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늘은 부드러운 파란빛이다. 구름조각은 새털같이 유유히 흘러간다. 햇빛도 강렬하지 않고 바람은 선선한, 참 좋은 날씨다.
나는 잠깐 삽질을 멈추고 멍하니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살 태우는 냄새와 매캐한 연기만 나지 않았더라면 잠깐이라도 고향 근처 산마루에서 뒹굴던 기분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어이, 거기! 노는 거냐! 저녁 먹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으면 미친 듯이 일해!”
알았수다, 알았어. 누가 안 한댔어? 나는 잔소리꾼한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툴툴거렸다.
우리는 지금 들판에 널린 시신들을 거둬 소각중이다. 나를 비롯해 아직 팔다리 성한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면 위생병들이 시체를 날라다 그 안에 던져놓고 태우는 식이다. 아군이 너무 빨리 이동한 통에 나처럼 낙오된 병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봐야 이십여 명이지만.
죽고 나면 이젠 적군아군도 없는 건데 누구는 묻어주고 누구는 안 묻으면 그건 인간이 할 짓이 못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복 구분 않고 죽었으면 아무나 묻어줬다. 대신 묻히는 구덩이는 달랐다.
그냥 파묻어버리기엔, 사실 불쌍하지. 다들 각자 살던 이야기가 있었겠지? 되도록이면 아는 얼굴이 안 나오길 빌며 나는 쌓아놓은 흙무더기를 쳐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돌린 옆으로 병사들이 오가며 시체를 던졌다.
“어이, 십인병! 거기 애송이! 여기 와서 이것 좀 도와!”
애송이라고? 저눔이 나잇살 좀 먹으면 얼마나 처먹었다고 애송이야, 애송이는! 갑자기 열이 확 올라 돌아보니 못생긴 황소 같은 인상의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저편에서 날 부르고 있었다. 예예, 애송이 갑니다요. 젠장.
“이거 다리 잡아.”
아저씨는 딱딱하게 팔다리가 뒤틀린 송장 하나를 팔을 잡고 말했다. 입을 가린 수건 때문에 발음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런 내용인 건 분명하다. 나는 내가 맨 수건을 고쳐 매고 시체의 다리를 잡았다. 어쿠, 무겁다.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무거워지나? 아니면 이 사람이 원래 무거웠던 거야?
“그런데 아저씨, 오늘 군의관님들이 떠나는 거 맞습니까요?”
땀을 닦으며 물으니 아저씨는 서두르는 손길로 담배를 태워 물며 대꾸했다.
“그럴걸.”
“그럼 오늘 한나절만 시체 수습하는 겁니까?”
“그럴걸.”
“아니, 언제 다 해요? 이 많은 걸? 게다가 아직 적진이나 강 건너는 손도 못 댔잖아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죽은 놈은 지나가던 어느 한가로운 놈이라도 나서서 묻어주게 되어 있어. 아니면 하다못해 하늘이 알아서 다 해줘. 이걸 다 하겠다고? 네놈 손발이 그렇게 많냐?”
아저씨는 괜시리 짜증을 부리며 침을 퉤 뱉었다. 난 대답할 말이 없어 시체 한 구에 손을 뻗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를 다 보냈지만 시체의 산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 진지 근처, 그러니까 강 건너기 직전의 전장에 널린 시체들만 대충 처리할 수 있었다. 강 건너는 오늘 안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우선 여기 남은 사람이 너무 적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 우리는 손을 털고 강으로 가 몸을 씻었다. 강은 여전히 흙탕물이었지만 시체만진 몸으로 그냥 진지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덜 찜찜한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군복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병사 몇이 대충 헹궈버리고 아직 남은 볕에 내다 말린 게 전부였다. 하긴, 남아있는 물자가 있어야지. 저걸 태우거나 빨면 당장 오늘저녁 우리가 입을 옷이 없다. 물에서 벌벌 떨며 나오니 그 병사들은 덜 마른 군복을 내줬다.
“대충 입으슈.”
“덜 말랐잖아요.”
“그럼 벗고 자던가.”
“이 날씨에, 미쳤수?”
“이도 싫고 저도 싫으면 어쩌자고? 당신 몸뚱이 온도가 기온보다는 높으니까 입어서 말리면 되잖아.”
그렇더라도 덜 마른 걸 체온으로 말리라니, 저 자식 뭐야? 감기 걸리라고? 나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 병사를 째려봤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폭싹 젖은 옷을 입고 덜덜 떨며 진지로 돌아갔다. 해는 이미 지평선 아래로 떨어져 스산한 밤바람을 불어댔다.
우리가 무슨 군담을 들으면 그 내용은 짜릿하고 피 튀기는 전투 이야기지 이런 지루하고 구역질까지 나는 전투 뒤처리 같은 건 아니다. 어, 짜증스럽다. 밥을 한 끼 먹어도 배부른 사람 뒤에 공들여 요리하는 사람 있고 힘들여 설거지하는 사람 있는 건 알겠지만 전투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건가. 제에기, 퉤!
“어이! 다켄! 이리 좀 와봐라.”
오늘따라 어이 하고 부르는 소리를 많이 듣는군. 그런데 여기서 날 이름으로 부를 사람이 있던가? 먹던 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의 그, 그? 그러니까?
“막사를 조사해보니 그럭저럭 쓸만한 걸 찾아낼 수 있었지. 너도 필요한 걸 찾아봐라.”
어제의 그 꼬마 도령이 막사 옆에 쌓인 자질구레한 짐더미 옆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마 놈이야말로 사지육신 멀쩡한 주제 송장치다꺼리는 안 했구만. 그러고는 주인 없는 짐이나 뒤적였단 말야? 이런 까마귀 같으니라고!
“뭘 찾으란 말씀이굽쇼?”
나는 남은 밥덩이를 억지로 입에 우겨넣고 그쪽으로 갔다. 안 가면 명령 불복종 운운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여기 있는 거면 여기 남은 약간명의 부상자보다는 급하게 떠나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을 병사들 물건, 즉 주인 없는 물건일 가능성이 더 높다. 뭔가 도움이 되는 걸 건질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쳇, 도둑놈 같긴 하다만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가보니 낮에 일을 도운 몇몇 병사들이 이미 와서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다. 꼬마 도령은 내가 놓칠 뻔한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비켜섰다. 지체 높은 집안 도련님께서야 가난한 병사들 짐을 뒤져 얻을 게 없긴 하구나. 나는 꼬맹이를 봐서 뒤지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짐을 뒤적여봤자 그놈 군장이 그놈 군장이니 따로 가지고 싶은 게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군의관들 따라 이동할 때 짐이 많아서 좋을 것 같진 않고, 그냥 성해 보이는 가방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데 도련님. 주인 없는 거라지만 이렇게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무슨 소리. 전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건 가져가 주는 게 물건 입장에서도 기쁠 거야. 물건이란 사람에게 사용될 때 그 본분을 다하므로 가장 값진 법이다.”
그러니까 주인 없는 물건 도둑질을 합리화하는 말이잖아. 물론 소설 보면 그런 장면이 많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주인공들은 안 그런다. 그런 짓은 하인들이나 하는 거다. 그래서 이 꼬마 놈은 날 시키고 자기는 안 하고 있었군. 날 하인 취급했다 이거로군. 어이구, 이런 한주먹감도 안 되는 것이!
기가 차서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만 꾸벅인 후 잠자리나 찾을까 돌아서다가 문득 발길을 잡는 게 있어 멈춰 섰다. 이쪽에 쌓인 물건들 말고, 저편 좀 떨어진 데에도 물건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흙투성이, 그을음투성이, 터지고 밟히고 말이 아닌 군장 몇 개다. 옆에는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남자가 간이의자를 놓고 앉자 뭘 적고 있었다. 거기에 메넴 십인장이 예의 군단기를 들고 서 있었다.
“뭐 하십니까요?”
“전사자 확인중이다.”
전사자? 갑자기 모골이 송연하다. 그러고 보니 십인장 앞에는 군번줄이 가득한 커다란 궤짝이 하나 있었다. 제기랄. 바로 옆에서는 산 사람들이 주인 모른다고 아무거나 챙기고 있는데 여기선 그 주인일지도 모를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단 말이지.
“십인장님, 오늘 군의관들이 떠난댔잖습니까요. 오늘 시체 수습한 데서 건진 거라면 몇 명밖에 확인 못 하는 거 아닙니까요?”
“여기에는 기병들도 몇 명 있다. 말이 세 마리 있어서 우리가 강 건너까지 다녀왔다.”
“그럼 군번줄이라도 얼만큼 수습한 건가요?”
십인장은 잠깐 하늘을 쳐다봤다.
“다는 아니다.”
…헤헤헤. 뭐, 거야 어쩔 수 없었겠지. 어쩔 수 없어. 대체 내가 뭘 기대했던 거야?
“그럼 이건 다 전사자겁니까?”
“몰라. 주운 거다.”
나는 멍하니 널브러진 물건들을 쳐다봤다. 대체로 군낭이었다. 하긴, 단검이나 철모 같은 거야 너무 널려있으니 수습하지 못하지.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가방 하나를 주워들었다. 흙탕물에 잔뜩 절은 듯 엉망진창에 고약한 냄새도 났다. 열어보니 자잘한 관물들과 구겨진 책 한권이 나왔다.
“어라, 이거?”
물이 군낭 안까지 들어갔는지 책도 젖어서 엉망이었지만 이게 뭔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기사 펠트로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아니라서 조금은 실망이었지만, 아무튼 나 말고도 이런 책을 들고 나온 녀석이 있었구나. 아마도 애송이인 것까지 똑같았겠지. 쳇. 코가 시큼해.
나는 책을 챙겨 들고 온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체 수습을 정말로 대충대충 하고 저녁 먹은 후 좀 쉴까 했더니, 우리는 곧 군의관들이 끌고 온 무개마차(라지만 말이 끌어서 마차지 실상인즉 짐수레다) 두 대에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을 싣게 되었다. 그러고는 다음날 한새벽에 눈도 제대로 못 붙여보고 출발했다.
“거참 신기한 노릇일세. 보통 오늘 간다하면 내일, 내일 간다 하면 엿새 뒤, 제대일이랑 귀환일은 원래 이런 식인데 웬일로 이렇게 빨리 떴을까?”
옆에 가는 병사의 혼잣말이었다. 나는 잠자코 졸린 눈을 꿈뻑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탈 자리는 없던 마차가 천천히 굴러가는 뒤를 터덜터덜 걸었다.
정말이지, 한창 전쟁 중인 나라인가 싶게 평온한 나날이다. 켐빌로 행군할 때처럼 사람 없는 들판만을 골라 죽죽 내려가는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묘한 기분이 든다. 슬슬 봄볕이 들어서일까. 하지만 봄 신령이 지피기엔 우리 처지가 아니올시다인걸.
“창검이라도 들려주지 이게 뭐야. 불안해.”
갈아엎은 너른 밭 근처를 지날 때 다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일하는 농부 하나 안 보이지만 막 갈은 것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흙을 보니 확실히 사람이 근처에 있긴 있나보다. 이런, 저 병사한테 동감이다. 그 농부들이 멀리서 우릴 보고 줄달음질쳐서 민병대 같은 거에 알리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래도 난 아직 단검이라도 챙기고 있으니까 뭐어. 혹시라도 위급할 때 어떻게든 되겠지.
듣기로 데그에서 켐빌까지 보통 도보로 일주일은 걸린다던데 이런 속도로 가서는 보름이나 지나야 도착하겠어. 그 긴긴 날을 이렇게 흙먼지 마시고 부상자들 부려워하며 걷자니 오만 잡상만 들고 기분은 잡치고. 차라리 최고행군속도로 한 닷새 고생하고 말지.
“헤에, 아지랑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마차 끄트머리에 다리를 걸치고 멍하니 우리 뒤편하늘을 쳐다보던 길갈레온 백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한 말 같다. 흐음, 표정만 봐선 나른한 게 당장 꾸벅꾸벅 졸겠는걸. 이 아저씨야, 아저씨는 마차 타고 편하게 경치감상하며 가지만 우린 그냥 걷고 있다고요. 참 태평한 소리 하신다.
“백인장님, 다리는 좀 어떻습니까요?”
그냥 본 김에 말을 걸어봤다. 나를 기억하려나? 백인장님은 나를 보고 눈을 깜빡거리다가 씩 웃었다.
“스렌돌프 십인병 아닌가. 살 만 하네.”
“좋겠습니다. 마차 타고 가서.”
“꼭 그런 것도 아니지. 자네가 여기 올라와 앉아있다면 파리 쫓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걸세.”
“에에? 파리쯤 쫓는 게 뭐 어렵다고요. 그냥 팔만 설레설레 흔들면 됐지.”
아저씨는 그냥 웃었다. 파리라고?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마차 쪽에서 썩는 냄새가 나긴 했다만. 하긴, 죽다 만 사람들만 가득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아저씨도 좋기만 한 처지는 아니구나. 그런데 벌써 파리가 날라 다녀? ‥하긴, 여긴 고향보다는 남쪽이니까 봄도 빠른가보다.
갑자기 저만치 앞에 가던 마차에 앉은 위생병이 워워 하고 말을 멈췄다. 이쪽 마차도 끼익하고 멈췄다. 뭐지?
“어라. 전령인가.”
뒤쪽(내가 볼 땐 앞쪽)을 보며 백인장님이 말했다. 저 앞 마차에는 군의관들과 그 견습기사 두 명만 타고 있다. 그 전령이란 자들이 볼일 있는 건 앞엣마차겠지. 이런 파리나 날리는 잡병들 마차 말고. 곧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우리군 복장을 한 기병 한명이 달려왔다. 그 틈을 타 마차 뒤를 걸어가던 우리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열심히 다리를 주물렀다. 그 와중에 나는 마차바퀴 옆으로 고개를 빼고 앞에서 오가는 말을 엿들었다.
“무슨 일인가?”
“나후크 동맹 소속 제6 군단 수이키아 부대 제1 천인대 제2 백인대 소속 지스 십인병입니다. 군의장님, 키츠 전군사령관님의 전언입니다. 비상입니다.”
“말해 봐.”
“대 에이모르전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끝났다고! 난 뭐 한 게 없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엄청 당혹스러워 입을 벌린 채 병사를 노려보았다. 병사는 침을 꿀떡 삼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목젖을 울렁였다. 내가 뭔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어 그의 눈을 쳐다본 순간 병사는 짓눌린 음성으로 토해내듯 말했다.
“예메크 그 더러운 야만인들이 배신했습니다! 지금 수이키아와 안달루스가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뭐, 뭐야! 수이키아가! 그, 그럼 성에서 제일 북쪽인 우리 마을은? 우리 마을은 어떻게 되고? 그게 무슨 아닌 밤중의 날벼락 같은 소리냐고!
“그, 그래? 그래서, 전언은 뭐지?”
“킬리온을 쫓아 데그를 공격하던 아군은 급히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군의장님은 인월(寅月) 13일 새벽 0시에 켐빌과 보크 사이의 작은 만에서 배를 타고 귀환하십시오.”
“13일 새벽 0시? 젠장, 바로 오늘밤이잖아. 죽어라 달려야겠군. 알았어. 그런데 전황이 어떻게 된 거야?”
“아군은 최고행군속도로 닷새 만에 데그에 도착해 성을 공격했습니다. 원래 전군사령관님의 뜻은 킬리온을 성에 가둔 채 몇 년이고 버텨서라도 놈을 잡는 것이었습니다만, 하필이면 이 때에 예메크가 뜻하지 않게 본토를 쳤다는 소식에 급히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토에 남은 병력은 얼마 안 되는데다 모두 나후크스탄 근처에 있으니까요. 그 틈을 타서 킬리온은 칼딕 황제를 구출해 도망쳤습니다.”
“그럼 진짜 종전이 아니군. 빌어먹을. 알았어.”
전령은 경례를 붙이고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군의관 마차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제 돌아가기는 늦었고, 우리랑 같이 갈 생각인가 보다.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건가. 어째서 예메크 놈들이 배신한 건가? 여태 조용히 잘 지내왔잖아? 우리 고향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싸울 장정들이야 아직 많겠지만, 젠장! 재수 없으면 다텔이나 술집 채터같은 꼬맹이들도 무기를 잡게 생겼어. 이제 시작했을 농사는 또 어떻고? 우, 우리 누나 보리걷이 때 시집 간댔는데! 우, 씨! 왜 하필 내가 없을 때! 병사들이 죄다 내려갔을 때! 천하에 재수 없는 개 같은 예메크 놈들!
“일이 재미없게 되었군. 예메크 침공이라. 십인병, 좀 진정하게. 자네가 여기서 씩씩거린다고 예메크 군 한명이라도 배탈이 나거나 하진 않아.”
씩씩거리며 고개를 드니 길갈레온 백인장이 여전히 그쪽을 바라본 채 말했다. 당신이 알긴 뭘 알아? 당신은 라이첸 사람이잖아. 여길 봐, 이 사람들은 수이키아 사람들이라고. 다들 열 받아서 뻑 간 거 안 보여? 당신이라면 라이첸이 침공당했다는 말 듣고도 그렇게 태평하겠어?!
하지만 아저씨 말이 맞긴 맞다. 내가 에이모르에서 성내봤자 그놈들 발도 못 걸어준다. 그러니까 왜 일이 이따위냐고!
“키츠 대공도 꽤나 곤란하겠군. 애초에 그 믿을 수 없는 놈들을 끌어들이자고 우릴 설득한 게 대공 아니었던가?”
“그 사람도 아직 애송이야. 언제냐, 킬리온이 산을 넘을 때부터 뭘 좀 안다고 큰소리쳐대더니만 뒤통수를 맞는군. 후후.”
“암만 그 킬리온을 무너뜨렸어도 이렇게 되어서야, 행색 한번 초라하군. 하지만 이걸 들은 에이모르 놈들이 기세등등해서야 좋을 건 없지. 조금 속도를 높여 보실까?”
군의관들은 자기들끼리 하하 웃으며 지껄이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자, 그만들 쉬고 일어나! 방금 들은 놈은 들었겠지만 본토가 위험하다. 우리는 다른 경로로 배를 타고 고향에 간다. 오늘 자정까지 목적지에 도착 못하면 아무도 집에 못 가니 그렇게 알고, 이제부터 똥 빠지게 뛰어!”
“이랴, 하!”
마차가 덜컹하더니 빠르게 굴러갔다. 이런, 젠장! 아직 다 못 일어났는데! 우리들은 온갖 욕을 내뱉으며 일어나 마차를 쫓아 달렸다. 하지만, 어쨌든 좋아. 이대로 수이키아까지 달려갈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