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웬만한 부활동은 거진 끝난 시각이라 학교에는 학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건 갑자원 준비가 막바지에 접어든 야구부 정도일까. 그런 부활동과는 전혀 상관 없는 아네자키 마모리가 지금 학교 안을 돌아다니는 것은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였다. 평소 그녀의 꼼꼼한 성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녀도 사람이며, 실수할 때도 있는 것이다.
땅거미가 내리면서 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학교는 종종 괴담의 배경이 될 만큼 스산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이런 것에 지레 겁을 집어먹는 친구를 돌보며 자란 아네자키로선 그다지 으스스한 느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건 그저 방금 들은 소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팟! 소리는 좀 더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아네자키는 누군가가 깜빡하고 열어둔 채 가버린 복도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텅 빈 운동장 구석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보자 그녀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그림자는 데이몬 고등학교의 학생이라면 절대로 모를 리가 없는 것이었다.
히루마는 서녘 하늘에 한줌 남은 빛에 의지해 20미터쯤 앞에 놓인 물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뭔가 생각하던 그는 잠시 후 발치에 구르던 공을 하나 주워들더니 갑자기 뭔가를 피하듯이 옆으로 달려갔다. 탁! 불안정한 자세에서 던진 공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물체에 맞고 튀어나갔다. 히루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다른 공을 집어 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비슷한 동작을 반복했다. 시합에서의 상황을 가정하고 연습하는 것일까. 아네자키는 그 시커먼 물체가 뭔지도 알 것 같았다.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에 손을 걸친 사람 그림이 그려진 그 판자때기는 축제 같은 데서 경품을 걸고 공 던지기에나 쓸법한 그런 물건으로, 그 역시 데이몬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것이었다.
창문을 닫고 건물 밖으로 나온 아네자키는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거구의 그림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해는 산 밑으로 완전히 가라앉으면서 그의 빨개진 눈을 가려주었다.
“쿠리타?”
“응? 으응, 아네자키구나. 이 시각에 웬일이야?”
“내일 선도부 회의 때 제출할 보고서를 두고 나왔거든. 미식축구부는 아직 연습중인 거야?”
쿠리타는 운동장을 쳐다보았다. 공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지자 히루마는 칫 혀를 차고 흩어진 공을 줍고 있었다. 또 울어 버릴까봐 겁이 난 쿠리타는 짐짓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응! 나는 땡땡이쳤지만. 히루마는 정말 대단하다니까. 오늘 연습시합에서 스물한 번이나 색을 당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연습하고 있어.”
“색?”
“쿼터백.. 그러니까 공을 던지는 선수를 쓰러뜨려서 공격기회를 무산시키는 거야. 쿼터백이 부상당한다면 십중팔구 색 때문이지. 땅바닥에 인정사정없이 때려눕히거든. 그런 걸 오늘 스물한 번이나 당했는데도..”
아네자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상식적인 생각보다는 그 악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이미지부터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사시는 요즘 어떻대? 자퇴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자퇴는 아냐. 히루마가 휴학으로 만들어놨어. 그, 그러니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분명.”
그 악마가 또 선생님들을 협박했나,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아네자키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익숙하지도 않은 담배를 물고 퇴학당하도록 보고해 달라던 무사시를 그녀는 잊지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겐 미식축구부원이라는 이유로 악마와 한 세트로 취급받았고 또 굳이 주위의 오해를 정정하려 들지도 않던 그런 괴팍한 소년이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직원들을 책임지겠다며 어린 나이부터 일터에 나갔다는 것은 아는 이가 드물었고, 아네자키는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무사시와 쿠리타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은 잠깐이나마 데이몬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히루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억눌렀다.
“둘이서만 부를 꾸리려면 힘들겠구나.”
“좋아서 하는 건데 뭘.”
“그 보고서 말인데, 다른 운동부의 원성이 높아. 특히 야구부. 큰 대회가 눈앞이잖아. 그런데 선수들이 툭하면 미식축구부 연습시합에 차출되니까 부상 위험도 있고 해서 감독이 불만스러워 해. 실제로 처음 연습시합 했을 때 두 명이나 골절 당했잖아. 계속 이러면 선도부에서 가볍게 항의할지도 몰라.”
교장조차 히루마의 손아귀에 쥐여있는 이 데이몬 고등학교에서 과연 어느 누가 감히 그에게 대적하겠느냐마는,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리는 것이다. 평소엔 히루마가 무슨 짓을 해도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선도부지만 이 정도로 압력을 받으면 형식적으로나마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럼, 히루마는 즉시 철저한 응징으로 답할까? 남부끄러운 실수를 저지른 일이 없다 해도 협박수첩이라는 물건의 가공할 위력을 아는 이라면 혹시 자신도 모르는 실수가 적혀 있을까봐 몸을 사리게 된다. 선도부의 방침상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 되도록이면 히루마의 악행을 모른 척 했던 아네자키는 혹시라도 정면으로 그와 대치해야 할 일이 생길 경우 과연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그녀가 나설 것이다.
아네자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 쿠리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활짝 웃었다.
“조력자들을 좀 더 신중하게 데려가란 거구나. 내가 전할게. 미리 말해줘서 고마워.”
쿠리타는 발소리를 쿵쿵 울리며 히루마에게 달려갔다. 아네자키는 발걸음을 돌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쿠리타는 히루마에게서 공이 잔뜩 든 통과 그 우스꽝스런 조형물을 빼앗아 들고는 뭔가를 떠들며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절집 아들답게 상식적이고 온화한 쿠리타는 천하에 둘도 없을 몹쓸 악마와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지금은 저들 곁에 없는 무사시 또한 생각은 이미 세상을 깊이 겪어본 어른의 그것으로, 데이몬고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중 99%에 원인을 제공하는 인물과 나란히 놓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히루마에게 뭔가 알려지지 않은 선한 면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하던 아네자키는 곧 자신이 사막에 비가 내리길 바랐다는 걸 깨달았다. 쿠리타나 무사시가 워낙 사람됨이 좋으니까 저런 녀석도 품어줄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아네자키는 데이몬 고등학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곤 고개를 돌렸다.
일본의 평범한 고등학교 1학년에게 있어 집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 히루마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집이란 공간은 조용히 쉬다 나올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뭔가 형이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런 무가치한 짓을 할 여유가 있는 녀석들이나 하는 것이다.
씻고 늦은 저녁을 때우면서 저녁에 들어온 뉴스를 검색한 후 온갖 정보망을 동원해 전국의 고교 미식축구 선수들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리한다. 부활동을 3학년 1학기 까지만 할 수 있는 데이몬 고등학교의 교칙 상 추계대회의 끝인 크리스마스볼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올해와 내년, 두 번 뿐. 마지막까지 실컷 부활동을 할 수 있는 학교에 다녔더라면 조금은 형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팀원은 중학 시절이나 지금이나 쿠리타와 무사시 둘 뿐이다. 가령 신류지 같은 명문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해도, 온통 잘난 녀석들의 틈바구니에서 중학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렇듯이 그들 셋만이 겉돌 뿐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셋 뿐이었다.
세상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곳이며 필드 위 또한 그러하다. 대신 싸워주는 녀석 같은 건 없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으로 지어진 동물이기에 타고난 것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꼭 끌어안은 채 남에게는 조금도 내주지 않는다. 본래 약하게 지어진 동물이기에 자기 자신에게 닥친 일만으로도 버거워한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나 아닌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남을 돌아볼 수가 없다. 선의로 내민 손에 진흙을 끼얹고 생각 없이 내뱉는 말 한두 마디로 상처를 입히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까지 상해도 어쩔 수 없지 체념하고 매일을 살아갈 뿐. 정말로 아무 대가 없이 이웃에게 손을 내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말없이도 진심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히 신뢰하는 동료 같은 건 공상 속에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었고 또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기에 그들 셋은 특별했다.
히루마에게 있어 쿠리타와 무사시는 만남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 둘 이외의 미적지근한 녀석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고, 이해를 구할 생각도 없다. 무수히 많은 무표정한 사람들 중에 섞여 있어도 셋의 세계가 굳건한 동안에는 홀로 되는 외로움 같은 걸 느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미식축구는 스물두 명이 하는 스포츠다. 공수 교대를 하지 않는다면 열한 명으로까지 줄일 수 있지만, 어쨌든 셋이서 하기엔 터무니없이 손발이 부족하다. 그들 셋만으로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건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다. 이기기 위해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들 3인이 서로에게 가진 신뢰의 반의 반 만큼이라도 나눌 수 있는 정식부원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볼에 갈 기회가 두 번이든 세 번이든 마찬가지다. 그런 팀원을 만날 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러니까 무사시가 그들 곁을 떠나 있어도 아직 기회가 두 번 남은 지금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이번 주말에 열릴 춘계 관동대회 결승전의 진출자인 오죠 화이트나이츠와 신류지 나가에 대해 재탕 삼탕을 거듭한 뉴스 외에는 그다지 쓸 만한 정보가 없었다. 히루마는 눈을 감고 왼손으로 지그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낮 동안 축적된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잊으려고 애썼던 통증이 묵직하게 덮쳐왔다. 소염제를 삼키고 약을 바른 후 늘 준비해두는 얼음팩을 저린 곳마다 둘렀다. 아직까지 별 탈 없이 쓸 수 있는 오른손목에서 시선을 멈춘 그는 손목을 가볍게 돌려보고는 약을 바르는 걸로 족하다고 판단했다.
찌르는 듯한 약냄새에 익숙해져서 아예 느끼지도 못하게 될 때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눈을 감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잠시 후 그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근래에는 아메후토 시에서 내년에 고등학생이 될 중학교 3학년 남학생들의 자료를 틈틈이 수집하고 있다. 이미 데이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 2학년 남학생 중에는 쓸 만한 녀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이제는 내년의 마지막 기회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중학교 기록은 대학진학이 걸린 고등학교 자료만큼 전산화가 잘 되어있는 편은 아니지만 끈기를 가지고 탐색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데서 쓸 만한 정보를 건져낼지도 모른다. 자료를 검색하고 필요하다면 슬쩍 해킹도 하면서 그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기회는 아직 있다. 그러니까.
<<타케쿠라 사무소입니다.>>
“내일 방과 후에 교실로 와라.”
뚝.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으며 대답 또한 기다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히루마는 핸드폰을 던지고 수십 수백 번은 돌려본 시합 영상이 담긴 DVD를 꺼냈다.
숨 막히는 열기가 가득한 필드에서 hut 콜이 울리고, 선수들이 뭉치며 흩어진다. 페이크에 페이크를 거듭한 후 적진을 뚫고 한줄기 섬광처럼 러닝백이 돌진했다.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가로막는 적은 가차 없이 쳐부수고 필요 없는 싸움은 날렵하게 회피하며 전진, 전진한다. 마침내 그의 앞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완벽했다.
우레 같은 환호를 받으며 골라인을 넘어서는 그 등에는 등번호 21이 선명하게 빛났다. 히루마는 생각에 잠긴 채 그 선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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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어느 커플링도 지향하지 않습니다. 뭔가 기대하신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긁적)
마모리를 성으로 적어놓은 건, 이때의 마모리는 세나의 엄마도 데빌배츠의 매니저도 히루마의 그녀-_-*도 아닌, 그야말로 '제3자'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 엄마친구따님 마모리는 완전소중 그 자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