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에 다시 올린 스리슬쩍 수정본입니다.
-------------------------------------------------------------------------
1.
황혼이 내리면서 어슷해진 강가에 슬금슬금 안개가 피어올랐다.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우던 아이들은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며 떠들어댔다. 요즘에는 고기가 통 잡히지를 않는데, 서울에서 온 검은 옷의 아저씨들 때문이라는 투덜거림이 대부분이었다. 그 검은 옷의 남자들이 좋은 낚시자리를 빼앗아버려 아이들은 마을에서 먼 하류 쪽으로 가야만 했는데, 그나마도 남자들이 땅을 파면서 물을 흐리는 등 소란을 피우니 좋을 턱이 없었다.
손바닥만한 물고기를 한두 마리씩 꿰어 들고 강둑을 걷던 아이들은 얼마 안 가 낯선 이가 그들의 뒤를 따르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굵은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목을 바짝 경직시킨 채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꼬마들은 형들의 등을 부지런히 쫓아가면서도 신기한 듯 뒤를 흘끔거렸다.
낯선 이는 아이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차림에 생김이 다른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겨우 무릎길이로 맞춘 망토 같은 것을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눈코입귀는 각각 수를 맞춰 제자리에 있지만 머리색이 다른 데다 얼굴의 골격도 어딘가 달랐다. 남자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그를 흘끔거려도 여의치 않는 듯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성큼성큼 걸었다.
이윽고 마을이 보이자 아이들은 갑자기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제각각 나무나 울타리 뒤로 쪼르르 달려가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아이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남자는 마을에 들어섰다.
이스갈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마을의 풍경이었다. 잔돌과 흙으로 지은 집들은 어딘가 초라했고 늑골이 드러나도록 마른 개는 낯선 이에게 컹컹 짖어댔다. 일찍 일을 마치고 들에서 돌아오던 주민들은 남자를 보고 반기는 것은 아닌 표정으로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남자는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며 턱을 긁적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나가던 마을 남자를 불렀다.
“저기, 말씀 여쭙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나그네가 하룻밤 쉴 만한 자리를 얻으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마을 남자는 오랫동안 여행한 듯 꾀죄죄한 차림의 나그네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바람을 휙 일으키며 가버렸다. 나그네는 한숨을 푹 쉬고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를 물어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얼마 걷지 않아 그는 마을 한복판이라 할 만한 곳에 다다랐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피어오를 만큼 황량하리만치 텅 빈 그곳에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맥주잔이 그려진 낡은 간판이 삐걱거리는 건물을 발견했다. 이런 조그맣고 별 볼일 없는 마을에 여관이 따로 있을 리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주점으로 걸어갔다.
이른 시각부터 주점에 몰려있던 무리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한 곳을 쳐다보았다. 막 먼지 낀 램프에 불을 붙이던 주점 주인은 본 적 없는 남자가 들어오자 우선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돈이 있을지에 대해 짧은 궁리를 끝낸 후 주인은 바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모자를 벗었다. 다듬지 않아 덥수룩하게 자란 밀짚색 머리카락이 선량해 뵈는 눈을 가렸다.
“주인장.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까요.”
대답하려던 주인은 문득 주당들을 바라보았다. 주당들은 완고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주인은 주당들이 지은 것과 같은 표정을 떠올렸다.
“들개 같은 너희 족속에게 내줄 방은 없어.”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 말씀한번 지나치십니다, 들개라뇨. 어찌 됐든 방값을 지불할 정도의 돈은 있으니‥.”
“충고하지.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마을을 나가.”
주인은 무슨 말을 들어도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듯 턱을 쳐들었다. 어느새 주당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술병을 든 채 주위를 둘러쌌다. 남자는 고개를 까딱인 후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주점을 나와 버렸다.
이미 해가 산등성이 밑으로 가라앉아 사방은 캄캄했다. 마을 밖 강변 쪽에서 여우가 우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분위기로 보건대 이 마을에서는 그에게 헛간이나마 내어줄 집을 찾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아아, 나그네에게는 천장도 과분하지. 밤이슬을 맞는 것도 생각보다 나쁜 게 아니야.”
심정과는 상반되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마을 사람 몇이 쳐다보는 가운데 마을 입구를 나선 그는 문득 강변 쪽에서 검은 옷의 남자들이 예닐곱 명 몰려오는 걸 발견했다. 그들은 등마다 뭔가 장비를 짊어지고 있었으며 강에 들어가기라도 한 건지 떼는 걸음마다 철벅거렸다. 나그네는 그들이 지나가도록 길 한켠으로 비켜섰다. 남자들은 그를 보지도 못한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지나갔다.
그 때 뒤편에서 잔뜩 찌푸린 낯으로 걷던 남자가 나그네를 보고 멈춰 섰다. 앞서가던 남자들은 그가 멈추자 일제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행동 통일 잘 된다고 속으로 감탄하던 나그네는 뒤편에 있던 남자가 모자를 벗고 다가오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나그네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띠었다.
“이런, 자네 브네로 군 아닌가? 아렌체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는 웬일인가?”
나그네는 남자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갑자기 이마를 딱 쳤다.
“아! 레페리 씨! 크리스토퍼 레페리 씨 맞지요?”
“그 때 그 일 이후 3년만이지. 오랜만일세. 그나저나 이제 밤인데 어디 가는 건가? 근처에는 마을이 없네.”
“아, 아하하. 그게, 이 마을은 부랑자스러운 나그네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라서요.”
“자네가 부에노소 인이라고 내쫓던가? 재미있군. 이들의 무지를 탓할 것만은 아니네만.”
레페리는 브네로의 어깨를 툭툭 쳐준 후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자네들은 먼저 들어가게. 나는 옛 친구를 만났으니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군.”
남자들은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마을 저편으로 걸어갔다. 레페리는 브네로를 억지로 잡아끌고 마을에 들어갔다. 브네로는 레페리가 제복을 입은 채 수영이라도 한 것처럼 젖어있는 걸 깨달았다.
“자네, 운이 좋았어. 지금 이 근처는 분위기가 최악이라서 노숙 따윈 극구 말리고 싶네. 지금 내가 신세지는 곳이라면 자네도 편히 묵을 수 있을 것이야.”
브네로는 속으로는 얼싸 좋다를 외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집마다 덧창 틈으로 그가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눈이 거슬렸다.
“이거, 밤이슬 맞는 신세를 피하게 된다면야 저는 기쁩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때의 갚음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히 가져. 일단 이 마을에서는 내가 지금 가장 높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지. 자세한 건 이야기가 길어지니 들어가서 하세. 에취!”
강에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이 마을의 먼지를 쓸어 올렸다. 레페리는 코를 훌쩍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브네로는 별 수 없다는 듯 망토를 벗어 그에게 둘러주었다.
“이스갈 남부의 촌락들은 이민족에게 대단히 배타적이라 들었는데, 오늘 직접 겪어보니 그 말 그대로더군요. 하지만 분위기 최악이란 말씀은 그 외의 것도 있다는 뜻이겠죠?”
레페리는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망토깃을 여몄다.
“나는 공무원이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출장 가서 살인이든 유괴든 처리해야 하는 말단 재판관이지. 그래, 자네가 자네 민족의 에페오이듯이 나는 우리 민족의 재판관일세.”
레페리는 가볍게 브네로를 흘겨보았다.
“그런 친구가 마음대로 세상 유람을 다녀도 뭐라 하지 않으니 역시 부에노소 인들은 너무 느긋하다고.”
“저기, 우리는 당신네 민족 같은 관료제가 없거든요. 민족성의 차이 같은 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논할 수 있으니 이야기나 들어보죠. 일단 에페오와 이스갈의 재판관이 하는 일은 비슷해도 성질은 전혀 다르다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당신이 파견 나왔다면 그만한 사건이 있다는 이야기겠죠?”
레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의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마을의 중심을 지나 약간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 언덕 끝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고풍스러운 주택이 서있었다. 가난한 마을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건물은 뽐내듯이 회칠한 벽을 푸르스름한 달빛에 빛냈다.
“흠, 오늘은 알트루겐만 뜨는 날인가? 그럼 그 사건은 대략 반달 전에 있었군. 자네들 기준으로는 한 달이지? 이 마을 밖 강변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계속 하지. 밤바람이 추운걸.”
레페리는 두텁게 잠긴 철문 한편에 난 조그만 쪽문의 문고리를 탕탕 두드렸다. 레페리의 얼굴을 확인한 하인이 얼른 문을 열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물러났다. 레페리는 그쪽을 본체도 안 하고 곧장 본채 쪽으로 걸어갔다. 부유한 축에 드는 이스갈 인의 집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던 브네로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은 회랑과 기둥으로 둘러싸인 기본틀에 하늘이 열린 정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중앙의 연못 주변에는 곳곳에 이국적인 조각상과 화초가 놓여있었다. 레페리는 어느새 나타나 램프를 들고 앞장선 노예가 듣지 못하도록 조그맣게 말했다.
“곧 소개하겠지만 이 집은 이 집 주인의 별장이야. 군대에서 무슨 공을 세우고 포상휴가차 내려와 있지. 이스갈레아에 본가가 있다는데 생각보다는 재력이 있는 모양이더군. 이 아래의 소작농들을 보면 그런 생각은 안 드는데 말이야.”
브네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노예의 안내를 받아 본채 안으로 들어갔다.
초를 사용해 환히 밝힌 방에서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가 걸어왔다. 전체적으로 군인의 모습이 연상되는 탄탄한 체구였다. 남자는 먼저 레페리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오, 돌아오셨습니까. 오늘의 수사는 진전이 있었습니까?”
“그저 그렇군요. 소령께서 지원해 주시는데도 성과가 없으니 부끄럽습니다. 아, 허슬 소령. 이쪽은 제 오랜 벗인 브네로 얀테 발더스라 합니다. 브네로 군, 이쪽은 리처드 허슬 소령이네.”
브네로는 모자를 벗고 소령에게 이스갈 식으로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소령은 브네로를 이채를 띤 눈으로 훑어본 후 간단하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레페리 님의 벗은 제 벗이기도 합니다. 환영합니다. 이분께서는 오늘 묵을 곳이 있으신지요?”
“그것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데려왔습니다. 이 젊은이는 현명해서 수사에도 제법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거 잘 됐군요. 그렇다면 기꺼이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식솔들은 레페리 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하하.”
“그전에 저는 옷을 갈아입어야겠습니다. 강바닥을 뒤지느라 온통 젖고 말았군요.”
소령은 호인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페리는 모자와 브네로의 망토를 노예에게 맡기고 그의 방으로 갔다. 이스갈 인들은 공식적인 일을 본채에서 치르기 때문에 손님 접대용 식당은 응접실과 함께 본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먼지 묻은 외출복 차림으로 드나들기엔 곤란한 것이다. 그를 본받아 브네로도 얼른 먼지가 쌓인 모자를 노예에게 건네주었다. 소령은 브네로에게도 그런 자리에서 입을 만한 적당한 옷을 내주도록 눈치 좋게 명령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이스갈 식으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소령의 뒤를 따라갔다. 식당에 먼저 와 앉아있던 두 여인이 손님들이 들어오자 일어섰다. 소령은 레페리를 상석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았다. 브네로는 레페리에 가깝고 소령의 가족들과는 떨어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손님들이 앉고 나서야 여인들은 자리에 앉았다.
“발더스 님, 소개하지요. 제 식솔들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마리아, 이쪽은 딸인 제인입니다.”
인사를 나눈 후 음식이 들어왔다. 소령은 주인의 예를 지켜 직접 음식을 덜어주었다. 브네로는 소령이 가족보다 레페리와 브네로에게 먼저 준 것은 이해했지만, 아내보다 딸에게 먼저 준 것에선 고개를 갸웃했다. 이스갈의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제와 연장자 우대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장남이었다면 모를까, 딸이 아내보다 먼저 대접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 듯했기에 브네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에는 자연스럽다는 듯 이야기가 곁들여졌다.
“레페리 님, 발더스 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쌓으셨습니까?”
“언젠가 아렌체에 간 일이 있습니다. 젊은 혈기에 강 동편의 초원을 한번 도보로 가로질러보고 싶었죠. 그 무모한 행동의 결과로 중간에 물자가 다 떨어져버렸는데, 바로 그 때 허허벌판 한가운데에서 멧사자를 만난 겁니다. 이제 죽었구나 싶을 찰나 마침 근처에 있던 저 친구가 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부에노소 인들은 타고난 목동인지라 짧은 칼을 잘 다루지요. 하지만 그들도 아무나 멧사자를 상대하지는 못합니다. 이스갈의 훌륭한 무사도 어렵게 여길 일을 이 사람이 한 겁니다.”
소령은 가볍게 감탄하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방인 객을 돌아보았다.
“아, 용맹한 분이시군요. 멧사자라면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육식동물 아닙니까. 저는 군인이라 이민족의 무구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취미가 무기 수집이죠. 마침 검을 갖고 계시니, 괜찮다면 부에노소 인들의 검을 견식해볼 기회를 허락해주십시오.”
브네로는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레페리를 쳐다보았다. 레페리는 히죽 웃으며 그를 외면해버렸다. 브네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혁대에서 칼집을 끌렀다. 그것은 성인 남자의 정강이 길이만한 길이에 제법 날이 두터운 숏소드로, 아렌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옻으로 칼집을 칠한 것이었다. 칼집 거죽에는 부에노소의 문자로 둘러친 은색 느릅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브네로는 소령에게 칼집째 검을 넘겨주었다. 소령은 칼을 반쯤 뽑아 찬찬히 둘러보았다. 칼날에도 칼집과 같은 느릅나무 문양이 새겨진 것을 본 그는 뭔가 생각하듯 입을 다물었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럴 수가. 이것, 혹시 에페이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브네로는 거의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소령은 질렸다는 표정의 가족들에게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이분은 부에노소 인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분임이 틀림없다. 에페이도는 부에노소 인들의 재판관이 증표로 갖는 칼이니까.”
브네로는 자신이 동족들로부터 에페오이기 때문에 존경받은 일이 있었던가 골똘히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추억이 없었다. 그의 가문 사람들은 골치 아픈 분쟁, 가령 낙인을 찍지 않은 새끼양이 멋대로 경계를 넘어 다른 집 양들과 섞였을 때 그것이 누구의 양인가를 가려내는 등의 문제를 처리해야 할 때만 그를 찾았으며 평소에는 여느 목동들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말하자면 그는 문젯거리를 해소하는 해우소 정도로 여겨지곤 했다.
“정확히는 각 가문 내에서 일어나는 잔일의 중재자입니다. 다른 가문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들의 문제도 듣긴 합니다만, 참고 수준이죠. 에페오란 부에노소 인들 사이에서 그렇게까지 대단한 존재는 아닙니다. 오히려 덕망 있는 노인의 말 한마디가 더욱 힘을 갖습니다. 물론 보통의 경우에는 그런 어른이 에페오나 에페이아가 되기 때문에 저처럼 무시되는 건 아니지만요.”
브네로는 한탄하듯이 말했다. 소령은 껄껄 웃고 검을 돌려주었다.
“어찌 됐든 레페리 님 같은 분이 벗으로 삼을 만 한 분이시군요. 그런데 발더스 님, 이스갈 인은 식탁에서는 검을 휴대하지 않습니다. 검은 신성한 것인 만큼 식당 같은 곳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물론 발더스 님은 이스갈 인이 아니니 굳이 이스갈의 전통을 따르라 강요하진 않겠습니다만.”
그렇게 검을 신성시한다면 왜 식당에서 검을 견식 시켜줄 것을 요구했냐며 대꾸하고 싶었지만 소령 덕에 간신히 하룻밤 묵을 자리와 저녁까지 얻은 브네로는 굳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에페이도를 들고 일어섰다.
“레카에서는 레카의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으니 이스갈에서는 마땅히 이스갈의 전통을 따름이 옳겠지요. 죄송하지만, 검을 둘만한 곳을 일러주실 수 있겠는지요.”
“아니, 제 집의 손님께서 식탁을 떠나실 것 까지는 없습니다. 발더스 님이 머물 방에 옮겨두겠습니다.”
소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예가 한 명 들어왔다. 노예는 주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을 들어올렸다. 브네로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주인의 말을 들어 노예에게 검을 건네주고 앉았다. 소령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며 브네로에게 들리도록 아내에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발더스 님께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번 사건’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던 브네로는 그것이 아까 레페리가 말한 살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걸 떠올리자 고개를 수그릴 뻔 했다. 겨우 자세를 추스른 그는 소령의 가족들이 밥상머리에서 살인 사건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리 탐탁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저는 오늘 이 마을에 도착해서 자세한 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숙녀 분들이 계신 자리에서 언급할 만큼 향기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진 않군요.”
“흠흠, 그도 그렇군요.”
소령은 브네로가 더 이상 화제를 이으려 하지 않음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곧 소령은 레페리를 붙잡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치니 전쟁이니, 수도에 사는 귀족들의 동향이니 따위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던 브네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의 홍수에 익사할 것 같아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식당으로 안내받을 때처럼 노예가 램프를 들고 방으로 안내했다. 본채 뒤편에는 다시 하늘이 열린 중정이 나타났다. 본채 앞의 정원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보다 아담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여인들이 주로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었다. 중정을 지나 안채에 도달하자 노예는 왼쪽으로 꺾었다.
브네로가 안내된 곳은 약간 작지만 한 사람이 쓰기에는 넉넉하고 깨끗한 방이었다. 창가에 놓인 침대 위에서 에페이도를 발견한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방에 내려놓은 행장을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 노예가 램프에 불을 켜고 나갔다. 어지간히 잘 사는 집이 아니고서는 램프에 드는 기름값을 아끼고 싶어 하는 만큼 방에서는 초나 등잔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브네로는 처음 보는 손님에게도 제법 호기를 부리는 주인이라 생각하며 휘파람을 불고는 램프를 꺼버렸다.
열린 덧창으로 푸른 달 알트루겐의 빛이 흐릿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에페이도를 밀어버리고 침상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던 브네로는 문득 옆방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다시 문소리가 나더니 이 방의 문이 열렸다. 레페리는 포도주병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어때?”
“오, 그레이트.”
잠시 후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달빛을 벗 삼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잔을 기울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레페리였다.
“이 윌더빌이라는 촌이 어지간히 수구꼴통들이 몰려 사는 데여야지. 주민들은 이스갈 인이 세계 최고라고 굳세게 믿고 있다네. 자네 같은 이민족이랑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치들이야.”
“그것 뿐만은 아니겠죠. 이런 작은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란 게 얼마나 큰일이겠습니까. 한 백년은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깃거리입니다. 그런데다 이스갈의 임금께서 친히 관리를 보내 조사하게 했으니 주눅이 들 데로 들었겠죠. 주민들이 저를 보자마자 무작정 나가라 한 거, 이제 이해합니다.”
“자네는 가끔 너무 사람이 좋은 것처럼 굴어서 탈이야. 좋아, 사건 이야기나 하지. 자네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어. 어디까지나 내가 여태 보고 듣고 조사한 것을 주정부리 삼아 주절거리는 것뿐이야. 무슨 소리를 해도 마음 쓸 것 없다는 뜻일세.”
“그렇다면 기꺼이 땡스한 심정으로 들어드리죠.”
어디까지나 주사를 받아줄 상대로서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 깊이 관여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브네로는 양손을 들어올렸다. 본심과는 약간 다른 말을 한 레페리는 두고 보자는 듯 입가를 실룩였다.
“반달 쯤 전, 그러니까 정확히는 28일 전 한 레카 인이 이 마을에 들렀네. 알다시피 레카의 그 가문과 피가 섞인 자는 마도의 능력이 격세유전 되지. 다른 민족들은 그걸 굉장히 두렵게 여겨.”
“말만 외치면 그대로 이뤄지는 능력 말이군요. 하지만 순전히 피가 섞였나에 달린 거고 피가 섞여도 마도사가 되지 못하는 자도 있지 않아요?”
“그렇지. 하지만 마도사가 아닌 우리들 눈으로 볼 때 흰머리 빨간 눈인 사람은 그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체로서 공포야. 레카 인들 스스로도 세상 시끄럽게 만들기 싫으니까 계곡에 틀어박혀 안 나오잖아. 어쨌든 그 젊은이는 레카 인을 꺼린 마을 주민들의 요구로 묵을 자리도 못 얻고 쫓겨났지. 그로부터 1순 후 그 친구가 살해되었다며 범인을 처벌해달라고 그 친구의 동생이 이스갈레아까지 와서 탄원했네. 그냥 행방불명된 것일 수도 있는데 살해되었다고 단정 지은 이유는 모르겠네만, 어쨌든 탄원이 들어온 이상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내가 파견되었어. 마지막으로 그 레카 인의 소식이 들린 곳인 이 마을 부근에서 결국 그 불쌍한 젊은이의 시체를 찾아낸 게 6일 전이야. 강변 진흙더미에 머리부터 반쯤 파묻힌 채 썩어있었지.”
레페리는 발견 당시의 상태를 떠올리듯 손가락으로 허공중에 거꾸로 선 사람의 모양을 그렸다. 그림의 머리 쪽에 손가락을 대고 뭔가 더 그리려 하자 브네로는 기겁했다.
“우엑, 시체의 상태를 털 하나까지 묘사하고 싶어 안달 났군요. 그런 건 웬만하면 건너뛰죠?”
“바보 같은 소리 마. 어떻게 죽었는지, 범인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같은 걸 알려면 시체와 그 주변을 꼼꼼히 봐줘야 한다고. 하여간 뒤통수를 둔기로 맞았더군. 그게 결정타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마구 두드려 맞은 흔적이 있어. 범인들은 - 다수인 건 확실해. 혼자서는 그 정도로 몸 곳곳의 뼈에 금이 가게 만들지는 못하지 - 먼저 둔기로 머리를 때려 마도를 발하지 못하도록 혼을 빼놓은 후 맨손으로 레카 인을 흠씬 두들겨줬어. 그 과정에서 죽은 것처럼 늘어지자 사체를 유기한답시고 마을 밖 강변에 파묻어버린 거야. 젊은이는 흙에 묻힌 후 죽었어. 묻혀있던 곳의 흙과 잡초를 움켜쥐고 있었거든. 그 후 한번 큰 비가 오자 강물이 불어나면서 시체가 묻힌 데까지 차올라 흙을 좀 치워버린 게지. 그 때 우리가 발견한 것이고. 근처 들짐승이 파먹기까지 해서 수습하는데 고생했지. 썩는 냄새가 장난이 아니더군.”
에페오 짓 하다보면 가끔 사람 시체도 치운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말할 타이밍을 놓친 브네로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어쨌든 그런 건 자랑삼아 할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편이 낫긴 했다. 잠시 이름도 모르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말을 중얼거린 후 그는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럼 이제 범인이 누구일지 이야기할 차례군요. 뭐 없어진 거는 없었나보죠?”
“있어. 레카 녀석들은 왜, 로브 비슷하게 긴 털옷을 입지 않던가. 그게 없었어. 머리가죽에 붙어있던 흰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레카 사람인 걸 몰랐을 거야. 물론 지금은 여름이고 이스갈은 그 계곡에 비하면 참 더운 곳이니까 안 입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좀 이상하잖아. 다른 짐은 건들지도 않은 주제 별난 것도 없는 그런 털옷을 탐내 사람을 죽일 놈이 있을까? 그것도 여럿이 몰려가서 말이야.”
“강도는 아니란 말이군요. 흠, 이 동네 사람들이 이민족에 대해 배타적이란 건 저도 직접 겪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고. 보아하니 그 젊은이한테 특별히 원한 관계는 없는 모양이죠?”
“그러니까 지나가던 자네를 붙잡고 주사나 늘어놓게 되었지. 짐작은 하고 있을 테지? 아무래도 이 마을 사람들이 살해한 것 같단 말씀이야.”
“함부로 단정하는 건 안 좋아요. 뭐, 먼저 결론을 단정해버리고 거기 맞춰 수사하면 마음이야 편하긴 하겠지만. 어디보자. 그럼 레페리 씨의 주정거리는 이겁니까? 이 마을의 누군가에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안 나오고 오리발도 완벽해서 짜증스럽다는?”
“그렇지. 이 마을 사람들은 이민족을 싫어하고, 특히나 마도사 같은 게 나오는 레카 인은 악의 씨로 여기네. 탐문해보면 그깟 악마가 죽은 게 뭐 대수냐는 식이더라고. 게다가 이런 벽촌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단결이 잘 돼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외부로부터 목숨 걸고 지키려들지 않겠어. 마을의 유지라 부를만한 사람들 중에는 이민족은 사람도 아니니 죽여도 괜찮다고 지껄일 만큼 포악한 녀석이 있어. 추궁해도 자백하지 않고 외려 같은 이스갈 인이 동족을 괴롭히냐고 엄숙히 따지더군, 나 원.”
말을 마친 레페리는 잔뜩 찌푸린 낯으로 잔을 기울였다. 브네로는 잔을 새로 채워준 후 자신의 잔을 들었다.
“흉기는 찾았나요? 하다못해 그 옷이라도 찾으면 되잖아요.”
“못 찾았으니까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다니지. 아, 그렇지. 자네 한번 같이 현장에 가보지 않겠나?”
“절대 거절! 예쁜 아가씨면 또 모르지, 다 늙은 아저씨랑 달밤에 살인현장을 산책하라고요?”
“산책이 아니야! 현장조사다! 그리고, 신사라면 아가씨를 그런 곳에 데려가겠냐? 그러니까 나와 가는 게 더 낫다!”
브네로가 잔뜩 얼굴을 구기자 레페리는 껄껄 웃었다.
“하긴 같이 갈 아가씨도 없긴 하군. 밤산책을 가자는 진짜 이유를 말하자면, 낮에는 이 마을을 관할하는 보안관이 참견하러 나와서라네. 그 보안관도 꽤나 보수적인데다 마을 사람들 눈치를 엄청 살피거든. 하여간 자네가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려면 지금이 기회야. 가자고!”
레페리는 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브네로를 잡아끌었다. 브네로는 허우적거리면서 싫은 소리를 몇 번이고 투덜거렸지만, 결국은 부은 낯을 한 채 레페리를 따라야 했다. 그는 툴툴거리며 소령에게 빌린 옷을 걸친 채 일어섰다. 들짐승이 나올지도 모르므로 에페이도를 집어든 그는 손에 잡히는 무게감이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급히 술병을 치우고 방문을 열던 레페리는 머뭇거리는 그를 돌아보며 낮게 외쳤다.
“더 밤이 깊기 전에 가지 그래?”
브네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칼을 혁대에 채우며 문을 나섰다.
언덕 위인 소령의 집에서는 맑은 밤하늘이 훤히 드러났지만 강은 다가갈수록 짙은 안개에 잠겨 달빛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마을을 벗어난 이후로는 램프의 불빛만으로는 앞사람의 등을 보는 것이 한계일 정도였다. 두 사람은 며칠째 이곳을 오간 레페리의 기억에만 의지한 채 길을 더듬어갔다. 푸른 달의 만월이 천정에서 약간 비껴난 위치에 도달했다고 여겨질 무렵 두 사람은 현장에 도착했다.
강이라기보다는 개천이라 함이 옳을 지류는 시원스레 졸졸거렸다. 물가에 우거진 잡초 사이에선 풀벌레들이 울고 간혹 개구리가 풍덩 뛰어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무지 평화스러운데요.”
브네로는 발밑을 살피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처럼 질퍽거리는 진흙 때문에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땅을 노려봐야 했다. 레페리는 램프를 좀 더 밑으로 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언제나 평화로운 거야. 하지만 그 시각에 어디선가는 누군가가 강간당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죽어갈 수도 있는 노릇이지. 다 왔구먼. 거기 밟지 말게.”
브네로는 말뚝을 박아 둘러친 새끼줄을 밟을 뻔하고 휘청거렸다. 조심스레 줄을 넘어간 그는 가느다란 막대에 붉은 기를 달아 꽂아둔 표식을 발견했다. 레페리는 램프를 두루 비춰주었다.
갈대와 부들이 무성하게 둘러싼 흙더미는 근래에 무너진 흔적이 보였다. 시체를 발굴한 자리는 휑한 구덩이를 드러냈고 그 허리께까지 물이 차올라 출렁거렸다. 주위에는 시체를 파낼 때 함부로 밟고 다녔는지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풀이 꺾여있네요. 원래 이랬어요?”
흙더미 위의 갈대들은 뿌리 근처가 꺾여 비스듬히 서있었다. 레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엉터리 보안관이 저지른 짓이야.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안 그랬어. 흙이 이렇게 질퍽하니 한 사람이 시체를 운반해와 땅까지 파기는 어려웠겠지. 녀석들은 다른 방향으로 해서 물속을 걸어 왔을 거야. 보안관보다는 주변머리가 있달까나.”
“물이 얕은 것 같군요.”
“이 근처에서 제일 깊은 데가 어른 가슴께밖에 안 돼. 하지만 물은 흐르는 것이라 강바닥에 남은 발자국 같은 건 금방 없어져. 결국 우리가 며칠 동안 한 짓이라곤 흉기나 하다못해 단추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주변 강바닥을 헤집고 다닌 것뿐이야. 주먹보다 큰 돌도 없으니 골치 아파.”
“범인이 아직까지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마을 사람들 물건은 조사해봤어요?”
“그러고는 싶은데 협조들을 안 하시네. 보안관놈이 잔뜩 골을 내며 멋대로 몇 집 조사하고는 없다고 주장하잖아. 내가 조사하려고 하면 이미 끝났다며 쫓아낸다고. 솔직히 강을 뒤집는 건 다른 할 일은 없고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는 짓이지, 실상은 뻘짓이야.”
“하이고, 위대하신 이스갈 국왕 폐하께서 친히 수사권을 수여하신 재판관이 이런 촌동네 하나 뜻대로 조사하지 못해 전전긍긍이라니. 안쓰럽습니다그려.”
브네로는 말을 끝내자마자 잔돌을 밟고 미끄러졌다. 첨벙!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 발을 강에 빠뜨려버린 그를 보고 레페리는 킥킥 웃었다.
“천벌이군.”
브네로는 대꾸하지 않고 찡그린 낯으로 돌을 주웠다. 손바닥에 쥐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돌이라 물매질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상하게 하긴 어려워 보였다.
“피해자의 뒤통수에 난 상처는 어느 정도 크기에요?”
“그 돌보다는 커. 두개골이 지름이 손가락만한 타원 모양으로 함몰될 정도였지.”
“흠. 그나저나 이 돌은 한쪽 면이 모나게 깎여나가 있군요. 곡괭이질이나 삽질을 하다 돌을 깨버리면 이런 모양이 나오려나.”
브네로는 돌을 주머니에 넣고 잡풀 뿌리 부근을 살피며 둔덕으로 올라갔다.
“나중에 사체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발견 당시에도 이미 상할 대로 상해서 살이 발라지고 뼈가 드러나 있었어. 위생상으로도 안 좋아서 부검 끝내자마자 화장했지. 부검 기록이라면 보여줄 수 있겠군.”
두 사람은 대충 조사를 마치고 강둑으로 올라갔다. 안개는 강변을 넘어 마을 입구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슬몃 흐르는 바람이 안개를 일렁이게 하자 유령이 흰 소복을 펄럭이며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기분 나쁘리만치 안개가 짙군.”
레페리는 중얼거리며 언덕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 언덕은 옅은 안개가 흐느적거리며 휘감아 돌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아 안개의 흐름은 싸늘하기만 했다.
레페리는 문고리를 잡았다. 막 대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집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퍼졌다.
“꺄아아아악!”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문에 달려들어 거칠게 두드려댔다. 개가 큰 소리로 컹컹 짖어댔다. 비명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노예들이 우왕좌왕하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나는 레페리다! 문부터 열어!”
쾅쾅쾅쾅! 레페리가 주먹으로 부족하다 여겨 문을 발길질하려던 찰나 쪽문이 열렸다. 노예는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레페리 님! 큰일 났습니다. 얼른 안채로 가주세요!”
“무슨 일이냐?”
“주인님께서 위험합니다. 누가 주인님을 찌르고 도망쳤습니다!”
두 사람은 노예를 제치고 본채를 지나 안채로 달려갔다. 사방에 환하게 불을 밝힌 가운데 안채의 오른쪽으로 꺾어든 두 사람은 노예들이 웅성거리며 어느 방 앞에 모여선 것을 발견했다. 집의 안주인이 혼절한 채 여자 노예들에게 부축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노예들은 손님들을 보자 얼른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은 정면에 테라스까지 달려있을 정도로 컸다. 테라스가 열려있는 것으로 보아 소령을 찌른 자는 테라스를 통해 도망친 모양이었다. 여자의 취향에 맞춘 듯 적당히 화려한 가구들로 꾸며진 방 한쪽에는 널찍한 침대가 있었다. 허슬 소령은 그 위에 머리를 침대 밖으로 향한 채 잠옷차림으로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옆구리에는 진득한 피가 콸콸 흐르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브네로는 소령을 살펴보았다.
“으, 술 냄새. 늑골 아래쪽에서부터 깊숙이 찔렀습니다. 칼이겠죠? 심장까지 들어갔어요. 즉사입니다.”
그는 침대의 발치 쪽 벽에 붙어서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피 묻은 잠옷차림으로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 이 여인은 소령의 딸이었다. 테라스로 뛰쳐나갔다가 들어온 레페리는 핏자국이 흩어진 흔적과 아수라장이 된 침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미 멀찍이 달아났어, 쳇. 재빠른 놈이군. 이것 봐, 술병이 깨져있어. 이건 물병인가? 도망칠 때 테이블을 건드린 거야. 제인 양, 여기는 제인 양의 방이지요?”
“아, 네. 그래요. 제 방이에요.”
“제일 먼저 발견하셨습니까?”
“예. 아마도요.”
제인은 맞잡은 두 손을 가늘게 떨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목이 계속 울렁거렸다. 브네로는 그녀가 꽤 강한 성격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테라스 쪽으로 갔다. 안채 뒤편은 작은 후원인 듯 나무가 몇 그루 있고 바로 담장으로 막혀 있었는데 좀 답답하고 삭막한 느낌이었다. 회랑으로 사방을 둘러친 예스러운 구조는 손님에게 보여주는 안채 앞까지만 있는 모양이었다. 테라스로부터 담장까지의 거리는 다섯 발자국. 담장 높이를 가늠해본 브네로는 이스갈 인들보다 한 뼘은 큰 부에노소 인이 팔을 뻗어도 겨우 담장의 끝에 닿을락말락한 것을 발견했다. 담장 끝을 스친 손가락 끝에 피가 묻었다. 조금 둘러본 후 그는 담장 중간쯤에 찍힌 흙발자국을 발견했다. 담을 뛰어넘을 때 디딘 흔적인 듯, 발가락 부분만 약간 찍혀 있었다. 흙냄새를 맡아본 그는 후원에서 묻은 흙이라고 결론지었다. 담을 딛기 직전 땅을 박찬 흔적을 찾으려고 몸을 숙이던 그는 갑자기 그림자가 지자 고개를 들었다. 레페리가 불편한 얼굴로 테라스에 비치는 빛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본 브네로는 뭔가가 뱃속에서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 봐, 브네로 군. 이거 자네의 에페이도 아닌가?”
방금 묻은 선혈이 뚝뚝 흐르는 검은 어른 정강이만한 길이에 두툼한 날을 가졌으며 칼자루 쪽 칼날에 느릅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브네로는 황급히 허리에 찬 칼을 뽑아보았다. 일반적인 부에노소의 숏소드이긴 했지만 느릅나무 문양이 없었다.
“어쩐지 가볍더라니! 식사할 때 바꿔치기 된 건가?”
“이봐! 어서 보안관에게 신고하지 않고 뭐 해! 신고하러 가는 놈 외에는 누구라도 보안관이 올 때까지 이 집을 나가지 못하게 해! 이 방의 것은 아무것도 건들지 말고, 누구 들여보내지도 마! 제인 양, 일단 다른 방에 갑시다. 여기에 오래 있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브네로 군은 나 좀 보세.”
브네로는 생경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노예들 사이에서 얼떨떨해하며 레페리의 뒤를 따라갔다. 레페리는 노예에게서 가운을 받아 제인에게 입혀준 후 그녀를 다독이며 옆방으로 갔다.
옆방은 소령이 서재로 쓰는 방인 듯 제인의 방보다 더욱 크고 널찍했다. 구조는 제인의 방과 비슷했으며 테라스는 닫힌 채 커튼까지 드리워있었다. 테라스가 있는 방향 외의 벽은 잡다한 서적이 꽂힌 책장으로 막혀있었는데, 읽을 목적보다는 수집의 목적으로 장만한 것 같았다.
레페리는 냉수를 떠오도록 지시한 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는 피 묻은 에페이도를 조심스레 책상 위에 있는 나무상자에 올려놓았다.
“제인 양은 거기 의자에 앉으십시오. 당장 옷을 갈아입고 싶으시겠지만 잠깐만 참아주시길. 이런 일을 당하시다니,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제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술을 깨문 채 바닥을 노려보았다. 레페리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브네로를 툭툭 쳤다. 브네로는 소리를 내지 않고 투덜거리는 입모양을 만들어 보인 후 나무상자를 치우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허슬 양. 눈앞에서 부친을 잃다니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현장을 목격하셨고 그 장소가 허슬 양의 방이었던 만큼, 아가씨께서 보신 것을 듣고 싶습니다. 다신 떠올리기 싫을 만큼 충격이 크실 겁니다만, 용기를 내서 말씀해 주세요. 국왕께서 임명한 재판관인 레페리 씨께서 범인을 체포하는 데 보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상 옆에 서있던 레페리는 자신이 조사하는 게 아니란 뜻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제인이 볼까봐 얼른 팔을 뒤로 돌렸다. 제인은 여전히 바닥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잘‥ 몰라요.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계셨어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셨죠. 제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시면서 술을 깨게 물을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물병을 가지고 왔는데‥. 그런데 그 사이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녀는 피가 묻지 않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레페리는 낯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었다.
“검을 바꿔치기해가며 에페이도를 쓴 게 이상해. 마치 브네로 군 자네가 범행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게 한 것 같아. 자네가 하필 그 때 나와 나가있을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야. 바꿔칠 기회는 우리가 식사를 한 때밖에 없었지. 그럼 범인은 그 시각에 이 집안에 있던 사람이라고 봐야 할 거야.”
“계획범죄란 거군요. 허슬 양, 혹시 아버님께서 평소에 누군가와 사이가 불편하셨습니까?”
“그런 건 잘 몰라요. 아버지는 집에서 일에 관한 이야기는 안 하세요.”
브네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벌떡 일어섰다.
“마저 후원을 조사해야겠습니다. 담장을 타넘을 때 땅을 박찬 흔적을 찾아야 해요. 담장에 찍힌 발자국과 땅에 남은 발자국을 대조해보면 최소한 체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을 겁니다. 대략 이스갈 인의 평균키에 날렵한 사람일겁니다. 집 뒤에는 뭐가 있죠?”
“골산(骨山)이야. 그 너머는 황야지. 그런 거 빼면 언덕 위에는 이 집 하나뿐이야.”
브네로는 후원에 가려고 테라스에 다가갔다. 커튼을 걷던 그는 유리창에 비친 제인의 모습에 눈이 갔다. 고개를 숙인 채 안절부절 하며 양손을 꽉 맞잡은 것이 안쓰러웠다. 그가 테라스 문손잡이를 잡은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레페리가 문을 열자 물잔과 물수건을 든 노예를 밀치고 살집 좋은 중년의 남자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들어섰다.
“오, 세상에. 이 오밤중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레페리 씨. 허슬 소령이 살해되다니!”
“애석한 일이오. 좋은 친구가 또 한 명 가버렸소. 제인 양이 가장 먼저 현장을 발견했는데 잠깐 물병을 가지러 나간 사이 일이 벌어졌다는군요. 범인을 보진 못했다 하오. 게다가 범인은 이 에페이도라는 특수한 칼을 썼소. 이 칼의 원주인은 사건 당시 나와 외출 중이었소만.”
보안관은 미심쩍다는 눈길로 브네로를 훑어보았다.
“이거 부에노소 인 아니오?”
“크흠, 그는 내 오랜 벗으로, 내가 신원보증을 할 수 있소. 오늘 내 조언자 자격으로 윌더빌에 왔으며 허슬 소령은 흔쾌히 자신의 집에 묵을 자리를 내주었소.”
물론 실제로는 초저녁에 마을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지만 법무부 파견 재판관의 위광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이방인인 브네로가 괜히 불리하게 몰릴 분위기였다. 레페리는 헛기침을 했다. 보안관은 그래도 의심어린 낯으로 브네로를 쳐다보았다.
“레페리 씨, 흉기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브네로는 얼른 보안관 뒤에서 감히 비집고 들어오지 못해 쭈뼛거리는 노예로부터 물잔과 물수건을 빼앗아 제인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잠시 손을 닦는 데 신경을 돌린 사이 레페리는 피 묻은 검을 브네로의 등 뒤로 넘겨 보안관에게 건넸다. 보안관은 전당포 주인이 물건을 감정하는 눈길로 검을 둘러보았다.
“이건 압수요.”
브네로는 속으로 찔끔했지만 따지진 않았다. 이스갈 인이 에페이도나 에페오의 의미를 이해할 턱이 없으며, 이스갈 땅에서는 그런 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수사에 필요하다면 기분은 상하지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안관이 턱짓으로 자신을 가리킬 때는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거기 부에노소 인! 너를 허슬 소령 살인용의자로 체포한다! 같이 가줘야겠어!”
“아니, 잠깐만요. 저는 당시 이 집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레페리 씨와 강가에 있었단 말입니다. 저에게는 체포될 이유가 없는데요.”
레페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내 명예를 걸고 증언할 수 있소. 여기의 브네로 군은 살인범이 아니오.”
“칼이 저 부에노소 놈 것이라면서요? 용의자가 못 되면 참고인으로라도 가줘야 합니다. 어쨌든 잔말 말고 이리 나와!”
보안관은 거칠게 브네로의 팔을 잡아당겼다. 수갑이 찰칵하고 손목을 죄었다. 기가 막혀 브네로가 뭐라 하지도 못하자 레페리는 목구멍까지 울컥 치미는 폭언을 꾹 누르며 보안관을 붙잡았다.
“에페이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설명하겠소. 어쨌든 이 사람은 범인이 아닌 게 너무도 분명하니 무례하게 다루지는 마시오. 증인 또한 많소.”
“허슬 아가씨가 최초의 목격자라는데 범인을 직접 본 건 아니랬잖습니까? 이자가 실은 악마의 능력을 쓰는 종자라서 칼이 멋대로 날아가 허슬 소령을 찌르도록 조종한 게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있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아니, 이 사람은 순종 부에노소 인이오! 아마도 그렇다고 알고 있소이다.”
“순종인지 먼먼 조상에 레카 놈 피가 섞였는지 누가 압니까? 아무튼 조사해서 혐의가 벗겨지면 풀려나는 게 당연하니 레페리 씨도 그만 흥분하시죠. 저는 공무집행중입니다.”
“이‥!”
레페리가 드디어 폭언을 터뜨리려는 순간 브네로는 레페리의 발을 콱 밟았다. 레페리는 펄쩍 뛰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쳤다. 브네로는 낄낄거리다가 보안관으로부터 주먹질이라도 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총을 받았다. 그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레페리 씨. 적어도 이 분은 저를 들개 놈이라고 부르진 않는군요. 그만 흥분하시란 데는 저도 찬성이니, 일단 한잠 푹 주무세요. 제가 한 일이 아니란 거야 금방 밝혀질 테니 염려 마시고요.”
“이봐, 브네로 군! 자네 억울하지도 않나!”
“억울하니까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고 싶어 죽겠다고요. 저까지 흥분해서 날뛰기 전에 서로 진정합시다, 예? 가죠, 보안관 씨.”
보안관은 수갑을 차서 팔이 자유롭지 않은 브네로를 거세게 밀쳤다. 레페리는 욕을 하려다 제인이 앉아있는 걸 보고 겨우 참았다. 그는 밤인사말을 대충 중얼거린 후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난 후 조용해진 방 한가운데에서 제인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입을 앙다물었다. 핏자국이 남은 나무상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젖은 눈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길이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