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개빠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사저사매 하마닭" 입니다.
*절대적인 메인은 하마닭이고 부수적으로 거미하마, 그노힌셔, 기린닭, 목와 요소 있습니다.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4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캐릭 해석 등에 저의 적폐왜곡날조가 많습니다. 물론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7.
“와, 힌셔님! 완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가 되자마자 트루디아는 활짝 웃으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힌셔는 마주 손을 흔들었다.
“저번의 기사 최종시험 때 한번 보지 않았소? 그리 먼 옛일은 아닌 듯한데.”
“그런가요? 전 그게 옛날 일 같은데. 시간이 엄청 빨리 가네요.”
시간의 선후와 길고 짧고의 감각이 자꾸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달지, 이 몸으로 살아본 시간이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인 건지. 힌셔는 트루디아가 말하지 않은 말을 들었다. 현재의 불멸자는 다른 이로부터 믿기지 않을 만큼 긴 세월을 살았던 기억을 물려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어쨌거나 또래의 세대에게 기대되는 본래의 수명도 다 살아보지 않은 젊은 사람이었다. 어제보다는 엷어진 성긴 눈구름에서 포슬포슬한 눈이 점점이 떨어지는 가운데, 트루디아는 한때나마 기사가 되기 위해 정식으로 훈련을 받으며 단련했던 이다운 경쾌하고 힘 있는 걸음으로 단번에 눈밭을 가로질러 그루터기를 올라왔다.
“그래서 말씀하신 애들은요?”
“아 싫다고오! 언니야가 하라고!”
그루터기 안쪽에서 새된 소리로 고함이 터지고, 나직하고 조금 쉰 목소리가 야단치듯 뒤따른다. 툭탁거리는 소리도 조금 난 것 같다. 힌셔는 엄지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트루디아는 반사적으로 엑 하고 질린 낯이 되었다가 조금은 달관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우리 애보다 말썽쟁이겠어요?”
잠투정으로 휘두른 한 방에 기사의 뼈가 금이 가게 만들었던 꼬마를 떠올리며 힌셔는 마주 헛헛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와 불멸자는 그루터기 안쪽으로 향했다.
불이 피워진 나무 아래에서 백발의 아이는 토라진 티를 내며 등을 돌려 앉아있었고 갈발 아이는 딱딱한 낯으로 다치지 않은 손에 쥔 모포를 백발 아이에게 망토처럼 둘러주려 애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긴 여행을 앞두고 하나뿐인 모포를 누가 두르느냐의 문제로 싸운 모양이었다. 힌셔는 까닭 없이 낯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인데 흔쾌히 수락해줘서 정말로 고맙소. 지금은 저렇게 다퉈도 의좋은 아이들이라오. 잘 타이르면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거요.”
“뭘요, 힌셔님이 아무 부탁이나 하시는 분이 아닌데 당연히 와야죠. 그리고 우리한테도 좋아요. 전부터 네프렌한테 친구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렇더라도 정처 없는 여행자의 삶인데 부담이 크진 않을지.”
백발 아이가 벌떡 일어나 어깨에 걸린 모포를 둘둘 뭉치더니 갈발 아이에게 집어던졌다. 갈발 아이가 드디어 인내심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백발 아이가 두 그루의 얽힌 나무 뒤편으로 도망쳐버리자 갈발 아이는 자신이 몸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당장 쫓아가서 꽤나 아프게 해줬을 것이며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아프게 만들어줄 거라는 요지로 으름장을 놓았다. 백발 아이는 혀를 날름 내미는 것으로 대답했다.
트루디아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싱긋 미소를 유지한 채 힌셔를 돌아보았다.
“근데 제가 애들을 도중에 안 버리고 잘 돌봐줄 거라고 믿으시는 근거가 뭔가요? 전 집도 절도 없고 사실 애 키워본 적도 없는걸요. 그건 좀 궁금하네요.”
“그대는 왜 수락했소? 그것부터 들어봅시다.”
“엥. 에이. 음. 있잖아요, 제가 저 큰애만 한 나이였을 때. 그때도 오늘처럼 눈 오는 날이었어요. 집 없고 어디 취직하기엔 너무 어린 전쟁고아가 먹고 살 방법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터는 것 정도잖아요? 그때 만난 어떤 사람이 이따금 생각나서요.”
“어떤 사람이었소?”
“기사였죠. 힌셔님처럼 금발에 붉은 반망토를 걸친 사람이었어요. 나이도 별로 차이 안 나 보였는데 저를 대뜸 꼬마라고 불러서 그건 좀 그랬지만, 아무튼 엄청 강하고 대단히 올곧은 사람인 건 그냥 알겠더라고요. 그 사람이 저한테 해준 말이 있었거든요.”
트루디아는 굳이 힌셔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연령대와 외모를 지닌 기사가 누가 있었는지 헤아려보던 힌셔는 트루디아의 뜻을 존중해 거기서 추측을 멈췄다. 그 기사가 트루디아에게 무슨 말을 해줬는지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 기사는 어린 트루디아에게 선을 권장하고 악을 제지하며 약자를 보호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줬을 것이다. 힌셔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대답하리다. 그대가 어리고 무력했을 때 도와준 이를 지금도 잊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트루디아는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냥, 제가 도울 수 있으니까 도우려고요.”
말을 마치자마자 트루디아는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마주쳐 아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트루디아가 능숙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걸 보면서 힌셔는 다시금 간밤에 했던 생각들을 되새겼다.
트루디아는 떠돌이인 고아가 처하게 되는 상황을 이해했고, 본인은 의사나 마법사가 아니긴 했지만 기억을 넘겨준 이로부터 의술과 마법의 지식을 이어받았기에 아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불멸자이기에 양측이 합의하거나 트루디아 쪽에서 포기하지 않는 한 아이들이 보호자를 잃을 일도 없었다. 존재가 널리 알려진 자는 아니며 그 어느 공권력과도 닿아있지 않기에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아이들이 그대를 잘 따르니 다행이오.”
어쨌거나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힌셔는 그 사실을 납득하고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이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힌셔를 바라보면서 트루디아는 여전히 웃고는 있지만 미묘하게 흐려진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힌셔님도 역시 힌셔님이세요. 아이들이 원하는 걸 꺾어버리지 않으면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신 거요.”
“나 혼자 생각해낸 것이 아니오. 도움을 좀 받았지.”
“그 인간이요? 헤에... 말 나와서 말인데 새까만 닭은 어디서 또 무슨 짓 하고 있대요?”
“그자는 빌린 걸 돌려주러 갔소.”
닭은 동이 트자마자 의사의 가방을 끼고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 트루디아가 혹시라도 네프렌과 함께 올지도 모르기에 기다렸다가 얼굴은 보고 갔을 법한 자가 그런 핑계를 대며 그냥 자리를 비운 것은 아무래도 아이들 때문에 촉발된 닭 나름의 어떤 상념 때문인 듯했다. 힌셔는 그게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나면 닭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힌셔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그나저나 기사님들이 지금도 힌셔님한텐 임무를 안 주나 보네요.”
무슨 이유에선지 또다시 말다툼이 붙을 듯 살벌하게 쏘아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숙련된 손길로 가져온 간식을 물려주면서 트루디아가 지나가는 말처럼 화제를 바꿨다. 힌셔는 이 젊은이도 ‘통찰의 눈’이라는 이능을 지닌 자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마침 닭도 없겠다, 힌셔는 팔짱을 끼고 나무에 편안히 기대서며 그 어떤 기사의 앞에서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 고민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내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그건 아닌 모양이라서.”
“속상하시겠어요. 그냥 명예와 정의만을 따르는 일개 기사로 여겨지고 싶은 분인데. 그치만 힌셔님은 영웅인걸요.”
힌셔는 녹은 눈을 묻혀온 발자국으로 지저분한 돌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영웅이라는 상징성이 지니는 무게 때문이든 임무 중에 흔히 발생하는 돌발상황으로 영웅의 이름에 흠이 날지도 모를 일을 완벽하게 차단하려는 것이든, 수도에서는 힌셔에게 기사의 임무를 주지 않은 채 그저 성벽 안에 머물면서 필요하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 정도만 요구했다. 500년 만에 수도에 복귀한 후로 힌셔는 기사로서 기사다운 일을 하고 있다는 효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 밖에 나왔다가 곤경에 처한 아이들을 마주친 순간 힌셔는 어떻게든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이용해 직접 보호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원치 않는 걸 알면서도 굳이 수도에 데려가고 싶었고 그것을 차선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닭은 힌셔의 가슴속에서 난폭하게 날뛰는 그 조바심과 좌절감을 꿰뚫어 본 것일지도 몰랐다. 바로 그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대련을 핑계로 이곳까지 데리고 나온 거라는 걸 이미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내가 요령이 없고 혼자서는 길을 찾지 못하고 싸우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으며 믿음을 줘야 할 어린아이들이 도리어 두려워하게 만든 자라는 걸, 영웅 같은 것이 아니라 고작 완전해지고자 애쓰는 한 명의 기사에 불과하다는 걸, 너만은 처음부터 똑바로 보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힌셔는 자신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닭이 틈만 나면 반은 놀리고 반은 비아냥거리는 조로 영웅이라 부르곤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기사사냥꾼이라는 소문이 떠나지 않는 저 치열하고 엄혹한 기사는 힌셔에게 영웅의 역할을 놓을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쭉 충고이자 경고를 하고 있었다. 고마운 노릇이지. 힌셔는, 그래도 닭이 그것으로 농담을 하려 들면 한 대 걷어차주고 싶어지는 마음 역시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냥 그런 식이었다.
힌셔가 생각에 잠긴 사이 트루디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갈 채비를 하며 분주했다. 잠깐이지만 아이들을 잊은 게 부끄러웠던 힌셔는 트루디아가 가져온 두터운 외투를 아이들의 누더기 위에 입히고 단단히 여며주며 조그만 얼굴들을 머릿속에 새겼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크고 나서 다시 만난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힌셔는 자신에게 그 날을 볼 수 있을 만큼의 수명이 허락되고 또 그 세월 내내 한 점 부끄럼 없이 명예롭게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가볼게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또 뵈면 좋겠어요.”
“종종 소식 전해주시오.”
트루디아는 쇠약해져서 아직 먼 길을 걷는 건 무리인 큰 아이를 등에 업고 작은 아이는 손을 잡은 모습으로 산책이라도 가듯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거뭇한 나무바위들의 폐허를 지나 저 멀리 지평선 가득 들어선 숲으로 사라져가는 이들의 등을 바라보면서 힌셔는 트루디아도, 아이들도 한번 돌아보지 않는 것이 조금은 섭섭했다. 하지만 이것이 불멸자가 건네는 인사라는 것도 이해했다. 조만간 다시 볼 사람과는 거창하게 작별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눈이 곧 그칠 것처럼 약해질 무렵 닭이 돌아왔다.
“잘 보냈나 보구만.”
힌셔는 명상에 잠겨 정좌하고 있던 자리에서 두 눈만 살짝 치떴다. 힌셔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얽힌 나무들의 가지가 살짝 떨리며 얼음이 되기 직전인 눈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닭은 기사명에 어울리게도 둥지에 들어간 닭처럼 나무 위에 쭈그려 앉았다.
“어떠냐. 좀 더 싸워볼 테냐?”
“오늘은 딱히.”
“동감이다.”
힌셔가 자리를 털고 엉거주춤 일어선 그 순간 머리 위로 아찔하리만치 차가운 눈덩이가 우악스럽게 쏟아졌다.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 꼴로 선 힌셔는 머리 위에서 낄낄 웃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보려 했다. 그리고는 하마턱을 들었다. 얽힌 가지의 틈 사이로 츠츳 소리를 내며 빠르게 분출된 마력이 가지는 건드리지 않은 채 그 위에 쌓인 눈덩이만을 폭발시킨다. 졸지에 소규모의 거꾸로 된 눈사태를 맞은 닭이 벌렁 나자빠지며 나무에서 쿵 떨어진다.
얼간이처럼 대자로 뻗은 닭을 내려다보면서 힌셔는 태연히 말을 걸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아이들과 작별조차 못 하지 않았느냐.”
“아니이~ 영웅님이 이렇게 유치해도 돼?”
“아무려면 어떤가? 이것도 나다.”
힌셔의 대답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시원스러웠다. 잠시 힌셔를 올려다보던 닭은 곧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일어나 투구와 온몸에 들러붙은 눈을 털었다.
“그보다 그거 그렇게 쓰는 거 재밌어 보이네. 올라서봐.”
“올라서? 이렇게 말이냐?”
“그래, 두 발로. 아까처럼 해봐. 공격용 말고 바람 빼는 것처럼, 그대로 위로. 어어, 앞으로 앞으로.”
하마턱을 거꾸로 세워든 채 망치머리에 해당하는 두 개의 커다란 상자 같은 장치 위에 한 발씩 올리고 선 힌셔는 닭이 지시하는 대로 작동시켰다가 불안정하게 공중으로 솟구쳤다. 빙그르 돌며 흔들거리던 힌셔는 곧 감을 잡고 안정적으로 하마턱을 타며 공중에 둥실 뜨게 되었다. 끊임없이 츠츳 소리를 내면서 세계 어느 곳에나 편재하는 마력을 흡수하고 응집하여 방출하는 기계장치의 정교한 움직임이 발바닥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온몸으로 느껴진다. 발밑에는 닭과 두 그루의 얽힌 나무와 둥그런 그루터기의 잔해가 있다. 스승의 나무가 뿌리와 가지를 뻗었고 나중에는 불에 타며 무너져내려 땅속에 반쯤 파묻힌 흔적들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한 눈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에 그림자가 지면서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돌이 된 옛 나무들의 터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나무의 느린 걸음으로 좁혀오는 지금의 숲이 보인다. 힌셔는 정전기를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살짝 떤다.
“훨씬 낫지?”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닭이 까닭 없이 얄미워진 힌셔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하마턱을 몰아가더니 그루터기의 위쪽 끄트머리에서 급격히 방향을 틀며 쓰러지듯이 몸을 눕혔다. 하마턱의 꼭지에서 불꽃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한 형태로 분출되던 푸르스름한 마력이 날카롭게 반원을 그리며 그루터기의 벽 위쪽에 쌓인 눈을 날려버린다. 아래쪽에 있던 닭은 다시 한번 눈을 뒤집어쓴다.
투구의 정수리부터 장화까지 온몸이 눈덩이가 된 닭은 잠시 할 말을 찾는 듯 우두커니 서 있더니 이윽고 한 손으로 얼음결정과 물방울이 맺힌 면갑을 쓸어내린다.
“그만하지? 내가 작정하면 왕눈싸움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왕눈싸움은 또 뭐냐?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인가?”
“노땅 티 내기는. 근데 그거 내가 방금 만든 말이야.”
“너 거기 딱 있어라.”
“싫은데.”
잠깐의 정적 후 힌셔는 닭의 머리 위로 맹금처럼 하강했다. 닭은 어느 틈에 집어던진 론누를 재빨리 잡아타고 맹금을 피해 도망치는 작은 새처럼 솟구쳤다. 힌셔가 뒤쫓는다. 론누와 하마턱이 수직으로 치솟고, 중력을 따라 뚝 떨어지고, 빙글빙글 꼬리를 쫓고, 경주하듯이 질주한다. 닭이 도발과 농담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소리친다. 하마턱에 매달려 당장이라도 전장에 뛰어내릴 것 같은 모습으로 날던 때와는 너무도 다른 자유로운 비행을 느끼면서 힌셔는 크게 소리 내어 야유하고, 받아치고, 웃는다. 그 뒤로 눈송이를 나풀거리며 푸른 빛의 궤적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추격을 피해 덩이진 눈구름 속으로 뛰어든 닭이 구름의 반대편으로 뚫고 나오자마자 론누를 멈췄다. 구름을 모조리 흩어버리며 뒤쫓아온 힌셔는 닭과 충돌할 뻔했다. 닭은 두 발로 서 있던 론누 위에서 머리를 짚으며 엉성하게 몸을 낮추더니 아예 바닥에 앉는 것처럼 털썩 걸터앉았다.
“아 잠깐만. 나 멀미. 아오.”
이겼다. 힌셔는 히죽 웃음을 꽈악 억누른 근엄한 낯으로 론누 옆의 공중에 하마턱을 세웠다. 닭이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머리-투구-를 감싸 쥐고 있는 동안 힌셔는 발밑의 풍광을 느긋이 구경했다. 잠시 후 닭도 투구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응시했다.
산소가 슬슬 옅어지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지평선이 둥글게 보이며 머리 위로는 새하얀 해가 시린 빛을 내리쪼이는 창공에서 힌셔는 닭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소리 내어 묻지 않았음에도 질문을 이미 들은 것처럼 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가네. 빠른걸.”
힌셔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최대한 눈을 가늘게 떴지만 닭이 가리키는 방향의 지표면에서 별다른 것을 볼 수 없었다. 저런 갑갑한 투구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닭은 남달리 눈이 좋은 기사였고, 저 멀리 설원 어딘가에서 바위인지 나무인지 물이 고인 진창인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점 중의 하나가 트루디아와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힌셔는 자신의 시력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아이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어때 보이느냐?”
“너무 멀어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흠... 나빠 보이진 않네. 꼭 붙어있어.”
“하도 절절해서 애틋한 사이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한시도 싸움을 멈추지 않더구나.”
“다르니까.”
“응? 뭔가 말했느냐?”
“저 애들은 우리가...”
닭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건지는 몰라도 닭이 말한 ‘우리’에 힌셔는 포함되지 않았다. 힌셔는 알았다. 닭은 바위틈에서 아픈 아이를 처음 만난 때부터 어딘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까.
닭이 힌셔의 스승에 대해 묻지 않듯이 힌셔는 닭의 목걸이에 대해 묻지 않는다.
“...뭐, 형제자매란 게 애틋하다가도 그렇게 싸워댄다잖아.”
닭은 어디서 주워들은 세상의 지혜를 전하는 양 점잔을 빼며 말을 돌렸다. 힌셔는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통찰의 눈’의 실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투구를 바라본다.
“집에 가자.”
그 말에 닭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불분명한 어조로 음, 하고 중얼거렸다. 잠시 후 두 기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하마턱과 론누의 방향을 돌려 수도로 향했다. 떠날 때처럼 돌아갈 때도 닭이 새까만 망토와 붉은 투구깃을 뽐내며 길을 선도하고, 힌셔는 그 뒤를 쫓았다. 싸움과 대화가 칼 같이 나뉘지 않았던 지난 며칠이 벌써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 같았다.
자매간의 싸움이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힌셔는 생각한다.
그 후.
수도에 복귀한 후로 성벽을 벗어난 일이 거의 없었던 영웅이 그 '기사사냥꾼'과 단둘이 성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때부터 수도의 사람들은 온갖 추측과 억측을 일삼으며 입을 쉬지 않았다. 며칠 후 돌아온 영웅과 와론이 겉보기에는 둘 다 멀쩡했고 심지어 둘이서 수도를 빠져나간 일조차 없었던 것처럼 멀뚱멀뚱 거리를 두며 각자의 일로 돌아간 후로도 그랬다. 호사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그 새까만 닭이 또다시 뭔가 영문 모를 일을 벌였고 그걸 알게 된 영웅이 일부러 날을 잡아 데리고 나가 교육을 한 것은 아닌가, 그럴 가치가 없는 새까만 닭도 포기하지 않는다니 역시 영웅은 다르다 같은 이야기였다.
소문은 소문일 뿐. 지우스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 와론이 있는 곳으로 영웅을 안내하는 내내 지우스는 영웅의 전신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 와론도 당연히 눈치챘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격분한 영웅이 수도 한복판에서 누군가에게 하마턱을 휘두르기 전에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직접 상대하려 한 것 같았으니까. 적어도 지우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지금 황궁 복도의 꼭 닫힌 창문 앞에 선 지우스는 지저분한 눈이 쌓인 뜨락에서 기사들과 의원들이 말싸움을 벌이며 제각기 떠드는 온갖 소리들을 듣고도 침착한 영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언질을 받았는지 달잔이 거의 구보에 가까운 속도로 등장해 영웅과 무리의 사이에 끼어드는 것까지 본 후 지우스는 발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열어놓은 기억이 없음에도 활짝 열린 창문에 와론이 걸터앉아있었다.
“그래서, 뭔데? 네 볼일이란 거.”
지우스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방금 닫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유들유들하게 인사말부터 건네며 상대를 살피는 게 아니라 바로 본론을 찌르고 들어가다니, 평소의 와론이 아니었다. 하지만 심심한 것처럼 한쪽 다리를 흔들며 창틀에 앉아있는 와론을 찬찬히 살펴본 지우스는 와론이 딱히 부정적인 기분에 싸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때의 대화의 연장선.
“기분은 좀 풀렸나 보군.”
“뭔 소리야?”
와론은 말에 그치지 않고 투구를 슬쩍 갸웃했다. 하지만 지우스는 와론이 딴청을 피우는 것이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지우스는 알고 있었다. 그날 어떤 이유로 자기만의 우울한 생각에 침잠한 와론이 수도 한복판에서 누군가에게 론누를 내지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처박혀 있었다는 것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영웅으로 불리는 기사와 기사사냥꾼이라는 소문이 있는 기사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별다른 상처 없이 평소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고 지우스는 만족했다.
“뭐가 됐든 정리가 됐다면 됐어. 나랑 일 하나 해.”
“싫어.”
“들어는 보고 거절해.”
“네가 몇 시간이고 날 찾아다녔다면서. 내가 꼭 필요한가 본데, 뭔진 몰라도 알뜰살뜰하게 굴려먹으려 들 속셈인 거잖아.”
“기사의 미래에 관한 일이라면?”
“관심 없-”
“나는 특임대를 하나 더 만들고 내가 직접 이끌 생각이다. 먼저 동대륙으로 출발한 특임대가 특수1기라면, 우리가 하는 건 특수2기가 되겠지.”
“뭘 자연스럽게 ‘우리’ 같은 소릴 해? 나 한다고 안 했-”
“너에게도 그럴 가치가 있는 ‘거래’라면 어때?”
달잔까지 포함하면 지우스의 특수2기에 대한 계획을 아는 자는 지금부터 세 명이 된다. 지우스는 이 계획에 와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영리한 와론이라면 수상쩍다고 생각해 바로 거절하리란 것도 예상했으며, 따라서 단계별로 촘촘하게 여러 개의 미끼를 준비했다. 우선은 진심을 슬쩍 내보이는 것부터.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임무에 신입이나 다름없는 젊은 기사들이 자원했지. 자기 손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들이 서투르기에 겪은 실수와 실패를 비웃는 놈들은 기사질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미래는 이미 글러먹은 놈들보다는 아직 자라나는 쪽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야.”
하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자들도 기사다. 지우스는 지금의 기사들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들 영웅을 좋아하지만 영웅은 누구나 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영웅인 것이다. 지우스는 개개인을 놓고 보면 완전한 영웅이 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단점과 한계 투성이의 평범한 기사라도 여럿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면 영웅 이상의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한 명의 영웅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해낼 방법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특수2기다. 어때. 아이들을 가르쳐서 지금 세대보다는 훨씬 나은 기사로 키워보는 거.”
하지만 지금의 기사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의 기사들은 기사를 모욕하느냐며 그저 반발할 것이다. 기사는 기사이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미신 같은 믿음이니까.
와론은 그런 보통의 기사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와론을 설득하기 위해서든, 앞으로 기사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결과부터 제시해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든, 진짜 목적을 숨기는 당의정 전술을 쓰는 수밖에 없다. 우선 비교적 협력이 가능하며 믿을 수 있는 기사들을 일부 선별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거라 믿게 만들고, 다시 아이들을 매개로 기사들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여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 동시에 아이들도 훌륭히 성장시킨다면. 그렇게 저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인 평범한 기사들과 아직은 어떻게 자랄지 알 수 없는 묘목에 불과할 아이들이 협력해서 지난 500년 동안 단 한 명밖에 없었던 영웅 못지않게 기사다운 일들을 이뤄내는 것을 다른 기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심지어 그 중심에 기사를 매우 싫어한다고 알려져있지만 진실은 조금 복잡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적 기사가 있다면.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투구가 지우스의 머릿속에서 바쁘게 오가는 생각들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한쪽으로 끼릭 쇳소리를 내며 기울었다.
“이게 대놓고 날 구워삶으려 드네. 더더욱 수상한걸?”
넌 내가 믿을 수 없어도 믿을 수밖에 없는 기사니까. 지우스는 늘 목구멍 밑에서 맴도는 그 말을 오늘도 조심스럽게 삼킨다. 지우스는 영웅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 와론을 택한 것을 믿고,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직접 보고 겪으면서 조금씩 퍼즐을 주워 모아 짜맞춰온 ‘와론’을 믿는다.
그리고 지우스가 알고 있는 와론은 지우스의 입에서 미래에 대한 말이 나올 때면 농담을 하거나 툴툴거리긴 해도 싫어하진 않는 기사였다.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지만~ 네 진짜 꿍꿍이가 뭔지는 궁금한걸. 좀 더 해보라고. 거래 얘기.”
기사 담청색 기린 지우스는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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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닭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소재를 리퀘 주제로 주신 악개빠님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