아이들을 달래 불 앞에 앉히고 모포를 둘러준 후 바람막이처럼 양쪽 끝, 두 나무의 뿌리 위에 앉았다. 기사들이 당장은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을 것 같아도 내일이 되면 알 수 없기에 아이들은 끊임없이 불안해했지만, 결국에는 눈 속에서 오랫동안 숲을 헤맨 피로에 잠겨들어 앉은 자리에서 서로 끌어안은 채 머리를 맞대고 잠들었다.

 

 피로 이어진 동기지간은 아니라도 아이들에게는 기사조차 끊을 수 없는 결속이 있었다. 힌셔는 자신이 지독하게 그리워하는 그것이 500년 전에 완전히 끊어진 것을 알았다. 뿌리째 뽑혀 엉뚱한 곳에 심겨진 나무. 그렇지만 힌셔는 스승이 목숨을 바친 뜻을 받들어야 했다. 이 시대의 미숙한 기사들을 위해서라도 기사, 완전한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삶에서 개인적인 연결과 정을 구하는 것은 사치일 터였다.

 

 꺼져가는 불의 연기 같은 입김을 흘리면서 힌셔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데서 나무가 자라다니 기묘하군. 죽은 나무의 마지막 싹인가.”

 “하나는 그럴 수도 있겠는데 다른 건 아닌 듯. 나무가 달라.”

 

 닭의 말을 듣고서야 힌셔는 두 나무가 종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그만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비추며 자세히 살펴보니 둘은 껍질의 색깔과 질감은 물론 가지가 뻗어 나가는 형태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나무가 다 나무 같이 생겼지 뭐란 말인가?-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닭의 설명을 들으니 하나는 스승의 나무와 같은 종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숲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나무라는 듯했다. 불에 타고 돌로 변한 그루터기는 나무가 뿌리를 뻗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두 나무는 악착같이 바위가 된 갈라진 틈 사이로 뿌리를 내렸고, 끈질기게 열린 하늘을 향해 자라났다. 힌셔는 스승과 백발의 아이가 말했던 숲의 연결망을 떠올렸다. 버섯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나무는 그루터기 바깥의 숲으로부터 단절된 채 미워하는 서로에게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힌셔의 상념 속에서 연상에 연상을 거쳐 누군가의 얼굴로 이어졌다.

 

 “방법이 떠올랐다.”

 

 닭이 무시하는 것처럼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이려다 멈칫했다. 힌셔의 낯을 본 닭은, 뭐라 딱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어디 있는지는 알고?”

 “다 방법이 있지.”

 “그럼 뭘 기다려?”

 

 힌셔는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참지 않으며 한참을 뒤진 끝에 품에서 잔뜩 구겨진 조그만 종잇장을 찾아냈다. 힌셔가 일부러 험하게 다룬 것이 아니라 쓸 일이 자주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방치한 탓에 허름해진 것이었다. 종이의 주름이 최대한 반듯하게 펴지도록 살살 문지르면서 힌셔는 이 마법회로가 아직 작동하길 간절히 바랐다.

 

 기사보급품이 아니라 알던 마법사가 개인적으로 만들어준 마법회로에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용건을 작성하고 전송시키기 전, 힌셔는 잠시 닭을 쳐다보았다. 투구의 옆면을 찌르는 끈질긴 시선을 느낀 닭이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돌아보았다.

 

 “? ? 또 뭐?”

 “...아니, 아무것도.”

 

 힌셔는 생각했다. 닭은 처음부터 힌셔가 이제야 떠올린 그 인물을 생각한 것은 아닌지. 다만 과거의 악연 탓에 자신이 그 인물과 당장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힌셔가 과연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 고심하느라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대안을 무작정 주장한 게 아니라 힌셔가 떠올릴 때까지 기다린 거라면, 사실은 닭도 기사로서 지닌 자신의 정의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기사가 단 한 명이라도 있기를 아주 조금은 소망하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닭은 힌셔가 이 시대에서 만나 이미 연결된 나무인 것은 아닌지.

 

 하지만 닭이 말하지 않는다면 힌셔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늘 그랬듯, 힌셔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기로 한다.

 

 그로부터 하루 후, 스승의 숲으로 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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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버섯과 곰팡이의 균근망이 숲의 나무와 어떻게 공존하는지, 더 나아가 서로 종이 다른 나무끼리도 우드와이드웹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좀 더 알고 싶으신 분들께는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라는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버섯과 곰팡이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게 하며, 무엇보다도 무지 쉽고 재밌게 쓰인 과학교양서입니다. 나무들 사이의 균사체 네트워크를 처음으로 연구한 수잔 시마드라는 과학자의 테드 강연도 추천합니다.

겨울철의 버섯 채집은 <야생의 식탁>이라는 책을 참고했습니다. 일전에 제가 도서관마다 300번대인지 800번대인지 의견이 분분하더라고 트윗했던 그 책입니다. 다 읽고 보니 800번대가 조금 더 적절한 것 같긴 합니다.

와론의 정의와 관련된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참고했습니다. (완전히 같진 않음) 있는 개념을 가져다 와론한테 붙인 건 아니고요, 반대로 애늙과 외전과 잔불의 현재까지 연재분을 통틀어 와론의 언행을 보고 얘의 정의는 뭘까 생각한 끝에 떠오른 게 이거였습니다. 와론이라면 악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겠구나 하고요.

 

다음 편은 별 일 없으면 목요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트위터의 잔불의 기사 팬덤에서 현재 진행 중인 사건과 관련하여 문수님과 공동으로 입장문을 올립니다.

 

더보기

 

편의상 "님" 존칭은 제외하겠습니다.



1. 표절 의혹 제기의 경과

<문수, 견습기사의 의혹 제기>

 *11.15. 오후 9:49 문수의 의혹제기: https://twitter.com/_mun_su_/status/1724771719133720981

 *11.15. 오후 9:56 견습기사의 의혹제기: https://twitter.com/Old_Tavern/status/1724773288151576871

이때 문수, 견습기사는 의혹을 제기했을 뿐 대상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목적은 특정인에 대한 "저격"이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한다, 보고 있다, 그러지 말자 분위기 환기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동인판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이후 키온이 혹시 자신에 대한 이야기냐, 문수, 견습기사의 연성을 본 적이 전혀 없다, 영향 받을 까봐 일부러 다른 글러의 글은 보지 않으며 교류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립니다. 
현재 키온의 해당 트윗은 검색되지 않지만 키온의 포스타입 해명글에서 관련 언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15. 오후 11.41 견습기사의 2차 의혹제기: https://twitter.com/Old_Tavern/status/1724799903304687753

이에 견습기사가 2차로 의혹제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키온의 팬픽을 직접 언급해 어느 부분에 의혹이 있는지 트윗을 올렸습니다. 

참고로 키온은 과거 문수의 천악au 시리즈에 감상 댓글을 남긴 바가 있습니다.

 


<키온의 1차 해명>

11.16. 오전12:16 키온의 해명: https://twitter.com/Kion1113/status/1724808479398113647

이때 키온은 해명문을 올리면서 포타에 팔로워가 6천 규모인 타 장르 계정에 위 해명문을 알티했으며, 최초 해명글에는 문수의 트위터 계정 및 카톡명과 견습기사의 트위터 계정 캡쳐가 여과없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추후 제3자의 지적을 통해 수정 이루어짐)
https://x.com/silver_2dk/status/1724977280076976171?s=20

계정을 가리는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 문수, 견습기사의 지인 몇 분이 공계에서 의혹에 동의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문수, 견습기사는 그분들을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사전에 그분들과 약속된 일이 아닐 뿐더러, 무서웠으니까요. 키온의 팬 분들이 6천 팔로워나 있는 타 장르 계정에 계정 자체가 노출되었기에, 타 장르에서부터 영문도 모르고 사이버불링을 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키온이 포스타입에 첫 해명문을 올렸을 때 달린 댓글은 잔불을 파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분들의, 키온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다수였습니다. 문수, 견습기사에게 동의하는 목소리를 낸 지인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타 장르로부터 사이버불링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에 "의혹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표한 것이었습니다. 키온 측에서 자신이 사이버불링을 당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 적어도 문수, 견습기사는 자신들이 확인할 수 있는 공계에서 누군가가 키온에게 원색적인 욕설을 하는 것은 본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지나친 행동이고 잘못입니다. 이 부분은 직접 증거를 가져오시면 저희가 확인하겠습니다.

 


<11.17. 배곰, 삼햄 등의 트윗>

배곰: https://x.com/love_cansaveus/status/1725442128350941633?s=20

삼햄: https://x.com/ashenhamster/status/1725466332316286998?s=20

그때 키온을 지지한 분이 몇 분 더 있지만 이 두 분의 트윗을 올린 것은 시간적으로 앞서고 대표성이 있으며 이후로도 이분들의 이름이 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곰을 시작으로 배곰에 동조하여, 단순히 중재를 하는 걸 넘어 문수, 견습기사를 적극 비난하는 제3자가 늘어나자, 이에 문수는 계정에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타 계정에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괴로움을 호소한 뒤 한동안 모든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견습기사가 다음 트윗을 작성했습니다.


11.17. 오후11:32 배곰, 삼햄 등에 대한 견습기사의 답변: https://twitter.com/Old_Tavern/status/1725522399272329520

오전 1:50 11.18. 견습기사의 추가 멘션(곱창김님께 답변): https://twitter.com/Old_Tavern/status/1725557010249457858

견습기사의 발언은 아마도 문수가 잔불판에서 지닌 영향력(추정)을 동원해 키온을 사이버불링할 것이다 같은 협박으로 읽혔던 듯합니다.

아래쪽에 곱창김님에게 답변한 멘션까지 보시면 그런 내용이 아니라, 문수가 이렇게 안 좋은 일로 계정에 접속하지 않게 된 것이 앞으로 잔불판에 미칠 영향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하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수, 견습기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키온과 교류하지 말라거나 언급하지 말라거나 대놓고 비방을 해달라는 식의 행동을 한 일이 전혀 없으며, 제3자인 주변 분들도 이후 이 일을 공계에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이버불링으로 정의될 행동을 한 바가 없습니다.

이걸 끝으로 문수와 견습기사는 공계에서 더이상 해당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키온의 입장은 확인했고, 서로 의견차가 분명해졌으므로 조용히 각자 갈 길 갈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문수와 키온은 맞블락을 했고, 견습기사는 키온을 뮤트했습니다. 문수는 한동안 잔불계에 접속하지 않았으며, 키온은 한동안 비계로 지냈습니다.
이날 이후로 문수, 견습기사는 물론 이들의 주변 지인들도 문수, 견습기사가 아는 한 공계에서 키온에게 추가로 사과를 요구하거나 일을 거론한한 일조차 전혀 없습니다.

 

 


2. 그 후 경과

그렇게 일단락된 후, 각자 갈 길 가는 것으로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생각했습니다만, 12월말 갑자기 삼햄에게서 문수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당사자인 키온이 아니라 제3자인 삼햄이 문수에게 오픈카톡으로 연락해서 키온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문수는 물론 의혹을 제기한 것에 사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3자인 삼햄이 저때로부터 한달 이상 시일이 지난 후 문수에게 일방적으로 사과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때의 스트레스로 문수는 지금도 병원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곧이어 역시 제3자인 배곰이 문수에게 디엠을 보내 저때의 사건을 언급하며 교류를 계속할 것인가 여부를 물었습니다.

이때 배곰은 문수와 교류 중인 다른 제3자에게도 문수 등과 교류를 계속할 것인지 여부를 묻거나,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묻는 디엠을 보냈습니다.

이상한 것은, 똑같이 의혹을 제기했음에도 견습기사는 문수와 달리 이러한 연락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견습기사는 키온, 배곰, 삼햄 중 누구도 블락하지 않고 뮤트만 했기 때문에 연락을 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트위터 시스템의 오류 문제가 아니라면 견습기사는 지금까지 저 세 사람으로부터 단 한 건의 연락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견습기사는 11월 이후 계속해서 각자 조용히 갈 길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3. 키온의 12.30. 및 12.31. 2차 입장

12.30. 오후10:47 키온의 입장: https://twitter.com/Kion1113/status/1741093740104847538

이어서 키온이 문수, 견습기사를 언급하거나 이들과 교류하는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습니다. 

12.31.오후1:29 키온의 입장: https://twitter.com/Kion1113/status/1741315581620670602

또한, 문수와 견습기사가 의혹 제기로 키온을 괴로움에 빠뜨려놓고 자신들은 이후에도 즐겁게 덕질한 것이 보기 괴롭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렸습니다.

 

 


3-1. 배곰 및 삼햄의 12.31. 입장

배곰:  https://x.com/love_cansaveus/status/1741257706772799616?s=20

삼햄: https://twitter.com/ashenhamster/status/1741112541668135239

삼햄은 이 상황을 방관하지 말아달라 합니다.

 

 


4. 입장

의혹 제기와 관련하여, 문수와 견습기사는 11월에 키온이 표절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냥 "영향 받았다" 정도만 말씀해도 그렇군요 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키온은 표절을 부정했고, 문수와 견습기사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이 키온의 입장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입장 차이는 좁혀질 수 없을 것이므로 문수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견습기사 역시 그 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초 문수, 견습기사는 의혹을 제기했을 뿐 대상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목적은 특정인에 대한 "저격"이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한다, 보고 있다, 그러지 말자 분위기 환기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동인판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닉을 특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키온을 제외한 다른 분께서도 포스타입에 글을 연재하는 중이셨으며, 그 분께서도 문수의 의혹 제기 이후 찾아오셔서 혹시 자신의 일이냐고 여쭙기도 했습니다. 당사자를 특정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키온만이 아니라 다른 분도 혹시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응하지 않고 넘어가면 그대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문수, 견습기사는 새로운 글러가 잔불판에 등장한 것을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이 점은 문제 제기가 된 연성들이 등장하기 전에 두 사람이 각각 키온의 다른 연성에 인용알티로 남긴 감상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랬는데 저런 의혹이 발견되자 문수는 그때부터 이미 혼자 착각해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정신적으로 굉장히 괴로워하며 탈덕까지 생각했고, 견습기사도 충격을 받아 잔불 연성은 이제 그만둬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 다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며 괴로워하다가 연성을 읽은 다른 분들로부터 말을 듣고서야 혼자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어 의혹 제기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수, 견습기사는 키온의 생각과 달리 11월 이후로 지금까지도 덕질을 하면서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문수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겪음과 더불어 현재 정신적인 증상을 겪어 진료를 예약 중이며, 견습기사는 소화기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모두가 보는 공계에서 트친들을 대상으로 괴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제3자인 분들 앞에서 적절한 행동은 아니기에, 괴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전처럼 즐겁게 덕질을 하는 척 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괴로움을 당사자만이 아닌 불특정다수가 보는 공계에 호소하는 행동이 제3자들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 일을 11월 상태 그대로 묻어두고자 했던 것뿐인데, 이것이 즐겁게 덕질하는 걸로 보였다면 유감입니다.

한편 키온은 최근들어 공계에서 저런 말을 하며 제3자인 분들에게 자신과 문수, 견습기사 사이에서 교류를 정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지인들이 눈치 보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요? 문수, 견습기사는 각자 블락이나 뮤트만 하고 지인들에게 관련자들의 트윗을 타임라인에 공유하지 말아달라 같은 소리는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문수, 견습기사는 키온, 배곰, 삼햄의 트윗과 연성이 타임라인에 넘어오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트위터는 기본적으로 공개된 곳이고 일론 머스크가 방치하는 한 뮤트한 트윗이 알티를 통해 여과 없이 넘어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3자가 누구와 교류를 하든 그분의 자유죠. 어떻게 우리가 남들더러 누구와 교류를 해라 마라 같은 소리를 하겠습니까? 지금 눈치 보는 분위기는 누가 만들고 있습니까? 

또한 배곰, 삼햄 등 제3자가 계속해서 공개적/비공개적으로 문수, 견습기사를 저격하고 주위의 다른 제3자들에게도 방관하지 말라는 등의 말씀을 하는 것은 어떤 의도인가요? 그냥 키온이 정서적으로 힘드니 지지해달라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더 나아가 문수, 견습기사를 판에서 쫓아내달라는 의미인가요? 제3자인 여러분이 이 일에 계속 말을 더하면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문수, 견습기사 측은 키온, 삼햄, 배곰으로부터 사이버불링을 당하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지금껏 잔불 교류회 등 행사가 있는 데다 문수, 견습기사 및 키온 사이의 일이지 제3자인 분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므로 잔불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 조용히 있었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공개저격을 당하고 심지어 제3자인 분들께 문수, 견습기사와 계속 교류할 거면 자신은 교류를 끊겠다는 식의 말씀을 하고, 그것이 수십알티가 되고, 반대로 문수, 견습기사 측에 이게 무슨 일인지 묻는 분은 전혀 없으니, 괴롭습니다.



문수와 견습기사는 오늘 이후로 일이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을 원합니다.

1. 당사자 3인인 문수, 견습기사, 키온은 각자 갈 길을 가길 바랍니다. 문수, 견습기사는 키온의 글에 의혹이 있다 생각하고, 키온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11월에 이미 당사자들의 의견 표명은 끝났으며, 이 상태에서 더는 의견이 좁혀질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니 이후로는 각자 갈 길을 가며 덕질하면 됩니다. 트위터에는 블락과 뮤트 기능이 있습니다.

2. 제3자는 관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초에 배곰의 트윗에서도 언급했듯이 제3자는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배곰, 삼햄을 비롯한 제3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침묵한다느니, 방관하지 말라느니 하면서 관여할 것을 선동하지 말아주십시오. 그것이 사이버불링입니다.

3. 또한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당사자 대신 상대측에 연락해 사과 기타 행위를 할 것을 종용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제3자입니다.

4. 제3자가 누구와 교류하든 참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당사자 세 사람과 전혀 상관 없는 그분들의 자유입니다.

새해에 타임라인의 분위기를 흐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오해가 퍼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어 소명하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남은 연휴 평안하고 즐거우시기 바랍니다.

 

 

 

 

 

악개빠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사저사매 하마닭" 입니다.

 *절대적인 메인은 하마닭이고 부수적으로 거미하마, 그노힌셔, 기린닭, 목와 요소 있습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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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힌셔는 최초의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다고 정확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돌이켜봤더니, 어렴풋이 느끼던 위화감의 중심에 불쾌감이 있었고 불쾌감을 느낀 일이 두어 번 겹쳐지자 직관처럼 실망감이 찾아왔으며 실망감은 곧 분노로 전이된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거듭되면서 쌓여온 좌절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날을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훗날의 일이다. 지금 힌셔는 나풀거리며 흩어지는 눈송이 사이로 입에 불을 머금은 용처럼 연기 같은 숨을 흘리면서 그저 앞으로, 앞으로 걷고 있었다. 벽이 가로막으면 뛰어넘고,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고, 막다른 곳이면 뒤돌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감히 말을 거는 자는 없었고, 설령 그런 자가 있다 해도 힌셔에게는 답할 말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힌셔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무뚝뚝하게 미로 같은 수도를 배회하는 내내 힌셔는 앞뒤와 좌우에서, 위와 아래에서 자신에게 오래도록 따라붙는 눈들을 느꼈다. 어느 눈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그 눈동자들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고, 그랬다가 자신이 무슨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 미숙했던 어린 시절에 악몽처럼 따라다녔던 그 두려움은 상대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을 때조차 시선만은 아주 살짝 비껴내어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치지 않는 기술을 익힌 지금도 때때로 머릿속 한구석에서 불쑥 튀어나와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눈들에서는 최초로 기사가 된 여자였기에 가는 곳마다 길게 따라오던 시선들이 연상되었다. 마치 여기서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진기한 무언가를 보는 눈. 그 뒤에 있는 감정과 생각이 경멸과 불건전한 흥미에서 경의와 흠모로 바뀌었다 해도, 각자의 생각과 감정으로 소란스러운 수십 수백 쌍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 앞에 홀로 노출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힌셔는 500년의 시차가 있는 이 시대에도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다는 익숙함을 느낀다.

 

 그렇게 방향이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걸음을 갑작스레 정면으로 끼어든 누군가가 막아서자 힌셔는 짜증이 나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자를 찾으시려면 이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샛노랗게 보일 정도로 짙은 금색의 눈을 곁눈으로 흘끔 보면서 힌셔는 담청색 기린이라는 기사명을 조금 늦게 떠올렸다. 한순간 이 자에게도 통찰의 눈같은 능력이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직접 말을 건 자에 대한 예의로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한 힌셔는 곧 기린이 순수하게 관찰력과 논리를 사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알아낸 거란 걸 깨달았다.

 

 “내가 그 자를 찾는 건 어떻게 알았소?”

 “하마님께서 몇 시간 째 산책을 하시며 지금 수도에 있는 기사들을 거의 모두 만났지만 누구 앞에서도 멈추지 않으셨으니까요. 지금 시점에서 남은 자는 저와 새까만 닭, 그자 정도죠.”

 “나를 감시하고 있었나.”

 “그건 아닙니다. 마침 저도 일이 있어 새까만 닭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게 아니오?”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다. 그곳에도 없으면 새까만 닭은 지금 수도에 없다고 봐야 합니다.”

 

 힌셔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닭이 마음먹는다면 누구도 그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린에게서는 조용한 확신이 보였다. 기린의 말이 거짓이나 허풍은 아닌지 판별하는 거라면 그의 샛노란 눈동자를 들여다볼 필요조차 없었다. 기린의 모자에는 닭을 찾아 도시를 헤맨 몇 시간 동안 쌓였다가 녹고 다시 얼어붙은 얼음조각이 붙어있었으니까.

 

 불현듯 힌셔의 머릿속에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륙 간의 전쟁에 대한 무거운 논의가 어느 틈에 격기사와 자유기사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며 혼란스러워진 회의장에서 팔짱을 끼고 선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투구를 쓴 기사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바로 왼편에 서서 장내를 지켜보다 회의가 끝날 무렵 짤막한 대화를 주고받은 자가- 네가 기사를 곁에 용납한다고? 잠시 흥미가 동했지만, 힌셔는 그쯤에서 슬쩍 눈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린은 앞장서면서 자연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힌셔가 혼자 헤매는 동안에는 몇 시간째 보이지 않던 길이 순식간에 열렸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힌셔는 기린과 더불어 황궁 뒤편에 자리한 바위산을 오르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니젤에서 북쪽에 우뚝 솟은 바위산은 산자락에 안긴 황궁의 부속 건물 대부분을 내려다보는 높이이기에 경호상의 이유로 황제의 호위기사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불문율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호위이자 대리인 순백의 코끼리는 볼품없이 크기만 할 뿐 경호와 안전을 이유로 일체의 폭력행위가 금지된 바위산에 관심이 없어 이곳을 거의 찾지 않았고, 코끼리의 호전성과 자존심을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은 기사들과 일반인들도 알아서 기피하면서 자연스레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버려지다시피 한 장소였다.

 

 새까만 닭은 바위산 꼭대기의 가장 높은 바위 위에 드러누워 눈을 맞고 있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누워있었던 건지 기사명처럼 새까만 상의와 망토자락 위로 녹았다가 얼어붙은 얼음결정이 허옇게 덧쌓여있어 처음에는 눈을 맞고 거무스름하게 젖은 바위인지 검은 옷을 입고 눈을 맞은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기린이 그 방향을 가리키기도 전에 힌셔가 먼저 움직였다. 도약 한 번으로 바위에 올라 닭의 발치에 선 힌셔는 눈발이 거의 가로에 가깝게 그어지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 입을 열었다.

 

 “대련하자.”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방금 바위 위로 따라 올라온 기린이 슬그머니 긴장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500여 년 만에 수도로 돌아온 이래 지금껏 힌셔는 누구에게도 도전하거나 도전받지 않았고 누구도 힌셔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니, 힌셔가 수도로 돌아오기 직전에 시간의 얼음에서 놓이자마자 싸움을 벌인 상대라면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황제의 명으로 철저히 함구된 채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지금 살아있는 자들 중에서 힌셔와 생사를 걸고 겨뤄본 적이 있는 그 유일한 기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비켜. 다 가리잖아.”

 

 힌셔는 무엇을 가린다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힌셔가 비켜서자마자 힌셔의 너른 등에 가로막혔던 굵은 눈발이 새까만 닭 위로 꽂히듯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닭의 몸 위로 수의를 덮듯 신선한 눈 한 겹이 얇게 깔렸다. 투구의 면갑에 세로로 난 틈에서 만족한 듯 엷은 숨결이 느긋하게 피어올랐다.

 

 기린이 두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두 눈을 질끈 감은 가운데 힌셔는 옆으로 저벅저벅 돌아가 닭의 머리맡에 가서 섰다.

 

 “대련하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 속에서 한쪽 눈이 뜨이며 이쪽을 향한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 별로 놀 기분 아닌데. 꼭 지금이어야 해?”

 “그건 아니지만-”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새까만 닭. 부탁이다. 시간을 내다오.”

 “내가 왜?”

 “너 말고는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힌셔는 말을 뱉기에 앞서 고심했고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으면 그냥 삼키곤 했다. 말이 적고 짧은 편이기 때문에 오해를 산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힌셔는 누군가와 대화 중인 사람의 태도로는 무심할 정도로 눈앞에서 편안히 드러누운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자가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의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힌셔가 아는 새까만 닭은 그런 자는 아니었다.

 

 짧은 침묵 후 닭이 대꾸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지금이라도 따라가지그래. 적어도 걔들 뒷담 하는 소리는 안 듣게 될걸.”

 

 최근 마지막 시험 임무를 마치고 동대륙으로 출발한 세 명의 젊은 기사와 한 명의 견습기사의 얼굴이 힌셔의 머릿속에서 선명히 떠올랐다. 그들이 최근까지 겪었던 어떤 실패에 대해 비웃고 놀리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목소리를 내거나 내지 않으며 떠드는 말들도. 물론 힌셔는 자신이 끼어봤자 그들의 임무에 방해만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나는 잠입 같은 건 할 줄 모르니까. 힌셔가 아는 것을 이 영리하고 교활한 자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리고 새까만 닭은, 기대했던 대로 힌셔가 여기까지 찾아와 갑작스레 대련을 요구하는 이유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닭이 이런 곳에 혼자 드러누워 눈을 맞으며 차갑게 몸을 식히는 이유 역시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힌셔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제국의 수도이자 기사의 성지인 니젤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지대에 속하는 이곳에서는 속세의 그런 말들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판단하는 눈들도 이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닭은 꽤 좋은 장소를 알고 있었다.

 

 힌셔는 닭의 고독을 방해한 것이 새삼스레 미안해졌다.

 

 “실례를 했군.”

 

 힌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분노와 좌절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반드시 싸움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힌셔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대화였고, 힌셔에게 가장 익숙한 대화의 방법이 철의 사용을 수반하는 것일 뿐이었다. 스승이여. 당신께서 저를 그렇게 키우셨으니 저도 그 방법밖에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음에야-

 

 “~~~~ 진짜!”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들으란 듯이 거창하게 장탄식을 뱉는 소리가 났다. 어깨너머를 돌아본 힌셔는 닭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걸 보았다. 새까맣던 옷이 거의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온몸에 엉겨 붙은 눈과 얼음을 탁탁 털어내면서 닭은 기린이 있는 방향을 향해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였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 없을 거니까 찾지 마.”

 “알았어.”

 “근데 넌 왜 온 거냐?”

 “나도 너한테 볼일이 있어. 내 쪽은 급하지 않으니 돌아오면 얘기하지.”

 “흐음.”

 

 닭이 속내가 불분명한 콧소리를 내는 걸 들으면서 힌셔는 눈알을 굴렸다. 왜 마음을 바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닭이 대련을 수락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기린은 어떨까? 급하지 않다는 기린의 말은 거짓은 아니지만 진심도 아니었다. 별 것 아닌 일 때문에 이 눈 속에서 행방이 묘연한 자를 찾아 몇 시간이고 도시를 헤맬 사람은 없다. 기린을 힐끔 본 힌셔는 기린이 두른 담담한 태도에 감춰진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그대도?

 

 기린은 닭이 돌아올 때까지 지평선에서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린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것뿐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래서 힌셔는 공연히 말 한 마디를 건넸다. 기린은 짧은 침묵 후 내리깐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닭은 이미 기린에게서 관심을 잃은 것처럼 휘적휘적 바위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색채라고는 흑과 백과 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무채색만 남은 폭설 가운데 힌셔는 닭의 투구 끝에서 우쭐대는 긴 붉은 깃을 표지로 삼아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2.

 

 수도의 사람들이 상상해본 적도 없는 기사의 조합에 수군거리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성문을 통과한 후, 한동안 두 기사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수도 안에서는 주민들이 포장된 길 위로 쌓이는 눈을 끊임없이 넉가래로 밀고 여기저기에 재를 뿌려댔지만 성문을 벗어나자마자 관리하는 손길이 뚝 끊기면서 길이 있어야 할 곳마저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이번 폭설은 며칠을 갈 것이며 눈폭풍이 몰아치는 곳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 때문일까, 두 기사의 것을 제외하면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수도 부근의 숲과 황야에는 언제나 기사 아니면 기사와 관계된 일을 하는 자들이 떠도는 것을 생각할 때 별스러운 일이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은 시각이었지만 벌써 사위가 어슴푸레해진 가운데 묵직한 눈을 뿌리는 구름이 얼마나 멀리, 얼마나 두텁게 하늘을 뒤덮은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힌셔는 눈구름이 수도만이 아니라 어쩌면 중앙대륙의 절반을 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곧 완전히 깜깜해지겠어. 어쩔래? 더 가봐?”

 

 수도를 떠나고 거의 한 시간 만에 처음으로 말을 꺼내면서 닭이 론누를 고쳐잡았다. 마침 힌셔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하마턱의 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땅은 수목이 듬성해지고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는 황야가 점차 넓어져가는 경계였다. 그들 수준의 강자들이 싸움을 벌이기에는 아직 지나치게 수도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이 눈 속에서 밤을 보낼 만한 곳도 아니었다.

 

 두 기사는 신호도 없이 거의 동시에 눈 덮인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힌셔는 푸른 마력을 벼락처럼 뿜으며 뛰쳐나가는 거대한 전쟁망치에 두 팔로 매달린 채로, 닭은 공중에 뜬 가느다란 창대를 두 발로 딛고 비스듬히 선 채로 눈이 내리는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거 뭐야?”

 

 한참을 날고 있을 때 눈을 뜨기도 힘겨운 매서운 바람 속에서 닭이 소리쳤다.

 

 “뭐가 말이냐?”

 “그거. 당장이라도 누구 머리를 날려버릴 것처럼 쥐고 있잖아. ~ 이대로 공중전 한판 뜨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잠깐이었지만 힌셔는 귀가 솔깃했다. 공중전이 성립되려면 싸우는 쌍방이 모두 공중을 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힌셔가 잠깐이라도 공중에서 싸움을 벌여본 것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뿐이었고, 그때의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공중전이 흥미로운 것과는 별개로 힌셔는 닭이 말하는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하마턱을 쥔 게 어쨌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힌셔가 하마턱에 매달려 나는 모습은 마치 언제든 공중에서 지상으로 하마턱을 내려찍으며 전투에 뛰어들 것 같은 형상이었다. 힌셔 자신은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숨 막히도록 쏟아붓는 눈발 속에서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리며 나는 무언가에 두 팔로만 매달린다면 1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닭은 싸울 상대가 자신밖에 없는 이 허공에서 힌셔가 줄곧 공격적인 태세를 유지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척 비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게 누구나 할 법한 참견조로 슬쩍 오지랖을 내보인 것뿐일까. 고개를 가로저어 공중전의 유혹을 떨쳐낸 후 힌셔는 전방의 짙은 어둠 속 어딘가를 턱짓했다.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하루쯤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괜찮은 터가 있다. 이 속도로 날면 한두 시간쯤 걸리겠지.”

 “우리 지금껏 북동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니젤의 북서쪽이다. 앞장서라. 보이면 신호하마.”

 “. 알아서 잘 따라오셔.”

 

 잠시 후 두 기사는 크게 선회하면서 닭이 지시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빽빽하게 쏟아지는 눈발과 어스름해진 어둠으로 시계가 좋지 않은 탓에 몇 번은 서로를 놓칠 뻔했다. 닭은 뭐라고 혼자 툴툴거리더니 힌셔의 발치보다 낮은 높이로 내려갔고, 곧 의도를 알아챈 힌셔는 좀 더 위쪽으로 하마턱을 띄웠다. 하마턱의 뒤쪽으로 쉼 없이 뿜어지는 푸른 섬광이 세상에 창백한 빛을 뿌리는 가운데 희푸른 빛이 반사된 허연 설원 위로 쏘아진 화살처럼 눈발을 뚫으며 나부끼는 새까만 망토와 살대마냥 쭉 펴진 붉은 투구깃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비행의 효율만 따진다면 두 기사가 하마턱이나 론누 중 하나에 같이 타고 나는 편이 나을 터였지만, 둘 중 누구도 자신만 무기를 포기한 채 상대를 품 안쪽으로 들일 생각은 없었다.

 

 두 발로 걸어서 오는 동안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길이 장애물 하나 없는 하늘을 날아서 가자 삽시간에 등 뒤로 사라지고,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가물거리나 싶더니, 어느덧 생경하면서도 어딘가 눈에 익은 풍경이 지평선의 저편에서부터 발밑으로 훌쩍 다가왔다. 능선처럼 이어진 완만한 산들이 서쪽의 레툰에서부터 황야를 건너 들이닥치는 얼어붙은 바람을 덜어낸다. 그 아래쪽의 야트막한 분지에는 여름이었다면 무성했을 나무들이 잎 대신 눈을 덮은 채 숲을 이루고 있다. 숲 군데군데에 땅과 바위가 깊이 파헤쳐지면서 아직까지도 나무가 자리를 잡지 못한 흔적들이 있었는데 무언가가 언뜻 보인다 싶으면 곧 희끄무레한 눈안개가 넘실대며 감춰버리는 탓에 하나하나 더듬듯이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힌셔는 목이 메었다.

 

 “이쪽으로.”

 

 여지껏 선두를 양보하고 조금 뒤처져 날던 힌셔가 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곧 하마턱에서 분출되던 푸르스름한 마력이 사그라들고, 힌셔는 산자락에서 분지를 내려다보는 높다란 언덕 위로 수십 미터를 뛰어내렸다. ! 언덕 전체가 부르르 떨리는 충격 속에서 종아리까지 쌓인 눈이 솟구치며 조그만 눈보라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조금 거리를 둔 곳에 사뿐히 착지한 닭이 투구를 때리는 눈바람에 손사래를 치며 다가왔다.

 

 “뭘 알고 가는 건지 뭔지.”

 “제대로 왔다. 지형이 눈에 익어.”

 “500년이 지났는데 옛날 지형이 지금 지형이겠어? 게다가 길치잖아, 당신.”

 “여기가 맞다니까. 저 절벽을 쪼개놓은 자국은 스승님이-”

 

 투구의 면갑 틈으로 호기심을 감추지 않은 강렬한 시선을 느낀 힌셔는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힘겹게 삼켰다.

 

 “-저 숲에 아주 거대한 나무가 있다. 밑둥에 집채만 한 구멍이 있지. 오늘은 늦었으니 거기서 쉬고, 내일은 하루 종일 죽도록 붙어보자.”

 “그냥 지금 싸우자고 하고 싶지만 뭐~ 이렇게 시야가 안 좋아서야. 어쩔 수 없네.”

 “그래. 저 산 너머에는 그때 우리가 싸웠던 곳 같은 너른 황무지가 있다. 기대하거라.”

 

 힌셔는 서두르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 눈은 별빛도 없는 새까만 어둠과 온통 펄펄 쏟아지는 희뿌연 눈안개가 뒤섞인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헐벗은 숲을 살피고 있었지만 힌셔가 머릿속에서 보고 있는 것은 500여 년 전 스승이 이 땅을 처음 보여준 날의 풍광이었다. 멋진 초여름날이었다. 어딜 봐도 녹색뿐이라 어질어질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걸어간 끝에 도달한 나무구멍 앞에서 스승은 자신이 어릴 적 며칠씩 묵으며 수련하던 곳이라고 소개하며 치우지 않은 방을 제자에게 들킨 것처럼 겸연쩍어했다. 힌셔는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온갖 곤충과 버섯과 새 몇 세대와 그 밖의 동물들의 서식지로 쓰인 흔적이 가득한 나무구멍의 청결상태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상에 드러난 뿌리 하나의 굵기가 자신의 키보다 높고 고개를 아무리 꺾어도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무에 온통 시선을 빼앗겼더랬다.

 

 스승의 나무는 숲 한가운데에 솟은 조그만 산이었다. 숲은 그 어미나무의 무릎께에서 무럭무럭 자란 어린 나무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일군 하나의 마을이었다.

 

 “근데 하마. 얼마나 큰 나무야? 다 고만고만한 것 같았는데.”

 

 그런데 닭이 여상한 어조로 던진 평범한 질문에 왜 뺨을 맞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 힌셔는 장시간의 비행으로 건조해진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찌푸린 낯으로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찬찬히 이해하려 애썼다. 그 후로도 이곳으로 몇 번 더 수련여행을 왔기에 힌셔는 겨울의 숲이 어떤 풍광이었는지도 기억했다. 그렇지만 숲을 둘러싼 바위산의 능선과 거기에 남은 스승의 흔적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기억과 맞는 것이 없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안개에 잠긴 앙상한 숲의 윤곽은 기억과 너무나 달랐다. 나무 역시 생물이고 종이 다른 나무끼리 생존경쟁을 하기도 하니 500년의 세월이라면 주류를 이루는 수종이 바뀌면서 숲의 양상 자체가 달라지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근본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남달리 눈이 밝은 줄 알았는데 밤눈은 어두운가? 잘 찾아봐라. 동산인가 싶을 정도로 큰 나무다.”

 “나 밤눈도 좋거든? 오면서 그런 걸 못 본 것 같다고.”

 

 닭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눈안개가 자욱한 허공으로 론누를 던졌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었다. 힌셔는 기다렸다.

 

 이윽고 숲을 한 바퀴 돈 론누가 안개를 찢으며 돌아왔다.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론누를 가볍게 잡아챈 닭은 다시 팔짱을 끼면서 창을 끌어안는 것처럼 어깨에 기대 세웠다.

 

 “시야가 나빠서 확실하진 않은데~ 어린 숲 같아. 늙은 나무가 별로 안 보여.”

 

 방금 확인한 사실을 전달하는 닭의 어조는 평소처럼 까불거리는 양 가벼웠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절제가 감춰져 있었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연령이 한꺼번에 젊어졌다면, 불이든 병이든 인간 때문이든 오래된 나무들이 한꺼번에 죽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불길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은 힌셔는 머릿속 어딘가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닭은 론누의 시야를 통해 숲을 관찰하는 동안 투구와 어깨 위로 쌓인 눈을 한 손으로 대충 쓸어내면서 힌셔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말고 딴 데는 없어?”

 “. 이 부근에 동굴 같은 건 없었을 거다, 산 어딘가에 큰 바위가 돌출된 데가 있었지. 소나기 정도는 피할 만했는데 우리 둘이들어가기엔 좁겠군.”

 “호랑이 둘이 같은 굴에 들어가면 싸우기밖에 더 하나. 나 슬슬 지금 당장 싸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닭은 품에 안은 론누를 손가락 끝으로 성마르게 톡톡 두드렸다. 힌셔는 정색했다.

 

 “이참에 분명히 해두지. 나는 너와 대련을 하고 싶은 거지 생사를 가름할 생각은 없다. 나라에 전운이 감도는 시국이다.”

 

 론누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탁 멈췄다.

 

 “, 대륙 간의 전쟁!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기사를 필요로 하겠는걸? 좀 있으면 기사 목숨을 소중히 여기자고 공익광고도 뜨겠어. 전쟁 났을 때 명예롭게 갈아버리려면 아무튼 그때까지는 살아있는 기사가 있어야 하니 말이야. , 아주 좋은 명분이고말고.”

 “너도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나?”

 “찬성했다기보다, 반대하지 않은 거지. 저쪽에서 작정하고 칼 들이대면 별 수 없잖아.”

 “그걸 아는 자가 뭐가 그리 불만이라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난 건가?”

 “내가 하자고 했어? 가만히 있던 사람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당신이라고.”

 

 닭이 두른 공기가 슬슬 짜증과 노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다. 힌셔는 수도의 바위산 꼭대기에 드러누워 눈을 맞던 닭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도에 있는 기사 중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기 위해 네가 택한 방법이 그것이었지. 내가 택한 방법은 너였고.

 

 “됐다. 김이 새는구나.”

 

 힌셔는 눈을 헤치며 언덕 아래로 무작정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짜증스럽게 혀 차는 소리가 나더니 머지않아 닭이 힌셔의 뒤로 따라붙었다. 정확히는, 힌셔가 푹푹 빠져가며 눈을 밟아 길을 낸 곳으로만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목이 짧은 장화 속으로 아직 얼지 않은 눈송이가 쏟아져 들어오자마자 녹아버려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가운데 쌓인 눈 속에 숨은 관목 덤불의 가시 같은 것이 드러난 팔다리를 자꾸 긁어댄다. 그 정도로는 기사에게 생채기도 낼 수 없지만 성가신 기분은 낙담과 결합하자 쉽사리 짜증으로 바뀌었고, 닭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힌셔는 기어코 한 마디를 하고 말았다.

 

 “치사한 녀석아, 너도 좀 도와라.”

 “싫은데~ 내가 누구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이라~”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약은 올리지 말아야지.”

 “내가 뭘 어쨌다고? 됐고, 길 찾아줄 테니까 당신은 그 소나기 피했다는 바위로 가. 쓸데없이 돌아다니다 또 얼음 되지 말고 날 밝을 때까지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

 “너야말로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같이 가자. 좁기야 하겠지만 뭐가 문제냐?”

 “아 내가 싫다고.”

 “일단 가보고나 말해라. 더 나불대면 댓발은 튀어나온 그 주둥이를 뜯어주마.”

 “이거 투구지 내 주둥이 아닌데?”

 “투구의 주둥이를 뜯어주마.”

 “아니이~ 영웅님이 이렇게 폭력적이어도 돼?”

 “난 진지하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나.”

 

 론누가 불쑥 튀어나와 힌셔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어깨너머를 돌아본 힌셔는 닭의 투구가 자신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는 걸 보았다.

 

 “또 뭐냐?”

 “불 켜봐. 작게, 약하게, 눈은 건드리지 말고.”

 

 힌셔는 그노제스의 -나의 그노제스의- 걸작이자 최초의 마스터피스인 하마턱을 고작 비상조명 취급하는 닭의 태도가 조금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라 해서 싸움과 거리가 먼 일상적인 용도로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노제스라면 그런 태도를 오히려 즐거워했을 것이다. 힌셔는 잠자코 하마턱을 작동시켜 조그만 촛불의 형태로 마력을 응집시키려 했다.

 

 섬세한 조절은 힌셔의 특기가 아니었다. 하마턱의 꼭지 위쪽으로 분수 같은 빛이 호쾌하게 솟구쳤다. 두 기사는 2미터는 됨직한 높이로 훅 솟아올라 눈 덮인 나무 사이로 극명한 명암을 드리우며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마법의 횃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 뭔가를 찾는 거라면 환한 편이 낫지 않겠느냐?”

 “그래. 영웅이 허당일 수도 있지.”

 

 닭은 구시렁대며 나무 사이로 몇 걸음 나아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쌓인 눈에 몸을 파묻다시피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닭의 움직임을 주시한 힌셔는 곧 닭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람인가?”

 

 몸을 일으킨 닭은 대꾸하는 대신 론누를 천천히 휘두르며 창끝으로 눈에 줄줄이 새겨진 흔적을 가리켰다. 닭이 선 곳으로 다가간 힌셔는 조그만 짐승이 온몸으로 헤엄치다시피 눈과 얼음을 파헤치며 지나간 듯한 흔적의 바닥에 한 쌍의 조그만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는 것을 보았다.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기껏해야 어른의 허리께 정도에 머리가 닿을 키의 어린아이인 듯했다.

 

 “그래. 이 시각에 이런 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ㄹ 켁.”

 

 힌셔는 한 손에 마법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다른 손으로는 닭의 망토에 달린 모자를 멱살 잡듯이 말아쥔 채 성큼성큼 걸었다.

 

 “가자!”

 “이거 놓, 아 미친, 놔줘야 찾지! 아니 혼자 튀어나가진 말고!”

 

 닭을 놓아준 힌셔는 흔적을 따라 이미 저만치 달려나가고 있었다. 한달음에 힌셔를 따라잡은 닭이 씩씩거리며 나직이 소리쳤다.

 

 “좀 진정해! 기사가 아니라 애라고! 이 눈 속에서 애 걸음으로 얼마나 갔겠어?”

 “그러니까 빨리 찾아야지! 이런 날씨에 어린 애 혼자 어찌 버틴단 말이냐!”

 “애 쪽에서 우릴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지금 그게 중요한가!”

 “그게 중요할 수도 있잖아!”

 

 옥신각신하며 나란히 달리던 두 기사가 한순간 동시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두 기사가 땅을 박찬 바로 그 지점에서 눈 위로 사람의 형상 같은 것들이 스르륵 일어서기 시작했다. 근방에 쌓인 눈이 형상을 중심으로 빨려들어가 뭉치면서 순식간에 젖은 흙바닥이 드러났다. 환하게 타오르는 하마턱의 불줄기로 전방을 비춰본 힌셔는 어린애가 도화지에 선화로 삐죽빼죽 낙서한 사람처럼 생긴 다섯 기의 거대한 눈사람이 발 앞에 거치적대는 나무를 수수깡처럼 밟아 부러뜨리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니, 여섯.

 

 “마법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애 쪽에서 우릴 마주치고 싶지 않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한 근거는 뭐지?”

 “그냥 감인데.”

 

 감이라고 어물쩍 뭉뚱그려 대꾸하긴 했지만 닭이 직관적으로 내린 판단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힌셔의 옛 기억으로나 여기까지 날아오면서 본 바로나 이 근방에는 마을이 없었다. 그럼에도 눈 내리는 밤의 숲 한복판에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면, 그 아이는 어떤 이유로든 숲에 떨어진 채 며칠 이상을 혼자 생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른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은 물론이다. 바로 그렇기에 힌셔는 아이를 우선 위험한 상황에서 구조하고 봐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었지만, 닭은 아이에게 사정이 있어 일부러 숲에 숨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통은 숲에 홀로 있는 아이를 보고 그럴 가능성을 떠올리진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닭은 아이의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 크고 강렬한 불이 아니라 조그맣고 약한 광원을 요구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도망자나 사냥감을 추적할 때처럼 목표에게 이쪽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두 기사의 머리 위로 당장이라도 때려눕힐 것처럼 커다란 눈주먹을 을러대며 다가오는 눈사람들을 보면서 힌셔는 아이의 근처에 악한 의도를 지닌 어른, 이를테면 아이를 납치해 숲에 숨은 마법사가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의 선두에 선 눈사람이 휘두른 주먹은 붕 소리를 내며 날아가 닭의 옆에 선 나무를 분질러버렸다. 몸을 비스듬히 트는 것으로 가볍게 피한 닭은 휘파람을 불었다.

 

 “하마, 잠깐 쟤들이랑 놀고 있어.”

 

 두 번째 눈사람이 솥뚜껑만한 발을 닭의 투구 위로 들어 올렸다. ! 닭의 기척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힌셔는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하마턱의 자루로 땅바닥을 찍었다. ! 지표가 부르르 진동하면서 주위의 나무마다 쌓인 눈이 와르르 쏟아졌다.

 

 “나는 기사, 검붉은 하마 힌셔!”

 

 이목구비가 없는 눈덩이 머리들이 일제히 힌셔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눈사람들은 굵직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 눈사람은 말을 할 수 없지. 힌셔는 자신의 기어스가 이 상황에서도 적용될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결론은 간단히 도출되었다. 눈사람은 도구일 뿐. 힌셔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듣거라! 나의 기어스는 말을 섞지 않은 상대와는 싸울 수 없다는 것! 나와 제대로싸우기를 바란다면 나와서 한 마디라도 지껄여봐라!”

 

 보통 때라면 힌셔는 말 섞지 말 것을 경고하여 자신과 싸우고 싶지 않은 자에게 싸움을 피할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어딘가에 숨은 정체 모를 상대라면 힌셔를 알든 모르든 -또는 자기 키보다 큰 거대한 망치를 들고 붉은 반망토를 두른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선 키 큰 여자가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부르는 500년 전의 그 인물이라는 사실을 믿든 못 믿든- 힌셔에게 싸움을 걸도록 유도해야 했다. 기사의 명예를 믿는다면 힌셔가 기어스를 지키는 한 말을 섞지 않고 덤비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리라는 걸 이용하기 위해서, 기사라는 자기소개를 믿지 않는다면 나무만큼이나 커다란 눈사람 무리에 포위되었음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어찌 됐든 상대는 힌셔를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명예로운 11이 성립되는가의 여부는 따질 필요도 없다. 닭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힌셔는 기어스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한꺼번에 덮쳐드는 눈사람들 앞에서 힌셔는 하마턱을 느슨히 쥐었다가 근처의 적당히 굵은 나무로 휘둘렀다. 밑둥부터 부러진 나무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발을 딛으려던 바로 그 위치에서 통나무에 발목이 걸린 두 눈사람이 우스꽝스럽게 기우뚱하며 앞으로 엎어진다. 땅에 부딪힌 몸통이 박살나면서 조그만 눈폭풍이 일어난 것처럼 푸스스 흩어진다. 그러나 맥없이 비산하던 눈송이들이 한순간 마치 시간을 거꾸로 감은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가고, 눈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형체를 갖추며 일어나 힌셔를 내려다본다. 자유자재로 부서지고 회복될 수 있는 눈사람의 몸속에 잠깐이라도 붙들렸다간 생에서 두 번째로 얼음 속에 갇힐 판이었다. 힌셔는 그냥 힘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억누르며 양떼를 모는 번견처럼 눈사람 무리의 바깥으로 천천히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일생 최대의 힘을 짜내 달음박질치는 속도였지만 힌셔로서는 눈사람들이 자신을 쫓아올 수 있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이따금 덮쳐드는 팔다리는 숲의 나무에 부딪히도록 유도하면서 눈사람들과 정면으로 맞서진 않았다.

 

 그리고 닭은 힌셔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찾았다.”

 

 머리 위 어딘가에서 숨어있던 아이를 찾아낸 술래처럼 심술궂고 장난스러운 중얼거림이 들렸다. 눈사람들이 삐걱이며 멈칫하더니 이내 뜨거운 물을 맞은 것처럼 힘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곧 눈사람은 완전히 사라지고 여섯 개의 거대한 눈무더기만이 남았다.

 

 힌셔는 하마턱의 꼭지 위로 아까보다도 커다란 마법의 불빛을 분출시키며 기다렸다. 곧 숲의 눈안개 사이에서 눈과 이름 모를 칩엽수의 잎을 잔뜩 뒤집어쓴 닭이 새된 소리로 무시무시한 욕을 퍼붓는 뭔가를 어깨에 짊어진 채 걸어 나왔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짤막한 두 다리가 버둥거리며 무릎과 발로 닭의 가슴과 배를 퍽퍽 찍어댔다. 힌셔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도 조그만 두 주먹과 팔꿈치가 닭의 뒤통수와 등을 마구 때리고 있는 듯했다. 물론 기사인 닭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공격이었다.

 

 “놔아아! *^%$#&& 죽여버린다!”

 

 아이가 지저분한 회색 머리칼을 사방으로 흔들어대며 온몸으로 발버둥 치다 두 손에 잡힌 붉은 투구깃을 휙 잡아당겼다. 닭의 목이 뒤로 훽 제껴지면서 투구가 들려 턱까지 벗겨졌다. 닭은 침착하게 한 손을 들어 투구가 더 벗겨지지 않도록 붙잡으면서 다른 팔로는 아이를 옆구리에 옮겨 끼었다. 아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닭의 옆구리를 깨물었고 닭은 움찔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힌셔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최대한 중립적으로 들리길 바라며 점잖게 말을 걸었다.

 

 “도와주랴?”

 “그래주면 감사.”

 “마법사는?”

 “여깄는데. 마법사.”

 

 기사가 된 후 힌셔는 이만한 나이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다뤄본 일이 없다시피 했다. 주먹과 발과 이빨로 사력을 다해 닭을 공격하다가 이제는 닭이든 힌셔든 손이 닿는 모든 사람을 할퀴려 드는 아이를 닭의 옆구리에서 빼내어 땅바닥에 두 발로 똑바로 서도록 세우는 동안 힌셔는 아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것과 뼈대가 아직 굳지도 않은 아이를 잘못 건드려 자칫 다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사이에서 손아귀의 힘을 조절하느라 진땀을 빼며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닭의 말에 담긴 의미는 힌셔에게 조금 늦게 다가왔다.

 

 “?”

 

 

 

 

 

3.

 

 마법은 물론 주먹도 발도 이빨도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받아들인 건지 그저 한바탕 난리를 친 끝에 기운이 빠진 건지, 잠시 얌전해진 아이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씩씩거리며 끊임없이 두 기사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등지고 선 나무에 바짝 몸을 붙인 모습은 눈앞을 성벽처럼 가로막고 선 기사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수 없다면 나무 속에라도 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힌셔는 짐짓 닭을 흘겨보았다.

 

 “아이한테 잘해준답시고 쓸데없이 겁을 준 건 아니겠지?”

 “난 인사만 했는데. 안녕 하고.”

 “그런 것치고 아이가 너무 겁에 질렸잖느냐.”

 “그러게. 내가 너무 기사처럼 생겨먹어서 그런가~”

 

 힌셔는 닭의 기색을 곁눈으로 살폈다. 말씨는 농담조일지 몰라도 닭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가 마법으로 일으킨 눈사람들은 처음에 눈에 띄는 거대한 마법의 횃불을 든 힌셔가 아니라 닭을 먼저 공격했더랬다. 더군다나 세간에 알려진 소문이 어떻든 간에 투구와 망토와 창을 갖춘 닭의 외양만큼은 그린 듯이 오래된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고전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기사를 무서워하는 거라고?

 

 자신의 한 몸에 지닌 미약한 힘으로는 세상의 설명되지 않는 악과 폭력을 견딜 수 없는 약한 자들에게 기사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 용기가 되고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기사가 약자에게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의 근원이 된다면 세상에 기사 같이 터무니없는 무력을 지닌 자들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예전의 힌셔라면 그렇게 노기를 드러내면서 닭에게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500년 후의 지금을 살고 있는 힌셔는 섣불리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힌셔가 닭을 끌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 생각이 많아지는군.”

 

 짧은 순간이었지만 투구 속에서 닭의 시선이 힌셔를 면밀히 살피는 것 같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인 힌셔는 닭이 눈앞의 일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심드렁한 태도로 뒷목을 짚고 우둑 소리가 나도록 목줄기를 이리저리 꺾는 것을 보았다.

 

 “이제 어쩔 거야? 명예로우시고 정의로우신 기사의 영웅님.”

 “장난이라도 너까지 그러지 마라.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명백하지 않나.”

 

 눈발은 이제 가늘어져 가루눈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함박눈이 내리는 동안 잠시 포근했던 기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시각각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모두의 입에서 농도 짙은 입김이 강처럼 흘렀다. 이 눈 속에서 추위와 공포로 퍼렇게 질린 채 파들파들 떠는 어린애를 심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힌셔는 지난 500년 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유명해진 붉은색의 반망토를 끌러 아이의 어깨에 둘러줬다. 키가 큰 힌셔에게는 반망토였지만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키의 아이에게는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외투였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망토를 내팽개칠 것처럼 꿈틀거리다 힌셔의 체온이 묻은 따뜻한 천을 손에 꽉 쥔 채 일그러진 낯으로 입술을 씹었다. 망토 속에 고분고분 파묻힌 아이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힌셔는 닭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선은 밤을 보낼 만한 곳에 아이를 데려가 보호해야겠지. 헌데 나는 아이를 다룰 줄 모른다. 섬세한 행동도 못 하지. 그런 나를 하룻밤 내내 아이 옆에 혼자 남겨둬도 괜찮겠느냐? .”

 “당신 요즘에 기린이랑 같이 다니기라도 해?”

 “기린? 무슨 소리냐?”

 “됐어. 그 바위 어떻게 생겼는데?”

 

 닭은 머리가 지끈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투구를 짚었다. 힌셔는 웃었다.

 

 그로부터 10분 뒤 눈 속을 헤매면서 힌셔는 더는 웃을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더 설명하라는 거냐?”

 “아니이~ 그래도 뭔가 기억하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동그라미랑 세모는 분간하지? 하마, 분간할 수 있는 거 맞지?”

 “바위가 다 바위 같이 생겼지 뭐가 다른가? 사람 얼굴도 아니고.”

 “그럼 최소한 방향이라던가, 주변의 특징적인 지형지물이라도 기억해야 할 거 아냐. 당신 스승이란 사람이 뭔가 표지판이라도 만들진 않았어?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아침저녁으로 숲에서 행방불명된 길치 제자를 구조하러 다니기만 하진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어린 힌셔가 새벽이나 저녁식사 후에 운동 삼아 능선이나 숲을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노라면 어느 틈에 따라붙은 스승이 나란히 걸으면서 그날의 훈련이나 다음 끼니의 반찬거리에 대해 이런저런 잡담을 하곤 했다. 힌셔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 신출귀몰할 정도로 갑자기 나타나던 스승이 신기하긴 했지만 숲을 잘 아니까 그런 것이려니 했다. 설마 정말로 제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구조하러 오신 거였습니까?

 

 “그게 뭐가 걱정이냐? 네가 있는데.”

 “차라리 애기한테 물어보고 말지. , 너 어디서 사니?”

 

 닭이 사근사근하게 물어봤지만 힌셔가 하마턱을 들지 않은 팔에 안긴 아이는 싸늘하게 외면하며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힌셔는 실룩이며 위로 올라가려는 입매를 근엄하게 억누르면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숲에서 혼자 지내려면 고생스러웠겠구나. 네가 눈과 비를 피하는 곳이 있다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련?”

 

 길게 드리워진 앞머리에 얼굴의 반절이 감춰져 있긴 했지만 아이가 망설이고 있는 기색은 통찰의 눈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버릇인 것처럼 한동안 입술을 씹던 아이가 고개를 수그린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날 어떻게 할 거야?”

 

 힌셔는 잠시 닭을 쳐다보았고 닭은 두 손을 들어 보이곤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이와의 대화를 전적으로 힌셔에게 떠넘기겠다는 선언이었다. 힌셔는 얄미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며 대답했다.

 

 “우리는 기사다. 나는 검붉은 하마 힌셔. 저자는 새까만 닭 와론.”

 “다시 안녕~ 이제는 나 때리지 마~”

 “또한, 우리는 어른이다. 너는 낯선 어른이 두렵겠지. 악한 자들도 여럿 마주쳤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구나.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아이가 온몸으로 덜컥 경련했다. 본능적으로 약한 이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싶어진 힌셔는 아이를 안은 팔에 아주 조심스럽게 힘을 더했다.

 

 “믿어달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으마. 다만, 우리가 돕는 걸 허락해줄 수는 없겠느냐.”

 

 고민이 길어지면서 아이는 몸에 외투처럼 두른 붉은 반망토 속으로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힌셔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힌셔의 드러난 어깨 위로 떨어진 눈이 녹아 수증기가 되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결심한 듯, 아이는 고개를 들어 힌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와줄 거지? 진짜로?”

 

 힌셔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는 두 번 묻지 않고 눈가루가 떨어지는 어둠 속의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기사들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닭이 영웅님의 마법’ ‘여억시 영웅님은 다르시다따위로 들릴락말락하게 조잘대긴 했지만, 자신을 조금은 신뢰하게 된 아이에게 집중하면서 힌셔는 닭의 엉덩이를 아주 아프게 걷어차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쉽게 참아낼 수 있었다.

 

 힌셔에게는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 얼어붙은 개울과 언덕과 바위와 나무를 지나 얼마간 걸은 끝에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드는 비탈길이 시작되었다. 닭이 론누를 들어 가리킨 방향을 올려다본 힌셔는 하마턱의 푸른 불빛에 물들어 반짝이는 굵은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바위를 찾아냈다. 고드름 탓에 바위는 경사진 산중턱 한복판에서 거대한 용이 흙과 바위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튀어나와 쩍 벌린 아가리처럼 보였다.

 

 “지금도 저 바위가 다른 바위랑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 설명 못하겠어?”

 “. 눈과 얼음이 덮였군. 그런데 다른 바위도 다 그렇지 않나.”

 “내가 잘못했어. 이젠 안 물을게.”

 

 닭이 자기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가? 자신이 뭔가 미안한 짓을 저지른 것 같은 다소 얼떨떨한 기분을 고갯짓 한 번으로 물리친 후 힌셔는 두어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바위까지 올라갔다. 품에서 비명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 힐끔 내려다본 힌셔는 한 번 땅을 박차는 것으로 십수 미터를 뛰어넘는 기사의 도약을 온몸으로 체험한 아이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해진 것을 발견했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벙벙하던 아이의 낯은 튀어나온 바위 아래에서 불씨가 거의 꺼진 잿더미 뒤의 땅바닥에 웅크리고 누운 조그만 형체를 본 순간 조각조각 깨져나갔다.

 

 “언니야!”

 

 힌셔의 팔에서 뛰어내린 아이는 한달음에 웅크린 아이의 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더니 자신이 두른 힌셔의 붉은 반망토를 끌러 덮어주고 그 위로 쓰러지듯이 몸을 겹쳤다. 기사이기에 힌셔는 이 바위틈이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추울지 정확하게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웅크린 아이가 하마턱의 서느런 푸른 빛 아래 온통 퍼렇게 물든 모습으로 쌕쌕 숨을 쉴 때마다 가느다란 입김이 쉴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 위로 크게 튀어나온 바위와 바위의 끄트머리에 발처럼 드리운 고드름 덕에 눈과 바람이 안쪽까지 들이치지 않을 뿐, 이 휑뎅그렁한 바위틈은 결코 안락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건조한 공간에 오래 머물렀을 때처럼, 또는 신선한 피가 흐르는 전장에 서 있을 때처럼 비릿한 내가 코끝을 슬그머니 스치는 것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춥고 차가운 공간은 힌셔의 머릿속 한켠에 자리한 기억 하나와 겹쳐지면서 상황에 맞지 않게도 -또는, 불편하게도- 편안한 기분을 가져왔다. 이곳에서 소나기와 낙뢰를 피하는 동안 스승은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의 행동수칙을 알려주려다 스스로도 그런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걸 깨닫고 혼자 좌절했더랬다. 그도 어쨌거나 기사였고 그중에서도 그 시대 최강의 기사로 군림한 자였기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생사가 갈릴 자연재해 앞에서 지닐 상식과 조심성이 완전히 무뎌지고 말았던 것이다.

 

 “500년짜리 향수가 도지나 봐. 하마.”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돌아본 힌셔는 닭이 잿더미 옆에 나뭇가지 한 짐을 와르르 쏟는 것을 보았다. 힌셔가 낯설어진 숲에서 길을 찾느라 집중하는 동안 닭은 뒤따라오면서 장작으로 쓰기 적당한 나뭇가지를 조금씩 꺾어 모은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닭은 야생에서 살아남는 지혜가 있는 자였다.

 

 닭이 잿더미에서 불씨를 일으키고 젖은 생나무로 솜씨 좋게 불을 지피자 곧 바위틈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힌셔는 아픈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회색 머리의 아이는 자신의 작은 몸 하나로 혹한의 세상으로부터 친구를 지키려는 것처럼 아픈 아이의 몸을 덮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울 것 같은 두 눈은 간절하게 힌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힌셔가 몸을 낮추면서 하마턱을 잡지 않은 쪽 손바닥을 위로 하고 천천히 내밀자 아이는 주저하더니 그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큰 아이를 놓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

 

 큰 아이는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손을 대자 잠깐 눈을 떴지만 이내 어지러운 듯 도로 감고 저항하지 않았다. 앓고 있는 아이를 감싼 누더기 같은 천을 풀어내자 신선한 피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아이의 왼팔에는 팔뼈의 방향을 따라 날붙이 같은 것에 깊이 쭉 베인 상처가 있었는데, 감염되거나 한 것 같진 않았지만 벌어진 상처를 더러운 천으로 묶어놓기만 했을 뿐 제대로 닫지 못한 탓에 출혈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힌셔는 급한 대로 늘 지니고 다니는 기사보급품을 뒤져 빠르게 응급처치를 했다.

 

 아이 둘이 쓰면 그럭저럭이지만 기사들 중에서도 키와 체격이 큰 축에 드는 어른 두 명이 끼어드니 바위틈은 확실히 비좁게 느껴졌다. 응급처치를 끝내고 아이에게 다른 상처는 없는지 살펴보는 작업까지 마친 후 힌셔는 한숨 돌리면서 구석에 욱여넣듯이 쌓인 허름한 잡동사니를 훑어보았다. 몇 안 되는 그 물건들은 모두 어린아이의 힘으로 들고 나를 수 있는 크기에 불과하며 마을에 정주하는 사람의 세간보다는 이리저리 떠도는 여행자의 휴대품에 가까웠다. 아픈 아이가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힌셔는 어린 애 둘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아이들 먹일 것 뭐 없나? 늘 뭔가 들고 다니잖나.”

 “있긴 한데 큰애는 못 먹을 듯. 그쪽 끝나면 눈이라도 퍼와.”

 

 적당한 크기로 모닥불을 일으킨 닭은 언제 밖에 나갔다 온 것인지 눈이 가득 담긴 통을 불 위에 걸어놓고 잡동사니 무더기에서 끄집어낸 헐렁한 주머니를 열어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를 옆으로 밀어둔 후 닭은 불붙은 장작 사이에서 불씨가 살아있는 재를 따로 덜어내더니 주먹만 한 생감자 세 개를 -저 자는 어디서 저런 걸 꺼내는 것인가?- 재 속에 묻었다. 이제는 안정적으로 넉넉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덕에 불빛이 충분해지자 힌셔는 하마턱에서 칫칫 소리를 내며 분출되던 마법의 빛을 꺼트렸다. 그리고는 다른 빈 통 하나를 찾아 새로 눈을 퍼담으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작은 아이는 끙끙거리는 큰 아이의 오른손을 꼭 쥔 채 익어가는 냄새를 풍기는 잿더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반쯤 벌어진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닭에게 눈이 든 통을 건네던 힌셔는 불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닭이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느라 자신이 돌아온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새까만 닭?”

 

 기사명을 들은 순간 투구를 쓴 기사는 선잠에서 깬 사람처럼 어리둥절해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투구 속에 완벽히 숨겨진 얼굴이 짓고 있을 표정을 알 방법이야 없었지만, 힌셔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왔어.”

 

 닭은 힌셔의 손에서 통을 빼앗다시피 가져가 불 옆에 뒀다. 닭이 두른 공기는 방금 전에 본 것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평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법이다. 힌셔는 의아했지만 굳이 들쑤시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힌셔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건너편으로 돌아가 회색 머리의 아이와 아픈 아이를 살폈다. 이제 보니 하마턱의 푸른 빛 아래에서 회색으로 보였던 아이의 머리는 백발에 가까웠다. 아픈 아이를 들어 품에 안고 불가에 자리를 잡은 힌셔는 무딘 단검으로 자른 듯 길이가 맞지 않는 갈색의 단발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호흡은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열이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약이 나오는 나무가 있어. 나무껍질을 끓여 먹으면 열이 내리고 안 아파져. 그래서 나무를 찾으러 갔었어. 근데에 나무가 딱딱해져서, 껍질이 안 벗겨져서.”

 

 그 말을 하는 내내 백발의 아이의 충혈된 눈에는 구슬픈 죄책감이 가득했다.

 

 “근데에, 하늘에 파란색, 하얀색 번개가 생겼어. 이상한 번개인데 친구들이 싫어하지 않았어. 그래서 번개가 떨어진 데로 가봤는데 기, 기사가 있었어.”

 

 백발의 아이는 두 기사가 비행하는 모습을, 정확히는 힌셔의 하마턱이 허공에 남긴 빛의 궤적을 보고 다가갔다가 외양만큼은 누가 보더라도 기사 같은 닭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린 모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자신을 기사라고 밝힌 어른들을 무서워했고, 지금도 조금은 의심하고 있었다.

 

 “친구들? 숲에 친구가 더 있느냐?”

 “. 여기두 있어. 나 친구 많아. 근데 나만 얘기할 수 있어. 나하고만 말하는데.”

 

 아이의 온몸에 다시금 경계하는 기색이 짙어졌다. 자신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닭이 치워뒀던 주머니에서 바스라지다시피 한 곡물을 꺼내 손바닥에 놓고 비교적 멀쩡한 것들을 골라 눈과 얼음을 녹인 물에 쓸어 넣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령이라고 부를걸. 마법사들이 교감하는 그거.”

 “내 얘기 믿는 거야?”

 “믿고말고. 저 덩치 크고 사나운 노랑머리 언니가 아까 무식하게 큰 망치에 불인데 안 뜨거운 불을 켜고 있었지? 그거 네 친구들이 힘을 빌려주는 거야. 마력이라고.”

 “진짜로? 너네도 나나 같은 거야?”

 

 두려움과 경계로 찌푸린 조그만 낯에 놀라움과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힌셔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자니 닭이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아닌데? 나랑 저 언니는 너랑 달라. 우리는 기사. 너는 마법사다.”

 “마법사가 뭔데?”

 “네 친구들의 친구들. 그런 사람들 있어.”

 “나 말고도 이런 사람 있어? 나 괴물 아니야?”

 “아니야.”

 

 동그랗게 열린 아이의 눈동자 앞에서 힌셔는 열어젖힌 문으로 쏟아지는 큰물에 휩쓸리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보통의 사람들은 세상에 기사가 있듯이 마법사가 있다는 것도 개념적으로는 알지만 그들이 사력을 다해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기회는 일생에 한두 번도 되지 않는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편리한 도구를 보면서도 그것을 만든 마법사가 싸움을 각오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어른에게 지도도 보호도 받아본 적 없는 아이가 궁지에 몰리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연히 타고났을 뿐 통제할 줄 모르는 힘을 폭발시킨 순간-

 

 아이를 몰아붙이던 자들의 눈에 어린 그 두려움과 맹렬한 적대감에 힌셔는 착잡한 기시감을 느낀다.

 

 “근데 너, 네가 뭔지는 모르면서 기사는 뭔지 아나 봐?”

 

 아이의 활짝 열렸던 마음이 닫히고 낯에서 다시 두려움과 사나운 미움이 치솟았다. 그러든 말든, 닭은 잿더미에서 꺼낸 감자에 작은 나뭇가지를 꽂아 내밀었다. 아이는 감자와 닭을 번갈아 쳐다볼 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바로 정하지 못했다. 힌셔는 크고 깊은 심호흡 한 번으로 뻣뻣해지려던 몸과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점잖게 한 마디했다.

 

 “애 그만 괴롭혀라. 이 아이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

 “나한테 뭐 시키려고?”

 “밥을 먹고, 이를 닦고, 일찍 자도록.”

 “그게 다야?”

 “그게 다다.”

 

 아이의 머리와 가슴은 의심을 놓지 못했지만, 입과 배는 노릇하게 구워진 감자의 냄새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천둥처럼 꼬로록거리는 소리가 분했는지 아이는 닭의 손을 때리다시피 감자를 낚아채 힌셔의 등 뒤로 달려가 숨었다. 닭은 아이에게 맞은 손을 허공에 살살 흔들고는 잿더미를 뒤적여 남은 감자 두 알을 꺼냈다. 힌셔는 말없이 닭이 꺼내놓은 감자 한 알을 집어 들고는 몸을 돌려 닭을 등지고 앉았다. 그리고는 닭이 준 감자를 벌써 다 먹고 검댕투성이의 손가락까지 빠는 아이에게 새 감자의 껍질을 까서 건넸다.

 

 나뭇가지로 통을 깡깡 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힌셔는 닭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알아서 해.”

 

 닭은 보글보글 끓는 죽을 가리켜 보이고는 론누를 들고 일어섰다. 힌셔는 닭이 세 번째 감자를 재 속에서 꺼내놓기만 하고 손대지 않은 걸 확인했다.

 

 “어디 가느냐?”

 “화장실.”

 

 닭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고드름 아래로 몸을 숙였다. 힌셔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닭을 막지도 않았다. 열 때문에 축 늘어진 아이를 달래어 반은 흘리다시피 하면서 밍밍한 죽을 먹여보려 애쓰고 동시에 가족처럼 의지하는 친구가 아픈데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끊임없이 발작하듯 불안해하는 아이를 어르다 보면,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어른의 심란함까지 배려할 여유는 남아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 밤 내내 꺼지지 않은 모닥불 앞에서 힌셔는 눈은 감았지만 정신은 잠들지 못한 채 자신에게 기댄 두 아이를 품에 안고 기다렸다. 겨울의 밤은 영원할 것처럼 길었고, 밤을 지새우는 것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고단했다. 그래도 밤의 시간에는 끝이 있었다. 눈이 잠시 그친 가운데 머리 위로 묵직하게 드리운 구름 한켠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이 텄지만 닭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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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픽은 상중하 세 편 분량입니다. 다음 편은 별 일 없으면 화요일 저녁 쯤에 올릴 예정입니다.

 

 

 

 

 

문수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기린 쫓는 닭" 입니다.

 *이 연성의 줄거리가 잡힌 것은 미리보기분으로 126화가 공개된 후인 7월 11일경입니다.
  따라서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2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단 마의 126화가 풀린 후로 2달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그간 잔불 연재분도 슬쩍 반영됩니다.;;
  그리고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마법이나 마수에 대한 설정은 원작자인 환댕 님이 작품을 통해 공개하신 것에 기반하되
  공백이 있는 부분을 제 맘대로 망상해서 채워넣은 것으로,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가독성 차원에서 화면을 125% 정도로 확대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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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첫닭이 우는 소리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가 울기 시작하면 두 번째, 세 번째 녀석도 합세해 주고받으면서 결국에는 마을 전체의 닭이 번갈아 가며 울어대게 된다. 그 우렁찬 돌림노래는 아무리 기사라도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와론은 베고 누운 베개로 두 귀를 틀어막으며 신음했다. 아 미친 닭 새끼 잡히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린다-

 

 그렇다고 마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닭의 목을 비틀어버린다 하여 새벽이 오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새벽이 되면 닭이 아니라도 세상의 새들은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하며,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맞춰 규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해가 없는 동안에는 자제했던 생활의 소음을 거침없이 일으키는 법이다. 잠시 후 와론은 억지로 잠에서 깬 사람 특유의 반쯤 넋이 나간 낯으로 침대에서 몸을 굴려 내려왔다. 진짜 오랜만에 침대에서 잔 건데 너무하는 것 아닌가 물론 닭들도 숲속의 새들도 마을 사람들도 와론의 기분 같은 걸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세상은 원래 그런 법이었다.

 

 여관이 없는 조그만 마을에서 와론에게 방을 빌려준 집주인은 매우 소심하게 두어 번 문을 두드리고 도망쳤다. 사람의 기척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와론은 걸어 잠갔던 문을 살짝 열어 그 앞에 놓인 물이 든 나무통과 반듯하게 개켜진 옷 꾸러미를 잡아당겼다. 촛불을 켠 후 세수를 하고 간단히 몸을 씻다가 와론은 문득 조그만 방의 한구석에 거울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반장갑 끝에 드러난 손가락을 제외하면 언제나 몸의 모든 부분을 투구와 망토로 감추고 다니는 와론이 아무 가림막 없이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와론은 낯설고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까지 느끼면서 낯을 흐리다가 기왕 거울이 있으니 상처를 살펴보기로 했다.

 

 몸에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시간대에 새겨진 온갖 흉터와 생겨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거의 아문 상처가 가득했다. 그중에서 와론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상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검붉은 멍 같은 상흔이었다. 이 상처를 거울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도 배에 500년 전에는 없었던 꽤나 큼직한 상처가 생겼을 테지만 말이야. 볼 때마다 나 생각해, 선배.

 

 힌셔의 하마턱은 일견 거대한 망치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망치를 칼자루 삼아 마력을 칼날로 구현하는 장대한 검이었다. 만일 힌셔가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고 일어서서 마지막 일격을 날렸을 때 마력을 칼날처럼 응축하여 날카롭게 집중시켰더라면 와론은 그대로 베여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힌셔는 와론을 죽이지 않았다. 힘이 다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직전 와론이 힌셔를 죽이겠다고 선언해놓고 정통으로 숨을 끊어놓을 지점을 아주 조금 비껴간 위치에 론누를 꽂아 넣었기 때문인지, 그 밖의 다른 이유라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그때는 나도 당신도 서로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라 치고,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우리 대화는 안 끝났잖아? 그때쯤이면 지나는 자리마다 뼈를 거의 상하게 한 이 거대한 상처도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흉터는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와론이 또 한번 생존한 증거가 될 뿐이다. 와론은 가볍게 코웃음 치고는 새 마법회로 뭉치와 붕대를 꺼내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집주인 내외가 손을 써준 덕에 밤새 세탁을 마치고 잘 말린 옷을 입은 후 투구를 쓴 와론은 방을 나왔다. 아침상을 준비하던 내외는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서 악명 높은 투구를 쓴 기사의 새까만 그림자가 문간에 선 것을 보고 흠칫했다. 와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얼마 안 되는 짐과 함께 집을 떠났다. 방을 빌린 값이라면 집주인 내외로부터 빌렸던 옷 위에 넉넉하게 남겨뒀으니 적어도 그거라면 이들이 원한까지 품진 않으리라.

 

시골에서 새벽에 치르는 일상적인 일들로 부산스러운 길을 지나 지우스가 방을 빌린 집에 찾아가 보니 지우스는 한발 앞서 떠난 뒤였다. 지우스도 짐이랄 게 없었기에 잠시 방을 비운 것처럼 보였지만 집주인 내외는 젊은 기사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남기고 갔다며 와론에게 돈주머니를 돌려주려 했다. 와론은 다 듣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숲으로 향했다.

 

 흙과 바위를 다루는 마법에 재주를 지닌 준법사가 지진과 산사태로 무너진 건물과 끊어진 길을 대강 정리해둔 덕에 숲으로 나가는 길은 다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깔끔했다. 와론은 숲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간 끝에 주위에서 자신을 목격할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론누를 던졌다. 푸르스름한 밤의 끝자락에 묽은 분홍빛이 번지기 시작한 허공에서 론누가 빙그르 돌았다. 팔짱을 끼고 잠시 집중한 후, 와론은 방향을 정했다.

 

 마수에게 잡혀갈 뻔한 용병을 발견하고 준법사를 인질-안내역-로 붙잡았던 그 부근에서 와론은 지우스를 발견했다. 지우스는 와론이 생포한 용병을 묶어놓았던 그 나무 아래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밤새 숲을 산책하다가 잠시 쉬고 있었던 것처럼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와론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오리라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와론을 보고도 지우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며칠 동안 나무 꼭대기에 묶여 있었더군. 살아서 다행이야.”

 

 와론이 다가오자 지우스는 그 말을 아침인사처럼 건넸다. . 내가 지금 풀어주려던 참이었는데. 옷을 툭툭 털면서 일어난 지우스는 난데없이 나무에 묶여 있던 용병에 대해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와론의 짓이라는 건 알아냈겠지만, 적어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와론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신도 그 용병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임무 중인 기사가 아니라 집 근처에 산책을 나온 평범한 사람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숲에서는 머리 위를 오가는 새들의 소리와 이슬이 맺힌 풀잎을 사박사박 밟는 소리만이 들렸다.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와론이었다.

 

 “걔들은 어쩔 거냐?”

 

 두서도 없고 맥락도 없었지만 지우스는 곧바로 대꾸했다.

 

 “원래대로라면 체포해야겠지. 마을을 위험에 빠뜨리고 임무 중인 기사를 공격했으니.”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과 얘기해 봤는데 이쪽은 역시 광산 개발에 부정적이야. 시끄럽고 물도 오염되고, 외지인도 몰려오게 될 테니까.”
 “그리고?”

 “저들이 증언을 하면 마수가 그 희귀한 광물의 원천이라는 정보도 알려지게 되겠지. 나는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
 “마법사들을 고용한 그 투자자는? 그자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우리가 모른 척하면 돼. 어차피 마수들은 이제 그쪽에 없으니까 광맥인지 뭔지도 더는 안 나올 것 아냐. 아무도 자길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히 손을 떼려 하겠지. 놈을 치는 건 그 다음이다.”

 “걔들이 증인인데. 걔들 없이 어떻게 하려고?”

 “때가 됐을 때 다시 설득해서 데려오면 돼. 그리고 그 건은거북이님께 얘기해보고 나서 진행해도 늦지 않아. . 네가 맡고 싶어?”
 “딱히? 그런 건은 중앙 돌아가는 꼴을 잘 아는 치가 맡는 게 낫지. 거북이가 딱이잖아.”

 “그렇긴 해.”

 

 , 이번에는 웬일로 다 떠맡겠다고 나서지 않는군. 범죄조직과 손을 잡아가며 기사가 둘이나 사망할 정도로 일을 크게 벌였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 투자자는 무척이나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광산 문제는 애초에 지우스가 맡은 임무의 범위 밖이었고, 아직도 중견보다는 신입에 훨씬 가까운 기사 한 사람이 거기까지 책임을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와론은 지우스가 자신이 책임지려는 일의 범위에 스스로 선을 그은 것에 만족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범위를 아는 것은 한 사람의 기사로서나 사령탑으로서나 반드시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투구는 정면을 향한 채, 와론은 눈만 굴려 지우스를 곁눈질했다. 지우스가 사양하는 마을 주민에게 굳이 값을 치르고 구한 새 겉옷은 후드는 달려있지 않았지만 앞주머니는 달려있었다. 그 덕에 지우스는 평소처럼 앞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건방진 모습이었다. 지우스가 견습기사처럼 몸에 달라붙는 단출한 검은 목티만 걸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웃자란 소년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잘 단련되긴 했지만 평균보다는 조금 작은 체구와 여름의 잡초처럼 무성해서 정리가 되지 않는 풀빛 머리와 티없이 앳된 얼굴도 그런 느낌을 강조할 뿐었다. 하지만 낙낙한 겉옷을 구해 체구를 감추고 평소의 익숙한 몸가짐을 할 수 있게 되자 지우스에게서는 훨씬 청년다운 느낌이 났다. 다른 것보다도 자세의 문제겠지. 똑같이 구부정한 모습이라도 방어적인 것과 자신감이 있는 건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와론은 투구 밑에서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게다가 일 하나를 끝까지 책임지고 자기 뜻대로 완수하는 경험은 크거든. 그게 도중에 완전히 잘못될 뻔한 일을 어떻게든 수습해낸 거라면 말할 것도 없고. 와론이 지우스를 애송이로 취급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아 끝을 맞게 될 것 같았지만, 와론은 그런 재미를 일찍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녀석들에게는 알아서 여길 떠나 조용히 살라고 해뒀어. 또다시 범죄에 휘말리면 두 번째는 없다는 경고도 해뒀으니 네가 나설 것 없어. 우리는 바로 출발해도 돼. 두고 온 것 없지?”

 

 마치 와론이 자신을 곁눈으로 살피고 있던 걸 알았던 것처럼, 지우스는 샛노란 눈을 정면에 둔 채 무뚝뚝하게 통보했다. 와론의 의견을 듣지 않고 와론도 모르게 결정해 처리까지 마쳤지만 뭐가 문제 있냐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이것 봐. 애송이가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엔 어디까지 가겠어. 안 그래도 건방진 놈이 내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 들 걸. 와론은 지우스의 태도에는 코웃음 쳤지만 지우스의 결정에는 그러지 않았다.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결정이었다. 그래서 와론은 지우스 본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해 뜨려면 아직 멀었는데 좀 더 걷지. 급할 것 없기도 하고.”
 “산책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나라고 항상 뛰거나 날아다니는 건 아니란 거 알 때 됐잖아~ 그때 마수들이 위협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면 너는 을 쓸 작정이었나? 내가 없었다는 전제로.”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지우스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을 발동할 수 있는 두 손을 주머니 속에 제대로 숨길 수 있게 되자 속내를 숨기기 위해 두르는 불투명한 공기도 자연스럽게 함께 돌아온 모양이었다.

 

 “너는 내가 그 을 쓸지 말지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군.”

 “응 많아.”

 “흥미로우니까?”

 “그럼 그럼.”

 “너라면 눈치챘겠지. 나에게는 기사의 명예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어. 명예와 그 가치 중에서 택해야 한다면 나는 명예를 포기할 거다. 그렇게 된다면 기사사냥꾼은나를 죽일까?”

 

 명예롭지 못한 기사를 사냥하는 기사에 대한 "소문"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풍문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취급되어야만 했다. 기사는 존재 자체로 명예롭고 정의롭다는 믿음-미신-은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기사가 공포 속에서 마수처럼 사냥당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기사가 활보하는 풍경에도 안심할 수 있도록 기사의 온몸에 보란 듯이 얽어 놓은 사슬이었다. 하지만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최초의 목적은 잊혀지거나 변질되기 일쑤이며, 실재란 언제나 이상과 괴리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힌셔. 요즘 기사들 보고 놀라지 마.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내 뒤통수에 냅다 망치 꽂던 때처럼 싸움 걸고 다니지도 말고. 진짜로. 나 진심임. 그렇기에 단순히 생각이 부족해서 유치한 정도가 아니라 명예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여 처단되어야만 하는 기사가 실제로 존재하고 심지어 그 수가 수십명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람들이 갖게 되어 좋을 일은 없었다. 와론은 기사를 싫어했지만 그것은 바라지 않았다. 난 기사를 너무 미워하지 않으려고 정말 애쓰고 있다고. 그놈들이 나를 안 도와주는 거란 말이야.

 

 그렇지만 지우스는 처음부터 보통의 기사들이 안다면 명예롭지 못하다고 비난할 명예관을 지닌 기사였다. 오래전 본인이 주선한 실험대련 때부터 지우스의 부근에 그 기사사냥꾼이 계속 맴도는 것을 달잔이 은근히 불안해했던 걸 떠올리며 와론은 히죽 웃었다.

 

 “소문 속에서 상상된 기사사냥꾼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세상의 소문대로라면 내가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서 나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겠지.”

 “그럼 너는 어떻게 상상하냐?”

 “글쎄, 왜 사람들이 상상된 소문 같은 걸 두려워하는 건지 모르겠군.”

 

 대답을 피하는군. 본인도 단언할 수 없는 거야. 그 상황이 되지 않으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내가 정말로 명예나부랭이 때문에 너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소문 속에서 상상된 새까만 닭은 실제의 와론과 다르다. 와론이 지우스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우스가 와론이 그어놓고 고수하는 선의 안쪽을 바라보고 가늠하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와론은 불편했다. 싫진 않았다. 하지만 오해와 불신은 와론이 호흡하는 공기였고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본모습을 알아채고 똑바로 바라보는 기사가 나타나게 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와론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하마나 기린 너라 해도말이야.

 

 “그나저나 내가 신세 진 집의 주인이 간밤에 이상한 소문을 말해주더군. 500년 전의 기사인 그 검붉은 하마가 지금 수도에 돌아와있다고.”

 

 와론은 투구 밑에서 눈을 깜빡였다. 힌셔와 지우스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지우스의 입에서 힌셔가 언급된 것은 무슨 우연인가? 그러나 이런 궁벽한 오지의 마을에도 소식이 들어온 것 자체는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500년이 걸린 영웅의 복귀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소문이었다.

 

 “기사사냥꾼은 어떨지 몰라도 검붉은 하마한테는 안 걸리게 조심해라. 영웅님은 명예인지 나발인지에 무지 엄격하거든.”

 “설마 네가 서쪽 다리 이후 겪었다는 많은 일이 전설의 영웅과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글쎄 어떨까나~”

 

 와론은 입매를 비죽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와론을 죽이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으나 끝내는 완전히 무력화된 와론을 죽이지 않고 하마턱을 바닥에 끌면서 절뚝이며 떠나던 검붉은 뒷모습을 생각했다. 팅크. 그때 나는 힌셔가 먼저 건 싸움을 변명 한마디 없이 받아줄 게 아니라 그 인간에게 말이라도 걸어봐야 했던 것일까. 아무런 숙고 없이 폭력을 정당화할 뿐인 공허한 명예 따위보다 너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득은 해봐야 했던 걸까. 어쩌면, 와론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거나 설득했더라면 힌셔는 이해해줬을지도 모른다. 싸움은 흐지부지 끝나고 두 기사는 위험에 처한 팅크에게 제때에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힌셔라면 그 새까만 닭이 하는 말을 일단 진지하게 들어볼지도 모른다는 -납득까진 못 하겠지.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인간이니- 가능성은 힌셔가 다짜고짜 먼저 시작한 그 싸움이 한창이던 도중에야 발견되었고, 그럼에도 와론은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와론은 그런 희박한 운과 가능성 때문에 예외를 만들 순 없었다.

 

 예외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그는 더이상 기사들을 상대로 홀로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으므로. 더이상 기사사냥꾼이 될 수 없으므로.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너는 내가 하마님의 손에 죽게 내버려둘까?”

 

 지우스가 여상스럽게 건넨 말에 와론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는 이를 갈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 애송이 놈, 긴장해라. 그따위로 계속 기어오르다가 언젠가 하마 이전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글쎄, 어떨까나.”

 

 지우스가 입매만으로 씩 웃었다. 와론이 이마-투구-를 짚지 않은 것은 순전히 지우스가 보고 싶어 할 반응은 보여주지 않겠다는 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우스의 질문은 힌셔가 돌아온 지금 와론이 반드시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힌셔와 또다시 생사를 걸고 싸워야만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싸움에 걸리는 목숨이 또다시- 이번에는, 네 것이라면와론은 차라리 힌셔가 다른 멍청한 기사들처럼 자신을 무작정 싫어하고 미워했으면 싶어졌다. 그랬더라면 자신도 힌셔를 쉽게 미워할 수 있을 테니까. 팅크. 난 이제 네 생각은 안 할 거다. 살아있는 놈 건사하는 것도 벅차거든. 와론은 팅크에 대한 애도를 끝내기로 했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본 와론은 어디에도 얼굴을 숨기고 싶은 것처럼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어린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지우스와 함께 지하를 벗어난 때부터 팅크의 환영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흠칫 고개를 돌린 와론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지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완전히 숨기는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와론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별 것 아냐.”

 

 와론은 다시 정면으로 투구의 방향을 돌렸다. 그러면서 다시는 팅크의 모습이 자신의 눈에 달라붙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다고 정말로 가버린 거냐? 섭섭하긴.

 

 “그건 그렇고, 하마님에 대한 소식이 사실이라면 수도는 지금 몹시어수선하겠군.”

 

 지우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와론이 이 임무를 위해 출발하기 전부터 수도는 시끄러워져 있었다. 니젤은 끔찍한 곳이다. 이전에도 물밑에서 온갖 더러운 짓과 멍청한 일이 벌어졌지만 500년 묵은 전설 속에나 얌전히 묻혀계셔야 할 영웅이 피와 살을 지니고 현실로 돌아오는 대형 변수가 터졌으니 더는 물밑에 숨겨놓고 문제도 갈등도 없는 척 할 수 없게 되겠지. 기사는 본격적으로 사방에서 견제당할 것이며 내부적으로도 분열될 것이다. 파국이 언제, 어떤 식으로 올지는 모른다. 힌셔와의 결투가 끝난 후 상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수도로 돌아가는 내내 와론은 그것에 대해 생각했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와론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답을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그런 애송이 같은 꼴로 돌아가면 곤란해.”

 “내 꼴이 뭐가 어때서.”

 

 다음 순간 지우스는 와론의 손에 뒤통수를 덥석 잡힌 채 강제로 인사라도 하듯이 머리를 눌렸다. 당황했는지 지우스가 반사적으로 두 손을 꺼내 와론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와론은 쉽게 손아귀를 풀지 않았다. 이 조그만 잡초뭉치 같은 머리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니. 와론은 내심 한숨을 지으면서 거칠게 쓰다듬는 것처럼 지우스의 머리 앞쪽으로 손바닥을 쓸어내렸다.

 

 “훨씬 낫네.”

 

 울컥 화를 낼 것처럼 고개를 쳐든 지우스는 와론의 팔을 떼어내려고 들었덨 두 손으로 엉망이 되었을 머리를 만지다 깜짝 놀랐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지우스는 다른 손으로 깨끗이 세탁되고 수선도 마친 모자를 벗어든 채 내려다보았다.

 

 “이거 네가 계속 갖고 있었어?”

 

 나뭇잎 사이로 비쳐들기 시작한 금적색의 아침 햇살이 지우스가 멈춰선 위치에도 닿았다. 그 빛 한점이 떨어져 부드럽게 물든 지우스의 얼굴을 본 와론은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나 조금은 후회했다. 지우스의 금색 눈동자는 건방지고도 대담한 짓을 할 때는 색이 짙어지는지 샛노랗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와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조용한 불빛이 너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었다. 마치 해가 뜨고 질 때 놀이 지는 빛깔처럼. 지금처럼, 말이지. 와론은 그 빛깔을 좋아했지만 결코 지우스가 알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넌 그렇잖아도 동안인데 머리꼴 때문에 더 어려 보인다. 거북이놈처럼 수염을 기르기엔 한참 이르니 모자라도 써야지.”

 “고마워.”

 “시끄럽고. 가서 얕보이지나 마라. 기사가 둘이나 죽었다. 네가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다닐 일이 아주 많아.”

 

 와론은 한 손을 휘휘 저으며 성큼성큼 앞서갔다. 뒤통수-투구-를 바라보는 지우스의 시선이 느껴진다. 잠시 후 모자를 다시 쓴 지우스가 발소리를 내며 따라와 와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내가 이 얻을 것 없고 피곤하기만 한 지원임무를 왜 수락했는지 알아? 나는 네가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고 싶다. 말뿐인 명예 따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좀 더 고민하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는 네가 실현하는 미래는 어떤 것일지 보고 싶다. 네가 기사인 한 나는 너를 잃을 수 없어. 와론은 예고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왜 또!”

 

 그 뒤를 지우스가 허둥지둥 뒤쫓아 달렸다. 나무 사이에 키 작은 수목이 너무 많고 빽빽하기까지 한 이 숲에서는 발을 걸리지 않고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와론은 가까운 거목 위로 뛰어올랐다.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순식간에 수 킬로미터를 달려나가면서 흘끔 돌아본 와론은 뒤처진 지우스가 이를 악문 채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잘 따라오네. 그래도 네가 다리 다쳤던 거 감안해서 천천히 달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진 말고. 와론은 지금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며 오늘 안에 이 숲을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하늘 높이 론누를 집어던졌다.

 

 허공으로 화살처럼 쏘아져 올라간 론누는 밤이 물러가고 아침놀이 번지면서 금빛과 담청빛이 뒤섞여가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아직 새까만 어둠의 여운이 남은 서쪽을 멀리 내다보았다. 저 멀리, 둥그스름하게 휘어지는 지평선의 끝자락에서 숲이 끝나고 황야가 시작되는 경계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와론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황야에 부는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어디로든 어느 때든 갈 수 있었다. 자유로운 바람처럼 세상을 멋대로 주유하다가도 문득, 자신이 지켜야 할 자가 부르는 순간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와론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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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오늘 저녁 업뎃될 135화에서 기린닭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공식 장면이 터지면 저는 공개처형을 당하겠지요. 그치만 뭐 어떻습니까? 이건 팬픽이고 동인질이며 적폐왜곡날조망상입니다? 🤪🤪🤪

리퀘로 재밌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이상한 놈 만들뿐이다~!!- 소재 주신 문수님과 끝까지 긴 글 재밌게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m(_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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