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5
이 시대에 걸맞지 않게 벽에 걸려있던 종이 달력 위로 부들부들 떠는 손그림자가 어렸다. 손은 질풍노도의 미터마이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신속하게 어제 날짜를 찢어내더니 토르의 해머에 얻어맞은 전함처럼 조각을 내버렸다. 북북!
"결국은...
'아기 다리 고기 다리 던 그 날' 이란 말을 다시는 입밖에도 내지 않게 된 그 날이 와버렸군."
이젤론 요새의 행정업무 담당 카젤느는 비장함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던 책상을 힘차게 내리쳤다. 쾅!
"내 이날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너희 전우를 사칭한 반란군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날을!"
그는 1mm 크기로 분해된 달력 조각을 군홧발로 마구 짓밟아댔다. 마치 그 휴지조각이 후배인지 원수인지 구분이 안가는 사령관 얀 웬리인 듯이.
그날은 기상대에서 큰맘먹고 화창한 날씨로 맞춰놓았던 날이었다.
카젤느는 여느때처럼 일찍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맑게 개인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우중충한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운 채 근심하며 걷고 있었다.
뭔가 수상했다.
확실히 수상했다.
정말 수상했다.
"뭐가 그렇게 수상합니까, 선배님?"
"지금 시간에는 침대에서 허우적 거려야는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부터가 하 수상해요, 얀 군...이 아니라 얀 장군. 얀 장군!? 정말 왜 지금 시간에 돌아다니는 거요?"
경악하며 100m 전방으로 물러서는 그에게 얀은 억울무쌍하다는 표정으로 항의했다.
"명색이 야전 사령관인데 일찍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정 수상하다면 신고하십시오."
"그런 율리안에게 수면제를 먹여버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런 도덕적이고 지극히 당연하지만 여기선 철저히 무시되는 소릴 하면 설득력이 없어요."
"무, 무슨! 전 오늘은 정말 제 의사로 일찍 일어났습니다. 율리안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구요!"
"잠결에 깬 걸 일어난 걸로 하면 곤란합니다."
라인하르트의 일억대군 앞에서도 배짱부리는 얀이지만 선배의 독설 공격은 막아낼 재간이 없다. 더이상 말했다간 완벽하게 패할 것 같아 그는 즉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 그런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뭐가 그렇게 수상한거죠?"
카젤느는 눈살을 찌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얀 장군.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아뇨. 아, 맞아!"
"무슨 날이죠?"
허둥지둥 물어보는 카젤느. 얀은 이 두 마리 정도는 서식하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버릇인 머리긁기를 했다.
"오늘은 구정, 음력설입니다."
카젤느는 처음 스케이트 타는 사람처럼 쭈욱 미끄러져 버렸다. 쿠당탕!
"여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오?"
"설이잖아요."
아내는 담담하게 대꾸하고 가래떡을 (이게 여기 왜 있어?) 썰었다. 난 김빠진 얼굴로 가스 레인지 위의 (이건 또 여기 왜 있어?) 냄비를 응시했다.
오늘 당연히 맡아야 하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여보. 정말로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른단 말이오?"
"사오정이에요? 설이랬잖아요."
나는 엄청난 실망감을 안고 비척비척 부엌에서 걸어나왔다. 설인거야 맞지만 아니 명색이 마누라가 그런 것도 잊어버린단 말이야?
그것 없이 아침먹을 기분이 날 리가 없다. 나는 출근이나 하려고 방에 들어갔다. 샤롯이 옷장을 잔뜩 어질러 놓으면서 내 소중한 단벌 군복에 주름잡고 있었다.
"샤롯. 너 왜 옷장은 뒤지고 그러는 거냐. 아니, 뒤지는 것 까진 좋은데 내 군복 밟지 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빠? 음, 오늘은 설이잖아요. 새옷이 여기 어디 있다고 엄마가 말씀해 주셨거든요. 아빠, 나 세배하면 세뱃돈 많이 줘야 되요."
나는 말없이 딸네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빠가 뭐 하나만 물어보자. 오늘 무슨 날이냐? 설 말고."
"2월 5일이오."
"그건 나도 안단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지 않니?"
"네! 율리안 오빠가 얀 아저씨랑 놀러와요!"
이건 순전히 가정교육을 잘못한 내 잘못이다. 이럴수가!
오늘은 내 생일이란 말이다!
"..느 장군. 카젤느 장군! 이봐요! 아니 아침부터 왜 그렇게 비몽사몽이오?"
카젤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무라이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카젤느는 사양했다.
"아아. 빈속이라 커피 마시기가 좀 곤란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빈속이라구요? 어허, 장군께서 몸이 안좋으면 온 이젤론이 마비되거늘."
사실이다. 그가 기침만 해도 이젤론 요새 전체가 버그 발생시의 창세기전 전투 장면처럼 멈춰버린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불변의 진리였다. 이젤론을 함락시키고 싶다면 얀 웬리보다는 알렉스 카젤느를 암살해서 요새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무라이는 주인없는 커피를 후룩 마시며 벽에 기대섰다.
"그럼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식당이나 갑시다. 아직은 출근시간도 아니니까 천천히 가지요."
카젤느는 그의 호의에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다가 눈을 들었다.그의 전신을 감싸고 도는 엄청난 박력에 무라이는 움찔 물러섰다.
"장군!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그, 글쎄요. 설날인건 맞습니다만 또 다른게 겹쳤나? 앗, 장군! 어디 편찮으시오?"
"아뇨...아무것도. 식당이나 갑시다."
카젤느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장교 식당으로 걸어갔다.
오늘 아침 가족들은 그를 배신해 버렸다.
정말 다들 모르는 걸까? 아내의 무뚝뚝함과 샤롯이 뭔가 꾸미는 듯한 얼굴을 봐선 평소와는 다르다는 게 맞긴 맞는데 한결같이 모른다는 반응이라니.
수상해. 신고해 버리겠어.
"아...아..."
카젤느는 강렬한 스포트 라이트를 등지고 손가락을 오그라 뜨렸다. 저절로 온몸이 부르르르 떨린다.
잽싸게 피했던 무라이는 즉시 범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올리비에 포플런! 새해 벽두부터 무슨 짓인가! 장교 식당을 전세내기라도 했나, 응? 샴페인을 터트린 것 까진 좋은데 왜 파이는 집어던져!"
"아이쿠, 죄송합니다. 소장님. 전 그저 코네프 녀석에게 요리의 신을 대신해서 천벌을 내리려고 한 것 뿐인데 그만 카젤느 소장님께 맞아버렸네요. 장군님, 그 레몬 파이 맛 죽이죠? 그렇죠? 애플 파이보다 백배 천배억만배 낫지요!"
"..."
아닌게 아니라 그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코네프가 밀치는 바람에 넘어질 뻔 했는데 순간 날아온 파이에 정통으로 직격당한 것이다. 역시 격추왕의 실력은 지상에서도 뭔가 틀렸다. 당사자야 그 반대 기분이겠지만.
카젤느는 터프하고도 상큼하게 웃어제끼는 포플런을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네 이거 영창감이지만 퀴즈 하나만 맞추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 오늘은 무슨 날이지?"
"아, 그거야 쉽죠. 설날인 동시에..."
"동시에?"
다급하게 묻는 그를 향해 포플런은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올리비에 포플런한테 닿으려면 아직아직 까마득하지만 그래도 격추는 잘 하는 이반 코네프의 제삿날이죠. 레몬 파이가 지당 낫지! 암! 잡히면 나 죽었다고 복창해라! 어라, 소장님?"
카젤느는 무라이가 준 냅킨으로 얼굴과 군복을 닦은 후 절도있게 돌아섰다.
"괘씸죄와 상관기만죄 및 군내기강질서혼란초래죄로 저자를 영창에 보냈으면 합니다, 무라이 장군."
"그건 걱정 마시오. 저자는 센코프 장군과 함께 반드시 영창에 집어넣어야는 자들 리스트 1순위를 다투는 자요."
웬지 재수 옴붙은 날이 아닐까 싶어져 카젤느는 즉시 근무지로 출동했다.
꼼꼼한 성격 탓에 책상 정리는 항상 잘 되있었다. 카젤느는 조간 전자신문을 보면서 깊은 시름에 빠져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머, 소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그리고?'
"세뱃돈 주세요."
카젤느의 잡아먹을 듯한 표정에 까르르륵 웃으며 프레데리커는 도리질했다.
"아, 농담이에요, 농담. 어쨌든 설은 신정만 인정하고 구정이란 개념이 없는 은하영웅전설의 배경 사회탓에 오늘은 휴일이 아니죠. 대신 잔무가 많아요."
쾅! 그녀는 자기 키의 절반만한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카젤느는 길가의 개미집 감상하듯 대충대충 넘겨보았다.
뭐야. 정말 하나같이 자디잔 일이잖아.
"오늘 퇴근때까지 다 해놓고 얀 장군님께 보내서 결재받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소만 대위."
"예."
그는 오늘 아침 내내 물어봤지만 차마 꺼내지지 않는 질문을 했다.
"난 대위의 기억력을 믿고 싶소만. 그러니까 오늘은 무슨 날이오?"
"그야 소장님의 외조모분 생신 아닌가요?"
결국 달관한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이젤론 요새에 존재할 리가 만무한 먼 산을 쳐다보았다.
이대로 하루가 허무하게 끝나는 걸까...
카젤느는 무겁고도 슬픈 배신감에 짓눌려 어깨도 펴지 못한 채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 엄청난 일을 결국은 해치워버린 그의 퀭한 눈은 어쩐지 유령같았다.
"여어, 카젤느 소장. 어디 가시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메르카츠 장군. 어디 가다뇨. 주점이죠."
"장군은 미터마이어 장군 정도는 아니어도 대단히 가정에 신경쓰는 걸로 아는데?"
"그 공들인 가정이 저를 배신해 버렸습니다. 흑."
결국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메르카츠는 곤란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 자, 그러지 말고 나와 한 잔 하러 갑시다. 슈나이더가 미리 잡아놓은 곳이 있소. 아, 그러고보니 센코프 장군과 아텐보로 장군도 그곳에 간다던데. 흠."
"무슨 상관이랍니까! 예! 한 번 죽어보자구요!"
자포자기한 심정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그것은 때로 한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 버린다. 하지만 그 진리를 아주 잘 알면서도 카젤느는 용감하게 유흥가로 향했다.
"엇, 이제 생각나다니. 나도 늙긴 늙었군. 민츠 군도 그곳에 끌려갔지."
"어린애한테 술이라뇨! 센코프 장군의 짓입니까?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어이어이.
"민츠 군은 어리지만 영리하니까 음주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거요. 그땐 장군이 얀 장군에게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물으시오."
총각 얀에게 전쟁고아(?)가 된 율리안을 덜커덕 떠넘긴 건 바로 꼬리없는 악마 카젤느였다.
"그러죠. 그런데 장군."
"예."
"...아니오, 됐습니다."
객원장군이 그렇게까지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 대해 생일같이 사소한 것까지도 알 리가 없다. 카젤느는 이젤론 요새 살림같이 하루 펑크내면 한달은 야단나는 중요한 업무가 자신의 소임이라는 것도 잊고 비텐펠트마저 놀라 넘어질 박력으로 주점에 돌격했다.
주점은 이미 정신분열의 도가니였다. 율리안은 키르히아이스 뺨치는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빙긋 웃으면서 진땀만 흘릴 뿐 저들의 사악한 폭주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스타트는 노총각으로 늙을 주제 가슴은 뜨거운 아텐보로였다. 그는 베레모를 거꾸로 돌려쓰고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난 알아요! 그대가 오늘 너무너무 지쳐 알코올 해변에 휴가온 걸!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는 지금 웃잖아요~!"
"아텐보로 장군. 꼭 지나간 옛노래 불러야만 하겠소? 장미의 기사중의 기사인 이 몸이 나서야만 한단 말이오? 아마..오셨을텐데..우리들을 웃게 해줄 사람들~."
"센코프 장군님. 오늘 같은 분위기에 그런 숙연한 노래가 어울린답니까? 제가 오딘에서 유행했던 노래를 불러드리죠. 늘 함께 있어 사악한 걸 몰랐던 거죠,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준 원수같은 사람들을. 가끔씩 내가 지쳐 혼자라 느낄 때에 언제나 나를 괴롭혀온 사람들을 잊고 살았죠~."
"모두 정신과 진료를 권하고 싶군."
카젤느의 짤막한 감상 앞에서 두 장군과 한 소령은 술집을 거덜내고 있었다.
구석에서 우유를 홀짝이던 율리안은 카젤느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왔다.
"카젤느 장군니임! 메르카츠 장군니임!"
"율리안. 너 어쩌자고 얀은 내팽게치고 여기 와있는 거냐? 이러다가 그 친구 저녁 굶는 거 아냐? 물론 그래도 튼튼란 작자지만."
양아버지에 대한 험담이 더 터지기 전에 수습할 의무를 느낀 율리안은 두 장군을 난장판 바로 옆 테이블로 끌었다. 카젤느는 턱을 괸 자세로, 맥주병을 들고 주점을 노래방 겸 DDR판으로 착각한 채 갖은 쇼를 다하는 자들을 구경했다... 뭐 보고있자니 즐겁기는 했지만 저런 작자들이 자유행성동맹의 최전선에 있는 13함대의 중추들이라는 것에 카젤느는 한심함을 느꼈다.
"그런데 율리안.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 난 너만은 믿고 싶은데."
"설날이죠."
"그거 말고."
"2월 5일 아닌가요?"
"이봐아!"
"동시에 카젤느 장군님의 외조모분 생신이죠. 아하, 그렇군."
"야 임마!"
오벨슈타인을 본 미터마이어처럼 발악하는 그를 말리며 메르카츠가 말했다.
"어린 친구가 자네에 대해 아는 게 꽤 되는군. 민츠 군, 역시 샤롯 양과의 소문이 사실이었나? 미래의 장인 어르신을 챙긴단 말이지. (미래의 장인 어르신은 월터 폰 센코프닷! 아아악!)"
"어, 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카젤느 장군님을 장인으로 모시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군. 얀 장군의 말에 따르면 세계를 파멸로 몰아가려는 마족의 왕이라던데. 그럼 자네가 리나가 되서 막을텐가?"
"리나가 되느니 차라리 장인으로 모시고 말죠."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카젤느는 연거푸 소주잔을 비웠다. (와인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때 한참 웃고 떠들며 즐기던 센코프가 그의 어깨를 쳤다.
"장군님. 이렇게 따로 떨어져 계실게 아니라 같이 즐기시죠."
"됐네요, 됐어. 그건 얀 장군에게 부지런해지라는 소리와도 같소이다."
"그렇습니까? 그럼 여러분. 페스티벌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주위에 있던 자들의 눈빛이 싹 달라졌다. 아까의 광기같은 건 찾을데 없이 하나같이 눈이 웃고 있었다.
- 부, 불안하다!
"뭘....꾸미는 거요?"
"이겁니다. 자, 아텐보로 장군! 즐거움 잊는거야, Never smile!"
"으랏차! 시원한 구름아래, Cloudy days!"
"아욱!"
아텐보로는 센코프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카젤느의 머리에 어디서 준비해왔는지 망태기를 씌워버렸다. 뭘 담았었는지 소금기가 잔뜩 배어나오는 - 꼭 무슨 해초 냄새 같았다 - 속에서 그는 누군가 힘좋은 자에게 팔을 결박당한 채 끌려갔다.
"뭐하는 짓들이야! 당신들 연봉 깎아버리기 전에 이거 놔!"
"해볼테면 해보쇼. 우리가 눈 하나 깜빡하는가."
"이이이익! 이건 반란이닷!"
"헤에, 이를 어쩌지? 최전선에서 반란이라니. 이거 트류니히트 의장씨의 속을 아주 잘도 구워버리겠는데?"
"대체 오늘 왜들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루종일 괴롭혀! 제발 그만 둬!"
평소 자신의 행실 따윈 잊어버린채 부르짖는 눈물 섞인 절규에 갑자기 주위가 숙연해졌다. 너무도 조용해지자 이번엔 카젤느 쪽이 불안해졌다.
대체 뭘 꾸미는 건지...
"자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카젤느는 온몸이 경직되는 섬뜩한 기분에 바들바들 떨었다.
저, 저, 저, 저 목소린...!
어제까진 상냥했는데 오늘 아침 돌변해서 무뚝뚝하게 남편 미역국도 안챙겨준 저 목소린..!
아텐보로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고 망태기를 벗겨버렸다. 얀 함대 일당 앞에는 원래의 말쑥한 이미지는 간데없이 레몬 파이와, 술냄새와, 해초비린내로 철저하게 무장한 꼬리없는 악마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서있었다.
포플런은 카젤느의 등 뒤에서 오늘 하루 두 번째로 샴페인을 터트렸다.
"얀 장군님 선창!"
"에헴. 친구일 때보다는 웬수같은 때가 더 많았던 카젤느 장군."
"어허, 더 크게!"
얀은 특유의 쇳소리로 외쳤다. (제 목소리 말입니다. 누가 하드록에 딱 어울린다고 한;)
"장군! 생일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휘이익~! 축하인지 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만수무강! 새해 안녕!
생신 축하!"
포플런이 뿌려대는 샴페인 거품에 파묻힌 채 다들 만난 순서대로 인사했다.
먼저 무라이가 악수해 왔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장군."
"아침에는 포플런 녀석한테 쫓기느라 못 뵈었죠? 그거 실은 저희가 무라이 장군님과 짠 겁니다. 우리의 생신 선물은 좀 비신사적이었지만 레몬 파이와 샴페인 입니다."
"생신 축하해요, 장군님. 아까 떠맡긴 일들은 제가 이미 처리한 것들이랍니다. 올해에는 좀더 편하게 지내시라구요."
"술집은 내가 책임진거요. 난 소주로 대접했소이다. 축하하오."
"저와 센코프 장군, 슈나이더 소령, 율리안, 이렇게 넷은 오락 담당이었습니다. 특별히 평소에 하지도 않던 노래자랑에 DDR 경연에 코믹극까지, 아무튼 심적으로 즐거운 날이셨으면 합니다."
"아까 여기 올 때 팔 비튼 것 미안합니다. 제가 원체 힘이 세서 말이죠."
"전 얀 장군 저녁 차려드리려고 했는데 여기서 드시겠다고 하시는 바람에주점에 있었습니다. 꼬마가 그런데 있었다고 탓하진 마세요."
"대체 이건...이봐요들..."
황당해 하는 카젤느 앞에 특대 사이즈 - 꼭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어린이 키만했다 - 의 생크림 케렉이 도착했다. 얀은 카젤느 부인의 반대편에 서서 폭죽을 들었다.
"늘 다른 일과 겹쳐 제대로 생일 잔치 한 번 해본 적 없으신 카젤느 장군을 위해 제가 부인과 꾸민 겁니다. 다들 선의로 한 행동이니 도중에 좀 심한 게 있었다해도 웃으며 넘어가 주십시오. 자, 촛불 끄셔야죠."
"다들...정말 너무..아니 황당해서 이해가 잘...하지만 정말...고맙..습니다. 아, 이런."
겨우 상황파악을 한 그는 웃는지 우는지 분간이 안가는 표정으로 케렉에 다가섰다. 숨막히는 침묵 가운데 그는 촛불을 껐다. 순간 일동의 눈빛이 또 한 번 달라졌다! 콰아아아앙!!!!!
"뭐, 뭐, 뭐, 뭐야!"
너무 놀한 나머지 뒤로 넘어가면서 주저앉은 그의 눈에는 화려한 폭죽과 드라이아이스에 감싸인 케렉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속에서는...
"생신 축하해요, 아빠. 이거 제가 직접 끓인 미역국인데 드셔보세요."
누가 생각해낸 건지는 몰라도 좀 충격적인 바니걸 차림의 샤롯 (세부 묘사는 생략) 이 미역국 한 사발을 들고 방긋방긋 웃으며 나타났다. 심장마비로 비명횡사할 뻔한 데다가 어린아이한테 시킨 저 잔혹한(?) 짓에 카젤느는 결국 비명을 질러버렸다...
"그아아아아아악!"
이후 석달간 이젤론의 모든 행정업무는 마비되어 버렸다.
라인하르트는 이때 쳐들어 갔으면 간단하게 하이네센도 점령했을 거라며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달력을 찢어요?"
"바로 당신같은 자 때문이 아니겠소. 오늘이...오늘이 그날로부터 1년째..."
바르르르 떠는 그를 바라보며 얀은 하하 웃었다.
"그땐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올해도 다시 해볼까요? 아하하하하..."
얀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대기중으로 녹아들어갔다. 짧은 침묵은 엄청나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카젤느는 미소지었다.
"그대는 죽을 때 무슨 말을 남길거지?"
"그야 헤어지니까 '안녕' 이나 '고마워' 하고...으아아아악!"
2월 5일 - 알렉스 카젤느와 얀 웬리에게 있어 악몽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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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껄껄. 에듀넷 은하영웅전설 소모임동의 알렉스 카젤느님 생일 기념으로 지어올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들은 이름만 은영전에서 빌려왔지, 실은 그 닉을 사용하는 은영동 사람들!
고로 실제 은하영웅전설의 캐릭터들과는 좀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는게지요.(쿨럭)
참고로 제가 얀웬리올시다.(쿨럭쿨럭) 중간에 난데없이 리나니 마왕이니 하는 소리가 나온 건, 카젤느님과 제가 은영동 사람인 동시에 슬레동 사람이라섭니다. 카젤느님의 슬레동 닉이 루비아이였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