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개빠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사저사매 하마닭" 입니다.
*절대적인 메인은 하마닭이고 부수적으로 거미하마, 그노힌셔, 기린닭, 목와 요소 있습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이번 편부터는 캐릭 해석과 핏빛 거미의 설정 등에 본격적으로 저의 적폐왜곡날조가 들어갑니다. 물론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4.
눈구름 뒤편에서부터 흐릿하게 밝아오는 빛이 눈썹에 부서지는 걸 느끼며 힌셔는 이 바위가 동쪽을 향하려니 짐작했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밤새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책상다리로 앉아있었더니 기사라도 슬슬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호흡은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열은 어제보다는 조금 내린 듯한 느낌이었다. 약간의 희망을 품고 갈발 아이의 팔에 묶어놓았던 붕대를 슬쩍 풀어본 힌셔는 도로 암담해졌다. 기사보급품인 마법회로가 작동하면서 피는 그쳤지만 팔의 상처는 여전히 제대로 닫히지 않은 채였고, 언제 감염이나 동상이 일어날지 몰랐다. 기사였다면 간밤에 힌셔가 한 정도의 조치로도 벌어진 상처가 벌써 어느 정도 붙으면서 자연치유가 진행되고 있었겠지만, 아이는 기사가 아니었다.
“언니야는 괜찮아? 나을 수 있어?”
힌셔는 말의 무거움을 알았고 그렇기에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장담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하지만 간밤에 닭이 준 감자 말고는 먹은 것 없이 아침 끼니때를 넘긴 백발 아이가 절반 넘게 남은 식어 빠진 죽을 계속 흘끔거리면서도 손대지 않은 채 10분 단위로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점점 뭐라도 대꾸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가슴속에 꾸역꾸역 들어차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네... 언니는 도움이 필요하다. 닭이 돌아오는 대로 얘기를 해보마.”
“네가 도와주면 안 돼?”
“내가...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적구나.”
힌셔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는 불이 있는 이곳에서 돌봐줄 어른이 절실했고 힌셔는 혼자 숲에 내려갔다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멀어지는 바람에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를 닭의 일을 두 배로 늘리고 싶지 않았다. 고심 끝에 행동 대신 이곳에서 아이들을 지키며 견디는 것을 택한 데 후회는 없지만, 힌셔는 스스로에게 한심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분을 읽은 것처럼 백발 아이가 힌셔의 무릎 위에 엎드려 빤히 올려다보았다.
“동생은 떠난 거야? 언니 버리고?”
“동생?”
“까만 기사가 동생이잖아.”
3초 후 힌셔는 자신도 모르게 얼간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평소의 근엄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힌셔는 아이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오해를 하여 그런 경악스러운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자와 나는 동기지간이 아니다.”
“그게 뭔데?”
“그러니까 자매, 음, 언니 동생 사이가 아니다.”
“아니야? 왜?”
애초에 부모가 다르다고 대꾸하려다 힌셔는 혀를 깨물다시피 하여 그 말을 삼켰다. 백발 아이와 갈발 아이는 한눈에 봐도 부모가 달랐지만 적어도 백발 아이 쪽에서는 혈연으로 이어진 자매보다도 깊은 정으로 갈발 아이를 대하고 있었다. 힌셔는 황급히 머릿속에서 단어를 뒤졌다.
“그...러니까 뭐라 해야 할지... 선배와 후배 사이라고는 할 수 있지. 기사로서, 또...”
스승이 오직 힌셔에게만 전수한 그 무술을 어째선지 500년 뒤의 사람인 새까만 닭도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 반골과 고민과 치열함과 오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에서 힌셔에게 너무나 익숙하고도 그리운 기사의 그림자를 보곤 하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자는- 그렇지만- 힌셔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엄지와 검지로 세로 주름이 깊이 새겨진 미간을 짚었다.
“...아무튼 그런 친밀한 사이는 아니고. 그냥, 동료 기사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기사들은 누구나 존경하고 고개를 숙이는 전설의 영웅 앞에서 홀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존칭조차 붙이지 않은 채 불손한 언행을 서슴지 않는 닭을 몹시 싫어했지만, 힌셔는 그런 태도가 싫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닭은 의외로 싸우지 않을 때는 인격적으로 무례하게 구는 자가 아니었다. 단지 모든 기사 앞에서 너와 나 사이에 위아래 같은 건 없다는 듯이 행동했으며 힌셔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것이 힌셔가 지금의 ‘동료’ 기사들로부터 접하고 싶은 태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자가 있을까. 검붉은 하마 힌셔라는 기사와 임무를 함께 하거나 적어도 서로의 명예와 정의를 밝히며 말을 섞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500년 전부터 모두가 영웅으로 우러렀으니까 따르는 맹신과 맹종. 그보다도 현재의 기사들의 미숙함을 증거하는 것은 없었다.
힌셔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이의 낯이 멍해졌다. 힌셔가 뭔가 좀 더 설명하려고 열심히 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때 탁 바위를 딛는 소리가 나면서 입구로 비쳐들던 빛이 새까맣게 가려졌다.
“오, 아직 있었네.”
닭은 한 손에 론누를 들고 다른 손은 자신을 보자마자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백발 아이에게 흔들어 보이며 집 앞에 산책을 나갔다 온 것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반가움과 안도감과 호기심과 야속함이 한꺼번에 가슴 속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힌셔는 핀잔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장실 한번 오래 갔다 오는구나.”
“큰일이었거든~ 그새 나 보고 싶었어?”
장작이 줄어들면서 어제보다는 작아진 모닥불 위로 뭔가가 둥실 날아가더니 백발 아이가 엉겁결에 내민 두 손 위에 떨어졌다. 큼직한 육포덩어리를 본 아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닭은 육포를 공격적으로 물어뜯느라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도 반응하지 않는 아이를 지나쳐와서 힌셔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아직도 끙끙거리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갈발의 아이를 들여다보는 투구에는, 당연하지만 표정이 없었다.
“새까만 닭. 그대는-”
“아무래도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야 싸울 맘이 들잖아. 그치? 근데-”
싸운다는 소리에 벌써 육포를 절반이나 먹어치운 백발의 아이가 움찔하며 두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 전에 애기 데리고 산책이라도 하고 와.”
“나 애기 아닌데?”
“아닌데 애긴데?”
“애기 아니라고오.”
백발 아이의 매서운 주먹 한 대에 맞아주는 것처럼 등을 돌린 닭은 그렇게 몸으로 아이의 눈을 가리면서 어느 틈에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작은 가죽가방을 슬쩍 열어 보였다. 안을 본 힌셔는 바늘과 실, 붕대, 칼과 가위, 약으로 짐작되는 액체가 든 조그만 병 등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쓰는 치료도구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작고 낡은 가죽가방은 급하게 왕진을 가는 시골 의사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깨달음이 온 순간 힌셔는 저쪽에 치워둔 하마턱 대신 주먹으로 닭의 투구를 후려칠 뻔했다. 비행에 익숙한 닭이라면 아픈 아이를 안고 몇 시간 안에 니젤에 있는 최고의 의사에게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쯤 아픈 아이는 충분히 치료를 받으며 쉬고 백발 아이는 벽과 난로가 있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닭은 아이를 의사한테 데려가거나 의사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걸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한 것이었다. 힌셔의 충동과 생각을 감지한 것처럼 뻔뻔하게 똑바로 얼굴을 마주하는 투구, 그 안에 든 자의 눈동자를 감춘 철의 벽 앞에서 힌셔는 지그시 눈을 감고 분기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 자는 기사이고, 생각 없이 행동하지 않아. 그걸 믿자. 힌셔는 육포와 의사의 가방의 출처는 물론, 닭의 의심스러운 결정에 대해서도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말이다.
“그런 재주도 있는 줄은 몰랐군.”
“없지. 당장은 돌팔이라도 필요한 것뿐이지.”
불현듯, 자신의 몸에 난 찢어진 상처를 훔쳐온 실과 바늘로 서툴게 꿰매는 사람의 모습이 힌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굴은 그가 숨어있는 어둠 탓에 흐릿해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가느다랗고 조그만 체구를 보면 아이인 듯했다. 눈을 깜빡인 힌셔는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는 투구와 다시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힌셔는 표정이 없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닭은 고개를 돌려 벌써 육포를 모두 먹어치운 백발 아이에게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였다.
“애기야, 이 언니 되게 길 잘 잃어먹거든? 안 잃어버리게 잘 데리고 다녀~”
백발 아이는 닭을 쏘아보더니 쌀쌀맞게 고개를 팽 돌렸다. 힌셔는 그때까지 자신의 반망토로 감싸 품에 안고 있었던 아픈 아이를 닭의 팔에 넘기고 일어섰다. 그걸 본 백발 아이가 당황하며 힌셔의 팔을 붙잡았지만 힌셔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등을 밀며 바깥으로 향했다.
“알았다. 끝나거든 잠깐 나 좀 보지.”
어쨌거나 생살을 꿰매는 광경은 어린아이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바위 밑 피난처를 떠나 비탈길 아래의 숲으로 내려가는 동안 발 닿는 대로 걸으면서 힌셔는 그늘진 낯으로 생각에 골몰했다.
어제 내린 눈이 거의 무릎 높이까지 쌓인 탓에 눈을 밟아 길을 내면서 걸어야 했다. 힌셔가 닭에게 자기 친구를 넘긴 것이 배신으로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여차하면 뒤돌아 다시 바위로 달려갈 것처럼 거리를 둔 채 힌셔의 걸음을 따라 난 길로 따라오고 있는 백발의 아이는 검붉은 하마라는 기사의 이름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당연히 힌셔가 지닌 ‘통찰의 눈’이라는 이능에 대해서도 까맣게 몰랐다. 힌셔의 앞에 서면 고개를 숙이면서 의식적으로 눈을 내리까는 수도의 사람들과 달리 아이는 힌셔가 돌아볼 때마다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없이 자신의 분노와 원망과 속상함을 주장했고, 그러면 아이의 생각과 감정이 쉴 새 없이 힌셔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물이 그대로 얼어붙은 야트막한 개울에 다다를 무렵 힌셔는 백발 아이와 갈발 아이의 짧은 삶을 대강 알게 되었고, 머릿속은 휘몰아치는 상념으로 터질 지경이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마음이 강해지는 과정이에요. 그 말을 하며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대장간의 불과 쇠 냄새가 밴 따스한 손이 떠오른다. 힌셔는 목이 메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다.
“아! 버섯이다.”
아이의 새된 외침에 힌셔는 마른 눈을 깜빡이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이가 힌셔를 앞지르더니 저편 기슭에서 쓰러져 얼어붙은 개울 위로 처박힌 나무에 쪼르르 달려갔다. 죽은 나무 위에 두 뼘은 되도록 쌓인 눈을 맨손으로 파낸 아이는 그 밑에서 납작하고 큼지막한 버섯 하나를 따 높이 치켜들어 보이며 의기양양해 했다. 힌셔는 미소를 지었다.
“눈이 그렇게 쌓였는데 버섯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우리 언니야가 버섯 되게 잘 찾아. 언니야가 가르쳐줬어.”
“이 나무가 버섯이 많이 자라는 나무인가 보구나.”
“여기보다 더 많은 데도 있어. 가르쳐줘?”
아이가 너무나 기대하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기에 힌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힌셔가 말리기도 전에 아이는 개울 저편의 자기 허리께까지 쌓인 눈으로 뛰어들었다. 깜짝 놀라 얼른 뒤쫓아간 힌셔는 아이가 지나갈 때마다 몸 주위에 아지랑이처럼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옷이나 몸이 타지 않도록 아주 얇게 불을 둘러달라거나, 자기 주변의 공기만 뜨겁게 온도를 높여달라는 식으로 ‘친구들’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이 대를 이어 공식으로 정리해온 마법은 배우지 않아 전혀 모르지만 마력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정도만큼은 틀림없는 천재였다.
“저기도 있어! 저기도.”
아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겨울에도 갓을 내민 버섯을 찾아냈다. 이미 수차례 다녀간 탓에 상했거나 너무 작은 버섯만 남은 곳을 보여주며 어떤 맛의 버섯이 있었는지 재잘대는가 하면 수상쩍은 모양과 색채를 자랑하는 건 피하며 -그래도 힌셔는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구분할 자신이 없었기에 아이 입에 들어가기 전에 꼭 기사인 자신이 먼저 시험을 하자고 다짐했다- 숲을 누비는 모습은 아이들이 사람을 피해 이 숲에서 몇 달째 숨어 살고 있다는 가혹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힌셔는 애써 밝은 화제를 생각해냈다.
“버섯을 잘 찾는 요령이라도 있을까?”
“응! 버섯마다 좋아하는 나무가 달라. 봐봐, 얘는 소나무에서만 자라고 얘는 죽은 나무 북쪽으로 가면 많아. 그리구, 응, 버섯들은 땅속에서 뿌리가 있어.”
“버섯에 뿌리가 있다고?”
“뿌리, 어, 나무뿌리처럼! 땅속으로 엄청 크게 많이 연결돼있어. 그래서어 하나 찾으면 근처에 또 있어.”
힌셔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기억 속에서 스승이 해줬던 이야기 하나를 가까스로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숲에서 수련여행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승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함부로 버섯을 채취해 먹으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면서 버섯의 정체는 곰팡이라는 것을 -힌셔는 그날 식사에 버섯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도 기억했다- 그리고 낙엽과 흙 밑에서 끈적한 거미줄처럼 온통 연결되어 있기에 버섯이 하나 보이면 근처에 같은 버섯이 또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던 것 같다. 아이는 숙달된 버섯채취가들이 그렇듯이 정령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땅밑으로 연결된 버섯의 지도가 훤히 읽히는 모양이었다.
“버섯이 이리도 많으면 나무가 못 살겠구나.”
힌셔가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 아이가 나뭇가지로 눈과 흙을 파헤치던 데서 잠깐 고개를 들었다.
“아닌데? 버섯이 나무 도와줘. 나무랑 나무가 친구 하게 해줘. 쟤는 아팠는데 옆에 큰 나무가 쟤한테 밥 줘서 살렸어. 언니야가 그랬다고 가르쳐줬어.”
힌셔는 아이가 가리킨 가느다란 나무와 수령이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큰 나무를 쳐다보았다. 두 나무 사이에는 못해도 십수 미터의 거리가 있었고, 수종도 달랐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렇게 떨어진 나무도 버섯의 뿌리...라는 걸 통해 서로 교류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냐?”
“응! 버섯 뿌리가 저 끝에서 저 끝까지 다 있어! 그래서 나무들이 나쁜 일 생기면 소문도 전한다? 그니까 숲에선 말조심하랬어!”
아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스승이 버섯과 곰팡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날 들려준 또 다른 이야기 하나가 낚싯바늘로 엮인 것처럼 기억 깊은 곳에서 건져 올라왔다. 나무도 땅 위에서 보이지 않을 뿐 실은 모두 무언가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렇기에 원래 자라던 곳에서 뽑혀 다른 곳에 옮겨심어진 나무는 약해지고 쉽사리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무렵 수도에서 어떤 이유로 멀쩡하던 가로수를 뽑아버리고 새 나무를 심는 걸 스승이 심기 불편해했고, 실제로 관리가 소홀했던 몇 그루는 그 해가 끝나기 전에 말라 죽었던 것을 힌셔는 기억했다.
원래 속하고 자라던 곳의 토양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연결망으로부터 뿌리째 뽑힌 채 500년 후의 모르는 숲 한복판에 억지로 심겨져 어디에도 연결될 곳을 얻지 못한 나무가 바로 자신의 꼴이 아닌가, 힌셔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언니야한테 버섯 보여주고 싶은데.”
아이가 낡고 해진 옷자락에 넘치도록 모은 버섯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힌셔는 그만 산책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래. 돌아가자.”
힌셔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나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눈밭을 헤치고 뛰어나갔다. 힌셔에게는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 얼어붙은 개울과 언덕과 바위와 나무를 지나 비탈길을 오르는 길은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이제 보니 바위틈의 피난처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모닥불을 지피는 동안 데워진 공기가 고드름 주변에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뭉게뭉게 수증기가 되어 피어오르는 탓이었다. 바위 앞에 나온 닭은 허리에 손을 얹은 모습으로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힌셔는 닭의 등 뒤에서 언제나 커다란 날개처럼 펄럭이던 새까만 망토가 없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론누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꺼림칙한 나린기는 닭의 눈을 대신해 하늘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 위를 흘끔 본 힌셔는 오후 늦게부터 다시 눈이 쏟아지겠다고 짐작했다.
“나도 너도 아이들에게 망토를 빼앗겼군.”
힌셔가 인사 삼아 건넨 말에 닭은 느릿느릿 엉뚱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걘 지금은 자고 있어. 오늘을 넘기면 어떻게든 될지도.”
“정말로 의사 공부는 한 적 없는 거냐? 별 괴상한 지식을 많이도 알더니.”
“불멸자가 그런 말 들으면 놀려요~ 오, 버섯이 풍년이네?”
“넌 안 줘!”
백발 아이는 버섯무더기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바위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밥은 먹이고 나서. 두 기사 사이에 말없는 동의가 이루어졌다. 짙어져가는 눈구름 아래 두 기사는 나란히 아이들의 피난처로 들어갔다.
5.
닭이 어딘가에서 가져온 다른 육포 덩어리를 잘게 쪼개 넣어 국물을 내고 숲에서 채집한 버섯 -힌셔가 버섯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무작정 하나를 입에 넣으려 하자 직접 독버섯을 선별하려고 자세를 잡던 닭이 어디 계속해보라는 듯 빤히 쳐다봤고 힌셔는 조용히 버섯을 내려놓았다- 을 넣어 끓인 국이 늦은 점심으로 마련되었다. 싸움을 예감한 기사들이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덕에 배부르게 먹고 나자 백발 아이는 노곤노곤해져선 꾸벅이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도 어제보다는 국물을 수월하게 넘기며 조금은 목을 축였다.
간밤부터 모닥불이 종일토록 바위틈을 데우면서 입구에 매달린 고드름의 길이가 길어졌고 장작은 다시 가득 채워져있었다. 여전히 무척 아프고 지쳐 보이는 갈발의 아이 옆에 백발의 아이를 눕히고 낡았지만 깨끗한 모포 하나-힌셔는 언젠가 닭에게 화수분 같은 동화 속의 마법주머니라도 갖고 있는지, 혹시 그런 거라면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꼭 물어보기로 결심했다-를 둘에게 덮어준 후, 이윽고 닭은 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검은 망토를 둘러 입으며 일어섰다. 밖에서 눈으로 취사도구를 닦고 돌아온 힌셔는 닭이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다소 허름해진 붉은 반망토를 어깨에 두르며 하마턱을 집어들었다.
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탈길을 내려가는 동안 힌셔는 능선 너머 서쪽으로 레툰까지 펼쳐진 광활한 황야에 넘어가 하루 종일 닭과 실컷 싸워보려 했던 최초의 계획을 돌이켜보았다. 아픈 아이에게 힌셔와 닭이 해준 조치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이었고 백발 아이에게는 백발 아이대로 돌봄이 필요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낮잠에 든 백발 아이가 언제 깰지도 몰랐다. 일단 개입해서 자신의 책임 아래로 들인 아이들을 내버려 둔 채 자신의 사소한 욕심을 달래기 위하여 산을 넘어가는 것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었다.
“새까만 닭. 사과하도록 하지.”
“갑자기? 여기서?”
“그래. 대련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너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뭐. 오지게 놀 기회야 다음에 또 있겠지.”
하늘에서 소리도 없이 뚝 떨어진 론누가 닭의 손아귀 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래도 가볍게 몸은 데워보자고. 모처럼인데 그냥 돌아가면 아쉽잖아. 당신도 수도에 갇혀 있으면서 어지간히 욕구불만이었던 모양이고.”
닭이 론누로 가리킨 곳을 본 힌셔는 눈 닿는 곳 어디나 빽빽하던 나무들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작은 운동장만 한 크기로 트인 땅을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싼 숲보다 지대가 조금 낮은 이 벌거숭이 땅은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나무를 뿌리째 쪼개버리고 바위를 조각조각 깨버리는 거대한 충격이 균일하게 가해진 끝에 본래는 들쑥날쑥 날카로웠을 바위들마저 판판하게 깎여있었다. 사물의 모습을 숨기고 모든 것이 그게 그거처럼 보이도록 혼란시키는 두터운 눈 때문에 조금 늦긴 했지만, 곧 힌셔는 이곳을 알아보았다. 이곳에 처음 온 날 하나뿐인 제자를 위해 직접 터를 닦았다며 자랑스럽고 조금은 쑥스러워하던 얼굴을 기억했다. 스승님.
오래전에 버려진 숲속의 대련장 가장자리에서 닭은 론누를 땅에 꽂더니 어깨를 이리저리 틀어 관절을 풀며 중앙으로 걸어갔다.
“맨손으로, 어때.”
스승은 주먹 한 번, 목검 한 번 부딪쳐보는 것으로 제자의 상태와 기분을 단번에 파악하곤 했다. 스승과 제자의 대련은 자연스레 고민을 상담하고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대화의 자리가 되곤 했다. 힌셔는 그 대화가 지독하게 그리웠다.
힌셔는 깃발 없는 깃대처럼 세워진 론누 옆에 기꺼이 하마턱을 거꾸로 세워두었다.
“맞고 울지나 마라.”
“어쭈. 먼저 우는 쪽이 지는 걸로 하고 삼세판?”
“그럼 네가 세 번이나 울겠군. 손수건은 빌려주마.”
“에헤이 아껴둬~ 난 울려도 안 빌려줌.”
마주 보고 선 두 기사는 신호도 없이 동시에 바닥을 찼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고, 발이 허공을 베고, 이편에서 저편으로 어지럽게 치고 달리고 회전함에 따라 검고 붉은 망토가 찢어질 듯이 나부낀다. 순식간에 쌓인 눈이 모조리 날리면서 누군가가 아주 오래 전 공들여 고르게 깎은 바위 바닥이 드러나고 비산한 눈은 안개가 되어 자욱하게 깔린다. 공격이 방어에 가로막히거나 빗나가 돌바닥에 꽂힐 때마다 천둥이라도 치듯 숲이 쩌렁쩌렁 울린다.
알고는 있었지만, 힌셔는 다시금 감탄했다. 두 기사가 처음으로 맞붙었을 때 닭은 힌셔와 맞상대가 되긴 하지만 조금은 아래라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1, 2년쯤 지났을까. 지금의 닭이 휘두르는 주먹은 그 사이에 또 어떤 전투를 치르고 다녔던 건지 좀 더 묵직하고, 좀 더 빨라져 있었다. 아, 나구나. 우리가 서로 죽일 각오로 임했던 마지막 싸움 때.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힌셔는 전술을 바꾸기로 했다.
다음으로 주먹과 발이 교차한 순간 힌셔는 무게중심을 크게 낮추면서 들이받듯이 달려들어 닭의 허벅지를 두 팔로 끌어안고 넘어뜨렸다. 머리 높이로 크게 발차기를 날린 직후라 닭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입식 격투에서는 한 치도 밀리지 않았지만 그래플링으로 바뀌자 닭이 맞받아치는 반응이 조금 느려지면서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이것만큼은 타인에게 배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기술이니 독학으로 싸움을 익힌 듯한 닭은 잘 대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힌셔의 판단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그럼에도, 온몸으로 바닥에 깔린 채 꼼짝을 못하고 가능하리라곤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관절이 사정없이 꺾이는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접하자마자 눈을 번득이며 흠뻑 젖어들듯이 흡수하고 있는 자의 희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힌셔는 조금 더, 조금 더 가열차게 밀어붙이며 몇 가지 배워 익힌 기술들을 차례차례 닭에게 시전한다.
다시 말해 닭은 온몸의 관절 곳곳에 돌아가며 멍이 들 정도의 부상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팔을 꺾는 기술로 돌아간 힌셔는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고집스레 저항하는 닭에게 소리쳤다.
“이놈, 팔 부러진다. 포기해라!”
“싫, 어!”
조르다시피 깔아 누른 다리 밑에서 닭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위치를 바꾸며 몸을 뒤집었던 것 같다. 다음 순간 힌셔의 손아귀에서 팔이 빙글 돌며 빠져나가고, 닭은 힌셔의 등을 걷어차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꺾였던 팔꿈치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힌셔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방금 일어난 상황을 빠르게 복기했다. 닭은 그런 형태로 팔꿈치 관절을 잡혔을 때 풀려나는 방어 기술을 배운 적도 없을 텐데 스스로 깨우친 듯 얼추 비슷하게 움직여 빠져나갔다. 제대로 배웠다면 자신은 풀려나면서 역으로 힌셔에게 관절기를 거는 연계를 했겠지만 닭이 거기까지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스스로 파해법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했다. 힌셔는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싸움꾼-힌셔가 처음 떠올린 단어는 ‘무인’이었지만, 닭이 안다면 썩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 단어로 바꿔 생각했다-으로서의 닭은 나이가 어리지 않음에도 계속 성장하는 자였고, 그릇이 어디까지 깊어지고 얼마나 더 커질지 기대되는 자였으며, 정식으로 스승을 맞아 배웠더라면 지금 성취한 것이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 자였다.
“욕구불만이, 내가 생각한 거랑 영 다른 방향이었나 봐? 좀 있으면 침대로 끌고 가는 거 아냐? 선배.”
그 호칭을 실은 어조가 빈정거리는 투임에도 어째서 웃음을 그칠 수 없는 것일까? 시간의 얼음에서 풀려난 힌셔가 수도로 돌아가기 전의 짧고 격렬한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장난인지 모종의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투로 ‘선배’라고 호칭하곤 했던 닭은 수도에서 재회한 때부터 마치 만난 적 없는 사람인 것처럼 기사명만으로 힌셔를 부르고 있었다. 그랬던 닭이 지금 와서 다시 선배라고 호칭하자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레툰의 설원에서, 사막 한복판의 어느 동굴 부근에서, 핀타스 부근의 황무지에서 무기를 맞대며 마주 보고 선 때로 돌아간 것 같다. 힌셔는 500년 후 현재 기사들의 실상을 아직 모른 채 그저 기사 대 기사로서 정면으로 부닥치기만 하면 되었던 그때의 여정에도 자신이 향수를 느끼고 있음을 실감한다.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멀쩡하구나. 울면서 빌 때까지 해주마.”
“어우, 영웅님의 이런 모습 애들이 볼까 봐 무섭네. 근데 진짜 뭐야? 500년 전 기술?”
“그보다도 오래됐지. 최초의 기사가 등장하기 전에 육중한 갑주를 갖추고 싸우던 무인들의 기술이다.”
닭이 방금 전까지 당한 걸 복기해 공략을 궁리하면서 체력을 회복하고 싶어 일부러 말을 거는 거란 걸 알면서도 힌셔는 술술 대답해줬다. 그 시절에는 갑주의 무게 때문에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둔해지는 걸 이용해 적장을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갑주를 씌울 수 없는 관절을 공격해 무력화하는 그래플링 기술이 무기를 다루는 법과 더불어 기본기나 다름없었다고.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지닌 기사들이 세상에 등장하고 뚫을 수 없는 금속이 없는 나린기가 점점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기사 앞에서는 인간의 기술로 제작한 방어구가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중론이 되었고, 힌셔가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던 무렵에는 이미 기본기의 지위에서 끌어내려졌다고. 이제 전장의 주인이 된 기사들의 싸움에서는 날이 갈수록 발달하는 무기가 훨씬 중요해진 반면 땅바닥에서 몸뚱어리를 맞붙이고 흙먼지를 먹어가며 뒹구는 그래플링 기술은 쓸 일이 없으니까 잊힌 것 같다고.
물론 기술을 잊어버린 것은 기사들뿐이다.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으로서 군인이 된 자들은 두 발로 버티고 서서 강력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싸우는 기사들을 동경하기에 이런 품위 없어 보이는 기술을 부끄러워하지만, 여전히 기본기로서 익힌다는 듯했다. 힌셔는 원치 않아도 지난 500여 년간 기사들이 잊어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어떠냐. 너도 해볼 테냐?”
“흠. 이건 보는 것만으론 안 되고 당해봐야 감이 오는 부류 같은데. 당신 스승이 가르쳐준 건가?”
“맞다.”
스승은 최초의 기사를 직접 본 적이 있고 그가 등장하기 전 옛 시대 무인들의 기술을 기본기로 익힌 기사로서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했다. 아마 닭이 이런 기술을 익히더라도 기사나 장군과의 싸움에서 사용하게 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힌셔는 가르쳐주고 싶었다.
“못 하겠으면 항복해도 된다.”
“아직 아무도 안 울었는데. 첫판이 안 끝났다고. 선배.”
500년의 세월을 넘어 벽공이라는 스승의 흔적을 공유하는 유이한 기사에게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뭐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다.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닭이 후 하고 긴 숨을 뱉더니 먼저 달려들었다.
“그거 한 번 더 해봐.”
힌셔는 기꺼이 자세를 낮추며 닭을 붙잡을 준비를 했다. 닭은 힌셔의 움직임을 매끄럽게 모방해 무게중심을 깊이 가라앉히면서 한쪽 팔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아직 서툰 감이 있었고, 힌셔는 간단하게 다시 한번 닭의 팔을 꺾으며 깔고 앉았다. 닭이 아까 했던 것처럼 몸을 뒤집으며 빠져나가려 하자 힌셔는 재빨리 팔을 놓으면서 몸에 익은 대로 팔다리를 바꿔 얽으며 닭의 다리를 잡고 무릎을 꺾었다. 닭이 짧게 신음을 뱉으며 다시 몸을 뒤집고, 다음 순간 힌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닭에게 걷어차여 비척이며 물러난 힌셔는 빠르게 눈을 깜빡여 눈에 들어간 흙먼지를 눈물로 씻어내려 애썼다.
“너 이..!”
“울었지?”
새까만 닭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기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치졸해질 수도 있는 저 밉살스러운 자는 투구 밑에서 거칠게 숨을 뱉으면서도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힌셔는 끝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그래. 그렇게 동의했지. 첫판은 양보해주마. 내가 선배니까.”
“여억시 영웅님. 이런 건 시원해서 좋다니까.”
“두 번은 못 쓸 잔재주인 것도 알 테지? 각오해라.”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한 건지. 땅을 박찬 힌셔는 닭에게 실례를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주먹은 약간의 악감정을 담아 내질렀다. 첫판에서는 선공을 가져가려 다투고 반대로 당할 것 같으면 정면으로 맞받아치자마자 바로 반격하면서 공격적으로 임했던 닭이 이번에는 힌셔의 공격을 흘리고 피하는 데 주력하며 거리를 두다가 틈을 보아 날카롭게 치고 빠지기 시작했다. 힌셔가 전술을 바꿨던 것처럼 닭도 전술을 바꾼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공방이 오가는 사이의 탐색전이 길어지면서 서로 틈을 노리며 뱅글뱅글 도는 형국이 되자, 힌셔는 슬슬 때가 되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애들 말이다만. 네 생각은 어떠냐?”
원래 하고 싶었던 대화는 이게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힌셔는 눈동자를 마주칠 일이 없는 투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닭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힌셔의 갑작스런 질문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방이 서너 번 더 오가고 맞붙었다가 다시 떨어진 후에야 닭이 입을 열었다.
“예전이었으면 말토가 마법에 엄청 재능 있는 고아의 소문을 듣고 귀신같이 찾아내서 먹이고 입히며 마법사로 훈련시켰을 텐데~ 지금은 뭐, 저런 애들은 방치될 뿐이지.”
힌셔는 닭이 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며 오해를 살 걸 알면서도 일부러 밉게 들리는 소리를 뱉곤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닭은 저 투구 속에 다 눌러 담지 못할 만큼 혼자 골몰하고 있는 어떤 생각들로 꽉 차 있는 자라는 것도 경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힌셔는 곧바로 의아함이나 황당함을 표하기보다는 닭의 영 뜬금없는 대답이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나온 말일지부터 생각했다.
마법의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부모를 만나는 운이 그러하듯이 전적으로 우연이다. 그 재능을 연마하고 개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법에 재능을 지닌 아이가 실제로 제도권에서 스승과 동료들을 만나 정식으로 공부하고 수련하게 될 기회는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신기하고 기괴한 현상이 마법이라는 걸 알아보고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취해주는 어른이 곁에 있어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생 마법사를 만날 일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단순히 기묘할 정도로 날씨를 잘 맞추거나 불을 다루다 화상을 입는 일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테면 마을에 큰 불을 지르는 수준의 사고를 친 고아를 봤을 때 기사를 부를 생각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물론 기사들은 마법사의 존재를 잘 알았고 아직 뭘 잘 모르는 아이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 아이가 하필이면 너무 큰 재능을 지니고 너무 큰 실수를 저지른 탓에 이미 가망 없는 범죄자로 낙인찍힌다면 어떨까.
시스템이 있어도 사각지대에 놓이는 약자는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 힌셔의 시대에도 아주 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는 소문이 들렸는데, 500년이 지났지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놈들이 존재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냥, 안타까워서 그렇지. 그런 썩은 동아줄조차도 쟤들한텐 사치라는 게.”
닭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힌셔가 달려들었다. 선수를 내준 닭은 방어적으로 대응하며 다시 흐름을 가져올 틈을 노렸다. 하지만 대련장 바깥에 있는 것들로 생각이 옮겨가면서 두 기사의 공방은 갈수록 좀 더 가볍고, 좀 더 완만해진다. 부딪치고 피하고 다시 내지르며 주고받는 팔다리의 움직임이 싸움보다는 미리 합을 맞춘 시연에 가까워진다.
“당신 생각은?”
“작은 아이는 마법사의 그릇. 게다가 아직 한참 어리니 과거에 저지른 실수도 어느 정도는 참작이 되겠지. 수도의 마법사들에게 맡기고 내가 후견을 선다면 어떻게든 될 게다. 걱정스러운 건 큰 아이 쪽이구나.”
“애기를 통찰했어? 쯧.”
“본의는 아니었다. 그간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거두어 같이 도망 다녔더군. 그런데 큰 아이는 나이를 먹은 만큼 좀 더 오랫동안 혼자 생존하며 여러 일을 겪었고, 여러 일도 저질렀던 모양이다.”
“그렇겠지. 저런 애들은 좀도둑질, 강도질 아니면 먹고 살 방법이 없어. 세상에 집 없는 고아는 흔하고 인심은 박하거든.”
“그럼 잘 알겠군. 그렇다고 사람을 상하게 해서 경비대의 수배가 걸린 도시도 있을 정도면 더는 어린아이의 실수가 아니라는 걸.”
말이 끝나자마자 힌셔는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부웅-! 힌셔의 머리카락을 벨 것처럼 차올리며 새까만 잔영이 흩어진다. 갑자기 싸움의 박자가 바뀌면서 쏟아붓는 공격에 선수를 빼앗긴 힌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수세를 취한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음에도 잡기 기술을 들어갈 틈이 없는 속도다. 자칫 살기가 실린 것으로 착각할 만큼 맹렬하게 집중된 공격들을 막고, 쳐내고, 또 막은 끝에 두 기사의 몸이 교차한다. 쾅! 팔뚝과 팔뚝이 공격이자 방어인 형태로 맞물린 채 두 기사는 서로를 노려보고, 입술과 투구 사이로 거친 입김이 새어 나와 한데 뒤섞인다.
“당신은 이미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 그럼 내 생각 같은 건 의미 없지 않나?”
“아니, 난 네 의견을 꼭 듣고 싶다. 너는 나와 다르게 보니까.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떻지? 새까만 닭.”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힌셔는 간절히 묻고 싶다. 스승이여. 저만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답을 구하는 기사가 저와 진정으로 대화를 하게 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스승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500년 전 힌셔의 손으로 목이 베이고 매장되었다. 힌셔는 다문 입 속에서 어금니를 앙다물며 닭이 대답하기를 기다린다.
그 순간 배에 툭 닿는 주먹이 느껴진다. 몸을 관통해 뒤편으로 빠져나가는 힘이 느껴진다. 여기서? 흠칫하며 등 뒤에서 닥쳐올 공격을 대비해 옆으로 빠진 힌셔는 아무런 충격도, 힘의 반동도 느끼지 못했다. 고개를 드니 닭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하늘을 올려다본 채 길게 허연 입김을 흘리고 있었다.
닭이 사용한 기술은 분명 벽공이었다. 다만 힘이 접촉한 상대를 관통하는 단계에서 그치고 뒤편의 어느 벽을 통해 반사시키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것이었다. 이자가 날 놀렸군. 잠깐이었지만 자신이 눈앞의 상대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던 걸 들킨 것은 아닐까? 머쓱하게 자연체로 서면서 힌셔는 자신의 꼴이 꽤나 우습게 보였겠다고 생각했다.
“왜, 사람들이 그렇잖아.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걸 보면 공격적으로 구는 거. 당신도 모르진 않을 것 같은데? 검붉은 하마.”
그리고 다시 닭이 움직였다.
도약 한 번으로 거리를 좁힌 닭이 오른주먹을 뒤로 당긴다. 그러면서 활짝 열린 닭의 오른쪽 옆구리를 힌셔가 노린다. 카운터가 들어가기 직전 난데없이 시력을 빼앗긴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진다. 힌셔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뻗는다. 주먹 끝이 노린 대로 닭의 옆구리에 꽂혔지만 다소 빗나가고 만다. 닭은 힌셔의 머리 위로 오른손에 잡은 새까만 망토자락을 뒤집어씌우면서 그대로 태클해 쓰러뜨리고 있었다.
힌셔의 상체를 깔고 앉은 닭은 익숙하지 않은 그래플링 기술을 흉내 내는 대신 힌셔의 목에 걸린 붉은 반망토자락을 써서 목을 졸랐다. 그리고 속삭였다.
“너희 기사들이 떠들어대는 악이라는 거, 사실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잖아.”
깰 수 없는 맹세를 한 연인의 선물이며 약자를 수호하겠다는 기사로서의 다짐이 새겨진 붉은 망토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숨통을 조여드는 가운데 힌셔는 내심 쓰게 웃었다.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은 특수임무에 자원한 젊은 기사들의 등 뒤에는 우왕좌왕하며 여러 번 시험 임무에 실패한 그들을 비웃기나 하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사들이 있었다. 백발의 아이가 도저히 잊지 못하고 있는 기억 중에는 악마라고 소리치며 두 아이에게 삽과 쇠스랑을 휘두르는 가난한 농부들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에게만 들리고 보이는 것들이란 걸 몰랐기에 남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걸 사정없이 들춰내버리는 데다 한술 더 떠 여자애 주제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조그만 아이를 따돌리면서 가시 돋친 말과 생각으로 무수히도 상처를 준 보통의 사람들이 있었다.
기사는 명예롭고 정의로우며 악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을 대하는 평범한 행동에도 악이 있으며, 그것은 기사의 저 강대한 힘으로도 일일이 맞설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기사들은 자기 자신이 바로 그런 평범한 악을 행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지금의 기사들은 자신이 기사이므로 악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명예로운 존재인 거라고, 그저 순진하리만치 믿고 있었다.
완력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는 자가 그러는 대신 숨통을 압박하는 의도는 자명했다. 호흡이 달려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의지와 관계없이 생리적으로 눈물샘이 자극되는 가운데 힌셔는 코끝에 닿을 지경으로 늘어뜨려진 녹색의 광택 없는 목걸이를 본다. 그리고는 목걸이가 매달린 투구 밑, 쇠로 보호되지 않는 창백한 목이 보이는 틈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집어넣을 것처럼 뻗는다. 닭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후려치고, 목을 조르던 망토자락이 느슨해진 틈에 힌셔는 닭을 붙잡고 뒤집어 옆으로 구른다. 순식간에 위아래가 바뀐다. 닭의 등이 바닥에 닿기 직전 힌셔는 닭의 복부를 주먹으로 툭 친다. 닭의 등 뒤로 지표에서 투웅 하고 힘이 반사되고, 떠오를 듯 크게 들썩인 닭의 몸은 체중을 실어 온몸으로 내리누르는 힌셔 때문에 도로 바닥에 깔리고 만다. 힘이 벽에 반사된 거리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던 탓에 위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닭은 잠깐이나마 앞뒤로 두 개의 벽 사이에 낀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닭을 깔고 엎드리다시피 짓누르면서 힌셔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후, 악이 무서운 거다. 언제나 생각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누구나 쉽게 저지르고, 쉽게 정당화하니까.”
“헉, 허, 하.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서 그 애를 악으로 규정하고 어른의, 규칙으로 처벌하는 게, 헉, 타당한가는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저 아이들 때문에 집이 불탄 자들과 칼에 찔린 자들은? 피해를 입은 그 사람들을 위한 정의도 있어야지. 너도 그건 부정하지 않을 것 아닌가.”
“내가 왜 말토 얘기를 한 것 같아? 빌어먹을 시스템은 결코 완벽하지 않아. 그게 죄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말토 같은 놈들이 번성하는 건 그런 틈으로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야. 장담하는데 저 애들은 공격당했기 때문에 공격하게 되었을 거다. 그걸 지워놓고 정의를 말하는 건 모순이다. 그런 게 당신이 생각하는 기사는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묻지 않나.”
“그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퍽! 의식이 깜빡 끊겼다가 돌아오고서야 힌셔는 턱이 돌아갈 정도로 세게 강타당한 것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힌셔의 두 팔은 뇌와 별개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주먹을 내지른 닭의 팔을 잡아 몸에 배어 익숙해진 기술로 꺾고 있었다. 한순간이나마 의식이 끊긴 탓에 가감 없이 힘이 들어간 기술에 당하자 이번에는 닭의 입에서 끝내 고통에 찬 신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 항복. 망, 할.”
힌셔는 즉시 팔을 놓고 일어섰다. 가까스로 부러뜨리진 않았지만 한동안 닭은 오른팔을 움직일 때마다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축축한 돌바닥에 축 늘어진 닭은 움직일 수 없는 오른팔 대신 왼손 손등으로 눈을 가리는 것처럼 투구의 면갑을 덮은 채 가슴을 들썩이며 불규칙해진 호흡을 고르려 애썼다.
“결국에는 둘 다 수도에 데려가고 싶겠지.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건데? 뭐가 저 애들한테 최선이냐고. 우리가 멋대로 쟤들 미래를 결정해도 돼? 큰애는 마법사가 아냐. 잘못한 것도 있어. 작은애를 마법사들이 데려가면 둘은 반드시 갈라진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난... 아직은... 생각 중이야.”
아직 움직일 수 없어야 하는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면서 움직이더니 광택 없는 돌조각 같은 녹색의 목걸이를 쥔다. 마치 주먹 속에 감싸 숨기려 하는 것 같다.
그 단호하고, 분노로 가득하고,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한 동작을 보면서 힌셔는 비로소 닭이 완강하게 대답을 거부한 이유를 이해했다. 당초 힌셔가 닭에게 이 대화를 청한 이유는 아이들을 설득해 수도로 데려갈 방법과 아이들의 앞날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닭은 그것을 논하기 전에 두 기사 사이에서 대화의 전제가 먼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언제나 적대적인 어른들로부터 기사를 부르겠다는 협박을 들으며 살아온 저 아이들이 과연 기사를 따라 순순히 기사들로 가득한 수도에 가고 싶어 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 두 기사 중 누구도 아이들에게 묻지 않았고, 누구도 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겼지만, 힌셔는 이겼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네 말도 일리는 있군. 먼저 아이들이 뭘 바라는지부터 들어봐야 했다.”
닭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도 섞기 싫은가보다고 생각하면서 힌셔는 괜시리 진흙투성이가 된 머리칼과 붉은 반망토를 탁탁 털었다. 어릴 적의 힌셔는 타인의 의지를 쉽사리 읽어버린 탓에 묻지도 않고 타인이 생각만 한 것에 맞춰 먼저 행동했다가 곤혹스러운 일을 겪곤 했다. ‘통찰의 눈’이라는 이능 때문에 종종 저질렀던 그 실수는 스승의 지도와 말을 섞지 않으면 싸울 수 없다는 기어스를 받으면서 확연히 줄어들었다. 힌셔는 자신이 받은 기어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세 번째 판은 굳이 지금 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여기까지 할까.”
“그럼 무승부인데.”
“그런 걸로 하지. 언제든 이길 수 있는 자를 상대로 승패에 연연할 이유도 없고.”
“글쎄? 조만간 승패에 연연하게 될걸.”
“오냐, 언제든 덤벼보거라.”
힌셔가 당연히 거절당하리라 생각하며 내민 손을 잡고 닭이 일어섰다. 힌셔는 멈칫했지만, 곧 오른팔을 부여잡은 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의 무기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힌셔가 ‘악마기사’의 목을 쳐서 명예로운 기사의 시대를 열었다면, 그노제스가 힌셔에게 선물한 최초의 마스터피스 하마턱은 기사들이 무기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시대를 열었다. 기사는 그 자신이 흉폭한 무기이긴 하나 기사 대 기사의 싸움에서는 추가로 무기 하나를 더 지니지 못한 쪽이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대세가 되고 500년이 흐른 후의 기사인 닭은 기발하리만치 창의적으로 자신의 나린기가 지닌 기능을 활용해 싸우는 자였다. 물론 무기 없이도 어지간한 기사를 제압할 수 있는 경지의 강자였지만, 언젠가 본인의 입으로 인정했듯이 강한 적 앞에서는 무기 없이 할 수 있는 게 무척이나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두 기사가 치른 맨손대련은 현재보다는 500년 전 기사들의 것에 가까웠다.
하마턱을 집어들면서 힌셔는 문득, 스승의 숲으로 온 이 짧은 여행 내내 닭이 자신에게 맞춰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설마. 그리고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흩어버린다.
올 때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탈길에 다다랐을 때 닭이 멈칫했다.
“왜 그러느냐?”
“입구가 너무 깨끗한데.”
그 말에 고개를 든 힌셔는 바위에 매달린 고드름 부근에서 아지랑이도, 수증기 같은 연기도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의 짧은 해는 이미 능선에 걸려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눈구름은 곧 올 밤을 재촉하듯 얼마 안 되는 빛을 삼키며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오고 있었다. 하마턱을 사용한 도약으로 단번에 바위 앞까지 뛰어오른 힌셔는 모닥불이 꺼진 것을 발견했다. 공기는 벌써 휑했지만 사드라든지 얼마 안 된 재는 아직 따스했다.
그곳에 아이들이 없었다.
“이거, 애기가 따라와서 우리 얘기를 엿들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끝까지 듣진 않았어.”
밖으로 뛰쳐나간 힌셔는 닭이 론누를 들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한 쌍의 조그만 발자국이 잘 걷지 못해 끄는 것에 가까운 조금 더 큰 발자국에 꼭 붙어 비탈 위쪽으로 향하고, 곧 모조리 눈이 녹아 흔적이 남지 않은 거뭇한 바위만이 올려다보였다. 잠시 후 먹구름 속에 묻힌 점으로 보일 높이까지 솟아오른 론누가 산과 숲을 모두 내려다보는 공중에서 창날을 아래쪽으로 향하고 꼿꼿이 섰다.
“역시. 저건 속임수다. 보통내기가 아닌걸.”
“그렇다면?”
“산을 오르는 척하다 숲으로 내려갔다. 시야를 가리는 게 많고 곧 눈도 퍼부을 테니 론누로 찾는 건 한계가 있지. 긴 밤이 되겠어.”
힌셔를 향해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이면서 닭은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눈을 마주칠 필요도 없었다. 힌셔가 지독한 길치이며 수색에 능숙하지 않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든 아이들의 처우와 관련하여 기사로서 지닌 철학 간의 충돌 때문이든, 힌셔는 닭이 곧 시작될 추적행에서 자신을 장애물로 여기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힌셔는 말없이 혼자 결정을 내리고 떠난 닭이 -스승이여, 당신께서 그때 그러셨던 것처럼- 언제 돌아올지, 돌아오기는 할지 알지 못한 채 지새운 긴 밤을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만. 나도 간다.”
힌셔는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했다. 숲을 향해 날듯이 달리는 힌셔의 뒤로 쯧 혀 차는 소리가 나더니 곧 크게 망토가 펄럭이고, 닭이 길을 선도하듯 몇 걸음 앞질러 나아간다. 떨어지기 시작한 눈송이 몇 개가 기사들이 달리면서 일으킨 바람에 휘말려 어지러이 나풀거리며 떠오른다.
두 기사는 안개와 밤에 잠겨 드는 헐벗은 숲으로 뛰어들었다.
6.
얼굴을 때리는 눈이 갈수록 굵고 빨라지면서 그렇잖아도 갑갑한 호흡을 어지럽혔다. 이따금 바람이 마른 가지 사이로 웅웅거리면 가지마다 축 늘어지도록 쌓인 눈이 머리 위로 쏟아졌고, 어딘가에서는 눈의 무게를 못 이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힌셔는 만일을 위해 하마턱을 사용하는 마법의 횃불도 켜지 않고 오로지 기사 특유의 예민한 기감으로 앞서가는 이의 기척을 따라 걷고 있었다. 폭설이 쏟아지는 밤의 숲은 시각과 청각을 빼앗다시피 했고,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살을 에며 달라붙는 눈과 얼음에 피부와 몸의 말단이 얼어붙어 촉각도 잃을 판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 닭이 도대체 어떻게 아이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인지 힌셔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닭. 뭐가 좀 보이나?”
“아무래도 숲 중심부로 향하는 것 같군. 숨을 데가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흠.”
힌셔는 품에 버섯을 한가득 안은 백발의 아이와 바위틈으로 돌아가던 때에 닭이 론누로 어딘가를 보고 있던 광경을 떠올렸다. 닭은 눈이 그치고 어스름하나마 빛이 있는 낮 동안 숲 전체의 지형을 대강 살펴보면서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 넣은 모양이었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마치 이 어둠 속에서 훤히 보이는 것처럼 자신 있게 앞서가는 닭의 능력은 시력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이능이라도 있는 것일까 싶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대체 어떻게 찾는 게냐?”
“사람이 둘이잖아. 하나는 아픈 애고, 눈도 많이 쌓였고. 흔적이 안 남는 게 이상하지.”
“신통방통한 녀석.”
“어휴, 눈으로만 보려 하지 말고 발밑을 좀 느껴봐.”
어리둥절해 하던 힌셔는 잠시 후 닭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닭은 허벅지 높이로 쌓인 두터운 눈 속에서 허우적대며 새로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가 뚫고 가 눈이 파헤쳐진 대로 사뿐히 따라가고 있었다. 백발의 아이가 마법으로 일으킨 거대한 눈사람을 떠올린 힌셔는 왜 그때처럼 마법을 써서 흔적을 지우지 않은 것인지 의아해졌다. 어쩌면, 겨우 예닐곱살인 아이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아픈 아이를 돌보며 도망치는 데 모든 힘을 쏟느라 눈에 흔적이 남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이 저 춥고 어두운 숲 어딘가에 있다. 한 아이는 너무 어리고, 한 아이는 크게 다쳤다.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생각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서두르다가 닭과 두어 번 부딪치고서야 힌셔는 다시 닭의 걸음에 자신의 속도를 맞췄다.
“아이들을 찾아도 문제다. 어떻게든 수도에 같이 가자고 설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이 상황이 수도에 가고 싶은 애들 태도 같아? 해석 재밌네.”
걱정과 조바심은 쉽사리 짜증으로 전이되고 짜증은 뾰족한 말이 되어 지금 옆에 있는 이를 겨눈다.
“작은 아이는 마법사의 지도가 필요하고 큰 아이도.. 나름의 지도가 필요하다. 돌팔이가 아닌 제대로 된 의사의 치료도. 수도가 아니면 어디서 그 일들을 모두 할 수 있나?”
“그니까 왜 꼭 수도여야 하냐고. 의사든 마법사든 보호자 노릇 해줄 사람이든 딴 데서도 구할 수 있잖아? 애들이 떨어지지 않게 해줄 방법은 생각할 수 없어?”
“그노제스에 맡기면-”
“이보세요. 무책임한 짓이야. 아무리 당신 부탁이라도 수배 걸린 애 숨겨주는 건 부담된다고.”
대장간 그노제스에서는 초대 그노제스 이래로 중앙대륙 어딘가에서 전쟁이 터질 때마다 소속 대장장이들이 달려가 전쟁고아들을 데려오고 이들을 키우며 기술을 가르쳐 대를 잇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지만 대장간 그노제스는 어디까지나 민간의 사업체이지 자선단체나 교화를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 권위 있는 자의 법과 명령이 통하지 않는 치외법권은 더더욱 아니었다. 힌셔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시대에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어디서 맡아주는지 잘 모른다. 그건 네가 나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 모르겠는데? 그딴 게 세상에 있었던 적이나 있어야지?”
“그래? 대안이 있으니까 계속 딴지를 거는 줄 알았는데. 뭐든 말해봐라. 난 열려있으니까.”
“생각 중이라고 했잖아. 차악 하나 내놓고 그걸로 자긴 최선을 다했다고 할 거야? 그렇게 해서 그 결과를 겪는 건 애들이다. 나나 당신이 아니라.”
“차악이 아니라 차선이다. 그만. 이 이상 방해하면 참지 않겠다.”
“뭐야. 말이 되는 방법 좀 찾아보자 했더니. 이제는 내가 악이다. 뭐 그런 거?”
언젠가부터 두 기사는 걸음을 멈추고 마주 선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빛 한 톨 없는 어둠 속이라도 서로를 지그시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온몸에서 흘리기 시작한 은은한 살기는 모를 수가 없었다.
악은 명예롭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것이다. 힌셔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그 말을 부정까진 하지 않겠지만, 한편으로는 뭔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으로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지 않냐며 석연찮아 하는 질문을 들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닭은 이미 힌셔에게 빈정거리는 것처럼 그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엉뚱한 도발이 걸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됐지만, 지금이라도 대답해야 한다면 힌셔는 각각의 상황에서 무엇이 명예롭고 무엇이 정의로운 행동인지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노제스, 생각이 많은 나를 긍정해준 그대. 나는 네가 있기에 기사가 될 수 있었어. 지금 힌셔는 견디는 게 고작일 만큼 분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도 닭의 행동이 명예롭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힌셔는 하마턱을 휘두르는 대신 닭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정녕 모르겠나? 내가 새까만 닭이라는 기사를 잘못 본 것이냐? 지금 저 숲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위험에 처해있는데 너는 고작 말다툼이나 하겠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알면 이걸 멈추지 마.”
이마와 이마가 맞닿은 거리에서, 닭은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동작으로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투구-를 툭툭 두드렸다.
“당신이 환멸감 느끼는 저 미숙한 기사들처럼 굴지 말라고.”
악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무엇을 초래하게 될지,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새까만 닭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힌셔가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그것은 세간에서 의심 없이 영웅으로 여겨지는 존재인 기사보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에 가까웠다. 물론 기사의 명예와 정의는 각자 삶의 경험과 고찰을 통해 주관적으로 세우는 것이니 그런 생각을 자신의 정의로 삼은 기사가 있다면 그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게 힌셔의 생각이었다. 비록 힌셔가 스승의 목숨과 맞바꿔 기사의 정체성으로 정의한 명예에 지극히 회의적인 자라 해도, 서로가 서로를 거의 죽일 뻔했던 마지막 결투에서 힌셔는 닭의 기사됨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사로서의 닭은 부서질 지언정 물러서지 않을 자신만의 정의를 완성한 자였으며 기사들에게 격기사의 자격을 얻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될 것을 요구하는 자였다. 새까만 닭은 그것을 500년 전 모두가 영웅으로 인정한 힌셔에게조차도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는 매 순간마다 치열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힌셔가 500년 전의 영웅을 추앙할 뿐 스스로 완전한 영웅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기사들에게 실망한 것처럼, 새까만 닭이 현재의 기사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스승이여, 그대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완성을 추구하는 기사를 단 한 명 보았으나 하필이면 저놈이랍니다. 자신과 가장 다른 자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기사라는 것을 힌셔는 지금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질 때가 있었다.
다른 기사들이 싫어하고 피하는 닭을 자신은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찾게 되는 걸 보면, 아마도 싫어하진 않는 것 같긴 했다. 힌셔는 움켜쥔 닭의 앞섶을 놓아준다.
“그 생각이란 거, 아무리 늦어도 아이들을 찾기 전에는 내놓아야 할 거다. 너에게 대안이 없다면 나는 내 생각대로 하겠다.”
“그럼 그때가 세 번째 판이 되겠군.”
그리고 오늘 안에 세 번째 판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대화의 양념 삼아 맨손으로 붙은 앞서의 대련과 달리 철을 쥐고 한쪽이 완전히 패배할 때까지 치르는 결투가 될 것이다. 그 결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든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죽을지언정 항복은 선언하지 않을 것이다. 기사가 지닌 명예와 정의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자리라면, 다가올 대륙 간의 전쟁이나 두 기사가 그때 수행해야 할 역할 같은 것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문제가 된다.
기사는, 우리는 본래 그런 자들이지.
눈 내리는 수도에서 답이 없는 분노와 질문을 안고 그 격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상대를 찾아 몇 시간이고 헤매던 때의 기분이 되살아난다. 힌셔는 그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사실이 이상스럽게 마음 한구석을 갉는 것을 느낀다.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다툼을 끝으로 한동안 두 기사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새 또 한 겹 쌓인 눈이 발밑에서 뽀득이며 부서지는 단조로운 소리는 다시금 힌셔의 가슴 속에서 조바심을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고개를 든 힌셔는 몇 미터 앞에서 닭이 눈 때문에 폭 젖은 망토가 다리에 달라붙는 걸 성가셔하며 떨쳐내는 기척을 느꼈다.
“갈수록 지형이 더러워질 거야. 애들 가까우니까 큰소리 내지 않게 조심하고.”
닭이 사무적인 어조로 전달하는 말을 들으면서 느낀 게 무엇이든, 그중에서 가장 짙은 감정은 안도감과 자조였다. 힌셔는 자신이 심각한 길치이거나 야생보다는 도시의 삶에 더 익숙한 것에 딱히 열등감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닭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피부에 무수히 박히고 있는 조그만 얼음결정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힌셔는 닭이 등 뒤에 있는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걸 한 박자 늦게 떠올리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눈안개가 서린 짙은 어둠 속에서 언뜻 느껴지던 풍광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귀였다. 공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은 눈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떨거나 부딪치거나 부러지며 제각각 소리를 질러댔다. 그 살아있는 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그보다는 메마른 바위 사이를 빠져나가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암괴석이 흩어진 협곡을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다음으로 깨달은 것은 눈이었다. 하늘을 가리던 나무들이 뜸해지면서 어딘가 먼 곳에 있는 지상의 불빛을 머금어 조금은 뿌옇게 보이는 눈구름이 주위의 윤곽을 슬그머니 드러냈다. 과연 주위에는 끝이 뾰족하거나 뭉툭한 기둥 같은 것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거나 땅에 누운 채 흩어져있었다. 이 숲의 모든 곳을 가본 건 아니지만, 힌셔는 이런 곳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닭이 움찔하며 잠시 멈추는 기색을 느낀 힌셔는 서둘러 닭에게 다가가 어깨가 있음직한 높이에 손을 슬쩍 뻗었다. 닭이 돌아보는 것 같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힌셔는 닭의 망토자락이 뭔가에 걸려 부욱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방향으로 천천히 하마턱의 자루 끝을 내밀어본 힌셔는 곧 팅 하고 묘하게 경쾌한 소리를 내는 돌에 닿았다. 정말 묘하게도 꼭 가지 위쪽이 뚝 부러져 줄기만 남은 나무 같은 모양의 돌이었다.
이제 허리 높이까지 다다른 눈밭에서 저런 나무를 닮은 바위 부근에 잠깐씩 쉬어갔던 흔적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지치고 힘겨워 보이는 흔적을 따라가면서 두 기사 사이의 공기가 삽시간에 긴장되었다.
그 끝에서 눈구름 아래에 작은 폐가처럼 불쑥 솟은 형체가 나타났을 때 닭이 걸음을 멈췄다.
“하마. 불. 이번엔 제발 살살.”
“고약한 놈.”
힌셔는 투덜거리면서도 하마턱을 신중하게 작동시켰다. 그노제스는 하마턱이라고 이름 붙이게 될 기계장치를 섬세하게 설계했지만 사용자가 0.01초 미만 단위에서 생사가 가름되는 전장에 서는 것을 고려해 작동법은 최대한 단순화시켰더랬다. 그리운 연인의 사려 깊고 세심하던 성격을 떠올린 힌셔는 닭이 주문한 걸 자신도 반드시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힌셔를 위해 하마턱을 만든 그노제스를 믿었다.
그리고 하마턱의 꼭지에 촛불 크기의 조그만 마법의 불빛이 떠올랐다.
“닭! 이거 봐라!”
닭은 어쩌라고 라고 써놓은 것 같은 투구로 활짝 웃는 힌셔를 한번 쳐다보고는 폐가 같은 암괴를 향해 걸어갔다. 힌셔는 의식적으로 낯에서 웃음을 지웠지만 여전히 조금은 상기된 채 닭을 쫓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약하나마 광원을 지니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확실해졌다. 이 숲속에 난데없이 등장한 폐가처럼 보이던 바윗덩어리는 타고 남은 거대한 그루터기였다. 지금 남아있는 밑둥의 흔적만도 집채만 한 걸 보면 생전의 나무가 얼마나 거대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힌셔는 이 죽은 나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불에 타고 나서 석화된 거였군. 이 주변은 그런 거였어.”
그루터기의 표면을 만져본 닭이 중얼거렸다. 뱃속이 뒤틀리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힌셔는 그루터기만 남은 스승의 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스승의 나무는 산처럼 거대한 만큼 가을마다 엄청난 낙엽을 떨궜는데,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나 제일 위쪽의 낙엽만 태우고 사그라드는 작은 산불이 없는 채로 몇 년을 쌓이다가 어느 날 아주 작은 불씨에 뿌리까지 타버릴 정도로 겉잡을 수 없이 큰 불이 난 모양이었다. 그런 재앙적인 화재가 한두 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번져간 불로 숲이 완전히 황폐해진 후, 불이 땅속까지 닿지 않은 곳에서부터 재를 양분 삼아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나며 그렇게 숲에 세대교체가 일어났을 것이다.
아이들의 흔적은 그루터기의 세로로 쪼개지고 갈라진 틈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무 밑둥에 있었던 구멍이 사람 두 명쯤은 충분히 숙식을 할 수 있는 크기였던 걸 떠올리면서 힌셔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을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뿌리의 흔적인 경사지고 갈라진 바닥을 밟고 올라가 나무구멍의 입구였던 곳에 다다른 힌셔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조그만 마법의 불빛이 일렁이는 하마턱을 치켜들었다.
스승의 나무는 화재를 겪고 세월의 풍상을 맞으면서 나무구멍의 천장을 이루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부러지고 무너져내렸던 것 같았다. 그루터기 안쪽의 공간은 벽만 남은 채 하늘이 열려있어 마치 지붕이 날아간 폐가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힌셔의 기억 속에서 사람이 없을 때면 텅 비어 있었던 공간 한복판에는 헐벗은 가지마다 무겁게 눈을 얹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 보통의 나무들은 가지를 뻗을 때 수종을 불문하고 서로 불가침조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경계를 사이에 둔 채 서로 얽히지 않도록 피해가며 자라난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떨어진 곳에 서 있으면서도 마치 처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때부터 치대고 싸워댄 것처럼 가지 일부가 얽혀있었다. 여름에 봤다면 나무 두 그루가 자연적으로 이룬 시원한 그늘막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름의 폭염 대신 겨울의 눈발을 막아 떠받치고 있는 두 나목 사이에는 그루터기 안의 다른 바닥과 달리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그곳에 아이들이 있었다.
푹 젖은 눈투성이의 모포를 같이 두르고 벌벌 떨면서 웅크려 앉아있던 아이들은 가지 위쪽을 비추던 하마턱의 불빛이 내려와 자신들을 향하자 젖은 눈으로 두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갈발의 아이가 모포를 떨어뜨리며 일어섰다. 아이의 손에는 날이 빠진 단검이 쥐여 있었다.
“결국... 기사님들이, 오셨네요.”
“언니야 하지 마! 그러지 마!”
덩달아 모포를 벗어버리고 일어선 백발의 아이가 애원하며 큰 아이의 옷자락을 연신 잡아당겼다. 퀭한 눈에 어두운 빛을 띤 갈발의 아이는 깨끗한 붕대가 감긴 팔로 작은 아이를 등 뒤에 숨기듯이 떠밀었다.
“얜 제가, 시킨, 대로만 했어요. 저만 잡아, 가고, 헉, 얘는, 좋은, 사람들한테, 헉.”
“무슨 소리야? 언니야가 왜 잡혀가? 내가 했어! 내, 내가 때리고 불 냈어! 다 내가 잘못한 거야!”
한순간 갈발의 아이의 낯에 그 나이대의 아이가 지녀선 안 될 지친 표정이 스쳤다. 동생 같은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갈발의 아이는 뭐라 입을 열려다, 그대로 힘이 다했는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백발의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조그만 몸으로 갈발의 아이를 감쌌다.
“데려가지 마! 도와준다고 했잖아. 제발 데려가지 마요.”
백발의 아이가 소리 내어 오열하는 가운데 갈발의 아이도 내리깐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던 힌셔는 하마턱을 짚고 미동도 없는 동상처럼 망연히 서 있었다.
닭이 옳았다. 아이들은 결코 수도에 갈 생각이 없었고, 서로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힌셔는 닭을 힐끔 곁눈질했다. 닭은 자신의 생각이 옳은 걸 확인했다 해서 기고만장해지는 자는 아니었다. 우두커니 서서 자기만의 상념에 잠긴 채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녹색의 돌조각 같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자신이 옳았다는 것에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힌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툭 나왔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밤을 나도록 하지.”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자. 날이 밝을 때까지만이라도. 힌셔는 닭을 향해 서툴게 화해를 청했다. 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닭은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며 바닥에 떨어진 잔가지를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곧 탁탁 소리를 내며 조그만 불이 지펴졌다. 벽처럼 둘러선 그루터기의 잔해 덕에 눈바람이 직접 들이치지 않는 데다 가지를 얽은 두 그루의 나무가 지붕처럼 쏟아지는 눈을 받아내고 있는데 불기까지 생기니 제법 아늑해졌다. 두 기사는 우는 아이들을 달래 불 앞에 앉히고 모포를 둘러준 후 바람막이처럼 양쪽 끝, 두 나무의 뿌리 위에 앉았다. 기사들이 당장은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을 것 같아도 내일이 되면 알 수 없기에 아이들은 끊임없이 불안해했지만, 결국에는 눈 속에서 오랫동안 숲을 헤맨 피로에 잠겨들어 앉은 자리에서 서로 끌어안은 채 머리를 맞대고 잠들었다.
피로 이어진 동기지간은 아니라도 아이들에게는 기사조차 끊을 수 없는 결속이 있었다. 힌셔는 자신이 지독하게 그리워하는 그것이 500년 전에 완전히 끊어진 것을 알았다. 뿌리째 뽑혀 엉뚱한 곳에 심겨진 나무. 그렇지만 힌셔는 스승이 목숨을 바친 뜻을 받들어야 했다. 이 시대의 미숙한 기사들을 위해서라도 기사가, 완전한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삶에서 개인적인 연결과 정을 구하는 것은 사치일 터였다.
꺼져가는 불의 연기 같은 입김을 흘리면서 힌셔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데서 나무가 자라다니 기묘하군. 죽은 나무의 마지막 싹인가.”
“하나는 그럴 수도 있겠는데 다른 건 아닌 듯. 나무가 달라.”
닭의 말을 듣고서야 힌셔는 두 나무가 종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그만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비추며 자세히 살펴보니 둘은 껍질의 색깔과 질감은 물론 가지가 뻗어 나가는 형태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나무가 다 나무 같이 생겼지 뭐란 말인가?-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닭의 설명을 들으니 하나는 스승의 나무와 같은 종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숲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나무라는 듯했다. 불에 타고 돌로 변한 그루터기는 나무가 뿌리를 뻗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두 나무는 악착같이 바위가 된 갈라진 틈 사이로 뿌리를 내렸고, 끈질기게 열린 하늘을 향해 자라났다. 힌셔는 스승과 백발의 아이가 말했던 숲의 연결망을 떠올렸다. 버섯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나무는 그루터기 바깥의 숲으로부터 단절된 채 미워하는 서로에게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힌셔의 상념 속에서 연상에 연상을 거쳐 누군가의 얼굴로 이어졌다.
“방법이 떠올랐다.”
닭이 무시하는 것처럼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이려다 멈칫했다. 힌셔의 낯을 본 닭은, 뭐라 딱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어디 있는지는 알고?”
“다 방법이 있지.”
“그럼 뭘 기다려?”
힌셔는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참지 않으며 한참을 뒤진 끝에 품에서 잔뜩 구겨진 조그만 종잇장을 찾아냈다. 힌셔가 일부러 험하게 다룬 것이 아니라 쓸 일이 자주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방치한 탓에 허름해진 것이었다. 종이의 주름이 최대한 반듯하게 펴지도록 살살 문지르면서 힌셔는 이 마법회로가 아직 작동하길 간절히 바랐다.
기사보급품이 아니라 알던 마법사가 개인적으로 만들어준 마법회로에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용건을 작성하고 전송시키기 전, 힌셔는 잠시 닭을 쳐다보았다. 투구의 옆면을 찌르는 끈질긴 시선을 느낀 닭이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돌아보았다.
“뭐? 왜? 또 뭐?”
“...아니, 아무것도.”
힌셔는 생각했다. 닭은 처음부터 힌셔가 이제야 떠올린 그 인물을 생각한 것은 아닌지. 다만 과거의 악연 탓에 자신이 그 인물과 당장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힌셔가 과연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 고심하느라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대안을 무작정 주장한 게 아니라 힌셔가 떠올릴 때까지 기다린 거라면, 사실은 닭도 기사로서 지닌 자신의 정의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기사가 단 한 명이라도 있기를 아주 조금은 소망하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닭은 힌셔가 이 시대에서 만나 이미 연결된 나무인 것은 아닌지.
하지만 닭이 말하지 않는다면 힌셔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늘 그랬듯, 힌셔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기로 한다.
그로부터 하루 후, 스승의 숲으로 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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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버섯과 곰팡이의 균근망이 숲의 나무와 어떻게 공존하는지, 더 나아가 서로 종이 다른 나무끼리도 우드와이드웹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좀 더 알고 싶으신 분들께는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라는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버섯과 곰팡이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게 하며, 무엇보다도 무지 쉽고 재밌게 쓰인 과학교양서입니다. 나무들 사이의 균사체 네트워크를 처음으로 연구한 수잔 시마드라는 과학자의 테드 강연도 추천합니다.
겨울철의 버섯 채집은 <야생의 식탁>이라는 책을 참고했습니다. 일전에 제가 도서관마다 300번대인지 800번대인지 의견이 분분하더라고 트윗했던 그 책입니다. 다 읽고 보니 800번대가 조금 더 적절한 것 같긴 합니다.
와론의 정의와 관련된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참고했습니다. (완전히 같진 않음) 있는 개념을 가져다 와론한테 붙인 건 아니고요, 반대로 애늙과 외전과 잔불의 현재까지 연재분을 통틀어 와론의 언행을 보고 얘의 정의는 뭘까 생각한 끝에 떠오른 게 이거였습니다. 와론이라면 악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겠구나 하고요.
다음 편은 별 일 없으면 목요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