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류지전과 오죠전 사이가 시점입니다. 고로 살짝 미리니름 있겠습니다.
히루마모 계의 영원한 빛 향이님께 바칩니다. 미력한 재주를 내치지 말아주사이다. OTL
"차-앗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오오!”
1학년들은 언제나 큰소리로 인사했다. 딱히 누군가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행동했다. 한 번의 승리는 다음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하지만 한 번의 패배는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남을 의미하는 세계, 그들은 가을대회 토너먼트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거나 늘어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당장 졸도해버리고 싶을 만큼 피곤해도 힘을 짜내 소리를 지름으로써 기합을 넣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그들은 자연스레 그런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축축하고 답답한 것이 코와 입을 틀어막은 기분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던 쥬몬지는 젖은 마스크가 잡히자마자 얼른 손을 놓았다. 이기기 위한 특훈이다. 히루마조차 효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긴 했지만 주정뱅이 주제 미식축구 지식은 신묘하게도 빠삭한 그 도부로쿠가 자신 있게 내놓은 방법이다. 마스크 위치를 제대로 잡은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운동장 한쪽을 바라보았다. 태클머신을 들어 올리는 쿠리타와 그 너머에서 공을 줍는 히루마, 킥 연습에 쓰던 그물망을 치우는 무사시가 차례차례 시야에 들어왔다. 쥬몬지는 신류지전의 마지막 플레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로 굴복하기 싫은 녀석이 끼어있어서 말로 드러낸 적이 없으며 그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그들을 존경했다. 신류지전은 그 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마지막 TFP 때의 그 순간 팀의 에이스이자 1학년인 세나가 히루마로부터 공을 건네받은 것은, 어쩌면 그 시합에서 과거를 정리한 마오 데빌배츠 삼인조로부터 지금의 1학년 데이몬 데빌배츠에게 무언가가 전달되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1학년들이 모두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괜시리 뜨거운 것이 울컥하는 기분에 쥬몬지는 호기롭게 큰소리로 말했다.
“좋았어, 구호나 한 번 외치고 정리하자. 모여 봐.”
1학년들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장난스럽게 웃는 낯으로 몰려들었다. 2학년들이 무슨 일인가 쳐다보는 가운데 1학년들은 자기들끼리 뭔가를 속닥였다. 잠시 후 세나가 어색해하면서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를 따라서 1학년들은 다시 한 번, 온몸의 힘을 쥐어짜내 외쳤다.
“GO! CHRISTMAS BOWL!"
“오죠 따위가 대수냐! 죽여주마!”
격렬한 야유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2학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웃음을 지음으로써 화답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쿠로키가 갑자기 검은 표범처럼 몸을 날렸다. 그 앞에는 태클머신이 있었다. 훗날의 변명 같지 않은 변명에 따르면, 데이몬 선수는 아닌데 뭔가 덩치 큰 것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오죠 선수가 염탐하러 나타난 줄 알고 응징을 한 것이었다고 한다.
“받아랏! 필살얍삽스윗친뮤지이이익!”
본래대로라면 폼 나는 옆차기가 되었어야 할 킥은 시전자가 쿠로키 코지가 되자 혼신을 담은 날라차기로 변모되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누군가가 말릴 틈도 없었다. 제대로 직격당한 태클머신은 멋들어지게 붕 뜨더니 몇 미터 뒤의 운동장 한 가운데에 처박혔다. 콰아앙! 세나와 몬타와 쿠리타의 입이 경악으로 딱 벌어진 것은 마스크로도 가릴 수 없었다. 쿠로키의 머리에 약간 과하게 피가 쏠렸다고 판단한 쥬몬지가 얼른 달려가 쓰러진 태클머신을 두드려 패려 드는 친구를 뜯어말리는 동안 코무스비와 토가노가 기계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기계와 쿠션을 잇는 목 부분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와지끈, 쾅! 요란하게 쓰러지는 태클머신에 모두가 석화된 가운데 어떤 상황에서도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지고 마는 토가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허걱.”
팀원들의 머리에 쓸 수 있는 태클머신이 이제 네 개밖에 없으며 (몇 개 더 있긴 했지만 격한 연습이 계속되는 동안 부서졌고 아직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죠와의 시합이 바로 내일 모레라는 사실이 스쳐지나갔다. 모두의 눈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 현행범인 쿠로키를 포함한 불량삼돌이가 이미 엉덩이를 감싸 쥐고 도망칠 준비를 한 순간,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초 사이언 변신이라고 해도 믿을 빛이 번쩍였다.
“안 그래도 여유분이 없는데 이 빌어먹을 불량주둥이가!”
투투투투투! 눈먼 총이 분노의 불길을 뿜어댔다. 같이 공을 줍느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유키미츠는 들고 있던 공을 모조리 내던지고 달려와 어정쩡하게 두 손을 휘둘렀다.
“히루마, 잠깐만, 잠깐만! 아네자키가 금방 새 태클머신을 사올 거야, 그렇지?”
으득 이를 간 히루마는 유키미츠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쿠리타나 다른 1학년이었다면 즉시 총을 갈기고도 남았을 거라 외치는 음산한 기운이 뭉글뭉글 일어났다. 유키미츠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 깨달았다. 태클머신은 축구공처럼 아무 스포츠가게에 들어가도 진열되어있는 물건이 아니다. 따로 전문점에 연락해서 배달을 받아야 할 텐데, 밤 10시가 넘은 지금 이 시각에 영업 중인 전문점이 있을지도 의문일뿐더러 물건을 수배하고 배달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못해도 모레에나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레에는 오죠와의 추계관동대회준결승 시합이 있었다. 겨우 이성을 수습한 그가 가장 적당한 방법을 떠올린 순간 마모리가 그 생각을 입에 올렸다.
“다른 학교 미식축구부에 연락해서 빌려올게.”
“조쿠토가 좋겠다. 트럭 끌고 올 테니 잠깐 기다려. 히루마, 그쪽에 연락해줘.”
애써 웃는 낯으로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하는 마모리와 자연스럽게 그 제안을 기정사실화하는 무사시를 보면서 유키미츠는 속으로 감사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넓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 외에는 딱히 생각할 수 있는 방법도 없을뿐더러 연습으로 지친 상태에서 괜한 기운을 빼기 싫었던 히루마는 투덜거리면서도 휴대폰을 꺼냈다. 일단 악마가 잠잠해졌다고 판단한 불량삼돌이는 히루마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을 안전범위 밖으로 멀찍이 빙 돌아서 부실을 향해 줄달음질쳤다. 사태의 원인을 제공해놓고 넉살좋게 도망쳐버린 녀석들을 원망하면서도 남아있던 1학년들은 죽을힘을 다해 최고속도로 연습도구들을 정리했다. 혹시 후폭풍으로 터질지도 모를 악마의 화풀이는 피하고 볼 일이니까.
정리를 마친 후 데이몬고 미식축구부원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부실에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키가 스즈나에게 잡혀가듯이 일어섰다. 이어서 남아있던 부원들도 하나 둘 부실을 떠났다. 10시 30분이 되었을 무렵 부실에 남아있는 사람은 히루마 뿐이었다.
그의 지정석처럼 된 카지노 테이블의 정위치에 앉은 채 히루마는 잠시 텅 빈 부실을 둘러보았다. 잠깐의 침묵 후 그는 여상스레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팀원들은 체력단련과 자신의 포지션이 요구하는 기술을 연습하는 데서 대부분의 일과를 끝내지만 쿼터백인 그는 다르다. 필드의 사령탑으로서 적을 분석하고 대응할 전술을 구상하는 업무가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감독이나 코치가 있는 팀이라면 그 부분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줄겠지만 데이몬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히루마에게 있었다.
문득 피곤함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젖은 마스크 때문에 호흡이 힘들어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히루마는 시계를 본 후 약간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어섰다. 부실 한쪽에는 언제나 커피포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한 블랙커피를 타면서 히루마는 꽤 오랜만이라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자기 손으로 커피를 타지 않게 된 건 거의 8개월쯤 된 일이었다.
그래. 쿠리타와 단 둘이 있던 시절까지는 언제나 그가 직접 커피를 타서 마셨다. 성격상 남에게 대접을 하는 녀석이 아니니까 쿠리타와 무사시 밖에 모르는 거지만, 덕분에 히루마가 커피를 타는 솜씨는 제법 괜찮았다.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도 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맛있어질 수 있는 법. 마스크를 조금 걷고 자신 있게 자신이 만든 커피를 입에 댄 히루마는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익숙한 맛이 아니었다. 자신이 뭔가 실수한 건가 생각하던 그는 곧 실소를 흘렸다. 요 몇 달 동안 그는 남이 타주는 커피 맛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아네자키 마모리.
뭔가 떠오르려는 것을 고개를 저어 떨쳐낸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노트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전통적으로 철벽수비로 이름 높은 강호이다. 하지만 최근 - 바로 어제 -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번 가을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공격 면에서도 혁신이라 할 만한 변화를 일으켰다. 희대의 천재일 신 세이쥬로와 높이로는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을 사쿠라바 하루토, 그들의 매치 업은 힘으로는 결코 신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코바야카와 세나와 땅꼬마 라이몬 타로였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필사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히루마는 데이몬의 승산을 점치기 어려웠다. 봄대회 당시의 어설픈 사쿠라바를 아는 그로서는 가을대회 동안 그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물며 끝없이 노력하는 천재 신이라면야. 이쪽의 세나와 몬타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고교생은 시합 도중에도 성장해 버리기 때문에 어떤 변칙적인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게다가 대비해야 할 것은 그들 둘 만이 아니다. 히루마는 쓰디쓴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그 쓴 맛이 현실감각을 일깨우면서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 시합은 시작되지 않았다. 좀 더 궁리하고 좀 더 노력해서 아주 미미하게라도 승률을 높일 여지가 있다. 수백 번도 넘게 해봤을 오죠와의 시합흐름에 대한 예상을 되짚으면서 경우의 수에 따른 작전을 검토하던 그는 어느 한 군데에서 생각의 흐름을 멈췄다.
혹시라도, 사쿠라바가 몬타와 대등한 캐치력을 얻었다면? 신장차이는 엄청난 핸디캡이 될 것이다. 거기에 신이 사쿠라바의 리드블로커가 되는 식으로 콤비네이션을 짜서 숏패스로만 나온다면, 데이몬이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라인 쪽의 쥬몬지 등 다른 녀석들을 이쪽으로 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전통의 강호 오죠는 신의 원맨팀이 아니다. 특히 수비 부문에서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도쿄 베스트 일레븐에 선발될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오죠와 달리 공수교대를 할 수 없는 데이몬은 오죠의 철벽수비진을 상대하면서 평소 이상으로 체력손실을 강요당할 테고, 그 상태에서 여느 강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공격진과 마주쳤다간 여차하면 틈을 보일지도 모른다. 어중간하게 진형을 흩어 생각지도 못한 선수한테 뚫리느니, 적의 창끝이 한 점으로 집중되게 하는 편이 차라리 수비하기에는 좀 더 낫다. 신은 세나 혼자서 상대해야만 한다.
히루마는 몸을 젖히며 의자에 깊숙이 누웠다. 늦은 전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 고요해진 부실에선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렇게 너무 정직한 공격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네 녀석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냐.”
푸념처럼 흘러나온 혼잣말은 이 자리에는 없는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쿠리타라면 대책 없이 그가 내놓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준비만 할 것이다. 세나라면 정말 죽을 각오로 신에게 달려들면서 또 조금씩 진화해버릴 테지만, 어떻게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작전을 그려서 제시할 수 있는 녀석은 아니다. 몬타가 가진 원숭이의 지혜에 이르러서는 논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 나머지 녀석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쿠리타와 그다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전에 이의를 걸어가며 피드백을 할 수 있는 녀석은 마모리나 유키미츠 정도. 그렇지만 그 녀석들은 지금 아무도 여기에 없었다. 히루마는 일부러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조용하잖아.”
적적한 기분이 들었다. 올 초 까지는 쿠리타와 단 둘이서만 의지하며 지키던 공간이었는데, 이 부실을 드나들며 소란을 피우는 녀석들이 생기면서 익숙하던 적막이 깨져버렸다. 쿠리타마저 없을 땐 단 하나뿐인 친구가 되던 고요함은 이제 두려움 비슷한 감정조차 일으키고 있었다.
쿠로키가 제멋대로 날뛰다가 비품을 부쉈다 해서 정말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태클머신은 쿠리타 같은 거한이 그 엄청난 파워로 달려들어도 엔간해선 부서지지 않는 물건이다. 그런데도 정신없는 날라차기 한 방에 부서졌다면, 그 정도로 라인맨들이 연습을 거듭해 기계 자체가 약해진 상태였던 것일 뿐이다. 그 뿐일까. 신류지전 후반 데이몬의 킥오프 때 그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믿고, 서로를 믿고, 진짜 작전을 알아채준 그 녀석들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는 그들 앞에서는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얼핏 보기에는 허풍 한 마디 더 얹는다고 뭐가 닳는 것도 아니라는 그의 신조에 정반대되는 노릇이지만, 언어란 사실 값싼 공치사에 불과하다. 고맙고 고마운 그 녀석들한테 그가 갚아주는 방법은 단 하나, 이기는 것 뿐.
어떻게든 이기게 해주고 싶다. 그들이 그 손에 꿈을 움켜쥐게 해주고 싶다. 그 녀석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
커피를 다 마신 걸 깨달은 히루마는 다시 마스크를 내린 후 컵을 가볍게 물로 헹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매니저 녀석이 시끄럽게 잔소리할 것이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마모리가 이 자리에 있었다 해도 그녀 역시 뭔가 기발한 작전을 내놓을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어쨌든 그녀는 히루마 요이치가 아니니까. 그런데도 그녀가 생각난 건 어째서일까.
간단한 이유다. 자신이 만든 커피가 어색해진 것이 그 답이었다.
“언제 오는 거야.”
가볍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마자 마술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문이 열리더니 마모리와 무사시가 들어온 것이다. 무사시는 히루마가 한순간이나마 놀란 표정을 지은 걸 놓치지 않았다.
“히루마 군, 태클 머신 빌려왔어. 방금 체육관에 넣어뒀어.”
“...아.”
“히루마, 나는 먼저 간다.”
무사시는 어째선지 서두르는 걸음으로 부실을 나섰다. 놀란 것과는 별개로 명석한 두뇌는 무사시의 생각을 정확하게 눈치 채고 있었다. 히루마는 뭔가 발끈하려는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마모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들고 그녀의 지정석처럼 된 카지노 테이블 왼편에 앉았다.
“작전 짜고 있었어?”
“아아. 일단 읽어둬.”
마스크로 표정이 가려진 상태였다지만 놀라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가 곤란한 일이었다. 히루마는 머쓱함을 감추기 위해 마모리 쪽으로 노트북을 밀고 일어섰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마모리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가 커피포트가 놓인 개수대 쪽으로 가서 슬쩍 불을 올리고 손을 씻는 동안 마모리는 노트북을 조심스레 만졌다.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한 그녀는 히루마가 마우스의 휠 역할을 하는 터치패드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방향키만으로 백 페이지 가까이 되는 작전들을 검토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총무로서 이 이상의 인재를 바랄 수 없을 재원이라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작전안이 형성되도록 자료를 정리하고 이런저런 반론도 제기해보았던 마모리는 금방 읽기를 마쳤다.
“지금으로선 이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아니 댈 수도 없다고 생각해.”
이것이다.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연습해온 것이 있어 표정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히루마의 눈매는 남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약간 부드러워졌다. 아네자키 마모리가 총무를 겸하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히루마의 작전안을 구성단계부터 지켜보게 되었다. 그 결과물을 내놓을 때마다 그녀가 덧붙인 ‘이것이라면 안심’이라고 납득하는 한 마디는 지난 8개월간 마셔온 그녀의 커피만큼이나 그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 한 마디가 덧붙여져야 작전안이 완성되었다는 그런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자신이 나약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과거 시합을 앞두고 99.9퍼센트를 넘어서는 패배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느끼던 막막함 따위가 없었다. 똑같이 패배의 가능성이 99.9퍼센트라 해도 마모리가 그의 작전을 믿어준다면, 그리고 데이몬 데빌배츠 녀석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차분히 승리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곁에서 그를 부축하며 함께 걸어갈 녀석들이 생겼으니까. 그는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확신을 준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그 때 약간 주저하는 어조로 마모리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뭔데.”
“신 군과 사쿠라바 군의 콤비네이션. 오죠가 정말 이 작전을 들고 나오면 어떻게 대응할거야? 정말로 세나와 몬타가 각각 상대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어?”
마모리는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그 부분의 작전안이 떠오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히루마는 적당히 끓은 물을 커피가루 위에 부은 후 약간 느릿한 동작으로 커피상자 옆에 수북이 쌓인 각설탕과 프림을 집어 들었다.
“다른 방법이라도?”
“모르겠어. 우리는 공수교대를 하는 오죠를 상대로 엄청난 소모전을 하게 될 텐데 다른 선수를 여기에 붙일 수도 없잖아. 히루마 군이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면 이것뿐이야.”
잠시 말이 끊겼다. 데이몬 데빌배츠 녀석들은 누구랄 것 없이 전적으로 그에게 기대어온다. 그라면 반드시 뭔가 해줄 거란 그 믿음의 무게를 알기에 그 자신도 목숨을 걸고 싸우듯이 기대에 보답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만큼의 믿음을 그들에게 돌려준다. 녀석들이라면 그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맡긴 일을 해낼 거라고.
“케케케. 한 녀석은 아이실드21이고 한 녀석은 캐치로 관동 넘버원이다. 그런 녀석들이라고.”
“역시, 진다는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잖아?”
“당연하지. 어떻게든 데이몬이 이기게 만든다.”
왜냐면, 이 세상에는 진실로 무적인 녀석 같은 건 없으니까.
히루마는 그것을 굳게 믿는 자신이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씩 웃었다. 이 녀석들과 함께 하는 한 그는 언제까지고 꿈을 쫓는 소년으로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허공중에 건배하듯이 컵을 들어 보인 후 그는 그것을 마모리의 앞에 두었다. 깜짝 놀라는 그녀를 보며 그는 입 속에 든 말을 감췄다. 그러니까.
“이거 뭐야, 히루마 군? 커피라면 내가...”
“실수했다. 설탕범벅 커피믹스였어. 젠장, 그딴 걸 나더러 먹으란 건 아니겠지.”
바로 돌아서서 투덜거리며 보기만 해도 눈앞이 깜깜해질 것 같은 진한 블랙커피를 타는 그를 보면서 마모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곧, 데이몬 데빌배츠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음식을 버리면 벌 받을 텐데. 할 수 없네. 내가 먹을게.”
마모리는 꽤 기대하는 빛을 띠며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그래도 써.. 라고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지만 히루마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그는 그녀의 커피맛에 익숙해졌고, 그녀는 이제 처음으로 그의 커피맛을 알게 되었다. 평소의 그라면 마모리 앞에서 뭔가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했겠지만 지금은 약간 풀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변덕스런 기분은, 아마도 함께 이 순간을 호흡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데이몬 데빌배츠 전원이 그에게 베푼 작은 선물일지도 모른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도 끝까지 커피를 마신 마모리는 히루마가 두 잔째의 커피를 비우길 기다렸다가 간단한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동안 히루마는 노트북을 접고 다시 한 번 부실을 둘러보았다. 마모리가 꼼꼼하게 청소를 함에도 보이지 않는 구석에 교묘하게 새로이 쌓이는 흙먼지와 거칠게 다뤄댄 탓에 약간 우둘투둘해진 비품들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이들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있었다. 아차, 이상하게 감상적으로 변하려는 자신을 깨닫고 히루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류지와는 다른 의미로 인연이 길었던 오죠와의 마지막 싸움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그 때 마모리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바시라 군은 아직도 미식축구부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어. 내년에는 선수로 뛸 수 없는데도...”
“이쪽 동네 녀석들은 포기하는 게 늦는 바보들뿐이니까.”
“어라,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걸까.”
가볍게 웃은 후 손의 물기를 닦은 마모리는 푸른 눈동자에 진지한 빛을 담아 히루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히루마는 그 시선을 물끄러미 받아쳤다.
“히루마 군. 오죠전 꼭 이기자.”
“그래.”
“꼭 크리스마스볼에 가자.”
“그래.”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실을 빠져나왔다. 말끔하게 개인 밤하늘은 무수한 별무리로 가득했다. 독보적인 빛을 뿜어내는 태양도 그 빛을 한껏 담아내 반사하는 달도 없었지만, 별들은 서로를 비추면서 어둠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데이몬 데빌배츠 녀석들처럼.
마모리는 가볍게 감탄했다.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던 히루마는 그녀의 손을 향해 손끝을 살짝 뻗었다가 조용히 거두었다. 아직은 가을이 끝난 게 아니다. 아직은 다른 것을 생각해도 될 때가 아니다. 이미 오늘 저녁에는 그답지 않은 행동이 많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런 변덕을 부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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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치오 capriccio 는 '변덕스러움’ ‘일시적인 기분’ 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입니다. 유쾌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의 기악 소곡을 뜻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