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4일 개시 ~ 10월 29일 완료.
1.
앞으로 한 100년은 어떤 이도 찾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산 울창한 숲속에 론누 한 자루 들고 통나무를 찍어내 한칸짜리 집을 짓고는 몇주, 몇달이고 사람의 말을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사는 회백발 여자. 그리고 그로부터 1년쯤 지날 무렵 기어코 그 우울한 은둔자를 찾아낸 풀색머리 남자
숲속에서 사냥하던 도중 실수로 불청객을 죽일 뻔하곤 1mm 앞에서 간신히 론누를 콱 움켜쥐어 멈춘 와론이 얼굴을 확인하고서도 아무 말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우스는 지우스대로 자신을 깔고 앉아 제압한 회백발 여자의 처음 보는 낯을 올려다보면서 입술을 살짝 떨 뿐 아무 말도 못 꺼내는.
머릿속에서는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겨있어 언어를 잃은 적이 없지만 입과 목청을 움직여 말소리를 내본 게 하도 오랜만이라 말을 할라치면 동시에 진행하던 몇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뒤섞인 채 튀어나가고, 그래서 몇 단어 뱉다가 머쓱하게 입을 도로 닫아버리는 와론.
와론에게 시간이 필요한 걸 이해하기도 하고 굳이 세상을 등진 사람을 찾아와 방해하는 자신을 환대해줄 거란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았기에 와론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와론이 눈짓손짓으로 허락하기 전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우스.
해가 저물어가고 눈발이 날릴 듯 축축하고 시린 바람을 느끼면서, 여전히 견습 수준으로 약한지 이 정도 추위에 코가 벌게진 지우스를 작지만 아늑한 한칸짜리 오두막에 밀어넣고 숲속으로 저벅저벅 사라져버리는 와론. 작은 화덕 겸 난로에 불을 피워놓고 와론이 보낸 은둔자의 삶을 그려보는 지우스.
해가 지고 얼마 안 가 급격히 기압과 기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지더니 곧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함. 조그맣게 끼워놓은 유리창에 낀 성에가 살얼음으로 바뀌고 난로를 떼는데도 집안에서 허연 입김이 남. 왠지 오늘밤은 와론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지만,
열심히 불을 떼며 집안의 온기를 유지하려 애쓰는 지우스. 자신이 추워서이기도 하지만, 와론이 손수 지은 듯한 이 집이 눈 속에서 외롭게 고립된 채 얼어붙는 광경 자체가 몸서리쳐지게 싫었음. 그것이 기사의 몰락을 막기 위해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애썼지만, 세상은 고마워하지 않고
기억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았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듯이 조용히 사라진 와론의 지금 모습처럼 느껴져서였음. 그게 정말로 당연한 거라면, 정말로 "와론"의 목적과 역할이 거기서 완수된 거라면, 왜 자신과 마주쳤을 때 회백발 여자는 우울한 눈을 하고 있었을까.
묵직한 털옷의 텅 빈 채 축 늘어진 소매 한쪽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면서 지우스는 점점 초조해짐. 오두막을 둘러싼 나무와 돌들이 바람결에 온갖 곤두서는 소리를 내고 순식간에 쌓인 눈이 지붕을 짓누르는지 서까래 위쪽에서 음산한 소리와 녹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탓도 있을 것임.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저 밖의 어둠 속 어딘가에 와론이 있다는 것임. 지우스는 론누를 들고 나간 와론이 동사하거나 낭떠러지에서 헛딛고 추락하거나 마수한테 잡아먹히거나 할 걱정은 하지 않았음. 그냥, 자신을 마주하느니 저 거친 산에서 혼자 있겠다는 듯한 묵묵함이 천길 절벽 같아서.
네가 불편해하고 어쩌면 원망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나는 끝내 너를 찾아냈으며, 너에게서 어떤 대답을 들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거라고. 네가 이 새까만 어둠 속에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란 각오를 알리고 싶어서라도 불을 활활 지피면서 창 밖으로 환한 빛이 퍼지게 하려 애쓰는 지우스
2.
(이제부터 진짜 적폐 고고씽) 그런데 자미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음. 바로 자신의 몸 상태. 1년이 지나긴 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잃은 팔은 여전히 거기 있는 것처럼 환상통을 일으키곤 했음. 의사들이 열심히 처치해주긴 했지만 이런 추위 속에선 예전엔 두터운 근육으로 보호받았던 뼛속으로
절단부위를 통해 차가운 외기가 직접 스며 속부터 얼어붙는 기분임. 게다가 자미는 의수를 맞추긴 했지만 아직 재활이 끝나지 않은 데다 익숙하지 않아서 짐에 넣어놓고 착용은 미루는 중임. 이성과 거리가 먼 어떤 충동적인 이유로 닭과 재회했을 때 아무 일 없었던 척 하고 싶지 않은 탓도 있었음
왜냐면 그때 닭이 간절히 원하던 다른 것을 자신이 방해한 결과니까. 목적을 달성했다고 중얼거리고 그 자리에서 "새까만 닭"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듯이 날아드는 죽음 앞에 무방비로 몸을 드러내고 있던 닭을 억지로 구하려 뛰어들었던 결과니까. 그때 깨진 투구 틈으로 보였던 닭의 눈은..
아픈 절단부위를 남은 손으로 감싸 통증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침울한 회상에 잠겨있을 때 기척이 나더니 문이 삐걱 열리면서 눈발이 쏟아져들어옴. 걸어다니는 눈사람 같은 몰골로 문을 닫고 서서 눈을 거칠게 털어내는 닭을 자미는 멍하니 쳐다봤음. 닭이 오늘은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집주인 등장에 예의바르게 불 앞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자미한테 닭은 다시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섰음. 문은 하나뿐이니 퇴로가 차단된 셈임. 조그만 단칸방 오두막에 건장한 기사-그렇게 불릴 수 있을까, 자미는 쓰게 웃었음- 둘이 말없이 마주보니 단번에 공기가 긴장됨
자미가 입을 열려 하자 닭은 한 손을 들어 제지함. 눈 그치면 가라. 그 한 마디였지만 자미는 닭이 지금껏 뭐 하다 온 건지 알아차림. 닭은 이 눈폭풍 속에서 자미가 내려갈 길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온 것임. 그건 유예된 축객령이었음. 하지만 설마 대화마저 하지 않을 셈일까?
자미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닭이 들어올린 손으로 허공을 쥐어짜듯 주먹을 콱 쥐었음. 여기서 뭐하는 거지? 새로운 시대의 영광스러운 기사님들을 이끌어야 할 새로운 영웅께서. 대답하지 마. 그냥 다물어라. 자미는 좌절한 신음소리를 내며 남아있는 손으로 미간을 짚었음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자미는 그렇게 소리지르고 싶었음. 다른 사람들이 멋대로 갖다붙이는 소리는 아무래도 좋지만, 그걸 닭에게서만은 듣고 싶지 않았음. 영웅은 너잖아. 자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닭의 멱살을 잡고 그렇게 고함치고 싶었음.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임.
그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이 자미로 하여금 치료와 재활을 하던 지난 1년 내내 남들 모르게 닭이 있을 곳을 찾은 이유였음. 미간을 짚던 자미의 손도 어느새 손등에 핏대가 두드러지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음. 이윽고 자미는 그 주먹을 펼치면서 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음
그리고 식지 않도록 화덕 옆에 둔 솥의 뚜껑을 열고 탁자에서 나무그릇을 집어 국을 뜨고는, 닭에게 내밀었음. 우선 몸부터 녹여. 주인이 없는 동안 멋대로 찬장을 뒤져 고기국을 끓인 걸로 모자라 그냥 닥치고 있으라는 닭의 명령을 과감히 무시하는 행동이었지만, 자미의 눈과 손은 흔들리지 않았음.
자미의 눈과 그릇을 한번 번갈아보더니 회백발 여자의 낯이 일그러졌음. 닭이 온전히 맨얼굴을 드러낸 모습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닭의 저런 표정을 보는 것도 자미에겐 생전 처음이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음. 당연하다면 당연했음. 자미에게 닭은 언제나 저 사람이었으니까.
닭은 뭐라고 역정을 낼 것처럼 이를 드러낸 채 입가를 움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뱉지 않고 빼앗다시피 그릇을 가져갔음. 그 순간 자미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크게 공기를 호흡함. 축축하게 얼어붙은 공기가 폐로 한껏 밀려들면서 자미는 다시금 추위와 환상통을 느낌.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한 주제. 덜덜 떠는 자미를 찌푸린 낯으로 주시하면서 내뱉더니, 닭은 입을 대지 않은 그릇을 탁자에 놓고 다가왔음. 응? 감히 네가 내 생을 판단하고 내 결말마저 결정할 것처럼 굴더니 말이야. 꼴 좋다. 닭의 크고 거친 손이 어깨 아래의 절단부를 덮었음. 이게 무슨 꼴이냐.
식은땀이 밴 채 눈을 든 자미는 닭이 이마가 거의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걸 깨달았음. 낯선 얼굴, 낯선 표정. 화가 난 건 분명한데, 왜 슬퍼 보일까. 자신을 보자마자 죽이려 들 가능성도 희박하긴 하나 0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왜 뼛속 깊이 얼어붙으면서 동시에 불이 붙은 것 같던 절단부에서
닭의 손이 감싸쥔 데서부터 고통을 둔하게 덜어주는 것 같은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일까. 격통으로 머릿속마저 혼미해지면서 핑 도는 가운데 자미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던 이의 생각과 감정을 해석하려 애썼음. 그러면서 불빛이 일렁이는 저 눈을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음...
그날, 자신의 생명까지 담아 마지막으로 폭발시킨 힘은 하늘 높이 솟구쳐 폭우를 쏟던 구름마저 흩어버리고 피와 비로 젖은 대지에 빛을 드리웠음. 그 빛살 속에 우두커니 선 새까만 기사가 투구를 벗으면서 갈색의 짧은 머리칼이 사락 쏟아졌음. 자신을 쳐다보는 전혀 낯선 얼굴에 자미는 몸을 떨었음
...흠칫 떨며 눈을 뜬 자미는 자신이 깜빡 잠들었던 걸 깨달음. 절단부는 아직도 저리고 쑤셔서 이젠 없는 손끝부터 많이 상한 어깨죽지까지 꾹꾹 눌러 주무르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닭을 기다리며 혼자 추위에 떨던 때에 비하면 통증 자체는 상당히 둔해져서 훨씬 기분이 나아졌음.
문제는 그쪽이 아니었음. 자신은 누워있을 텐데 이상하게 머리가 무겁고 천장이 핑글 도는 것 같았음. 뱃속에선 은근하게 토기가 치밀락말락 했음. 어라. 이거 무슨 증상인데. 뭐였지. 자미의 볼에 축축한 바람이 닿으면서 용케 살아남은 눈송이 하나가 툭 닿음. 천장 부근에 덧문 같은 게 열려있었음
고개만 들어 주위를 둘러본 자미는 자신이 단칸 오두막 구석의 이불도 깔개도 없던 나무상자 같은 침상에 누워있는 걸 확인함. 그래, 이불 같은 건 안 보였는데 낡은 새까만 망토가 이불처럼 자미의 몸을 덮고 있었음. 자미는 옷을 벗은 기억이 없는데 망토에 덮인 몸은 상의가 벗겨져있었고,
환부엔 약이 발리고 깨끗한 붕대가 솜씨 좋게 묶여 있었음. 저쪽의 불가에선 여기까지 오는 동안 흙투성이가 됐던 자미의 외투와 상의가 빨랫감처럼 걸린 채 물방울을 떨어뜨렸음. 그리고 그 옆에서 등을 돌리고 앉은 회백발 여자가 뭔가를 마시고 있었음. 자미가 끓인 국의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았음
아직도 눈폭풍이 한창이라 열린 덧창으로 이따금 살얼음 같은 바람이 웅웅 불어닥쳤고 바람에 채여 비수처럼 날려온 잔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했음. 불빛이라곤 닭 앞의 화덕에 지펴진 자그마한 불꽃 뿐이었음. 자미는 자신이 잠든 게 몇 시간 안 됐고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듯하다고 결론을 내림.
바람이 드나드니 허름한 오두막은 불을 피워도 기온이 영하였음. 자미는 익숙한 닭의 체취가 밴 망토를 코끝까지 끌어올리며 웅크렸음. 그런데 왜 갑자기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것인지? 고통이 심한 날에는 오히려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리고 닭은 왜 자미를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인지?
내 집에서 자살이라도 할 셈이었나? 관심 끄는 수단이 자해인 건 어떻게 변하질 않냐? 제정신 아닌 새끼. 자미가 생각하느라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등을 돌리고 앉은 닭이 차갑게 내뱉었음. 자미의 정신이 대번에 맑아졌음. 연기 중독. 현기증의 원인은 환상통이 아니었음
닭이 때맞춰 돌아오지 않고 이 밤 내내 밖에서 눈을 맞으며 자미를 외면했더라면 눈이 그친 후 닭은 자미의 시체와 마주쳤을지도 모름. 그런데 자미는 닭이 그날 그 자리에서 죽일 것처럼 론누를 겨누고도 죽이지 못한 채 스스로 떠나야 했던 인물이었음. 자미는 그 이유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음.
비록 다른 이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만의 사고와 방식에 기반하긴 했지만, 닭은 기사를 지금보다는 덜 미운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뼈를 깎으며 싸워왔음. 그 과정의 끝에서 닭은 자신이 가장했던 "새까만 닭"의 투구를 벗고 그 속의 회백발 여자를 지워버리려 했었고.
타인을 믿지 않는 닭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첫째로 불의 아이가 대안을 보여줬기 때문이고, 둘째로 닭은 처음부터 자신이 해온 일들을 이어 마무리할 "기사"로 자미를 점찍어두고 그에게 새 시대의 기사들을 위한 어떤 역할을 떠넘기기 위해 움직였던 듯함. 모두 끝난 지금 보니 알 것 같음.
그러니 닭이 연기에 중독되어 위태로워진 자미를 구하고 둘 사이의 숱한 다툼과 신경전과 그럼에도 전장에서 등을 맞댔던 역사의 결말인 잘린 팔에도 친절하게 필요한 처치를 해준 건, 닭에게 아직 자미가 필요하고 쓸모 있기 때문일 것임. 그런 이유여야만 한다고, 자미는 눈을 감으며 생각함.
3.
다시 눈을 떴을 때 자미는 날이 밝고 눈폭풍도 그친 걸 깨달음. 실내는 똑같이 어두컴컴했고 조명이라곤 화덕에 지펴진 작은 불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기사의 날카로운 감각은 기압과 기온과 습도가 달라진 걸 감지함. 다 마른 옷은 자미가 이불처럼 두른 새까만 망토 위로 홑이불처럼 덮여있었고
닭은 없었음. 자미는 한 손으로 익숙하게 주섬주섬 옷을 꿰어입으며 어두운 단칸 오두막을 주의 깊게 살펴봄. 사실 볼 건 없었음. 화덕, 솥, 물통, 필요에 따라 서랍과 의자와 탁자의 기능을 병행하는 나무상자 몇 개 정도 빼면 삭막하리만치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자들은 비어있지 않았음
화덕 옆에 있는 상자는 자미가 왔을 때 이미 열려있었고 딱 봐도 식량보관용이었음. 자미는 나머지 상자들이 궁금했음. 닭은 기사 생활을 하는 내내 주거가 불분명했고 무슨 마법의 화수분이라도 가진 것처럼 여기저기서 불쑥 엉뚱한 물건을 꺼내곤 했음. 생각해 보면 집이 없으니 필요한 물건은
그때그때 조달하고 그 밖에는 당장 몸에 지닐 수 있는 것들로 소지품을 한정해 어딜 가나 들고 다녔던 것임. 회백발 여자는 "새까만 닭"에게 지급된 카톤 같은 기사보급품도 일절 손대지 않았으니, 그의 소유물은 정말로 걸친 옷과 론누, 투구, 목걸이가 전부였던 것임. 그럼 이 상자들은 뭘까?
자미가 상자들을 바라보며 굉장히 큰 유혹을 느끼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도(?) 닭이 방금 쪼갠 장작을 한아름 들고 들어옴. 닭은 자미한테 냉랭한 눈길을 한번 주고는 화덕 옆에 장작을 와르르 쏟음. 눈 그치면 가라고 했을 텐데. 이제 내 말은 사람 말로 취급하지도 않나 보군.
자미는 으르렁거리듯이 한숨을 뱉었음. 갈 거야. 대답 하나만 듣는다면. 닭은 이를 드러냈지만 잠자코 있었음. 자미는 필사적으로 얼마 없는 정보를 조합했음. 자미가 투구를 쓴 기사를 마지막으로 본 날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지만, 우선은 쫓겨나지 않아야 그런 것도 시도해볼 수 있는 것임.
닭의 팔짱을 낀 팔 위에서 톡톡거리는 손가락의 박자가 슬슬 빨라질 때 자미는 조금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음. 운석 사냥. 나도 데려가줘. 손가락이 딱 멈춰음. 닭이 짜증과 노기를 숨기지 않은 낯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음. 감시하고 있었냐? 내가 알아서 뒈지겠다는 걸 억지로 살려놓은 주제.
자미는 얼간이처럼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음. 그럴 리가. 그냥 기사가 아닌 너는 뭘 할지 생각을 좀 해봤어. 자미가 아는 닭은 배우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생명의 무게를 아는 인물임. 갑자기 삶이 "목적"이 사라졌을 때 닭이 간단히 제 목숨을 버리려 한 건
닭이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마저도 목걸이의 주인에게 오롯이 바치려 했기 때문이었음. 자미의 참견으로 그 마지막 계획이 조금 틀어지고 나서 닭이 홀연히 사라졌을 때 자미는 그가 시체도 찾을 수 없는 데서 다시 자결하려는 걸까봐 정말로 무서워했지만,
팔을 치료받으며 상태가 안정된 후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 닭에 대해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사실들, 그리고 새침한 금발머리 제자놈이 문병 와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인 닭에 대해 한 말들을 생각하면서 왠지 닭이 다시 그런 시도를 하진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음
그 예감 하나에 매달려 닭이 살아있다면 지금 하고 있을 법한 일들을 추측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까마귀를 통해 우연히도 운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단서가 됐음. 일확천금이지만 매우 희귀한 행운인데 요즘 연구자들과 대장장이들이 공급받는 운철 물량이 평소보다 조금 늘어났다는 것임
운철이란 말을 듣자마자 자미는 닭이 사용하던 최종기 별 내리기를 떠올렸고, 자미가 아는 닭은 투구 때문에 티가 나지 않을 뿐 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홀로 밤을 새곤 하는 사람이었음. 그리고 닭의 나린기인 론누는 별하늘을 관찰하거나 별똥별이 떨어질 때 추적하기에 꽤 적합한 기능이 있었음
물증 없이 논리의 비약으로 정보를 이어붙여 억지로 쥐어짜낸 희망이었지만 자미는 필사적으로 희망을 쫓았고, 그 결과가 이 첩첩산중의 오두막에서 닭과 독대하고 있는 것이었음.. 닭은 짜증과 초조함이 섞인 낯으로 엉뚱한 데를 쳐다보며 혀를 찼고, 자미는 참을성있게 기다렸음.
사실 자미는 조금 겁을 먹고 있었음. 닭이 다짜고짜 힘으로 쫓아낼 가능성도 있었기에 일부러 자신이 닭의 소재를 추적할 수 있고 여차하면 예전처럼 그 정보로 닭을 이용할 거라 암시해 닭을 고민에 빠뜨린 거지만, 내심은 닭이 단호히 거부하면 그냥 떠날 생각이었음. 그것 말고 무슨 선택이 있겠음?
이윽고 한숨을 뱉은 닭이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가로저었음. 수작질은 관둬. 아무튼 넌 여기 있어선 안 돼. 네 역할은 니젤에 있다. 자미는 실망하지 않았음. 영리한 닭이 간파할 거란 것도 당연히 예상했음. 실은 코끼리가 닭을 만나러 가겠다는 자미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들었던 이유도 저거였고.
내 역할, 그걸 위해 지금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면? 자미의 대꾸에 닭은 낯을 찌푸렸음. 말해두는데 난 기사질 같은 거 생각 없-/그게 아냐. 내 '힘'은 아직 쓸 수 있다. 기어스는 그대로니까. 그런데 방법을 못 찾고 있어. 열쇠는.. 감일 뿐이지만, 네가 쥐고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해. 그래서 온 거다.
그 말을 하면서 자미는 낯이 뜨거워지지 않았길 바랐지만 귀뿌리에는 이미 조금 더운 느낌이 들고 있었음. 닭이 고개를 들어 자미를 빤히 쳐다보았음. 오늘 아침 말 몇 마디를 나누는 동안 닭이 자미와 눈을 마주친 건 지금이 처음이었음. 다행히도 닭은 자미의 낯이 붉어진 걸로 놀리거나 하진 않았음
단지 닭은 뭔 소리야 라고 써붙인 듯한 얼굴이었고 닭의 입에서 실제로 나온 말소리도 그거였음. 뭔 소리야? 그리고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그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구나 같은 한가로운 생각을 했음.
4.
어쨌거나 닭이 물었으니 자미가 좀 더 설명을 하려고 입을 뻐끔거리자 닭이 바로 한 손을 딱 들어 제지함. 네가 갖다붙이는 변명은 아무래도 좋아. 요는 내가 거절할 걸 알아도 여기 있고 싶다는 거잖아. 자미는 입을 다물었음. 닭은 미간을 찌푸렸음. 바다에 빠뜨려도 기어서 돌아오겠군. 참 나.
닭은 회백발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밖으로 나갔음. 자미는 닭이 이미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허락했다는 걸 알아챘지만 혹시 모르니 확실히 하려고 닭을 따라나갔음. 새까만 닭, 하고 부르려다 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어 호칭을 생략했음. 밥값은 하겠어. 네 운석 사냥을 돕지. 그냥, 머물게 해줘.
닭은 대답 없이 론누를 들고 오두막을 한 바퀴 빙 돌았음. 주위를 살피고 눈 덮인 땅을 바라보며 흠 하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음. 닭은 생각 없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었음. 자미는 잠자코 기다렸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뭔가를 살피던 닭이 잠시 후 자미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더니
자미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두막 오른편을 론누로 가리켰음. 남쪽? 자미가 그렇게 생각할 때 닭이 론누를 크게 휘둘렀음. 어찌 보면 귀찮아하는 기색마저 있는 가볍고 느릿한 (어디까지나 닭의 힘을 아는 자미가 볼 때 느릿한) 휘두름에 풍압이 일면서 바닥에 쌓여있던 눈이 순식간에 날려감.
한순간에 제법 넉넉한 너비로 젖은 흙을 드러낸 바닥이 생겨났음. 닭은 턱짓으로 그 땅을 가리켰음. 네 집은 네가 지어. 자미는 귀를 의심함. 닭이 눈을 치워놓은 땅은 오두막의 벽에서부터 시작되었음. 다시 말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집을 지으려 했다간 몸을 누일 공간도 나지 않을 터였음.
닭은 벌써 자미를 냅두고 혼자 숲에 들어가고 있었음. 자미는 한숨을 푹 쉬곤 바닥을 내려다봤음. 닭은 집을 어떻게 지으라는 지시까진 하지 않았음. 그럼 자미 맘대로 지어도 된다는 이야기임. 무엇보다도, 이건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이었음. 자미는 그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음.
두어 시간 후 두 어깨에 거대한 곰 한 마리를 짊어지고 돌아온 닭은 자미가 한 손에 잡힐 굵기의 나무 몇 그루를 분질러서 가져다 쌓아놓고 대강 가지만 쳐낸 후 닭의 오두막 지붕에 비스듬히 기대어 늘어놓는 광경을 목격했음. 자미는 닭의 오두막 한 면을 자신이 지으려는 집의 한 면으로 삼고
이걸 기준으로 앞에서 보면 직각삼각형 꼴의 삼각기둥을 이루도록 지붕을 만든 후 남은 두 개의 면 중 하나만 벽체로 막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방을 짓고 있었음. 굵은 통나무를 서슴없이 쓰러뜨려 쌓아올린 닭의 오두막에 비하면 장작을 보관하는 헛간이나 다름없는 무언가였지만,
닭이 도와주지 않고 도구도 재료도 없으며 본인이 손을 하나 밖에 쓸 수 없는 상태에선 현명하고도 힘을 덜 들이는 선택이었음. 애초에 닭은 자미가 혼자 힘으로 독립된 오두막을 지을 수 없는 걸 알았기에 반쯤은 심술을 부리는 마음으로 이런 선택지를 준 거였지만...
그렇지만 바닥도 다지지 않은 데다 지붕이고 벽체고 생나무를 그대로 써서 틈이 벌어져있었음. 이 산의 추위와 폭설을 경험해봤으면서 무슨 생각인 건지. 저 수수깡 같은 구조물이 무너지거나 자미가 병이 나거나 산짐승이 습격해도 닭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배짱인 건지 뭔지.
어쨌든 자미는 닭이 온 걸 흘끔 보고도 일절 도와달라는 소릴 안 했음. 닭은 코웃음치곤 아직 몸이 굳지 않은 곰을 오두막 앞마당에 마련해놓은 나무틀에 거꾸로 매달고 손질하기 시작했음. 각자 묵묵히 작업에 매진하는 소리가 적막한 산속에서 요란하게 울렸음.
자미는 자미대로 자신의 지식과 기력과 깡다구를 총동원해 집을 지어보려 애쓰고 있었음. 애초에 기사는 부수고 때리고 죽이는 훈련을 받지 뭔가를 짓고 만드는 사람이 아님. 야생에서 맨몸으로 버티고 말지 자기 손으로 사람이 살 집을 짓는 자들이 아니란 말임. 그래도 자미는 기쁘게 일했음
아니, 정말로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이었음. 제 머리로 궁리하고 제 손으로 땀 흘려 목적한 걸 생산해내는 행위, 노동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음. 500년 전 제시된 명예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게 된 현 시대의 기사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이런 경험일지도.
한참을 작업에 골몰해 지붕과 한쪽 벽면을 완성한 자미는 쳐놓은 나뭇가지로 지붕의 얼기설기한 틈을 덮은 후 그 헛간 같은 자신의 '방' 안에 앉아봤음. 앞쪽은 아직 안 막아놔서 찬 바람이 솔솔 드나들었고 흙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음. 방 크기는 드러눕거나 앉아서 뭔가를 하기엔 적당했지만
침구와 낮은 책상 정도 외의 가구를 넣을 각이 나오지 않았음. 불 피울 공간 만들기도 무리였고. 약해졌어도 기사니까 바람만 피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생각한 자미는 우선순위를 조정해 전면에 진흙 섞은 벽을 세운 후 문을 다는 작업부터 하기로 하고 밖에 나왔음. 해지기 전에 끝내야 했음.
그때 닭이 저벅저벅 다가와 자미가 지은 공간 안에 불쑥 들어왔음. 닭은 '방'을 한번 둘러보곤 그대로 돌아서 나가더니 다시 숲으로 사라졌음. 자미는 의아했지만 내버려두고 나무를 몇 그루 더 끊어와 전면의 벽을 채우고 진흙을 개어다 틈을 메꾸며 바삐 작업했음.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음.
마지막으로 남은 나무줄기를 엮어 문짝 비슷한 걸 만들어놓고 경첩이 없어 그냥 비스듬히 세워놓고 있자니 닭이 돌아왔음. 뒤를 돌아보는 자미에게 닭이 뭔가를 불쑥 떠넘겼음. 집들이 선물. 그리고는 자미가 작업하면서 생긴 나뭇조각들과 잔가지를 모아다 이제 두 칸이 된 오두막 앞에 불을 피웠음
자미의 품에 안긴 건 묵직하고 푹신한 곰가죽이었음. 자미가 직접 무두질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게 며칠씩 걸리는 일인 건 알고 있음. 자미가 묻고 싶어 하는 걸 아는 듯 닭은 등을 돌린 채 불에 식재료가 든 솥을 걸면서 말했음. 사온 거야. 닭이 어느 틈에 마을에 가거나 사냥꾼을 만난 모양임
론누 비행은 아무튼 사기란 말임. 여하간. 자미는 대답할 말을 바로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한팔로 서툴게 곰가죽을 몸에 둘러봤음. 묵직하고 제법 따뜻했음. 아니 기사 기준으론 덥다고 해야 할 것임. 고마워. 닭은 계속 등을 보인 채 요리를 하고 있어서 자미의 말에 닭이 지었을 표정은 알 수 없었음
오늘은 눈폭풍이 오진 않았지만 사방이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어 무척이나 추웠음. 자미는 돌을 몇 개 주워 닭이 피운 모닥불에 집어넣고 그 앞에 앉았음. 닭은 고기를 넣고 끓인 죽을 자미에게 건네고 조금 거리를 둔 옆에 앉았음. 슬쩍 본 자미는 자기 그릇엔 고기가 있었지만 닭의 그릇은 그렇지
않은 걸 깨달았음. 닭이 고기를 싫어했던가? 반대였음. 자미가 기억하는 닭은 먹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먹었고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뭐든 거절하지 않았음. 그러고 보니 자미가 어제 국을 끓이면서 살펴본 식료품상자는 건량 위주였고 고기는 국내기 용에 불과한 듯 한줌 밖에 안 되었음.
자미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닭이 불쑥 입을 열었음. 내일은 날 밝기 전에 일어나서 산을 탈 거야. 못 따라와도 안 주워줘. 자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으려던 것을 깊숙이 갈무리했음. 대신 목을 가다듬으며 좀 더 평범하게 들리는 질문을 했음. 저 집은 네가 지었나? 닭은 응. 하고 대답했음
유성은 세상 어디에도 떨어질 수 있잖아. 운석 사냥을 하려면 계속 떠돌아야 할 텐데. 자미의 질문에 닭이 싱긋 웃었음. 언제 물어보나 했다. 맞아. 정주할 순 없지. 하지만 매년 주기적으로 유성우가 쏟아지는 시기가 있거든. / 유성우? / 응. 이 부근이 그거 관측하기 좋아. 닭은 다시 입을 다물었음
그러고 보면 이상했음. 운석은 발견하기 어렵고, 상품성이 있는 운철은 그 안에서도 더욱 희귀함.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건 물론임. 운철을 한두 개만 팔았어도 닭이 쥔 현금이 제법 두둑할 텐데 돈을 모아 어디에 쓰려는 걸까? 자미가 아는 닭은 물욕이 없었고 살풍경한 오두막이 이를 증명함.
닭이 운석을 찾는 목적이 돈은 아닐 것임. 그렇다면 역시 별똥별 자체에 목적이 있는 걸까? 왜? 어느 틈에 자미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닭의 가슴께로 향했음. 늘 그 자리에 있던 광택 없는 수수한 녹색 목걸이가 불빛을 머금고 있었음. 자미는 닭의 목걸이에 대해 묻고 싶어 하는 입을 힘주어 다물었음
그건 닭의 몸상태에 대한 질문보다도 더욱 건드려선 안 되는 주제였음. 그렇지만 닭은 눈이 밝고 지나치리만치 영민한 사람이었음. 그만 힐끔거려라. 그렇게 안 봤는데 음흉하네~ 그게 닭이 원하는 반응이란 걸 알았기에, 자미는 그런 거 아냐. 라고 시무룩하게 뱉었음.
"새까만 닭"이 아닌 회백발 여자는 자신의 몇 안 되는 소유물 중에서 투구를 이미 잃었음. 자미는 이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묻고 싶었지만 대신 입 안에 든 고기를 힘주어 씹으면서 가까스로 삼켰음. 닭이 언제까지 자미를 허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모를 일임.
조촐한 식사가 끝나고 닭이 먼저 자기 오두막에 들어가 문을 닫은 후, 자미는 자신이 얼기설기 엮은 방에 달궈진 돌을 들였음. 언젠가는 문짝이 될 나무뭉치로 입구를 막고 나니 새까만 어둠 속에서 자기 손바닥도 볼 수 없었음. 자미는 닭이 선물한 곰가죽을 두르고 닭의 오두막 벽에 기대어 앉아
어둠을 응시했음. 수도에 있는 기사들과 견습들은 사고 안 치고 자미가 남긴 계획과 과제를 잘 따라가고 있을지? 한 손으로 '힘'을 사용할 새로운 방법은 왜 닭과 관련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인지? 닭은 왜 별똥별을 찾아다니는 것인지? 등을 기댄 통나무벽은 우연히도 닭이 침상처럼 쓰는 상자가
쌓여있던 방향이었음. 한뼘이 조금 넘는 이 벽을 사이에 두고 닭이 누워있을 터였음. 닭은 이미 잠들었을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여줬을지. 마지막에 닭이 당했던 부상은 잘 치료한 건지. 천천히 정리해야 할 생각거리가 많았지만, 종일 힘써 일한 몸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음...
5.
볼을 툭툭 치는 손길에 눈을 뜬 자미는 닭의 무척이나 심술궂어 보이는 얼굴을 대면함. 하도 안 깨서 돌아가신 줄 알았다. 동화처럼 뽀뽀라도 해줘야 하나 싶었네~ 자미는 닭을 흘겨보곤 기지개를 폈음. 밖은 한새벽이라 깜깜했지만 공기가 바삭한 게 아주 쾌청하고 추운 날씨가 될 거란 걸 직감함
닭은 이번에도 자기 오두막의 화덕이 아니라 오두막 바깥의 모닥불에 솥을 걸고 어제 저녁에 남은 음식을 데워서 나눠줌. 불을 쬐며 빠르게 식사하면서 자미가 질문함. 매년 특정 시기에 유성우가 쏟아진단 말이지. 그럼 이번에 관측하고 떠났다가 내년에 다시 오는 건가? 닭은 어깨를 으쓱임.
기본적으론. 그래도 여기가 공기도 맑고 전망이 좋거든. 거점으로 제격이야. 자미는 별 생각 없이 듣다가 문득 깨달음이 온 얼굴(아차 하는 얼굴)로 닭을 쳐다봄. 닭은 씩 웃었음. 조수 노릇 하겠다며. 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그 느린 발로 뛰어다녀야 할 거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는데~
나야 환영이지. 하지만 '힘'의 열쇠를 찾을 때까지만이야. 그건 너도 나한테 협조해야 할걸. 자미는 일부러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음. 닭은 코웃음치곤 대답하지 않았음. 이러니 마치 특수2기 임무를 앞두고 둘이 약속을 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음. 자미는 일부러 헛기침을 해 감상을 지움
저 멀리 능선 너머 눈 덮인 깎아지른 바위봉우리를 향해 절반 이상은 얼어붙은 바위를 기어올라야 하는 길이 시작됐음. 그치만 둘 다 별다른 장비 없이 가볍게 올라갔음. 기사는 기사니까. 그래도 자미는 닭이 자꾸 빠르게 앞서가버려서 따라가기가 벅찼음. 일부러 심술을 부린다기엔,
닭이 걷는 내내 어떤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그냥 동행이 있고 그 인물이 평상시엔 견습 수준으로 약한 자미라는 걸 까먹은 것뿐인 듯했음. 자미는 일부러 힘든 걸 내색하지 않고 헉헉거리며 열심히 따라갔음. 도중에 점심쯤 되어서야 멈칫한 닭은 하늘을 흘끔 보고 해의 높이를 어림하다가
저 아래쪽에서 자미가 헉헉거리며 털썩 주저앉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돌아봤음. 어? 어. 미안하다. 훌쩍 뛰어내려와 자미한테 물통을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서 꺼낸 것인지..?) 건넨 닭은 정말로 미안해 보였음. 물을 힘겹게 마시며 숨을 돌린 자미는 약간의 원망을 담아 닭에게 물었음.
너라면 나를 데리고 론누로 날 수 있잖아. 혹시 하루 종일 걸어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닭은 엄지로 어깨너머를 가리켰음. 저기 한번 올라가면 해뜰 때까지 못 내려온다. 불빛은 무조건 금지다. 준비가 필요하다고. 닭이 가리킨 방향을 올려다본 자미는 눈덮인 돌무더기를 발견함.
자세히 보니 반쯤 지은 작은 돌집 같은 거였음. 닭은 정상까지 가는 길 중간중간에 저런 식으로 거점 같은 걸 만들면서 가려는 모양이었음. 그러니까 닭 정도 되는 기사에게 그게 왜 필요한 것인지? 석연치 않은 설명이었지만 자미는 더 묻지 않았음. 그보다 닭이 이번에도 대화 내내 자신과 눈을
직접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게 신경 쓰였음. 투구를 벗은 지 1년은 넘었을 텐데 투구 없이 사람과 마주하는 데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달지. 하긴, 목적 하나만 달성하고 그대로 남 모르게 죽어버릴 작정으로 수년간 투구를 벗지 않고 살아온 사람의 삶과 심정을 남이 어떻게 알겠음.
자미는 그것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일단 눈앞의 과제에 집중했음. 베이스캠프에 도달해 돌집 마저 짓기. 휴식장소부터 다시 1시간을 등산해 닭이 짓다 만 돌집에 도달함. 그간 닭이 왔다갔다 하면서 재료로 쓸 수 있는 돌을 가져다놨기에 쌓기만 하면 됐음. 안쪽엔 식량과 장작도 준비돼있었고.
일손이 셋()이니 금방 작업이 끝남. 원래는 한 사람만 쓰는 걸 상정하고 지은 조그만 돌집에 들어가 불을 피워놓고 앉으니 어쩔 수 없이 둘이 어깨와 몸을 붙여야 했음. 물론 아무리 기사라도 체온을 계속 잃는 건 위험하니 닭과 몸을 붙이고 앉는 것 자체는 싫지 않았음. 그보다 신경쓰이는 게 있었음
쉬면서 자미는 닭의 상태를 곁눈질로 살폈음. 좁은 돌집 안에서 망토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조금 수그린 닭은 왠지 지쳐 보였음. 자미가 지치는 건 당연하지만, 닭이 지치다니. 자미는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그날 닭이 배를 관통당하고 쓰러져 즉사한 것처럼 피를 쏟던
모습이 캄캄해진 눈앞에서 섬광 터지듯 떠올랐음. 너무 많은 피가 흘렀음. 상처에서도, 투구 속에서도.. ..린. 기린, 야! 뭔가가 볼을 가볍게 찰싹 때리는 감각에 자미는 정신을 차렸음. 후드에 반쯤 가려진 닭의 눈이 불빛을 머금어 반짝이면서 자미를 바라보고 있었음. 너 갑자기 왜 그래?
닭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자미는 그럴 수 없었음. 소맷자락으로 코 밑을 훔치면서 자미는 고개를 돌렸음. 뭐 좀 생각하느라. 다시 슬쩍 곁눈질하니 닭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낯이 되어 있었음. 자신이 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자미는 일부러 짜증내듯 내뱉었음. 못 따라간다니까, 좀 천천히 가.
닭은 입매만으로 희미하게 웃는 시늉을 하곤 다시 고개를 수그려 후드 속에 얼굴을 감췄음. 잠시 후 닭이 일어나 불을 밟아 껐음. 가지. 닭이 돌집에서 사용한 만큼 물자를 보충해놓고 (그러니까 어디서...?) 둘은 다시 등반에 나섰음. 그리고 해가 지평선에 걸려 하늘이 온통 검붉게 물들 무렵
정상에 도달했음. 눈만 대충 치우고 털썩 주저앉은 닭은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음. 자미가 조심스럽게 닭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닭이 도리질치며 크게 숨을 들이켰음. 그런 거 아니니까 상관 마. 그리고는 품에서 모눈종이 몇 장과 펜을 꺼내 자미에게 건넸음. 이제 부를 때까지 얌전히 있어.
자미는 손에 쥔 종잇장에서 닭의 체온을 느끼며 기다렸음. 닭이 바닥의 눈을 치우자 정사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는 네 개의 돌 같은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게 드러났음. 닭은 위쪽에 사각형의 액자 같은 틀이 달린 지지대를 꺼내 (어디서...) 돌에 맞춰 다리를 펼쳐놓고 고정시키곤 자미한테 그 아래에서
닭이 시간을 알려줄 때마다 사각형 틀에 보이는 모든 별을 위치 그대로 표시하라고 지시했음. 그러니까 닭이 자미에게 시킨 것은 성도를 그리는 것이었음. 벌써부터 목에 디스크가 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자미는 시키는 대로 했음. 곧 해가 가라앉고 군청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동쪽 하늘부터
별이 드러나기 시작했음. 닭은 한 시간 간격으로 때를 알렸고, 자미는 닭의 핀잔과 재촉과 잔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1분 이내에 사각형 액자 같은 틀 안에 보이는 모든 별의 위치를 그대로 그리려고 무진 애를 썼음. 나머지 시간 동안엔 둘 다 말 없이 기다렸음. 기다리고 또 기다렸음.
겨울의 늦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 마지막 시간대의 별지도를 그린 직후 닭이 벌떡 일어섰음. 그리곤 말도 없이 론누를 던져 타고 쏜살같이 날아갔음. 허둥지둥 일어서다 관측틀에 머리를 부딪친 자미는 욕을 중얼거리면서 이미 저만치 날아간 점이 된 닭을 바라보았음
한순간이었지만 자미는 닭이 론누를 던지기 직전 작은 빛살이 그 방향으로 그어지는 걸 본 것 같았음. 별똥별. 그 단어를 떠올리자 닭이 어디에 뭘 하러 간 건지 이해됐음. 까닭 없는 허탈감을 느끼면서 자미는 지지대를 접어 옆구리에 끼고 그 밤 내내 그린 성도를 품에 넣어 산을 내려왔음.
어디에 얼마나 먼 곳에 별똥별이 떨어진 건지는 모르지만 닭이 그걸 확인하고 돌아오려면 며칠은 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음. 어제 닭이 큰 곰을 사냥해 고기를 마련하고 가죽이불도 갖다 준 건 자미가 오두막에서 굶거나 얼어죽진 않게 해주겠다는 최소한의 배려였나 봄.
그렇지만 이럴 계획이란 설명은 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몸도 좋지 않아 보였는데. 투구를 벗고 자신이 격기사가 아님을 드러낸 지금도 닭은 옛 기사처럼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려는 걸까. 뛰어내리다시피 달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짧고 격렬했음. 베이스캠프를 그냥 지나쳐 달린 자미는
새로 밝은 해가 다시 기울어져 공기에 붉은빛이 짙어지고 있을 무렵 오두막에 도착했음. 역시 닭이 오두막에 들른 흔적은 없었음. 자미는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관측틀과 성도를 자기 오두막에 갈무리해놓고는 앞마당에 불을 피워 혼자 먹을 저녁을 차렸음. 닭의 오두막엔 발도 들이지 않은 채.
6.
닭은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돌아옴. 자미의 씁쓸함이 노기로 바뀌고 노기는 다시 속이 메슥거리는 걱정으로 바뀌려던 즈음이었음. 그 사이 눈이 한번 더 왔기 때문에 자미는 실내에서 불을 피울 수 있도록 자기 오두막을 좀 더 보강하고 침상도 하나 짜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긴 했음.
그날도 단조로운 고기 식단의 탄단지 균형을 맞추고 무엇보다 식물! 식물을 섭취하고 싶어 숲을 돌아다니며 겨울 먹거리를 채집하다 돌아온 자미는 자신의 허술한 오두막 앞에 선 닭의 너덜너덜한 뒷모습을 발견함. 기척을 느낀 닭은 돌아보더니 안 갔네? 하고 빙글빙글 웃으며 자기 오두막에 들어감
자미는 잠잠해졌던 씁쓸한 울분이 스멀스멀 치미는 걸 느끼며 달려가 닫히려던 닭의 오두막 문을 잡음. 얘기좀 해. 닭이 찌푸린 낯으로 돌아봄. 뭐. 사과하라고? 너 버리고 간 거? 어 미안. 닭이 다시 들어가려는 걸 자미가 문을 꽉 잡고 놓지 않음. 대화를 하자고. 성도, 받기 싫어? 닭은 코웃음쳤음
새끼. 협박질하던 버릇 나오네. 닭이 힘으로 문을 잡아당기자 질질 끌려간 자미는 아예 몸을 날려 하나 남은 팔을 문틈에 끼워넣었음. 닭이 문을 쾅 닫으려다 멈칫했음. 어둠 속에서 닭의 두 눈이 싸움을 앞둔 야생동물의 그것처럼 희미하게 빛을 뿜었음. 엷은 살기가 자미의 피부를 간지럽혔음.
대화를, 하자고 했어. 자미는 그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버티고 섰음. 닭은 짜증을 숨기지 않는 낯으로 자미를 내려다보다가, 문을 열며 밖으로 나왔음. 자미가 뒷걸음치지 않고 문 바로 앞에 버티고 서자 닭은 실낱만큼만 다가가면 이마와 몸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음. 그래 하자 대화. 뭘 원하지?
단도직입 묻는 닭 앞에서 자미는 마른침을 삼켰음. 어디 갈 땐 적어도 얘기를 하고 가. / 내가 나가는데 왜 허락이 필요하지? / 그게 아냐, 그냥 어디 가는지만이라도 알려줘. 까닭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리기 싫어. / 어쩌라고. 네가 무슨 권리로 그런 걸 요구하냔 말이다. 내 이름도 모르는 주제.
닭의 그 냉정한 말이 방금 자미를 얼마나 깊이 찔렀는지 닭은 알까.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던 감정을 오랫동안 연마한 자기통제로 억제하면서 자미는 허옇게 질린 주먹을 주머니 안에 갈무리하고 다른 말을 꺼냈음. 녀석이 재밌는 얘기를 하더군. 징크스라고 하던가. 기사의 기어스와 비슷한 원리라지.
닭의 낯이 굳었고, 혹시 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어 자미의 뱃속이 울렁거렸음. 그럼 나 때문인 거냐? 차분히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자미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말았음. 닭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음. 녀석은 징크스라고 부르는군. 뭐 명칭은 아무래도 좋아. 그래. 나는 조금 약해졌다.
진정해라. 정말로 요만큼일 뿐이니까. 그냥 기가 좀 허해진 느낌? 울컥하려는 자미 앞에서 닭은 엄지와 검지로 별 것 아니라고 손짓해보이며 장난스럽게 웃었음. 투구.. 보다 정확히는 내가 사람들에게 나의 벗으로 여겨지는 동안엔 점점 더 강해지는 느낌이었지. 지금은 그게 딱 멈춘 느낌.
회복 속도가 느려진 건가. / 잘 관찰했네. 뭐, 그렇게 됐다. 별 것 아냐. 내가 지닌 힘은 그대로거든. / 그렇지만 산에서 넌.. / 그건 심리적인 거야. 체력이나 회복력 문제는 아니었다. 거기까지 말한 닭의 낯에 잠시 후회하는 기색이 어렸음. 닭의 손은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음.
자미는 비로소 문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떨어뜨렸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너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어. 닭은 잠시 자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문을 닫으며 말했음. 나는 너에게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어. 조용히 닫힌 문을 자미는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음.
그리고 닫힌 문에 등을 대고 선 닭은 나직이 긴 한숨 같은 입김을 뱉었음. 닭은 투구를 쓴 초창기에 일찌감치 자신에게 격기사들의 기어스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뭔가가 생겨난 걸 특유의 예민한 감각과 영민한 관찰력으로 알아챘고, 기사들이 자기 기어스에 대해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그 기묘한 규칙이 작동하는 한 자신은 계속해서 더욱 강해질 거란 것도 알았음. 하지만 그날 자미가 죽어가는 닭을 살리겠다고 뛰어들어 허락 없이 투구를 벗겨버리면서 사람들이 회백발 여자의 얼굴을 본 날, 그 규칙이 깨졌음. 닭이 익혀온 힘과 기술과 경험은 그대로지만 스승 없이도 실전을 통해
학습을 할 수 있었던 밑천의 하나인 경이적인 회복력이 사라진 것임. 투구를 쓴 동안 기사 사냥 등 이런저런 실전이 곧 최고의 훈련이 되었지만 동시에 몸 여기저기, 특히 뼈와 내장을 자주 다칠 수밖에 없었는데, 회복력이 사라진 지금 그게 복리를 쳐서 돌아와 전체적으로 몸이 약해졌음.
다른 형태로 그런 규칙을 개발해서 긴 시간 지키면 다시 회복력이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갖고 있긴 하지만, 더는 기사로 살 생각이 없고 기사의 싸움을 할 이유도 없기에 닭은 그런 걸 새로 개발할 생각이 없었고, 이제 몸은 견습 수준으로 느리게 회복되었음. 징크스라, 이름 잘 붙였네.
닭은 먼지투성이 망토를 벗어 이불처럼 두르며 뻐근하고 쑤시는 몸을 조잡한 침상 위에 뉘였음. 싸움은 없었음. 그냥 미친 사람처럼 잠도 안 자고 광활한 지역을 빠르게 이동해댄 것뿐이지만, 무척 피곤했음. 그대로 잠들려던 참에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음. 뭐 좀 먹어둬. 문앞에 둘게.
자미의 목소리였음. 닭은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짜증을 내며 겨우 몸을 일으켰음. 터덜터덜 걸어가 문을 여니 나무판이 뚜껑처럼 덮인 그릇과 그 위에 돌로 눌러놓은 여러 장의 성도가 놓여있었음. 옆쪽에서 자미가 문을 닫는 소리가 났음. 닭은 쯧 혀를 차고 따뜻한 그릇과 성도를 집어 방에 돌아갔음
7.
이후 한동안은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음. 자미는 틈만 나면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자기 오두막을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개조했고 닭은 자기 오두막에 틀어박혀 있다가 식량이 떨어질 때쯤이면 사냥을 하러 나갔음. 자미를 데리고 다시 그 산봉우리에 가진 않았음. 자미가 그것에 대해 묻자,
닭은 성도는 한달에 한 번 간격으로 시기를 정해 그리고 있다고 대답했음. 그러니까 닭은 이 일도 외부와 연결 없이 어떤 자기만의 목적을 갖고 혼자 진행하는 거였단 얘기임. 유성은 날을 정하고 떨어지지 않는데 산에 오르지 않는 동안 떨어진 것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보자, 닭은 황당한 소릴
들은 표정으로 자미를 쳐다보더니 하루에도 수십 수백개씩 떨어지는 게 유성인데 자신이 어떻게 그걸 모두 주우러 다니겠냐고 대꾸했음. 맞는 소리니까 자미도 더 할 말이 없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였음. 그래도 시간은 흘러 본격적인 유성우의 날이 왔음.
이제 동지가 가까운 시기였음. 연중 밤이 가장 긴 즈음이니 별도 유성도 더 오래도록 관찰할 수 있음.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음. 눈구름이 스멀스멀 모여들다니 며칠째 대기가 불안정하고 산봉우리까지 접근하기도 위험했음. 닭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쭉 쳐다보더니 후드를 푹 눌러쓰곤
론누를 꼬나잡고 혼자 산봉우리 방향으로 걸어갔음. 장작을 패면서 곁눈질로 닭을 살피던 자미는 즉시 도끼를 멈췄음. 어디 가는지 말해줄 거지? 닭은 자미를 등진 채 말했음. 산에. 자미는 도끼를 놓고 이제 제법 그럴듯해진 자기 오두막으로 향했음. 같이 가. 닭이 어깨너머를 돌아봤음. 넌 오지 마.
성도 그릴 거 아냐. 자미는 문을 열어놓고 들어가 물건을 뒤지면서 큰 소리로 대답했음. 알아. 구름 위에서 대기할 거지? 나도 보여줘. 닭은 허, 하고 하늘을 향해 헛웃음을 흘렸음. 괜찮겠어? 나 예전 같지 않은데. 자미는 추위에 단단히 대비한 모습으로 나왔음. 그러니까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닭은 자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음. 요즘엔 닭이 자미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는 때가 늘었고 자미는 이것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은 채 그냥 가슴 속에 묻어놓고 있었음. 곧 닭은 짧은 한숨을 뱉고 앞장섰음. 저 위에서 떨어져도 난 몰라. 자미는 흥 코웃음치는 것으로 답하고 닭을 뒤따라 걸었음.
한낮이었지만 날씨가 너무 험악했음. 폭설이 오락가락했고, 안개가 얼어붙은 얼음결정이 공기 중에 떠다니다 휘몰아칠 땐 드러난 피부가 수백만개의 작은 바늘로 베이는 듯했음. 새하얀 순백으로 변한 시야는 코앞도 볼 수 없는 새까만 밤과 다를 바 없었음. 중간부터 닭은 자미의 허리에 줄을 묶어
자신의 허리에 연결하고 눈을 파헤치며 앞서갔음. 닭이 길을 손금보듯 잘 아는 데다 워낙 감각이 예민해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에 덮인 위험천만한 크레바스도 어찌어찌 잘 피해갔지만 이런 식으론 오늘 안에 정상까지 오르지 못할 것임. 새삼 자미는 닭이 요소마다 베이스캠프를 세운 이유를 깨달았음
몇 번 위험한 상황을 넘긴 끝에 눈에 파묻힌 돌집 중 하나를 파내어 간신히 대피소에 들어온 둘은 불을 피워놓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음. 오늘은 어려울지도 몰라. 자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닭이 자미를 째려보았음. 나 혼자 왔으면 달랐을지도~ 근데 누가 고집을 부려서 말이지~
자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지만 나름 반박할 말은 있었음. 글쎄, 너 혼자 갔으면 대피소도 들르지 않고 무리하다가 위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 넌 신중하다가도 한번 작정하면.. 자미는 입을 다물었음. 한동안 돌집의 천장 틈으로 눈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와 불이 탁탁 튀는 소리만 났음
닭은 대답하지 않았음. 둘의 어깨와 몸이 닿은 데서 옷에 엉겨붙은 눈이 녹아 축축하게 배어들었고, 돌 틈으로 스미는 시린 한기를 피해 서로 더욱 몸을 바짝 붙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대륙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음. 한참 후 닭이 입을 열었음. 너는 왜 나에게 집착하는 거지?
내가 아니어도 네 힘이 될 수 있는 기사들은 있었다. 내가 없어도 네 주변에는 늘 사람이 있잖아. 왜 이런 데서 나 하나를 신경 쓰며 네 의무를 방기하는 거야. 착 가라앉은 음울한 목소리는 자미가 익숙한 새까만닭의 목소리가 아니었음. 자미는 비로소 회백발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었음
운석을 찾는 이유, 물어도 될까? 자미는 한참만에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음. 회백발 여자는 목걸이를 매만지면서 대꾸했음. 내가 먼저 물었어. 자미는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풀려 애쓰며 대답했음. 말했잖아. 내 '힘'을 다시 사용할 열쇠가 너한테 있다고. / 딱히 열심히 찾는 것 같진 않던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 나한테 열쇠가 있다는 소리는 대체 뭐냐? 누가 예언이라도 하든? / 그런 거 아냐. 내 기어스니까 내가 아는 거지. 설명하긴 어려워. 그냥.. '힘'을 생각하면 네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뿐이야. / 나한테 허락 받던 것 때문인가? 근데 넌 맘대로였잖아.
자미는 고개를 돌려 닭을 빤히 쳐다보았고, 그만큼 닭은 고개를 뒤로 젖혔음. 뭐. 왜. 뭐. / ...아냐. 그리고는 다시 돌집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음. 장작이 반쯤 다 타고서야 닭이 다시 입을 열었음. 마족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고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별똥별이 떨어진다는 미신을 믿어.
마족? 서대륙의 마족 말인가? / 응. 내가 알던 사람은 마족도 아니면서 그 미신을 좋아했어. 황당한 소리였지. 별은 하늘 저편의 아주 먼 공간에서 돌덩어리나 기체덩어리가 빛을 내는 거야. 게다가 죽은 사람이 별이 된다면 하늘에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개씩 새로운 별이 생겨나야 할걸.
그 말을 하는 닭의 낯에는 표정이 없었음. 자미의 눈은 닭의 주먹 속에 감춰진 목걸이로 향했음. 그리고 닭이 육안으로 보이는 별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게 했던 성도를 생각했음. 단 하룻밤이었지만, 그 밤 내내 그린 성도를 비교해 별들의 움직임을 그려보면서 그렇게 많은 별이 생겨나진
않는 걸 확인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음. 자미가 금방 발견한 걸 닭이라고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음. 그럼에도 너는 별똥별을 찾아다니는군. 자미는 조용히 말했음. 회백발 여자의 낯은 한순간 한꺼번에 10년은 나이를 먹은 지친 모습이 됐음. 자미는 닭이 자신보다 연상인 걸 어느 때보다 실감했음
나는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아.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곤 해. 닭은 손에서 목걸이를 놓고 몸을 일으켰음. 수다는 다 떨었으니 이제 움직여야 한다고 행동으로 말하려는 듯이. 자미는 묵묵히 닭을 도와 불을 끄고 물자를 갈무리하고 다시 눈밭으로 나갔음.
닭이 모두 말한 것은 아니지만 기사 생활을 시작한 거의 처음부터 닭을 알아온 자미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별똥별을 쫓고 운석을 줍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음. 운석이 발견된 곳 부근을 돌며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지 미친듯이 수소문하고 찾아다니는 회백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음.
한두 건만이라도 그런 사례가 확인된다면, 닭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걸 본인도 알 텐데. 바로 곁에서 호흡을 섞으며 몸을 맞대고 있지만 마음은 아스라이 멀리 있다는 점에서 자미에게 닭은 별과 다르지 않았음. 마족의 미신을 인용한다면 닭은 살아서 죽은 사람일지도.
자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음.
8.
하늘을 온통 가리는 눈폭풍 때문에 시간이 가는 걸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밤은 왔고 산봉우리까지는 아직도 한참 멀었음. 눈에 젖은 외투가 얼어붙으면서 묶어놓은 소맷자락이 얼음덩어리가 되고 어깨 아래의 절단부까지 얼어붙는 감각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음
힘든 티를 내면 닭이 두고 갈 테니까. 기사라도 자연에 대적하는 건 한계가 있었고 자미는 평상시엔 약한 기사였음. 그래도 말석일지언정 기사는 기사. 자미는 젊은 기사의 체력과 근성으로 이를 악물고 죽어라 걸었음. 눈을 헤쳐 길을 내며 앞장선 닭은 이따금 헉헉대는 자미를 곁눈으로 살피면서
별 말 하지 않았음. 그게 닭 나름의 자미에 대한 존중이었고 자미는 그로부터 다시 기력을 쥐어짜낼 수 있었음. 어찌어찌 산봉우리 아래의 마지막 돌집에 도달하자 닭은 거기서 멈추고 날씨가 바뀔 때까지 머문다고 선언했음. 바람이 좋은 방향으로 거세니 구름이 곧 흩어지고 날씨가 바뀔 듯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돌집에 들어가 앉은 자미는 닭이 언 장작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곯아떨어졌음. 곳곳에 만든 돌집들은 원래 혼자 쓸 생각으로 작게 지어서 여기서도 둘은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아야 했음. 자미의 머리에 어깨를 내준 닭은 그 무게와 호흡을 느끼며 아주 느리게 허연 입김을 흘렸음.
당초 닭은 자신이 일군 공과 영광은 오롯이 자미에게 넘기거나 아무도 모르는 그늘 밑에 묻어두고, 그래도 자신을 한번은 떠올릴법한 이들에게는 투구를 쓴 기사 "새까만 닭"의 인상만 남겨놓은 채, 그 속에 든 회백발 여자는 과와 함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작정이었음.
그러나 죽음이 임박해 혼수상태로 의식을 잃었던 그때 사람부터 살리고 보겠다는 자미의 쓸데없는 참견으로 닭의 의사와 관계없이 투구가 벗겨지는 바람에 회백발 여자가 세상에 드러나버리면서 목적의 추구부터 자신의 최후에 이르기까지 닭이 짜놓은 계획은 마지막에서 삐끗하고 말았음.
다행히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그나마 닭에게 조금씩 우호적인 기억이 있어서 공을 인정하는 건 물론 기사 사칭이 일으킬 파란을 걱정해 입을 다물어줬지만, 의식을 회복하고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닭은 바닥까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음. 그래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말없이 사라졌음.
솔직히 닭은 목적을 이루고 난 후에 자신이 살아있는 풍경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음. 삶은 자기혐오로 가득했고 자신의 이름으로는 미련도 남길 것도 없었으니까. 벗을 만나기 전처럼 그저 사람을 피해 텅 빈 황야를 떠돌다가, 불현듯 손에 쥔 론누의 날 위로 몸을 던져버릴까 충동이 들곤 했음
머리로는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벗이 언급했기 때문에 죽은 이의 재탄생을 기원하는 마족의 미신을 검증하듯 별똥별과 아이의 출생 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보기로 작정하면서 억지로나마 목숨을 연장할 이유를 찾긴 했지만, 그 우울한 생각은 그림자처럼 어디든 붙어다녔음. 그랬는데,
자미가 따라온 지난 몇주간은 그런 생각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음. 지금도 자미가 잘못될까봐 조심해서 산을 타고 있었으니까. 왜인지는 닭 자신이 선명하게 잘 알았음. 아니까, 오래 전 저녁놀 비치는 창가에서 아직 풋내기였던 앳된 자미의 뒷모습을 보며 이미 마음을 굳혔던 것이지만...
곤히 자는 자미를 깨우지 않으려 자미가 기댄 반대편의 손으로 까칠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회백발 여자는 다시금 마음을 굳혔음. 기사 담청색 기린은 새로운 시대의 어린 기사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야 함. 이런 곳에서 산송장 때문에 세월을 낭비해선 안 되었음. 그러니 이번 유성우가 끝나면 반드시.
몇 시간 후 자미는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잠에서 깼음.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자미는 불그름한 잉걸불빛을 머금고 히죽 호를 그리는 입매가 눈앞에 있는 걸 보고는 잠이 확 깨 몸을 젖히다 돌집 벽에 정수리를 부딪쳤음. 집 무너진다~ 놀리는 닭을 힘껏 째려보면서 자미는 달아오른 표정을 숨겼음
지금 시간이? / 두 시간 조금 지났어. 일어나라. 날씨가 견딜 만해졌다. 닭이 끙 소리를 내며 굳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자 자미의 가슴 속에서 다시금 죄책감이 스멀거렸음. 그렇지만 닭은 곧 체력방전 따위 모르던 예전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불을 끄곤 돌집 밖으로 자미를 몰아내다시피 재촉했고,
산소가 희박한 얼어붙은 공기에 노출되자마자 자미의 머릿속에서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사라졌음. 바람이 여전히 거칠었고 한밤중이라 시야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폭풍은 지나갔고 가벼워진 구름층도 더 높은 상공으로 올라가 닭의 말대로 날씨가 훨씬 견딜 만했음. 닭은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다가,
구름층의 높이와 두께를 가늠하더니 자미를 돌아보았음. 자 마지막 기회- / 빨리 던지기나 해. 자미는 툴툴거리며 허리에 묶인 밧줄의 매듭을 확인했음. 닭은 소리 없이 쓰게 웃고는 론누를 던졌음. 거꾸로 흐르는 유성처럼 날아간 론누가 경로를 틀어 주인에게 돌아오자 닭은 자미를 한 팔에 안고
뛰어내리듯 몸을 던졌음. 론누는 익숙하게 손바닥에 감겼고 자미는 이런 취급이 당연한 짐짝처럼 닭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채 닭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음. 그렇게 론누에 매달려 흩날리는 가는 눈발을 지나 구름층에 뛰어들고, 몇 분간 흙탕물을 헤엄치듯 구름 속을 헤며 솟구치고,
그리고는 갑자기 온갖 색조의 별이 가득한 찬란한 밤하늘이 활짝 열렸음. 유성우의 극대기는 지난 때였지만 아직도 누군가가 이따금 툭툭 뿌리듯이 길고 짧은 유성의 빛이 하늘 한 방향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그어지고 있었음. 발 밑은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못할 새까만 심연 같고
머리 위는 높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이 멀고 깊어 문득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이 까마득한 허공에서 고산병까진 아니더라도 고소공포증 비슷한 떨림을 느끼지 않을 인간은 없음. 인간은 본래 지상에 두 발을 붙이고 자신이 가장 잘난 척 머리를 쳐들며 살아온 생물이니까.
현기증을 느낀 자미는 본능적으로 닭에게 꼭 매달렸음. 닭이 약간 어색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음. 올라가서 앉자. 기다려야 하니까. 닭은 론누에 매달린 한 팔의 힘만으로 자신과 자미의 체중까지 끌어올렸음. 곧 둘은 허공에 수평으로 고정된 론누 위로 한 뼘을 두고 나란히, 어색하게 걸터앉았음
고도와 환경에 적응하면서 좀 진정된 자미는 머리 위에서 발 밑의 어딘가로 떨어지는 숱한 유성을 바라보며 말이 없는 닭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음. 기록해두지 않아도 돼? 회백발 여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음. 예쁘지? 없던 미신도 생길만해.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자미는 그냥 입을 다물었음
잠시 후 닭이 쯧 혀를 차곤 말을 이었음. 확률과 통계 문제야. / 뭐? 갑자기 무슨.. 아. / 알아들었네? 좋아. 닭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고 자미에겐 설명이 필요 없었음. 자미는 닭이 서대륙 마족의 미신을 들려준 때부터 세세한 부분에 의문을 품고 있었고 닭의 대답은 대답이 되었음.
마족의 미신은 별똥별을 아이의 탄생과 연결했음. 그런데 언제가 탄생으로 정의되는가? 아이가 모체로부터 분리된 시점? 잉태된 시점? 별똥별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으면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목격자가 없으면 그렇지 않게 되는가? 또한 그 아이는 어디서 태어나게 되나?
더군다나 별똥별은 낮에도 떨어지지만 태양 때문에 볼 수 없음. 운석은 별똥별이 떨어진 가장 명확한 증거지만, 별똥별은 대개 떨어지는 과정에서 모두 타버리고 그 중 지상까지 도달해 운석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몹시 희귀함. 그래서 밤하늘의 별똥별을 전수조사하는 건 불가능함.
그렇기에 닭은 한편으론 밤하늘의 특정한 구역에서 보이는 별의 수와 위치를 기록해 별이 실제로 증감하는지 확인하고, 한편으론 운석이 발견됨으로써 별똥별의 낙하 사실과 시점,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 경우를 표본으로 삼아 근방의 마을을 수색하는 방식으로 조사해온 모양이었음.
미신은 안 믿는다며 처음부터 전제고 결론이고 부정한 주제, 지나치리만치 성실하게 조사하는 격이었음. 닭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회의와 과학적 상식의 승리일까, 아니면 오랜 미신의 전설 같은 부활일까? 닭의 이성적 행동의 근간을 이루는 비이성적 동기라면 자미가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명백했음
그렇더라도, 닭은 그냥 산봉우리 아래 그 마지막 거점에서 구름 위로 론누를 던져올리기만 해도 유성우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왜 굳이 악천후 속에서 짐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동행을 허락하고 하늘 위에도 데려온 것일까? 어쩐지 닭은 자미가 조금씩 선을 넘어 밀어붙이는 대로 밀려주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왜 자신은 별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이 아름답고 먹먹한 별의 바다 속에서 인생에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방식으로 우주를 목격하는 기회를 누리면서도 한뼘 떨어진 거리에 함께 있지만 그 이상 다가가지 않을 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가?
야, 저거. 갑자기 닭이 자신의 무기처럼 한점으로 집중되는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내며 어딘가를 가리켰음. 흠칫 정신이 든 자미는 닭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서 유독 이글거리는 빛을 뿜는 긴 꼬리를 끌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발견했음. 닭이 활기차게 벌떡 (론누 위에서?) 일어섰음. 꽉 잡아라!
아 제발. 자미가 입 속에서 중얼거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미의 몸은 기계적으로 잽싸게 일어서면서 하나 남은 팔을 닭의 허리에 둘렀고, 론누는 줄이 풀린 사냥개처럼 뛰쳐나갔음. 그 고도에서 유성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광기에 찬 속도로 쏘아진 론누는 그 자체로 떨어지는 별과 같았음.
눈도 뜨기 힘든 매서운 바람, 시시각각 뒤집히는 고도와 풍경, 마침내 론누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꽂히듯 딱 멈춘 순간 자미는 닭의 등에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속에 든 것을 그대로 다 게워낼 뻔했음. 저기 가서 토해! 닭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뛰어내려 허공에 뜬 론누를 잡아채고는 그대로 달렸음.
드디어 땅을 딛은 자미는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헛구역질을 하다가 억지로 일어서서 닭이 사라진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쫓아갔음.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은 추락(자미는 절대 그걸 비행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임) 중에도 자미가 기사니까 지닌 동체시력은 우렁우렁한 굉음과 비산하는 흙먼지와
갑작스레 불길이 번진 숲, 그리고 숲 복판에 닭 정도로 강한 기사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마어마한 크레이터가 파인 걸 놓치지 않았음. 운석이 떨어진 것임. 다행히도 숲 한복판이라 사람이 상하진 않았을 것임. 유성이 떨어질 때부터 보고 하늘을 날아온 닭보다 먼저 올 사람도 없었고.
9.
엄청나군. 운석이 떨어질 때마다 이 정도로 지형이 뒤바뀌나? 사람이 사는 곳에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자미의 감탄을 들었으면서도 닭은 반응하지 않았음. 슬쩍 보니 닭은 많이 놀라고 당황한 것 같은 낯이었음. 닭도 사람이고 당연히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긴 했지만,
투구 너머로 어림짐작되는 기색이 아닌 생생한 민낯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 들었음. 자미가 묘한 낯으로 쳐다보자 닭은 문득 정색하면서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음. 보통은 이렇게까지 크지 않아. 커봐야 십수 미터가 쓸려나가는 정도지. / 큰 운석이 떨어진 건가? / 운석이 무거울수록,
빠를 수록 운석공도 커지긴 해. 이 정도로 지표면이 박살나려면 운석 크기가 10미터 이상이어야 할 텐데. 닭이 말하는 투를 보니 뭔가 이상했음. 자미가 재차 질문하려는데 닭이 기다리지 않고 먼저 구덩이 안쪽으로 뛰어내렸음. 자미는 한숨을 쉬고는 그 뒤를 따라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갔음.
구덩이의 중심에 먼저 도달한 닭은 몸을 굽힌 채 어딘가 성마른 태도로 바닥을 살피고 있었음. 주위를 둘러본 자미는 닭이 말한 것처럼 10미터가 넘는 크기의 바윗돌 같은 건 볼 수 없었음. 얼씨구. 닭이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거리며 내는 소리에 자미는 잰걸음으로 달려갔음.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엉거주춤 버티고 선 닭은 론누를 땅에 꽂고 두 손으로 주먹만한 공 같은 돌을 힘겹게 허리께쯤까지 들어올리고 있었음. 야, 너도 만져봐라. 이거 차갑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본 자미는 닭의 말대로 돌이 얼음처럼 차가운 걸 깨달았음. 주위에 물이나 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별똥별에 수반되는 마찰열과 운동에너지가 한순간에 식어버릴 수도 있는가?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음. 돌은 깨지지 않은 흑요석처럼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고 완벽한 구체였음. 그리고 그런 크기에서 상상되는 것과 달리 닭이 쩔쩔맬 정도로 무거워 보였음. 닭은 맨손으로 건장한 성인을
공중 높이 가볍게 집어던질 수 있는 기사임. 겨우 주먹만한 크기의 돌이 닭 정도의 기사가 힘겨워할 정도로 거대한 질량을 지닐 수도 있는가? 운석에 대해 잘 모르는 자미가 봐도 이상하고 수상한 물체였음. 안 되겠네 이거~ 닭은 일부러 경박하게 내뱉으며 운석을 떨어뜨리고 론누를 집어던졌음.
핑핑 꺾이며 하늘을 크게 돌아 돌아온 론누는 닭의 바로 앞에서 걸터앉기 좋은 높이에 멈춰섰음. 닭은 다시 두 손으로 운석을 집어들려 하다 당황했음. 운석이 꼼짝도 하지 않았음. 절씨구? 손을 놓은 닭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음. 그리곤 공중에 떠있는 론누와 운석을 번갈아봤음.
자미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쯧 혀를 차고 일어선 닭은 론누를 잡아 땅에 내팽개치고 다시 운석을 들어올렸음. 무게 때문에 끙끙거리긴 했어도 이번에는 아까처럼 들어올릴 수 있었음. 자미는 닭이 말하지 않아도 모자를 벗어 돌에 덮어씌우고 바닥에 나뒹구는 론누를 주워들었음.
습관적으로 새까만 닭이라고 입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호칭을 혀를 깨물다시피 해서 붙들곤 호칭이 생략된 말을 뱉었음. 너도 그걸 생각하고 있겠지? 닭은 낯을 찌푸리며 대답했음. 아무래도 그거지. 크기에 비해 말도 안 되게 무거운 구체를 두 팔로 품에 안아든 닭은 여러 번 깊은 숨을 뱉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천천히 단단한 걸음으로 흙과 잔돌이 굴러떨어지는 경사면을 걸어 올라갔음. 자미는 하나 남은 손으로 론누를 지팡이처럼 짚고는 상체와 팔을 잃은 어깨로 닭의 등을 받치며 밀었음. 닭이 표정을 읽기 어려운 그 복잡한 낯으로 어깨 너머를 돌아보자 자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음.
왜? 빨리 뜰수록 좋잖아. 닭은 이제 짜증과 미소가 뒤엉킨 낯이 되더니 허! 하고 탄성을 뱉었음. 그때부터는 순순히 자미의 부축을 받으면서 경사면을 끝까지 올라갔음. 나무가 일제히 쓰러지고 여기저기서 잔불이 타는 지대를 벗어나 한참을 뚜벅뚜벅 걷다 보니 어느덧 날이 밝았고
둘은 운석 충돌의 충격 범위를 벗어난 숲에 들어섰음. 숲은 닭이 오두막을 마련한 산맥과 달리 완만하고 낮은 평야에 위치했고 기온도 겨울치곤 온화해서 기사에겐 얇은 옷으로 가볍게 운동이라도 하고 싶어질만큼 기분 좋은 수준이었음. 얼마 안 가 숲속에서 사람의 발길로 생겨난 오솔길이 나타났고,
정오가 가까울 무렵엔 숲머리 너머로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음. 그쯤에서 둘은 길을 벗어나 언제 나타날지 모를 행인들의 이목이 닿지 않을 숲 가운데로 자리를 옮기고 잠시 휴식을 취했음. 자미가 두 사람의 물통을 수거해 물을 찾으러 간 동안, 닭은 운석(?)을 내려놓고 몸을 쉬면서 하늘 높이 띄운
론누로 주위를 감시할 겸 주변 지형을 파악했음. 그러면서 눈을 감고 이 다음부터 할 일들을 생각했음. 자미가 가득 채운 물통과 배는 차지 않지만 기운을 잠깐 북돋고 싶을 때 씹는 향긋한 상록수 잎을 조금 채집해 돌아왔을 때 닭은 나무등걸에 한가롭게 걸터앉아 한 발로 운석(?)을 굴리고 있었음.
이제 어쩔 거야? 자미가 물으면서 잎을 건네자 닭이 거절하면서 건성으로 대꾸했음. 난 기사 아닌데. / 이게 나린기라면 엉뚱한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별천지에 신고해야 해. / 그건 네 일이고. 나는 내 일을 할 거다. 자미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음. 알았어. 그럼 저 마을부터 시작하는 건가?
응. 성벽도 있고 생각보다 크던데. 거기서 닭은 입을 다물었음. 성벽을 두를 정도의 규모라면 저곳은 산골의 마을이 아니라 도시일 것임.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면 태어나는 아이도 많을 가능성이 높았음. 고개를 수그리고 다리 사이의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닭의 모습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작아 보였음. 자미는 묵묵히 기다렸음. 한참 후 고개를 든 닭은 씩 비틀린 미소를 지었음. 같이 갈까? 내가 어디다 숨길지 알고 싶잖아. 이번엔 자미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을 피했음. 점심은 오랜만에 식당에서 먹고 싶은걸. 밥 먹으면서 얘기해줘. 그래줄 거지?
닭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음. 뱃속이 까닭없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자미는 닭을 흘끔 쳐다봤음. 회백발 여자의 낯에는 자미가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음.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본 닭의 미소는 아까처럼 비틀린 형태였음. 좋아. 네가 사라. 기사님이 사는 밥 한번 얻어먹어 보자고.
자미는 닭의 발밑에 있는 반사광도 명암도 없는 이상한 검은 구체로 눈길을 떨어뜨렸음. 두 기사는 그 수상한 운석(?)이 매우 높은 확률로 나린기라고 판단했음. 이것이 실렸던 별똥별은 혜성인가 싶을 정도로 눈에 띄게 빛을 뿜었음. 닭 정도로 빠르진 않았어도 사람들은 운석이 떨어진 걸 알 것이며,
특히 유성우 시즌이니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운석사냥꾼 등이 벌써 몰려오고 있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음. 일단은 그 크레이터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봐야 했기에 닭이 이때까지 혼자 돌을 나르며 고생한 거지만, 마을이 코앞인 지금은 더이상 그 무거운 걸 끙끙대며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욕심 많은 멍청이들에게 시비가 걸릴 필요는 없었음. 닭이 나린기일지도 모를 돌을 어딘가에 숨긴 후 자기 볼일부터 처리하러 가는 것은 매우 논리적인 판단이었음. 하지만 자미가 기사인 이상, 자미에게는 나린기로 추정되는 이 물체를 안전하게 별천지로 넘길 의무가 있었음.
물론 자미에겐 혼자 저 돌을 니젤에 가져갈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진 닭을 짐꾼처럼 부리며 기사의 총본산인 그 땅에 끌고 가고 싶지도 않았음. 그렇다면 방법은 닭이 돌을 숨긴 장소를 자미가 기억한 다음 닭과 헤어져 혼자 수도에 돌아가 별천지에 보고해서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이었음.
그게 올바른 판단이란 걸 자미도 알고 닭도 알았음. 바로 그 지점이, 자미의 마음 속에서 닭이 발견한 돌보다도 무거운 돌덩어리가 되어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음. 자미는 자신이 이번에 떠나면 닭을 정말로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음. 명확한 이유는 없고 별다른 근거도 없지만,
어제 새벽 오두막을 떠나 산을 오르기 시작한 때부터 구름 위에서 함께 유성우를 보던 순간조차 닭에게서 쭉 느껴지던 어떤 거리감이, 그리고 방금 한순간 눈의 착각이었나 싶었던 회백발 여자의 그 미소가, 자꾸만 뱃속을 뒤집고 옥죄었음. 자미가 '힘'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닭이 돕는 것?
자미가 기사로서 발휘하는 진짜 힘은 기어스에서 비롯된 그런 이상한 현상이 아님. 그 '힘'을 끝내 사용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중앙에선 한 팔이 없는 자미의 사직서를 반려한 채 계속 황궁에 붙들어놓고 기사와 관련된 중대한 임무들을 진두지휘하도록 맡길 것임. 그러니 그걸 돕겠다는 약속 같은 걸
한 적 없고 그저 집을 지어 머무는 것만 허락했던 닭은 아무런 의무나 부채감 없이 언제든 가볍게 자미를 떠날 수 있었음. 닭이 그에게 바란 것도 결국엔 기사로서의 역할이니까. 그래서 자미는 혀끝까지 치달은 말이 있는데도 입을 뗄 수 없었음. 내가 수도에서 돌아왔을 때 다시 나를 받아주겠냐고,
나는 내 오두막을 좀 더 집답게 고치려고 계획한 게 있으며 어서 돌아가 그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해야는데. 그렇지만 자미는 그러지 못했음. 그래. 집주인에게 신세를 졌으니 가끔은 갚아야겠지. 그렇게 겁쟁이처럼 머쓱하게 마른침을 삼키고서 약한 미소를 지으며 마음이 반만 든 말을 뱉을 뿐이었음
자미의 대답을 듣자마자 닭은 한 번도 피로를 느낀 적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몸을 일으켰음. 다녀온다. 그리곤 한숨을 푹 쉬더니 세상의 짐 같은 돌덩어리를 들어올려 어깨에 지고 숲 깊숙한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음. 곧 닭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머리 위 저 높은 하늘에는 론누가 느긋하게 떠있었고
자미는 닭이 자신을 지켜볼거란 걸 알면서도 하나 남은 손으로 모자가 없는 머리를 감싸쥔 채 후회하는 바보의 모습을 숨기지 않았음. 자미의 삽질은 오래 가지 못했음.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마을 쪽에서부터 점차 가까워지더니 용병처럼 잘 무장한 사람 두 명이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왔음.
그들도 자미를 보고 놀랐고 자미도 그들을 보고 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 속에 간수했음. 어, 안녕하쇼.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소. 그럼 이만. 두 사람은 자미를 지나쳐 숲 안쪽으로 향했음. 닭이 사라진 그 방향이었음. 자미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음. 도와주십시오! 여기가 어딥니까? 어디로 가야 하죠?
저 좀 숲 밖으로 데려가주세요! 두 사람은 자미를 흘끔 돌아보며 입을 꾹 다문 낯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음. 팔 하나가 없고 키도 평균보다 조금 작은 젊은 남자가 오랫동안 산야를 헤맨 너저분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하니 누가 봐도 조난자 같긴 했음. 그렇지만 그들의 우선순위가
조난자 구출은 아닌게 명백했음. 한 명이 도시 쪽 방향을 대충 가리켰음. 저쪽으로 쭉 가쇼. 바로 코앞이니까 알아서 하고. 그리곤 서둘러 닭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음. 자미는 그들이 언제든 무기를 뽑을 수 있게 꼬나쥔 채 사냥꾼처럼 흔적을 살피며 이동하는 걸 놓치지 않았음.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본 자미는 론누가 사라진 걸 깨달았음. 저들이 노리는 것은 값 나가는 운석일까, 아니면 설마... 뭐가 됐든 닭은 자미가 소란을 피워 잠깐이나마 저들의 발목을 잡는 행동을 하는 걸 론누로 봤을 것임. 기사급은 아닌 자들이니 닭 혼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닐 거라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 확신처럼 온몸에 들러붙었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회백발 여자에게서 투구를 쓴 기사를 떠올리지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무를 익혔다면 그가 기사급의 강자라는 건 알 수 있음. 그를 상대하면서 견습급에 불과한 용병 둘만 나서진 않을 거란 이야기임
판단은 빨랐음. 자미는 도시 쪽으로 달려갔음. 저들이 단순히 운석을 탐내는 도둑이면 닭은 호된 교훈을 주고 마지막 식사를 하러 올 것이며, 다른 이유로 자신을 노리는 거라면 나머지 무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도시에 들를 것임. 자미가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닭이 이대로 사라질 가능성도 있지만,
저들과 먼저 마주친 자미가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행동을 보였으니 상황은 파악했고 스스로 닭에게 휘말리러 달려들 거란 의사도 전달됐을 것임. 벌써 닭이 비난하는 소리로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었음. 아무래도 좋았음. 저들로 인해 닭이 반드시 자미를 찾아올 거란 것, 그것이 자미에겐 가장 중요했음
10.
과거에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날 그 사건 이후로 자미는 기사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젊은 영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음. 근 1년간은 어느 도시에서도 성문에서 본인확인에 10초 이상 걸리지 않을 정도였음. 그래도 일반인들은 벽보의 사진을 통해 자미의 얼굴을
대강 익힌 정도라 니젤을 벗어나면 실물이 눈앞을 지나가도 본인인 걸 눈치채는 경우가 흔하진 않았음. 그 사건 후로 자미는 치료와 재활 아니면 책상업무에 전념하느라 밖에서 이름과 사진이 나붙을 정도의 사건에 직접 엮이지도 않았기에 자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상당히 잠잠해지기도 했고.
그리하여 간단히 성문을 통과한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비밀임무라 둘러대며 자신이 나타난 걸 숨겨달라는 당부도 한) 자미는 낡은 외투에 달린 후드를 모자 대신 덮어쓴 후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인파에 섞였음. 사람이라곤 닭 밖에 없는 적막한 산속에 있다가 달포만에 사람이 가득한 거리에 나오니
은근히 정신이 사납고 살짝 어질어질해지기까지 했음. 자미가 기사 생활을 한 세월 동안 지도에서만 한두 번 이름을 본 작은 도시인데, 유성우 철이었기 때문인지 눈에 보이는 도시의 건물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 사람들의 상당수가 긴 여행 중인 외지인 같았음.
하긴 닭이 자리잡은 산은 하늘과의 거리만 따지면 제일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유성우 하나를 보겠다고 세계의 지붕 같은 험준한 첩첩산중에 들어가진 않음. 지상의 불빛만 차단된다면 근처에 산이나 높은 건물이 적어 지평선까지 시야가 확보되는 평지야말로 맨눈으로 유성우를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임
실제로 외지인 같은 차림을 한 사람들은 도시의 주민들과 구분이 될 정도로 들뜬 채 어디서나 간밤의 유성우와 근처에 떨어졌을 운석 얘기를 하고 있었음. 다만 개중에 단순 관광객이나 학자만이 아니라 못해도 견습에 준하는 정도는 되어 보이는 무력을 지닌 자들이 다수 눈에 띈다는 게 신경 쓰였음.
대개는 운석사냥꾼이나 의뢰를 받은 모험가, 부유한 관광객의 호위 같은 자들인 듯했는데, 자미의 주의를 끈 건 그런 일반인 동행이 없거나 유성우 이야기에 심드렁한 무장한 자들도 몇 명은 눈에 띄는 것이었음. 물론 그들은 주위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위협적인 분위기를 흘리고 다니진 않았지만,
사상 최강의 기사와 일상적으로 업무 이야기를 하고 견습 아이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던 자미에겐 몸놀림과 눈짓 같은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일반인들 사이에서 칼밥을 먹고 사는 자들을 골라낼 수 있었음. 그럼 저들은 왜 전투와 거리가 먼 이곳에 있는가? 왜 저들끼리 두셋씩 무리지어 다니는가?
도시경비대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데도 왜 성문부터 대로변, 시장, 관공서, 여관 거리에 이르기까지 순찰하듯 돌아다니는가?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미는 그런 '용병' 중 풋내기 같은 자 하나를 점찍어 멀찍이서 감시하다가 그가 활동을 마치고 여관거리로 향하자 뒤쫓았음.
자미는 눈 덮인 험한 산에 다녀온 티가 나는 비무장의 두툼한 옷차림에 오늘 면도를 못 한 데다 도중에 노점에서 산 음식을 봉투 가득 안고 어깨를 움츠렸기에, 대충 보면 잠깐 마을에 내려왔다가 주눅이 든 산사람 같았음. 외지인들 중 적잖은 수가 비슷한 행색이라 누구도 자미를 신경 쓰지 않았음.
그렇게 용병을 따라 들어간 여관은 주머니가 가벼운 외지인들로 북적거렸음. 남은 방이 한두 개라 선택지가 거의 없을 정도. 자미는 망설이다 그 중에서 가장 방값이 쌌던 2층의 1인실을 빌리고 그 방으로 갔음. 음식 봉투를 내려놓고 잠시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뻗고 있자니 절단부가 시큰거렸음.
감각이 어느 정도 마비되는 추운 곳에 쭉 있다가 오랜만에 따뜻한 실내에 들어온 탓일까. 마지막으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았던 게 그저께인 데다 어제는 동상에 걸리기 직전까지 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음. 그렇지만 지금은 이 낫지 않을 상처를 돌볼 때가 아니었음.
자미는 잠시 쉬며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음. 여느 여관이 그렇듯 이곳도 1층은 식당과 술집을 겸했음. 마침 이른 저녁무렵이라 식사하러 온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자미는 별 수 없이 모두의 눈에 띄는 바 앞의 스툴에 앉아야 했음. 하나 둘 복귀한 용병들은 구석 자리의
식탁 둘을 차지하고 이야기하며 식사 중이었음. 거기 모인 자는 다섯 정도. 그 중 넷은 견습 수준의 용병이었고 하나는 그냥 무술을 조금 익힌 일반인 같았음. 주변은 시끄럽고 그들의 대화는 조용했기에 자미는 방금 나온 그릇을 께작이며 기사의 예민한 감각과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려야 했음.
그리고 자미의 귀까지 드문드문 끊기며 건너온 단어들은 심상치 않았음. 사냥꾼, 마법, 운석, 늦어지고 있는 동료 걱정, 그리고 그 산맥의 이름. '기린'처럼 들리는 단어에 이르자 자미는 지금까지 그들을 향해 집중했던 감각을 반대로 뒤집어 그들의 감각이 자신을 향하진 않는지 조심스레 탐지했음.
자미는 코끼리 등 몇몇 기사에게만 알리고 닭을 찾아 조용히 수도를 떠났더랬음. 닭과 그 산에서 지내는 동안 오두막은커녕 그 둘이 돌아다니는 영역 근처에서라도 사람의 흔적을 본 적은 없었음, 애초에 사람이 찾지 않는 험준한 산중에 위치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자미가 있는 게 알려진 걸까?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기사 몇과 금발의 젊은 모험가 하나를 제외하면 닭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음. 그 밖의 사람들이 회백발 여자를 보면서 투구를 쓴 기사를 떠올려선 안 되었음. 하지만 적어도 기사들에겐 새까만 닭과 담청색 기린이 종종 한쌍으로 묶여 다니는 게 평범한 풍경이었고,
기사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별천지 직원들과 니젤의 주민들도 그 모습을 드물지 않게 목격했음. 설마 본의 아니게 영웅으로 알려진 자신 때문에 지금 함께 있는 회백발 여자가 주목을 끌었고 누군가는 그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새까만 닭일 가능성을 떠올린 것은 아닐까? 자미는 식은땀이 돋았음.
그때 용병들이 식사를 마쳤음. 일반인인 자가 위층에 올라가더니 잠시 후 천으로 둘둘 만 긴 칼 같은 것을 매고 내려왔음. 일반인 일행이 합류하자 용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몰려나갔음. 두 사람이 놈에게 당했다면 그것도 갚아줄 뿐이야. 누군가가 그렇게 짓씹듯이 내뱉으면서.
한창 저녁식사가 몰리는 시간대라 식당이 가장 북적일 때 일어섰기에 용병들은 의자 사이로 옆걸음쳐 빠져나가거나 뜨거운 그릇을 쟁반 가득 든 종업원에게 길을 비켜주며 굼뜨게 이동했음. 자연히 그들을 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여럿 있었기에 자미도 무심히 구경하는 척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음.
딱히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지만 그들 대부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음. 문제는 자미에겐 저들이 정말로 초면이란 것임. 대체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지 생각하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눈을 치뜨니 무기를 등에 맨 일반인이 자미를 쳐다보고 있었음. 의아해하는 시선은 그쪽에서도
자미를 어디서 본 적 있던가 생각을 하는 눈치였음. 자미는 태연히 눈을 맞추며 깜빡였고 그자는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일행과 함께 여관을 떠났음. 자미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그릇을 내놓고 서둘러 2층의 방에 뛰어올라갔음. 창문으로 엿보니 용병들은 이미 대로 끝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음
자정이 가까울 무렵 가볍게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자미가 대꾸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닭이 들어왔음. 재빨리 닭의 모습을 훑어본 자미는 닭이 전혀 상처입지 않은 듯하자 아주 조금 불안을 내려놓았음.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선 닭은 자미를 놀리지도 비웃지도 않았음. 너 걔들 만났구나.
자미는 긴장했음. 설마- / 안 싸웠어~ 내가 애도 아니고. 그냥 스토커랄지. 내가 좀 인기가 있었잖아? / 그자들은 '기사사냥꾼'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가득한 유족이야. 자미는 닭을 똑바로 쳐다보았음. 회백발 여자는 눈을 피하듯 발치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음. 그거야 걔들 마음이지.
의자가 쓰러지든말든 벌떡 일어선 자미는 한달음에 회백발 여자 앞에 서서 하나 남은 손으로 어꺠를 꽉 붙들었음.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이런 오해가 너를 위험에 빠뜨리니까...! / 그럼 유족 앞에서 네 형제자매를 살해해야 기사의 몰락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었다고 내가 변명해야 했을까?
자미는 말문이 턱 막혔음. 회백발 여자는 코앞까지 다가온 자미를 여전히 바라보지 않았음. 어떤 '진실'은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말해봤자 의미 없고 도리어 거센 반발을 일으킬 뿐임. 그런데 상대가 받아들이려면 그 '진실'을 알아야 함. 이것은 타인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임.
누군가는 명예롭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던 그 기사들이 저지른 것을 바로잡아야 했지만 자신이 영웅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기사들 사이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닭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음. 격기사가 아님에도 격기사를 위해, 격기사였던 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닭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가는 복수자가 등장하는 것도 당연히 일어나게 될 일로 받아들인지 오래였음. 닭은 어깨의 근육을 뚫고 뼈까지 파고들 것처럼 쥐어드는 자미의 손가락을 간단히 떼어냈음. 근데 왜 아직도 여기 있냐? 안 갈 거야? 별천지.
나린기는? / 잘 숨겼지. 도시 동쪽의 호수로 가. / 그 둘은- / 지금쯤 웬 사막에서 내 욕 하고 있을 듯. / 같이 가자. 잠시 몸을 숨겨. / 싫어. / 죽을 작정이냐? / 글쎄~? 자미는 충혈된 눈으로 회백발 여자를 노려봤음. 회백발 여자는 담담했음. 이것은 새까만 닭이 아닌 회백발 여자의 의지였음.
자미는 자신도 모르게 닭의 이름을 부르려다, 그것이 회백발 여자의 이름이 아니란 걸 떠올리며 혀를 깨물다시피 이를 악물었음. 회백발 여자는 한 손을 들어 자미의 소매가 텅 빈 쪽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쥐었음. 난 말이지, 너와 함께 쫓은 별똥별이 나린기인 걸 확인한 순간 이게 순리구나 싶었어.
담청색 기린, 니젤로 가라. 나는 오래 전에 내 할 일을 다했어. 너도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길 바라. 회백발 여자의 이마가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자미의 이마에 툭 닿았음. 자미는 속삭였음. 넌 지금도 기사를 싫어해? / 응. / 그 중에서 가장 싫은 기사는 나고? / 응.
그 말을 하면서 회백발 여자는 자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음.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그 투명한 눈에 붙들린 채 자미는 손을 더듬듯이 뻗어 회백발 여자의 손을 잡았음. 회백발 여자의 눈을 피할 수 없었던 자미는 자신의 눈을 감았음.
이마와 볼을 간질이던 머리칼이 사라진 느낌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자미는 소리 없이 닫힌 문 앞에 홀로 서 있었음. 망연히 돌아섰다가 바닥에 쓰러진 의자를 발견하고 기계적으로 일으켜세운 자미는 문득 몇 시간 전 자신이 탁자 위에 놓아둔 불룩한 종이봉투를 깨달았음.
추적자가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식당을 피할 닭에게 주려고 노점에서 산 찐빵과 구운 알감자는 차갑게 식어빠진지 오래였음. 내가 사준 밥 먹고 싶다면서. 자미는 중얼거리면서 아직도 회백발 여자의 체온과 숨결과 촉감이 느껴지는 것 같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음. 이마, 눈, 코, 입.
회백발 여자가 머뭇거리다 그 손을 맞잡은 순간, 낙뢰가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관통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자미의 마음 속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떠돌았던 무언가가 명쾌한 확신으로 바뀌었음. 손바닥이 턱을 지나 가슴 앞으로 떨어지고, 주먹을 쥐었음. 자미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석양처럼 빛났음.
11.
닭은 즉시 니젤로 돌아갈 것을 명했지만, 자미는 그 도시에서 고집스럽게 며칠을 더 머물렀음. 극대기가 지났기에 매일 밤 떨어지는 유성의 양이 확연이 줄어들었고, 그 해의 유성우 철은 그렇게 끝났음. 딱히 볼 만한 건 없는 지역이라 외지인들은 들어오던 때처럼 나갈 때도 빠르게 우르르 흩어졌음.
그 사이 어느 운 좋은 자가 숲을 다 날려버린 거대한 운석공에서 모래알만한 운철 몇 조각을 주워 마법사들과 마스터피스 만드는 대장간에서 앞다둬 가격을 높여 부르며 줄을 섰다는 얘기도 있고, 좀 더 먼 황야 쪽에서 운철은 아니었지만 작은 운석을 주운 사람이 있다는 애기도 있었음.
이전까진 의좋았던 동업자들이 우연히 커다란 운철을 줍고 칼부림이 났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었음. 그렇지만 어디서도 나린기 같은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음.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녹색 돌조각 같은 목걸이와 긴 창을 지닌 여자나 그 여자를 추적하는 무리에 대한 소문은 물론 어디에도 없었음.
하다못해 자미가 매일같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대놓고 얼굴을 비추는데 동경의 눈으로 볼지언정 자미의 행적과 목적에 관심갖는 사람조차 없었음. 그 용병들이 복수를 꾀하는 것 치고 무도한 사람들 같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혹시 자미를 인질로 삼을까 염려한 닭이 그들을 꼬리에 단 채
한참 전에 사람이 없는 어딘가로 멀찍이 떠나버린 것일까? 일주일째 되던 날 자미는 터벅이는 걸음으로 성문을 벗어나 도시 동쪽의 호수로 향했음. 작은 마을 정도 크기에 묘하게도 둥그런 형태, 호수를 둘러싸고 한 방향으로 튀며 넘치는 물방울 같이 형성된 야트막한 산세를 보니 그냥 호수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 생성된 거대한 운석공인 모양이었음. 지형을 본 것만으로 자미는 닭이 어디에 어떻게 나린기를 숨겼을지 알 것 같았음. 물속은 부력이 작동하는 공간임. 지상에선 닭이라도 그 지나치게 무겁고 고집 센 나린기를 들고 이동할 때 끙끙거려야 했지만, 그걸 짊어진 채 물속에 걸어들어간다면
몸은 가라앉아도 나린기의 무게는 오히려 어느 정도 덜 수 있을 것임. 물밑을 걷는다는 발상, 기사만이 가능한 힘과 폐활량, 시야가 나쁜 물속에서도 패닉에 빠지지 않는 배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일반인들은 알아도 따라할 수 없지만, 별천지에선 도와줄 기사들을 간단히 골라잡을 수 있을 것임
그리고 닭은 자미라면 당연히 이걸 알아낼 거라 신뢰했음.
한숨을 쉰 자미는 호수를 내려다보던 언덕에서 발길을 돌려 도시로 돌아가는 방향을 가늠했음. 언덕을 다 내려왔을 때, 기다린 것처럼 나무 뒤에서 꾀죄죄한 조난자 꼴을 한 사람 둘이 나타났음. 여. 마을 가는 길은 잘 찾았수? 기사 양반.
자미는 지금은 '힘'을 발동할 수 없어도 습관적으로 주머니 속에 꽂아둔 손을 슬그머니 주먹쥐었음. 자미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은 일주일 전 숲에서 나린기를 숨기러 가던 닭을 뒤쫓다가 자미와 마주친 자들이었음. 이들은 자미가 여관에서 본 기사사냥꾼을 쫓는 복수자들의 일행이었음.
자미는 닭이 이들을 사막 어딘가에 버리고 왔다고 했던 말을 간신히 떠올렸음. 그때 그분들이군요. 덕분에 길을 찾았습니다만.. 무슨 일이죠? 자미는 차분한데 쳐다보는 두 용병의 눈빛이 영 심상치 않았음. 숲속에서 자미에게 길을 알려줬던 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눈높이로 들어보였음.
끈이 달려있지 않은 광택 없는 녹색의 돌조각 같은 그것을 본 순간 자미는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바뀌었다가 아차 했음. 자미의 반응을 본 용병들은 엷은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음. 역시 이걸 알아보시네요. 담청색 기린님. 자미의 몸에 직접 손을 대거나 대놓고 협박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전달하려는 바는 명백했음. 겨우 견습 수준인 용병 몇이 뭉쳐봤자 그 닭이 패하는 그림 같은 건 자미의 머릿속에서 전혀 그려지지 않았음. 하지만 저 목걸이를 놓칠 정도로 어떤 예기치 못할 사태가 멀어진 건 확실했음. 아마도 이들은 닭을 그 정도로 몰아붙이고도 놓쳤기에 수색하다가
자미가 아직까지 이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걸 알게 되어 쫓아온 것 같았음. 자미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포착하는 순간이었음. 뭘 원하지? 자미도 공손한 태도를 버리고 본래의 성격을 드러냈음. 용병들은 긴장했음. 워워, 기린님. 우린 기사사냥꾼한테 핏값을 받아낼 권리가 있거든요
기사 새까만 닭은 죽었다. 1년도 더 된 일이야. / 그럼 이 목걸이의 주인은 누구죠? 유족이라도 된답니까? 아무도 그자의 얼굴을 몰라요. 투구만 벗으면 죄 없는 딴 사람인 척 잘 살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새 젊은 기사 애인을 사귀었을지도. 그 말을 하면서 자미를 노려보는 눈들은
극악무도한 살인마의 탈옥을 돕는 정신 나간 공범이라도 보듯 혐오와 경멸을 숨기지 않고 있었음. 자미는 다시 한번 천천히, 또박또박 물었음.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하지? / 목격자가 되어주십쇼.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그냥 가만히 계시면 기린님의 안전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 목격자? 무엇을?
자미가 캐물었지만 용병들은 더는 말을, 혹은 그들의 정보와 꿍꿍이를 넘기지 않겠다는 듯 얌전히 따라오기나 하라는 태도를 취했고 자미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음. 두 용병은 양옆에서 자미를 포위하고 호수를 둘러싼 숲 깊숙한 곳으로 향했음.
그 길 내내 자미는 용병들의 손에 들어간 목걸이를 생각했음. 현재 확실한 정보는 닭이 최소한 한번은 공격당했지만 빠져나가 지금까지 몸을 잘 숨기고 있다는 것. 닭이 그 괴물 같던 회복력을 상실해 이제는 견습 수준에 불과한 느린 속도로 낫는다는 사실이 머릿속 생각들을 헝클어버리는 걸
어떻게든 차단하려 애쓰면서 자미는 다시 목걸이에 집중했음. 복수자들은 누군가의 유족이기에 남겨진 자가 유품에 갖는 애틋함을 알았음.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새까만 닭의 수수한 목걸이를 눈여겨볼 줄 아는 자들이었음. 장례를 치르지 않을 정도로 죽음이 일상적인 기사들은
일상이 유품과 남겨진 자들로 둘러싸여 있고 스스로도 그 일부이기에 도리어 타인이 지닌 유품에 관심을 갖지 않았음. 그래서 닭을 늘 유심히 관찰하던 자미 정도가 아니고선 닭의 목걸이를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음. 일반인과 기사는 이런 사소한 태도에서도 상식이 어긋나있었음..
중요한 건 닭이 자기 뼈를 내줄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을 유품을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되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것임. 복수자들은 목걸이의 가치를 아니 이 돌조각 하나로 닭을 사지에 불러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음. 그럼에도 목걸이가 아니라 자미를 이용하려는 것이고.
복수자들이 기사라도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위험한 모종의 함정을 준비한 것인가? 혹시 닭이 심한 부상을 당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상태인 것은? 애초에 이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자미는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들려 하는 것을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생각을, 또 생각을 했음...
그날 밤 반쯤 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음. 닭은 누워있던 지붕 위에서 고개만 조금 돌려 우울한 눈으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음. 바늘을 숨기려면 짚더미에,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이 많은 곳에 보내면 됨. 복수자들이 엉뚱한 숲과 산을 뒤지는 동안 닭은 도시로 돌아와 숨죽이고 있었음.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음. 복수자들에게 당한 상처에서 며칠째 피가 그치지 않았으니까. 예전 같으면 하루이틀쯤 푹 자는 것으로 벌써 살이 차오르며 상처가 어느 정도 막혔을 텐데, 지금은 자신이 기사니까 즉사하지 않았을 뿐 숨을 쉴 때마다 살아있는 대가로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했음.
닭이 알고 자미가 알고 세간의 상식이 알듯, 보통은 견습 10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기사 1명을 잡을 수 없음. 닭은 복수자들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니젤 가는 길의 반대 방향으로 유유히 떠났더랬고. 그런데 며칠간의 빙글빙글 도는 술래잡기 후, 용병들은 결심한 듯 큰 소리로 자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닭이 지금 나오지 않으면 지금 그 도시에 있는 자미를 끌고 와 우리의 고통을 너도 눈앞에서 겪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허공에 대고 협박을 떠든 후 걸음을 돌려 도시로 향했음. 물론 숨어서 듣던 닭도 자신이 니젤로 가라고 말했는데도 남의 개인적인 일에 부득불 끼어들겠다고 고집부리며
자미가 그 도시에서 기다리는 걸 알고 있었음. 자미를 아는 닭은 그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음. 아무리 그래도 기사사냥꾼 잡겠다고 나온 복수자들이 사회적 자살을 할 생각이 아니고선 자기들을 정당화할 명분-명예와 정의-을 제 손으로 박살내버릴 짓을 하진 않을 터라,
자미를 이용하려 들 순 있어도 정말로 해치진 않을 거란 말임. 그래서 닭은 처음엔 용병들의 협박을 코웃음치며 무시했지만, 용병들의 아무말이 점차 자미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닭이 기사 사냥을 비롯한 여러 악행(?)을 저질러온 거란 식으로 사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왜곡된 내용이 되고
닭이 스스로 심판받으러 나오지 않으면 자기들이 자미를 그 거짓된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식의 말이 나오자 짜증과 더불어 특유의 호기심이 솟고 말았음. 저들은 닭의 행보를 지나치게 상세히 알았고, 자미가 새 시대의 기사들을 이끄는 기수가 된 데엔 닭의 공헌이 일부 있다는 것도 알았음.
닭은 자신이 사냥한 기사의 유족이 복수하러 올 때 반격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죽어줄 생각도 없었음. 혼자라면 남은 생 내내 잘 도망다니며 숨어있을 자신도 있었고. 하지만 자미가 휘말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짐. 자미는 새로운 기사의 시대가 안착하도록 길을 닦는 자가 되어야 했음.
500년에 걸쳐 내부에서부터 비틀어진 기사들의 새까만 업보에 흠뻑 빠진 자신과 더는 얽혀선 안 되었음. 자미와 둘이서 사람 없는 산과 황야를 떠돌고 이따금 별똥별을 쫓으며 나이를 먹어가는 삶은 어떨지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말을 걸듯이 목걸이를 한번 쥐어본 후 닭은 모습을 드러냈음
저들이 뭘 근거로 어떤 사고를 거쳐 무엇을 달성하려고 자미가 지닌 정당성을 공격하는지 알아내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던 중,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뭔가 메마르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그리고는, 갑자기 몸이 베여있었음. 휘청거리면서 닭은 푸르스름한 빛조각이 선형으로 흩어지는 걸 봤음.
닭의 유난히 뛰어난 시각은 빛의 창이 날아온 등 뒤의 수백미터 밖 언덕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피를 쏟으며 나자빠지는 걸 포착했음. 동료 용병들과 발맞춰 달리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하던 일반인이었음. 그가 지닌 작대기 같은 물건, 마법사들의 짧은 지팡이를 노인이 짚는 크기로
확대한 듯한 그것의 끄트머리에서 방금 푸르스름한 빛의 창이 발사됐고, 닭이 보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관통은 면했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해 옆구리에서 가슴께까지 크게 베인 후, 무기가 폭발해 일반인도 다친 거였음. 그것을 거대한 죽음 그 자체였던 마도병기와 연결하는 건 어렵지 않았음
목걸이가 사라진 걸 깨달은 건 남은 힘을 쥐어짜내 도망친 끝에 도시의 성벽을 몰래 넘어가던 때였음...
...얼어붙을 것 같은 찬 비를 온몸에 고스란히 맞으면서 닭은 목걸이가 없는 가슴 앞의 허공을 움켜쥐었음. 이건 이제 단순히 자신을 향한 눈 먼 원한을 적당히 상대해주는 문제가 아니었음.
이것은 기사와 마법사가 즉시 알아야 할 문제였음. 그리고 이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채 저 초인적인 기사들은 물론 서로에 대해서도 가공할 폭력을 휘두르게 될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대한 예고였음. 닭은 자미의 삶에서 영원히 떠나야 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자미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야만 했음
문제는 자미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였음. 닭은 가슴 위에 얹은 주먹의 텅 빈 허전함을 느끼면서 다른 손으로는 몸의 상처를 촉진했음. 피는 이제야 겨우 멈출락말락 했고 싸우는 건 무리였음. 하지만 다리를 당한 건 아니지 않은가? 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음. 결심을 했다면, 남은 것은 행동이었음.
12.
기사사냥꾼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이 복수자들은 자미를 데리고 그 도시로 돌아갔음. 아무리 기사사냥꾼이라도 일반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이는 바보짓은 안 할 테니 주민들을 방패로 삼으려는 것도 있었고, 자미는 모르는 이유로 크게 다친 동료를 치료하기 위해서도
도시로 가야 했음. 두 용병이 자미를 데려가는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복수자들이 두셋씩 합류했고 7명에서 더는 늘지 않았음. 기사사냥꾼한테 사냥당한 기사의 수는 두 자릿수가 넘는다고들 하는 소문을 떠올리면서 자미는 이 정도 밖에(?) 안 되어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떨지 가늠하기 어려웠음.
닭의 기사 사냥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누구를 왜 사냥했으며 그 수가 몇이나 되는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소문과 좀 달랐으니까. 닭이 마지막까지도 그것에 대해 변명하진 않은 탓에 자미가 아는 것도 여기저기서 정황적인 증거와 증언을 그러모아 겨우 대략적인 얼개만 짜맞춘 정도였음.
닭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자미가 그 정도인데 증오하는 자들은 어떻겠음? 그나저나 저 일반인은 어쩌다 저렇게 지근거리에서 뭐가 폭발한 것처럼 다친 것인지? 닭에겐 저런 무기나 기술이 없었음. 자미가 다친 일반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복수자들이 경계하는 태도를 보여서 더 수상했고.
그녀석에게 당한 건가? 자미가 평이한 어조로 물어보는데 아무도 들은 척 안 했음. 자미는 조금 더 찔러봤음. 새까만 닭은 강한 기사다. 녀석을 죽이고 싶다면 준비가 더 필요할 거야. 기사 한둘쯤은 가볍게 상대하는 녀석이니까. 복수자 중 하나가 자미를 휙 노려보았음.
당신이 우릴 걱정해? 왜, 기사사냥꾼이 우릴 다 죽이고 당신만은 구해줄 거니까? 그런 놈이 제 편이니 겁나는 게 없나 봐? 다른 복수자가 제지하는 손짓을 하자 그 복수자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다물었음. 정중하지만 때때로 자미를 향한 경멸과 증오를 숨기지 않는 복수자들의 태도를 보면
이들은 기사사냥꾼만이 아니라 자미에게도 진심으로 어떤 원망을 품은 듯했음. 그 부분이라면 자미는 이해할 수 있었음. 자미가 기사사냥꾼 소문을 흘리고 다니는 자와 붙어다니면서도 몇 년이고 살아있는 것이 그 자체로 기사 사냥은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이라도 명예롭고 정의롭게 이뤄진 거라는
반증이 되기에, 복수자들은 자미의 존재에도 원한이 있었던 것임. 이들이 하려는 게 복수라면, 어떤 식으로 하려는 걸까? 자미는 그게 단순히 닭이나 자신을 죽이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음. 그럴 거면 방금 자미가 지적했듯 아주 강력한 전력을 데려오든가 용후가 그랬듯 여론을 움직여
불명예스러운 기사 사냥이 실제로 있었단 식으로 고발을 하든가 할 일이었음. 그래, 저들은 사냥당한 기사들의 유족이고 그 죽음을 전혀 납득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복수를 원했음. 그럼에도 용후의 고발로 명예롭고 정의로운 기사 같은 신화가 박살나 여론이 악화되어 기회가 있었던 그땐 가만있다가
이제 와서 죽은 걸로 알려진 닭을 쫓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리고 이 견습 수준에 불과한 무력을 지닌 자들이 자기들의 한계를 알면서도 닭을 꾀어내고 있다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텐데, 그게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아직 니젤을 출발하기 전 들었던 어떤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뭔가가 폭발할 때 몸에 박힌 무수한 파편 중 큰 것 몇 개만 제거된 상태라 끙끙거리는 일반인 복수자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부축해 이동하는 복수자들을 보면서 자미의 머릿속에선 닭이 떠난 후 도시에서 기다리는 동안 떠올렸던 어떤 가설 하나가 수도 니젤의 풍경과 함께 구체화되었음.
기사에게 영광의 시대가 열렸다고들 하지만, 그것이 선언된 순간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지향하고 한마음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음. 사람은 자신이 익숙했던 사고와 문화와 습관을 바꾸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더러 혹자는 완고하게 바뀌지 않으려 하기도 하니까.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기사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지만 자미를 위시한 특수기수의 젊은 기사들과 견습들이 뭉쳐서 추진하는 개혁에 기성의 격기사 모두가 찬동하는 건 아니며, 용후나 동대륙 같은 세력과 내통해서라도 기사를 지금 즉시 무너뜨리려 안달했던 일반인 권력자들도 건재했음.
그리고 누군가는 대놓고 티내지 못할 뿐 자미를 거꾸러뜨리고 싶어 했음. 자미는 그걸 알며 500년 전처럼 한 명의 '영웅'이 체제를 결정하는 건 그 영웅이 사라지는 순간 지속성을 잃고 쉽사리 왜곡될 거라 생각해서 가급적 공훈이 있는 자들 하나하나를 부각시키고 자신은 덜 눈에 띄려 했음.
사라져버린 회백발 여자를 찾아 장기간 중앙을 떠난 건 개인적인 용무도 있었지만, 자미 없이도 기사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좌충우돌하며 새로운 체제를 체화케 하면서 자미에게 집중된 견제를 분산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음. 닭이 자미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싶어 하면서 즉시 쫓아내진 않은 것도
둘 사이의 복잡한 관계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에 대한 이해도 있기 때문일 터였고... 주머니 속 가장 깊숙한 곳에 대충 쑤셔넣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구겨진 휴지조각을 손가락 끝으로 굴리면서 자미는 어깨를 으쓱였음. 그리곤 지금껏 드랬듯 복수자들이 하는 행동을 차분하게 관찰했음.
그날 해가 저물 무렵 진눈깨비가 될락말락 한 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복수자들이 도시에 도착했음. 통금을 넘긴 시각이었지만 성문 경비병들은 자미가 동행하고 있으니 이들을 모두 간단히 통과시켜줬음. 복수자 중 하나가 다친 동료부터 도시에 사는 하나뿐인 의사한테 데려갔고,
나머지는 외투의 후드를 벗겨서 자미의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 데리고 사람 많은 곳 중심으로 도시 한 바퀴를 돈 후 여관거리로 돌아갔음. 관광객 등 외지인이 거의 다 빠져서 한산해졌어도 이곳은 관공서가 코앞인 도시의 중심부였고, 인근에 사람 사는 집이 밀집되어 있었음. 기사 사냥의 증거를
남기지 않고 교묘히 행적을 숨겨온 닭이라면 사람과 건물을 쉽게 파괴해버릴 수 있는 이런 데서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임. 거기까지 예상하면서도 바로 그 부분에서 닭은 무차별 살인마가 아니며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못 하나 비난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닭 본인이 '유족'의 마음을 헤아려
별 말 하지 않았던 일에 자신이 화를 낼 입장은 아니라는 이성이 필사적으로 작동한 덕에 자미는 말을 삼켰음. 복수자들은 미리 빌려둔 큰 홀로 들어가 가구를 벽 쪽으로 밀어서 다 치운 후 복판에 자미를 앉혀놓고 기다렸음. 이런다고 닭이 나타날 것 같진 않은데. 이미 떠났을 수도 있지 않아?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으면서 자미가 도발했지만 복수자들은 무시했음. 호수에서 자미를 데려온 용병이 주머니에서 회백발 여자의 목걸이를 꺼내더니 높이 던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받는 장난을 쳤음. 자미는 그 행동이 매우 거슬리고 싫었음. 그렇지만 자미와 닭의 관계를 모종의 형태로 단정짓고
이쪽을 쳐다보면서 목걸이를 돌바닥에 떨어뜨릴말락말락 하며 손장난치는 도발에 넘어갈 순 없었음. 자미는 침묵했고, 다른 용병이 정신 사납다고 짜증내고서야 그 용병은 장난을 그만뒀음. 잠시 후 일반인 복수자가 복수심이 몸의 고통을 능가한 것처럼 창백한 낯으로 주위를 격려를 받으며 돌아왔음.
그가 준비가 끝났다고 하자 모두 침묵했음. 어떤 불길한 각오를 한 모습들이었음. 그들 중 하나가 자미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음. 기사사냥꾼은 기사가 기어스를 위반하게 만들곤 명예롭지 못하다며 싸움을 걸어서 살해했다죠. 어떤 자는 그게 증명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는데
(다른 복수자가 노골적으로 자미를 노려보며 발을 쾅 굴렀음) 사실이고 정말로 명예롭다면 자신이 아껴서 새 시대의 기수로 떠받든 자라도 예외는 아니어야겠죠? 자미는 안색은 변하지 않았지만 주머니 속에 든 손은 꽉 주먹을 쥐고 있었음.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 같은 무슨 상징이나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싸움에 쓸모 없고 지친 외팔이지. / 기사사냥꾼이 아무하고나 몇년이고 붙어먹진 않을 것 같은데요. 당신, 뒤로는 놈을 도운 거 아닙니까? / 아니, 하... 복수자가 홧김에 막 뱉은 말인 걸 알지만 자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을 수 없었음. ...멋대로들 상상해.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기어스를 위반하게 만들고 싶은가 본데, 알기나 하나? / 글쎄, 이제 알아볼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목걸이를 가지고 놀던 복수자가 그걸 바닥에 내팽개쳤음. 동시에 자미가 몸을 날려 목걸이가 돌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잡아챘음. 목걸이를 손에 쥐고 바닥에 쓰러진 자미를 내려다보면서
복수자들의 분위기가 조용히 험악해졌음. 빼앗아. 누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근처에 있던 복수자들이 자미를 걷어차고 짓눌렀음. 으득,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자미의 손에서 목걸이가 빠져나갔음. 이런, 이게 그자한테 진짜 중요한 물건인가 본데요. 기린님이 먼저 기어스를 말해주실지
이게 먼저 깨질지 한번 해볼까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복수자 하나가 밟히고 깔려 엎어진 자미의 눈앞에 목걸이를 놓더니 칼을 뽑았음. 목걸이를 한번 겨누곤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일반인이 혀 차는 소리를 냈음. 그만. 놈이 언제 올지 알고 장난질이야. 빨리 하자고.
칼을 든 복수자는 억울하다는 듯 자미에게 삿대질했음. 저 인간 얼굴을 봐. 그 유명한 담청색 기린이 울상이잖아. 역시 보통 사이가 아니었던 거지. 한놈은 명예로운 기사들을 학살하고 한놈은 덮어주고! 그래놓고 지금은 기사 개혁을 한댄다! / 그러게. 난 그 꼴 그만 보고 싶어.
일반인 복수자는 지쳐보였고 나머지 복수자들은 침묵했음. 하나 둘 일반인의 어깨를 감싸안거나 눈물을 보이기 시작함. 왜들 그래, 어차피 나 시한부인데. 일반인이 일부러 쾌활하게 구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음. 자미는 이들이 자신의 기어스를 이미 안다는 걸, 그리고 뭘 계획한 건지도 깨달았음.
눈을 비빈 복수자 몇이 자미를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히고 몸을 묶는 동안 자미가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말했음. 너희는 새까만 닭과 나를 모두 죽일 셈이군. / 흥. 우린 누구한테 복수해야 하는지 정도는 압니다. 당신도 증오스럽지만 우린 기사는 아니어도 놈과 달리 명예를 알거든요.
당신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목격한 걸 증언해야 할 겁니다. / 그렇다 쳐. 그럼 녀석도 기사에게 정당한 복수를 한 거라면 어쩔 거지? 복수자들은 찡그리고 화난 낯으로 자미를 쳐다봤음. 이 사람 어디까지 추해지려고- / 그 목걸이는 유품이다. 녀석이 기사에게 빼앗긴 이의 것이지.
기사는 명예로운 영웅이다! 기사에게 죽었다면 악당인 거겠지! / 글쎄. 살해당한 이는 격기사였다. 고작 아이 하나를 지키려고 목숨도, 신분도 내준 것 같더군. 다시 말해 고작 아이 하나를 해치려고 같은 기사들이 그 기사를 죽인 거였다. 그럼 그 아이의 복수는 악하고 정당하지 못한 걸까?
자미의 말에 복수자들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엇갈렸음. 누군가는 더욱 차가워졌고 누군가는 어딘가 신중해졌음. 자미의 말은 진짜가 아니라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의 파편에 즉석에서 지어낸 거짓말을 보탠 거지만 (자미는 이런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써먹었고 자신에게도 가르쳐준 제자에게 감사했음)
복수자들을 흔들기엔 충분했음. 왜냐면 이들이 아는 건 새까만 닭이고 회백발 여자는 조금도 몰랐으니까.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일반인 복수자가 짜증스럽게 소리쳤음. 당신의 말은 진짜인지 뭔지 알 수 없죠. 근데 기사사냥꾼이 우리 가족을 죽인 건 진짜거든요. 내 동생은 놈보다 어렸으니까
당신이 말한 아이의 복수 대상이 될 수도 없고요! 그 말에 복수자들은 정신을 차린 듯 일제히 흉흉해졌음. 여기까지였음. 복수자들은 묶여있는 자미의 몸에서 팔만 빼내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길쭉한 작대기 몸체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석궁의 방아쇠처럼 튀어나온 길쭉한 쇠에 네 손가락을 걸게 했음.
그 기묘한 문양을 본 순간 자미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고, 동료들의 격려와 작별인사 속에서 일반인은 자기 이마에 작대기의 반대편 끝을 댔음. 자미가 온몸을 뒤틀며 저항하자 저쪽에서 예의바르게 손을 모으고 서있던 용병이 회백발 여자의 목걸이를 꺼내며 사납게 웃어보였음.
저한테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일반인이 속삭이며 작대기 끝을 이마에서 심장으로 내렸음. 작대기가 아래로 처지면서 팔이 부러져 힘이 전해지지 않는 손가락 위로 자연스럽게 방아쇠가 눌리고, 작대기 안쪽에서 뭔가가 윙윙거리며 빠르게 회전하는 진동이 울리고, 푸르스름한 빛이 차오르고,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문이 폭발하면서 쏘아진 론누가 일반인의 등을 찌르고, 푸르스름한 빛의 창이 거꾸로 흐르는 낙뢰처럼 천장으로 꽂히고, 론누가 꽂힌 시신이 자미 위로 쓰러지고, 의자째 뒤로 넘어가면서 자미는 피투성이가 된 회백발 여자가 홀 안에 새까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걸 보았음.
13.
일반인 복수자는 누가 봐도 그 자리에서 절명한 모습이었음. 론누에 가슴을 관통당한 상처 때문인지 목과 가슴 사이에 구멍을 내버린 소형 마도병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았음. 시신의 상태와 바닥을 구르면서 금이 간 틈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깜빡거리는 무기를 흘끔 본 닭이 나직이 빈정댔음.
너네, 마법사의 장난감을 몇 개나 갖고 있는 거냐? 어디서 돈이 펑펑 솟나봐? 아니다~ 누가 펑펑 퍼줬다고 해야 하려나. 복수자 몇이 무기를 움켜쥐었고, 누군가가 칼끝으로 바닥에 드러누운 자미와 자미 위로 엎어져있는 시신을 가리켰음. 놈은 적을 직접 죽였어! 기어스를 깬 불명예스러운 기사다!
어쩔 거냐, 기사사냥꾼? 너도 기사라면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복수자가 조롱하듯 외친 소리에 닭이 입매만으로 시익 웃었음. 뭐야. 기린 너 얘들한테 기어스도 털렸냐? 바보야? 자미는 지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음. 닭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오자 복수자들은 위압당한 채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섰음
몸 어딘가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건지 닭이 걸음을 뗀 자리마다 피묻은 발자국이 찍혔고, 기댈 론누가 없어 비틀거리는 몸짓은 누가 봐도 서있는 게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보였음. 몸을 감싼 큼직한 망토와 새까만 옷 때문에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자미는 닭이 바로 저 무기로 공격당해
부상당했고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걸 확신했음. 지금이라면 견습 수준의 무력을 지닌 자들도 머릿수로 덤비면 그 새까만 닭을 잡을 수 있었음. 복수자들은 1차적으론 자기네 동료를 희생시켜서라도 자미가 기어스를 위반하게 해 닭이 자미를 사냥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뜨리려 했고,
자미가 끝내 직접 살인하지 않거나 닭이 '기사 사냥'을 거부할 경우 2차적으로 직접 닭을 죽일 작정이었던 것임. 그래서 숲에서부터 닭을 저 무기로 공격해 약화시킨 상태에서 자미를 인질로 잡은 것이었음. 전부터 자미는 이런저런 일로 닭이 비난을 들을 때마다 나서서 대신 변명하며 감싸곤 했고
단독행동을 선호하는 닭이 어쩌다 다른 기사와 임무를 하게 되면 대개 자미를 동행으로 택한 걸 수도에선 잊지 않았다는 걸 자미는 절감했음. 닭을 건드리면 자미는 나설 것이며, 자미를 건드리면 닭은 어떤 형태로든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래, 이왕이면 우리 둘 다 한꺼번에 제거하고 싶겠지.
어느 쪽이든 후환은 무서울 테니까 말이야... 자미는 마음 속으로 자조했고, 닭은 겁을 주듯 복수자들을 향해 불쑥 몸을 내밀었음. 안 덤벼? 나 무기도 없는데. 닭은 천연덕스레 말하며 비어있는 두 손을 들어보였고, 복수자들은 이를 악물더니 각기 어떤 기사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들었음.
닭은 심하게 다쳤고 맨손이며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 실내라 공간을 크게 쓸 수 없는 악조건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짧고 빠르고 간결하게 움직이며 한방으로 확실하게 무력화하거나 빗나간 무기가 저들끼리 공격하게 만들었음. 건물이나 이 부근에 있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
순식간에 닭이 복수자들로 가로막힌 짧은 거리를 돌파해 자미에게 도달했음. 제압당한 복수자들이 바닥을 기고 부러진 곳을 부여잡으며 신음하는 가운데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닭의 눈이 전류 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비치는 자미의 샛노란 눈과 마주쳤음. 닭이 멈칫한 순간 자미가 소리쳤음. 폭발한다!
고개를 휙 돌린 닭은 바닥에 나뒹굴던 소형 마도병기의 몸체가 쩍쩍 갈라지며 푸르스름한 빛의 구체가 불길하게 회전하는 걸 발견했음. 급히 시신을 밟고 론누를 뽑으면서 닭은 출구가 사납게 웃는 복수자들에게 가로막혔으며 구멍 뚫린 천장으론 멀리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파악했음. 무기의 균열 틈으로 엿보이는 핵에 푸른 빛이 응축되는 기세가 아주 심상치 않았고, 폭발이 일어난다면 그때 언덕에서 일반인이 저격한 직후 무기가 폭발했던 것보다 규모가 클 것 같았음. 그때 일반인은 소형 마도병기에 응축한 마력을 제때에 발사했기에 불량하고 약한 무기의 몸체에
잔류한 불안정한 힘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방금 자미의 손에 눌려 발사된 무기는 힘이 충분히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발사되어 뭔가 고장나면서 지금도 핵이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 같았음. 론누로 자미와 자신은 지킬 수 있지만 복수자들과 부근의 무관한 주민들까지 지키는 건 무리였음
이 모든 관찰과 판단이 0.1초 이내에 이뤄졌고 닭은 론누를 세우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자미 앞에 버텼음. 닭의 선택은 분명했고 이로 인해 발생할 피해도 악명도 모두 자신이 감수하겠다는 결기가 이 자리에서 다 같이 죽더라도 기사사냥꾼과 자미를 제거하고 말겠다는 복수자들의 결기와 부딪쳤음.
그 등을 향해 자미가 속삭였음. 나를 봐. 명령이나 요구가 아닌 애원 같은 간청이었기에 회백발 여자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음. 자미가 부러졌지만 묶여있지 않은 팔을 길게 뻗고 있었음. 허락해줘. 다시 한번 자미가 속삭였음. 눈앞에서 웅웅 소리를 내며 불길한 푸른 빛이 시시각각 부풀어오르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렇지만 자미의 눈엔 어떤 확신이 있었음. 회백발 여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당하고 겪고 느꼈던 자미라는 사람을 알았음. 그것이, 바깥의 겨울비처럼 차가운 이성적 판단과 사방의 생기를 빨아들이듯 숨 막히도록 응축된 저 푸른 빛처럼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떠나
회백발 여자로 하여금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자미의 손을 맞잡게 했음.
"허락한다."
극도로 응축된 푸른 빛이 마침내 그 힘을 사방으로 폭발시켰고, 자미가 맞붙은 두 손바닥을 한쪽으로 끼릭 돌렸으며, 푸르스름한 빛이 깃들면서 미소짓는 눈을 보며 회백발 여자는 큰 소리로 광인처럼 웃고 싶어졌음
그리고는 투둑 끊어진 줄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자미는 온몸에서 담청색의 번개 같은 빛을 뿌리며 자기 몸으로 폭발하는 소형 마도병기를 덮치고 있었음. 지우스! 누군가가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자미는 자기 마음이 만든 상상일 거라 생각하며 1년 이상의 시간 동안 축적된 '힘'으로 폭발을 견뎠음.
눈을 뜰 수 없는 시린 빛이 작렬하고, 무기의 핵을 끌어안은 채 엎드린 자미의 몸이 덜컹 흔들리고, 뒤늦게 파동이 전해진 것처럼 건물이 부르르 떨렸음. 돌가루와 나뭇조각이 머리 위로 으스스하게 쏟아졌음. 위층에선 갑자기 바닥이 뚫려 확인하러 오던 민간인들이 지진이냐며 비명을 질렀음.
무릎을 꿇은 자미의 품에서 산산이 깨지며 폭발하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검게 그을리고 깨진 핵이 툭 굴러떨어지더니 곧 먼지처럼 바스라졌음. 어깨를 짚는 손길에 돌아본 자미는 자신이 두른 푸른 벼락 같은 빛 속에서 핏기 하나 없이 죽은 사람 같은 회백발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됐음.
자미가 산에서부터 두텁게 입고 내려왔던 외투와 상의가 폭발의 충격으로 다 찢겨져 넝마가 되어버렸고 군데군데 탄 자국도 있었지만 자미의 몸은 원래 지녔던 흉터와 약간의 그을음 말고는 아무 탈도 없었음. 하지만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었던 도박이었던 건 사실임. 무엇보다도 저 마도병기는
자미의 '힘'에서 힌트를 얻은 마법사가 그 원리를 응용해 설계한 장치였기에, 두 힘이 충돌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몰랐음. 다행히도 이 무기는 그냥 과열된 흑색화약처럼 혼자 폭발하고 말았지만... 자신을 응시할 뿐 꼼짝도 하지 않는 회백발 여자에게 자미가 뭐라 말을 건네려 애쓸 때
문간에서 우당탕 거리며 비명이 터졌음. 검고 붉은 인영이 기사도 눈으로 쫓기 어려운 잔상을 남기며 스쳐간 자리에서 복수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쓰러졌음. 그리고는 터덜터덜 게으른 느낌조차 있는 발소리가 널브러진 복수자들의 몸을 타넘어 홀 안으로 들어왔음.
웬일로 날 부르기에 하던 거 접고 오긴 했는데.. 이게 다 무슨 난리지? 새까만 옷을 입은 백발 남자와 붉은 옷을 입은 흑발 여자는 자미도 회백발 여자도 아는 자들이었음. 쩔그렁, 쇠가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회백발 여자가 쓰러졌음. 자미는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쳤음. 와서 돕기나 해!
피부로 접촉하고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음. 회백발 여자는 정말로 심각하게 회복력이 저하되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상태로 도시를 수색하고 자미를 찾아낸 것이었음. '기사사냥꾼'에게 복수하겠다며 자미를 잡아간 자들을 쫓으면서 회백발 여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열이 끓고 진득한 피가 끝없이 흐르는 몸을 끌어안은 자미는 다시 까마귀를 휙 돌아봤고 위협으로 받아들인 개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음. 괜찮으니 비켜줘. 진귀한걸? 위대하신 사령탑이 제정신이 아니야. 마치 그때 같은걸. 까마귀는 빈정거리며 바닥에 흩어진 소형 마도병기의 파편을 주워들었음.
'열쇠'는 찾은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며 자미의 온몸에서 파직거리며 흩날리는 푸릇한 빛을 흘끔 본 까마귀는 곧 그의 품에 안긴 채 의식을 잃은 회백발 여자로 눈길을 돌렸음.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치료용 카톤을 몇 장 꺼내 눈으로 보이는 가장 급한 상처부터 지혈했음.
회백발 여자의 얼굴을 가급적 피하면서 입을 꾹 다문채 응급처치를 하는 까마귀의 얼굴에선 평소의 까불거림이나 날카로움을 찾을 수 없었고, 자미는 늘 그랬듯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았음. 그러는 사이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기웃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음. 어느 틈에 쓰러진 복수자들을 둘러보고
온 개가 까마귀에게 내민 손바닥에는 녹색의 광택 없는 돌조각 같은 목걸이가 놓여있었음. 개나 까마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미는 목걸이를 낚아챘음. 부딪친 손바닥이 아프다는 듯 살살 흔들면서 까마귀가 비로소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었음. 뭐,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도움을 줘야겠지. 가라.
회백발 여자가 사람들에게 더 노출되어 좋을 일은 없었고, 까마귀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이 얽힌 이 일에 대해 많은 걸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 자미는 두 번 돌아보지 않고 한 팔로 회백발 여자와 론누를 안은 채 바닥을 박차 순식간에 거리를, 도시를, 숲을 벗어났음. '힘'의 시간이 다해가고 있었음.
14.
중앙에서는 근래들어 지하에서 암암리에 파란 불을 뿜는 작대기에 대한 소문이 도는 걸 포착하고 있었음. 까마귀가 이끌었던 마도병기 연구에 참가한 대륙 각지의 마법사들 중엔 그 잘난 머리로 마도병기를 건장한 성인이면 들고 다닐 크기로 소형화할 생각을 한 자들도 당연히 있었고,
그런 아이디어가 마스터피스에 응용되기도 했음. 그렇지만 애초에 까마귀가 마도병기를 개발한 건 인위적으로 국가 단위의 전쟁억지력을 창출하려는 거였지 일반인들이 초월적인 힘을 휘둘러 손쉽게 서로 죽이란 건 아니었음. 적어도 지금은 아님. 그래서 까마귀는 불법개조를 마구 때려잡는 중이었음
도시에서 닭을 기다리는 동안 자미는 수도에 자신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 복수자 무리의 일반인이 지닌 정체 모를 무기와 연결될 가능성을 떠올렸고, 오랫동안 잊어먹은 채 주머니 구석에 처박아놔서 아직 기능하는지 의심스러웠던 카톤을 꺼내 까마귀에게 연락했음.
자미가 도시에서 일주일을 소일거리 없이 머물렀던 건 한편으로는 닭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까마귀를 기다린 것이었음. 그리고 까마귀도 자미의 연락을 받자 수도에서 어떤 치졸한 무리가 자미한테 모종의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을 우려해 무작정 출발하기보다 조사부터 시작했고,
우려가 사실일 가능성을 포착하자 불법개조 마도병기를 때려잡을 겸 자미를 해치려는 음모의 증거와 증인을 잡을 겸 가장 발이 빠른 기사인 개의 도움을 받아 수도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거였음. 나중에 까마귀가 자미에게 설명해주기로, 자미로 대표되는 젊은 기사들의 개혁행보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그 극우스런 자들이 자미가 어떤 이유로 갑자기 장기휴직을 하고 코끼리가 보호하는 니젤을 벗어나 혼자 훌쩍 떠나자 기사 사냥으로 살해된 의혹이 있는 기사의 유족으로 견습 정도는 되는 무력을 지닌 자들과 접촉해 자미가 마지막까지 새까만 닭의 기사 사냥 의혹을 덮어줬으니
실은 협력자일지도 모른다고 의혹을 부추긴 후 그들로 하여금 불법개조 소형 마도병기를 들고 자미를 추적하게 한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음. 죽었다고 알려진 새까만 닭이 진짜로 투구를 벗고 자미와 함께 지내는 게 발각된 건 그 과정에서 정말로 우연히 얻어걸린 것이었음...
그런 전말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는 건 좀 더 훗날의 일임. 지금 자미는 의식이 없는 회백발 여자를 등에 업고 망토로 자신이 몸에 고정한 모습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음. '힘'이 발동한 5분 중 실제로 회백발 여자를 데리고 달리는 데 사용한 시간은 2, 3분에 불과했지만, 쌓인 힘이 1년치 이상이다보니
그 시간 동안 자미는 사상 최강의 기사인 순백의 코끼리가 그렇듯 말도 안 되는 힘과 속도로 뛰어오르고 달리는 것이 가능했음. 그 힘이 소진되어가는 0.001초도 아까워하며 자미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달렸음. 산을 뛰어넘고 물 위를 달리며 어떻게 한 건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질주한 끝에
시간이 아직 10여초 남았을 때 자미는 두 사람의 오두막에 도착했음. 겨우 7, 8일 떠나있었지만 불을 떼지 않은 두 채의 오두막은 눈과 얼음 속에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옹송그린 채 얼어붙어 있었음. 자미는 그때 이후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지 않았던 닭의 오두막에 과감히 들어가 불을 떼고
오래 전 자신이 누웠던 그 조잡한 침상에 닭을 눕혔음. 자미가 '힘'을 사용하면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동안 등에 묶여 있었던 회백발 여자의 몸에서 상처가 새로 터지거나 하진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꽁꽁 얼었던 오두막이 데워지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자미의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회백발 여자는
조금 돌아온 것 같던 핏기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음. 당장 뭐라도 없나 싶어 미친듯이 흩어진 상자를 열어본 자미는 그 안에서 운석인 듯한 돌 여러 개와 여러 지역에서 여러 날짜에 걸쳐 그린 성도, 그리고 운석을 주운 지역의 인구에 관한 기록만 찾아냈음. 약이나 기타 생필품은 하나도 없었음.
자미는 자신을 돌보는 일에 지극히 무심했던 회백발 여자에게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 오두막으로 뛰어가 얼어붙어 뻣뻣해진 곰가죽과 아주 조금 모아놨던 약초 전부를 들고 돌아왔음. '힘'의 남은시간이 0초가 된 순간 자미는 회백발 여자를 품에 안고 곰가죽을 덮어쓴 채
나란히 누워있었음. 1년치 '힘'을 한꺼번에 소진한 반동이 밀려들면서 더는 버틸 수 없었음.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메마르고 창백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까무룩 잠들었음...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자미는 온몸이 아파 끙끙거렸음. 힘의 반동 탓이기도 하지만, 복수자들에게 잡혀 두들겨맞고
하나 남은 팔이 부러진 걸 잊은 채 그 팔로 그 모든 힘 쓰는 일을 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음. 신음하던 자미는 눈을 뜨기도 전에 옆자리가 빈 것을 깨달았음. 회백발 여자의 침상은 관처럼 좁아서 두 사람이 누우려면 몸을 딱 붙여야 했기에 부재도 금방 알 수 있었음. 눈을 번쩍 뜬 자미는
미지근히 데워진 오두막에서 화덕의 불을 지켜보며 앉아있는 회백발 여자의 등을 발견했음. 가죽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선 자미는 자신의 몸에서 팔이 부러진 곳과 반대편 팔의 절단부에 새 붕대가 감긴 걸 깨달았음. 회백발 여자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것처럼 고개짓했음. 얜 대놓고 막 저지른다니까.
기사가 그래도 되냐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살아있었음. 자미는 주저없이 다가가 뒤에서 회백발 여자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음. 회백발 여자는 움찔하며 어색하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버려뒀음.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자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음.
사과해야 할 게 있어. 거기서 네가 곤란을 겪은 건- / 됐어. 어차피 나에게 돌아올 일이었고, 네 일이 그런 식으로 엮여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네가 사과하지 마라. 회백발 여자는 역시나 돌아가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 그 영민함 덕에 둘 사이에서 많은 대화가 생략될 수 있었지만,
자미는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대화의 생략 또는 부재를 더는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생각했음. 자미는 포옹하던 팔을 풀고 그 앞으로 가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회백발 여자를 올려다보았음. 얘기좀 해. 그렇게 말을 걸면서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우울한 눈과 눈을 마주치려 애썼음.
회백발 여자는 정말로 우울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음. 가슴 앞의 텅 빈 공간으로 손이 가려다 흠칫하며 물리곤 그 손으로 푸석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리며 고개를 내젓는 식이었음. 넌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수도에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했잖아. 나를 그만 내버려둬.
자미는 주머니에서 잘 보관하고 있었던 녹색 돌조각을 꺼냈음. 닭이 얼어붙었음. 끈이 떨어졌지만 돌조각은 원래 모습을 거의 온전히 지니고 있었음. 자미는 목걸이를 닭의 손바닥에 쥐여줬음. 그런 말은 오래 전 그 실험대련 후 네가 나를 택하기 전에 했어야지. 닭의 낯에 혐오감이 어리자 자미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음. 내가 원해서 여기 있는 거야. 사실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난 여기 오기 전에 은퇴했어. / 뭐? 너 이..! / 한 명의 영웅이 모두 감당할 수는 없다는 걸 네가 가장 잘 알면서 왜 너는 그런 영웅이 되려 하는 건데. 너는 네 할 일을 다 했다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러 가라고?
기사 담청색 기린의 일은 이 팔을 잃은 순간 끝났어. 그 말에 닭이 자미의 멱살을 잡으려다 상의를 입지 않은 몸에서 잡을 곳을 못 찾고 허공을 움키며 으르렁거렸음. 자미는 하나 남은 손을 들어 자신의 것보다 조금 큰 그 주먹을 감싸쥐며 말을 이었음.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여기에 있어.
네가 나에게 손을 빌려주면서 '힘'의 사용을 허락했을 때 비로소 나도 깨닫게 됐거든. 담청색 기린이라는 기사는 지독하게도 너를 속이고 이용했지만 (이새끼는 최악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회백발 여자가 헛웃음을 흘렸고 자미는 같이 웃으며 닭의 주먹에 이마를 맞댔음) 나란 놈은 말이야...
...그때 여관에서 손을 맞잡은 순간 자미는 자신이 '힘'을 사용하려면 닭이 있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이유를 깨달았음. 하지만 자미는 이것이 단순히 제 필요에 의해 멋대로 회백발 여자의 손을 쓰는 행위가 되는 건 결코 원하지 않았음. 자미가 진정으로 원한 건 닭의 "허락"이었으니까.
사상지평의 사용을 "허락한다." 곁에 있는 걸 "허락한다." 내일도 모레도 함께 살아가기를 "허락한다."
기린은 기사이기에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자미는 회백발 여자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가슴 속에서 끌어냈음. 네가 기사를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자신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 내가 네 곁에 머무는 걸 허락해줘. 그 목걸이를 나도 함께 지키면 안 될까?
회백발 여자는 자미의 눈을 응시했음. 표정을 알 수 없어야 하는데도 어쩐지 무슨 표정인지 알 것 같았던 투구 속에서 회백발 여자는 늘 저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표정을 지었던 거구나, 새삼스레 자미는 그런 생각을 했고, 마침내 회백발 여자가 대답했음. 시간을 줘. 나는.. 아직 답할 수 없어.
자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백발 여자의 주먹에서 천천히 손을 뗐음. 회백발 여자는 잠시 목걸이가 든 주먹을 내려다보다 일어나 말없이 밖으로 나갔음. 자미는 안달하지 않았음. 회백발 여자가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니까. 그래서 자기 오두막으로 돌아가 옷을 찾아 입고 오두막의 안팎을 청소하기
시작했음. 어제 자신이 약 찾는다고 닭의 오두막을 뒤집어놨던 게 생각나 그쪽도 청소하고 정리하러 들어간 자미는 열어놨던 상자들이 대충 닫힌 채 벽 쪽에 치워진 걸 발견했음. 자미가 아직 자고 있던 아침나절에 회백발 여자가 먼저 치웠던 것.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떠올린 자미는
성도가 들어있었던 상자를 끌어내 기록을 찬찬히 뒤적였음. 어느 것이든 회백발 여자가 지난 1년 동안 쉬지 않고 별똥별을 쫓고 성도를 그리며 누군가를 찾았다는 증거였음. 그런데 가장 최신의 성도는 몇주전 자미가 그린 것이었음. 그 사이 성도를 그리는 주기가 있었는데도 회백발 여자는
업데이트하지 않고 넘어갔음. 왜냐면 회백발 여자는 자신이 알고 싶었던 걸-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걸 이미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 씁쓸한 기록들을 묵묵히 바라보던 자미는 이윽고 성도를 상자 안에 정리한 후, 뚜껑을 덮어 원래 자리로 치웠음. 그리고 남은 하루 동안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수를 끓이고 장작을 보충하고 저녁을 준비하며 분주하고도 느긋하게 하루를 보냈음. 해 저물녘이 되어 돌아온 닭은 자미가 오두막 앞의 모닥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걸 보더니 말없이 가져온 자루를 내줬음. 자미가 무척이나 먹고 싶어 했던 채소가 들어있었음. 물론 자미는 표정이 안 좋아졌음.
고맙지만 무리하지 마. 어제는 네가 죽는 줄 알았어. 자미가 염려하자 회백발 여자는 한숨을 쉬곤 모닥불 앞에 의자 용도로 둔 큼직한 나무토막에 걸터앉아 불 쪽으로 긴 다리를 쭉 뻗다가 웅크리며 아야야 하고 앓는 소릴 냈음. 무리 안 했어. 아는 사냥꾼이 근처에 있어서 교환해온 거야. 왜.
겁이라도 났어? / 당연히 무섭지. / 그런 것치고 평소처럼 뻔뻔한 낯인데. / 뻔.. 하... 됐어. 자미가 지끈한 티를 내며 채소자루를 가져가려 하자 닭이 팔을 뻗어 도로 채갔음. 앉아있어. 그리곤 론누를 오두막 벽에 기대 세워놓고 손을 씻은 후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음. 하긴 채소 다듬는 작업은
한 손으로 할 만한 일은 아니었음. 자미는 얌전히 도로 앉아 솥에 자신이 준비한 재료를 부었고, 회백발 여자는 빠르게 손질을 마친 재료를 갖다준 후 자미 옆에 나란히 앉았음.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나서도 둘은 그렇게 불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있다가, 밤이 깊자 각자 오두막으로 돌아갔음
오두막을 보강하고, 환기시설 같은 주거환경을 정비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런저런 세간을 제작하고, 낚시를 가고, 수액을 채취하고, 벽을 갈라 안쪽으로 두 오두막을 연결하는 문을 달고, 이따금 기상이 좋을 때면 같이 산봉우리로 올라가 별똥별을 찾거나 론누를 타고 천천히 비행하고,
땅이 녹을 무렵에는 텃밭을 만들고, 나물과 약초를 찾고, 밤에는 함께 불을 바라보고. 그 계절은 그런 식으로 지나갔음.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은 채 하루하루 주어진 것들로 살아가면서, 회백발 여자는 뼛속까지 기사인 자미가 언제까지 이 정적인 은둔자의 삶을 버틸 수 있나 시험하는 것도 같았음.
하지만 자미에게는 니젤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치러야 할 기사의 임무였음. 자미는 자신 없이도 수도에 남은 젊은 기사들과 견습들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몸에 익힌 것들을 모조리 발휘하며 치열하게 생각하고, 우당탕탕 좌충우돌하고 실수도 하고 퇴행도 조금 겪어보면서 꾸준히,
기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까지 포용하며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익힐 수 있을 거라고 믿어야 했음. 저 500년 전의 영웅도 인정한 기사인 회백발 여자가 스스로 그 삶에서 벗어나고 있다면, 자미도 못할 건 없었음. 자미는 회백발 여자가 "허락한다"고 말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음.
그리고 그 해의 마지막 눈이 그치고 마지막 겨울의 별자리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은 밤, 회백발 여자는 오랜만에 운석 사냥을 하려고 산봉우리를 올라갔음. 성도를 그리지 않은지 한참 됐고 한번 더 운석을 주웠을 때는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인구조사를 할 건덕지도 없었던 터라,
오랜만에 산에 올라 이따금 떨어지는 별똥별을 지켜보다 정말 오랜만에 지상으로 추락한 것이 확실한 걸 발견했을 때 회백발 여자도 자미도 다소 느긋하게 론누를 타고 날아갔음. 그렇지만 산맥을 떠나 추정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지상의 풍경이 확연히 심상치 않은 형태로 바뀌고 있었음.
적어도 영웅이나 닭 정도 되는 강한 기사들이 무리지어 싸움을 벌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형이 바뀔 정도로 지표면이 할퀴어졌고 이 지역에 있어야 할 작은 마을 두어 개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있었음. 이것은 방금 떨어진 운석이 초래한 게 아니었음. 누가 봐도 명백히 사람이 일으킨 짓.
이번 운석은 자그마해서 원래 여기 있던 바위가 깨진 자갈인지 하늘 너머에서 떨어진 돌인지 분간하기가 조금 어려웠고 운석공도 그렇게 크지 않았음. 이미 상자 가득 운석과 운철을 보유한 회백발 여자는 욕심내지 않고 주변을 더 둘러보고 싶어 했음. 회백발 여자를 따라가며 파괴의 흔적을 살핀
자미는 시신의 일부가 증발된 것처럼 크게 훼손된 흔적들을 발견하고 낯이 어두워졌음. 아무래도 까마귀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회백발 여자는 코웃음쳤음. 기사가 사라진 시대엔 마도병기를 든 병사들이 행진하겠지. 인간의 욕심을 안다면 그런 건 애초에 만들지를 말았어야지.
딱히 까마귀를 변명해줄 의리(?)를 느끼지 못한 자미는 어깨만 으쓱이고 아무 말 하지 않았음. 중앙에서는 나날이 빠르게 개량되고 소형화되는 마도병기로 무장한 보통의 사람들이 용후 사건을 통해 본질은 구름 위의 영웅이 아니라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인 걸 깨달은 기사를 상대로
또다시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충돌을 일으키고 있을 텐데.. 각자 이유가 있다지만 자신들이 정말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자미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깊은 호흡으로 다스리려 했음. 그때 회백발 여자가 멈칫하더니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음. 들려? 의아해하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인 자미는 곧
기다리지 않고 한발 먼저 뛰쳐나간 회백발 여자를 굳은 낯으로 뒤쫓아 달렸음. 마을이 있었던 잔해 사이에서 아주 희미했지만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음. 한달음에 소리의 진원지로 달려가 무너진 지붕을 조심스레 치우자 그 아래에서 부모인 듯한 어른들의 시신에 깔린 아이가 발견됐음.
회백발 여자는 말없이 망토를 벗어 흙먼지와 재를 뒤집어써 온통 잿빛으로 보이는 아이를 감쌌고, 자미가 한 팔로 아이를 안아 어르는 동안 물통을 꺼내 연신 기침을 뱉는 아이의 얼굴을 씻기고 머리에 앉은 먼지를 털어냈음. 이름이 뭐니? 자미가 팔에 안긴 아이한테 (딴에는) 자상하게 물었지만
아이는 콜록거리고 울면서 도리질할 뿐 대답을 못 했음. 이런 어린애를 론누에 태울 순 없어. 한동안 걸어야겠다. 아이의 얼굴을 마저 씻기면서 회백발 여자가 말했고, 자미는 고개를 끄덕였음. 그러다 아이가 갑자기 뚝 그친 걸 깨달았음. 아이는 울다가 대충 세수해서 엉망인 얼굴로 회백발 여자를
아니 회백발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가슴 앞에서 흔들리는 녹색의 광택 없는 돌조각 같은 목걸이를 쳐다보고 있었음. 아이가 목걸이가 신기한가 봐. 그렇게 말하며 눈을 든 자미는 회백발 여자가 아이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봤음. 자미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숙여
이제 대충 갈색으로 보이는 머리칼과 담청색 눈을 지닌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음. 아는 아이야? 자미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회백발 여자는 자미를 쳐다보았음. 그 투명한 눈동자와 마주친 한순간 자미는 깨달았으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확신을 느꼈음.
자미는 팔 하나를 잃은 걸 그리 아쉬워한 적은 없었지만, 남은 팔로 아이를 안았기 때문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지금만큼은 그것이 정말 아쉬웠음. 이 아이에겐.. 우리가.. 다시 한번 물어봐도 될까? 대신 자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허락을 구했음.
그리고 마침내 회백발 여자가 대답했음.
- 완전 적폐날조왜곡망상 지와지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