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9/14
이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이 어림잡아 100만개를 웃돈다고 한다. 그 100만개의 별엔 100만가지의 생물이 있고, 100만가지의 문명이 있고, 100만가지의 사고방식이 있을 것이다.
물론 100만가지의 배고픔도 있을테고. 하하하.
나는 라면을 께작께작 집어먹고 있었다.
“헤..심란해 보이시네요? 옆구리가 허전하신가?"
"시끄러."
코네프 군...아니, 됐어. 네놈의 처리는 민츠에게 맡기지. 굳이 이몸이 손을 더럽힐 일은 없는거다. 핫핫핫!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스튜 그릇을 내려놓았다. 군함의 장교식당은 더욱 다양하고 영양높고 맛좋은...어디서 무슨 소리 들렸나요.
코네프는 식기를 반납하고 터덜터덜 나가는 카일을 턱짓했다.
"하아...저 녀석, 이래뵈도 실력은 있어서 믿고 맡긴 거였는데 이거...더 교육을 시켜야 겠어요."
감기를 이유로 풋내기한테 위험천만한 일을 맡긴 네녀석의 정신교육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나저나 그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한 게 하나 있어.
"그런데 13명, 아니 12명의 항법사중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대체 뭐지?"
"군대로 치면 기함인 배가 그냥 가니까 이의 제기하려다가도 갔겠죠. 아니면 제기하려 해도 전파방해 때문에 두절되버렸거나."
하이네센을 굳게 믿는다 이거로군. 가만, 만약 한 척이라도 잃었다면 40만명이 현실에 눈뜨게 된다 이건가?
내 알 바 아니다. 이건 하이네센의 소관이다. 난 그저 [관객]의 입장에서..
"아, 그런데 센코프 씨."
뭐냐뭐냐.
"왜."
"우리 내기하나 하죠."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만 흥미가 돋는군.
"말해봐."
"음, 두 가진데요, 첫 번째는 일주일 안에 생물이 살 수 있는 별이 나타난다."
"바로 얼마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초신성을 지났는데 거 무슨. 조야해라. 있어도 안 내릴거다. 다음."
"음..하지만 생물이 살 수 있는 별이 정말 나타나야만 한다구요. 세균을 적게 가져오는 바람에.."
"세균?"
"아, 아뇨, 아무것도........자, 두번째입니다."
갑자기 눈이 쭉 찢어진다. 그, 그렇게 웃지 마! 괴로워!
녀석은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 한참 뜸을 들이다가 나한테 얼굴을 들이밀며 나직이 말했다.
"두두두두두두두! 하이네센 씨가 과연 연애에 성공할 것인가!"
..푸, 푸핫, 할 일도 되게 없는 놈일세. 나는 가볍게 그의 목 뒷덜미를 손날로 내리쳤다. 그 여파로 그는 내 라면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불가능하다는 걸 전제로 하는 그런 뻔한 잡소리 하지 마. 그 시간에 또 일 안나게 관제실이나 지키시지."
"푸흡! 불어버린 라면이라니 맛없잖아 이거. 그런게 어딨어요! 이건 근거있는 거라구요!"
난 관심없네.
"흥미 없어, 남들 연애설 따위."
"다른 사람도 아닌 카젤느 양이 상대라면?"
...뭐?
나는 구엔이 갑자기 나타나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건 아닐까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다. 지금쯤 재채기 마구 하며 침튀길 그 녀석은 여기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되물었다.
"자넷 카젤느 씨가 하이네센과 염문을 뿌린다니. 무슨 소리야. 그렇게 뜨거운 사이는 아닌 거 같던데."
"둘만이 비밀스럽게 메인 브리지에 있는 걸 본 사람이 있는데요."
아마도 항로 얘기같은 걸 했겠지. 그 얼음장 아가씨가 무슨...이봐! 한 두 번 우연히 본 거 가지고 헛소리 하지 마!
"헛소리는 몸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그만해. 어느 내기도 하지 않겠어."
"뭐예요, 끝까지 다 들어놓고!"
"네가 혼자 술술 불어놓은 거잖아! 그래서 들은 거고!"
"무슨 그런 억지를! 난 성공한다에 브랜디 한 병 걸었단 말이에요!"
그런 데 걸기엔 아깝군. 그나저나 억지는 네가 부리는 것 같은데.
"참고로, 하이네센 씨는 여성대면대화공포석화증의 중병환자이기 때문에 -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쉔프님; - 아주 친한 소수의 여성들을 빼면 같이 있지도 못한다구요. 그러니까 확률이 무지 높지요."
...두 손 들었다.
정말 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천천히, 그의 어깨를 향해 내린다. 턱!
"니콜라스 코네프 군."
"예? 아, 예?"
"5초안에 스튜 해치우고 관제실로 돌아간다. 실시."
"예...?"
"1초."
"으아아!"
효과만점이군. 그는 정말 고속으로 빈그릇만 남기고 머리카락에서 라면국물 흩날리며 사라진 것이다. 뭐, 좀 처진 눈의 사람들은 순해 보이지만 부릅뜨면 정말 무섭게 보이니까...그 탓도 있겠지. 군시절 교관일 때 내 별명이 처진 눈의 매였다는...그건 자랑이 아니잖아.
다용도 손목시계의 차가운 촉감이 조금 낯설었다. 나는 몇 가지를 더 프로그래밍한 후 해먹에 누웠다.
웬지 울적하다. 안그래도 안넘어가 께작거리던 라면이 걸린 것 같다. 켁!
뭐가 이렇게 기분나빠, 쳇.
나는 침체된 기분을 전환시킬 셈으로 메인 브리지에 나갔다. 불은 꺼진 상태다. 우주에서는 시간을 나눈다는 게 의미없는 짓이지만 우린 인간. 생체 리듬이 시간과 무지 관계깊으므로 24시간을 나눠 꼬박꼬박 자고 일어나고 먹고 움직이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억지 시계에 의하면 지금은 23시. 밤11시다.
..라고 말해봤자 우주는 항상 어두운 상태니 밤인지 낮인이 어떻게 알아.
일반 군함과는 비교도 안되게 좁고 초라한 브리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로 다리를 쭉 뻗고 팔을 뒤로 돌려 몸을 지탱한다. 눈은 한없이 먼 광점을 담는다.
나는 희미한 별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만을 데리고 그렇게 한동안 앉아있었다.
"뭐하는 거죠?"
말소리가 들린 지 한 3초 후에야 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메인 브리지로 올라오고 있었다. 별빛은 [그녀]에게 고요의 장막을 살짝 열어주었다.
카젤느...?
"센코프 씨?"
"아, 카젤느..씨."
머쓱해. 쳇.
그녀는 간편한 옷을 입고 한손에는 도망자들에겐 정말 과분한 기호품인 커피를 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내 정적의 시간을 빼앗아가지 말아줘!
"여기에 앉으세요."
입은 항상 생각과 상반되는 소릴 한다. (고, 적어도 이때 난 그렇게 생각했다.) 난 옆자릴 가리켰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아 더 머쓱해! 나는 별이나 더 감상하기로 했다. 윽.
"그나저나,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오늘도 낮잠자서 잠이 안오는 건가요?"
"대우주 속에서 소우주로의 탐구. 그러는 카젤느 씨는 커피까지 들고 계시네요."
결론 - 둘 다 잠이 안온다.
"전 원래 잠이 적어서 이 시간에는 항상 여기에 나오는데요."
"그렇군요."
하아..코네프, 역시 잘못 짚었어. 그 브랜디, 반대표를 던진 녀석한테나 줘 버려. 하이네센은 이 시간대에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나랑 비슷한 질문을 그녀에게 했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아득함에 아찔했다. 뭐야 이거...
"별을 좋아하시나요? 늘 나온다니."
"글쎄요. 센코프 씨는?"
뒷말은 발음에 약간 흐려진 게...한 모금 마셨나 보군.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한때는 꽤 좋아했었습니다. 저 희미한 별무리들을.
뭐, 지금은 이렇게 멍청히 앉아서 구경하는 게 더 좋습니다."
정적의 시간 -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내 취미다. 고요에서, 더 발전하면 섬뜩하기까지 한 소름끼치는 어둠. 그리고 그 어둠을 차갑게 수놓는 수많은 광점들. 이 속에 파묻히면 난 편안한 것을 느낀다. 그 속에서 세상사 따위는
관심의 시야를 벗어난다. 그저 별빛만을 바라보고, 별빛만을 시야에 채우고, 별빛만을 가슴속에 들이부으면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범한 취미'라고 하지만 좀 예리한 친구들은 금방 짚어낸다.
현실도피 라는 걸.
"저 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군요. 현실도피인가요?"
예리하십니다!
"딴은 그렇게도 말합니다."
부정하진 않습니다. 나 자신이 현실도피라는 건 더 잘 아니까요.
"이번엔 제가 대답을 들어야 겠습니다. 카젤느 씨는 왜 늘 나오시는지?"
다시 고요가 흘렀다. 커피가 넘어가는 그 미미한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내 청각은 날카로워 졌다. 잠시 후, 그녀는 해석하기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답변을 돌려줬다.
"별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데 매일 나온다니? 별을 보러?
"왜 싫어하시죠? 보통은 별을 좋아하던데요."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순간 그녀가 씁쓸하게 웃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안봐서 모르겠다.
"사적인 질문은 별로 답하고 싶지 않은데요. 묵비권 행사라고나 할까.."
여기가 오딘이었으면, 여기가 사회질서유지국이었으면, 당신은 자백제 몇 번은 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묵비권이라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 아닌가? 그런 사적인 것도 불리한 진술이 될 수 있나?
하여간 자유라는 건 좋군.
그나저나 무슨 사연이 있는 거겠지. 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외의 사람 울리는 취미는 없다. 이쯤에서 조용히 물러나는 게 신사.
사락. 천이 서로 맞비벼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본다.
그녀는 없었다.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만이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을 뿐.
나는 다시 별의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더더욱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생각없이 살면 속편하다는데 왜 난 그러질 못하는 거지? 너무 천재라서 그런가?
메인 브리지는 무한의 어둠에 잠식되었다.
찌푸둥한 몸을 뒤틀며 걸어간다. 코네프인가? 자식, 저말 부지런하군. 몸살감기환자 맞나 싶게 쉴새없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녀. 그는 근처를 지나가던 친구를 붙잡아 세웠다. 그 내기인가?
"이봐요! 센코프 씨가 카젤느 씨랑 열애에 빠졌다는 데 성공할지 못할지 내기할래요? 참고로 이건 구엔 씨가 목격한 겁니다. 어젯밤에 두 사람이..."
...돌격, 앞으로~! 타깃은 구엔 킴 호아, 일명 동태눈의 닭대가리!
이야, 내가 삼계탕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알아서 날 잡아 잡숴 하잖아? 그럼 냉큼 튀어나와 목을 바쳐야 할 거 아냐! 크아아아!
닭을 잡으려면 목을 단 번에 비틀어야 한다. 동태는 참나무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줘야지만 없으니까 주먹을 대용품으로 써야지.
나는 녀석의 목을 단단하게 졸라준 후 온몸을 작신작신 두들겨 줬다. 그걸 본 민츠는 얼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구엔에게 동정심 가져보긴 처음이야."
한동안은 일상생활화 될테니 잠자코 있어!
"그만두지 않으면 제가 당신을 난타할겁니다."
니에, 니에.
나는 그를 엄청나게 살기등등한 눈으로 쏘아본 후 일어서서 먼지를 털었다. 구엔은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악담을 했다.
"저 봐라, 저 봐. 카젤느의 말 한 마디에 야수가 인간 비슷하게 진화하는 걸..으아아~!"
사정없이 손을 밟아줬다. 아아 개운해라.
나는 턱을 쓱 들어올리며 팔짱을 꼈다.
"미안하지만 난 여자밝히는 취미는 없다. 네가 오늘 사망신고서를 쓰게 된 건 명예훼손죄로 사형을 언도받았기 때문이니 뉘우치며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허나 이건 새빨간 거. 짓. 말. 이다. 오딘 시절 나는 경계대상 1호였다. 홍등가는 유치해서 싫고 스스로 달려드는 고관집 영애..어흠, 아무튼 아무한테나 손뻗을 만큼 어리석진 않다.
"그런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아무튼 이젠 그만들 하세요. 훌륭한 항법사를 죽이면 나중에 곤란해져요."
그녀의 책망은 원시안적 차원에서 맞는 소리였기에 나는 멈췄다. 쳇.
코네프는 이제 자기 차례라 생각했는지 사색이 되어 바들바들 떨었다. 관심없어, 너같은 꼬마는. 겨우 두 살 아래인데 어린애 취급이라, 나 자신이 우습군. 나는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무시하고 관제실로 갔다.
흐음 역시 여기 있었군.
"안녕하세요, 센코프 씨?"
"좋은 아침입니다, 하이네센 씨."
구엔에게는 재수 옴붙은 아침이지. 하하하. 나는 하이네센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휴게실에서 녀석을 발견하고 밟은 것이다. 불쌍하군. 잠깐이지만 힘 좀 썼더니 쉬고 싶다. 나는 코네프의 자리에 앉았다.
"뭐하세요?"
"3차원 체스중인데, 같이 하시겠습니까?"
뭐냐뭐냐. 소중한 메인 컴으로 게임이나 하고 있다니!
"아뇨, 사양하죠."
나는 인상을 팍 쓰며 스크린을 주시했다.
오늘도 고요 내일도 고요 크아아 무료한 일상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체스나 할 순 없는 노릇아닌가...으으으.
어, 어쨌든 진정하자. 자아 이자크. 진정하는 거야. 화내봤자 너 좋을 건 없어.
생각은 그러면서도 나는 컴퓨터를 켰다.
그동안 보류했던 일이나 해볼까?
"그나저나 하이네센 씨는 어떻게 이 여행을 생각해 내셨습니까? 제국의 감시는 그냥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닐텐데요."
"글쎄요..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나네요. 하하하."
"그런 기억이요?"
"뭐, 전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잘 기억하질 못해서요."
- 이봐 청년~! 그런 기억력으로 살아가자면 늙은 후 회상할 때 머릿속에 남는 건 하나 없겠어!
나는 허무한 기분을 다잡으며 다시 물었다.
"정말 기억 못해요? 굉장히 아슬아슬했을 것 같은데요."
순간 그의 표정이 경직됐다. 나는 주의깊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남의 눈에 보일 정도로 경직된 표정은 아예 경악의 수준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나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푸, 푸헙!
체크 메이트!
"아..그러니까.....제가 노예로 있었던 행성은 좀 추운 데였거든요. 물자유통은 어림도 없는 곳이었는데요, 어, 그러니까 어떤 꼬마가 얼음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놀고 있었습니다. 그 행성엔 장난아니게 큰 드라이 아이스 덩어리들이 산재해 있었구요."
헉..설마.......
"이..이봐요, 그럼 드라이 아이스로 우주선을 만들어 탈출한 거요?"
"예. 그리고 반년간 근처 행성에 숨어서 80척의 배를 건조했죠. 지금 당신이 탄 배요."
하하하. 이 여행이 성공하면 거의 신화 수준으로 남을 이야기로군. 이 친구, 겉보기엔 맹해 보여도 머리는 제법 돌아간다는 말씀이야. 그런데 왜 체스는 못하는 거지? 이, 이봐! 퀸을 그렇게 돌리면......
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게임 오버의 선명한 글자가 뜸과 동시에 하이네센은 석화증세를 일으켰다. 으으음.
"체스에 약하군요. 킹을 그렇게 쉽게 적한테 내주다니."
"이긴다 이긴다 이긴다! 난 해낸다!"
"암만 말을 잘 돌리면 뭐해요, 킹이 잡히면 말짱 도루묵인데. 이봐요 아저씨, 듣고 있어요?"
"본론만 얘기하세요. 내 반드시 컴을 깰테니!"
음음. 본론이 따로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건가. 나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내 앞의 모니터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셋업 완료. 오케이.
"그래요. 킹이 잡히면 체스는 끝장나 버리죠. 사람 사는 것도 그래서 어떤 단체는 리더가 사라지면 완전히 와해 돼버립니다."
"제가 위험할 거라는 겁니까?"
하이네센은 처음으로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맑은 암청색 눈이 나를 직시했다. 나는 헛기침하고 싶은 걸 의식적으로 참았다.
"그겁니다. 며칠전의 사고는 이 배에 탄 누군가가 고의로 저지른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당신을 시험하기 위해서죠. 그 자가 당신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저 하나 없어진다고 이 전진이 멈춰질까요? 전제주의는 시대착오적 발상, 시대를 역행하는 짓입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유를 위해 함께 하는 겁니다.
제가 없어도 전진은 계속됩니다."
답답하군.
나는 가볍게 일어나면서 컴 전원을 껐다. 그는 내가 다가오는 걸 끝까지 쳐다보았다. 나는 표정없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여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들과 알게 된 지 얼마 안되는 전직 귀족의 해병대 출신 백수입니다. 어찌보면 상당히 경계해야 할 대상인데 당신은 나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하고 있단 말입니다.
해병대라면 개개인의 전투력이 어느정도 인지는 대충 아시겠죠. 난 그중에서도 최상위 클래스였던 장교였습니다."
그는 표정없는 얼굴로 바로 앞에 멈춰선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몸을 굽혔다. 왼손으로 그의 양팔을 잡고 오른손은 목젖 바로 위에 올렸다. 교본대로라면 다리도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하겠지만 이 친구는 그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전투와는 생면부지의 관계다.
하이네센은 내가 하는 대로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자, 여기서 내가 손에 힘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참고로 나는 손의 힘만으로 사람의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관제실 내 서늘한 공기위로 컴퓨터의 조그만 잡음과 전자냄새만이 떠돌았다. 하이네센은 피식 웃었다.
"손에 힘을 준다면 제가 곤란하겠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상황까진 가지 않겠는데요. 장난은 이제 그만하세요."
오.
나는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주며 잠깐 머리를 굴렸다.
이 친구, 대담한데. 내가 어떻게 할 지는 신과 나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잖아. 제법이야.
나는 역시 피식 웃으며 손을 치웠다. 좀 아프게 쥐었는지 그는 손목을 문질렀다.
"장난 미안합니다. 이런 상황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챙겨야죠. 그리고 그런 상황이 온다면 속절 없이 죽을 수밖에요."
나는 하이네센을 흘깃 바라보다가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우주가 날 비웃듯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겁니까?"
"당신의 눈은 항상 장난기가 어려 있지요. 그건 당신이 가진 차가움을 덮어씌운 막에 불과하구요. 하지만 아까 그 상황에서 당신의 눈에 있던 건 순수한 장난기더군요."
나는 그에게 고개를 획 돌렸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체스를 재부팅하고 있었다.
난 남한테 내 속을 읽히는 건 싫어. 그래서 항상 진심을 숨기고 있지. 그런데 당신, 내 마음을 읽었단 말인가? 모처럼의 유희가 기분나쁜 여운으로 끝나는군.
내가 조용히 우주를 응시하는 동안 그는 열심히 손을 놀렸다. 평소 일을 그렇게 하란 말이다. 노는 데 낭비하지 말고! 내 소리없는 욕은들을 수 없었는지 하이네센은 씨익 잔혹한 미소를 띠어가며 손을 놀렸다. 어쭈, 이것봐라. 진짜로 컴을 이겨가고 있잖아? 아, 그 비숍 거기 말고 여기로 돌려봐.
내가 훈수려고 다가가던 순간 갑자기 모니터가 꺼졌다. 대신 화면에 뜬 것은 하나의 작은 윈도우였다.
태양계 발견 - 이라는.
휘익-.
"오, 축하합니다. 고대하고 고대하시던 태양계입니다."
내가 반은 진심 반은 빈정거림으로 말하던 순간 하이네센은 다시 한 번 석화증세를 일으켰다. 요즘엔 석화증 신드롬이 유행인가?
"이...이럴수가......."
"아아, 너무 흥분하진 말라구요. 탐사대를 슬슬 짜야겠지요? 다른 친구들 불러올테니..."
"다 이긴 판이었는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우하하!
녀석의 절규가 관제실에 메아리쳤다....
이봐, 너무 실망하진 말라구. 체스판의 용병천재이신 이몸이 도와줄테니 나중에 다시 도전해 봐. 착하지? 이건 내 도발성 도박을 훌륭하게 이긴 대가야. 그러니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구.
난 다소 기꺼운 기분으로 일당들을 부르러 갔다. 도박에서 지고도 기분좋기는 오늘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