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드래곤 에이지 앤솔로지 [테다스의 놀라운 물건들] 참가작

쉽: 렐리아나/카산드라 (前 렐리아나/여워든)

앤솔 제목의 컨셉(?)에 맞춰 해냈다 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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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요원이 경례를 붙이고 뛰어가자 렐리아나는 옅은 입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똑바로 뜨기 힘들 만큼 시린 햇볕을 반사하는 눈언덕 저 끝에서 카산드라는 아직도 라벨란, 컬렌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진 않았지만 카산드라의 모양 좋은 입매는 읽을 수 있었고, 렐리아나는 성채, 인퀴지션, 보급 같은 단어들을 알아보았다. 라벨란이 끄덕이자 카산드라는 어깨를 툭 쳐주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드라스테의 전령이 약속한 요새를 한시라도 빨리 두 눈으로 보고 싶어 언덕을 올라가는 피난민들을 지나쳐 카산드라가 걸어 내려왔다. 그 걸음이 미묘하게 절뚝이는 것을 렐리아나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너무 오래 잊혀진 장소라 길이 좋지 않아. 이 인원을 모두 수용할 상태도 아니고. 오늘 중에 입성하긴 어렵겠어.”

 “동의해. 길을 찾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서 쉬고, 장작과 식량을 조금이라도 보충해야 해. 한동안은 외부에서 보급을 받을 수 없을 테니까. 전령한테 한 말도 그거지?”

 “그래.”

 

 카산드라는 렐리아나가 기대선 짐마차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서서 팔짱을 끼었다. 짐마차는 널에 새겨진 나이테까지도 새똥 냄새가 배어있었고 그늘진 방향이라 훨씬 추웠지만 카산드라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렐리아나는 카산드라의 몸을 눈짓했다.

 

 “저 많은 마법사들이 우리 동맹인데 솜씨 좋은 영혼치유사는 없다니 애석한 노릇이네.”

 “어쩔 수 없지. 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더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멀쩡해.”

 “눈사태가 챈트리를 덮쳤을 때 휘말려 생매장당할 뻔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좋아. 우리가 늘 하던 게임 아니겠어. 당신이 괜찮은 척한다면, 난 괜찮다고 믿는 척해야지.”

 “게임이 아니라 정말 괜찮다고. 당신이 걱정할 것 없어.”

 

 코웃음치는 카산드라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보면서 렐리아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전령을 집어삼킨 불길 앞에서 카산드라가 조금 더 고집을 부렸더라면, 배릭이 카산드라를 설득하지 못했더라면, 무너진 돌이 섞인 눈더미 속에서 세라가 시커의 갑주를 분간해내지 못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렐리아나. 당신이 동의해준다면, 나는 엘라나 라벨란을 인퀴지터로 추대하고 싶다.”

 

 여상스런 어조의 말에 실린 갑작스런 무게에 렐리아나는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카산드라의 생각은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다가왔다.

 

 “조시와 컬렌은?”

 “아직. 하지만 우리가 말을 꺼내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저기서 하자.”

 “좋아.”

 

 카산드라는 짐마차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켜려다 흠칫했다. 불만스러운 낯으로 몸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만져보는 카산드라를 보며 렐리아나는 물 위에 떨어뜨린 물감처럼 온갖 색이 어지럽던 멍자국들을 떠올렸다. 그런 상처에 쓰는 마법은 없다. 약을 바르고 그저 시간이 지나길 기다릴 뿐. 팔짱을 단단히 끼고 저편으로 눈을 돌린 렐리아나는 문득 언덕 위에서 라벨란이 솔라스와 대화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챈트리 신자인 인간의 무리와 역시 챈트리 신자인 소수의 도시엘프 사이에서 데일스 엘프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지닌 이에게 좀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왼손의 시선을 따라 같은 광경을 보면서 오른손이 중얼거렸다.

 

 “이제 디바인의 오른손으로서 마지막 임무가 끝나는군.”

 

 체인메일 뒤에 누가 눈덩이를 쑤셔 넣은 것 같은 오한이 느껴졌다. 천천히, 태연히 고개를 돌린 렐리아나는 카산드라의 낯에서 온종일 노동하고 집에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은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을 보았다. 몇 번이고 억지로 목울대를 움직인 끝에 겨우 튀어나가려는 말을 삼켜낸 렐리아나는 인사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려 조세핀이 재고를 확인하는 곳으로 향했다. 카산드라의 눈길이 자신이 아니라 안드라스테가 선택한 엘프에게 붙박혀있는 것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카이홀드의 계단에서 세상을 향해 새로운 인퀴지터가 선포된 날, 카산드라는 워테이블을 떠났다.

 

 

 

2.

 

 벌써 너덜거리는 훈련용 더미 앞에서 손끝으로 땀을 떨어낸 카산드라는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사슬에 조금 녹슨 흔적이 있는 조그만 로켓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카산드라는 심호흡을 하고 로켓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을 보면서 카산드라의 낯이 망연해졌다.

 

 “시커 펜타가스트, 저를 찾으셨죠?”

 

 카산드라는 로켓을 닫아 주먹 안에 감춘 채 칼을 집어넣으며 몸을 돌렸다. 하딩은 뻣뻣하게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명령이 아니라 개인적인 요청이니 긴장할 것 없어. 어땠지?”

 “옙. 레드클리프 부근에서 본 건 확실해요. 근데 대부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카산드라는 하딩의 머리 위 저편의 탑을 흘끔 보았다. 까마귀 몇이 배회하는 원뿔형 지붕 아래 가장 높은 층의 발코니에서 후드를 쓰고 이쪽을 바라보는 인물을 발견한 카산드라는 명치 언저리가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스카이홀드에 들어선 후 렐리아나의 얼굴을 본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카산드라는 기억할 수 없었다. 들리는 소문들은 헤이븐 때보다도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다, 렐리아나의 곁에 조세핀이 있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이 거리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카산드라는 목례를 했다.

 

 “그럼 힌터랜드에서는 그 지역만이 가능성 있는 것이군.”
 “네…. 그 전에 걔를 어떻게 하셔야 하겠지만요.”
 “음. 퍼렐던은 넓고 이 일은 급하지 않으니 상관없겠지. 정찰병 하딩, 사의를 표한다. 시스터 렐리아나에게는-”

 “넵, 입 꼭 다물었어요. 어차피 부모님 집 근처라서요.”

 

 경례를 올리고 몸을 돌린 하딩은 그때서야 스파이마스터가 주시하고 있었던 걸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랐다. 시스터 나이팅게일이 날 죽이려는 것 같아, 이런 소릴 중얼거리며 줄달음쳐 달아나는 드워프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실패한 손을 들어 그대로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인퀴지터가 다가왔다.

 

 “우리 커다란 모자 친구가 당신에겐 그걸 찾아줬나 보네요.”

 

 라벨란의 턱짓에 아직까지도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다본 카산드라는 사슬이 손 밖으로 비져나온 것을 보았다. 카산드라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로켓을 집어넣었다.

 

 “인퀴지터.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베개 위에 있었죠.”

 “콜이 또 사라졌을 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설마 헤이븐에 불의 돌격대를 따라갔던 건 몰랐어요. 그때 참 경황이 없었죠….”

 “음. 두고 온 것이 많았습니다. 희생자도 수습해야 하고요. 그 악마가 그런 일에 관심 있는 건 몰랐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우리 시커님께서 잃었다가 되찾은 조그만 기쁨은 뭘지 물어봐도 될까요?”

 

 다시 더미에 칼을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이 치고 올라왔지만, 인퀴지터의 앞이었다. 카산드라는 가만있지 못하는 두 손을 어색하게 깍지끼었다.

 

 “가족의 유품입니다.”

 “아.”

 “인퀴지터, 당신은 무엇을 돌려받았습니까?”

 “어, 글쎄요. 콜이 아직은 저를 안 찾네요. 다들 뭔가를 잃었지만 모두가 돌려받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저는요.”

 

 라벨란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미소였다. 카산드라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 조그만 데일스 엘프 사냥꾼과 챈트리의 시커가 서로를 존경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밀한 이야기를 공유할 만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이럴 때 렐리아나나 배릭처럼 매끄러운 혀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카산드라가 말문이 막힌 것을 눈치챈 것처럼 -혹은 즐거워하는 것처럼- 라벨란은 히죽 웃더니 어깨를 으쓱이고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드래곤과 이런저런 인연이 있댔었죠?”

 

 활과 화살통을 맨 렐리아나가 카산드라의 훈련장으로 걸어들어올 무렵 라벨란은 배를 잡고 뒤로 자빠질 것처럼 몸을 젖힌 채 깔깔거리고 있었다. 넌더리를 내는 카산드라 앞에서 라벨란은 숨을 돌리느라 끅끅거리며 렐리아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갑자기 웃음기가 싹 가신 낯으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스터 나이팅게일은 섬뜩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놀라면 딸꾹질이 낫는다고 하죠. 도와드릴까요, 인퀴지터?”

 “어, 아뇨, 꺽, 렐리아나. 그럼, 꺽, 나중에 봐요, 꺽, 시커.”

 

 라벨란이 혼비백산 자리를 뜨자 카산드라는 소리 없이 두 손을 들어 렐리아나를 비난했고 렐리아나는 못 본 척 시위를 걸며 방금 비워진 자리에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시선 끝의 표적용 더미에 눈길을 둔 채 렐리아나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 대해 조시가 호들갑을 떨더라. 당신이 워테이블을 떠난 후로 우리가 얼굴 한번 맞대지 않으니 성을 방문한 귀족들 사이에서 모종의 상상력이 자극되나 봐.”

 “공개적으로 우리가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란 말이군. 그 치들, 조야한 상상을 할 시간에 피난민들이나 도울 것이지.”

 

 카산드라는 넌더리를 냈다. 렐리아나가 놓은 첫 번째 화살이 사선으로 놓인 세 표적 중 제일 먼 것의 머리에 날아가 꽂혔다. 카산드라는 돌아서면서 칼을 뽑았다.

 

 “콜이 그분의 로켓을 찾아줬다면서.”

 

 카산드라는 시커의 검술 훈련 루틴에 따라 흐르듯이 칼을 휘둘렀다. 무딘 칼날이 더미의 두터운 거죽을 깔끔하게 베었다.

 

 “그래. 당신은 뭔가 받았어?”

 “아니. 받아야 할 것도 없지만.”

 “내 로켓을 찾아냈다면 근처에서 당신 애뮬릿도 봤음직한데.”

 

 화살이 한 점으로 수렴하듯 잇따라 박혔다.

 

 “남이 버린 물건을 왜 당신이 신경 쓰는 건지.”

 

 렐리아나가 지닌 구도자의 원(seeker’s circle)이라는 애뮬릿이 처음 시커의 눈에 띈 것은 무척 오래전의 일이었다. 제5차 대재앙이 종식된 후 디바인 베아트릭스 3세의 이름으로 데너림을 방문한 오른손은 퍼렐던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그레이워든으로부터 아직 병상에 있던 붉은 머리의 수녀에 대해 들었다. 부상자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만남은 고사했지만, 아무 장식 없는 둥그런 고리 모양의 평범한 챈트리 애뮬릿을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 있던 모습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콘클라베 참사가 터진 다음 날, 카산드라는 두 사람과 조세핀이 공유하던 숙소 구석에 그 애뮬릿이 나뒹구는 것을 보았다.

 

 “그냥 내가 정리정돈을 좋아해서일지도 모르지.”

 

 카산드라는 애뮬릿을 주워 침대 옆 협탁에 뒀다. 렐리아나는 다시는 그것을 착용하지 않았다.

 렐리아나는 활을 당기다, 심호흡하며 발치를 향해 내렸다.

 

 “그 소문은 뭐니? 테다스에서 가장 용맹무비한 시커께서 저명한 모 작가에게 사적으로 언론탄압을 가했다던데.”

 “뭣? 언론…, 흥. 그러는 당신은 헤이븐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인퀴지터 앞에서 애처럼 울 뻔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망상은 아무래도 좋은데 당신이 배릭을 한 대도 못 맞춘 건 실망스럽네. 샘슨이란 자까지 보고 났더니 난 요즘 커크월로 향하는 승임의 행군을 반대하지 말았어야 했나 후회되거든.”

 “그러는 당신은 가장이 아니라 진짜로 전지(全知)한 척하지 마시지. 부하들의 무용한 희생을 막은 건 자랑스러워할 판단이야.”

 

 칼날이 더미의 뼈대인 나무축에 박히기 시작했고 화살은 표적의 급소마다 흩뿌려졌다. 두 사람은 헐떡이며 각자의 적을 노려보았다. 한참 만에 카산드라가 입을 열었다.

 

 “로켓이 눈사태에 묻힌 걸 깨달았을 때 난 단념했어. 내가 지닌 오라버니의 물건은 이것뿐이었지만, 받아들였어. 그런데 이렇게 돌려받고 보니, 나는 정말로, 정말로 이걸 되찾고 싶었어.”

 

 대꾸는 없었다. 흘끔 돌아본 카산드라는 렐리아나가 텅 빈 화살통을 고쳐매면서 활시위를 느슨하게 푸는 걸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렐리아나는 표정 없는 낯으로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탑으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등을 보며 입안에서 울컥 맴도는 여러 말 중 아무것도 고를 수 없었던 카산드라는 그중에서 지금과 가장 상관없어 보이는 말을 힘겹게 뱉었다.

 

 “렐리아나. 적어도 당신 부하들의 희생과 노고는 위로해주지그래. 행사라도 열어보는 게 어때. 활쏘기 대회라던가.”

 

 렐리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3.

 

 레드클리프 동쪽에서 불을 뿜는 드래곤을 목격한 후 라벨란은 근처에 캠프를 설치해 통행을 제한하고 감시할 뿐 일절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븐이 습격당한 날 하늘에서 덮쳐온 오염된 드래곤이 라벨란에게 어떤 영감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하딩이 이끄는 정찰대가 커크월의 챔피언과 함께 크레스트우드를 정찰하는 동안 라벨란은 드래곤의 레어를 직접 정찰하기로 했다. 어드바이저들이 반대했지만 인퀴지터는 정찰만 할 거라며 완고하게 버텼다. 결국 인퀴지터가 출발하던 날,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 함께 가는 카산드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동행했다.

 그들이 돌아올 시기가 가까워졌을 때 힌터랜드 방향에서 까마귀가 날아왔다. 암호로 적힌 쪽지를 열어본 렐리아나는 천천히, 정성스럽게 양피지 조각을 손아귀에서 구겨버렸다.

 

 “버틸 수 있어. 이보다 심했던 적도 있어. 포션 먹고 자고 일어나면 나아. 그러니 그 사람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휙 쳐든 렐리아나는 문득 어둠이 내린 루커리에 자신과 커다란 모자를 쓴 창백한 소년밖에 없는 것을 깨달았다. 첨탑의 유령. 소년이 다른 때의 다른 장소에서 불렸던 이름을 떠올리며 렐리아나는 몸 곳곳에 숨긴 단검을 느꼈다.

 

 “그 사람이니? 그 와중에도 인퀴지터를 염려했나 보구나.”

 

 콜은 눈과 입을 동그랗게 떴다. 렐리아나는 일부러 등을 보이며 촛불을 끌어당겨 쪽지를 불살랐다. 다시 평소의 꿈꾸는 듯한 낯으로 돌아간 채 콜은 연기를 들이마셨다.

 

 “하늘을 뒤덮은 사악한 날개들. 그 사람은 대재앙을 향해 혼자 달려가야만 했어. 그 사람도 희망을 구하러 괴물들에게 달려가, 그렇지만 나는 갈 수 없어, 붙잡을 수 없어-”

 “콜.”

 “나의 두 손이 서로 맞물려있으면 다른 일을 할 수 없지 않겠니. 와인에 꿀을 타도 쓴맛은 없어지지 않아. 항상 거기 있어.”

 

 두 번째 경고는 없었다. 갑작스런 움직임과 솟구치는 살기에 새장에서 쉬던 까마귀 몇이 푸드덕 뛰쳐나왔다. 렐리아나는 콜의 단검으로 콜의 목을 겨누었다. 콜은 고개를 수그릴 뿐 칼날을 피하지 않았다. 렐리아나는 떨리려는 호흡을 억눌렀다.

 

 “내 생각을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으면 로드 시커를 찾아내서 너를 던져주겠어. 리스도 이해하겠지.”

 

 렐리아나는 단검 손잡이를 내던지듯이 콜에게 넘겼다. 콜은 초점이 맞지 않는 커다란 눈으로 스파이마스터를 멍하니 바라보다, 어둠 속으로 스르륵 녹아들었다. 렐리아나는 이마를 짚다가 한숨을 뱉고 보고서가 쌓인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습관적으로 와인병에 뻗던 손이 멈칫하더니, 신경질적으로 물러갔다.

 며칠 후 새빨간 황혼 속에서 스카이홀드에 돌아온 인퀴지터 일행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헤이븐의 대장간에서 마지막으로 제작한 무기와 갑주가 대부분 망가졌고 몸이 성한 사람도 없었다. 병사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나르는 드래곤의 머리와 기타 전리품이 아니었다면 패잔병으로 보였으리라. 일행을 해산한 후 식사를 올려보내도록 지시하고 방으로 올라온 라벨란은 갈아입긴커녕 불을 켤 생각도 못 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식기가 책상에 닿는 소리를 듣고 움찔 놀라 돌아본 라벨란은 렐리아나가 창가에 선 것을 보았다. 라벨란은 벌떡 일어섰다.

 

 “저기, 날아서 올라오셨나요? 문 여는 소리 못 들었는데.”

 “저는 당신처럼 문으로 올라왔어요. 대화를 하면 좋겠군요.”

 “대화요! 정말 바람직한 거죠, 문명적이고-”

 “당신은 배신한 요원을 처분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요. 제가 정찰대의 목숨을 아까워해서 레드 템플러의 습격을 감지하지 못했음에도 그 몇 명의 생명을 아낀 마음이 훌륭하다고 했죠.”

 “엄, 저, 설마 그 다음 말씀이 그런데, 인 건 아니죠?”

 “그런데 정작 당신은 충성스러운 동료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려 드는군요. 인퀴지터.”

 

 라벨란의 얼굴에서 경직된 웃음이 떨어져 나가며 두려움이 드러났다. 렐리아나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당신이 안드라스테의 전령일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당신은 전쟁을 이끄는 지도자예요. 우리가 당신을 인퀴지터로 추대한 건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역량과 동료들의 상태도 파악하지 못해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무책임한 짓, 하고 싶으면 하세요.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짊어진다는 건 기억하시길.”

 

 ‘안드라스테의 전령’에 욱하려던 라벨란은 그 뒤 이어진 말에 어둠 속에서도 발라슬린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벌게진 채 고개를 수그렸다. 렐리아나는 입을 다물고 인퀴지터를 지나쳤다.

 밖에는 갬비슨 차림의 카산드라가 성탑처럼 서 있었다. 갬비슨의 상체에는 찢어진 잇자국이 반원형으로 늘어섰고 개중에는 가장자리에 마른 핏자국이 스며든 것도 있었다. 카산드라는 가장 바깥의 판금갑만 벗어던지고 급히 달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글로 먼저 보고를 받고 그동안 마음을 가다듬지 않았더라면.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렐리아나는 비죽 입매를 끌어올렸다.

 

 “새끼곰이 덫에 잡힌 어미곰도 아니고.”

 “내가 인퀴지터가 아니라 당신한테 볼일이 있는 건 안단 말이지. 좋아. 당신의 그 대화는 공평하지 못해.”

 “공평?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두 사람은 코가 닿을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인퀴지터의 탑은 외풍이 귀가 멍멍하도록 웅웅거렸고 여기로 숨어든 까마귀들이 이따금 찢어지는 소리로 짖어댔다. 그래도 두 사람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수준을 넘기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인퀴지터가 준비 없이 무모한 싸움을 벌여 화난 심정은 이해해. 나도 그걸로 한 마디 했으니까. 하지만 그에겐 지금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어.”

 “당신 공모했어? 당신이 부추긴 거야?”

 “아니야. 나도 드래곤 사냥이 진짜 목표인 걸 도착하고서야 알았어. 하지만 우린 이해해줘야 해. 코리피우스는 그 아치데몬 같은 것을 거느리고 있어. 언젠가는 그 드래곤도 죽여야 해. 인퀴지터는 두려움을 떨치고 드래곤을 대면할 수 있어야 해.”

 “드래곤 앞에서 얼어붙은 서툰 이 대신 물리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일엔 선후가 있고 이게 가장 시급한 건 아니었잖아. 우리가 하는 일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아!”

 “당신 무엇에 화가 난 건가?”

 

 렐리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진실을 추구하는 시커의 헤이즐색 눈이 불빛 없는 어둠 속에서 성상 앞의 촛불처럼 타올랐다.

 

 “나는 배릭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진짜로 분노한 이유는 배릭에게 있지 않았어. 당신은 지금 나와 인퀴지터를 같이 때리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지만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뭐지?”

 

 침묵 속에서 산악의 바람이 탑 안을 회오리쳤다. 바람이 들이닥쳐 후드를 뒤집을 듯 부풀렸을 때 렐리아나는 숨을 멈췄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향기가 바람결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카산드라. 품에 뭘 숨긴 거니?”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카산드라는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초조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이 옷 아래의 어디에 어떤 흉터가 있고 거기 얽힌 역사는 무엇인지 나는 모두 알지. 그 생각을 하면서 렐리아나는 새로운 흉터가 새겨졌을 품을 가리켰다. 카산드라는 소리 없이 턱을 조금 벌렸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갬비슨 위쪽의 끈을 풀고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카산드라의 목에 걸린 가죽주머니 속에는 조그만 흰 들꽃이 마른 종이에 싸여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렐리아나의 안에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당신은 이 꽃으로 만든 향수를 쓰곤 했지. 전쟁 때문에 최근에는 제조가 중단됐지만. 그런데 듣자 하니 레드클리프 부근에는 아직도 이 꽃이 보일 때가 있다더군. 그 빌어먹을 퍼렐던 프로스트백의 레어에 정말로 한 송이가 있었어.”

 “당신이 인퀴지터의 무모한 짓에 동참한 이유가 이거였어?”

 “그건 다른 이유라니까. 으, 조금은, 이것도 있었지만.”

 “그 꽃에 대해 뭘 알아? 아니, 됐어. 콜이 속삭였겠지.”

 “콜? 아니, 난 그저 당신이 생각나서-”

 

 카산드라가 멈칫했다. 이제 렐리아나는 서리등선산맥의 골짜기를 깎아내는 북풍보다도 날 선 파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꽃은 내 어머니의 향이야. 그이도 내게 그걸 건넸어.”

 “퍼렐던의 영웅이? 렐리아나, 나는-”

 “뭘 원하는 거야. 당신이, 당신이 나한테 감히 게임을 거는 거야? 아까 내가 진짜로 화난 대상이 무엇인지 물었지. 지금 분명해졌어. 당신이야.”

 

 렐리아나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후드 아래 표정이 숨겨졌다.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카산드라가 뻗은 손은 그림자를 움켰다.

 

 

 

4.

 

 루커리의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만을 밝히고 우두커니 앉아있던 렐리아나는 어느 순간 자신이 혼자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이 취약해진 순간을 틈타는 걸 보면 소년의 정체는 비비엔의 말마따나 악마일지도 모르겠다.

 

 “시커는 단념했지만 로켓은 시커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콜. 나에게도 뭘 찾아주러 온 거니?”

 “아뇨. 애뮬릿은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렐리아나는 자조 섞인 헛웃음을 피식 뱉었다. 콜은 조심스럽게 책상 맞은편 의자로 올라가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사람들은 그 고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해요. 당신은 그 사람에게 뭐라고 알려줬나요?”

 

 새삼스레 렐리아나는 눈앞의 존재가 이제 지상에서 걸음마를 뗀 어린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수하고, 가르침 받고, 배우고,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원은 세계야. 무한이야. 완전함이야. 죄악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창조주의 끝없는 인내. 수난이자 열정이었던 안드라스테의 꺼지지 않는 불길. 엘리사는 이해했어. 그리고 믿었지.”

 “당신은 믿지 않나요?”

 “회의한다고 해두자. 어쩌면 그분께 계획이 있고 궁극적으론 우릴 사랑하실지도 모르지. 하지만 개인들은 어떨까. 가장 선하고 의로운 이들이 의미 없이 피를 흘려. 나를 들어 쓰시면서…, 고립시키시네. 마치 그분이 주신 역할밖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마치 마졸렌이 그랬던 것처럼. 콜은 렐리아나의 표정 없는 낯을 말간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건 제가 찾아드릴 수 없어요. 당신이 찾아가야 해요, 렐리아나.”

 “콜. 왜 나한테 온 거니?”

 “당신의 목소리는 성 어디서든 또렷이 들려요. 비탄, 분노, 그리움, 의심, 후회, 두려움, 희망, 그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외침에는 아직 이름이 붙어있지 않아요. 믿음이 그것을 듣고 당신에게 다가가려 애쓰고 있어요.”

 “옛 친구 중에 증거가 없는 무언가를 믿는다는 건 잘 속는다는 뜻이라고 말한 이가 있었지. 이것도 그분의 게임이니. 아니, 너도 당연히 그분의 체스말이겠지. 우리 모두 그러니까.”

 

 눈을 깜빡인 렐리아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콜은 없었다. 애초에 콜이 이곳에 왔을까? 자신은 지금까지 누구와 이야기했던 것인가? 오늘은 정말로 잠을 자야 하는 게 아닐까.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렐리아나는 의식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오자마에서 셰일이 한 말이었다. 윈이 무척 즐거워했지.

 

 그래. 그이와 사랑을 나눈 어느 밤 그이가 애뮬릿에 얽힌 사연을 물었다. 로더링으로 떠날 때 도로테아가 준 선물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올레이의 영웅인 젊은 시커에 대해 보고 들은 것들을 한참 떠들었지. 그때 당신의 표정은 질투였을까.

 

 그래. 그날이었다. 요원이 나가고 가림막으로 분리된 천막 뒤편에 숨어 주저앉은 나를 충혈된 눈의 그 사람이 다가와 말없이 끌어안았지. 그리고 일으켜 세웠지.

 

 그래. 평범한 날이었다. 얄밉게도 차만 홀짝이는 그분 앞에서 우리는 탁자 위에 뛰어오를 기세로 논쟁을 벌였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못된 농담에 당신의 얼굴은 참 귀엽게 빨개졌고.

 

 그래. 그건 겨울궁이었다. 황제와 올레이의 영웅과 나이는 같지만 성취는 한참 못한 나를 마졸렌은 비웃었지. 그리고 올레이의 귀족들 사이에서 적국의 공주인 당신은 길 잃은 표정으로 수모를 견뎠고, 아무도 당신에게 손 내밀지 않았지. 나 역시-

 

 하지만 그래, 그날이었다. 아직 피가 흐르는 왼뺨에 거즈를 댄 채 시커단을 떠나 외톨이가 된 고통을 혼자 견디던 당신. 나는 손을 내밀어, 당신의 상처를 꿰매 그 멋진 흉터를 닫았지. 그때 당신은 미소를 지었던가?

 

 눈을 뜬 렐리아나는 의자에 앉은 채 졸았던 것을 깨달았다. 촛불도 꺼진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책상에는 꺾였지만 시들지 않은 안드라스테의 은총 한 송이가 물이 담긴 잔에 꽂혀있었다. 렐리아나는 스산한 추위에 어깨를 떨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삶에서 생각보다 무척 많은 장면에 카산드라가 있었다.

 창조주께서는 항상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데려가셨어.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건 왼손의 역할 뿐이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지 않으면 돼. 그게 내가 창조주의 이 잔혹한 게임에서 살아남을 방법이야. 렐리아나는 따끔거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런데 왜 꽃은 죽은 덤불에서 피어났던 것일까?

 

 

 

5.

 

 평지와 산지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해가 산을 기어 올라가야 하는 산속에서 밤은 일찍 오고 아침은 늦게 온다.

 카산드라는 몸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푸른 공기 속에서 셔츠 자락을 펄럭이며 칼을 휘둘렀다. 더미가 어제 기어코 파괴되어 새것을 설치했지만 벌써 너덜거렸다. 며칠을 미친 듯이 칼질해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카산드라는 온몸의 통각이 무뎌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다시 가장 힘든 루틴으로 칼을 휘둘렀다.

 

 “같이 해도 될까.”

 

 그 부드러운 음성은 동상에 끓는 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카산드라는 돌아보지 않은 채 칼을 몇 번 더 휘둘렀다. 렐리아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곧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당신도 상처받았지. 아마 화도 났겠지. 사과하고 싶어.”

 

 카산드라는 몸을 비틀며 루틴을 완성하는 교과서 같은 3연참을 가했다. 가열한 공격에 더미의 목이 깨끗이 잘려 날아갔다. 카산드라는 잠시 상단세로 칼을 올린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정은 몰랐지만 함부로 선을 넘었어. 사과할 사람은 나야.”

 “내가 화난 건 당신 때문이지만 당신 탓은 아니었어. 당신이 안드라스테의 전령을 따르는 건 당연해. 단지 내가, 나만이 오른손마저 잃고 그분의 하나뿐인 손으로 남는 걸 견딜 수 없었어.”

 

 몸을 돌린 카산드라는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기던 렐리아나를 자연스레 마주했다. 렐리아나의 눈길은 표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배릭을 공격한 날 죄스러운 만족감을 느꼈어. 당신이 지금도 그분과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이 기뻤어.”

 “애도에는 끝이 없더군. 설령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화살이 먼저 꽂힌 화살을 쪼개며 꽂혔다. 렐리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카산드라는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렐리아나, 들어주겠어. 베아트릭스께도 왼손이 있었지. 그가 새파랗게 어린 오른손에게 한 이야기가 있어.”

 

 렐리아나는 완만한 호흡으로 시위를 매겼다. 카산드라는 칼을 짚은 채 젖은 머리칼을 어색하게 쓸어넘기며 말을 골랐다.

 

 “그분의 만년에 차기 디바인 자리를 놓고 물밑 다툼이 길게 이어졌지. 왼손은 발랑스의 마더 도로테아야말로 베아트릭스의 뜻에 합당한 후계자라 판단하고 물밑에서 조금은 도움을 드렸어.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테지?”

 “음흠.”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왼손이 아니게 될 날을 준비했어.”

 

 화살이 탄착군에서 조금 빗나간 곳에 꽂혔다. 렐리아나의 표정 없는 눈길은 여전히 표적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 일은 모시던 디바인께서 사라진다고 끝나는 게 아닐 텐데? 그 사람 나이가 들더니 생각보다 혼미해졌었나 보네.”

 

 그리고 잇달아 쏘아진 화살은 다른 화살보다도 깊숙이 박혔다. 상처 같은 화살들을 바라보며 카산드라가 나직이 말했다.

 

 “그 혼미한 노인이 나에게 충고하더군. 다시 오른손이 되거든, 그때 만날 왼손이 혼자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지 말라고.”

 

 렐리아나의 활이 화살을 건 채 아래로 향했다. 카산드라는 칼을 집어넣고 옅은 입김을 흘리고는, 렐리아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을 들면 서로의 팔 안에 들어갈 거리였다. 머리를 수그려 눈을 피한 채 렐리아나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는 계획하지만, 창조주께서는 웃으시지. 화평을 바라고 콘클라베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도 그런 식으로 죽게 될 줄 몰랐어. 퍼렐던의 영웅은 자신이 죽어야 대재앙이 끝난다는 걸 막바지까지 몰랐어. 당신이나, 내가, 혹은 인퀴지터마저도…, 카산드라, 이건 그냥 우리가 각자 짊어져야 하는 거야.”

 “우리는 신의 뜻을 알 수 없지만, 지금 여기서 힘껏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있어. 저스티니아께서 계시지 않으니 더이상 오른손은 아니지만, 는 그분의 이상을 이루겠노라고 창조주 앞에서 당신과 함께 맹세했고 그 맹세는 다하지 않았어. 그러니 나는 우리가 계속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믿어. 이것이 살아간다는 것이고, 우리가 함께 끝을 볼 거라고 믿어.”

 “이 불확실한 시대에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는 거니?”

 

 답을 요구하며 내리깐 렐리아나의 눈은 희뿌연 새벽어둠 속에서 끝없는 밤하늘 같았다. 시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많이 잃었고, 자기 자신마저 잃어가고,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신 앞에서 함께 한 맹세에 폭풍우 속의 표류자처럼 매달린 이 앞에서, 잘 돌아가는 혀가 없고 지혜롭지도 않은 자신이 어떻게 답을 주겠는가? 카산드라는 다만, 새벽을 기다리는 노래에 가장 먼저 합류하던 렐리아나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카산드라는 렐리아나의 물빛 어린 눈에서 불길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 자신이 담긴 것을 느꼈다. 나는 혼자가 아닐지니. 내가 길에서 넘어지고 내 눈이 감길지라도, 빛이 여기 있음을 내가 알지니. 시련의 송가의 한 구절을 떠올리면서 카산드라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당신도 알까.

 

 “카산드라. 우리가 각자 기억하는 그분이 조금 다른 거 알지.”

 “그것도 같이 감당해야지. 이제와서 나와 다투기 무서운가?”

 “내가? 당신을?”

 

 활과 화살을 떨어뜨린 채, 렐리아나는 카산드라를 끌어안았다.

 마침내 봉우리 사이로 뛰쳐나온 첫 햇살이 성벽을 넘어 비쳐들면서 후드에 덮인 렐리아나의 머리 위로 아스라한 후광을 뿌렸다. 추위인지 전율인지 알 수 없는 떨림 속에서 카산드라는 렐리아나를 부둥켜안았다. 렐리아나가 성벽처럼 두른 차디찬 체인메일이 젖은 셔츠에 감긴 몸을 아프게 압박했지만, 상관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짐이 있었고, 렐리아나의 짐은 자신조차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렐리아나에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곁에서 함께 걸을 수는 있었다.

 카산드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렐리아나가 속삭였다.

 

 “근데 이 눈 덮인 산속에서 꼭두새벽부터 웬 셔츠바람이니? 물론 보기는 좋은데 그러다 한순간에 몸 상하는 거거든.”

 “그게요 저번의 드래곤 사냥에서 저 때문에 카산드라의 갑주랑 갬비슨이 저 목 날아간 더미만큼이나 너덜너덜해져서요….”

 

 고개를 휙 쳐든 두 사람은 라벨란이 반질반질 새카만 흉갑을 품에 안고 부모의 침실에 잘못 들어온 아이처럼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았다. 스카이홀드에서 해릿과 다그나가 협력하여 처음으로 만들어낸 작품에는 시커의 문장이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

 

 “저…, 이거 위에 갖다 놓을게요. 두 분, 그럼!”

 

 라벨란이 어깨로 대장간 문을 밀치고 뛰어들어가는 걸 보면서 렐리아나는 소리 없이 코웃음 치고 카산드라에게 다시 기댔다. 카산드라는 렐리아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두 팔로 서로를 끌어안은 원 안에서 두 사람은 평온했다.

 

 

 

6.

 

 인퀴지터가 다소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준비한 크레스트우드 원정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스파이마스터의 주최로 활쏘기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세라는 상대인 데일리쉬의 보석을 단 활(?)이 부정행위라고 항의하다 싸움이 붙어 일찌감치 실격패했다. 정찰대와 요원들과 병사들 중의 내로라하는 사수들이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양치기 하딩에게 꺾였고 그 드워프가 결승에서 라벨란과 만났다. 비앙카는 활이 아니기에 참가자격조차 없었던 배릭은 심술궂게 해설하면서 중계를 맡은 도리안과 경기 외적인 내용으로 만담을 쏘아댔다. 메리든이 매치마다 괴상한 즉흥곡을 지어 부르는 가운데 태번 주인과 행상인들은 간식과 술을 퍼나르며 법석을 떨었다.

 최후의 화살 한 발로 승부가 가려지자 요원들과 정찰병들이 뛰쳐나가 하딩을 무등 태우고 환호했다. 어째선지 시합에서 진 라벨란도 그 무리에 끼어있었다. 그들이 렐리아나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반짝이는 얼굴들 사이에서 렐리아나는 자신의 결단으로 헤이븐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을 보았다. 렐리아나는 점잖게 거절했고, 무리는 용기는 내봤다고 자축하며 하딩만 태운 채 태번으로 달려갔다.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크렘에게 웃으며 돈을 건네던 블랙월 뒤에서, 카산드라가 고개를 돌렸다.

 신의 체스말들. 산채로 삼켜지는 분노와 슬픔을 몇 번이고 겪은 끝에 죽은 줄 알았던 심장에서 또다시 움트는 이름 없는 것을 쳐내려 애쓰다가도, 미소를 띠고 바라보는 카산드라의 얼굴에서 렐리아나는 문득 장식 없는 둥근 고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렐리아나는 믿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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