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측으로 돌겨어억! 4 십인대, 대응하라! 5 십인대, 4십인대를 보조해!”
“침착해! 침착하라! 작전대로 대응하라!”
각 부대 대장들의 독려와 전투욕의 고함, 흉흉한 욕설, 외마디 비명이 두 번째의 격돌로부터 터져 나왔다. 킬리온도 저 좁은 진문으로 많은 군사가 나오다간 줄줄이 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어떻게 진 밖으로 나와 언덕을 빙 둘러서 아군을 덮친 모양이다. 혹시 아까 예메크 기병이 불 지른 곳, 그러니까 진지 뒤편의 목책을 불 끄는 김에 부숴버리고 거기로 나온 건 아닐까?
아니, 그렇더라도 진과 그 밑의 언덕을 돌아서 마치 땅에서 솟은 것처럼 두 갈래로 덮쳐오는 성난 적군이라니! 저 격한 기세만으로도 우리 고함이 주눅 들고 저 땅을 박차는 진동만으로도 우리 무릎이 떨려온다. 이것이, 이 소름 돋게 짜릿하고, 거센 산폭풍을 정면으로 맞서는 듯한 박력을 뿜어대는 이것이 바로 진짜 군대가 돌격하는 모습인 것이구나!
내가 감동에 젖을 겨를도 없이 우리 백인장씨가 내 앞을 스쳐 달려갔다.
“아군의 벽을 우회해서 우측으로 이동! 최대한 빨리 달려 놈들의 측면을.. 엉?”
백인장씨가 치지직하고 저만치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저기서 지휘관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저 자식들이 포위망을 치려 한다! 아군진지를 향해, 어린진으로 전속 돌진!”
포위망? 나는 앞사람이 뒷사람으로 바뀌어 내 등을 밀어대 우물쭈물 달리면서도 고개를 빼고 주위를 휘휘 살폈다. 지금은 아침이 다 됐겠지만 하늘을 가득 덮은 먹구름과 이른 아침 특유의 어둠으로 컴컴한데다 여긴 평지라서 이렇게 난전이 되어 버리니까 어디서 누가 누구와 붙은 건지 대체 알 수가 없다. 포위라니, 킬리온이 우릴 포위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물론 야만족을 가뒀던 양팔이 안쪽이 아니라 팔 바깥쪽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포위되려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
어라, 진짜 그런가 보다. 그 양팔이 안쪽의 야만족으로부터 등을 돌려 바깥쪽과 싸우고 있다. 그렇게 병사들이 등을 돌리는 흐름이 적군 진지 쪽에서부터 우리 백인대가 있는 몸체로 점점 올라온다. 어떻게 된 거야? 킬리온은 야만족이 우리한테 각개격파 당할 거리로 내던져진 것처럼 해 놓고 도리어 우리 발을 묶은 거였던 거야? 우리보다 월등한 병력으로 이렇게 밖에서부터 포위하려고? 그렇구나, 바둑의 환격이로군. 순서는 반대지만 말이야. 우와, 정말 멋있어! 이게 용병인 거구나!
“멍청이, 뭘 꾸물대는 거냐!”
아야! 뒷사람이 빨리 안 간다고 창대로 등을 쳤다. 이런 나쁜 자식, 어디 나중에 살아서 보기만 해 봐라. 그냥 흠씬 두들겨 패준다. 지금이야 내가 황홀한 기분이니까 용서하는 거야! 나는 한손으론 창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철모를 고정하며 숨차게 달렸다. 아까까지는 우리 백인대가 제일 후위였는데 지금은 후퇴전선의 제일 전위가 되어버렸군.
킬리온이 이렇게 나온다 치자. 아마도 우리보다 많은 병력을 앞세워 삼면에서 우리 바깥을 포위하고 야만족 기병과 자기네 진지가 있는 언덕을 안쪽의 한 면으로 해서 우릴 포위 섬멸할 속셈인가 보다. 여기에 대한 대응수가, 어디보자. 아까 어린진이랬던가? 기러기가 날아가는 그 모양으로 가고 있단 말이군.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있으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쐐기 모양으로 달려가고 있나 보다. 포위를 뚫기엔 좋은 모양새다. 아직 킬리온의 포위진은 완성되지 않은 듯, 우리의 돌진은 방해받는 일도 없었고 전투의 소음만이 다가왔다 멀어졌다, 심장 떨리게 오락가락 했다. 우리 대공님은 그 킬리온한테서 참 잽싸게도 도망쳤구만? 동맹의 군인이 아니라 성의 경비병으로서 이 사람들이 가끔 말하던 그, 여차하면 당장 튀어버릴 자세가 아주 잘 되어있어. 하하하! 달려, 달려버려! 앞을 막는 게 안 보이니까 달리는 게 막 신나잖아!
우와, 그러고 보니 난 사실 영웅의 자질이 있는 건지도 몰라. 보라고, 이 급박한 와중에도 차분하게 전황을 분석하고 있잖은가. 적어도 저번의 그 기습 때보다는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가? 씩 웃으며 무기를 쥐고 달리는 내 모습은 이야기속의 기사처럼 멋있어 보이지 않겠는가? 하하하핫!
“전원 반전! 지금 그대로 대열을 맞춰라!”
삼가 존명을 받듭죠! 우리는 힘차게 달려가다가 주르륵 멈춰선 다음 뒤로 돌아서 창을 겨눴다. 그대로 대열을 맞추란 건, 지금 뒤집은 쐐기 모양으로 적을 바라보고 있을 거란 거군. 아까의 반월진에서 완만하고 두툼한 중심부를 뾰족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겠구나. 대충 휘 둘러보니 내 위치는 열심히 도망친 우리 부대, 즉 쐐기의 뾰족한 부분에서 조금 비껴나간 위치인 듯 했다. 우리는 모두 호흡을 고르며 지평 저편, 활활 타오르는 언덕 위의 적진과 그 아래로 무시무시한 요원의 불길을 거느린 것처럼 다가오는 적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내 위치는 여전히 저 불굴의 적과는 멀었고, 그래서 나에게는 적의 돌격이 어쩐지 지평선 멀리 꼬물거리는 아지랑이의 장난처럼 보였다.
“공겨어어억!”
이건 환상도 꿈도 아니다. 현재진행형인 실화인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듯 점점 커지는 적의 사나운 모습도 번득이기 시작한 창검도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도 흩뿌려지는 피도 모두 실화다. 그런데 모든 것이 동화처럼 톡 건드리면 뿅 하고 장난스럽게 사람 놀래키기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지?
“크아아아악!”
나는 미친놈처럼 괴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이상하게 몽롱한 실화 속에서 이상하게 내 발놀림이 신명난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격 외침에 발걸음 하나 떼기가 힘겨웠던 풋내기인데 어째서 오늘 이 시간의 돌격은 짜릿하고 터질 듯이 유쾌하기만 할까.
“다 덤벼, 이 자식들아! 와 보란 말야, 새꺄!”
지금이라면 내 앞에 그 킬리온이 나타나도 멋지게 한판 맞장을 뜰 수 있을 것 같다! 와봐, 덤벼 보라고! 한껏 고취된 전투욕, 이건 정말 몸살 나게 환상적인 기분이구나! 주위의 모두가 눈이 뒤집혀 전속력으로, 적을 향해, 그 해일이 우리 배를 덮쳤던 것처럼 달려간다! 울려! 돌격 북소리를 울리라고!
하지만 이런 기분이 오래가지 않아 탐탁찮음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최전위에서는 이미 충돌을 끝낸 뒤다. 아군과 적군이 맞물려 꼼작도 않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 뒤에서 흥분한 황소처럼 달려들던 아군의 무리는 저쪽에 맞춰 갑자기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라서 앞사람에 맞춰 걸음을 늦춰야 했다. 끝내주던 기분 잡치겠네. 대신 귀가 멍멍할 정도로 뜻 모를 외침과 창검 부딪치는 소리가 온몸을 떨게 만들면서 새로운 기분으로 날 흥분시켰다. 이젠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창 다루는 게 아직 미숙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난전에서 수년간 아군을 도륙해왔던 적을 멋지게 물리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젠장, 알 바 아니다. 그냥 찌르고 때리고 그러고 보는 거야!
“우와앗! 으랏차!”
감겨들고 풀리는 병사들의 움직임. 하늘로 땅으로 난무하는 주먹과 창검.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튕겨오는 창날. 끝에는 피가 묻어 둔탁한 쇳빛을 도드라지게 한다. 적의 번들거리는 눈을 본다. 소름이 죽 돋는다. 어깨를 뒤로 당긴다. 창을 내지른다. 아깝게 빗나갔다. 적의 창이 슬쩍 찔러온다. 화들짝 놀라 손에 쥔 창을 아무렇게나 당겨 쳐버린다. 너무 힘을 줘서 상체가 비었다. 누군가가 적을 옆에서 쳤다. 누군가가 내 옆을 파고든다.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린다. 운 좋게 칼이 둥근 철모에 빗맞아 등 뒤로 미끄러진다. 창대 끝으로 그냥 찍어버린다. 재수 좋게 적의 상판에 맞아 적이 피를 흘리며 몸을 숙인다. 누군가의 칼이 놈의 목을 찍어버린다. 갑자기 누가 등을 확 밀쳐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아군이 새파래진 얼굴로 막 날 찌르려던 참이다. 아군인 걸 확인하고 한숨을 내쉰다. 누군가가 옆에서 그의 팔에 칼을 꽂아 넣는다. 그가 비명을 지른다. 욕지기가 난다. 창으로 찌르려니 놈이 슬쩍 빠지며 혼전 속으로 사라졌다. 싸우는 동안 비뚤어진 철모를 바로잡다가 창을 놓칠 뻔해 몸을 숙였다. 내 머리가 있던 자리를 뚫고 창이 박힌다. 얼른 뒤로 돌며 창대로 적의 무릎을 후려친다. 적이 신음하고 휘청거린다. 그대로 몸을 튕겨 일으키며 적의 배를 찌른다. 팔이 떨려 갑옷에 빗맞는다. 아차 할 때 놈이 내 등을 팔꿈치로 찍는다. 숨이 턱 막혀 엎어졌다. 뒷골이 선하다. 뜨거운 뭔가가 뒷목에 흩뿌려지고 등에 뭐가 엎어져 무거워진다. 시체다. 혼비백산해 바닥을 기어 시체에서 빠져나갔다. 머리를 차버린다. 뒷목에 손을 대 보니 누군가의 피가 묻어있다. 나는 겁에 질려 바닥을 기어갔다. 또 창을 잃어버렸지만 여기에는 죽은 놈이 많고, 따라서 주인 잃은 창검도 널렸다. 누군가에게 몇 번을 밟혀 다리에 멍이 든 것처럼 아프고 등이 얼얼하다. 사람이 좀 드문 것 같은 데서 일어나 검을 하나 주웠다. 낯선 게 에이모르제 같다. 갑자기 측면에서 누군가가 힘 있게 어깨를 젖힌다. 뭘로 치려고? 그냥 달려가서 머리로 상체를 들이받아 버린다. 철퇴 같은 게 궤도를 엇나가 등 뒤로 떨어져 적의 상체가 가벼워졌다. 재수 좋았다. 그냥 주먹으로 한 대 갈겨버렸지만 이것도 빗나가 놈의 투구에 맞았다. 재수 없었다. 더럽게 손이 얼얼하다. 안되겠다 싶어 얼른 도망갔다.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얼마나 허약해 보일까. 다시 달려드는 적. 몸을 숙이고,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올려친다. 적이 헉 하고 나한테 엉겨온다. 힘으로 밀치면서 창을 빼앗아버리니 지레 겁을 먹은 건지 도망간다. 그 자리를 다른 적이 씩 웃으며 채운다. 나는 검을 버리고 창을 쥐었다. 감겨들고 풀리는 병사들의 움직임. 하늘로 땅으로 난무하는 주먹과 창검.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튕겨오는 창날.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다. 이젠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모든 것은 흐릿한 환상을 보듯 몽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나쳤고 많은 창검이 번득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기계적으로 창을 장작 패듯 휘두른다.
갑자기 낯익은 복장이 나를 치고 저쪽으로 달린다.
“또 포위됐어!”
“저쪽으로! 몰린다!”
“후퇴, 후퇴한다! 대열을 유지해!”
후퇴가 뭐였더라. 대열이 뭐였더라. 아찔하기만 하다. 머리가 아프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고 달렸다. 나도 얼결에 따라 달렸다.
“침착하게 후퇴해! 침착하란 말이다!”
지휘관들이 필사적으로 외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튄다.
우리가 진 거다.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지고 팔에 감각이 사라진다. 머리가 무거워 어깨 아래로 축 늘어질 것만 같다. 피곤해 죽겠다. 여태 흥분했을 때는 몰랐던 피로가 온몸을 무겁게 한다. 젠장. 그렇게 줄창 뛰어다녔지만 얻은 건 하나도 없고 몸만 지쳐버렸던 거냐. 목말라. 입이 텁텁해.
갑자기 귓가가 선하며 새파란 바람이 스친 기분이 들었다. 힘겹게 팔을 들어 귀를 만져보니 물이 묻어있었다.
“우라질, 비까지 내리냐!”
젠장, 고맙기 짝이 없구만 뭘 그래? 어차피 승부는 났잖아. 우리가 그 킬리온한테 진 거잖아. 부탁인데 조용한 기분으로 물 좀 마시게 내버려둬 줘. 장시간동안 격하게 움직인 탓에 목이 타는 듯이 말랐기 때문에 허공에 대고 입을 뻐끔거리며 마른 목을 좀 축였다. 나만 그런 건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와 같은 행동을 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자연히 병사들의 걸음이 느려졌고, 당장 목이 자동으로 움츠러드는 호통이 터졌다.
“이 굼벵이 자식들아, 뛰란 말이다! 굴러서라도 뛰어! 두 다리가 아예 빠져버리게 뛰란 말이다!”
루스 저 놈은 입을 잘 간수해야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나처럼 빗물을 마시던 병사들은 방금 전의 패배에 실망한 기분을 빗줄기가 땅바닥에 내려 꽂히듯 더욱 무겁게 하며 다시 발을 돌려 후다닥 뛰었다.
열심히 씹어 먹을 놈이나 지금 당장은 순순히 따라야만 하는 백인장놈의 뒤를 따라 발을 질질 끌며 달리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우리 무리와 반대편, 즉 뒤쪽으로 가는 아군의 무리를 봤다. 뭘 어쩌려는 거지? 가뜩이나 적은 숫자인 주제 나머지 반이라도 살리려고 반이 저 노도 같은 적을 막겠다는 건가? 단언하건대 그건 미친 짓거리다. 그럼 이렇게 둘로 나뉜 게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우리가 가는 방향 앞에는 뭐가 있는 거야? 약간 시간이 지나 내가 초조함마저 느꼈을 무렵 갈라진 우리 편은 지평 저편으로, 갑자기 쟁쟁한 함성을 올리며 사라져버렸다.
평원을 달리는 우리들의 진군은 조용하기만 하다. 모두가 방금 전까지의 흥분을 싹 잊어버린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완전히 져버린 걸까, 혹시 이 근처에서 복병이 튀어나온다거나 해서 우리까지 칼 맞아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축축한 아침공기 사이로 슬슬 풀리는 안개와 더불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지금이 여름이었다면 각반에 닿는 풀잎이 우석거리는 소리에도 움찔하며 달려야 했겠지. 하지만 아직은 초봄이고, 기껏 봄이 빠른 곳도 손톱만한 움이 올랐을 정도겠지. 축복받은 절기라면 초록으로 가득 찼을 이 드넓은 땅은 지금 그 가능성을 막 뿜으려는 황야가 되어있을 것이다. 우리가 헉헉거리며 달리면서 내는 무구의 절그렁거리는 쇳소리만이 신경을 마구 헤집으며 너른 평원 끝까지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여기에 내가 품은 자식들의 적이 있다고 땅이 외치고 바람이 외치는, 꼭 그런 기분이다.
그나저나. 한참 달리는 중에는 몰랐는데 단단하던 땅이 점점 말캉해진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삼각주라면 참 기름진 곳인데 왜 경작하는 흔적이 없지? 켐빌은 에이모르 최대의 밀농사 지역이라면서? 아, 물론 나는 밀이라는 식물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똑같이 낱알 달리는 벼하고 다를 바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논에 댈만한 물은 없어 벼를 밭에 심지만 저 남부에서는 무논에다 심는다던데. 그럼 이곳에서도 밀을 논에다 심을까? 헤헤헤.
썅, 이 상황에서 무슨 헛소리야. 난, 패했다지만 병사고, 농부가 아니란 말이야.
어, 이 소리는? 윽, 뭐야? 갑자기 키 큰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 시야를 어지럽혔다. 적인 줄 알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멍하니 쳐다보니 마른 갈대다. 창을 쥔 손에서 힘을 푸니 곧이어 어디서 수풀을 헤집는 소리가 나고 멀리선 첨벙첨벙 하고 물 튀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어라? 이런, 삼각주면 당연히 큰 강을 여럿 끼고 있겠지. 지금 강을 하나 건너는 건가? 아이고, 이 계절에 그러면 얼어 죽겠어! 게다가 지금 비까지 내리고 있잖은가. 무슨 생각이야, 절름발이 대공놈은!
“젠장! 우라질 놈의 자식!”
한 마디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속이 울렁거리며 아무한테나 달려들어 두들겨 패버리고 싶다. 마구 폭력을 휘두른답시고 온몸에 부딪히는 젖은 갈대들을 팔다리를 휘둘러 쳐댔지만 도리어 나한테 찰싹 감겨버린다. 짜증나 죽겠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젠장할.”
“빌어먹을, 좀 쉽시다. 에휴.”
“주둥이들 닥쳐! 이제부터 입 열면 내가 죽여 버린다.”
루스 놈의 목소리다. 이 자식은 잘도 살아있군. 왜 안 뒈지고 살아있는 거냐? 왜 우린 이 험한 꼴로 이렇게 버둥거리는데 네놈은 쌩쌩한 거냐? 심히 불공평해. 죽어, 이 자식아!
씩씩거리며 갈대숲을 해쳐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무겁다. 우석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마구 때린다. 정신이 없다. 비에 젖은 채 얼음장 같을 강을 건널 걸 생각하니 벌써 턱이 달달 떨린다.
갑자기 앞이 훤히 트였다. 희멀건 안개다. 어쩌다 바람이 불어 안개가 헤쳐질 때 언뜻 보이는 새카만 지평은 땅이다. 실낱같이 이어지는 검은 선 아래부터 여기처럼 누런 갈대들이 빽빽이 들어차 하늘거린다. 그편 갈대밭과 이편 갈대밭 사이로 잘 탄 잿빛으로 길고 구부정한 길 같은 게 가로지르고 있다. 그걸 다시 가로질러가는 검은 무리는 우리 편이다. 사람들이 허리께 아래는 그 잿빛 길에 뚝 잘려 안 보인다. 자세히 보니 강이다.
나는 죽자는 심정으로 앞사람 키가 불쑥 낮아져버린 그 곳에 발을 들이댔다. 첨벙첨벙. 으음, 이래서 기름을 바르라 한 걸까? 당장은 물에 젖지도 않고 춥게 느껴지지도 않는걸. 다들 금속인 창을 머리 위에 지고 깊은 곳은 가슴까지 차는 강을 설렁설렁 건넜다. 물에 들어가고 나갈 때만 첨벙거리는 소리가 유난할 뿐 물 가운데서는 물이 흘러가면서 우리를 슬쩍 떠미는 느낌 외에는 뭐 유별난 것도 없이 조용했다. 하지만 정말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이 첨벙거리는 소리! 좀 조용히 건널 수 없나?
강을 다 건넌 후 우리는 강 이쪽의 갈대숲 속에서 잠시 쉬며 몸을 말렸다. 지금 비가 오고 있는데 말려봤자 얼마나 소용이 있겠냐마는. 아무튼 좀 쉰 후 우리는 백인장들의 낮고 날카로운 지령을 따라 여기저기 움직이며 줄을 섰다. 저승사자가 오밤중에 바람을 타고 휙휙 나는 움직임으로 모두들 민첩하고 조용히 움직였다. 갈대숲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보니 이편은 우리가 건너온 저편보다 갈대가 더 많은 듯했다. 그 대열대로 잠시 휴식.
긴장되고 초조하고 살 떨리는 시간이 내 명을 야금야금 깎아먹듯이 심장 박동에 맞춰 흘러간다. 젠장,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침 한번 삼키자고. 나는 물에 엇섞인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소매로 이마의 물기(반은 땀일 것이다)를 훔친 후 우리가 방금 건너온 강 건너를 노려보았다. 아, 볼 수가 없다. 안개가 낮고 짙게 깔리고 있었다.
지휘부가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판을 놓을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갈대숲 속에 틀어박혀서 내 주위의 키 크고 여윈 갈대들에 받쳐진 것처럼 좁은 하늘만 쳐다보니 기분 안 좋다. 무슨 하늘을 향해 열린 통발 속에 들어앉은 기분이다. 그 하늘이란 것도 연회색 구름만 가득하고-어쩌면 안개일지도 모르겠다- 빗방울까지 흘려 눈이 따끔하다. 그나마도 갈대밭이 썩은 갈대 같은 게 내뿜는 열을 품고 있어 이 빗속에도 춥진 않아 다행이다.
짙어가는 안개 속에서 세상이 점점 형체를 잃어간다고 생각될 무렵.
갑자기 저편에서 무시무시한 함성이 일어났다. 우리는 움찔하며 창을 움켜쥐었다. 시작인가? 제길, 어디야? 강 저편인데다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조용히!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그대로 엎드려있어.”
이편 지휘관들이 낮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아니 이봐, 강 저편에선 우리 편이 흠씬 두들겨 맞고 있을 거란 말이야! 아니, 이미 다 죽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 댁들, 우리가 일개 병사라고 그딴 식으로 소모품 취급할 거야? 지금 여기 있는 건 반만 살아서 도망치려는 얄팍한 술수잖아. 저편의 아군이 적들의 주의를 아군 진지 같은 데에 돌리는 동안 우리는 여기 숨어서 적이 다 지나가도록 기다리려고? 어차피 비까지 내리는데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피곤할 게 뻔한 적이 강을 건너올 리는 없잖아. 더러워!
갑자기 갈대가 삭삭 움직이더니 누군가가 포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루스였다.
“그 자세로 듣는다. 스렌돌프 십인병.”
“네에, 네에.”
쫘악! 반발심에 건성으로 대답했더니 당장 따귀가 날아간다. 이 젠장맞을 놈을 그냥!
“무슨 태도냐. 우린 아직 지지 않았다. 네놈이 규율도 명예도 없는 잡병이냐?”
“시정하겠습니다.”
내 입은 왜 항상 내 뜻과 반대로 나불거릴까. 그래, 어디 한번 지껄여 봐라, 이 나쁜 놈아.
루스는 한 팔로 상체를 받치고 강 저편을(정확히는 안개를) 노려보며 다른 손으로 턱을 긁었다. 면도를 못 해 수염이 뻣뻣한데 내 턱도 지금 그 모양일거다.
“우리 백인대는 지금 중요한 작전을 수행중이다. 잘 들어. 우린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최소한 비와 허기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지. 하지만 적은 자다가 얼결에 붙들려나왔고, 따라서 비에 대한 방비는커녕 아침도 못 먹어 지친 상태일 거다. 하지만 이겼다는 흥분 때문에 그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마냥 우리 편을 추격해 올 거다. 강을 건너면 무장이 푹 젖기 때문에 몸도 굉장히 둔해질 거야. 저편의 아군이 그렇게 적을 여기로 유인하면 강을 막 건너온 적을 우리가 포위해 섬멸한다. 우리가 적에게 두 번 포위당한 건 여기까지 놈들을 끌어오려는 술책이다.”
거 좋네. 아무튼 대공씨가 아직 포기할 생각은 아니라니까. 하지만 난 졸려 죽겠어. 여긴 따뜻하고 포근한걸. 저 너머는 전장이지만 내 보기에는 우리 처지가 강 건너 불구경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왜 그걸 일개 졸병인 나한테 줄줄이 설명하냐?
“그래서 말인데 스렌돌프 십인병, 우리는 적이 언제 여기로 들이닥칠지 알아볼 병사가 필요하다. 자네가 가라.”
그래, 간다. 척후쯤이야, 뭐?
“척후입니까?”
“그렇지. 잠시 후 우리는 여길 벗어난다. 자네는 여기 남았다가 적이 반쯤 강을 건너오면, 즉 전위가 갈대밭을 막 벗어나면 신호한다. 자네는 이 전투의 열쇠를 쥔 거지. 막중한 임무이니 넋 놓고 있지 마.”
“하, 하지만 백인장님, 저 혼자 여기 남으란 말씀입니까? 만약 발각되면 저도 죽지만 이 작전은‥.”
“잔말 말고 명령대로 해. 내 알 바 아니야.”
이, 이 자식이 지금 날 죽이려고? 너,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러는 거냐! 놈은 나한테 신호탄을 던져줬다. 나는 몸을 돌려 저쪽으로 기어가던 놈을 부들거리는 손으로 붙잡았다.
“말해 주십쇼. 왜 나만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겁니까. 왜 내가 욕설부대에 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척후까지 맡게 된 겁니까? 백인장님!”
놈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야비한 웃음이 눈가에 떠 있었다.
“데그 포위전 때를 기억하나.”
“예?”
“그 때 너희 무지렁이들은 기껏 해일 때문에 난동을 부렸었지. 네놈들을 진정시키려던 나는 일개 사병한테 맞기까지 했단 말씀이야.”
무, 무슨? 잠깐, 그 때 일을 말하는 건가? 그, 수중성벽인가 뭔가 때문에 우리가 난리 났을 때? 나, 난 아니야! 그 때 네놈을 친 건 내가 아니란 말이야! 오해야!
“저는 배, 백인장님을 감히 구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놈의 소행입니다.”
목소리까지 떨린다. 겨우 그런 오해 때문에?! 이, 이 자식이 대단히 치졸하고 더러운 성격인 건 알지만 어떻게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을! 루스는 내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너무 즐겁다는 듯이 구경하며 단호히 내뱉었다.
“남아라.”
“백인장님! 잠시만, 백인장님!”
놈은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 나는 머리가 싹 비어버리는 기분이 되었다.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다. 이 강 건너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는 내 알 바 아니다만 놈이 날 없애려고 작정한 것만은 확실하다. 멍하니 놈이 사라진 쪽을 쳐다보는 사이 주위가 갑자기 서걱거리더니 숨어있던 병사들이 슬금슬금 나와 강 반대쪽으로 기어갔다. 귀를 막막하게 하는 전투의 소음은 안개 때문에 더욱 크게 들린다. 무섭다. 날 두고 가지 마!
비명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제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내 것이 아닌 창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까 하늘을 보면서 통발 같다고 했던가? 정말이다. 내가 지금 통발 안 물고기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