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건 아침이 다 되어서야 최 도령네는 최 도령네 집에 당도를 하였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몇 번을 외고서야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온 하인배들은 꼼짝없이 사랑채에 있어야 할 냥반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출타를 하여서는 근처 동리에서 보도 듣도 못한 사내들까지 데리고 대문 밖에 서있나 깜짝 놀라버렸더랬다. 고 호랭이란 놈의 재주가 어찌나 신묘했으면 사람 하나 물어 가는데 아무도 그 기척을 몰라. 달리 말하자면 고 호랭이란 놈이 작심만 하면 최 규수 하나 물어가는 건 일도 아니란 소리렷다. 최 도령은 등골이 오싹오싹하다 못해 식은땀을 비질거리건만 이 고민을 나눠야 할 이 도령이란 냥반은 제 종놈 등짝에 실려 고롱고롱 잘도 자니 분통이 팍팍 터질까말까 한다 이거다.
고 이 도령이란 냥반이 그래서 정말 푸욱 잘 자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저는 돗가비가 옆에서 난리굿을 쳐도 달게 자겠네 어쩌겠네 했다지만 돗가비한테 홀리고 호랭이랑 대거리하고 하는 것이 과연 일생에 두 번은 겪기 어려운 일들인지라, 자려고 자려고 눈을 붙여도 틈만 뵈면 말똥말똥 도로 뜨여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한여름 햇님이 오죽 바지런하신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할 것도 없이 애저녁에 날은 샜던 게다. 이불을 돌돌 말고 뒹굴뒹굴 해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고 감질나기만 하니까 이 도령, 에에라 모르겠다 자리를 박찬다.
이 도령이 저언혀 잠들지 않았단 걸 모르던 최 도령은 오후 느즈막하게나 깰 줄 알고 의복도 내주지 않았더랬다. 강쇠 놈은 어딜 싸돌아 댕기는지 기척도 없더라. 하여, 이 도령이란 냥반은 산중을 헤매느라 흙투성이 된 바지저고릴 고대로 걸치고 나왔더랬다.
선대에 워낙 쌓아둔 것이 있는데다 최 규수 시집가는 건으로 요 근래 최 진사댁에는 부쩍 방객이 늘었더랬다. 한양땅 여느 거상의 집 못잖게 복작복작 와글와글, 시장통이 따로 없다. 이러니 벌건 눈에 눈곱 주렁주렁 매달고선 달랑 바지저고리 바람으로 나돌아 다니는 사내놈은 아무개가 데려온 게으른 종놈 이상으로는 뵈질 않는 게다. 팔도 사투리 읊으며 바삐 오가는 종놈들 틈에서 저도 종놈인 척 귀동냥을 해본 이 도령은 그간 일 돌아가던 사정을 비롯하야 방객이란 자들이 김 도령 아니면 권 도령이란 양반들 중 뉘 편에 서는 것이 유익할꼬 주판 튕기느라 바쁜 모양이란 것까지 짐작한다. 여하튼 최 규수한테 장가만 가면 최씨 집안에서 한 재산 들어올 건 명약관화이어니.
‘그래서 어찌 하란 말인고.’
이 일 저 일 끼어보느라 한창 바쁜 젊은 냥반더러 대뜸 너 장가가라 그러면 그게 집안 어른 말씀이어도 속으론 염통이 덜컥 내려앉는 것이 인지상정이어늘 벗이란 놈이 딴 놈은 못 미더우니 네가 장가들련 하는 것도 배알 꼴리기는 매한가지다. 그래도 호랭이 하려는 짓은 못 봐주겠으니 어디까지 묻어 가다 발뺌함이 도리일까 고민하던 차, 도령의 걸음이 어느 틈에 뒷마당까지 이르렀더라.
별당 두어 채가 호젓하니 수목에 가리워 잠잠해야 할 이곳마저 웬 사람이 복작대는고나. 방객이란 자들도 예의는 아는 고로 직접 인사는 않더라도 최 규수에게 알랑거리는 선물은 꼬박꼬박 챙겨온지라, 문제는 예를 차리는 마음이 지나쳐 여느 때 같으면 사내놈은 출입을 삼갈 곳에 바리바리 짐 푸느라 남종놈이 줄을 잇는다는 게다. 뉘 댁 뉘가 규수께 무엇무엇을 선물하네 어쩌네 고하는 소란통에 온 뒷마당이 다 시끌벅적한 것이 이쯤 되면 최 도령이 튀어나와 네 이놈들 썩 물럿거라 한 소리 지름직도 하건마는 그 냥반이 밤새 산을 타서 뻗어버렸다는지 코빼기도 비치질 않는고나. 그 틈에 끼어있던 이 도령, 웬 떡대 좋은 여종이 흥흥 콧방귀 뀌며 툇마루에 앉는 걸 본다.
“아씨 아씨 이게 웬 소란이래요. 저는 구경만 해도 배가 부르겠어요.”
옳거니 저 방에 최 규수가 앉았구나. 이 도령, 호기심이 동하야 살곰살곰 다가간다. 최 규수가 뭐라 댓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을날 산자락마냥 울긋불긋한 여종 낯짝을 보아하니 과히 좋은 소리만 한 건 아닐 게다.
“말해두지만 아씨, 저는 저들을 내어 쫓으려고 했단 말이어요. 아씨가 말리지만 않으셨어두 누구 하나 본보기로 다듬잇대에 올려놓고 신나게 두들겨서‥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노인네 삭신 쑤시면 비오는 것처럼 아씨 변덕 알아채는 것도 쉬웠으면 오죽 좋아.”
여종이 마당으로 내려와선 안 그래도 떡두꺼비 같은 두 눈 부릅뜨고 숨 크게 들이쉬던 차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한발 먼저 끊는다.
“앞마당에 최 규수가 납시었다!”
“뭣이? 허면 별당에는 뉘가 계신단 말이야?”
“최 규수 잘났다는 얼굴 좀 보자.”
낚싯대를 드리우니 지들도 사내라고 우우 몰려나가는 꼴 봐라, 어이가 도망을 가려 하네.
이 도령은 월척이네 만선이네 외치는 대신 뒷짐 지고 점잔 떨며 여종한테 걸어간다. 건들건들 방자한 품새는 여느 종놈과 다를 바가 없건만 험한 일이라곤 도무지 겪어보지 않은 귀한 집 자손답게 그을린 적 없는 낯이 해맑기만 하고나. 장사치 같은 종자들을 내어 쫓으려고 작정하고 내려왔던 여종은 내놓으려던 표독스런 말을 다 삼키고 종놈인지 양반인지 모를 냥반을 쳐다본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고들 하건만 최씨네 규수 칭송하는 소문은 참 무성하외다. 그렇게 찔러대다간 하늘에 구멍이 날라.”
“우리 아씨가 얼마나 고운지 댁이 어찌 알우? 암튼 허튼 짓 하지 말고 썩 물러가요!”
“종놈끼리 뭘 숨겨. 한번 말해보오. 아씨의 아름다움이 과연 금수도 경탄할 정도요?”
아니 어딜 비교할 데가 없어 금수한테! 여종 눈이 뒤집어지려는 바로 그때 그 순간 별당에서 언젠가 사내들 심금을 울리던 그 고운 목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곱단아, 네 보기에 선비들이 치는 사군자가 아름답더냐?”
바로 종년 언동이 고분고분해진다.
“저같이 미천한 년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솔직히 말해 보아라. 내가 누구에게 이르거나 하진 않잖니.”
“으응, 양반님들이 즐기시는 거니까 뭔가 저같은 종년은 모를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어요.”
“물감을 쓰는 일도 없이 검은 먹물만으로 본 적도 없는 풀이나 꽃나무를 그리는데 아름다울 리가 없지. 곱단아, 그럼에도 사군자가 아름다운 건 그것을 치는 사람의 성품이 아름답기 때문이란다. 사군자는 매낸국죽의 자태가 아니라 그것이 담아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란다.”
이 도령, 속으로 무릎을 치며 혀를 찬다. 최 규수 한다는 소리는 분명 겉사람의 생김 말고 속사람의 생김을 보란 고차원의 훈계렷다. 그럼에도 이 도령은 요상한 데서 장딴지 한번 걸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얘 곱단아 속이 실하면 뭐 하니 처자식 굶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흥보네 쫓겨난 일과 심청이 인당수에 몸 던진 일이 그네들에게 돈궤나 권세깨나 있었으면 어디 가당키나 할 일이든? 춘향이 매맞아가며 제 낭군 기다린 일은 또 그네가 양반집 적출이었으면 어디 가당키나 할 일이든? 허나 내가 그네들이었으면 제비가 둥지 틀길 기다리거나 애지중지 여식을 구걸시키거나 낭군님 암행어사 출두하길 바라느니 진즉에 두엄지고 밭 갈아먹으며 자식새끼들 배나 불리었으리라.”
곱단이 들어보니 그 말이 옳게 들리는지라. 뭐라 댓구할 말을 찾지 못해 슬그머니 별당을 돌아본다. 최 규수, 곰곰이 생각하다 댓구한다.
“곱단아, 네 나이가 어느덧 이팔청춘이구나. 장래에 어떤 사내를 지아비로 맞고 싶으냐? 놀보 같은 부유한 이나 변 사또 같은 힘 있는 이가 좋으련?”
“삼시세끼 따슨 밥 먹을 수만 있다면야 놀보도 변 사또도 좋고말고요. 하지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살기엔 좀‥ 이히히.”
뭐 부끄럽다고 배배 꼬는 저 덩치가 이팔청춘이었다니 놀라웁긴 놀라운데 내색을 했다가는 저 팔뚝에 모가지 낄라, 짐짓 모른 척해주고는 이 도령은 슬몃 웃음을 짓는다.
“하기사 사내인 내 보기에도 좀 그렇다. 인생은 긴 것이야.”
“곱단아. 네 비록 고운 여인은 아닌데다 여종에 불과하나 네 심성만은 올곧고 한결같은지라, 네 배필 될 사내는 복 받은 사내다.”
배배 꼬다 못해 꽈배기 되것다 꽈배기 되것어.
헌데 최 규수는 한갓 종놈이 왱알왱알 조잘조잘 농지거리 하는 것이 무에 중요한 일이라고 저리도 절절이 이 사내가 한다는 말을 받아치시는고? 잠시 뜸 들이던 규수가 이내 말을 잇는다.
“대신 사람들을 쫓아내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나 여기 오래 지체하다가는 무슨 오해를 살까 두려우니 어서 처소로 돌아가시라 여쭈어라.”
곱단이는 규수가 누구더러 뭔 소릴 하나 싶어 두꺼비눈을 꿈뻑꿈뻑한다. 이 도령, 뜨끔하면서도 내색은 않고 짐짓 물러간다.
“얘 곱단아. 무식한 종놈이 윗분들 말씀을 알아먹을 귓구멍이 있어야지, 헤헤. 하여간 소문엔 산중의 임금이란 범조차도 아씨한테 홀딱 반했단 말까지 들리더라고. 정말 그런가 궁금했지 뭐냐.”
“궁금하면 다냐 이 무례한 종놈아? 종놈이 어디를 넘보긴 넘보는 게야? 경치기 전에 썩 물러가라! 훠이훠어이!”
곱단이가 진짜로 화를 내면 다듬잇대에 사람 엎어놓고 볼기짝을 까도 하나 이상할 것 없을 듯하야 이 도령, 부리나케 제 처소로 달아난다.
보아하니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최 도령을 제외한 최 진사댁 사람들은 호랭이가 최 규수한테 눈독 들이는 걸 깜깜 모르는 눈치다. 아직 장가들기는 싫지만 호랭이 색시 자리에서 최 규수를 끌어내는 건 사람 하나 살리는 셈이라 해봄직한 일이렷다. 이 도령은 본격적으로 호랭이 구축할 일을 생각하는데 별안간 김 도령네 하인배 패거리가 몰려간다.
“도련님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었습지요!”
얼씨구 반나절은 늦었지만 저쪽도 알아차렸는가. 무심코 지나가려던 차에 이번엔 저으기서 권 도령네 무인배 패거리가 몰려간다.
“도련님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었사옵니다!”
절씨구 저쪽도 알아차렸는가. 그런데 아랫사람들이 서로 화통을 했다느냐 이신전심을 했다느냐 어찌하여 동시에 수수께끼를 깨달아? 괴이하게 생각하던 차 또 이번엔 한 도령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갈짓자 걸음을 걷는데 그 양반 표정이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 애를 쓰느라 아주 두억시니 히죽대는 면상이더라.
지화자 좋구나 세 도령이 동시에 깨달음을 얻었구나. 이것이 무슨 조화이더냐? 아리송해하던 차 이 도령은 처소 앞에서 자다가 불났다는 소리 들은 사람마냥 두 손 번쩍 치켜들고 허둥지둥 뛰어오는 최 도령과 마주친다.
“여보게 이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온 동리에 답에 대한 소문이 짜하네! 삼척동자도 답이 무언지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 듯 허이. 세 도령이 답을 알아낸 눈치더구먼.”
“이 답답한 사람아 어찌 그리 태평한 게야!”
“어찌 됐든 세 도령은 사람이니 누가 됐든 호랭이보다는 낫지 아니한가?”
“가정맹어호도 모르나 이 사람아! 사람이 호랭이보다 더 무섭기에 내 일찍이 자네부터 찾은 것이었어. 게다가 호랭이란 놈이 저 혼자 답을 아는 줄 알았는데 모두가 알고 있다 하면 누구부터 잡아먹으려 들겠나? 자다 깨서 사리를 분별할 정신이 없는 겐가?”
이 도령, 그렇게까지 누이를 생각하는지는 몰랐던지라 최 도령의 기민함에 감탄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평하는 줄은 몰랐기에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더랬다.
“이 내가 괜찮은 신랑감임은 명명백백한 일이나 굳이 당장 장가들 까닭이 없을 뿐더러 어른들 허락도 없이 그런 중대사를 결정할 수는 없는지라. 호랭이 쫓아내는 건 돕겠으나 내 도움은 그걸로 족하리라.”
“자네의 말은 우리 선친의 유지에 반하네. 모르는가? 누구든지 고놈의 쓰임을 맞추는 이에게 누이를 시집보내라 하시었네. 수수께끼를 푼 자는 자네가 첫 번째일세.”
아뿔싸 호랭이 앞에서 빠져나갈 일만 골몰하다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고나! 이 도령 후회막심하여 가슴을 치면서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로 머리를 데굴데굴 굴린다.
“허나 그걸 아는 이는 자네와 강쇠뿐이네. 그 약조했다는 날에 내가 답을 알았노라 증명할 이도 없거니와 나는 애시당초 선고장 어른의 수수께끼에 도전하겠노라 나서지 않았느니.”
“소문에는 수수께끼를 푼 자가 자네란 것까지 실려 있네.”
이 도령,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은 것처럼 두 눈 깜빡깜빡하다 실실 쪼개더니 갑자기 벌컥 화를 낸다.
“강쇠 이놈이‥!”
그렇고나 수수께끼의 답도 그거 풀어헤친 자의 이름자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닌 놈이 따로 있었고나. 자기 종놈 입단속도 못 하다니 아나 내가 어둑시니였구려. 이 도령 뒤늦게 이를 북북 갈아보나 물은 엎질러졌고 배는 나루를 떠난지라. 최 도령 볼 낯이 없어 짐짓 외면하고선 이놈 강쇠란 놈 돌아오면 네놈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부득부득 다짐할 밖에.
이러저러 여차저차 하여 약조한 사흘이 지났더랬다.
최 도령이 수수께끼 낸 날처럼 이 동리 저 동리 한량이란 한량들은 죄 몰려나온 것이 가을걷이할 생각은 있는 건가 의심스럽다. 하여간 어찌어찌해서 답을 알아낸 세 도령은 어깨에 힘주고 모가지 뻣뻣하니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고나. 헌데 한량들 웅성웅성하며 길을 열어준 곳에 그 호가라는 엿장수 놈이 의기양양해선 세 도령보다 잘난 면상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오지 않든. 강쇠란 놈이 소문을 낼 적에 호랭이 소리만은 입 밖에 내지 않은지라 그 이가 호랭이일 거라고는 누구하나 짐작도 못 했더랬다. 그저 고놈이 용케 도망하지는 않았고나 수군거릴 따름이더라.
풀이 팍 죽어서는 앞마당에 나온 최 도령은 호가 놈을 보자 어깨가 움찔움찔이다. 그 뒤에 선 이 도령은 선비의 의복을 갖추어 점잖고 의젓한 것이 그냥 서있는 것만으로도 나 귀한 집 자제요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듯 하더라. 보도 듣도 못한 인사가 최 도령 뒤에 섰건만 며칠 전 최 도령이 느닷없이 야밤출타를 하야 도령 하날 데려왔으며 그 도령이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정보를 주워들은 지 오래인 두 도령은 느긋한 얼굴 뒤로 언짢음을 감추고, 그런 정보통이 없는지라 소식이 감감한 한 도령은 그저 최 도령네 집안 젊은이려니 어림한다. 호랭이 호가 놈은 이 도령 근엄한 낯이 왠지 수상쩍긴 하다만 설마하니 인간 놈이 호랭이 뒤통수를 칠까, 치면 그걸 맞아 줄까보냐는 존심으로 더욱 어깨가 떡 벌어진다.
“해서, 답을 아는 이 말해보오.”
세 도령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그 틈에 호가가 불쑥 튀어나와 “저요 저요” 외치자 위기에 닥친 세 도령, 동시에 “나요”라 외친다. 즉시 호가는 저가 제일 먼저 손들었으니 자기 답을 들어야 한다고 박박 우기고 세 도령은 최 도령이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노라 척척 받아치니, 돌아가는 꼴이 우습게 되었다. 누구누구 덕에 동리에 소문이 돈 지 오래라 넷이 모두 같은 답을 말할 것은 뻔할 뻔자이건만 최 도령은 절대로 호랭이 편은 들어주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세 도령 편들어주기도 싫으니 말이다. 호가가 여차하면 멱살 잡고 한판 뜨려고 소매 걷어붙이는 꼴을 보고서야 최 도령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끼어든다.
“일이 어렵게 되었소이다. 보아하니 여러분 모두 답을 아는 듯 한데 한번 동시에 외쳐보심은 어떻겠소이까?”
세 도령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버럭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셋이 다 같은 답을 품은 걸 아는데 자기만 콕 찍혀 답을 말할 뾰족한 수는 없는지라 자기가 안 되면 남 되는 꼴도 보기 싫다고 그리 하라 한다. 호랭이 호가가 상황 판단이 아니 되어 어물어물하던 차에 일이 그리 결정이 나버리자 넷은 동시에 답을 외치고, 여러분 누구나 아시는 바 “시계”란 외침이 온 동리를 쩌렁쩌렁 울려 자던 애까지 깨우더라.
최 도령은 이제 어이할까 고민하듯 고개를 수그리고 가만 서있더라. 호가란 놈이 이것은 어째 약조와 다르지 않더냐 엉덩이 덜썩덜썩하며 튀어나가 말아 하고 있던 차, 최 도령이 고개를 번쩍 든다.
“네 분 모두 답을 맞추셨소. 허나 네 분 모두 안 되겠소이다.”
“뭣이?”
“이 사람은 한양땅 이 참판댁 차남 이 아무개라 하오.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 선비가 가장 먼저 수수께끼를 풀었소이다.”
최 도령은 힘차게 이 도령을 가리키고, 시선의 화살에 고슴도치 되는 기분을 느끼며 이 도령은 멋쩍게 싱긋 웃는다. 이런 상황을 대비했던 권 도령이 즉시 반론한다.
“허나 이 선비는 사흘 전 그 자리에 나서지 않았으니 자격이 되지 아니하오.”
옳소 옳소 하고 김 도령과 한 도령과 호가가 입을 모은다. 최 도령 또한 이런 상황을 대비했던 터라 쉬이 댓구를 한다.
“선고장께서는 신분막론 노소를 가리지 말고 고놈의 쓰임을 맞추는 이와 사돈을 맺으라 하시었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자면 이 도령 한 사람만이 이 자리에 남아야 할 것이오. 아시겠소이까?”
“이노옴 최가야 보자보자 하니까 뒷간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말이 다르지 않더냐!”
어이쿠 드디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느냐! 호가가 어흥 부르짖고 펑펑 변신을 하니 엿장수 호가는 간데없이 집채만한 호랭이 하나가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하늘님 맙소사 산신령님 맙소사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도령들도 혼비백산하여 조상님 이름을 목을 놓아 부르짖네. 에라 모르겠다 이 도령이 용감하게 뛰어나가 방안으로 뛰어드는 호랭이 앞을 가로막은 찰나 발을 드리운 너머에서 예의 옥구슬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 난리통에 어찌 그리 잔잔한 말씀을 하는지 정녕 최 규수는 별세계에서 온 선녀인가 감탄이 나올 지경이더라.
“곱단아, 선고장의 뜻을 곧이곧대로 따르려는 오라버님 말씀도 옳으나 그것은 또한 권 선비의 말씀대로 공정하지 아니하다. 네 분 선비와 호랑이 한 분을 모두 모아 다시금 새로운 문제를 두고 겨루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고 여쭈어라.”
“라라라라고 아씨께서 전하라 하시옵, 옵, 옵, 아이구머니나 호랭이!”
방에서 뭔 소동이 났는가는 일단 차치해 두고, 이 도령을 콧바람으로 날려버리려던 호랭이가 그 말에 딱 멈춰버린다. 분명 최 규수는 엿장수 호가가 아니라 호랭이란 걸 알고 말한 것이렷다. 허나 당한 것이 있어 호랭이란 놈은 일단 을러대기부터 한다.
“내, 아기를 해할 생각은 없노라. 허나 인간이 무엄하게도 나를 속여 넘긴 것이 이번이 두 번째이니 아기 또한 인간이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혼인하기도 전부터 지어미를 믿지 못하는 사내가 어찌 지아비 노릇을 하겠느냐고 여쭈어라.”
“라라라라고 아씨께서 전하라 하시옵, 옵, 옵, 아이구머니나 하시옵니다!”
금수에게조차 조신하게 내외를 하는 저 깜찍한 처자 좀 보소. 이에 호랭이는 확신을 얻어 크게 만족한 낯으로 고분고분 마당에 내려간다. 이 도령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호랭이 옆에 가 섰더라. 이 도령 하는 양을 보자 세 도령도 굴러온 돌에 박힌 돌이 질 수 없지 싶어 눈치 살살 보며 이 도령 옆에 가 서는데, 정작 이 사람들 지휘를 해야 할 최 도령이란 냥반은 반쯤 넋이 나간 것이 오줌이나 지리지 않았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러든 말든 최 규수는 낭랑한 목소리로 새로운 문제를 낸다.
“선고장께서는 신분막론 노소를 가리지 말고 물건의 쓰임을 맞추는 이와 사돈을 맺으라 하신즉 쓰임을 안다는 것은 사용할 줄 안다는 뜻이라. 지금부터 열흘의 말미를 내어드릴 터이니 각자 시계를 그 쓰임에 맞게 사용하시고 그 결과를 열흘째 되는 날에 알리시라 여쭈어라.”
“아니 아씨, 고놈은 하나인데 넷, 아니 다섯 분이 어떻게 쓰임에 맞게 쓰나요? 나눌 수 있는 물건인가요?”
“내가 이르는 대로 말씀 여쭙기나 하거라.”
곱단이 울상이 되어 최 규수 한 말을 아뢰니 네 도령과 호랭이 한 마리는 어안이 벙벙하더라. 고 시계란 놈이 필시 쪼갤 수 있는 물건은 아닐 터인데 쓰임대로 써보고 결과를 알리라 함은 어인 말인가? 게다가 시계란 놔두고 시시때때로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는 물건인지라 따로 쓰고 자시고 할 것이 당장 떠오르지를 않는 것이었다. 일단 시계를 가진 냥반은 저으기 널브러져있으니 나중에 차차 물어보도록 하고, 하릴없이 서있기만 할 수는 없어 다섯은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그런 와중에도 호랭이란 놈은 네 도령한테 눈알을 부라리며 한 소리 경고하는 건 잊지 않는다.
“허튼 수작 부리면 그날이 늬들 제삿날이여.”
네 도령은 고저 꿀 먹은 벙어리 흉내를 내더라.
자작
- [중편]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4- 2006.08.30 4
- [중편]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3- 2006.08.26
- [중편]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2- 2006.08.23
- [중편]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 2006.08.23 2
- [중편] 윌더빌 살인사건 5 終 2006.02.21
- [중편] 윌더빌 살인사건 4 2006.02.21
- [중편] 윌더빌 살인사건 3 2006.02.21
- [중편] 윌더빌 살인사건 2 2006.02.21
- [중편] 윌더빌 살인사건 1 2006.02.21
- [장편] 귀환기 4. 승리자, 낙오되다 -3- 2006.02.21
때는 술시라. 한여름의 술시라면 마악 해가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어니, 또 하루 빡세게 일과 하려면 자리 펴고 누워야건만 매미는 더위 먹고 맴맴 거려 모기는 피 좀 줍쇼 애애앵거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좀체 잠을 못 이룰 그런 시절이렷다.
상놈들이야 고단한 몸 뉘일제 무슨 일과 어떤 일이 동시에 일어나도 나는 자고야 말겠다고 굳게 이부자릴 지키지만 땡볕에 땀 흘릴 일 없는 양반님네들은 지금이 바로 놀 때로고. 선비들은 누마루에 모여 니나노 술잔을 기울이고 활달한 규수들은 살그머니 멱을 감누나.
어지간히 막힌 동네가 아니고선 어느 동네에나 아낙들만 아는 그런 물놀이터가 있는 법이다. 나랏님 계시는 땅이라고 예외는 아닌지라 지금 보는 이 남정네들처럼 도둑괭이마냥 살곰살곰 산을 타다보면 앗흥 하고 별천지가 보이는 게지. 선녀와 나뭇꾼 이바구가 어디 허황된 쉰소리일까.
아니 그러니까 이 남정네들이 지금 야밤에 아낙들 멱 감는 거 훔쳐보러 나가는 게야? 이런 고이헌 놈들 냉큼 정보를 공유하지 못할까!
“강쇠야 아직 멀었느냐?”
여인네 속곳마냥 허이연 바지저고리를 걸친 것이 나 상놈인 척하는 도령이오 라고 조잘거리는 총각의 말이다. 앞서 가는 총각은 머리엔 새집을 이고 마빡부터 짚세기까지 온통 거무죽죽헌게 나 시방 머슴인디요라고 떠드는 놈이다. 고 머슴아가 퉁명스레 쏜다.
“지가 작대기 하나 주웠응께 눈 딱 감고 고것만 잡고 따라와 보시요잉. 쫌 있다 오데까지 왔는고 물으심 지가 지 뒤에 있지라우라 척척 댓구할 것이구먼요.”
“멀면 멀고 가까우면 가까운 거지 어디서 수작이냐 이놈아 네놈 뒤가 얼마나 가깝냐 하며는 내가 손바닥 한번 돌려 네놈 뒤통수에 불똥 틔울 거리이니라.”
“아따 그 냥반 돗가비래요 부시 없이 불을 내고 말게. 다 왔어라. 인자 좀 합죽이가 되보시오잉.”
두 총각, 하마 잔가지 밟을 새라 뒤꿈치는 들었는데 마음은 벌써 저만치 날아가서는 두루미마냥 겅둥겅둥 날라 다닌다. 먼데서부터 계곡으로 물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치듯 온산을 뒤흔드는데 바람결에 하하호호 실려 오는 소리는 보지 않고 믿는 자에 복을 주노나. 오냐 오늘 내가 나뭇꾼이 되어보리라 작심한 두 총각 목울대를 꼴깍꼴깍 넘겨대며 사냥꾼처럼 수풀을 헤치는데.
뭐에 부딪쳐 뒤로 벌렁 나자빠져버렸다. 아니 이것이 무어야?
“이놈드으을! 내가 내는 수수께끼 맞추면 고이 보내주되 못 맞추면 내 잡아가버릴 것이야!”
물벼락 소릴 삼키는 벽력같은 고함! 고운 처자들이 꺄아아 흩어지는 기색에 내가 눈물이 다 나누나. 그사이 강쇠란 놈은 잽싸게 오체투지를 하고선 복복 기는데.
“사사사살려주시요잉! 지는 돈 없구 가난한 종놈이구 이 냥반이 양반 도령인께 이 냥반을 족을 치시오잉!”
아따 강쇠 그놈 말 한번 잘 한다. 양반 도령이 어이가 없어 한소리 하려다 뭐에 부딪쳤나부터 살펴본다.
구척장신에 사천왕 저리 가라할 상판대기에 올락볼락 팔뚝은 시뻘겋기도 한 것이 호패짝 볼 짝도 없는 산적 놈이다. 그런데 어느 산적이 혼자 영업을 하더냐? 게다가 수수께끼 내놓는 산적은 일찍이 보도 듣도 못한 지라,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양반 도령은 콧방귀 탕탕 뀌며 턱을 쭈욱 내민다.
“수수께끼를 맞추면 필히 길을 비키겠느냐?”
“두 말하면 입 아프다.”
“오냐 한번 내 보아라.”
“그 전에 네 이름자나 들어보자.”
“나는 이 아무개라 한다.”
심술궂은 장사, 도령의 이름을 듣자 눈을 반짝이며 제 허벅지를 찰싹 치더랬다.
“좌사우사중언하심 (左絲右絲中言下心)!”
이 말을 딱 듣자 도령의 낯이 해괴해진다.
“네가 아녀자더냐? 그 전에 돗가비에 남녀가 있긴 하더냐? 과연 천하는 넓도다만 나는 인간된 몸이라 그대가 나를 사모하는 뜻은 알아도 허할 수는 없으니‥.”
“시방 이 냥반이 뭘 혼자 시부렁거린대요? 돗가비에 홀렸대냐?”
이 도령은 아직도 바닥을 기는 강쇠란 놈을 흰자위로 흘겨본다.
“척 보면 알아야지. 이 자는 돗가비니라.”
“시방 그게 어쨌다고라!”
“들어 보아라 이놈아. 좌사우사중언하심이면 좌변 우변에 실사(絲)자 넣고 가운데는 말씀언(言) 아랫변엔 마음심(心)자니 합하면 사모할련(戀)자라, 어헛 해괴한지고! 오냐 댓구하마. 좌무우무불하유구 (左無右無不下有口)!”
듣자하니 뭔가 그럴싸하긴 한데 언문도 못 배운 강쇠란 놈이 한문은 또 무슨 재주로 알겠는가, 그냥 양반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고개만 끄덕끄덕 하는 게지. 근디 돗가비가 이 도령을 사모하네 어쩌네 하는 소린 그냥 못 넘어가겠다. 강쇠는 발딱 일어나서는 돗가비한테 속닥댄다.
“아따 이 이 도령이란 냥반이 어떤 냥반인지나 알고 말을 가리시오잉. 이 냥반은 겉은 멀쩡해 뵈두 속은, 아이고 말도 마셔라. 오장육부에 말썽보 하나 더 붙은 냥반이오잉!”
사람도 아니고 돗가비 앞에서 제 주인을 흉보는 이놈을 우째쓰까. 이 도령, 입가가 실룩실룩 하는 걸 꾹 참고 짐짓 돗가비를 바라본다.
“댓구는 했으니 장난은 그만두고 썩 비켜나라.”
“못 하겠다.”
“말이 다르지 않느냐? 돗가비는 혓바닥이 두 갈래더냐?”
“도령의 뜻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파자의 댓구는 삼구유점우각불산(三口有点牛角不山)이라. 틀린 건 틀린 것이니 호언대로 잡아가겠노라!”
돗가비는 제 말이 마음에 들어서 껄껄 웃으며 그 자리에서 재주를 일곱 바퀴나 넘는다. 쾅쾅 하고 요란스레 번쩍번쩍 하더니 시퍼런 돗가비 불덩이가 뱅글뱅글 돌아간다. 고것이 미처 몸을 빼내지 못한 두 사람을 눈 깜짝할 새에 잡아채다 휙 하고 날아가니, 팽글팽글 도는 눈을 바로 뜨고 둘러본즉 하늘도 낯선 산중에 뚝 떨어져 있더라. 이러니 돗가비에 홀린다는 소리가 나오는 게다. 강쇠는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 떨듯 떤다.
“아나 이 석 달 열흘을 에에에 해버릴‥ 하여간 멍텅구리 도령 같으니라고! 답을 알면 기냥 좋게 댓구나 할 것이지 무에 지 기분에 안 맞는다구 요상망측하게 바꿔놔서 이 지랄이라요!”
이 도령, 입이 하나라도 할 말은 많다.
“아니 그럼 네놈이라면 돗가비한테 사모한단 소릴 듣고 옳거니 허하노라 댓구하겠느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 이놈!”
“고놈의 양반님 쫀심이 사람 잡네! 아나 도련님 예가 한양은 한양이겠지라?”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 도령 생각에 아무래도 한양은 아닐 것 같더란 말이더랬다. 아직도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돗가비불을 향해 이 도령, 노호성을 지른다.
“네 이놈 돗가비야! 허튼 장난은 그만하렷다!”
과연 기에 눌린 겐지 돗가비불이 쪼글쪼글 쪼그라들더라.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아니한 채 돗가비는 이 도령 주위를 얼씬거린다.
“밴댕이마냥 좁아터진 소갈머리로다. 사내가 그래서야 어찌 대인이 되겠느냐.”
“네놈의 돗가비 같은 그 성정을 어찌 하면 내 고려해 보겠노라. 장난질 쳐가며 예까지 끌고 온 연유가 대체 무엇이더냐?”
돗가비가 가만히 본즉 돗가비 장난을 당한 사람이라면 으레히 놀라 자빠지거나 넋이 빠지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 냥반은 그러긴 커녕 반말 짓거리 탕탕 하며 넉살좋게 말댓구까지 하지 않든. 고 배짱이 맘에 든 돗가비, 날이 새고 밤이 꼬박 가도록 이 도령이랑 한판 걸지게 놀아보고 싶어졌더랬다. 헌데 누가 성큼성큼 이리로 오는 걸 보고 돗가비, 아쉽지만 장난질을 거두기로 한다.
숲에서 불쑥 나온 것은 산중임금 호랭이인지라. 근데 그 호랭이란 놈의 아가리에 웬 사람이 하나 물려있지 않든. 호랭이는 바짝 얼은 이 도령과 강쇠를 번갈아보곤 돗가비에게 묻는다.
“누가 이 도령이더냐? 양반 차림을 한 이가 없지 않느냐?”
“아니우! 여기 이 냥반이 양반이우! 지는 상놈인께 맛두 하나두 없어라!”
강쇠란 놈 고자질하는 소린 접어두자. 호랭이는 이 도령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아가리에 문 사람을 내려놓는다. 뉘 집 자제가 호환을 당했다 해도 지금의 자기들이 동정해줄 처진 아니다 싶어 입 꾹 다물고 있던 이 도령, 혼이 나간 그 냥반을 보고 깜짝 놀란다. 자고로 세상에 호환, 마마,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있으니 일 돌아가는 영문도 모른 채 남의 손에 명줄이 끌려 다니는 게다. 어여쁜 누이를 둔 죄로 오밤중에 호랭이한테 물려온 이 최 도령이란 냥반은 물론 왜 호랭이가 제 집 월장을 했는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혼백이 다 빠져나가선 어이고 조상님 어이고 아버님 꽃밭 저편에 계시었사옵니까 이러고 앉았다. 이 도령, 호랭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최 도령을 흔들어본다.
“이보게 최군. 정신 차리게.”
“어이고 아버님 불효소자 미처 최씨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한 채 호환을 당하였사오니 이 죄를 조상님들께 어찌 아뢰옵니까.”
“강쇠야 이 양반 정신좀 돌려놓아라.”
강쇠란 놈, 곰방대 피워 문 호랭이 눈치를 보아하니 지가 잡혀 먹힐 일은 당분간 없을 듯 하야 심지를 되찾자마자 손바닥에 침 한번 탁 뱉고는 최 도령 멱살을 잡고 신나게 흔들어댄다. 상놈이 양반님 쥐어 패볼 기회가 어디 흔하더냐. 엉덩이 실룩이며 대갈님 싸대기 명치 등짝 할 것 없이 있는 대로 두드려 패대니 부처님 가운데토막이라도 벌떡 성을 낼 일이로세, 최 도령이라고 별 수 없어 벌컥 화를 낸다.
“그대는 뉘 집 자손인데 그리도 무도하게 사람을 치는 게요? 관아에 송사 걸까보다.”
“불초 소생은 한양땅 이 참판댁 둘째아들놈올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관아에 가는 건 좀 봐주시구려.”
시퍼렇게 밤탱이 다 된 눈을 꿈뻑꿈뻑하던 최 도령, 이 도령을 알아보자 별안간 엎드리며 꺼이꺼이 대성통곡이다.
“어이고 어이고! 이군 이 사람아 어찌하여 자네마저 호환을 당한 겐가! 그대에게 서신을 띄운 후로 주야 없이 앉으나 서나 그대 소식만 기다렸거늘 이렇게 불귀의 객이 되어있을 줄이야, 다 내 탓이로소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사지 멀쩡히 살아있으니 자네만 정신을 차리면 되네. 헌데 서신은 또 무슨 소린가?”
호랭이 뻐끔뻐끔 곰방대 빠는 소리가 급작스레 뻑뻑뻑뻑으로 들리누나. 감 잡아버린 이 도령, 호랭이를 삐죽 노려본다.
“산군! 산중호걸이면 호걸답게 시원한 설명 좀 해 보시오. 보아하니 여기는 경기도 어디쯤인 듯한데, 돗가비를 시킨 게 산군이오?”
“그러하니라.”
“나와 이 양반이 얽힌 일이오?”
“그러하니라.”
“바쁜 사람 왜 불렀소?”
호랭이 대하는 말버릇 좀 봐라, 최 도령과 강쇠는 이 양반이 너무 놀래서 아주 맛이 갔나싶어 갈빗대를 쿡쿡 찔러대고. 호랭이도 털 나고 이래본 적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고분고분 대답을 해버린다.
“그 뭐냐 내가 장가를 가야지 말이다. 여기 이 사람은 내 처형될 냥반이니라.”
이 호랭이가 더위를 자셨나, 호랭이가 어찌 사람한테 장가를 들어? 이 도령 맘 같아선 소나기 내리듯 한 소리 퍼부어주고 싶다만 그랬다간 호랭이한테 명줄 끊길 거란 분별은 있는 냥반인지라 말이나 더 들어보기로 한다.
“최군이 처형이 된다면, 최군의 누이 말이오?”
“그러하니라.”
“내가 어찌 해주길 바라는 게요?”
“최 아무개란 놈이 수수께끼를 내놓았느니라. 수수께끼를 풀면 최가네 아기를 색시로 맞을 수 있는데 아무리 궁리해도 금수들에게는 아리송한 문제라 사람을 부른 게다.”
별안간 최 도령네 주먹만큼 부푼 눈이 수박만큼 커진다. 낮에 왔다 간 그 엿장수 호가놈이 이 호랭이란 걸 알아본 게다.
“그그그그리하다면 소생은 어인 일로 대령시키셨나이까?”
“자네가 고놈을 지니지 않았든? 내 고놈만 슬쩍 빼내어 오려 했네만 자네가 하도 곤히 자길래 어쩔 수 없었네.”
최 도령, 황급히 소맷자락을 더듬더니 시꺼먼 나무상자를 꺼내든다. 그걸 보자 여태껏 잠잠히 있던 돗가비가 휙 날아들어선 고놈을 낚아채다가 공중에서 뒤집어버리는 게다. 딸깍 하고 뭐가 툭 떨어지길래 주워본 이 도령, 사슬 달린 동글납작한 쇠붙이가 대체 무엇에 쓰일 건지 짐작도 못 하겠더라.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더냐.”
“그것이 알고잡다. 그러니 똑똑하다는 이 도령 네가 수수께끼를 풀어내렷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로구나. 이 도령을 지그시 바라보는 호랭이의 시푸르딩딩한 눈깔을 보건대 이 자리에서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똑똑한 다른 놈 찾기 전에 밤참을 즐겨보실까 답싹 잡아먹혀도 손쓸 방도가 없을 듯하더라. 이 도령, 침침한 별빛과 시퍼런 돗가비불에 비춰가며 고놈 괘씸한 물건을 열심히 살펴본다.
“이것이 문자더냐 그림이더냐? 한일 두이 석삼까지는 알아보겠는데 그 다음이 괴이쩍구나. 아하 이것은 열십자더냐. 가위표를 열십자로 써놓다니 무식한 장인이로구나. 허면 이것은 십이 개 숫자이더냐.”
어찌어찌 만지작거리다보니 최 도령이 손댔다가 창피를 당한 그 쇳조각을 건들게 되었더랬다. 한 방향으로 돌려보니 끼리릭 끼리릭 까슬한 소리 내며 한도 없이 돌아간다. 어디쯤에서 더는 안 돌아가고 탁 막히길래 손을 놔버리니 아 글쎄 고놈 동글납작한 쇠붙이가 예의 재깍재깍 소릴 내지 않든! 한번 혼난 최 도령은 흠칫 놀라 스스슥 뒷걸음질치고 강쇠란 놈은 저 냥반이 왜 저런다니 요상하게 쳐다보기만 한다. 이 도령은 재깍거리는 소리에 넋이 나가 우두커니 섰다가 갑자기 소매를 걷고 제 맥을 짚더라.
“이것이 사람의 맥보다 정확하게 뛰놀다니 신기한 물건이로다.”
“뛴다니 무슨 소리인가?”
“침술사가 보면 좋아할 물건일세. 이 재깍거리는 소리가 신통하게도 규칙을 지켜 뛰노는구나.”
최 도령과 강쇠는 얼른 자기들도 소매를 걷고 재깍 소리 들으며 맥을 짚어본다. 그들이 신통방통하다 옳다구나 의원의 물건이로다 서로 맞장구를 쳐대는 걸 멀거니 보던 이 도령, 문득 고 물건을 한 번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린다.
“허면 이 돗가비 방망이보다도 못생긴 바늘이 문제로다. 이것이 방금 전까지 사와 십이를 가리키더니 왜 지금은 긴 것이 일을 가리키는고?”
이 도령,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고 물건을 뚫어져라 본다. 최 도령도 강쇠도 호랭이도 돗가비도 미간에 내천자 잡고 입술 잘근잘근 씹으며 이 도령 하는 양을 쳐다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꼬. 최 도령도 강쇠도 호랭이도 돗가비도 고만 심심해져서 저희들끼리 의원에 팔면 저것이 얼마나 받을꼬 같은 노가리나 까던 와중에 갑자기 이 도령, 찰싹하고 제 허벅다리를 때린다.
“십이와 육 사이가 한 식경! 그렇다면 긴 바늘 한 바퀴가 한 시진이로구나. 짧은 바늘이 가리키는 십이는 십이 간지로구나! 옳거니 이것은 시계로다! 해도 물도 모래도 필요치 않다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시계? 시계라 허면 자격루 앙부일구 배꼽시계 같은 물건을 이름이냐?”
“그렇소이다! 뉘 재주인지는 모르나 참으로 신묘한 물건이외다.”
이 도령, 혀를 홰홰 내둘러가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고놈 만든 장인놈 문자는 못 배웠어도 참 훌륭하다 칭찬하기 바쁘다. 호랭이는 입을 쩍 벌렸다가 고개를 갸웃갸웃 했다가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가 혼자 서성이더니 냅다 그 시계란 물건을 낚아채버린다.
“허면 지금 당장 혼례를 준비하라.”
직전까지 호랭이랑 고놈은 몇 푼은 나가겠노라 시시덕거리던 최 도령, 얼굴에서 핏물이 좌르륵 빠져서는 두 손을 쳐들고 호랭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이구 산군님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아직 약조한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았사옵니다!”
“내가 방금 수수께끼를 풀었노라. 허면 더는 기다릴 것도 없지 않느냐?”
재주는 사람이 넘고 규수는 언감생심 호랭이가 챙기려느냐며 버럭하려는 걸 목구멍 밑으로 쑤셔 넣고 이 도령, 최 도령을 거든다.
“산군께서 맘만 잡수면 혼사를 치르는 것쯤 언제라도 가한 일이외다. 그럼에도 이날 이때까지 참으며 수수께끼를 풀고자 골몰하심은 사람이 혼인을 하는 예를 따르고자 함이오. 그렇지 않소이까?”
“그건‥ 끄으응 그러하니라.”
“그렇다면 까짓 며칠을 더 기다려 보는 것이 무에 어려운 일이오? 산군은 모름지기 산중임금답게 처신하시오.”
인간이 감히 훈계까지 하거늘 호랭이란 놈, 고분고분 고개 조아리고 네네 듣고 앉았다. 그러자 돗가비란 놈이 우쭐우쭐 튀어나와 말한다.
“호군아 인간의 말에 넘어가지 마라. 팥죽 준다던 할미의 말에 속아 봉변당한 호랭이 일을 모르느냐? 형님 소리에 속아 넘어가 제 새끼들 내비두고 인간 할미 따라 죽은 호랭이 일을 또 모르느냐? 인간이란 그리도 간사한 것이니 인간들 하는 양 따라하다간 그대만 손해니라.”
이 도령, 참다못해 쩌렁쩌렁 호령한다.
“네 이놈 돗가비야! 네가 하찮은 재주를 믿고 나를 희롱하더니 이제는 산중임금의 위엄마저 훼손할 셈이더냐! 더 이상 까불면 내, 사람을 시켜 네놈 처소에 닭피를 뿌리는 수가 있느니라!”
닭피란 말을 듣자마자 돗가비란 놈, 바람 맞은 촛불마냥 휘이잉 날려가서는 보이지 않는다. 호랭이가 돗가비 놈 말을 깊이 생각하기 전에 이 도령은 서둘러 말을 잇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이거늘 사람이 어찌 산중임금을 당해내겠소. 그럼에도 힘을 감추고 사람의 예를 따르면 만인이 산군을 법도를 아는 임금 중의 임금이라 칭송할 것이오. 허면 최 규수 또한 법도를 아는 지아비를 맞이하니 어찌 아니 기뻐하오리까?”
“네 말이 일리가 있다.”
호랭이는 임금 중의 임금이란 말에 흡족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리하야 이 도령과 최 도령은 약조했던 그 날에 호랭이와 다시 보기로 하고는 시계란 물건을 돌려받아 산을 내려간다.
어느덧 별은 서산에 걸리고 먼데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최 도령은 고놈 호랭이란 놈 어이고 아버님 되뇌이며 여직껏 재깍거리는 시계란 물건을 자꾸자꾸 들여다보고 강쇠란 놈은 하룻밤 새 호랭이와 돗가비를 다 만난 양반들이 어찌 처신하나에 맞춰 저도 장단을 맞춰야니 주위를 흘끔흘끔거리고 이 도령, 풍 맞은 노인네마냥 두 다리 후들후들 떨다가 아예 풀썩 꺾여 자빠진다.
“아이고 호랭이란 종자는 사람이 상종치 못할 것이로구나. 두 번은 보기 싫다.”
“아까꺼정 잘도 대거리 하더구만 뭘 또 이제와선 약한 척은 약한 척이오. 내 도련님 다시 봤던 게 내 눈깔이 삔 겐가 싶어지는구먼요.”
“이놈아 없는 배짱 부리지 않고서야 어디 호랭이 앞에서 살아나오겠느냐 그만 하고 나 좀 일으켜다고.”
강쇠란 놈 주둥이가 한 자는 튀어나와선 투덜투덜 구시렁구시렁 잔말이 많다. 강쇠 등에 이 도령을 업혀주고 최 도령, 걱정스레 묻는다.
“이군, 이제 이 일을 어찌 감당해야 하겠는가?”
“생각 좀 해봄세. 우선 한숨 붙이고 요기부터 한 다음에.”
“약조한 날짜는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네. 이대로 가다가는 호랭이한테 우리 누이를 주게 생겼으이!”
“그러니 일단 한숨 붙이고 요기를 한 후 생각 좀 해보겠네. 지금 같아서는 돗가비가 귓전에서 풍악을 울리고 굿판을 벌여도 달게 잘 것 같네. 헌데 서신은 웬 말인가?”
“내 누이를 저런 불한당 같은 것에 시집보낼 수는 없지 않더냐?”
“왜 내가 자네 사정에 맞춰 성정도 모르는 자네 누이한테 장가들어야 하더냐! 호랭이랑 작당을 하고 나를 보쌈한 게야?”
두 냥반이 장가가시게 나는 싫으셔요 옥신각신하는 양을 가만 듣던 강쇠란 놈,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끼어든다.
“그러믄 도련님 지는 주인마님께 도련님 예 있다고 전하러 갈 것이구먼요. 언제꺼정 계신다 둘러 댈까요잉?”
“예 있어라. 내가 며칠 훌쩍 집을 비운 게 한두 번이냐. 네놈이 가면 필시 호랭이 이야길 할 것인즉 부모님께 괜한 심려 끼칠까 두렵노라.”
“그럼 지는 이 골 어디쯤에 짱박혀있겠슈.”
그 호랭이란 놈 때문에 한시바삐 이 고을을 뜨고 싶었던 강쇠란 놈, 이를 아득바득 갈며 등짝에 업힌 상전한테 소리 없이 육두문자를 날려댄다. 그 욕설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문자로 옮겨놨다가는 참한 아동의 덕성을 해할 것이라, 이하는 생략한다. 그것도 모르는 이 도령 속편하게 꾸벅꾸벅 잠꼬대한다.
“괴이한 일이다. 정녕 자네 선고장께서는 이것을 풀지 못해 홧병이 나셨던 겐가?”
최 도령, 잠시 생각하다 댓구한다.
“의원이 홧병이라 일렀네만 고놈 때문이란 말은 항간의 입소문이네.”
“잠시잠간 생각해보면 쉽게 풀 수수께끼가 아닌가. 나는 자네의 선고장 어른이 나보다는 지혜 있는 어른이시던 걸 기억하네.”
잠간 주저주저 뜸을 들이다가는.
“아무래도 자네 집안은 이전부터 호환이 든 모양일세. 마음 단단히 잡수게.”
그 말을 마치자마자 이 도령이란 냥반은 고로롱고로롱 코를 고누나. 아니 남의 집은 발에 불똥이 떨어졌구만 자기 집 일 아니라고 태평하게 잠이 오냐 잠이 와? 하마터면 점잖은 최 도령 입에서 쌍소리 나올 뻔했지 뭔가?
여차저차하야 점잖은 도령들이 엉덩이 들썩들썩하며 눈치나 살피던 차 드디어 드디어 최 도령이 방을 붙였더라. 고 최 아무개 진사가 이러이러한 유언을 남겼으니 그 뜻을 좇아 모월 모일 모시에 그 물건을 공개할 것인즉 감히 도전할 자는 나오라고 동리 안에다 써 붙여놨더니 어찌 된 영문인지 내일은 이웃 동리, 모레는 골짝 저편, 글피는 산 너머 물 건너 동네에까지 종잇장이 나붙어 있더랬다. 말인즉 아무 놈이나 사내면 나오라지만 상놈이 언감생심 양갓집 규수를 노리겠나, 일 되어가는 꼴이나 구경하자고 사람은 몰리건만 나서겠다는 인물은 그 세 도령이 전부였더라.
가지 마라 사정해도 해는 떴다 지고 떠서 마침내 모 일이 되었다. 최 도령은 시꺼먼 상판이 되어선 사랑채 앞을 오락가락한다. 이날 이때가 되도록 고 이가 놈은 아니 온 게다. 손을 쥐락펴락 한숨을 토해냈다 눈알을 부라렸다 발을 굴러봤다 생난리를 쳐도 안 오는 놈은 안 오는 놈이고 오지 말란 때는 도달하는지라. 마침내 맘 굳히고 땅이 꺼져라 한숨 뿌리며 최 도령은 앞마당으로 나간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건만 감히 그 안을 내다보는 강아지 한 마리 없다. 높다란 담장 위로 동리 사람들 마실 나온 사람들 죄 둘러서선 고개만 빼꼼 내밀고 안에서 하는 양을 구경한다. 담 밑에는 김 도령네 하인배들과 권 도령네 무인배들이 눈쌈으로 불꽃 튀는 접전을 펼치는고나. 마당 복판에는 요 며칠 본 것 중 제일로 잘 차려입은 김 도령, 꼿꼿한 모가지가 위풍당당한 권 도령, 꾀죄죄하니 허리 굽고 눈 찡그린 한 도령이 나란히 서 있더랬다.
눈앞의 대청마루 건너 안방에는 발을 드리우고 백씨부인이 자리했는데 필시 그 곁에는 최 규수가 있을 게다. 세 도령은 눈알이 또르르 굴러가련 걸 참고 최 도령을 쳐다본다. 고 최 도령이란 냥반은 내키지 않는 걸음 한 사람 티내며 엣흠엣흠 목청을 가다듬고.
선친 고 최 진사께옵서는 모년 모월 모일에 나시어 지위는 어디에 이르렀고 공은 이러이러했고 덕을 높이 쌓아 천하 만민이 우러르더란 이야기를 종일이 가도록 늘어놓으니 가만 듣고 서있기도 힘들지, 동리 사람들 마실 나온 사람들은 아예 대놓고 하품을 쩍쩍 하누나. 모가지가 길어 뎅겅 잘라내야 할 참에야 최 도령이 모기만한 소리로 어찌어찌하야 예의 고 물건을 손에 넣었더라는 말을 하니 하품하던 아해들 눈까지 번쩍인다.
“그리하야 선친의 유지를 받자와 예의 수수께끼를 맞추는 분과 사돈을 맺을 것인즉 금일이 약조한 그 날이올시다. 이제 더는 나설 대장부가 아니 계시오?”
웅성웅성 왱알왱알 시끄럽긴 시끄런데 누가 감히 성큼성큼 양반댁에 나설쏘냐? 오호라 용자가 한 분 계시었다! 키는 구척이요 눈은 화등잔만하고 수염은 올올이 곤두선 것이 흡사 호랭이 같은 화상이 문간을 나서누나! 차림을 보건대 직전까지 석 달 열흘 산구석에 처박혀 네 물건 내놓고 가거라 깨나 외웠음직한 행색에 고물 몇 개 달랑이는 엿판을 지고 있고나. 지나가던 엿장수가 양갓집 규수를 넘보다니 이래서 엿장수 맘대로란 게다. 도령들 기가 차서 말을 못 잇는데 과연 인물은 인물이라 권 도령이 나서서 호통을 친다.
“허어 네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는 게야? 경치기 전에 어서 가던 길 가거라!”
호랭이 같은 화상의 호랭이 같은 낯짝이 대번에 호랭이가 되어버렸다. 그 권 도령이 찔끔 물러나버리네.
“내 이 댁에서 뭘 하는지 알고 오는 길이구만 도령은 무슨 연유로 내게 나가라마라 하쇼? 댁이나 경치기 싫음 썩 비키시구랴!”
상전이 창피를 당하자 권 도령네 무인배들 손이 칼자루로 갈락말락 한다. 이 집에 온 이래 이리 오너라 소리 말고는 암 말도 안 하던 한 도령이 잽싸게 나선다.
“무엄하다! 천지가 나누이고 건곤이 분명하듯 인간사에 반상의 구별이 엄연하거늘 네가 감히 뉘 앞에서 행패더냐!”
호랭이 엿장수가 고개를 휙 돌리니 돌연 일진광풍이 이는 듯하더라. 비실비실한 한 도령은 종잇장처럼 날려간다. 엿장수는 이번엔 김 도령을 노려보는데 이 양반은 오금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싱글벙글 웃는다.
“아무렴 자네도 자격이 되고말고. 그렇지 않소 최 선비? 자자 어서 오시게. 온 김에 자네 이름자나 들어보세.”
“호 아무개요.”
“호가라니 필시 뿌리가 오랑캐인 상놈이로고.”
잔뜩 골난 권 도령이 개미 만하게 조잘댄 걸 그 엿장수 귀도 좋아, 어찌 알아듣고는 화등잔만한 눈을 휙 돌리니 권 도령은 고 매미 한번 시끄럽게 우노니 어쩌니 하며 울지도 않는 매미를 탓하더라. 한 도령도 고집을 못 버리고 집주인 최 도령에게 카랑카랑 따진다.
“이 일을 관장하는 어른은 최 선비니 최 선비의 말씀을 따르오리다. 저 호 아무개라는 자를 이 자리에 세울 것이오, 말 것이오?”
호 아무개가 이번엔 최 도령을 노려보니 그 눈이 과연 사람 하나는 너끈히 잡아먹겠더라. 맘 같아서는 이 화적 같은 화상을 도령들 편을 들어 내어 쫓고는 싶다만 이놈을 매우 쳐라 소리의 이 자만 내어도 이놈한테 잘근잘근 씹힐 판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집주인 최 도령의 체면이 어찌 되겠나. 악재가 깔끔하게 물러난 게 아니라 제 친구놈을 하나 더 데려다 놓은 꼴이로다. 최 도령이 대략 정신이 멍해져서는 게거품을 물락말락한 찰나 안방에서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다.
“곱단아, 선친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었는지 기억하느냐?”
선녀가 강림하였느냐! 은쟁반에 옥구슬 쏟아지누나! 사내란 사내들은 모조리 튀어나온 눈으로 안방을 우러르니 최 도령은 상투를 움켜쥐고 재주를 넘어버릴 참이다. 그 곱단이란 아이가 시침 뚝 떼고 말을 받는다.
“신분막론 노소를 가리지 말고 고놈의 쓰임을 맞추는 이에게 아씨를 시집보내라고 하셨사와요.”
얘 목소리는 어디서 돼지 멱을 딴다니. 사내들이 토악질을 참으려고 웩웩거리는데 다시 선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 아무라도 그 물건의 쓰임을 맞춘 분이 내 지아비 되는 분이로구나.”
“그러믄요 아씨.”
눈이란 눈들은 모조리 최 도령을 쳐다본다. 최 규수가 친히 확답을 주었거늘 누가 감히 거역할쏜가. 최 도령은 반쯤은 이승을 떠난 사람 얼굴이 되어 말했더랬다.
“호가 자네도 자격이 되네. 거기 서게.”
엿장수 호가는 콧김을 탕탕 뿜고 양반네 도령들은 아연실색하더라. 허나 물은 쏟아버렸으니 이제 어쩌겠는가, 그릇 깰 거 아니면 새로 담아야지. 최 도령이 하늘을 우러러 분루를 삼키며 손짓하니 행랑아범이 그때로부터 고이고이 모셔둔 고 상자를 쟁반에 받쳐들고 나타난다.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었관대 멀쩡하던 사람 하나 숟가락을 놔 버리고 꽃다운 처녀 하나 시집보내게 생겼는고? 모두가 침 꼴깍 삼키는 가운데 드디어 개봉박두! 최 도령이 뚜껑을 열었더니!
덜덜 떠는 손가락이 끄집어낸 건 목에 걸어도 좋을 가느다란 사슬이렷다. 낭창하니 소리도 좋게 미끄러지는 사슬 끝에는 똥그랗고 납작한 것이 달려있는데 햇님 얼굴을 보자마자 반짝하고 빛나는 것이 빛나리 영감 저리가라다. 최 도령이 그 똥그란 걸 어떻게 만지작거리니까 뚜껑이 열리면서 속이 드러나는데, 무슨 공짜술 얻어먹고 담벼락에 술값 달아둔 놈 낙서마냥 알다가도 모를 작대기가 나란히 있기도 하고 엇걸어 있기도 하고 끝이 붙어있기도 한 게 똥그란 가장자리에 테처럼 둘러 있고 한복판에는 돗가비 방망이도 저보다는 잘 생겼을 흉측한 막대기가 길고 짧은 게 여덟팔자처럼 붙어있더랬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최 진사 어르신이 홧병 날 만도 하다. 저거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대관절 짐작도 못 하겠다.”
마을 사람들 고개를 홰홰 내두른다. 세 도령과 엿장수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는 최 도령이 든 물건을 째려본다. 사슬 끝을 잡고 동그란 쇳덩이를 추 삼아 좌우로 흔들흔들하던 최 도령은 그제야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닫는다. 옳거니 아버님도 끙끙댄 걸 이 새파란 도둑놈들이 어찌 쉽게 알아내어? 최 도령네 푸르죽죽하던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고나. 최 진사 세상 하직하고 한번 돌아보도 않던 그 물건이 어찌 생겨먹었나 제대로 봐둘 요량으로 곰곰이 뜯어보던 최 도령, 동글납작한 쇳덩이의 테두리 한쪽에 툭 튀어나온 꼭지 같은 걸 보고 무심결에 만지작거리다 돌려버렸다. 아 그랬더니 이것이 째깍째깍 소릴 내는 게다! 염통이 철렁해서 최 도령은 고놈을 떨어뜨려버렸더랬다. 쥐새끼 한 마리가 꼬랑지라도 내밀었다간 찍 하고 죽을 만큼 조용하던 터라 고놈이 째깍거리는 소리는 담장에 매달린 한량들도 다 들을 정도였다. 반상 가림 없이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마당에 오랜만에 마을까지 마실나온 당골네가 갑자기 길길이 날뛴다.
“그거이, 그거이 얼른 태워버리시오잉! 그거이 귀신이 붙은 게 틀림없어라! 최 진사 어르신도 그거이 붙은 귀신이 잡아간 게 분명하구마잉!”
화들짝 놀란 하인배들이 축지법을 썼다니 열 보는 멀어져버렸다. 입만 쩌억 벌리고 섰던 최 도령, 뒤늦게 뭔 소린지 알아먹고 두 손을 타다닥 떤다.
“뭣이라고? 뭣이야? 여봐라, 불을 가져오‥ 아이고 내 발!”
최 도령이 한 발을 잡고 깨갱깽 뛴다. 당골네 말에 놀란 호가가 고놈을 어찌 해본다고 콱 밟다가 앰한 최 도령 발을 밟은 게다. 도령들이 쳐 죽일 듯이 노려보건만 이 호가 놈, 아까까지의 호랭이 같은 기상은 간데없이 계면쩍어 하며 최 도령한테 굽신굽신 사과를 한다. 도령들은 당골네 말을 무시하긴 그렇고 듣자니 양반 체면이 있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놈을 냅둔 채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며 헛헛 헛기침만 하는데, 일찍이 고놈을 손에 쥐어보기도 했던 행랑아범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것을 주워다가 귀에 대본다. 저것이 귀신이 씌었나 하고 사람들이 의심하던 차에 행랑아범은 고것을 공손히 최 도령한테 바치는데.
“멈췄구먼요. 도련님 놀라지 마시오. 이놈이 요기 요걸 돌리면 제꺽 소릴 내는 기계입지요.”
노비 놈도 아는 걸 양반님네들이 몰라서 당골네 하는 소리에 호들갑을 떨었다 하면 이건 뭐 육갑을 떠는 게지. 도령들이 한여름에 죄다 고뿔이 들었나 거 기침하는 소리에 처마가 다 들썩이는고나.
“어, 어찌 됐든 물건은 공개했소. 사흘 말미를 드릴 터이니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답을 내보시구려. 사흘 뒤 정오에 예서 봅시다.”
최 도령은 얼른 물건을 상자에 간수해놓고 못 볼 것 보듯 하다가는 호기롭게 품안에 갈무리해둔다. 이날만큼이나 도령이 돌아간 최 진사 고 냥반을 원망한 적이 없었을 게다.
최 진사가 못마땅하기는 세 도령과 엿장수 호가 놈과 구경꾼들 모두 매한가지라. 근방 동리 사람들은 제 할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고 물건이 무엇인고 쑥덕공론하기 바쁘다.
“허리띠인가?”
“애들 허리도 저 둘레보다는 굵네 이 사람아.”
“튼튼해 뵈는데 패랭이 끈을 달면 어떠려나?”
“쇳덩이는 무어에 쓸 게야?”
“응 그걸로 사슬을 둘둘 말아 고정하는 게지.”
“에끼 머리에 똥만 찬 놈.”
상놈들은 예까지 고민하다 웃어버리면 고만인데 당당하게 마당에 섰던 도령들은 웃지도 못할 일이다. 고 괴이쩍은 물건을 직접 만져보고 살펴봐야 뭘 알든 하겠는데 최 도령은 공평하게 한답시고 아무한테도 물건을 아니 내주는 게다. 어찌 됐든 예까지 왔으니 궁리는 해야겠는 고로 각자 제 방법대로 행하는데 그게 어찌 돌아가는지 한번 보자.
돈푼 있는 김 도령은 돈을 펑펑 풀어 논다. 이러이러하게 생긴 요러조러한 물건의 쓰임을 아는 이에게 금 백 냥을 드리오! 하니 이놈 저놈 김 도령네 방 문간을 기웃거리긴 하는데 누구하나 속 시원한 소리는 못 하지 않든. 첫날엔 백 냥이던 게 둘쨋날엔 이백 냥이 되고 셋쨋날엔 오백 냥으로 눈덩이 굴리듯 불어날 판이다.
권세 있는 권 도령은 사람을 줄줄 풀어 논다. 한양에까지 급전을 띄우고 근방에서 똑똑하다는 이들한텐 다 서신이 갔다더라. 그런데 사흘이란 게 어디 긴 시간이든. 가라면 죽어도 안 가는 놈이 시간이란 건데 가지 말라면 또 때려죽여도 나는 가겠다고 가는 것이 시간인지라 답신은 아직 보이지도 않건만 날짜는 슝슝 지나가더라.
학식 있는 한 도령은 책속에서 길을 찾는다. 마을 훈장님께 가보고 근처 향교엘 다 찾아가보건만 고 물건의 쓰임만 딱 적어놓은 책이 있을까보냐, 설령 있다 해도 그 많은 책 중에서 고 물건 이야기만 짚어내려면 족히 석 달은 걸릴 것이니 사흘 안에 찾아야 하는 한 도령으로선 고저 시간이 웬수로다.
그런데 보자보자 하니 양반님네도 아니면서 양갓집 규수한테 장가든다고 큰소리친 그 호가라는 엿장수 놈이 그림자도 아니 비쳐. 동네 꼬맹이들 말을 듣자하니 호가는 일찌감치 산에 들어가 버렸다는데 설마하니 도를 닦으려는 건 아닐 터이고 삭발승려가 되려는 건 더더욱 아닐 터이다. 동리 사람들은 그제야 상놈이 정신 차려서 허황된 꿈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며 호가를 잊었더라.
그래서 그 산에 들어간 호가가 무엇을 했느냐. 이놈이 갈수록 인적 드문 곳으로 들어가는 게다. 성큼성큼 걷다가는 갑자기 엿판을 내던지고 옷을 훌훌 벗는데 드러난 팔다리엔 누런 털이 그득하고 장익덕 같던 수염은 줄무늬가 되었으니 에이구머니나 어느 새 네 발로 걷는 이분은 근처 산의 호랭이였던 게다! 호랭이는 산중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선 어흥 하고 길게 포효한다.
“산중의 각색짐승은 모두 모이렷다!”
산중임금께서 급히 회의를 소집하니 내노라는 각색짐승 모두 모여든다. 무도회를 하자는 게 아니니 춤추는 토깽이나 깡깡이 켜는 여우는 없다만 까칠한 까치 음흉한 구렁이 교활한 살쾡이가 수군수군하네. 아아니 저으기 근처에서 못 보던 양반은 혹시 서낭당 뒤에 사는 돗가비 아니셔? 요놈까지 부르다니 호랭이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대왕님 하계 구경 어떠하온지요?”
살쾡이가 호랭이 눈치를 살피누나. 호랭이는 곰방대를 톡톡 털며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쉰다.
“고 인간이란 놈들은 참으로 교활도 하다. 얘 돗가비야 최 아무개란 놈과의 약조를 기억하느냐.”
금수들은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한데 돗가비란 놈은 껄껄 웃고는 한 바퀴 재주를 넘는다.
“오오라, 호군의 이번 행차는 새색시 마중을 나갔던 겐가?”
“말도 마라. 최가 놈이 애시당초 약조를 깰 요량이었던 게 분명하다. 고 냥반은 나와 통혼하자 했다 이거여. 아기 뜻도 물어 봐야니 좀만 기다리라던게 그새 그 냥반이 삼도천을 건넌 통에 당장 뭘 어찌 하진 못했지. 당장 데려가고픈 것을, 밥도 아니 나오는 무덤을 삼 년이나 지키는 건 내 도무지 이해가 아니 가네만 인간들 하는 짓이 다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내리 삼 년을 꾹 참았느니라. 이 내가 삼 년을 참고 기다렸건마는 오늘 찾아가보니 고 냥반네 아들놈이란 놈은 인간들을 모아놓고 괴상한 수수께끼를 내놓고는 고걸 풀어야지 시집을 보내네 어쩌네 떼를 쓰고 있지 뭐야. 내 장가들면 처형될 냥반한테 주먹질하기 뭣해서 그냥 나왔네만 이게 뭐 돗가비 장난도 아니고. 쯧쯧.”
돗가비, 옛날 옛적에 호랭이가 최 진사 방에 뛰들어선 대뜸 딸 내노면 안 잡아묵지 했단 걸 모른 척하고 맞장구친다.
“본디 인간이란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임금답게 수수께끼를 풀어볼 요량이신가.”
“군소리 못 허게 허렴 그네들 장단에 맞춰줘야지. 그러니 여봐라, 이 산에 모인 각색짐승들아! 이러저러하게 생긴 여차저차한 물건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아는 놈이 없더냐? 답을 내는 놈에게는 내 크게 상을 베풀 것이다.”
호랭이 그 말에 까칠한 까치 음흉한 구렁이 교활한 살쾡이가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리건만 도무지 인간들 물건을 알 수가 있어야지. 서로가 옆에 앉은 놈 옆구리를 쿡쿡 찔러댄 끝에 비리비리한 장끼가 비슬비슬 앞으로 나온다.
“대왕님 대왕님.”
“오오 장끼더냐. 네가 그것을 알더냐?”
“쇤네들은 답을 모르겠사옵니다.”
“엥이 꺼벙이가 커봐야 꺼벙한 건 갈데없고나. 물러가라!”
호랭이가 골내면 깃털도 못 추리니 장끼 녀석 얼른 가까운 덤불에 숨는다. 그 때 음흉한 구렁이가 꼬랑지로 옆에 앉은 노루 넓적다리를 찰싹 때린다.
“옳거니! 대왕님 좋은 수가 있사옵니다!”
“오오 구렁이더냐. 말해 보아라.”
“쇤네들은 금수인즉 인간의 일을 알지 못하옵니다. 하오면 인간들 일은 인간이 제일 잘 알 것인즉 똑똑한 인간 하나 잡아서 족을 치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호랭이 열 길을 펄쩍 뛰며 무릎을 탁 친다.
“묘안이로고! 얘 까치야 그 서신을 가져오너라!”
까치가 푸드득 날아가선 때가 꼬질꼬질한 종이뭉치를 물고 온다. 뜯겨 있는 서신 겉봉에는 한양땅 이 참판댁 상신이라 쓰여 있더라. 최 도령이 봤음 진즉에 거품 물고 고꾸라졌을 고 서신을 읽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호랭이, 돗가비를 돌아본다.
“며칠 전 출출해서 잡아먹은 놈이 이런 걸 갖고 있길래 내, 최가네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아차렸노라. 최가네 아들놈이 손수 찾을 정도면 필시 고놈의 쓰임도 맞출 똑똑한 도령이렷다. 돗가비야, 네 걸음으로 한양땅까지 얼마나 걸리든?”
“이 어른이 날면 일각도 필요치 않느니라만서두‥.”
돗가비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호랭이 쪽으로 어깨를 들썩들썩한다. 호랭이 속으론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도 임금의 위엄을 지켜 고개를 끄덕인다.
“내 당골네를 시켜서 모밀묵을 산처럼 가져다주마.”
“냉큼 다녀오마. 뉘에게 가면 되겠느냐?”
“이 아무개란 도령을 잡아와야 할 것이다.”
“한양땅 이 참판댁이면 그 댁 처마를 셀 때 첩첩산중이란 말을 써야 할 것인즉 노고가 클 것인데‥.”
“오냐 이 도둑놈아. 수육도 올리라 하마. 아주 거덜을 내라 거덜을 내.”
호랭이가 넌더리를 내니 이 돗가비란 놈이 크게 껄껄 웃고는 두 바퀴 재주를 넘는다. 쾅쾅 하고 빛이 번쩍이더니 이놈이 시퍼런 도깨비불이 되어서는 살별 날듯 날아가는고나. 자 이제 고 이 아무개 도령은 어찌 될 것이냐?
옛날 옛날 호랭이 담배 먹던 시절 저으기 경기도 산골 어디쯤에 최 진사라는 양반이 살았더랬다. 이 냥반이 어떤 인물인고 하냐면 돌잔치날 종중 어르신이 집으라고 내민 붓 대신 엄니 치마폭 붙잡고는 “오마니 오마니 아해는 오데서 생겨요”라고 첫 말문을 틔었다던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일찍이 돌쟁이 시절부터 사물의 이치를 고민하는 비범함을 보이던 그 냥반, 자라서는 고놈의 호기심을 주체 못해 나라에서 제일가는 수수께끼 대장이 되었더랬다. 날이면 날마다 그 냥반한테 재미나는 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고 뭐 국물 한 접시라도 얻어먹으려고 사람이 줄을 섰다지. 그야말로 문전성시더랬다.
그렇다고 그 냥반이 그래도 양반 체면에 허구헌날 파자놀이나 하고 그랬던 건 아니라서, 어찌어찌해 진사 소리도 듣고 물려받은 전답도 잘 가꿔 배로 불려놨더랬다. 이윽고 아들딸 잘 키워놓고 보니 서울 양반들 빼고 세면 경기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이거다.
그런데, 그 잘 나가던 최 진사한테 마가 낀 겐지 어쩐 겐지.
어느 날 좋던 봄날 웬 방물장수가 이 산골짝에 당도했더랬다. 이 화상이 마을 한복판에서 이것저것 좌판을 벌이고 앉아있자니 멀찍이서 먼 산 보고 어기적어기적 갈짓자 제대로 밟으며 엣흠 하고 뱉은 소리 한번 멋들어지게 내뱉는 양반님네가 하인 하나 데리고 섰지 않든. 고래로부터 방물장수란 이야기 주머니중의 주머니인지라, 제 살쩍은 떼어줄지언정 제 버릇은 남 못 줄 이 냥반이 귀가 번쩍 뜨이지 않겠는가. 무어? 집에 불러? 아아니 양반님 체면에 어찌 그런 해괴한 짓을 해? 그러니까 고민 고민하던 최 진사가 날씨 한번 좋다고 혼잣말씀 외치고는 훌쩍 일어나신게지. 이 냥반이 또 한 성깔 하는 거 잘 아는 동리 사람들, 눈치도 좋게 꾸역꾸역 몰려와서는 구름을 노려보는 양반님 대신 장돌뱅이한테 말을 건다.
와글와글 바글바글 오일장이 따로 없다. 거기서 고 참새 한번 자알 생겼다 중얼거리시며 이 냥반은 방물장수 떠드는 소릴 죄 주워듣고 있는 게다. 그러다 이 아해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고 하며 쭈그리고 앉은 어린애 어깨를 슬쩍 넘겨보니 이 냥반이랑 같이 커서 눈치 하나는 입신인 행랑아범이 날래게 끼어든다.
“이보시오. 어디 새로 들어온 거는 없는가?”
“있습죠 있지요 있구말굽쇼. 때깔고운 옥양목에 짤랑짤랑 방울에, 보시구려! 노리개는 또 오죽 고와.”
“아낙들 쓰는 거 말고 좀 신기한 거는 없나.”
방물장수의 뱁새눈이 아래위가 달싹 달라붙음서 쭈우욱 찢어진다. 오오라, 아낙들 쓰는 거 말고 좀 신기한 게 있긴 있는 게다. 협조 잘 하는 동리 사람들이 죄다 합죽이가 된 것도 모르고 이 화상, 등 뒤에 부린 꾸러미에서 뭐를 주섬주섬 꺼내든다. 먹음직한 고깃점이나 내놓는 것처럼 슬그머니 든 손에는 손바닥마냥 납작하니 분가루나 들었음직한 새까만 나무상자가 들려 있더랬다. 행랑아범은 이제부터 방물장수가 주워섬길 특별한 분가루의 재료로 두꺼비 눈꼽, 지네 앞다리 반쪽 같은 걸 생각하면서도 예의 삼아 물어본다.
“이게 뭔가?”
방물장수는 보란 듯이 턱 하고 행랑아범 손바닥에 상자를 올려준다.
“이거이 뭐냐 하면은 저으기 물 건너 뙤놈네 땅에서 막 건너온 뜨끈뜨끈한 놈으로 돗가비 방망이가 따로 없을 신묘한 물건인즉‥.”
바로 그 때 이쪽으로 우두두두두 하고 미친 소떼 달려드는 소리가 나지 않든! 동리 사람들 깜짝 놀라 보니 포졸들 서넛이 육모방망이 휘두르며 달려온다.
“흩어져라 흩어져! 가서 일들 안 보고 뭐하느냐!”
“어헛 노점상 단속령도 모르느냐! 흥정은 장에 가서 하렷다!”
“아이고머니 물건은 안 사도 쪽박은 깨지 마시우!”
혼비백산한 방물장수, 손갈퀴로 잽싸게 좌판을 싸안는데 그 손놀림이 가히 신기에 가깝더라. 행랑아범이 뭘 어쩔 새도 없이 이 화상은 보따리 싸들고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이를 우째쓰까. 한손은 빤딱빤딱한 상자를 들고 한손은 뻘쭘허니 허공을 움키던 행랑아범, 최 진사 어르신을 돌아본다. 이 냥반 살아생전에 남의 돈 떼먹은 일이 없거늘 드디어 사단이 일어난 게다. 그런데 원래 성정대로라면 엥이 내다 버리라고 해야 할 양반이 휙 하고 헛바람 일으키며 돌아서질 않든?
“넣어두어라. 다음에 자네에게 부탁함세.”
이 냥반은 양반이 도둑질했단 소리 들어도 눈 딱 감아버릴 만큼 고 상자 속에 든 놈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는 게다. 행랑아범은 그 방물장수가 과연 언제 이 동리에 다시 나타날지 의심스러웠지만 양반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함부로 나불대선 안 되겠지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 날 밤 최 진사댁 사랑채에서 온밤을 꼬박 새도록 멍멍 컹컹 으르렁 왈왈대다가 기어이 버럭하고 낑낑대는 소란에 온 식구가 잠을 설쳤더랬다. 상자 안에 든 게 대체 무엇이관대 그 냥반이 저리도 환장하는고? 모르면 모른다고 똑똑한 아무개 붙잡아다가 물어보면 될 것을, 이 냥반은 자기가 힘써서 풀어보겠노라고 마침내 맞은 생애 최대의 도전에 임하야 전의를 불태우더니-
끝내는 홧병이 나서 숨이 넘어가셨다. 그 냥반을 알던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차면서도 평소 그 냥반이 베푼 건 안 잊어서 성심성의껏 조의를 표했더랬다.
그런데 그 냥반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마당에 무슨 소리를 했는지 듣고선 그 사람들 모조리 기가 차서 귀를 후볐더랬다.
“내가 죽거들랑 임자는 신분막론 노소를 가리지 말고 고놈의 쓰임을 맞추는 이에게 우리 아이를 시집보내시구려.”
고 비범한 어르신은 이승 하직하면서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수수께끼 한 토막을 내놓고 간 게다. 이러니 친척이고 친구고 뭐시깽이고간에 이 집 대문 문지방 넘어본 사람이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냥반대신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끙끙대게 생겼지. 그치만 최 진사 고 냥반이 살아생전 남한테 고 물건을 보여준 적이 있어야지, 또 한 번 본 적은 있는 행랑아범은 입 무겁기로는 동리 제일이라 암 말도 안 하지, 해서 고 물건의 정체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만이 세상을 싸돌아 댕기고 있더랬다.
이제 진사댁 가장이 된 최 도령이란 냥반은 또 활량이던 제 아비랑 딴판이라서 엄격하고 정직하고 소심하기 이를 데 없더랬다. 최 도령은 우선 선친의 삼년상부터 지내고 나야 누이를 시집보내든 말든 한다고 엄숙히 선언하고는 정확히 삼 년간 그린 듯이 법도를 지켜 시묘살이를 마쳤더랬다. 말 몇 마디 하는 새 삼 년이 얼렁뚱땅 지나가버렸구먼.
그리하야 기대하고 고대하던 그 날이 와버린 게다. 시묘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날 밤 최 도령은 모친 백씨부인이랑 이마를 맞대고 앉아서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다.
“이 집에 시집을 보낼 아이라면 그 아이 하나인데 이를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고 최 진사에게는 슬하에 아들놈이 하나 딸년이 하나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딸아이가 어찌나 곱던지 아기씨 그림자 한번 본 적도 없는 아해들까지 규수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더랬다. 곱기만 한 줄 알아, 난을 치라면 방안에 난향이 진동해, 시를 지으라면 날던 새가 가다 말고 귀 기울여, 뉘 집에 주리는 애가 있다면 쌀을 갖다 주라고 해, 그야말로 최 진사댁이 아니라 동리 제일의 보물이더랬다. 백씨부인도 끔찍이 귀한 딸 그냥 내놓긴 뭐해서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연다.
“죽은 사람 소원은 귀신도 들어준다는데 그 어른 말씀임에야 어찌 하겠느냐. 따르자꾸나.”
“하오나 혼사가 아니옵니까? 엉뚱한 자에게 그 아이를 맡겨 고생시키면 아버님도 지하에서 통곡하실겝니다.”
“그 어른이 어디 허투루 말씀을 하든. 다 뜻이 있을게다.”
백씨부인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부부는 살면서 닮는다는 게다. 웃으며 말씀하는 모친께 감히 대들 수 없어 최 도령은 운명의 그 아이인 자기 누이를 붙잡고 사정해본다.
“얘야, 네 혼사 말이다‥.”
“아버님 말씀대로 하셔요.”
오호라 고립무원이구려. 최 도령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최 진사가 쓰던 사랑채에서 나오질 않는다. 이미 동리에 소문이 짜해서 홀아비 노총각 총각 초동에 나도 사내라고 머슴아까지, 짝 없는 사내란 사내들은 본 적도 없는 그 물건을 두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는 게다.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도둑놈으로 보이는 마당에 누이를 끔찍이 아끼는 최 도령이 어디 사내놈 얼굴을 보고잡겠는가. 집안의 머슴이 마당을 쓸다가 텁텁한 사내 목소리만 내도 깜딱 놀라 앉은 자리에서 석 자는 솟구치는 나날에 피골이 상접해가는 아들을 보다 못한 백씨부인이 한 마디 한다.
“너 서울에 친구 있지 않든. 괜찮은 도령이 있으면 귀띔하려무나.”
묘안이로다! 아들은 엄니 말씀을 들으렷다! 최 도령은 버선발로 사랑채에 뛰 들어가선 먹을 박박 갈아댄다. 탐탁지야 않지만 동리의 꼴사나운 사내놈들보다야 알고 지낸 친구놈이 낫거니! 한 식경 쯤 지나자 발 빠른 머슴 하나가 한양땅 이 참판댁으로 가는 서신을 들고 서으로 서으로 달리더랬다.
고놈이랑 엇갈려서는 웬 장원급제 행차가 부럽잖은 행렬이 동리로 다가온다. 온 동리 사람들이 시골 촌사람 티를 팍팍 내며 동구 밖까지 몰려나와 행렬을 구경하누나. 풍악을 울리는 놀이패 뒤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씨근덕거리는 사내들이 줄줄이 줄을 잇고 따악 중간에는 구릿내 깨나 풍기는 높다란 안장을 채운 조랑말에 윤기 좔좔 흐르는 도포자락 휘날리는 도련님이 흔들흔들 실려 계신다. 따악 최 진사댁 앞에 멈춰서는,
“이이리 오너르아으아으아으!”
목청도 좋고나. 이거이 무슨 일인고 하고 하인들이 나가보니 산 너머 물 건너 벼락부자 김 초시댁 도령이란다. 본래 대대로 중인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 적에 조운으로 떼돈을 벌어서는 족보를 샀대나 어쨌대나. 어찌 됐건 오는 객 막지 않던 선친의 품성은 닮아서 최 도령은 미적미적 방을 하나 내줬더랬다. 그랬더니 취미도 높은 김 도령, 방 한번 슥 돌아보고는 하인들에게 턱짓을 하는데, 저녁에 김 도령네가 뭣들 하나 찾아간 최 도령은 초호화풍도 이런 초호화풍이 없는 방 풍경을 보고는 딴 집에 잘못 들었나싶어 눈을 비빈다. 하인들이 지고 온 가구가 죄 이 안에 있고나. 방 안을 싹 뒤집어놓고는 뭐가 불만인지 섬돌 앞을 오락가락하던 김 도령, 최 도령을 보자 점잔빼며 사정을 설명하는데.
“나는 귀하게 자라서 자던 침구와 먹던 식기가 아니면 불편한 사람이오. 하오니 양해 바라오.”
선친 살아생전 별별 괴담을 다 들어서 엔간한 걸론 웃지도 않던 최 도령이 허허 하고 빈 웃음을 터뜨린다.
악재는 항상 패거리로 다닌다고, 김 도령이 동리를 휘저어놓고 이틀쯤 지나자 이번엔 서쪽에서 웬 사내들이 몰려온다. 김 도령네처럼 풍악을 울려라 북치고 장구 쳐라는 아니었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어깨들이 시커먼 철릭 차림에 칼 한 자루씩 차고 뚜벅뚜벅 걸어오니 울던 아해가 뚝 그치더라니까. 사내들이 모셔온 도령은 얼굴은 샌님인데 눈매가 추상같다. 이도 따악 최 진사댁 앞에 멈춰서는,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불호령이 따로 없고나. 이거이 설마 또 그건고 하고 하인들이 나가보니 골짝 저편 권 치사댁 도령이란다. 조상 대대로 재상에 당상관에 떵떵거리는 세도가인데, 지금 가장인 권 도령네 조부가 나랏님께 궤장까지 받은 그 권 치사 어른이시란다. 그 부친은 병조판서에 아들이 줄줄이 다섯인데 그 중 막내가 이 권 도령인지라. 막내가 분가해봤자 재산을 받으면 얼마나 받겠나, 음덕을 볼 수도 없는 처지에 우선 씨앗재산부터 다지고 보자는 한 포부 있는 양반이더랬다. 최 도령은 이도 쫓을 수는 없어 방을 내주는데 벌써부터 김 도령네랑 오고가는 눈치가 심상치 않다. 최 도령이 저녁 즈음 슬며시 찾아가니 김 도령네 하인 패거리가 권 도령네 무사들한테 쫄아 김 도령 방 벽에 붙어 깽깽거리고 있더라나. 집주인으로서 한 소리 하려던 차 마침 방에서 나오던 권 도령이 먼저 한 마디 얹는다.
“내, 객의 예를 지켜 명일 일찍 귀댁의 사당을 참배코자 하오. 차후에 자당께 문후 여쭙고 이 고을 사또를 뵈어야겠소.”
양반님이 어디 마실 나가는 법도도 모르는 김 도령을 놀리는 한편 최 도령더러는 알아서 자기 나갈 차비 도우란 소리렷다. 언외언 읽느라 최 도령은 골이 빠개지려는데 또 누가 찾아왔댄다.
“이리 오너라아아아앗! 이리 오너라아아아앗”
바락바락 애쓴다 애써. 차림은 분명 양반님 도포랑 갓을 갖추었건만 그 도포란 게 누덕누덕 기워 이은 누비요 갓이란 건 자글자글 찌그러져 있으니 영락없는 거렁뱅이 행색이로다. 괴나리봇짐에 책 몇 권 달랑 넣고 이웃 동네에서 찾아왔다는데 사대 전에 급제자 끊긴 양반 아닌 양반이더라. 풍악에 칼잡이에 눈이 휘둥그레질 행차들만 본 동리 사람들이 혼자 나막신 딸깍이며 예까지 걸어온 거지꼴 도령을 보고 최 진사댁에 가는 길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대 전에는 양반이었던 이 유생은 한 도령이라 한다. 최 도령은 수심 가득한 낯으로 이 손님에게도 방을 내줬더랬다. 홀몸이라 그런지 앞서 온 두 도령은 거들떠 보도 아니하고, 한 도령 자신도 방에 들어가서는 좀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오지를 않는다. 수발드는 아이 말로는 첫닭 울제 일어나 누더기나마 의관을 정제하고 닳아빠진 서책을 펴들고는 자시가 다 되도록 글만 판다던가.
최 도령 우는 꼴이 안쓰러웠던지 악재는 이쯤에서 슬쩍 물러가는 듯 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내달리는지라, 이웃동네 건너동네 먼 동네 가까운 동네에서 양반 도령이란 도령이 죄 몰려오려다가도 김 도령 권 도령이 도사린다니까 꼬리를 말고 겸양을 표하는 게다.
일이 이래놓고 보니 동리에선 도령들이 왜 최 진사댁에 파리 떼 마냥 꾀이는지 모르는 이가 없더랬다. 똑 소리 나는 최 규수가 그걸 모를 리 또한 없더랬다.
“오라버님, 이제 도령들은 아니 오나요?”
이 애가 빨랑빨랑 시집 가고잡아 애가 타는 처녀였던가. 최 도령 울상이 되어 대답한다.
“한 사람 정도는 더 기다려 보자꾸나. 아니, 지금도 많긴 많구나.”
“오라버님이 점찍은 분이라도 있나 봐요? 그런데 아직 당도하진 않았고.”
“알면서 묻는 게냐?”
“공정해야지 않겠어요. 아버님은 신분막론 노소를 가리지 말고 그 물건의 쓰임을 맞추는 이에게 저를 시집보내라 하셨거늘 오라버님이 미리 정해버리시면 어떡하나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닌데 논리만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명징해진다면야 최 도령이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끙끙거리겠는가.
“네 말이 맞다만 이 오라비는 불안해서 그런다. 지금 있는 도령들이 못났다는 게 아니야. 아아, 오라비 타는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가 없으니 내 속내를 알릴 길이 없구나.”
“도령들이 눈에 차지 않으신 거잖아요. 매일같이 방을 바꿔대는 도령이나 날마다 권세 있는 집 들락거리는 도령이나 날이 가든 말든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도령이나.”
“이 애가,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어찌 도령들 하는 양을 그리도 세세히 아는 게야?”
최 규수는 혀를 빼죽 내민다. 상놈들 하듯이 한 대 쥐어박아줄 수 있다면 더 소원이 없겠다만 최 도령은 누이가 자기 속내를 알긴 안다는 게 기쁘다.
“그리도 잘 안다면 오라비가 누구를 기다려도 이상할 게 없지 않느냐? 네가 감춰둔 속내는 무엇일꼬?”
“도령들을 진정시켜야지요. 오라버님이 아무 소리도 안 하니까 저들이 자기들끼리 불안해서 저러는 것이어요. 이대로 두다간 며칠 내에 큰 소동이라도 날 테니 뭔가가 진행되고 있긴 한 것처럼 꾸미기라도 하시어요.”
곰곰이 생각해본 최 도령, 누이의 말이 일리 있다 여겨 고개를 끄덕인다.
“오냐. 내 근일 내에 이야기 좀 해 보마.”
최 규수 표정이 묘한 것이 뭔가 말을 더 하긴 해야겠는데 참는 눈치다. 인사를 하고 나와 툇마루에 선 최 도령이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밤하늘에 희뿌연 구름이 흘러 농월을 휘감고 있는 것이 흡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다 품에 감추는 양이더라. 여의주보다 귀한 누이를 저 이름도 모르던 도령들에게 빼앗길쏘냐. 최 도령은 달을 향해 아우우 울부짖는다.
“오라는 이가 놈은 어찌 더디 오는고오오오!”
5.
그 날 저녁 붉은 달이 뜰 무렵에 레르다이는 행장을 꾸려 소령의 집을 나섰다. 브네로는 그를 배웅하러 따라 나왔다.
재판이 열렸던 마을 중앙의 공터에는 마을 사람들 서넛이 모여 낮의 일로 떠들었다. 한창 떠들썩하던 그들은 마을을 떠나는 이방인들을 보고 조용해졌다. 그들을 지나치며 곁눈질로 주점을 본 브네로는 벌써부터 흥청거리는 야단법석이 새어나오는 걸 듣고 쳇, 짧게 혀를 찼다.
마을 밖으로 나오자 초저녁의 어슷한 풍경이 거침없이 펼쳐진 벌판 위로 드러났다. 여행자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은 태반이 검푸른 어둠에 물들었지만 서녘에선 석양이 성긴 구름 위로 마지막 미련처럼 묽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빛은 사우스필드의 누런 먼지흙에 밤하늘보다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두 사람은 그림자의 일부가 되어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을 스치며 바람이 웅웅거렸다. 브네로는 망토의 깃을 여미며 입을 열었다.
“비 온 뒤라 그런가, 바람이 차군요. 계곡으로 돌아가십니까?”
“예. 당신은 이 땅에 계속 계실 겁니까?”
“아뇨. 내일 아침 허슬 소령의 관을 이스갈레아로 보낼 때 저도 이 동네를 뜰 생각입니다.”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레르다이는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짐에는 데오로의 유골이 들어있었다. 브네로는 어깨를 으쓱이고 모자 위로 머리를 긁적였다.
“레페리 씨는 이래봬도 이스갈의 관리니까 제 맘대로 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녜요.”
내가 그 이스갈 관리더러 자기 뜻대로 일을 못 한다고 화를 내긴 했지만. 브네로는 입속을 맴도는 말 중 하나를 꿀꺽 삼키며 입가를 비죽였다. 레르다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갈 인은 저주스럽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제 형제를 죽이도록 사주한 자의 집에서 유숙했습니다. 저 자신도 창피스럽습니다.”
대화는 다시 끊기고 말았다. 브네로는 탄식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색한 침묵을 유지한 채 걷는 동안 그들은 실개천 같은 강에서 물을 끌어와 겨우 일궈내는 밭에 접어들었다. 여름이 한창인 태양달인데다 낮에 한 차례 비가 내렸음에도 작물은 어딘가 시들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브네로에게 갑자기 레르다이가 말을 걸었다.
“한 가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이 마을은 왜 이렇게 미움으로 가득한 겁니까?”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던 브네로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출 뻔 했다. 곧 자세를 추스른 그는 그 역시 곰곰이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가난 때문이에요. 태어나기 전부터 평생 가난한 소작농으로 땀 흘리다 이 메마른 땅으로 돌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것에 대한 분노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스갈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사나, 그게 내 운명이니까. 이걸 바꾸려면 더 좋은 운명을 타고난 윗분들이 손을 내밀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다. 왜 윗분들이 신경 쓰지 못하나, 이민족들이 계속 이스갈을 위협해서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이스갈에서는 자기 신분에 대한 분노를 어디 돌릴 데가 없으니까 이민족이나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자에게 돌리는 겁니다. 뭐, 사실 이스갈의 역사는 대륙 중앙에 자리 잡은 죄로 주위의 온갖 민족과의 싸움으로 기록된 것도 사실이니까요. 작년까지만 해도 이스갈은 남쪽의 미트라다스와 전쟁하느라 바빴죠.”
“잘 아시는군요.”
“이스갈레아에서 강 하나 건너면 아렌체거든요. 정확히는 서 아렌체라 부르는 땅이지만.”
“그렇군요.”
그 사이 그들은 밭의 서쪽 경계에 다다랐다. 서쪽은 밭둑의 형태로나마 이어지던 길이 간데없이 사라지고, 끝 모를 황야만이 펼쳐져있었다. 지평선 너머에는 이스갈 영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막이 남쪽 끝자락을 펼친 채 도사리고 있다. 저녁이 되어 땅이 식으면 그 사막에서 온 차가운 먼지바람이 황야를 휩쓸 것이다. 원망과 회한만 안은 채 걷기에는 너무나도 외로운 길이다. 브네로는 멈춰 섰다.
“그냥 가기는 좀 섭하지 않습니까?”
레르다이는 몇 걸음 더 걸어가서 멈춰선 후 그를 돌아보았다. 부에노소 인은 무슨 장난이라도 꾸미는 악동처럼 웃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레페리 씨는 관리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쳐도, 이대로 일을 일단락 짓기에는 섭섭하지 않습니까?”
레르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 전역에 유명한 레카 인의 붉은 눈에 이글거리는 빛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브네로는 히죽 웃고 왼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빈 벌판이 저편의 어두운 하늘에 닿아있었다.
“남쪽은 군인들밖에 없는 황야라더군요. 그 군인들 때문에 좀 위험하긴 합니다만 오늘 밤에는 그쪽으로 길을 잡아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되짚어갔다. 마지막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친 레르다이는 모자에 손을 댄 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작별을 고하는 인사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곧 다시 볼 것이 아니라면 헤어질 때 인사하지 않는 것은 어느 민족에게나 큰 실례다.
잠시 후 레르다이는 떠오르는 푸른 달을 왼편에 두고 급히 걸음을 돌렸다.
“어이, 빌리. 그만 일어나.”
기분 좋게 잠들었는데 훼방이라니. 스미스는 어깨를 흔드는 두터운 손을 팍 밀쳐냈다. 하지만 술이 과했던지, 그의 팔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도로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그 모양새를 보던 그렉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내가 데리구 가께. 냅두.”
“고주망태한테 고주망태를 맡기라고? 혀가 꼬여도 말은 바로 해야지.”
주점 주인은 혀를 차며 바로 돌아갔다. 어차피 좁은 마을 안이다. 취객한테 취객을 맡겨도 마을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큰일이 날리는 없다. 혹 주점 앞에서 둘 다 쓰러져 곯아떨어진다 해도 얼어 죽을 날씨도 아니다. 주점 주인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걸레질했다. 무언의 긍정으로 알아들은 그렉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주점 주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야, 데이브.”
“뭐야.”
“‥아니. 잘 머꼬 간다아.”
주점 주인은 잔뜩 찡그린 낯으로 잡상인이라도 몰아내는 것처럼 걸레를 든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그렉은 실실 웃으며 스미스를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본 그는 그새 모든 취객이 돌아가고 그들만 남은 걸 깨달았다. 로이와 알은 치사하게도 먼저 나간 무리와 섞여 가버린 모양이다.
낮의 재판에서 이긴 그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주점에 있는 술통을 모조리 비워버릴 기세로 잔을 권했고, 그걸 다 뿌리칠 순 없어 하나 둘 씩 받아마시던 그들은 결국 곤드레만드레 취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일당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준 주점 주인에게도 앞을 다퉈 잔을 권했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좀 시무룩해져 잔을 받지 않았다. 그렉은 일찌감치 그 이유를 알아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소란을 피우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결국 밤이 깊어 주민들 모두가 술에 절어 쓰러졌을 때 말짱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사람은 주점 주인 한 명 뿐이었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다. 덕분에 취객들이 마음 놓고 정신을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니까.
붉은 달의 초승달은 이미 졌고, 살이 많이 빠진 푸른 달은 천정을 지나쳐 서녘을 향해 느릿느릿 내려가고 있었다. 어지간히 늦은 시각이다.
“마눌쟁이한테 혼나요, 혼나‥. 까짓 여편네.”
그렉은 혼잣말을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곡조에 실어 띄엄띄엄 웅얼거렸다. 반쯤 잠이 든 것처럼 의식이 가물거린다. 하지만 의식이 없어도 발은 기억하는 길을 비척거리며 잘도 간다. 이처럼 떡이 되어버리는 날이 지나고 나면 신기하게도, 자신의 몸은 어느 틈에 침대에 돌아가 있는 것이다.
오늘따라 밤이 차갑다. 낮에 비가 와서 그런 것일까.
“‥이 자식아‥! 일어나, 이 머저리야!‥”
누군가가 멱살을 잡고 흔든다. 몸이 울렁거리니 토기가 치민다. 깜빡거리는 의식 속에서 그를 흔들어대는 자의 형상이 언뜻 보였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입에는 칼날처럼 번쩍거리는 송곳니가 비죽 튀어나와 있고 눈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시뻘겋다. 서울에서 온 높으신 나리? 그들이 죽인 레카 인? 아니면,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
“자‥잘못했‥.”
“야, 인마! 맞아야 정신 차리겠냐!”
“사사사, 살려주시오!”
그렉은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사람은 서울 나리도, 그 레카 인도, 사신도 아니었다. 스미스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는 그렉을 내던지듯 놓아주고 일어섰다. 그는 적잖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제기랄, 여기가 어디지? 니들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그렉은 겁에 질린 생쥐처럼 부지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발치에는 알이 곤죽이 되도록 취한 채 등을 구부리고 쿨쿨 자고 있었다. 그 옆에 힘없이 주저앉은 로이는 풀린 눈으로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렉은 고개를 들어 스미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언제 어디서 습격을 받더라도 즉시 받아칠 수 있도록 주먹을 쥐고 자세를 낮춘 채 주위를 바삐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그렉은 그들이 마을은 아닌 게 분명한 곳에 처박혀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는 어른 가슴높이의 흙담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만한 깊이의 흙구덩이에 그들이 빠져있었다. 덜컥 겁이 나면서 술이 깬 그렉은 벌떡 일어섰다. 말짱한 정신이었다면 이 구덩이가 사우스필드 남부 국경지대를 순찰하는 군인들이 밤에 야영하면서 만든 흔적이란 걸 알아챘겠지만, 일단 당황하자 그런 걸 가려 보는 눈이 사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 나 말야, 집에 가고 있었어. 이런 흙구덩이가 아니고‥. 그런데 마을 주변에 이런 데가 있던가?”
“허허벌판 한가운데야. 제기랄, 구덩이 속이 아니었으면 다 얼었겠군.”
스미스는 구덩이 밖으로 눈을 내밀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모래먼지가 실린 바람이 휭 하고 불어와 그의 덥수룩한 머리를 부풀렸다. 평소에는 습기가 없어 안개 같은 걸 구경할 수 없는 황야가 낮에 내린 비 때문에 옅은 안개에 잠식되어 있었다. 시야가 가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하늘은 열려있어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알 수 있었다.
“마을 남쪽 같다. 아직 달이 떠있으니까 어떻게든 돌아갈 수는 있을 거야. 그런데 어떤 개새끼가 우릴 여기다 던져둔 거지? 로이, 너 어째서 여기 온 건지 기억나는 거 없어?”
“모, 몰라. 나도 깨고 보니 여기였어.”
“네놈이 먼저 왔으니까 우리가 여기 굴러 떨어질 때 뭔가 본 게 있을 거 아냐! 그렉!"
“아니, 나도 방금 일어났는데‥.”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는 짓 하고는!”
스미스는 역정을 내고는 구덩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렉, 로이. 저 멍청한 알 녀석 좀 일으켜봐. 빨리 뜨자. 느낌이 안 좋아.”
그렉과 로이는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알을 구덩이 위로 밀어 올렸다. 알을 옮기면서 두 사람은 그가 토하기라도 한 건지 옷이 좀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구덩이 밖에서 알을 끌어낸 스미스는 다른 두 사람도 올라오도록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말했다.
“동작 그만. 두 손 뒤통수에 대고 일어서셔.”
구덩이 밑에 있던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췄다. 스미스는 순순히 손을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군화를 신은 것처럼 무거운 발소리들이 다가왔다. 간간이 쇠가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트라다스 인 남자들에게서 흔히 맡을 수 있는 알싸한 담배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거기 밑에 있는 놈들도 나와.”
그렉과 로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 앞에는 완전무장한 군인들 네 명이 옅은 안개를 두르고 칼을 빼든 채 서있었다. 서쪽으로 어지간히 기운 달이 잠깐 구름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달빛에 비친 군복은 이스갈 정규군의 것이었다. 그렉과 로이는 안심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어 안절부절 했다. 잎담배를 말아 문 군인이 가래침을 뱉고 말했다.
“먼저 나와 있던 놈, 뒤로 돌아. 니들 뭐야?”
“수, 수상한 사람은 아니구만요. 우린 저어기 윌더빌 사람들인데‥, 헤헤, 같은 이스갈 사람끼리 이러지 맙시다요. 예?”
그렉은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손을 비볐다. 군인은 침을 한 번 더 뱉고 칼을 쳐들었다.
“놀고 있네. 니들이 이스갈 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이런 한밤중에 사우스필드 한가운데에다 구덩이 파놓고 자는 것들을 보고 미트라다스의 첩자는 아니라 생각할 병신은, 여기엔 없어. 뒤통수에 양손 다 올려, 새꺄."
“우, 우린 허슬 소령님의 소작농이굽쇼! 리처드 허슬 소령님, 그분 소작인이라고요!”
“허슬 소령? 그딴 놈은 또 뭐야?”
군인은 무심하게 말했다. 일당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군인이 눈짓하자 다른 군인들이 다가와 그들의 뒤에서 칼로 쿡쿡 밀었다. 날이 없는 칼등으로 미는 거지만 당장이라도 등골에 칼이 쑤셔 박힐 것 같아 그들은 벌벌 떨었다. 상황 모르고 쿨쿨 자는 알을 걷어차면서 병사 한 명이 말했다.
“이놈은 완전 술에 절었지 말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얼어 뒈지든 말든 냅둬. 우선 이 수상한 놈들부터 처리하자고. 끌고 가.”
등에 칼이 쿡 들어오자 그렉과 로이는 덜덜 떨면서 비슬거리며 걸어갔다. 하지만 스미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가 이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더 세게 칼로 밀었지만 그는 꼼짝하지 않고 말했다.
“군인님, 잠깐만! 혹시 빈센트 파머라고, 아십니까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면서 군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는 놈이야?”
“물론이죠. 그놈이 국경의 군인님들한테 담배를 빌린다고 들었습죠. 군인님이 혹시 그 분인가 해서‥. 우린 그놈이랑 항상 같이 다니는 친구입니다. 지금이야 별별 핑계를 대가면서 우리한테는 안 주지만, 처음 멋모르고 빌리러 갔을 땐 우리도 준다고 다섯 상자나 달라면서 떼를 썼을걸요.”
그렉과 로이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고개를 휙 돌리며 멈춰 섰다. 군인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그 멍청이가 그런 소리를 했던 것도 같긴 해. 하지만 말이지, 항상 다섯이 몰려다닌댔어. 그런데 여기엔 그놈이 없잖아. 야아, 그러고 보니 네놈들 조사 엄청 했구나? 첩자 주제에 촌동네 사람들 신상까지 조사하고 다녔어?”
“잠깐만요, 말을 더 들어보‥!”
“끌고 갈 것 없다.”
일당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군인은 칼날을 둘러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생각해보니 칼이란 건 정기적으로 피를 먹여줘야 녹이 안 슬지. 오늘이 딱 좋은 것 같다.”
아차 싶었다. 담배는 미트라다스의 물건이고, 이스갈에서는 금지품이다. 이스갈레아 근처의 번화한 곳에서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전리품삼아 가져온 것을 아껴가며 피우고, 이런 남부의 외진 곳에서는 담배를 못 구하면 대마라도 공공연히 피우니 실제로 문제 삼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곳은 국경이 가깝다. 전쟁 통에 그것에 맛들인 군인들 중 특히 국경에서 근무하는 자들은 사람의 눈이 드문 것을 이용해 미트라다스의 잡상인으로부터 밀수해 피운다. 물론, 잡상인의 정체가 정말로 떠돌이 행상인지 행상을 가장한 첩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상부에 알려지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빈센트가 담배 태우는 취미를 친구들에게까지 퍼뜨릴 수 없는 이유였다. 담배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끊기 어렵다. 그런 수요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중간에서 담배를 ‘빌려주는’ 군인은 행상을 더 자주 만나 더 많이 사들여야 하고, 위험은 비례해서 증가한다. 그런 저런 사정으로, 담배 빌려주는 군인이 누구인지를 같은 말단군인이 아닌 외부인에게 널리 알려 좋을 일은 없다. 그 일을 꼬투리삼아 어떤 후환거리를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군인의 생각을 읽은 병사들은 사납게 웃으며 검을 비껴 잡았다.
“아, 좋슴다, 조장. 안 그래도 휴전한지 쫌 돼서 베는 감각이 무뎌진 참이죠.”
“게다가 군법에도 있지 말입니다. 스파이는 발견 즉시 참하라고. 와, 오늘 재수 좋은데.”
일당의 얼굴에 돌던 핏기가 쓱 빠져나갔다. 스미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우리를 보쇼! 우린 검은 머리라고! 남쪽 돼지들의 빨간 머리가 아니란 말요! 보면 모르겠수? 우린 이스갈 사람이오! 담배 이야기 같은 거야 우리 친구 일이기도 하니까 입 딱 다물 수 있다고!”
“시끄럽게 꽥꽥대는 게 꼭 남쪽 돼지들한테 혼을 판 이스갈 놈일세.”
군인은 씩 웃으며 칼을 치켜들었다. 몇 년 전까지 전장에서 사람의 피를 묻힌 칼에 귀기서린 빛이 번득였다. 넋이 빠진 그렉과 로이는 입을 헤 벌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오줌을 지린 건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스미스는 이를 악물고 군인을 노려보았다. 한 점 망설임이 없는 군인들의 눈에서 그는 정말로 자신들이 죽게 될 거란 걸 깨달았다.
칼이 사람의 목을 노리고 기울어진 순간.
“멈추시오!”
이스갈 인들은 한꺼번에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황야 저편에서 한 남자가 안개를 헤치고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는 군인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곳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모자를 벗었다.
달이 구름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도 붕대 아래 희끄무레하게 늘어진 백발과 냉정하게 이글거리는 붉은 눈을 감출 수는 없었다. 군인들은 헛바람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레카 인‥?!”
“멈추시오! 그 사람들을 해친다면, 나는 왜 레카의 마도사가 대륙 전역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지 보여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도움에 놀라 정신을 차린 스미스 일당은 레카 인의 얼굴을 보고 낯을 일그러뜨렸다. 레르다이였다. 그리 큰 체격도 아니고 기운이 세 보이지도 않았지만, 레카 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홀로 무리를 압도했다. 병사들은 칼끝을 부들부들 떨며 조장의 눈치를 살폈다. 군인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칼을 돌려 레카 인을 겨누었다. 칼을 쥔 건 그들이었다.
“저, 저 귀신부터 없앤다!”
병사들은 기괴한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레르다이는 모자를 던지고 냉정하게 도우포 자락을 휘둘렀다. 펑! 갑자기 흰 연기가 일어 주위를 휩쓸면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때맞춰 돌개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연기와 주위 안개의 흐름을 사정없이 소용돌이치게 했다. 병사들은 허공을 찌른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칼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경고했소이다.”
나직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가 갑작스레 군인의 등 뒤에서 들렸다. 레카 인은 마도를 써서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지 군인의 등 뒤에 나타나 그의 목에 단검을 들이댔다. 군인의 입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레르다이는 예리하게 갈린 단검을 군인의 목줄기에 지그시 누르고 다른 손으로 칼을 빼앗았다.
“물러가시오.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해주겠소.”
“네, 네놈도 한 패냐! 더러운 레카 놈이, 익‥!”
“물러가시오.”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하자, 말은 그 자체로 힘을 얻은 것처럼 군인의 마음을 몰아세웠다. 물러가야 한다. 여기에 더 있으면 위험하다. 싸움에 임하면 물러설 줄 모르는 이스갈 군인에게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이 자는 흉악한 마도사라는 뜻이다! 군인은 등 뒤의 레카 인을 볼 수 없으니 정면의 허공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짧은 시간동안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을 굴린 그는 결국 쳇 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물러난다. 칼 치워.”
병사들은 미미하게 손을 떨며 머뭇거리다가 칼을 치웠다. 그들은 스미스 일당으로부터 물러섰다. 적당히 거리가 떨어지자 레르다이는 단검을 쥔 손을 조금 느슨하게 한 후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자들에게 볼일이 있소. 그건 당신들이라 해도 방해할 수 없지. 이해했소?”
“이, 이해했다.”
“가시오. 당신들은 여느 때처럼 이 땅을 순찰했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단검이 목을 떠나자 가느다란 핏자국이 드러났다. 군인은 목에 난 상처를 깨닫지 못하고 살기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군인이 멀찍이 물러선 병사들과 합류하자 레르다이는 검을 던져줬다. 재빨리 검을 낚아챈 군인은 당장이라도 달려와 레카 인을 벨 듯이 쳐들었다. 레르다이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군인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검을 칼집에 꽂았다. 그의 눈은 이미 기세에서 눌린 것이 분명했지만 자존심이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듯했다. 군인은 거드름을 피우며(레르다이의 눈에는 벌벌 떠는 것처럼 보였다) 몸을 돌렸다.
“귀대한다!”
병사들은 억눌린 신음소리를 냈지만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레카 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대범하게 등을 돌려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병사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레르다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모자를 주워들었다. 탁탁 먼지를 터는 그를 보고 스미스 일당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레카 인을 제압할 만한 것이 없다. 아무도 없는 황야에서 형의 원수와 마주선 자가 어떤 마음을 품을지는 뻔하다. 그렉과 로이는 스미스의 등 뒤에 숨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쿨쿨 자는 알이 너무 부러웠다.
모자를 쓴 레르다이는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움찔했다. 레르다이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렉이 외쳤다.
“괴물!”
“나는 마도사가 아닙니다. 당신들 때문에 거짓말한 거니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쇼.”
레르다이는 도우포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연막탄을 손바닥에 쥐고 굴렸다. 레카 인이라는 것만으로 별의별 일을 다 당하게 되기 때문에, 먼 여행길에 나서는 자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종류의 물건을 지니고 다녔다. 물론 레르다이는 그런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고, 이스갈 인들이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봐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레르다이는 살인자들의 면면을 눈에 새기려는 듯 바라보았다. 이들 일당 중에서 법이 처벌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왜 구해준 거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군요. 솔직한 심정으론 당신들이 저들의 칼에 죽어버렸으면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운 놈이라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귀신 자식이‥!”
“재판관은 이미 판결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 당신들과 관련되고 싶지 않으니, 이쯤에서 서로 물러납시다. 내 평생에 두 번 다시 당신들을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레르다이는 약간 새된 소리로 말을 끝내고 몸을 돌렸다. 이스갈의 북서쪽, 레카 계곡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지나쳐 등을 보였다. 그의 형이 당한 것처럼, 혹은 그 자신이 당할 뻔 한 것처럼 그들이 또 뒤에서 습격해올까? 절로 목 뒤가 뻣뻣해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도 경계하고 있으니 같은 꼴을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에는 가만히 당해줄 생각도 없다. 게다가 상대는 셋, 그 혼자서도 선수만 잡는다면 무사히 도망치는 건 가능할 것이다.
등 뒤에서 흙을 차고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르다이는 단검자루를 쥐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그에게 달려들더니 발치에 고꾸라졌다.
“이봐, 잘못했어! 자네 형을 해쳐서 정말 미안하네. 미안하네!”
어느 방향으로 어떤 공격이 날아들까 궁리하며 단검을 꺼내려던 레르다이는 당황해 멈칫했다. 남자는 그의 도우포 자락을 붙잡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저편에서 입을 딱 벌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살인자 중 한 명이 얼른 달려왔다. 그도 먼저 엎드린 남자의 옆에 쓰러져 고개를 조아렸다.
“미안하오! 하, 하지만 우린 당신들이 무섭다고. 당신들은 있는 것만으로도 언제 어떤 재앙을 내릴지 모르니까‥. 그, 그, 그래도 당신이 우릴, 우릴 구해줬어. 입이 찢어져도 할 말이 없지, 없지만, 그래. 미안하오. 제발 잊어주시오. 잊고 떠나주시오!”
레르다이는 입을 다물었다. 살인자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과는 제발 여기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입 밖으로 아무렇게나 밀어낸 말일 것이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낯선 이들에게 증오 받고 살해당하기까지 하는 민족의 사람으로서, 그는 이들의 사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역시 진심으로 이들을 용서하려고 구해준 건 아니었다. 다른 레카 인이었다면 원수가 죽는 꼴을 어디 한번 보자며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나섰던 건 아직 젊은 사람이기에 상대가 누구든지 그의 눈앞에서 죽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두 민족 사이에서는 진정한 상호이해 같은 걸 바랄 수 없다. 그러기에는 오랜 시간 파내려온 골이 너무도 깊다.
그냥, 이걸로 됐다. 여기서 끝내면 되는 것이다.
“웃기지 마! 정신 차려. 이상하지 않아? 우리 말야, 술을 깨고 보니 여기였어. 우리가 여기까지 제 발로 온 게 아닌 건 분명해. 그럼 누가 옮겨놨다는 건데, 저 귀신이 일부러 군인들이 땅 판 데다 우릴 버려둔 거 아냐? 그래놓고 우리가 위험해지면 나서서 잘난 척을 하려던 심보겠지! 속지 마!”
레르다이는 고개를 들었다. 구덩이 옆에 선 스미스가 증오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무릎을 꿇은 자들을 온화하게 대하려 했던 레르다이는 다시 싸움을 준비하는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작작 하십시오. 내가 당신들 목숨을 구한 건 정말로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윌더빌을 떠난 참이었습니다. 왜 당신들이야말로 여기- 윌더빌에서 3마일은 떨어진 곳에 있는 겁니까? 나는 이보다 더 남쪽에서 노숙하다가 당신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겁니다.”
“믿을 수 있는 소리를 하시지. 네가 마도사든 아니든 레카 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그건 세상의 온갖 쓰레기 중에서도 가장 쓰레기 같은 족속이란 걸 뜻해. 그런 놈 하나가 어느 날 없어졌다고 세상에 뭐 나쁠 게 있어. 이스갈 사람이 네놈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인가?”
레르다이의 얼굴에 분노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뭐라 말했든 마도사임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던 그렉과 로이는 퍼렇게 질려 스미스를 돌아보았다. 스미스는 네깟 게 뭘 어쩔 수 있겠냐는 듯 팔짱을 단단히 끼고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군! 당신 대체 어떻게 그리도 잔인할 수가 있는 거요? 사과 까지는 바라지도 않겠어! 하지만, 사자(死者)를 그런 식으로 모욕할 수는 없어!”
“열 받냐? 뚫린 입이라고 잘도 우리말로 지껄이는데, 한번 욕도 해봐. 그리고 이왕이면 나한테 주먹 한방이라도 맞혀보라고.”
스미스는 셔츠 끈을 풀어헤치고 두 팔을 쫙 벌렸다.
“나 노 가드다. 배짱이 있으면 와서 쳐봐, 쳐봐.”
“네 이놈!”
레르다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처음 내지른 주먹은 너무 힘이 실려 크고 느리게 휘둘러졌다. 스미스는 냉정하게 주먹을 피한 후 적의 안면에 가벼운 잽을 날렸다. 온 힘을 다해 달려가다 카운터를 맞은 레르다이는 그리 힘을 들이지 않은 주먹임에도 큰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스미스는 어슬렁거리는 느낌으로 발을 바꾸며 상대를 노렸다. 레르다이가 간신히 머리를 흔들고 상체를 일으키자 그는 재빠르게 주먹을 뻗었다. 강력한 직격타에 이어 왼쪽에서, 아래에서, 다시 정면으로 바쁘게 주먹이 날아갔다. 한 방 한 방이 처음의 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타였다. 레르다이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꺾었다. 땅바닥에 후두둑 피가 쏟아졌다. 스미스는 손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후 킬킬거리며 발을 들었다. 퍽! 무서운 일격을 턱에 맞고 레르다이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땅바닥에 두 어깨를 붙이고 드러누운 상대를 내려다보며 스미스는 손마디를 꺾었다.
“네 형이랬지? 얻어터지면서 말야, 계집애처럼 계속 비명을 질러대더라고. 살려 달라 살려 달라, 아주 애걸복걸 하더구만. 나 같으면 존심이 있어서라도 그렇게 못 해. 어디, 동생 쪽은 두들겨 맞으면 무슨 소리를 내는지 한번 들어볼까?”
레르다이는 고개를 조금 돌려 피 섞인 침을 뱉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의 찢어진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니까, 쿨럭! 네가 죽인 건, 맞군?”
“서울에서 오신 정의로우신 재판관 나리께서 무죄를 선고하셨지. 나는 무죄다, 레카 놈.”
“살인자인 건 맞았군.”
퍽! 날카로운 주먹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러나 레르다이는 고개를 다시 돌리면서 상체를 튕겼다. 주먹질을 하려고 몸을 숙였던 스미스는 코에 한방 박치기를 먹고 말았다. 몇 걸음 물러나서 피를 닦으며 그는 본격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너, 실수했어.”
레르다이는 그 말을 비웃듯이 비틀거리면서 주먹을 쥐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들이 싸우는 걸 지켜보던 그렉과 로이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스미스가 허리띠 뒤로 손을 돌리더니 접칼을 꺼내들었다. 그는 배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측면에서 덮쳐들었다. 어깨를 들이받힌 스미스는 옆으로 쓰러졌다. 검은 그림자는 스미스와 뒤엉켜 한 바퀴 구른 후 재빨리 그의 등을 누르고 팔을 꺾어 올렸다. 어찌나 세게 꺾었는지 팔에 힘이 풀려 칼을 놓쳐버렸다. 스미스는 비명만은 지르지 않으려고 자제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버리고 괴상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자유로운 한 손은 아픔 때문에 속절없이 땅바닥을 긁었다.
“웃차! 자신이 땅바닥에 코를 박아봐야 그게 좋은 기분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고.”
스미스의 등을 찍어 누른 채 검은 옷의 남자가 유쾌하게 외쳤다. 그렉은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형씨는 또 누구쇼?”
남자는 온통 검은 차림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모자와 목도리 사이로 보일락 말락하는 눈으로는 이 어둠속에서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남자가 나타난 방향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선‥ 아니 디에고 씨. 정말 잽싼 분이네요?”
가드너는 입을 벌린 채 주위를 둘러본 후 뭔가를 두루뭉술하게 싼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의 옆에는 검은 옷의 남자가 지고 오다 내던진 다른 보따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가드너의 뒤에 서있던 제인은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시선을 둔 채 그 보따리를 똑바로 세웠다.
남자는 비틀어 쥔 스미스의 팔을 더욱 세게 잡았다. 스미스는 팔이 바위 밑에 깔린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피가 통하지 않자 손바닥이 금세 하얗게 변했다.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남자는 한가롭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목도리와 모자챙에 파묻혀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긋해 하는 건 분명했다.
“어디 보자. 당신, 이름이 아마 빌리 스미스지? 윌더빌에 사는 사람이고, 그 마을 불한당들의 두목이렷다.”
“네놈은 뭐냐!”
“지나가던 나그네. 먼 여행길에 잠시 이 황야로 발을 돌렸지. 강이 졸졸대고 바람이 웅웅거리는 걸 들어보자니 당신에 대해 그리 향기롭지만은 않은 소문이 들려오더라고. 사람을 죽였다면서?”
“무슨‥!”
“아니 아니, 뭐. 그건 재판으로 무죄 확정됐다는 건 나도 들었어. 그거 말고 또 있잖아. 왜, 자기들이 살려고 다른 사람들도 거짓말하면 안 되는 데서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말도 있고, 일당 하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고는 배포 유하게 축하주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더라고. 말이야, 사람의 가죽을 쓰고 그러면 쓰나.”
스미스는 이를 갈며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남자의 위치가 절대적으로 좋은 데다 솜씨가 좋아 쉽사리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남자는 그 상황을 즐기듯이 한가로이 제 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것이 참으로 마음에 걸리네그려. 게다가 반성은커녕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을 흠씬 두드려주다니, 그러면 안 되지. 이게 다 속세에 너무 찌들어 생긴 일일세. 나 디에고가 자랑스레 여기는 아렌체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 그 작자를 칼 한 자루 쥐어서 초원에 던져놓는다네. 자네도 대자연에 마음껏 안겨 마음의 때를 씻어낸다면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일 것이야.”
“지랄하네, 이거 놔! 젠장!”
“어헛, 거 요즘 유행하는 말 있지 않나. 맨손으로 멧사자를 때려잡고 쇠뿔을 철근같이 씹어 먹으며 달리는 들소 등에서 뛰어내리는 그대 빌리 스미스! 그런 것이 로망이라네. 가서 진정한 인생을 배우고 오시게.”
“이 미친놈이 진짜‥!”
스미스가 이를 악물고 몸을 뒤집으려던 순간 남자는 주머니에서 젖은 천을 꺼내 그의 코를 덮었다. 몇 번을 버둥거리던 스미스는 이내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남자는 천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일어섰다. 그는 레르다이에게 단검을 빌린 후 스미스의 팔뚝을 걷어 올렸다. 그가 뭘 하는지 넌지시 본 레르다이는 남자가 사람 팔목에 882. 8. 7. B.Y.B라고 새기자 의아해했다. 남자는 시선을 느끼자 간단히 설명했다.
“부에노소식 추방형을 집행하는 과정입니다. 제왕력 882년 8월, 에, 이스갈 식으로는 태양달 하월에 결정되었으며 벌은 7년에 이를 거라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7년 동안 아렌체의 어느 집도 이 남자를 들이지 않을 겁니다.”
남자는 일을 마친 후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 돌려주었다. 그때서야 그는 얼이 빠진 그렉과 로이를 막 생각난 것처럼 쳐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빌리의 절친한 친구가, 누구시더라?”
둘은 즉시 레르다이에게 달려가 넙죽 엎드렸다. 자신의 상처에서 난 피를 닦던 레르다이는 그들을 보고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당신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은 내버려 두셨으면 합니다. 일단 잘못을 인정하고 저에게 사과한 사람들입니다.”
둘은 고개를 조아린 채 눈만 들어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모자 위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후다닥 물러나, 여전히 쓰러져있는 알을 일으켰다. 정신을 잃은 스미스도 추스르려고 남자의 눈치를 살핀 그들은 남자가 한 발을 스미스의 등 위에 얹자 아무 것도 못 본 것처럼 허둥지둥 달아났다. 남자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달은 한두 시간 후에는 서쪽 지평선에 닿을 듯했다. 남자는 하품을 한 후 코를 훌쩍였다.
“그나저나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되지 않았나.”
“저기 있다! 탈옥범이 저기 있어!”
기가 막히게 때를 맞춰 대답이 들려왔다. 가드너와 제인은 움찔 놀라 주춤주춤 물러섰다. 남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 대의 쌍두마차가 덜컹거리며 달려왔다. 말이 좋아 마차이지, 말 두필을 앞에 맨 나무상자에 바퀴를 단 것 같은 것이었다.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쩝. 그래도 명색이 보안관이라 저보단 좋은 걸 타고 다닐 줄 알았지. 안 망가지게 잡는 게 최선이겠어.”
남자는 마차가 어느 정도 다가올 때까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있었다. 마차가 마부 뒤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보안관의 푸르죽죽한 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드는 마차의 정면으로 걸어갔다. 슬슬 속력을 줄일까 하던 마부는 갑작스런 상황에 깜짝 놀라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만 마차라 제동기도 없는 물건이다 보니 말이 멈춰야만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멈추기에는 너무 가깝다!
“비켜엇!”
마부는 히스테릭한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남자는 들은 체도 않고 계속 걸어왔다. 말이 남자를 짓밟기 직전, 보안관은 남자의 눈에 마치 한밤중에 본 맹수의 눈처럼 형형한 빛이 어려 있던 것 같다고 느꼈다.
말들은 비명을 지르듯 히힝거리며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바로 앞에서 멈춰선 남자를 깔아뭉개기 직전에 말들은 무릎을 꺾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굴레가 부러져나갈 듯이 요동친 데다 관성까지 더해지자 조악한 마차는 크게 들썩였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한 사람이 마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마차는 바퀴축이 부러지지 않은 게 용하리만치 우당탕거리며 기울어진 채 멈춰 섰다.
남자는 거품을 물고 가삐 숨을 내쉬는 말들 사이에서 씩 웃었다. 경악한 채 그를 쳐다보는 보안관 일행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말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이도 긁힌 것 외에는 다친 데가 없어 말들은 쉽게 일어섰다. 남자는 두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며 나직이 말했다.
“짐승은 사람보다 현명하지. 적어도 들이댈 것과 그러면 안 되는 것 정도는 구분하거든.”
“이 자식이! 네, 네놈은 사형수들을 탈옥시켰어! 국법에 의해 네놈도 사형이야! 뭣들 해! 저것들을 당장 체포하라!”
보안관의 부하들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아직도 다리를 후들거리는 그들을 보고 남자는 한바탕 크게 웃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린 후 손을 들어 제인과 가드너를 뒤로 물렸다. 보안관의 부하들은 칼을 빼들고 어딘가 약한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보안관의 부하는 모두 다섯 명. 한 명은 마차에서 떨어질 때 다리를 다친 건지 넘어진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제일 먼저 달려온 자의 칼을 흘려보냄과 동시에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남자가 철퍽 엎어지자 그는 잘못 밟은 것처럼 부하의 오른손목을 콱 밟았다.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졌는데, 손목뼈가 어긋나거나 한 모양이었다. 그가 놓친 칼을 멋지게 발로 튕겨 올려 잡은 남자는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본 후 사벨 특유의 가벼운 맛이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찼다. 그 사이 찔러온 칼 두 자루를 일검으로 막아 세운 그는 칼을 크게 휘둘러 적의 검을 비끄러뜨리고 그대로 폼멜을 당겨 오른쪽에 있던 자의 콧등에 때려 박았다. 한 명이 쓰러지자 다른 한 명이 노호성을 지르며 검을 바로잡고 베어 들어왔다. 동시에 뒤에서 보안관과 다른 부하가 검을 찔렀다. 구경하던 자들이 비명을 지른 순간 남자는 몸을 낮추고 뒷발을 축으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남자의 목을 노리고 베었던 첫 번째 검은 얼결에 뒤에서 남자를 찌르던 보안관의 검을 걷어냈고, 마지막 부하의 검은 첫 번째 검을 든 부하를 찔러버렸다. 동료에게 어깨를 찔린 부하는 엇, 엇 하는 소리만 내며 상처를 잡고 주저앉았다. 남자는 동료를 찌른 것 때문에 당황한 부하를 사정없이 두어 번 칼등으로 후려갈겨 쓰러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보안관을 바라보았다. 보안관은 검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걸어오는 남자를 향해 초점 없이 흔들리는 칼을 쑥 내밀고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비웃음을 담아 씩 웃었다. 그는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왁!”
“우와악!”
보안관은 혼란에 빠져 정면으로 돌격했다. 훗날 레르다이가 회상한 바에 의하면, 그는 살집 좋은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두 손으로 움켜잡은 칼은 상체와 함께 앞으로 쭉 내민 채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기사의 용맹을 가지고 뒤뚱거리며 달려갔다. 남자는 보안관을 멀뚱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번개같이 칼을 휘둘렀다. 챙강! 칼이 하늘높이 튕겨 올라갔다. 남자는 칼을 놓치면서 만세라도 부르는 폼으로 두 팔을 든 보안관의 품에 파고들었다. 보안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히에에에에엑!”
살려달라고 애걸하지 않은 걸 그나마 칭찬해야 할까. 남자는 속으로 쓰게 웃으며 칼끝을 재빠르게 놀렸다. 검광이 몇 번 번쩍이자 남자는 칼을 거두고 정중히 뒤로 물러섰다. 그의 뒤로 튕겨나간 검이 떨어져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숙녀 분은 눈을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엉뚱한 말에 사람들은 보안관을 쳐다보았다. 때맞춰 바람이 한차례 불어 닥치자 보안관의 옷이 방금 당한 테러가 무엇인지를 증명했다. 뚱뚱한 편인 보안관이 바지가 흘러내리고 저고리와 셔츠 앞섶이 풀어헤쳐져 바람에 날리는 꼬락서니를 한 채 멍하니 서있는 것은 남자들이 보기에도 그리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제인은 저도 모르게 낯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괴상한 침묵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 보안관은 게거품을 물며 바지를 추어올렸다.
“네놈, 네놈! 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부에노소 놈!”
“어차피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마실 것처럼 말하지 마라, 당신.”
남자는 정중하게 대꾸해준 후 마차로 달려갔다. 그의 눈빛을 본 가드너는 여태껏 멍하니 있던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은 후 한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한손에는 쓰러진 스미스를 질질 끌며 달렸다. 제인도 그를 거들어 스미스와 보따리를 마차에 싣는 걸 도왔다. 그들도 마차에 태운 후 남자는 칼을 가드너에게 던져주고 마부석에 몸을 날렸다. 보안관이 바지를 추어올리는 짧은 순간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남자는 망연자실한 채 앉아있거나 기절한 보안관의 부하들에게 한눈을 찡긋해 보이고 고삐를 갈겼다. 말들은 투레질하고 달려 나갔다. 마차가 레르다이를 지나칠 때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레르다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마부석 위로 끌어올려졌다.
마차는 덜컹거리면서도 잘도 달려갔다. 경쾌하게 돌과 흙을 튀기는 소리에 섞여 보안관이 울분에 차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빌어먹을 부에노소 노오오오옴!”
“하핫, 결국 저 아저씨는 내 이름을 모른 채 끝나는군! 앞으로 혹시라도 아저씨가 만나게 될 다른 동족들에게는 좀 미안한걸. 이랴!”
남자는 유쾌하게 웃으며 고삐를 바쁘게 놀렸다. 마차는 신나게 동쪽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린 후 남자는 밤샘을 한 말들을 위해 고삐를 느슨하게 쥐었다. 말들은 편자를 털레털레 흔들며 달렸다.
달은 서편 지평선에 몸통의 반을 걸치고 있었다. 이제는 달빛과는 상관없이 공기의 색깔 자체가 푸르스름해졌다. 이제 한두 시간 후면 해가 뜰 것이다.
레르다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디에고라고? 브네로 씨 아닙니까?”
“아니아니, 헤어질 때까진 디에고라고 불러주십쇼.”
디에고? 문득 레르다이는 어릴 적에 재미나게 들었던 활극담 하나를 떠올렸다. 미트라다스가 지금보다 강성해 대륙을 지배하던 시절 그들에게 지배당하던 부에노소 인들에게는 한 사람의 영웅이 있었다. 그는 정복자의 전횡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나타나 그를 구하고 멋진 칼솜씨로 병사들을 제압한 채 유유히 도망쳤다. 그 영웅에게는 다른 별칭이 있었는데, 본명은 디에고 어쩌고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이 부에노소 인다운 짓이다, 라며 피식 웃던 레르다이는 주먹질을 당할 때 다친 입안이 아파 우물거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더러 그냥 가면 섭하다고 남쪽으로 가라 하시더니.”
“아하, 뭐랄까. 환송회 비슷한 거라고 해두죠.”
남자는 새벽의 추위에 어깨를 떨며 목도리를 다시 묶었다. 잠시 드러난 얼굴은 레르다이가 예상한 대로,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 레르다이는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조금쯤 이야기를 흘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덕분에 저는 만신창이로 얻어맞았습니다.”
“사실 언제라도 한 대쯤은 정통으로 때려주고 싶지 않았습니까?”
남자는 등 뒤를 턱짓했다. 밧줄에 묶인 스미스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던 레르다이는 대꾸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발, 아니 디에고 씨. 어떻게 그 사람들을 거기까지 옮겨놓은 겁니까?”
“뭐 별 건 아니고. 야밤에 좀 달렸지요. 하하.”
“사람을 둘씩 지고 3마일을 두 번 왕복해요? 가능합니까? 물론 부에노소 인들이 발이 빠른 건 유명하지만‥.”
“그러니까 기운 좋은 가드너 씨의 도움을 좀 받았죠. 그동안 허슬 양은 유치장에서 잠깐 기다렸고요. 의외더군요. 전 여태 이스갈 사람은 달음박질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저 친구는 그럭저럭 저를 따라 달리더군요. 선입견은 빗나간다는 좋은 교훈을 얻었지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던 가드너는 간밤에 진행된 일을 떠올렸다. 그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조용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을 감시하던 보안관의 부하는 저녁 찬거리가 형편없다느니 투덜거리며 연신 하품을 했다.
일은 푸른 달이 천정에 닿을 무렵 일어났다. 유치장 안의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디를 통해 들어온 건지 불쑥 나타난 검은 남자는 보안관의 부하들을 때려 기절시켰다. 그를 보고 큰 소리로 이변을 알리려던 빈센트는 철창 사이로 정확하게 경봉을 던져 기절시킨 후, 쓰러진 보안관의 부하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의자에 채찍으로 결박 지었다. 그는 일련의 상황을 보고 입을 벌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가드너와 제인을 풀어준 후,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했다. 그에 따라 제인은 빈센트가 깨어날 때마다 기절시키기 위해 경봉을 쥔 채 대기했고, 가드너는 남자를 따라 나와 주점 근처로 숨어들었다. 가드너는 스미스 일당이 항상 자기들끼리만 다니며 주점에 최후까지 남는 손님인 걸 알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네 명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까지 각오했던 두 사람은 술이 거나해진 로이가 비슬거리는 알을 끌고 나오자 즐거운 기분으로 달려들었다. 남자는 재미난 걸 내놓았다. 신 술과 비슷한 냄새가 나지만 그리 맛을 보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 액체를 묻힌 천이었다. 가드너가 실수하는 바람에 알에게는 그 액체를 아예 끼얹었더니, 남자는 이 밤이 다 지나도록 알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킬킬 웃었다.
두 사람을 확실히 기절시킨 후 그들은 각각 한명씩 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성인 남자를 지고 3마일 가까이 되는 길을 달리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검은 남자는 겅중겅중 잘도 달려, 쫓아가기 위해 죽을상을 써야 했다. 둘을 먼저 구덩이에 밀어 넣은 후 두 사람은 재빨리 마을로 돌아가 스미스와 그렉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비슷한 일을 반복한 후 그들은 소령의 집 뒤로 돌아갔다. 남자는 훌훌 담을 넘어 이런저런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꺼내온 후 두 보따리로 나눠 묶었다. 보따리를 지고 내려온 그들은 제인을 데리고 나왔다. 그동안 빈센트는 한 번도 깨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기절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가 적당한 때에 정신을 차리고 소란을 피워대길 바라며 그들은 제인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네 사람을 버린 흙구덩이 앞에서 그들은 이런저런 활극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럼 제가 윌더빌을 떠나자마자 저 사람들을 탈옥시킨 겁니까? 빈센트라는 자도 보안관 사무실의 유치장에 갇혔으니, 그가 봤다면 보안관한테 탈옥을 알렸을 텐데요.”
“그런 건 아니지만 뭐, 덕분에 보안관이 마차까지 보내줬지 않습니까? 하하, 간밤의 활극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레페리 씨한테 안 들키려면 저는 슬슬 윌더빌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세한 건 가면서 저 선남선녀들에게 물어보세요.”
레르다이는 마부석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간밤의 일로 지친 제인은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떨군 가드너에게 기대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미소를 지은 레르다이는 새삼 졸음을 느끼며 모래알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따끔거리는 눈을 비볐다.
어느덧 마차는 강에 닿았다. 윌더빌 근처의 실개천 같은 강이 아니었다. 근처의 지류가 하나 둘 모여들어 거대한 레드리버의 서쪽 갈래로 갈라지는 흐름에 합류해가는, 비로소 강다운 모양새를 갖춘 강이었다. 그 도도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살짝 걸쳐진 배다리 위로 마차가 올라섰다. 다리가 흔들거리자 말들이 당황했지만, 레르다이는 솜씨 좋게 동물들을 안심시켰다. 거기서 남자는 내렸다. 말이 놀랄 때 깬 가드너와 제인은 급히 마차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남자는 멋쩍은 듯 히죽 웃었다. 고삐를 넘겨받은 레르다이는 그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저는 사실 이번이 처음으로 계곡 밖에 나온 여행이었습니다. 당신 덕에 돌아가는 길이 좀 길어졌군요.”
“어떻게 가든 언젠가는 레카 계곡에 닿습니다. 견문을 쌓는 셈 치고 한번 대륙 동쪽도 유람해 보십시오. 아렌체는 괜찮은 곳입니다.”
“슬슬 발더스 씨의 속내가 읽힙니다. 뱃속에 능구렁이를 몇 마리나 감추셨습니까?”
브네로 얀테 발더스는 레카 식 농담을 이해하고 히죽 웃기만 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레르다이에게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쫓기는 몸이 되어 오랜 세월동안, 혹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안전한 아렌체 어딘가에 터전을 마련하도록 도와주고, 스미스가 브네로의 판결대로 대초원에 홀로 남겨지도록 아렌체의 깊은 곳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 스미스가 재빨리 돌아갈 길을 찾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가드너와 제인이 어디에 정착했는지를 스미스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브네로는 원한을 가진 자의 손에 원수를 붙인 것이다. 사람이 없는 아렌체 한가운데에서 그가 스미스를 직접 살해하든, 꽁꽁 묶어 멧사자 앞에 던지든, 혹은 브네로의 말을 지켜 정중히 놓아주든 그것은 레르다이의 마음에 달린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든 바로 여기서 살해할 것이 아니라면 레르다이는 꽤 오랜 시간동안 스미스와 동행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 후에도 그를 죽일 마음이 들 것인가, 레르다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네로는 배다리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차에 탄 사람들은 기절한 자를 제외하고 모두 일어나 그를 돌아보았다. 브네로는 멋들어지게 모자를 벗어 몸 왼편으로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부에노소 식 작별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스갈 식으로, 혹은 레카 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들은 그 부에노소 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을 대신해 브네로는 입을 열었다.
“모두, 즐거운 여행되시길.”
허슬 가의 저택은 이른 아침부터 조용한 가운데 부산했다. 가주의 살인범에 대한 재판도 끝나서 전통에 따라 장례를 치르려는 것이었다. 허슬 소령의 관은 그의 본가가 있는 이스갈레아로 보내져 군인묘지에 묻힐 예정이었다. 아내의 집안 쪽으로 가문의 묘지가 따로 있기는 했지만, 부인은 고인이 그 묘지에 묻히는 걸 거부했다.
이날 아침에는 집안의 딸인 제인 허슬이 국법에 의해 처형당하도록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조화인지 간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침입해 사형수들을 도망치게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로 인해 조용해야 하는 상가는 조용히 수군거리는 수다가 남이 보지 않는 구석에서 열심히 오갔다.
마침내 신부가 장례예식을 마치자 운구마차를 내보내기 위해 저택의 커다란 정문이 열렸다. 상복이 없어 평소처럼 검은색의 법무부 관리 제복을 입은 레페리는 형식상 예를 지켜 주인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려고 모여든 노예들을 헤치고 누군가가 들어오려 애쓰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여기가 상가라는 것도 잊고 버럭 소리 질렀다.
“이 정신 나간 부에노소 놈! 어디 있나!”
“아침부터 무슨 일이오, 보안관. 정숙하시오. 이 집은 지금 중요한 일을 치르고 있단 말이오.”
레페리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최근 윌더빌 근처에 나타난 부에노소 인은 그가 아는 한 단 한 명뿐이다. 짐작 가는 바가 있던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근엄한 얼굴로 보안관을 바라보았다. 보안관은 상가라는 걸 잊을 만큼 흥분한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의 난입으로 정문이 막히자 마차를 모는 일꾼들이 멈칫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보안관은 열이 올라 말했다.
“사형수가 둘이나 내빼고 마을 사람 하나가 행방불명된 것보다 중요한 일이오?”
“어험, 이건 장례식올시다.”
“아, 예. 중요한 일이군요! 어쨌든 부에노소 놈을 내놓으십시오. 그자가 간밤에 사형수를 빼내고 스미스를 납치해갔으며 본인의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보, 본인을 모욕했습니다. 엄연히 사형감입니다!”
“브네로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하지만 브네로 군이라면 어제 푹 자고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장례식을 돕고 있었소만.”
“뭐요?”
과연 그 말 그대로였다. 신부가 관 앞에서 사자의 여행을 축복하는 기도를 올리는 동안 그 얄미운 부에노소 인은 깨끗한 차림으로 신부의 뒤에 서서 향불을 들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 있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보안관은 복장이 뒤집혔다.
“큭! 그럼 어제 저녁에 저자가 어디 나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잘 모르는 일이오. 브네로 군, 자네 어제 어디 나갔었나?”
“잠깐 나가기야 했죠. 레르다이 씨가 돌아가길래 배웅하려고 초저녁에 잠깐 마을 밖에 나간 거 말씀입니까?”
나는 거짓말은 안 했어. 브네로는 속으로 킬킬 웃으면서도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보안관은 새로 갈아입은 셔츠를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고 벌벌 떨었다.
“그, 그럼 이 집에서 뭐 없어진 건 없소? 식량이랄지, 옷가지랄지 하는 것 말입니다. 놈들은 보따리를 두 짐이나 들고 있었으니 분명 없어진 게 눈에 뛸 겁니다.”
“여보게. 간밤에 뭐 없어진 것 있는가?”
레페리는 집안일을 돕는 노예를 돌아보았다. 노예는 기겁하며 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럴 리가요. 집안의 물품은 소인들이 항상 꼼꼼히 조사합니다. 뭐가 없어지기라도 하면 제일 먼저 혼나는 건 쇤네들이니까요. 틀림없이 어제 자기 전에 세어본 그대로입니다요, 예.”
보안관은 거품을 물고 허공중에 손을 휘휘 저었다. 뭔가를 몸짓으로라도 설명하고 싶은데 뜻하는 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흥분한 모양이었다. 레페리는 진심으로 보안관의 건강이 걱정스러워졌다.
“보안관, 지나친 흥분은 병을 부릅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오신 김에 고인을 떠나보내는 행렬에 참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버버 하고 입을 뻐끔거리던 보안관은 가엾게도 풀이 죽어버렸다. 레페리가 눈짓하자 허슬 가의 노예가 보안관을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브네로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보안관 님, 오늘은 제 칼을 돌려주시겠죠?”
그 말에 갑자기 없던 기운이 솟은 건지 보안관은 발끈했다.
“사형수들을 처형하면 준댔어! 처형을 못 했으니 돌려주지 못해!”
레페리는 히죽 웃는 브네로에게 짐짓 꾸중하는 눈길을 보낸 후 헛기침을 했다.
“어흠. 보안관. 내 끼어들기는 민망하지만 한 마디 하자면, 이미 재판은 끝났소. 그 칼은 증거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는 뜻이오. 그만 돌려주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 더 이상 장례식을 방해하지 말아주었으면 하오. 나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라 생각되오만.”
주위로부터 보안관을 향해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완전히 풀이 죽어버린 보안관은 노예의 위로를 들으며 본채 어딘가로 향했다. 막간의 소동이 가라앉자 운구마차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언덕을 내려갔다.
브네로는 향불을 노예에게 넘겨주고 앞서 내려가 보안관 사무실로 달려갔다. 보안관의 부하들은 빈센트를 호송하려고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간밤의 일로 역시 시무룩해진 그들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에페이도를 돌려주었다. 간만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자 잃었던 친구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는 보안관의 불쌍한 부하들이나 인생에 암운이 드리운 빈센트를 놀려먹는 짓 따위는 하지 않고 얼른 나가 운구마차를 전송하는 행렬에 어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동구 밖까지만 운구마차를 따라왔다. 그들로서는 간만에 보는 구경거리니까 끼어든 것일 뿐, 지주의 죽음에 대해 심심한 애도를 표하는 뜻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보다 화제가 되는 것은 간밤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형수들과 스미스, 갑자기 넋이 나가버린 그렉과 로이,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어나 당황해하는 알에 대한 것이었다. 구구한 억측들이 난무했지만 진실에 가까운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들 자신도 진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간밤의 사건은 이로써 마을 사람들이 한 백년은 두고두고 회자할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차는 강을 따라 북쪽으로 길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마차에 동행하는 사람은 허슬 가의 일꾼과 노예 세 명과 허슬 부인, 그리고 레페리 일행뿐이었다. 브네로는 생전에 그렇게도 자신을 치장하려 애쓰던 남자가 비명횡사한 후 초라한 끝을 맞는 걸 조금은 측은하다는 기분으로 바라보며 에페이도의 칼집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옆으로 레페리가 다가왔다. 그는 주위에 눈길을 주며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말이지, 내 어제 자정 무렵에 하도 잠이 안 와서 잠깐 창을 열어놓고 있었는데, 커다란 박쥐가 한 마리 담을 타넘더라고. 아주 커다란 박쥐였어. 거의 사람만했지.”
“헤에, 그래요?”
브네로는 속으로는 찔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레페리는 쳇 하고 혀를 찼다.
“그래서, 자네 식으로 볼 때는 해피엔딩인가?”
“뭐 그럭저럭요. 제가 끝을 알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유감이지만.”
“흥. 내 식으로 볼 때는 배드엔딩이야. 엄연히 불법행위다. 사정이야 어떻든 사형수들을 탈옥시킨 데다 양민을 납치하다니, 그 박쥐 놈은 어지간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야. 물론 나는 그 박쥐가 누군지 몰라서 잡아가두지 못하니까 더욱 서글프군. 에잇.”
레페리는 애꿎은 잔돌을 걷어찼다. 돌은 마차의 뒷바퀴에 맞아 튕겨나갔다. 이스갈 왕국 법무부 파견 재판관은 정면의 허공을 노려본 채 나직이 말했다.
“이번에는 박쥐가 한 짓을 그저 추측할 따름이지만, 다음번은 아니야. 혹시라도 그 박쥐 놈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면 나는 지체 없이 달려가서 놈의 모가지를 잡아다 법정에 올려놓겠어. 자기가 꼴리는 대로 법질서를 흩어놓는 놈을,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나는 가만 두고 보지 않아. 그렇고 말고.”
브네로는 딱히 대꾸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해가 높아져 정오가 되었을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사람들과 간단한 점심을 나눠먹은 후 브네로는 털고 일어났다.
“슬슬 저는 제 갈길 가야겠습니다. 그동안 은혜를 입었습니다, 부인. 댁에 닥친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허슬 부인은 말없이 브네로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브네로는 그때서야 눈치 챘다.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허슬 부인은 그가 해치운 일들을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아차리고 있었고, 가장 크게 공감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내색하지 않고 그와 레르다이같은 이방인들이 머물게 해준 것에 다시금 감사하며 브네로는 고개를 숙였다.
레페리는 뭐가 불만인지 잔뜩 찌푸린 낯으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브네로는 코웃음 쳤다.
“헹, 세상의 정의는 내가 지키겠다는 얼굴이군요. 그렇게 정의를 지키고 싶거들랑 도망간 사형수 추격을 지휘하셔야죠.”
“내 관할 아냐. 일이 터진 건 유치장이고, 거기 관할은 보안관 놈이야. 게다가 행불자도 보안관 놈이 관할하는 마을 사람이지. 못 찾으면 뭐, 그놈 혼자 뒤집어쓰는 거다.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싫은 놈을 위해 초과근무를 하냐?”
그놈의 관료근성, 하고 질린 듯이 중얼거리면서도 브네로는 히죽 웃었다. 그는 가볍게 뒷걸음질 치며 손을 들었다.
“그럼 저 갑니다. 심심하면 또 아렌체에 놀러 와요.”
“참견 쟁이는 질색이야. 가다가 넘어지라지.”
브네로는 킬킬 웃으며 돌아섰다. 레페리는 그의 등을 향해 모자를 벗고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브네로는 어깨에 멘 짐을 추어올리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짧았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동편으로 흘러갈 때 그는 멈춰 섰다. 주위는 말라빠진 잡초 한 포기 보기 어려운 황야였다. 강을 따라 북진할 운구마차와는 거리가 멀어진지 한참이다. 그는 방향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키는 대로 걸어온 것이었다.
“자, 이제 어쩐다.”
슬슬 출출해지고 있었다. 일단 저녁을 때워볼까 하고 가방을 풀던 그는 문득 손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흐아-. 디에고란 놈은 어지간히 마음씨가 좋은 남자인가 봐. 자신이 여행할 때 쓰려고 챙겨둔 보급품을 싸그리 넘겨주다니, 바보짓도 그 정도면 상을 줘야지.”
하지만, 그 보급품이 있다면 야생에서 사는 지혜가 부족하더라도 네 사람이 한동안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 걱정은 없을 것이다. 브네로는 씩 웃으며 망토 밑에 손을 넣고 흔들흔들 걷기 시작했다.
언제는 제대로 보급을 받으며 여행했던가. 그는 다른 일족을 찾아가려면 최소 사나흘은 걸어야 하는 대초원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여느 부에노소 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빈주먹으로 북녘의 고원에 떨어진다 해도 그럭저럭 목숨을 유지한 채 살아나올 자신이 있었다. 빈손으로 떠난 여행이면 쌓인 것이 많아 보이는 곳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사람이 반겨주지 않는다면 땅과 하늘이 반겨줄 것이다.
브네로는 내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길도 방향도 없는 황야를 걸으면서, 어느새 그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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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노기 조금 덜하고 처음 올릴 때 제대로 올렸으면 오죽 좋았겠습니까마는 게임이 환장하게 재미있어서-_-; 대충대충 끄적이는 우를 범하고 나중에서야 슬쩍 손을 본 수정본입니다. 수정 안 한 버전은 본가에 있는데, 이야기의 개연성 증진 차원에서 수정을 가한 거라 양자간에 스토리상 차이점은 그다지 없습니다.
4.
비라도 올 것처럼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적어도 뙤약볕에 시달릴 일은 없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날씨에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다. 그날 할 일을 서둘러 정리한 후 사람들은 마을 중앙의 공터에 몰려들었다.
보안관 사무실에서 끌어낸 책상이 수도가 있는 방향인 공터 북쪽에 놓였다. 책상에서 다섯 발짝쯤 앞에는 다섯 개의 의자가 놓였다. 그 뒤로 수사관들이 말뚝을 박아 금줄을 쳤다. 주민들은 금줄 남쪽에 웅성거리며 모여섰다.
브네로는 하늘만큼 찌푸린 낯으로 챙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점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레페리는 모여드는 주민들을 둘러보며 그의 옆으로 갔다.
“재판 처음 보나?”
“흥. 보나마나 이스갈의 위대한 법대로 진행될 테죠. 저 같은 이방인이 알아 뭣하겠습니까?”
“궁금해 죽겠으니까 예까지 내려온 주제 꽁해있는 척 하지 마. 간단히 강의하지. 재판관이 있고, 재판관이 기소한 피고인이 있다. 이 동네에선 변호사 같은 거 못 보니 그건 없겠군. 그러니까 재판관과 피고인이 맞붙는다.”
그 정도는 브네로도 이미 아는 것이었다. 왠지 애 취급을 당한 기분이 들어 언짢아진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기를 맡은 수사관이 간이책상을 가져다 펼쳐놓았다. 브네로는 의자의 수를 세어보았다. 피고인들이 앉을 자리 다섯 개에 서기가 앉을 자리 하나, 그리고 재판관이 앉을 자리가 하나였다. 수사관들은 더 이상 기구를 들이지 않고 금줄 밖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섰다. 그들 바로 옆에 머리에 붕대를 감은 레르다이가 서있었다. 주민들은 그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지만 수사관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감히 다가가지는 못했다.
“계속 궁금했던 건데요, 사건을 조사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피고인이란 자기가 찍어놓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놈이잖아요. 그런데 조사자가 재판관까지 해버리면 당연히 피고인이 질 거 아녜요?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이랑 재판하는 사람은 분리되어야 하지 않나요?”
레페리는 기특하다는 듯 씩 웃었다.
“호오, 잘 짚었어. 보통의 경우에는 기소권자와 재판관의 분리 같은 거 생각도 못 하는데 말이지. 알다시피 이스갈에서 재판하는 사람은 보안관과 행정관과 법무부 파견 재판관이다. 앞의 두 관리는 전문적으로 법률을 공부한 작자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법전이랑 판례집 봐가며 판결은 할 수 있지. 맨 마지막 관리에 변호사를 더한 게 소위 법률가라는 집단이네. 이들만 전문적으로 키우는 기관은 대학뿐이야. 그런데 행정관리만으로도 어느 정도 재판이 커버가 되니 그 대학조차도 전문적으로 법학만 하는 관리는 잘 안 키워. 요컨대 사람들이 분리할 필요도 못 느끼고, 인력 부족이라 결국 재판관이 다 해야 해. 물론 재판관 멋대로 날뛰는 상황을 막으려는 장치가 있어. 그게 공동체 투표라고, 피고인이 속한 마을의 성인남자 중 제비로 뽑힌 자들이 재판관의 결정에 찬성이냐 반대냐 정하는 주민투표다. 만장일치로 찬성 나오면 재판관은 그냥 죄목이랑 형 때리면 되는 거고, 반대가 한 표라도 있으면 만장일치 나올 때까지 다시 투표한다. 이렇게 세 번 해도 안 되면 그 중 반대가 제일 적었던 걸로 가는 거야. 만장일치로 반대 나오면? 그 죄목은 선언할 수 없는 거지.”
“그냥 법률가 수를 대폭 늘려 조사 전담자 따로 두고 재판관 따로 두는 게 더 낫겠어요. 그 주민 투표는 더더욱 못 미더워 보여요. 스미스의 유죄가 확정되어도 그 투표로 반대 한 번만 나와 버리면 곤란하잖아요. 하긴 처음부터 사형 때려버리고 다음에 무기징역, 다음에 징역 몇 십 년 하는 식으로 투표기회 세 번을 날려먹으면 되긴 하겠지만 이래서는 재판관 견제가 안 되잖아요. 왜 이런 제도가 유지되는 거예요?”
“말했잖아, 인식과 인력의 부족이라고. 게다가 높으신 분들은 딱딱거리는 법률가 따위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으신다. 이 세상에서 법이란 권력의 시녀다. 초 법규적이며 신성불가침의 존재께서 이미 만물 위에 군림하시니, 법이란 첫 번째로 그분의 규준을 문자로 적어 나라의 틀을 규정하고, 두 번째로 그분의 눈길이 닿지 않는 밑바닥 인생들에게 그분의 어명을 대신해 정의를 베풀어주려고 있는 것이지. 그게 잘 굴러가는지 구멍이 많아서 태풍이 치는지는 높은 분들 관심이 아니라네. 이스갈 독립 이래 300년, 긴 전통이로군.”
레페리는 침이라도 뱉고 싶다는 표정으로 모여든 주민들을 노려보았다. 브네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민족은 법의 민족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는 법은 그런 용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사람도 바뀌니 법 또한 그에 맞춰 바뀌어야 함이 마땅하다. 문제점이 많아 보이는 법제가 300년이 넘도록 그대로 준수된다는 것이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젠장, 난 이스갈 인이 아니에요. 당신들이 당신들 법을 대체 어떻게 여기고 다루는 건지 갈수록 이해하기 어렵군요. 법이 이상하면 바꾸면 되잖아요? 삐딱한 아저씨.”
“그 입법권을 쥔 높으신 어르신들한테 그럴 생각이 없대도. 재판관에게는 입법권이 없어. 게다가 나는 행정이 본업이고 재판이 잔업인 ‘일반적인’ 재판관이 아니라서 더욱 분통터져. 그나저나 시작해야겠군.”
보안관의 부하들이 보안관 사무실에서부터 레페리가 기소한 피고인들을 데려왔다. 그들의 얼굴을 본 주민들은 웅성거렸다. 수사관들이 정숙하라고 호통을 치자 주민들은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피고인들이 피고인석으로 배정된 의자 앞에 멈춰선 후 레페리는 재판관의 자리로 정해진 책상에 다가갔다. 서기를 맡은 수사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사우스필드 소재 윌더빌 마을에서 일어난 레카 인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참되고 유일한 신 가드와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이스갈의 국왕 윌리엄 3세께 예를 올리겠습니다.”
재판관 레페리는 신의 자비와 왕의 정의가 악인에게는 벌을, 의인에게는 의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의 짧은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나자 주민들은 신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른 후 왕이 있는 북녘을 향해 세 번 절했다. 예를 끝낸 후 레페리는 자리에 앉았다. 서기관이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사건의 용의자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호명하겠습니다. 호명된 사람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빈센트 파머. 로이 에드워즈. 알 노먼. 그렉 그레스. 빌리 스미스.”
서기관의 호명을 따라 피고인들이 자리에 앉았다. 네 명은 재판관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스미스는 턱을 쳐들고 레페리를 노려보았다. 똑같이 노려보는 눈길로 받아친 후 레페리는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사건은 제왕력 882년 태양달 상 2일 밤 자정 무렵에 일어났습니다. 피해자 데오로 베이네딘은 사우스필드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도중 윌더빌에 들른 그는 하룻밤 묵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야영을 하기 위해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레카 인을 불경스럽게 여긴 빈센트 파머 외 4인의 피고인들은 공소외인 리처드 허슬의 부추김에 피해자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피고인들은 윌더빌 남쪽 황야에서 피해자를 발견했습니다. 안개를 틈타 접근한 피고인들은 먼저 피해자의 후두부를 가격한 후 폭행했습니다. 심한 구타로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 피고인들은 윌더빌 남쪽 320야드 지점의 강변에 피해자를 매장했습니다. 피해자는 그곳에서 질식사했습니다. 이상 사건의 경위에 대한 설명에 이의가 있는 피고인은 발언해주시기 바랍니다.”
레페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피고인들을 바라보았다. 피고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우리가 그랬다는 증거 있수? 뭐시기 물증이라던가 하는 거 말이오.”
레페리는 서기관을 향해 눈짓했다. 서기관은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레페리가 상자에서 꺼낸 것은 한쪽이 깨져나간 부싯돌이었다.
“이것은 부싯돌이 깨진 조각입니다. 주민 여러분은 최근 들어 빈센트 씨가 감기에 걸리면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걸 보셨을 것입니다. 빈센트 씨는 피해자의 사체가 유기된 현장에서 부싯돌을 잃어버렸고, 혹시라도 그것을 빌미로 수사관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밤중에 강을 헤맸습니다. 이것이 빈센트 씨의 물건이라는 것은 본인이 자백했습니다.”
“그걸로는 멍청한 빈센트 한 놈만 범인이라는 소리 아니오. 왜 우리 네 명까지 법정에 끌고 나왔수?”
브네로는 스미스의 뻔뻔함에 기가 차서 탄식했다. 빈센트는 스미스 일당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들과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고 실토했다. 물론 스미스는 한사코 부인했으며 다른 일당들은 침묵했다지만, 피해자의 시신이 여러 사람에게 구타당했음을 증명하는데다 마을 사람들은 현재 허슬 소령의 집에 묵고 있는 사람들과 레페리가 데려온 수사관들 외에는 그만한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외부인을 본 일이 없었다. 스미스를 제외한 일당들은 심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결국 빈센트의 자백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심문이 끝났다. 일당을 옹호하던 보안관도 끝내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여기 모여든 주민들은 심문 당시 일어난 일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심문에서 자백했어도 여기서 그것을 부인한다면 이야기의 전말을 모르는 주민들은 스미스의 말을 따라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빈센트 외의 일당에 관한 증거가 필요했다.
레페리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기관을 쳐다보았다. 서기관도 찡그린 낯으로 레페리를 바라보다가 별 수 없다는 듯 다른 상자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군데군데 녹색물이 든 괭이가 들어있었다.
“최근 발표된 어느 연구논문에 의하면, 어떤 화학약품은 사람의 피가 닿으면 색깔이 변한다 합니다. 이 괭이는 몸체 전체에 약을 접촉시켰지만 여기, 녹색으로 변한 부분에서만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물이 짙게 든 이 괭이 뒷목은 피해자의 후두부에 난 함몰자국과 일치했습니다. 괭이는 스미스 씨의 것이죠.”
주민들은 놀라서 수군거렸다. 스미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 녹색물은 어디서 났소? 알 것 없다는 식으로 나가면 증거를 조작한 거라고 스스로 까발리는 꼴인 건 아시죠?”
영리한 놈. 레페리는 신경질이 나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그는 재판관이다. 명백히 범인인 자에게 유리할 수 있어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얼마 전 마을의 강에서 마을의 소년들이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 물고기가 토한 피입니다.”
“하, 지금 나리께선 웬 물고기가 피를 토한 게 내 괭이에 묻었더니 풀물로 바뀐즉슨 내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거쇼? 그 물고기는 분명 말을 했다고 애들 사이에서 소문이 짜한 그놈이죠? 마을 사람들, 이게 말이 되요? 물고기가 말을 했다고 주절대는 애들도 웃기지만 그 고기가 토한 피는 사람의 피를 찾아낸 약품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수다.”
주민들은 킬킬 웃었다. 수사관들은 상관이 모욕당한 것 같아 얼굴을 붉히고 인상을 험악하게 바꿨다. 검은 제복의 사내들에게 주눅이 든 주민들은 다시 잠잠해졌다. 공터가 조용해지자 레페리는 평정을 잃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다른 시험도 거쳤소. 수도에서 가져온 다른 약품으로 말이오. 반딧불에서 추출한 약에 과산화수소를 가해 뿌리면 피가 묻은 곳에서 형광빛을 발합니다. 그 시험 결과 역시 혈흔이 검출되었소. 암실에서 보면 반딧불처럼 빛나는 걸 볼 수 있지요. 녹색물이 든 자국과 형광빛이 나타난 자리는 일치했소.”
주민들은 괭이가 빛나는지 보려고 금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어차피 그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는데다 주위가 충분히 어둡지 않아 레페리가 말한 증거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온 재판관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고 믿는 주민들은 그런 증거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재판관의 말을 믿었다. 의혹의 눈길이 등을 쿡쿡 쑤셔대어도 스미스는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말했다.
“그 반딧불 어쩌고 하는 약은 피에 반응하는 모양이죠?”
“그렇소.”
“사람 피가 아닌 피에도 반응하는 모양이죠?”
레페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루미놀 반응이라고 명명된 그 시험은 분명 일만 배로 희석된 혈흔도 검출해내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피가 사람의 피인지 동물의 피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둘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방법에는 노련한 사냥꾼이 맛을 보거나 막 뽑아낸 피에 사람의 피를 섞어 엉기는지 확인하는 등의 어설픈 기술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냥꾼도 틀릴 수가 있고, 사람의 피끼리 섞어도 엉기는 일이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혈액 상태에서 시험해야 했다. 이미 말라버리고 씻어내어 눈으로는 핏자국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둘 다 쓸 수 없는 방법이다. 지금의 과학 수준으로는 그런 걸 구별해낼 재간이 없었다. 스미스는 히죽 웃었다.
“역시 그건 증거가 될 수 없수다. 물고기가 토한 이상한 거라도 피는 피, 그런 걸 나리가 먼저 묻혀놓았으니 반딧불 어쩌고 하는 약이 반응하지 그럼 안 하겠수?”
여기가 법정이 아니었고 스미스가 유력한 용의자가 아니었다면, 브네로는 나서서 박수라도 쳤을 것이다. 그의 지적은 옳았다. 가까스로 레페리의 말을 믿는 분위기가 되어가던 주민들은 다시 스미스에게 우호적인 쪽으로 돌아섰다.
브네로가 아는 바에 의하면 더 이상의 물적 증거는 없었다. 부싯돌과 괭이만으로 불충분하다면 이제는 이들이 자기 입으로 실토하고 죄를 인정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레페리는 이를 악물고 스미스를 노려보다가 명령을 내렸다.
“좋소. 그렇다면 증인을 소환하겠소. 데이브 씨, 나오시오.”
모여든 주민들 사이에서 살집 좋은 남자가 끌려나왔다. 브네로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말을 주고받은 사람이었다.
주점 주인 데이브는 만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이 견디기 어려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벌벌 떨었다. 레페리는 짐짓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가드의 이름으로 거짓을 증언하지 않겠노라고 선서하시오.”
주점 주인은 서기관이 내민 성경에 손을 올리고 몸 전체를 덜덜 떨며 선서했다. 레페리는 질문을 시작했다.
“신의 이름으로 선서하셨으니, 심문 때 보여준 태도를 계속 유지해주기 바랍니다. 우선 스미스 씨에게 질문하겠소. 데오로 베이네딘이 살해당한 태양달 상 2일 밤 어디서 뭘 하고 있었소?”
“언제나와 같소. 우리는 모두 데이브네 집에서 퍼마시고 있었지. 안 그래, 데이브?”
주점 주인은 레페리의 눈치를 살폈다. 레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점 주인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예, 나리. 빌리네 일당은 맨날 우리 술집에 와서 죽어라 마시고 갑죠.”
“보통 언제까지 있소?”
“새벽이 꼴깍 넘어가 두 달이 다 서쪽 땅에 걸릴 때까지죠.”
“그날도 그 시각까지 그랬노라고 가드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소?”
레페리는 주점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주점 주인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낼 용기가 없었는지 자꾸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문득 스미스와 눈이 마주친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레페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예. 하고말굽쇼. 제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면 그 날도 그랬다고 맹세하굽쇼.”
브네로는 놀란 눈으로 증인을 쳐다보았다. 신의 이름을 걸고 증언하는 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증인은 브네로도 참관했던 심문 자리에서 한 것과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레페리는 서기관으로부터 기록을 받아든 후 낯을 찌푸렸다.
“심문 기록에는 사건 당일 허슬 소령이 불렀다면서 피고인들이 일찍 돌아갔다 하지 않았소? 저녁 9시 무렵에 말이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빌리는 소작인 대표올시다. 지주이신 허슬 나리가 종종 불러내곤 했죠. 심문 때엔 그 날인지 그 전날인지 헷갈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전날 불러냈던 것 같습니다요.”
아까까지 덜덜 떨던 주점 주인은 어깨를 펴고 당당히 말했다. 심문 때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봤다면 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진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스미스의 알리바이를 깨려고 불러낸 증인이 심문과는 다른 소리를 해 오히려 스미스의 알리바이를 굳혀버렸다. 주점 주인은 마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들의 틈으로 돌아갔다.
스미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레페리를 쳐다보았다.
“친절하게도 우리가 누구 죽은 거랑은 아무 상관없다는 증인까지 준비해 주셨구먼. 과연 공정하신 재판관이시오.”
레페리는 노기 띤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스미스는 그를 놀리는 게 즐거운 듯 느물느물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레카 놈을 죽였다 쳐 보쇼. 그래도 저 멍청한 빈센트 놈의 말을 믿자면 죽이라고 시킨 건 죽은 허슬 나리요. 어떻게 봐도 여기에는 처벌될 사람이 빈센트 하나란 거지. 동네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쇼?”
“무죄다! 무죄다!”
“빌리를 풀어줘라!”
주민들은 재판관에게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듯이 외쳤다. 그 기세가 자못 흉흉해 수사관들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금줄 앞을 막아섰다. 레페리는 흥분한 주민들이 안중에도 없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설령 살인을 사주한 자는 리처드 허슬이고 스미스 씨 자신에게는 그런 의도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해도, 직접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그러니까 그런 증거가 있냐 이거요. 증거 말이야, 증거.”
“증인으로 출두한 빈센트 씨는 심문 과정에서 범행을 자백했소. 자, 빈센트 씨. 다시 한 번 진실을 증언해 주시오.”
주민들이 입을 다물었다. 빈센트는 피고인석에서 끌려나와 주점 주인이 했던 것처럼 선서했다. 그는 너무 떠느라 비틀거리며 레페리의 앞에 섰다. 스미스 일당을 포함한 마을 주민들은 가늘게 눈을 뜨고 그의 등을 쏘아보았다.
“이제 재판관의 권한으로 묻겠소. 당신은 데오로 베이네딘이 살해된 자리에 있었소?”
“그렇구먼요, 쿨럭.”
“일행이 있었습니까?”
“예.”
“그 중에 여기 있는 빌리 스미스 씨도 있었소?”
빈센트는 덜덜 떨면서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수십 쌍의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긴장한 탓에 기침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올시다.”
주민들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면면에 자신이 재판에서 이긴 것처럼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레페리는 서기관이 넘긴 심문 기록을 차분한 손길로 펼쳐들었다. 찾고자 한 부분을 찾아낸 그는 빈센트와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두루마리를 돌려 들고 붉은 지장이 찍혀있는 부분을 가리켰다.
“심문 때 당신은 리처드 허슬의 사주로 빌리 스미스 외 4인이 데오로 베이네딘을 살해했다고 자백했소.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증언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인정하는 지장도 남기지 않았소? 신성한 법정에서 가드의 이름 앞에 선서한 자가 거짓을 말하지 마시오!”
“그, 그건 나리께서 고문하고 협박하니까 씨부린 헛소리요!”
빈센트는 악을 쓰고는 자기 목소리에 놀라 움찔했다. 레페리도 고문 협박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재판을 하다보면 심문 당시의 자백이 고문 협박에 의한 거라며 완강히 부인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기 때문에, 레페리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어제의 심문은 이 마을을 관할하는 보안관이 참관하는 가운데 보안관 사무실에서 이루어졌고, 나는 고문 방법 같은 건 모르오. 빈센트 씨. 거짓증언은 새로운 죄목을 덧붙일 뿐, 당신에게 유리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어제 증언한 대로 진실을 말하시오.”
“보안관님을 불러줘요! 그분한테 정말 심문에 들어왔었는지, 정말로 고, 고문이나 협박 같은 거 없었는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직접 듣자고요!”
레페리는 어지간히 어이가 없었는지 헛헛 웃은 후 두루마리를 끝까지 펼쳤다. 끝부분에는 재판관의 것과 보안관의 것, 두 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럼 이 보안관의 인장은 뭐요?”
“도장이야 나중에 쾅 찍을 수 있는 거잖습니까요? 아, 아무튼 보안관님은 여기에 없잖아요. 본인한테 물어보란 말입니다요.”
주민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빈센트가 취조되는 내내 참관인 자격으로 들어와 있었음을 증언해줄 보안관이 공터에 없었다. 황당해진 브네로가 대신 증언하려고 앞으로 나서자 금줄 앞에 서있던 수사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재판관이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증언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레페리는 브네로가 이스갈 인이 아닌데다 자신의 지인임이 알려졌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브네로가 끼어든다면 주민들은 레페리가 고의적으로 스미스 일당을 죄인으로 몰아가려 한다며 반발할 것이다. 이미 주민들은 빈센트의 말을 듣고 레페리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안관 사무실에는 무시무시한 거 많지 않아? 채찍이나 몽둥이 같은 거 말야.”
“나도 본 거 같은데. 재판관 나리가 지금 거짓말하는겨?”
“정말로 빈센트를 고문했을지도 몰라.”
레페리의 얼굴에서 평소 이스갈 인답지 않게 띄우던 농담을 좋아하는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주민들은 재판관의 표정을 보고 꼬리말은 개 마냥 어깨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상스런 침묵이 감돌았다. 재판관이 지금 불호령을 내리면 하늘에서 정말로 불벼락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자 주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냉정하고 사무적인 어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빈센트 씨.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리처드 허슬의 사주로 몇몇 마을 주민들이 데오로 베이네딘을 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빌리 스미스, 로이 에드워즈, 빈센트 파머, 알 노먼, 그렉 그레스, 이상 5인입니다. 맞습니까?”
“아니야! 난 허슬 나리가 시켜서 모르는 놈 몇 명이랑 갔어! 거기에 그놈들은 없었어! 없었다고!”
겁에 질린 빈센트는 벌떡 일어나 레페리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보안관의 부하 한 명이 그를 자리에 앉히려고 금줄을 넘어왔다. 그 때 레페리의 뒤편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저벅저벅 몰려왔다.
보안관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즐기며 레페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겨우 시간을 맞춘 듯 하군요. 레페리 씨. 리처드 허슬의 집 지하실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보안관의 뒤를 따라 부하 한 명이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피 묻은 도우포와 염소가죽으로 만든 칼집에 채워진 단검이 들려있었다. 하얗게 질린 레르다이와 씩 웃는 스미스의 얼굴을 본 레페리는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보안관이 저런 걸 들고 나타난 건지 한순간에 이해되었다. 레페리는 자리가 자리라 노호성도 터뜨리지 못하고 보안관을 노려보았다. 가까스로 고함을 목구멍 아래에 눌러 넣은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소, 보안관. 일단 저편에서 당신의 재판을 기다리시오.”
“아, 레페리 씨. 이건 레카 인 살인사건의 증거라 지금 당장 필요할 듯 한데요. 리처드 허슬이 빈센트를 비롯한 살인자들에게 레카 인을 살해하도록 사주한 증거입니다. 거기 서있는 레카 인은 피해자의 동생이라지요?”
레페리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보안관은 지금 재판의 분위기를 죽은 허슬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방향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 스미스는 무죄라고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슬그머니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재판관이고, 아무리 피고인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레르다이 베이네딘 씨. 저 도우포와 칼은 데오로 베이네딘의 것이 맞습니까?”
레르다이는 목이 굳어버린 것처럼 꼿꼿이 서 있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들은 아우성치며 스미스 일당의 무죄를 주장했다.
“무죄다! 무죄다!”
“이제 재판은 필요 없소! 빌리는 명백히 무죄야, 무죄!”
“범인은 허슬 나리다!”
레페리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정숙하시오!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소!”
주민들은 다시금 서울에서 온 재판관의 권세에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처럼 완전히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의기양양한 보안관을 흘깃거리며 주민들은 자기들끼리 귓말을 나누었다. 웅성거림이 더 커지기 전에 레페리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보안관. 레카 인 살인사건에 관한 심문 당시 참관인 자격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아, 물론이오. 물론이고말고. 저는 이 마을을 관할하는 보안관이니까요.”
“심문 과정에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이나 협박이 이용되었습니까?”
“고문은 없었죠. 하지만 누구라도 겁을 먹고 그 자리에서 얼른 벗어날 생각으로 헛소리를 주절거릴 분위기이긴 했죠. 하기야 어느 심문 자리나 그렇긴 하지만.”
보안관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주민들이 보안관의 말 중에서 어디에 귀가 솔깃했을지는 뻔했다. 레페리는 철저하게 비협조적으로 구는 보안관에게 정말로 화가 났다. 그 때 잠잠히 있던 스미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빈센트, 괜찮아. 우린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누구라도 서울서 오신 재판관님이 나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떠냐, 내 생각이랑 다른 말하면 죽는다는 분위기로 제압하고 들어가면‥.”
“피고인! 발언을 허락한 적이 없소!”
스미스는 입을 다물면서 피식 웃었다. 재판관이 뜻대로 재판을 진행하지 못해 부아가 치민 모습을 즐기는 듯 했다. 보안관은 먼저 와있던 부하와 귓속말을 주고받은 후 어깨를 으쓱이고 레페리를 돌아보았다.
“나올 증거도 다 나오고 증언도 다 들어봤으니 이제 결론을 내야지 싶습니다. 재판관님, 판결을.”
레페리는 두 손을 포개고 그 위에 이마를 괴었다. 주민들은 입을 다물고 재판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머리를 든 재판관은 피곤한 표정으로 펜을 들어 뭔가를 써내려갔다. 쓰기를 마친 그는 서기관에게 양피지를 넘겼다. 서기관은 양피지를 읽은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민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양치지의 내용을 큰 소리로 읽었다.
“가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빈센트 파머, 살인죄로 징역 7년. 로이 에드워즈, 무죄. 알 노먼, 무죄. 그렉 그레스, 무죄.”
브네로는 레페리를 바라보았다. 레페리는 고개를 떨구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레르다이의 시선을 뻔뻔하게 무시할 수 없어서 레페리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서기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빌리 스미스, 무죄.”
주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가벼운 축이 곳곳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레페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늘져있었지만 냉정함이 돌아온 얼굴이었다. 브네로는 언젠가 엘리하스 축제 때 이스갈레아에서 본 경찰을 떠올렸다. 교통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던 그는 주위의 소란과 기쁨에 섞여들기는커녕 무표정했는데, 빨리 지긋지긋한 축제가 지나가 그에게 주어진 의무도 끝나기를 바라는 게 역력했다. 레페리는 그런 낯으로 나직이 말했다.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민 여러분은 자리를 정돈해 주십시오. 이제 공동체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레페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외쳤다.
“나리. 허슬 나리가 시킨 짓이고, 빈센트 말고 다른 놈들은 누군지도 모르고, 시켰던 허슬 나리는 죽어버렸으니 잡아갈 건 빈센트 한 놈 아니우? 딴 마을 사람들은 손이 깨끗하잖아요.”
“찬성이오! 찬성이오!”
“죽일 놈은 허슬 나리 하나요!”
주민들은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즐거워했다. 레르다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몇몇 주민들이 레카 인의 뒷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가운데 그는 언덕으로 휑하니 달려갔다. 서기관은 얼른 주민들의 소란을 진정시키려고 앞으로 나섰다.
“투표자를 선발하겠습니다. 성인 남성들은 나와서 제비를 뽑으시오. 이건 중요한 절차이니 되도록 엄숙하게 치르길 바랍니다.”
그 말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구경 나온 마을 주민들 중 성인이 된 남자들이 줄지어 금줄을 넘어왔다. 서기관은 미리 준비해둔 상자를 내밀었다. 남자들은 거기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줄이 모두 지나가자 서기관이 말했다.
“검은 콩을 뽑은 분은 콩을 반납하고 금줄 뒤로 돌아가십시오. 흰 콩을 뽑은 분은 여기 남으십시오.”
주민들은 웅성거리며 서기관의 말대로 했다. 콩의 색깔로 줄이 갈린 후 서기관은 거둬들인 검은 콩을 남은 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가판결에 찬성하면 흰 콩을, 반대하면 검은 콩을 던지시면 됩니다. 먼저 빈센트 파머의 가판결에 대해 투표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서기관이 꺼내놓은 다른 상자 앞에 줄지어 가서 구멍 속에 손을 넣었다. 무슨 콩을 골랐는지는 겉보기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콩을 던진 주민들은 한결같이 완고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줄이 다섯 번 지나간 후 서기관은 상자를 열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재판관의 책상 위에 콩을 늘어놓았다. 다섯 무더기의 콩이 놓였다. 색을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서기관은 콩의 수를 확인한 후 주민들을 향해 외쳤다.
“빈센트 파머, 만장일치로 찬성. 로이 에드워즈, 만장일치로 찬성. 알 노먼, 만장일치로 찬성. 그렉 그레스, 만장일치로 찬성. 빌리 스미스, 만장일치로 찬성.”
주민들은 박수를 쳤다.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날아다녔다. 재판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민들은 잠시 조용해졌다. 레페리는 서기관으로부터 가판결이 적힌 양피지를 돌려받았다.
한숨을 쉰 후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재판관의 조사와 공동체 투표로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 빈센트 파머에게는 살인죄가 인정되므로 징역 7년을 선고합니다. 동 절차로 혐의 없음이 확정된 피고인 로이 에드워즈, 알 노먼, 그렉 그레스, 빌리 스미스에게는 무죄를 선고합니다. 죄인 빈센트 파머는 내일 동틀 녘에 사우스필드의 로드아일 감옥으로 이송합니다. 본 판결은 이스갈을 보살피시는 위대한 신 가드의 이름과 공의로우신 이스갈의 국왕 윌리엄 3세의 명령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레페리는 힘겹게 인장을 꺼내들고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양피지 끝에 지그시 내리눌렀다. 주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빈센트를 제외한 피고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악수를 나눴다. 금줄 너머로 돌아가는 그들을 주민들은 어깨를 두드려 주거나, 악수를 하거나, 하다못해 옷깃이라도 만지려 들며 축하했다. 혼자 남겨진 빈센트는 수사관들에게 양팔을 잡힌 채 끌려갔다. 오늘은 보안관 사무실의 유치장에서 보낸 후 판결대로 내일 아침 이송되기 위해서였다.
소란스런 와중에 레페리는 혼이 나간 것처럼 의자 위에 늘어져 있다가, 보안관이 어깨를 흔들자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일어섰다.
“지금부터 사우스필드 소재 윌더빌 마을에서 있었던 허슬 소령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예는 생략하겠습니다.”
재판관의 자리에 앉은 보안관은 서기관을 맡은 부하에게 눈짓했다. 서기관은 직전의 재판에서 서기관을 맡았던 수사관을 곁눈질한 후 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사건의 용의자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호명하겠습니다. 호명된 사람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프랭크 가드너. 제인 허슬.”
다섯에서 둘로 줄어든 피고인석에 두 사람이 앉았다. 가드너는 각오한 듯 입술을 굳게 깨물고 있었지만, 제인은 파리하게 떨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혐오와 경멸이 어린 눈으로 그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주민들 사이에서 피어오른 적의가 형체를 얻어 피부를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겠습니다. 피해자 리처드 허슬은 국왕 폐하의 충성스런 군인이며 윌더빌의 존경받는 지주로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명망 깊은 인물로 알려져 왔습니다. 제왕력 882년 태양달 상 30일 자정 무렵 허슬 소령은 양녀인 피고인 제인 허슬의 방에서 피고인과 부녀지간의 정을 돈독히 할 대화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평소 평민 출신인 허슬 소령이 귀족의 피를 이은 자신을 자녀로서 낮게 여김에 원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허슬 소령의 피고용인인 피고인 프랭크 가드너와 밀통하여 소령을 살해하기로 공모한 제인 허슬은 당일 밤 피해자가 단독으로 자신의 방에 온 것을 기화로 피고인 프랭크 가드너와 더불어 피해자를 살해했습니다. 이상 사건의 경위에 대한 설명에 이의가 있는 피고인은 발언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드너는 손을 들었다. 보안관은 그 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주점 앞에서 부에노소 인과 뚱한 얼굴로 재판을 구경하는 레페리를 보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드너는 손에 쥔 모자를 있는 대로 구겨 쥐었다.
“잠깐만요. 보안관님, 허슬 아가씨는 저랑 공모한 적 없어요. 허슬에 대해 귀족 같은 걸로 원한을 가진 것도 아니고요. 아가씨가 분명히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아요. 허슬은 의붓딸인 아가씨를‥!”
“확인된 바 없는 이야기를 거듭 주장할 텐가? 자꾸 그러면 법정모독의 죄를 묻겠네.”
“보안관님! 마나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마나님이 가장 분명한 증인이에요. 그밖에 그 집 노예들도 잔뜩 있고요!”
“허슬 부인은 몸이 좋지 않아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 노예는 이스갈 사람이 아니니 증인이 될 자격이 없어. 자, 더는 이의가 없겠지?”
보안관은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도 허용한 레페리와는 사뭇 대조되는 태도였다. 가드너는 잇소리를 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보안관의 부하들이 뒤에서 어깨를 내리누르자 그는 마지못해 땅바닥으로 고개를 떨궈야 했다.
그 때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낸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보안관님. 해도 될까요?”
보안관은 레페리가 쏘아보는 눈길을 느끼고 짜증 섞인 어투로 말했다.
“하시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심문에서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보안관님은 저와 가드너를 어떻게든 죄인으로 몰아갈 작정을 하고 진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드너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건 우발적인 사고였지요. 그럼에도 심문을 마칠 무렵 보안관님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시고자 하는 의중을 내비치셨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아아, 떠올리기도 싫은 제 과거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피해자로서의 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보안관님은 오로지 저에게서 패륜적인 살인자로서의 모습만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그만! 그건 사건 경위에 대한 이의가 아니지 않소. 쓸데없는 말로 재판을 지연시키려 든다면 퇴정명령을 내릴 것이오.”
“보안관님께도 따님이 한 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말 예기치 못한 사고로 보안관님이 어느 날 세상을 버리고 사모님이 재혼하셨을 때, 그 따님이 새로이 맞은 양아버지로부터 그런 학대를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안관님이라면 그 양부를 가만 두시겠습니까? 저승에서라도 저주하실 것입니다. 마을 주민 여러분도 딸을 가진 부모라면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당사자인 딸은 어떻겠습니까? 인정합니다. 저는 제 의부를 정말로 살해하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습니다. 의부인 자가 수양딸에게 해온 짓을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현실적으로 탄원할 길이 없었습니다. 양부는 군부에서 제법 배경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을의 여러분들은 제 모친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양부를 지주로서 섬겼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저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것을 모른 척 했습니다.”
“반성하기는커녕, 이제는 감정적인 말로 여론을 조종하려 드는가! 과연 제 집 일꾼에게 제 아비를 죽이자고 꼬리칠 만하군. 요녀가 따로 없어!”
보안관은 동의를 구하려는 듯 마을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주민들은 보안관의 기대와 달리 자신들을 성토하는 재판을 침묵으로 지켜보았다.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높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날 가드너는 제 불행을 모른 척할 수 없어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이나 보안관님과 달리 다른 사람의 불운을 모른 척 지나치지 못한 것이 그의 죄입니다! 여기서 제가 뭘 해야 했던 걸까요? 누구도 제 눈물과 외침을 들어주지 않은 그 때에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 그것을 들어준 사람을 살인자라고 곧이곧대로 고발해야 했던가요? 강도를 당해 상처입고 버려진 자를 구원하려고 강도를 찌른 자를 여러분은 살인자라고 부르나요? 제가 보안관님께 묻고 싶은 것은 단 하나입니다. 왜 제 양부의 죄는 외면했으면서 저와 가드너의 죄는 크게 벌하려 하시는 건지요? 왜 진정한 죄인에게는 고개를 숙이면서 피해자들의 말에는 귀를 막으시는지요!”
“재갈을 물려라! 죄인에게 침묵의 미덕을 가르치겠다!”
보안관의 일갈에 부하들이 재갈을 가져왔다. 제인은 저항하지 않고 앉아 순순히 재갈을 물었다.
너른 공터에서는 보안관이 씩씩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브네로는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당신보다 더 말 잘 하네요. 저 정도로 말을 하면 돌이라도 움직이겠어요. 보안관 씨, 좀 듣는 게 어때.”
“불행히도 보안관의 심장과 머리는 돌보다 더 단단한 모양이다.”
레페리는 빈정거렸다. 그는 그들을 할 수만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담당한 사건이 아니기에 제 3자에 불과한 그로서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 그 때 레페리는 재판을 구경하는 주민들 틈에 섞여 자기들끼리 뭔가 속닥이다가 이쪽을 쳐다본 스미스와 눈이 마주쳤다. 스미스는 히죽 웃으며 모자에 손을 올렸다. 레페리는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보안관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은 후 양피지에 뭔가를 휘갈겨 썼다.
“더 들을 가치도 없군! 피고인들이 모두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니 바로 가판결을 내리겠소. 서기관!”
서기관은 양피지를 받아들고 표정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가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프랭크 가드너, 살인죄로 사형. 제인 허슬, 존속살인죄로 사형.”
주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바로 며칠 전 제인을 심문할 때 보안관 사무실 밖에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제인이 한 말은 그들 개개인이 마음 속 깊이 묻어둔 무언가를 정면으로 때린 것 같았다. 그 때 몇몇 사람이 반쯤 죽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비를 죽인 자식은 매달아서 까마귀밥을 만들어라!”
“찬성이오!”
동조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머뭇거리던 주민들은 슬그머니 주먹을 쳐들었다. 웅얼거리던 소리들이 점점 한 목소리가 되어갔다.
“죽여라! 죽여라!”
“살인자를 죽여라!”
“조용히! 이제 공동체 투표의 투표자를 선발하겠습니다. 성인 남성들은 나와서 제비를 뽑으십시오. 절차는 직전의 재판과 동일합니다.”
서기관은 약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민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성인 남자들의 줄이 세 번 돌았다. 서기관이 콩을 쏟아놓자 색깔을 확인한 보안관은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두 무더기의 콩은 모두 흰색이었다.
서기관으로부터 가판결문을 돌려받은 보안관은 서둘러 주머니에서 인장을 꺼냈다. 가판결문에 인장을 찍으려던 그는 레페리가 혀를 차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인장으로 자기 이마를 때릴 뻔 했다. 급히 인장을 든 손을 내리며 그는 일어서서 외쳤다.
“프랭크 가드너, 만장일치로 찬성. 제인 허슬, 만장일치로 찬성. 이제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재판관의 조사와 공동체 투표로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 프랭크 가드너에게는 살인죄가 인정되므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동 절차로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 제인 허슬에게는 존속살인죄가 인정되므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위 피고인들은 내일 동틀 녘에 교수형에 처하겠습니다. 본 판결은 이스갈을 보살피시는 위대한 신 가드의 이름과 공의로우신 이스갈의 국왕 윌리엄 3세의 명령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안관은 인장을 쾅 찍었다. 주민들은 웅성거렸지만 딱히 반대하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
재판이 끝나자 주민들은 각자 갈 길로 흩어졌다. 브네로는 시무룩한 레페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느릿한 걸음에 맞춰 걸었다. 그 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부에노소 인!”
돌아보니 보안관이었다.
“내일 처형이 끝나거든 그 재수 없는 칼토막을 돌려줄 테니 사무실로 와라.”
“그거 고맙군요.”
브네로는 성의 없이 대꾸했다. 보안관은 그에게 한 마디라도 걸어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뚫고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사무실로 갔다. 그 틈바구니에서 수사관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갈 채비를 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언덕에 닿자 공터의 소란스러움이 잠결에 들리는 소리처럼 멀어졌다. 소령의 집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집에 들어간 두 사람은 정원에 화려한 운구마차가 준비된 것을 보았다. 사제 한 사람이 운구마차를 손질하는 인부들과 이야기 중이었다. 신부는 내일 아침 죄인들이 처형당하기 전 참회를 돕고 난 후 성당으로 돌아갈 거라 말했다. 그들을 지나쳐 안채로 가면서 레페리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웃기게 되었군. 양부의 장례를 위해 모셔온 신부가 제인 양 자신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어. 지독하게 비협조적이고 폐쇄적인 동네야. 이래서 벽촌으로 파견 나가는 건 정말 싫다.”
브네로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레페리 역시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것 같진 않았다.
안채에는 사람이 없었다. 제인의 방 앞에는 여전히 금줄이 쳐져 있었지만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안채 앞 중정에서 노예들이 물통과 걸레를 들고 오가는 걸로 보아 이제 살인의 흔적을 청소하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레페리가 입을 열었다.
“브네로 군.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브네로는 머리를 긁적였다. 레페리가 물은 것은 재판에 대한 브네로 개인의 감상이라기보다는 에페오로서의, 혹은 부에노소 인으로서의 생각인 듯 했다.
“글쎄요. 우리 식으로 하면 천지율 제 1계명을 어긴 자는 죄질과 상황에 따라 사형에서 피해자의 유가족이 용서하고 끝내는 것까지 다양해서. 그리고 에페오나 에페이아한테 가는 건 최후의 수단이에요.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가 속한 씨족끼리 이야기해 보고, 씨족 레벨에서 안 되면 가문이 나서고, 가문 레벨에서도 안 되면 그때서야 양쪽의 에페오가 만나는 거죠.”
“최후의 경우라고 상정해 봐.”
“그렇다면 저는 가드너 씨는 허슬 씨의 집에서 5년간 무보수로 일을 도울 것, 허슬 양은 가문에 맡기고, 스미스 씨네 일당은 추방 7년이에요. 우리라면 거짓말쟁이를 부끄러워하는 데다 과정이야 어떻든 에페오나 에페이아의 결정에 토를 다는 일은 없으니 아까 같은 경우는 어렵겠습니다.”
브네로의 말에는 이민족으로서 이스갈 인에 대해 느낀 불만이 옅게 배어있었다. 레페리는 쓴웃음을 짓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추방이라. 그거밖에 안 하는 건가?”
“우리가 말하는 추방이란 건 단순히 마을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게 아니에요. 칼 한 자루로 저 험한 아렌체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벌이죠. 규칙은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는 거 하나뿐이지만요.”
“그 넓은 아렌체 땅에서 누굴 만나는지 안 만나는지 어떻게 알아.”
“하하, 그건 그래요. 하지만 추방형의 진짜 뜻은, 죽음보다 더 어려운 ‘삶’이란 것을 절감하게 하는 겁니다. 피해자가 잃어버린 삶의 지속이 무슨 의미를 갖는 건지, 사람과의 단절로 느끼게 하는 거죠. 기간이 끝나고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피해자 가족한테 바로 가서 사과하더군요. 당신들이 간수라고 부르는 감시자 없이도 알아서 잘들 합니다. 그런데 왜 물으시죠?”
“그냥 궁금해서. 제멋대로인 부에노소 인답군. 같은 살인죄여도 처벌이 그렇게 천차만별이면 법정안정성이나 형평 따윈 약에 쓰려 해도 없겠어.”
“우리는 어려운 법률용어나 법전 같은 거 없어요. 우리가 가진 법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되죠. 우리가 볼 때 벌이란 죄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할 수 있는 한 상대의 손실을 보상하려고 노력하게 만들면 되는 겁니다.”
“말은 그럴듯하군. 하지만 부에노소 인이니까 가능한 방식이야.”
“저도 다른 민족한테는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레페리 씨는 이제 어쩔 거예요?”
“뭘? 아, 이 결과 말인가? 주문 끝부분 못 들었나? 어리석은 재판관이 어리석은 백성들 앞에서 온갖 창피를 당한 끝에 선언한 바, 본 판결은 이스갈을 보살피시는 위대한 신 가드의 이름과 공의로우신 이스갈의 국왕 윌리엄 3세의 명령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브네로는 레페리를 쳐다보았다. 레페리의 얼굴에는 내심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무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브네로는 쳇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가져간 왼손은 비어있는 칼집이 잡히자 신경질적으로 허공에 뿌리쳐버렸다.
“누가 범인인지 알면서 처벌 못하는 판결과 범인은 맞는데 형벌이 지나친 판결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이것 봐요, 이런 건 이상하잖아요. 뭔가 다른 수단을 써야 되는 거 아니에요?”
“없어. 혹시라도 불법적인 수단을 떠올린 거라면 즉시 잊어버리게.”
“당신은 부조리한 걸 알아도 법을 고수하려 드는군요. 답답해 죽겠습니다.”
레페리는 이방인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두둑하고 널찍한 이파리에 물방울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빗방울이 떨어졌다. 운구마차가 젖는 걸 막으려고 노예들이 바삐 천을 들고 달렸다.
이스갈의 황야는 고운 흙먼지가 수억 년의 세월동안 쌓여 이룬 것이다. 빗방울이 튀어 올린 흙내는 흙보다는 먼지에 가까운 냄새를 띠었다. 아렌체의 검고 기름진 흙내에 익숙한 브네로는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신이 축복하기를, 중얼거린 레페리는 다시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 자네가 말한 대로 법은 만능이 아니며 그 존재 자체로 오롯이 정의를 표방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야. 하지만 이건, 시대의 한계라고 여겨지네. 지금 세상에서는 법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아. 죄와 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이 정도밖에 안 돼. 그러니까 법의 탈을 쓴 불의가 있지만, 법의 잘못은 아니야. 지금보다 나은 법과 제도를 만들면 이런 같잖은 일은 줄어들 테지. 그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법이 존중받아야 해. 법이 지켜져야 할 것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해야 불의에 쉽게 당하는 지금의 세태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보다 나은 걸 찾게 될 거라고.”
“법과 제도가 먼저 정의로워야 지킬 마음이 들 것 같은데요. 악법은 법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정의인가? 뭘 어떻게 해야 정의가 구현된다는 건가?”
“글쎄올시다. 부에노소 식으로 하면 죄에는 벌을, 무고한 자에게는 위로를, 동정 받을 자에게는 동정을, 갚을 것이 있는 자는 갚게 하는 것이 정의올시다.”
“그거야 자네 민족은 국가가 없고 사람 수 자체가 적으니 가능한 거지. 애초에 법이란 건 정의 구현이 목적인 게 아니야.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나라의 기틀을 잡는 것이네. 불특정다수의 국민들을 상대로 실현할 정의란 건 거기서 파생적으로 나오는 효과일 뿐. 우리가 가진 법은 그렇네. 죄에는 벌, 채무에는 변제라는 생각은 우리네 정의 관념에도 부합하네만, 거기까지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시게. 여긴 아렌체가 아니니까. 법이 불의를 용납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해도 불법한 수단으로 고치려 들어선 안 돼. 만약 시도한다면 걸리는 즉시 친구고 뭐고 간에 바로 가둬버릴 테니 그리 알게.”
레페리는 몸을 돌렸다. 브네로는 더는 참을 수 없어 그의 등을 향해 일갈했다.
“당신들한테 법이란 건 대체 뭡니까!”
“계속 이야기했어. 이제 알아서 생각해.”
레페리는 방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브네로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꾹꾹 눌러 담는 눈으로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문득 그는 이스갈에 몇 개나 되는 법과 법조문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알기로도 민법이 일천 개가 넘는 조항을 담고 있으며 형법이나 소송법, 행정법 쪽까지 더하면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아렌체에서는 법이 천지율이라 불리는 것 하나뿐이며 그것조차 법조문은 셋에 불과하다. 1. 정당한 이유 없이 살인하지 말 것 2. 남의 것을 탐내지 말 것 3. 인륜을 저버리지 말 것
에페오나 에페이아들은 저 세 개의 조항을 적당히 해석한 다음 관습을 덧붙여 결론을 내리며 대개의 경우 판단을 맡긴 양자가 모두 그것으로 납득한다. 법조문이라기보다는 금언이나 마찬가지인 이것만으로는 이스갈 인들이 말하는 식의 법적 의미가 낮다. 하지만 부에노소 인들은 누구나 이 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권세나 재산 같은 것의 도구 노릇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법이란 인간관계에 있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상태의 회복, 즉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기 때문이었다.
부에노소의 사회는 드넓은 아렌체를 방랑하는 각 가문과 씨족들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묶을 국가라는 체제가 없다. 반면 이스갈의 사회는 신분제와 관료제가 촘촘히 엮여 단단한 하나의 국가를 이룬다. 부에노소의 천지율은 위반자의 죄악(sin)을 처벌하지만 이스갈의 형법은 위법자의 범죄(crime)를 처벌한다. 이스갈에서 법이란 이미 여러 집단이 묶인 사회가 다시 흩어지지 않도록 더욱 강하게 조이는 도구로서 이해되고 사용되는 모양이다. 그 법의 중심에는 사람이 없다.
힘없는 개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시켜버릴 수 있고 또 그것이 법으로 정당화되는 체제를 브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갈의 법에 대해 딱히 가치판단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정의 실현은 반사적 효과일 뿐, 단지 평민의 사회에 대한 불만거리를 줄여줄 목적으로 존재하는 법이라도 그로써 역할을 다 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이스갈 인들이 만족한다면 이민족인 그로서는 불만스러워도 참견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생각을 좀 달리 할 필요가 있을 듯 했다.
“법과 제도가 백만 번 개선되어봤자 다른 꼴 볼 것 같진 않슴다. 중요한 건 그걸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써먹느냐겠죠. 그런 뜻에서, 나는 당신들 법을 이딴 식으로 써먹은 놈들을 가만 둘 수가 없군요.”
레페리의 주장대로라면 법은 지켜짐으로써 비로소 의미가 있다. 모두가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은 이미 법이 아니다. 그런데도 법을 벗어난 자들을 법대로 상대하려 하니까 엉망진창인 것이다. 브네로는 찌푸린 낯으로 코를 훌쩍이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빗줄기는 답답함을 씻어내기는커녕 더욱 후텁지근하게 만들고 있었다.
3.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장교가 있었다. 철저한 계급사회인 이스갈에서 자신의 운과 능력으로 제법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그는 가난해도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몸담은 사회는 능력은 없어도 타고난 신분의 덕으로 위에 앉은 자들에게 그가 머리를 숙이도록 강요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장교는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출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숙이기 시작한 머리는 점점 혀가 달콤한 말을 하는데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런 건, 자신감 넘치던 젊은 장교가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분했다.
그런 절망감에 빠진 장교의 앞에 귀족 가의 미망인이 나타났다. 역시 평민 출신이던 그녀는 다 쓰러져가는 가문이나마 귀족 출신인 전 남편 덕에 여유롭게 살 정도의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장교는 그녀와 그녀의 어린 딸에게 관심을 보이며 점차 사이를 좁혀나갔다. 귀족인 상관들에게 여러 가지로 손을 쓴 끝에 그는 형식적인 신분 차이를 넘어 여인과 결혼하는 데 성공하고 여인이 상속받은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제법 부유함까지 얻은 그에게 이제는 평민 출신의 가난하고 젊은 장교들이 고개를 숙여왔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의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자신은 귀족이라는 신분만은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친부가 귀족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귀족과의 연이 이어진 의붓딸이 그는 못내 증오스러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겨우 열 살이던 의붓딸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
“그 자는 자기 딸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겁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지만 명색이 딸인,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아이에게 말이에요! 마나님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 자가 이미 재산을 다 가로채버린 뒤인 데다 마나님마저 해칠까봐 두려워 눈물을 삼키며 지내셨을걸요. 그런 더러운 상태가‥ 아가씨가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가드너는 치를 떨며 말했다. 보안관이 즉시 끼어들었다.
“황당한 소리는 집어치워라. 고용해준 어른을 죽여 놓고는 그걸 정당화하려고 말을 꾸며내는 거지? 레페리 씨, 상식적으로 저게 말이 됩니까? 허슬 소령은 마을에서 명망 있는 분이고, 누구나 존경합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따님한테 어찌나 살갑게 대하는지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죠.”
“그 명망이란 게 개소리잖아요! 살갑다고요? 나리! 선생님! 그 자식이 딸을 건드린다는 건 마을 사람들도 다 알면서 쉬쉬하던 겁니다! 여기서 일한지 2년밖에 안 된 저도 금방 알아버린 이야기라고요. 휴가 때에만 이 별장에 내려온다지만,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어요! 10년이나 된 이야기니까요!”
“이 새끼가 그래도!”
보안관은 벌떡 일어나 따귀를 갈기려 했다. 레페리가 권위적인 어투로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보안관! 자리에 앉으시오. 가드너 씨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심문을 모두 마친 후에 내려도 늦지 않소.”
보안관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브네로는 소령이 아내보다 딸에게 먼저 음식을 나눠주던 걸 떠올렸다. 신사인 척 미소 짓던 얼굴이 뒤로는 가족들을 오랫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통에 몰아넣은 자의 가면이란 것이 그는 혐오스러웠다.
레페리는 계속 하란 뜻으로 가드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드너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근래에 허슬은 아가씨에게 손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스갈레아에서 귀한 손님이 온 만큼 그 자신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습니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술을 마셔버렸지요. 선생님의 그 칼 때문이었겠죠.”
철저하게 구경꾼의 위치에서 심문에 참석했던 브네로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예? 제 에페이도 말입니까?”
“그날 낮에 허슬이 시킨 일이 있어서 저는 결과를 보고하려고 그 집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정원에서 노예 한 명을 붙잡고 이런 지시를 하더군요. 응접실에 걸린 부에노소 숏소드 한 자루를 가져와라, 식사 중에 부르면 칼을 바꿔쳐라. 단 칼집은 손대면 안 된다. 바꿔친 칼은 내 서재 책상위의 나무 상자에 넣어둬라. 그 말을 들은 저는 그 수집광이 또 누군가로부터 뭘 뺏는구나 싶어 좀 있다가 보고하려고 마을에 돌아갔습니다."
브네로는 소령의 속셈을 대충 알아차렸다. 검을 바꿔치기한 것은 금방 들통 난다. 그것을 따지기에는 밤이 늦어버릴 테니, 좀 맹해 보이는 부에노소 인 손님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따지러 올 것이다. 그 전에 소령은 마을 주민들이 이방인을 묵게 하는 걸 반기지 않는다며 미안하지만 나가달라고 정중히 사과해서 쫓아낸다. 혹시라도 일찍 알아채서 당일 밤에 찾아올 것을 대비해, 검을 받아간 노예가 훔친 것으로 해 두려고 노예를 미리 도망 보낼 준비를 했을 수도 있다. 소령은 이런 얄팍한 속셈으로 이민족인 브네로가 자신의 집에 묵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라고요?”
“그 작자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아들이는 더러운 놈이에요. 응접실에 있는 수집품들 중 절반이 갖은 속임수로 훔친 것들일걸요. 어쨌든 전 나중에 다시 허슬에게 갔습니다. 괜히 그 때 나섰다가 뭘 엿들은 건 아니냐며 쫓겨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식사가 끝났을 무렵 찾아가보니 마침 그 작자가 술병을 든 채 아가씨의 방으로 가고 있더군요. 불길했어요. 설마 저 자식이 손님들까지 온 상태에서 그 더러운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요. 저는 아가씨의 방문에 귀를 바짝 대고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엿들었죠. 더러운 새끼‥. 그 자식은 또 아가씨에게 요구하고 있더군요. 순간 정말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들어가 버렸죠. 그 자식이 당황하는 꼴이란. 저는 더 이상 아가씨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결혼까지 할 나이에요. 그런 딸을 그렇게 창녀마냥 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안 그래요? 그랬더니 그 자식이 무슨 참견이냐며 힘으로 제 목을 조르려 들었어요. 그 자식은 군인입니다. 살인기술을 허가받고 당당히 익힌 놈이죠. 그런 놈을 제가 이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살려고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그 꼴이 웃겼는지 그 자식은 웃기만 하고 쫓아오진 않았죠. 도망치던 중, 갑자기 그 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손님한테서 뺏은 칼을 서재 책상 위 나무상자에 넣어두라고‥. 저는 서재에 들어가 그 칼을 꺼내들었죠. 그냥 칼을 들고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협박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보니 그놈은 침대에 누워 강제로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더군요. 더 이상 생각 같은 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안관 사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시계추가 흔들거리며 똑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보안관은 사사건건 자신에게 간섭하려드는 레페리를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좋아.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 네놈이 하는 말은 다 여기 적히고 있어. 이제 다른 걸 묻지. 네놈 말대로 허슬 소령이 인륜을 짓밟았다면 왜 신고하지 않은 거지? 신고해서 그게 사실이었다면 법이 처벌해줬을 거다. 그런데도 신고하지 않고 네 손으로 찌른 건 그저 네가 죽이고 싶으니까 죽인 것을 둘러대는 거짓말에 불과해. 네놈 말대로라면 피해자인 제인 허슬도, 허슬 부인도 그런 일이 있다고 신고 같은 걸 한 적이 없단 말이다.”
가드너는 역겹다는 표정으로 보안관을 노려보았다. 보안관이 눈을 부라리며 손을 움찔거리자 레페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건 나도 의문이오. 가드너 씨, 왜 허슬 가 사람들은 소령에 관해 아무 호소도 안 한 겁니까?”
“당연한 걸 물으세요? 허슬은 뒤에 군대가 있단 말이에요. 그 자가 평소 잘 보이고 뇌물 먹여대던 작자들이 허슬의 명예를 해칠 것 같은 신고가 받아들여지게 냅두리라 생각해요? 마을 사람들은 10년간 모른 척한 일을 10년 후에라도 아는 척해줄 리가 없고요. 여기 계신 이 훌륭하고 공정한 보안관께 신고하는 건 더더욱 웃기지도 않는 일이죠.”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보안관!”
레페리가 역정을 내자 보안관은 그제서야 그의 안색을 살피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그는 표독스런 눈으로 다른 질문을 진행했다.
“제인 허슬은 네놈과 공모하고 일부러 소령을 방심시켰지? 일부러 여기 계신 법무부 재판관께 거짓말을 했지?”
브네로와 레페리는 고개를 휙 돌렸다. 보안관은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튕겨내겠다는 뜻으로 팔짱을 단단히 끼고 콧김을 푸르렁거렸다. 가드너는 바쁘게 눈을 굴리며 그들의 안색을 살피다가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믿어주세요. 리처드 허슬을 죽인 건 접니다. 아가씨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미리 내통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자리에 계셨을 뿐이죠. 그 후에 아가씨가 나리께 거짓말을 한 건 제가 부탁해서입니다. 그것도 절대로 아가씨의 뜻이 아니에요.”
제인의 거짓말이 그녀의 뜻이 아니란 데에선 브네로와 레페리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드너와 사전에 공동으로 일을 꾸민 것은 아닐 테지만, 제인은 가드너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스스로의 뜻으로 그를 감쌌을 것이란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허슬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날 보인 눈물은 오히려 그녀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가드너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었을까.
브네로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말을 들어보니 당신 자신은 허슬 씨에 대해 별다른 개인적인 원한이 없군요.”
“그다지‥.”
“하지만 허슬 양에 대해서는 모든 일을 당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변호하시는군요.”
가드너는 낯을 붉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요?”
브네로는 손에 쥐고 있던 걸 주머니에 넣은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곤한 낯으로 방에 들어온 레페리는 브네로의 옆에 모자를 던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적으로 피곤해 죽겠군. 자네, 아주 영리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제인 양을 심문하는 자리에는 가지 말걸 그랬어.”
“엉망이었어요?”
“가드너 씨보다 더하군. 마을 주민들이 살기등등하게 몰려와서는 보안관 사무실 밖에서 죽여라, 죽여라를 외쳐대는 그 꼴을 봤어야 했어. 아비를 죽인 자식으로 벌써 소문난 모양이야. 제인 양은 보안관이 아픈 데만 찔러가며 집요하게 추궁해대니까 제대로 자기변호도 못하고 끌려 다녔지. 결국에는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울어버렸는데, 보안관 놈은 그걸 질문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이더군.”
“긍정이요? 무슨 질문이었는데요?”
“허슬 소령을 살해하자고 가드너와 공모한 적이 있느냔 거지. 보안관 놈은 아주 솜씨 좋게 돌려서 말하더군. 죽이고 싶다는 기분이 든 적은 없느냐, 그걸 가드너랑 이야기했더니 동감해주더냐라는 식으로 말이야.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제인 양이 살인행위 자체에서는 아무 분담도 없었지만 ‘공모’를 했다는 사실, 현장에서 공범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들어 공모공동정범으로 단정 지어 버렸어. 더군다나 법률상 자식이니까 그냥 살인죄도 아니고 존속살인죄라고. 엥이!”
“공모공, 뭐요?”
“그런 건 몰라도 돼! 빌어먹을, 강간당한 여자들이 왜 잘 신고하지도 않는지 아나? 그런 기억은 강도를 당했거나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고통이야. 인생에서 그 사건만 뚝 잘라다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다고. 게다가 여자가 피해자인데도 구경꾼들, 심지어 수사관마저도 가해자보다 더 못난 인간 취급한다고. 그런 것만 골라다 건드리는 질문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여자가 제대로 대답해? 보안관 놈은 처음부터 그녀까지 엄하게 처벌할 작정으로 싫은 기억을 들춰대다 그딴 답을 이끌어낸 게 분명해.”
엄한 처벌? 브네로는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가드너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로 생각할 때 제인은 살인 자체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공무원인 레페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죄가 된다. 브네로가 보기에 제인이 지은 죄는 그뿐이었다. 그런데 레페리의 말을 가만 들어보자니 보안관은 뭔가 더 무서운 죄목을 짚어낸 모양이었다.
“이스갈의 임금께서 전권을 위임해 내려 보내신 명망 깊은 재판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이런 경우 두 사람은 어떻게 판결 받죠?”
“글쎄. 내가 담당한 사건이라면 작량감경이라도 하려고 몸부림쳤겠어. 하지만 보안관 놈은 절대로 안 그럴걸. 마을 사람들의 눈치도 있으니까 말이지. 나라면 살인정범인 가드너에게는 징역 5년, 과잉방위는 인정하기 어려우니 여기서 더 감경하기는 어렵겠군. 제인 양에게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300펜실 쯤의 벌금을 선고하겠어. 하지만 보안관 놈은 가드너는 살인죄의 공동정범, 제인 양은 존속살인죄의 공동정범으로 싸그리 사형을 선고하려고 작정한 것 같아.”
브네로는 레페리가 주워섬긴 법률용어에 관해서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보안관이 결심한 판결은 레페리가 생각한 것과 비교할 때 가혹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피식 웃었다.
“사형이라고요? 와, 빡센 농담인데요.”
“그걸 뒤집는 건 마을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반대표를 던지는 것뿐인데 지금 분위기로 봐서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군. 변호사도 없고 말이지. 자세한 건 모레 재판이 열리니까 그 때 들을 수 있을 걸세. 잠깐, 내가 변호하면 될 거 아니냔 말은 접어둬. 나는 명색이 재판관이라 변호사 일은 못 하도록 되어있어. 자네 역시 이스갈 인이 아니니 안 돼.”
브네로는 잇소리를 내며 말을 삼켰다. 레페리는 찡그린 낯으로 이마를 쓸었다.
“운이 나빴어. 이쪽도 법무부에다 탄원했으면 어지간히 간사한 놈이 내려오지 않는 한 저보다는 경한 형을 선고하리라 생각하네. 하지만 이런 벽촌에서는 보안관이 재판관이야. 제길, 어떻게 그게 공모라는 거야? 누구나 싫은 놈에 대해 친한 사람과 뒷담 정도는 깔 수도 있는 거잖아. 그게 살인 공모가 되냐?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방조범도 아니고 정범이 돼? 갖다 붙여도 저딴 식이라니!”
레페리는 의자 위에 힘없이 늘어졌다. 브네로는 찡그린 낯으로 웃으며 바닥 여기저기를 쳐다보다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이라도 이스갈레아에 탄원하러 갈 수 있어요?”
“늦었어. 내가 이스갈의 재판 시스템을 설명할 때 뭘 들었나. 법무부 탄원은 보안관 레벨에서 해결 못 하는 일을 처리해달라고 하는 거야. 보안관의 재판에서 해결을 못 보면 비로소 가는 거지. 게다가 이미 보안관 놈의 관할이 되어버린 일이고, 지금이라도 이스갈레아에 간다 해봤자 재판이 모레이니 탄원에, 접수에, 재판관 선임에, 다시 윌더빌에 내려오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이미 죽은 시체를 상대로 재판해달라는 꼴이 될 거야.”
“그 재판관이 당신이잖아요.”
“내가 접수받은 건 레카 인 살인사건이지 허슬 소령 살인사건이 아니야. 관할이 다르다고. 나는 사실 보안관의 일에 간섭해서도 안 돼. 법으로 정해진 일이야. 최대한 설득은 해보겠지만 그게 내 한계다.”
브네로는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료제라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이토록 경직되어 있다니, 레페리가 나선다면 살릴 수도 있는 사람들을 두 눈 뜨고 죽여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브네로는 계속 말을 걸었다.
“저기요. 보안관이 판결 내려버리면, 정말 그걸로 끝이에요?”
“그래.”
“더는 다시 재판을 받는다거나 할 수 없어요? 인간이 하는 거니까 오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어딨어. 폐하의 특명이라도 없으면 재판은 한 번이야. 그건 나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체제지만.”
브네로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레페리는 그가 이제 체념하고 진정된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뜬 브네로는 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아니에요. 뭔가 잘못 되었어요.”
레페리는 쓰게 웃었다. 입 밖에 내고 있지 않을 뿐이지,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스갈의 재판관으로서 결론을 이해해야 했다.
“어쩔 수 없잖아. 법이 그런걸.”
“법은 소령의 죄를 적발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 동네의 관습이란 건 외려 숨겨주기 바빴고요. 왜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겁니까?”
“그렇더라도, 나는 가드너가 허슬 소령을 살해한 걸 정의라고 말할 수 없어. 그건 심판도 뭣도 아닌 살인일 뿐이야.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야. 왜 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모두가 자기 주관대로 누군가의 행동을 불의라 단정 짓고 처단하면, 세상이 어떤 꼴이 되겠어?”
“가드너 씨가 살인을 저지른 거 가지고 처벌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법이 구비되어있다 해서 정의가 구현되는 건 아니란 겁니다. 법은 만능이 아닙니다. 저는 법을 부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법망의 구멍을 빠져나간 것들, 조리(條理)로 볼 때엔 불의한 법의 산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늘이 보시기에 아름다울지 모르겠군요.”
“자네가 그들을 동정하는 만큼 나도 그들을 동정해. 하지만 법은 법이야. 마음에 안 들어도 지켜야만 비로소 법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거야. 제인 양의 경우는 정말 안타깝지만 재판관이 그렇다면 더는 어쩔 수 없네. 보안관 자식이 왈왈 짖는 소리를 판결문에 써놔도 그게 적법절차 거쳐 나온 거면 그대로 되어야 해!”
“뭘 위한 법인데요! 젠장할!”
브네로는 버럭 고함치며 침대 모서리를 내려쳤다. 두터운 나무장식이 와지끈 깨져나갔다. 그 소리에 놀란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떨어져나간 나무장식을 쳐다보았다.
열린 덧창 너머로 참새 몇 마리가 짹짹거리며 날아다녔다. 밖에 누군가가 있어 소란을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지만, 집안사람들이 알기 전에 원상복구 시켜놓을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브네로는 찢어져 피가 나는 주먹을 살살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손괴죄인가요?”
“무죄다. 과실손괴죄란 건 없어.”
레페리는 사실이야 어쨌든 브네로의 행위를 과실로 치부해버린 후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민사상 불법행위에는 속하니까 변상은 하는 게 좋겠지. 허슬 부인께 잘 말해 보라고.”
“꺼으으흑.”
“나는 내 담당 사건이나 처리하러 가겠어. 자네가 급히 불러내는 통에 주민들의 물건 조사를 미뤄버렸네. 이 자들이 기세등등할 때 기습해야겠어. 그럼.”
레페리는 모자를 집어든 후 서둘러 방을 나갔다. 브네로는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두 사람과 안면이 깊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어떻게 되더라도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가드너가 살인자로서 처벌받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이유야 어쨌든 그건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정을 참작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의 죄질이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 악독한 것일까? 제인이 살인자나 마찬가지인 패륜아로서 처벌받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몰아가는 마을의 분위기에 편승해 되지도 않는 죄목을 만들어낸 보안관이 그는 괘씸하게 여겨졌다. 어찌 보면 피해자인 사람들을, 법의 이름을 빌어 보안관이 자기 마음대로 엄한 형벌로써 단죄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법정형이 선택적일 때, 가령 사형과 무기징역과 징역 중 선택하게 되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랄지, 작량감경이니 사정 참작이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재판관이 마음대로 사건의 질에 대해 판단해버리는 것이긴 하다. 법관에게 그런 선택의 폭을 주는 건 개별 사안에 따라 구체적인 사정을 보아가며 참작할 것은 참작하고, 혼을 내야 할 것은 혼을 내도록 죄질에 맞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이건 완전 횡포야.’
보안관이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허슬 소령의 죄는 그가 살아있는 한 법으로는 처단할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한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제인과 가드너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가에 대해 그는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그것을 감안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보다 중한 죄로 몰아가며 최고형을 선언하고자 하는 건 무슨 의도인가.
분명, 보안관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대로 판결을 내린다 해도 그것은 적법절차를 거쳐 나오는 한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법의 형식을 뒤집어쓴 불의이다. 그런 것이 거죽의 형식 때문에 정의의 실행인 마냥 당당히 이루어지는 꼴 같은 건, 적어도 부에노소 인들은 용납할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참견 잘하는 부에노소 인답다며, 브네로는 쓰게 웃었다. 그는 물병을 가져다가 찢어진 상처를 씻은 후 가방에서 붕대를 찾아내 대충 처매었다. 붕대를 끊은 후 그는 덧창 너머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레르다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사연이 있던지간에 그 끝이 살인으로 귀착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 그 말대로군.”
레페리는 강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사람의 얼굴을 보기 싫었고, 사람의 말소리를 듣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빈 들을 그저 걷고 있었다.
레카 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을 둘러본 후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그는 문득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어린애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좀 멀리 돌아서 갈까 하던 그는 아무 표지도 없는 황야에서 마을까지의 길을 찾아낼 자신은 없어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아이들은 높직한 둔덕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렇게 떠들어대서야 고기가 놀라 도망갈 테지만 아이들한테 그런 걸 일일이 말해줄 생각은 없던 레페리는 그냥 입을 다물고 지나치려 했다. 그 때 아이들이 그를 발견하고 일제히 외쳤다.
“나리, 안녕하세요!”
어른들이 그를 나리라고 부르니까 아이들도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만한 나이의 아이들한테는 그냥 아저씨라고 불리는 게 편한 레페리는 어색한 기분에 우물쭈물하다 한손을 흔들어줬다. 그 때 레페리는 아이들이 한 아이를 중심으로 몰려서있는 것을 보았다. 가운데에 서있는 아이는 월척이라도 건진 모양이었다. 이런 얕은 강에서 월척이라 해봤자 팔뚝만한 물고기 정도일 테지만 말이다. 지나쳐 가던 그를 아이들이 얼른 소리 질러 불러 세웠다.
“나리, 이것 좀 와서 보세요! 나리!”
“이것 봐요! 고기가 말을 해요!”
물고기가 말을 하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뭍에 끌려나온 물고기가 숨을 쉬지 못해 입을 뻐끔거리는 걸 보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야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레페리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농을 거는 줄 알고 농담으로 대꾸했다.
“너희들같이 쬐그만 꼬맹이들한테 잡혀서 억울하다든? 물고기들이 원수를 갚으러 윌더빌을 습격하기 전에 나는 얼른 도망가야겠구나.”
“그런 거 아니고요! 나리, 얼른 와보세요. 이 물고기 이상해요!”
이가 상해 뭉텅 빠져버린 물고기냐고 혼자 빈정거린 후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과연 팔뚝만한 월척을 낚아들고 있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려 아이들을 쳐다보며 입으로 붉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레페리는 어째선지 기분이 나빴지만 아이들이 내미니까 물고기를 받아들었다. 물고기가 토하는 붉은 피가 그의 손을 물들였다. 그는 개천에서 나는 생선에 피비린내가 욱할 정도로 많은 피가 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 그것은 레페리에게 시선을 맞추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억 · 울 · 하 · 오 · 억 · 울 · 하 · 오>>
“‥지금 이놈이 나한테 말을 한 거냐?”
아이들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페리는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전율이 흘러 물고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물고기에게는 성대가 없다. 말소리를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레페리는 짐짓 아이들을 무섭게 둘러보았다.
“네놈들이 어른을 놀리려고 장난을 치는 것이렷다. 이놈들, 재판관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또 장난치면 혼쭐을 내준다.”
“아, 아니에요! 나리, 우린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정말이에요! 이놈은 낚였을 때부터 이랬다고요!”
갑자기 물고기가 왈칵 피를 토해냈다. 폐병을 앓는 사람이 쏟아낸 선혈과도 같이 그것은 선명한 핏빛이었다. 물고기는 죽어가는 자가 마지막 힘을 다해 꿈틀거리는 것처럼 버둥거리며 외쳤다.
<<흙 · 내 · 가 · 난 · 다 · 네 · 놈 · 이 · 냐>>
물고기는 크게 몸을 꺾으며 들썩이더니 갑자기 굳어버렸다. 아이들은 겁을 먹고 레페리로부터 떨어졌다. 레페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이 담긴 빈 통에 물고기를 던졌다. 물고기는 물을 피로 흐리며 둥실 떠올랐다.
레페리는 얼른 강으로 내려가 손을 씻었다. 하지만 진득한 비린내가 배인 피는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손을 문질러도 피가 씻겨나가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지자 레페리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문득 그는 데오로 베이네딘이 마도사라는 것이 떠올랐다. 마도에 관해서는 쥐뿔만큼도 모르지만 그가 아는 개념 중에서는 그것밖에 이 물고기를 만족스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고기가 지껄인 말을 떠올렸다.
“흙내라고?”
그는 흙을 묻히며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에게 흙내가 배일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흙을 묻히고 일하는 어떤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이므로 물고기가 말한 흙냄새가 항상 배어있다.
갑자기 레페리는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물고기가 말을 했다는 황당한 장면을 봐버린 탓에 물고기 따위의 말을 중요한 단서인양 생각한 자신이 우스워서였다. 그는 겁먹은 아이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얼른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일, 일을 하자. 일이나 하는 거다. 제길.”
마을 사람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마을 곳곳에 모여앉아 웅성거렸다. 수사관들이 집집마다 뒤지고 마당을 파헤치며 의심스러운 물건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주점 앞에 모여 앉아있던 무리는 막 밭에서 돌아오는 스미스를 보고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이봐, 빌리. 쿨럭, 재판관 나리가 작심했어. 집집마다 들쑤셔놓고 있단 말야.”
빈센트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스미스는 어깨에 진 괭이를 내려 땅바닥을 짚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멍청이. 그래봐야 제깟 게 뭘 찾아내겠냐. 쓸데없이 겁먹지 마. 정 무서우면 술이나 퍼마시고 자빠져 자면 되잖아. 담배를 안 태우니까 골통마저 연기가 돼버렸냐?”
“그, 그런가? 쿨럭.”
“자네들도 잊지 마. 우리는 하나야. 한 놈 낚이면 모조리 끝인 거야. 배신하는 새끼는 내가 먼저 목을 비틀어놓을 테니 알아서 처신들 잘 해.”
사내들은 긴장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스는 히죽 웃으며 사내들의 등을 찰싹 때렸다.
“자, 자. 시시껄렁한 소린 그만 두고, 마시자고. 마시고 죽어보자! 오늘은 내가 쏜다!”
사내들은 불안해하면서도 헤죽 웃으며 주점에 몰려 들어가려 했다. 레페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웃음은 밤새 이어졌을 것이다.
사내들은 레페리에게 일단 모자를 벗으며 굽실거렸다. 레페리도 모자에 손을 대 간단히 답했다. 사내들은 재판관의 손에 선혈이 묻은 것을 굳은 얼굴로 힐끔거렸다.
레페리는 싱긋 미소까지 띠며 스미스에게 말했다.
“좋은 저녁이오, 스미스 씨. 알다시피 지금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조사 중인데, 예외가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의 원성을 사지 않겠소?”
“내 집은 이미 조사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뎁쇼. 제일 먼저 쳐들어오지 않았소?”
“아, 집에 있는 물건들이야 조사가 끝났죠. 나는 지금 스미스 씨가 들고 있는 괭이를 말하는 겁니다. 그건 오늘 하루 종일 집을 비운 스미스 씨가 계속 들고 다닌 거니 말이오.”
사내들은 스미스를 쳐다보았다. 스미스는 거만한 낯으로 괭이를 던졌다. 던질 줄은 몰랐던 레페리는 제대로 받지 못해 그것을 떨어뜨렸다.
“맘대로 하슈. 거기서 뭘 더 찾아낼지는 모르겠지만.”
사내들은 굳은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띠며 서둘러 주점에 들어갔다. 레페리는 주점을 향해 주먹을 을러댄 후 괭이를 집어 들었다. 괭이의 날을 살펴본 그는 날이 자루에 이어지는 그 꺾인 부분의 폭이 손가락 길이인 걸 확인했다. 이 마을의 어느 괭이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괭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때 그에게 다가오던 수사관이 흠칫 놀랐다.
“재판관 님, 손에‥.”
“낮에 강에 갔다가 이상한 게 묻었네. 신경 쓸건 아니야.”
“아니, 손에 든 그거, 핏물입니까? 그게 괭이에 묻는데요.”
수사관은 레페리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핏물은 말라있었다. 그게 괭이에 묻는 건 이상한 일이다. 레페리는 괭이를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든 핏물이 빠지고 있었다. 대신 손이 지나간 자리에 녹색물이 얼룩덜룩하게 묻어났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진 레페리는 괭이를 수사관에게 내밀었다.
“나도 핏물이라 생각했는데, 풀물인가? 젠장, 기분 정말 더럽군. 일단 이거 압수해. 좀 더 조사해봐야겠어.”
손으로 잡은 부분에 모두 녹색물이 든 건 아니었다. 사람이 괭이를 잡고 휘두를 때 붙잡는 위치, 그리고 괭이 날의 꺾인 뒷목에 짙은 물이 들었다. 레페리는 급히 언덕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제 물고기가 말하는 현상을 단순히 이상한 일로 웃고 넘길 수 없게 되었다.
빈센트는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항상 어울리는 왈패들과 더불어 코가 비뚤어지도록 퍼마셨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은 이상스레 무언가에 옥죄임 당하는 기분이었다. 잠깐 잔을 놓고 멍하니 있기만 해도 몸속 깊은 구석에서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에 놀라 그는 일부러 요란하게 웃어대며 연거푸 잔을 들었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자정을 넘겨버려 주점주인이 슬슬 널브러진 주당들을 정리할 무렵 빈센트는 쓰러진 동료들을 내버려두고 혼자 주점 밖으로 나갔다. 취할 대로 취해 걸음마저 비척거렸지만 그의 정신은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그는 밤바람에 몸을 떨며 서둘러 집을 향해 갔다.
문득 담배가 절실해진 그는 습관적으로 파이프를 꺼내 문 후 주머니를 휘저어보았다. 잠시 후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파이프도 집어넣어버렸다.
서울에서 온 검은 옷의 남자들은 지금쯤 마을에서 압수한 물건들을 조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오늘이라면 강에 나가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수중에 없다는 게 너무도 불안했다.
빈센트는 마을 밖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강에서 올라온 차가운 안개가 마을 입구로부터 빈 들에 이르기까지 사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 안개를 틈탄다면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 없이 강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레카 인이 묻혔던 곳에 닿자 그는 팔을 걷어붙인 후 조심스레 금줄을 넘어 강으로 들어갔다.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린 진흙땅에 한두 개의 발자국이 더 더해진다 해서 누군가가 쉽게 알아볼 리는 없었다. 빈센트는 안개 때문에 달빛조차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강에 코를 박다시피 고개를 들이대고 강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두고 간 물건이 있는 모양이지?>>
빈센트는 차가운 물속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벌벌 떨며 주위를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주위는 막막하게 시야를 가리는 안개뿐이었다. 헛것을 들은 게 틀림없다. 술이 과했던 모양이다. 그는 안면근육 전체를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서려고 강바닥을 짚다가 강 한가운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스르륵 걷혔다. 그 뒤에서 도우포가 벗겨진 레카 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붉은 불길이 쏟아져 나와 그를 태워 죽여버릴 듯이 이글거렸다.
<<너희 피 묻은 자들을 내가 쉽게 잊으리라 생각했나.>>
그 얼굴과 목소리는 분명 그의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넘어진 채 뒤로 물러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미끈거리는 진흙 때문에 제대로 발을 디딜 수 없어 오히려 물만 잔뜩 뒤집어썼다.
“아, 쿨럭, 아니야! 허슬 나리가 시켰어, 시킨 거라, 쿨럭, 시킨 거라고! 네 겉옷이랑 칼을 가져다주는 대신 우릴 눈감아준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쿨럭쿨럭, 네놈이 허슬 나리도 데려간 거 아냐!”
레카 인의 유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물 한가운데에서 서서히 움직여 강변으로 다가왔다. 빈센트는 발버둥치는 것도 잊고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다가오는 유령을 쳐다보았다. 되지도 않는 기도문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미사 시간에 졸기만 했던 그가 기억해낼 수 있는 건 몇 마디도 되지 않았다. 그사이 유령은 자신의 시체가 버려진 구덩이에서 다섯 발짝 앞에 멈춰 섰다.
<<허슬을 데려간 건 내가 아니다. 하지만 사신의 결정은 옳았군.>>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나는 살려, 쿨럭, 살려줘! 네 머리를 깐 건 빌리지 내가 아니야! 사람 죽이긴 싫었지만 빌리가 안 끼면, 쿨럭, 가만 안 둔다 해서 때린 거야! 쿨럭, 난 몇 번 차지도 않았어, 나는 널 죽이지 않았다고! 제발 죽, 쿨럭, 죽이지 마!”
빈센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엎드려 물속에 이마를 박은 채 흐느껴 울었다. 유령은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때 안개 속에서 묘하게 경쾌한 목소리가 말했다.
“자, 여기까지. 살기(殺氣)는 관둬요, 레르다이 씨.”
“괜찮은 낚시터라더니만 허, 정말 월척이 낚였구먼.”
어디에 숨어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강둑 위의 안개 속에서 슥 나타났다. 브네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페리는 말없이 빈센트를 노려보았다. 들어 올린 손으로 얼굴에 칠한 피를 닦아낸 레르다이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찌나 창백한지, 막 건져 올린 익사체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든 빈센트는 아까까지 여기에 없던 사람이 두 명 더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주위를 휘 둘러보며 눈을 꿈뻑이던 그는 갑자기 새된 소리로 버럭 고함쳤다.
“일부러 네놈들이 여기서‥!”
“응, 그 일부러다.”
“우, 왜, 왜 하필 나요?”
“스미스의 친구니까. 그래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법.”
이런 데서까지 농담을 하려 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레페리는 이스갈 인답지가 않다. 브네로는 속으로 레페리에게 야유를 보낸 후 얼른 말을 잘라 들어갔다.
“이 더운 여름에 감기라니, 이상했거든요. 제가 여기서 주은 돌조각을 보고 처음에는 사체를 발굴할 때 삽질하다가 깬 건가 했죠. 그게 맞긴 한데, 이게 부싯돌이 깨진 거더라고요. 레페리 씨한테 물어보니 수사관들 중에 부싯돌을 잃어버린 사람은 없더군요. 이 부근은 낚시하기 좋은 곳이라 꼬맹이들이 자주 다녔던 곳이죠. 애들은 부싯돌을 쓰지 않아요. 그럼 어느 부주의한 어른이 흘렸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귀한 부싯돌을 죄를 지은 자리에서 잃어버린 바보치고 찾으러 다니지 않을 사람이 없잖아요? 그게 물속이라 해도 말이죠. 더군다나 십 수 일 동안 금연을 강요당하고도 담배냄새가 풀풀 나는 애연가라면.”
브네로는 주머니에서 깨진 돌조각을 꺼내들었다. 빈센트는 당황해 그것을 빼앗으려고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진흙을 밟고 미끄러졌다. 첨벙! 레페리는 즐거운 듯이 혀를 차며 그를 끌어올렸다.
“쯧, 더운 낮에 강물을 뒤집어쓰면 어찌 됐든 감기는 걸리지 않아. 하지만 차가운 밤에 물장구를 치면 백이면 백, 감기에 걸릴 수밖에. 당신은 한밤중에 이 부싯돌 하나를 찾으려고 수시로 강을 들락거렸어. 이 부근에 널려있던 발자국이나 꺾여있던 갈대 같은 건 보안관이나 사체발굴자가 부주의한 탓도 있지만 당신도 일조한 바가 있지. 이미 엉망이 된 데니까 자신이 드나들어도 티가 안 나리라 생각했나? 그런 건 물속으로 걸어 다닌 스미스를 본받았어야지.”
“으극‥!”
“자, 방금 우리 앞에서 떠들어댄 이야기를 모레 법정에서도 고스란히 증언해주길 바란다. 스미스한테 죽기 싫으면 순순히 협조하고 우리 보호를 받는 게 현명하겠지.”
“이‥ 거, 쿨럭! 거짓말쟁이들! 아무도 네놈들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레페리는 먹이를 수중에 가둔 육식동물처럼 씩 웃었다.
“그런 건 법정에서 알아보자고.”
2.
“아, 젠장. 언제 보내주는 거야.”
브네로는 팔베개를 하고 누운 채 무릎 위에 얹은 다리를 까딱거렸다. 차디찬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에 뒷골이 섬뜩하긴 했지만 몇 시간이고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건 벌 받는 기분이 들어 싫다. 다리를 흔드는 것도 귀찮아진 그는 게으르게 이리저리 뒤척이며 배를 북북 긁었다. 그 꼴을 노려보던 보안관은 버럭 소리 질렀다.
“네놈이 지금 처한 처지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군! 똑바로 앉지 못해? 두 손은 다 내가 볼 수 있게 무릎 위에 올려놔!”
브네로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고는 기지개까지 폈다. 목을 이리저리 비틀어보며 그는 보안관이 벌게진 얼굴로 뭔가를 열심히 휘갈겨 쓰는 것을 구경했다. 유치장 창살 사이로 저편 벽에 주렁주렁 걸린 채찍과 경봉들이 보였다. 하지만 책상은 하나였기에 브네로는 보안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보안관님. 이 동네를 보안관님 혼자 지켜요?”
“무슨 소리야?”
“부하 없냐고요. 이거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골낼 준비부터 하진 마시고.”
“네놈이 그런 거 알아서 뭣에 쓰려고? 탈옥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브네로는 딱히 대꾸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보안관이 불퉁거리며 작성하는 서류는 브네로의 무혐의를 인정하니 풀어준다는 내용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침에 보안관이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쳐들어온 레페리가 소령의 집 노예들을 동원해 알리바이를 증언케 한 데다, 제인이 직접 찾아와 그는 범인이 아닌 듯하니 풀어달라고 설득한 덕이었다.
잠시 후 보안관은 그를 째려본 후 유치장 문을 열고 서류를 집어던졌다.
“갖고 꺼져.”
보안관의 말버릇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굳이 성질을 돋울 필요는 없다 여긴 브네로는 서류를 읽지도 않고 돌돌 말아 주머니에 꽂아버렸다. 늘 허리에 매달려있던 검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자 몸의 중심이 다른 방향으로 쏠려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그는 유치장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칼은 언제 돌려줘요?”
“살인에 쓰인 흉기다. 증거 1호란 말이야. 줄 성 싶냐?”
보안관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더 이상 따지는 건 무의미하기에 브네로는 즉시 사무실을 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만, 에페이도를 빼앗긴 이상 그조차 뜻대로 할 수는 없다. 에페이도는 단순히 에페오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에페오로 선택된 가문의 소유물로 선대의 지혜를 잇는다는 뜻에서 반드시 후대에게 전해줘야 할 물건이었다. 좋든 싫든 허슬 소령 살인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어 검을 돌려받을 때까지 그는 이 마을에 있어야만 한다.
초상을 치르게 되어 소란스러운 소령의 집에는 가봐야 할 일도 없고 괜한 눈치만 보일 것이다. 레페리의 일을 돕는 척 그쪽 구경이나 가는 게 당장으로선 유일한 일거리가 될 것 같다. 소령의 죽음으로 더욱 차가워진 주민들의 시선을 느끼며 그는 마을을 가로질러 강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레페리가 강바닥을 조사하러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붉은 기가 꽂힌 현장은 찾아냈지만 그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 말씀이 옳아. 가는 날이 장날인 법이지.”
따로 갈 데도 없다면 사람의 눈이 없는 곳에서 시간이나 보내는 게 낫겠다. 브네로는 현장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좀 떨어진 강둑으로 갔다. 마른 흙바닥을 찾아낸 그는 거기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은 신나게 졸졸거렸다. 시원한 바람이 강을 스칠 때마다 갈대가 서로 비비며 버석거렸다. 맑은 하늘에는 몇 점 안 되는 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인간에게 일어난 일 같은 건 이들 앞에서는 이야깃거리조차 못 되는 듯했다.
문득 인기척을 느낀 브네로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듬성듬성 우거진 갈밭을 헤치고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레페리인가 싶어 일어선 브네로는 그 사람의 복색이나 걸음걸이가 그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낯선 이는 염소털로 짠 두루마기 같은 긴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브네로가 아는 게 맞다면 그것은 레카 인들의 전통의상인 도우포였다.
피차 얼굴을 알아볼 거리까지 다가오자 낯선 이는 모자를 벗었다. 백색증 환자처럼 흰 머리칼과 붉은 눈이 드러났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카 인은 멍하니 쳐다보는 브네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유창한 이스갈 어로 말했다.
“실례합니다. 윌더빌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요?”
그 말이 자신에게 향한 거란 걸 겨우 알아차린 브네로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 강을 따라 북쪽으로 쭉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여도 되겠습니까? 여긴 이스갈 남부인데‥.”
“부에노소 분이니까요. 레카 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분들이지요.”
브네로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레카 인 청년의 앞을 막아섰다.
“유감스럽게도 윌더빌은 부에노소 인의 마을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최근에 인근에서 레카 인이 살해당했습니다. 되도록이면 멀찍이 돌아서 가시는 게 좋겠네요.”
“데오로 베이네딘이 살해된 걸 알기 때문에 왔습니다. 저는 그의 동생입니다.”
브네로는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는 붉은 기가 너무 잘 보였다. 바로 저곳이 이 레카 인의 형제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 곳이란 걸 알려줘야 할지 망설여졌다. 청년은 그가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깃발이 꽂힌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네로는 얼른 뒤쫓아 갔다.
청년은 새끼줄이 쳐진 자리를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죽은 자의 냄새가 나는군요.”
브네로는 코를 킁킁거렸다. 사체를 발굴한지 꽤 되었기 때문에 썩는 냄새 같은 건 없었고, 강 특유의 물비린내만 느껴졌다.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브네로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마도사이십니까?”
“아니오.”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레카의 언어로 고인을 위한 기도라도 올리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청년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강둑으로 올라왔다. 그는 윌더빌을 향해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브네로는 재빨리 그를 뒤쫓았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청년이 먼저 말을 붙였다.
“윌더빌에 묵으십니까?”
“아, 예. 다른 사건에 말려드는 바람에 떠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데오로의 일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는지요.”
브네로는 오늘 강에 나오지 않은 레페리가 괜히 원망스러워졌다.
“제가 아는 건 아직 범인을 알 수 없고 흉기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입니다. 자세한 건 재판관으로 파견된 크리스토퍼 레페리라는 사람에게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살해되었다는 건 어떻게 알고 탄원하신 겁니까?”
“레카의 수장에게는 마도사로 운명 지워진 자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분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데오로 씨가 마도사입니까?”
“예. 그러니까 분명 마도사다운 방식으로 어딘가에 증거를 남겼을 겁니다.”
다잉 메시지가 있다면 진즉에 수사관들이 찾아내지 않았겠느냐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브네로는 침을 꿀꺽 삼켜 침묵했다. 이 청년은 레카 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게 분명한 피해자의 동생이다. 그는 정말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험한 이곳까지 직접 오셔야 했습니까?”
청년은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가 떨렸다. 모자챙에 가려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청년이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브네로가 잠시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보는 사이 청년은 눈가를 슥 훔쳤다.
“형제니까요. 저에게는 그의 안식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브네로는 여전히 먼 하늘에 시선을 둔 채 머리를 긁적였다. 이 청년은 마도사가 아니라고 했다. 일단 보이는 행색으로는 형제의 죽음을 알면서도 납득할 수 없어 먼 곳에서 달려온 평범한 유가족이었다. 레카 인들에게도 에페오나 재판관 같은 제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 해도 이 청년이 그런 직분을 가졌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혈기에 자신이 살해당할 수 있음에도 무작정 달려오고 본 젊은이 같았다. 신화 시대에는 명부(冥府)의 입구가 레카 계곡에 위치했더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대륙에서 가장 죽음과 가까이 지내는 레카 인이라지만 가족의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건 여느 민족들과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브네로는 갑자기 간밤의 사건을 떠올렸다.
청년은 브네로가 멈춰 서서 턱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중얼거리자 이상한 듯 돌아보았다. 브네로는 부에노소 말로 뭔가를 더 중얼거린 후 눈에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레페리가 봤다면 ‘드디어 볕이나 쬐던 사자한테 발동이 걸렸다’며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군요. 가족이니까요.”
그는 청년에게 주의를 주려던 것도 잊고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향해 갔다. 청년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쫓아 걸었다. 마을 입구가 보일 만큼 가까워진 곳에서 브네로는 레페리가 수사관들과 몰려나오는 걸 보고 손을 흔들었다.
“레페리 씨! 지금 안 바쁘다면 저랑 차나 한잔 하시죠!”
“이제부터 강바닥 뒤지러 갈 거야. 바쁘다고.”
“에이, 그딴 요식행위는 부하들 시키고요. 저는 급해요.”
요식행위라는 말에 수사관들의 딱딱한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런 걸 못 본 척하며 브네로는 레페리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레페리는 수사관들에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하고 순순히 따라갔다. 그는 브네로의 뒤에 서있던 청년을 흘깃거리며 수군거렸다.
“이봐 이봐, 제정신이야? 레카 인을 이 마을에 들여서 또 시체 치우고 싶어?”
“피해자의 동생이라는데요. 멀리서 애써 와줬는데 당신이 좀 지켜줘요.”
“바보 같은 소리. 이 친구까지 마을에 들이면 안 그래도 비협조적인 마을 양반들이 옳다구나 더 등 돌릴 거라고. 수사가 제대로 되려면 이 작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말이야.”
말을 하는 사이 그들은 마을 중앙의 공터까지 왔다. 몇 명의 남자가 낡은 상복을 입고 주점 앞 계단에 걸터앉아 잡담을 나누다가 그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일어서면서 브네로와 청년에게 곱지만은 않은 시선을 던졌다. 레페리는 얼른 손을 번쩍 들었다.
“안녕들 하시오. 허슬 소령의 장례를 도우러 가는 거요?”
“예, 나리. 쿨럭, 쿨럭. 우리는 그분의 땅을 부쳐먹던 사람입지요. 이런 때에 돕잖으면 언, 쿨럭, 언제 또 돕겠습죠?”
허리가 굽은 편인 남자는 잔기침을 뱉어가며 히죽 웃었다. 브네로는 낯을 찌푸렸다. 그 남자가 숨을 뱉을 때마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 알싸한 것 같으면서도 구역질이 치밀게 독한‥. 레페리는 놀랐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라, 빈센트 씨는 감기입니까?”
“그게 낚시를 갔다가 그만 물에 빠져서, 쿨럭쿨럭. 헤헤.”
남자들은 레페리에게 굽실거렸다. 그 중 유일하게 굽실거리지 않고 거만하리만치 턱을 쳐든 채 엉뚱한 곳을 보던 남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툭 던졌다.
“나리는 쓸데없는 친구가 꽤 많수.”
레페리는 씩 웃기만 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남자들은 레페리의 등을 향해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그 남자만은 허리에 손을 얹고 그들의 등을 쏘아보았다.
마을 복판에서 멀어져 언덕을 오를 무렵 레페리가 입을 열었다.
“거기 레카 분은 성함이?”
“레르다이 베이네딘입니다. 죽은 데오로의 동생입니다.”
“무모한 짓 하셨습니다그려. 이스갈레아야 양식인인 척 하기 좋아하는 작자들이 많으니 이민족도 마음대로 다닙니다만, 이런 촌에선 좋은 꼴 보기 어렵습니다. 머리 염색이라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네로는 레르다이가 레카 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형을 생각해 일부러 레카 인임을 드러내고 다니는 게 아닌가 추측했다.
“참, 베이네딘 씨.”
“이름으로 불러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아, 예. 레르다이 씨. 저 두목 아저씨가 아까 말한 레페리 씨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저분께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레페리는 뒤를 휙 돌아보며 브네로에게 주먹을 을러댔다. 브네로는 낄낄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레페리는 좀 더 엄격한 표정으로 얼굴을 고친 후 레르다이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남자들 중 내 교우관계에 대해 잘난 척 하던 친구는 특히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빌리 스미스라는 소작농인데, 이 마을 사람들은 저 친구의 말을 잘 따르죠. 당신의 형을 살해한 게 아닌가 의심이 가는 자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레르다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레페리는 흥분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제가 비록 폐하께서 권한을 위임해 파견한 재판관이라지만, 이 마을에서 저 친구를 함부로 다뤄도 될 정도의 위세는 없습니다. 당신을 보호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당신이 제 눈 닿는 데에 있을 때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혼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특히 밤에는 절대 외출하지 마십시오. 기왕 오신 거 쫓아낼 수는 없으니 지금 제가 묵는 곳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만, 그 집 역시 바로 어제 재난을 당해 상황이 좋지 않으니 되도록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십시오.”
“새겨두겠습니다.”
레페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문의 문고리를 두드렸다. 상복 차림의 노예가 문을 열어주다가 청년을 보고 멈칫했다. 레페리는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정원에는 무장한 남자가 몇 명 어슬렁거렸다. 레페리는 브네로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설명해줬다.
“보안관의 부하들이야. 윌더빌 같은 촌구석에 끌려와 지금 상당히 저기압이지.”
“보안관 씨한테 부하가 있긴 있었군요. 그런데 레페리 씨가 이 사건을 조사하는 거 아니었어요?”
“응? 나 아냐. 이건 보안관 담당이야.”
“어째서 그렇게 되는데요?”
“그러고 보니 이스갈의 법을 자네가 알 리는 없겠군. 자네들 부에노소 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 에페오인지 에페이아인지 하는 인근의 덕망 있는 어른에게 해결을 맡기지만, 이스갈에서는 국가에 진정해. 어느 기관에 진정했는가에 따라 사건을 맡는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지. 보통은 도시의 행정관에게 진정하네. 행정관도 없는 이런 작은 마을의 경우에는 마을을 관할하는 보안관이 다 맡지만 말이야. 레르다이 씨의 경우는 피해자의 유가족이 이스갈레아에 상경해 직접 법무부에 탄원한 경우지. 둘의 차이는 알 수 있겠지?”
“레카 인은 이민족이죠. 이해했네요.”
이스갈의 법은 타 민족이 이스갈에서 재판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카 인도 이스갈의 행정관이나 보안관에게 탄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마을을 관할하는 보안관이라면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면식이 있어 외부인에 대해 치우침 없는 판결을 내릴 확률이 낮다. 하물며 이스갈 인들이 두려워하는 레카 인에 관한 것이라면 뻔한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보안관이나 행정관 레벨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을 탄원하는 곳이 법무부이겠지만 외국인의 경우에는 작은 일도 안심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외국인이 이스갈 인을 상대로 재판을 청해야 할 경우에는 법무부에 직접 탄원하는 게 거의 관습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본채를 지나 작은 정원에 다다랐을 때 문득 생각난 것처럼 레페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달밤에 현장조사 가는 것도 거부한 자네가 왜 갑자기 차나 한잔 하자고 한 건가?”
“허슬 소령 건 관련해서 할 말이 있거든요.”
“내, 일단 레르다이 씨의 거취에 관해 허슬 부인께 허락을 받은 후 자네 방에 가겠네. 사람이 죽으면 외부에서 아무나 받지 않는 금제가 있단 말일세. 부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을 이스갈레아 쯤 되는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단 말씀이야. 이해하시지요, 레르다이 씨?”
레르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페리는 마을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수사가 더 어려워진다느니 따위 소리를 주절거렸어도 멀리서 찾아온 피해자의 가족을 대번에 쫓아낼 만큼 매몰찬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걸 생각하며 브네로는 미소 지었다. 그러는 사이 레페리는 안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브네로는 그 방향을 흘끔 바라보았다. 제인의 방 앞에는 금줄이 쳐져있었고 무장한 남자 두 명이 그 앞을 지키고 서있었다. 레페리는 그보다 더 안쪽의 방 앞에 갔다.
“일단 레르다이 씨는 자네 방에 모셔두게.”
레페리는 허슬 부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브네로는 레르다이를 끌고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갔다.
그는 레르다이를 앉혀둔 후 밖에 지나다니던 노예에게 부탁해 빵과 우유를 받아왔다. 레르다이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간단한 점심상을 받았다.
“이 집에서 상을 당했습니까?”
“그게, 어젯밤에 이 집 주인이 딸자식의 방에서 비명횡사했거든요. 누구 짓인지는 아직 모르고요.”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이 살인으로 귀착되는 것은 슬픈 일이군요.”
브네로는 좀 더 말을 돌려서 할 걸 그랬다며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려댔다. 눈앞의 청년이 식욕 없다는 표정으로 쟁반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민망해서였다. 그는 열린 덧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인이 상복 위에 망토를 두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딘가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역시 상복차림인 여자노예가 따라갔다. 노예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보고 브네로는 그녀들이 마을에 내려가나 생각했다. 그는 마침 장례식에 쓸 물건들을 큼직한 바구니에 잔뜩 담아들고 방 앞을 지나가는 젊은이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허슬 양께서 지금 어디 가시는지요?”
젊은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브네로를 쳐다보았다. 몸이 좋지 않은 건지 젊은이는 해쓱한 얼굴이었다.
“이웃 마을에 가시는 걸 겁니다. 허슬 씨의 마지막 길을 지켜줄 신부님을 모시러 가는 게지요.”
“살인범이 허슬 씨를 해친 이유도 아직 모릅니다. 그가 돌아와 아가씨마저 해칠 수도 있어요.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용감한 분입니다. 습격 같은 걸 두려워 할 분이 아니죠. 그리고 보안관님의 조수들이 마차를 몰 테니 괜찮습니다.”
대꾸를 마친 젊은이는 본채 쪽으로 걸어갔다. 젊은이의 흔들림 없는 걸음을 보고 브네로는 꽤 기운이 센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가 들고 있던 물건들은 놋쇠로 만든 촛대 같은 묵직한 금속제로 보기에도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잠시 후 레페리가 돌아왔다. 그는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거꾸로 돌려 앉았다.
“부인께서는 좀 어떠세요?”
“충격이 많이 진정된 듯 하군. 좀 쇠약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식사도 하셨다는군.
뭐, 허락하셨네. 다만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동안에는 되도록 방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었지만. 밖에 레르다이 씨께 방을 안내해줄 노예가 와 있소.”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페리 씨.”
레페리는 손을 휘저었다. 레르다이는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브네로는 레르다이가 나간 후 방 밖에 인기척이 없나 살폈다. 짧은 침묵 후 그는 덧창을 내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레페리는 그의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꽤 심각한 이야기인가보군. 뭘 그리 경계하는가?”
“부에노소 놈이 이스갈 인의 일에 참견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개인적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제가 헛짚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알아서 걸러 들으세요. 그리고 레페리 씨가 듣기에 그럴싸한 건 보안관한테 레페리 씨의 생각인 것처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네놈 꼭두각시냐? 영 탐탁찮다만 일단 들어나 볼까.”
레페리는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었다. 브네로는 일어서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레페리 씨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건 당신 관할이 아니라고 신경을 덜 쓰시는 것 같아서요. 저는 에페이도가 달린 거라 필사적인데 말이죠.”
“별로 필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충분히 필사적이라니까요. 아무튼 좀 들어봐요. 첫재로, 범인은 대체 왜 제 에페이도를 가져간 거죠? 아니, 저로 꾸밀 거면 그냥 칼집째로 가져가도 되잖아요. 왜 칼만 바꿔치기한 걸까요? 그렇게 계획적으로 꾸민 거라면 행동을 한 시점이 이상해요. 수도에서 재판관이 와 묵고 있는데 보란 듯이 집주인을 죽인다는 건 날 잡아보쇼라고 외치는 꼴 아니에요.”
“칼에 관해서는 확실히 의문이야. 그건 좀 더 조사해 봐야 하지 않을까?”
“허슬 씨가 쓰러진 방향도 좀 걸리는데요. 허슬 양의 말대로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습격당한 거라면, 아니 하다못해 습격자를 격퇴하려고 하기라도 했다면 침대에 그런 모습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요? 머리가 침대 바깥쪽을 향하고 몸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모습 말입니다.”
레페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정면으로 찔렸으니 등 뒤의 기습은 아니야. 눈앞에 있는 습격자를 눈치 채기라도 했다면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을 테니 머리는 침대 안쪽에 있고 다리가 밖으로 나오는 게 맞겠어. 어제의 모양새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손도 못 써보고 습격을 당했다는 거지. 하지만 제인 양 말로는 꽤 취해있다 했지 않나? 제인 양이 나간 후 누워있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이스갈 인들은 가족 간에도 엄청 격식 따지잖아요. 아버지가 다 큰 딸 처소에 취한 채 나타나도 되요? 제가 알기로는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을 만날 때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아내가 아닌 여자의 침상에는 아버지나 남자 형제라도 앉지 않고 어쩌고 하는 게 소위 잘 사는 이스갈 인의 예절 같던데.”
“귀족들이 그렇긴 해. 음. 취한 채 잠옷차림으로 딸의 방에 들어가는 건 좀 비상식적이기야 하지. 게다가 아버지라도 딸 앞에서는 의자에 앉지 침상에 앉지는 않아. 하지만 허슬 소령은 귀족은 아니라서 그런 걸 잘 지키지 않을 수도 있어.”
“무엇보다도, 왜 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데 따님과 부인께서는 그리 슬퍼 보이지 않는 거죠? 레르다이 씨는 자기 형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계곡을 떠나 이스갈레아에, 윌더빌까지 찾아왔어요. 그런데 왜 이 집 식구들은 이렇게까지 침착한 거죠? 부인께서는 레카 인인 레르다이 씨가 상중에 불쑥 나타났는데도 이러이러한 건 주의하라고 차분한 말씀까지 곁들여 숙박을 허락하시고, 따님은 침착하게 장례를 준비합니까?”
“그럼 남편이 죽으면 아내와 자식은 산발하고 쓰러져서 식음전폐한 채 통곡만 하고 앉아있어야 하냐? 자네가 이스갈 인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네만 모든 여인이 그러지는 않을뿐더러, 그런 게 상을 당했을 때의 예절이라고 누가 땅땅 때려 박아놓은 것도 아니야. 그리고 이건 자네가 몰랐을 텐데, 제인 양은 소령의 친딸이 아니야. 부인이 재혼하면서 데려온 의붓딸이지. 재혼한지 오래 되지 않았다면 그리 슬프지 않을 수도 있어. 사람 마음이 주위 환경이 변한 거 가지고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니까.”
정신없이 방안을 돌아다니던 브네로는 그 말에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 눈썹을 모았다.
“그건 그런가.”
“어쨌거나 자네의 말, 기억해 둘 가치는 있군. 하지만 보안관 놈이 들어줄지는 모르겠어. 일단 그놈에게 몇 마디 말은 걸어보지.”
레페리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몇 마디를 적어 넣었다. 브네로는 잠시 생각하다가 레페리가 일어나려 하자 얼른 말했다.
“아니오. 제가 허슬 양과 좀 더 이야기 해보죠. 그 후에 보안관 씨한테 말해도 늦지 않아요. 뭔가 중요한 것이 허슬 씨의 죽음 뒤에 숨겨져 있는 것 같긴 한데, 제가 지적한 것들 정도로는 아직 모르겠군요.”
“제멋대로군. 그래, 자네 맘대로 해. 허나, 에페이도는 안타깝네만 내 관할이 아닌데다, 나는 레카 인 사건이나 신경 쓰고 싶으이. 범인이 잡히자마자 돌려받도록 그 정도 조치는 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말라고.”
브네로는 툴툴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런 게 관료제의 폐해니 뭐니 중얼거리던 그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온 사람은 보안관의 부하였다.
“무슨 일인가?”
“보안관께서 용의자들을 심문하시겠답니다. 레페리 씨도 참석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알겠네.”
보안관보가 나가자 레페리는 수첩에 적던 것을 마저 적으며 일어섰다. 브네로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용의자가 벌써 잡혔어요?”
“자네가 유치장 신세를 지던 오전 내내 내가 뭘 했으리라 생각하나? 보안관 놈이 자네를 풀어주는 대신 어제 저녁 시간에 이 저택에는 있었고 식당에는 없던 자들을 색출해내라는 거래를 제안했네. 별 수 있나, 해줘야지.”
반나절 만에 그런 일을 해치운 레페리를 브네로는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페리는 씩 웃으며 문을 열었다.
“뭐, 감사하다는 말은 안 해도 돼.”
“알았어요.”
“‥보통 이럴 때 그래도 고맙다고들 안 하냐? 귀여운 구석이 없어, 자네는.”
레페리는 투덜거리며 나갔다. 브네로는 피식 웃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떤 사람들이 잡혀갔을까. 대부분 이 집의 노예일 것이다. 하지만 범인은 외부인일 수도 있다. 브네로가 마을에 나타나 소령의 집에 갔다는 소식이 마을 전체에 퍼지는 데에는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을 거라는 데에 그는 돈 한 푼을 걸 수 있었다. 또한 레페리에게 망토를 둘러준 이후 그가 허리에 찬 에페이도를 드러내 보이고 다녔으니 못 해도 대여섯 명의 주민은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비록 담장이 높다지만 브네로는 자신이 이 담을 혼자 힘으로 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의 장정들 중에도 담을 훌쩍 넘는 정도는 해낼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 범인이 용의자들 중에 없다 해도 레페리의 잘못은 아니다. 보안관이 건 조건은 ‘어제 저녁 시간에 이 저택에는 있었고 식당에는 없던 자들’이다. 짓궂은 레페리라면 조건에 충실하게도 그 말 그대로인 자들만을 골라다 내놓았을 것이다. 그라면 이제 심문을 참관하면서 그들 중에는 범인이 없을 수 있음을 천연덕스런 얼굴로 지적할 것이다.
브네로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말을 걸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 그는 본채에 닿았다.
앞문과 뒷문이 모두 열려있어서 안채 앞 중정에서도 본채 앞 정원이 훤히 보였다. 본채에 들어선 그는 식당의 반대쪽, 즉 응접실로 통하는 벽에 온통 이상한 문장이 들어간 깃발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흥미가 동한 그는 응접실에 들어가 보았다.
널찍한 응접실은 벽에 틈 하나 두지 않고 무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스갈의 전통무기로부터 북방 고원의 소수민족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의 의식에서 쓰는 가면에 이르기까지 온갖 민족의 물건이 고루 갖춰져 있어 무구 박물관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중에서 부에노소의 숏소드와 팔라까지 발견한 브네로는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뚱뚱한 여자 노예가 허리에 손을 얹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아니, 감시하고 있었다.
“아, 저기요.”
“노예한테 주인마님의 손님이 존대 쓰실 것 없어요. 그냥 말씀하시죠.”
왠지 들어가면 안 되는 집안 어른의 방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걸린 꼬마가 된 기분이라 브네로는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노예가 없는 부에노소 인의 관습에 익숙한 그는 신분을 이유로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에게 함부로 반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일단 말을 걸 사람을 찾았다는 것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허슬 양은 언제 돌아오죠?”
“말 놓으시라니까요. 제가 뭐 아가씨를 감시하는 사람인가요. 성당은 반나절거리에 있으니 일러도 내일 점심에나 돌아오시겠죠. 뭔가 전할 말이라도 있어요?”
“그게, 레페리 씨가 찾으셨거든요. 간밤의 흉사와 관련해서 질문할 게 있다고.”
실은 자신이 볼일이 있었지만. 머쓱한 기분을 감추려고 브네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여기엔 신기한 게 많군요. 이게 다 뭐죠?”
“주인마님은 이민족의 무기나 뭐 전통옷 쪼가리인가 그런 이민족스러운 물건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어요. 저런 흉측스런 것들은 이제 좀 버렸으면 좋겠구만.”
노예는 투덜거렸다. 브네로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찬장 안에도 유리세공 같은 것 대신 각 민족들의 수갑(手甲)을 늘어놓고 손님과 마주앉는 탁자는 말안장 위에 방패와 창을 이어 붙여 만든 취미를 뭐라 일러야 할 지 알 수 없어 약간은 노예의 말에 수긍이 갔다. 그는 노예의 안색을 살피며 얼른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레페리는 저녁 식사시간을 한참 넘긴 후에야 돌아왔다. 그는 옷깃을 풀고 손을 파닥거리며 투덜거렸다.
“식당에서 자네한테 에페이도를 받아간 그 노예가 범인으로 몰리는 분위기더군. 쯧, 게으른 놈. 내가 지적한 자들이 용의자의 전부는 아니란 걸 끝까지 모르더군. 일단 아무나 한 놈 찍고 보자 이거지.”
“원인 제공자는 따지고 보면 당신이잖아요.”
“더 소급하면 자네야. 왜 에페이도를 차고 식당에 들어온 거야.”
브네로는 이스갈 인들이 식당에는 칼을 들이지 않는 관습이 있다는 걸 몰랐다. 레페리는 도중에 옷을 갈아입는다고 사라져버려 주의를 줄 틈이 없었고, 소령은 브네로가 검을 차고 있는 걸 뻔히 봤으면서도 식당에 들어간 후에야 그걸 알려주었다. 그 무기 매니아는 식사할 때 검 이야기가 나오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그런 건지도 모를 일이다. 브네로는 나름대로 항변하고 싶어졌다.
“더 더 소급하면 역시 당신이죠. 누가 내가 멧사자랑 결투를 했는지 사이좋게 술 마셨는지 관심이나 있겠어요? 그런 걸 뭣하러 말해서 소령이 검 이야기를 꺼내게 하냐고요.”
“자네가 부에노소 인이라고 무시당할까봐 그런 거야! 제길, 이런 식으로 가면 이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으니 그만 하자고.”
레페리는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잔에 찬물을 채웠다. 그가 냉수를 꿀꺽꿀꺽 들이켜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브네로는 덧창을 열어보았다. 레페리도 밖의 소란이 의아한 듯 창가에 다가왔다. 노예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누군가가 한 사람을 부축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브네로는 바람결에 옅은 피냄새가 실려 오는 걸 느꼈다.
그들이 안채에 다가오자 노예들이 든 촛불 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브네로와 레페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슨 일이야? 아니, 이건‥!”
두 사람은 즉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르고 단단한 체구의 젊은이가 부축해 들어온 사람은 레르다이였다. 그는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며 상처투성이가 된 채 혼절해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길에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이 레카 인, 나리께서 오늘 데려간 사람 맞죠? 마을 아래에서 웬 사람들한테 얻어맞고 있었어요. 제가 소리를 지르니까 다 도망쳤지만요.”
“아니, 이 사람 언제 나갔던 거야?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브네로는 당황하며 레르다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여럿에게 심하게 구타당하기는 했지만 일단 치명상은 없어 보였다. 젊은이가 부축한 모양새로 보아 머리 외에는 뼈가 상한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상은 외견으로는 알 수 없는 거라 안에 들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노예들이 레르다이를 그의 방으로 데려간 후 레페리는 젊은이를 돌아보았다.
“자네 이름이?”
“프랭크 가드너라 합니다. 허슬 씨가 고용한 일꾼이에요.”
“자네가 레카 인을 도운 걸 알면 스미스가 가만있을 리가 없는데, 괜찮겠나?”
브네로는 레페리를 쳐다보았다. 레페리의 표정에는 별달리 분노하거나 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젊은이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건 나리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제 일입니다.”
“그런가. 늦었으니 가보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해 내, 진심으로 감사하네.”
젊은이는 고개를 더욱 숙여 보인 후 터덜거리며 돌아갔다. 브네로는 그 뒷모습을 향해 중얼거렸다.
“낮에 봤던 그 힘 좋은 젊은이인가. 용기 있는 청년이군요.”
레페리는 침을 뱉으려다 자신의 집이 아님을 생각해 멈추고 대신 혀를 찼다.
“무모한 거야. 나 원, 누구처럼 이 마을에 잠시잠간 머물다 가는 것도 아니고, 계속 살 거잖아. 그런데 마을 유지들한테 미움 살 짓을 하다니.”
“말은 그러면서 기특하다는 얼굴이에요.”
“어쨌든 보다 확실해졌어. 나는 레르다이에게 린치를 가한 작자들이 이 마을 사람일 수도 있다고 돌려 말한 건데, 저 친구는 부인하지 않았어. 빌어먹을 스미스 놈, 내가 두 눈 뻔히 뜨고 앉아있는데 또 이런 짓을 한다 이거지. 내 교우관계가 어쨌다고? 두고 보렷다.”
레페리는 주먹을 쥐고 허공을 향해 을러대었다. 이번에는 브네로도 레페리의 행동에 웃지 않았다.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젊은이를 여럿이 달려들어 때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마을에는 의사가 없었다. 사람들이 의사 대신 찾던 노인들은 레카 인을 진찰하는 걸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급한 데로 브네로는 아렌체의 들에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레르다이를 직접 진찰했다. 그의 얕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청년의 생명은 무사했다.
아침이 되자 레르다이는 잠을 잔 사람이 깨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침대 옆에서 브네로는 창턱에 팔을 괴고 앉아있었다. 먼 하늘이 상당히 밝아졌기에 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무슨 돌조각 같은 것을 관찰하는 것이 잘 보였다. 레르다이는 벽 쪽으로 눈을 돌리고 쭈뼛거리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씀 하세요. 욕을 하셔도 좋습니다.”
브네로는 코를 훌쩍이고 돌조각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레카 인이라고 하면 흔히 악마나 귀신을 떠올리는데, 당신을 보고 있자니 뭐. 그냥 사람이구나 싶어지네요.”
“‥‥.”
“에이, 하고 싶은 말 하라 했으면서 괜히 삐지진 마시고요. 어제 강에 가셨죠?”
레르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브네로는 그가 밤중에 혼자 강에 간 이유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청년은 수사관들도 못 찾은 거지만 형이 분명 어딘가에 증거를 남겼으리라 믿고 있다. 하지만 브네로나 레페리는 같이 가기는커녕 무조건 외출을 말릴 것이며, 보안관에게는 말을 걸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적이 드물어질 밤에 혼자 나가보는 수밖에 없다. 브네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은 마음 졸인다고 풀리는 게 아니에요. 때로는 때가 되기까지 진득하게 기다릴 필요도 있죠.”
“하지만 이미 반달이 지났는데도 흉기조차 찾지 못한 건 말이 안 됩니다.”
“당신이 탄원한 게 접수되어 레페리 씨가 여기 온 때로부터 세면 2순도 안 지났습니다. 어제 일을 잊지 마세요. 형님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당신 목숨이 먼저 날아갈 뻔 했습니다.”
레르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네로는 혼내는 건 그쯤으로 충분하다 판단하고 이야기를 돌리기로 했다.
“어찌 됐든, 어제 당신을 습격한 작자들이 데오로 씨를 습격한 범인들과 동일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얼굴이나 목소리, 체격, 사용한 물건,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들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는지요?”
“글쎄요. 강가는 안개가 짙어서 주위에 누가 숨어있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뒤에서 머리를 치고 자루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는 무작정 때렸지요. 맞다가 정신을 잃어버려 더는 기억나는 게 없군요. 아, 그러고 보니 한 사람은 계속 기침을 해대는 것 같았지만‥.”
브네로는 머리를 긁적인 후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 분 형제의 복수는 레페리 씨가 확실하게 해주실 테니, 앞으로는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오늘은 방에서 푹 쉬시고요.”
방을 나온 그는 뭔가를 생각하더니 레페리의 방으로 갔다. 레페리는 식빵 조각을 우물거리며 여러 서류를 대조해보고 있었다. 묻는 얼굴에 브네로는 간단히 대답했다.
“치밀하네요. 자루를 씌우고 때렸답니다.”
“놈들의 얼굴을 모른다는 건가. 가드너 씨 이야기도 들어봐야겠군.”
“모를 일이죠. 그 사람도 간밤에 습격당해 협박을 받았을지 죽어서 어디 묻혀버렸을지.”
“아침부터 시니컬하게 굴지 말라고. 수사관 한 명을 그 친구한테 붙여뒀어. 놈들도 그 정도 바보짓은 안 했을 거야. 어쨌거나 이게 부검 기록인데 한번 보려나?”
브네로는 레페리가 넘겨준 서류를 대충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그의 눈을 멈추게 한 것은 두개골의 골절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림은 꽤 정확하게 묘사해서 직접 시체를 볼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위치는 뒤통수의 오른쪽 윗부분으로, 옆으로 휘둘러 때렸다기보다는 위에서 내려친 모양이었다. 뼈는 손가락만한 길이의 누운 타원형으로 부서졌는데 뼛조각이 날카롭게 깨져나간 것이 아니라 잔금이 잔뜩 간 채 함몰된 모양새였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때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함몰된 폭이 몽둥이 같은 일반적인 둔기로 때렸다고 하기에는 좀 좁아보였다.
“도끼의 등을 눕혀서 휘두르면 이런 자국이 나려나? 역시 주민들이 가진 쇠붙이를 다 조사해야 한다니까요.”
“안 그래도 오늘은 그럴 작정이야. 권력의 횡포니 뭐니 지껄여도 모조리 조사하고 말테다. 그러니까 가드너 씨랑 대화하는 건 자네가 해.”
레페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브네로는 관자놀이에 절로 핏대가 서는 걸 느꼈다.
“이봐요, 아저씨. 나 지금 무료봉사를 강요당하는 기분인데, 애초에 이 마을에는 하룻밤 묵을 자리 외에는 볼일도 없던 처지입니다. 에페이도만 아니었으면 어제 날이 밝자마자 이런 흉한 동네를 떴을 거라고요. 이민족한테 다 떠넘기지 말고 일 하시죠, 아저씨.”
“알았으니까 대화 좀 해. 보안관 놈은 신고 들어오지 않는 한 절대로 나서서 조사해줄 리가 없으니 선수 치란 말야. 허슬 부인이 자네를 쫓아내지 않고 무기한 묵게 내버려둔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엉뚱한 허슬 부인을 들먹이냐고 화를 내는 대신 브네로는 투덜거리며 방을 나갔다. 그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에페이도가 보안관 사무실에 모셔져있는 한 이 마을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돌려받을 날만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뭔가 일이라도 하는 게 시간을 때우는 데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설령 일거리가 남의 일을 억지로 떠넘겨 맡은 거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브네로는 허슬 부인에게 부탁해 가드너를 오전 일에서 빼내었다. 가드너는 반나절동안 잡일을 하지 않아도 된 것이 그리 기쁘진 않은 표정으로 그의 방에 들어왔다. 브네로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발더스입니다.”
“예, 선생님.”
“우선 어제 레르다이 씨를 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브네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드너는 허둥거리며 같이 고개를 숙였다.
“레르다이 씨의 일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 모셨습니다. 저는 레페리 재판관의 비공식조수(이 말을 할 때 브네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찌그러졌다) 역할로, 제가 보고 들은 정보는 모두 레페리 씨에게 바로 전달됩니다. 이스갈의 국왕께서 직접 임명한 재판관인 만큼, 그분이 내리는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이야기에는 거짓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가드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나 재판관을 거론해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이, 권력 같은 것에 이유 없이 짓눌리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더라도 처음 보는 이방인의 생명을 구하러 달려들 용기가 있는 자다웠다.
“먼저 가드너 씨에 관해 간단히 여쭙겠습니다. 이 마을 분이십니까?”
“아뇨. 서머빌이라고, 여기서 닷새 거리인 마을 출신입니다. 허슬 씨가 별장을 관리할 잡일꾼을 모집할 때 돈벌이가 될 것 같아 왔어요.”
“오래 일하셨나요?”
“한 2년 됐네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 어제 일에 관해 여쭙겠습니다. 린치 현장을 목격한 건 언제쯤이었습니까? 위치는요?”
“대략‥ 셀파투겐이 질 무렵이었을 겁니다. 레카 인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 근처였고요.”
“저라면 오밤중에 그런 곳에 가고 싶진 않을 텐데‥.”
“저도 싫은 곳이에요. 하지만 데이브네 집, 그러니까 술집에 가려고 나와 보니 마침 그 레카 인이 보였고, 그 뒤로 웬 놈들이 쫓아가는 게 심상치 않아서 뒤를 밟아본 것뿐이에요.”
“흠, 그래요. 몇 명이었습니까?”
“다섯 명? 여섯 명 쯤?”
“체격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옷차림이랄지, 그들에 대해 생각나는 게 있으신지요?”
“그다지‥. 보통 키에 보통 체격에, 그랬던 것 같네요. 옷차림 같은 건 기억나지 않아요. 어차피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무엇을 쓰던가요?”
“한 사람이 작대기인지 뭔지 뭔가 길쭉한 걸 들고 있었던 것 같네요. 다른 사람들은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고 있었죠.”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오. 안개가 짙은 데다 그들은 말소리도 내지 않았어요.”
“어디로 달아났습니까?”
“강 아래로요. 그쪽은 아무것도 없는 황야죠. 이 마을에서 사흘거리에 미트라다스와의 국경이 있어서, 그 사이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군인들이 지킬걸요.”
브네로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어제부터 다시 두 개의 달이 뜨기 시작했다. 붉은 달 셀파투겐이야 조그만 초승달인데다 금방 져버리니 무시한다 해도, 푸른 달 알트루겐은 이제 이지러지기 시작한 둥근 달이었다. 요 며칠 계속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으니 지독한 안개가 끼는 강가 주변만 아니라면 달빛만으로도 환히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남쪽이라, 페이크다. 강에서 조금만 벗어난다면 달아난 자들은 좀 멀리 돌아서 가더라도 달빛으로 길을 밝혀 마을로 돌아올 수 있다.
레르다이는 어제 마을에 왔기 때문에 밤이 되면 강에 짙은 안개가 끼는 걸 모른다. 안개는 시야를 가리고 주의를 흩는다. 그가 마을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은 안개가 낀 걸 이용해 습격했을 것이다.
안개를 틈타 뒤에서 한 방 먹인 후 여럿이 린치를 가하는 것은 어디서 한번 들은 적이 있는 패턴이었다. 데오로를 살해한 자들과 동일인물이라면 이것은 레페리를 비웃는 행동임이 분명했다. 그들의 뒤에는 같은 짓을 두 번 저질렀다가 발각되어도 배짱 좋게 굴 만큼 강력한 세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현재 이 마을에서 레페리를 눌러버릴 만큼 강한 권세를 가진 자는 보이지 않는다. 비교적 권세가 있다고 볼만한 허슬 소령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처지이다.
역시 도발일 뿐일까?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 어제 그 일 이후 당신에게 침묵을 강요하거나 협박한 자는 없습니까?”
브네로는 가드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드너는 잠시 주저했지만 눈을 돌리지 않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없습니다.”
“그런가요.”
“예.”
브네로는 가드너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약간 흔들리긴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 이상 묻는 건 의미 없다 여긴 브네로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빌리 스미스 씨를 아십니까?”
“아, 예.”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직업이랄지, 기분 나쁘면 혼자 삭히는 편인지 아니면 바로 주먹부터 내지르는 편인지 같은.”
“그 사람은 허슬 씨의 소작농 대표입니다. 대가 센 사람이라 허슬 씨가 소작료를 조금만 올려도 따지러 달려오곤 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그 사람을 신뢰해요.”
“마을 분들은 전체적으로 저 같은 이민족을 싫어하는 분위기던데, 스미스 씨도 그렇겠군요.”
“뭐 그거야‥ 이쪽 동네들이 좀 그렇죠.”
“스미스 씨랑 친한 분들에 대해 아십니까?”
가드너는 눈을 깜빡이며 답변을 주저했다. 그는 처음으로 브네로의 시선을 피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빌리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브네로는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려워 어깨를 으쓱였다.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가드너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네 명, 항상 빌리랑 붙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빌리가 하는 말은 다 옳다고 할 사람들이에요.”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로이, 빈센트, 알, 그렉. 모두 소작농들이에요.”
브네로는 눈을 감고 지금까지 들은 것들을 정리했다. 머릿속에서 목록을 정리해가며 곳곳에 밑줄을 그은 후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참, 그러고 보니 빈센트 씨는 감기에 시달리는 것 같던데 요즘 감기가 유행입니까?”
“아뇨. 그 사람만 감기입니다. 낚시 갔다가 물에 빠졌다더군요.”
“그 분 기침할 때 좀 이상한 냄새가 나던 것 같은데, 나쁜 병에 걸린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거 담배 냄새일걸요.”
“담배요?”
브네로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드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에노소 분들은 그거 모르나요? 이만한 잎을 말려서 둘둘 말아 태우면 연기가 나요. 연기를 마시는 건데, 좀 냄새가 독하죠. 미트라다스 놈들이라면 아무나 입에 물고 있는 그건데.”
“그렇구나, 그 냄새였구나. 아렌체에는 그런 풀이 안 자라거든요. 본 적이 있는 건데 기억을 못 했군요. 그렇지, 담배구나. 여기선 흔합니까?”
“으음, 글쎄요. 어둠의 루트라고나 할까‥. 아무튼 보안관한테 걸리면 잡혀가는 물건이에요. 미트라다스 놈들 물건이니까요. 이 동네 보안관이야 드러내놓고 피우지 않으면 아무 간섭 안 하지만.”
“알겠습니다. 담배, 담배.”
브네로는 신기한 것을 다시는 잊어먹지 않겠다는 듯 연신 중얼거렸다. 그 때 언젠가 응접실에서 브네로에게 투덜거리던 여자노예가 문 밖에서 툴툴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발더스 님, 아가씨가 돌아오셨네요.”
“고맙습니다. 가드너 씨, 죄송하지만 전 이제 다른 면담을 가야겠군요. 자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드너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방을 떠났다. 브네로는 깨끗하게 빨래를 끝낸 망토를 걸치고 모자는 벗어든 채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스갈의 여인들은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남자 가족이 동행하지 않는 한 가족이 아닌 남자와 단둘이 같은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브네로는 제인과 면담할 장소로 안채 뒤 후원을 택했다. 그는 살인현장이 직접 보이지는 않는 후원 왼편 나무 뒤에 의자 두 개를 가져다놓았다.
잠시 후 상복 차림의 제인이 후원에 나왔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따라 나온 여자노예에게 돌아가도록 지시한 후 그녀는 브네로에게 인사했다. 브네로도 이스갈 식으로 정중히 인사했다.
노예가 마실 것을 내온 후 브네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먼 길 다녀오신 직후인데 무리한 부탁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분명 그분에 관한 일일 테니 응하는 게 도리겠죠.”
“감사합니다. 레페리 재판관도 허슬 양의 협조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오늘 제가 레페리 씨 대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레페리 씨가 마을을 조사하는 동안 대신 아가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셔서입니다.”
제인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슬 소령 살인사건을 맡은 사람은 레페리가 아니라 보안관이므로 신경질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을 지적하며 대화를 거부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제인은 형사사건의 관할에 대해 잘 모르거나, 재판관이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보안관의 수사에 관심을 갖고 협조하려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게 직선적인 질문을 하자니 남자로서의 양심에 찔린 브네로는 어떻게 해야 그녀를 괴롭히지 않으면서 의문을 해소할 질문이 될지 고민스러워졌다.
“양녀시라고요. 실례지만 모친께서 재혼하신지‥?”
“올해로 10년이에요. 제가 열 살일 때 재혼하셨으니까요.”
“선친께서는 따님께 정이 많으셨나 보군요. 보통 아버지들이란 목이 뻣뻣해서 자식들을 앉혀놓고 같이 장래 이야기를 하자고 먼저 말하진 않으니까요.”
제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브네로는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이거, 죄송합니다. 괜히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했군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선친께서는 평소에도 허슬 양과 단둘이서 자주 이야기를 하셨나요?”
“그분은 평소에는 가족들에게도 지위 있는 군인으로서 대접받고 싶어 했어요.”
소년이 저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버지를 동경하나보다 싶기도 하겠지만, 다 큰 딸이 말하니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묻어나는 어투로 들렸다. 그 때 제인의 안색을 살핀 브네로는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인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눈에 어린 기운은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가족들 간에도 철저하게 격식을 차리셨군요.”
“아, 가족들이 그러길 바라시긴 했죠.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만요.”
브네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인은 선친을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직전에 했던 질답을 되새겨보았다. 지위 있는 군인?
뭔가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좀처럼 구체화되질 않았다. 브네로는 낯을 찌푸리다가 잠깐 화제를 돌렸다.
“저, 수사는 얼마나 진척되었습니까? 듣기로 이 댁 노예 한 명이 용의자로 몰린 모양인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범인은 원한으로 일을 저질렀습니다. 늑골 아래쪽에서 찌른 상처가 심장에 미칠 정도로 칼을 깊이 찔렀는데,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주먹을 날릴 때에도 잠시 주저합니다. 사람을 그렇게 깊이 찌르는 건 단련된 칼잡이가 아닌 한 맨정신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유별나다는 평을 듣더군요.”
“그런 건 보안관께 직접 들으세요. 저는 그런 것, 궁금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네요.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저를 부르셨나요?”
치맛자락을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제 제인의 태도는 적대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상했다. 피해자의 유가족은 가족이 어떻게 죽었는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법이다. 제인의 이러한 태도가 단순히 싫은 질문만 하는 이방인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어떤 방향으로 생각이 굳기 시작하자 브네로는 착잡함과 차가움이 반씩 자리한 얼굴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이걸 들으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왜 선친께서는 그 때 당신의 ‘침상’에 계셨습니까?”
제인은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 그때도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는 수, 술을 드시고 계셨어요. 저랑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물을 가져오라고 하셨다고요.”
“가족들이 자신에게 격식 차리길 바라셨다면, 딸이 자기 방에 있다 해도 잠옷 차림으로 자신을 맞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겠죠. 평소에는 아내의 말도 완고한 척 잘 안 듣는 사람이었을 것 같군요. 그런 사람이 딸의 방에 들어가 침상에 앉아서 술을 마셨단 말이죠. 확실히 선친의 시신에서는 술 냄새가 지독하게 나긴 했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요. 실례하겠어요!”
제인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후원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브네로는 속으로 용서를 빈 후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제인은 멧사자도 상대할 만큼 노련한 전사의 눈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브네로는 위압적인 어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그리 좋지 않은, 좀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허슬 씨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이 허슬 씨에 대해 어떤 깊은 원한이 있었기에 그것을 방관했고, 범인이 도망갈 시간을 충분히 얻도록 뒤늦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니, 어쩌면 당신과 범인은 잘 아는 사이인지도 모르겠군요. 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요.”
“아니에요!”
“물을 가지러 갔다는 말은 혹시 거짓말인 것 아닙니까? 물병은 애초에 방 안에 있었고, 범인이 허슬 씨를 해친 걸 못 본 것으로 꾸미려고 일부러 깬 것은 아닙니까?”
“아, 아니라고요!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당황하십니까? 왜 그렇게 범인을 잡는 것에 무관심하시죠?”
“아아아아악!”
제인은 귀를 막으며 쓰러졌다. 그녀는 충격적인 장면, 가령 친부모가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처럼 패닉에 빠져 울부짖었다. 브네로는 낯을 찌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걸 레페리한테는 어떻게 설명한다‥.
“그만 하세요!”
브네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귀를 막고 있던 제인은 핏기 잃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하세요. 리처드 허슬을 죽인 건 접니다.”
서재의 테라스에서 뛰쳐나온 가드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브네로는 속으로 그의 민족을 보살피는 신을 부르며 한숨지었다.
06년에 다시 올린 스리슬쩍 수정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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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혼이 내리면서 어슷해진 강가에 슬금슬금 안개가 피어올랐다.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우던 아이들은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며 떠들어댔다. 요즘에는 고기가 통 잡히지를 않는데, 서울에서 온 검은 옷의 아저씨들 때문이라는 투덜거림이 대부분이었다. 그 검은 옷의 남자들이 좋은 낚시자리를 빼앗아버려 아이들은 마을에서 먼 하류 쪽으로 가야만 했는데, 그나마도 남자들이 땅을 파면서 물을 흐리는 등 소란을 피우니 좋을 턱이 없었다.
손바닥만한 물고기를 한두 마리씩 꿰어 들고 강둑을 걷던 아이들은 얼마 안 가 낯선 이가 그들의 뒤를 따르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굵은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목을 바짝 경직시킨 채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꼬마들은 형들의 등을 부지런히 쫓아가면서도 신기한 듯 뒤를 흘끔거렸다.
낯선 이는 아이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차림에 생김이 다른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겨우 무릎길이로 맞춘 망토 같은 것을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눈코입귀는 각각 수를 맞춰 제자리에 있지만 머리색이 다른 데다 얼굴의 골격도 어딘가 달랐다. 남자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그를 흘끔거려도 여의치 않는 듯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성큼성큼 걸었다.
이윽고 마을이 보이자 아이들은 갑자기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제각각 나무나 울타리 뒤로 쪼르르 달려가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아이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남자는 마을에 들어섰다.
이스갈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마을의 풍경이었다. 잔돌과 흙으로 지은 집들은 어딘가 초라했고 늑골이 드러나도록 마른 개는 낯선 이에게 컹컹 짖어댔다. 일찍 일을 마치고 들에서 돌아오던 주민들은 남자를 보고 반기는 것은 아닌 표정으로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남자는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며 턱을 긁적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나가던 마을 남자를 불렀다.
“저기, 말씀 여쭙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나그네가 하룻밤 쉴 만한 자리를 얻으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마을 남자는 오랫동안 여행한 듯 꾀죄죄한 차림의 나그네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바람을 휙 일으키며 가버렸다. 나그네는 한숨을 푹 쉬고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를 물어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얼마 걷지 않아 그는 마을 한복판이라 할 만한 곳에 다다랐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피어오를 만큼 황량하리만치 텅 빈 그곳에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맥주잔이 그려진 낡은 간판이 삐걱거리는 건물을 발견했다. 이런 조그맣고 별 볼일 없는 마을에 여관이 따로 있을 리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주점으로 걸어갔다.
이른 시각부터 주점에 몰려있던 무리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한 곳을 쳐다보았다. 막 먼지 낀 램프에 불을 붙이던 주점 주인은 본 적 없는 남자가 들어오자 우선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돈이 있을지에 대해 짧은 궁리를 끝낸 후 주인은 바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모자를 벗었다. 다듬지 않아 덥수룩하게 자란 밀짚색 머리카락이 선량해 뵈는 눈을 가렸다.
“주인장.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까요.”
대답하려던 주인은 문득 주당들을 바라보았다. 주당들은 완고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주인은 주당들이 지은 것과 같은 표정을 떠올렸다.
“들개 같은 너희 족속에게 내줄 방은 없어.”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 말씀한번 지나치십니다, 들개라뇨. 어찌 됐든 방값을 지불할 정도의 돈은 있으니‥.”
“충고하지.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마을을 나가.”
주인은 무슨 말을 들어도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듯 턱을 쳐들었다. 어느새 주당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술병을 든 채 주위를 둘러쌌다. 남자는 고개를 까딱인 후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주점을 나와 버렸다.
이미 해가 산등성이 밑으로 가라앉아 사방은 캄캄했다. 마을 밖 강변 쪽에서 여우가 우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분위기로 보건대 이 마을에서는 그에게 헛간이나마 내어줄 집을 찾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아아, 나그네에게는 천장도 과분하지. 밤이슬을 맞는 것도 생각보다 나쁜 게 아니야.”
심정과는 상반되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마을 사람 몇이 쳐다보는 가운데 마을 입구를 나선 그는 문득 강변 쪽에서 검은 옷의 남자들이 예닐곱 명 몰려오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등마다 뭔가 장비를 짊어지고 있었으며 강에 들어가기라도 한 건지 떼는 걸음마다 철벅거렸다. 나그네는 그들이 지나가도록 길 한켠으로 비켜섰다. 남자들은 그를 보지도 못한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지나갔다.
그 때 뒤편에서 잔뜩 찌푸린 낯으로 걷던 남자가 나그네를 보고 멈춰 섰다. 앞서가던 남자들은 그가 멈추자 일제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행동 통일 잘 된다고 속으로 감탄하던 나그네는 뒤편에 있던 남자가 모자를 벗고 다가오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나그네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띠었다.
“이런, 자네 브네로 군 아닌가? 아렌체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는 웬일인가?”
나그네는 남자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갑자기 이마를 딱 쳤다.
“아! 레페리 씨! 크리스토퍼 레페리 씨 맞지요?”
“그 때 그 일 이후 3년만이지. 오랜만일세. 그나저나 이제 밤인데 어디 가는 건가? 근처에는 마을이 없네.”
“아, 아하하. 그게, 이 마을은 부랑자스러운 나그네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라서요.”
“자네가 부에노소 인이라고 내쫓던가? 재미있군. 이들의 무지를 탓할 것만은 아니네만.”
레페리는 브네로의 어깨를 툭툭 쳐준 후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자네들은 먼저 들어가게. 나는 옛 친구를 만났으니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군.”
남자들은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마을 저편으로 걸어갔다. 레페리는 브네로를 억지로 잡아끌고 마을에 들어갔다. 브네로는 레페리가 제복을 입은 채 수영이라도 한 것처럼 젖어있는 걸 깨달았다.
“자네, 운이 좋았어. 지금 이 근처는 분위기가 최악이라서 노숙 따윈 극구 말리고 싶네. 지금 내가 신세지는 곳이라면 자네도 편히 묵을 수 있을 것이야.”
브네로는 속으로는 얼싸 좋다를 외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집마다 덧창 틈으로 그가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눈이 거슬렸다.
“이거, 밤이슬 맞는 신세를 피하게 된다면야 저는 기쁩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때의 갚음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히 가져. 일단 이 마을에서는 내가 지금 가장 높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지. 자세한 건 이야기가 길어지니 들어가서 하세. 에취!”
강에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이 마을의 먼지를 쓸어 올렸다. 레페리는 코를 훌쩍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브네로는 별 수 없다는 듯 망토를 벗어 그에게 둘러주었다.
“이스갈 남부의 촌락들은 이민족에게 대단히 배타적이라 들었는데, 오늘 직접 겪어보니 그 말 그대로더군요. 하지만 분위기 최악이란 말씀은 그 외의 것도 있다는 뜻이겠죠?”
레페리는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망토깃을 여몄다.
“나는 공무원이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출장 가서 살인이든 유괴든 처리해야 하는 말단 재판관이지. 그래, 자네가 자네 민족의 에페오이듯이 나는 우리 민족의 재판관일세.”
레페리는 가볍게 브네로를 흘겨보았다.
“그런 친구가 마음대로 세상 유람을 다녀도 뭐라 하지 않으니 역시 부에노소 인들은 너무 느긋하다고.”
“저기, 우리는 당신네 민족 같은 관료제가 없거든요. 민족성의 차이 같은 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논할 수 있으니 이야기나 들어보죠. 일단 에페오와 이스갈의 재판관이 하는 일은 비슷해도 성질은 전혀 다르다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당신이 파견 나왔다면 그만한 사건이 있다는 이야기겠죠?”
레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의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마을의 중심을 지나 약간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 언덕 끝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고풍스러운 주택이 서있었다. 가난한 마을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건물은 뽐내듯이 회칠한 벽을 푸르스름한 달빛에 빛냈다.
“흠, 오늘은 알트루겐만 뜨는 날인가? 그럼 그 사건은 대략 반달 전에 있었군. 자네들 기준으로는 한 달이지? 이 마을 밖 강변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계속 하지. 밤바람이 추운걸.”
레페리는 두텁게 잠긴 철문 한편에 난 조그만 쪽문의 문고리를 탕탕 두드렸다. 레페리의 얼굴을 확인한 하인이 얼른 문을 열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물러났다. 레페리는 그쪽을 본체도 안 하고 곧장 본채 쪽으로 걸어갔다. 부유한 축에 드는 이스갈 인의 집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던 브네로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은 회랑과 기둥으로 둘러싸인 기본틀에 하늘이 열린 정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중앙의 연못 주변에는 곳곳에 이국적인 조각상과 화초가 놓여있었다. 레페리는 어느새 나타나 램프를 들고 앞장선 노예가 듣지 못하도록 조그맣게 말했다.
“곧 소개하겠지만 이 집은 이 집 주인의 별장이야. 군대에서 무슨 공을 세우고 포상휴가차 내려와 있지. 이스갈레아에 본가가 있다는데 생각보다는 재력이 있는 모양이더군. 이 아래의 소작농들을 보면 그런 생각은 안 드는데 말이야.”
브네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노예의 안내를 받아 본채 안으로 들어갔다.
초를 사용해 환히 밝힌 방에서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가 걸어왔다. 전체적으로 군인의 모습이 연상되는 탄탄한 체구였다. 남자는 먼저 레페리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오, 돌아오셨습니까. 오늘의 수사는 진전이 있었습니까?”
“그저 그렇군요. 소령께서 지원해 주시는데도 성과가 없으니 부끄럽습니다. 아, 허슬 소령. 이쪽은 제 오랜 벗인 브네로 얀테 발더스라 합니다. 브네로 군, 이쪽은 리처드 허슬 소령이네.”
브네로는 모자를 벗고 소령에게 이스갈 식으로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소령은 브네로를 이채를 띤 눈으로 훑어본 후 간단하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레페리 님의 벗은 제 벗이기도 합니다. 환영합니다. 이분께서는 오늘 묵을 곳이 있으신지요?”
“그것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데려왔습니다. 이 젊은이는 현명해서 수사에도 제법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거 잘 됐군요. 그렇다면 기꺼이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식솔들은 레페리 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하하.”
“그전에 저는 옷을 갈아입어야겠습니다. 강바닥을 뒤지느라 온통 젖고 말았군요.”
소령은 호인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페리는 모자와 브네로의 망토를 노예에게 맡기고 그의 방으로 갔다. 이스갈 인들은 공식적인 일을 본채에서 치르기 때문에 손님 접대용 식당은 응접실과 함께 본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먼지 묻은 외출복 차림으로 드나들기엔 곤란한 것이다. 그를 본받아 브네로도 얼른 먼지가 쌓인 모자를 노예에게 건네주었다. 소령은 브네로에게도 그런 자리에서 입을 만한 적당한 옷을 내주도록 눈치 좋게 명령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이스갈 식으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소령의 뒤를 따라갔다. 식당에 먼저 와 앉아있던 두 여인이 손님들이 들어오자 일어섰다. 소령은 레페리를 상석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았다. 브네로는 레페리에 가깝고 소령의 가족들과는 떨어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손님들이 앉고 나서야 여인들은 자리에 앉았다.
“발더스 님, 소개하지요. 제 식솔들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마리아, 이쪽은 딸인 제인입니다.”
인사를 나눈 후 음식이 들어왔다. 소령은 주인의 예를 지켜 직접 음식을 덜어주었다. 브네로는 소령이 가족보다 레페리와 브네로에게 먼저 준 것은 이해했지만, 아내보다 딸에게 먼저 준 것에선 고개를 갸웃했다. 이스갈의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제와 연장자 우대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장남이었다면 모를까, 딸이 아내보다 먼저 대접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했기에 브네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에는 자연스럽다는 듯 이야기가 곁들여졌다.
“레페리 님, 발더스 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쌓으셨습니까?”
“언젠가 아렌체에 간 일이 있습니다. 젊은 혈기에 강 동편의 초원을 한번 도보로 가로질러보고 싶었죠. 그 무모한 행동의 결과로 중간에 물자가 다 떨어져버렸는데, 바로 그 때 허허벌판 한가운데에서 멧사자를 만난 겁니다. 이제 죽었구나 싶을 찰나 마침 근처에 있던 저 친구가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부에노소 인들은 타고난 목동인지라 짧은 칼을 잘 다루지요. 하지만 그들도 아무나 멧사자를 상대하지는 못합니다. 이스갈의 훌륭한 무사도 어렵게 여길 일을 이 사람이 한 겁니다.”
소령은 가볍게 감탄하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방인 객을 돌아보았다.
“아, 용맹한 분이시군요. 멧사자라면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육식동물 아닙니까. 저는 군인이라 이민족의 무구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취미가 무기 수집이죠. 마침 검을 갖고 계시니, 괜찮다면 부에노소 인들의 검을 견식해볼 기회를 허락해주십시오.”
브네로는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레페리를 쳐다보았다. 레페리는 히죽 웃으며 그를 외면해버렸다. 브네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혁대에서 칼집을 끌렀다. 그것은 성인 남자의 정강이 길이만한 길이에 제법 날이 두터운 숏소드로, 아렌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옻으로 칼집을 칠한 것이었다. 칼집 거죽에는 부에노소의 문자로 둘러친 은색 느릅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브네로는 소령에게 칼집째 검을 넘겨주었다. 소령은 칼을 반쯤 뽑아 찬찬히 둘러보았다. 칼날에도 칼집과 같은 느릅나무 문양이 새겨진 것을 본 그는 뭔가 생각하듯 입을 다물었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럴 수가. 이것, 혹시 에페이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브네로는 거의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소령은 질렸다는 표정의 가족들에게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이분은 부에노소 인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분임이 틀림없다. 에페이도는 부에노소 인들의 재판관이 증표로 갖는 칼이니까.”
브네로는 자신이 동족들로부터 에페오이기 때문에 존경받은 일이 있었던가 골똘히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추억이 없었다. 그의 가문 사람들은 골치 아픈 분쟁, 가령 낙인을 찍지 않은 새끼양이 멋대로 경계를 넘어 다른 집 양들과 섞였을 때 그것이 누구의 양인가를 가려내는 등의 문제를 처리해야 할 때만 그를 찾았으며 평소에는 여느 목동들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말하자면 그는 문젯거리를 해소하는 해우소 정도로 여겨지곤 했다.
“정확히는 각 가문 내에서 일어나는 잔일의 중재자입니다. 다른 가문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들의 문제도 듣긴 합니다만, 참고 수준이죠. 에페오란 부에노소 인들 사이에서 그렇게까지 대단한 존재는 아닙니다. 오히려 덕망 있는 노인의 말 한마디가 더욱 힘을 갖습니다. 물론 보통의 경우에는 그런 어른이 에페오나 에페이아가 되기 때문에 저처럼 무시되는 건 아니지만요.”
브네로는 한탄하듯이 말했다. 소령은 껄껄 웃고 검을 돌려주었다.
“어찌 됐든 레페리 님 같은 분이 벗으로 삼을 만 한 분이시군요. 그런데 발더스 님, 이스갈 인은 식탁에서는 검을 휴대하지 않습니다. 검은 신성한 것인 만큼 식당 같은 곳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물론 발더스 님은 이스갈 인이 아니니 굳이 이스갈의 전통을 따르라 강요하진 않겠습니다만.”
그렇게 검을 신성시한다면 왜 식당에서 검을 견식 시켜줄 것을 요구했냐며 대꾸하고 싶었지만 소령 덕에 간신히 하룻밤 묵을 자리와 저녁까지 얻은 브네로는 굳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에페이도를 들고 일어섰다.
“레카에서는 레카의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으니 이스갈에서는 마땅히 이스갈의 전통을 따름이 옳겠지요. 죄송하지만, 검을 둘만한 곳을 일러주실 수 있겠는지요.”
“아니, 제 집의 손님께서 식탁을 떠나실 것 까지는 없습니다. 발더스 님이 머물 방에 옮겨두겠습니다.”
소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예가 한 명 들어왔다. 노예는 주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을 들어올렸다. 브네로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주인의 말을 들어 노예에게 검을 건네주고 앉았다. 소령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며 브네로에게 들리도록 아내에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발더스 님께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번 사건’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던 브네로는 그것이 아까 레페리가 말한 살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걸 떠올리자 고개를 수그릴 뻔 했다. 겨우 자세를 추스른 그는 소령의 가족들이 밥상머리에서 살인 사건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리 탐탁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저는 오늘 이 마을에 도착해서 자세한 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숙녀 분들이 계신 자리에서 언급할 만큼 향기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진 않군요.”
“흠흠, 그도 그렇군요.”
소령은 브네로가 더 이상 화제를 이으려 하지 않음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곧 소령은 레페리를 붙잡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치니 전쟁이니, 수도에 사는 귀족들의 동향이니 따위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던 브네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의 홍수에 익사할 것 같아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식당으로 안내받을 때처럼 노예가 램프를 들고 방으로 안내했다. 본채 뒤편에는 다시 하늘이 열린 중정이 나타났다. 본채 앞의 정원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보다 아담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여인들이 주로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었다. 중정을 지나 안채에 도달하자 노예는 왼쪽으로 꺾었다.
브네로가 안내된 곳은 약간 작지만 한 사람이 쓰기에는 넉넉하고 깨끗한 방이었다. 창가에 놓인 침대 위에서 에페이도를 발견한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방에 내려놓은 행장을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 노예가 램프에 불을 켜고 나갔다. 어지간히 잘 사는 집이 아니고서는 램프에 드는 기름값을 아끼고 싶어 하는 만큼 방에서는 초나 등잔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브네로는 처음 보는 손님에게도 제법 호기를 부리는 주인이라 생각하며 휘파람을 불고는 램프를 꺼버렸다.
열린 덧창으로 푸른 달 알트루겐의 빛이 흐릿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에페이도를 밀어버리고 침상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던 브네로는 문득 옆방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다시 문소리가 나더니 이 방의 문이 열렸다. 레페리는 포도주병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어때?”
“오, 그레이트.”
잠시 후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달빛을 벗 삼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잔을 기울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레페리였다.
“이 윌더빌이라는 촌이 어지간히 수구꼴통들이 몰려 사는 데여야지. 주민들은 이스갈 인이 세계 최고라고 굳세게 믿고 있다네. 자네 같은 이민족이랑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치들이야.”
“그것 뿐만은 아니겠죠. 이런 작은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란 게 얼마나 큰일이겠습니까. 한 백년은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깃거리입니다. 그런데다 이스갈의 임금께서 친히 관리를 보내 조사하게 했으니 주눅이 들 데로 들었겠죠. 주민들이 저를 보자마자 무작정 나가라 한 거, 이제 이해합니다.”
“자네는 가끔 너무 사람이 좋은 것처럼 굴어서 탈이야. 좋아, 사건 이야기나 하지. 자네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어. 어디까지나 내가 여태 보고 듣고 조사한 것을 주정부리 삼아 주절거리는 것뿐이야. 무슨 소리를 해도 마음 쓸 것 없다는 뜻일세.”
“그렇다면 기꺼이 땡스한 심정으로 들어드리죠.”
어디까지나 주사를 받아줄 상대로서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 깊이 관여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브네로는 양손을 들어올렸다. 본심과는 약간 다른 말을 한 레페리는 두고 보자는 듯 입가를 실룩였다.
“반달 쯤 전, 그러니까 정확히는 28일 전 한 레카 인이 이 마을에 들렀네. 알다시피 레카의 그 가문과 피가 섞인 자는 마도의 능력이 격세유전 되지. 다른 민족들은 그걸 굉장히 두렵게 여겨.”
“말만 외치면 그대로 이뤄지는 능력 말이군요. 하지만 순전히 피가 섞였나에 달린 거고 피가 섞여도 마도사가 되지 못하는 자도 있지 않아요?”
“그렇지. 하지만 마도사가 아닌 우리들 눈으로 볼 때 흰머리 빨간 눈인 사람은 그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로서 공포야. 레카 인들 스스로도 세상 시끄럽게 만들기 싫으니까 계곡에 틀어박혀 안 나오잖아. 어쨌든 그 젊은이는 레카 인을 꺼린 마을 주민들의 요구로 묵을 자리도 못 얻고 쫓겨났지. 그로부터 1순 후 그 친구가 살해되었다며 범인을 처벌해달라고 그 친구의 동생이 이스갈레아까지 와서 탄원했네. 그냥 행방불명된 것일 수도 있는데 살해되었다고 단정 지은 이유는 모르겠네만, 어쨌든 탄원이 들어온 이상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내가 파견되었어. 마지막으로 그 레카 인의 소식이 들린 곳인 이 마을 부근에서 결국 그 불쌍한 젊은이의 시체를 찾아낸 게 6일 전이야. 강변 진흙더미에 머리부터 반쯤 파묻힌 채 썩어있었지.”
레페리는 발견 당시의 상태를 떠올리듯 손가락으로 허공중에 거꾸로 선 사람의 모양을 그렸다. 그림의 머리 쪽에 손가락을 대고 뭔가 더 그리려 하자 브네로는 기겁했다.
“우엑, 시체의 상태를 털 하나까지 묘사하고 싶어 안달 났군요. 그런 건 웬만하면 건너뛰죠?”
“바보 같은 소리 마. 어떻게 죽었는지, 범인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같은 걸 알려면 시체와 그 주변을 꼼꼼히 봐줘야 한다고. 하여간 뒤통수를 둔기로 맞았더군. 그게 결정타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마구 두드려 맞은 흔적이 있어. 범인들은 - 다수인 건 확실해. 혼자서는 그 정도로 몸 곳곳의 뼈에 금이 가게 만들지는 못하지 - 먼저 둔기로 머리를 때려 마도를 발하지 못하도록 혼을 빼놓은 후 맨손으로 레카 인을 흠씬 두들겨줬어. 그 과정에서 죽은 것처럼 늘어지자 사체를 유기한답시고 마을 밖 강변에 파묻어버린 거야. 젊은이는 흙에 묻힌 후 죽었어. 묻혀있던 곳의 흙과 잡초를 움켜쥐고 있었거든. 그 후 한번 큰 비가 오자 강물이 불어나면서 시체가 묻힌 데까지 차올라 흙을 좀 치워버린 게지. 그 때 우리가 발견한 것이고. 근처 들짐승이 파먹기까지 해서 수습하는데 고생했지. 썩는 냄새가 장난이 아니더군.”
에페오 짓 하다보면 가끔 사람 시체도 치운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말할 타이밍을 놓친 브네로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어쨌든 그런 건 자랑삼아 할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편이 낫긴 했다. 잠시 이름도 모르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말을 중얼거린 후 그는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럼 이제 범인이 누구일지 이야기할 차례군요. 뭐 없어진 거는 없었나보죠?”
“있어. 레카 녀석들은 왜, 로브 비슷하게 긴 털옷을 입지 않던가. 그게 없었어. 머리가죽에 붙어있던 흰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레카 사람인 걸 몰랐을 거야. 물론 지금은 여름이고 이스갈은 그 계곡에 비하면 참 더운 곳이니까 안 입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좀 이상하잖아. 다른 짐은 건들지도 않은 주제 별난 것도 없는 그런 털옷을 탐내 사람을 죽일 놈이 있을까? 그것도 여럿이 몰려가서 말이야.”
“강도는 아니란 말이군요. 흠, 이 동네 사람들이 이민족에 대해 배타적이란 건 저도 직접 겪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고. 보아하니 그 젊은이한테 특별히 원한 관계는 없는 모양이죠?”
“그러니까 지나가던 자네를 붙잡고 주사나 늘어놓게 되었지. 짐작은 하고 있을 테지? 아무래도 이 마을 사람들이 살해한 것 같단 말씀이야.”
“함부로 단정하는 건 안 좋아요. 뭐, 먼저 결론을 단정해버리고 거기 맞춰 수사하면 마음이야 편하긴 하겠지만. 어디보자. 그럼 레페리 씨의 주정거리는 이겁니까? 이 마을의 누군가에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안 나오고 오리발도 완벽해서 짜증스럽다는?”
“그렇지. 이 마을 사람들은 이민족을 싫어하고, 특히나 마도사 같은 게 나오는 레카 인은 악의 씨로 여기네. 탐문해보면 그깟 악마가 죽은 게 뭐 대수냐는 식이더라고. 게다가 이런 벽촌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단결이 잘 돼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외부로부터 목숨 걸고 지키려들지 않겠어. 마을의 유지라 부를만한 사람들 중에는 이민족은 사람도 아니니 죽여도 괜찮다고 지껄일 만큼 포악한 녀석이 있어. 추궁해도 자백하지 않고 외려 같은 이스갈 인이 동족을 괴롭히냐고 엄숙히 따지더군, 나 원.”
말을 마친 레페리는 잔뜩 찌푸린 낯으로 잔을 기울였다. 브네로는 잔을 새로 채워준 후 자신의 잔을 들었다.
“흉기는 찾았나요? 하다못해 그 옷이라도 찾으면 되잖아요.”
“못 찾았으니까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다니지. 아, 그렇지. 자네 한번 같이 현장에 가보지 않겠나?”
“절대 거절! 예쁜 아가씨면 또 모르지, 다 늙은 아저씨랑 달밤에 살인현장을 산책하라고요?”
“산책이 아니야! 현장조사다! 그리고, 신사라면 아가씨를 그런 곳에 데려가겠냐? 그러니까 나와 가는 게 더 낫다!”
브네로가 잔뜩 얼굴을 구기자 레페리는 껄껄 웃었다.
“하긴 같이 갈 아가씨도 없긴 하군. 밤산책을 가자는 진짜 이유를 말하자면, 낮에는 이 마을을 관할하는 보안관이 참견하러 나와서라네. 그 보안관도 꽤나 보수적인데다 마을 사람들 눈치를 엄청 살피거든. 하여간 자네가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려면 지금이 기회야. 가자고!”
레페리는 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브네로를 잡아끌었다. 브네로는 허우적거리면서 싫은 소리를 몇 번이고 투덜거렸지만, 결국은 부은 낯을 한 채 레페리를 따라야 했다. 그는 툴툴거리며 소령에게 빌린 옷을 걸친 채 일어섰다. 들짐승이 나올지도 모르므로 에페이도를 집어든 그는 손에 잡히는 무게감이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급히 술병을 치우고 방문을 열던 레페리는 머뭇거리는 그를 돌아보며 낮게 외쳤다.
“더 밤이 깊기 전에 가지 그래?”
브네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칼을 혁대에 채우며 문을 나섰다.
언덕 위인 소령의 집에서는 맑은 밤하늘이 훤히 드러났지만 강은 다가갈수록 짙은 안개에 잠겨 달빛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마을을 벗어난 이후로는 램프의 불빛만으로는 앞사람의 등을 보는 것이 한계일 정도였다. 두 사람은 며칠째 이곳을 오간 레페리의 기억에만 의지한 채 길을 더듬어갔다. 푸른 달의 만월이 천정에서 약간 비껴난 위치에 도달했다고 여겨질 무렵 두 사람은 현장에 도착했다.
강이라기보다는 개천이라 함이 옳을 지류는 시원스레 졸졸거렸다. 물가에 우거진 잡초 사이에선 풀벌레들이 울고 간혹 개구리가 풍덩 뛰어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무지 평화스러운데요.”
브네로는 발밑을 살피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처럼 질퍽거리는 진흙 때문에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땅을 노려봐야 했다. 레페리는 램프를 좀 더 밑으로 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언제나 평화로운 거야. 하지만 그 시각에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강간당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죽어갈 수도 있는 노릇이지. 다 왔구먼. 거기 밟지 말게.”
브네로는 말뚝을 박아 둘러친 새끼줄을 밟을 뻔하고 휘청거렸다. 조심스레 줄을 넘어간 그는 가느다란 막대에 붉은 기를 달아 꽂아둔 표식을 발견했다. 레페리는 램프를 두루 비춰주었다.
갈대와 부들이 무성하게 둘러싼 흙더미는 근래에 무너진 흔적이 보였다. 시체를 발굴한 자리는 휑한 구덩이를 드러냈고 그 허리께까지 물이 차올라 출렁거렸다. 주위에는 시체를 파낼 때 함부로 밟고 다녔는지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풀이 꺾여있네요. 원래 이랬어요?”
흙더미 위의 갈대들은 뿌리 근처가 꺾여 비스듬히 서있었다. 레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엉터리 보안관이 저지른 짓이야.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안 그랬어. 흙이 이렇게 질퍽하니 한 사람이 시체를 운반해와 땅까지 파기는 어려웠겠지. 녀석들은 다른 방향으로 해서 물속을 걸어 왔을 거야. 보안관보다는 주변머리가 있달까나.”
“물이 얕은 것 같군요.”
“이 근처에서 제일 깊은 데가 어른 가슴께밖에 안 돼. 하지만 물은 흐르는 것이라 강바닥에 남은 발자국 같은 건 금방 없어져. 결국 우리가 며칠 동안 한 짓이라곤 흉기나 하다못해 단추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주변 강바닥을 헤집고 다닌 것뿐이야. 주먹보다 큰 돌도 없으니 골치 아파.”
“범인이 아직까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마을 사람들 물건은 조사해봤어요?”
“그러고는 싶은데 협조들을 안 하시네. 보안관놈이 잔뜩 골을 내며 멋대로 몇 집 조사하고는 없다고 주장하잖아. 내가 조사하려고 하면 이미 끝났다며 쫓아낸다고. 솔직히 강을 뒤집는 건 다른 할 일은 없고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는 짓이지, 실상은 뻘짓이야.”
“하이고, 위대하신 이스갈 국왕 폐하께서 친히 수사권을 수여하신 재판관이 이런 촌동네 하나 뜻대로 조사하지 못해 전전긍긍이라니. 안쓰럽습니다그려.”
브네로는 말을 끝내자마자 잔돌을 밟고 미끄러졌다. 첨벙!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 발을 강에 빠뜨려버린 그를 보고 레페리는 킥킥 웃었다.
“천벌이군.”
브네로는 대꾸하지 않고 찡그린 낯으로 돌을 주웠다. 손바닥에 쥐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돌이라 물매질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상하게 하긴 어려워 보였다.
“피해자의 뒤통수에 난 상처는 어느 정도 크기에요?”
“그 돌보다는 커. 두개골이 지름이 손가락만한 타원 모양으로 함몰될 정도였지.”
“흠. 그나저나 이 돌은 한쪽 면이 모나게 깎여나가 있군요. 곡괭이질이나 삽질을 하다 돌을 깨버리면 이런 모양이 나오려나.”
브네로는 돌을 주머니에 넣고 잡풀 뿌리 부근을 살피며 둔덕으로 올라갔다.
“나중에 사체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발견 당시에도 이미 상할 대로 상해서 살이 발라지고 뼈가 드러나 있었어. 위생상으로도 안 좋아서 부검 끝내자마자 화장했지. 부검 기록이라면 보여줄 수 있겠군.”
두 사람은 대충 조사를 마치고 강둑으로 올라갔다. 안개는 강변을 넘어 마을 입구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슬몃 흐르는 바람이 안개를 일렁이게 하자 유령이 흰 소복을 펄럭이며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기분 나쁘리만치 안개가 짙군.”
레페리는 중얼거리며 언덕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 언덕은 옅은 안개가 흐느적거리며 휘감아 돌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아 안개의 흐름은 싸늘하기만 했다.
레페리는 문고리를 잡았다. 막 대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집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퍼졌다.
“꺄아아아악!”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문에 달려들어 거칠게 두드려댔다. 개가 큰 소리로 컹컹 짖어댔다. 비명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노예들이 우왕좌왕하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나는 레페리다! 문부터 열어!”
쾅쾅쾅쾅! 레페리가 주먹으로 부족하다 여겨 문을 발길질하려던 찰나 쪽문이 열렸다. 노예는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레페리 님! 큰일 났습니다. 얼른 안채로 가주세요!”
“무슨 일이냐?”
“주인님께서 위험합니다. 누가 주인님을 찌르고 도망쳤습니다!”
두 사람은 노예를 제치고 본채를 지나 안채로 달려갔다. 사방에 환하게 불을 밝힌 가운데 안채의 오른쪽으로 꺾어든 두 사람은 노예들이 웅성거리며 어느 방 앞에 모여선 것을 발견했다. 집의 안주인이 혼절한 채 여자 노예들에게 부축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노예들은 손님들을 보자 얼른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은 정면에 테라스까지 달려있을 정도로 컸다. 테라스가 열려있는 것으로 보아 소령을 찌른 자는 테라스를 통해 도망친 모양이었다. 여자의 취향에 맞춘 듯 적당히 화려한 가구들로 꾸며진 방 한쪽에는 널찍한 침대가 있었다. 허슬 소령은 그 위에 머리를 침대 밖으로 향한 채 잠옷차림으로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옆구리에는 진득한 피가 콸콸 흐르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브네로는 소령을 살펴보았다.
“으, 술 냄새. 늑골 아래쪽에서부터 깊숙이 찔렀습니다. 칼이겠죠? 심장까지 들어갔어요. 즉사입니다.”
그는 침대의 발치 쪽 벽에 붙어서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피 묻은 잠옷차림으로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 이 여인은 소령의 딸이었다. 테라스로 뛰쳐나갔다가 들어온 레페리는 핏자국이 흩어진 흔적과 아수라장이 된 침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미 멀찍이 달아났어, 쳇. 재빠른 놈이군. 이것 봐, 술병이 깨져있어. 이건 물병인가? 도망칠 때 테이블을 건드린 거야. 제인 양, 여기는 제인 양의 방이지요?”
“아, 네. 그래요. 제 방이에요.”
“제일 먼저 발견하셨습니까?”
“예. 아마도요.”
제인은 맞잡은 두 손을 가늘게 떨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목이 계속 울렁거렸다. 브네로는 그녀가 꽤 강한 성격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테라스 쪽으로 갔다. 안채 뒤편은 작은 후원인 듯 나무가 몇 그루 있고 바로 담장으로 막혀 있었는데 좀 답답하고 삭막한 느낌이었다. 회랑으로 사방을 둘러친 예스러운 구조는 손님에게 보여주는 안채 앞까지만 있는 모양이었다. 테라스로부터 담장까지의 거리는 다섯 발자국. 담장 높이를 가늠해본 브네로는 이스갈 인들보다 한 뼘은 큰 부에노소 인이 팔을 뻗어도 겨우 담장의 끝에 닿을락말락한 것을 발견했다. 담장 끝을 스친 손가락 끝에 피가 묻었다. 조금 둘러본 후 그는 담장 중간쯤에 찍힌 흙발자국을 발견했다. 담을 뛰어넘을 때 디딘 흔적인 듯, 발가락 부분만 약간 찍혀 있었다. 흙냄새를 맡아본 그는 후원에서 묻은 흙이라고 결론지었다. 담을 딛기 직전 땅을 박찬 흔적을 찾으려고 몸을 숙이던 그는 갑자기 그림자가 지자 고개를 들었다. 레페리가 불편한 얼굴로 테라스에 비치는 빛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본 브네로는 뭔가가 뱃속에서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 봐, 브네로 군. 이거 자네의 에페이도 아닌가?”
방금 묻은 선혈이 뚝뚝 흐르는 검은 어른 정강이만한 길이에 두툼한 날을 가졌으며 칼자루 쪽 칼날에 느릅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브네로는 황급히 허리에 찬 칼을 뽑아보았다. 일반적인 부에노소의 숏소드이긴 했지만 느릅나무 문양이 없었다.
“어쩐지 가볍더라니! 식사할 때 바꿔치기 된 건가?”
“이봐! 어서 보안관에게 신고하지 않고 뭐 해! 신고하러 가는 놈 외에는 누구라도 보안관이 올 때까지 이 집을 나가지 못하게 해! 이 방의 것은 아무것도 건들지 말고, 누구 들여보내지도 마! 제인 양, 일단 다른 방에 갑시다. 여기에 오래 있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브네로 군은 나 좀 보세.”
브네로는 생경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노예들 사이에서 얼떨떨해하며 레페리의 뒤를 따라갔다. 레페리는 노예에게서 가운을 받아 제인에게 입혀준 후 그녀를 다독이며 옆방으로 갔다.
옆방은 소령이 서재로 쓰는 방인 듯 제인의 방보다 더욱 크고 널찍했다. 구조는 제인의 방과 비슷했으며 테라스는 닫힌 채 커튼까지 드리워있었다. 테라스가 있는 방향 외의 벽은 잡다한 서적이 꽂힌 책장으로 막혀있었는데, 읽을 목적보다는 수집의 목적으로 장만한 것 같았다.
레페리는 냉수를 떠오도록 지시한 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는 피 묻은 에페이도를 조심스레 책상 위에 있는 나무상자에 올려놓았다.
“제인 양은 거기 의자에 앉으십시오. 당장 옷을 갈아입고 싶으시겠지만 잠깐만 참아주시길. 이런 일을 당하시다니,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제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술을 깨문 채 바닥을 노려보았다. 레페리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브네로를 툭툭 쳤다. 브네로는 소리를 내지 않고 투덜거리는 입모양을 만들어 보인 후 나무상자를 치우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허슬 양. 눈앞에서 부친을 잃다니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현장을 목격하셨고 그 장소가 허슬 양의 방이었던 만큼, 아가씨께서 보신 것을 듣고 싶습니다. 다신 떠올리기 싫을 만큼 충격이 크실 겁니다만, 용기를 내서 말씀해 주세요. 국왕께서 임명한 재판관인 레페리 씨께서 범인을 체포하는 데 보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상 옆에 서있던 레페리는 자신이 조사하는 게 아니란 뜻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제인이 볼까봐 얼른 팔을 뒤로 돌렸다. 제인은 여전히 바닥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잘‥ 몰라요.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계셨어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셨죠. 제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시면서 술을 깨게 물을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물병을 가지고 왔는데‥. 그런데 그 사이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녀는 피가 묻지 않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레페리는 낯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었다.
“검을 바꿔치기해가며 에페이도를 쓴 게 이상해. 마치 브네로 군 자네가 범행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게 한 것 같아. 자네가 하필 그 때 나와 나가있을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야. 바꿔칠 기회는 우리가 식사를 한 때밖에 없었지. 그럼 범인은 그 시각에 이 집안에 있던 사람이라고 봐야 할 거야.”
“계획범죄란 거군요. 허슬 양, 혹시 아버님께서 평소에 누군가와 사이가 불편하셨습니까?”
“그런 건 잘 몰라요. 아버지는 집에서 일에 관한 이야기는 안 하세요.”
브네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벌떡 일어섰다.
“마저 후원을 조사해야겠습니다. 담장을 타넘을 때 땅을 박찬 흔적을 찾아야 해요. 담장에 찍힌 발자국과 땅에 남은 발자국을 대조해보면 최소한 체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을 겁니다. 대략 이스갈 인의 평균키에 날렵한 사람일겁니다. 집 뒤에는 뭐가 있죠?”
“골산(骨山)이야. 그 너머는 황야지. 그런 거 빼면 언덕 위에는 이 집 하나뿐이야.”
브네로는 후원에 가려고 테라스에 다가갔다. 커튼을 걷던 그는 유리창에 비친 제인의 모습에 눈이 갔다. 고개를 숙인 채 안절부절 하며 양손을 꽉 맞잡은 것이 안쓰러웠다. 그가 테라스 문손잡이를 잡은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레페리가 문을 열자 물잔과 물수건을 든 노예를 밀치고 살집 좋은 중년의 남자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들어섰다.
“오, 세상에. 이 오밤중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레페리 씨. 허슬 소령이 살해되다니!”
“애석한 일이오. 좋은 친구가 또 한 명 가버렸소. 제인 양이 가장 먼저 현장을 발견했는데 잠깐 물병을 가지러 나간 사이 일이 벌어졌다는군요. 범인을 보진 못했다 하오. 게다가 범인은 이 에페이도라는 특수한 칼을 썼소. 이 칼의 원주인은 사건 당시 나와 외출 중이었소만.”
보안관은 미심쩍다는 눈길로 브네로를 훑어보았다.
“이거 부에노소 인 아니오?”
“크흠, 그는 내 오랜 벗으로, 내가 신원보증을 할 수 있소. 오늘 내 조언자 자격으로 윌더빌에 왔으며 허슬 소령은 흔쾌히 자신의 집에 묵을 자리를 내주었소.”
물론 실제로는 초저녁에 마을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지만 법무부 파견 재판관의 위광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이방인인 브네로가 괜히 불리하게 몰릴 분위기였다. 레페리는 헛기침을 했다. 보안관은 그래도 의심어린 낯으로 브네로를 쳐다보았다.
“레페리 씨, 흉기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브네로는 얼른 보안관 뒤에서 감히 비집고 들어오지 못해 쭈뼛거리는 노예로부터 물잔과 물수건을 빼앗아 제인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잠시 손을 닦는 데 신경을 돌린 사이 레페리는 피 묻은 검을 브네로의 등 뒤로 넘겨 보안관에게 건넸다. 보안관은 전당포 주인이 물건을 감정하는 눈길로 검을 둘러보았다.
“이건 압수요.”
브네로는 속으로 찔끔했지만 따지진 않았다. 이스갈 인이 에페이도나 에페오의 의미를 이해할 턱이 없으며, 이스갈 땅에서는 그런 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수사에 필요하다면 기분은 상하지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안관이 턱짓으로 자신을 가리킬 때는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거기 부에노소 인! 너를 허슬 소령 살인용의자로 체포한다! 같이 가줘야겠어!”
“아니, 잠깐만요. 저는 당시 이 집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레페리 씨와 강가에 있었단 말입니다. 저에게는 체포될 이유가 없는데요.”
레페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내 명예를 걸고 증언할 수 있소. 여기의 브네로 군은 살인범이 아니오.”
“칼이 저 부에노소 놈 것이라면서요? 용의자가 못 되면 참고인으로라도 가줘야 합니다. 어쨌든 잔말 말고 이리 나와!”
보안관은 거칠게 브네로의 팔을 잡아당겼다. 수갑이 찰칵하고 손목을 죄었다. 기가 막혀 브네로가 뭐라 하지도 못하자 레페리는 목구멍까지 울컥 치미는 폭언을 꾹 누르며 보안관을 붙잡았다.
“에페이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설명하겠소. 어쨌든 이 사람은 범인이 아닌 게 너무도 분명하니 무례하게 다루지는 마시오. 증인 또한 많소.”
“허슬 아가씨가 최초의 목격자라는데 범인을 직접 본 건 아니랬잖습니까? 이자가 실은 악마의 능력을 쓰는 종자라서 칼이 멋대로 날아가 허슬 소령을 찌르도록 조종한 게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있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아니, 이 사람은 순종 부에노소 인이오! 아마도 그렇다고 알고 있소이다.”
“순종인지 먼먼 조상에 레카 놈 피가 섞였는지 누가 압니까? 아무튼 조사해서 혐의가 벗겨지면 풀려나는 게 당연하니 레페리 씨도 그만 흥분하시죠. 저는 공무집행중입니다.”
“이‥!”
레페리가 드디어 폭언을 터뜨리려는 순간 브네로는 레페리의 발을 콱 밟았다. 레페리는 펄쩍 뛰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쳤다. 브네로는 낄낄거리다가 보안관으로부터 주먹질이라도 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총을 받았다. 그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레페리 씨. 적어도 이 분은 저를 들개 놈이라고 부르진 않는군요. 그만 흥분하시란 데는 저도 찬성이니, 일단 한잠 푹 주무세요. 제가 한 일이 아니란 거야 금방 밝혀질 테니 염려 마시고요.”
“이봐, 브네로 군! 자네 억울하지도 않나!”
“억울하니까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고 싶어 죽겠다고요. 저까지 흥분해서 날뛰기 전에 서로 진정합시다, 예? 가죠, 보안관 씨.”
보안관은 수갑을 차서 팔이 자유롭지 않은 브네로를 거세게 밀쳤다. 레페리는 욕을 하려다 제인이 앉아있는 걸 보고 겨우 참았다. 그는 밤인사말을 대충 중얼거린 후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난 후 조용해진 방 한가운데에서 제인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입을 앙다물었다. 핏자국이 남은 나무상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젖은 눈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길이 어른거렸다.
3)
하늘은 부드러운 파란빛이다. 구름조각은 새털같이 유유히 흘러간다. 햇빛도 강렬하지 않고 바람은 선선한, 참 좋은 날씨다.
나는 잠깐 삽질을 멈추고 멍하니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살 태우는 냄새와 매캐한 연기만 나지 않았더라면 잠깐이라도 고향 근처 산마루에서 뒹굴던 기분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어이, 거기! 노는 거냐! 저녁 먹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으면 미친 듯이 일해!”
알았수다, 알았어. 누가 안 한댔어? 나는 잔소리꾼한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툴툴거렸다.
우리는 지금 들판에 널린 시신들을 거둬 소각중이다. 나를 비롯해 아직 팔다리 성한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면 위생병들이 시체를 날라다 그 안에 던져놓고 태우는 식이다. 아군이 너무 빨리 이동한 통에 나처럼 낙오된 병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봐야 이십여 명이지만.
죽고 나면 이젠 적군아군도 없는 건데 누구는 묻어주고 누구는 안 묻으면 그건 인간이 할 짓이 못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복 구분 않고 죽었으면 아무나 묻어줬다. 대신 묻히는 구덩이는 달랐다.
그냥 파묻어버리기엔, 사실 불쌍하지. 다들 각자 살던 이야기가 있었겠지? 되도록이면 아는 얼굴이 안 나오길 빌며 나는 쌓아놓은 흙무더기를 쳐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돌린 옆으로 병사들이 오가며 시체를 던졌다.
“어이, 십인병! 거기 애송이! 여기 와서 이것 좀 도와!”
애송이라고? 저눔이 나잇살 좀 먹으면 얼마나 처먹었다고 애송이야, 애송이는! 갑자기 열이 확 올라 돌아보니 못생긴 황소 같은 인상의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저편에서 날 부르고 있었다. 예예, 애송이 갑니다요. 젠장.
“이거 다리 잡아.”
아저씨는 딱딱하게 팔다리가 뒤틀린 송장 하나를 팔을 잡고 말했다. 입을 가린 수건 때문에 발음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런 내용인 건 분명하다. 나는 내가 맨 수건을 고쳐 매고 시체의 다리를 잡았다. 어쿠, 무겁다.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무거워지나? 아니면 이 사람이 원래 무거웠던 거야?
“그런데 아저씨, 오늘 군의관님들이 떠나는 거 맞습니까요?”
땀을 닦으며 물으니 아저씨는 서두르는 손길로 담배를 태워 물며 대꾸했다.
“그럴걸.”
“그럼 오늘 한나절만 시체 수습하는 겁니까?”
“그럴걸.”
“아니, 언제 다 해요? 이 많은 걸? 게다가 아직 적진이나 강 건너는 손도 못 댔잖아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죽은 놈은 지나가던 어느 한가로운 놈이라도 나서서 묻어주게 되어 있어. 아니면 하다못해 하늘이 알아서 다 해줘. 이걸 다 하겠다고? 네놈 손발이 그렇게 많냐?”
아저씨는 괜시리 짜증을 부리며 침을 퉤 뱉었다. 난 대답할 말이 없어 시체 한 구에 손을 뻗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를 다 보냈지만 시체의 산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 진지 근처, 그러니까 강 건너기 직전의 전장에 널린 시체들만 대충 처리할 수 있었다. 강 건너는 오늘 안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우선 여기 남은 사람이 너무 적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 우리는 손을 털고 강으로 가 몸을 씻었다. 강은 여전히 흙탕물이었지만 시체만진 몸으로 그냥 진지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덜 찜찜한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군복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병사 몇이 대충 헹궈버리고 아직 남은 볕에 내다 말린 게 전부였다. 하긴, 남아있는 물자가 있어야지. 저걸 태우거나 빨면 당장 오늘저녁 우리가 입을 옷이 없다. 물에서 벌벌 떨며 나오니 그 병사들은 덜 마른 군복을 내줬다.
“대충 입으슈.”
“덜 말랐잖아요.”
“그럼 벗고 자던가.”
“이 날씨에, 미쳤수?”
“이도 싫고 저도 싫으면 어쩌자고? 당신 몸뚱이 온도가 기온보다는 높으니까 입어서 말리면 되잖아.”
그렇더라도 덜 마른 걸 체온으로 말리라니, 저 자식 뭐야? 감기 걸리라고? 나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 병사를 째려봤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폭싹 젖은 옷을 입고 덜덜 떨며 진지로 돌아갔다. 해는 이미 지평선 아래로 떨어져 스산한 밤바람을 불어댔다.
우리가 무슨 군담을 들으면 그 내용은 짜릿하고 피 튀기는 전투 이야기지 이런 지루하고 구역질까지 나는 전투 뒤처리 같은 건 아니다. 어, 짜증스럽다. 밥을 한 끼 먹어도 배부른 사람 뒤에 공들여 요리하는 사람 있고 힘들여 설거지하는 사람 있는 건 알겠지만 전투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건가. 제에기, 퉤!
“어이! 다켄! 이리 좀 와봐라.”
오늘따라 어이 하고 부르는 소리를 많이 듣는군. 그런데 여기서 날 이름으로 부를 사람이 있던가? 먹던 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의 그, 그? 그러니까?
“막사를 조사해보니 그럭저럭 쓸만한 걸 찾아낼 수 있었지. 너도 필요한 걸 찾아봐라.”
어제의 그 꼬마 도령이 막사 옆에 쌓인 자질구레한 짐더미 옆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마 놈이야말로 사지육신 멀쩡한 주제 송장치다꺼리는 안 했구만. 그러고는 주인 없는 짐이나 뒤적였단 말야? 이런 까마귀 같으니라고!
“뭘 찾으란 말씀이굽쇼?”
나는 남은 밥덩이를 억지로 입에 우겨넣고 그쪽으로 갔다. 안 가면 명령 불복종 운운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여기 있는 거면 여기 남은 약간명의 부상자보다는 급하게 떠나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을 병사들 물건, 즉 주인 없는 물건일 가능성이 더 높다. 뭔가 도움이 되는 걸 건질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쳇, 도둑놈 같긴 하다만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가보니 낮에 일을 도운 몇몇 병사들이 이미 와서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다. 꼬마 도령은 내가 놓칠 뻔한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비켜섰다. 지체 높은 집안 도련님께서야 가난한 병사들 짐을 뒤져 얻을 게 없긴 하구나. 나는 꼬맹이를 봐서 뒤지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짐을 뒤적여봤자 그놈 군장이 그놈 군장이니 따로 가지고 싶은 게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군의관들 따라 이동할 때 짐이 많아서 좋을 것 같진 않고, 그냥 성해 보이는 가방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데 도련님. 주인 없는 거라지만 이렇게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무슨 소리. 전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가져가 주는 게 물건 입장에서도 기쁠 거야. 물건이란 사람에게 사용될 때 그 본분을 다하므로 가장 값진 법이다.”
그러니까 주인 없는 물건 도둑질을 합리화하는 말이잖아. 물론 소설 보면 그런 장면이 많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주인공들은 안 그런다. 그런 짓은 하인들이나 하는 거다. 그래서 이 꼬마 놈은 날 시키고 자기는 안 하고 있었군. 날 하인 취급했다 이거로군. 어이구, 이런 한주먹감도 안 되는 것이!
기가 차서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만 꾸벅인 후 잠자리나 찾을까 돌아서다가 문득 발길을 잡는 게 있어 멈춰 섰다. 이쪽에 쌓인 물건들 말고, 저편 좀 떨어진 데에도 물건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흙투성이, 그을음투성이, 터지고 밟히고 말이 아닌 군장 몇 개다. 옆에는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남자가 간이의자를 놓고 앉자 뭘 적고 있었다. 거기에 메넴 십인장이 예의 군단기를 들고 서 있었다.
“뭐 하십니까요?”
“전사자 확인중이다.”
전사자? 갑자기 모골이 송연하다. 그러고 보니 십인장 앞에는 군번줄이 가득한 커다란 궤짝이 하나 있었다. 제기랄. 바로 옆에서는 산 사람들이 주인 모른다고 아무거나 챙기고 있는데 여기선 그 주인일지도 모를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단 말이지.
“십인장님, 오늘 군의관들이 떠난댔잖습니까요. 오늘 시체 수습한 데서 건진 거라면 몇 명밖에 확인 못 하는 거 아닙니까요?”
“여기에는 기병들도 몇 명 있다. 말이 세 마리 있어서 우리가 강 건너까지 다녀왔다.”
“그럼 군번줄이라도 얼만큼 수습한 건가요?”
십인장은 잠깐 하늘을 쳐다봤다.
“다는 아니다.”
…헤헤헤. 뭐, 거야 어쩔 수 없었겠지. 어쩔 수 없어. 대체 내가 뭘 기대했던 거야?
“그럼 이건 다 전사자겁니까?”
“몰라. 주운 거다.”
나는 멍하니 널브러진 물건들을 쳐다봤다. 대체로 군낭이었다. 하긴, 단검이나 철모 같은 거야 너무 널려있으니 수습하지 못하지.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가방 하나를 주워들었다. 흙탕물에 잔뜩 절은 듯 엉망진창에 고약한 냄새도 났다. 열어보니 자잘한 관물들과 구겨진 책 한권이 나왔다.
“어라, 이거?”
물이 군낭 안까지 들어갔는지 책도 젖어서 엉망이었지만 이게 뭔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기사 펠트로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아니라서 조금은 실망이었지만, 아무튼 나 말고도 이런 책을 들고 나온 녀석이 있었구나. 아마도 애송이인 것까지 똑같았겠지. 쳇. 코가 시큼해.
나는 책을 챙겨 들고 온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체 수습을 정말로 대충대충 하고 저녁 먹은 후 좀 쉴까 했더니, 우리는 곧 군의관들이 끌고 온 무개마차(라지만 말이 끌어서 마차지 실상인즉 짐수레다) 두 대에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을 싣게 되었다. 그러고는 다음날 한새벽에 눈도 제대로 못 붙여보고 출발했다.
“거참 신기한 노릇일세. 보통 오늘 간다하면 내일, 내일 간다 하면 엿새 뒤, 제대일이랑 귀환일은 원래 이런 식인데 웬일로 이렇게 빨리 떴을까?”
옆에 가는 병사의 혼잣말이었다. 나는 잠자코 졸린 눈을 꿈뻑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탈 자리는 없던 마차가 천천히 굴러가는 뒤를 터덜터덜 걸었다.
정말이지, 한창 전쟁 중인 나라인가 싶게 평온한 나날이다. 켐빌로 행군할 때처럼 사람 없는 들판만을 골라 죽죽 내려가는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묘한 기분이 든다. 슬슬 봄볕이 들어서일까. 하지만 봄 신령이 지피기엔 우리 처지가 아니올시다인걸.
“창검이라도 들려주지 이게 뭐야. 불안해.”
갈아엎은 너른 밭 근처를 지날 때 다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일하는 농부 하나 안 보이지만 막 갈은 것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흙을 보니 확실히 사람이 근처에 있긴 있나보다. 이런, 저 병사한테 동감이다. 그 농부들이 멀리서 우릴 보고 줄달음질쳐서 민병대 같은 거에 알리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래도 난 아직 단검이라도 챙기고 있으니까 뭐어. 혹시라도 위급할 때 어떻게든 되겠지.
듣기로 데그에서 켐빌까지 보통 도보로 일주일은 걸린다던데 이런 속도로 가서는 보름이나 지나야 도착하겠어. 그 긴긴 날을 이렇게 흙먼지 마시고 부상자들 부려워하며 걷자니 오만 잡상만 들고 기분은 잡치고. 차라리 최고행군속도로 한 닷새 고생하고 말지.
“헤에, 아지랑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마차 끄트머리에 다리를 걸치고 멍하니 우리 뒤편하늘을 쳐다보던 길갈레온 백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한 말 같다. 흐음, 표정만 봐선 나른한 게 당장 꾸벅꾸벅 졸겠는걸. 이 아저씨야, 아저씨는 마차 타고 편하게 경치감상하며 가지만 우린 그냥 걷고 있다고요. 참 태평한 소리 하신다.
“백인장님, 다리는 좀 어떻습니까요?”
그냥 본 김에 말을 걸어봤다. 나를 기억하려나? 백인장님은 나를 보고 눈을 깜빡거리다가 씩 웃었다.
“스렌돌프 십인병 아닌가. 살 만 하네.”
“좋겠습니다. 마차 타고 가서.”
“꼭 그런 것도 아니지. 자네가 여기 올라와 앉아있다면 파리 쫓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걸세.”
“에에? 파리쯤 쫓는 게 뭐 어렵다고요. 그냥 팔만 설레설레 흔들면 됐지.”
아저씨는 그냥 웃었다. 파리라고?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마차 쪽에서 썩는 냄새가 나긴 했다만. 하긴, 죽다 만 사람들만 가득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아저씨도 좋기만 한 처지는 아니구나. 그런데 벌써 파리가 날라 다녀? ‥하긴, 여긴 고향보다는 남쪽이니까 봄도 빠른가보다.
갑자기 저만치 앞에 가던 마차에 앉은 위생병이 워워 하고 말을 멈췄다. 이쪽 마차도 끼익하고 멈췄다. 뭐지?
“어라. 전령인가.”
뒤쪽(내가 볼 땐 앞쪽)을 보며 백인장님이 말했다. 저 앞 마차에는 군의관들과 그 견습기사 두 명만 타고 있다. 그 전령이란 자들이 볼일 있는 건 앞엣마차겠지. 이런 파리나 날리는 잡병들 마차 말고. 곧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우리군 복장을 한 기병 한명이 달려왔다. 그 틈을 타 마차 뒤를 걸어가던 우리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열심히 다리를 주물렀다. 그 와중에 나는 마차바퀴 옆으로 고개를 빼고 앞에서 오가는 말을 엿들었다.
“무슨 일인가?”
“나후크 동맹 소속 제6 군단 수이키아 부대 제1 천인대 제2 백인대 소속 지스 십인병입니다. 군의장님, 키츠 전군사령관님의 전언입니다. 비상입니다.”
“말해 봐.”
“대 에이모르전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끝났다고! 난 뭐 한 게 없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엄청 당혹스러워 입을 벌린 채 병사를 노려보았다. 병사는 침을 꿀떡 삼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목젖을 울렁였다. 내가 뭔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어 그의 눈을 쳐다본 순간 병사는 짓눌린 음성으로 토해내듯 말했다.
“예메크 그 더러운 야만인들이 배신했습니다! 지금 수이키아와 안달루스가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뭐, 뭐야! 수이키아가! 그, 그럼 성에서 제일 북쪽인 우리 마을은? 우리 마을은 어떻게 되고? 그게 무슨 아닌 밤중의 날벼락 같은 소리냐고!
“그, 그래? 그래서, 전언은 뭐지?”
“킬리온을 쫓아 데그를 공격하던 아군은 급히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군의장님은 인월(寅月) 13일 새벽 0시에 켐빌과 보크 사이의 작은 만에서 배를 타고 귀환하십시오.”
“13일 새벽 0시? 젠장, 바로 오늘밤이잖아. 죽어라 달려야겠군. 알았어. 그런데 전황이 어떻게 된 거야?”
“아군은 최고행군속도로 닷새 만에 데그에 도착해 성을 공격했습니다. 원래 전군사령관님의 뜻은 킬리온을 성에 가둔 채 몇 년이고 버텨서라도 놈을 잡는 것이었습니다만, 하필이면 이 때에 예메크가 뜻하지 않게 본토를 쳤다는 소식에 급히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토에 남은 병력은 얼마 안 되는데다 모두 나후크스탄 근처에 있으니까요. 그 틈을 타서 킬리온은 칼딕 황제를 구출해 도망쳤습니다.”
“그럼 진짜 종전이 아니군. 빌어먹을. 알았어.”
전령은 경례를 붙이고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군의관 마차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제 돌아가기는 늦었고, 우리랑 같이 갈 생각인가 보다.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건가. 어째서 예메크 놈들이 배신한 건가? 여태 조용히 잘 지내왔잖아? 우리 고향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싸울 장정들이야 아직 많겠지만, 젠장! 재수 없으면 다텔이나 술집 채터같은 꼬맹이들도 무기를 잡게 생겼어. 이제 시작했을 농사는 또 어떻고? 우, 우리 누나 보리걷이 때 시집 간댔는데! 우, 씨! 왜 하필 내가 없을 때! 병사들이 죄다 내려갔을 때! 천하에 재수 없는 개 같은 예메크 놈들!
“일이 재미없게 되었군. 예메크 침공이라. 십인병, 좀 진정하게. 자네가 여기서 씩씩거린다고 예메크 군 한명이라도 배탈이 나거나 하진 않아.”
씩씩거리며 고개를 드니 길갈레온 백인장이 여전히 그쪽을 바라본 채 말했다. 당신이 알긴 뭘 알아? 당신은 라이첸 사람이잖아. 여길 봐, 이 사람들은 수이키아 사람들이라고. 다들 열 받아서 뻑 간 거 안 보여? 당신이라면 라이첸이 침공당했다는 말 듣고도 그렇게 태평하겠어?!
하지만 아저씨 말이 맞긴 맞다. 내가 에이모르에서 성내봤자 그놈들 발도 못 걸어준다. 그러니까 왜 일이 이따위냐고!
“키츠 대공도 꽤나 곤란하겠군. 애초에 그 믿을 수 없는 놈들을 끌어들이자고 우릴 설득한 게 대공 아니었던가?”
“그 사람도 아직 애송이야. 언제냐, 킬리온이 산을 넘을 때부터 뭘 좀 안다고 큰소리쳐대더니만 뒤통수를 맞는군. 후후.”
“암만 그 킬리온을 무너뜨렸어도 이렇게 되어서야, 행색 한번 초라하군. 하지만 이걸 들은 에이모르 놈들이 기세등등해서야 좋을 건 없지. 조금 속도를 높여 보실까?”
군의관들은 자기들끼리 하하 웃으며 지껄이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자, 그만들 쉬고 일어나! 방금 들은 놈은 들었겠지만 본토가 위험하다. 우리는 다른 경로로 배를 타고 고향에 간다. 오늘 자정까지 목적지에 도착 못하면 아무도 집에 못 가니 그렇게 알고, 이제부터 똥 빠지게 뛰어!”
“이랴, 하!”
마차가 덜컹하더니 빠르게 굴러갔다. 이런, 젠장! 아직 다 못 일어났는데! 우리들은 온갖 욕을 내뱉으며 일어나 마차를 쫓아 달렸다. 하지만, 어쨌든 좋아. 이대로 수이키아까지 달려갈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