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毛麟角봉모인각 : 신수기린 앤솔로지>에 드린 축전.

취향에 따라 기린닭이든 지와지로든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네이버 웹툰 <잔불의 기사> 기반의 2차창작이며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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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략) 그러나 달에 도시를 건설하고 심해의 가장 깊은 해구를 답사하며 세계의 비밀들을 거의 남겨놓지 않은 이 시대에도 나린기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무기들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다. 그 무기들의 실물은 발굴되지 않으며 혹자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그것을 사용했다는 사람들과 … … , 해태, 기린, 봉황 등등 이른바 신수라 불리는 존재들, … … 나린기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한가. 하늘을 날고, 허공에 고정되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덮어쓰고 … … 기억은 잊혀지고, 기록은 소실된다.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 속에 숨겨짐으로써 지금까지도 살아남는다. 우리가 관측하고 기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실 속에 일말의 진실이 숨겨져있다면 (중략)

 

 … 그리하여 드론으로 수색하기도 어려운 황량한 사막을 조난자 꼴로 헤매는 신세가 됐지만, 현장연구란 원래 다 그런 법이다. 그래도 하루만 더 가면 된다. 도서관 다섯 군데 분량의 문헌조사와 소거법과 갖은 교차검증(저널 맨 뒷장 rd.66 메모 참고) 끝에 … … 침낭에 드러누워 토씨 하나 온점 한 개마저 외울 지경으로 들었던 136번 채록을 다시 재생한다.

 

 

#136.12-4. 그걸 죽여버린 게지. 사냥꾼 하나 지킨다고 금기도 어기고 사냥꾼이랑 한 약속도 어겨버린 거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신수가 왜 신수겠어, 그냥 짐승이 아니라 신령한 그거니까 그렇지. 근데 살생을 해버렸다고. 그러면 더는 신령한 게 아니지. 그러면 죽는 거야, 그냥. 그래서 기린이 병이 났어요. 비늘이 떨어지고 손끝 발끝부터 썩어들어가는데 하늘이 벌을 준 거라 신선이 와도 못 고치는 거요. 그럼 이제 사냥꾼은 어쩌느냐. 지 목숨 구해준 걸 죽으라고 냅둬? 약속 어겼으니까 그래버려도 누가 뭐랄 순 없는데, 근데 그거 하나가 빚이 됐나 봐. 그래서 신수를 미워하는 이 사냥꾼이 신수 하나 살려보겠다고 백방으로 애를 쓰게 됐는데 (하략)

 

 

 … 아직 해가 안 떴는데 벌써부터 뒷덜미가 타는 것 같고 입술이 갈라진다. 이 사막에 진입한 때부터 늘 그랬듯,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에 아침까지 최대한 달리고 4년 전 식생조사에서는 경이롭게도 그 나무가 여전히 홀로 살아있으면서 주위에 작은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고 했다. 이 사막은 과거에는 울창한 숲이었지만 지금은 기후재난으로 (중략) 낮잠을 잤는데도 지친다. 그래도 오늘 해질녘에는 도착하리라는 안내인의 말에 의지해 마침내 물이 마른 바위 협곡에 내려왔다. 이 협곡의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폐소공포증이 생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햇볕을 피하니 살 것 같다. 설화 속에서 신수사냥꾼이 죽어가는 기린을 부축해 지나간 길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숨을 돌리며 136번 채록을 듣는다.

 

 

#136.12-5. 사방에서 기린의 뼛조각이라고 주워 먹으려고 덤벼대니 당연히 다 실패했지. 사냥꾼이 괜히 신수사냥꾼인가. 그래도 100일을 그렇게 밤낮없이 싸우면서 기린이 태어난 그 신령한 숲으로 기린 데려가는 동안 사냥꾼이 아주 만신창이가 됐는데 다 죽어가는데도 둘이 그렇게 냉랭하고 모진 소릴 주고받으면서 하여튼 기린이 처음 그 숲을 나왔을 때 마주쳐서 쭉 같이 다닌 사이였으니까, 그 사냥꾼이.

 

 

 구전설화가 흥미로운 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화자가 마치 수십 대 이전 조상의 몸에 들어가 그때 일어난 일을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1만 년 전의 재난에 대한 원주민의 구전설화에 기반해 조사해보니 바로 그 시기에 설화에서 묘사한 그대로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사실이 확인된 사례도 있다(참고문헌 까먹지 말고 달아놓을 것). 그렇다면 신수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나린기 유물이 남아있지 않듯, 신수의 화석이 발굴된 적도 없다. 어떤 위대한 힘을 지닌 인간들을 영험한 동물에 비유하던 것이 어느덧 영험한 동물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 것은 (중)

 

 

#136.12-5. 그러니 사냥꾼이 꼭지가 돌아버린 거요. 여기까지 어떻게 살려서 데려왔는데 죽여달란 소릴 해. 근데 기린은 말요, 내가 말했잖어, 딴 신수들이 닭한테 한 짓 때문에, , 이 얘기 안 했어 내가? 새까만 닭요, 사냥꾼의 친구였던 영물. (136.18번대 채록 참고) … … 기린은 자비로운 신수요. 기린이 무서운 건 자기가 죽는 게 아냐. 이런 식으로 천벌을 받아 죽으면 자기가 악귀가 될 텐데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지, 사냥꾼이 전문가니까. 기린이 정말로 무서웠던 건 친구 때문에 신수를 미워한 사냥꾼이 자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들도 미워하게 될까 봐, 그니까 사냥꾼이 살아서 악귀가 되지 않게 하려고 (하략)

 

 

 ‘악귀라니 무슨 의미일까. 이 설화를 다룬 몇 안 되는 선행연구나 세부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는 다른 채록에서는 사냥꾼이 당연히 인간이라고 읽힌다. 하지만 136번 채록에서는 사냥꾼을 어떤 다른 존재로 보는 듯했다. 그것이 136번 채록의 특수성이자 (중략)

 

 … 수천 년을 그 자리에서 버텨온 장엄한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냥 잘 보존된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령 100년 안팎의 소박한 나무 같았다(사진 첨부). 그럼에도 함부로 접근하거나 침범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고요함이 있어 이 나무의 실제 수령이 수천 년은 된다는 사실을 … … 나무줄기에는 설화에서 전하듯이 뿌리께에서부터 길다란 창 한 자루의 길이만큼 세로로 크게 갈라진 구멍이 있었다. 동행한 식물학자와 고고학자가 시료를 채취하고 (중략)

 

 … 30분 후면 드디어 집에 간다. 손전등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새까만 새벽어둠 속에서 나린기의 설화가 얽힌 나무를 바라본다. 136번 채록의 마지막 부분이 떠오른다.

 

 

#136.12-6. 누가 봐도 기린은 죽을 때가 된 모습이었소. 마침내 사냥꾼은 기린을 품에 아기처럼 안아 든 채 숲으로 떠났고,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 계절이 네 번 바뀌고 나서 젊은 사람 하나가 숲에 들어가봤는데, 숲 제일 깊숙한 곳에서 전에 아무도 본 적 없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불쑥 자라있었대. 근데 그 나무줄기가 창 하나를 휘감고 있었단 거야. 마치 줄기 속에 사냥꾼의 창이 박힌 채로 자라난 것처럼. 그게 그 나린기의 이야기요.

 

 

 이 나무에서 발견되었다는 나린기는 하늘을 날며 세계의 삼라만상을 굽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새까만 닭이라는 신수’(그 설화에서는 인간도, 영물도 아니다)가 그 나린기의 주인이라 말하며, 여러 설화에서 언급된 그 나린기는 실제로 존재한 물건이 아니라 새까만 닭이라 불린 설화 속의 비극적 캐릭터를 가리키는 별명이 아닌가 추측하는 가설도 있다. 한편 신수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는 극도로 드물며, 새까만 닭이 변신한 다른 모습이거나 그 화신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설화에서나 위대하고 자비로우며 짧은 삶을 살다가 사라진 담청색 기린이라는 영웅적 캐릭터와 극도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문제는 사냥꾼(혹은 닭)의 그 몇 안 되는 설화에서 반드시 기린이 한 쌍의 짝으로 등장하곤 한다는 것이다. 서로 엇갈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진실의 편린일지는 (중략)

 

 … 연구자의 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논리의 비약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오래전 숲이었던 사막의 협곡 아래에 홀로 선 나무 앞에 서있자니 자신이 죽은 후 사냥꾼의 미래를 걱정한 신수와 자신이 미워한 신수의 마지막을 지킨 사냥꾼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 설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녹음기에서 136번 채록의 마지막 줄이 재생되고 있을 때, 일지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나무 위쪽으로 무심코 손전등을 비췄더니 그곳에 거대한 형체가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이나 커다란 영장류 동물이 앉아있는 줄 알았다. 어둠을 망토처럼 두른 그 알아볼 수 없는 형체가 나를 쭉 감시했던 거다. 나무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갔다간 … … 하필 그 타이밍이 기상 알람을 맞춰놓은 시각이었다니! 휴대폰 알람을 허둥지둥 끄고 다시 나무 위를 보니 그것은 없었다. 저 멀리, 동이 터오는 하늘을 등지고 밤을 쫓아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거대한 새의 형상이 언뜻 보였을 뿐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새까맣게 보였던 그 새는 새벽빛을 뒤집어쓰자 온통 하얗게 보였다. 그 새는 무엇이었을까? 136번 채록은 이렇게 끝난다.

 

 

#136.12-6. 그 후로 아주 가끔, 닭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닭은 절대 아닌 거대한 새가 한밤중에 그 나무로 날아와 깃들어있다가 새벽닭이 울기 직전에 떠나곤 했다더군. (녹음 종료)

 

 

 과학과 이성이 전통과 미신을 부정한 근대 이후에도 오래된 이야기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끊임없이 전하고 남겨서 언젠가는 모두가 듣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까. 이야기와 진실의 경계는 모호하며, 때로는 허구 같은 이야기가 진실 이상의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어떤 것들은 이성의 빛으로 밝히지 않은 채 영원히 어둠 속의 신비한 비밀로 두는 편이 더 좋다는 비과학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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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솔 제목이 鳳毛麟角인 게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치만  저 새가 무엇인지는 읽는 분의 생각에 달렸습니다.(웃음) 여튼! 신수기린au로 잔불 앤솔이 다 나오다니 정말 좋네요. 웹발행도 하신다 하니 회지를 구하지 못한 분들도 그때를 기대해주시고, 참가자 분들의 멋진 글과 그림 연성들을 즐겨주세요. 저는 간소한 축전을 바친 것으로 턴을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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