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0/6
그 민츠라는 자는 신사같이 생긴 것과는 달리 굉장히 거친 녀석이었다. 물론 이 몸에 비하면 한참 어린애지만. 뭐, 나쁠 건 없다. 저 동태같은 녀석을 흠씬 두들겨 주는게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 왜이러지?)
옷을 돌려받고 상황에 대해서 좀더 들은 다음 나는 침대위를 유유자적 뒹굴었다.
상선이라는 이 소형 우주선의 이름은 로키라고 들었다. 로키라...
고대 게르만 신화에 따르면 이 자는 이름께나 날리던 난봉꾼으로 거인족이면서 주신 오딘과 의형제를 맺었기에 신족 대우를 받은 자다. 잘생겼고 강한 꾀돌이였는데 넘치는 끼를 주체 못했는지 오딘의 아들네미를 질투해 살인죄(살신죄?)를 범하여 라그나뢰크, 즉 신들의 황혼을 연출한 장본인, 아니아니 장본신으로 낙인찍혔다. 흐음. 갑자기 수도성 오딘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그런데말야, 나를 구하려고 오딘까지 와준 것 같진 않단 말씀이야? 우연이지, 나와 마주친 것."
"정답."
"...뭣하러 수도성엔 간거야?"
"이 배는 상선이야. 그럼 하는 일 정도는 뻔하지 않아?."
...
"그거야 어쨌든 상관없어. 그런데 이 배, 지금 어디로 가는거지?"
"그건 비밀."
참고로 현재 나는 어느새 말을 놓게 된 민츠와 잡담중. 그런데 비밀...? 어허!
"비밀 지상주의자는 누가 싫어해.(너 뭐냐!) 뭘 말하고자 하는 거지?"
"묵비권과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 행사중."
묵비권...불리한 진술...웃기지 말아!
"너 지금 무슨 옛날 재판하니?"
"장난 칠 수도 있는 거지 무슨 과민반응을...그런데 너...어쩌다가 공화주의자가 된 거지? 귀족이면 평생 손에 물 안묻히고 살 수도 있을텐데."
"말이 좋아 귀족이다."
센코프 가는 옛날 옛적에 몰락했어요. 나 어렸을때. 지금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도 순전히 그때의...쳇. 지난 일 씹어서 뭣하리.
민츠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엄청나게 험난한 사연으로 공화주의자 물이 든 걸로 생각할거다, 아마도. 생각은 자유다. 발언이나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상관없다. 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으로 황제 폐하를 저주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망신고 날리게 된다.
공화주의 치리하의 국가도 그럴까?
"그나저나 날 앞으로 어떻게 할거지?"
"그건..."
"이봐요, 민츠 씨!"
...의외의 방해꾼 등장.
이 배를 현재 몰고 있는, 즉 우리 안전을 담당하는 선장 니콜라스 코네프다. 로키 호의 원주인으로 상인이란다. 그는 묘하게 구엔과 닮은 구석이 있는 자였다. 단지 예절을 안다는 점에서 녀석보다 나을 뿐.
코네프는 한창 잡담중이던 나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민츠를 잡아끌고 나갔다. 뭐지? 난 일어섰다.
"아아. 센코프 넌 그냥 안에 있어. 아니지, 어디 숨을 만한 데나 찾아보겠어?"
"뭐냐. 제국군 초계함이라도 나와서 화물검사한대?"
"알면 더 빨리 움직여."
로엔그람 영감님일지, 뮤젤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리해. 쳇. 우주에까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단 말이야? 뭐야, 이 작자들 정말.
난 잠깐 보통의 우주선 내부를 떠올리며 적당한 데를 찾아봤다. 희미하게 윤곽을 잡은 것은...
"관제실에 가겠어."
"뭐?"
"등잔밑이 어둡대잖아? 설마 귀족의 거물급 수배자가 관제실에 있을거라고 생각이나 하겠어?"
"...위험한 짓을 사서 하는군. 이봐. 네가 있는게 발각되면 너만 다치는 줄 아나? 이 배의 승무원 전원이 다친다."
나도 그건 알아. 나는 인상을 팍 썼다.
"안들키게 하면 될 거 아냐."
"귀족들은 고집이 세지요...잡히면 이 친구가 숨어든 걸로 위장해 버립시다."
이봐 선자앙~! 그건 또 무슨 무책임한 소리야!
"관제실에 숨어들 정도로 담력있는 수배자? 믿어 주겠군."
민츠는 무표정하게 빈정대서 코네프의 얼굴을 붉힌 다음 거의 구보의 속력으로 걸었다.
"네 마음대로 해. 죽든살든 그건 알 바 아니다."
동감이다. 쳇.
관제실에는 동태 = 구엔이 나와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자 인상을 팍 썼다. 뭐냐. 첫인상은 빙글거리는 게 우스운 인간 같았는데 인상써야 한없이 우스워 보인다니.
"여어, 처진 눈에 기생 오라비같은 건달이 여긴 왜 왔어?"
...+
"여어, 동태 눈에 닭대가리같은 키마이라가 여긴 왜 있어?"
지금 확실히 말해두지만, 난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바꾼다. 즉 공손한 사람 앞에서는 나도 공손하게 대하고 이런 삼류 앞에선 나도 삼류 이하로 행동한다. 멋진 사교법이 아닌가! 쳇.
"그런데 너 여긴 왜 온거야? 누구 생목숨 날려버릴 작정이냐?"
"네녀석의 목숨이라면 고려해 보도록 하지."
나는 한 마디 쏘아준 다음 통신 스크린이 설치된 벽에 다가갔다. 역시. 진짜 대상인이 아닌 이상 관제실의 벽 하나를 통신용 스크린으로 도배하는 자는 없다. 나는 스크린 바로 옆의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민츠의 눈썹 끝이 약간 기묘하게 움직였다.
"호오. 사각지대에 있겠다는 건가? 하지만 수색을 시작하면 여기가 가장 위험한 곳이다."
"수색을 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거 알려면 대화나 경청하겠어."
"호기심이 많은 귀족이군."
"시끄러."
그놈의 귀족 소리좀 하지 마. 기분 더러워. 난 이름만 귀족이라니까! 쳇. 원래 이런 일은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 하려 했었는데 신분상 사정상 휘말린 거란 말야!
나는 벽에 등을 기댄채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갑자기 찌릿하고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전해졌다. 허어 시작인가?
화면이 떠올랐다. 코네프는 빙글빙글 미소를 띠고 아주 공손한 태도로 영상을 대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 귀함의 운항을 방해한 점, 사죄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으니 양해 바랍니다. >>
닭살 돋게 만드는건 전자파만이 아니었다. 뮤젤의...전혀 감정이라곤 들어가지 않은 예절 바른 말투도 한 몫 단단히 하는군. 윽. 저녀석 원래 성격이라면 불시에 접선해서 수색했을텐데. 정말이지...
"어떤 일입니까?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힘껏 돕겠습니다만."
<< 얼마전에 수배된 범죄자가 오딘을 떠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검문하는 것 뿐입니다. 귀함의 이름과 운항 목적, 화물, 승무원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이젠 범죄자 취급이군. 넌 돌아가면 죽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상선 로키 호입니다. 선장은 저, 니콜라스 코네프이고, 항법사로 구엔 킴 호아 씨, 손님은 버나드 민츠 씨 입니다. 본함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 베스타랜드로 물과 약간의 곡물을 수송하는 중입니다."
저렇게 실명을 불러도 되는 걸까? 잠깐 확인중인듯 시간을 흘린 다음 그는 말을 이었다.
<< 이런 자가 무료승차하진 않았습니까? >>
나는 약간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저녀석, 나를 어떤 모습으로 수배붙여 놨을까나. 코네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저렇게 이상하게 생긴 자는 본 적 없어요."
...
<< 예. 검문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
"빨리 범인이 잡혔으면 좋겠군요. 편안한 여행 되시길."
갑자기 내 전신을 간지럽히던 전자파의 흐름이 사라졌다. 나는 코네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갔어요, 갔어. 너무 쉽게 물러선것 같지만 뭐, 우리 좋으면 그만. 후아아, 거짓말은 내 성격에 안맞아."
"정직한건 상인 정신에 약간 위배되지 않나?"
"신용이 제 신조라구요."
"좋아. 그럼 나에게도 신용을 지켜."
"예? 악!"
나는 아주 가벼운 동작의 돌려차기로 그의 등짝을 찼다. 비명을 지르며 엎어지는 선장.
"수배용지에 대체 뭐가 있었지?"
구엔은 묵묵히 손을 내밀어 코네프를 일으켰다. 민츠는 팔짱을 꼈다.
"적갈색 머리의 잘 놀게 생긴 청년. 이름은 이자크 폰 센코프. 나와 동갑이었군."
세상이 잠시 휘청거려 보였다. 충격이 크군. 나는 아예 이들을 무시하기로 하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문으로 다가섰다. 민츠는 약간 고개를 모로 돌리고 물었다.
"어딜 가나?"
"이봐~ 신체의 자유 정도는 주지 그래?"
"공익을 위해선 제한할 수도 있어."
"기본적인 권리까진 침해하지 마. 발이 달린 이상 돌아다닐 수도 있잖아."
"많이 돌아다니진 말아."
내 마음이다. 아무튼 아까의 질문으로 봐선 뭔가 찔리는게 있다는 건데...
"바쁜 사람들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방 침대에서나 뒹굴어라."
구엔 킴 호아. 죽기를 원하는 자.
"너야말로! 네가 무슨 재주로 항법사가 된거야? 이거 비리가 있어!"
비틀했다. 아아 다른 두 녀석이 소리죽여 웃는다. 사실인건가? ;;;
"난 자격증 있어. 그러니 제발 사라져 주겠어?"
"나도 네녀석 더이상 보고싶지 않아."
하하하. 실없는 소리들의 끝은 내 등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어두운 복도. 무한의 어둠이 내 앞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웃었다. 저 앞에 뭐가 있을지 나는 모른다. [미래] 처럼.
"화물검사는 내가 대신 해주겠소이다. 뮤젤 대령."
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퀴퀴한 냄새. 어둠의 공간을 규칙적으로 울리는 나지막한 기계음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음. 역시 잠겨있군. 후우.
손목시계를 잠금장치에 댄다. 탁 타탁 탁. 비밀번호는 870205...O.K.
철컹. 갑자기 몰아닥치는 한기.
"열려라 참깨...할 새도 없었군. 우, 추워."
나는 재킷 지퍼를 올린 다음 들어갔다.
예상대로였다. 여긴 냉동창고였다. 단지 냉동육류가 조금 있을 뿐이었지만.
"허어..정말 보통 상선인가?"
뭐어야아...그럼 내가 기껏 고생한 게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아까 코네프의 말대로라면 하다못해 곡식섬이라도 있어야는 거 아냐? 물이야 액화수소와 액화산소를 잔뜩 실어놓은 걸 확인했지만.
나는 냉기류에 허무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젠장. 난 고기 검사하러온 건 아니란 말야! 이런!
퍽.
응?
뭐야. 고기를 발로 차면 이런 소리가 나는건가? 둔탁한 살 치는 소리가 아니잖아? 묵직하고, 여러개의 조그만 조각들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는데.
이런 원수같은...!
나는 작은 나이프를 꺼내면서 시계의 플래시를 켰다. 이 만능에 가까운 시계...하나도 안감사해요, 로엔그람 영감님. 쳇. 희미한 빛은 나이프의 앞길을 인도해 고기를 양단해 나갔다. 툭! 고깃덩어리는 결국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위로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허.탈.해!
"하하...하하하하하...아, 아하하...이런 방법도 있었군. 쳇."
"그래. 세상 사는 길은 한 가지 만이 아니지. 물론 죽는 방식도 그렇고."
그건 맞아.
"맞다고 생각해. 언제부터 와있었지, 민츠?"
"네가 푸줏간 개업하던 순간부터."
고기를 자르던 때 말이더냐...음. 나는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곡식 종자로군."
"맞아."
"정직하게 대답해 줘. 난 어디로 도망치거나 하진 않을테니까.
너흰 뭐하는 녀석들이지?"
민츠는 피식 웃으며 문에 기대섰다.
"탈출하는 자들이지. 사회로부터."
잠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추워. 좀 나갔으면 좋겠군.
"무엇으로부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사회로부터랬잖아."
공화주의는 결코 전제정치와 어울릴 수 없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뭐, 그 둘을 융합한 제도도 있긴 있는가 보지만 난 그런거 모른다. 알고싶지도 않거니와.
"제국을 떠나려는 건가?"
"그렇지."
"어디로?"
"그건 몰라. 일단 모선단과 만난 다음에 생각할 문제니까."
"모선단? 설마 새 주역이라도 찾아나서자는 건 아니겠지?"
"유감이지만 정답이다."
아아...지도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참 간 큰 작자임은 확실하다. 아니 뭐? 새 주역을 찾아 나선거라고? 방향도 없이? 저 끝이나 있을까 의심되는 우주를?
"인원이 모두 얼마야?"
"한...40만명?"
미쳤군...단단히 미쳤어. 죄다 죽을라고 환장들을 했구만.
뭐, 변두리 성계에 잡혀가 강제 노역을 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으윽.
"이봐, 그런데 이 대단한 모험단의 대장은 누구야?"
"대장...안어울리는 단어로군."
응? 왜 그렇게 웃어?
"아, 그럼 리더라고 고칠게."
"그런 의미가 아냐. 어쨌든 [지도자] 라는 단어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듯한 녀석이니까. 하이네센은."
하이네센? 지도자 안같다는 자의 이름인가? 흐음 기억 회로 작동. 방금전의 고유명사 저장. 파일명? 그게 왜 필요해!
나는 질문이나 마저 하기로 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지?"
"알 필요 없어. 어쨌든 너만 일방적으로 질문할 작정인가? 나도 좀 하자."
"좋을대로."
그는 똑바로 섰다. 그림자 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딱딱한게 확실했다.
"넌 대체 누구지?"
나는 나이프를 회수했다.
"수수께끼의 전직 귀족, 현직 공화주의자를 빙자한 백수, 이자크 폰 센코프다."
"그런걸 물은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테지?"
"그런 것 같지만 묵비권 행사, 불리한 진술은 거부하겠어."
한 대 맞은 표정이군. 하하하.
"뭘 어쩌려고?"
"말했었지. 쫓기는 거물급 귀족 출신 공화주의자라고."
민츠는 다시 문에 기대섰다. 아깐 어깨더니 이번엔 등을 대는군.
"솔직히 대답해 줘. 넌 누구의 편이냐?"
"나를 쉬게 할 수 있는 자의 편이다."
그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모로 세웠다. 버릇인가? 어쨌든 해석하기에 너무 대책없는 대답이었지.
나를 쉬게 할 수 있는 자.
누구든 상관 없다. 신이든, 악마든 간에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쉴 수 있게 해주는 자에게 나는 기댈 것이다.
고요하다. 기계음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몇 초가 지난 건지는 몰라도 너무나 길게만 느껴진다.
민츠는 돌아섰다. 그는 등을 보인 자세로 한 손을 들어올렸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해.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넌 돌아갈 수는 없을거다. 가능한 한 우리를 괴롭히진 말아줘.
우린 자유를, 좀더 인간답게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탈옥한 거다, 저 감옥을.
모선단과 만나려면 며칠은 놀아야니까 상처나 치료해. 긁지좀 말고."
나는 물끄러미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유? 인간답게 사는 것? 탈옥?
복잡한 상념들은 긴 그림자가 되어 내 뒤를 따라왔다. 어느새 복도에 불이 켜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