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7/30
뭔가 악몽을 꾼 것 같다.
깨 보니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허리를 튕기며 일어났다.
- 잠버릇 고쳐야지, 아무데서나 자버린다는 게 말이..욱, 허, 허리야!
황당하게도 별구경 하다가 스르르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자그마치 네 시간을 한데서.... 쿨럭.
그것도 그렇지만 오딘이었다면 아침 햇살이 깨워줬을텐데 우주다 보니 시간개념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 살며시 눈 감을 때 따스한 아침 햇살 그리워지는...
아아, 어쨌거나 왜 깼냐면.
"...잘 생각해 보게. 자네는 똑똑한 청년이니까 뭐가 더 모두에게 좋은 건지 알 수 있을 걸세."
..누구 목소리더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굉장히 톤을 낮춘 걸 보면 여기서 사람 없는 줄 알고 비밀 얘기를 했다는 건데. 하긴 입구쪽에서 볼 땐 잘 보이지 않는 육시창 바로 앞바닥에 뒤척이지도 않고 누워 있었으니.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체구조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 예리한 청각이겠지.
"그, 그래도...........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좋아. 자네의 현명한 판단 기다리겠네."
나는 일부러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놀랐는지 대화는 뚝 끊기고 정적만이 남았다. 불행히도 난 연기를 아주 잘 해. 저 녀석들이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눈치채지 못한 척 하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니지.
"후움-. 아침인지 저녁인지 대체가 구별이 안 가니 원. 어후, 허리야."
아주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편다. 이번엔 정말로 하품이 나왔다. 하암-.
자, 천천히 허리를 비틀며 체조 좀 하고, 추우니까 몸 한 번 떨어준 다음, 세면실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입구쪽에 낌새가 둘 있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고 지나가 주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뭐 손해볼 것도 없고. 그나저나 숨는답시고 숨어도 사람 있는 티를 내는 건 평범한 승객중 하나란 건가? 관제실의 누구누구는 바로 뒤에 있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위험하지.
"팔자 늘어졌군, 귀족 씨. 지금이 몇 시인데 브리지에 늘어져 있는 거지?"
..호랑이는 제말하면 온다.
민츠는 브리지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왔다. 입구에서 시선이 잠깐 다른 데서 멈칫하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이런, 골치 아픈데. 할 수 없지, 내가 희생하는 수밖에. 코믹연기는 정말이지 싫은데....에잇!
"어이, 민츠. 밤새 한숨도 못 잤냐? 눈밑이 거뭇거뭇하군. 오호라! 이젠 너의 그녀를 위해 화장도 하는군! 그런데 그 눈에 아이섀도는 절대 어울리지 않다는...케엑!"
헛소리에 대한, 아니 정확히 말해 연기를 위한 거짓말의 대가는 목조르기였다. 힘만 무식하게 센 놈. 쳇.
이렇게 내가 고문당하는 사이 두 그림자가 브리지 입구 밖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을 스쳐보았지만 순간 팔까지 꺾으려고 몸을 돌리던 민츠가 가로막는 바람에 정확히는 못 보았다. 이것 봐! 난 저 녀석들이 누군지 아직 확인 못했단 말이야!
어쨌거나 아픈 목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 난 민츠의 손에서 빠져 나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배고프다, 식당 가자. 남의 수명 그만 깎고."
"귀족 하나 수명 깎는 게 뭐 잘못됐다고."
이거, 맨몸으로 우주의 바다에 빠지고 싶은가 보군? 난 간신히 폭력 충동을 억누르며 목적지를 바꿔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식당까지의 복도는 조금 길다. 그 한 가운데쯤에서 멈춰 섰다. 당연히 그 녀석도 멈췄다.
나는 약간 입매를 올리고 웃었다. 나는 웃는다고 웃는 건데 남들은 비웃는 것 같다고 상당히 기분 나빠하는 그 웃음이었다.
"굳게 잠긴 문 대신 숨바꼭질하기 좋은 입구밖에 장소가 없다는 건 비밀이 필요한 자들한텐 좀 곤란한 문제겠지?"
"좀 정도가 아니지. 그런데 왜."
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팔짱을 끼었다. 이젠 이게 자유롭게 된다.
"아침부터 거기서 누군가가 재잘거리더군. 중년 아저씨와 꼬마의 목소리였다.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서 끼어드는 건 오히려 어색할 것 같아 그만 뒀지."
"카일과 프레이저였다. 안 그래도 요즘 카일 녀석, 프레이저랑 자주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뭐가 오고 갔지?"
민츠는 정색했다. 보통 가볍게 받아넘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상하게 비아냥 거리는 표정이니까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서 말이지.
"아아, 별 거 아냐. 나이 먹은 아저씨가 자라나는 새싹에게 설교하더군."
"...그게 어떻게 하면 음모론으로 발전하는 거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프레이저가 끼어 있으니까 저절로 색안경 쓰게 되더군. 흥."
민츠는 한순간 힘 빠지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굳건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아무튼 아침 해결하거든 하이네센한테 가 봐."
"왜?"
"난 하이네센이 아니니까 묻지 마."
그는 내 등을 떠밀고 총총히 사라졌다. 언젠가 한 번 저 녀석 묶어놓고 패 줘야지. 이 몸을 잘도 학대하셨겠다.
관제실에 하이네센은 없었다. 대신 코네프와 카젤느가 있었다.
"여어, 안녕하세요."
"음. 코네프, 하이네센 씨 못 봤냐? 민츠가 가보라던데."
"하이네센 씨는 조금 있으면 올걸요. 응? 통신 들어왔다."
나는 그의 어깨너머로 선단중간에서 뭔가 하고 있는 래클란 씨를 보았다. 난 이 할아버지한텐 예의 차리지. 꾸벅.
<< 니콜라스? 자네 여기로 좀 와보겠나? >>
"무슨 일이에요?"
<< 이 배의 관성항법장치가 좀 맛이 간 것 같은데 근처 배에도 기술자가 없어. >>
"예엣, 잠깐만 기다리십쇼."
삑. 화면이 사라지자마자 코네프는 항로를 자동으로 맞추고 재킷을 크게 돌려 팔을 끼우며 관제실 밖으로 나갔다.
"하이네센 씨 오면 전 44호선 갔다고 전해 주세요!"
"O.K."
나는 수락하고 빈 의자를 하나 찾아다가 앉았다. 이 넓디넓은 관제실에는 나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카젤느 씨 단 둘이 있다. 죄다 어디 갔지?
기체가 삐끄덕거리는 소리와 구식 엔진의 잡음이 가르릉가르릉 들려온다.
가래 걸린 소리 같기도 하고 고양이가 목을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초기엔 저 소리가 꽤나 불안했었지만 이젠 일상의 배경음일 뿐. 역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고 마는 생물인 것이다.
"그런데 카젤느 씨는 애인 있어요?"
내 두서없는 장난 반의 질문에 그녀는 등을 보인 채 대답했다.
"남의 사생활 캐는 취미 있었나요."
"아아, 제가 한 번 도전해 볼까 해서. 농담이고, 카젤느 씨. 당신의 차가운 이성에 반한 차가운 열정의 사내가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시죠?"
"필요없는 말은 삼가해 주시죠?"
"에...그럼 필요 있는 질문.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지요?"
"..확실한 건 죽을 장소가 제국보단 나을 거란 거죠."
뭐..?
"당신은, 그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전제로 여기에 끼어든 겁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다 죽지 않나요? 그게 어디냐의 차이 뿐이지."
무미건조하다.
섬뜩하리만치 무미건조한 톤으로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처음엔 어이없음을, 나중엔 두려움을 느꼈다.
후우...
이 여자, 이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 비상식적이다. 특히 나를 대하는 데 있어서! 왜지? 힘들게 산 게 당신 뿐은 아닐 거 아냐? 이건, 이건 단순히 제국에 대한 증오 같은 게 아니야!
나는 주저 없이 일어나 그녀의 의자 뒤로 다가갔다. 한 발자국 남기고 멈춰 선다. 그 때서야 카젤느는 고개를 돌려 흘끗 쳐다보았다.
"자넷 카젤느 씨. 꽤나 힘들게 살아왔다고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문을 닫고 사는 줄은 몰랐습니다."
"필요 없는 말은 삼가해 달라고 안 했던가요?"
제길, 호흡을 가다듬고, 진정하자, 이자크. 네 앞에 있는 사람은 그냥 여자야.
"필요 없는 말? 필요 없는 말? 당신은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는 게 두렵습니까? 아주 일상적인 대화나 농담조차도 당신 앞에선 심각해지는군요. 아하, 그거로군. 우리가 죽을 고비를 넘나드는 순간에도 항상, 당신만은 될 대로 되란 식의 배짱을 부렸었죠! 그거 였어, 당신이 겉으론 강한 척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도 뭘 어쩔 줄 모르니까 드러내기 싫어서 아예 입을 다무는 것 아닌가? 당신도 분명 뭔가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야. 하지만 항상 알 게 뭐냐는 식으로, 결국은 달관해 버리지. 당신 자신이 당신을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당신에게 따뜻한 다른 사람들한테도 거리를 두는 것이고. 그대로 가면 당신은 그 뭐냐, 인간의 존엄성조차도 잃어버려. 이 배에 탄 사람들 중 1/3정도는 단지 노예노동이 싫어서 따라온 벌레들이란 걸 알고 있어. 당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어. 나도 그런 벌레의 부류에 속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하이네센의 이상을 따르는,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인간일 줄 알았어! 존엄성? 자유, 평등, 박애? 다 필요 없어, 자기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공염불이야!"
제길, 제길, 내가 뭐라고 지껄였을까? 정말 정리가 안 되는군. 하아, 하아.
젠장!
카젤느는 씩씩거리는 나를 뭐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지요?"
확신하는데, 당신은 청각신경 내지 연합 뉴런 어딘가가 고장났어. 어휴..
나는 한 풀 꺾인 소리로 대답했다.
"경고하는데, 우주엔 정신과 의사 따위 없소. 라는 거요. 젠장."
"40만, 아니 39만명 중에 의사가 없다는 보장 또한 없습니다."
아아...골 아프다. 너무 많은 말을 단시간에 쏟아내 뇌가 산소부족을 호소하는 통에, 이 여자는 날 아예 말려 죽일 각오로 쳐다보고. 하지만 당신, 계산미스야. 받아치기에 자신 있나 본데, 난 어렸을 때 그러고 놀았어!
이야기가 상당히 빗나간 것도 같고 정신 사납기도 해서, 처음에 꺼내려던 말을 하기로 했다.
"당신을 좋아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 멍청이는 당신 때문에 완전히 맛이 가서 나한테 털어놓는다는 중대한 실수까지 범했죠. 절대온도 이하인 당신한테 어쩌다 눈이 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떻게든 당신을 해동시켜야 겠다는 겁니다. 카젤느는 본 성이 아니겠지요?"
처음으로 그 여자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눈을 내리깔았다.
"양녀입니다. 그래서요?"
"당신의 과거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나 역시.. 한 때는 그랬으니까."
기계의 잡음만이 확성 되어 귀청을 때렸다. 갑자기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사람.. 연기실력만 늘었어.."
"...에?"
"아닙니다. 아무 것도.."
어이어이, 이건 진짜라고! 아무렴 부잣집은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고, 귀족 이름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친족 영지에서 신세질 수도 있었지만 왜 내가 다들 기피하는 군대를 갔겠어요!
그녀는 브리지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곳 보단 밝은 편인 조명 때문에 흐린 별빛은 보이지 않으리라. 빛이 빛을 가린다라, 허참.
"틀린 말은 없습니다. 양부모님은 친절했지만, 난 그들도 믿을 수 없었죠.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당신은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았겠지만 마지막으로 가식이라도 낙천적인 성격은 남아 있군요..
정확히 해 두죠. 나와 이자크 씨는 다를 것 없습니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나는 문을 닫음으로 나를 지키려 하지만 당신은 야유 받고 냉소 받으면서도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차이겠지요.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도, 당신은 얼마든지 총을 겨눌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기계음을 배경으로, 무미건조하게, 느릿느릿 말하는 철옹성.
그리고 거슬리는 마지막 말. 시간이란 사슬로 꽁꽁 묶어 놓고 망각이란 자물쇠를 채워 놨지만 자극이라는 열쇠는 가볍게, 묻어 두려 한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언제라도.
그런..
아니, 잠깐만. 당신 그거..?
내가 뭔가 걸리는 게 있어 물으려는 순간 통신이 들어왔다. 우리는 동시에 눈을 돌렸다.
"아, 하이네센 씨."
<< 카젤느! 어..센코프 씨도 계셨군요. 잘 됐어요. 태양계입니다. 태양계라구요! >>
개인사는 나중에 마저 토의하고, 우선은 현실적인 문제부터.
나는 씨익 웃었다.
"이번엔 체스 안 했습니까?"
<< ...크악! 아..아무튼 내려가서 조사나 합시다. 새벽 5시에 발견했는데 제국과의 거리, 주변의 천체, 행성의 상태 같은 걸 조사하느라 시간 다 갔거든요. 민회에 통보할 겁니다. >>
킥킥, 또 체스 하다 걸렸구만? 하지만 나야 상관 전무하니 제 3자로서 마구 웃어주마. 핫핫핫!
좋아 좋아, 잘하면 곧 끝낼 수도 있겠어.
"그렇지만 아직 제국과 가까운 것 같은데요."
카젤느의 냉정한 분석.
<< 맞아요. 여긴 잠깐 머무는 곳입니다. 목표로 정한 행성 바깥엔 소행성이 지천이라서 영 불편한데요. 제플로 다 터뜨리고 갈까봐요. 웃지 마세요, 센코프 씨. 제플 귀한 거 압니다! 그리고 뭐, 언젠가는 지향성 제플이 나오지 말란 법 없쟎습니까? 어쨌거나 사람들 반응을 봐선 저기에 눌러 살자고 할 사람도 나올 거 같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그냥 알리지 않고 지나치는 게 최선이겠지만 일단은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
뭐어. 그럴거야. 자동차를 몰 땐 두 시간에 한 번 휴게소에 들러야는 법이지.
인간은, 비록 지금은 우주를 유영하고 있더라도 본래 땅 위를 걷게 태어났다.
우주에 적응하려면 요즘에도 께나 고생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우주에서 태어나 산다 해도 결국은 땅을 본뜬 인공의 대지를 걷지 않던가?
잠깐 숨 좀 돌리자는 건가. 아, 난 인간들이 그 태양계에 완전히 정착하는 걸로 착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런 생각 내가 한다는 걸 알면 로엔그람 영감, 땅을 치며 후회할 텐데, 아하핫!
"예에, 당장 팀원이 되어 드리지요. 어디로 갈까요?"
나는 하이네센과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더 이야기했다. 대화가 끝나고, 하이네센이 통신 모니터에서 사라지자 나는 기지개를 펴며 돌아섰다. 몇 걸음 걸어나가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전체를 관조하는 자에 불과해요."
....나는 입가를 예각으로 올리며 문을 나섰다.
덜컹.
"후아- 이번엔 그런 대로 훌륭한 착륙이었습니다."
"사방으로 구르지 않기 위해 벨트로 포박 당한 상태였잖아."
민츠는 가볍게 말했지만 난 일껏 잊으려 한 고통이 다시 떠올라 그를 쓰읍 노려보았다. 멀미로 뒤집어 지려는 속을 진정시키며 대기성분 세부분석.
"질소 78%, 산소 17%, 나머진 아르곤 이산화탄소 수증기 기타 등등."
"이산화탄소가 꽤 높은 편인데? 장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행성이지만 왜 생물체는 하나도 없나. 박테리아나 있을까.."
"헬맷 벗고 말합시다."
기겁하며 돌아보니 이 겁 없는 코네프 녀석이 이미 헬맷을 벗고 있었다. 산소농도가 너무 희박한 이 땅에서, 이이 겁 없는 녀석이. 내 표정을 읽고 그는 말했다.
"고산지대 같아서 숨쉬긴 좀 그렇겠습니다만 죽을 정도는 아닌 데다 실내니까 벗어요. 안 불편해요?"
"목숨을 버리고 자유를 찾겠다는 폼이 누구를 닮았군."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그런데 갑자기, 민츠가 정색을 했다.
"그런데말야, 왜 하필 비가 내리는 곳에 착륙한 거지?"
쏴아아아아.
코네프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오퍼레이터가 불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툭툭 쳤다.
"여긴 잠시 후면 구름이 사라집니다. 소나기지요. 지각변동이 좀 심해서 내릴 만한 장소를 찾기 어려운 판국에 기껏 괜찮은 데 찾았더니 비가 내리더라 인 거지만."
"바다에 빠진 것 보단 나은 것이겠지. 그런데 저 비, 위험하지 않을까?"
우리는 일제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뿌옇게 안개가 낀 건지, 시야가 흐릿하다. 거무스름한 저 그림자는 산 쯤 될까?
"지각변동이 심하다라. 산성비일 공산도 큰데요."
"우주선이 무사할래나."
후... 걱정되네. 지각변동 심한 곳은 제국재상을 시킨다 해도 안 살아. 난 안정된 장년기 행성에서 살 테다.
<< 거긴 비 맞으며 탐사해야 하나? 여긴 쨍쨍한데. >>
치직... 여기서 몇백 Km 떨어진 곳에 내린 구엔이 통신으로 물어 왔다.
민회는 행성탐사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그래서 지금 우린 대기권에 떠 있는 모선단을 기준으로 경위도를 나눈 다음 몇 군데 지정한 위치를 세부적으로 조사하며 행성 한 바퀴를 돌 계획이다. 범위가 넓어지니까 당연히 참여하는 사람도 늘어났지만, 음.
그나저나, 요즘 들어 저녀석 얼굴 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는 건 기쁜 일이지만 오랜만에 보니 확실히 반갑다, 쳇. 음? 모순되는 문장인가? 아니다, 역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핫핫핫. ..더 문장이 이상해지는걸.
내가 허둥대는 사이 민츠는 미간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여기 상황은 그래. 화산도 있고 하니까 물은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독수일 확률이 높아."
<< 독수? 아, 산성. >>
"그래. 우주선이 좀 걱정되지만 비에 섞인 양은 그래도.. 음, 옛날옛적 지구 시절의 산성비 보단 낮은 게 분명한 수치다. 이 정도는 버텨 주겠지.
3호는 어떻게 됐지? 코네프."
코네프는 머리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육시창을 넘겨다보았다.
"우리와 1호 딱 사이의 강에 착수한 것 같아요. 프레이저 자식, 냉수 마시고 속 좀 차리라고 하죠."
하이네센과 구엔, 카일이 탄 1호, 나와 민츠와 코네프가 탄 2호, 여기 까진 원 멤버 들이다만 어디서 3호기가 날아왔느냐.
저 잘나신 민회의 뺀질이 프레이저가 우긴 거다. 하이네센한테 일을 전부 맡기는 건 불안하니까 자기도 가겠다는 거다. 그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대게 저런 자들은 위험한 일엔 몸을 도사리고 숨는 법이다. 그런데 정면으로 튀어나오다니, 놀라운 녀석. 대체 무슨 속셈일까?
<< 그 자한테 이상이 생기면 하이네센의 지위가 흔들려. 좋든 싫든 우리는 녀석을 보호해야 해. 반대로 우리가 일 생기는 건 그냥 훌륭한 멤버를 잃었습니다 유감입니다 로 끝날 테니 주의해야지. 젠장. >>
프레이저 녀석, 어디서 자기 닮은 부하만 끌어 모아다 탄 건지, 저 자한테 고의든 우연이든 일이 생기는 날엔 대기권 밖에서 대기중인 저놈의 부하들이 사고칠 거란 소리다. 노리고 왔군.
네 녀석, 일 끝나면 내가 처리하는 수가 있어.
"아무튼 비가 그치거든 나가고, 그 동안 한 숨 붙이자. 사라져, 구엔 킴 호아."
<< 훠어이, 버나드 민츠, 물럿거라! 오만잡귀 호랑말코의 민츠는 물럿거라! 모레 상판 볼 때까지 꿈에도 나타나지 마! >>
민츠는 의외로 냉소만 지을 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종석을 돌려서 간이 침대를 만들고는 누웠다. 코네프는 하품을 하더니 몇몇 오퍼레이터들과 대화한 다음 아예 브리지를 나가버렸다. 나는 다리를 꼬고 오랜만에 3차원 체스를 시작했다.
젠장, 장난 아니게 센 컴이군. 상대가 인간이면 심리전이라도 기대해 보겠는데 컴을 상대로 뭘 해? 수학적 계산, 수학적 계산, 수학적 계산, 어이구 얼어죽을.
"랄 랄랄 랄랄라 싱 어 해피송~ 나이트 보내고 루크 집어먹고~ 폰이 오면 비숍으로 지원~ 재미없어."
삑.
뭐가 이렇게 답답한 거지? 쳇.
나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모르는 빗소리를 멍하니 들었다. 쏴아아아아.
빗방울 하나 하나가 창을 두드린다. 타탁, 탁, 탁탁.
선체를 따라 주욱 미끄러지면서 어느 순간 중심을 잃고 땅 위로 땅 위로.
통. 통-.
갑자기 사방이 새하얗게 번뜩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천둥이 쳤다. 찌지지직, 콰콰쾅!!!
시인은 비단폭 찢는 소리랬다. 더러는 개벽하는 소리라고 했다.
나에게는 총성으로 들렸다.
- ...자, 센코프 군. 어쩔 거지? 감히 루돌프 대제를 모욕한 네 아비다.
욕한 정도가 아니라 저주하고, 매도하고, 공화주의라는 썩어빠진 사회의 독을 암암리에 전파한 자야. 그것도 대제의 은혜를 입은 귀족의 몸으로서.
- 폰 센코프 남작의 죄는 피붙이란 피붙이는 모두 사형함으로써 씻겨진다.
비록 증거가 불충분하지만 그냥 넘길 순 없다. 본보기로..
- 이자크, 너희 가족이 살려면 아버지와 의절하고 공개처형 하면 돼. 그런데 네 손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의절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인정되고 네 폐하에 대한 충성심도 확인되는 거지. 아무튼 조심해라.
- 죽어 버려! 우주에서 영원히 헤매다 찢겨 죽어 버려!
- 그래? 그럼 갈 데가 없겠구나... 아, 군대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니?
그럼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데다 출세가 빠르지.
- 센코프 남작의 무죄가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작위는 돌려 받지 못할 것입니다. 제국기사부터 다시 시작하셔야죠...
..중위님? 예? 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