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9
“이자크 폰 센코프 대령, 임무를 마치고 지금 막 귀환했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무미건조하고 억양조차 없는 이 딱딱한 말투가 내 원래 말투란 말이지...
“수고 많았군.”
로엔그람 각하는 내가 내민 포맷된 전자시계와 보고서를 대충 넘겨다보며 흘리듯 물었다.
“그래, 공화주의자들은 물론 모두 성간물질로 환원되어 있겠지?”
아뇨.
“예.”
“경위를 듣기엔 자네가 좀 피곤해 보이는군. 결론만 말해.”
녀석들은 구엔 킴 호아를 중심으로 계속 항진중입니다.
“우두머리 알레 하이네센이 살해당한 후 어리석게도 내분으로 흩어져 자멸했습니다.”
각하는 계속 흥미 없어 보이는 손놀림으로 보고서를 넘겼다.
“완벽한 일처리와 무사귀환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썼군. 프레이저는 도중에 죽고?”
“예.”
“까짓 끄나풀, 없어도 상관없지. 좋아.
그런데 자네, 다른 물을 마시고도 괜찮은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소관, 황제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 마음가짐이 끝까지 가길 기원하지, 자넬 위해서.
그만 가서 쉬도록. 절차는 이미 마쳤다. 내일 오전 중에 경은 복권될 것이다. 더불어 해적 조무래기 소탕건이 있다. 간단한 일이니 빨리 끝내고 별을 달기 바란다. 어려운 임무, 잘 처리했다.”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나는 되도록이면 각하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15도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딱딱한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일순간, 얼핏 본 각하의 눈에 예리한 빛이 머무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대로 돌아서서 사령실에서 도망쳤다.
“센코프! 괜찮나? 이게 지진이라는 건가, 이거야 원 지옥이 따로...”
민츠는 가볍게 바위 사이를 뛰어오다가 센코프를 보고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돌아앉은 그의 등은 어쩐지 딱딱했다. 민츠는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지반이 갈라진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 기둥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센코프?”
센코프는 그때서야 움찔 고개를 돌렸다. 약간은 당황한 갈색 눈동자는 그러나 곧 차갑게, 우주의 심연보다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시선과 함께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강한 산성의 이슬비가 내린 직후라 계곡은 안개에 잠식당해 있었다.
민츠는 센코프의 멍한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어느 한 자리에서 그의 모든 동작이 정지했다. 민츠는 피식 웃으며 양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뭐지, 이 꼬락서니들은? 아는 얼굴들이 왜 땅바닥에 있는 건지 모르겠군. 특히 하이네센. 일어나, 멍청아.”
센코프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의 차가운 갈색 눈동자에 서서히 살기가 번져갔다. 민츠는 어깨를 으쓱이며 센코프가 앉아있는 곳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입가는 약간 올라가 있었지만 눈과 발걸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
하이네센은 빙긋 웃으며 반쯤 열린 눈으로 먼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츠는 그가 누운 옆에 멈춰 섰다.
“일어나. 우린 3류 연극부원이 아니야. 난 장난칠 기분은 더더욱 아니니 빨리 일어나.”
하이네센은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민츠는 몸을 깊이 굽혔다. 그는 주머니에서 한손을 빼 하이네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레.”
단조롭게 움직이던 손길은 한순간 거칠게 고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이제 경직되어가는 차가운 몸을 거칠게 흔들며 민츠는 힘주어 불렀다.
“알레, 이봐.”
“그만 해라.”
센코프가 기계적인 음성으로 경고해도 민츠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손을 펼쳤다. 거의 굳은 피가 진득하게 묻어있었다.
“하이네센. 이...”
민츠는 허탈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 누군가를 향하듯 땅을 내려쳤다. 뼈가 부스러지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지만 민츠는 그것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 멍청이! 네까짓 게 뭔데.. 뭔데 남한테 멋대로 희망 따위 줘 놓고.. 그래놓고 멋대로 죽은 거냐! 너 따위가... 이렇게 어이없이.......빌어먹을, 너 따위가!”
순간 센코프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작렬했다.
“여어, 센코프. 아직 안 죽었나?”
“경의 면상을 날려버리기 전엔 죽을 수 없지.”
참으로 정답고 따스한 인사가 오갔다. 뮤젤은 임무 때면 더없이 재수 없고 차갑지만 평상시엔 썰렁하고 더 재수 없다. 나는 어깨를 한번 추어올렸다.
우리는 나란히 장교 숙소로 향했다. 오딘 시내는 가랑비가 내리면서 조용히 젖어있었다. 흙냄새인지 풀냄새인지 알 수 없는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자극했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도 감미롭다.
이게 땅 위의 감각인가.
“아무튼 연극한 보람은 있지?”
“그땐 정말 리얼했지. 난 연극을 빙자해 영감님이 날 숙청하려는 줄 알았다. 그리고.”
퍽! 뮤젤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내 무쇠펀치에 맞은 어깨관절이 빠질 듯이 아플 것이다.
“나한테 불만 있나? 장난 아니군.”
“면상에 날리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당장 죽을 생각은 없으니 이 정도로 봐 주지.”
뮤젤은 내 실속 있는 장수계획(?)에 감탄해(??) 멈춰 서서 입을 벌리고 날 쳐다보았다.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앞만 보고 걸었다.
“멋지게 한판 했군.”
구엔은 간단히 감상을 내뱉고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씩씩거리며 죄지은 장난꾸러기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센코프와 민츠는 옷 곳곳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흙탕물에 감은 채 헝클어져 있었으며 몸 여기저기는 붉고 퍼런 꼴이었다. 총천연색으로 염색된 그들의 얼굴과 밀랍처럼 창백한 죽은 자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코네프는 어느 순간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니까, 프레이저는 제국에 매수된 개였고- 그 사람이 카일을 선동해 그를 살해했다는.. 것입니까? 당신은 뒤늦게 그들을 발견하고 제지하려 했지만 늦었다구요...?”
카젤느는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말이 느렸으며 자꾸 시선은 이리저리 돌아가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에 코네프가 곁눈질하자 구엔이 여전히 우주를 쏘아보면서 손마디를 우두둑 꺾고 있었다. 이를 가는 소리는 그의 입에서 나는 것이 분명했다. 몇 사람의 산 자와 몇 사람의 죽은 자가 같이 있는 이 방에서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젠 어쩔텐가..”
센코프의 공허한 말이 5분 가까이 지속된 침묵을 간신히 깨뜨렸다. 구엔은 고개를 휙 돌렸다.
“어쩌냐고? 어쩌긴 뭘 어째?”
그는 콘솔 위에 방만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가부좌로 변형시켰다.
“그 머저리가 사고사한 게 알려지면 모두들 혼란에 빠진다. 민회를 소집해 빨리 새 리더를 뽑고 사태를 진정시켜야지.”
그는 거뭇한 얼굴에 어떤 표정도 떠올리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평소 센코프가 인식하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구엔은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센코프는 헛기침을 했다.
문득 구엔은 주위를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하던 일 안하고 뭐해, 여러분? 여기가 당신들 자리야?”
“그렇군. 내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민츠가 일어섰다. 그는 찢어진 입술이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혀로 상처를 핥고 방을 나갔다. 하지만,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진 그의 넓은 등은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갑자기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여기서 바보짓하면 후세 사가들뿐만 아니라 지하의 동지들까지 비웃음교향곡을 연주할 거요. 당연히, 내 자리로 갑니다.”
코네프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씩 웃었다. 힘이 빠졌지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말대로라면,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것이니까...”
카젤느는 날카롭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예의 절도 있는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나갈 때까지 절대로 하이네센의 시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일으켰다. 상실감이 덮쳐오면서 여태 느끼지 못했던 피로까지 밀려와 표정은 어두웠지만, 그들은 멈춰선 안 되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센코프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들었다.
“그럼 난 떠나겠어.”
센코프는 가볍게, 소생을 위해 애써 날개짓 하려는 무리의 등에 무참한 말을 던졌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경직되었다. 잠시 후 구엔은 메마른 음성으로 물었다.
“다 죽이는 건 아니겠지?”
“봐서.”
일동은 눈만 굴리다가 무슨 소린지 깨닫고 잇소리를 냈다.
분명히 동요하는 자는 있다. 그들은 이 이상주의자들을 괴롭히고 더 나아가 죽은 하이네센의 꿈까지 서슴없이 짓밟을 것이다.
“내가 총대 매지. 로키 호, 가져가도 되겠지?”
“흥, 가져가 버려요. 난 필요 없어.”
짐짓 쾌활한 어조로 코네프는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눈에는 아쉬움이 배어있었다.
중추에서 누군가가 떠난다고 하면, 분명 그들에게 반대하는 무리는 눈치 볼 것 없이 따라갈 것이다. 센코프는 하이네센을 암살하려고 계획하던 동안 해킹해 놓은 항로 파일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발할라 성계를 눈앞에 두고 센코프는 로키 호를 탑승자들과 함께 폭파시켜 버렸다. 어차피 살아서 돌아간다 해도 제국군이 그들을 가만 둘 리 없으므로 이게 더 났다는 자위의 그늘에서 센코프는 폭발하는 우주선을 등졌다. 공화주의자들은 바라지 않은 결과였지만 센코프로선 배신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배신자였기에.
온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제길, 가랑비라고 우습게 봤더니 속옷까지 폭싹 젖어 버렸다.
민츠는 나를 때리고 나한테 터지면서 내가 한 짓이 아닌가 추궁했다. 나는 부분적으로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암살자를 죽인 자를 내가 죽인 거라고.
샤워기의 뜨거운 물이 정수리에 쏟아졌다. 나는 벽을 짚고 물을 뒤집어쓰며 멍청이 서 있었다.
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민츠는 그녀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가더니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흐릿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드는 걸 확인하고 나는 자리를 비웠다. 나 때문에 마음을 닫았던 그녀는 하이네센에 의해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나 때문에 마음이 상했겠지. 이번엔, 나 따위 패륜아가 아닌 믿음직스런 녀석이 함께 해 줄 것이다. 오빠란 놈이, 끝까지 너한테 미안한 짓만 하는구나.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는데도 계속 춥다. 나는 경련에 가까운 떨림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술을 찾았다. 아쉽게도 독주는 없고 뮤젤이 두고 간 맥주캔만 몇 개 있었다. 나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갑자기 턱이 덜덜 떨렸다. 떨림은 온몸으로 퍼져 손끝까지 전달되었다. 힘을 잃은 손을 떠나 캔은 바닥에 떨어졌다. 둔중한 충격음에 화들짝 놀라 다시 캔을 집었지만 또 미끄러졌다. 캔은 내 손이 닿지 않는 침대 밑으로 굴러갔다.
“빌어먹을! 이젠 맥주캔 따위까지 지랄이야!”
나는 침대보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순간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환한 숙소의 조명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지평이었다. 나는 움찔 손을 놓쳤다. 침대보가 구겨진 채 제자리로 돌아가자 어둠은 다시 사라지고 하얀 천만이 눈을 가렸다.
이런 게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젠장!”
차갑고 깨끗한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손이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떨려왔다. 저 하얀 조명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말하지 못했다.
동생에겐 오빠로서 한 마디도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다 떠나버렸다.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다.
난.. 단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게다가 보고서와는 달리 내가 직접 죽인 것도 아니잖은가.
죄책감? 허, 그런 것도 내게 있었던가?
그런데도 지금 떠는 건, 단지 나도 모르게 푹 젖은 가랑비 때문이야. 나도 모르게 뛰어들었다가 젖어버린...
젠장!
내겐 새벽이 올까?
내가 그곳에서 당신들과 함께 본 것은 새벽의 미명이 아니었단 말인가?
당신의 피, 공화주의자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어서 그 이후로 괜히 흔들리는 건가?
놔 줘!
“쿨럭! 몸살인가...”
억지로 일어났다.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침대에 대충 던졌다. 상체만 침대에 걸친 채 나는 눈을 감았다.
어느 이념이 옳은 지, 절대적인지 아닌지, 그딴 건 모른다. 난 공화주의자가 되기엔 너무 경직되어 있고, 황제를 지지하기엔 너무 공화주의에 잠식당했다. 이젠, 그런 건 상관없어.
하지만 당신에 관한 문제라면 달라. 나는 선택했다. 당신을 죽이지 않기로. 겨우 찾은 동생을 멀리서 바라보며 당신들과 함께 여행하겠다고... 난 그렇게 선택했다. 이전에 무조건적으로 당신을 따르던 민츠를 비웃었지만, 난 비웃을 자격도 없었다.
내 탈출은 실패했다. 밤은 영원하다.
“하지만...”
하지만..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다른 모습으로라도..”
만나게 된다면.. 그땐.....
그땐 당신에게만 충성하겠다.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다.
그때라면, 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날 옥죄는 모든 것으로부터...
이건 진심이다.
아스테이트 전투에서 150만이 전사했다. 자유행성동맹군 육군 총감부 소속 로젠 리터 연대는 물론 함대전에는 나갈 일이 없기 때문에 전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는 없다. 전사자에 대해 딱히 감상적인 생각을 갖진 않는다. 직업군인을 제외하면, 군인은 죽으라고 끌려가는 존재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위해 위스키라도 한잔 들어주는 건 그들이 헛되게 목숨을 바쳐준 상대가 우스워서다. 자신들은 하이네센의 안전한 지하벙커에 있으면서 그들은 최전선으로 몰아내고, 죽은 후에는 악어의 눈물이나 흘려주면서 또 그 죽음을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궁리하는 치들이 있다. 내 잔은 그 치들의 권력다툼을 위해 죽어준 건 모르고 국가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죽는다고 믿었을 순진한 청년들에게 바치는 거다. 정치꾼이란 것들은 토마호크가 종횡으로 날아다니고 사람이 산채로 찢겨 나가는 장면 따위, 솔리비젼에서만 보는 이상 재밌는 구경거리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아, 생각해보니 그건 정치꾼만이 아니다. 전장에 서본 적 없는 ‘시민’은 150년은 족히 끌어가는 이 전쟁에 길들여져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웃어넘길 수 있다. 솔리비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말이다.
자유행성동맹 국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들은 지금 싸운다 빛나는 미래를 위해
우리들은 지금 싸운다 영원한 내일을 위해
웃기는 소리, 그런 건 없다. 우리가 왜 싸우냐고? 그거 외엔 할 게 없어서다. 특히나 우리 로젠 리터들은 망명 제국인의 자손으로서 조국에 검을 겨누는 꼴이지만, 그거 외엔 우리가 인정받고 살아남을 길이 없으니까 죽이고 또 죽이는 거다. 빛나는 미래? 영원한 내일? 죽은 놈한테 그런 게 있는지 물어 보라지. 차라리 스파르타니언을 모는 생각 없는 놈들 말마따나 술과 전쟁과 여자가 빠진 인생 따위 인생도 아니니 살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나는 발터 폰 센코프. 네 명의 전사자와 두 명의 명예제대자와 여섯명의 배신자의 뒤를 이어 13번째로 로젠 리터를 이끄는 남자다. 그 13이라는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세간에선 내가 7번째 배신자가 될 지도 모른다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신경 쓰진 않는다. 국가라는 건 나라는 개인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이미 한번 떠난 조국, 또 버린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재미없는 곳이라면 동맹 따위 내가 있어줄 필요는 없는 거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패전 후 군대재편에서 로젠 리터가 배속된 곳 또한 13함대이다. 그나마 통상 함대의 절반규모밖에 안되는 데다 아스테이트의 생존자들을 모아다 놓은 신생 반쪽짜리 함대다. 함대사령관은 얀웬리라고, 그 아스테이트의 전투가 완벽한 불계패로 끝나지 않도록 막은 ‘영웅’이라고 들었다. 더 귀를 기울여 보니 동맹군 장교들이 추태를 보였던 그 엘 파실에서도 영웅이 된 자라 한다. 정부는 쉽사리 흥분하는 군중들이 전투의 참패에서 눈 돌리게 하기 위해 영웅을 만든다. 얀웬리라는 자도 그런 잠깐 반짝이고 말 영웅일지 아닐지는 차차 알게 될 일이다만, 되도록이면 반짝영웅은 아니었으면 한다. 나도 내 부하들도 멍청한 상관 밑에서 시달리는 건 그리 반기지 않는다. 우선 살아 돌아갈 확률이 대폭 감소해 버리니까.
그건 그렇다 치자... 그 전쟁영웅 얀웬리 소장 각하께서 일개 대령에 불과한 이 몸을 왜 부르셨을꼬. 우리의 자랑스런 절름발이 함대는 당당하게도 신함대 최초의 대규모 기동연습(을 빙자한 제국에 집적대기)에 나섰다. 항법사 녀석들이 떠들어 대는 바에 의하면 이젤론 방면이라 한다. 워프 거리와 날짜를 따져보니 이젤론 회랑에 들어가도 너무 깊이 들어갔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동연습 따위가 아니다. 그렇지만 여섯 번 쳐들어가 여섯 번 격퇴당한 이젤론 요새에 맨땅에 헤딩하듯 달려드는 것일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속셈이지?
대충 복색을 바로잡고 장교휴게실에 대기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여군이 들어왔다. F. 그린힐이라는 그 중위는 나에게 사령관이 호출한다고 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령관실로 걸어갔다.
좀더 색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좀더 재미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뭔가 기대할 수 있는 걸 제공할 능력이 없다면 그자는 내 상관으로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그게 그자의 능력에 비춰 무리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나와 상성이 맞는 상관을 만날 때까지 살아남기만을 기도해야지.
나는 비죽 웃고 사령관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脫出記 完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