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0/11
뮤젤 그 찰거머리에 완벽지상주의자가 드디어 떨어져 나간지 일주일 째.
상선 로키 호는 계속 항진했다. 방향은 베스타랜드가 아니라 은하계 중심 쪽으로...지금쯤이면 제국을 벗어났을 것이다.
민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상당히 의심받을 짓은 했지만 일단은 믿는 눈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간단히 믿는다라...허어.
난 무료함에 구엔을 상대로 3차원 체스 연승기록을 갱신하며 시간을 죽였다. 이 배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민츠라면 난 가장 할일 없는 사람이다.
"이봐, 동태눈의 닭대가리. 하이네센은 어떤 인물이지?"
순간적으로 입매가 찌그러졌다. 하하하.
"직접 만나보면 알 거 아냐. 아니, 그녀석을 어떻게 알았어? 처진 눈의 기생 오라비!"
뭐뭐뭐? 윽, 넓은 가슴으로 내가 참아주겠어. 내가 정말 열받으면 넌 즉사한단 말이다.
"다 방법이 있지. 어쨌든 오딘을 뜬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모선단 같은 건 그림자도 안뵈는군.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지? 대충 설명해 줘."
"나한텐 그래야는 의리 따위 없어."
"호오 언제는 의리 있어서 체스 연승기록 갱신 대상이 되준 건가?"
손 끝이 흔들렸다. 에구구, 저녀석이 자살을 결심했군. 퀸을 저렇게 움직여서야...쯧쯧쯧. 흠흠, 일단 도발은 성공인가?
"시간 죽이기 상대로 네놈을 선택해 준 거나 감사히 생각해."
"그래? 체크."
"뭐뭐뭐뭐뭐야아아앗! 어디서 나이트가 날아온 거얏! 크아악!"
끼끼끼. 퀸은 죽었고 체크! 킹이 사정거리에 들어섰다. 훗. 돌릴 덴 없을 거다. 킹의 다른 진로 방향엔 내
퀸이랑 루크가 포진하고 있거든? 이몸의 이 천재적인 용병술을 보라! 아, 아하하하하~!!! 체크 메이트!
"말해주면 한 수 물려주지."
"뭐어야 너! 너 일부러 날 도발시킨 거지!"
"8연패 기록을 떠맡을래 이야기 할래."
"그런 양자택일 반협박식 선택이 어딨어!"
"여기."
"센코프! 이 뺀질이한테 내가 당하다니이이~!!!"
...+
확실히...민츠가 무엇을 해도 저녀석보단 낫다. 우선 매너가 있고, 머리도 제법 굴리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는다.
그나저나 자꾸 말 안하면 더 궁금해 지잖아.
"그럼 두 수 물려주지. 파충류."
"내가 파충류면 넌 단세포잖아?"
"어허 바뀌었다. 난 다세포중 최고등의 인류고 넌 단세포중 최하등 아메바잖아."
"네놈이 인간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간 이상이겠군. 이봐, 제발 그냥 한 수 물려. 계속 이기면 안지겨워?"
"지겨울 리가 있나." ^________^
"칵!"
이, 이봐! 그런다고 컴퓨터를 꺼버리다니! 야! 어, 어라라, 앞에 조심...
퍼퍽.
"싸울 시간 아껴서 코네프나 도와. 어린 놈들. 그 이야기는 내가 해주지."
아하하.
"제발 말로 해, 말로! 버나드 민츠, 넌 다 좋은데 너무 폭력적이야. 알아?"
"안들려. 교대나 해."
"맨날 나만 미워해!"
사내 자식이 궁시렁 대긴...쯧쯧. 뭐, 난 상관 없다. 드디어 지적인 대화를 나눌 가치가 있는 상대 등장! 나는 구엔이 나가면서 걷어찬 의자를 주워들었다.
"좋아, 민츠. 하이네센 이라는, 난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네가 꺼냈으니 네가 말하는게 순리겠지?"
인상 쓰지 마. 주름 늘어. 그는 의자에 기대 앉았다. 피곤하긴 피곤할거다. 누구랑 달리 계속 관제실 메인 컴 앞에 붙어있었으니.
"해주지. 그런데 왜 그렇게 관심갖는 거지?"
나는 내 컴퓨터를 끝 다음 턱을 괴었다.
"궁금하잖아. 내가 앞으로 동행할 친구들의 지도자가 어떤지 알 권리쯤은 있다고 봐."
"귀족답게 권리에 대해선 민감하군. 좋아."
그는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알레 하이네센은, 음, 우선 생김부터 말해주지. 청회색 눈에 옅은 오렌지색 머리. 키는 나와 구엔 사이 정도? 눈이 온순하다 못해 멍하게 생겼지. 당황하면 머리를 긁적대는 버릇이 있고 대단한 다도 매니아다."
"남들 괴롭게 만드는 성격은 아니지?"
"상당히 괴롭다만 뭐, 견딜만하다."
음.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엔 깊은 신뢰의 빛이 언뜻 보였다. 점점 더 궁금해 지는군. 어쨌든 판단은 내가 직접 만난 다음에 한다.
"언제쯤 모선단과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1 시간쯤 후?"
"아, 뭐, 고마워."
그는 눈 주위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석은 건들지 말아줘. 엄청나게 귀찮아져. 모두에게."
무슨 의미야? ^^+
내가 속으로 궁시렁 대는 동안에도 그는 거의 졸기 직전의 위태로운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허어 그렇게 힘든 항로는 아니었는데? 뭐, 선장녀석도 거의 놀고 있고 이 녀석이 다 알아서 하는 판이니까 피곤한 심정은 이해되지만. 쳇.
어디보자, 지금은 7시 막 넘긴 때라고. 어허,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단 말인가?
이녀석은 축 늘어진 상태...우후후후후...그렇다면......!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그를 노려보았다.
"3차원 체스, 한 판 뜨자."
결과는 녀석의 승리였다.
음. 난 잠을 못자서 잔뜩 신경질이 나있던 녀석의 인내심을 마구 퍼낸 샘이었고, 그 대가는 구엔한테 하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폭력이었다. 젠장, 네녀석은 나와 동갑이라면서! 함부로좀 대하지 마, 폭력신사!
이런저런 사정으로 내가 궁시렁 거리며 식당 구석에서 포켓 위스키를 없애고 있을때 불청객이 또 나타났다. 쳇. 오늘은 엄청나게 마가 끼는 날이군.
"야, 여긴 또 왜 온거지, 닭대가리?"
"그러는 네놈은 손님 주제 주인 행세냐? 기생 오라비."
"손님은 왕이니라."
"난 민주주의자, 전제정치의 상징인 왕을 증오한다!"
망할...망할 구엔 녀석! 넌 매너가 없고 머리가 안돌아간다는 점에서 뮤젤보다도 나빠! 그런 소린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건 알아?
녀석은 뭐 씹은 얼굴로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소주를 축냈다. 아아...저녀석만 없었으면 오랜만에 마셔보는 위스키의 감미로움이 극대로 다가왔을 것을...
"정말 여긴 왜 온거야? 관제실에 있어야는 자가."
"망중한도 모르냐?"
그리 유쾌하진 않군. 닭이 얼굴을 찌푸리면 저런 모습인건가? 쳇.
그는 병째로 한 모금 들이킨 다음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뭐, 내 일이 다 끝난 탓도 있지만."
"끝나다니?"
녀석은 얼굴 근육을 혹사시켰다. 즉 있는대로 찌그러 뜨렸다.
"몰랐어? 아직도? 모선단에서 네가 미치도록 보고싶어 하는 하이네센 녀석이 오고 있다고! 지금쯤 육안 식별 가능한 범위에 들어왔겠지."
응? 벌써 한 시간이 지났어?
“허어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난 미치도록 보고싶은 생각은 없어."
구엔은 피식 웃으며 병을 마저 비웠다. 뭐야 기분나쁘게.
어쨌든 이거, 잘하면 너무 쉽게 끝나는건 아닐지 슬슬 걱정되는군. 쩝. 물론 그렇게만 되준다면야 작가도 편하고(뭐야 이건...;) 나도 편하지만.
아무튼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들어왔단 말이렷다.
나는 위스키 병의 뚜껑을 채운 다음 일어섰다.
"그럼 구경 가볼까나?"
거대한 스크린에는 무한의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허무로만 남지 않는 것은 그 수 만큼의 이야기를 가진 무수한 광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역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일주일이라...제국 변경 지역을 막 벗어난 건가? 이제부턴 제국과 점점 더 멀어지는 거야. 좋아좋아.
별의 바다 저편엔 다섯개의 거대한 광점이 있었다. 허어.
"10초 후면 접선 시도 가능할 것으로 보임."
코네프는 랑데부 준비를 거의 끝마쳤다. 나는 눈으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주역을 측량해 보았다. 그 수치는 계속 줄어들었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저쪽 배가 보였...다...이런.
로키 호가 초호화판 황제폐하 전용선이라 해도 하나 안 어색하겠군! 뭐야!
철회색의 칙칙한, 게다가 제대로 손질도 안했는지 거칠고 울퉁불퉁한 게 다 보이는 표면! 시설은 제대로 갖춰져 있을런지 의구심이 들게 하는 크기! 무엇보다도 통신 스크린에 떠있는 저, 저 멍청온순하게 생긴 얼굴은 뭐야! 결코 좋으리라고는 생각한 적 없지만 이건 좀 너무하잖아~!!!
내가 현실이란 냉혹하기가 사회 질서 유지국 맞먹는 벽에 깔려 허우적 거릴 때 코네프와 민츠는 손을 흔들었다. 구엔은 고개짓을 했다.
화질이 안좋아서 흐릿하지만 저 오렌지색 머리...멍청해 보이는 눈...으로 미루어 볼때...저 친구가?
뭐야 이 촌놈같이 생긴 작자는?
"여, 다른 배들은 어딨어?"
<< 30광년 너머에 정박중이야. 카젤느 씨가 가능성 있는 성계를 하나 발견했거든. 민회에선 거의 압도적으로 거길 탐사하자는데 카젤느 씨는 신중론이야. 제국과 너무 가깝다고 더 가자는군. >>
"어쨌거나 희소식이군."
민츠의 중얼거림에 코네프는 씨이익 웃었다. 불안하군.
"민츠 씨. 웃고 있는 거...아세요?"
순간 그는 턱을 쓰다듬는 척 하면서 입을 가렸다. 동시에 코네프와 구엔의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다. 어라라?
"무슨 헛소리야. 저녀석은 안웃었잖아."
응? 내가 뭐...못할 소리라도 했...어? 왜그래?
갑자기 민츠가 판타지 만화에서 자주 등장했다가 깨지는 석마수처럼 보인다 싶더니...
"니콜라스 코네프. 상당히 인생이 무미건조한가 보군. 삶과 죽음의 차이에 대해 나와 논하고 싶은가?"
"악! 무, 무슨! 센코프 씨는 눈치도 없나요? 아아악~!!!"
...공허한 실내에 가득 울려퍼지는 둔탁한 충격음과 신음. 이, 이건 대체 뭐야! 왜그래, 민츠! 무슨...과민반응이야?!
<< 그, 그만들 해! 지금 그런걸로 싸울 때가 아니야~! 조사하러 내려가려면 빨리 가야지. 귀환하란 말야! 아, 옆에 계신 분이 센코프 씨? >>
.............
"예...이자크 폰 센코프 입니다..."
<< 만나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전 알레 하이네센 입니다. 예. >>
어, 어지러워..현기증이...으아아......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 다음 민츠 쪽을 돌아보았다. 구엔은 그들을 뜯어말릴 생각도 못하는 듯 얌전히 팔짱끼고 서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한창 폭력을 휘두르던 그는 스크린을 광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딱 1분. 그정도면 충분해. 마저 이자식을 요리한 다음 가겠다. 이만."
<< 미, 민츠! 이봐! 구엔, 말려! 어서! >>
삑. 회백색으로 물드는 스크린.
구엔은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단호히 표명했다. 즉 벽에 바짝 붙어선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아아 나만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갑자기~!!! 아으 머리야!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생명의 존엄성에 호소해서 코네프의 목숨을 끊으려드는 그를 말려야 할지 아니면 그렇게 패다가는 훌륭한 선장을 하나 잃게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설득해야 할지 너무도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