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9/25
암묵적인 침묵이 주위를 배회한다. 가시적인 것이든 추상적인 것이든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불안]으로 과대포장되어 있었다. 난 이런 분위기 무지 싫어하는데.
강화유리가 모자라 조그맣게 내놓은 둥근 창밖으로는 무한의 별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과 상극인 존재가 있다. 그렇다면 이 우주도 그 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언제 그것의 진실여부가 밝혀질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10초후 대기권 진입. 준비들 하라구요. 아, 이건 충고인데 되도록 충격에 주의해 주세요. ”
코네프는 불안의 두터운 장막을 벗겨내려는 듯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그 장막 속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착륙후에 천천히 생각해볼 문제다. 그런데 충격에 대비하라고? 요즘 우주선들은 착륙할 때 착륙한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인데 무슨 소리지?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기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쾅! 아야야~! 이봐~ 배를 몰 거면 조심해서 몰아! 내 머리에 이상생기면 네가 책임질거냐? 앙!
기내온도가 서서히 올라갔다.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경험은 없지만 마치 운석에 타고 있는 기분이다! 우주선은 대기와의 마찰로 불덩어리가 되어 추락인지 착륙인지 알 수 없는 폼으로 급강하했다. 지상에서 봤다면 거대한 불덩어리가 볼품없이 추락의 궤도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젠장, 멀미나네.
“이봐, 코네프! 무슨 행성착륙용 우주선이, 우주선이 이 모양이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대기권 진입하, 하는 건 천년전 지구시절 일 아니었어?”
“그 시절엔 엄청난 기압 때문에 우주보, 복과 안전벨트로 온몸을 묶고 있어야 했, 했다구요. 평복에 안전벨트라곤 허리에 달랑 하나 매는 우리들이랑은 틀려요. 아욱, 턱이야, 어, 엄청 흔들리는데.”
그건 사실이다. 인정해주지. 쳇.
“아무튼 차, 착륙까진 얼마 더 걸리지?”
“1분만 기다리십쇼.”
1분...? 우, 우후후훗..........
“크아악! 누굴 멀미로 죽일 셈이냐!”
“민츠, 잡아!”
“드디어 자신이 실성해 이, 있다는 걸 드러내는군.”
얼씨구, 장난한 거 가지고 이젠 날 실성한 놈 취급하냐? 잘나셨어, 과격청년! 이거 놔!
나는 민츠를 거칠게 밀어냈다. 동시에 또 기체가 요동치는 바람에 그는 팔꿈치를 금속벽에 부딪혔다. 쾅! 아프겠다. 그는 기절하겠다는 표정까진 안갔지만 하여간 아프다는 표정으로 팔을 감싸쥐었다.
“우와...센코프 형 힘 세네요? 민츠 형을, 민츠 형을 힘으로 해보다니!”
카일...너 어쩌자고 그러 발언을...민츠의 보복이 두렵지 않나.
“코네프가 운전을 잘못, 못하는 바람에 반작용이 커서 당한거다. 착각하지 마.”
폭력을 휘두르는 대신 그는 엉뚱한 자에게 갖다붙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하하. 그런데 그게 사실이거든.
“아, 아무튼 미안. 폭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진 마, 말라구, 민츠.”
“시끄러.”
민츠가 저렇게 된 건 전적으로 날 말리게 시킨 하이네센 탓. 하면 과장된 건가?
어쨌든 그 후로도 몇 번 더 난동이 일어난 다음 우주선은 안정적으로 착륙했다. (바위투성이 땅바닥을 우주선 전체로 긁으면서 청신경을 혹사시킨 다음 거대한 나무 몇 그루를 받아 넘어뜨렸으며 진흙에 반쯤 처박힌 꼴로 정지한 것도 안정적인 착륙이라면.)
여기는 하이네센에게 엄청난 아픔을 가져다주며 찾아낸 태양계의 제 3행성. 4행성도 생물이 살만한 데라는 의견이 모아졌지만 선단에 가까운 데에 가자는 의견으로 인해 민회에서 지목당한 - 무슨 방법으로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쩐지 제비뽑기가 머리속을 멤돈다 - 나와 민츠, 카일, 코네프는 목숨을 건 착륙(...)을 하게 됐다.
하이네센은 자의사로 끼어들었다. 일당의 리더가 직접 앞에 나서서 행동하는 것은 좀 의외였지만 군인들은 멍청하지만 않다면 이런 맹장스타일의 지휘관을 좋아하지.
그나저나 어디에 내릴 것인가의 사소한 것도 민회를 거쳐야 한단 말이더냐. 하긴 뭐 여기에 내린 목적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하지.
“화산활동이나 지각변동은 이 근처엔 없어요. 대기성분도 적당해요. 좀 수증기가 많은 것 같지만 무시할 수준입니다.”
하이네센은 카젤느가 전송한 데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위는 바위벌판이 끝나면서 습지와 접한 곳으로 늪을 경계로 한쪽은 황야, 한쪽은 엄청나게 빽빽한 숲인 것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곳이었다. 식물이 이렇게 많으니 대기가 안정적인 건 당연한 것이겠지?
“늪에 더 빠져서 피부미용에 신경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코네프!”
“예!”
“숲으로 더 깊이 전진.”
“예써! 무브!”
그는 힘차게 대답하고 비행선을 작동시켰다. 나는 지상용으로 전환하는 엔진의 거슬리는 박동을 들으며 메인 스크린에 비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인데 비라도 올 것처럼 우중충하군.
“우와아아아! 형! 저것 좀 봐요!”
“저기...우리 혹시 자연사 박물관에 온 겁니까? 아니면 타임머신이라도 만들어 졌다든가..”
“이거, 지구로 치면 석탄기나 중생대 초가 아닐까 심히 의심되는데.”
“저, 저, 저, 저 나무! 저 나무!”
“아저씨. 저건 고대 양치류지 나무가 아니네요. 하긴 저렇게 크면 다 나무로 보이지..”
별 의미없는 감탄사와 의문사가 오갔다.
햇빛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은 양치식물의 숲 사이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와 앞을 비췄다. 눅눅할 정도로 습하다. 빽빽하게 들어찬, 이 얼마만에 보는 녹음인가! 하지만 기분은 별로 안 좋았다.
“눅눅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보호복을 벗었다. 민츠는 주위를 둘러보며 세쿼이아만큼이나 커다란 양치식물 하나의 줄기를 나이프로 툭툭 쳤다.
“옛날옛적 선조들이 살던 지구의 역사중에 이런 비슷한 시기가 있었지. 어쨌든 더 둘러볼 필요는 없잖아. 볼일만 보고 빨리 뜨지.”
“왜요?”
순식간에 나와 민츠의 눈초리가 꽂혔다. 민츠는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대기권에서 당한 것까지 치밀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코네프....넌 과학 시간에 졸았어..? 지구과학 시간은 특별히 수업 안 받은 거야?“
“둘 다 아닌데요. 하하하. 전 친족이 반란자로 몰려서 어렸을 때 학교같은 데는 못 갔어요.”
그..그런 건 몰랐다.
“미..안.”
“상관없어요. 와, 아무튼 왜죠?”
“민츠 네가 시작했으니 제가 끝내.”
“너란 놈은...좋아.”
그는 모기로 추정되는 곤충의 습격에 손을 내저었다.
“고생대말에서 중생대초쯤에 해당하는 시대같아. 물론 지구와 꼭 같으리란 법이야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야. 비만 초식도마뱀과 마주치는 거야 상관없지만 위험천만한 육식주의자와 마주치는 건 좀 고려해볼 문제아닌가?
어차피 여기 살려고 탐사나온 건 아니니 빨리 할 일만 하고 가자.”
“도마뱀이면 겁낼 거 없잖아요? 좀 큰 정도일래나?”
기어코 민츠가 폭발했다. 요 며칠 어째 잠잠하다 했어. 그는 코네프의 안면을 향해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너 공룡은 알잖아! 공룡이 돌아다닌다니까! 가뜩이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저런 것들이나 상대하며 세월을 보내야는 데다가! 전에 지나쳐온 초신성의 폭발 범위에는 안 미치지만 그래도 멀리 피하는 것이 좋은 건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민회에서 만장일치로 여기는 지나치기로 했었잖아! 그때 졸았나! 귀가 있으면 후비지만 말고 듣는 데 써!”
“예, 예.”
저런저런. 그렇게 설명하면 그 잘난 뮤젤녀석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릴걸.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허리에 찬 전투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여지껏 그들을 재밌게 구경하던 카일은 시선을 그쪽으로 향한 채 코네프의 생명을 끊으려 드는 민츠를 툭툭 쳤다. 그는 고개를 획 돌렸다.
“네가 너무 소란피워서 싫대잖아. 어쩌지?”
내 질문에 하이네센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후 말했다.
“전원 후퇴! 우주선으로 돌아갑시다.”
악어를 네 배 정도 확대시켜 놓은 것 같은 파충류 한 다스가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진찍어서 카젤느 씨한테 보내면 어떨까? 받는 순간 기겁을 하며 비명지를까?”
코네프는 고대의 스포츠 제전이던 올림픽에 장난이라는 종목을 넣어 출전시키면 금메달 0순위가 될 것이다. 즉시 날아드는 민츠의 주먹. 퍽퍽퍽!
“아, 아하하...그렇게 폭력 쓸 것 까진 없잖아. 아무튼 카젤느한텐 그런 건 안통할걸요. 워낙에 험하게 살아온 분이라.”
하이네센은 얼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스크린과 K.O.된 코네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은 약간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분명 지질시대 생물과 닮긴 닮았지만 내 기억속에 저런 생물은 없었다. 악어 더하기 도마뱀 더하기 용가리? 그럼 키마이라? ..뭐 행성에 따라 생물이 다 다른 건 당연한 거지. 흠흠.
“허어 우주선에 폭력을 행사하네.”
민츠의 말에 생물학 강의와 옛날 영화의 추억에 빠져들었던 내 정신이 돌아왔다. 쾅쾅! 쾅! 겨우 대기권 지나칠 때 버틸 수 있는 수준의 열악한 우주선인데 저, 저 파렴치한 파충류가! 부수지 마! 크아악!
“왜 우릴 공격하는 걸까요? 뭘 해친 것도 아닌데.”
“여기 들어올 때 너무 시끄러웠던 게 원인이라면 원인이겠지. 우주선째로 땅위를 슬라이딩하던..아니, 착륙하던 소음이라면 충분히 우리가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 안그래, 코네프?”
“네, 네. 잘못했습니다. 죽여주세요. 정말로 돌아가시겠군.”
코네프는 무책임하게도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대로 이륙해 버릴 순 없는거야?”
“그러고 싶지만 안되요...”
그의 서글픈 미소에 불안감을 느낀 나는 그때서야 좌측 날개밑의 배기구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익 기익 기기기긱. 이봐~! 그건 배기구지 네놈들 집이 아냐! 나가! 이 상태에서 엔진을 가동했다간 배기구가 막혀서 폭발할테고, 그럼 다 날아가 버리겠지.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둘 상황은 더더욱 아니야.”
하이네센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 괴생물들을 바라보았다.
“흙 못 퍼가면 민회에서 혼날걸.”
하하하...우리가 그냥 지나치자는 이 행성에 힘들여 내린 이유는 바로 흙때문이었다.
여행이 얼마나 길어질 지 몰라서 수농재배니 뭐니 하는가 본데, 유기물을 분해할 세균이 기내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고로 이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나는 민회가 싫어요! (왜 엉뚱한 민회를 갖다붙이냐고 하진 말라 나도 모른다)
“제엔장...기다려. 내 나갔다 오지.”
나는 짜증스럽게 나이프를 들고 출구로 향했다. 카일이 허겁지겁 나이프를 들고 따라왔다.
“저, 저도 갈래요.”
“어? 너같은 애한텐 무리야. 얌전히 있으라구.”
그는 볼을 긁적거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년이면 성인이라구요. 전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고 이런 데서 피하거나 할 생각은 더 없어요.”
강해보이고 싶냐? 허세 한 번 부려보고 싶은거냐? 얘야. 그런 걸 두고 우린 영웅심리라고 한단다.
그 가느다란 팔다리를 보면 절대 힘을 쓸 타입이 아니란 것쯤 평범한 사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가겠다고? 여기서 한 번 떠보고 싶다는 거야?
“민츠, 얘좀 떼 줘.”
“조심해라, 카일 군.”
뭣이라고! 나는 그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느새 엎드린 자세로 전환한 코네프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띤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눈빛을 하이네센에게 보냈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잘 부탁합니다, 센코프 씨. 당신이 나간다는 건 뭔가 생각이 있다는 거니 믿겠습니다. 덤으로 데려가세요. 기다리죠.”
어이어이.
“나 혼자 충분히 합니다. 게다가 어린 애라구요! 지금 내가 뭘 하려는지 아십니까? 저녀석들 몇을 종말처리해서 아예 쫓아내려는 겁니다. 저런 애가 달려있으면 곤란해요.”
꼬마의 영웅심리 어쩌고는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냥 삼켰다. 솔직히 불안했다. 저녀석이 피를 보고도 견딜 수 있을지, 어느 정도로 센 지 알 수 없는 동물들 상대로 얼마나 잘 피할 수 있을지. 민츠가 간다 해도 말릴 생각인데 하물며 꼬마라니!
“하나보다 둘이 낫겠죠. 카일이 경험을 쌓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겁니다. 당신이 악어를 상대하면 카일이 흙을 퍼오는 겁니다. 녀석들이 복수심이 강하기라도 한다면 당신의 계획은 정말 위험한 게 되죠. 최단시간내에 일을 처리하고 사라져 주는 게 좋겠죠?”
쿵, 쿵! 자슥들, 온몸으로 선체를 비벼대는군. 영역표시하는 거냐? 하지마! 해봤자 소용없어! 이건 떠날 거라고! 윽.
코네프는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켜 소형 통신기를 던져줬다.
나는 주절주절 불만을 쏟아내며 통신기를 귀에 꽂고 카일한테 턱짓을 하곤 게이트로 내려갔다. 얼핏 보니 꼬마는 흙 담을 때 쓸 검은 주머니만 주무기(?)로 쓸 생각인지 나이프는 허리에 채우고 따라오는 것이었다. 기분 참 더럽군. 날 희생양으로 쓸 작정이냐, 하이네센! 물론 그만큼 신뢰한단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난 그러질 못하겠다구! 쳇.
카일 뒤로는 민츠가 총을 들고 따라왔다. 기내에 단 한 자루 있던 총이었다.
녀석도 나갈 셈인가?
“총은 안 쓸건가?”
아니었다.
“난 총은 절대 안 써.”
“엄호정도는 해 주지.”
“나갈 때만 해라. 난전에선 도움이 안 돼.”
이야기하던 사이 최하층에 있던 게이트까지 내려왔다. 나는 단호히 끊은 다음 바깥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통신기에서 코네프의 신호가 들어왔다. 나는 게이트에 바짝 다가선 다음 카일을 반대편에 세웠다. 민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2초 후, 반쯤 열린 문틈에서 민츠의 위협 사격이 가해졌다. 동시에 게이트 근처 악어떼가 흠칫 물러섰다. 문이 다 열리자마자 나는 뛰어나갔다. 등 뒤로 카일의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대를 역행하여 이 행성에 최초로 등장한 인류에 파충류들은 잠시 긴장했다. 나는 뛰어가던 관성까지 몰아쳐 가장 근접했던 녀석을 쳤다. 캬아아아아! 일순간이나마 등골이 서늘해지는 괴성. 차디찬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그것은 축 늘어졌다. 날 원망하진 말라구. 재수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 살기 위해선 별짓 다하는 놈이라서. 그나저나 이건 좀 너무하는군. 오랜만에 흥분하려니까 기분은 좋은데 말야, 왜 상대가 동물이냐고. 그것도 학술원같은 데서 알면 날 박제로 만들어버릴 생물들이냔 말이다. 쳇.
내 공격을 기점으로 그것들도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낯선 송곳니가 허공을 가른다. 느려, 임마! 즉시 보통 동물의 콧등에 해당하는 곳을 친다. 최후의 발악으로 날아드는 꼬리는 반사적으로 올린 왼팔로 가까스로 막았다. 이 무슨 초보같은 실수냐! 상대의 힘을 모르는 상태에서 맨팔로 막다니! 욱, 쓰려. 파충류랍시고 피부는 딱딱하다 이건가? 흥.
나는 여유부리며 슬쩍 어깨너머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꼬마는 어정쩡한 폼으로 나이프를 휘둘러 악어떼를 물리고 있었다. 폼으로 가져온 건 아니었다는 건가. 하지만 대체가 도움이 안되니 원...
난 카일의 등을 노리던 악어 한 마리를 처리하고 녀석과 등을 맞대고 섰다.
“도마뱀들은 내가 막을테니 빨리..흙 퍼. 저 나무같이 생긴 거 - 이건 나무가 아니라 전함에서 전차등을 나르는 화물 엘리베이터라 해도 믿겠어 - 밑에 검은 흙 보이지? 저런 데에 미생물이 많아. 엄호한다. 가!”
녀석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은 느렸다. 뛰려고 한 발 용감하게 내딛던 순간 막아선 악어에, 발이 땅에 붙어 움직이질 못한다. 이이이이이!
“야!”
밀쳐내며 놈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퍽석! 두 개골 깨지는 소리에 피가 튀고 비늘 조각이 난무했다. 짜증나네 정말. 가만히 보니 이녀석들, 복수심이라는 것도 있는지 더 심하게 달려든단 말씀이야? 애초에 내가 판단을 잘못한 건가. 그런거라면 잠시 후 정말 골치아프게 될 텐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심함을 느끼며 카일의 뒷덜미를 잡았다.
“폼으로 나왔나?”
“예..?”
“칼을 들었으면 휘둘러, 못하겠으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해. 적을 상대할 때는 항상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거다! 어허, 더 오네.“
내 허무한 중얼거림의 끝은 몇 마리의 악어떼가 포위진형으로 나타나는 소리였다. 카일은 내 옆에 바짝 붙어섰다. 아, 그렇게 붙어 있으면 내가 행동하는 데 불편해.
나는 혀를 찬 다음 나이프를 고쳐쥐었다.
“아무래도 1차는 실패. 후퇴한다.”
“흙은요?
“흙이 도망가는 거 봤어? 일단 들어가자.”
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상당히 도발적인 하단 겨누기로 주의를 끌었다. 싸움을 즐기는군..하고 코네프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아무튼 다시 나올 땐 애는 떼고 나와야지.
“신호하면 정말로 목숨걸고 뛰어라.”
“예.”
“오랜만에 검을 잡았는데 기껏 한다는게...열 받는군.
와라, 파충류 자식들아. 내가 박제로 만들어 주마.“
너희의 멀고먼 후손뻘되는 녀석들은 박제로 전락해서 오딘의 고관들 댁에 잘 모셔져 있지. 나도 하나 해 볼까? 가난하고 배경 없어서 서러웠는데 말이야. 끼끼끼.
나는 카일의 등을 쳤다. 그는 뛰었다. 순간 악어도 반응했다. 하지만 내가 있으니까 어떻게 함부로는 안되지. 내가 뒷걸음을 치자 악어떼는 조심스럽게 포위망을 좁혔다. 나는 통신기에 손을 댔다.
“코네프, 애 들어가니까 문 열 준비...”
“으악!”
나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악! 카일 녀석이 악어한테 거의 물어뜯길 뻔했다! 넌 대체 왜 나온거야!
“...되도록이면 빨리! 구경만 하진 마!”
<<알아요! 안다구요! 젠장!>>
나는 땅을 차면서 카일을 밀었다. 악어의 정면으로 쇄도한 무적의 전직 최강 해병대원은 순간적으로 굳은 악어의 눈을 날려버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악어 옆에서 다른 악어 한 마리가 턱을 들이댔지만 콧잔 등을 찍어서 보내버렸다. 이거, 웃기는 녀석들이군. 상대가 강하다는 걸 알게 되면 동물들은 더 이상 덤비지 않는 법이야. 그런데 무슨 승부근성이 이렇게 강해? 우리가 정말 들어와선 안될 시기 - 이를테면 번식기 - 에 오기라도 했나?
그런데 난 뭔가 하나 잊고 있었다.
“에? 이녀석 어디갔지?”
주위에는 좀더 신중하게 공격태세를 갖춘 악어떼만이 보였다.
카일은 없었다.
<<치직..숲으로 뛰어갔어요! 앗, 센코프 씨, 뒤에..>>
“그만!”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칼을 뒤로 낮게 풀스윙 했다. 허리가 삐끗하지만 않기를 바란다. 욱! 이녀석은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즉시 무방비상태인 나를 덮쳤다. 나는 급하게 몸을 뺐지만 반응이 약간 늦었다. 녀석의 빗나간 턱에 왼쪽 목덜미 바로 아래 견골을 부딪쳤다. 눈에서 눈물나게 아픈 일격이었다.
악어는 정면으로, 난 뒤로 넘어갔다. 다행이 바닥엔 돌이 없어 2차 충격은 덜했다.
“너 이녀석..감히 나한테 양치질도 안한 이빨을 드러냈냐?”
왼쪽 손을 움직여 봤다. 얼얼하지만 움직이긴 했다.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쓰러진 나를 향해 육박해 오는 악어떼의 파워와 복수심을 감상하며 감탄하는 대신 나이프로 나를 깔고 누운 녀석의 옆구리를 찌른 채 그어버렸다. 엄청나게 무거운 몸을 치우자마자 옆으로 굴러 옷자락이 찢어진 선에서 또 깔릴 뻔한 불상사를 면했다. 나는 일어섰다. 뒷걸음치다가 뭔가 딱딱힌 것이 등에 부딪혔다.
우주선..?
순간 눈앞이 백열광으로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