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포님께서 주신 단문 리퀘 주제는 "휴일" 입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캐릭 해석 등에 저의 적폐왜곡날조가 많습니다. 물론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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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힌셔는 휴일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할 말이 없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자신의 앞과 뒤에서 뭐라고 지껄이든 자신은 기사가 되고 싶다는 고민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으로 모든 시간과 노력을 집중했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 연인과 시간을 보낼 때도 무슨 화제로 시작하든 결국에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곤 했고, 감사하게도 -그리고 미안하게도- 연인은 힌셔를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도량을 지닌 이였다. 그랬던 자신이 원치 않아도 만인으로부터 최고의 기사라는 말을 듣게 된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기사의 임무마저 주어지지 않는 탓에 매일이 휴일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휴일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제는 할 말이 생겼는가? 솔직히, 힌셔는 지금도 휴일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휴일이라는 개념이 힌셔의 삶에는 주어진 적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때는 힌셔가 지닌 여러 “첫번째”라는 이름값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그래야 했다면, 지금은 만인이 영웅으로 우러르기에 그랬다. 사람들의 눈과 귀는 사상 최고의 기사, 악마기사를 처단해 기사의 본을 세운 기사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이 바라는 기사다움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강하지만 미숙하고 제어되지만 불완전하며 그래서 한계가 있는 기사들을 향해 알게 모르게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스치고 있는 현재의 시대에서 힌셔는 1초라도 그 기대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설령 지켜보는 자가 없더라도 기사라면 무엇이 기사다운 행동인가에 대한 고민을 1초도 멈춰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힌셔의 임무는 역설적으로 휴식도 퇴근도 휴일도 없었다.

 

 “최고의 기사께서는 24시간 연중무휴로구만.”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등 뒤편에서 놀리듯 툭 던져진 아는 목소리에 힌셔는 사인을 해주려고 들고 있던 필기구를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도 사상 최악의 기사, 두 번째 악마기사 같은 말을 듣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소문과 악명을 떨치는 기사가 불빛을 등지고 서서 계단 아래로 거대하고 불길한 새처럼 새까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본능처럼 곁눈으로 주변을 살핀 힌셔는 와론과 자신 사이에 있는 높고 폭넓은 계단이 기사들의 본산인 황제의 성과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구분하는 지리적 표지 중 하나라는 것을 인식했다. 힌셔의 붉은 망토자락이라도 만져보려고 다가와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눈도 있다. 아무리 와론이라도 이런 곳에서 싸움을 걸 것 같진 않았다.

 

 그 사람들이 흰눈을 뜨며 슬금슬금 물러난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아 발을 멈추고 서성인다. 사람들은 힌셔가 유명한 문제아를 상대하면서 어떤 행동을 할지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계단 위쪽을 올려다보면서 힌셔가 자신을 본딴 예술품마다 똑같이 새겨져있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것은 그들이 기대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수도에는 퍽 오랜만 아니냐? 요즘 무슨 특수 임무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응.”

 

 와론은 자신이 서있던 제일 위쪽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단을 올라가 와론과 눈높이가 같아지는 지점에서 팔짱을 끼고 멈춰선 힌셔는 잠시 기다리다가 흠 하고 콧소리를 내며 무안해지려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먼저 말을 건 이상 부연하는 설명이든 그냥 시시콜콜한 잡담이든 뭔가가 좀 더 따라올 법도 하건만, 와론은 정확히 힌셔가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 이상의 말이 없었다. 의아해하며 와론의 기색을 살핀 힌셔는 속내를 종잡을 수 없기로 유명한 새까만 기사가 어딘가 풀이 죽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풀죽은 와론이라니, 그를 한번이라도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힌셔는 여러 의미에서 보통의 기사는 아니었다.

 

 “이거 어색하구나. 누구 기다리나?”

 “아니.”

 “그럼 뭔가를 기다리나?”

 “아니.”

 “혹시 갈 데가 없는 건가?”

 “하마. 바쁜 거 아녔어?”

 “그래. 난 바쁘지 않아...”

 

 와론과 달리 힌셔는 좌절감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와론은 으, 하고 목구멍 아래쪽에서 짜증 섞인 신음을 뱉고는 다시 침묵했다. 힌셔가 아는 와론은 아무 용건 없이 사람들, 그 중에서도 기사들 근처에 머무는 자가 아니었다. 풀이 죽다 못해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 태도로 다가왔으면서 용건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한 힌셔는 사람이 항상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더라는 걸 떠올렸다. 통찰의 눈 같은 이상스런 능력을 타고난 탓에 대화를 하던 상대보다 훨씬 정확하게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차렸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통찰의 눈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눈앞의 투구를 쓴 기사는 힌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뭔지 본인도 아직 종잡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의도가 뭐든 말을 섞어보면 알 일이었다. 마지막 계단까지 마저 올라간 힌셔는 친근해 보이진 않겠지만 목소리는 들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와론과 나란히 앉았다.

 

 “마침 잘 됐다. 잠깐 말상대나 해다오.”

 “괜찮겠어? 영웅님이랑 말 한 마디라도 섞고 싶어 안달난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직무유기 아냐? 영웅이 그래도 돼?”

 “말 섞는 게 귀찮다면 철이나 섞어보자. 나갈까?”

 “응 나중에~ 조만간 큰 건이 있을 것 같거든.”

 

 싸움을 사양하는 와론이라니 이것도 희귀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와론이 아까보다는 조금 차분해진 것처럼 느껴질까? 힌셔는 추측과 추리에 재미까지 느끼며 머릿속에서 아는 정보들을 열심히 뒤적였다. 새까만 닭이 참가 중인 특수 임무. 그러고 보니 동대륙에서 장군급이 넘어왔고 특수2기가 그자와 조우했다고 들었더랬다. 황제의 성에서 나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힌셔와 와론이 싸우면 대련이라 해도 가볍게 끝나지 않는다. 와론은 지금 그렇게 좋아하는 싸움 공부도 자제할 만큼 몸을 아끼며 대비해야 할 큰 전투를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싸우지 않을 때 와론은 무엇을 할까? 그러고 보니 힌셔의 머릿속에 있는  와론에 대한 기억은 싸우거나 싸움을 대비하는 모습들 뿐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순백의 코끼리가 오늘 낮에 재미있는 견습을 만났다면서. 네 제자냐?”

 

 힌셔가 들은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순백의 코끼리 칸덴티아가 낮에 겪은 어떤 해프닝에 곁다리로 수반된 것이었다. 와론은 무릎에 기대어 세워놓은  론누에 기대는 것처럼 머리를 기울였다.

 

 “제자는 무슨. 소꿉놀이지, 그냥.”

 “그 아이가 하필이면 너로 둔갑하는 재주를 부렸다고도 들었다만.”

 “보통은 견습이 그 코끼리한테 덤빈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냐? 그 편이 훨씬 흥미진진하잖아.”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서 물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새까만 닭으로 둔갑한 이야기는 새까만 닭 앞에서 해야 재미있지 않겠나.”

 “난 재미없거든.”

 “그러냐. 이번에 얼마나 머무나? 보고 겸 정비 때문에 들른 것이겠지?”

 “일주일. 맞아. 나 지금 휴가 중임.”

 “일주일이나?”

 “그니까 말야. 참 길지? 그치만 애들은 쉬긴 쉬어야지. 사령탑께서 이것저것 처리할 것도 있는 모양이고.”

 

 와론은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바닥으로 턱-투구의 옆면-을 괴면서 발치의 불빛 가득한 도시를 바라본다. 표정이 없는 투구임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이 저절로 상상된다. 불현듯 힌셔는 와론이 그답지 않게도 풀이 죽은 이유를 깨닫는다.

 

 “그런가. 뭘 하면서 보낼 생각이냐?”

 

 힌셔는 자신의 말이 차분하고 평범하게 들리길 바랐다. 표정을 숨기는 거라면 힌셔가 두 번째 천성처럼 잘하게 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필 상대가 예민함을 두 번째 천성처럼 지닌 자였다. 도시를 향하던 투구가 다시 한쪽으로 기울면서 이쪽을 빤히 바라볼 때 힌셔는 이번엔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힌셔가 와론이 말을 건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듯이 와론도 그 말을 뱉어놓고 스스로 자신의 평소같지 않은 상태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뭐냐?”

 “저기, 이거 좀 뻘쭘하다. 우리 이런 거 묻는 사이 아니잖아.”

 “...그냥 참고하려는 거다.”

 “당신은 친구가 없어?”

 

 자신을 숨기려고 일부러 상대의 약한 곳을 쿡쿡 찌르는 소릴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툭 던지는 것마저도 힌셔가 아는 밉살스런 기사로 완벽하게 돌아온 모습이다. 힌셔는 살짝 아쉬움을 -왜?- 느낀다.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팔짱을 끼면서 재치있게 받아칠 말을 열심히 궁리한다.

 

 자연스레 발치의 계단 아래쪽으로 눈길을 둔 힌셔는 기사의 본산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감히 발을 올릴 생각은 할 수 없어 그 앞의 광장에 두셋씩 모여 아직까지도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최고의 기사와 최악에 가까운 기사를 올려다보는 눈들에 담긴 것은 선망이기도 하고, 호기심이기도 하고, 의혹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눈, 사람들이 멋대로 퍼뜨리는 상상과 해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기사는 없다. 혹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기사가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꾸며진 모습이리라. 힌셔는 자신이 아는 이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모습을 가장 철저하게 꾸미는 기사, 자신과는 무척이나 다르고 반쯤은 적일지도 모르면서 친구에는 가장 가까운 기사에게 짐짓 심술궂은 말을 던진다.

 

 “네가 친구 삼고 싶은 인간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어서 다행이구나.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라.”

 “오, 삐졌다.”

 “안 삐졌다.”

 “삐졌구만 뭘. 그보다 슬슬 업무 복귀하셔야겠어. 팬들이 기다리잖아.”

 

 그리고 힌셔의 임무를 상기시키는 와론의 그 점잖은 대화종료선언만큼 아쉬움을 일으키는 것도 없었다. 등 뒤의 높다란 담장과 기둥에 걸린 불빛들은 두 기사에게 부드러운 빛을 씌우고 편안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계단 위를 쓸어내듯 불어든 상쾌한 밤바람이 화려한 금발과 우쭐거리는 붉은 투구깃을 둥실 띄워 흐트린다. 돌과 벽돌로 가득 채워진 도시에도 틈이 있는 곳마다 풀은 자라고 풀에 깃드는 벌레들이 아스라이 나른한 노래를 부른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다. 와론은 이미 일어나 툭툭 털고 있지만, 힌셔는 아직 일어서고 싶지 않다.

 

 “시간이 났을 때 할 일을 모르겠다면 언제든 들러라. 같이 생각해보자꾸나.”

 

 옷과 망토의 매무새를 정돈하면서 와론은 아직도 앉아있는 힌셔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짧은 침묵 후 와론이 한 손을 들어보였다.

 

 “난 필요 없는데? 그럼 수고~”

 

 긴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간 와론은 알아서 좌우로 갈라지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태연히 빠져나가 이윽고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늘 그렇듯 언제라도 어딘가로 혼자 훌쩍 떠날 듯한 가벼운 공기를 망토처럼 두른 채였다.

 

 가벼운 한숨을 뱉고 계단에서 내려온 힌셔는 다시 몰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혼자 있을 시간을 예의바르게 요청했다. 사람들은 눈치를 보고 아쉬워하고 심지어 억울해하면서도 순순히 비켜섰다. 사람들이 엿들을 수 없는 계단 위에서 두 기사가 나눈 어떤 대화 때문에 영웅께서 고민이라도 생긴 모양이라는 속삭임이 얼핏 귓가를 스쳤다. 힌셔는 어깨를 으쓱이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자제하면서 거처까지 이어지는 불빛이 환한 거리로 나섰다.

 

 자기만의 어떤 정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다 못해 밖으로 폭발시키곤 하는 저 문제적 기사에게는 휴일이 있을까? 아마 자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힌셔는 왜 자신이 그런 답을 떠올린 것일까 생각하면서 모처럼 생긴 여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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