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기린 쫓는 닭" 입니다.

 *이 연성의 줄거리가 잡힌 것은 미리보기분으로 126화가 공개된 후인 7월 11일경입니다.
  따라서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2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단 마의 126화가 풀린 후로 2달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그간 잔불 연재분도 슬쩍 반영됩니다.;;
  그리고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마법이나 마수에 대한 설정은 원작자인 환댕 님이 작품을 통해 공개하신 것에 기반하되
  공백이 있는 부분을 제 맘대로 망상해서 채워넣은 것으로,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가독성 차원에서 화면을 125% 정도로 확대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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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첫닭이 우는 소리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가 울기 시작하면 두 번째, 세 번째 녀석도 합세해 주고받으면서 결국에는 마을 전체의 닭이 번갈아 가며 울어대게 된다. 그 우렁찬 돌림노래는 아무리 기사라도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와론은 베고 누운 베개로 두 귀를 틀어막으며 신음했다. 아 미친 닭 새끼 잡히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린다-

 

 그렇다고 마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닭의 목을 비틀어버린다 하여 새벽이 오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새벽이 되면 닭이 아니라도 세상의 새들은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하며,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맞춰 규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해가 없는 동안에는 자제했던 생활의 소음을 거침없이 일으키는 법이다. 잠시 후 와론은 억지로 잠에서 깬 사람 특유의 반쯤 넋이 나간 낯으로 침대에서 몸을 굴려 내려왔다. 진짜 오랜만에 침대에서 잔 건데 너무하는 것 아닌가 물론 닭들도 숲속의 새들도 마을 사람들도 와론의 기분 같은 걸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세상은 원래 그런 법이었다.

 

 여관이 없는 조그만 마을에서 와론에게 방을 빌려준 집주인은 매우 소심하게 두어 번 문을 두드리고 도망쳤다. 사람의 기척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와론은 걸어 잠갔던 문을 살짝 열어 그 앞에 놓인 물이 든 나무통과 반듯하게 개켜진 옷 꾸러미를 잡아당겼다. 촛불을 켠 후 세수를 하고 간단히 몸을 씻다가 와론은 문득 조그만 방의 한구석에 거울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반장갑 끝에 드러난 손가락을 제외하면 언제나 몸의 모든 부분을 투구와 망토로 감추고 다니는 와론이 아무 가림막 없이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와론은 낯설고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까지 느끼면서 낯을 흐리다가 기왕 거울이 있으니 상처를 살펴보기로 했다.

 

 몸에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시간대에 새겨진 온갖 흉터와 생겨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거의 아문 상처가 가득했다. 그중에서 와론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상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검붉은 멍 같은 상흔이었다. 이 상처를 거울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도 배에 500년 전에는 없었던 꽤나 큼직한 상처가 생겼을 테지만 말이야. 볼 때마다 나 생각해, 선배.

 

 힌셔의 하마턱은 일견 거대한 망치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망치를 칼자루 삼아 마력을 칼날로 구현하는 장대한 검이었다. 만일 힌셔가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고 일어서서 마지막 일격을 날렸을 때 마력을 칼날처럼 응축하여 날카롭게 집중시켰더라면 와론은 그대로 베여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힌셔는 와론을 죽이지 않았다. 힘이 다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직전 와론이 힌셔를 죽이겠다고 선언해놓고 정통으로 숨을 끊어놓을 지점을 아주 조금 비껴간 위치에 론누를 꽂아 넣었기 때문인지, 그 밖의 다른 이유라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그때는 나도 당신도 서로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라 치고,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우리 대화는 안 끝났잖아? 그때쯤이면 지나는 자리마다 뼈를 거의 상하게 한 이 거대한 상처도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흉터는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와론이 또 한번 생존한 증거가 될 뿐이다. 와론은 가볍게 코웃음 치고는 새 마법회로 뭉치와 붕대를 꺼내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집주인 내외가 손을 써준 덕에 밤새 세탁을 마치고 잘 말린 옷을 입은 후 투구를 쓴 와론은 방을 나왔다. 아침상을 준비하던 내외는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서 악명 높은 투구를 쓴 기사의 새까만 그림자가 문간에 선 것을 보고 흠칫했다. 와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얼마 안 되는 짐과 함께 집을 떠났다. 방을 빌린 값이라면 집주인 내외로부터 빌렸던 옷 위에 넉넉하게 남겨뒀으니 적어도 그거라면 이들이 원한까지 품진 않으리라.

 

시골에서 새벽에 치르는 일상적인 일들로 부산스러운 길을 지나 지우스가 방을 빌린 집에 찾아가 보니 지우스는 한발 앞서 떠난 뒤였다. 지우스도 짐이랄 게 없었기에 잠시 방을 비운 것처럼 보였지만 집주인 내외는 젊은 기사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남기고 갔다며 와론에게 돈주머니를 돌려주려 했다. 와론은 다 듣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숲으로 향했다.

 

 흙과 바위를 다루는 마법에 재주를 지닌 준법사가 지진과 산사태로 무너진 건물과 끊어진 길을 대강 정리해둔 덕에 숲으로 나가는 길은 다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깔끔했다. 와론은 숲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간 끝에 주위에서 자신을 목격할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론누를 던졌다. 푸르스름한 밤의 끝자락에 묽은 분홍빛이 번지기 시작한 허공에서 론누가 빙그르 돌았다. 팔짱을 끼고 잠시 집중한 후, 와론은 방향을 정했다.

 

 마수에게 잡혀갈 뻔한 용병을 발견하고 준법사를 인질-안내역-로 붙잡았던 그 부근에서 와론은 지우스를 발견했다. 지우스는 와론이 생포한 용병을 묶어놓았던 그 나무 아래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밤새 숲을 산책하다가 잠시 쉬고 있었던 것처럼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와론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오리라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와론을 보고도 지우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며칠 동안 나무 꼭대기에 묶여 있었더군. 살아서 다행이야.”

 

 와론이 다가오자 지우스는 그 말을 아침인사처럼 건넸다. . 내가 지금 풀어주려던 참이었는데. 옷을 툭툭 털면서 일어난 지우스는 난데없이 나무에 묶여 있던 용병에 대해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와론의 짓이라는 건 알아냈겠지만, 적어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와론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신도 그 용병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임무 중인 기사가 아니라 집 근처에 산책을 나온 평범한 사람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숲에서는 머리 위를 오가는 새들의 소리와 이슬이 맺힌 풀잎을 사박사박 밟는 소리만이 들렸다.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와론이었다.

 

 “걔들은 어쩔 거냐?”

 

 두서도 없고 맥락도 없었지만 지우스는 곧바로 대꾸했다.

 

 “원래대로라면 체포해야겠지. 마을을 위험에 빠뜨리고 임무 중인 기사를 공격했으니.”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과 얘기해 봤는데 이쪽은 역시 광산 개발에 부정적이야. 시끄럽고 물도 오염되고, 외지인도 몰려오게 될 테니까.”
 “그리고?”

 “저들이 증언을 하면 마수가 그 희귀한 광물의 원천이라는 정보도 알려지게 되겠지. 나는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
 “마법사들을 고용한 그 투자자는? 그자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우리가 모른 척하면 돼. 어차피 마수들은 이제 그쪽에 없으니까 광맥인지 뭔지도 더는 안 나올 것 아냐. 아무도 자길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히 손을 떼려 하겠지. 놈을 치는 건 그 다음이다.”

 “걔들이 증인인데. 걔들 없이 어떻게 하려고?”

 “때가 됐을 때 다시 설득해서 데려오면 돼. 그리고 그 건은거북이님께 얘기해보고 나서 진행해도 늦지 않아. . 네가 맡고 싶어?”
 “딱히? 그런 건은 중앙 돌아가는 꼴을 잘 아는 치가 맡는 게 낫지. 거북이가 딱이잖아.”

 “그렇긴 해.”

 

 , 이번에는 웬일로 다 떠맡겠다고 나서지 않는군. 범죄조직과 손을 잡아가며 기사가 둘이나 사망할 정도로 일을 크게 벌였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 투자자는 무척이나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광산 문제는 애초에 지우스가 맡은 임무의 범위 밖이었고, 아직도 중견보다는 신입에 훨씬 가까운 기사 한 사람이 거기까지 책임을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와론은 지우스가 자신이 책임지려는 일의 범위에 스스로 선을 그은 것에 만족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범위를 아는 것은 한 사람의 기사로서나 사령탑으로서나 반드시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투구는 정면을 향한 채, 와론은 눈만 굴려 지우스를 곁눈질했다. 지우스가 사양하는 마을 주민에게 굳이 값을 치르고 구한 새 겉옷은 후드는 달려있지 않았지만 앞주머니는 달려있었다. 그 덕에 지우스는 평소처럼 앞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건방진 모습이었다. 지우스가 견습기사처럼 몸에 달라붙는 단출한 검은 목티만 걸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웃자란 소년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잘 단련되긴 했지만 평균보다는 조금 작은 체구와 여름의 잡초처럼 무성해서 정리가 되지 않는 풀빛 머리와 티없이 앳된 얼굴도 그런 느낌을 강조할 뿐었다. 하지만 낙낙한 겉옷을 구해 체구를 감추고 평소의 익숙한 몸가짐을 할 수 있게 되자 지우스에게서는 훨씬 청년다운 느낌이 났다. 다른 것보다도 자세의 문제겠지. 똑같이 구부정한 모습이라도 방어적인 것과 자신감이 있는 건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와론은 투구 밑에서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게다가 일 하나를 끝까지 책임지고 자기 뜻대로 완수하는 경험은 크거든. 그게 도중에 완전히 잘못될 뻔한 일을 어떻게든 수습해낸 거라면 말할 것도 없고. 와론이 지우스를 애송이로 취급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아 끝을 맞게 될 것 같았지만, 와론은 그런 재미를 일찍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녀석들에게는 알아서 여길 떠나 조용히 살라고 해뒀어. 또다시 범죄에 휘말리면 두 번째는 없다는 경고도 해뒀으니 네가 나설 것 없어. 우리는 바로 출발해도 돼. 두고 온 것 없지?”

 

 마치 와론이 자신을 곁눈으로 살피고 있던 걸 알았던 것처럼, 지우스는 샛노란 눈을 정면에 둔 채 무뚝뚝하게 통보했다. 와론의 의견을 듣지 않고 와론도 모르게 결정해 처리까지 마쳤지만 뭐가 문제 있냐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이것 봐. 애송이가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엔 어디까지 가겠어. 안 그래도 건방진 놈이 내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 들 걸. 와론은 지우스의 태도에는 코웃음 쳤지만 지우스의 결정에는 그러지 않았다.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결정이었다. 그래서 와론은 지우스 본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해 뜨려면 아직 멀었는데 좀 더 걷지. 급할 것 없기도 하고.”
 “산책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나라고 항상 뛰거나 날아다니는 건 아니란 거 알 때 됐잖아~ 그때 마수들이 위협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면 너는 을 쓸 작정이었나? 내가 없었다는 전제로.”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지우스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을 발동할 수 있는 두 손을 주머니 속에 제대로 숨길 수 있게 되자 속내를 숨기기 위해 두르는 불투명한 공기도 자연스럽게 함께 돌아온 모양이었다.

 

 “너는 내가 그 을 쓸지 말지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군.”

 “응 많아.”

 “흥미로우니까?”

 “그럼 그럼.”

 “너라면 눈치챘겠지. 나에게는 기사의 명예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어. 명예와 그 가치 중에서 택해야 한다면 나는 명예를 포기할 거다. 그렇게 된다면 기사사냥꾼은나를 죽일까?”

 

 명예롭지 못한 기사를 사냥하는 기사에 대한 "소문"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풍문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취급되어야만 했다. 기사는 존재 자체로 명예롭고 정의롭다는 믿음-미신-은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기사가 공포 속에서 마수처럼 사냥당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기사가 활보하는 풍경에도 안심할 수 있도록 기사의 온몸에 보란 듯이 얽어 놓은 사슬이었다. 하지만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최초의 목적은 잊혀지거나 변질되기 일쑤이며, 실재란 언제나 이상과 괴리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힌셔. 요즘 기사들 보고 놀라지 마.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내 뒤통수에 냅다 망치 꽂던 때처럼 싸움 걸고 다니지도 말고. 진짜로. 나 진심임. 그렇기에 단순히 생각이 부족해서 유치한 정도가 아니라 명예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여 처단되어야만 하는 기사가 실제로 존재하고 심지어 그 수가 수십명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람들이 갖게 되어 좋을 일은 없었다. 와론은 기사를 싫어했지만 그것은 바라지 않았다. 난 기사를 너무 미워하지 않으려고 정말 애쓰고 있다고. 그놈들이 나를 안 도와주는 거란 말이야.

 

 그렇지만 지우스는 처음부터 보통의 기사들이 안다면 명예롭지 못하다고 비난할 명예관을 지닌 기사였다. 오래전 본인이 주선한 실험대련 때부터 지우스의 부근에 그 기사사냥꾼이 계속 맴도는 것을 달잔이 은근히 불안해했던 걸 떠올리며 와론은 히죽 웃었다.

 

 “소문 속에서 상상된 기사사냥꾼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세상의 소문대로라면 내가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서 나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겠지.”

 “그럼 너는 어떻게 상상하냐?”

 “글쎄, 왜 사람들이 상상된 소문 같은 걸 두려워하는 건지 모르겠군.”

 

 대답을 피하는군. 본인도 단언할 수 없는 거야. 그 상황이 되지 않으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내가 정말로 명예나부랭이 때문에 너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소문 속에서 상상된 새까만 닭은 실제의 와론과 다르다. 와론이 지우스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우스가 와론이 그어놓고 고수하는 선의 안쪽을 바라보고 가늠하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와론은 불편했다. 싫진 않았다. 하지만 오해와 불신은 와론이 호흡하는 공기였고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본모습을 알아채고 똑바로 바라보는 기사가 나타나게 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와론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하마나 기린 너라 해도말이야.

 

 “그나저나 내가 신세 진 집의 주인이 간밤에 이상한 소문을 말해주더군. 500년 전의 기사인 그 검붉은 하마가 지금 수도에 돌아와있다고.”

 

 와론은 투구 밑에서 눈을 깜빡였다. 힌셔와 지우스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지우스의 입에서 힌셔가 언급된 것은 무슨 우연인가? 그러나 이런 궁벽한 오지의 마을에도 소식이 들어온 것 자체는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500년이 걸린 영웅의 복귀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소문이었다.

 

 “기사사냥꾼은 어떨지 몰라도 검붉은 하마한테는 안 걸리게 조심해라. 영웅님은 명예인지 나발인지에 무지 엄격하거든.”

 “설마 네가 서쪽 다리 이후 겪었다는 많은 일이 전설의 영웅과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글쎄 어떨까나~”

 

 와론은 입매를 비죽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와론을 죽이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으나 끝내는 완전히 무력화된 와론을 죽이지 않고 하마턱을 바닥에 끌면서 절뚝이며 떠나던 검붉은 뒷모습을 생각했다. 팅크. 그때 나는 힌셔가 먼저 건 싸움을 변명 한마디 없이 받아줄 게 아니라 그 인간에게 말이라도 걸어봐야 했던 것일까. 아무런 숙고 없이 폭력을 정당화할 뿐인 공허한 명예 따위보다 너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득은 해봐야 했던 걸까. 어쩌면, 와론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거나 설득했더라면 힌셔는 이해해줬을지도 모른다. 싸움은 흐지부지 끝나고 두 기사는 위험에 처한 팅크에게 제때에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힌셔라면 그 새까만 닭이 하는 말을 일단 진지하게 들어볼지도 모른다는 -납득까진 못 하겠지.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인간이니- 가능성은 힌셔가 다짜고짜 먼저 시작한 그 싸움이 한창이던 도중에야 발견되었고, 그럼에도 와론은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와론은 그런 희박한 운과 가능성 때문에 예외를 만들 순 없었다.

 

 예외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그는 더이상 기사들을 상대로 홀로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으므로. 더이상 기사사냥꾼이 될 수 없으므로.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너는 내가 하마님의 손에 죽게 내버려둘까?”

 

 지우스가 여상스럽게 건넨 말에 와론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는 이를 갈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 애송이 놈, 긴장해라. 그따위로 계속 기어오르다가 언젠가 하마 이전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글쎄, 어떨까나.”

 

 지우스가 입매만으로 씩 웃었다. 와론이 이마-투구-를 짚지 않은 것은 순전히 지우스가 보고 싶어 할 반응은 보여주지 않겠다는 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우스의 질문은 힌셔가 돌아온 지금 와론이 반드시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힌셔와 또다시 생사를 걸고 싸워야만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싸움에 걸리는 목숨이 또다시- 이번에는, 네 것이라면와론은 차라리 힌셔가 다른 멍청한 기사들처럼 자신을 무작정 싫어하고 미워했으면 싶어졌다. 그랬더라면 자신도 힌셔를 쉽게 미워할 수 있을 테니까. 팅크. 난 이제 네 생각은 안 할 거다. 살아있는 놈 건사하는 것도 벅차거든. 와론은 팅크에 대한 애도를 끝내기로 했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본 와론은 어디에도 얼굴을 숨기고 싶은 것처럼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어린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지우스와 함께 지하를 벗어난 때부터 팅크의 환영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흠칫 고개를 돌린 와론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지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완전히 숨기는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와론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별 것 아냐.”

 

 와론은 다시 정면으로 투구의 방향을 돌렸다. 그러면서 다시는 팅크의 모습이 자신의 눈에 달라붙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다고 정말로 가버린 거냐? 섭섭하긴.

 

 “그건 그렇고, 하마님에 대한 소식이 사실이라면 수도는 지금 몹시어수선하겠군.”

 

 지우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와론이 이 임무를 위해 출발하기 전부터 수도는 시끄러워져 있었다. 니젤은 끔찍한 곳이다. 이전에도 물밑에서 온갖 더러운 짓과 멍청한 일이 벌어졌지만 500년 묵은 전설 속에나 얌전히 묻혀계셔야 할 영웅이 피와 살을 지니고 현실로 돌아오는 대형 변수가 터졌으니 더는 물밑에 숨겨놓고 문제도 갈등도 없는 척 할 수 없게 되겠지. 기사는 본격적으로 사방에서 견제당할 것이며 내부적으로도 분열될 것이다. 파국이 언제, 어떤 식으로 올지는 모른다. 힌셔와의 결투가 끝난 후 상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수도로 돌아가는 내내 와론은 그것에 대해 생각했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와론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답을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그런 애송이 같은 꼴로 돌아가면 곤란해.”

 “내 꼴이 뭐가 어때서.”

 

 다음 순간 지우스는 와론의 손에 뒤통수를 덥석 잡힌 채 강제로 인사라도 하듯이 머리를 눌렸다. 당황했는지 지우스가 반사적으로 두 손을 꺼내 와론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와론은 쉽게 손아귀를 풀지 않았다. 이 조그만 잡초뭉치 같은 머리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니. 와론은 내심 한숨을 지으면서 거칠게 쓰다듬는 것처럼 지우스의 머리 앞쪽으로 손바닥을 쓸어내렸다.

 

 “훨씬 낫네.”

 

 울컥 화를 낼 것처럼 고개를 쳐든 지우스는 와론의 팔을 떼어내려고 들었덨 두 손으로 엉망이 되었을 머리를 만지다 깜짝 놀랐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지우스는 다른 손으로 깨끗이 세탁되고 수선도 마친 모자를 벗어든 채 내려다보았다.

 

 “이거 네가 계속 갖고 있었어?”

 

 나뭇잎 사이로 비쳐들기 시작한 금적색의 아침 햇살이 지우스가 멈춰선 위치에도 닿았다. 그 빛 한점이 떨어져 부드럽게 물든 지우스의 얼굴을 본 와론은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나 조금은 후회했다. 지우스의 금색 눈동자는 건방지고도 대담한 짓을 할 때는 색이 짙어지는지 샛노랗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와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조용한 불빛이 너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었다. 마치 해가 뜨고 질 때 놀이 지는 빛깔처럼. 지금처럼, 말이지. 와론은 그 빛깔을 좋아했지만 결코 지우스가 알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넌 그렇잖아도 동안인데 머리꼴 때문에 더 어려 보인다. 거북이놈처럼 수염을 기르기엔 한참 이르니 모자라도 써야지.”

 “고마워.”

 “시끄럽고. 가서 얕보이지나 마라. 기사가 둘이나 죽었다. 네가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다닐 일이 아주 많아.”

 

 와론은 한 손을 휘휘 저으며 성큼성큼 앞서갔다. 뒤통수-투구-를 바라보는 지우스의 시선이 느껴진다. 잠시 후 모자를 다시 쓴 지우스가 발소리를 내며 따라와 와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내가 이 얻을 것 없고 피곤하기만 한 지원임무를 왜 수락했는지 알아? 나는 네가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고 싶다. 말뿐인 명예 따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좀 더 고민하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는 네가 실현하는 미래는 어떤 것일지 보고 싶다. 네가 기사인 한 나는 너를 잃을 수 없어. 와론은 예고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왜 또!”

 

 그 뒤를 지우스가 허둥지둥 뒤쫓아 달렸다. 나무 사이에 키 작은 수목이 너무 많고 빽빽하기까지 한 이 숲에서는 발을 걸리지 않고 달리기가 쉽지 않았다. 와론은 가까운 거목 위로 뛰어올랐다.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순식간에 수 킬로미터를 달려나가면서 흘끔 돌아본 와론은 뒤처진 지우스가 이를 악문 채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잘 따라오네. 그래도 네가 다리 다쳤던 거 감안해서 천천히 달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진 말고. 와론은 지금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며 오늘 안에 이 숲을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하늘 높이 론누를 집어던졌다.

 

 허공으로 화살처럼 쏘아져 올라간 론누는 밤이 물러가고 아침놀이 번지면서 금빛과 담청빛이 뒤섞여가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아직 새까만 어둠의 여운이 남은 서쪽을 멀리 내다보았다. 저 멀리, 둥그스름하게 휘어지는 지평선의 끝자락에서 숲이 끝나고 황야가 시작되는 경계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와론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황야에 부는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어디로든 어느 때든 갈 수 있었다. 자유로운 바람처럼 세상을 멋대로 주유하다가도 문득, 자신이 지켜야 할 자가 부르는 순간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와론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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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오늘 저녁 업뎃될 135화에서 기린닭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공식 장면이 터지면 저는 공개처형을 당하겠지요. 그치만 뭐 어떻습니까? 이건 팬픽이고 동인질이며 적폐왜곡날조망상입니다? 🤪🤪🤪

리퀘로 재밌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이상한 놈 만들뿐이다~!!- 소재 주신 문수님과 끝까지 긴 글 재밌게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m(_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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