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건 아침이 다 되어서야 최 도령네는 최 도령네 집에 당도를 하였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몇 번을 외고서야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온 하인배들은 꼼짝없이 사랑채에 있어야 할 냥반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출타를 하여서는 근처 동리에서 보도 듣도 못한 사내들까지 데리고 대문 밖에 서있나 깜짝 놀라버렸더랬다. 고 호랭이란 놈의 재주가 어찌나 신묘했으면 사람 하나 물어 가는데 아무도 그 기척을 몰라. 달리 말하자면 고 호랭이란 놈이 작심만 하면 최 규수 하나 물어가는 건 일도 아니란 소리렷다. 최 도령은 등골이 오싹오싹하다 못해 식은땀을 비질거리건만 이 고민을 나눠야 할 이 도령이란 냥반은 제 종놈 등짝에 실려 고롱고롱 잘도 자니 분통이 팍팍 터질까말까 한다 이거다.
고 이 도령이란 냥반이 그래서 정말 푸욱 잘 자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저는 돗가비가 옆에서 난리굿을 쳐도 달게 자겠네 어쩌겠네 했다지만 돗가비한테 홀리고 호랭이랑 대거리하고 하는 것이 과연 일생에 두 번은 겪기 어려운 일들인지라, 자려고 자려고 눈을 붙여도 틈만 뵈면 말똥말똥 도로 뜨여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한여름 햇님이 오죽 바지런하신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할 것도 없이 애저녁에 날은 샜던 게다. 이불을 돌돌 말고 뒹굴뒹굴 해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고 감질나기만 하니까 이 도령, 에에라 모르겠다 자리를 박찬다.
이 도령이 저언혀 잠들지 않았단 걸 모르던 최 도령은 오후 느즈막하게나 깰 줄 알고 의복도 내주지 않았더랬다. 강쇠 놈은 어딜 싸돌아 댕기는지 기척도 없더라. 하여, 이 도령이란 냥반은 산중을 헤매느라 흙투성이 된 바지저고릴 고대로 걸치고 나왔더랬다.
선대에 워낙 쌓아둔 것이 있는데다 최 규수 시집가는 건으로 요 근래 최 진사댁에는 부쩍 방객이 늘었더랬다. 한양땅 여느 거상의 집 못잖게 복작복작 와글와글, 시장통이 따로 없다. 이러니 벌건 눈에 눈곱 주렁주렁 매달고선 달랑 바지저고리 바람으로 나돌아 다니는 사내놈은 아무개가 데려온 게으른 종놈 이상으로는 뵈질 않는 게다. 팔도 사투리 읊으며 바삐 오가는 종놈들 틈에서 저도 종놈인 척 귀동냥을 해본 이 도령은 그간 일 돌아가던 사정을 비롯하야 방객이란 자들이 김 도령 아니면 권 도령이란 양반들 중 뉘 편에 서는 것이 유익할꼬 주판 튕기느라 바쁜 모양이란 것까지 짐작한다. 여하튼 최 규수한테 장가만 가면 최씨 집안에서 한 재산 들어올 건 명약관화이어니.
‘그래서 어찌 하란 말인고.’
이 일 저 일 끼어보느라 한창 바쁜 젊은 냥반더러 대뜸 너 장가가라 그러면 그게 집안 어른 말씀이어도 속으론 염통이 덜컥 내려앉는 것이 인지상정이어늘 벗이란 놈이 딴 놈은 못 미더우니 네가 장가들련 하는 것도 배알 꼴리기는 매한가지다. 그래도 호랭이 하려는 짓은 못 봐주겠으니 어디까지 묻어 가다 발뺌함이 도리일까 고민하던 차, 도령의 걸음이 어느 틈에 뒷마당까지 이르렀더라.
별당 두어 채가 호젓하니 수목에 가리워 잠잠해야 할 이곳마저 웬 사람이 복작대는고나. 방객이란 자들도 예의는 아는 고로 직접 인사는 않더라도 최 규수에게 알랑거리는 선물은 꼬박꼬박 챙겨온지라, 문제는 예를 차리는 마음이 지나쳐 여느 때 같으면 사내놈은 출입을 삼갈 곳에 바리바리 짐 푸느라 남종놈이 줄을 잇는다는 게다. 뉘 댁 뉘가 규수께 무엇무엇을 선물하네 어쩌네 고하는 소란통에 온 뒷마당이 다 시끌벅적한 것이 이쯤 되면 최 도령이 튀어나와 네 이놈들 썩 물럿거라 한 소리 지름직도 하건마는 그 냥반이 밤새 산을 타서 뻗어버렸다는지 코빼기도 비치질 않는고나. 그 틈에 끼어있던 이 도령, 웬 떡대 좋은 여종이 흥흥 콧방귀 뀌며 툇마루에 앉는 걸 본다.
“아씨 아씨 이게 웬 소란이래요. 저는 구경만 해도 배가 부르겠어요.”
옳거니 저 방에 최 규수가 앉았구나. 이 도령, 호기심이 동하야 살곰살곰 다가간다. 최 규수가 뭐라 댓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을날 산자락마냥 울긋불긋한 여종 낯짝을 보아하니 과히 좋은 소리만 한 건 아닐 게다.
“말해두지만 아씨, 저는 저들을 내어 쫓으려고 했단 말이어요. 아씨가 말리지만 않으셨어두 누구 하나 본보기로 다듬잇대에 올려놓고 신나게 두들겨서‥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노인네 삭신 쑤시면 비오는 것처럼 아씨 변덕 알아채는 것도 쉬웠으면 오죽 좋아.”
여종이 마당으로 내려와선 안 그래도 떡두꺼비 같은 두 눈 부릅뜨고 숨 크게 들이쉬던 차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한발 먼저 끊는다.
“앞마당에 최 규수가 납시었다!”
“뭣이? 허면 별당에는 뉘가 계신단 말이야?”
“최 규수 잘났다는 얼굴 좀 보자.”
낚싯대를 드리우니 지들도 사내라고 우우 몰려나가는 꼴 봐라, 어이가 도망을 가려 하네.
이 도령은 월척이네 만선이네 외치는 대신 뒷짐 지고 점잔 떨며 여종한테 걸어간다. 건들건들 방자한 품새는 여느 종놈과 다를 바가 없건만 험한 일이라곤 도무지 겪어보지 않은 귀한 집 자손답게 그을린 적 없는 낯이 해맑기만 하고나. 장사치 같은 종자들을 내어 쫓으려고 작정하고 내려왔던 여종은 내놓으려던 표독스런 말을 다 삼키고 종놈인지 양반인지 모를 냥반을 쳐다본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고들 하건만 최씨네 규수 칭송하는 소문은 참 무성하외다. 그렇게 찔러대다간 하늘에 구멍이 날라.”
“우리 아씨가 얼마나 고운지 댁이 어찌 알우? 암튼 허튼 짓 하지 말고 썩 물러가요!”
“종놈끼리 뭘 숨겨. 한번 말해보오. 아씨의 아름다움이 과연 금수도 경탄할 정도요?”
아니 어딜 비교할 데가 없어 금수한테! 여종 눈이 뒤집어지려는 바로 그때 그 순간 별당에서 언젠가 사내들 심금을 울리던 그 고운 목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곱단아, 네 보기에 선비들이 치는 사군자가 아름답더냐?”
바로 종년 언동이 고분고분해진다.
“저같이 미천한 년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솔직히 말해 보아라. 내가 누구에게 이르거나 하진 않잖니.”
“으응, 양반님들이 즐기시는 거니까 뭔가 저같은 종년은 모를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어요.”
“물감을 쓰는 일도 없이 검은 먹물만으로 본 적도 없는 풀이나 꽃나무를 그리는데 아름다울 리가 없지. 곱단아, 그럼에도 사군자가 아름다운 건 그것을 치는 사람의 성품이 아름답기 때문이란다. 사군자는 매낸국죽의 자태가 아니라 그것이 담아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란다.”
이 도령, 속으로 무릎을 치며 혀를 찬다. 최 규수 한다는 소리는 분명 겉사람의 생김 말고 속사람의 생김을 보란 고차원의 훈계렷다. 그럼에도 이 도령은 요상한 데서 장딴지 한번 걸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얘 곱단아 속이 실하면 뭐 하니 처자식 굶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흥보네 쫓겨난 일과 심청이 인당수에 몸 던진 일이 그네들에게 돈궤나 권세깨나 있었으면 어디 가당키나 할 일이든? 춘향이 매맞아가며 제 낭군 기다린 일은 또 그네가 양반집 적출이었으면 어디 가당키나 할 일이든? 허나 내가 그네들이었으면 제비가 둥지 틀길 기다리거나 애지중지 여식을 구걸시키거나 낭군님 암행어사 출두하길 바라느니 진즉에 두엄지고 밭 갈아먹으며 자식새끼들 배나 불리었으리라.”
곱단이 들어보니 그 말이 옳게 들리는지라. 뭐라 댓구할 말을 찾지 못해 슬그머니 별당을 돌아본다. 최 규수, 곰곰이 생각하다 댓구한다.
“곱단아, 네 나이가 어느덧 이팔청춘이구나. 장래에 어떤 사내를 지아비로 맞고 싶으냐? 놀보 같은 부유한 이나 변 사또 같은 힘 있는 이가 좋으련?”
“삼시세끼 따슨 밥 먹을 수만 있다면야 놀보도 변 사또도 좋고말고요. 하지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살기엔 좀‥ 이히히.”
뭐 부끄럽다고 배배 꼬는 저 덩치가 이팔청춘이었다니 놀라웁긴 놀라운데 내색을 했다가는 저 팔뚝에 모가지 낄라, 짐짓 모른 척해주고는 이 도령은 슬몃 웃음을 짓는다.
“하기사 사내인 내 보기에도 좀 그렇다. 인생은 긴 것이야.”
“곱단아. 네 비록 고운 여인은 아닌데다 여종에 불과하나 네 심성만은 올곧고 한결같은지라, 네 배필 될 사내는 복 받은 사내다.”
배배 꼬다 못해 꽈배기 되것다 꽈배기 되것어.
헌데 최 규수는 한갓 종놈이 왱알왱알 조잘조잘 농지거리 하는 것이 무에 중요한 일이라고 저리도 절절이 이 사내가 한다는 말을 받아치시는고? 잠시 뜸 들이던 규수가 이내 말을 잇는다.
“대신 사람들을 쫓아내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나 여기 오래 지체하다가는 무슨 오해를 살까 두려우니 어서 처소로 돌아가시라 여쭈어라.”
곱단이는 규수가 누구더러 뭔 소릴 하나 싶어 두꺼비눈을 꿈뻑꿈뻑한다. 이 도령, 뜨끔하면서도 내색은 않고 짐짓 물러간다.
“얘 곱단아. 무식한 종놈이 윗분들 말씀을 알아먹을 귓구멍이 있어야지, 헤헤. 하여간 소문엔 산중의 임금이란 범조차도 아씨한테 홀딱 반했단 말까지 들리더라고. 정말 그런가 궁금했지 뭐냐.”
“궁금하면 다냐 이 무례한 종놈아? 종놈이 어디를 넘보긴 넘보는 게야? 경치기 전에 썩 물러가라! 훠이훠어이!”
곱단이가 진짜로 화를 내면 다듬잇대에 사람 엎어놓고 볼기짝을 까도 하나 이상할 것 없을 듯하야 이 도령, 부리나케 제 처소로 달아난다.
보아하니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최 도령을 제외한 최 진사댁 사람들은 호랭이가 최 규수한테 눈독 들이는 걸 깜깜 모르는 눈치다. 아직 장가들기는 싫지만 호랭이 색시 자리에서 최 규수를 끌어내는 건 사람 하나 살리는 셈이라 해봄직한 일이렷다. 이 도령은 본격적으로 호랭이 구축할 일을 생각하는데 별안간 김 도령네 하인배 패거리가 몰려간다.
“도련님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었습지요!”
얼씨구 반나절은 늦었지만 저쪽도 알아차렸는가. 무심코 지나가려던 차에 이번엔 저으기서 권 도령네 무인배 패거리가 몰려간다.
“도련님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었사옵니다!”
절씨구 저쪽도 알아차렸는가. 그런데 아랫사람들이 서로 화통을 했다느냐 이신전심을 했다느냐 어찌하여 동시에 수수께끼를 깨달아? 괴이하게 생각하던 차 또 이번엔 한 도령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갈짓자 걸음을 걷는데 그 양반 표정이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 애를 쓰느라 아주 두억시니 히죽대는 면상이더라.
지화자 좋구나 세 도령이 동시에 깨달음을 얻었구나. 이것이 무슨 조화이더냐? 아리송해하던 차 이 도령은 처소 앞에서 자다가 불났다는 소리 들은 사람마냥 두 손 번쩍 치켜들고 허둥지둥 뛰어오는 최 도령과 마주친다.
“여보게 이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온 동리에 답에 대한 소문이 짜하네! 삼척동자도 답이 무언지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 듯 허이. 세 도령이 답을 알아낸 눈치더구먼.”
“이 답답한 사람아 어찌 그리 태평한 게야!”
“어찌 됐든 세 도령은 사람이니 누가 됐든 호랭이보다는 낫지 아니한가?”
“가정맹어호도 모르나 이 사람아! 사람이 호랭이보다 더 무섭기에 내 일찍이 자네부터 찾은 것이었어. 게다가 호랭이란 놈이 저 혼자 답을 아는 줄 알았는데 모두가 알고 있다 하면 누구부터 잡아먹으려 들겠나? 자다 깨서 사리를 분별할 정신이 없는 겐가?”
이 도령, 그렇게까지 누이를 생각하는지는 몰랐던지라 최 도령의 기민함에 감탄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평하는 줄은 몰랐기에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더랬다.
“이 내가 괜찮은 신랑감임은 명명백백한 일이나 굳이 당장 장가들 까닭이 없을 뿐더러 어른들 허락도 없이 그런 중대사를 결정할 수는 없는지라. 호랭이 쫓아내는 건 돕겠으나 내 도움은 그걸로 족하리라.”
“자네의 말은 우리 선친의 유지에 반하네. 모르는가? 누구든지 고놈의 쓰임을 맞추는 이에게 누이를 시집보내라 하시었네. 수수께끼를 푼 자는 자네가 첫 번째일세.”
아뿔싸 호랭이 앞에서 빠져나갈 일만 골몰하다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고나! 이 도령 후회막심하여 가슴을 치면서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로 머리를 데굴데굴 굴린다.
“허나 그걸 아는 이는 자네와 강쇠뿐이네. 그 약조했다는 날에 내가 답을 알았노라 증명할 이도 없거니와 나는 애시당초 선고장 어른의 수수께끼에 도전하겠노라 나서지 않았느니.”
“소문에는 수수께끼를 푼 자가 자네란 것까지 실려 있네.”
이 도령,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은 것처럼 두 눈 깜빡깜빡하다 실실 쪼개더니 갑자기 벌컥 화를 낸다.
“강쇠 이놈이‥!”
그렇고나 수수께끼의 답도 그거 풀어헤친 자의 이름자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닌 놈이 따로 있었고나. 자기 종놈 입단속도 못 하다니 아나 내가 어둑시니였구려. 이 도령 뒤늦게 이를 북북 갈아보나 물은 엎질러졌고 배는 나루를 떠난지라. 최 도령 볼 낯이 없어 짐짓 외면하고선 이놈 강쇠란 놈 돌아오면 네놈은 죽었다고 복창해라 부득부득 다짐할 밖에.
이러저러 여차저차 하여 약조한 사흘이 지났더랬다.
최 도령이 수수께끼 낸 날처럼 이 동리 저 동리 한량이란 한량들은 죄 몰려나온 것이 가을걷이할 생각은 있는 건가 의심스럽다. 하여간 어찌어찌해서 답을 알아낸 세 도령은 어깨에 힘주고 모가지 뻣뻣하니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고나. 헌데 한량들 웅성웅성하며 길을 열어준 곳에 그 호가라는 엿장수 놈이 의기양양해선 세 도령보다 잘난 면상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오지 않든. 강쇠란 놈이 소문을 낼 적에 호랭이 소리만은 입 밖에 내지 않은지라 그 이가 호랭이일 거라고는 누구하나 짐작도 못 했더랬다. 그저 고놈이 용케 도망하지는 않았고나 수군거릴 따름이더라.
풀이 팍 죽어서는 앞마당에 나온 최 도령은 호가 놈을 보자 어깨가 움찔움찔이다. 그 뒤에 선 이 도령은 선비의 의복을 갖추어 점잖고 의젓한 것이 그냥 서있는 것만으로도 나 귀한 집 자제요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듯 하더라. 보도 듣도 못한 인사가 최 도령 뒤에 섰건만 며칠 전 최 도령이 느닷없이 야밤출타를 하야 도령 하날 데려왔으며 그 도령이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정보를 주워들은 지 오래인 두 도령은 느긋한 얼굴 뒤로 언짢음을 감추고, 그런 정보통이 없는지라 소식이 감감한 한 도령은 그저 최 도령네 집안 젊은이려니 어림한다. 호랭이 호가 놈은 이 도령 근엄한 낯이 왠지 수상쩍긴 하다만 설마하니 인간 놈이 호랭이 뒤통수를 칠까, 치면 그걸 맞아 줄까보냐는 존심으로 더욱 어깨가 떡 벌어진다.
“해서, 답을 아는 이 말해보오.”
세 도령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그 틈에 호가가 불쑥 튀어나와 “저요 저요” 외치자 위기에 닥친 세 도령, 동시에 “나요”라 외친다. 즉시 호가는 저가 제일 먼저 손들었으니 자기 답을 들어야 한다고 박박 우기고 세 도령은 최 도령이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노라 척척 받아치니, 돌아가는 꼴이 우습게 되었다. 누구누구 덕에 동리에 소문이 돈 지 오래라 넷이 모두 같은 답을 말할 것은 뻔할 뻔자이건만 최 도령은 절대로 호랭이 편은 들어주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세 도령 편들어주기도 싫으니 말이다. 호가가 여차하면 멱살 잡고 한판 뜨려고 소매 걷어붙이는 꼴을 보고서야 최 도령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끼어든다.
“일이 어렵게 되었소이다. 보아하니 여러분 모두 답을 아는 듯 한데 한번 동시에 외쳐보심은 어떻겠소이까?”
세 도령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버럭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셋이 다 같은 답을 품은 걸 아는데 자기만 콕 찍혀 답을 말할 뾰족한 수는 없는지라 자기가 안 되면 남 되는 꼴도 보기 싫다고 그리 하라 한다. 호랭이 호가가 상황 판단이 아니 되어 어물어물하던 차에 일이 그리 결정이 나버리자 넷은 동시에 답을 외치고, 여러분 누구나 아시는 바 “시계”란 외침이 온 동리를 쩌렁쩌렁 울려 자던 애까지 깨우더라.
최 도령은 이제 어이할까 고민하듯 고개를 수그리고 가만 서있더라. 호가란 놈이 이것은 어째 약조와 다르지 않더냐 엉덩이 덜썩덜썩하며 튀어나가 말아 하고 있던 차, 최 도령이 고개를 번쩍 든다.
“네 분 모두 답을 맞추셨소. 허나 네 분 모두 안 되겠소이다.”
“뭣이?”
“이 사람은 한양땅 이 참판댁 차남 이 아무개라 하오.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 선비가 가장 먼저 수수께끼를 풀었소이다.”
최 도령은 힘차게 이 도령을 가리키고, 시선의 화살에 고슴도치 되는 기분을 느끼며 이 도령은 멋쩍게 싱긋 웃는다. 이런 상황을 대비했던 권 도령이 즉시 반론한다.
“허나 이 선비는 사흘 전 그 자리에 나서지 않았으니 자격이 되지 아니하오.”
옳소 옳소 하고 김 도령과 한 도령과 호가가 입을 모은다. 최 도령 또한 이런 상황을 대비했던 터라 쉬이 댓구를 한다.
“선고장께서는 신분막론 노소를 가리지 말고 고놈의 쓰임을 맞추는 이와 사돈을 맺으라 하시었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자면 이 도령 한 사람만이 이 자리에 남아야 할 것이오. 아시겠소이까?”
“이노옴 최가야 보자보자 하니까 뒷간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말이 다르지 않더냐!”
어이쿠 드디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느냐! 호가가 어흥 부르짖고 펑펑 변신을 하니 엿장수 호가는 간데없이 집채만한 호랭이 하나가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하늘님 맙소사 산신령님 맙소사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도령들도 혼비백산하여 조상님 이름을 목을 놓아 부르짖네. 에라 모르겠다 이 도령이 용감하게 뛰어나가 방안으로 뛰어드는 호랭이 앞을 가로막은 찰나 발을 드리운 너머에서 예의 옥구슬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 난리통에 어찌 그리 잔잔한 말씀을 하는지 정녕 최 규수는 별세계에서 온 선녀인가 감탄이 나올 지경이더라.
“곱단아, 선고장의 뜻을 곧이곧대로 따르려는 오라버님 말씀도 옳으나 그것은 또한 권 선비의 말씀대로 공정하지 아니하다. 네 분 선비와 호랑이 한 분을 모두 모아 다시금 새로운 문제를 두고 겨루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고 여쭈어라.”
“라라라라고 아씨께서 전하라 하시옵, 옵, 옵, 아이구머니나 호랭이!”
방에서 뭔 소동이 났는가는 일단 차치해 두고, 이 도령을 콧바람으로 날려버리려던 호랭이가 그 말에 딱 멈춰버린다. 분명 최 규수는 엿장수 호가가 아니라 호랭이란 걸 알고 말한 것이렷다. 허나 당한 것이 있어 호랭이란 놈은 일단 을러대기부터 한다.
“내, 아기를 해할 생각은 없노라. 허나 인간이 무엄하게도 나를 속여 넘긴 것이 이번이 두 번째이니 아기 또한 인간이라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혼인하기도 전부터 지어미를 믿지 못하는 사내가 어찌 지아비 노릇을 하겠느냐고 여쭈어라.”
“라라라라고 아씨께서 전하라 하시옵, 옵, 옵, 아이구머니나 하시옵니다!”
금수에게조차 조신하게 내외를 하는 저 깜찍한 처자 좀 보소. 이에 호랭이는 확신을 얻어 크게 만족한 낯으로 고분고분 마당에 내려간다. 이 도령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호랭이 옆에 가 섰더라. 이 도령 하는 양을 보자 세 도령도 굴러온 돌에 박힌 돌이 질 수 없지 싶어 눈치 살살 보며 이 도령 옆에 가 서는데, 정작 이 사람들 지휘를 해야 할 최 도령이란 냥반은 반쯤 넋이 나간 것이 오줌이나 지리지 않았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러든 말든 최 규수는 낭랑한 목소리로 새로운 문제를 낸다.
“선고장께서는 신분막론 노소를 가리지 말고 물건의 쓰임을 맞추는 이와 사돈을 맺으라 하신즉 쓰임을 안다는 것은 사용할 줄 안다는 뜻이라. 지금부터 열흘의 말미를 내어드릴 터이니 각자 시계를 그 쓰임에 맞게 사용하시고 그 결과를 열흘째 되는 날에 알리시라 여쭈어라.”
“아니 아씨, 고놈은 하나인데 넷, 아니 다섯 분이 어떻게 쓰임에 맞게 쓰나요? 나눌 수 있는 물건인가요?”
“내가 이르는 대로 말씀 여쭙기나 하거라.”
곱단이 울상이 되어 최 규수 한 말을 아뢰니 네 도령과 호랭이 한 마리는 어안이 벙벙하더라. 고 시계란 놈이 필시 쪼갤 수 있는 물건은 아닐 터인데 쓰임대로 써보고 결과를 알리라 함은 어인 말인가? 게다가 시계란 놔두고 시시때때로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는 물건인지라 따로 쓰고 자시고 할 것이 당장 떠오르지를 않는 것이었다. 일단 시계를 가진 냥반은 저으기 널브러져있으니 나중에 차차 물어보도록 하고, 하릴없이 서있기만 할 수는 없어 다섯은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그런 와중에도 호랭이란 놈은 네 도령한테 눈알을 부라리며 한 소리 경고하는 건 잊지 않는다.
“허튼 수작 부리면 그날이 늬들 제삿날이여.”
네 도령은 고저 꿀 먹은 벙어리 흉내를 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