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장교가 있었다. 철저한 계급사회인 이스갈에서 자신의 운과 능력으로 제법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그는 가난해도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몸담은 사회는 능력은 없어도 타고난 신분의 덕으로 위에 앉은 자들에게 그가 머리를 숙이도록 강요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장교는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출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숙이기 시작한 머리는 점점 혀가 달콤한 말을 하는데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런 건, 자신감 넘치던 젊은 장교가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분했다.
그런 절망감에 빠진 장교의 앞에 귀족 가의 미망인이 나타났다. 역시 평민 출신이던 그녀는 다 쓰러져가는 가문이나마 귀족 출신인 전 남편 덕에 여유롭게 살 정도의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장교는 그녀와 그녀의 어린 딸에게 관심을 보이며 점차 사이를 좁혀나갔다. 귀족인 상관들에게 여러 가지로 손을 쓴 끝에 그는 형식적인 신분 차이를 넘어 여인과 결혼하는 데 성공하고 여인이 상속받은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제법 부유함까지 얻은 그에게 이제는 평민 출신의 가난하고 젊은 장교들이 고개를 숙여왔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의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자신은 귀족이라는 신분만은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친부가 귀족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귀족과의 연이 이어진 의붓딸이 그는 못내 증오스러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겨우 열 살이던 의붓딸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
“그 자는 자기 딸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겁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지만 명색이 딸인,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아이에게 말이에요! 마나님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 자가 이미 재산을 다 가로채버린 뒤인 데다 마나님마저 해칠까봐 두려워 눈물을 삼키며 지내셨을걸요. 그런 더러운 상태가‥ 아가씨가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가드너는 치를 떨며 말했다. 보안관이 즉시 끼어들었다.
“황당한 소리는 집어치워라. 고용해준 어른을 죽여 놓고는 그걸 정당화하려고 말을 꾸며내는 거지? 레페리 씨, 상식적으로 저게 말이 됩니까? 허슬 소령은 마을에서 명망 있는 분이고, 누구나 존경합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따님한테 어찌나 살갑게 대하는지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죠.”
“그 명망이란 게 개소리잖아요! 살갑다고요? 나리! 선생님! 그 자식이 딸을 건드린다는 건 마을 사람들도 다 알면서 쉬쉬하던 겁니다! 여기서 일한지 2년밖에 안 된 저도 금방 알아버린 이야기라고요. 휴가 때에만 이 별장에 내려온다지만,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어요! 10년이나 된 이야기니까요!”
“이 새끼가 그래도!”
보안관은 벌떡 일어나 따귀를 갈기려 했다. 레페리가 권위적인 어투로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보안관! 자리에 앉으시오. 가드너 씨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심문을 모두 마친 후에 내려도 늦지 않소.”
보안관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브네로는 소령이 아내보다 딸에게 먼저 음식을 나눠주던 걸 떠올렸다. 신사인 척 미소 짓던 얼굴이 뒤로는 가족들을 오랫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통에 몰아넣은 자의 가면이란 것이 그는 혐오스러웠다.
레페리는 계속 하란 뜻으로 가드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드너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근래에 허슬은 아가씨에게 손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스갈레아에서 귀한 손님이 온 만큼 그 자신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습니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술을 마셔버렸지요. 선생님의 그 칼 때문이었겠죠.”
철저하게 구경꾼의 위치에서 심문에 참석했던 브네로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예? 제 에페이도 말입니까?”
“그날 낮에 허슬이 시킨 일이 있어서 저는 결과를 보고하려고 그 집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정원에서 노예 한 명을 붙잡고 이런 지시를 하더군요. 응접실에 걸린 부에노소 숏소드 한 자루를 가져와라, 식사 중에 부르면 칼을 바꿔쳐라. 단 칼집은 손대면 안 된다. 바꿔친 칼은 내 서재 책상위의 나무 상자에 넣어둬라. 그 말을 들은 저는 그 수집광이 또 누군가로부터 뭘 뺏는구나 싶어 좀 있다가 보고하려고 마을에 돌아갔습니다."
브네로는 소령의 속셈을 대충 알아차렸다. 검을 바꿔치기한 것은 금방 들통 난다. 그것을 따지기에는 밤이 늦어버릴 테니, 좀 맹해 보이는 부에노소 인 손님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따지러 올 것이다. 그 전에 소령은 마을 주민들이 이방인을 묵게 하는 걸 반기지 않는다며 미안하지만 나가달라고 정중히 사과해서 쫓아낸다. 혹시라도 일찍 알아채서 당일 밤에 찾아올 것을 대비해, 검을 받아간 노예가 훔친 것으로 해 두려고 노예를 미리 도망 보낼 준비를 했을 수도 있다. 소령은 이런 얄팍한 속셈으로 이민족인 브네로가 자신의 집에 묵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라고요?”
“그 작자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아들이는 더러운 놈이에요. 응접실에 있는 수집품들 중 절반이 갖은 속임수로 훔친 것들일걸요. 어쨌든 전 나중에 다시 허슬에게 갔습니다. 괜히 그 때 나섰다가 뭘 엿들은 건 아니냐며 쫓겨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식사가 끝났을 무렵 찾아가보니 마침 그 작자가 술병을 든 채 아가씨의 방으로 가고 있더군요. 불길했어요. 설마 저 자식이 손님들까지 온 상태에서 그 더러운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요. 저는 아가씨의 방문에 귀를 바짝 대고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엿들었죠. 더러운 새끼‥. 그 자식은 또 아가씨에게 요구하고 있더군요. 순간 정말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들어가 버렸죠. 그 자식이 당황하는 꼴이란. 저는 더 이상 아가씨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결혼까지 할 나이에요. 그런 딸을 그렇게 창녀마냥 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안 그래요? 그랬더니 그 자식이 무슨 참견이냐며 힘으로 제 목을 조르려 들었어요. 그 자식은 군인입니다. 살인기술을 허가받고 당당히 익힌 놈이죠. 그런 놈을 제가 이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살려고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그 꼴이 웃겼는지 그 자식은 웃기만 하고 쫓아오진 않았죠. 도망치던 중, 갑자기 그 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손님한테서 뺏은 칼을 서재 책상 위 나무상자에 넣어두라고‥. 저는 서재에 들어가 그 칼을 꺼내들었죠. 그냥 칼을 들고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협박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보니 그놈은 침대에 누워 강제로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더군요. 더 이상 생각 같은 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안관 사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시계추가 흔들거리며 똑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보안관은 사사건건 자신에게 간섭하려드는 레페리를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좋아.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 네놈이 하는 말은 다 여기 적히고 있어. 이제 다른 걸 묻지. 네놈 말대로 허슬 소령이 인륜을 짓밟았다면 왜 신고하지 않은 거지? 신고해서 그게 사실이었다면 법이 처벌해줬을 거다. 그런데도 신고하지 않고 네 손으로 찌른 건 그저 네가 죽이고 싶으니까 죽인 것을 둘러대는 거짓말에 불과해. 네놈 말대로라면 피해자인 제인 허슬도, 허슬 부인도 그런 일이 있다고 신고 같은 걸 한 적이 없단 말이다.”
가드너는 역겹다는 표정으로 보안관을 노려보았다. 보안관이 눈을 부라리며 손을 움찔거리자 레페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건 나도 의문이오. 가드너 씨, 왜 허슬 가 사람들은 소령에 관해 아무 호소도 안 한 겁니까?”
“당연한 걸 물으세요? 허슬은 뒤에 군대가 있단 말이에요. 그 자가 평소 잘 보이고 뇌물 먹여대던 작자들이 허슬의 명예를 해칠 것 같은 신고가 받아들여지게 냅두리라 생각해요? 마을 사람들은 10년간 모른 척한 일을 10년 후에라도 아는 척해줄 리가 없고요. 여기 계신 이 훌륭하고 공정한 보안관께 신고하는 건 더더욱 웃기지도 않는 일이죠.”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보안관!”
레페리가 역정을 내자 보안관은 그제서야 그의 안색을 살피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그는 표독스런 눈으로 다른 질문을 진행했다.
“제인 허슬은 네놈과 공모하고 일부러 소령을 방심시켰지? 일부러 여기 계신 법무부 재판관께 거짓말을 했지?”
브네로와 레페리는 고개를 휙 돌렸다. 보안관은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튕겨내겠다는 뜻으로 팔짱을 단단히 끼고 콧김을 푸르렁거렸다. 가드너는 바쁘게 눈을 굴리며 그들의 안색을 살피다가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믿어주세요. 리처드 허슬을 죽인 건 접니다. 아가씨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미리 내통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자리에 계셨을 뿐이죠. 그 후에 아가씨가 나리께 거짓말을 한 건 제가 부탁해서입니다. 그것도 절대로 아가씨의 뜻이 아니에요.”
제인의 거짓말이 그녀의 뜻이 아니란 데에선 브네로와 레페리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드너와 사전에 공동으로 일을 꾸민 것은 아닐 테지만, 제인은 가드너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스스로의 뜻으로 그를 감쌌을 것이란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허슬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날 보인 눈물은 오히려 그녀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가드너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었을까.
브네로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말을 들어보니 당신 자신은 허슬 씨에 대해 별다른 개인적인 원한이 없군요.”
“그다지‥.”
“하지만 허슬 양에 대해서는 모든 일을 당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변호하시는군요.”
가드너는 낯을 붉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요?”
브네로는 손에 쥐고 있던 걸 주머니에 넣은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곤한 낯으로 방에 들어온 레페리는 브네로의 옆에 모자를 던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적으로 피곤해 죽겠군. 자네, 아주 영리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제인 양을 심문하는 자리에는 가지 말걸 그랬어.”
“엉망이었어요?”
“가드너 씨보다 더하군. 마을 주민들이 살기등등하게 몰려와서는 보안관 사무실 밖에서 죽여라, 죽여라를 외쳐대는 그 꼴을 봤어야 했어. 아비를 죽인 자식으로 벌써 소문난 모양이야. 제인 양은 보안관이 아픈 데만 찔러가며 집요하게 추궁해대니까 제대로 자기변호도 못하고 끌려 다녔지. 결국에는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울어버렸는데, 보안관 놈은 그걸 질문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이더군.”
“긍정이요? 무슨 질문이었는데요?”
“허슬 소령을 살해하자고 가드너와 공모한 적이 있느냔 거지. 보안관 놈은 아주 솜씨 좋게 돌려서 말하더군. 죽이고 싶다는 기분이 든 적은 없느냐, 그걸 가드너랑 이야기했더니 동감해주더냐라는 식으로 말이야.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제인 양이 살인행위 자체에서는 아무 분담도 없었지만 ‘공모’를 했다는 사실, 현장에서 공범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들어 공모공동정범으로 단정 지어 버렸어. 더군다나 법률상 자식이니까 그냥 살인죄도 아니고 존속살인죄라고. 엥이!”
“공모공, 뭐요?”
“그런 건 몰라도 돼! 빌어먹을, 강간당한 여자들이 왜 잘 신고하지도 않는지 아나? 그런 기억은 강도를 당했거나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고통이야. 인생에서 그 사건만 뚝 잘라다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다고. 게다가 여자가 피해자인데도 구경꾼들, 심지어 수사관마저도 가해자보다 더 못난 인간 취급한다고. 그런 것만 골라다 건드리는 질문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여자가 제대로 대답해? 보안관 놈은 처음부터 그녀까지 엄하게 처벌할 작정으로 싫은 기억을 들춰대다 그딴 답을 이끌어낸 게 분명해.”
엄한 처벌? 브네로는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가드너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로 생각할 때 제인은 살인 자체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공무원인 레페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죄가 된다. 브네로가 보기에 제인이 지은 죄는 그뿐이었다. 그런데 레페리의 말을 가만 들어보자니 보안관은 뭔가 더 무서운 죄목을 짚어낸 모양이었다.
“이스갈의 임금께서 전권을 위임해 내려 보내신 명망 깊은 재판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요. 이런 경우 두 사람은 어떻게 판결 받죠?”
“글쎄. 내가 담당한 사건이라면 작량감경이라도 하려고 몸부림쳤겠어. 하지만 보안관 놈은 절대로 안 그럴걸. 마을 사람들의 눈치도 있으니까 말이지. 나라면 살인정범인 가드너에게는 징역 5년, 과잉방위는 인정하기 어려우니 여기서 더 감경하기는 어렵겠군. 제인 양에게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300펜실 쯤의 벌금을 선고하겠어. 하지만 보안관 놈은 가드너는 살인죄의 공동정범, 제인 양은 존속살인죄의 공동정범으로 싸그리 사형을 선고하려고 작정한 것 같아.”
브네로는 레페리가 주워섬긴 법률용어에 관해서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보안관이 결심한 판결은 레페리가 생각한 것과 비교할 때 가혹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피식 웃었다.
“사형이라고요? 와, 빡센 농담인데요.”
“그걸 뒤집는 건 마을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반대표를 던지는 것뿐인데 지금 분위기로 봐서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군. 변호사도 없고 말이지. 자세한 건 모레 재판이 열리니까 그 때 들을 수 있을 걸세. 잠깐, 내가 변호하면 될 거 아니냔 말은 접어둬. 나는 명색이 재판관이라 변호사 일은 못 하도록 되어있어. 자네 역시 이스갈 인이 아니니 안 돼.”
브네로는 잇소리를 내며 말을 삼켰다. 레페리는 찡그린 낯으로 이마를 쓸었다.
“운이 나빴어. 이쪽도 법무부에다 탄원했으면 어지간히 간사한 놈이 내려오지 않는 한 저보다는 경한 형을 선고하리라 생각하네. 하지만 이런 벽촌에서는 보안관이 재판관이야. 제길, 어떻게 그게 공모라는 거야? 누구나 싫은 놈에 대해 친한 사람과 뒷담 정도는 깔 수도 있는 거잖아. 그게 살인 공모가 되냐?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방조범도 아니고 정범이 돼? 갖다 붙여도 저딴 식이라니!”
레페리는 의자 위에 힘없이 늘어졌다. 브네로는 찡그린 낯으로 웃으며 바닥 여기저기를 쳐다보다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이라도 이스갈레아에 탄원하러 갈 수 있어요?”
“늦었어. 내가 이스갈의 재판 시스템을 설명할 때 뭘 들었나. 법무부 탄원은 보안관 레벨에서 해결 못 하는 일을 처리해달라고 하는 거야. 보안관의 재판에서 해결을 못 보면 비로소 가는 거지. 게다가 이미 보안관 놈의 관할이 되어버린 일이고, 지금이라도 이스갈레아에 간다 해봤자 재판이 모레이니 탄원에, 접수에, 재판관 선임에, 다시 윌더빌에 내려오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이미 죽은 시체를 상대로 재판해달라는 꼴이 될 거야.”
“그 재판관이 당신이잖아요.”
“내가 접수받은 건 레카 인 살인사건이지 허슬 소령 살인사건이 아니야. 관할이 다르다고. 나는 사실 보안관의 일에 간섭해서도 안 돼. 법으로 정해진 일이야. 최대한 설득은 해보겠지만 그게 내 한계다.”
브네로는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료제라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이토록 경직되어 있다니, 레페리가 나선다면 살릴 수도 있는 사람들을 두 눈 뜨고 죽여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브네로는 계속 말을 걸었다.
“저기요. 보안관이 판결 내려버리면, 정말 그걸로 끝이에요?”
“그래.”
“더는 다시 재판을 받는다거나 할 수 없어요? 인간이 하는 거니까 오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어딨어. 폐하의 특명이라도 없으면 재판은 한 번이야. 그건 나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체제지만.”
브네로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레페리는 그가 이제 체념하고 진정된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뜬 브네로는 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아니에요. 뭔가 잘못 되었어요.”
레페리는 쓰게 웃었다. 입 밖에 내고 있지 않을 뿐이지,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스갈의 재판관으로서 결론을 이해해야 했다.
“어쩔 수 없잖아. 법이 그런걸.”
“법은 소령의 죄를 적발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 동네의 관습이란 건 외려 숨겨주기 바빴고요. 왜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겁니까?”
“그렇더라도, 나는 가드너가 허슬 소령을 살해한 걸 정의라고 말할 수 없어. 그건 심판도 뭣도 아닌 살인일 뿐이야.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야. 왜 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모두가 자기 주관대로 누군가의 행동을 불의라 단정 짓고 처단하면, 세상이 어떤 꼴이 되겠어?”
“가드너 씨가 살인을 저지른 거 가지고 처벌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법이 구비되어있다 해서 정의가 구현되는 건 아니란 겁니다. 법은 만능이 아닙니다. 저는 법을 부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법망의 구멍을 빠져나간 것들, 조리(條理)로 볼 때엔 불의한 법의 산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늘이 보시기에 아름다울지 모르겠군요.”
“자네가 그들을 동정하는 만큼 나도 그들을 동정해. 하지만 법은 법이야. 마음에 안 들어도 지켜야만 비로소 법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거야. 제인 양의 경우는 정말 안타깝지만 재판관이 그렇다면 더는 어쩔 수 없네. 보안관 자식이 왈왈 짖는 소리를 판결문에 써놔도 그게 적법절차 거쳐 나온 거면 그대로 되어야 해!”
“뭘 위한 법인데요! 젠장할!”
브네로는 버럭 고함치며 침대 모서리를 내려쳤다. 두터운 나무장식이 와지끈 깨져나갔다. 그 소리에 놀란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떨어져나간 나무장식을 쳐다보았다.
열린 덧창 너머로 참새 몇 마리가 짹짹거리며 날아다녔다. 밖에 누군가가 있어 소란을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지만, 집안사람들이 알기 전에 원상복구 시켜놓을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브네로는 찢어져 피가 나는 주먹을 살살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손괴죄인가요?”
“무죄다. 과실손괴죄란 건 없어.”
레페리는 사실이야 어쨌든 브네로의 행위를 과실로 치부해버린 후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민사상 불법행위에는 속하니까 변상은 하는 게 좋겠지. 허슬 부인께 잘 말해 보라고.”
“꺼으으흑.”
“나는 내 담당 사건이나 처리하러 가겠어. 자네가 급히 불러내는 통에 주민들의 물건 조사를 미뤄버렸네. 이 자들이 기세등등할 때 기습해야겠어. 그럼.”
레페리는 모자를 집어든 후 서둘러 방을 나갔다. 브네로는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두 사람과 안면이 깊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어떻게 되더라도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가드너가 살인자로서 처벌받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이유야 어쨌든 그건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정을 참작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의 죄질이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 악독한 것일까? 제인이 살인자나 마찬가지인 패륜아로서 처벌받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몰아가는 마을의 분위기에 편승해 되지도 않는 죄목을 만들어낸 보안관이 그는 괘씸하게 여겨졌다. 어찌 보면 피해자인 사람들을, 법의 이름을 빌어 보안관이 자기 마음대로 엄한 형벌로써 단죄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법정형이 선택적일 때, 가령 사형과 무기징역과 징역 중 선택하게 되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랄지, 작량감경이니 사정 참작이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재판관이 마음대로 사건의 질에 대해 판단해버리는 것이긴 하다. 법관에게 그런 선택의 폭을 주는 건 개별 사안에 따라 구체적인 사정을 보아가며 참작할 것은 참작하고, 혼을 내야 할 것은 혼을 내도록 죄질에 맞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이건 완전 횡포야.’
보안관이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허슬 소령의 죄는 그가 살아있는 한 법으로는 처단할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한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제인과 가드너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가에 대해 그는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그것을 감안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보다 중한 죄로 몰아가며 최고형을 선언하고자 하는 건 무슨 의도인가.
분명, 보안관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대로 판결을 내린다 해도 그것은 적법절차를 거쳐 나오는 한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법의 형식을 뒤집어쓴 불의이다. 그런 것이 거죽의 형식 때문에 정의의 실행인 마냥 당당히 이루어지는 꼴 같은 건, 적어도 부에노소 인들은 용납할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참견 잘하는 부에노소 인답다며, 브네로는 쓰게 웃었다. 그는 물병을 가져다가 찢어진 상처를 씻은 후 가방에서 붕대를 찾아내 대충 처매었다. 붕대를 끊은 후 그는 덧창 너머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레르다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사연이 있던지간에 그 끝이 살인으로 귀착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 그 말대로군.”
레페리는 강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사람의 얼굴을 보기 싫었고, 사람의 말소리를 듣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빈 들을 그저 걷고 있었다.
레카 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을 둘러본 후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그는 문득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어린애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좀 멀리 돌아서 갈까 하던 그는 아무 표지도 없는 황야에서 마을까지의 길을 찾아낼 자신은 없어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아이들은 높직한 둔덕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렇게 떠들어대서야 고기가 놀라 도망갈 테지만 아이들한테 그런 걸 일일이 말해줄 생각은 없던 레페리는 그냥 입을 다물고 지나치려 했다. 그 때 아이들이 그를 발견하고 일제히 외쳤다.
“나리, 안녕하세요!”
어른들이 그를 나리라고 부르니까 아이들도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만한 나이의 아이들한테는 그냥 아저씨라고 불리는 게 편한 레페리는 어색한 기분에 우물쭈물하다 한손을 흔들어줬다. 그 때 레페리는 아이들이 한 아이를 중심으로 몰려서있는 것을 보았다. 가운데에 서있는 아이는 월척이라도 건진 모양이었다. 이런 얕은 강에서 월척이라 해봤자 팔뚝만한 물고기 정도일 테지만 말이다. 지나쳐 가던 그를 아이들이 얼른 소리 질러 불러 세웠다.
“나리, 이것 좀 와서 보세요! 나리!”
“이것 봐요! 고기가 말을 해요!”
물고기가 말을 하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뭍에 끌려나온 물고기가 숨을 쉬지 못해 입을 뻐끔거리는 걸 보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야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레페리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농을 거는 줄 알고 농담으로 대꾸했다.
“너희들같이 쬐그만 꼬맹이들한테 잡혀서 억울하다든? 물고기들이 원수를 갚으러 윌더빌을 습격하기 전에 나는 얼른 도망가야겠구나.”
“그런 거 아니고요! 나리, 얼른 와보세요. 이 물고기 이상해요!”
이가 상해 뭉텅 빠져버린 물고기냐고 혼자 빈정거린 후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과연 팔뚝만한 월척을 낚아들고 있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려 아이들을 쳐다보며 입으로 붉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레페리는 어째선지 기분이 나빴지만 아이들이 내미니까 물고기를 받아들었다. 물고기가 토하는 붉은 피가 그의 손을 물들였다. 그는 개천에서 나는 생선에 피비린내가 욱할 정도로 많은 피가 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 그것은 레페리에게 시선을 맞추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억 · 울 · 하 · 오 · 억 · 울 · 하 · 오>>
“‥지금 이놈이 나한테 말을 한 거냐?”
아이들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페리는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전율이 흘러 물고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물고기에게는 성대가 없다. 말소리를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레페리는 짐짓 아이들을 무섭게 둘러보았다.
“네놈들이 어른을 놀리려고 장난을 치는 것이렷다. 이놈들, 재판관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또 장난치면 혼쭐을 내준다.”
“아, 아니에요! 나리, 우린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정말이에요! 이놈은 낚였을 때부터 이랬다고요!”
갑자기 물고기가 왈칵 피를 토해냈다. 폐병을 앓는 사람이 쏟아낸 선혈과도 같이 그것은 선명한 핏빛이었다. 물고기는 죽어가는 자가 마지막 힘을 다해 꿈틀거리는 것처럼 버둥거리며 외쳤다.
<<흙 · 내 · 가 · 난 · 다 · 네 · 놈 · 이 · 냐>>
물고기는 크게 몸을 꺾으며 들썩이더니 갑자기 굳어버렸다. 아이들은 겁을 먹고 레페리로부터 떨어졌다. 레페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이 담긴 빈 통에 물고기를 던졌다. 물고기는 물을 피로 흐리며 둥실 떠올랐다.
레페리는 얼른 강으로 내려가 손을 씻었다. 하지만 진득한 비린내가 배인 피는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손을 문질러도 피가 씻겨나가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지자 레페리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문득 그는 데오로 베이네딘이 마도사라는 것이 떠올랐다. 마도에 관해서는 쥐뿔만큼도 모르지만 그가 아는 개념 중에서는 그것밖에 이 물고기를 만족스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고기가 지껄인 말을 떠올렸다.
“흙내라고?”
그는 흙을 묻히며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에게 흙내가 배일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흙을 묻히고 일하는 어떤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이므로 물고기가 말한 흙냄새가 항상 배어있다.
갑자기 레페리는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물고기가 말을 했다는 황당한 장면을 봐버린 탓에 물고기 따위의 말을 중요한 단서인양 생각한 자신이 우스워서였다. 그는 겁먹은 아이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얼른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일, 일을 하자. 일이나 하는 거다. 제길.”
마을 사람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마을 곳곳에 모여앉아 웅성거렸다. 수사관들이 집집마다 뒤지고 마당을 파헤치며 의심스러운 물건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주점 앞에 모여 앉아있던 무리는 막 밭에서 돌아오는 스미스를 보고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이봐, 빌리. 쿨럭, 재판관 나리가 작심했어. 집집마다 들쑤셔놓고 있단 말야.”
빈센트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스미스는 어깨에 진 괭이를 내려 땅바닥을 짚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멍청이. 그래봐야 제깟 게 뭘 찾아내겠냐. 쓸데없이 겁먹지 마. 정 무서우면 술이나 퍼마시고 자빠져 자면 되잖아. 담배를 안 태우니까 골통마저 연기가 돼버렸냐?”
“그, 그런가? 쿨럭.”
“자네들도 잊지 마. 우리는 하나야. 한 놈 낚이면 모조리 끝인 거야. 배신하는 새끼는 내가 먼저 목을 비틀어놓을 테니 알아서 처신들 잘 해.”
사내들은 긴장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스는 히죽 웃으며 사내들의 등을 찰싹 때렸다.
“자, 자. 시시껄렁한 소린 그만 두고, 마시자고. 마시고 죽어보자! 오늘은 내가 쏜다!”
사내들은 불안해하면서도 헤죽 웃으며 주점에 몰려 들어가려 했다. 레페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웃음은 밤새 이어졌을 것이다.
사내들은 레페리에게 일단 모자를 벗으며 굽실거렸다. 레페리도 모자에 손을 대 간단히 답했다. 사내들은 재판관의 손에 선혈이 묻은 것을 굳은 얼굴로 힐끔거렸다.
레페리는 싱긋 미소까지 띠며 스미스에게 말했다.
“좋은 저녁이오, 스미스 씨. 알다시피 지금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조사 중인데, 예외가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의 원성을 사지 않겠소?”
“내 집은 이미 조사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뎁쇼. 제일 먼저 쳐들어오지 않았소?”
“아, 집에 있는 물건들이야 조사가 끝났죠. 나는 지금 스미스 씨가 들고 있는 괭이를 말하는 겁니다. 그건 오늘 하루 종일 집을 비운 스미스 씨가 계속 들고 다닌 거니 말이오.”
사내들은 스미스를 쳐다보았다. 스미스는 거만한 낯으로 괭이를 던졌다. 던질 줄은 몰랐던 레페리는 제대로 받지 못해 그것을 떨어뜨렸다.
“맘대로 하슈. 거기서 뭘 더 찾아낼지는 모르겠지만.”
사내들은 굳은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띠며 서둘러 주점에 들어갔다. 레페리는 주점을 향해 주먹을 을러댄 후 괭이를 집어 들었다. 괭이의 날을 살펴본 그는 날이 자루에 이어지는 그 꺾인 부분의 폭이 손가락 길이인 걸 확인했다. 이 마을의 어느 괭이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괭이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때 그에게 다가오던 수사관이 흠칫 놀랐다.
“재판관 님, 손에‥.”
“낮에 강에 갔다가 이상한 게 묻었네. 신경 쓸건 아니야.”
“아니, 손에 든 그거, 핏물입니까? 그게 괭이에 묻는데요.”
수사관은 레페리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핏물은 말라있었다. 그게 괭이에 묻는 건 이상한 일이다. 레페리는 괭이를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든 핏물이 빠지고 있었다. 대신 손이 지나간 자리에 녹색물이 얼룩덜룩하게 묻어났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진 레페리는 괭이를 수사관에게 내밀었다.
“나도 핏물이라 생각했는데, 풀물인가? 젠장, 기분 정말 더럽군. 일단 이거 압수해. 좀 더 조사해봐야겠어.”
손으로 잡은 부분에 모두 녹색물이 든 건 아니었다. 사람이 괭이를 잡고 휘두를 때 붙잡는 위치, 그리고 괭이 날의 꺾인 뒷목에 짙은 물이 들었다. 레페리는 급히 언덕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제 물고기가 말하는 현상을 단순히 이상한 일로 웃고 넘길 수 없게 되었다.
빈센트는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항상 어울리는 왈패들과 더불어 코가 비뚤어지도록 퍼마셨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은 이상스레 무언가에 옥죄임 당하는 기분이었다. 잠깐 잔을 놓고 멍하니 있기만 해도 몸속 깊은 구석에서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에 놀라 그는 일부러 요란하게 웃어대며 연거푸 잔을 들었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자정을 넘겨버려 주점주인이 슬슬 널브러진 주당들을 정리할 무렵 빈센트는 쓰러진 동료들을 내버려두고 혼자 주점 밖으로 나갔다. 취할 대로 취해 걸음마저 비척거렸지만 그의 정신은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그는 밤바람에 몸을 떨며 서둘러 집을 향해 갔다.
문득 담배가 절실해진 그는 습관적으로 파이프를 꺼내 문 후 주머니를 휘저어보았다. 잠시 후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파이프도 집어넣어버렸다.
서울에서 온 검은 옷의 남자들은 지금쯤 마을에서 압수한 물건들을 조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오늘이라면 강에 나가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수중에 없다는 게 너무도 불안했다.
빈센트는 마을 밖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강에서 올라온 차가운 안개가 마을 입구로부터 빈 들에 이르기까지 사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 안개를 틈탄다면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 없이 강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레카 인이 묻혔던 곳에 닿자 그는 팔을 걷어붙인 후 조심스레 금줄을 넘어 강으로 들어갔다.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린 진흙땅에 한두 개의 발자국이 더 더해진다 해서 누군가가 쉽게 알아볼 리는 없었다. 빈센트는 안개 때문에 달빛조차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강에 코를 박다시피 고개를 들이대고 강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두고 간 물건이 있는 모양이지?>>
빈센트는 차가운 물속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벌벌 떨며 주위를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주위는 막막하게 시야를 가리는 안개뿐이었다. 헛것을 들은 게 틀림없다. 술이 과했던 모양이다. 그는 안면근육 전체를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서려고 강바닥을 짚다가 강 한가운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스르륵 걷혔다. 그 뒤에서 도우포가 벗겨진 레카 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붉은 불길이 쏟아져 나와 그를 태워 죽여버릴 듯이 이글거렸다.
<<너희 피 묻은 자들을 내가 쉽게 잊으리라 생각했나.>>
그 얼굴과 목소리는 분명 그의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넘어진 채 뒤로 물러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미끈거리는 진흙 때문에 제대로 발을 디딜 수 없어 오히려 물만 잔뜩 뒤집어썼다.
“아, 쿨럭, 아니야! 허슬 나리가 시켰어, 시킨 거라, 쿨럭, 시킨 거라고! 네 겉옷이랑 칼을 가져다주는 대신 우릴 눈감아준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쿨럭쿨럭, 네놈이 허슬 나리도 데려간 거 아냐!”
레카 인의 유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물 한가운데에서 서서히 움직여 강변으로 다가왔다. 빈센트는 발버둥치는 것도 잊고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다가오는 유령을 쳐다보았다. 되지도 않는 기도문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미사 시간에 졸기만 했던 그가 기억해낼 수 있는 건 몇 마디도 되지 않았다. 그사이 유령은 자신의 시체가 버려진 구덩이에서 다섯 발짝 앞에 멈춰 섰다.
<<허슬을 데려간 건 내가 아니다. 하지만 사신의 결정은 옳았군.>>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나는 살려, 쿨럭, 살려줘! 네 머리를 깐 건 빌리지 내가 아니야! 사람 죽이긴 싫었지만 빌리가 안 끼면, 쿨럭, 가만 안 둔다 해서 때린 거야! 쿨럭, 난 몇 번 차지도 않았어, 나는 널 죽이지 않았다고! 제발 죽, 쿨럭, 죽이지 마!”
빈센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엎드려 물속에 이마를 박은 채 흐느껴 울었다. 유령은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때 안개 속에서 묘하게 경쾌한 목소리가 말했다.
“자, 여기까지. 살기(殺氣)는 관둬요, 레르다이 씨.”
“괜찮은 낚시터라더니만 허, 정말 월척이 낚였구먼.”
어디에 숨어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강둑 위의 안개 속에서 슥 나타났다. 브네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페리는 말없이 빈센트를 노려보았다. 들어 올린 손으로 얼굴에 칠한 피를 닦아낸 레르다이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찌나 창백한지, 막 건져 올린 익사체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든 빈센트는 아까까지 여기에 없던 사람이 두 명 더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주위를 휘 둘러보며 눈을 꿈뻑이던 그는 갑자기 새된 소리로 버럭 고함쳤다.
“일부러 네놈들이 여기서‥!”
“응, 그 일부러다.”
“우, 왜, 왜 하필 나요?”
“스미스의 친구니까. 그래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법.”
이런 데서까지 농담을 하려 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레페리는 이스갈 인답지가 않다. 브네로는 속으로 레페리에게 야유를 보낸 후 얼른 말을 잘라 들어갔다.
“이 더운 여름에 감기라니, 이상했거든요. 제가 여기서 주은 돌조각을 보고 처음에는 사체를 발굴할 때 삽질하다가 깬 건가 했죠. 그게 맞긴 한데, 이게 부싯돌이 깨진 거더라고요. 레페리 씨한테 물어보니 수사관들 중에 부싯돌을 잃어버린 사람은 없더군요. 이 부근은 낚시하기 좋은 곳이라 꼬맹이들이 자주 다녔던 곳이죠. 애들은 부싯돌을 쓰지 않아요. 그럼 어느 부주의한 어른이 흘렸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귀한 부싯돌을 죄를 지은 자리에서 잃어버린 바보치고 찾으러 다니지 않을 사람이 없잖아요? 그게 물속이라 해도 말이죠. 더군다나 십 수 일 동안 금연을 강요당하고도 담배냄새가 풀풀 나는 애연가라면.”
브네로는 주머니에서 깨진 돌조각을 꺼내들었다. 빈센트는 당황해 그것을 빼앗으려고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진흙을 밟고 미끄러졌다. 첨벙! 레페리는 즐거운 듯이 혀를 차며 그를 끌어올렸다.
“쯧, 더운 낮에 강물을 뒤집어쓰면 어찌 됐든 감기는 걸리지 않아. 하지만 차가운 밤에 물장구를 치면 백이면 백, 감기에 걸릴 수밖에. 당신은 한밤중에 이 부싯돌 하나를 찾으려고 수시로 강을 들락거렸어. 이 부근에 널려있던 발자국이나 꺾여있던 갈대 같은 건 보안관이나 사체발굴자가 부주의한 탓도 있지만 당신도 일조한 바가 있지. 이미 엉망이 된 데니까 자신이 드나들어도 티가 안 나리라 생각했나? 그런 건 물속으로 걸어 다닌 스미스를 본받았어야지.”
“으극‥!”
“자, 방금 우리 앞에서 떠들어댄 이야기를 모레 법정에서도 고스란히 증언해주길 바란다. 스미스한테 죽기 싫으면 순순히 협조하고 우리 보호를 받는 게 현명하겠지.”
“이‥ 거, 쿨럭! 거짓말쟁이들! 아무도 네놈들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레페리는 먹이를 수중에 가둔 육식동물처럼 씩 웃었다.
“그런 건 법정에서 알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