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개빠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사저사매 하마닭" 입니다.

 *절대적인 메인은 하마닭이고 부수적으로 거미하마, 그노힌셔, 기린닭, 목와 요소 있습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더보기

 

1.

 

 힌셔는 최초의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다고 정확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돌이켜봤더니, 어렴풋이 느끼던 위화감의 중심에 불쾌감이 있었고 불쾌감을 느낀 일이 두어 번 겹쳐지자 직관처럼 실망감이 찾아왔으며 실망감은 곧 분노로 전이된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거듭되면서 쌓여온 좌절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날을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훗날의 일이다. 지금 힌셔는 나풀거리며 흩어지는 눈송이 사이로 입에 불을 머금은 용처럼 연기 같은 숨을 흘리면서 그저 앞으로, 앞으로 걷고 있었다. 벽이 가로막으면 뛰어넘고,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고, 막다른 곳이면 뒤돌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감히 말을 거는 자는 없었고, 설령 그런 자가 있다 해도 힌셔에게는 답할 말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힌셔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무뚝뚝하게 미로 같은 수도를 배회하는 내내 힌셔는 앞뒤와 좌우에서, 위와 아래에서 자신에게 오래도록 따라붙는 눈들을 느꼈다. 어느 눈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그 눈동자들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고, 그랬다가 자신이 무슨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 미숙했던 어린 시절에 악몽처럼 따라다녔던 그 두려움은 상대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을 때조차 시선만은 아주 살짝 비껴내어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치지 않는 기술을 익힌 지금도 때때로 머릿속 한구석에서 불쑥 튀어나와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눈들에서는 최초로 기사가 된 여자였기에 가는 곳마다 길게 따라오던 시선들이 연상되었다. 마치 여기서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진기한 무언가를 보는 눈. 그 뒤에 있는 감정과 생각이 경멸과 불건전한 흥미에서 경의와 흠모로 바뀌었다 해도, 각자의 생각과 감정으로 소란스러운 수십 수백 쌍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 앞에 홀로 노출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힌셔는 500년의 시차가 있는 이 시대에도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다는 익숙함을 느낀다.

 

 그렇게 방향이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걸음을 갑작스레 정면으로 끼어든 누군가가 막아서자 힌셔는 짜증이 나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자를 찾으시려면 이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샛노랗게 보일 정도로 짙은 금색의 눈을 곁눈으로 흘끔 보면서 힌셔는 담청색 기린이라는 기사명을 조금 늦게 떠올렸다. 한순간 이 자에게도 통찰의 눈같은 능력이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직접 말을 건 자에 대한 예의로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한 힌셔는 곧 기린이 순수하게 관찰력과 논리를 사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알아낸 거란 걸 깨달았다.

 

 “내가 그 자를 찾는 건 어떻게 알았소?”

 “하마님께서 몇 시간 째 산책을 하시며 지금 수도에 있는 기사들을 거의 모두 만났지만 누구 앞에서도 멈추지 않으셨으니까요. 지금 시점에서 남은 자는 저와 새까만 닭, 그자 정도죠.”

 “나를 감시하고 있었나.”

 “그건 아닙니다. 마침 저도 일이 있어 새까만 닭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게 아니오?”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다. 그곳에도 없으면 새까만 닭은 지금 수도에 없다고 봐야 합니다.”

 

 힌셔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닭이 마음먹는다면 누구도 그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린에게서는 조용한 확신이 보였다. 기린의 말이 거짓이나 허풍은 아닌지 판별하는 거라면 그의 샛노란 눈동자를 들여다볼 필요조차 없었다. 기린의 모자에는 닭을 찾아 도시를 헤맨 몇 시간 동안 쌓였다가 녹고 다시 얼어붙은 얼음조각이 붙어있었으니까.

 

 불현듯 힌셔의 머릿속에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륙 간의 전쟁에 대한 무거운 논의가 어느 틈에 격기사와 자유기사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며 혼란스러워진 회의장에서 팔짱을 끼고 선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투구를 쓴 기사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바로 왼편에 서서 장내를 지켜보다 회의가 끝날 무렵 짤막한 대화를 주고받은 자가- 네가 기사를 곁에 용납한다고? 잠시 흥미가 동했지만, 힌셔는 그쯤에서 슬쩍 눈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린은 앞장서면서 자연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힌셔가 혼자 헤매는 동안에는 몇 시간째 보이지 않던 길이 순식간에 열렸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힌셔는 기린과 더불어 황궁 뒤편에 자리한 바위산을 오르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니젤에서 북쪽에 우뚝 솟은 바위산은 산자락에 안긴 황궁의 부속 건물 대부분을 내려다보는 높이이기에 경호상의 이유로 황제의 호위기사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불문율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호위이자 대리인 순백의 코끼리는 볼품없이 크기만 할 뿐 경호와 안전을 이유로 일체의 폭력행위가 금지된 바위산에 관심이 없어 이곳을 거의 찾지 않았고, 코끼리의 호전성과 자존심을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은 기사들과 일반인들도 알아서 기피하면서 자연스레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버려지다시피 한 장소였다.

 

 새까만 닭은 바위산 꼭대기의 가장 높은 바위 위에 드러누워 눈을 맞고 있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누워있었던 건지 기사명처럼 새까만 상의와 망토자락 위로 녹았다가 얼어붙은 얼음결정이 허옇게 덧쌓여있어 처음에는 눈을 맞고 거무스름하게 젖은 바위인지 검은 옷을 입고 눈을 맞은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기린이 그 방향을 가리키기도 전에 힌셔가 먼저 움직였다. 도약 한 번으로 바위에 올라 닭의 발치에 선 힌셔는 눈발이 거의 가로에 가깝게 그어지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 입을 열었다.

 

 “대련하자.”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방금 바위 위로 따라 올라온 기린이 슬그머니 긴장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500여 년 만에 수도로 돌아온 이래 지금껏 힌셔는 누구에게도 도전하거나 도전받지 않았고 누구도 힌셔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니, 힌셔가 수도로 돌아오기 직전에 시간의 얼음에서 놓이자마자 싸움을 벌인 상대라면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황제의 명으로 철저히 함구된 채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지금 살아있는 자들 중에서 힌셔와 생사를 걸고 겨뤄본 적이 있는 그 유일한 기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비켜. 다 가리잖아.”

 

 힌셔는 무엇을 가린다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힌셔가 비켜서자마자 힌셔의 너른 등에 가로막혔던 굵은 눈발이 새까만 닭 위로 꽂히듯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닭의 몸 위로 수의를 덮듯 신선한 눈 한 겹이 얇게 깔렸다. 투구의 면갑에 세로로 난 틈에서 만족한 듯 엷은 숨결이 느긋하게 피어올랐다.

 

 기린이 두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두 눈을 질끈 감은 가운데 힌셔는 옆으로 저벅저벅 돌아가 닭의 머리맡에 가서 섰다.

 

 “대련하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투구 속에서 한쪽 눈이 뜨이며 이쪽을 향한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 별로 놀 기분 아닌데. 꼭 지금이어야 해?”

 “그건 아니지만-”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새까만 닭. 부탁이다. 시간을 내다오.”

 “내가 왜?”

 “너 말고는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힌셔는 말을 뱉기에 앞서 고심했고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으면 그냥 삼키곤 했다. 말이 적고 짧은 편이기 때문에 오해를 산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힌셔는 누군가와 대화 중인 사람의 태도로는 무심할 정도로 눈앞에서 편안히 드러누운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자가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의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힌셔가 아는 새까만 닭은 그런 자는 아니었다.

 

 짧은 침묵 후 닭이 대꾸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지금이라도 따라가지그래. 적어도 걔들 뒷담 하는 소리는 안 듣게 될걸.”

 

 최근 마지막 시험 임무를 마치고 동대륙으로 출발한 세 명의 젊은 기사와 한 명의 견습기사의 얼굴이 힌셔의 머릿속에서 선명히 떠올랐다. 그들이 최근까지 겪었던 어떤 실패에 대해 비웃고 놀리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목소리를 내거나 내지 않으며 떠드는 말들도. 물론 힌셔는 자신이 끼어봤자 그들의 임무에 방해만 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나는 잠입 같은 건 할 줄 모르니까. 힌셔가 아는 것을 이 영리하고 교활한 자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리고 새까만 닭은, 기대했던 대로 힌셔가 여기까지 찾아와 갑작스레 대련을 요구하는 이유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닭이 이런 곳에 혼자 드러누워 눈을 맞으며 차갑게 몸을 식히는 이유 역시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힌셔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제국의 수도이자 기사의 성지인 니젤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지대에 속하는 이곳에서는 속세의 그런 말들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판단하는 눈들도 이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닭은 꽤 좋은 장소를 알고 있었다.

 

 힌셔는 닭의 고독을 방해한 것이 새삼스레 미안해졌다.

 

 “실례를 했군.”

 

 힌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분노와 좌절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반드시 싸움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힌셔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대화였고, 힌셔에게 가장 익숙한 대화의 방법이 철의 사용을 수반하는 것일 뿐이었다. 스승이여. 당신께서 저를 그렇게 키우셨으니 저도 그 방법밖에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음에야-

 

 “~~~~ 진짜!”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들으란 듯이 거창하게 장탄식을 뱉는 소리가 났다. 어깨너머를 돌아본 힌셔는 닭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걸 보았다. 새까맣던 옷이 거의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온몸에 엉겨 붙은 눈과 얼음을 탁탁 털어내면서 닭은 기린이 있는 방향을 향해 투구의 턱부리를 까딱였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 없을 거니까 찾지 마.”

 “알았어.”

 “근데 넌 왜 온 거냐?”

 “나도 너한테 볼일이 있어. 내 쪽은 급하지 않으니 돌아오면 얘기하지.”

 “흐음.”

 

 닭이 속내가 불분명한 콧소리를 내는 걸 들으면서 힌셔는 눈알을 굴렸다. 왜 마음을 바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닭이 대련을 수락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기린은 어떨까? 급하지 않다는 기린의 말은 거짓은 아니지만 진심도 아니었다. 별 것 아닌 일 때문에 이 눈 속에서 행방이 묘연한 자를 찾아 몇 시간이고 도시를 헤맬 사람은 없다. 기린을 힐끔 본 힌셔는 기린이 두른 담담한 태도에 감춰진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그대도?

 

 기린은 닭이 돌아올 때까지 지평선에서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린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것뿐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래서 힌셔는 공연히 말 한 마디를 건넸다. 기린은 짧은 침묵 후 내리깐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닭은 이미 기린에게서 관심을 잃은 것처럼 휘적휘적 바위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색채라고는 흑과 백과 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무채색만 남은 폭설 가운데 힌셔는 닭의 투구 끝에서 우쭐대는 긴 붉은 깃을 표지로 삼아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2.

 

 수도의 사람들이 상상해본 적도 없는 기사의 조합에 수군거리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성문을 통과한 후, 한동안 두 기사는 인근의 도시와 마을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수도 안에서는 주민들이 포장된 길 위로 쌓이는 눈을 끊임없이 넉가래로 밀고 여기저기에 재를 뿌려댔지만 성문을 벗어나자마자 관리하는 손길이 뚝 끊기면서 길이 있어야 할 곳마저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이번 폭설은 며칠을 갈 것이며 눈폭풍이 몰아치는 곳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 때문일까, 두 기사의 것을 제외하면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수도 부근의 숲과 황야에는 언제나 기사 아니면 기사와 관계된 일을 하는 자들이 떠도는 것을 생각할 때 별스러운 일이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은 시각이었지만 벌써 사위가 어슴푸레해진 가운데 묵직한 눈을 뿌리는 구름이 얼마나 멀리, 얼마나 두텁게 하늘을 뒤덮은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힌셔는 눈구름이 수도만이 아니라 어쩌면 중앙대륙의 절반을 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곧 완전히 깜깜해지겠어. 어쩔래? 더 가봐?”

 

 수도를 떠나고 거의 한 시간 만에 처음으로 말을 꺼내면서 닭이 론누를 고쳐잡았다. 마침 힌셔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하마턱의 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땅은 수목이 듬성해지고 머리 위에 아무것도 없는 황야가 점차 넓어져가는 경계였다. 그들 수준의 강자들이 싸움을 벌이기에는 아직 지나치게 수도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이 눈 속에서 밤을 보낼 만한 곳도 아니었다.

 

 두 기사는 신호도 없이 거의 동시에 눈 덮인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힌셔는 푸른 마력을 벼락처럼 뿜으며 뛰쳐나가는 거대한 전쟁망치에 두 팔로 매달린 채로, 닭은 공중에 뜬 가느다란 창대를 두 발로 딛고 비스듬히 선 채로 눈이 내리는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거 뭐야?”

 

 한참을 날고 있을 때 눈을 뜨기도 힘겨운 매서운 바람 속에서 닭이 소리쳤다.

 

 “뭐가 말이냐?”

 “그거. 당장이라도 누구 머리를 날려버릴 것처럼 쥐고 있잖아. ~ 이대로 공중전 한판 뜨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잠깐이었지만 힌셔는 귀가 솔깃했다. 공중전이 성립되려면 싸우는 쌍방이 모두 공중을 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힌셔가 잠깐이라도 공중에서 싸움을 벌여본 것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뿐이었고, 그때의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공중전이 흥미로운 것과는 별개로 힌셔는 닭이 말하는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하마턱을 쥔 게 어쨌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힌셔가 하마턱에 매달려 나는 모습은 마치 언제든 공중에서 지상으로 하마턱을 내려찍으며 전투에 뛰어들 것 같은 형상이었다. 힌셔 자신은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숨 막히도록 쏟아붓는 눈발 속에서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리며 나는 무언가에 두 팔로만 매달린다면 1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닭은 싸울 상대가 자신밖에 없는 이 허공에서 힌셔가 줄곧 공격적인 태세를 유지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척 비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게 누구나 할 법한 참견조로 슬쩍 오지랖을 내보인 것뿐일까. 고개를 가로저어 공중전의 유혹을 떨쳐낸 후 힌셔는 전방의 짙은 어둠 속 어딘가를 턱짓했다.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하루쯤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괜찮은 터가 있다. 이 속도로 날면 한두 시간쯤 걸리겠지.”

 “우리 지금껏 북동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니젤의 북서쪽이다. 앞장서라. 보이면 신호하마.”

 “. 알아서 잘 따라오셔.”

 

 잠시 후 두 기사는 크게 선회하면서 닭이 지시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빽빽하게 쏟아지는 눈발과 어스름해진 어둠으로 시계가 좋지 않은 탓에 몇 번은 서로를 놓칠 뻔했다. 닭은 뭐라고 혼자 툴툴거리더니 힌셔의 발치보다 낮은 높이로 내려갔고, 곧 의도를 알아챈 힌셔는 좀 더 위쪽으로 하마턱을 띄웠다. 하마턱의 뒤쪽으로 쉼 없이 뿜어지는 푸른 섬광이 세상에 창백한 빛을 뿌리는 가운데 희푸른 빛이 반사된 허연 설원 위로 쏘아진 화살처럼 눈발을 뚫으며 나부끼는 새까만 망토와 살대마냥 쭉 펴진 붉은 투구깃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비행의 효율만 따진다면 두 기사가 하마턱이나 론누 중 하나에 같이 타고 나는 편이 나을 터였지만, 둘 중 누구도 자신만 무기를 포기한 채 상대를 품 안쪽으로 들일 생각은 없었다.

 

 두 발로 걸어서 오는 동안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길이 장애물 하나 없는 하늘을 날아서 가자 삽시간에 등 뒤로 사라지고,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가물거리나 싶더니, 어느덧 생경하면서도 어딘가 눈에 익은 풍경이 지평선의 저편에서부터 발밑으로 훌쩍 다가왔다. 능선처럼 이어진 완만한 산들이 서쪽의 레툰에서부터 황야를 건너 들이닥치는 얼어붙은 바람을 덜어낸다. 그 아래쪽의 야트막한 분지에는 여름이었다면 무성했을 나무들이 잎 대신 눈을 덮은 채 숲을 이루고 있다. 숲 군데군데에 땅과 바위가 깊이 파헤쳐지면서 아직까지도 나무가 자리를 잡지 못한 흔적들이 있었는데 무언가가 언뜻 보인다 싶으면 곧 희끄무레한 눈안개가 넘실대며 감춰버리는 탓에 하나하나 더듬듯이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힌셔는 목이 메었다.

 

 “이쪽으로.”

 

 여지껏 선두를 양보하고 조금 뒤처져 날던 힌셔가 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곧 하마턱에서 분출되던 푸르스름한 마력이 사그라들고, 힌셔는 산자락에서 분지를 내려다보는 높다란 언덕 위로 수십 미터를 뛰어내렸다. ! 언덕 전체가 부르르 떨리는 충격 속에서 종아리까지 쌓인 눈이 솟구치며 조그만 눈보라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조금 거리를 둔 곳에 사뿐히 착지한 닭이 투구를 때리는 눈바람에 손사래를 치며 다가왔다.

 

 “뭘 알고 가는 건지 뭔지.”

 “제대로 왔다. 지형이 눈에 익어.”

 “500년이 지났는데 옛날 지형이 지금 지형이겠어? 게다가 길치잖아, 당신.”

 “여기가 맞다니까. 저 절벽을 쪼개놓은 자국은 스승님이-”

 

 투구의 면갑 틈으로 호기심을 감추지 않은 강렬한 시선을 느낀 힌셔는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힘겹게 삼켰다.

 

 “-저 숲에 아주 거대한 나무가 있다. 밑둥에 집채만 한 구멍이 있지. 오늘은 늦었으니 거기서 쉬고, 내일은 하루 종일 죽도록 붙어보자.”

 “그냥 지금 싸우자고 하고 싶지만 뭐~ 이렇게 시야가 안 좋아서야. 어쩔 수 없네.”

 “그래. 저 산 너머에는 그때 우리가 싸웠던 곳 같은 너른 황무지가 있다. 기대하거라.”

 

 힌셔는 서두르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 눈은 별빛도 없는 새까만 어둠과 온통 펄펄 쏟아지는 희뿌연 눈안개가 뒤섞인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헐벗은 숲을 살피고 있었지만 힌셔가 머릿속에서 보고 있는 것은 500여 년 전 스승이 이 땅을 처음 보여준 날의 풍광이었다. 멋진 초여름날이었다. 어딜 봐도 녹색뿐이라 어질어질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걸어간 끝에 도달한 나무구멍 앞에서 스승은 자신이 어릴 적 며칠씩 묵으며 수련하던 곳이라고 소개하며 치우지 않은 방을 제자에게 들킨 것처럼 겸연쩍어했다. 힌셔는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온갖 곤충과 버섯과 새 몇 세대와 그 밖의 동물들의 서식지로 쓰인 흔적이 가득한 나무구멍의 청결상태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상에 드러난 뿌리 하나의 굵기가 자신의 키보다 높고 고개를 아무리 꺾어도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무에 온통 시선을 빼앗겼더랬다.

 

 스승의 나무는 숲 한가운데에 솟은 조그만 산이었다. 숲은 그 어미나무의 무릎께에서 무럭무럭 자란 어린 나무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일군 하나의 마을이었다.

 

 “근데 하마. 얼마나 큰 나무야? 다 고만고만한 것 같았는데.”

 

 그런데 닭이 여상한 어조로 던진 평범한 질문에 왜 뺨을 맞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 힌셔는 장시간의 비행으로 건조해진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찌푸린 낯으로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찬찬히 이해하려 애썼다. 그 후로도 이곳으로 몇 번 더 수련여행을 왔기에 힌셔는 겨울의 숲이 어떤 풍광이었는지도 기억했다. 그렇지만 숲을 둘러싼 바위산의 능선과 거기에 남은 스승의 흔적 같은 것들을 제외하면 기억과 맞는 것이 없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안개에 잠긴 앙상한 숲의 윤곽은 기억과 너무나 달랐다. 나무 역시 생물이고 종이 다른 나무끼리 생존경쟁을 하기도 하니 500년의 세월이라면 주류를 이루는 수종이 바뀌면서 숲의 양상 자체가 달라지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근본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남달리 눈이 밝은 줄 알았는데 밤눈은 어두운가? 잘 찾아봐라. 동산인가 싶을 정도로 큰 나무다.”

 “나 밤눈도 좋거든? 오면서 그런 걸 못 본 것 같다고.”

 

 닭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눈안개가 자욱한 허공으로 론누를 던졌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었다. 힌셔는 기다렸다.

 

 이윽고 숲을 한 바퀴 돈 론누가 안개를 찢으며 돌아왔다.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론누를 가볍게 잡아챈 닭은 다시 팔짱을 끼면서 창을 끌어안는 것처럼 어깨에 기대 세웠다.

 

 “시야가 나빠서 확실하진 않은데~ 어린 숲 같아. 늙은 나무가 별로 안 보여.”

 

 방금 확인한 사실을 전달하는 닭의 어조는 평소처럼 까불거리는 양 가벼웠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절제가 감춰져 있었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연령이 한꺼번에 젊어졌다면, 불이든 병이든 인간 때문이든 오래된 나무들이 한꺼번에 죽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불길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은 힌셔는 머릿속 어딘가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닭은 론누의 시야를 통해 숲을 관찰하는 동안 투구와 어깨 위로 쌓인 눈을 한 손으로 대충 쓸어내면서 힌셔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말고 딴 데는 없어?”

 “. 이 부근에 동굴 같은 건 없었을 거다, 산 어딘가에 큰 바위가 돌출된 데가 있었지. 소나기 정도는 피할 만했는데 우리 둘이들어가기엔 좁겠군.”

 “호랑이 둘이 같은 굴에 들어가면 싸우기밖에 더 하나. 나 슬슬 지금 당장 싸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닭은 품에 안은 론누를 손가락 끝으로 성마르게 톡톡 두드렸다. 힌셔는 정색했다.

 

 “이참에 분명히 해두지. 나는 너와 대련을 하고 싶은 거지 생사를 가름할 생각은 없다. 나라에 전운이 감도는 시국이다.”

 

 론누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탁 멈췄다.

 

 “, 대륙 간의 전쟁!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기사를 필요로 하겠는걸? 좀 있으면 기사 목숨을 소중히 여기자고 공익광고도 뜨겠어. 전쟁 났을 때 명예롭게 갈아버리려면 아무튼 그때까지는 살아있는 기사가 있어야 하니 말이야. , 아주 좋은 명분이고말고.”

 “너도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나?”

 “찬성했다기보다, 반대하지 않은 거지. 저쪽에서 작정하고 칼 들이대면 별 수 없잖아.”

 “그걸 아는 자가 뭐가 그리 불만이라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난 건가?”

 “내가 하자고 했어? 가만히 있던 사람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당신이라고.”

 

 닭이 두른 공기가 슬슬 짜증과 노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다. 힌셔는 수도의 바위산 꼭대기에 드러누워 눈을 맞던 닭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도에 있는 기사 중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기 위해 네가 택한 방법이 그것이었지. 내가 택한 방법은 너였고.

 

 “됐다. 김이 새는구나.”

 

 힌셔는 눈을 헤치며 언덕 아래로 무작정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짜증스럽게 혀 차는 소리가 나더니 머지않아 닭이 힌셔의 뒤로 따라붙었다. 정확히는, 힌셔가 푹푹 빠져가며 눈을 밟아 길을 낸 곳으로만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목이 짧은 장화 속으로 아직 얼지 않은 눈송이가 쏟아져 들어오자마자 녹아버려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가운데 쌓인 눈 속에 숨은 관목 덤불의 가시 같은 것이 드러난 팔다리를 자꾸 긁어댄다. 그 정도로는 기사에게 생채기도 낼 수 없지만 성가신 기분은 낙담과 결합하자 쉽사리 짜증으로 바뀌었고, 닭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힌셔는 기어코 한 마디를 하고 말았다.

 

 “치사한 녀석아, 너도 좀 도와라.”

 “싫은데~ 내가 누구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이라~”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약은 올리지 말아야지.”

 “내가 뭘 어쨌다고? 됐고, 길 찾아줄 테니까 당신은 그 소나기 피했다는 바위로 가. 쓸데없이 돌아다니다 또 얼음 되지 말고 날 밝을 때까지 거기서 꼼짝 말고 있어.”

 “너야말로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같이 가자. 좁기야 하겠지만 뭐가 문제냐?”

 “아 내가 싫다고.”

 “일단 가보고나 말해라. 더 나불대면 댓발은 튀어나온 그 주둥이를 뜯어주마.”

 “이거 투구지 내 주둥이 아닌데?”

 “투구의 주둥이를 뜯어주마.”

 “아니이~ 영웅님이 이렇게 폭력적이어도 돼?”

 “난 진지하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나.”

 

 론누가 불쑥 튀어나와 힌셔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어깨너머를 돌아본 힌셔는 닭의 투구가 자신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는 걸 보았다.

 

 “또 뭐냐?”

 “불 켜봐. 작게, 약하게, 눈은 건드리지 말고.”

 

 힌셔는 그노제스의 -나의 그노제스의- 걸작이자 최초의 마스터피스인 하마턱을 고작 비상조명 취급하는 닭의 태도가 조금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라 해서 싸움과 거리가 먼 일상적인 용도로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노제스라면 그런 태도를 오히려 즐거워했을 것이다. 힌셔는 잠자코 하마턱을 작동시켜 조그만 촛불의 형태로 마력을 응집시키려 했다.

 

 섬세한 조절은 힌셔의 특기가 아니었다. 하마턱의 꼭지 위쪽으로 분수 같은 빛이 호쾌하게 솟구쳤다. 두 기사는 2미터는 됨직한 높이로 훅 솟아올라 눈 덮인 나무 사이로 극명한 명암을 드리우며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마법의 횃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 뭔가를 찾는 거라면 환한 편이 낫지 않겠느냐?”

 “그래. 영웅이 허당일 수도 있지.”

 

 닭은 구시렁대며 나무 사이로 몇 걸음 나아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쌓인 눈에 몸을 파묻다시피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닭의 움직임을 주시한 힌셔는 곧 닭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람인가?”

 

 몸을 일으킨 닭은 대꾸하는 대신 론누를 천천히 휘두르며 창끝으로 눈에 줄줄이 새겨진 흔적을 가리켰다. 닭이 선 곳으로 다가간 힌셔는 조그만 짐승이 온몸으로 헤엄치다시피 눈과 얼음을 파헤치며 지나간 듯한 흔적의 바닥에 한 쌍의 조그만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는 것을 보았다.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기껏해야 어른의 허리께 정도에 머리가 닿을 키의 어린아이인 듯했다.

 

 “그래. 이 시각에 이런 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ㄹ 켁.”

 

 힌셔는 한 손에 마법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다른 손으로는 닭의 망토에 달린 모자를 멱살 잡듯이 말아쥔 채 성큼성큼 걸었다.

 

 “가자!”

 “이거 놓, 아 미친, 놔줘야 찾지! 아니 혼자 튀어나가진 말고!”

 

 닭을 놓아준 힌셔는 흔적을 따라 이미 저만치 달려나가고 있었다. 한달음에 힌셔를 따라잡은 닭이 씩씩거리며 나직이 소리쳤다.

 

 “좀 진정해! 기사가 아니라 애라고! 이 눈 속에서 애 걸음으로 얼마나 갔겠어?”

 “그러니까 빨리 찾아야지! 이런 날씨에 어린 애 혼자 어찌 버틴단 말이냐!”

 “애 쪽에서 우릴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

 “지금 그게 중요한가!”

 “그게 중요할 수도 있잖아!”

 

 옥신각신하며 나란히 달리던 두 기사가 한순간 동시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두 기사가 땅을 박찬 바로 그 지점에서 눈 위로 사람의 형상 같은 것들이 스르륵 일어서기 시작했다. 근방에 쌓인 눈이 형상을 중심으로 빨려들어가 뭉치면서 순식간에 젖은 흙바닥이 드러났다. 환하게 타오르는 하마턱의 불줄기로 전방을 비춰본 힌셔는 어린애가 도화지에 선화로 삐죽빼죽 낙서한 사람처럼 생긴 다섯 기의 거대한 눈사람이 발 앞에 거치적대는 나무를 수수깡처럼 밟아 부러뜨리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니, 여섯.

 

 “마법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애 쪽에서 우릴 마주치고 싶지 않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한 근거는 뭐지?”

 “그냥 감인데.”

 

 감이라고 어물쩍 뭉뚱그려 대꾸하긴 했지만 닭이 직관적으로 내린 판단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힌셔의 옛 기억으로나 여기까지 날아오면서 본 바로나 이 근방에는 마을이 없었다. 그럼에도 눈 내리는 밤의 숲 한복판에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면, 그 아이는 어떤 이유로든 숲에 떨어진 채 며칠 이상을 혼자 생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른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은 물론이다. 바로 그렇기에 힌셔는 아이를 우선 위험한 상황에서 구조하고 봐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었지만, 닭은 아이에게 사정이 있어 일부러 숲에 숨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통은 숲에 홀로 있는 아이를 보고 그럴 가능성을 떠올리진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닭은 아이의 흔적을 처음 발견했을 때 크고 강렬한 불이 아니라 조그맣고 약한 광원을 요구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도망자나 사냥감을 추적할 때처럼 목표에게 이쪽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두 기사의 머리 위로 당장이라도 때려눕힐 것처럼 커다란 눈주먹을 을러대며 다가오는 눈사람들을 보면서 힌셔는 아이의 근처에 악한 의도를 지닌 어른, 이를테면 아이를 납치해 숲에 숨은 마법사가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의 선두에 선 눈사람이 휘두른 주먹은 붕 소리를 내며 날아가 닭의 옆에 선 나무를 분질러버렸다. 몸을 비스듬히 트는 것으로 가볍게 피한 닭은 휘파람을 불었다.

 

 “하마, 잠깐 쟤들이랑 놀고 있어.”

 

 두 번째 눈사람이 솥뚜껑만한 발을 닭의 투구 위로 들어 올렸다. ! 닭의 기척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힌셔는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하마턱의 자루로 땅바닥을 찍었다. ! 지표가 부르르 진동하면서 주위의 나무마다 쌓인 눈이 와르르 쏟아졌다.

 

 “나는 기사, 검붉은 하마 힌셔!”

 

 이목구비가 없는 눈덩이 머리들이 일제히 힌셔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눈사람들은 굵직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 눈사람은 말을 할 수 없지. 힌셔는 자신의 기어스가 이 상황에서도 적용될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결론은 간단히 도출되었다. 눈사람은 도구일 뿐. 힌셔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듣거라! 나의 기어스는 말을 섞지 않은 상대와는 싸울 수 없다는 것! 나와 제대로싸우기를 바란다면 나와서 한 마디라도 지껄여봐라!”

 

 보통 때라면 힌셔는 말 섞지 말 것을 경고하여 자신과 싸우고 싶지 않은 자에게 싸움을 피할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어딘가에 숨은 정체 모를 상대라면 힌셔를 알든 모르든 -또는 자기 키보다 큰 거대한 망치를 들고 붉은 반망토를 두른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선 키 큰 여자가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부르는 500년 전의 그 인물이라는 사실을 믿든 못 믿든- 힌셔에게 싸움을 걸도록 유도해야 했다. 기사의 명예를 믿는다면 힌셔가 기어스를 지키는 한 말을 섞지 않고 덤비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리라는 걸 이용하기 위해서, 기사라는 자기소개를 믿지 않는다면 나무만큼이나 커다란 눈사람 무리에 포위되었음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어찌 됐든 상대는 힌셔를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명예로운 11이 성립되는가의 여부는 따질 필요도 없다. 닭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힌셔는 기어스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한꺼번에 덮쳐드는 눈사람들 앞에서 힌셔는 하마턱을 느슨히 쥐었다가 근처의 적당히 굵은 나무로 휘둘렀다. 밑둥부터 부러진 나무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발을 딛으려던 바로 그 위치에서 통나무에 발목이 걸린 두 눈사람이 우스꽝스럽게 기우뚱하며 앞으로 엎어진다. 땅에 부딪힌 몸통이 박살나면서 조그만 눈폭풍이 일어난 것처럼 푸스스 흩어진다. 그러나 맥없이 비산하던 눈송이들이 한순간 마치 시간을 거꾸로 감은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가고, 눈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형체를 갖추며 일어나 힌셔를 내려다본다. 자유자재로 부서지고 회복될 수 있는 눈사람의 몸속에 잠깐이라도 붙들렸다간 생에서 두 번째로 얼음 속에 갇힐 판이었다. 힌셔는 그냥 힘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억누르며 양떼를 모는 번견처럼 눈사람 무리의 바깥으로 천천히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일생 최대의 힘을 짜내 달음박질치는 속도였지만 힌셔로서는 눈사람들이 자신을 쫓아올 수 있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이따금 덮쳐드는 팔다리는 숲의 나무에 부딪히도록 유도하면서 눈사람들과 정면으로 맞서진 않았다.

 

 그리고 닭은 힌셔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찾았다.”

 

 머리 위 어딘가에서 숨어있던 아이를 찾아낸 술래처럼 심술궂고 장난스러운 중얼거림이 들렸다. 눈사람들이 삐걱이며 멈칫하더니 이내 뜨거운 물을 맞은 것처럼 힘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곧 눈사람은 완전히 사라지고 여섯 개의 거대한 눈무더기만이 남았다.

 

 힌셔는 하마턱의 꼭지 위로 아까보다도 커다란 마법의 불빛을 분출시키며 기다렸다. 곧 숲의 눈안개 사이에서 눈과 이름 모를 칩엽수의 잎을 잔뜩 뒤집어쓴 닭이 새된 소리로 무시무시한 욕을 퍼붓는 뭔가를 어깨에 짊어진 채 걸어 나왔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짤막한 두 다리가 버둥거리며 무릎과 발로 닭의 가슴과 배를 퍽퍽 찍어댔다. 힌셔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도 조그만 두 주먹과 팔꿈치가 닭의 뒤통수와 등을 마구 때리고 있는 듯했다. 물론 기사인 닭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공격이었다.

 

 “놔아아! *^%$#&& 죽여버린다!”

 

 아이가 지저분한 회색 머리칼을 사방으로 흔들어대며 온몸으로 발버둥 치다 두 손에 잡힌 붉은 투구깃을 휙 잡아당겼다. 닭의 목이 뒤로 훽 제껴지면서 투구가 들려 턱까지 벗겨졌다. 닭은 침착하게 한 손을 들어 투구가 더 벗겨지지 않도록 붙잡으면서 다른 팔로는 아이를 옆구리에 옮겨 끼었다. 아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닭의 옆구리를 깨물었고 닭은 움찔했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힌셔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최대한 중립적으로 들리길 바라며 점잖게 말을 걸었다.

 

 “도와주랴?”

 “그래주면 감사.”

 “마법사는?”

 “여깄는데. 마법사.”

 

 기사가 된 후 힌셔는 이만한 나이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다뤄본 일이 없다시피 했다. 주먹과 발과 이빨로 사력을 다해 닭을 공격하다가 이제는 닭이든 힌셔든 손이 닿는 모든 사람을 할퀴려 드는 아이를 닭의 옆구리에서 빼내어 땅바닥에 두 발로 똑바로 서도록 세우는 동안 힌셔는 아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것과 뼈대가 아직 굳지도 않은 아이를 잘못 건드려 자칫 다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사이에서 손아귀의 힘을 조절하느라 진땀을 빼며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닭의 말에 담긴 의미는 힌셔에게 조금 늦게 다가왔다.

 

 “?”

 

 

 

 

 

3.

 

 마법은 물론 주먹도 발도 이빨도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받아들인 건지 그저 한바탕 난리를 친 끝에 기운이 빠진 건지, 잠시 얌전해진 아이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씩씩거리며 끊임없이 두 기사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등지고 선 나무에 바짝 몸을 붙인 모습은 눈앞을 성벽처럼 가로막고 선 기사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수 없다면 나무 속에라도 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힌셔는 짐짓 닭을 흘겨보았다.

 

 “아이한테 잘해준답시고 쓸데없이 겁을 준 건 아니겠지?”

 “난 인사만 했는데. 안녕 하고.”

 “그런 것치고 아이가 너무 겁에 질렸잖느냐.”

 “그러게. 내가 너무 기사처럼 생겨먹어서 그런가~”

 

 힌셔는 닭의 기색을 곁눈으로 살폈다. 말씨는 농담조일지 몰라도 닭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가 마법으로 일으킨 눈사람들은 처음에 눈에 띄는 거대한 마법의 횃불을 든 힌셔가 아니라 닭을 먼저 공격했더랬다. 더군다나 세간에 알려진 소문이 어떻든 간에 투구와 망토와 창을 갖춘 닭의 외양만큼은 그린 듯이 오래된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고전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기사를 무서워하는 거라고?

 

 자신의 한 몸에 지닌 미약한 힘으로는 세상의 설명되지 않는 악과 폭력을 견딜 수 없는 약한 자들에게 기사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 용기가 되고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기사가 약자에게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의 근원이 된다면 세상에 기사 같이 터무니없는 무력을 지닌 자들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예전의 힌셔라면 그렇게 노기를 드러내면서 닭에게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500년 후의 지금을 살고 있는 힌셔는 섣불리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힌셔가 닭을 끌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 생각이 많아지는군.”

 

 짧은 순간이었지만 투구 속에서 닭의 시선이 힌셔를 면밀히 살피는 것 같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인 힌셔는 닭이 눈앞의 일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심드렁한 태도로 뒷목을 짚고 우둑 소리가 나도록 목줄기를 이리저리 꺾는 것을 보았다.

 

 “이제 어쩔 거야? 명예로우시고 정의로우신 기사의 영웅님.”

 “장난이라도 너까지 그러지 마라.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명백하지 않나.”

 

 눈발은 이제 가늘어져 가루눈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함박눈이 내리는 동안 잠시 포근했던 기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시각각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모두의 입에서 농도 짙은 입김이 강처럼 흘렀다. 이 눈 속에서 추위와 공포로 퍼렇게 질린 채 파들파들 떠는 어린애를 심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힌셔는 지난 500년 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유명해진 붉은색의 반망토를 끌러 아이의 어깨에 둘러줬다. 키가 큰 힌셔에게는 반망토였지만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키의 아이에게는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외투였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망토를 내팽개칠 것처럼 꿈틀거리다 힌셔의 체온이 묻은 따뜻한 천을 손에 꽉 쥔 채 일그러진 낯으로 입술을 씹었다. 망토 속에 고분고분 파묻힌 아이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힌셔는 닭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선은 밤을 보낼 만한 곳에 아이를 데려가 보호해야겠지. 헌데 나는 아이를 다룰 줄 모른다. 섬세한 행동도 못 하지. 그런 나를 하룻밤 내내 아이 옆에 혼자 남겨둬도 괜찮겠느냐? .”

 “당신 요즘에 기린이랑 같이 다니기라도 해?”

 “기린? 무슨 소리냐?”

 “됐어. 그 바위 어떻게 생겼는데?”

 

 닭은 머리가 지끈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투구를 짚었다. 힌셔는 웃었다.

 

 그로부터 10분 뒤 눈 속을 헤매면서 힌셔는 더는 웃을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더 설명하라는 거냐?”

 “아니이~ 그래도 뭔가 기억하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동그라미랑 세모는 분간하지? 하마, 분간할 수 있는 거 맞지?”

 “바위가 다 바위 같이 생겼지 뭐가 다른가? 사람 얼굴도 아니고.”

 “그럼 최소한 방향이라던가, 주변의 특징적인 지형지물이라도 기억해야 할 거 아냐. 당신 스승이란 사람이 뭔가 표지판이라도 만들진 않았어?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아침저녁으로 숲에서 행방불명된 길치 제자를 구조하러 다니기만 하진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어린 힌셔가 새벽이나 저녁식사 후에 운동 삼아 능선이나 숲을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노라면 어느 틈에 따라붙은 스승이 나란히 걸으면서 그날의 훈련이나 다음 끼니의 반찬거리에 대해 이런저런 잡담을 하곤 했다. 힌셔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 신출귀몰할 정도로 갑자기 나타나던 스승이 신기하긴 했지만 숲을 잘 아니까 그런 것이려니 했다. 설마 정말로 제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구조하러 오신 거였습니까?

 

 “그게 뭐가 걱정이냐? 네가 있는데.”

 “차라리 애기한테 물어보고 말지. , 너 어디서 사니?”

 

 닭이 사근사근하게 물어봤지만 힌셔가 하마턱을 들지 않은 팔에 안긴 아이는 싸늘하게 외면하며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힌셔는 실룩이며 위로 올라가려는 입매를 근엄하게 억누르면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숲에서 혼자 지내려면 고생스러웠겠구나. 네가 눈과 비를 피하는 곳이 있다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련?”

 

 길게 드리워진 앞머리에 얼굴의 반절이 감춰져 있긴 했지만 아이가 망설이고 있는 기색은 통찰의 눈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버릇인 것처럼 한동안 입술을 씹던 아이가 고개를 수그린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날 어떻게 할 거야?”

 

 힌셔는 잠시 닭을 쳐다보았고 닭은 두 손을 들어 보이곤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이와의 대화를 전적으로 힌셔에게 떠넘기겠다는 선언이었다. 힌셔는 얄미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며 대답했다.

 

 “우리는 기사다. 나는 검붉은 하마 힌셔. 저자는 새까만 닭 와론.”

 “다시 안녕~ 이제는 나 때리지 마~”

 “또한, 우리는 어른이다. 너는 낯선 어른이 두렵겠지. 악한 자들도 여럿 마주쳤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는구나.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아이가 온몸으로 덜컥 경련했다. 본능적으로 약한 이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싶어진 힌셔는 아이를 안은 팔에 아주 조심스럽게 힘을 더했다.

 

 “믿어달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으마. 다만, 우리가 돕는 걸 허락해줄 수는 없겠느냐.”

 

 고민이 길어지면서 아이는 몸에 외투처럼 두른 붉은 반망토 속으로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힌셔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힌셔의 드러난 어깨 위로 떨어진 눈이 녹아 수증기가 되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결심한 듯, 아이는 고개를 들어 힌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와줄 거지? 진짜로?”

 

 힌셔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는 두 번 묻지 않고 눈가루가 떨어지는 어둠 속의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기사들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닭이 영웅님의 마법’ ‘여억시 영웅님은 다르시다따위로 들릴락말락하게 조잘대긴 했지만, 자신을 조금은 신뢰하게 된 아이에게 집중하면서 힌셔는 닭의 엉덩이를 아주 아프게 걷어차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쉽게 참아낼 수 있었다.

 

 힌셔에게는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 얼어붙은 개울과 언덕과 바위와 나무를 지나 얼마간 걸은 끝에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드는 비탈길이 시작되었다. 닭이 론누를 들어 가리킨 방향을 올려다본 힌셔는 하마턱의 푸른 불빛에 물들어 반짝이는 굵은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바위를 찾아냈다. 고드름 탓에 바위는 경사진 산중턱 한복판에서 거대한 용이 흙과 바위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튀어나와 쩍 벌린 아가리처럼 보였다.

 

 “지금도 저 바위가 다른 바위랑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 설명 못하겠어?”

 “. 눈과 얼음이 덮였군. 그런데 다른 바위도 다 그렇지 않나.”

 “내가 잘못했어. 이젠 안 물을게.”

 

 닭이 자기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가? 자신이 뭔가 미안한 짓을 저지른 것 같은 다소 얼떨떨한 기분을 고갯짓 한 번으로 물리친 후 힌셔는 두어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바위까지 올라갔다. 품에서 비명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 힐끔 내려다본 힌셔는 한 번 땅을 박차는 것으로 십수 미터를 뛰어넘는 기사의 도약을 온몸으로 체험한 아이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해진 것을 발견했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벙벙하던 아이의 낯은 튀어나온 바위 아래에서 불씨가 거의 꺼진 잿더미 뒤의 땅바닥에 웅크리고 누운 조그만 형체를 본 순간 조각조각 깨져나갔다.

 

 “언니야!”

 

 힌셔의 팔에서 뛰어내린 아이는 한달음에 웅크린 아이의 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더니 자신이 두른 힌셔의 붉은 반망토를 끌러 덮어주고 그 위로 쓰러지듯이 몸을 겹쳤다. 기사이기에 힌셔는 이 바위틈이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추울지 정확하게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웅크린 아이가 하마턱의 서느런 푸른 빛 아래 온통 퍼렇게 물든 모습으로 쌕쌕 숨을 쉴 때마다 가느다란 입김이 쉴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 위로 크게 튀어나온 바위와 바위의 끄트머리에 발처럼 드리운 고드름 덕에 눈과 바람이 안쪽까지 들이치지 않을 뿐, 이 휑뎅그렁한 바위틈은 결코 안락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건조한 공간에 오래 머물렀을 때처럼, 또는 신선한 피가 흐르는 전장에 서 있을 때처럼 비릿한 내가 코끝을 슬그머니 스치는 것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춥고 차가운 공간은 힌셔의 머릿속 한켠에 자리한 기억 하나와 겹쳐지면서 상황에 맞지 않게도 -또는, 불편하게도- 편안한 기분을 가져왔다. 이곳에서 소나기와 낙뢰를 피하는 동안 스승은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의 행동수칙을 알려주려다 스스로도 그런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걸 깨닫고 혼자 좌절했더랬다. 그도 어쨌거나 기사였고 그중에서도 그 시대 최강의 기사로 군림한 자였기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생사가 갈릴 자연재해 앞에서 지닐 상식과 조심성이 완전히 무뎌지고 말았던 것이다.

 

 “500년짜리 향수가 도지나 봐. 하마.”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돌아본 힌셔는 닭이 잿더미 옆에 나뭇가지 한 짐을 와르르 쏟는 것을 보았다. 힌셔가 낯설어진 숲에서 길을 찾느라 집중하는 동안 닭은 뒤따라오면서 장작으로 쓰기 적당한 나뭇가지를 조금씩 꺾어 모은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닭은 야생에서 살아남는 지혜가 있는 자였다.

 

 닭이 잿더미에서 불씨를 일으키고 젖은 생나무로 솜씨 좋게 불을 지피자 곧 바위틈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힌셔는 아픈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회색 머리의 아이는 자신의 작은 몸 하나로 혹한의 세상으로부터 친구를 지키려는 것처럼 아픈 아이의 몸을 덮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울 것 같은 두 눈은 간절하게 힌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힌셔가 몸을 낮추면서 하마턱을 잡지 않은 쪽 손바닥을 위로 하고 천천히 내밀자 아이는 주저하더니 그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큰 아이를 놓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

 

 큰 아이는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손을 대자 잠깐 눈을 떴지만 이내 어지러운 듯 도로 감고 저항하지 않았다. 앓고 있는 아이를 감싼 누더기 같은 천을 풀어내자 신선한 피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아이의 왼팔에는 팔뼈의 방향을 따라 날붙이 같은 것에 깊이 쭉 베인 상처가 있었는데, 감염되거나 한 것 같진 않았지만 벌어진 상처를 더러운 천으로 묶어놓기만 했을 뿐 제대로 닫지 못한 탓에 출혈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힌셔는 급한 대로 늘 지니고 다니는 기사보급품을 뒤져 빠르게 응급처치를 했다.

 

 아이 둘이 쓰면 그럭저럭이지만 기사들 중에서도 키와 체격이 큰 축에 드는 어른 두 명이 끼어드니 바위틈은 확실히 비좁게 느껴졌다. 응급처치를 끝내고 아이에게 다른 상처는 없는지 살펴보는 작업까지 마친 후 힌셔는 한숨 돌리면서 구석에 욱여넣듯이 쌓인 허름한 잡동사니를 훑어보았다. 몇 안 되는 그 물건들은 모두 어린아이의 힘으로 들고 나를 수 있는 크기에 불과하며 마을에 정주하는 사람의 세간보다는 이리저리 떠도는 여행자의 휴대품에 가까웠다. 아픈 아이가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힌셔는 어린 애 둘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아이들 먹일 것 뭐 없나? 늘 뭔가 들고 다니잖나.”

 “있긴 한데 큰애는 못 먹을 듯. 그쪽 끝나면 눈이라도 퍼와.”

 

 적당한 크기로 모닥불을 일으킨 닭은 언제 밖에 나갔다 온 것인지 눈이 가득 담긴 통을 불 위에 걸어놓고 잡동사니 무더기에서 끄집어낸 헐렁한 주머니를 열어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를 옆으로 밀어둔 후 닭은 불붙은 장작 사이에서 불씨가 살아있는 재를 따로 덜어내더니 주먹만 한 생감자 세 개를 -저 자는 어디서 저런 걸 꺼내는 것인가?- 재 속에 묻었다. 이제는 안정적으로 넉넉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덕에 불빛이 충분해지자 힌셔는 하마턱에서 칫칫 소리를 내며 분출되던 마법의 빛을 꺼트렸다. 그리고는 다른 빈 통 하나를 찾아 새로 눈을 퍼담으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작은 아이는 끙끙거리는 큰 아이의 오른손을 꼭 쥔 채 익어가는 냄새를 풍기는 잿더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반쯤 벌어진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닭에게 눈이 든 통을 건네던 힌셔는 불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닭이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느라 자신이 돌아온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새까만 닭?”

 

 기사명을 들은 순간 투구를 쓴 기사는 선잠에서 깬 사람처럼 어리둥절해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투구 속에 완벽히 숨겨진 얼굴이 짓고 있을 표정을 알 방법이야 없었지만, 힌셔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왔어.”

 

 닭은 힌셔의 손에서 통을 빼앗다시피 가져가 불 옆에 뒀다. 닭이 두른 공기는 방금 전에 본 것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평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법이다. 힌셔는 의아했지만 굳이 들쑤시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힌셔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건너편으로 돌아가 회색 머리의 아이와 아픈 아이를 살폈다. 이제 보니 하마턱의 푸른 빛 아래에서 회색으로 보였던 아이의 머리는 백발에 가까웠다. 아픈 아이를 들어 품에 안고 불가에 자리를 잡은 힌셔는 무딘 단검으로 자른 듯 길이가 맞지 않는 갈색의 단발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호흡은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열이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약이 나오는 나무가 있어. 나무껍질을 끓여 먹으면 열이 내리고 안 아파져. 그래서 나무를 찾으러 갔었어. 근데에 나무가 딱딱해져서, 껍질이 안 벗겨져서.”

 

 그 말을 하는 내내 백발의 아이의 충혈된 눈에는 구슬픈 죄책감이 가득했다.

 

 “근데에, 하늘에 파란색, 하얀색 번개가 생겼어. 이상한 번개인데 친구들이 싫어하지 않았어. 그래서 번개가 떨어진 데로 가봤는데 기, 기사가 있었어.”

 

 백발의 아이는 두 기사가 비행하는 모습을, 정확히는 힌셔의 하마턱이 허공에 남긴 빛의 궤적을 보고 다가갔다가 외양만큼은 누가 보더라도 기사 같은 닭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린 모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자신을 기사라고 밝힌 어른들을 무서워했고, 지금도 조금은 의심하고 있었다.

 

 “친구들? 숲에 친구가 더 있느냐?”

 “. 여기두 있어. 나 친구 많아. 근데 나만 얘기할 수 있어. 나하고만 말하는데.”

 

 아이의 온몸에 다시금 경계하는 기색이 짙어졌다. 자신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닭이 치워뒀던 주머니에서 바스라지다시피 한 곡물을 꺼내 손바닥에 놓고 비교적 멀쩡한 것들을 골라 눈과 얼음을 녹인 물에 쓸어 넣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령이라고 부를걸. 마법사들이 교감하는 그거.”

 “내 얘기 믿는 거야?”

 “믿고말고. 저 덩치 크고 사나운 노랑머리 언니가 아까 무식하게 큰 망치에 불인데 안 뜨거운 불을 켜고 있었지? 그거 네 친구들이 힘을 빌려주는 거야. 마력이라고.”

 “진짜로? 너네도 나나 같은 거야?”

 

 두려움과 경계로 찌푸린 조그만 낯에 놀라움과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힌셔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자니 닭이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아닌데? 나랑 저 언니는 너랑 달라. 우리는 기사. 너는 마법사다.”

 “마법사가 뭔데?”

 “네 친구들의 친구들. 그런 사람들 있어.”

 “나 말고도 이런 사람 있어? 나 괴물 아니야?”

 “아니야.”

 

 동그랗게 열린 아이의 눈동자 앞에서 힌셔는 열어젖힌 문으로 쏟아지는 큰물에 휩쓸리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보통의 사람들은 세상에 기사가 있듯이 마법사가 있다는 것도 개념적으로는 알지만 그들이 사력을 다해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기회는 일생에 한두 번도 되지 않는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편리한 도구를 보면서도 그것을 만든 마법사가 싸움을 각오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어른에게 지도도 보호도 받아본 적 없는 아이가 궁지에 몰리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연히 타고났을 뿐 통제할 줄 모르는 힘을 폭발시킨 순간-

 

 아이를 몰아붙이던 자들의 눈에 어린 그 두려움과 맹렬한 적대감에 힌셔는 착잡한 기시감을 느낀다.

 

 “근데 너, 네가 뭔지는 모르면서 기사는 뭔지 아나 봐?”

 

 아이의 활짝 열렸던 마음이 닫히고 낯에서 다시 두려움과 사나운 미움이 치솟았다. 그러든 말든, 닭은 잿더미에서 꺼낸 감자에 작은 나뭇가지를 꽂아 내밀었다. 아이는 감자와 닭을 번갈아 쳐다볼 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바로 정하지 못했다. 힌셔는 크고 깊은 심호흡 한 번으로 뻣뻣해지려던 몸과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점잖게 한 마디했다.

 

 “애 그만 괴롭혀라. 이 아이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

 “나한테 뭐 시키려고?”

 “밥을 먹고, 이를 닦고, 일찍 자도록.”

 “그게 다야?”

 “그게 다다.”

 

 아이의 머리와 가슴은 의심을 놓지 못했지만, 입과 배는 노릇하게 구워진 감자의 냄새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천둥처럼 꼬로록거리는 소리가 분했는지 아이는 닭의 손을 때리다시피 감자를 낚아채 힌셔의 등 뒤로 달려가 숨었다. 닭은 아이에게 맞은 손을 허공에 살살 흔들고는 잿더미를 뒤적여 남은 감자 두 알을 꺼냈다. 힌셔는 말없이 닭이 꺼내놓은 감자 한 알을 집어 들고는 몸을 돌려 닭을 등지고 앉았다. 그리고는 닭이 준 감자를 벌써 다 먹고 검댕투성이의 손가락까지 빠는 아이에게 새 감자의 껍질을 까서 건넸다.

 

 나뭇가지로 통을 깡깡 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힌셔는 닭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알아서 해.”

 

 닭은 보글보글 끓는 죽을 가리켜 보이고는 론누를 들고 일어섰다. 힌셔는 닭이 세 번째 감자를 재 속에서 꺼내놓기만 하고 손대지 않은 걸 확인했다.

 

 “어디 가느냐?”

 “화장실.”

 

 닭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고드름 아래로 몸을 숙였다. 힌셔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닭을 막지도 않았다. 열 때문에 축 늘어진 아이를 달래어 반은 흘리다시피 하면서 밍밍한 죽을 먹여보려 애쓰고 동시에 가족처럼 의지하는 친구가 아픈데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끊임없이 발작하듯 불안해하는 아이를 어르다 보면,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어른의 심란함까지 배려할 여유는 남아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 밤 내내 꺼지지 않은 모닥불 앞에서 힌셔는 눈은 감았지만 정신은 잠들지 못한 채 자신에게 기댄 두 아이를 품에 안고 기다렸다. 겨울의 밤은 영원할 것처럼 길었고, 밤을 지새우는 것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고단했다. 그래도 밤의 시간에는 끝이 있었다. 눈이 잠시 그친 가운데 머리 위로 묵직하게 드리운 구름 한켠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이 텄지만 닭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이번 픽은 상중하 세 편 분량입니다. 다음 편은 별 일 없으면 화요일 저녁 쯤에 올릴 예정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