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9
“이거 몇 개로 보이냐?”
손가락 두 개, 승리의 V.
“나를 따르라! 승리의 여신은 내가 채갔다!”
퍽!
나는 씨익 웃었다.
“폭력신사. 폭력의 진짜 미학을 가르쳐 주겠다. 너 이 자식..”
“그만들 하세요. 비가 그쳤다구요.”
코네프의 졸린 한 마디가 우리의 싸움을 막았다. 나와 민츠는 으르렁거리며 주먹을 내렸다.
작은 창문으로 사정없이 하얀 햇살이 쏟아지
..는 대신 짙은 잿빛 하늘이 들어왔다.
“화산재 같은 것 탓 일거야. 차라리 잘 됐어. 이런 데라는 걸 앍[ 된다면 여기 눌러 살겠다는 작자는 안 나올 테니까.”
민츠는 너무 솔직담백해서 탈이야. 쯧.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 때마다 뼈마디가 반항했다. 우둑, 투두둑.
뭔가 악몽을 꾼 것 같은데... 왜 꿈이란 건 무책임하게도 생각 안 나서 사람 성가시게 하는 거야, 제기랄. 요즘들어 웬일로 안하던 욕이 다시 늘잖아. 어휴.
“코네프. 이 근처의 지각운동 상황은?”
“카젤느 씨로부터의 전언. 이쪽은 조용하겠지만 세 팀이 집합하는 곳은 좀 위험해 보인다고 장소 옮기래요. 하이네센 씨 팀에도 전달된 겁니다.”
“그 외엔?”
“글쎄요? p.s. 버나드 씨와 이자크 씨에게는 20 √2를 나눠주라고?”
“뭐?”
나와 민츠는 서로를 쳐다본 후 코네프를 쳐다보았다. 코네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한 척 했다!
“으응... 20 √2가 뭔 소린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버나드는 누구고 이자크는 누구죠?”
퍽, 퍽!
같은 팀원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니콜라스 코내프 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인은 척살로 인한 늑골 골절로 심장 정지, 기관지 파열.
...너무 거창한가?
확실히 지각변동이 심했다. 우리가 날고 있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땅이 들썩거린다. 코네프는 죽었던 몸이면서도 꿋꿋하게 일어서서 배를 조종했다. 드디어 자신의 정체가 좀비였음을 밝히는군.
“나라면 절대 이런 데서 안 살 거야.”
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봐도 지면의 갈라진 곳에서 뭉글뭉글 솟아나는 지독한 연기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11시 방향으로... 조금 있으면 우리가 조사할 지역이다.”
민츠는 콘솔을 가볍게 톡톡 쳤다. 나는 도구들을 쓱 훑어보았다. 문득, 금속제 도구들의 반사광이 밝은 금적색임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하아...!
“날씨는 좋을래나? 하늘에 노을이 떴어요.”
“노을이구나. 본지 엄청 오래된 기분인데.”
“우리의 경우엔 기분이 아니라 진짜로 오랜만인 거다. 알타이르를 떠난 후 본 적이 없었어.”
우리는 약속한 듯이 브리지에 늘어섰다. 코네프는 비행로를 정하고 자동으로 전환하느라 조금 늦게 내려왔다.
우리의 머리위에 덮인 반투명한 스크린은 유황 섞인 뜨뜻한 바람이 스치고 있을 하늘을 보여줬다. 화산재라고 판명된 잿빛 구름의 장막 사이사이로 붉은 건지 황금빛인지 구별할 수 없는 빛살이 떨어졌다. 이따금 들춰진 구름 밑이 진한 오렌지색으로 변하면서 옅은 금색안개와 짙은 회색구름에 섞여 어우러지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여기에 흰색은 없다. 회색, 적색, 황금색, 주황색, 우리의 배 아래로 길게 늘어진 검은 그림자, 붉게 물든 거친 산맥의 꿈틀거림 사이로도 검은 그림자, 대지는 타오른다.
“코네프 씨! 2차 목적지 다 왔수다! 여러분도 준비하시죠.”
“아아.”
나는 움찔 놀라서 오퍼레이터를 바라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은 불평하면서도 돌아갔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빌어먹게 아름다운 붉은 그림자의 회색장막..
“정신 차려라. 우리 할 일 해야지.”
“간다, 가.”
그래. 내겐 할 일이 있었지.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내 자리로 갔다.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기 전 언뜻 본 하늘은 낙조의 오렌지색이었다.
조사라고 해 봤자 지질과 행성의 나이, 생물이 살 수 있는가 여부, 수분 함량 기타 별 잡스런 것 몇 가지만 하고 끝났다. 간단하게 우주식(다신 군대의 식사를 욕하지 않겠어)으로 저녁을 때운 후 나는 브리지 아래의 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기내는 조용했다. 중계위성이 없어 위성 대신으로 쓰이는 선단의 컴퓨터가 우리 컴퓨터로 보낸 자료를 읽어 들이는 듯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간간이 들렸다. 코네프는 자기 의자에 앉은 채 자고 민츠는 아무것도 없는 파란 모니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당직인 두 명만 어둠 가운데 꺼진 스크린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중이었다. 나머지는 물론 수면 중이다.
나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자리가 있는 민츠를 흘끗 쳐다본 후 만능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접속 성공. 기록파일 전송. 1, 2, 3...
“뭐 하나.”
그는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지나가듯 물었다. 하지만 말에는 은연중에 무거운 뭔가가 깔려 있었다.
나는 눈가를 긁적였다.
“시계 봐.”
“이전부터 궁금하더군, 그 시계. 자네는 그걸 참 자주 본단 말야.”
“시계 보는 게 버릇이야. 그냥 나도 모르게 자주 본다구.”
“그래?”
나는 내 시계를 만지는 척 하며 시계의 모니터를 돌려 껐다. 이제 그 시계위에 뜨는 것은 형광색의 현재시각이다.
“몇시지?”
“11시 6분. 슬슬 자야지.”
“잠이 오질 않는군.”
내 입매가 반사적으로 스윽 올라갔다. 아아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번득이는 내 재치는 나만의 슬픈 천성인가 봐.
“옆구리가 허전한 폭력신사늑대는 적막한 은빛 대지위에서 홀로 포효한다네.”
퍼억. 날카로운 스트레이트. 아욱!
“오래 살고 싶으면 헛소리 좀 줄여라. 진심어린 충고다.”
“충분히 반성하고 있으니.. 주먹 좀 취워줘어.”
녀석이 끝까지 내 얼굴을 주목으로 지그시 밀어붙이는 바람에 발음이 이상해져 버렸다. 윽. 내 성격 참 많이 좋아졌군.
민츠가 자료정리를 끝내고 컴을 끈 후 나갈 때까지 난 한 번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군인들은 밤에도 글로 전보를 전달할 수 있게 점자를 배운다. 열악유전자법 제정 이전에 맹인들이 썼다던 점자는 바로 군대에서 쓰던 게 민간인한테 흘러나간 거니까. 어쨌거나 내 손끝은 전송 끝났다는 표시로 점자 형태로 전자파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상당히 고도의 훈련과 타고난 감각을 필요로 하는..험험.
어쨌거나 이 파일들은 나중에 아주 중요하게 쓰일 것이다. 내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상태로 돌아갈 키워드가 될 것이다...
“잠깐 나와 보시지.”
어구야! 간 떨어질 뻔 했잖아, 폭력신사!
나는 얼어붙었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뭐, 뭐, 뭐, 뭐냐! 기척이라도 낼 것이지!”
“네가 뭔가에 집중하느라 못들은 게 아니라?”
두, 둘러대야 해!
“안 들렸어.”
“전직 군인답지 않은 소리군. 아무튼 나와.”
“쳇.”
저 녀석만 보면♡ 죽이고 싶어♡
나는 억지로 웃으며 - 어둠속에서 으흐흐하고 일그러진 얼굴로 화를 곱씹는 이자크 폰 센코프 나 정말 성격 많이 좋아졌다니까 - 일없이 잘 자는 코내프 얼굴에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낙서한 후 뛰어나갔다.
녀석은 위험하게도, 비행기를 착륙시켜놓은 상황만 믿고 밖의 선체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지구시절 비행기의 흔적으로 선체 위에 붙어있는 난간 형태의 구조물에 멋대로 기대어 섰다. 하늘은 검었다. 재 때문에 이번엔 별이 보이지 않는 그런 어둠이었다. 갑자기 무뚝뚝한 목소리가 어색하게 말했다.
“음, 자네가 카젤느 씨에 대해 그나마 기억하는 걸 좀 가르쳐 주면 안 되겠나.”
나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서있을 수 있었던 자신에게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어스름한 민츠의 얼굴을 보니 분명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런, 이 자가 점점 더 이상해져 가는구만.
“난 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뭘 어떻게 아냐?”
“무슨 소리야. 자넨 우리들 중 그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잖아.”
“허어? 무슨 근거로?”
그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뭐? 이봐, 자네는 카젤느 씨 친오빠잖아?“
뒤통수를 뭔가로 가격당한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라이트닝 볼트가 떨어져 재수없게 직통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버스를 타고 즐겁게 한 시간을 달렸는데 알고 보니 방향을 잘못 탄 걸 깨달은 느낌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여자 오빠라니. 누가 그런 소릴 해?”
“어? 무슨 소리지? 아니, 잠깐. 그, 그럼 자네만 몰랐다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내가 더 모르겠어. 이봐, 똑바로 내 눈 쳐다보고 말해줘. 내가 그 쌀쌀맞은 아가씨네 오빠라고? 갑자기 황궁 상공에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냐, 자넷 카젤느의....
자넷....?
순간 완벽하게 허무로 채워져 버린 내 머릿속을 비집고 뭔가, 아주 오래전에 묻어두고 내팽개친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언젠가 한 번, 공화주의자들이 담 너머로 몰래 뿌린 전단을 주워들고 읽으셨다. 어머니는 기겁하며 즉시 그걸 태우셨다. 그리고 며칠 후 저녁 들이닥친 제국군에 아버지가 끌려갔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사람들과 하인들까지 모두.
며칠 뒤,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무섭다는 생각만 하고 눈을 뜬 채 뒹굴던 밤이었다.
기품있고 엄해 보이는 초로의 아저씨였다. 그는 나에게 아버지의 친구이기 때문에 돕고 싶다면서, 증거가 불충분하지만 사형은 기정사실이라며 혹, 장남인 내가 아버지와 의절하고 직접 사살한다면 최소한 가족들의 목숨은 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다음 날 나는 가족들과 제국의 이름있는 사람들 앞에서 처연하게 미소짓고 있던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내 손에는 태어나서 처음 만져보는 전자 라이플이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나를 말리셨다. 아직 어리던 내 동생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 한 사람 죽음으로써 가족 모두가 살 수 있다기에- 아니, 사실은 내가 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아저씨가 쏘라고 한 한 마디가 ‘명령’으로 받아들어졌기에, 모든 것을 정당화해버렸다.
라이플을 들자 아버지는 눈을 감아버리셨다. 나는 총을 쐈다.
제일 먼저 어머니가 나를 저주하며 쓰러지셨다. 아버지는 단발에 즉사한건지 그 자리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동생은 눈만 깜빡거리며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날로 가족이 흩어졌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동생은 아저씨가 지정한 보호자에게 넘어갔고, 어머니는 유배됐다. 가산은 몰수, 하인들 역시 몰수. 나는 아저씨가 데려갔다.
갈 데가 없었다.
아저씨는 군대를 거론하셨다.
사관이 된 후 어찌어찌 하여 아버지의 무죄가 입증됐어도 사법부는 흐지부지 넘어가 결국... 아버지의 완전한 복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때도 난 상부에 어떤 항의도 하지 않고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폐륜아, 충신, 선택의 여지도, 생각할 필요도, 움직여야 할 나도 없었다.
그래도...
“자넷........”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시답잖은 문장을 읊으며 솔리비젼 만화 주인공 흉내를 내면 등 뒤로 내린 긴 다갈색 머리칼이 다 떨릴 정도로 까르르 웃던...
“.....폰 센코프......”
........내 동생.
무릎이 풀렸다.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꿈이기를...
“몰랐던 건가.. 카젤느 씨는 자네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해 줬지. 그 때문에 우린 자네에게 비교적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었어.”
민츠의 낮은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렸다. 그는 분명히 평소의 무뚝뚝한 눈빛에 약간의 경계와 동정을 잠아 날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다시 만났단.. 말인가. 이제 와서.”
왜 하필 이제 와서 말이다....!!!
“곤란하게스리.. 왜 하필 여기에.......이제 와서.”
누군가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돌아보니 얼굴 가득 검은 사인펜줄이 그어진 코네프가 엄숙한 얼굴로 서 있었다. 웃어야.. 해. 푸하하하!
“크, 우흡, 푸핫! 와하하핫!”
“충격이 크시겠군요. 동생인줄도 모르고 만난 동생이니까요.”
그의 침중한 말에 민츠가 얼빠진 얼굴로 대꾸했.. 우하하!
“그런 게 아닌 것 같군. 자네, 먼저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좀 보고 와.”
“예?”
아하하하!
“어, 얼굴이.. 훗. 자네가 그런 취향인 줄 몰랐는데?"
“무슨 소리에요, 갑자기?”
“거짓말 하지 마! 얼굴에 다 씌어있어!”
나는 꿋꿋하게 일어서서 그의 얼굴을 힘차게 가리켰다.
“‘나는 구엔 킴 호아의 팬입니다’! 라니!”
“....뭐뭐뭐뭐뭐뭐뭐라구요?! 무, 무슨! 으아악!!! 말도 안돼, 누가 그런 전도유망한 청년 하나 매장시켜버리는, 어디에 그런 게 되 있다는 겁니까? 누가 그딴 헛소릴?! 얼굴에 씌어있어? 거울? 밝혀! 누구 짓이야아아!!!”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자아붕괴를 일으키던 그는 해치 밑으로 투신하듯 사라졌다. 나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갑판 위에 엎드려 웃어제꼈다.
“우하하! 니콜라스 코네프! 구엔 킴 호아! 장래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하하하하하!”
“...무서운 놈.”
“캬하하하핫!”
울었다. 고개를 수그리고 터져버릴 듯이 웃으면서 나는 어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울어보았다.
햇빛 따윈 비추지도 않았다. 찌푸린 하늘은 지겹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차가운 금속 갑판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누군가가 내 어깨에 코트를 던져놓고 갔다.
- 민츠.
나는 허리에서 전해지는 뼈마디의 강렬한 외마디 비명을 들으며 일어났다. 밤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후-. 과연, 할 짓이 못 된다. 밤샘도, 한데에 나가 고집부리며 앉아있는 것도.
“젠장 이왕이면 침대까지 옮겨다 주지 그냥 추운 밖에다 옷 하나 던져주고 가면 그만이야?”
코트를 집어 들고 기지개를 폈다. 입에서 하연 김이 일었다. 문득 으슬으슬 떨렸다.
“쿨럭! 커피라도 마시고 싶어.”
나는 해치를 힘겹게 열고 내려갔다. 추운 밖과는 달리 안은 미지근했다. 이놈들은 따슨 데서 잤다 이거지. 복수혈전을...
“일어났냐.”
“따뜻한 차 있으면, 쿨럭! 훌쩍. 좀 줘.”
민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데운 물을 내밀었다. 맹물일지언정 언 손에 닿는 컵의 온기는 기분 좋았다.
그 맹물을 홀짝거리는데 코네프가 눈 비비며 나타났다. 대단하군. 그새 그걸 다 지웠단 말인가.
“아웅~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제 합류장소로 가야.. 하아품.”
아이고 귀여워라. 너무 귀여워서 한방 먹여주고 싶네. 엉뚱한 짓으로 내 폭력성을 자극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내 자리에 앉았다.
“훌쩍. 어디지?”
“임시동경 132, 북위 37에요. 아아, 기분은 대기권밖에 떠 있는 모선단. 하아품.”
“효과음까진 필요 없어. 아무튼 언제쯤 떠야 시간 맞추나?”
갑자기 민츠가 내 팔목을 나꿔채더니 시계를 돌려보았다. 캬악! 이런 걸 빌미로 그 시계를 건들다니이잇! 더럽게 치사한데서 잔머리 굴리는 놈!
“아침 7시 4분. 좋은 때군. 약속시간은 오후 3시야.”
“4시간 거리니까 빨리 가서 적당히 놀죠.. 하아암. 계속 하품 나오네.”
나한텐 저 말이 밤새도록 낙서 지우다가 막 자기 시작했는데 깼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나저나 누가 그랬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이 녀석은?
“그런데 두 분, 정직해집시다. 누가 구엔 씨한테 사랑고백을 한 거죠? 제가 잘 전해 줄게요.”
푸헉!
나는 모두의 오해어린 시선집중 속에서 소중한 컴퓨터 위에 물을 뿜었다. 민츠 자식... 너... 날 밖에 내버려 둔 것도, 물을 준 것도 이런 것까지 계산하고 한 짓이었냐..?! 캬아오오!!!
“생각해 보니까 센코프.”
“왜?”
“너 정말 감정변화가 빠르다.”
“그 편이 인생 살아가는 데엔 속편해.”
망할 자식. 어제 내가 혼란스러워 한 걸 알고 있군.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른한 표정으로 브리지의 메인컴퓨터를 점령하고 체스나 두고 있다는 것도.
그는 나를 흘끗 보더니 잽싸게 또 팔을 잡아당겼다. 아얏! 손목아! 어깻죽지야! 등허리야! 내가 온갖 비명을 속으로 내지르는 동안 그는 시각을 보는 척, 기계를 면밀히 관찰했다. 내 날카로운 눈에는 그 찰나의 순간이 싹 잡혔다. 야아 이 망할 자식아, 백날을 들여다봐라, 시계는 시계다. 하지만.
이이 진짜로 능구렁이 열 마리는 뱃속에 들어앉은 놈.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나는 시계를 넘겨보았다. 3시였다.
“그럼 코네프 깨울까?”
“녀석들이 올 때까진 자게 내버려 둬. 네 덕에 한잠도 못 잤잖아?”
코네프는 여기까지 운전부터 한 후 쓰러져 자는 중이다. 그는 내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 아무런 의사표현도 하지 않았다. 졸려서겠지.
그나저나 더는 지체할 수가 없군. 나, 여기 더 있다간 정말.. 하지만...
<< 안녕들 하신가! 구엔 님이시다! 핫핫핫! >>
<<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이봐, 좀 비켜. >>
<< 정말 오랜만이에요, 형들! >>
쓰읍. 구엔, 하이네센, 카일의 제 1호.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통신스크린을 가득 채운 구엔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다른 친구들은 그자의 등 뒤에서 비키라고 정중하게 요구중이다. 쯧.
“오랜만이라뇨, 내려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프레이저 네는?”
<< 곧 올 겁니다. 아, 오네요. >>
나와 민츠는 동시에 육시창으로 고개를 들렸다. 오우 제에기랄. 3호 납시었나? 이거, 붉은 카펫이라도 깔아 드려야는 거 아냐? 황송하게도 먼지가 엄청 이는군!
<< 안녕들 하시오, 프레이저입니다. >>
<< 안녕하세요. >>
민츠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고 난 무시했다.
“자아, 여기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했으니 빨리 할 일 합시다.”
<< 땅이 춤바람나서 들썩거리는 것만 뺀다면 전반적인 조건은 제법 좋은 행성이야. 구미 당기는데. >>
1호의 통신모니터를 장악한 구엔이 또 헛소릴 했다. 하이네센은 여기 와서까지 머리를 긁적였다. 구엔이 그것에 대해 불만을 토하려는 듯 돌아서는 순간 그는 태클을 피하는 플라잉 볼 프로보다 아주 약간 어설픈 폼으로 모니터 앞에 달라붙었다. 하하. 구엔 녀석이 모니터를 독점하려드니 지휘가 참 힘드시겠어. 이해해.
<< 아무튼 2차 조사한 것까지 모선단에 송신한 후 여길 중심으로 다시 흩어지는 거 기억하시죠? 이틀. 여기 중심으로 반경 100Km 내의 지역을 표본조사지역으로 정했습니다. >>
<< 방향은 알아서 가야겠죠? 나는 동으로 갑니다. 그럼. >>
삑. 프레이저는 멋대로 전해 버리고 사라졌다. 하이네센은 잠시 얼어 있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 아, 뭐.. 우린 남과 서로 가죠. 어, 왜 이래. 그래서 불만이야? 이봐, 머리가 항상 앞장서야 하는 거라고! 아, 죄송합니다. 그럼 북쪽 부탁드립니다. >>
삑. 구엔과 치고받고 싸우면서 하이네센도 끊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민츠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가 3차.. 모선단과는 정황하게 행성 반대편이군. 중계위성 따윈 애초에 없으니 한동안 통신이 안 되겠어.”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네 군대 지정한 곳을 조사하는 것..이지, 아마? 자저,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할수록 빨리 놀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난 지지부진 늘여버리는 바람에 여지껏 못 놀고 있어.
민츠는 승무원들과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코네프 좀 깨워 줘.”
“그러지..”
“으악! 벌써 모두 모였었단 말인가요?!”
에? 우린 동시에 문을 돌아보았다. 억울함인지 뭔지 모를 복잡한 표정에 머리가 다 뻗친 코네프가 주먹을 불끈 쥐고 붕붕 휘두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구엔 씨한테 꼭 전해야 했는데! 왜 안 깨웠죠? 일부러 그런 거죠, 센코프 씨? 치사하군요!”
민츠.. 또 웃고 있냐.. 너의 두뇌는 왜 남을 골탕 먹이는 방향으로만 회전하지..?
나는 아까 깨우지 말자고 했던 녀석을 외면해 버렸다. 다신 네 말 안 듣는다, 이 능구렁이 너구리 영감아.
“그런데..”
나는 창문 너머 잿빛 하늘을 쳐다보았다.
“행성 반대편이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