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9/14
"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
"어이..모두의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그 대담무쌍한 무모함에 경의를 표하며, 이젠 그만 하시지?'
"라~ 라 라라라 라 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
"구에에에엔....."
"휘이이익~♪"
"칵!"
쾅!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나직이 노래(라면 엄청나게 좋게 봐준 거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어디서 돼지잡나 고개를 갸웃거렸을거다)를 부르던 그는 벽에 기댄 채 쓰러졌다. 졸도? 그랬으면 좋겠군. 정신폭력을 일삼는 시끄러운 닭 한 마리 잡는 셈이니 더 좋지 뭐! 쳇. 점점 민츠 물이 들어가고 있다.
"잘 하셨습니다! 저라도 그러고 싶었거든요."
이거 보라고! 카젤느도 인정하잖아!
"자자, 진정들 하라구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구요."
또 머리를 긁적이는 하이네센. 이젠 머리를 안 긁으면 그게 이상하게 보인다.
나는 욕구불만으로 잔뜩 굳은 표정을 한 채 메인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한없이 펼쳐진 별의 바다. 어제도 별의 바다, 오늘도 별의 바다, 내일도 별의 바다, 음.
"최초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아무리 재미없었다기로 이주일 내내 사람을 치나? 스트레스는 혼자 푸시지."
그래도 친구랍시고 민츠는 잊혀진 인물 구엔을 부축해서 끌어올렸다. 나는 의자에 깊숙히 몸을 누이면서 곁눈으로 구경했다. 그는 구엔을 기절한 자세 그대로 바닥에 질질 끌며 나갔다. (불쌍한 친구)
민주주의의 입문이라길래 회의에 구경갔다온지 이주일째..
무료하다. 뭔가 [일]을 내고 싶어진다. 이 정신없는 무리들은 무턱대고 위험이 득시글한 밤길을 걷고 있다. 빛? 그런 건 없다. 자유에의 의지..라는 거창한 이름의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하고 있을 뿐.
그런데 40만명이 정말 다 자유를 원한다는 건가? 쩝.
"하이네센."
"예?"
"이 불안한 여정은 어떻게 생각해 냈습니까?"
그는 이번엔 볼을 긁적이며 콘솔을 내려다 보았다..
"아, 뭐. 전제정치 하에서는 민주주의가 살 수 없으니까요."
답답한 놈.
"그런 뜻이 아니라. 사실 제국은 꽤 넓은 범위에 걸쳐 있으니까 변두리 행성들을 거점으로 할 수도 있었을 거 아닙니까? 왜 굳이 새로운 은하계를 찾아 떠난 거냐는 거요."
"40만명으로요? 그것도 대다수가 여성과 아이인 부대로?"
아차. 내 질문 자체가 잘못됐군. 진압부대를 한 사단만 보내면 끝장이군.
"아무튼 너무 무모한 것도 같군요. 지금 당신들은 바로 앞에 어떤 위험한 천체가 있는지조차 모르잖소. 장님 밤길 걷기요."
"글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담담하게 웃었다. 더 이상 말하진 않았지만, 난 대충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 거 일일이 겁내면 아무것도 못한다. 무엇보다도, 어떻게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곳을 찾을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가겠다. 난 [신념]에 목숨걸었다. 라는.
하지만 그렇다면 환상에 붙들려 졸래졸래 따라오는 40만인은?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목숨걸고 지켜야 할 것인가? 중요한 건 삶이지 명분을 따른 죽음이 아니잖아?
"안됐어."
"예?"
"혼잣말입니다."
"혼잣말하는 겁쟁이는 몇 대 쳐줘야 정신차린다."
나는 뜨악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이네센은 피식 웃었다.
저런 약간 거친 말을 한 사람은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젤느였다. 허어, 나도 그런 말 들은 기억이 있소만.
"누가 생각해낸 건지는 몰라도 훌륭한 사상이오. 그런데 당신이 말하면 안어울립니다."
"상황에 맞는 말을 하고자 했을 뿐이지 말하는 사람에 어울 리는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
솔직히 말하면, 난 이 여자한텐 약하다. 왠지 모르게 써늘하다고나 할까...하는 기운에 압도되서. 내가 사람한테 기로 눌려보기는 로엔그람 영감님 이후로 처음이군.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일어섰다.
"자아 취침. 두뇌는 휴식을 원해요. 별일 없으면 절대 깨우지 말아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나도 모르니까. 그럼!"
"휴식이라면 질리게 취한 걸로 아는데..."
하이네센의 멍한 표정은 사람 머리아프게 만들지만 그렇게까지 싫진 않았다. 아무래도 내 주변엔 그런 인물이 없었으니까 신선하게 받아들이는가 보다. 음.
나는 오늘도 죽음의 문턱을 넘겨다보며 아슬아슬하게 모험 중인 그들을 떠나 자러 갔다.
젠장 난 조그만 소리에도 금방 깨버린단 말이다. 어느 핵융합로에 처넣을 녀석이 소리지르는 거야!
난 선잠 깬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일반형에 폭력적 성향을 덧붙여 궁시렁댔다. 내 악담을 듣는 자들은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 욕을 많이 먹을수록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으니까. 핫핫핫.
욱, 이런 썰렁한 농담 할 때가 아니잖아!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선잠깼더니 머리가 더 무거워졌다. 윽.
그대로 미끄러지듯(정확히는 뒤집어지며) 옆으로 텀블링에 가까운 착지. 해먹은 쉽게 뒤집힌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아무튼 대충 옷을 걸치고 관제실로 질주.
하아...예상대로 이 배에 있는 지도층 인사들은 죄다 모여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뭔가를 열심히 조작하는 하이네센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뭐냐 그 멍한 표정은.
"누가 아까 소리질렀소?"
"와, 귀 좋으시네요? 그건 구엔이었는데."
...
정말 핵융합로에 집어던질 놈이었군. +
"무슨 일이죠?"
"아, 그게 말입니다. 하하."
그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볼을 긁적였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웬 꼬마한테 궁시렁거리는 코네프한테 갔다. 다들 그쪽을 싹 째려보는 걸 난 놓치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 꼬마 낯이 익은데.
아, 맞아. 그때 표 수거해가던 그 꼬마다.
"어이, 뭐야?"
"임마! 어떤 바보가 이런 선단 끌고 시한폭탄에 바짝 붙어 가냐? 중력 타고 간다고 다 에너지 절약되는 줄 알아? 한 두척이라면 또 모를까, 이런 대선단으론 오히려 항로 유지하기 더 힘들어. 베테랑들도 잘 안하는 짓을..쳇."
귀끝까지 붉어진 꼬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소리도 못했다. 난 코네프가 내말을 씹었다는 중요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등돌리고 앉은 민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는 말없이 메인 스크린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처음부터 존재한 것 같은 거대한 암흑속에 붉게 타오르는 거성이 시야의 한쪽을 채웠다. 나는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초신성.."
"너무 가까이 갔어. 밴 앨런대에 휩쓸려 버렸다구."
에이. 그럼 그 방사능대 때문에 통신 두절정도로 끝날 거 아냐. 난 또 무슨 일이라고.
"우습다는 표정 마.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니까."
"그럼 뭔데?"
옆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구엔은 자조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기까지 영향을 끼치는 펄사가 저쪽에 있는 데다가 선단이 흩어져 버렸고 항로 데이터마저 삭제됐어."
어라, 친절한 대답이라니. 저녀석 내가 아까 머리에 상당한 충격을 준 걸 그새 잊었나? 오, 그거 참 희소식이...아니라! 잠깐! 너 지금 뭐라 했냐!
저 엄청난 크기의 초신성이 내뿜는 방사능띠와 펄사의 X선은 충분히 인공적인 무기보다 더 심각한 전파방해를 일으킨다. 거기다가 초신성이라면 언제 폭발할 지 알 수 없고 중력 또한 무지막지하기 때문에 이정도 거리라면 암만 속도 높여도 달팽이 기어가듯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항로 데이...
그..그럼 정말 큰 문제잖아!
나는 민츠의 의자에 몸을 바짝 붙였다.
"민츠, 선단이 흩어졌다고? 어떻게? 위치 확인되는 건 몇척이지?"
"천천히 물어라. 내 입은 하나다. 저 초신성을 빙 돌아서 가다가 여기 와보니 몸통이 잘렸다인 거지. 위치 확인된 건 우리 바로 뒤에 있던 열 두척."
"자알들 한다. 그건 그렇다 치자, 누가 초신성에 붙여서 항로설정한 거야? 데이터는 또 왜 지워졌어!"
일당들은 한꺼번에 꼬마한테서 코네프한테로 시선을 옮겼다.(즉 그를 노려보았다.)
"코네프가 뭘 어쨌길래?"
"저녀석..카일한테 항로를 맡기고 들어가서 자고 있었더랬지."
카일? 꼬마가 고개를 더 푹 숙이는 걸 보니 꼬마 이름이 카일인 듯 했다. 그런데 항법사가 항로설정을 자기가 안하고 저런 꼬마한테 맡겼다고? 이건 또 무슨 경우야?
"아아, 몸살감기 걸려서 카일한테 교육도 시킬 겸 잠깐 쉴 겸 맡긴 것 뿐인데...그, 그래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코네프는 정중하게 사과하면서도 궁시렁거렸다. 내가 들어왔을 때 그가 꼬마를 꾸짖던 게 생각났다.
이 배의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자력으로 항진하는 것 보단 태양풍이나 별의 중력을 타고 이동하는 걸 생각했나 보다, 저 꼬마는. 어린 나이치곤 훌륭한 생각이지만 코네프 말마따나, 대선단이라면 연계가 잘 되는 일류 항해사들이 각 배마다 있어야 한다. 통신두절같은 위기상황이 있으니까.
여태까지 멀뚱멀뚱 구경하던 하이네센은 머리를 긁적이며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코네프를 괴롭힌다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우선은 일행들과 무사히 만날 생각부터 합시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일당들은 각자의 컴퓨터를 열심히 두드렸다.
할 일없는 건 불행히도 나 하나였다. 나는 그나마 제일 만만한 민츠 옆에 붙었다.
"데이터가 삭제된 건 어디부터야?"
"그걸 찾는 중이지. 아..한 24광년은 데이터 기록없이 날았군. 이걸 어떻게 거슬러가지?"
"24광년이면 짧은 편이잖아."
"흩어진 일행들은 어쩌고?"
그렇지. 함부로 돌아다녔다간 길이 엇갈리는 수가 있다. 난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목숨같은 항로 데이터를 감히..
나는 몸을 숙여 모니터를 쳐다보는 척 하며 민츠에게 속삭였다.
"관제실에 한 두 사람만 남았던 때 있어? 흩어지기 전에."
"난 잘 몰라. 너보다 먼저 나갔잖아. 카젤느 씨, 사고나기 전에 누가 남았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 식사중이었는데 그 사이 일이 터졌군요. 제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난 그녀한텐 책임 전무하다고 단정지어 버리고 꼬마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빨갛게 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코네프 이 녀석, 제정신인가? 앞으로 뭐가 나올 지 알지도 못하면서 풋내기한테 관제실, 그것도 기함이나 마찬가지인 배를 맡겨? 끝나거든, 나 좀 보세나.
하이네센은 자기 의자대신 콘솔에 올라가 다리를 흔들며 앉았다. 나는 점잖게 고개를 돌려 소리없이 웃어줬다. 이거야 원, 대장님께선 쓸데없이 과장된 멋을 부리는 건 싫어하시는군.
"추궁은 나중에 천천히 하고, 그럼 남아있는 선단들하곤 접속이 됩니까? 카젤느?"
"이 거리로도 안 될 정도로 심한데요..연락용 셔틀을 보낼까요? 전할 말이라도?"
"아, 일단은 모이라고 전하고 싶군요. 혹시 항로 데이터가 남은 배는 있나 물어봐주세요. 구엔!"
"말만 해."
"백업 파일은?"
"으..그거라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어. 흔적도 없어. 항로에 관계된 건!"
"세수하고 돋보기 낀 다음 현미경 챙겨서 잘 뒤적여 봐. 어제 카젤느가 백업을 만드는 걸 봤어. 민츠."
"음."
"일단 우리들의 위치파악좀 해 줘. 마지막으로 전체 선단이 있던 위치도. 어이, 코네프. 그만 궁시렁대고 나좀 쳐다봐!"
"예?"
"항법사가 자기 일 안하고 구석에서 중얼거리기만 하는 건 업무태만이야. 빨리 자리로 안 가? 좋아. 초신성이 폭발하기 전에는 안전거리 밖으로 나가야겠지? 민츠하고 항로 설정해."
쥐죽은 듯 조용하던 선내가 갑자기 시끄러워 졌다. 우왕좌왕하던 무리들은 리더의 명령대로 - 아차, 여기선 명령이 아니라 지시라고 해야나? 아무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만이 할 일이 없어서 이 잘생긴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구경하고 있을 뿐.
순간 구엔이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 이자가 어디서 감히!
"남들 다 바쁜데 혼자 놀고있을 작정이야? 너도 찾아!"
"...하이네센 체면을 봐서 도와주마, 아, 치킨먹고 싶어라."
구엔은 차갑게 비웃고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는 그에 질세라 더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렸고, 녀석은 나를 의식한 듯 속도를 점점 더 높였.. 쾅! 으악!
"이 정신나간 작자들아! 키보드를 부숴먹을 작정이냐!"
민츠의 점잖은(...?!) 질책에 우린 입다물고 살살 디렉터리 사이를 헤맸다.
"하이네센! 13호선에 항로 파일이 남아있어요!"
뭐?
“멋져요! 빨리 보내라고 해요!"
나와 구엔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헛수고했잖아.
그런데 정말 누가 파일을 다 지워버린 걸까? 문제는, 이 배에 탔으며 하이네센을 떨거워 하는 자일 거라는 거다. 우릴 다 죽이고 싶어하는 자라면 - 물론 이유야 모르지 - 항로를 저 초신성에 수직으로 떨어지게 슬쩍 바꿔도 되고 항로파일을 없앨 거라면 전체 배의 파일을 다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탄 배니 그런 불장난은 안한 거지. 아무래도 장난삼아 저 친구를 시험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인데.
메마른 기계음의 반복이 지루해졌을 무렵 13호의 항로 파일이 도착했다. 민츠와 구엔과 코네프는 잡아먹을 듯이 모니터를 쳐다보며 지금의 위치파악을 했다. 이런 식으로 시간가는 동안에도 이 선단조각은 초신성의 인력에 이끌려 위성처럼 뱅글뱅글 돌든지 초신성에 수직으로 낙하하든지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난 싫다!
"그런데 구엔. 좀 이상하지 않아?"
"바쁜데 말 시키지 마. 뭐가."
말 시키지 말라면서?
"왜 선단이 흩어진 거지? 생각해 봐. 이 배가 선단의 기함이나 마찬가지인데 방향이 좀 수틀린다 싶으면 다른 배의 항법사들은 가만 있냐? 하다못해 점잖게 질문이라도 할 것 같은데. 게다가 입다물고 있었다 해도 선단의 기본 규칙은 기함을 절대적으로 따라가는 거다. 흩어질 이유가 없어."
"누군가가 조작을 부리지 않는 한 말이지."
녀석은 내 말을 이해한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정말로 기분나빴다. 딴생각하자, 우어어!
좋아. 항로는 어떻게든 다시 찾을 수 있어. 그렇다면 이제 문제되는 건 흩어진 선단을 찾는 거지. 이건 내 생각이지만, 누군가, 이 배에 있으며 선단 전체에 영향력이 크나 하이네센보단 못한 자가 고의적으로 잘못된 명령을 내리거나 신호를 무시한다거나 해서, 이런 환상적인 결과를 초래했을 거란 거지.
믿을 순 없지만 항법사라는 저녀석은 그걸 이해한 것이다.
"좀 짚이는 데가 있긴 하지만 의심은 함부로 해선 안되는 것이고 지금 중요한 건 선단찾기지. 해야 할 일이 먼저인 것이야. 음....좋아!
민츠, 이대로 중력타고 한 바퀴 돌자. 조금씩 가속하다 중력장 밖으로 날아가는 거다."
"잘못하면 제국쪽으로 갈 수도 있을텐데."
"타이밍 계산은 네녀석 몫이지 난 아냐. 그러니 내겐 그런 거 걱정할 이유가 없지. 우하하! 빨리 못할까?"
민츠는 점잖게 강인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덕분에 웬일로 멋있게 행동하던 구엔은 단단한 콘솔에 헤딩해 머리 전체가 욱씬거리는 진귀한 체험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손으론 항로 수정중이었다.
나는 하이네센을 곁눈질했다. 그는 아무 말도 안하고 빙긋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남들 구경만 하는 건 나와 똑같군. 항법사 친구들이 뭘 하든 상관하진 않을거란 건가? 좋은 자세야. 그런 건 전문가에게 군소리말고 맡겨야지.
구엔의 지시를 담은 통신캡슐이 남아있던 선단에 도착하고 선단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방향을 잡긴 잡았나 보다.
"하지만 도박 아닐까요? 항로데이터를 날려버린 자가 항로도 조금 이상하게 바꿔버렸다면 저언혀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재수없으면 제국군의 중성자빔이 환영해줄 지도 몰라요."
"코네프, 재수없는 소린 말아! 너도 뱃놈이라면 항해중 헛소린 금기라는 거 알텐데."
민츠는 픽 웃었다. 그는 여전히 눈아프게 빛나는 초신성을 곁눈질했다.
"지금으로선 제발 그자가 항로까지 이상하게 바꿔버리진 말았기를 바랄 뿐이지."
"항로만은 바뀌지 않았을 걸. 구엔 녀석 말 믿고 일단은 나가는 거야."
항법사들이 날 주목했다. 왜이렇게 난 시선집중을 좋아할까.
"아까 구엔한테 한 이야긴데, 아무튼 이 배에 사고친 자가 있어. 항로까지 바꾸는 불장난은 안 해. 자기도 큰일날 짓을 왜 하겠어? 재미를 위한 장난을 목숨걸고 할 필요는 없잖아."
그들은 나를 쳐다본 후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이거이거, 설마하니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난 계속 자고 있었어, 누가 증명좀 해줘!
아무튼 선단은 초신성의 자전방향에 맞춰 한 바퀴 빙 돌았다. 이틀 후 나는 일당들이 처음으로 선단들과 통신이 두절된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와 있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는 나머지 여순일곱척의 배들이 조용히 정지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여기에 정박해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대답해 카젤느를 자책에 빠뜨렸다.
하지만 통신담당 대타를 세우지 않은 건 그녀 잘못이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이 배에는 이들 외에 배를 조종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는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식당 구석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조용히 식사중인 카일을 바라보았다. 민회에서는 하이네센 일당들을 업무태만이라며 걸고 넘어졌다 한다. 래클란 할아버지가 꽤 큰 발언을 해서 지금은 조용하지만 그냥 넘어가긴 그런가 보다.
나는 몇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가 되면 배고픈 게 자연의 섭리다. 그리고 그 본능은 이성을 가볍게 이기는 법이다.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