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터덜터덜.
세 병사의 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땅을 향해 낮게 들린 횃불이 그럭저럭 앞을 비추지만 자꾸 덮쳐드는 피곤함과 몽롱함과 안개는 내 그림자도 적의 그림자로 헷갈리게 한다. 게다가 어딘가 멀리서 슬슬 달려드는 짐승 울음소리. 군복 아래로 슬쩍 파고드는 바람은 살을 엔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느끼게 한다. 이런 것들에 신경 쓰다 간혹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며, 혹은 지쳐서 발을 질질 끌며 우리는 무작정 걸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딘가로 가긴 가야 하니까. 걷다가 누군가가 힘을 잃으면 다른 두 사람이 말없이 부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두 오늘 처음 마주친 사람들끼리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남 몸뚱이까지 돌보게 하는 건 날 잡아 잡수 하고 비명부터 나오는 짓거리다. 하지만 우린 그런다. 왜냐고?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군가?처지면 나와 다른 누군가가 그 누군가를 돕는다. 그리고 내가 처지면 다른 둘이 나를 돕는다. 어리석다면 어리석지만 어쨌거나 우린 그렇게 어딘가로 걷고 있고, 계속 그렇게 걸어야겠다. 아군의 무리를 만날 때까지, 혹은 어딘가 쉴 데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땅은 온통 우리를 향한 적의로 가득 찬 곳이니까.
갑자기 길갈레온 백인장이란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어라? 잠깐만, 젊은 친구들. 저기 말인데, 뭐가 보이지 않나?”
다리를 다쳐 걷는 게 자꾸 처지던 백인장을 부축했던 나는 고개를 좀 돌리는 게 이다지도 힘겨운 건가 투덜거리며 그 아저씨가 말한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뭐가 보이는데요?”
“메난드로스 군, 잠깐만 횃불을 치워주게.”
메난드로스 군이라고? 허참, 계급도 있고 나이도 지긋하니 그렇게도 부를 수 있구나. 십인장은 잠자코 횃불을 잠시 다른 쪽으로 돌렸다. 되도록 불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눈을 몇 번 깜빡인 후 나는 그 방향을 다시 쳐다보았다.
응, 어라?
“저거 뭐가 타는 거 같은데. 불인가?”
강에서 많이 멀어졌다지만 아침의 비 때문에 여전히 옅은 안개가 흘러 다닌다. 그 사이로 땅은 검다. 하늘과 맞닿은 부분이 구름이 꼈나 아닌가로 구분할 정도이다. 그 한 귀퉁이가 불쑥 솟은 곳, 새까만 지평 한가운데에 마치 길 잃은 돌처럼 튀어나온 부분 언저리는 화광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빛깔로 은근히 붉게 물든 안개가 일렁인다.
“아군 진지다!”
나는 손뼉을 치려다 아저씨를 놓칠 뻔 하곤 머쓱해서 실실 웃었다. 아이고, 드디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구나! 그것도 아군이 있는 곳으로! 메넴 십인장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그쪽을 노려보며 방향을 조금 틀었다. 맙소사, 아저씨가 그냥 지나쳤으면 우린 다 엉뚱한 데로 날이 밝도록 가버렸겠어?
목적지가 분명하게 보이자 우리 걸음도 조금씩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우선 나부터가 걸음이 씩씩해졌다. 갑자기 시체 사이에서 튀어나와 우릴(정확히는 나를) 놀래킬 유령이나 시체 같은 건 이젠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목적지가 보인다. 이제 두 다리 뻗고 배 채우고 따뜻하게 쉴 수 있을 거다!
“조금만 천천히 가지. 백인장님은 몸이 불편하다.”
십인장이 잔소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백인장님을 부축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저녁 먹으러 가는 꼬맹이처럼 신이 나서 헬렐레 팔렐레 가버렸을 것이다. 갈 데가 보이니까 걸음이 나도 모르게 가벼워지던걸. 헤헤 웃어서 녀석의 차가운 얼굴을 피할 밖에. 그나저나 점잖다는 라이첸 출신 백인장씨는 우리 군단에서 무슨 부대라도 맡았을까? 부하들은 어떻게 다뤘을까? 나는 모든 백인장이 우리네 밉살스러운 루 모 씨 같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본질적으론 다 같을지 몰라도 어쨌거나 부하 괴롭히기가 일생의 목표인 그런 진귀한 사람만이 백인장이 될 리는 없지 않은가.
“참, 백인장님. 라이첸에선 구타가 군법으로 금지된다면서요.”
“음? 응, 그렇다. 갑자기 왜?”
“백인장님쯤 되려면 군대에 오래 계셨을 텐데, 그럼 젊은 로타레프 대공님이 그런 법을 만들기 전에도 병사였을 거 아녜요?”
“그랬지. 십인장 쯤 됐을 때 선제후께서 서거하셨으니.”
“혹시 그때엔 라이첸 상관들도 부하들을 가끔은 군기 잡았나요? 좀 아프게.”
백인장님은 흠 하더니 입을 다무셨다. 엇.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일개 십인병 주제 백인장님과 이런 스스럼없는 대화를 하는 건가? 뭘 모르는 누가 보면 동네 아저씨랑 청년이 대화하는 것 같잖아? 어이쿠, 불호령이라도 나오려나. 그런데 아저씨는 점잖은 라이첸 사람답게 점잖고 느릿한 어조로 운을 뗐다.
“그랬으니까 그런 법이 생겼겠지 않나.”
아차차, 그렇구나! 누군가 때리는 사람이 있으니 금지하는 법이 생겼겠지. 내 정신 좀 봐. 이런 멍텅구리 같은 질문이라니. 그렇더라도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은 모양이다. 쩝.
그래도 이 백인장님은 부하를 대하는 됨됨이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내 황당한 말도 저렇게 부드럽게 받아주다니.
아군 진지는 어느새 성큼 다가와 버렸다. 어떻게 진지 주위를 두른 목책을 빙 돌아서니 갑자기 모닥불의 빛으로 생각되는 짙은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뻗쳐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 빛그림자가 시작되는 곳에는 우리가 새벽에 빠져나온 진문이 열려 있었다. 메넴 십인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우리 앞을 막아섰다. 나직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보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나한테 횃불을 맡기더니 백인장님의 허락 같은 건 받지 않고 진문에 다가갔다. 몸을 낮추고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살그머니 다가가는 모양이 마치 적진을 염탐하러 가는 병사 같은걸?
그, 그러고 보니 혹시 여기에 낙오된 에이모르 군이 있거나 할 수도 있는 건가? 이거, 까딱 잘못하면 우리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 되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이 덜덜 떨리면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이, 이러면 안 돼! 여차하면 튀어야지! 어, 그런데 튀면 어디로 가지? 게다가 다리를 다친 백인장님은? 버려야 하나? 달리게 할 수 없다고 내가 들쳐 업고 뛰는 건 미련한 소리다. 역시 버려야나? 그, 그렇지만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잖아. 아, 아차, 횃불! 자랑하려고 여태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니, 난 정녕 돌대가리인가! 이건 어째야나? 밟아서 꺼버려야나? 그런데 불 없이 어디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이 땅은 모두 적지인데!
“왜 그래, 십인병?”
나는 횃불을 얼른 내려들고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저는 다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서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해요. 그런데 어쩌죠? 제가 아저씨를 버리고 혼자 달아나면 아저씨는 저를 엄청 원망하실 거죠? 나는 턱을 덜덜 떨면서 되도록 아저씨의 시선을 피해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어깨에 걸쳐진 단단한 팔이 들리나 싶더니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스렌돌프 십인병. 가세나.”
“예! 어디로 튀면 될까요?”
역시 이 아저씨를 버리고 혼자 튀는 건 의리 있는 수이키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렇게 결론짓고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은 나는 비로소 아저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저씨의 표정이 횃불 불빛 탓인지 어딘가 해괴해 보인다.
“도망친다니, 거 무슨 소린가?”
“적이 남의 진지 안에서 불을 피우는 상황이 뭔지는 저도 알아요. 어서 몸을 숨기기라도 해야‥.”
“그거 재기발랄한 상상이긴 한데 깜찍하기보단 끔찍한걸. 저기서 메난드로스 군이 우리더러 빨리 오라는군. 아, 자네가 날 끌고 갈 수고는 안 해도 되겠군. 들것이로다.”
어, 어라, 그러니까? 나는 백인장 아저씨의 태평한 말을 들으며 앞을 쳐다봤다. 십인장은 고집스럽게 그 군기를 끌어안은 채 누군가를 따라 들어가고 그들을 스쳐지나 나오는 세 사람은, 둘은 들것 같은 걸 들고 있고 한 명은 무슨 상자 같은 걸 든 것 같은걸. 군복은 또 굉장히 눈에 익은데.
“아군!”
어구야! 정말로 맥이 풀려버린다. 더불어 부근에는 들쥐가 파놓은 구멍이라도 없을까 싶은걸. 재기발랄한 상상이라고? 아저씨, 제가 정말 재기발랄한 상상을 했군요. 다들 이긴 싸움이라고 했지. 그럼 적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아아, 내가 정말로 피곤한가 보다. 나는 두 병사가 아저씨를 들것으로 나르고 한 병사가 내 상태를 대충 살피도록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머리의 상처는 대단찮은 게 아니고, 좀 피로하기만 할 뿐 튼튼하다는 판정을 받은 나는 얌전히 구석에 쪼그려 잠이나 한숨 자기로 했다. 둘러보니 (비록 절름발이 반쪽 부대라지만) 명색이 세 개의 천인대가 숙영했던 진지는 텅 비어있고 막사도 웬만큼 걷혀 있었다. 텅텅 비어 휑뎅그렁한 목책 안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은 하얀 완장을 찬 의무반뿐이다. 그 외의 사람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줄지어 즐비하게 누운 중환자들 몇 명뿐. 사람이 적다보니 흔히 전장하면 연상되는 끔찍스런 신음소리 같은 것도 어쩌다 조그맣게 들릴 뿐 나같이 의술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는 사람은 그냥 무시해버릴 그런 광경이다.
백인장 아저씨가 그 다 죽어가는 줄의 한끝에 가 누운 걸 보니 마음은 좀 불편하다. 뭐 그리 심하게 다친 거 같진 않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법 다리도 썼으니 죽기야 않겠지. 아까 했던 생각 때문에 아저씨한테 괜히 미안해지는걸. 하지만,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그저 의무반과 중환자뿐이라니? 어떻게 된 건가? 다른 아군들은?
“우린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진지에 남아있었다. 아군은 지금쯤 패배한 개 킬리온을 잡으러 전사자도 챙기지 못하고 급히 데그로 달리는 중일 거다.”
어딘가 바삐 가던 군의관 한명을 붙잡고 물으니 대답한 말이다. 저, 조금은 중뿔 나는걸. 패배한 개라니? 그게 어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좋게 들리지는 않는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위대한 영웅인 킬리온을 어떻게 개로 표현하지? 영 마음에 안 드는걸, 당신! 나는 새하얀 게 바깥사정은 전혀 모르는 샌님 같은 그 군의관을 불쾌한 표정으로 보내버렸다. 물론 그 친구의 등 뒤에서 감자를 먹여주는 건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킬리온의 패잔병들은 데그로 가는 건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볼썽사납게 기절한 동안 우리군은 그 킬리온의 홍사자 군단을 물리쳤단 말이지?
이상해. 기분이 영 멍한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우리가 이겼으니 당연히 미쳐 날뛰며 좋아해야겠는데 왜 난 지금 이렇게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아 버리는 걸까.
헤헷. 난 여전히 풋내기 병사인가 보다. ‘동맹군’이라는 자각이 전혀 안 드는걸. 그저 난데없는 신인인 우리 절름발이 대공님한테 딱 한번 부딪치고 패배한 개가 되어버린 그 킬리온 더 나후카닉스가 안쓰럽다.
“…그러니까, 나더러 이런 썩은 물을 마시란 건가? 네놈들이 제정신이냐!”
응? 뭐야? 루스 놈이 여기 있나? 거의 본능적으로 등골이 오싹한걸. 하늘님, 상제님, 제발 그 루스 놈만은 여기 없게 해주세요, 예? 그, 뭐야, 에이모르 사람들네 신이, 아무튼 거기 신님, 제발제발요. 그놈이 여기 있으면 저는 내일 신경과민으로 과로사한 변사체가 되어있을 겁니다요!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누님, 형님, 할아버지! 내 입에서 자꾸 이상한 사람들까지 나오게 할 참이우? 그 망할 자식은 아니지요, 예? 아닌 거죠!
참말로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 멍청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면 역시 난 구제불능이다.
“천한 것들, 비천한 근성이란! 근처에는 강도 있는데 어째서 먹을 수 있는 물이 없다는 거냐!”
“도련님, 이 물은 그 강에서 뜬 것입니다. 먹을 수 있는 물이지요. 자, 그만 고정하시고‥.”
“네놈은 사람에게 흙탕물을 권하고도 뻔뻔하군!”
도련님? 십년감수했다! 그 루스 놈은 아니구나! 대신 여러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변변찮은 볼거리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 걷어치우지 않은 막사가 몇 개 남아있는 쪽에 커다란 나무통이 하나 나와 있었다. 저게 뭔지는 잘 안다. 우리 부대가 여기까지 오는 내내 밀고 끌던 거니까. 물통이군. 그리고 그 옆에는, 에게? 어랍쇼, 저건 기껏해야 열대여섯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꼬맹이인데. 그런 꼬맹이가 주제에 여기서 봐도 엄청 값져 보이는 번쩍하는 갑옷 차림으로 서서는 앞에 선 어른한테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뭔가, 저 버릇없는 꼬맹이는. 도령이라고? 뉘댁 자제인지는 모르겠다만 가정교육이 참 형편없나 보군? 어찌 귀인이라 해서 제보다 나이 있는 어른한테 큰소리야! 그건 우리 동맹 식으로 보면 개망나니라고!
“흠, 피브랄딘 도련님이신가.”
어라? 옆을 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메넴 십인장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전히 군단기를 든 채이다. 팔에는 새로 붕대가 감겨있는데 좀 수척한 걸 빼면 멀쩡해 보였다. 아는 사람인가?
“아십니까요?”
“피브랄딘 낙성 당시 라이첸으로 망명한 펠브리스 공의 말남이다. 아직 열여섯이라고 알고 있는데 로타레프 대공과 키츠 대공한테 떼를 써서 수이키아 군에 지원했지.”
“열여섯? 그럼 저 도령의 지위는?”
“견습기사다. 나와 같은.”
메넴 십인장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 같은 걸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웃음이다. 그러나 표정은 금방 사라지고 여태 유지했던 무표정이 돌아왔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십인장을 좀더 괴롭히기로 했다. 졸리긴 하지만 궁금한 걸 참은 채 자는 건 누구 말마따나 재기발랄한 청년한테는 가혹하다고.
“그런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본대를 따라갈 처지가 안 되니까 뒤쳐진 그룹에요.”
십인장은 나를 흘끗 보더니 발을 돌려 다른 데로 가버렸다. 나는 눈치를 슬슬 살피며 따라붙었다. 잘 데를 구할 때도 이런 계급 있는 사람 주변에 있으면 좀 유리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거야 어쨌든 뭔가 아는 사람 근처를 배회하다보면 무슨 재미있는 건덕지를 들을 수도 있고 한 것 아니겠어.
십인장은 군의관 한명을 붙잡고 뭘 묻더니 남아있는 막사들 뒤편으로 갔다. 거기에는 약간의 상자와 통이 몇 대의 수레에 실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십인장은 아무데나 가서는 상자를 열더니 모포를 하나 끄집어내어 어딘가로 총총히 가버렸다. 이런, 난 안 주고 자기만 가져가기야? 나는 뭔가 약이 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십인장이 뒤적이던 상자로 가 깨끗한 모포를 하나 꺼냈다. 얻은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후훗.
상자를 잘 닫아놓고 십인장이 가버린 방향으로 뛰어갔다. 메넴 십인장은 중환자들을 돌보느라 군의관들이 지펴놓은 모닥불이 안 보이는 어두운 목책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나는 실실 웃으며 좀 어색하게 다가갔다.
“주무십니까요, 십인장님?”
“당신, 나이가?”
십인장은 예상도 못한 걸 물었다. 그건 왜?
“올해로 스물인뎁쇼. 생일도 곧이고요.”
“그런가. 나보다 한살 많군.”
뭔가. 갑자기 왜 나이는 묻고 그러나. 그런 거 알면 형 대접이라도 해줄 참인가? 나는 괜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십인장한테서 좀 떨어진 어둠 속에 앉았다. 목책?등지고 앉으니 자연스레 시선이 위로 가는데, 바로 머리위의 발판위로 펼쳐진 하늘에 오밀조밀 메워진 구름 떼가 무슨 지붕같이 보여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바닥은 좀 차서 엉덩이가 얼얼할 지경이지만 뭐 모포를 얻은 것만도 감지덕지지.
“아까의 견습기사 꼬마랑은 아는 사이인가요?”
“말을 삼가라. 펠브리스 공의 자제라 했다.”
젠장, 펠브리스 공인지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어차피 제 성도 지키지 못해 저 멀리 바다건너 라이첸으로 도망간 칠칠치 못한 귀족 따위 알 바 아냐.
“예에, 시정하겠습니다요. 그러니까 그 도련님이랑은 아는 사이인가요?”
“그럭저럭.”
“그럼 역시 십인장 대우 견습기사인가? 헤에, 이 원정에 견습기사들도 많이 출전했어요?”
“얼마 안 된다. 어쨌든 너희 수이키아 성은 기사 제도가 없지 않나. 대부분이 나나 도련님처럼 킬리온이 휩쓴 지역 출신일 거다.”
어, 그러고 보니 같은 견습기사인데도 저 꼬맹이한테는 도련님이라고 해? 그거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부르나보네. 혹시 메넴 십인장은 평민 출신인데 그 혹독하다는 시험과 경쟁을 뚫고 견습기사가 된 사람인가?
“거기 암흑속의 두 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히시지.”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눈만 떼굴떼굴 굴리며 말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그 도련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쪽에 장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겠는데 뭐래 해야 하지? 기가 찬 건지 정말 당황한 건지 당장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때 메넴 십인장이 조용히 대꾸했다.(그리고 나는 속으로 휴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메난드로스입니다. 도련님.”
“아, 메넴이야? 살아있었구나! 역시, 근성 있는 안달루스 기사다!”
도령은 싱글벙글 웃으며 한손을 번쩍 들고 다가왔다. 이거, 아직 손에 들린 저 칼이 무서워서라도 이 자리에서 내빼고 싶은데 어쩌지. 젠장, 괜한 호기심으로 십인장한테 들러붙는 게 아니었어. 저런 까다로워 보이는 꼬맹이를 상대해야 하다니. 안면이 있는 견습기사들 끼리나 이야기하겠지? 난 어차피 졸병이니까 이런 자리에선 알아서 잊혀진 인물로 만들어주겠지. 그때 스리슬쩍 빠져야지.
“그런데 옆의 소년은 누구지?”
소, 소년이라니! 난 당당한 약관의 청년이라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버럭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어린애 같은 짓이다. 나는 고개를 무릎사이에 파묻어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했다. 이것도 메넴 십인장이 대꾸했다.
“다켄 십인병입니다. 오늘 오후 저와 함께했습니다.”
“그렇구나.”
쉽게 수긍해버리는 게 적이 마음이 놓인다만 어째, 이 꼬맹이는 본바탕이 조심성이 없는 건가, 아니며 극도로 태평한 건가? 보통 실전경험이 거의 없을 어린 사람이 큰 전투를 치른 직후 어둠 속에서 알아볼 수 없는 사람과 마주치면 경계부터 해야 하는 거 아냐? 메넴 십인장이랑 그리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말을 일단 믿어주다니 다른 의미로 위험한 꼬맹이로다.
그 꼬맹이 도령은 내 생각대로 ‘십인병’은 무시하고 메넴하고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메넴이 여기 왜 있는 거야?”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 낙오되었습니다. 도련님도 그렇습니까?”
갑자기 꼬맹이가 읍 하고 입을 다물었다. 헤에, 정곡인가 보네. 과연, 나이로 봐선 원칙대로라면 군에 지원할 수 없으니 여태 실전경험이 전무할 텐데 오늘의 혼란한 와중에 어쩌다 길을 잃은 모양이로군. 그래서 이렇게 꼴사납게 낙오병들이랑 중환자들 틈에서 큰소리나 치다니. 꼬마다워 귀여운 건 좋군. 어이구, 귀여운 것.
“그런데 메넴은 여기서 잘 거냐?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기사가 전장에서 딱히 자리를 가리겠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메넴을 쳐다보았다. 뼈가 있는 말이다. 평민 출신인 듯한 그가 피브랄딘 씩이나 되는 큰 성의 성주의 막내아들한테 감히 할 그런 말은 아니다. 물론 메넴 십인장은 이 꼬마보다 나이가 있지만 아까 꼬마가 보인 행동을 봐선 절대로 나이를 가지고 버릇을 고쳐주거나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저런 말을? 더 놀라운 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에 대꾸한 꼬마 도령이다.
“어, 그도 그렇구나. 그렇지, 펠트로 같은 기사들은 전장에선 갑옷을 입은 채 자곤 했지. 네 말이 맞아, 메넴.”
그러고는 조금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메넴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거, 생각보다 털털한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메넴 십인장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모포를 내주었고 꼬마 도령은 또 당연하다는 듯 모포를 받아 둘렀다. 쳇, 상급자를 추위에 벗겨놓고 있을 순 없잖아. 이래서 졸병이 고생이지. 난 속으로만 투덜거리곤 내 모포를 밀어주고 일어서서 새 모포를 가지러 갔다. 어우, 귀가 다 간지럽다.
모포를 하나 꺼내고 보니 중환자들의 신음이 갑자기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들린다. 바로 이 옆의 막사들 너머에는 시체처럼 즐비하게 누운 중환자들이 있지. 그들을 이 추운 밤에 밖에 내놓은 채 재울까?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막사는 몇 개 남겨뒀겠지. 얼려죽일 작정이 아니고서야 당장 수술이 필요한 저들을 저렇게 내버려둘 순 없어. 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다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스러워.
갑자기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아악!”
“잡아! 거기 메스 줘!”
“지혈대! 지혈대 어디 있나!”
“진통제가 부족합니다! 젠장, 그 자식들은 충분히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젠장. 그런 건가. 병사란 사지가 멀쩡할 때나 유용한 법이지. 재활용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진 병사는 죽이는 게 물자 면에서 효율적일지도 몰라. 어쩌면 그 병사한테도 그 편이 좋고. 하지만, 하지만 난 저 병사가 제발 수술 중에 죽거나 하진 않길 기도하겠어. 사람을 그런 식으로 가볍게 여기는 꼴을 보려고 군대 들어온 거 아냐. 게다가 저 병사 자신은 살고 싶을 거 아냐. 당연히 당신네 군의관들은 목숨 걸고 저 병사를 살려내야 할 거다. 알겠어!
괜히 속이 쓰리다. 그러고 보니 먹은 게 거의 없다. 그렇지만 저 아픈 병사들 먹일 걸 축낼 수야 없다. 아군이 급하게 떠나면서 남겨둔 게 거의 없나 본데 나같이 사지육신 멀쩡한 놈이 저 불쌍한 사람들 것을 뺏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가족들은 잘 있을까? 체엣, 성산머리마을이야 세월 가는 줄을 모르는 조용한 시골이니 잘들 있겠지 뭐. 어쩌면 날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 행복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저 병사들도 고향이 있겠지. 가족들이 기다릴까? 전란 중에 다 잃어버려 돌아갈 데가 없는 사람들일까?
제기랄! 난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갈테다. 보란 듯이 개선해서 돌아갈 거라고. 우리 가족들한테도 나한테도 그 편이 이해하기 좋지. 내가 이런 걸 봤다는 걸 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진 않아. 지금 난 전쟁이 뭔지도 전혀 모르면서 설쳐댄 기분이라고. 그저 살고 싶어 미치겠단 말야.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하지만 들어보란 말이다.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주인공인 10대 소년들의 모험이 이렇게 시작하지 않던가? 이건 정말로 그런 기회일지도 몰라. 기회는 그걸 알아보고 덤비는 사람한테만 잡혀주는 거라고. 알겠어, 메넴? 기회야. 잘 해보자고!”
“무엇을 잘 해보자는 말씀인지.”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는 거지? 막사 저편에선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이편에선 그들을 피해, 죽음을 피해 어둠 속에 숨은 쥐들이 즐겁게 찍찍거리는 것 같잖아. 젠장, 왜 갑자기 기분이 이 모양이 되었을까나. 어쨌든 나는 멀쩡하고 그게 다행스러운데, 저들과 다르다는 데서 무슨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그건 바보짓이다. 그런다고 저들이 갑자기 낫는 것도 아니고. 남의 상처를 왜 내가 아파하냐?
“어라, 십인병. 왜 표정이 그 모양이냐? 내가 있는 게 불만이냐?”
“예? 아, 아닙니다요. 그럴 리가요.”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내 표정을 본 거지?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필사적으로 씩 웃어 보이고 도령의 반대편, 그러니까 메넴의 다른 쪽 옆에 앉았다. 젠장, 숨는 거야. 난 군의관들 도울 생각도 않고 오늘의 피로를 핑계로 편안히 코골 생각만 하는 거라고. 왜 이렇게 내가 치사스러워 보이지? 아는 건 쥐뿔도 없으니 군의관들을 도울 수 없는 건 당연한데도 왜 이렇게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냐고.
꼬마 도령은 하찮은 십인병 따위의 기분이 어떻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 그런지 이내 자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지. 킬리온이 소년 시절 노련한 야랑족 전사들을 씨름으로 꺾은 이야기 같은 거. 그런 기사다운 경험을 그런 어린 시절에 겪을 수 있었던 것도 다 스스로 검을 쥐고 시련을 자청했기 때문이 아니겠어.”
야랑족이 뭐지? 어디 야만족인가? 어쨌거나 킬리온이 언젠가 씨름으로 야만족 전사 여럿을 꺾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스스로 검을 쥐고 시련을 자청한 결과라고 생각되진 않는걸. 내가 들은 대로라면 그 이야기 앞에는 얌전히 물건 팔던 킬리온에게 야만족 전사들이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는 전문이 붙어야 할 텐데. 그나저나 이 꼬맹이는 뭘 생각하는 건가? 물론 기사 펠트로의 이야기도 그렇고 대개 소년들을 상대로 하는 장쾌한 기사도문학에선 10대 소년이 중심이 되어 모험을 시작하곤 하지만서도, 실제로 그런가하면 아니올시다란 말씀이다. 봐라, 우선 10대 소년이 모험을 떠날 마음을 먹으려면 그만한 무기 다루는 실력이 우선 따르고, 그러려면 어려서부터 수년간 전문교육을 받아야 하고, 여행에 대해선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고, 기타 등등 골 아픈 조건들이 많이 붙는다. 진짜로 수행 같은 걸 떠나려면 십대 후반은 되어야 하거나 기사 서임을 받은 후 편력기사가 되든가 해야 하는 것이다. 뭐 나도 좋아하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그게 소설일 뿐이란 건 아니까 더 웃고 즐겨주는 거지. 내 진짜 취향은 기사 마이스터처럼 좀 관록이 붙기 시작한 젊은 기사의 이야기라고. 좀더 현실감 있잖아.
“그런데 그쪽 십인병은 이름이 뭐였다고?”
“예? 아, 다켄 스렌돌프 십인병, 수이키아 6군단 제2 천인‥.”
“소속은 됐고, 십인병 다켄이란 말이지. 응. 몇 살이지? 양친의 직업은?”
아, 두 손 두 발 다 들었수다.
“스물입니다. 평범한 농군이고요.”
“그래? 이것 봐, 메넴. 파티 짜기 괜찮은데? 저 병사는 힘은 제법 쓰지 않겠어. 내가 중심전사가 되고 너와 십인병이 보조전사가 되면 좋겠군. 나이대도 맞고 말야. 이제 필요한 건 궁수인가? 뭐, 메넴 넌 활을 제법 다루니까 네가 그걸 하면 되겠군.”
뭐야, 뭐야. 저 자식, 뭘 혼자 멋대로 정하고 있는 거야? 내가 기가 차서 입을 딱 벌린 채 하늘만 쏘아보는 동안 꼬마 도령은 혼자 잘도 떠들어댔다.
“아, 내 소개를 안 했군. 나는 피브랄딘 성의 주인 이난드 펠브리스 공작의 삼남인 슈라드 펠브리스다. 앞으로 신세를 좀 질지도 모르니 잘 부탁해 두지.”
크악! 이 현실감각을 잃은 꼬맹이는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지금 엉망진창으로 전투 하나 끝나고 낙오병으로 남은 신세, 이게 무슨 대서사시의 시작으로 보이냐? 내가 너 같은 꼬마의 낭만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목숨 바쳐 졸졸 따라다니며 무슨 장쾌한 모험이라도 해야 하냐? 그건 내가 바라 마지않는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야! 좀더 실력이 붙은 후 나 혼자 할 거다! 너 같은 꼬마의 유희가 아니라 진짜 기사의 모험 말이다!
“도련님. 스렌돌프 십인병은 오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지금 많이 피곤할 것입니다. 좀 쉬게 하는 것이 어떨는지.”
아아, 구세주여! 나는 메넴 십인장의 앞날에 육십갑자가 다 돌도록 축복이 있기를 기원했다.
“그런가? 그럼 너랑 얘기해야겠네.”
불쌍한 메넴 십인장.
“오늘 전투 중에 부상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몸이야말로 오늘 큰 경험을 했지 뭐야. 너도 칼리가라 장난감의 대명사 하켄에 대해선 들어봤겠지? 그 하켄, 주인이 아닌 자가 쥐면 그를 정복해 갑자기 검의 달인으로 만드는 대신 광전사로 만든다는 마검 말야. 난 오늘 전투 중에 그 검을 직접 맞대 봤다. 그 킬리온을 직접 눈앞에서 봤다고!”
응? 이건 좀 입맛 당기는 이야기네. 나는 모포를 바짝 조여 최대한 웅크리고는 그쪽을 곁눈질했다. 이 꼬맹이가 검의 천재이거나 뭐 그런 걸로 보이진 않는데. 덩치도 그 나이또래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걸.
“그런데 용케 살아나셨네요. 킬리온과 하켄 앞에서.”
“응! 내가 막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없이 적을 베고 치던 사이 어느 순간에 스테로나드 천인대까지 흘러들어 갔었나봐. 눈코 뜰 새 없이 적을 도륙하는데, 갑자기 새까만 무기질광택의 그림자가 나타났나 싶더니 시퍼런 마검이 번득이는 거야! 난 죽을 힘을 다해 적의 피로 붉게 물든 내 검을 들어 그 마검을 막아냈지. 세상에, 단 1합이야. 단 1합 부딪쳤는데 손목부터 어깨까지 찌릿하고 저려오는 거야. 눈물나겠더라고. 그 상황에서도 검을 놓지 않고 즉시 적의 옆구리를 치려던 순간 적이 투구를 벗었어. 세상에, 왜 내가 그 유명한 홍사자 군단 군복을 잊고 있었을까. 그 자는 한 손에는 홍사자기 대장기를 붙잡은 킬리온 더 나후카닉스였다! 그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쏟아져 나와 날 태워죽일 듯이 노려본 그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순간 내 온몸이 경직되어 버리더군. 내 검이 한 치만 더 가면 그 킬리온의 몸을 벨 참이었지. 그런데 그 자가 나한테 말을 걸었어. 아주 정확한 나후크 말이었지. 몇 살이냐는 거야. 그래서 나는 동맹의 공적, 황금삼족오의 대적자에게 그런 걸 가르쳐줄 성 싶으냐고 대답했지!”
허공에 주먹질까지 하며 신나게 말을 늘어놓는 품세가 참 꼬마다워 귀엽긴 귀엽다. 그런데 정말로 킬리온과 부딪쳤다고? 그건 좀 믿을 수 없는걸. 저런 꼬맹이 하나를 그 스테로나드 천인대가 자기네 존경하는 대장 앞에 검을 들린 채 보낼 만큼 골이 비진 않았을 것 아닌가. 설령 그랬다 해도 그럴 정도의 실력자가 눈앞에 있는데 공격을 막기는커녕 투구나 벗어던져? 무슨 소설의 한 장면이냐, 그건. 이 자식, 뻥튀기는 거구나! 그렇더라도 저 막사 너머의 무시무시한 비명은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꼬마 도령의 장광설에 맞장구를 쳐줬다.
“굉장했겠어요? 꼭 소설의 한 장면 같은걸요.”
“후후후. 킬리온은 내 대답에 감명 받았는지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주위에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리며 자기네들 말로 뭐라 지껄이더군. 그러자 주위의 에이모르 병사들이 몰려와 나를 포위하더니 한꺼번에 공격하더군. 그것도 검날이 아니라 창대로 말야. 평소였다면 놈들을 모조리 풀 베듯 베어버리고 킬리온에게 당당히 명예로운 결투를 신청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어야 말이지, 게다가 난 홀몸이니 중과부적이었다. 모든 힘을 다해 적들의 곧은 창대를 짚단 베듯 베어버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 킬리온을 향해 다음에 만나면 네 목을 가져가겠다고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
허공을 향해 힘차게 손가락을 내지른다. 어라, 거기서 왜 내 눈치는 살펴?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길 바란 건가? 그때 메넴 십인장이 보충설명을 해줬다.
“짚단 베기는 제법 검에 익숙한 검사만이 할 수 있다. 쉬워 보이지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그, 그렇군요! 그러니까 슈, 슈?”
“슈라드 도련님.”
“슈라드 도련님은 그런 엄청난 검사란 말씀이군요. 우와아, 대단한데요. 킬리온도 인상적이었겠어요.”
그렇겠지. 정말 꺼벙한 꼬맹이다 싶어 한동안은 기억해 주겠지. 꼬맹이는 신이 나서 더 크게 떠들어댔다.
“그 후 킬리온은 서둘러 도망쳤지. 간신히 살아남은 적들이 앞줄의 양떼가 가는 대로 가는 불쌍한 어린양마냥 어지러이 도망치던 와중에 내 검에 걸려 쓰러진 것만도 부지기수라고. 그리고 나서….”
이후로도 꼬마의 장광설은 계속되어 마침내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새파란 여명이 비칠 때까지 이어졌다. 결국 내용은 ‘천재검사인 나 슈라드는 일당백의 기세로 단기필마를 달리며 적을 도륙했으나 중과부적을 이기지 못하고 전략적인 후퇴를 감행해 지금 여기에 있다’ 아닌가. 녀석, 진위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혼자 잘나서 날뛰면 당연히 자기 부대를 잃어버리잖아. 나는 하품이 자꾸 나오는 걸 억지로 손으로 틀어막으며 눈을 감고 예, 예 고개만 끄덕여댔다.
피곤해, 피곤해. 이런 꼬맹이가 견습기사라니. 피브랄딘 성의 앞날이 참 밝구나, 밝아. 내가 수이키아 성 사람이라 다행이야. 멍청이,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어쨌거나 넌 낙오된 거잖아. 지금 우리 세 명의 낙오병이 무슨 무시무시한 전설의 모험이라도 시작하게 될 거라 생각한 거냐? 꿈도 야무지지, 난 지금 그저 우리 부대에 복귀할 궁리밖에 안 한다고. 물론 편력기사다운 모험을 하게 된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좀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지금 우린 전쟁 중에 어쩌다 마주친 낙오병들이지 평화기에 어디 야산에서 만난 모험가들이 아니란 말야.
체엣, 그래. 대개 소설 속 이름난 기사들은 십대에 이미 그 싹을 보인다지. 이십대 중반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저 킬리온은 현실에선 역시 빠른 경우지만 소설의 설정으로 보면 늦깎이라고.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열여섯밖에 안 된 너야 그런 궁리도 하겠지만 난 스물이야. 검의 기본도 없으니 많이 늦었다고. 이제부터 검의 신이라도 만나 본격적으로 수련하지 않는 이상에야 돈키호테 같은 바보밖에 안 된단 말야. 하기사 그 노망난 에이모르의 자칭 편력기사는 그래도 말년에 한번 일어섬으로써 후세에 길이 감명을 주는 이야기를 남기긴 했지만.
“그나저나 부대복귀는 어디로 가야 할 수 있죠?”
나는 하품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한 채로 물었다. 잠깐 뜸을 들인 후, 여기에 대답한 건 용감한 단기필마의 기사 슈라드가 아니라 무표정한 낙오기사 메넴이었다.
“내일, 아니 오늘 날이 밝는 대로 데그로 간다. 킬리온이 간 곳이 그곳이니 아군도 그쪽에 있겠지.”
이런, 정확한 건 아니란 말이잖아. 길 하나 모르는 이 낯선 땅에서 어떻게 우리 부대를 찾아내나. 여기에 올 때야 남들 가는대로 가면 됐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잖아. 내 동요를 알아챈 건지 메넴 십인장은 부연설명을 더해줬다.
“내일 군의관들도 이동한다. 따라가면 돼.”
아, 다행이다. 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어떤 대비를 보여주는 것 같은걸.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다는 견습기사는 어디로 갈지도 모르니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전장에서 적한테 당해 죽은 척이나 해야 했던 견습기사는 일단 갈 데는 알고 있으니. 어느 쪽이 멋진 걸까. 뭐, 알 바 아니다. 어쨌거나 하루 종일 지친 상태에서 누구의 장광설을 들어주느라 난 지금 무지 피곤하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잠이나 푹 자고 싶으니까.
자작
- [장편] 귀환기 4. 승리자, 낙오되다 -2- 2006.02.21
- 선線 (下) 2006.02.21
- [장편] 귀환기 4. 승리자, 낙오되다 -1- 2006.02.21
- 선線 (上) 2006.02.21
- [장편] 귀환기 3. 병사, 승리하다 -6- 2006.02.21
- [장편] 귀환기 3. 병사, 승리하다 -5- 2006.02.21
- [장편] 귀환기 3. 병사, 승리하다 -4- 2006.02.21
- [장편] 귀환기 3. 병사, 승리하다 -3- 2006.02.21
- [장편] 귀환기 3. 병사, 승리하다 -2- 2006.02.21
- [장편] 귀환기 3. 병사, 승리하다 -1- 2006.02.21
5.
“자, 여러분. 모두 찰흙 가져왔지요?”
“네-.”
즐거운 즐거운생활 시간입니다. 저는 이 시간이 정말 기다려집니다. 가끔은 나가서 줄넘기도 하고요, 재미있는 놀이도 하고요, 이렇게 신기한 찰흙 만지기나 그림 그리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니까요. 오늘은 찰흙으로 뭘 한대요. 책상에 신문지를 깔아놓으니까 제 욕을 하는 나쁜 말들이 가려져 안 보입니다. 성진이는 자기 책상에 ‘윤성진 똥개’라고 써 있으니까 제 책상에 ‘김으녕 더 똥개’라고 복수해 버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윤성진은 더더더 똥개 남 이름도 모른대요’라고 썼고요. 지금 제 책상은 굉장히 지저분합니다. 성진이 책상도 마찬가지지만요. 아니, 더 더러울 겁니다. 성진이는 책상에 낙서도 많이 하거든요.
“오늘은 찰흙으로 각자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봐요. 찰흙은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으니까 안 쓰는 덩어리는 계속 주물러야 해요.”
선생님 말씀을 따라 저는 찰흙을 뭉텅 떼어 강아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쑤시개랑 나무젓가락으로 뼈를 만들고 거기에 살을 붙여야 한답니다. 손에 차가운 찰흙이 닿으면 진흙처럼 묻으면서 요렇게조렇게 변하는 게 참 신기합니다. 만들면서 저는 저도 모르게 찰흙이 들었던 지저분한 봉지를 성진이 자리로 밀었나 봅니다. 성진이가 발끈해서 자기 쓰레기까지 저한테 밀었습니다. 저는 화가 났지만 암말도 않고 쓰레기를 주워서 제 책상 옆에 달려있는 고리에 걸린 쓰레기봉지에 버렸습니다.
“그렇지. 쓰레기는 쓰레기봉지나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지. 우리 은영이 참 잘했어요. 여러분도 쓰레기는 친구 거랑 한꺼번에 모아서 쓰레기봉지나 쓰레기통에 버려요. 바닥에 흘린 것도 서로 줍고. 자기 자리 아니라고 청소 안 하면 나쁜 어린이에요.”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저는 성진이를 보고 자랑스럽게 웃었습니다. 성진이는 나쁜 어린이라서 자기 쓰레기도 남의 자리에 버립니다. 성진이는 못 본 척 했습니다.
선생님은 즐거운생활 시간이 끝나자 자기가 만든 작품을 들고 나오라 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만든 강아지를 검사받으려고 일어서서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앞에 애가 가방을 제대로 안 걸어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제가 잘못해서 가방을 밟고 넘어졌습니다.
“아야!”
엉덩이가 너무 아픕니다. 눈물이 다 나올 정도입니다. 앞에 앉은 미진이가 놀라서 자기 가방을 줍습니다.
“어어, 미안해. 은영아, 괜찮아?”
“어엉, 괜찮아.”
선생님이 놀라셔서 달려오셨습니다. 저는 엉덩이를 주무르며 일어섰습니다. 다행히도 바로 옆에 있는 2분단 책상에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분단이 다섯 개나 되니까 분단 사이가 좁은데 정말 운이 좋습니다.
“은영이, 괜찮니? 어디 다치진 않았니?”
“괜찮아요, 선생님.”
“여러분들, 자기 가방은 항상 걸상이나 책상 고리에 잘 걸어놔요. 가방이 바닥에 있으면 이렇게 다른 사람이 다칠 수도 있어요.”
선생님은 다정하게 저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를 검사받으려고 책상 위를 보니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제 강아지가 어디 갔을까요? 아까 넘어지면서 책상이 흔들려 떨어졌을까요? 저는 너무 놀라서 바닥을 보려다가 성진이 책상을 봤습니다. 너무합니다. 성진이가 자기 기린 옆에 제 강아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리 내! 그건 내거야!”
저는 너무 화가 나서 제 강아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진이가 제 강아지를 붙잡았습니다.
“금 넘어왔어. 이젠 내거야.”
“그런 게 어딨니? 이건 내가 만든 거야!”
“금 넘었다니까, 이 바보가! 이리 내!”
“이 나쁜 놈!”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부끄럽게도 욕을 해버렸습니다. 제 얼굴이 뜨거운 게 빨개졌나 봐요. 저는 일부러 씩씩거리면서 다시 제 강아지를 잡아당겼습니다. 성진이도 강아지를 잡아당겼습니다.
“너희들, 뭐 하니. 친구들끼리 싸우면 안 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여기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저는 뒤로 넘어가버렸습니다. 뒤에서 선생님이 잡아주셔서 다행히 다치진 않았지만요. 놀라서 손을 보니 제 강아지가, 다 만들어서 얼만큼 말리기까지 했던 강아지가 찰흙뭉텅이로 변해 뚝 부러져있었습니다.
“흐‥흐으‥으아아아앙!”
성진이는 자기 손에 들린 강아지 반 토막을 보고 드디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 미안. 미안해.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으아아아아앙! 물어내! 물어내란 말야, 이 나쁜 놈아!”
저는 목을 놓아 울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이 어쩔 줄 몰라 하시며 달래셨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성진이는 정말로 욕을 들어 마땅한 나쁜 애입니다. 성진이는 제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기도 울어버렸습니다.
“흑, 어흑, 네가, 그러니까, 끅, 부서졌잖아. 으아앙!”
“흐윽, 흐윽. 엉엉.”
교실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습니다. 쉬는 시간인데도 애들은 화장실에 가거나 레쓰링을 하지 않고 모두 둘러서서 저랑 성진이가 우는 걸 구경했습니다. 애들도 나쁩니다. 남 우는 거 구경만 하는 이 애들도 모두 커다란 몽둥이로 한대씩 맞고 혼나야 합니다.
선생님은 인상을 쓰셨습니다. 선생님이 화내시는 걸 본 적이 없었던 저는 울다가도 무서워져서 끅끅거리며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선생님은 이마를 짚으셨습니다.
“너희 둘, 오늘 수업 끝나고 남아라. 쉬는 시간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화장실 가요. 수업 중에 나가지 말고.”
무섭습니다.
6.
애들이 다 가버리자 교실은 텅 비어버렸습니다. 저랑 성진이만 같은 책상에 걸상만 멀리 떨어뜨려 놓고 앉아있습니다.
좀 있으면 오후반인 2학년 언니들이 올 텐데. 언제까지 여기 앉아있어야 할까요. 무섭습니다.
“왜 선생님은 안 오시는 거야.”
성진이가 다른 데 보고 투덜거렸습니다. 누가 할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성진이를 노려봤습니다.
“너 때문에 남게 됐잖아.”
“미안해.”
저는 삐져서 톡 쐈는데 성진이는 이상하게도 순순히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왕 한 말 끝까지 해야지 안 그러면 어정쩡해서 이상해집니다.
“뭐가 미안한데? 잘난 네가 뭘 잘못했는데?”
“미안하다고. 미안하댔잖아. 그래. 내가 네 자 맘대로 빌려간 거 잘못했어. 하지만 친구끼리 그런 잘못은 용서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성진이는 불퉁거리며 여전히 복도 쪽 벽을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슬슬 일찍 온 2학년 언니들이 복도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성진이가 이렇게 말하니까 저도 괜히 미안해졌습니다. 사실 성진이만 잘못한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도 오빠 물건을 제 맘대로 가져온 것이니까요. 오빠는 아직 모르지만 오빠가 알면 저를 혼낼지도 모릅니다. 오빠가 성질이 나빠서 화를 낼까요? 아니에요. 저라도 제 크레파스를 오빠가 맘대로 가져가거나 하면 울어버릴 겁니다.
“그럼 용서해 주면 되는 거네.”
저는 괜히 운동장 쪽 창을 쏘아보며 말했습니다. 성진이가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해 주는 거야.”
“지우개 돌려줄게. 사실 난 그거 안 썼어.”
“강아지 부순 것도 용서해 줄게.”
“나만 잘못했나? 나만 나쁜 애인가 뭐.”
“그래. 알았어. 나도 잘못했어. 참말로 자는 내 거 아니었어. 나도 우리 오빠 거 허락 안 맡고 가져왔어. 그런데 내 것처럼 너한테 화냈어. 미안해.”
“용서해 줄게. 이젠 낙서도 안 할게.”
“나도 낙서 안 할게.”
저는 슬쩍 고개를 돌렸습니다. 성진이가 멀뚱멀뚱 칠판 위에 걸린 태극기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슬쩍 웃음이 나왔습니다.
“자, 악수.”
저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성진이는 저를 쳐다보더니 쑥스러워 하면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손을 내어 제 손을 잡았습니다.
“악수.”
“악수.”
우리는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면서 웃었습니다. 성진이는 이렇게 착한 애인데 왜 나쁜 애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성진이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런데 은영아. 우리 이거, 금 지우자.”
“어떻게 지워? 칼로 팠잖아.”
저는 책상 위를 내려다봤습니다. 칼로 판 선은 깊진 않았지만 연필도 아니라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지?”
성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냈습니다. 제 거였습니다.
“이거 가져가.”
그러고는 성진이는 자기 지우개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박박 문질렀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뭐 하는 거야? 낙서 지워?”
“아니. 이걸로 금을 지워버리자.”
지우개로 칼자국을 지운다고요? 성진이는 바보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성진이가 하는 걸 봤습니다. 성진이는 제가 목욕 안 한다고 떼쓰다 잡혀 때를 밀었을 때 만큼이나 굵은 지우개가루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을 뭉쳐서 주무르더니 성진이는 칼로 판 선에 지우개가루를 꾹꾹 눌러 넣었습니다. 아, 뭘 하려는지 알겠습니다.
“응, 그렇구나. 알았어.”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 지우개를 책상에 대고 박박 문질렀습니다. 성진이가 제 책상에 판 낙서들이 이상하게 안 보입니다. 저는 생긋 웃으며 지우개질을 해서 지우개가루로 금을 지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눌러 넣고 눌러 넣어도 금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큰일입니다. 복도가 시끄러운 게 금방이라도 2학년 언니들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어쩌지? 안 없어져.”
성진이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저도 거의 울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교실 뒷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2학년 언니들이 들어온 건가요?
“잘 되가니?”
아, 선생님이었습니다. 어휴. 선생님도 참. 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시는 걸까요.
“선생님, 어디 계셨어요?”
“아아. 너희들 책상이 낙서가 가득해 보기 좋지 않잖니. 그래서 잠깐 나갔다 왔단다. 나와보렴.”
저랑 성진이는 책가방을 매고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책상을 번쩍 들더니 복도에 내시고 복도에 있던 다른 새 책상을 우리 자리에 집어넣으셨습니다.
“이 작업이 끝날 때 까지는 저 책상을 쓰렴.”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책상을 가지고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저랑 성진이는 영문도 모르고 졸졸 쫓아갔습니다.
한참 가니까 계단이 나왔습니다. 옥상에 올라가는 계단인데 저희가 올라가지 못하게 항상 철문이 잠겨있는 곳입니다. 이 앞에 너른 바닥이 있는데 신문지가 잔뜩 깔려있었고 페인트통도 있어 이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저랑 성진이는 서로 쳐다보며 코를 쥐었습니다.
“자, 보렴. 마술이다. 이제 이 책상은 새것처럼 깨끗해질 것이다.”
선생님은 빙긋 웃으시며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페인트 통에서 커다란 붓을 꺼내셨습니다. 선생님은 붓으로 책상 위를 슥슥 칠하셨습니다. 와! 입학하던 날 봤던 그 새것 같은 책상이 보입니다! 정말로 마술 같습니다! 칼로 그어놓은 금들도 선생님이 붓으로 한번 칠하니까 안 보이게 되었습니다! 저랑 성진이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몇 번 붓칠하신 후 선생님은 웃으며 저희를 돌아보셨습니다.
“너희가 화해한 기념이란다. 이젠 싸우지 말고, 책상에 칼로 금을 긋거나 하지도 마. 책상이 아파하잖니. 원래 둘이 같이 쓰게 되어있는 책상인데 혼자 쓰겠다고 금을 그어버리면 너희 둘을 다 사랑하는 책상이 슬퍼한단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너무 슬펐습니다. 저랑 성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는 책상에 금을 긋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날 저랑 성진이는 같이 손을 잡고 신발주머니를 크게 휘두르며 집에 돌아갔습니다.
7.
“어, 젠장. 왜 이딴 걸 숙제라고 내준 건지. 참, 입시에 도움 하나 안 되는 짓거리를.”
오빠가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왔습니다. 오빠는 방문을 쾅 닫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저는 슬쩍 오빠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계지리라던가요, 오빠의 알록달록한 그림숙제는 거의 끝나 있었습니다. 아직 칠은 안 했지만 깨끗하게 볼펜으로 그려진 세계지리 모양 안에 책에 있는 것 같은 점선은 연필로 반듯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참 이상도 하지요. 왜 금을 그어놨을까요? 같이 사는 세계지리인데. 우리나라도 미국도 소련도 지구 안에 있지 않아요?
저는 선생님이 하셨던 게 생각났습니다. 선생님은 페인트로 깨끗하게 칠해서 저랑 성진이가 마구 그어놓은 낙서랑 금을 지워버리셨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빠 책장 위에 있는 제 크레파스를 꺼냈습니다.
“자아, 기다리렴, 세계지리야. 내가 아끼는 분홍색으로 깨끗하게 칠해줄게.”
저는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며 크레파스로 오빠가 그린 세계지리를 깨끗하게 칠했습니다. 볼펜은 어쩔 수 없지만 연필로 그은 건 다 크레파스에 묻혔습니다. 크레파스에서 나는 향기가 꼭 그 때 선생님이 쓰신 페인트 냄새 같습니다.
“야, 인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이코 깜짝이야! 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습니다. 오빠가 너무너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달려들더니 저한테서 도화지랑 크레파스를 빼앗았습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들어오지 말랬잖아! 이 자식이, 남의 숙제를 이따위로 만들다니!”
“왜 그래, 오빠? 바보같이 금 그어놓은 거 다 지우는 건데 뭘 화를 내고‥.”
“안 나가, 이 자식아? 맞고 싶어? 이 정신나간 것이, 왜 기껏 그어놓은 금을 다 지워!”
저는 얼른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쳐 나갔습니다. 오빠가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 있다가는 정말로 저를 집어던질 것 같습니다.
참, 어른들이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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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어린애들 식 말을 꾸미는 것도 어렵군요.;
저는 국민학교(당시에는 ‘국민’이었음) 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욕이란 걸 들어본 적이 없었고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초3이 되자마자 남학생들과 열심히 레슬링을 하면서 갑자기 욕이란 걸 일상어로 배우게 되었으니.(...) 어쨌든 저에게는 ‘놈’이란 말도 몰랐을 정도로 순진무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웃음)
인간이란 자기가 만든 제도에 종속되어 없던 금을 긋고도 뻔뻔합니다.
4. 승리자, 낙오되다
1)
“이제 뭘 하죠?”
나는 찢어진 막사 조각이 땅바닥에 늘어진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주저앉으며 툭 뱉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걸을 힘도 없고, 젖은 옷이 몸에 찰싹 붙어서 바람 한번 불 때마다 맨살을 내놓은 것처럼 춥고, 머리가 징하게 울려대서 어지러워 죽겠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생각은 물론이요 숨쉬기도 할 수만 있다면 그치-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망발이야. 이게 그 술기운이란 건가? 정신이 멍해지는걸. 아니, 그래도 어떻게 한 모금 마시고 취하겠어. 그저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견습기사는 여기저기를 기운차게 뒤지고 다니며 내 질문은 들은 척도 안했다. 뭐냐, 난 이 상황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거냐? 이거 약 오르네. 그보다도 지금 뭘 하는 거지, 저 녀석?
“저기, 기사님. 지금 뭐 하십니까요?”
“불붙일 걸 찾는 중이다.”
녀석은 뚝 잘라 대꾸했다. 무슨 대나무 쪼갠 것 같은 대답이군.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드냐.
“아군 진지로 갈 겁니까?”
“내 생각인데, 아군도 없을 것 같군.”
어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군도 없다고? 물론 전투 뒷정리를 하는 손길은 아무데도 없고 하지만 왜? 아군이 당장 갈 데가 있‥긴 하구나.
“킬리온이 정말로 졌다면, 이겠죠. 적은 졌고 아군은 전투 뒷정리를 할 틈도 없이 여길 떠났다고 치면 아군은 그 적들을 쫓아갔겠죠.”
그게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여기까지 건너왔으니 대공님의 목적은 킬리온의 박멸일 테고 따라서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 쫓아가겠지. 팬으로서의 본분은 다하는 거야.
녀석은 대꾸하지 않고 부산히 움직이며 막사고 목책이고 다 들쑤셔댔다.
에이모르 군은 우리보다 병력이 많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신병이 천이백 명쯤 되고 이삼백 명이 성읍에 남아있던 고참들이다. 예메크 기병 칠백을 더해서 샌다면 이들 이천백 내지 이천이백의 군사가 홍사자 군단의 천인대 넷에 스테로나드 천인대 하나를 더해 오천 명은 되는 적을 오늘 상대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몇 년간 우리 땅을 돌아다니면서 병사 수가 꽤나 줄었겠지만 단순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하룻밤 잔 진지이다. 혼자서 밤을 새워 뒤적여도 모두 조사할 순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친구는 여길 조사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횃불거리를 찾으려는 모양이니까 금방 어떻게 되겠지만.
내가 이런 시시껄렁한 생각이나 하며 얌전히 주저앉아있는 건 절대로 게으르거나 해서가 아니다. 큰 전투를 치르면서 부상을 입어 피곤하기 짝이 없는 데다 위계상 상관인 저 녀석이 날더러 뭘 하라고 하지 않았으니 짬을 내서 쉬는 게 경제적인 건 정한 이치 아닌가.
“부싯돌 있나?”
갑자기 녀석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가 저 녀석이 못 봤을 거란 데 생각이 미쳐 입으로 말했다.
“없는데요.”
“그 소주 이리 내.”
술? 뭐야, 신경질이라도 났냐? 술 마시고 뭐 하게? 그러고 보니 하 수상한 녀석이다. 견습기사면 아무리 나이를 많게 잡아도 열아홉일 텐데. 물론 경제사정이 안 좋거나 해서 평생 직업적으로 견습기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건 소수의 예외라 치고. 어쨌든 그런 어린 녀석이 그 안달루스 소주 같은 걸 진즉에 알고 지냈다는 듯이 벌컥벌컥 마시다니. 행실 나쁜 견습기사였나? 나는 머릿속으로 구시렁대는 걸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일어나서 술병을 던지려다 마개가 없는 걸 떠올리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기사님, 아까 저더러 뭐라고 한 거죠? 에이모르 말인가요?”
“그런데.”
녀석은 술병을 받아들더니 손에 들고 있던 뭔가에 아낌없이 부어버렸다. 으악, 저 아까운 술을! 물론 난 술맛을 잘 모르고 방금 먹어보니 맛대가리도 없고 해서 귀하다고 말만 들었던 이걸 딱 한모금만 마시고 말았으니 아깝네 어쩌네 할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덕분에 남은 양은 녀석이 든 걸 적시기에 충분했다. 막사를 지탱하는 대에 막사의 천 조각을 둘둘 말아 횃대를 만들었군.
“에이모르 말을 잘 알아요?”
“안달루스 출신이니까.”
아까부터 우리들의 대화가 너무 싱겁게 이어진다는 기분이 드는데. 그도 그럴게 난 만사가 귀찮고 이 녀석은 말수가 적은 듯한 모양을 보여서다. 그런데 안달루스 출신이라니. 혹시 루갈도처럼 라이첸이나 수이키아로 도망쳐 견습기사가 된 건가? 안달루스는 위치가 안 좋은 탓에 꽤 오래전부터 킬리온의 점령 하에 있던 성 아닌가. 갑자기 녀석에 대해 궁금한 게 무지무지 많아졌지만 말을 걸 분위기는 아니었고 또 이 친구도 친절하게 대꾸하는 성격은 아닌 듯해서 나는 절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나저나 부싯돌도 없는데 어떻게 홰에 불을 붙이려는 걸까. 녀석은 잠깐 주저하다가 나에게 횃대를 척 맡겼다. 내가 얼결에 그걸 들고 구경하니 녀석은 멀쩡한 팔 하나로 다친 팔 쪽 주머니에서 뭘 뒤적뒤적 꺼내들었다. 조그만 상자 같은 것이었다. 거기서 이쑤시개 같은 걸 꺼내더니 녀석은 다친 팔로 상자를 잡고 이쑤시개로 상자 옆을 착착 그었다. 뭐 하는 거지? 그런데 놀랍게도 이쑤시개 끝에 조그만 불이 치이익 하고 붙었다! 이, 이게 무슨 도깨비장난이야!
“뭐 하나. 횃대 이리 대.”
녀석의 차가운 말에 나는 허둥거리며 횃대를 들이댔다. 조그만 불꽃은 둘둘 말린 천에 닿더니 거기에 스며들 듯 약해졌는데 곧 확 하고 불이 붙었다. 술이 묻은 데로는 불이 활활 타진 않았지만 어쨌든 천이 타면서 그럭저럭 앞을 밝힐 불이 생겼다. 녀석은 잠깐 한숨을 쉬더니 불붙은 이쑤시개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쑤시개에 붙은 불이 핏 하고 꺼졌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뭐랍니까요? 어째서 이쑤시개에 불이 붙었지?”
“성냥이다.”
녀석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옆에 뉘어둔 군단기를 주워들었다. 내가 횃대를 들게 할 참인가 보다. 성냥이라고? 처음 듣는걸. 이건 또 무슨 칼리가라 장난감인가.
그렇더라도 참 정나미 떨어지는 녀석이다. 안달루스 사람들은 듣기로 대단히 정열적이고 쉽게 흥분하며 수다 떨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연애하는 걸 엄청 좋아한다던데 이 녀석은 뭔가. 정말로 안달루스 출신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 알았던 건가. 왜 이렇게 쌀쌀맞은 건가. 물론 이 녀석은 나와 초면이니 낯을 가려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만 첫인상이 참, 사람 겸연쩍게 한다.
녀석은 더 볼 게 없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갔고 나는 코뚜레 꿰인 송아지마냥 엉거주춤하게 쫓아갔다.
“저기, 성냥이라굽쇼? 그런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서 왜 부싯돌을 찾았는데요? 그냥 칙 하고 그으면 불이 생기는데요.”
“성냥개비는 한 번 쓰면 두 번은 못 쓴다.”
간편한 대신 한 번 쓰면 두 번은 못 쓴다고? 쓰기가 영 안 좋지만 닳고 닳을 때까지 쓸 수 있는 부싯돌이랑은 또 다르구나. 거 쓰기가 참 조심스럽겠어. 그런데 저런 귀한 물건은 어디서 난 걸까? 속으로는 자꾸만 궁금한 것들이 둥실둥실 떠올랐지만 당장은 물어도 다 대답해줄 성 싶진 않고, 또 빨리 우리 무리들을 만나는 게 중요하기에 나는 떠오른 생각들을 한꺼번에 뒷덜미를 잡아 끌어내렸다. 어쨌든 몸을 움직이니까 으슬으슬 떨리는 게 좀 나아지는 느낌이다.
불을 발 아래로 비추고 조심조심 진문을 지나 언덕을 내려갔다. 사실 이것도 위험한 거 아닐까? 우리처럼 길 잃고 헤매는 에이모르 군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무리들이 이 너른 평원에서 마주치면 어떤 꼴이 날까나. 그러고 보니 난 당장 쥘 든든한 무기가 없다. 황급히 혁대를 만져보니 단검은 아직 덜렁거리고 있지만 이 짧은 칼로 창을 든 적을 찌를 자신은 없다.
“저기, 우리만 낙오한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불을 들고 있으면 에이모르 군도 몰려드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여긴 에이모르 땅인데 그냥 지나가던 에이모르 사람이라도 있으면‥.”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예고 받지만 아무도 살면서 신경 쓰지 않아."
그러니까 좋게 생각하자고, 라고 한 마디 덧붙였으면 진짜 안달루스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는걸. 하지만 이 무뚝뚝한 견습기사 나리는 자기 할 말만 툭 뱉고는 척척 걷기만 한다. 저 친구가 스스로 한 말에 취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죽을 걸 신경 안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나만 머쓱해지고 초조해지게 하는 담담함이다. 정말 마음에 안 드네. 친구가 퍽이나 적으시겠어.
사람의 말이 뚝 끊긴 동안 언덕은 금세 끝나버리고 내가 새벽에 고래고래 떠들던 곳까지 왔다. 가끔 말 시체 같은 게 차이는 게 영 걷기 불편하다. 게다가 강안개가 평원으로 슬금슬금 넘어와서 먼 곳은 잘 안 보인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요?”
대답이 없다. 하긴 시계도 없고 하늘도 저 모양이니 누구라도 대답하기 곤란하겠다.
“저기,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건 좀 확실히 알고 갑시다. 우리 편도 어디 가고 없을 거라면서요?”
“일단 아군 진지가 있던 곳으로.”
“아군도 없을 거라면서요.”
녀석은 대꾸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 일의 시종 정도는 설명해 줘야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대강 방향이라도 잡을 수 있을 거 아닌가. 뭔가. 자기 혼자 다 알아서 한다 인가.
“기사님, 그러니까 왜 거기로 가는데요?”
“메넴이라고 불러. 이렇게 급히 떠나면 중상자는 데리고 갈 수 없다. 몇 명 정도는 남아있겠지.”
에, 메넴? 아까 이름이 뭐라 했더라? 길어서 잊어버렸는데 그거 애칭인가. 어쨌거나, 알다시피 우리 동맹 사람들은 나이나 위계가 위인 사람을 함부로 이름으로 부르면 버릇없는 놈 취급하잖은가. 뭘 뒤에 붙여 불러야만 할 것 같은데.
“이렇게 시야가 안 좋은데 괜히 돌아다니다가 길만 잃는 거 아니에요?”
괜히 횃불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일렁이는 빛그림자에 언뜻언뜻 안개가 비치고 뭔가가 불길하게 반짝였다가 기괴한 음영이 진다. 그쪽에는 필시 죽은 사람이 엎어져있으리라. 메넴이라는 친구는 대꾸가 없었다. 말도 하기 싫은 거냐?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여기에 살아있는 사람이 나와 너뿐이야. 제발 너도 나 살아있다고 말 좀 해 봐.
“속도 허전한데요. 저녁끼니때는 지났다는 뜻이겠죠? 메넴 십인장님.”
오, 그렇지. 십인장님이라고 하면 되겠어. 나는 속으로 히죽 웃으며 내 눈치 빠름을 자찬하고 녀석을 슬쩍 봤다. 횃불에 비친 십인장의 낯은 잠깐 찌푸려졌다가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나와 비슷한 연배 같은데 원래 무표정에 익숙한 얼굴인가? 다른 표정을 붙이면 떨어져나갈 것만 같은걸. 하지만 눈매만은 날카롭고 뭘 생각하나 알 수 없어보였다. 그는 불편한 팔에 군단기를 대충 끼우고 멀쩡한 손으로 품을 잠깐 뒤적이더니 거무스름한 덩어리 하나를 꺼내 던져줬다. 나는 횃대를 잡지 않은 손을 뻗어 얼결에 그걸 잡아챘다. 뭐지? 좀 딱딱한데 가래떡을 구우면 생기는 그런 그을음 같은 게 전체적인 색을 이루고 있다. 먹는 건가?
“fan이다. 에이모르 인들의 주식이지.”
“먹는 건가요? 어, 그럼 십인장님은요?”
그는 됐다는 듯 고개를 조금 삐딱하게 흔들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걸 살펴보았다. 에이모르 인들의 음식이라면 아까 적진을 뒤적일 때 찾아낸 건가보다. 큼큼. 구수하다는 말이 적당할 것 같은 냄새가 살풋 이는 곰팡내랑 섞여나는걸. 갑자기 배가 무지 고파졌다. 나는 횃대를 쥔 손을 써서 주먹을 쥔 채 그 기묘한 덩어리 거죽에 조금 핀 곰팡이를 탁탁 쓸어냈다. 손이 움직이면서 불티가 날렸다. 생각건대 내가 쓸데없는 잡담을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십인장 대우 견습기사는 말없이 뒤를 따르는 이 분위기는 참 평화로운걸. 배경이 막 전투가 끝나 여기저기서 시신이 발에 걸리고 안개까지 음습하게 끼고 있어 영 안 어울린다는 게 문제지만. 어, 그러니까 난 지금 무서워서 자꾸 말을 꺼내고 있는 건가?
“멈춰.”
갑자기 십인장이 자세를 좀 낮추면서 허리의 칼에 손을 가져갔다. 홰를 쥔 팔에 소름이 좍 돋았다. 나는 엉겁결에 우뚝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허겁지겁 빵인가 하는 걸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후들거리는 오른손을 조심스레 허리로 가져가려다가 깜짝 놀라 왼손으로 칼을 뽑았다. 홰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지. 나는 얼른 양손에 든 걸 바꿔 쥐고 왼손에 들리게 된 횃불을 십인장이 바라보는 쪽으로 비췄다. 자, 갑자기 분위기가 배경과 잘 어울리게 되었는걸. 뭐가 나온 거지?
귀를 세워도 비어있는 평원 특유의 서늘한 소리와 안개가 이리저리 쓸리는 소리만이 들린다. 횃불이 비치는 데를 주의해서 보니 안개가 유령이 날아다니듯 우리 곁을 휙휙 스치는 게 잘 보인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구나. 뒷목이 서늘한걸. 이런, 난 지금 무장이라고는 철모도 갑옷도 없이 기껏 팔뚝보다 짧은 단검이 하나라고. 그, 그러니까 싸우는 건 그쪽의 프로로 키워질 예정인 저 견습기사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자아, 침 한번 삼키고. 침착하자. 뭐가 됐든 간에 죽기보다 더 하겠나. 뭐가 안개 저편에 있는 거지?
십인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검을 놓고 앞으로 걸어갔다. 나도 얼른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쫓아갔다.
먼저 코가 반응했다. 비릿한 피냄새가 언뜻 코를 스쳤나 싶었다. 횃불을 비춰보니 그쪽에는 무더기로 시체가 뒤엉켜있었다. 아직 부패할 시간은 없었으니 시체 썩는 역한 냄새까지는 나지 않나 보다. 그 위를 바람이 스치면서 안개가 베일 덮이듯 깔렸다가 어느 순간 벗겨져나갔다. 안개가 죽은 자를 애도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저 불쌍한 사람들을 이렇게 멀뚱멀뚱 쳐다보는 건 사람을 욕보이는 것 같이 여겨졌다.
그런데 저 고약한 십인장 녀석은 시체무더기로 곧장 다가가더니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불 가져와.”
“에엣? 누, 누구 거기 살아있기라도 해요?”
“가져와. 안 보이잖아.”
뭐지? 나는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려고 일부러 성큼성큼 걸어서 십인장 앞으로 나갔다. 제길, 난 단검 다루는 건 풋내기란 말이야. 여차하면 녀석이 알아서 칼을 빼겠지.
자, 이제 죽은 사람들 앞이다. 어쩌지?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서거나 하진 않겠지?
그때 내 귀에 희미한 신음소리 같은 게 잡혔다.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번쩍하고 전율이 달렸다. 우하, 시체가 사람 잡겠어!
“누, 누, 누구냐! 시체면 얌전히 있고 산 사람이면 손들어봐!”
들리는 손은 없었다. 대신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얼빠진 어조로 대답했다.
“거기‥ 동맹군이오? 팔을 꺼내주면 손을 들도록‥ 하지.”
하, 아하하? 산 사람인가? 나는 횃불을 칼 잡듯 겨누고 슬금슬금 다가갔다. 잘 보니 엉켜있는 사람들은 사후경직으로 몸이 뒤틀리면서 그런 모양이 된 거고, 서로간에 조금씩 몸이 겹쳐있긴 하지만 차곡차곡 쌓여있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덜컹 하고 꿈틀거리며 거세게 기침을 해댔다.
“쿨럭, 쿠울럭! 커험! 허헛. 으음. 동맹군‥이오?”
“기침할 기운은 있으신가 보네요. 그런데요.”
“잘 됐군. 크흠, 흠! 쿨럭. 나도 동맹군이오. 백인장이고. 좀 도와주시겠소?”
그리고는 다시 몸을 다 뒤집으며 기침을 한다. 추위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나도 좋지만은 않은걸. 이 계절에 이 날씨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돌아다녔으니. 에, 에취!
“흐응. 알았어요. 이봐요, 메넴 십인장님?”
십인장은 벌써 내 옆에 와 있었다. 그는 나를 도와 시체들을 밀어내며 백인장이라는 남자를 꺼냈다. 음. 비에 젖은 채 이렇게 차가운 맨땅에 오랫동안 누워있었으니 얼마나 추웠을까. 게다가 허리 아래로 시체들에 깔려 꼼짝도 못 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주변을 치우고 남자를 꺼내니 퍼렇게 질린 얼굴이 거의 졸도 직전의 모양으로 드러났다.
“다리를 다쳤습니다. 시체의 무게로 용케 지혈이 된 모양입니다.”
십인장은 상상하면 끔찍한 내용을 ‘땅에는 흙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조롭게 설명할 수 있는 재능이 있나보다. 나는 진저리치며 한 팔로 사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겨드랑이를 안아서 땅바닥으로 옮겼다. 십인장은 나한테서 횃불을 받더니 남자의 상처를 살폈다. 한쪽 허벅지에 깊은 상처가 난 듯 했는데 피가 이미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발을 움직일 수는 있겠습니까?”
“가능한‥데. 쿨럭! 당신들은?”
“십인장 대우 견습기사 메난드로스입니다. 이쪽은 십인병 스렌돌프. 당신은?”
“라이첸 제3 천인대 소, 쿨럭, 쿨럭! 소속 제2 백인대장 길갈레온 길갈레이. 수이키아 군단에 객원 백인장으로 있네.”
헤에, 라이첸에는 천인대가 셋이나 있나 보네. 정말로 군단 하나를 채울 명수가 되나보다. 내가 묘한 데서 감탄하는 동안 십인장은 어떻게 해서 백인장의 상체를 세운 후 그에게 가까운 높이에 횃불을 들어 몸을 녹이게 도와줬다.
“발을 움직일 수 있다면 일단 신경은 다치지 않은 겁니다. 스렌돌프 십인병. fan 나눠드려.”
“이왕이면 다켄이라고 부르시죠. 스렌돌프라고 하면 노인네가 된 기분이라고요.”
역시 묘한 데서 투덜거리며 나는 빵을 꺼냈다. 좀 딱딱해서 그런지 움직이는 동안 군데군데 부스러져 있었다. 그걸 반을 갈라 하나는 덥썩 내 입에 물어버리고 하나는 쪼개서 백인장의 입에 물려줬다. 아저씨는 힘겹게 입을 움직이더니 허겁지겁 빵을 먹어치웠다. 나도 이게 그렇게 맛날까 싶어 천천히 씹어보았다. 음. 겉은 딱딱한 게 속은 부드럽고 말캉말캉한걸. 혀에 닿으면 녹아버릴 것 같네. 되도록 천천히 씹으려 했지만 어느새 내 입에 물렸던 빵은 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렸다. 우, 더 배가 고파진 기분이다.
그사이 십인장은 시체들 틈에서 버려진 군기 하나를 찾아내 천 조각을 찢은 후 아저씨의 상처에 단단하게 감았다. 재주가 많은 친구인가 보다.
“대충 기운 차렸으면 일어나지. 이대로 밤을 보내면 위험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팔다리가 다 멀쩡한 내가 아저씨를 부축하게 할 셈인가 보다. 나는 아저씨를 일으켰고, 아저씨도 힘을 내서 일어섰다. 잡고 있으니까 백인장 아저씨가 얼마나 추워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만 덜덜 떠쇼, 내 턱이 다 떨리니까.
“어디로 가나?”
“아군 진지로 갑니다. 어디까지 아시지요?”
“우리가 거의 이겼었지. 강을 건넜다가 저편에서 포위된 적이 이쪽으로 다시 넘어올 때 추격했었네.”
음. 기침이 잦아들고 말이 좀 똑바르게 나오는 걸 보니 아저씨도 많이 기운 차린 모양이다. 어쨌든 비틀거리는 걸음이나마 발을 옮기려 하시니 내가 힘쓸 일은 생각보다 적을 것 같다.
십인장은 횃불을 들고 우리를 선도하듯 앞섰다. 뭔가 전후사정에 대해 더 말을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없는 것이, 비록 안면이 생긴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녀석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입을 한번 비죽거린 후 조심스레 백인장 아저씨를 부축하며 뒤를 따랐다.
선線
-1991년 3월의 어느 날
1.
“은성이 오빠, 은성이 오빠. 뭐 해?”
“저리 가. 바빠.”
오빠는 아까부터 책상 앞에 앉아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저는 심심해 죽겠는데 오빠는 놀아줄 생각을 안 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다 바빠지나 봅니다. 저는 오빠가 이상한 거 하지 말고 저랑 놀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오빠아아.”
오빠는 대꾸도 안 합니다. 히잉. 오빠가 밉습니다. 맨날 오락실에서 게임하고 놀기만 하면서 뭐가 바쁘다는 걸까요. 어른들은 귀찮으면 무조건 바쁘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는 오빠가 뭘 하나 궁금해서 오빠한테 갔습니다. 오빠가 또 저리 가라 할까봐 살금살금 까치발로 책상 옆에 간 다음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말을 걸면 싫어라하면서 또 쫓아낼 것입니다.
책상에는 커다란 종이랑 색연필이랑 볼펜이랑 자가 있었습니다. 오빠는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책을 펴놓고 계속 이상한 말을 꿍시렁거립니다. 자세히 보니까 오빠는 자를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 그려? 뭐 그려?”
“숙제야, 숙제. 저리 가.”
“숙제로 그림 그려? 재밌겠다.”
“재미? 숙제가 개뿔이 재미있다고. 세계지리란 건데,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나 나더러 직접 그려가지고 내란다. 젠장,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었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나라 지도 그리기도 힘들구만.”
오빠는 투덜거리면서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책에 있는 그림이랑 닮은 모양을 따라 그리고 있습니다. 꼬불꼬불한 선이랑 그 안에 이리저리 그어진 점선까지 자를 대고 반듯하게 그립니다. 와, 우리 오빠는 성질은 나쁘지만 그림은 잘 그립니다.
“근데 세계지리가 뭐야?”
“나라말이야, 나라. 우리나라, 미국, 일본, 소련, 뭐 이런 거 말야.”
“그림이 참 곱다. 알록달록한 게 뽑기 구슬통 같다.”
“쓸데없이 나라만 많은 게 뭐 곱고 그러겠어.”
“우리나라랑, 미국이랑, 소련이랑, 나라가 그렇게 있지? 분홍색은 다 우리나라야?”
“우리나라가 손바닥만한데 그렇게 크겠냐? 그냥 국경 구분하려고 그렇게 한 거잖아. 귀찮게 하지 말고 안 나가?”
오빠가 자를 들고 저를 노려봅니다. 오빠는 고등학생이라서 힘이 셉니다. 저를 번쩍 들어 던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얼른 나가버렸습니다.
오빠가 진짜 밉습니다. 그림만 그리고 있으면서 숙제한다고 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그림숙제를 할 때도 있지만 고등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니까 그런 거 안 하지 않을까요?
2.
저는 김은영이구요, 이제 국민 학교 1학년입니다. 몇 밤 전에 입학했고요, 선생님이랑 친구들을 많이많이 만났습니다.
학교에서는 재미있는 공부를 많이 합니다. 예쁜 책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기쁜 건 제 책상이 생긴 것입니다. 집에서는 고등학생인 오빠한테만 혼자 쓰라고 방을 줬답니다. 저는 엄마아빠랑 같이 자는데 책상도 없습니다. 맨날 바닥에 엎드리거나 밥상에 앉아서 그림 그리고 산수공부 해야 합니다.
“자아, 자기 번호 보고 자리에 앉으세요. 싸우지 말고 천천히 자리에 앉아요.”
입학한 날 선생님은 칠판에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숫자를 쓰셨습니다. 숫자는 제 번호입니다. 아침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는 순서랍니다.
그림을 세어보니까 두 줄씩 여섯 개인 상자가 다섯 개 있습니다. 이 륙 십이니까 십이가 다섯 개면 어, 그러니까, 이 오 십에 오 일은 오 더하기 일은 육‥ 모두 육십 개입니다. 헤헤헤, 저는 구구단 욀 줄 알고요, 두 자릿수 곱셈도 할 줄 압니다.
제 번호는 47인데 3분단 두 번째 줄 왼쪽자리입니다. 책상은 아주 깨끗했습니다. 낙서 한 점도 없습니다. 꼭 우리 오빠가 쓰는 책상을 엄마가 청소하고 난 것 같습니다. 크기도 오빠 책상만큼 큰데 저 혼자 책상을 다 쓰는 게 아닌 건 조금 아쉽습니다. 아직 국민 학생이라서 그런가봅니다. 제 오른쪽에는 15번인 성진이가 앉습니다. 짝도 생기고 책상도 생기고, 너무 두근거립니다.
“은영아, 이거 어떻게 해?”
성진이는 저보다 산수를 잘 못 합니다. 산수 시간이면 산수 익힘책을 보고 끙끙거리다가 그림만 그립니다. 그러다 모르는 거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건 8더하기 5잖아, 손가락 여덟 개에 발가락 다섯 개 더하면‥.”
하지만 저는 성진이가 좋습니다. 가끔은 말 거는 게 귀찮지만, 성진이는 읽기를 잘 하는데 읽기 시간에 책을 또박또박 읽는 걸 보면 너무 멋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글씨도 예쁘게 써서 선생님한테 칭찬을 많이 받습니다. 쓰기 시간에는 성진이가 저한테 연필 잘못 잡았다고 가르쳐 줍니다. 말하기듣기 시간에는 또 어떻고요, 어찌나 말을 잘 꾸미는지 선생님이 너무 좋아하십니다.
저는 성진이가 산수 할 때 도와주고 성진이는 제가 쓰기 할 때 도와줍니다. 저는 성진이가 좋습니다. 성진이도 제가 좋다고 합니다. 학교 가기가 너무 즐겁습니다.
3.
저랑 성진이는 참 친해서 가끔 물건도 서로 빌려줍니다. 언젠가 제가 필통을 깜빡하고 왔을 때 성진이는 연필을 빌려줬습니다. 성진이가 가위를 안 가져온 날에는 제가 가위를 빌려줬습니다.
오늘은 바른생활 시간에 시간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저는 돌돌 말린 도화지를 반대로 돌돌 말아서 싹싹 편 다음 가지고 온 작은 접시를 대고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옆에 보니까 성진이가 자를 안 가져왔는지 동그라미만 그려놓고 안절부절 못 하고 있습니다.
“성진아, 왜 그래? 자 안 가져왔어?”
“어, 어어.”
“산수 익힘책 대고 그려.”
산수 익힘책은 공책만큼 크고 얇아서 자가 없을 때 대고 그리기 좋습니다. 4학년이나 5학년 언니들은 이거 절반만한 읽기책이나 수학책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건 두꺼워서 대고 긋기 더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1학년이니까 산수 익힘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성진이는 제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가방에서 산수 익힘책을 꺼냈습니다. 제가 자로 요리조리 재보고 동그라미 한 가운데에 점을 찍었을 때 성진이가 어떻게 하나 보니까 산수 익힘책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줄을 긋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를 내려놓고 동그라미 위에 스물네 개의 점을 찍었습니다. 똑같은 크기랑 거리로 찍으려고 지우고 다시 찍고 하면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겨우 다 찍고 줄을 그으려고 자를 찾아보니 자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저는 자를 떨어뜨렸나 싶어서 바닥을 찾아봤지만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어, 이상하다. 자가 어디 갔지?”
자를 잃어버리면 큰일입니다. 오빠 건데 오빠 허락도 안 받고 가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빠는 고등학생이라서 아침 일찍 학교에 가버리기 때문에 제가 일어나면 집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냥 가져온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정말 큰일입니다.
“어어, 어디 갔지?”
금방이라도 울음이 날 것 같았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막 둘러보면서 자를 찾다가, 책상에 엎드려서 열심히 시간표를 그리는 성진이한테 도와달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성진이 등을 두드리니까 성진이가 일어나 저를 봤는데, 글쎄 성진이 손에 잃어버린 제 자가 있었습니다!
“야! 윤성진! 너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자 마음대로 가져가!”
저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빌려달라고 했으면 빌려줬을 텐데 왜 자기 멋대로 가져갑니까?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성진이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말했습니다.
“너 안 쓰고 있었잖아.”
“네 거 산수 익힘책 쓰랬잖아!”
“동그라미가 가려서 안 보여서 그릴 수가 없어.”
“너어, 나쁜 애구나! 다시는 자 안 빌려줄 거야!”
갑자기 성진이가 저한테 자를 던졌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보니까 성진이가 화를 막 냈습니다.
“더럽다, 더러워! 더러워서 안 쓴다! 나도 너 같은 애한테는 안 빌려!”
“뭐, 뭐야? 앞으로 너한테는 아무것도 안 빌려줄 거야!”
“나도 안 빌려줄 거야!”
성진이는 저보다 더 크게 고함치고는 산수 익힘책으로 책상을 팡 때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고 화나서 그만 큰소리로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저희들한테 뭐라고 하셨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결국 종이 칠 때까지 저는 시간표를 다 그리지 못했습니다.
4.
다음날 학교에 가니까 성진이가 먼저 와서 교실 뒤에서 남자애들이랑 레쓰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애들이랑 정답게 인사했지만 성진이는 못 본 척 했습니다. 저는 제 자리에 얼른 가서 책가방을 걸상에 걸고 앉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깨끗하던 책상 한가운데에 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줄 바로 옆에 바짝 붙여서 성진이의 즐거운생활 책이랑 필통이 놓여있었습니다. 저는 성진이가 책상에 낙서할 만큼 나쁜 애란 걸 알고 놀랐습니다. 그래도 어제 화낸 거 미안해서 오늘은 사과해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이런 나쁜 애한테는 제가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 윤성진!”
남자애들이 레쓰링 하다 말고 다 저를 쳐다봅니다. 거울 앞에 몰려서 서로 머리를 땋아주던 여자애들도 쳐다봅니다. 성진이는 제 말을 들은 체도 않고 윤혁이랑 마룻바닥을 뒹굴며 웃습니다. 저는 화가 나서 더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야, 이 일본놈 같은 나쁜 윤성진!”
어른들은 저런 나쁜 사람한테 일본놈 같다고 합니다. 저도 아주 쬐끔은 우쭐한 기분으로 주워들은 말을 한번 써 봤습니다. 이번에는 성진이가 바닥에 엎어져서는 고개를 휙 들고 저를 쏘아봤습니다.
“내가 왜 일본놈이냐?”
“일본놈이니까 일본놈이지.”
“그 말 뜻이나 알고 쓰냐? 바보.”
그럼 자기는 뭐 말 뜻을 아나요? 정말로 나쁜 애입니다. 저는 성진이 책으로 책상을 탕탕 두드렸습니다.
“이게 뭐야, 이게! 누가 책상에 낙서하래! 넌 정말 나쁜 애야. 나쁘고 일본놈 같아.”
그러자 성진이가 기분 나쁘게 실실 웃으며 일어섰습니다. 성진이는 저한테 어슬렁어슬렁 오더니 제 손에서 자기 책을 빼앗아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책 모서리로 책상 위의 선을 가리켰습니다.
“이 선 넘어오지 마. 여긴 내 자리야.”
“뭐야? 누구 맘대로!”
“내 마음이다, 흥!”
“네 맘만 있냐? 내 맘도 있다, 흥! 그럼 여긴 내 자리다.”
나는 그 반대편에 아무것도 없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렸습니다. 성진이는 인상을 썼습니다.
“선 넘기만 해 봐. 죽을 줄 알아.”
“너도 선 넘기만 해 봐. 죽을 줄 알아. 우리 오빠 아주 무서워.”
오빠 이야기가 나오니까 성진이가 좀 겁먹은 표정을 짓습니다. 옛날에 성진이한테 울 오빠가 무지 힘센 고등학생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걔가 그러고 입을 다물어버리니까 기분이 좀 좋아졌습니다.
“우리 오빠한테 혼나기 싫으면 이 선 넘어오지 마.”
그 날 하루 종일 저는 성진이를 쳐다보지 않았고 성진이도 저를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팔이 선을 넘어갈까봐 쓰기 시간에 엎드리다가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제 책이 선을 넘어가면 성진이는 마구 선 밖으로 밀어버렸고 성진이 필통이 넘어왔을 땐 제가 팍 밀쳐버렸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말하기듣기입니다. 선생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고는 책에다 다음에 이어질 줄거리를 써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쓸까 곰곰이 생각하며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박박 지워버리곤 연필을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써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글자를 잘못 써서 지우려고 지우개를 찾아보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진이 자리를 슬쩍 보니까 글쎄 성진이가 이번에는 제 지우개를 들고 있지 뭐예요? 저는 성진이를 노려봤습니다.
“야, 윤성진. 내 지우개 왜 네가 써. 빌려준 적 없어, 내놔.”
그러자 성진이는 징그럽게 웃으며 선을 가리켰습니다.
“선 넘어왔으니까 내 거다.”
말도 안 됩니다. 선 넘어왔으니까 자기 거라뇨! 선도 자기가 먼저 그어놓고는 왜 이런 어거지에요? 저는 너무 화가 났지만 수업시간 중에 큰소리를 내면 선생님이 싫어하시니까 입을 꾹 다물어버렸습니다. 대신 성진이 물건이 넘어오기만 하면 제 거라며 빼앗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성진이가 엄청 조심했는지 성진이 물건은 수업이 다 끝나고 종례도 끝날 때까지 하나도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림자라도 넘어오면 내 거라고 놀려주려 했는데 햇빛은 3분단까지는 비치지 않아서 그림자도 없습니다. 너무 분하고 약 오릅니다.
다음날 학교에 와 보니 성진이는 오늘도 일찍 와서 남자애들이랑 레쓰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로 가 앉으려는데 책상의 제 자리에 크게 ‘김은영 바보’라고 칼로 또박또박 써있었습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안 봐도 뻔합니다. 저는 화가 나서 가위를 꺼내 날 하나로 ‘윤성진 똥개’라고 성진이 자리에 더 크게 썼습니다. 이제 보니 어제는 연필로 줄만 그어졌던 책상에 칼로 줄이 파여져 있었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산수 익힘책을 꺼내 책상 길이를 재 봤습니다. 선 까지 길이는 제 자리나 성진이 자리나 똑같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여간 나쁜 애입니다.
6)
안개는 대체 흐려질 기미가 안 보인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이젠 갈대밭도 추워진다. 갈대밭이 품은 열이 김이 되어 뭉실뭉실 서리면서 강의 안개와 합쳐져 이제 세상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귀만 쫑긋 세운 채 벌벌 떨었다.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다. 오직 나만 남아있다. 그런 풍경이라면 어디 산중의 새벽처럼 고요하기만 해야 할 텐데 강 바로 저편에선 서로의 목을 치는 전투가 한창이라 무시무시한 고함과 비명이 자꾸 귀를 찌른다. 그건 곧 이쪽으로 옮겨질 것이다. 빌어먹을 루스 놈의 오해로 겨우 스물의 새파란 나이에 죽을 걸 생각하니 몸서리쳐진다.
“으그으으윽!”
이가 갈린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순 없다. 그래도 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간신히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은 비명이 목젖에 턱 걸려 끅끅 하고 걸린 소리를 냈다. 손에 쥔 신호탄을 으스러져라 쥐면서 나는 눈물을 참았다. 빌어먹을, 이런 빌어먹을 데가!
“ost d rieba!"
순간 소름이 쫙 돋으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킬 뻔 했다. 이, 이 낯선 소리는 뭐지? 뭐야? 적이 벌써 다가온 건가? 어디지?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최대한 강에서 멀어졌다. 코가 땅에 닿아 있으니 비에 젖은 흙내가 얼굴을 확 덮친다. 문득 손이 미끈거려 들어보니 희미하게 기름내가 난다. 쭉 둘러보니 갈대란 갈대는 모두 물과 기름에 같이 젖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비가 내리고 있다지만 빽빽하게 키 큰 갈대로 덮여있는 이 땅바닥이 젖어 있어?
이건 우리가 기름에 절은 채 강에 들어갔다 나와서 이런 게 아니다. 명백히 기름을 콸콸 들이부은 흔적이다! 이런 젠장할, 나까지 같이 구워버리려고!
갑자기 강 쪽에서 함성이 들리며 대단한 무리가 강을 건너는 소리가 들렸다. 첨벙첨벙! 너무 또렷하게 잘 들린다.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다. 창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어딘가로 멀리멀리 도망가고 싶다!
“건너! 죽을힘을 다 해!”
“빨리, 살고 싶으면 빨리 튀엇!”
이건 우리말이군. 사, 살았다. 아직은 적이 아니야. 이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강 건너 우리 편이 전멸만 면하고 간신히 살아 강을 건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는 놈들이 적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것뿐이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뒤로 자빠질 뻔 했다. 필사적으로 첨벙거리는 소리는 창칼 부딪치는 소리를 동반한 것이었지만 그건 조금씩 잦아들어가고, 아군 전위가 이편에 닿아 갈대숲을 해치고 달리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곧 새카만 그림자가 휙 하고 바로 내 앞을 지나쳐 달렸다. 달리던 남자와 내 눈이 순간 마주쳤다. 남자는 내 군복을 확인한 건지 아무 말 않고 앞으로 죽죽 달렸다. 그 뒤를 따라 갈대밭을 다 뒤엎을 작정을 한 건지 우리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달려갔다. 그들은 멍하니 주저앉아 자신들을 쳐다보는 내가 다리라도 접질려 남겨진 아군으로 여긴 건지 얼른 몇이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내버려 둬. 녀석은 임무수행중이다.”
백인장 같은 인물이 외치고 나를 스쳐 달려갔다. 나에게 내밀어졌던 손들이 쑥 들어갔다. 하, 하하하. 다 한통속이지 뭔가. 내가 뭘 바란 거야, 대체. 저들이 날 여기서 데려가 달라고 빌기라도 해야 했나. 젠장.
그렇게 아군의 무리가 온통 피칠갑을 한 엉망인 몰골로 갈대밭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들이 저편에서 몰려왔다. 이런, 숨어야 한다! 아군의 진로에서 벗어나야 들키지 않아! 나는 황급히 갈대숲을 가로질러 달렸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고 세상은 있는 대로 흔들리며 내 정신을 마구 빼앗아간다. 목이 너무 아프다. 목에서 피맛이 다 난다. 숨까지 턱턱 막히고 온 몸이 감각을 잃은 채 뻐근하기만 하다.
“daresh iu! causht!"
시끄러워. 시끄러워 죽겠다고. 나는 허리를 꺾고 무릎을 짚은 채 헉헉거렸다. 더 뛰다간 온몸의 구멍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을 거야. 머리가 어질한 게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다고.
등 뒤로 갈대숲을 파헤치며 달려오는 사람의 소리. 소리는 순식간에 나를 덮쳐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뒤까지 와 있었다. 에이모르 적사자 군단의 상징과도 같은 새까만 군복과 홍사자 모양의 문장이 든 갑옷. 놈은 왼손에 든 둥근 방패를 뒤로 빼더니 그대로 내 머리를 날려버렸다. 세상이 다 깜깜해진다.
정신이 들었을 때 주위는 조용했다. 사위는 어두컴컴하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눈은 주위가 다 흐릿하게 보이는 게 초점조차 안 맞는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저어보려다 관두고 손을 꿈틀거려봤다. 멀지 않은 데서 창이 잡혔다. 일어나야…!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죽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우선 창부터 잡고 보려 하다니. 갈 데 없는 병사로세.
“키키킬! 킥킥!”
까닭 없이 웃음이 나온다. 이 내가 죽었을까나? 전통적인 방법인 볼 꼬집어보기를 하는 건 어쩐지 바보짓 같고. 왜, 어른들 말씀이 유령이란 것들은 죽어도 자기가 죽은 줄 모르고 생전에 하던 짓을 되풀이 한다잖은가. 내가 지금 그 꼴인지도 모르겠다.
아, 누워있는 게 편하니 이대로 있자.
있자고? 이렇게 탄내가 가득한데 팔자 좋게 뻗대고 누워있자고?
나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휘저으려다 너무 어지러워 뒤통수만 몇 번 세게 두드렸다. 철모는 얻어맞을 때 저만치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젠장, 맞은 데서 피가 나잖아.
“여기가 어디야? 젠장맞을.”
유령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탄내와 매콤한 연기가 자욱한 여기를 나가고 싶은 건 매한가지다. 나는 쿨럭거리며 창대를 짚고 일어섰다. 일단은 주위를 둘러보고 할 여유는 되었다.
초저녁인지 하늘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어두웠다. 그 지독하던 안개는 아까보다는 옅었지만 여전히 강 쪽에 걸려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낼법한 소리는 없고 갈대가 불에 틱틱거리며 타는 소리만 점점 커진다. 안개인지 연기일지 모를 기체 때문에 자꾸 숨이 막혔다.
“에취! 쿨럭, 쿠울럭! 카악!”
침을 탁 뱉고 입을 슥 닦은 후 일단 비실거리는 걸음으로라도 갈대숲을 나가기로 했다. 불이 어디서 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건 하나 없는 게 뻔하지 않은가.
어찌어찌 지루하게 걷다 보니 갈대가 점점 줄어들면서 비교적 단단한 땅이 밟혔다. 어느 순간 시야에서 갈대가 사라지고 너른 평지가 보였다. 아! 여기에 가득 찬 것들은!
시야가 엉망이었지만 내 눈을 가득 채운 풍경은 햄버거 힐이라 불러도 됨직한 시체의 땅이었다. 빌어먹을! 어디가 이기고 어디가 진 거야? 그건 확인해야 해! 나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가 가장 가까운 시체를 뒤집어봤다. 젠장, 역겹다. 이 군복은 피로 더러워져서 어떻게 확인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엉망이 된 갑옷을 사시나무 떨 듯 떠는 손으로 헤치고 보니 나후크 동맹 군복이 보였다. 죽은 자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지고 비틀려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잘난 체 사람 모을 때는 언제고, 이런 식으로 다 개죽음 시키다니! 빌어먹을 절름발이 자식!”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듣는 사람도 없으니 눈치 보고 할 게 없었다. 다시 비틀거리며 몇 사람 더 확인해 봤지만 죽은 사람들은 모조리 아군인 것처럼 보였다.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빌어먹을!
잠깐, 생각해 보자. 이 사람들은 시체로 이렇게 누워있지만 나는 멀쩡히 서서 돌아다니고 있다. 그럼 난 지금 살아있는 건가? 혹시, 그런 건가?
하나도 안 기뻐! 시체들을 보며 감사해 마지않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겠어! 그럴 기운도 없고, 기분도 안 돼!
“적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무나 나와 줘. 아무나 나타나 주란 말야.”
제대로 맞춰진 시야로 보니 하늘은 구름 때문에 어두운 게 아니라 밤이라서 더 어두운 거였다. 비구름의 꼬리 같은 구름떼가 아직 하늘에 빼곡하다. 하지만 틈새로 하늘이 보인다. 초저녁이 맞다. 저편은 아직 희끄무레하게 밝다. 그 앞에 선 나지막한 산은 새까맣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발치에서 여기까지 펼쳐진 들판은 산 그림자가 걸린 건지 어두워지면서 못난 인간들의 시체를 가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울먹거리고 말았다.
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먹은 거라곤 한참 새벽에 한 덩이 삼킨 주먹밥이 전부라 지독한 허기가 져 속이 쓰렸다. 이상하다. 우리 동네는 먹을 게 흔하진 않아서 한두 끼 굶는 거 정도는 익숙했는데. 생각해 보니 군에 입대하고 나서는 매 끼니를 꼬박꼬박 먹었었다. 그새 굶주림에 약해졌나 보다.
졌는지 이겼는지조차 알 수 없어 내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해는 이미 넘어가버렸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강안개가 다시 짙어지기 시작해 사방을 알 수 없었다.
“어디 보자. 어디가 남쪽인가?”
우리 진지는 동쪽의 나후크 대륙에서 막 건너온 킬리온 군에 대해 남서쪽에 있었다. 어떻게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던 나는 생각하다가 창을 세워 쓰러지는 방향을 본 후 터덜터덜 발을 끌며 그쪽으로 걸었다.
죽은 사람들을 묻어주고 싶지만 나 혼자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죽고 보니 적도 우리랑 똑같은데 동정이 가더라. 같이 정성스레 볕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다. 하지만 난 혼자고 손은 둘 뿐이다. 어쩌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어디가 이겼건 간에 죽은 자들은 묻어주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밤이슬과 들짐승에 내주고 마냐? 빌어먹을, 매정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군. 어디가 이긴 거야?
우리가 왔던 대로 돌아가기 위해 갈대숲 쪽으로 가려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갈대숲은 비에 젖어있었지만 우리 때문에 기름이 묻어서 그럭저럭 불에 타고 있었다. 저 시커먼 연기를 봐라. 꾸역꾸역 뭉치는 모양이 죽어버린 사람들의 표정 같다. 나는 토가 나오려는 걸 참으며 갈대숲을 멀찍이 두고 아마도 강과 나란한 방향이라 생각되게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안개가 갈대숲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이쯤에서는 뭐가 타는 내도 나지 않는다. 나는 방향을 꺾어 갈대숲 쪽으로 갔다. 곧 갈대가 듬성듬성 난 땅이 드러났고 바로 희멀건 강이 보였다. 나는 허겁지겁 강으로 굴러빠지듯이 들어갔다.
허기지고 피곤하고 물이 차고 해서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와는 달리 강의 물살과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가슴깊이는 예사로 넘고 어디서는 몸이 완전히 빠질 뻔 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어푸! 얼결에 물을 먹어버렸다. 흙이 섞여있어 과히 기분이 더러웠다.
어떻게 악을 쓰고 해서 간신히 강을 건너 저편 갈대밭에 닿았다. 역시 갈대밭이 따뜻했다. 잠깐 쉰다고 그 속에 파묻혀 주저앉아 버렸지만 영영 뻗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너무 크다. 나는 그냥 뒤로 넘어가 한참동안 누웠다. 말 대신, 씩씩거릴 때마다 입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응?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까보다는 쉽게 되는 게 몸 상태가 많이 나아진 듯 했다. 더 오래 눌러있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는 아닌지라 한참만에 몸을 일으켰다. 문득 몸이 으슬으슬 추워온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아직 밤 추위가 장난이 아닐 때이다. 나는 진저리치며 물에 젖어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져 버렸다.
갈대숲에서 천천히 걸으며 몸 상태를 조사해 보니 크게 다친 데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하늘을 보니 아직도 구름이 빼곡해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도 반은 관성으로 지겹게 걸은 끝에 평원에 나왔다. 피비린내니 탄내니 하는 건 나지 않았다. 휘잉 하고 빈 땅을 달리는 바람에선 젖은 흙내만 묻어났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아아.”
짜증난다. 사람이 죽었든 전쟁이 어떻게 됐든 다 상관없다. 그저, 여기에 아무도 없고 그래서 내가 혼자 미아마냥 해매고 있는 게 너무너무 짜증난다.
“적이라도 좋으니까 아무나 좀 나타나라.”
짜증스럽게 지껄이다가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언제였더라, 아무나 나타나라고 했더니 늑대가 불쑥 나타났었던가? 낄낄낄.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누군가가 컴컴한 들에서 불쑥 나타났다. 아니, 엎드려 있다가 몸을 일으킨 것이리라. 이 어둠 중에도 검 끝만은 반짝거리며 잘 보이는 게 이상하지.
“dareshk!"
뭐,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어쨌든 저건 우리말이 아니니 에이모르 말인 게 분명했다. 나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늑대도 그랬지만 이거, 난 함부로 아무나 나타나란 소리 하면 안 되겠어?
“불쌍하게도 길을 잃은 사람이올시다. 댁이 누가 됐든 나 좀 잡아가쇼. 차라리 잘 됐네.”
나는 완전히 체념해 버리고 양팔을 늘어뜨렸다. 생각해 보니 창은 아까 방향을 잡을 때 던져두고 왔지. 갑옷도 없겠다, 지금 내 꼴은 완전히 무방비이리라.
그런데 상대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상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검끝을 조금 내리는 것이다.
“동맹군인가? 이름과 직위를 대라.”
“다켄 스렌돌프. 제2 천인대 제5 백인대 소속 십인병올시다. 댁은 누구쇼? 제국군이오?”
상대는 검을 아예 내려버렸다. 검이 칼집에 채워지는 소리가 너무 반갑게 들렸다. 찰캉.
“메난드로스 아스켄도. 제2 천인대 제1 백인대 소속 십인장 대우 견습기사. 당신은 낙오병인 모양이군.”
낙오병? 내 귀가 번쩍 뜨였다. 지금 이 주위엔 아무도 없긴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듯 합니다. 십인장님, 차라리 잘 됐는데 저 좀 우리 부대로 데려가 주십시오.”
일순 상대가 멋쩍은 표정을 보인 듯 했다.
“난 부대를 찾는 중이다.”
이런 젠장! 이 자식도 길 잃은 놈인가! 뭐야, 견습기사 씩이나 되는 주제 어떻게 부대를 잃어버려! 네놈이 나처럼 사정이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갑자기 폭언이 튀어나오려 해서 나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상대는 내가 뭐 하나 싶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으리라. 그는 몸을 숙여 땅바닥에서 창 같은 걸 주워들었다. 자세히 보니 군단기였다. 하이고, 군단기 씩이나 맡은 사람이 낙오돼? 어쩌자는 건가?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도 군단기에서 시선을 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떻게든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 단서를 찾기 위해서.
그렇지만 이렇게 막막한 벌판에서 뭐 특이한 게 보여야 말이지. 저편 평원 끝의 언덕 같은 곳 위엔 땅의 기복도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어쩔 도리도 없고 해서 그냥 드디어 만난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가만 보니 키는 나보다 좀 큰데 어깨가 힘깨나 쓰게 적당히 벌어졌다. 견습기사랬지. 그럼 어디 성읍의 대단한 집 자제인가? 갑자기 우러러 보이는데. 하지만 말야, 내가 잡을 수 없었던 기회를 환경 때문에 쉽게 잡을 수 있었던 친구라면 좀더 똑똑하게 굴지 그래? 이게 뭐야, 내가 그리도 선망하던 기사님의 전단계인 견습기사가 어째서 길 하나 못 찾아 일개 졸병인 나처럼 요리조리 해매고 있는 거냐! 아, 또 욕 나오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나저나 견습기사라고? 그럼 아직 스물이 안 된 놈이군. 나보다 어린놈이잖아. 어이구, 젠장.
별걸 가지고 다 욕이 나오고 트집이 잡히는 걸 보면 내가 지금 배알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인 거다. 세상이 보이고 세상의 모양에 욕이 나오고 그걸 어떻게 틀어막아 참으며 알아서 내 뜻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 내가 아직 이 땅에 발붙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 난리치는 산증거인 거다.
크악, 이런 식으로 미화해서 꼬인 심사가 풀리는 건 아니야!
“이쪽으로 갈까.”
내가 속으로 악악대는 사이 견습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어딘가로 척척 걸어갔다. 나도 투덜거리며 뒤를 따라가다 문득 뭔가에 걸려 콰당 하고 넘어졌다. 녀석이 돌아보았다.
“뭐지?”
“시, 시체인가 봅니다. 아이고.”
호되게 부딪혔더니 무릎이 다 얼얼하다. 아무튼 내가 걸려 넘어진 건 딱딱하게 굳은 시체였다. 나는 진저리치며 발로 차서 시체를 밀어내고 얼른 일어서서 손을 털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녀석은 분명 비웃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겠지. 나보다 어린놈이 날 우습게 보는 건 우리 동네 예절 상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냥 가다 넘어지는 척 뒤통수를 한대 쳐줄까?
내가 이런 고약한 생각을 하고 스스로 놀라서 속으로 펄쩍 뛰는 동안 그는 어딘가로 계속 걸어갔다. 문득 발에 부딪치는 시체가 점점 많아졌다. 둘러보니 어쩐지 주위가 낯이 익었다.
“기사님은 어쩌다가 길을 잃으셨죠?”
견습기사지만 기사라고 높여 불러줬다. 그런다고 싫어할 견습기사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그는 좀 언짢은 듯했다. 기사라 불러서 그런 건가, 아니면 견습기사 씩이나 되는 놈이 꼴사납게도 길을 잃은 이유를 물어서 그런 건가.
“혼전 중에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후는 기억나지 않아. 어떻게 정신을 차려보니 전투가 막 끝났더군. 아직 해가 남아있는 때였지만 아무도 없었다.”
뭐냐? 이 친구는 한참 전부터 길을 잃고 헤맸더란 말이냐? 우습네, 그거.
“그렇지만 해가 있으면 진지까지 방향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직 에이모르 군이 내 주위에 있었다. 나 혼자 백인대 반은 되는 녀석들을 상대해야 했더란 말이냐?”
불쾌한 듯한 어투다. 어쩌라고? 네가 잘못해서 길을 잃어먹고는 왜 나한테 불쾌해 해? 난 사실을 물은 죄밖에 없어. 흥.
어쨌든 이 친구는 전투가 막 끝날 무렵부터 정신을 차렸고 그 때 에이모르 군과 마주쳐 죽은 척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니 군단기를 맨 팔은 뭔가 천 같은 걸로 묶여있었고 확실히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쳇. 미안합니다.”
“당신은 어째서 길을 잃었지?”
“비슷합니다. 우리 백인장이 중대한 일을 맡겨 혼자 그걸 하다 적한테 맞고 이 지경이 됐죠.”
나는 내 머리를 가리켜 보였다. 그래봤자 이 어둠 속에서 내 머리에 난 상처나 핏자국이 보일 리는 없겠지만. 그는 수긍한 듯 만 듯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고, 나도 따라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별도 뭣도 안 보이니 방향을 잡기는 글렀다. 게다가 강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아침에 비가 내려 젖어있던 땅에서도 뭉글뭉글 일기 시작해 주위는 유령이라도 불쑥 나타날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슬슬 겁이 나서 겁도 없이 척척 가는 견습기사 뒤를 바짝 쫓았다. 젠장, 이렇게 되고 보니 좀 견습기사가 기사후보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섭지가 않단 말이냐? 당장 귀곡성이 울려도 이상하지 않을 데가? 게다가 낮의 전투로 먹을 게 득실하니 당장 어디서 들짐승이 덮쳐 와도 하등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걸 몰라서 그런 건지 알면서도 용감한 건지 녀석은 씩씩하게 걷는 것이다.
어떻게 계속 가다 보니 언덕 같은 데를 오르게 되었다. 어라, 여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드니 불탄 자국이 선한 진지가 보였다. 혹시?
진문은 불에 타지도 않았고 꼭 닫혀 있었다. 우리는 주위의 목책을 살펴본 후 조심스레 그걸 타고 넘어갔다.
견습기사는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덜 탄 목책 사이에서 교묘하게 숨겨진 병을 하나 찾아냈다.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보다가 슬쩍 병을 기울여 맛을 보더니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허, 이런 데서 이 귀한 것을. 안달루스 소주잖아.”
그는 마개를 던져버리고 단숨에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갑자기 나도 목마름을 느껴 그 술병이 참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거 나도 좀 주시죠?”
“좋을 대로.”
그는 두 말 않고 병을 내줬다. 흔들어보니 몇 모금 안 남아있었지만 그걸 따지고 자시고 할 사정이 못 되었다. 나는 우선 냄새를 맡아봤다.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게 그 유명한 안달루스 소주란 말이지?
“잠깐, 안달루스 소주라고? 그럼 여긴 우리 진지입니까? 우리가 패한 거요?”
“글쎄. 그건 모르겠군. 안달루스는 지금 에이모르 군이 점령한 곳이라서. 하지만 동맹군 진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군.”
녀석은 어두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지는 특히 진지를 둘러싼 목책과 그 가까이의 막사가 타 있었다. 나는 알 게 뭐냐는 심사가 되어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욱, 이, 이렇게 쓰다니! 혀가 다 얼얼하군. 이건 어떻게 물하고 비슷하게 생겨서 냄새도 안 나는 주제 이렇게 쓰지? 하지만 이걸 잘도 마신 녀석이 앞에 있는 데다 평소에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안달루스 소주라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억지로 침을 내서 혀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아주 천천히 한 모금을 넘겼다. 목구멍까지 다 얼얼해지는 기분이군. 목마름이 해소되긴 커녕 더 타는 듯이 목이 말라버리는 기분이다. 대책 없네, 진짜.
갑자기 녀석이 턱에 손을 받치고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에이모르 진지가 맞겠군. 거기나 우리나 진지를 쌓는 모양은 같으니 이걸로는 알 수 없지만. 흠, 과연.”
녀석은 타다 만 막사의 한 장을 들어보였다. 붉은 사자 문장은 나도 안다.
“다 타버렸다지만 진지에 돌아오지도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에이모르가 패한 것 같군.”
“어째서? 여긴 에이모르 땅이니까 굳이 진지에 있을 건 없잖아요?”
“그렇지만 전투는 오후 늦게 끝났어. 에이모르 군은 끼니를 하나도 때우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쉴 곳이 필요하고. 제국이 이겼다면 어딘가에 간단하게 진을 치고 쉬면서 자기편 사상자를 수용하던가 하겠지. 하지만 우리가 평원을 지나쳐올 때 그런 걸 봤던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젠장,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데 뭘 알아보겠어. 게다가 이 녀석의 감도 이젠 못 믿겠어. 하도 용감하게 나아가길래 믿었더니 뭐야, 여긴 에이모르 진지라고? 장난 하냐?
“어쨌든 우린 거의 이긴 상태였지. 내 주위의 녀석들은 패잔병으로서 도망치던 중이었고. 그런데 왜 아군 또한 보이지 않는 걸까. 이제 어쩐다.”
녀석은 혼자 중얼거리며 여기저기를 쑤시고 돌아다녔다. 나는 짜증이 나서 에라 모르겠다 땅바닥에 편히 주저앉아 버렸다.
녀석의 말이 맞다면 우리가 이기긴 이겼다. 그런데 동시에, 나 자신은 물설고 산 모르는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낙오되어 버렸다.
5)
“우측으로 돌겨어억! 4 십인대, 대응하라! 5 십인대, 4십인대를 보조해!”
“침착해! 침착하라! 작전대로 대응하라!”
각 부대 대장들의 독려와 전투욕의 고함, 흉흉한 욕설, 외마디 비명이 두 번째의 격돌로부터 터져 나왔다. 킬리온도 저 좁은 진문으로 많은 군사가 나오다간 줄줄이 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어떻게 진 밖으로 나와 언덕을 빙 둘러서 아군을 덮친 모양이다. 혹시 아까 예메크 기병이 불 지른 곳, 그러니까 진지 뒤편의 목책을 불 끄는 김에 부숴버리고 거기로 나온 건 아닐까?
아니, 그렇더라도 진과 그 밑의 언덕을 돌아서 마치 땅에서 솟은 것처럼 두 갈래로 덮쳐오는 성난 적군이라니! 저 격한 기세만으로도 우리 고함이 주눅 들고 저 땅을 박차는 진동만으로도 우리 무릎이 떨려온다. 이것이, 이 소름 돋게 짜릿하고, 거센 산폭풍을 정면으로 맞서는 듯한 박력을 뿜어대는 이것이 바로 진짜 군대가 돌격하는 모습인 것이구나!
내가 감동에 젖을 겨를도 없이 우리 백인장씨가 내 앞을 스쳐 달려갔다.
“아군의 벽을 우회해서 우측으로 이동! 최대한 빨리 달려 놈들의 측면을.. 엉?”
백인장씨가 치지직하고 저만치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저기서 지휘관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저 자식들이 포위망을 치려 한다! 아군진지를 향해, 어린진으로 전속 돌진!”
포위망? 나는 앞사람이 뒷사람으로 바뀌어 내 등을 밀어대 우물쭈물 달리면서도 고개를 빼고 주위를 휘휘 살폈다. 지금은 아침이 다 됐겠지만 하늘을 가득 덮은 먹구름과 이른 아침 특유의 어둠으로 컴컴한데다 여긴 평지라서 이렇게 난전이 되어 버리니까 어디서 누가 누구와 붙은 건지 대체 알 수가 없다. 포위라니, 킬리온이 우릴 포위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물론 야만족을 가뒀던 양팔이 안쪽이 아니라 팔 바깥쪽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포위되려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
어라, 진짜 그런가 보다. 그 양팔이 안쪽의 야만족으로부터 등을 돌려 바깥쪽과 싸우고 있다. 그렇게 병사들이 등을 돌리는 흐름이 적군 진지 쪽에서부터 우리 백인대가 있는 몸체로 점점 올라온다. 어떻게 된 거야? 킬리온은 야만족이 우리한테 각개격파 당할 거리로 내던져진 것처럼 해 놓고 도리어 우리 발을 묶은 거였던 거야? 우리보다 월등한 병력으로 이렇게 밖에서부터 포위하려고? 그렇구나, 바둑의 환격이로군. 순서는 반대지만 말이야. 우와, 정말 멋있어! 이게 용병인 거구나!
“멍청이, 뭘 꾸물대는 거냐!”
아야! 뒷사람이 빨리 안 간다고 창대로 등을 쳤다. 이런 나쁜 자식, 어디 나중에 살아서 보기만 해 봐라. 그냥 흠씬 두들겨 패준다. 지금이야 내가 황홀한 기분이니까 용서하는 거야! 나는 한손으론 창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철모를 고정하며 숨차게 달렸다. 아까까지는 우리 백인대가 제일 후위였는데 지금은 후퇴전선의 제일 전위가 되어버렸군.
킬리온이 이렇게 나온다 치자. 아마도 우리보다 많은 병력을 앞세워 삼면에서 우리 바깥을 포위하고 야만족 기병과 자기네 진지가 있는 언덕을 안쪽의 한 면으로 해서 우릴 포위 섬멸할 속셈인가 보다. 여기에 대한 대응수가, 어디보자. 아까 어린진이랬던가? 기러기가 날아가는 그 모양으로 가고 있단 말이군.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있으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쐐기 모양으로 달려가고 있나 보다. 포위를 뚫기엔 좋은 모양새다. 아직 킬리온의 포위진은 완성되지 않은 듯, 우리의 돌진은 방해받는 일도 없었고 전투의 소음만이 다가왔다 멀어졌다, 심장 떨리게 오락가락 했다. 우리 대공님은 그 킬리온한테서 참 잽싸게도 도망쳤구만? 동맹의 군인이 아니라 성의 경비병으로서 이 사람들이 가끔 말하던 그, 여차하면 당장 튀어버릴 자세가 아주 잘 되어있어. 하하하! 달려, 달려버려! 앞을 막는 게 안 보이니까 달리는 게 막 신나잖아!
우와, 그러고 보니 난 사실 영웅의 자질이 있는 건지도 몰라. 보라고, 이 급박한 와중에도 차분하게 전황을 분석하고 있잖은가. 적어도 저번의 그 기습 때보다는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가? 씩 웃으며 무기를 쥐고 달리는 내 모습은 이야기속의 기사처럼 멋있어 보이지 않겠는가? 하하하핫!
“전원 반전! 지금 그대로 대열을 맞춰라!”
삼가 존명을 받듭죠! 우리는 힘차게 달려가다가 주르륵 멈춰선 다음 뒤로 돌아서 창을 겨눴다. 그대로 대열을 맞추란 건, 지금 뒤집은 쐐기 모양으로 적을 바라보고 있을 거란 거군. 아까의 반월진에서 완만하고 두툼한 중심부를 뾰족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겠구나. 대충 휘 둘러보니 내 위치는 열심히 도망친 우리 부대, 즉 쐐기의 뾰족한 부분에서 조금 비껴나간 위치인 듯 했다. 우리는 모두 호흡을 고르며 지평 저편, 활활 타오르는 언덕 위의 적진과 그 아래로 무시무시한 요원의 불길을 거느린 것처럼 다가오는 적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내 위치는 여전히 저 불굴의 적과는 멀었고, 그래서 나에게는 적의 돌격이 어쩐지 지평선 멀리 꼬물거리는 아지랑이의 장난처럼 보였다.
“공겨어어억!”
이건 환상도 꿈도 아니다. 현재진행형인 실화인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듯 점점 커지는 적의 사나운 모습도 번득이기 시작한 창검도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도 흩뿌려지는 피도 모두 실화다. 그런데 모든 것이 동화처럼 톡 건드리면 뿅 하고 장난스럽게 사람 놀래키기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지?
“크아아아악!”
나는 미친놈처럼 괴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이상하게 몽롱한 실화 속에서 이상하게 내 발놀림이 신명난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격 외침에 발걸음 하나 떼기가 힘겨웠던 풋내기인데 어째서 오늘 이 시간의 돌격은 짜릿하고 터질 듯이 유쾌하기만 할까.
“다 덤벼, 이 자식들아! 와 보란 말야, 새꺄!”
지금이라면 내 앞에 그 킬리온이 나타나도 멋지게 한판 맞장을 뜰 수 있을 것 같다! 와봐, 덤벼 보라고! 한껏 고취된 전투욕, 이건 정말 몸살 나게 환상적인 기분이구나! 주위의 모두가 눈이 뒤집혀 전속력으로, 적을 향해, 그 해일이 우리 배를 덮쳤던 것처럼 달려간다! 울려! 돌격 북소리를 울리라고!
하지만 이런 기분이 오래가지 않아 탐탁찮음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최전위에서는 이미 충돌을 끝낸 뒤다. 아군과 적군이 맞물려 꼼작도 않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 뒤에서 흥분한 황소처럼 달려들던 아군의 무리는 저쪽에 맞춰 갑자기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라서 앞사람에 맞춰 걸음을 늦춰야 했다. 끝내주던 기분 잡치겠네. 대신 귀가 멍멍할 정도로 뜻 모를 외침과 창검 부딪치는 소리가 온몸을 떨게 만들면서 새로운 기분으로 날 흥분시켰다. 이젠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창 다루는 게 아직 미숙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난전에서 수년간 아군을 도륙해왔던 적을 멋지게 물리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젠장, 알 바 아니다. 그냥 찌르고 때리고 그러고 보는 거야!
“우와앗! 으랏차!”
감겨들고 풀리는 병사들의 움직임. 하늘로 땅으로 난무하는 주먹과 창검.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튕겨오는 창날. 끝에는 피가 묻어 둔탁한 쇳빛을 도드라지게 한다. 적의 번들거리는 눈을 본다. 소름이 죽 돋는다. 어깨를 뒤로 당긴다. 창을 내지른다. 아깝게 빗나갔다. 적의 창이 슬쩍 찔러온다. 화들짝 놀라 손에 쥔 창을 아무렇게나 당겨 쳐버린다. 너무 힘을 줘서 상체가 비었다. 누군가가 적을 옆에서 쳤다. 누군가가 내 옆을 파고든다.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린다. 운 좋게 칼이 둥근 철모에 빗맞아 등 뒤로 미끄러진다. 창대 끝으로 그냥 찍어버린다. 재수 좋게 적의 상판에 맞아 적이 피를 흘리며 몸을 숙인다. 누군가의 칼이 놈의 목을 찍어버린다. 갑자기 누가 등을 확 밀쳐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아군이 새파래진 얼굴로 막 날 찌르려던 참이다. 아군인 걸 확인하고 한숨을 내쉰다. 누군가가 옆에서 그의 팔에 칼을 꽂아 넣는다. 그가 비명을 지른다. 욕지기가 난다. 창으로 찌르려니 놈이 슬쩍 빠지며 혼전 속으로 사라졌다. 싸우는 동안 비뚤어진 철모를 바로잡다가 창을 놓칠 뻔해 몸을 숙였다. 내 머리가 있던 자리를 뚫고 창이 박힌다. 얼른 뒤로 돌며 창대로 적의 무릎을 후려친다. 적이 신음하고 휘청거린다. 그대로 몸을 튕겨 일으키며 적의 배를 찌른다. 팔이 떨려 갑옷에 빗맞는다. 아차 할 때 놈이 내 등을 팔꿈치로 찍는다. 숨이 턱 막혀 엎어졌다. 뒷골이 선하다. 뜨거운 뭔가가 뒷목에 흩뿌려지고 등에 뭐가 엎어져 무거워진다. 시체다. 혼비백산해 바닥을 기어 시체에서 빠져나갔다. 머리를 차버린다. 뒷목에 손을 대 보니 누군가의 피가 묻어있다. 나는 겁에 질려 바닥을 기어갔다. 또 창을 잃어버렸지만 여기에는 죽은 놈이 많고, 따라서 주인 잃은 창검도 널렸다. 누군가에게 몇 번을 밟혀 다리에 멍이 든 것처럼 아프고 등이 얼얼하다. 사람이 좀 드문 것 같은 데서 일어나 검을 하나 주웠다. 낯선 게 에이모르제 같다. 갑자기 측면에서 누군가가 힘 있게 어깨를 젖힌다. 뭘로 치려고? 그냥 달려가서 머리로 상체를 들이받아 버린다. 철퇴 같은 게 궤도를 엇나가 등 뒤로 떨어져 적의 상체가 가벼워졌다. 재수 좋았다. 그냥 주먹으로 한 대 갈겨버렸지만 이것도 빗나가 놈의 투구에 맞았다. 재수 없었다. 더럽게 손이 얼얼하다. 안되겠다 싶어 얼른 도망갔다.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얼마나 허약해 보일까. 다시 달려드는 적. 몸을 숙이고,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올려친다. 적이 헉 하고 나한테 엉겨온다. 힘으로 밀치면서 창을 빼앗아버리니 지레 겁을 먹은 건지 도망간다. 그 자리를 다른 적이 씩 웃으며 채운다. 나는 검을 버리고 창을 쥐었다. 감겨들고 풀리는 병사들의 움직임. 하늘로 땅으로 난무하는 주먹과 창검.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튕겨오는 창날.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다. 이젠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모든 것은 흐릿한 환상을 보듯 몽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나쳤고 많은 창검이 번득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기계적으로 창을 장작 패듯 휘두른다.
갑자기 낯익은 복장이 나를 치고 저쪽으로 달린다.
“또 포위됐어!”
“저쪽으로! 몰린다!”
“후퇴, 후퇴한다! 대열을 유지해!”
후퇴가 뭐였더라. 대열이 뭐였더라. 아찔하기만 하다. 머리가 아프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고 달렸다. 나도 얼결에 따라 달렸다.
“침착하게 후퇴해! 침착하란 말이다!”
지휘관들이 필사적으로 외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튄다.
우리가 진 거다.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지고 팔에 감각이 사라진다. 머리가 무거워 어깨 아래로 축 늘어질 것만 같다. 피곤해 죽겠다. 여태 흥분했을 때는 몰랐던 피로가 온몸을 무겁게 한다. 젠장. 그렇게 줄창 뛰어다녔지만 얻은 건 하나도 없고 몸만 지쳐버렸던 거냐. 목말라. 입이 텁텁해.
갑자기 귓가가 선하며 새파란 바람이 스친 기분이 들었다. 힘겹게 팔을 들어 귀를 만져보니 물이 묻어있었다.
“우라질, 비까지 내리냐!”
젠장, 고맙기 짝이 없구만 뭘 그래? 어차피 승부는 났잖아. 우리가 그 킬리온한테 진 거잖아. 부탁인데 조용한 기분으로 물 좀 마시게 내버려둬 줘. 장시간동안 격하게 움직인 탓에 목이 타는 듯이 말랐기 때문에 허공에 대고 입을 뻐끔거리며 마른 목을 좀 축였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와 같은 행동을 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자연히 병사들의 걸음이 느려졌고, 당장 목이 자동으로 움츠러드는 호통이 터졌다.
“이 굼벵이 자식들아, 뛰란 말이다! 굴러서라도 뛰어! 두 다리가 아예 빠져버리게 뛰란 말이다!”
루스 저 놈은 입을 잘 간수해야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나처럼 빗물을 마시던 병사들은 방금 전의 패배에 실망한 기분을 빗줄기가 땅바닥에 내려 꽂히듯 더욱 무겁게 하며 다시 발을 돌려 후다닥 뛰었다.
열심히 씹어 먹을 놈이나 지금 당장은 순순히 따라야만 하는 백인장놈의 뒤를 따라 발을 질질 끌며 달리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우리 무리와 반대편, 즉 뒤쪽으로 가는 아군의 무리를 봤다. 뭘 어쩌려는 거지? 가뜩이나 적은 숫자인 주제 나머지 반이라도 살리려고 반이 저 노도 같은 적을 막겠다는 건가? 단언하건대 그건 미친 짓거리다. 그럼 이렇게 둘로 나뉜 게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우리가 가는 방향 앞에는 뭐가 있는 거야? 약간 시간이 지나 내가 초조함마저 느꼈을 무렵 갈라진 우리 편은 지평 저편으로, 갑자기 쟁쟁한 함성을 올리며 사라져버렸다.
평원을 달리는 우리들의 진군은 조용하기만 하다. 모두가 방금 전까지의 흥분을 싹 잊어버린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완전히 져버린 걸까, 혹시 이 근처에서 복병이 튀어나온다거나 해서 우리까지 칼 맞아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축축한 아침공기 사이로 슬슬 풀리는 안개와 더불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지금이 여름이었다면 각반에 닿는 풀잎이 우석거리는 소리에도 움찔하며 달려야 했겠지. 하지만 아직은 초봄이고, 기껏 봄이 빠른 곳도 손톱만한 움이 올랐을 정도겠지. 축복받은 절기라면 초록으로 가득 찼을 이 드넓은 땅은 지금 그 가능성을 막 뿜으려는 황야가 되어있을 것이다. 우리가 헉헉거리며 달리면서 내는 무구의 절그렁거리는 쇳소리만이 신경을 마구 헤집으며 너른 평원 끝까지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여기에 내가 품은 자식들의 적이 있다고 땅이 외치고 바람이 외치는, 꼭 그런 기분이다.
그나저나. 한참 달리는 중에는 몰랐는데 단단하던 땅이 점점 말캉해진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삼각주라면 참 기름진 곳인데 왜 경작하는 흔적이 없지? 켐빌은 에이모르 최대의 밀농사 지역이라면서? 아, 물론 나는 밀이라는 식물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똑같이 낱알 달리는 벼하고 다를 바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논에 댈만한 물은 없어 벼를 밭에 심지만 저 남부에서는 무논에다 심는다던데. 그럼 이곳에서도 밀을 논에다 심을까? 헤헤헤.
썅, 이 상황에서 무슨 헛소리야. 난, 패했다지만 병사고, 농부가 아니란 말이야.
어, 이 소리는? 윽, 뭐야? 갑자기 키 큰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 시야를 어지럽혔다. 적인 줄 알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멍하니 쳐다보니 마른 갈대다. 창을 쥔 손에서 힘을 푸니 곧이어 어디서 수풀을 헤집는 소리가 나고 멀리선 첨벙첨벙 하고 물 튀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어라? 이런, 삼각주면 당연히 큰 강을 여럿 끼고 있겠지. 지금 강을 하나 건너는 건가? 아이고, 이 계절에 그러면 얼어 죽겠어! 게다가 지금 비까지 내리고 있잖은가. 무슨 생각이야, 절름발이 대공놈은!
“젠장! 우라질 놈의 자식!”
한 마디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속이 울렁거리며 아무한테나 달려들어 두들겨 패버리고 싶다. 마구 폭력을 휘두른답시고 온몸에 부딪히는 젖은 갈대들을 팔다리를 휘둘러 쳐댔지만 도리어 나한테 찰싹 감겨버린다. 짜증나 죽겠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젠장할.”
“빌어먹을, 좀 쉽시다. 에휴.”
“주둥이들 닥쳐! 이제부터 입 열면 내가 죽여 버린다.”
루스 놈의 목소리다. 이 자식은 잘도 살아있군. 왜 안 뒈지고 살아있는 거냐? 왜 우린 이 험한 꼴로 이렇게 버둥거리는데 네놈은 쌩쌩한 거냐? 심히 불공평해. 죽어, 이 자식아!
씩씩거리며 갈대숲을 해쳐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무겁다. 우석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마구 때린다. 정신이 없다. 비에 젖은 채 얼음장 같을 강을 건널 걸 생각하니 벌써 턱이 달달 떨린다.
갑자기 앞이 훤히 트였다. 희멀건 안개다. 어쩌다 바람이 불어 안개가 헤쳐질 때 언뜻 보이는 새카만 지평은 땅이다. 실낱같이 이어지는 검은 선 아래부터 여기처럼 누런 갈대들이 빽빽이 들어차 하늘거린다. 그편 갈대밭과 이편 갈대밭 사이로 잘 탄 잿빛으로 길고 구부정한 길 같은 게 가로지르고 있다. 그걸 다시 가로질러가는 검은 무리는 우리 편이다. 사람들이 허리께 아래는 그 잿빛 길에 뚝 잘려 안 보인다. 자세히 보니 강이다.
나는 죽자는 심정으로 앞사람 키가 불쑥 낮아져버린 그 곳에 발을 들이댔다. 첨벙첨벙. 으음, 이래서 기름을 바르라 한 걸까? 당장은 물에 젖지도 않고 춥게 느껴지지도 않는걸. 다들 금속인 창을 머리 위에 지고 깊은 곳은 가슴까지 차는 강을 설렁설렁 건넜다. 물에 들어가고 나갈 때만 첨벙거리는 소리가 유난할 뿐 물 가운데서는 물이 흘러가면서 우리를 슬쩍 떠미는 느낌 외에는 뭐 유별난 것도 없이 조용했다. 하지만 정말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이 첨벙거리는 소리! 좀 조용히 건널 수 없나?
강을 다 건넌 후 우리는 강 이쪽의 갈대숲 속에서 잠시 쉬며 몸을 말렸다. 지금 비가 오고 있는데 말려봤자 얼마나 소용이 있겠냐마는. 아무튼 좀 쉰 후 우리는 백인장들의 낮고 날카로운 지령을 따라 여기저기 움직이며 줄을 섰다. 저승사자가 오밤중에 바람을 타고 휙휙 나는 움직임으로 모두들 민첩하고 조용히 움직였다. 갈대숲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보니 이편은 우리가 건너온 저편보다 갈대가 더 많은 듯했다. 그 대열대로 잠시 휴식.
긴장되고 초조하고 살 떨리는 시간이 내 명을 야금야금 깎아먹듯이 심장 박동에 맞춰 흘러간다. 젠장,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침 한번 삼키자고. 나는 물에 엇섞인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소매로 이마의 물기(반은 땀일 것이다)를 훔친 후 우리가 방금 건너온 강 건너를 노려보았다. 아, 볼 수가 없다. 안개가 낮고 짙게 깔리고 있었다.
지휘부가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판을 놓을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갈대숲 속에 틀어박혀서 내 주위의 키 크고 여윈 갈대들에 받쳐진 것처럼 좁은 하늘만 쳐다보니 기분 안 좋다. 무슨 하늘을 향해 열린 통발 속에 들어앉은 기분이다. 그 하늘이란 것도 연회색 구름만 가득하고-어쩌면 안개일지도 모르겠다- 빗방울까지 흘려 눈이 따끔하다. 그나마도 갈대밭이 썩은 갈대 같은 게 내뿜는 열을 품고 있어 이 빗속에도 춥진 않아 다행이다.
짙어가는 안개 속에서 세상이 점점 형체를 잃어간다고 생각될 무렵.
갑자기 저편에서 무시무시한 함성이 일어났다. 우리는 움찔하며 창을 움켜쥐었다. 시작인가? 제길, 어디야? 강 저편인데다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조용히!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그대로 엎드려있어.”
이편 지휘관들이 낮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아니 이봐, 강 저편에선 우리 편이 흠씬 두들겨 맞고 있을 거란 말이야! 아니, 이미 다 죽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 댁들, 우리가 일개 병사라고 그딴 식으로 소모품 취급할 거야? 지금 여기 있는 건 반만 살아서 도망치려는 얄팍한 술수잖아. 저편의 아군이 적들의 주의를 아군 진지 같은 데에 돌리는 동안 우리는 여기 숨어서 적이 다 지나가도록 기다리려고? 어차피 비까지 내리는데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피곤할 게 뻔한 적이 강을 건너올 리는 없잖아. 더러워!
갑자기 갈대가 삭삭 움직이더니 누군가가 포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루스였다.
“그 자세로 듣는다. 스렌돌프 십인병.”
“네에, 네에.”
쫘악! 반발심에 건성으로 대답했더니 당장 따귀가 날아간다. 이 젠장맞을 놈을 그냥!
“무슨 태도냐. 우린 아직 지지 않았다. 네놈이 규율도 명예도 없는 잡병이냐?”
“시정하겠습니다.”
내 입은 왜 항상 내 뜻과 반대로 나불거릴까. 그래, 어디 한번 지껄여 봐라, 이 나쁜 놈아.
루스는 한 팔로 상체를 받치고 강 저편을(정확히는 안개를) 노려보며 다른 손으로 턱을 긁었다. 면도를 못 해 수염이 뻣뻣한데 내 턱도 지금 그 모양일거다.
“우리 백인대는 지금 중요한 작전을 수행중이다. 잘 들어. 우린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최소한 비와 허기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지. 하지만 적은 자다가 얼결에 붙들려나왔고, 따라서 비에 대한 방비는커녕 아침도 못 먹어 지친 상태일 거다. 하지만 이겼다는 흥분 때문에 그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마냥 우리 편을 추격해 올 거다. 강을 건너면 무장이 푹 젖기 때문에 몸도 굉장히 둔해질 거야. 저편의 아군이 그렇게 적을 여기로 유인하면 강을 막 건너온 적을 우리가 포위해 섬멸한다. 우리가 적에게 두 번 포위당한 건 여기까지 놈들을 끌어오려는 술책이다.”
거 좋네. 아무튼 대공씨가 아직 포기할 생각은 아니라니까. 하지만 난 졸려 죽겠어. 여긴 따뜻하고 포근한걸. 저 너머는 전장이지만 내 보기에는 우리 처지가 강 건너 불구경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왜 그걸 일개 졸병인 나한테 줄줄이 설명하냐?
“그래서 말인데 스렌돌프 십인병, 우리는 적이 언제 여기로 들이닥칠지 알아볼 병사가 필요하다. 자네가 가라.”
그래, 간다. 척후쯤이야, 뭐?
“척후입니까?”
“그렇지. 잠시 후 우리는 여길 벗어난다. 자네는 여기 남았다가 적이 반쯤 강을 건너오면, 즉 전위가 갈대밭을 막 벗어나면 신호한다. 자네는 이 전투의 열쇠를 쥔 거지. 막중한 임무이니 넋 놓고 있지 마.”
“하, 하지만 백인장님, 저 혼자 여기 남으란 말씀입니까? 만약 발각되면 저도 죽지만 이 작전은‥.”
“잔말 말고 명령대로 해. 내 알 바 아니야.”
이, 이 자식이 지금 날 죽이려고? 너,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러는 거냐! 놈은 나한테 신호탄을 던져줬다. 나는 몸을 돌려 저쪽으로 기어가던 놈을 부들거리는 손으로 붙잡았다.
“말해 주십쇼. 왜 나만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겁니까. 왜 내가 욕설부대에 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척후까지 맡게 된 겁니까? 백인장님!”
놈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야비한 웃음이 눈가에 떠 있었다.
“데그 포위전 때를 기억하나.”
“예?”
“그 때 너희 무지렁이들은 기껏 해일 때문에 난동을 부렸었지. 네놈들을 진정시키려던 나는 일개 사병한테 맞기까지 했단 말씀이야.”
무, 무슨? 잠깐, 그 때 일을 말하는 건가? 그, 수중성벽인가 뭔가 때문에 우리가 난리 났을 때? 나, 난 아니야! 그 때 네놈을 친 건 내가 아니란 말이야! 오해야!
“저는 배, 백인장님을 감히 구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놈의 소행입니다.”
목소리까지 떨린다. 겨우 그런 오해 때문에?! 이, 이 자식이 대단히 치졸하고 더러운 성격인 건 알지만 어떻게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을! 루스는 내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너무 즐겁다는 듯이 구경하며 단호히 내뱉었다.
“남아라.”
“백인장님! 잠시만, 백인장님!”
놈은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 나는 머리가 싹 비어버리는 기분이 되었다.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다. 이 강 건너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는 내 알 바 아니다만 놈이 날 없애려고 작정한 것만은 확실하다. 멍하니 놈이 사라진 쪽을 쳐다보는 사이 주위가 갑자기 서걱거리더니 숨어있던 병사들이 슬금슬금 나와 강 반대쪽으로 기어갔다. 귀를 막막하게 하는 전투의 소음은 안개 때문에 더욱 크게 들린다. 무섭다. 날 두고 가지 마!
비명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제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내 것이 아닌 창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까 하늘을 보면서 통발 같다고 했던가? 정말이다. 내가 지금 통발 안 물고기 꼴이 되었다.
4)
뭔가 일어날 줄 알고 잔뜩 어깨를 굳히고 있다가 가서 잠이나 자란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나 같은 반응을 한다. 아니, 할 거다.
“젠자아앙! 늬들이 지금 장난 하냐! 이런 고약한 경우가 다 있나!”
나는, 역사상 길이 남을지도 모를, 무시무시할 거라 생각되는 대회전을 앞두고, 창검을 날카롭게 다듬다가, 오늘밤은 아무 일 없으니 가서 자란 말을 듣고, 거품을 물 뻔한 동맹의 전사이다. 아니, 우린 싸우려고 여기 왔지 유람 나온 게 아니잖은가? 왜 이제 한판 뜨나 싶으면 이 모양이야? 데그에선, 그래, 킬리온을 꾀려고 그랬나 보다 싶기는 하다. 그냥 성 주위만 빙빙 돌며 구경이나 하다 짐 챙겨 나왔다. 남부권 천인대? 사실 우리 제5 백인대가 한 일은 없다. 십인대 네 개가 나가서 뭐 좀 하긴 했지만 조연이었고, 나중에 말을 들어보니 주무대를 독차지한 건 기병과 제1 천인대였다더라. 그리고 지금 여기 켐빌에서는? 허, 비상이라고 이 추운 오밤중에 중무장을 시킨 채 맨바닥에 늘어서서 잔뜩 긴장하게 해 놓고는 대장들끼리 몇 시간씩 속닥속닥한 결과 오늘은 잘 자라? 당신들 그 뭐야, 굿 나이트 인사라도 하려고 서로 불러냈던 거야? 뜨거우셨겠어?
“스렌돌프 십인병! 멍청한 소리 작작 하고 막사로 기어들어가!”
“우으으윽!”
십인장의 짜증 섞인 일갈에 나는 이를 박박 갈며 양손으로 창을 바스라지게 쥐고 발을 쿵쿵 울리면서 막사로 갔다. 농담해? 농담하는 거야? 당장이라도 돌격 앞으로를 외치란 말이야!
막사로 가는 길에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분위기를 보자면 다들 나와 비슷하단 말씀이다. 한창 호전적인 투쟁심과 용맹심을 가슴속에 박박 우겨넣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모두를 바람 빠진 풍선으로 만들어버렸잖은가. 하는 일도 없고, 시간은 초조하게 자꾸만 가고, 적은 바로 눈앞에 있고, 이 밤은 또 왜 이렇게 칠흑 같은가! 답답해 미치겠네, 에잇!
“십인장님, 그럼 내일 아침부터 줄창 박 터지는 거요?”
누군가가 걸쭉한 억양으로 외쳤다. 막사의 문을 신경질적으로 들어올리던 나는 제꺽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라보았다. 자기 휘하 십인대들의 막사를 돌아다니며 우리들을 진정시키던 십인장은 바쁘게 걸어가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잠이나 자. 꿈속에서 어머니나 애인 이름을 부르며 질질 짜는 놈이 있으면 주위에서 알아서 다독여. 젖먹이가 전장에 나온 건 우리 군의 일급비밀로 해야 해.”
주위에서 폭소와 야유가 빗발쳤다. 나도 야유의 휘파람을 한 소절 뽑은 후 컴컴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군은 각 백인대가 나흘에 한 번은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는데 우리 백인대의 가장 가까운 순은 그저께, 그러니까 행군 중에 지나갔다. 다음 순은 모레 저녁이다. 그 전에 큰 전투나 하나 치르고 경계할 것 없이 마음 편하게 졸면서 보초설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 작은 소원이 내일이면 어떻게 이뤄지긴 하겠지? 쳇.
먼저 들어가 있던 동료들이 자기 모포 속으로 꼼지락거리며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창을 바닥에 꽂아 세운 후 문을 내리니 너무 깜깜해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잠깐 쭈그리고 앉아서 눈을 깜빡거렸다.
“어이, 스렌돌프냐. 누구 밟으면 죽어.”
어라? 저 친구가 잠꼬대하나? 금방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된 나는 내 모포를 끄집어내면서 빈정거렸다.
“반장님은 너 아니었냐? 창질하는 폼이 영 시원찮은 녀석아. 하하핫!”
“관 둬라, 인마. 내일이면 아주 화끈하게 놈들과 끝장을 보는 거야.”
“그 뜻은 가상한데 대장이 돌격을 외쳤을 때 뒤로 돌격하다 누구 다리나 걸지 마라.”
“자식들, 시끄럽다. 잠이나 자!”
모두들 궁시렁거리며, 혹은 소리죽여 웃으며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나도 동료들이 조금씩 몸을 틀어줘서 생긴 틈에 끼어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언제 기상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갑옷 등등을 풀어놓을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런 생각이었는지 어쩌다 부딪치는 동료의 몸은 단단한 가죽갑옷의 느낌이 분명히 전해졌다.
비록 지휘관들은 아무 말 안 한다지만 내일이면 큰 전투가 있을 거란 것쯤은 모두가 직감하고 있다.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고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는 내일 알아서 다 결정될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에는 모두 두근거리는 내일의 일일 뿐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사실 나는 잘 안다. 무서우니까. 여러 번 칼을 잡아본 고참이 아니고서야 신병 일색인 우리들이 이렇게 지나치리만큼 흥분하는 게 당연하지. 이렇게 생색이라도 내지 않으면 다리가 풀려버릴 것 같잖아. 게다가 버럭 소리를 질러대고 서로가 서로에게 흥분을 전염시키는 동안에는 무서운 게 없다. 열광적인 전투에의 갈구만 남을 뿐, 내일 당장의 전투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거란 걸 모두 싹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젠장, 그런 차가운 진실 따위, 개나 주라지.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고향이 못 간다고? 그럼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고향에 돌아간다고 대꾸해 주지. 그게 바로 나일 거라고 소리 높여 외쳐 주지! 이것도 진실이잖아? 아주 뜨거운 진실.
쳇, 내일 일은 내일 일이고, 지금은 잠이나 자련다. 갑옷 때문에 등은 좀 불편하지만, 우리 졸병들의 특기가 뭔지 알아? 어떤 시간, 어떤 상황에서라도 누우면 바로 잠들기야. 헤헤헤.
바로 내일 그 킬리온과 붙는다는데 오늘 묘하게 기분 좋네.
“기상! 소리를 내지 마라!”
기상이면 기상이지 뭘 또 꼬리를 다는 거야? 소리를 내지 말라고? 여기서 떡을 치든 굿판을 벌이든 저 멀리 킬리온한테 들리겠냐? 나는 짜증을 부리며 허리를 일으키려다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우읍, 등허리가 지독하게 아프다!
“씨, 지금 몇 시야? 몇 시인데 벌써 일어나라는 거야?”
동료들도 다들 한 마디씩 쏘며 몸을 일으키는 듯 했다. 듯 하다고 본 건 컴컴해서 누가 뒤척인 건지 아니면 일어난 건지 구분이 안 가서이다. 나는 팔을 뒤로 돌려 바닥을 짚은 채 머리를 뒤로 한껏 젖혀 허리를 폈다. 아아앗, 짜릿하게 아프다! 무장한 채 자는 건 역시 할 짓이 못 돼.
갑자기 막사 문이 확 젖혀지고 십인장의 머리로 생각되는 게 불쑥 들어왔다. 그 머리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우리들을 휘휘 둘러보았다.
“조용히. 빨리 일어나서 정렬해. 1분 준다. 실시.”
“실시!”
우리는 후다닥 일어나 모포를 치우고 무장을 바로하며 달려 나왔다. 주위는 아직 새파랗게 어두웠다. 꼭 며칠 전 새벽의 급습이 있었을 때가 생각나는데? 갑자기 뒷목의 털이 쭈뼛 서는걸. 게다가 횃불 하나 켜지 않았단 말인가. 무슨 생각이지?
잠깐만,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 먼 것 같은데 왜 벌써 깨운 거야? 설마?
아직은 미명 전이라 어두컴컴하다. 거기다 하늘은 구름이 쫙 깔린 듯 우중충했다. 바람결이 스산한 기분조차 든다. 이제 인월(寅月)인데 이 남쪽에 눈이 내릴성싶진 않다만 괜히 팔다리에 소름이 돋는걸. 불빛이 없는데다 소리도 억제해야 했기 때문에 순전히 눈에 의지해 부대를 찾아다니는 동안 여러 사람한테 머리를 얻어맞았다. 크윽, 댁들도 이렇게 헤매봐! 왜 괜히 말도 안 되는 걸 시키면서 사병들만 두들겨 패! 물론 결국에는 부대를 찾아내 정렬하긴 했지만 말이다.
루스 백인장은 뭔가를 광주리에 수북이 담아 나르는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어째 이건 배고프게 하는 냄새가 나는데.
“일단 배를 채운다. 나눠줘.”
광주리 몇 개가 우리 사이로 달렸다. 어둠 속에서 팔들이 불쑥 뻗어 나와 덩어리 하나씩을 집었다. 오라, 주먹밥이군. 이렇게 일찍? 역시 아침 일찍 싸울 셈인가. 어쩌면 기습을 하려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이 시간에, 진지까지 다 쌓은 적을? 에이, 복잡하다. 먹기나 하자! 그런데 오늘따라 주먹밥이 뜨뜻한데? 좋네. 밥맛 나네.
“지금부터 입에 재갈을 문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입에서 떼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우리가 순식간에 주먹밥을 먹어치운 직후 백인장놈의 턱짓 한번에 몇몇 병사들이 뭔가를 양팔에 가득 끌어안고 우르르 달렸다. 앞줄 사람들이 손을 뻗어 하나씩 낚아채길래 나도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시간을 재어 하나 집었다. 재갈이라지만 그냥 입에 물기만 하면 될 나뭇조각이었다. 백인장놈은 곧 뒷짐을 지고 우리들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이른 아침 즈음에 비가 내릴 거라더군. 잠시 후 불을 지피면 질서정연하게 둘러서서 불을 쬐고 몸에 기름을 바른다. 복장은 다 챙겼겠지? 사소한 것을 놓치면 승리를 놓치는 거다. 넋 놓고 있지 마!”
큰소리 내지 말라면서 혼자 버럭버럭 소리 지를래? 망할 자식. 나는 입술을 조그맣게 움직여 투덜거리면서 재갈을 물었다. 놈이 또 뭐라 잔소리하기 전에 철모를 바로 쓰고 창을 쥐고 혁대의 단검 위치를 확인했다. 또 뭐 빠뜨린 거? 갑옷 끈은 확실히 조여 놨지. 이건 자기 전에 한 거다. 단추나 군화가 혹시 번쩍이지 않아도 이 어둠 속에서 볼 리는 없으니 괜찮아. 자,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겠군. 하지만 내 앞으로 다가오는 백인장의 걸음은 무섭기 짝이 없다.
갑자기 백인장이 멈춰 서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나 싶었다. 커억!
“차려. 열중쉬어. 차려. 정신 못 차리나. 부동자세 몰라? 부동자세! 차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원래도 조용했지만 바람소리조차 땅속으로 숨어들어간 것 같았다. 저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혐오스러운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배를 얻어맞아 숨이 턱 막혀 헉헉거렸다. 그만 재갈이 입에서 떨어졌다. 루스는 흙발로 재갈을 찼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입에서 치우는 거 허락 안 한다 하지 않았나? 금붕어만도 못한 기억력이냐!”
욱! 이번에는 정강이를 채였다. 다들 알다시피 살점 하나 없이 가죽만 씌어진 뼈를 치면 대단히 아프지 않던가. 나는 비틀거렸고 놈은 킬킬 웃었다. 이‥죽일 놈이!
“왜 맞는지 아나.”
“예, 그렇습니다!”
“목소리 깔아. 입 다물랬어.”
푸욱! 이번에는 허리가 완전히 앞으로 꺾이리만치 아팠지만 숨이 턱 막혀서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 개자식, 전장에서 보자. 시작하자마자 네놈 등에 칼을 박아 넣어주겠어. 아군한테 등에 칼 맞고 죽으려고 작정한 자식아! 그렇게 웃지 마!
“흐흐. 다시 묻지. 왜 맞는지 아나.”
“예, 그렇습니다.”
“짖어봐.”
“재갈을‥ 떨어뜨려서입니다.”
“아니, 틀렸어.”
이익, 또 한대 날아올까?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좀 힘이 없는 젊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무슨 일이지?”
루스는 갑자기 척 소리가 나게 군화 뒤꿈치를 붙이더니 경례를 붙였다.
“제2 천인대 제5 백인장 루스 젠틀러입니다. 복장이 불량한데다 침묵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은 병사가 있어 훈계 중이었습니다.”
“일벌백계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적당히 하고 자네의 백인대를 추슬러라.”
“옙, 대공 각하.”
뭐, 뭣이라고! 우리 절름발이 대공님이라고! 루스도 나도 때리고 얻어맞느라고 대공님이 오는 소리를 못 들었군. 대공님인 듯한 그림자는 절룩이며 저편으로 지나갔고 수행원인 듯한 사람들 몇이 그 뒤를 따랐다. 대공님 일행이 멀어질 때까지 루스는 경례의 표본이랄 수 있는 굳센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끔찍스런 눈빛은 나를 태워죽일 듯이 찌르고 있을게 분명했다. 나는 턱을 쳐들고 단단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스렌돌프 십인병.”
“예, 백인장님.”
“칼라 깃을 살펴봐라.”
나는 한손을 들어 목 주위를 만져보았다. 아차, 어제 진지를 세울 때부터 답답해서 풀어놨던 칼라가! 나는 황급히 칼라 단추를 잠그고 깃을 바로 세웠다. 루스는 조용히 쳐다보다가 내가 다시 차려 자세로 돌아가자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물어.”
나는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구 땅을 파헤치듯이 더듬어 재갈을 찾아낸 다음 흙이 묻은 채로 입에 물었다. 켐빌 근처의 흙은 기름지고 고왔더랬지. 삼각주니까. 입안에 들어오는 흙맛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난 사람이지 지렁이가 아니란 말이다. 흙을 먹는 취미는 없단 말이야!
“너희들도 똑똑히 들어라. 명령을 네놈들 목숨보다 소중히 지켜. 다시 말하지만 지금 문 재갈은 명령이 있기 전에는 떼지 말 것, 그리고 복장은 항상 군인답게 차릴 것. 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그 자리에서 부동자세로 꼼짝 말고 있어.”
놈은 총총히 가버렸다. 나는 그 똥개가 어디서 갑자기 솟아나 따귀를 때릴까 두려워서 재갈을 뱉고 침과 흙도 뱉어버릴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잠시 후 지루하고 피곤하게도 이런 고약한 자세로 꿋꿋이 서있던 우리는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지 중앙에는 작은 모닥불이 열을 맞춰 피워져 있었다. 이 어둠이라면 저 멀리 킬리온의 진지에서도 보일 걸 염려한건지 판자를 덧대어 주위를 가리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처음에는 불이 어디 있나 못 찾고 두리번거렸다.
우리는 판자 안쪽으로 줄을 맞춰 들어가 모닥불을 둘러싸고 선 다음 불을 쬐었다. 서너 발자국만 다가갔다가는 머리카락을 홀랑 태워먹을 만큼 뜨거웠지만 몸을 뒤집어 따끔거리는 낯 대신 등을 데우라는 명령이 내려진 건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다. 으, 뜨거워서 따끔하던 낯에 갑자기 찬바람이 닿으니 살이 에이는 것 같다.
“몸에 기름을 바른다. 실시.”
불에 구운 후에는 기름을 바르란 말이지? 그리고 뒤집어서 다시 구울 셈이냐? 젠장. 나는 누군가가 지나다니며 손에 부어준 기름을 특히 갑옷 밖으로 드러난 몸에 문질러 발랐다. 비가 올 거란 말이지. 무지 춥겠어. 적의 칼에 맞기 앞서 얼어 죽지 않으려면 열심히 뛰어야겠는걸.
이런 작업이 거의 끝나자 드디어 명령이 내려졌다.
“전군, 조용히 전진한다. 목표는 킬리온이다.”
서서히 아침이 밝을 시간이었지만 짙게 깔린 구름 때문에 빛살은 한줄기도 땅에 닿지 않았다. 단지 수십 년의 삶에서 익숙해진 대로 우리 몸이 새벽이라고 알려줄 뿐이었다.
창날에 재나 흙을 발라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빛에 번쩍이지 않도록 처리한 우리들은 소리죽여 킬리온의 진지로 다가갔다. 지평선 저편 끝에 쥐가 쥐구멍에서 콧대만 내놓은 것처럼 솟아있던 적진은 점점 커지더니 한 2리 정도 거리로까지 좁혀졌다. 여기서 걸음을 멈춘 우리들은 적진을 끌어안는 모양으로 두텁고 뭉툭한 반월처럼 늘어서고 돌격자세를 갖췄다. 으음, 이 반월은 가운데가 너무 두터워 보이는걸. 백인대가 우리부대 앞뒤로 늘어섰잖아. 그렇더라도 돌격력 있는 기병으로 백인대 하나쯤 들이닥치면 그냥 뚫리겠어.
곧 평소 백인장들이 벼르고 벼른 게 분명한 무리들이 십인대 두 부대 정도 명수로 앞에 나왔다. 왜 벼르고 벼른 게 분명하냐면 내가 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루스 놈이 나를 호명해 아군 대열로부터 한참 앞쪽, 적진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언덕뿌리에 세운 것이다. 여기서 보니 저 뒤편의 아군이 한 마장은 떨어진 먼먼 곳에 있는 것 같다. 아이고, 뒤통수가 선뜻해서 뒤돌아보기도 겁나네.
그나저나 왜 이런 거지? 무슨 특공대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한테 이런저런 언질도 없었지 않던가. 왜 앞에다 세워놓은 건가? 혹시 적군 중에 바보가 있어 우리한테 있는 화살을 다 꽂게 해서 나머지 부대는 안전하게 접근하려는 건가? 에이, 그럴 리야 없겠지.
우리들을 인솔한 사람은 우리를 적당히 벌려 세운 후 나직이 말했다.
“너희들의 입심은 각 부대 백인장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주둥이를 상소리가 나가는 대로 놀리는 걸 봐 주지. 그 킬리온이 게거품을 물고 튀어나오게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욕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재갈 내려라.”
나는 얼른 재갈을 퇘 뱉었다. 흙은 아까 침 삼키다 삼킨 지 오래다. 뭐 사람이란 흙에서 난 걸 먹고 흙으로 돌아가니까 절대로 몸에 나쁘지야 않겠지만 기분은 영 아닌걸.
손바닥이나 땅바닥에 침을 탁 뱉고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다듬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니 이 어둠 속에서도 뚜둑 손을 꺾어대는 소리랄지 떡 벌어진 어깨랄지 기세 흉흉하게 희번득거리는 흰자랄지 킁킁 김을 뿜는 들창코랄지, 보이는 양이 하나같이 나 한 성질 하오라고 써 붙인 것 같은 사내들이다. 어이쿠, 이 아저씨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니 나는 무슨 흙장난하다 끌려나온 악동 같잖아? 우리가 씨근덕거리며 준비(?)를 갖추자 지휘자가 내뱉듯 말했다.
“시작한다.”
즉시 귀를 막아버리는 지휘자. 나는 무슨 욕을 할까 말을 고르다가 얼결에 같이 귀를 막아버렸다. 주위에서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이 욕의 홍수가 쏟아진 것이다.
“야이 빌어먹을 후레자식아! 애비 없는 놈! 똥거름을 뒤집어씌워 석 달 열흘을 패 두들길 놈! …! …!”
음음,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꽁지에 불붙은 살쾡이! 새대가리! 억울하면 나와 봐, 나와 봐! 못나오겠지? 그렇지? 늬들은 거시기도 없지? …! …!”
그래설라무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창녀 자식한테 끌려다니는 늬들은 혹시 그 여편네 기둥서방이냐? 남의 집 안마당을 멋대로 휩쓰는 꼬락서니는 도둑고양이 핏줄이냐? …! …!”
아으으윽! 내 머리가 쾅쾅 울려버리잖아! 사람의 큰소리도 모이면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 정도는 간단히 돌아버리게 만드는구나. 나는 마구 짜증이 치밀어 바락바락 악을 써버렸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라쿵짝!”
갑자기 내 근처의 분위기가 싸해진 기분이지만 기분 탓이다, 그딴 거. 기분 탓이라니까.
아무튼 이 사람들은 상당히 해부학적이고 화장실적이며 허리하학적인 욕설들을 줄기차게 풀어놓았다. 저들 중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귀머거리 병사를 배려함인지 손짓발짓 욕까지 동원되어 내 주위는 아주 개판이었다. 정말로 사람들 고함소리가 개 짖는 소리로 들리는걸. 왈왈와르르릉왈왈! 깨갱깽깽깽!
이런 소란을 피우면 100리 밖의 갓난애가 자다 보챌 거다. 적진 안은 갑자기 홰가 켜지고 절그렁거리고 받아치는 욕설(실은 난 에이모르 말은 모르지만 이 상황에서 나올 말이 욕 말고 또 있나?)이 터지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내가 듣기로 그 킬리온은 대단히 신중한 성격이라는데 이런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은 북새통에 군사들을 풀까? 과연, 이쪽에서 내 입아 닳아버려라 고래고래 소리질러 댔지만 잠을 깬 분통 비슷한 욕설은 어쩌다 들려도 곧 적막해졌다. 뻔히 보이지 않는가. 나오라고 하늘하늘 손짓하는 게.
“불이야!”
갑자기 적진 저편에서 화르륵 하고 터지듯이 불길이 솟아올랐다. 불길은 최초로 불이 솟은 곳을 중심으로 좌우로 쫘르륵 확산되어 터져나갔다. 곧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우리 욕설을 압도해 버렸다. 두두두두두!
“예메크 기병이다! 미끼부대, 후퇴한다!”
미끼부대? 미끼라면 미끼지. 그 킬리온이 길길이 날뛰며 바늘을 콱 물어버리게 할 미끼라네. 나는 뒤풀이를 안 하면 아쉬움이 남을 거란 건지 뒤로 달리면서도 욕을 뱉어대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죽어라 달렸다. 불은 적진을 환히 밝히며 잘도 타올랐다. 그 화려한 불놀이를 배경으로 예메크 기병들이 진지 뒤에서부터 이쪽으로 몰려오는 게 보였다. 저 거대한 모닥불에 의지해 아군의 등 너머 저편에 있는 아군 진지가 언뜻언뜻 보일 정도다. 아무래도 욕설부대를 가장 먼저 돌격시킨 건 우리가 킬리온을 밖으로 꾀어내려는 듯한 모양을 보여 신중한 킬리온이 오히려 함정을 염려해 진지에 틀어박히게 할 작정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렇게 안에 뭉쳐있는 무리들에게 뒤통수로부터 화끈한 불의 세례를! 그럼 적들은 저 엄청난 불을 끄느라 시간 끄느니 당장 튀어나와 단판결판을 짓는 게 낫겠지. 더군다나 여기는 저들의 앞마당이니까. 사실 적이 진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이쪽에서 공성전 비슷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싸움을 걸 수 없지 않은가? 결국 킬리온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중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문이 열리면서 야만족 기병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나온 건 기병뿐이었다. 그들의 주요전력이랄 수 있는 보병은 기병이 나가자마자 진문을 굳게 잠그고 화재진압에 돌입한 듯 했다. 무슨 짓이지? 자기 부하들을 다 안에서 태워죽일 작정인가? 그 때 아군 보병들은 반월을 유지한 채 뒤로 스르륵 빠졌다. 그 자리로 예메크 기병이 뛰어 들어왔다. 창과 창이, 검과 검이 부딪쳤다. 전투 시작이었다.
“나를 따르라!”
반월의 가장 안쪽 즉 우리 부대 앞에 선 부대들이 잠깐 활을 쏘다 빠지자 반월에서 가장 두터운 부분 즉 우리 부대 뒤편에 선 백인장들이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고 달려갔다. 그런데 그들이 앞의 아군을 지나쳐 달리는 방향은 정면의 전장이 아니라 전장 양옆이었다. 게다가 정면 부대는 조금 물러선 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숨이 턱에 닿은 채 정면 부대 뒤편의 우리 부대로 복귀한 나는 머리가 산소부족을 호소하며 핑핑 도는 걸 견디려고 무릎을 짚고 헉헉거렸다. 갑자기 매서운 일격이 등짝에 적중했다. 커억!
“정신 차려라, 십인병! 돌격 준비다!”
이이 저 똥개놈이잇! 루스는 내 등을 검 손잡이로 찍은 후 다른 곳으로 달려가 부하들을 닦달했다. 우리는 아주 정면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정면에서 움직이지 않은 부대 중 후방일 뿐이잖아!
그나저나. 갑옷 차림이라 아주 아프진 않은 등짝을 문지르며 전장을 보니, 예메크 기병들은 아주 멋진 솜씨로 야만족 기병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이젠 불도 있겠다, 자세히 관찰하니 예메크 기병들은 안장이라고 하던가? 그런 것 옆에 늘어진 그 등자를 꽉꽉 밟으며 창검을 흩뿌렸고, 안장도 없이 말의 옆구리에 다리를 꼭 끼고 앉은 야만족들은 어쩌다 무지막지한 마상재주는 보여줬지만 그리 효과적으로 예메크 군의 공격을 받아내진 못하는 것 같았다. 저 등자라는 게 저 정도로 대단한 건가?
“아, 이건 각개격파를 유도한 거다! 굉장해!”
주위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며 감탄했다. 으잉? 각개격파라고? 아, 물론 우리는 가짜 천인대 셋뿐이지만 저쪽은 일개 군단은 족히 넘을 거란 말이야. 킬리온은 분명 로타레프 대공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주요전력은 다 끌고 왔을 거란 말이다. 아군은 확실히 수적으로 열세다. 그럼 당연히 각개격파를 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킬리온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 테니 웬만한 도발에는 응하지 않고 자기 부대를 일거에 던져 우리를 포위섬멸할 생각이었겠지.
그러니까, 신중한 킬리온은 저더러 나오라고 손짓하는 우리들의 쑥스러운 초대장(활활 타오르는 정열의 초대장이다)에 역시 정중하고도 신중하게 기병부대 하나만 답례로 내놓은 거다. 다른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신속히 문전의 적을 쫓아내려는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지금 예메크 기병이 야만족 기병의 발을 잡은 사이 우리 보병들의 후위부대는 다시 아군 뒤를 크게 우회해서… 야만족들을 완전히 우리 팔 안에 가둬버렸다!
“궁수, 발사!”
그 양팔에서 화살이 십자로 전장을 날았다. 예메크 기병들은 깔끔하게 우리 부대 뒤로 물러선 때였다.
“아무리 신중했다지만 엄한 결과인걸. 곧 그 킬리온이 본대를 끌고 튀어나오겠어.”
누군가가 옆에서 턱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활활 타오르는 적진 양옆, 우리 정면의 언덕 양옆에서부터 무시무시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3)
“기상!”
잠결에 싫은 속삭임이 들린다. 아, 제발. 아직 세상은 어둡다. 눈꺼풀이 위아래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분명하게 단언하건대 아직 어둡다. 아직 새벽 4시가 되었을 리는‥있구나. 축월(丑月) 말이니까. 아니, 그렇더라도 제발 좀. 지금 정신이 반은 나가버려서 일어날 상태가 아니라고.
“기상! 적습이다!”
뭐라고? 나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튕겨 세우며 일어났다. 적? 적이라고? 억지로 눈을 떠 여러 번 깜빡거려보니 내 시력이 회복되지 않은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세상은 아직 시커멓게 보였다. 새카만 공간 사이로 역시 새카만 바람 같은 그림자들이 휙휙 달려간다. 웅성거림과 금속들이 맞부딪치는 소리, 아득한 비명소리에 정신이 멍해진다. 진짜로 저, 적인가? 이런, 우선 일어나야지! 주위를 관찰하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야! 그런데 내 창이 어디 갔지? 철모, 철모는 여기 있고? 아얏!
“정신 차려, 돌대가리들아! 일어낫!”
잠이 확 달아났다. 목소리로 보건대 루스 그 자식이다. 이 자식, 이 어둠 속에서 잘도 날 알아보고 뒤통수를 치고 가다니. 네놈도 어둠 속에서 나한테 등 한번 맞아볼래? 나는 속으로 듣는 사람이 상당히 아파할 욕을 마구 퍼부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달려다니는 그림자들은 다행인지 적은 아니고, 아군 병사들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어깨를 부딪치고도 칼부터 들이대지 않는 게 이상하다. 나는 급하게 달려간 누군가에 부딪쳐 뒤로 나동그라질 뻔 하고는 얼른 몸을 숙여 땅바닥을 더듬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창을 옆에 두고 잤는데 어째서 안 잡히지? 누가 가다가 차버렸나? 적은 지금 어디 있지?
“당황하지 마! 각 백인대별로 빨리 집합해!”
유난히 잘 울리는 백인장들의 목소리가 우리들을 질타한다. 나는 손바닥이 거친 돌에 쓸려 아릿한 걸 느꼈지만 상관치 않고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창으로 생각되는 가늘고 길쭉한 것을 붙잡았다. 창 맞구나! 그런데 어디가 창날 쪽이지? 제기랄, 너무 어두워!
“제5 백인대는 여기로!”
저 앙칼지다 할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이런 혼란스런 와중에도 너무 잘 들리는걸. 저쪽인가? 나는 행군할 때 열심히 끌던 짐수레에 호되게 다리를 부딪친 후 간신히 방향을 잡고 백인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차차 눈이 시력을 회복해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이 잡힌다. 다시, 멀리서 창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린다. 으악!
“침착해! 적과 부딪친 건 전위뿐이야, 여긴 아군밖에 없다! 너희는 후위니까 뒤통수치기나 조심하면 돼! 수레를 밀착시키고 거기 붙어있어!”
네 네엣! 수레, 수레가, 그러니까, 방금 부딪쳤었지? 여기 있다! 끄으응차!
“앞으로 밀착! 이 자식아, 이탈하지 마!”
가까이서 들리는 둔탁한 충돌음과 누군가의 숨넘어가는 소리. 이탈이라고? 이 상황에서? 차라리 같은 편끼리 붙어있는 게 훨씬 안전해. 혼자 떨어져서 헤매고 다니다가는 그냥 누구 칼에 찔린다! 나는 수레에 달라붙어 기를 쓰며 밀어댔다. 곧 몇 사람이 달라붙어 같이 밀어 금방 앞 수레와 밀착시켰다. 젠장, 이러면 저편으로 넘어갈 수가 없군. 도망가는 건 꿈도 못 꾸겠어? 순간 뭔가 무서운 기분에 뒤통수가 선뜻해졌다. 쉬리릭! 쉬익!
“화살이다! 엎드려!”
으갸갸갸아악! 나는 창까지 놓친 채 머리를 싸쥐고 엎어졌다. 바로 머리 위로 날아가 수레에 푹푹 박히는 화살 소리. 섬뜩하다. 아, 생각해 보니 난 철모를 쓰고 있지. 그런데 왜 머리를 감싸 쥐었지? 염통에 한대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텐데 몸통은 무방비로 두고, 어리석기는.
순간 누군가가 드디어 홰에 불을 붙여 높이 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그 불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슬쩍 고개를 들고 불을 보니 바로 불 옆을 휙휙 날아가는 화살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끔찍스럽다.
“2, 3 십인대, 수레 왼편으로 돌격! 적은 저 언덕 위에 있다! 8, 9 십인대, 수레 오른편으로 돌격!”
누구 명령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 무조건 명령이면 돼! 이 상황에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다! 이미 누군가는 등 뒤의 수레를 박차고 앞으로 죽죽 달려 나가고 있었다. 3 십인대인 나는 다시 바닥을 더듬어 창을 찾은 후 상체를 한껏 낮추고 달려갔다. 화살이, 화살이 내 옆을 쉭쉭 스쳐가는 소리가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끔찍스럽다.
“아, 으, 으아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처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악, 화살이 여기로 집중되는 것 같아! 주위에서 나와 동조해 공포에 찬 고함을 질러대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됐겠지. 나는 혼자 달리는 게 아니라 여럿과 같이 달리고 있다. 적어도 화살의 비에 혼자 드러나 있는 건 아니다. 그것밖에는 지금 미친 척 화살 앞으로 달려가는 나를 위안하는 게 없어!
삽시간에 언덕이 다가왔다. 화살이 뜸해지고 무거운 발소리가 두두두 달려온다.
“제에에에엔장! 죽어!”
누군가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고 언덕 위로 뛰어올랐다. 최초의 적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 때였다. 파바바박! 보병과 보병이 돌격하던 속도를 간직한 채 충돌해 엄청난 소리가 났다. 머리 위로 사람이 날려간다. 이런, 고개 다시 숙여야 하겠어. 나는 창을 고쳐 쥐고 무릎이 떨려 흔들리는 걸음을 어떻게든 언덕 위로 돌리려 애썼다. 목이, 목이 자꾸 어깨 사이로 움츠러든다. 나는 달린다고 생각하는데 걸음은 비척거리고, 가까스로 소름끼치는 창검의 번득임이 가득한 언덕 위에 다다랐을 때, 뭔가 물컹한 게 밟혀 앞으로 엎어져버린다. 으, 으악! 어떤 개자식이 내 손을 밟았어!
나는 버둥거리면서 한손으로 철모를 잡고 다른 손으로 창을 쥐었다. 밟힌 손이 참 아팠지만 그런 거 돌볼 때가 아니다. 돌격, 돌격이다. 달려가서, 적과, 싸워야 한다. 찌르고, 휘두르고, 찍고, 자르고, 베어버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내 다리에 걸린 이 물컹한 건 뭐지? 어쩐지 축 늘어져 흔들거리는 형체가 꼭 사람 같은데?
“으악!”
내 비명은 저 위의 무시무시한 백병전에 삼켜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겠지. 나는 또 창을 놓쳐버리고 내 떨리는 손에 가득 묻은 진득한 피를, 내가 깔고 눌러버린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주, 죽은 거다. 어두워서 잘 모르겠지만 여기 있다면 우리 편일 거다. 나보다 먼저 돌격했다가 먼저 죽어버린 거다. 어둠 속에서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을까? 아니면 힘없이 감긴 눈으로 저승길을 바라보고 있을까?
“으악! 으악! 저리 비켜엇!”
발버둥을 친다는 게 허공을 차는 꼴이 되어 다시 뒤로 주르륵 미끄러져 버렸다. 빌어먹을! 내, 내 창! 죽고 싶지 않아,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 일어나려고 마구 팔을 휘두르다가 돌을 쳤지만 아픈 건 모르겠다. 어쨌든 손에 잡힌 바닥을 짚고 겨우 일어나서 허우적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불빛 아래 수레를 등지고 우리들의 전투를 쳐다보는 아군이 있다. 내 뒤로는 아무도 없다. 날, 나를 보고 있다. 여길 떠나고 싶다. 하지만 도망갈 수가 없다!
“젠자앙!”
아, 씨! 죽으란 거야? 날더러 죽으라고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고. 어쩌란 말이야! 나는 흐느적거리며 다시 언덕을 내달렸다. 백병전은, 아직인가? 동맥에서 피가 터지듯 분출되는 비명, 의미 없이 내지르는 고함, 여기에 아름다운 건 없어. 진득하게 귀를, 관자놀이를, 뺨을 경련시키는 공포뿐이야. 이상해. 소설에선 주인공들이 아무리 처음 전쟁에 참여해도 용감하게 돌진해 승리하던데. 난 영웅감은 아닌가?
“죽여버린다!”
언덕이 불쑥 사라지고 그 너머의 평평한 땅이 보인다. 무릎길이의 수풀로 덮여있어 달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곳곳에서 적과 싸우는 병사들의 고함이 힘겹다. 주위를 날뛰는 말들이 짜증난다. 누구를 말발굽으로 차 죽이려고? 저 냄새나는 말부터 없애버리겠어! 달려가려는데, 갑자기 나를 막아서는 누군가. 어깨 뒤로 넘긴 팔에는 피에 젖은 검이 들려있겠지. 제기랄, 또 창을 두고 와버렸잖아! 나는 무작정 달려들어 상대의 배를 머리로 떠받아 쓰러뜨렸다. 이 자식, 죽어! 으아악, 안 들려! 비명 지르지 마! 나에게 살인이 죄라고 말하지 마! 난 지금 죄짓는 게 아니야! 죽여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어! 여길 살아서 떠날 수 있다고!
“인마, 나다!”
커억, 턱이 확 돌아가 버렸다. 이 빌어먹을 놈, 힘깨나 쓰나보지? 나한테 눌려 쓰러진 주제 내 턱을 올려쳐? 이 자식! 나는 돌아가 버린 턱을 그대로 반전하며 적의 얼굴이 있을 위치를 들이받았다. 이 자식아, 대장간 쇠망치에 두들겨 맞은 기분이지? 어때? 코가 깨져서 좋지? 나는 히죽 웃으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마를 들었다. 갑자기 몸이 확 들리더니 옆으로 뒤집혀버렸다. 엉겁결에 팔을 들려고 했지만 이 자식이 상완을 자기 무게로 내리눌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놈이 내 가슴을 무릎으로 찍어 눌러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썅!
“크아아아악!”
“다켄, 이 자식아!”
어? 나는 무릎이라도 깨물려고 고개를 있는 대로 빼다가 위를 쳐다보았다. 하늘이 먼저 보인다. 이제 동틀 녘이 되었는지 시퍼렇다. 어디가 동쪽인지는 모르겠는걸. 그리고, 그 하늘을 등으로 받친 것처럼 구부정하게 날 내려다보면서 코피를 흘리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다. 안면이 딱딱하게 굳은 데다 여기저기 피가 묻어 흉측해보이던 그 얼굴은 입술만 달싹거리듯 움직였다.
“정신 차려. 전투 끝이야.”
“어…?”
“전투 끝이라고. 너 살았어, 버릇없는 가출꼬맹이.”
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 팔을 풀어주고 피를 슥 닦은 사람의 얼굴은 어쩐지 힌딜 형을 닮았다.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더니 형의 얼굴 한 면이 발갛게 물들었다.
어쨌든, 나는 살아있었다.
“저기, 형.”
“왜.”
“어, 그때 미안했어요. 그러니까.”
“됐어. 신병들이 다 그렇지.”
힌딜 형은 퉁명스러운 건지 무덤덤한 건지 알 수 없는 어투로 말하고 담배를 물었다. 다시 대화는 끊겨버렸고, 나는 머쓱해져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부끄럽게도 발광해버렸던 그 새벽의 전투는 에이모르의 남부권에 주둔하던 천인대가 기습한 거였다 한다. 그래봤자 우리 쪽은 일단 간판은 천인대가 셋에 기병까지 있었기 때문에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지만.
그렇더라도 이런 피 튀기는 전투, 이야기속의 전투가 아니라 진짜로 내가 그 속에 있었던 전투는 처음이다. 신병들이 많던 우리 수이키아 군이 대체로 어떤 분위기냐를 살펴보면 나와 비슷해서 뭔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누가 말이라도 걸으면 흠칫 놀라며 창을 움켜쥔다. 그 날 돌격했던 네 개의 십인대에선 모두 여섯 명이 죽었다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십인대에서는 부상자 두 명만 나왔다.
“신병 투성이라서 피해가 더 컸던 거다. 젠장.”
형은 담배를 들고 침을 탁 뱉었다. 누런 가래침은 우리가 기대서있던 목책 뿌리에 맞았다.
전투 직후 우리는 행군을 더욱 서둘렀고 오늘 늦은 아침 켐빌 근교라는 평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진을 세우고 정신없이 일하고 나니 해가 벌써 저렇게 높이 기울어졌는데 몸이 피곤하니까 대체 잡생각이 안 들어서 말이지. 그거 하나는 참 좋았다. 그렇게 일을 끝내자마자 점심도 마다하고 아무렇게나 자빠져 자다가 겨우 깨 보니 이렇게 오후가 한창 기울어 있었다는 거다.
“형은 어느 부대에요?”
“제1 천인대 제2 백인대.”
전위대였군.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전위부대와 기마대 일부가 병참부대를 공격한 적의 뒤통수를 앞에서부터 우회해 들어와 찔렀다던데. 그래서 그 때 그렇게 나타난 거였군.
“저, 형은 이전에도 전투에 참가했었댔죠.”
“그런데.”
아, 좀. 말하기 주저되긴 하는데.
“진짜로 사람을 죽여 봤어요?”
형은 후우 하고 먼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향해 담배연기를 뿜었다. 연기는 덧없이 흩어져 구름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덤덤한 얼굴이다. 젠장, 형님이 엄청 대단해 보이잖아. 그때 그 혼란한 와중에, 피가 튀고 살이 춤추고 쇠가 울어대는 그 상황에서도 대단히 침착해 보였는데. 이게 고참이란 건가? 난 그 때를 다시 생각만 해도 식욕 떨어지고 뺨이 경련을 일으킨다.
“그래도 형이랑 마주쳐서 다, 다행이에요. 헤헤.”
“인마, 진짜 살인날 뻔 했었어. 무슨 생각이야? 병아리란, 하여간.”
“그, 글쎄 그때는 경황이 없었다니까요.”
그리고 잠이 덜 깬 얼굴로 막사를 나온 나는 창을 떼놓으면 무지 불안해져서 창을 꼭 잡은 채 괜히 목책 근처를 얼쩡거리다가 높다란 목책 중간에 성벽의 갤러리처럼 달아놓은 발판에 서서 한가롭게 담배나 태우던 형과 마주친 거다. 막 형을 발견했을 때는 억지로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싹 사라졌다.
그래. 난 생애 첫 전투에서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덜덜 떨기만 했지. 물론 전투가 소설의 영웅들이 울부짖는 그런 위대한 광경은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실제상황은 너무했어. 그런데 힌딜 형은 이미 몇 번 전투를 했었고 적을 죽이기까지 했던 역전의 용사란 거지. 젠장, 우러러보이는데? 나도 다음 전투에선 제대로 된 꼴을 보이고 말테다. 내 목숨줄을 쥔 건 바로 이 손의 창과 용기와 냉정함이란 말이야. 그걸 보이겠다고. 난 용감하고 냉정한 전사다, 전사.
“그런데 밥은 잘 먹냐? 신병들이 첫 전투를 거치고 나면 식욕부진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아아아아주 잘 먹고 있습니다요. 안 남깁니다요. 맛있습니다요.”
“그 밥이 맛있다니 제대로 안 먹는 게로군.”
형은 킬킬 웃었고 나는 불퉁거렸다. 크윽, 이 전장에서 어떻게 맛을 알면서 먹지? 아니, 그것만으로 내가 먹나 안 먹나도 안단 말이야? 잘났다, 잘났어.
그 때 갑자기 아래쪽 저편 막사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계급을 보니 백인장이다. 어느 부대지? 그 늙수그레한 백인장은 허리의 검을 절그렁거리며 뒷짐을 지고 갈지자로 걷다가(갈지자가 뭐냐고 묻진 말라. 나도 모른다. 그냥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으로 걷는 폼이 잔뜩 배를 내밀고 헛기침 헷헷 하며 발목을 묘하게 옆으로 틀고 뒤뚱뒤뚱 느릿느릿 잰 척 하는 걸 말한다. 혹시 그것도 칼리가라의 말인가?) 우뚝 멈춰 섰다. 그 백인장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몇몇 사병이 모여앉아 쑤군덕거리고 있었는데 상관의 시선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나 뻣뻣하게 몸을 세웠다. 군복 앞섶이 풀려가지고 배때기를 다 드러내놓은 채 무슨 화투라도 한판 벌였던 모양인데. 햐, 저것이 고참이란 건가? 밤중에 습격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이 때에 당장 적이 나타날지도 모를 상황에서 당당하게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게? 그런데 내 생각은 뭔가 방향이 어긋났는지, 백인장은 척척 걸어가더니 늘어선 병사들의 따귀를 갈겨댔다. 쫘악, 쫘악!
“으, 보는 내가 소름끼치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힌딜 형은 그게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이 몸을 완전히 돌려 목책을 등지고서 구경했다. 맙소사, 혀어엉?
“남 맞는 게 보기 좋아요?”
“그럼. 남의 재앙은 나의 오락거리지.”
“잔인무쌍하군요. 저 병사들한테 이따가 그렇게 전하죠.”
“좋을 대로. 저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형은 키득거리며 유들유들 말했다. 뭐가 오락거리야? 혹시 형은 십인장 계급을 내세워 자기 십인대 부하들을 괴롭힘으로써 삶의 활력을 찾는 건 아니야? 우리 사병들의 적 같으니라고! 나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백인장은 따귀를 맞고 쓰러진 병사들을 다시 한대씩 걷어차 주고 그들이 들고 있던 울긋불긋한 화투장을 짓밟아버렸다. 직후 그는 씩씩거리며 언짢은 헛기침을 크게 내뱉고 뒷짐을 진 채 걸음을 빨리해 여기서 사라졌다. 병사들은 일어나면서 욕지거리를 내뱉고 운수가 없다느니 재수 없는 놈이라느니 수군거리며 화투장과 돈을 주워들었다.나는 뒷꼭지를 벅벅 긁었다. 내 복장은 그럭저럭 군인답다 할 상태였지만 칼라는 목이 답답해서 풀러놓았고 형은 셔츠 한 장을 받쳐 입은 위로 저 치들처럼 앞섶이 열린 군복차림이었다. 우리가 발판 밑에 있어 저 백인장의 눈에 띄었다면 역시 호통을 듣진 않았을까.
“좋게 말로 하면 되지 왜 저렇게 패댈까? 사람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
“인마, 개개인들은 잘났을지 몰라도 무리로 모아놓고 보면 예의니 도덕이니 하는 건 깡그리 사라지는 거란다. 일사불란하게 뭘 하려면 싫어도 누군가 나서서 으름장을 놔야 하는 거야. 무리란 것은 좋게 말로 해서는 뭘 듣지 않는단 말이야.”
뭔 소리야? 나는 고개를 들어 형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에요? 라이첸에선 구타가 군법으로 금지되었다던데 왜 그런 나쁜 걸 우리는 잘도 유지하는 건데요? 사람이 머리가 괜히 달렸나, 말로 하면 뭘 못 알아먹겠어요?”
형은 나를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머쓱해져서 목책에 두 팔을 올리고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다 큰 어른들이 얻어맞고 상소리를 들어야만 말을 듣는단 말인가? 사리를 다 알 사람들이 말이다. 사람이 좀 모였다고 말을 안 들을까? 이성적으로 이러이러 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면 누가 안 듣겠는가?
“라이첸 사람들은 기강이 확실해. 워낙 점잖은 족속들이라 사람을 주먹으로 치는 걸 굉장한 치욕으로 알거든. 당연히 이쪽은 말로 해도 어느 정도는 먹혀. 하지만 봐라, 군법에선 항시 복장을 단정히 하라, 도박을 금지한다 운운하지만 여기서 누가 듣고 있지?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고참들부터 나서서 태만히 하지.”
“그 정도야 안 지킨다고 승패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런 사소한 걸 군법으로 정해 괜한 죄인 만드는 거 아니에요?”
“그런 사소한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쌓이면 커다란 패인이 되는 거야. 예를 들어볼까? 너희들만 해도 데그에 도착한 이래 닷새 동안 완전히 풀어져서 꼴이 말이 아니었잖아. 그 복장 불량한 녀석들. 밤중에 습격을 받으니까 혼비백산하는 꼴이 참.”
“형도 복장 불량이올시다.”
“나? 난 이 꼴이어도 당장 적이 나타나면 내 자리를 알고 달려갈 수 있지. 너희? 너희 신참들은 허전하게 덜렁거리는 군복자락에 놀라 적이 자기 멱을 잡은 줄 알고 빌빌거리지.”
“이봐요, 지금은 낮인데.”
“적이 밤낮을 따지고 와 준다는 건 처음 알았군. 어쨌든 너희는 그런 사소한 데서부터 억지를 써서라도 잡아야 해. 대체 지각능력이 딸려서 말이야.”
“거야 우리는 애니까….”
애라고? 애? 잠깐, 나야 애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는 목책에서 팔을 내려 뒤를 휘 둘러봤다. 막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은 나와 같은 앳된 청년이 아니라 하나같이 ‘어른’이었다. 머쓱해져 고개를 돌리니 힌딜 형은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요. 형 잘났수. 잘났어, 진짜.”
“어른이나 애나 두드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건 똑같아. 특히 이렇게 규율이 필요한 ‘무리’들은. 어느 정도 지나면 또 자기들이 뭘 좀 안다고 풀어지는데, 이 때 또 두드려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명심해 둬. 전장에선 봐 주는 게 없어. 한 명의 실수로 모든 게 박살날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직 지휘관씨의 말만 듣고 그대로 움직여야만 해. 그 외는 필요 없어. 요구되지도 않고.”
나는 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 다 탄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군홧발로 밟아 끄는 모습은 여유롭기 짝이 없어 저런 냉정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이거 입대하던 날 그 조교의 말이 생각나는걸. 자아를 버리랬지. 삿된 자존심 내세우면 참형감이랬지.
젠장, 최고지휘관 외에는 다 사람도 아니구만.
“슬슬 가 봐라. 노닥거릴 시간에 창질 한번이라도 연습하면 실제상황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일 확률이 높아지지.”
나는 형에게 등을 떠밀려 앞으로 몇 발짝 갔다. 생각해 줘서 눈물나게 고맙네. 젠장.
이 날 해가 지평선에 걸렸을 무렵 우리들은 가벼운 흥분에 휩싸였다. 칠흑색 바탕의 홍사자 깃발이 어두워가는 저 북동쪽 지평위로 떠오른 것이다. 목책 위에 서서 경계하는 병사들이 그 너머로 고개만 빼고 보기에도 우리와 비슷한 모양의 칠흑색 군복 차림인 무리들이 질서정연하게 몰려오는 장면은 무섭고 멋진 것이었으리라. 게다가 그 무리들의 앞에는 바로 그 킬리온이 위풍당당한 승리자의 위용으로 서있을 것이다. 당장 5분 대기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각자의 무기를 움켜잡고 무장을 고쳐 확인했다.
오가는 말을 들으니, 수년간 타지에서 전쟁만 치른 고참들답게 그들은 순식간에 여기서는 한참 떨어진 언덕에 진지를 세웠다 한다. 왜 저걸 치지 않고 구경만 하나? 다시 들어보니 그들의 야만족 용병 기병대가 중무장보병과 당장 이쪽으로 치고 올 듯이 버티고 있어 그 후방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걸 어떻게 방해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 오갔다. 말도 안 돼, 우리가 뭣하러 여기에 먼저 들어왔는데? 하긴 우리도 오늘 여기 도착하긴 했지만. 하지만 먼저 쳐서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나?
“아니, 뭐. 우리 대공님이 그 킬리온과 대화라도 하려는 참인가 보던데.”
무슨? 왜? 싸우려고 여기 모인 것 아닌가? 대화라니? 좋게 말할 때 가라고 할 참인가? 난 당신의 팬이니까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다, 뭐 그런 대화라도 오갈 참인가? 이해가 안 돼!
이를 악물고 기다리고 있자니 어느새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오늘은 휘영찬 보름달이 떠야 하는데 아직 어둡기 짝이 없다. 응? 그러고 보니 낮에 구름이 좀 끼었던가? 하늘이 얼룩덜룩해 보이는걸. 검은 바탕에 짙은 회색 솜뭉치가 굴러다니는 게 뭐랄까, 털갈이 철에 개나 토끼가 날뛰다가 엉망이 된 집안 꼴이랄까나. 그나마 여긴 진지 안이라 여기저기서 횃불이 타고 있으니까 뭘 혼동하거나 하진 않겠지. 게다가 우리는 무지 든든한 목책 뒤에 있잖아?
우, 이렇게 말해도 떨리기는 매한가지이다.
“방금 전 대공님이 혼자 수행원 몇 만 데리고 말을 타고 나갔다네.”
“뭘 어쩌려는 걸까? 그 킬리온이 대화에 응했다는 거야?”
우리 모두 어깨를 바짝 긴장시키고 어둠 속에서 눈만 반짝이고 있었다. 우린 졸병일 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2)
고참들은 말한다. 잠만 푹 잘 수 있다면 전쟁도 나쁘지 않다고.
글쎄, 난 그런 건 모르겠다. 아직 병아리라 그런 건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치르는 ‘전쟁’이라는 게 내 눈에는 안 들어와서 그러는 건지. 지금의 상황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전쟁’이 아니라 조금 먼 외국에서의 캠핑인걸.
“흐아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지?”
“제국 놈들은 저 킬리온을 빼면 죄다 골수에 겁을 채운 작자들인가 보지.”
“실은 우리 지휘부가 겁쟁이인 거 아닌가?”
어느 이른 저녁 무렵, 우리 십인대 사람들은 저녁으로 받은 주먹밥을 조물딱거리면서 조용히 불평을 터뜨렸다. 불평이란 건 원래 시끄러워야 마땅한데 조용조용했던 건 육지에 발을 올린 순간 부활해 버린 루스 백인장의 눈에 띄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움을 가장한 저녁 한때의 잡담이 실은 전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우리로서는 언제 저 성에서 적이 튀어나와 우리를 칠지 알 수 없으니 극도로 긴장해 있어야 마땅했다. 그게 마땅하고 당연한 진리인데, 그렇게 믿어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의 이 한가로움은 대체 뭔가.
나는 무료함과 허전함을 반씩 느끼며 몸을 한껏 젖혀 기지개를 폈다. 눈짓해 보니 서녘은 가을 한창때의 들판 색을 물에 타 묽힌 듯한 모습이었다. 사람들과 군막과 목책,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데그 성은 저 색을 좀더 붉힌 물이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아직은 동장군의 걸음이 떠나가지 않은데다 바닷바람이 곧장 들이치는 데라 날씨가 차지만 이 순간만큼은 평범한 산들바람이라 해도 좋을 시원한 바람이 언뜻언뜻 분다. 이 풍경은 아무리 좋게 봐 줘도 한가로운 저녁 풍경이지 전장의 풍경이 아니다! 어, 지루해.
“에이모르에는 정말로 병사가 하나도 없나? 아니, 하다못해 의용군 같은 거라도 좀 튀어나와 줘야 하는 거 아냐?”
마치 싸움을 바라는 질 나쁜 건달 같은 소리를 잘도 주워섬긴다. 하지만 나도 그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한다.
대체 말이야, 동맹을 구하고 고향을 구하려고 병사가 되어 험한 물길을 헤치고 이렇게 와 줬더니만, 왜 무려 제국의 수도씩이나 되는 성에선 아무 반응도 없는 건가? 덕분에 우리들은 처음 돌격 때의 긴장이 흐지부지 풀어져 버렸지 않은가.
우리가 라이첸에서 배를 탄 건 자월(子月) 30일이고 에이모르의 수도 데그에 들어온 건 축월(丑月) 21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데그 성을 포위한지 딱 닷새째. 그동안 이쪽에서는 잊을 만 하면 성의 없이 달려가 성벽을 부숴주거나 성으로 들어가려는 수송선 또는 마차를 우리가 먹거나 하며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물론 전쟁이 지루하다고 하면 천벌 받을 말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도 우리 부대가 한 일은 없다. 처절하게 없다. 진지 세우고, 성으로 접근하는 모든 육로에 목책 치고, 식량 배급하면서 더 달라고 시비 거는 작자들 윽박지르고, 이런 뭐랄까, 통상적인 것? 하여간 이런 일밖에는 한 게 없다.
“하기야, 내가 킬리온이라면 병력 하나 없는 수도에 절대 우리 공격을 받아주지 말라고 충고하고 지가 열나게 뛰어오겠다. 에이모르에서 쓸만한 군대라곤 그 작자의 군대뿐이잖아.”
“그럼 저기선 역시 그 킬리온을 기다리는 건가.”
우리는 킬리온이라는 이름을 두려움과 증오와 경외감이 묘한 배합을 이룬 감정을 담아 부른다. 어쨌든 성장배경 자체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민이 아니었던가. 루갈도 가라사대, 키츠 대공님조차 그를 평하길 일개 천인대로 대륙 하나를 삼키고 일개 군단으로 대륙 하나를 지켰으며, 조약 이후 패배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제국의 만민을 열광시켰으며, 동맹에서 상대한 모든 강철 같은 무장을 패배시키고, 그런 위력을 소유하고도 자신의 발아래 엎드린 자를 손수 일으켜 세웠으며, 이 모든 것을 능히 자신의 안에 품을 수 있는 지혜로운 자라고 했단다. 간단히 말하자면 키츠 대공님은 사실 킬리온의 팬이란다. 어이구, 동맹의 운명을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이 도리어 나서서 적을 존경하다니! 뭐 나부터도 킬리온을 당대의 영웅으로 생각하니 그 심정을 아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만 어쨌든 대공님은 나 같은 촌부랑은 다르잖은가.
“소문에는 놈이 우리가 떠나고 이틀쯤인가 뒤에 에이모르로 출발했다던데. 눈치 하나는 끝내주는걸.”
“하지만 그 자의 발목을 잡는 건 로타레프 대공이야. 절대 평안한 행로가 되진 못할 거다.”
대원들은 낄낄 웃었다. 나도 그만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로타레프 대공은 일찍이 저 거친 예메크의 뱃사람들도 꺼리던 동해의 끝으로의 모험을 감행했던 사람 아니던가. 그 대가 센 성격이라면 분명히 킬리온을 괴롭히기엔 좋은 상대가 될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이 모든 작전이 로타레프 대공으로부터 나온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키츠 대공은 우리 대공님이라지만 정말이지 병약하다는 평판 외엔 얻은 게 없다. 하지만 로타레프 대공은 맹주로부터 인정받은 무인이기도 하다. 킬리온을 꺾는다면 그건 로타레프 대공이지 키츠 대공은 아니라는 게 우리들의 생각이다. 막상 여기로 건너온 건 키츠 대공이지만 뭐어, 결과만 좋으면 됐지. 아무튼 뭐 일 좀 주란 말야, 일을! 전쟁하러 나온 사람들한테 이 무슨 행패야, 평온한 저녁이라니!
“어쨌든 우리가 이렇게 속편하게 앉아서 조잘대고 있는 동안에도 그 킬리온은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을 거란 말이야.”
십인장이 짓씹듯이 말했다. 그게 우리의 문제다. 그것이 우리가 이렇게 평온한 저녁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불평이라도 해서 이 조용한 분위기를 깨보려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불안하다. 우리는 곧 그 킬리온 더 나후카닉스와 정면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 으으, 새삼스레 등골이 서늘하니 털들이 좌악 곤두서는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유서를 써 둘까? 에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십인장의 한 마디에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해는 수평선 너머로 상당히 가라앉았고 그 때문인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얼굴은 각자들의 생각보다 어두워 보였다.
“킬리온 하나만 문제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 휘하 천인장들도 만만치 않다는 게 끔찍스럽구먼.”
“그러게. 스테로나드 천인대야 대장 자신이 킬리온이니 논외로 치고, 홍사자 군단의 천인장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다지? 이아카 백작 제스커랄지, 평민도 아니고 천민 출신이라는 마카비랄지.”
“용병을 빙자한 에이모르 깡패패거리 가이에스의 아스그람도 잊어먹으면 곤란해.”
“그래서 거기 맞설 우리 전력은 어떻게 되는 거냐?”
우리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적이 됐든 아군이 됐든 전체 병력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우리네 지휘관들은 예메크 출신이라 어느새 사병들한테까지 이름이 알려져 버린 기마대 천인장 외엔 사실 얼굴도 모르는걸. 그 외의 지휘관들은 능력 검증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저쪽은 수년간 전쟁을 한 작자들인데 이쪽은 그동안 그 전쟁을 산 너머 물난리 난 듯 구경하고 있었단 말이다.
“자, 적당히 하고 치우지. 식사시간이 늘어지는 걸 우리의 백인장님은 굉장히 불편해 하시잖나.”
십인장은 점잖게 말을 끊었고 우리는 석연찮은 얼굴로 탁탁 털고 일어나 우리 백인장씨가 기다릴 곳으로 갔다. 휴, 방금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내가 철모르던 때 선망의 눈으로 그렸던 이름들 아닌가. 적이라고? 아, 그래. 적이지. 나는 입을 비죽거려 얄궂다는 생각을 쫓아버렸다. 그러고는 남들 따라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손에 밥알의 찰기와 소금기가 남아있다고 철석같이 믿듯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아무래도 주먹밥 한 덩이로는 양이 차지 않는 법이고, 아직 오지도 않는 영웅적인 적장들보다는 허전한 내 배가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다. 쩝.
“다 좋은데 밥 좀 넉넉히 먹을 수는 없나. 원.”
“그만큼 먹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 20년 전의 에이모르 사람이라면 네 목을 뽑아놓으려 들었을 게다.”
20년 전이라면 대략 에이모르에 대흉년이 들기 시작한 때 말인가? 나는 혀를 날름거렸다.
“지금은 20년 후라오. 아무튼 먹은 만큼 힘을 내게 되어 있지 않던가.”
“후후후, 힘이야 넘치지. 당장이라도 에이모르 놈이 머리를 디밀면 어깨 위를 시원하게 해줄 용의가 있는데 말씀이야. 이거 뭐 일 좀 없나?”
놀고 있네. 그나저나 말 나온 김에 뜨끈뜨끈한 국수 한 사발만 후룩거리며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내 평생에 국수란 걸 아래여울 부잣집 결혼식 때 딱 한번 먹어봐서 말이지. 귀한 멸치를 잔뜩 넣고 펄펄 끓여서 얼굴 전체로 김을 받으며 땀을 송글송글 흘리고는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면발을 후루루룩 쩝쩝쩝. 그러니까, 쩝.
시시덕거리는 새 진지 한가운데의 연병장 비슷하게 틔워놓은 공간에 도착했다. 우리는 부대기를 찾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줄을 섰다. 당장 여기저기서 군기 빠졌다고 호통이 날아왔지만 우리는 좀 어깨를 움찔할 뿐 우리 뜻대로 어슬렁거렸다. 이제 좀 묵은 병사 티가 나나? 헤헤헤.
“이 빌어먹을 후레자식들아, 너희가 입대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군기가 빠졌냐! 똑바로 안 서? 등짝을 좀 시원하게 해 줄까?”
오우, 그건 싫어. 제발 때리지 좀 말라고. 젠장, 라이첸 군은 구타만은 군법으로 금한다던데 왜 수이키아는 안 그러는 거야? 이건 군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우리 대공님의 한계다! 로타레프 대공을 봐라, 그 사람 자신이 어려서부터 병사들과 지내서 그 고충을 제일 잘 이해한다잖아? 그러니까 패지 말라고 아예 법으로 정했지.
어쨌든 해는 뉘엿뉘엿 저버려 군데군데 피워 올린 횃불만이 주위를 좀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바다위로 어둠이 깔리는 장면은 솔직히 말하면 멋있다. 나는 사방이 산으로 막힌 산골 출신이라 하늘이란 개념을 산이 받친 위에 있는 천장 정도도 느낀다. 그런데 막힌 것 하나 없이 뻥 뚫린 바다위의 하늘은 그야말로 둥근 하늘이다. 너무 멀어서 손을 대기는커녕 바라보기도 막막할 정도로 무서운 그런 거대한 세계의 지붕이다. 이런 하늘에 어둠이 깔리는 것이 어떻게 안 멋있겠는가. 몸서리쳐지게 멋지다. 그나마 지금은 굳건한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니 이렇게 널널한 기분으로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지만 흔들리는 배 위에선 하늘 하나 보기도 참 힘겨웠었지.
“정신 안 차리나! 엎드려뻗쳐!”
“실시!”
…그리고 이놈의 얼차려는 몸살 나게 싫어. 나는 죽을상을 쓰고 엎드렸다. 우, 그래도 우리 십인대만 걸렸군. 어째서 옆에서 떠들던 저 무리들은 안 걸린 거야? 일벌백계냐? 당장에 근처가 얼마만큼은 조용해졌다만 난 뭐냐, 어째 감나무 제일 윗꼭지에 매달린 까치밥 같잖아? 왜 다 우릴 쳐다보냐니까!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해서 줄이 반듯하게 맞춰지고 우리들 표정에 그럭저럭 긴장감이랄 것이 떠오르는 데엔 5분 정도가 필요했다. 그게 각 부대 백인장들의 안면근육을 무지 무리시킨 모양이다만 알게 뭔가.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건 속에 든 건 다 게워내게 했던 긴긴 바닷길과 김빠지는 근 며칠의 행태 때문이다. 전적으로 지휘부 책임이다 뭐. 흥.
“병사가 아니라 아침 일찍 마지못해 조회에 출석한 학생들 같군. 이 상태로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군.”
누군가의 젊은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앞쪽이었던 것 같은데 제5 백인대에서도 상당히 뒷줄로 떨어진 우리 자리까지 들린 건 순전히 누구누구의 강압으로 모두가 입을 다문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뜻이지? 난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모르겠는걸.
앞사람들의 머리 옆으로 고개를 좀 빼고 싶지만 그랬다간 당장에 벼락이 떨어지겠지. 나는 굳건한 열중쉬어자세로 앞사람 뒤통수만 매섭게 노려보았다. 눈동자만 슬쩍 움직여보니 앞쪽에서 누군가가 장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연단 같은 것에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아, 대공님인가. 잠시 후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위치로 대공님(으로 추정되는 젊은이)이 올라갔다. 주위는 어두운데다 횃불마저도 강한 바람에 빨랫감마냥 흔들리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먼데 자꾸 얼굴의 음영이 바뀌는 걸 어쩌겠는가. 하지만 체구 같은 건 여기서도 어림짐작이 가능했다. 불쌍하게도 키는 평균보다 작고 어깨는 참 좁아 보인다. 안색은 모르겠지만 목소리부터 피곤기가 조금씩 묻어나온다. 확실히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로군.
왜 대공님이 킬리온을 존경하는가 라는 질문에 할 대답이 하나 더 생겼다. 대공님은 그야말로 무골이라는 킬리온의 건강 또한 무지 부럽겠지.
그 대공님은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제군들. 그간 제군들이 지휘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진 건 알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힌다. 그건 전략적인 목적이었음을. 우리가 진정으로 맞아야 할 적은 저 데그 킬리온이지 데그 성과 에이모르 제국은 아님을. 우리가 며칠간 데그 성을 포위한 건 나후크스탄을 비롯한 동맹의 남부지역을 유린중인 킬리온이 우리 땅을 떠나게 함과 동시에 그들의 땅에서 결전을 짓고자 함이다.”
그 정도는 우리도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대충 꿰찼지. 그런데 분위기 묘하군. 지금 이 시점에서 대공님이 저런 말씀을 한다는 건, 뭐랄까, 마치 대격전을 앞두고 병사들을 격려하는 것 같은걸? 왜, 소설에도 자주 나오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킬리온의 홍사자 군단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킬리온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라이첸의 로타레프 대공을 비롯한 동맹의 용맹한 무인들의 검부터 막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지친 상태에서 급히 도착한 킬리온 군에게 그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한 우리 군이 상대가 되지 못할 리는 없다. 제군들은 그대들이 부모를 따르듯이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나는 제군들의 신뢰에 보답해 보이겠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우리는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온 것이니까. 이 싸움에는 동맹의 모든 가능성이 걸려있다는 걸 기억해 주길 바란다.”
음, 우리가 앞으로 맡을 임무가 그 정도로 심각한 임무였나? 하지만 뭐, 졸병이 뭘 알겠는가. 대장님이 꼭 이겨 보이겠다는데 나쁠 거야 없지. 이기는 건 어쨌든 기분 좋은 거니까. 상대가 나와 대공님의 영웅 킬리온이라는 건 씁쓸하지만 어쩌겠어, 지금은 전쟁 중인걸. 이렇게 생각하니까 괜히 비장감이 드는데? 헤헷. 절로 목이 어깨 사이에 파묻히게 되는군.
대공님은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대중을 향해 서서 말하기가 힘겨운지 좀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좀 쉰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지금 제군들은 무슨 모습으로 서 있지?”
갑자기 목뒤에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군복 칼라는 확실하게 세워져있는데 무슨 착각을. 그런데 왜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들리지? 우리들의 모습은, 그러니까 대공님 말씀으로는 아침에 마지못해 조회에 출석한 학생 같은 꼴이란 건가? 그게 어떤 건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까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상당히 허물어진 모습을 말하는 것이겠지. 윽, 정신 차리란 건가. 진짜로 죽을지도 모를 진짜 싸움을 하니까. 이제야 내가 신병이란 게 확 다가온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갑자기 주위가 달라 보인다. 내가 무지 긴장한 게 아니라면 역시 신병이 대부분인 다른 친구들도 진짜로 긴장한 모양이다.
“두 시간 후 출발한다. 그 때까지는 동맹의 군인다운 모습을 되찾길 바란다. 이상.”
대공님은 다시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내려갔다. 저 킬리온을 상대하면서 따르기에는 그리 믿음직하지 못한걸.
그나저나 오늘 저녁을 일찍 먹게 한 건 그 때문이군. 젠장, 진짜 대격전이란 말이지. 그 킬리온을 상대로 하는. 어, 어쩌지? 나는 작대기를 앞으로 찌르는 훈련밖에 무기 다루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데. 내 목숨을 어떻게 건져서 돌아갈 수는 있을까? 그 혼란한 와중에 어디서 날아온 건지도 모를 칼에 맞아 허무하게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아무래도 해산하는 대로 가서 유서를 쓰긴 써야겠다. 엇, 아냐. 죽긴 왜 죽나. 난 다켄이란 말이야. 다켄 스렌돌프라고.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고 군인이 되었어. 이름 정도는 남겨야지, 그 전에 죽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어.
가족들은 잘 있을까? 지금 시기에는 보리밟기가 한창일 텐데. 내 걱정에 아무것도 못할 만큼 약해빠진 사람들은 아닐 테지만 은근히 걱정되는걸. 이름 날리겠다고 홀연히 사라진 장남이 어느 날 그 킬리온한테 덤볐다가 유골로 돌아왔다고 하면 무슨 반응들을 보일까. 제길, 갑자기 눈이 부옇게 되는 건 뭐야.
“으, 혼쭐을 내는군. 저 병약한 대공이.”
고개를 돌리니 옆줄 친구들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아직 해산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건 신병다움이라 해야 할지, 격전을 앞둔 병사들의 끓어오르는 전의의 발현이라 해야 할지. 물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전자겠지.
“그나저나 이 거리에서 저 목소리가 저렇게 똑똑히 들리다니, 무슨 장치를 쓴 것도 같지만 딱히 그럴싸한 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한 거지?”
글쎄, 그걸 알면 여기서 졸병하고 있을까. 마법이야 전설 속 칼리가라 이야기를 할 때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니 절대로 아니고. 그러고 보니 대공님은 칼리가라의 유산이라는 저 수중성벽인가 뭔가를 무력화시켰었지. 혹시 대공님의 어릴 적 꿈은 칼리가라 탐험이었나? 그때 뒤에 서 있던 친구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말했다.
“그럼 우린 ‘칼리가라 탐험대’가 되어버리는 걸까?”
위험한 소리 하는군. 나는 그 친구 발 앞에 침을 탁 뱉은 후 내뱉듯이 말했다.
“그건 아닐걸. 최소한 패전 소식은 고향에도 닿을 테니까. 소식은 가니 ‘칼리가라 탐험대’는 아니지.”
그 친구는 뭐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주위에서는 나직이 음울한 웃음이 터졌다. 이때 드디어 해산명령이 떨어졌는지 백인장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웃음을 거두고 딱딱한 표정으로 줄을 섰다.
우리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백인장씨는 싸늘한 낯에 비죽 웃음을 띠고 우리를 훑어보았다.
“하. 그 킬리온과 정면대결이라. 그런데 지금 여기 있는 잡것들은 뭔가. 천하에 몹쓸 것들, 쓸모없는 멍청이들. 그 텅 빈 머리에 든 게 뭐지? 개라도 한달을 훈련시키면 주인의 말을 알아듣는다. 너희는 특별히 행군 직전까지 재훈련을 받는다. 1분 내에 완전군장하고 집합. 실시.”
귀신은 저 작자 안 데려가고 뭐 하나아앗!
두 시간 후 우리는 목책만 남기고 진지를 치워버린 후 열을 맞춰 행군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바다를 왼편에 끼고 데그 성을 등졌으니 아마도 북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싶다. 하긴 마음이 급한 킬리온이 우리가 한 것처럼 바다를 통해 역풍을 거슬러 올 리는 없고, 리크넵이나 지젤 등지에서 잠잠하고 좁은 바다를 건너 즉각 대륙에 들어오지는 않을까? 수이키아 군이라는 과녁을 향해 쏘아지는 화살의 기세로.
‘재훈련’인가 뭔가 때문에 진이 쫙 빠져버린 제5 백인대는 행렬의 말미에서 수레를 끌며 또 죽는 소리를 내고 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루스 놈!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 데엔 따라갈 자가 없는 놈! 우리는 속으로만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며 겉으로는 영차영차 짐을 날랐다.
데그 포위 첫날부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기병들이 슬금슬금 나타나 우리 주위를 돌아다닌다. 대체 어딜 갔었던 걸까? 역시 예메크 인들은 속이 시커멓다. 오죽하면 너구리 이상으로 의뭉스러운 사람을 가리켜 능구렁이 열 마리는 들어앉은 예메크 사람이라고 놀리나.
“어디로 가는 것 같수? 십인장님.”
자정 무렵 잠시 행군을 멈추고 네 시간동안 휴식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땅바닥에 모포를 깔면서 우리 십인장한테 물어봤다. 십인장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한동안 균형을 못 잡다가 될 대로 되란 듯 모포를 내던지고 그 위에 몸을 던져버렸다.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은 주위의 우리가 듣기에도 참 아파보였다.
“끄으으으음. 북쪽인 듯‥하다. 켐빌이려나.”
“켐빌이요?”
거기가 어디지? 나는 처음 듣는데. 하긴 내가 아는 에이모르 제국의 도시는 수도 데그와 킬리온의 고향인 스테로나드 뿐이지. 헤헤.
“남부권에선 데그 다음가는 도시이다. 콰우즈 강 하류의 삼각평야는 거의 차지하고 있어서 에이모르 최대의 밀 생산지라더군. 그쪽으로 가는 거라면 아마도 닷새는 행군하지 않을까 싶네. 원래는 도보로 일주일이 넘는 거리지만.”
모포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던 다른 친구가 대답해줬다. 닷새 행군? 새로워진다. 백인장놈을 향한 살의. 후하하하하.
“어, 피곤하다. 이제 복잡한 생각 같은 건 다 잊어버릴래. 그런 건 높은 사람들이 하는 거야.”
나는 진저리치며 모포 속에 동그랗게 몸을 말아 넣었다. 당장 죽더라도 잠은 자야겠다. 도저히 피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3.병사, 승리하다
1)
동맹군을 태운 배는 흐느적거리는 안개 속을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노가 없으니, 아마도 해류라는 것을 타고 흘러가는 모양이다. 해류라는 건 루갈도한테 처음 들은 말인데, 바다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이란다. 말이 안 돼. 물만 그득한 데서 약간의 물이 또 따로 움직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일인가? 마법도 아니고. 아무튼 그 해류라는 게 정말로 있는 건지 돛을 다 접은 우리의 배들은 뱃머리를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인 채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완전군장을 진즉에 끝내고 한시바삐 뭍에 오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날짜를 따져보니 자그마치 3주일동안 망망대해에 떠 있었다. 땅이 보고 싶다. 땅을 밟고 싶다. 땅에서 자고 싶다. 이놈의 비린내와 흔들림과 적적함과 무서울 정도의 막막함이 이젠 싫어!
“이상하군. 안개가 너무 짙어서 그런지 땅이 보이지 않는군. 여기가 정말 에이모르 대륙인가?”
조그마한 창으로 밖을 구경할 수 있는 자리를 독점할 정도로 우리 중에서도 제법 힘 좀 쓰는, 아니지. 정확히 말해 성질 나쁜 십인장 한명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목소리가 맞장구쳤다.
“맞아. 그 뭔가, 에이모르 제국의 도시들은 모두 높은 탑이 하나씩 있단 말이다. 그게 안 보이면 여긴 에이모르가 아니야.”
언제 에이모르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16년인가 17년 전에는 동맹군이 스테로나드까지 점령했었으니 당시 신병이거나 했던 사람이 아직 제대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군에 남아 최고참으로서 우리들에게 잘난 척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훨씬 이전, 기원조차 모르겠는 그 전쟁의 역사에서는 보다 멀리 데그까지 위협했던 적도 있을 테지만 근래의 일은 아니니 통과.
“엇, 안개가 갈린다.”
나쁜 자식, 혼자 상황중계하지 말고 모두에게 보여라! 나는 그 덩치 큰 십인장을 노려보았다. 어둠 속이라 들킬 일은 없지롱. 그런데 안개가 어쨌다고?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비명소리가 저 위에서부터 꼬리를 끌고 내려왔다.
“으아아아악!”
우리는 반사적으로 절그렁거리며 허리에 찬 단검을 부여잡았다. 뭐, 뭐야. 밖에 있다면 라이첸 군이잖아. 무슨 일이지?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순간 백인장씨가 벌컥 뛰어 들어왔다.
“해일이다아앗! 모두 충격에 대비하라!”
해일? 그게 뭐지? 나처럼 산골 출신이 많은 수이키아 군들은 뭘 하란 거냐는 듯 아무 짓도 안 했고, 백인장씨는 혼자 길길이 날뛰었다.
“이 멍충이들아! 아무거나 단단한 것 잡고 넘어질 걸 대비햇!”
무슨 소리야? 넘어질 걸 알면 안 넘어지게 하면 되지 왜 대비씩이나? 순간 나는 백인장씨의 표정에 서렸던 다급함이 뭔지 깨닫게 되었다. 십인장이 비명을 꽥 지른 것이다.
“파, 파도다! 엄청나게 큰 파도다! 으아악!”
뭣이라고! 단, 단단한 것! 단단한 게? 나는 되는대로 손을 뻗어 잡힌 침대 기둥에 있는 힘을 다해 매달렸다. 다음 순간 배는 크게 기우뚱하고 한쪽으로 들리더니 뒤집힐 듯이 기울어졌다. 끼이이이이익.
“으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
“뭐, 뭐야, 이건! 윽!”
“비, 비켜! 수, 숨이.”
당장 선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특히 기울어진 쪽에 있던 병사들은 그쪽으로 넘어지거나 쓰러지며 서로 밀게 된 다른 병사들에 깔려 죽기 직전이었다. 다음 순간 뭔가 무서운 소리가 쿠구구구궁 하고 가까워지더니 배가 완전히 옆으로 누워버렸다. 곧이어 무엇인가가 대단한 무게가 실린 엄청난 힘으로 배가 들린 쪽을 때렸다. 콰과과과광!
“크악! 배가 부서졌다!”
낭패스러운 목소리는 어디선가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물소리에 파묻혀버렸다. 실내는 당장 아수라장이 되었다. 파도를 맞아버린 쪽인 배 옆구리 어디가 부서진 것 같긴 한데, 물이란 위에서 쏟아져 들어와 이 아래부터 차는 것이다. 갑판 아래의 선실에 갇혀있던 우린 꼼짝없이 물더미에 생매장 당하게 생겼다! 우, 우선 나가야 한다. 여기 가만있다가는 익사체가 된다. 그런데 너무 옆으로 기울어져버린 데다 기둥에 매달린 채 언뜻 본 창 밖은 완전히 물에 잠겨 거품을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물은 쉴 새 없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들어오고 아래에 깔린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어떻게 도와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 나 자신이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여기서 나가더라도 이 배가 물속에 가라앉아버린 이상에는! 그래도 이곳을 도망치려고 모두가 문으로 달려들지 못 하는 건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기울어진 탓에 아예 움직이질 못하기 때문이다.
“침착하라! 배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이 촌놈들, 너희가 배에 대해 아는 게 뭐냐! 내 말을 따라! 침착해!”
백인장이 어디서 고함을 쳐댔지만 아비규환이 된 이 안에서 누구 귀에 들리길 바라고 외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얼이 나가 기둥만 붙잡은 채 내 다리가 걸린 저편 침대를 차면서 어떻게든 몸을 가누려 했다. 도중에 누군가를 차고 누군가에 밟혔지만 욕이나 실컷 해줄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발버둥치던 나는 어느 순간 젖은 선실 바닥을 밟고 일어섰다. 일어섰어?
“이 촌놈들아, 봤냐! 배는 원래 이렇게 설계한다! 침착해라! 2차 해일에 대비해 뭐든 붙잡아! 아래에 깔린 놈들을 구조해!”
이보쇼. 간신히 죽다 살아난 놈들이 이 상황에서 뭘 생각하겠어. 난 내가 생각하기에도 무서운 힘으로 문으로 돌진했다. 2차 충격? 젠장, 그딴 것 몰라! 난 여길 나가겠어, 익사하긴 싫어!
“우아아아아아! 비켜!”
“이 멍청이들이! 나가면 2차 해일에 휩쓸려! 욱!”
문에 가까웠던 친구가 백인장을 패서 잠재운 모양이다. 우리는 그대로 문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건 확실히 어리석었다. 복도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 병사들로 가득해 도저히 몸을 뺄 공간이 없었다.
“비켜, 이 자식아! 끄악!”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비키란 말야!”
“사람 살, 살려.”
온갖 욕이 쏟아지고 밀고 밀리는 가운데 좁은 복도는 삐이걱 비명을 질렀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단단한 벽조차 그 무게로 부서지려는 건가? 나는 너무 무서워졌다. 여기서 이렇게 사람에 깔려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인데! 앞뒤양옆에 가득한 사람들 때문에 갈빗대가 꽈아악 조이면서 폐와 심장이 비명을 지르는 게 내 귀에 들린다. 아아, 어째서지. 왜 내가 이렇게 호된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지금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집에 있었더라면, 지금 나는…!
콰아앙! 갑자기 엄청난 울림소리가 들렸다. 배가 부서지려는 줄 알고 순식간에 넋이 나가 조용해진 우리들은 그게 누군가가 복도 입구 쪽에서 망치 같은 걸로 벽을 친 소리임을 깨달았다. 그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라이첸의 조선술을 우습게보지 마라, 땅개놈들아. 우린 저 동해 끝까지 가봤던 배를 만들었다. 이까짓 해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은, 묘하게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입을 꼭 다물었고 그때까지 우리끼리의 소란으로 듣지 못했던 희미한 비명, 물 쏟아지는 소리, 배가 뒤틀리는 소리들을 들었다. 더 불안해지려는데 그 남자가 피식 웃었다.
“들리냐? 이건 우리가 동해로 떠나고 일주일 만에 태풍을 만났을 때 들은 그 소리군. 괜찮아. 저 소리 듣고도 다 살아왔거든. 하지만 갑판에 나가있던 녀석들은 3할이 바다에 쓸려갔던 것도 같다. 어여 들어가셔. 뱃일은 뱃놈이 알아서 하게 하고, 땅개들은 육지에 내릴 때까지 잠자코 있어라.”
이런, 그런 말은 미리 해줬어야 할 거 아냐! 라이첸 해군임이 분명한 그 남자의 말은 느물거리고 조용했지만 우리는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갑판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가까운 선실로 밀려들어갔다. 나도 누군가에 떠밀려 다시 우리 선실로 돌아왔다. 안에서는 저 남자의 말을 듣지 못한 병사들이 여전히 나가려고 아우성이었고 바닥도 흥건했지만 확실히, 갑판에 나가 저 파도를 직접 맞는 것 보다는 몇 중의 벽이 있는 이 안이.
으악! 그래도 난 나갈래! 여긴 너무 사람이 많아!
“백인장님, 정신 차리십쇼. 어이, 백인장님. 이런, 정신을 못 차리는군.”
문간에서 정신을 잃은 백인장을 흔들며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옳다구나 슬쩍 뒷걸음질쳤다. 안의 아우성, 밖의 고요함, 모두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리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안으로 떠밀려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되도록이면 뭔가 보고할 게 있어 나가는 병사처럼 표정을 굳세게 하고 몸을 틀어댔다. 아니 뭐, 내가 생각하기에도 굳세기보단 퍼렇게 질려있지 않을까 싶지만 어두우니까 아무도 그런 건 못 봐.
그 선원의 호통이 힘이 있었는지 대부분 선실로 돌아간 상태였기에 나는 곧 쉽게 선실복도를 빠져나왔다. 보니 망치로 두드린 게 분명한 부서진 자국이 옆벽에 있었다. 균열이나 패인 자국을 봐서는 엄청 세게 친 모양인데 어째서 배가 그리 부서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거지? 정말 단단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어떻게 해서 층계를 올라가 문을 여니 밖은 기민하게 뛰어다니는 선원들로 정신이 없었다. 배는 아직 기울어진 채였다. 그래도 완전히 옆으로 누웠던 아까에 비하면 많이 되돌아온 거지만. 그 때 높은 파도가 한차례 일더니 갑판 난간을 넘어 선실로 들이닥쳤다. 나는 얼른 문을 밀어 닫았지만 물은 조금의 틈으로 잘도 흘러들어왔다. 무릎까지 물을 적시면서 나는 어깨로 문을 들이밀었다. 문이 왜 이렇게 무겁냐! 당장 아래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악, 또 물이 들어온다!”
아아, 이런. 이렇게 해서 아래에 물이 들어왔던 건가. 그럼 배가 어떻게 크게 부서진 건 아니었구나. 어이구. 나는 계단에 죽을상을 쓰고 발을 디디며 문을 밀다가 나를 미는 힘이 좀 약해지자 창으로 밖을 확인했다. 물은 빠져있었다. 다시 파도가 치기 전에 얼른 열고 나갔다. 바닷물이 몇 차례 적시고 지나간 데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갑판을 걷기가 매우 위험해 보였다.
“제기, 안개가 낄 만큼 잠잠하던 바다가 갑자기 웬 지랄이야.”
나는 내 안의 떨림을 욕지거리로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평소에 게으름부릴 때 매달리던 돛대 쪽을 보았다. 세 개의 돛대 중 앞의 하나가 뿌리째 들려 기울어져 있었고 그렇게 파손된 갑판으로 파도가 칠 때마다 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선원들은 돛대 등에 긴 밧줄로 몸을 묶고 파손된 곳을 어떻게 손을 보고 있었다. 나는 또 하나의 파도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른 돛대로 달려가 촘촘하게 격자무늬처럼 밧줄이 묶여있는 곳에 매달렸다. 우와, 바다의 폭풍이란 건 정말이지 산폭풍 따위와는 비교가 안 돼! 나는 한순간이지만 순전히 바람에 날려 발이 붕 떠버리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 때 진저리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 나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좀 떨어진 저 옆의 배 갑판 위에서 몇몇의 군인들이 당황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두운데다 엄청난 바람과 파도 때문에 잘 안 보이지만 복장은 분명히 천인장이나 백인장 급들이다. 뭘 하려는 거지? 전설의 누구처럼 인신공양이라도 해서 바다를 가라앉혀 보려고? 예끼, 댁들이 효녀야? 리크넵 상인이야?
“…공님! 안 됩니…!”
에? 뭐? 나는 순간 덮쳐온 파도를 뒤집어써서 숨이 턱 막혀버렸다. 입안 가득 들어오는 이 짠 물! 얼결에 감았던 눈까지 지릿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죽을힘을 다해 밧줄에 매달려 간신히 떠내려가진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건지 눈에 들어간 바닷물을 흘리는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뜨거운 게 눈 근처를 간지럽게 해서 푹 젖은 군복 소매를 들어 대충 닦았다. 좀 뭐가 보이게 되니, 그 배 갑판에 누군가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복장은 천인장보다도 복잡해 보이는 것이, 혹시 군단장, 그러니까, 절름발이에 군단장이면, 그러니까!
‘대공님’은 그 절름거리는 발을 끌고 갑판 끝까지 가더니 새로이 덮쳐오는 거대한 물의 장벽을 향해 섰다. 젠장, 저건 내가 갑판에 올라온 이후 맞은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어 보이는데! 나는 이 굵은 밧줄로도 안심이 안 되어 주 돛대에 매달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렇게 기울어진데다 젖어서 미끄러운 갑판 위를 달려 돛대에 몸을 던질 자신이 없었다. 우선 저건 너무 굵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유서는 제대로 써 둘 걸 괜히 짜증난다고 내버려뒀더니. 대신 밧줄 사이사이로 팔다리를 얽어 감아 앙버티고 서면서 나는 대공님이 뭘 하나 쳐다보았다. 대공님은 그 배를 향해 덮쳐오는 엄청난 파도를 향해 천천히 두 팔을 내밀었다. 미쳤군! 이 원정계획을 짠 순간 이미 당신은 미쳐있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배도 때려 부수는 파도에 맨몸으로 손이나 내미는 미친 짓 따위…!
“… … …!”
뭐라고? 파도치는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저 사람이 뭐라 외친건지 모르겠다.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분명 저 집채 같은 파도는 우리를 다시 삼켜버리려고 벌린 입을 막 다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휘어지던 파도 윗부분이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공중에서 멈춰버렸다! 이, 이건 무슨 조화인가!
“물의… 장벽… 데그의 수호신이라는 수중성벽. …칼리가라… 의 흔적.”
앞쪽에서 누군가가 넋이 나간 얼굴로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이, 이게 그러니까 그 전설의 칼리가라의 흔적이라도 된단 말인가? 맙소사. 하지만 물의 장벽이라는 건 확실히 우리 눈에 보이고 있다. 물은 무슨 투명한 막 안에 갇힌 것처럼 파도의 모양을 한 채 위로 위로 용솟음치며 거꾸로 흐르는 것이다! 그렇게 위로 흐른 물은 파도가 굽이치는 정점에서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게 위로 뒤집어지며 파도가 위로 흐르며 만든 곡선을 타고 뒤로 넘어가는 듯 했다. 순식간에 휭휭 피리소리를 내는 바람소리만 날뛸 뿐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대공님은 한 팔을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이 바람을 타고, 최고속도로 전진! 이곳을 통과하면 데그 항이다!”
“우아아아앗!”
해군들이 갑자기 돛대에 물려들더니 나를 밀쳐내고 있는 대로 돛을 펼쳤다. 뭐, 뭐하는 건가? 그런데 쫙 펼쳐진 돛은 모두 뒤에서부터 가득 바람을 안은 채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바람이, 바람이 순풍이 되었어? 어떻게 된 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아무도 내 어리둥절함에 대답이 될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단호한 의지로 엄청난 순풍을 받으려 애썼다. 배는 기우뚱하더니 해군 여러분의 뜻을 알아들은 것처럼 앞으로 천천히, 곧 속도를 받아 화살같이 튕겨갔다. 내가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는 사이 배는 정면의 물의 장벽으로 미친 소처럼 달려들었다.
“충격에 대비하라!”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다시 밧줄에 엉겨 붙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내가 얼마나 숨을 참을 수 있나 생각했다. 어떻게 된다는 확신이 없어 불안을 가득 실은 배들은 겁도 없이 위로 흐르는 물의 장벽에 부딪쳤다. 나는 숨을 꼭 참았다.
아무 충격도 없이 물의 장벽은 배를 받아들였다. 잠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어쨌든 배는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물속은 어두컴컴했지만 묘하게 투명하고 질감이 있고 빛난다는 느낌이었다. 물은 끊임없이 위로 흘렀다. 갑작스레 그 사이로 뚫고 들어온 배에 부딪혀도 부드럽게 선체를 따라 위로 흘러올라갔다. 손에 얼얼하도록 밧줄을 붙잡았던 나는 물에 닿는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에 대단히 놀랐다. 가끔 볼을 때리는 바람은 물기가 있었지만 안개비가 내릴 때 길을 달려가는 정도의 느낌에 불과했다.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숨을 내쉬어보자 물거품이 올라가지는 않고 자연스레 숨이 나왔다.
근처의 선원들은 입을 꾹 다물거나 헐떡거리거나 하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아, 댁들도 놀란 걸 보니 이거 꿈은 아닌가 보군? 그러니까, 우린 지금 물속에 있되 물속에 있는 게 아닌 꼴인 거지?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러는 사이 배는 앞쪽으로 부지런히 나아갔다. 이 안에서는 바람도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가는 건가. 하지만 확실한 건 저 앞의 물의 장벽이 점점 투명하게 보이면서 장벽 저편의 세계가 흐릿하게, 점점 분명하게 보인다는 거다. 저 앞은 아직 컴컴하지만 뭔가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배는 물을 뚫고 늠름하게 뱃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물보라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뱃전을 두드린다. 자랑스럽게 치켜든 그 뱃머리는 땅위에 이상스레 솟은 가느다랗고 높은 탑 같은 것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저건…?”
현기증이 났다. 땅인가?
물의 장벽 너머에는 데그가 있다고?
갑자기 주위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처럼 환성이 터졌다.
“데그의 붉은 탑이다! 분명해! 맙소사, 우리가 그 수중성벽을 통과했어? 그런 거야, 지금?”
“제기랄, 동해의 폭풍도 견뎌냈던 우리다! 이쯤 남해바다야 물장난인거지!”
“우린 살았어!”
해군들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밧줄을 잡아당겼다. 이제 새벽하늘은 밝아오고 있었고, 지독하도록 맑은 그 시퍼런 하늘빛을 받으며 데그 항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해가 뜨려는 듯 밝아오는 동편과 그 빛으로 비스듬히 빛나는 도시를 보며 마구 떨려오는 걸 느꼈다.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 적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검을 찌를 수 있다. 우리는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원 전투태세! 무기고 개방 !수이키아 제5 백인대는 창고 앞에 집합하라!”
나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이걸 예상했던 그 똑똑한 녀석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갑판원인 루갈도 녀석은 당장 보이진 않았다. 걱정되긴 했지만 뭐 어떻게든 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오래도록 배를 탔다는 녀석인데. 나는 떨리는 함성을 지르며 병사들과 섞여 달렸다. 이긴다. 우리는 이긴다!
해일인지 뭔지 무지막지한 파도와 수중성벽인지 뭔지 괴상한 벽을 뚫고 갑자기 등장한 우리 선단에 데그의 배들은 대단히 놀란 듯 혼비백산 흩어지거나 정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을 실은 배는 가볍게 부두에 접안한 후 그간 배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던(아마도 가장 많이 받지 않았을까?) 기병대를 선두로 돌진했다.
데그의 성은 항구에서 좀 떨어진 곳의 절벽 옆에 위치했는데 과연 제국의 성답게 웅장하고 두터워보였다. 그런데 마치 물위에 솟은 성같이 육지에 닿은 면이 하나도 없었다. 다리를 내리지 않으면 땅과 단절되는 위치다. 성 위에서 굽어보며 활을 쏘아대는데 이렇게 낮은 배에서 활로 대응해봤자 어떻게 되는 건 아니고, 그래서 라이첸 해군의 공격은 좀 떨어진 데서 납작하고 이상하게 생긴 공성추(로 추정되지만 뭔지는 모르겠다)로 돌을 쏴서(절대로 날리는 게 아니다) 성벽을 조금 깨부수는 정도의 공격을 가했다. 그 사이 수이키아의 보병대는 항구를 통해 아무도 막지 않는 육로로 무작정 달려들었다.
병참 담당인 우리 제5 백인대는 배가 성에 다가가는 동안 창으로 그 광경을 보며 무기를 움켜쥐고 소리 없이 아군을 응원했다. 그러고 보니 기병이 어디로 간 거지? 그 때 언제 정신을 차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우리들을 갑판 아래로 끌고 가 줄 세우고 정돈하던 루스 백인장이 소리쳤다.
“전원, 상륙준비!”
우리는 얼른 수레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배는 순식간에 성이 바로 보이는 좀 낮은 절벽에 들이받듯이 접안했다. 우리의 정면에서 양쪽위로 사슬이 달린 육중한 문이 내려가더니 터엉 하고 땅에 박히는 소리를 내며 육지까지의 길을 만들었다. 문에는 송곳 비슷한 고정쇠가 따로 박혀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런 큰 배가 땅에 저런 철 쪼가리 두 개로만 이어져 있다면 우리는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에서 작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정말 죽어라 달릴 각오로 돌격태세를 갖췄다. 백인장은 직접 선두의 수레를 미는 조에 끼어 수레를 잡았다.
“돌격!”
우와라자자잣! 한껏 흥분한 우리는 미친 듯이 돌격하고 싶었지만 수레가 좀 무거워야지. 욕을 뱉고 악다구니를 써가며 어떻게 줄을 유지한 채 수레를 밀었다. 당장 육지에 발을 내리자 그동안 익숙해진 배의 흔들림이 없어 다리가 휘청하고 무거워졌다. 이런, 이 중요한 때에! 나는 마구 악을 써가며 수레에 매달리다시피 튀어갔다. 이 무렵 항구로 들어온 보병들이 우리가 내린 지점에 도달했다. 우리는 바닥에 모래주머니를 마구 쏟아버리고 얼른 배로 돌아갔고, 보병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달려와 그 모래주머니를 어깨에 졌다. 빈 수레를 신나게 달리며 흘끔 뒤를 보니 그들은 그대로 달려가 바다에 퐁당퐁당 던지고 뒤로 돌아 전속력후퇴하고 있었다. 아하, 저 절벽과 성 사이를 매울 샘인가. 미쳤수, 대공 나으리. 저 바다를 언제 메우겠다고? 그 때 라이첸 해군의 배 한 척이 무식하게 그 쪽으로 달려갔다. 어, 저 배 저러다 저 성과 절벽 사이에 끼겠다. 딱 그 너비인데. 직후 배 안에 뛰어든 나는 우리 조원들과 모래주머니 더미로 달려들어 주머니를 마구 주워 실었다. 서로 격려하려고 외쳐대는 욕 같은 악이 내 입에서도 흥에 겨워 쏟아졌다.
“우이쌰! 어기여차! 가자!”
“으와아앗!”
무거운 수레를 미친 듯이 밀어 다시 뭍으로 튀어 올랐다. 맙소사, 보병들이 던진 모래주머니가 그새 그렇게 쌓였었나? 아니면 저 절벽과 성 사이가 애초 좁았나? 그 미친 배는 절벽과 성 틈에 정확히 끼어있었다. 해군들은 작은 배를 내려 몸을 빼고 있었고, 보병들은 화살의 비를 피해 그 배의 갑판 위로 모래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가 얼추 쌓이자 그 높이는 절벽과 성문을 그런대로 이어주는 것이었다. 아이고.
“주머니, 다 날랐습니다!”
“좋아! 모두 승선한다!”
우리는 얼른 배에 탔다. 우리가 탄 배는 보병 몇의 도움으로 땅에 박혔던 문을 올려 닫은 후 바다에 나가있던 다른 배가 줄을 던져 끌어주고 육지에서는 장대 같은 것으로 밀어줘 바다로 떠밀렸다. 물의 장벽을 지날 때 불었던 바람이 아직 불고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그대로 우리 배는 성을 돌아 더 위쪽으로 갔다. 우리 배를 따라 다른 배가 한척 뒤를 따라 달렸다. 에고, 벌써 어깨가 무거워진다.
다시 배가 땅에 접안하고, 우리는 목재니 석재니 따위를 들어 날랐다. 기병 몇이 달려와 우리를 어느 지점으로 안내했고, 우리를 따라서 연장을 지고 내린 다른 배의 병사들은 즉시 터를 닦기 시작했다. 병참으로 전쟁을 한다지? 그러니까 우리는 성을 공략중인 녀석들보다 더 중요한 일인 진지 건설을 하는 중인거야. 아이고, 어깨야. 그런데 기병은 정찰만 했나? 아니 그보다도 왜 이렇게 없지? 7백기나 되던 그 부대가 싸그리 어디로 사라진 거야?
에라, 모르겠다! 내가 그거 안다고 뭐가 바뀌나, 일단은 진지나 세우자! 어쩐지 바보스러운 기분이 들지만 나는 남들이 성을 공략하는 동안 죽어라 진지를 건설해야 했다.
이 위치에서는 성이 잘 보였고 성이 볼 때도 이 위치는 잘 보일 듯 했다. 그렇다면 시위용이라는 것이겠지. 설마하니, 에이모르 군에 점령당하려고 진지를 세우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