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여러 이유로 와론 보고 싶어 하는 기린" 입니다.
*이 연성의 줄거리가 잡힌 것은 미리보기분으로 110화가 공개된 직후인 3월 20일경입니다.
따라서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10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니젤이나 기사 시스템에 대한 설정은 원작자인 환댕 님이 작품을 통해 공개하신 것에 기반하되
공백이 있는 부분을 제 맘대로 망상해서 채워넣은 것으로,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티스토리는 줄글의 가독성이 더 나빠진 것 같은 느낌이네요. 화면을 125% 정도로 확대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0. 돌아온 날
기사가 전사하면 별천지에서는 기사의 유체를 수습하고 마스터피스나 나린기 같은 귀한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 그런 일과 관련된 처리를 맡는 사람이 여럿인 데다 때때로 아주 먼 길을 돌아 수습한 것들을 수도까지 운반해야 하는 여정이 되기에, 기사의 죽음을 뒤처리하는 일에는 어떻게든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따라붙는다. 중앙에서 아무리 함구령을 내려도 기사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소문이 퍼진다.
하물며 기사의 성지이자 제국의 수도인 니젤의 한복판에서 기사가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면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규모는 겉잡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기사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것.”
달잔은 손끝에 닿은 것을 천천히 두드렸다. 별 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그 둔탁한 소리가 반쯤 열린 창문을 후두둑 두드리는 불규칙적인 빗소리와 섞이자 더없이 음산하고 불길했다. 바깥에서 불어든 눅눅한 바람이 볼을 어루만지는 걸 느끼면서 지우스는 달잔의 손가락이 떨어지는 위치에 쌓인 신문 무더기를 우두커니 건너다보았다. 주요 일간지에서 시간대를 앞당겨 발행한 석간, 주간지와 월간지에서 서둘러 낸 호외는 사건의 경위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보도한 것이 없고 서로간에도 말이 맞지 않았지만, 죽은 기사가 저지른 불명예가 있다는 익명의 제보와 더불어 새까만 망토를 두르고 투구를 쓴 기사의 사진을 1면에 실은 것만은 한결같았다. 신문마다 빗방울로 얼룩덜룩하게 젖어 잉크가 번져있었지만 사진 속의 그 특징적인 인물을 알아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기사끼리의 싸움이었다면 도시가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암살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부검이 먼저라 생각됩니다만.”
“그 말이 기사다운 발상은 아닌 것 알지?”
“기사가 대상이면 암살이든 부검이든 모욕으로 여기는 것 역시 우스운 노릇이죠.”
달잔은 가늘게 뜬 눈으로 지우스를 바라보다 신문 무더기로 눈을 돌렸다.
“분명 건물이든 뭐든 광범위한 파손 보고 같은 건 없었어. 하지만 기사가 아니라면 누가 기사를 죽일 수 있지? 이 사건을 일반인들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이겠나?”
“수도 한복판의 뒷골목에서 기사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이죠.”
“…내 말은, 우리는 기사니까 암살을 하는 기사라는 발상 자체를 터무니없어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객관적인 사실은 그것 하나지만 이걸 본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는 의혹은 그 이상이란 이야기야.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마치 새까만 닭이 범인인 것처럼 읽히도록 사진을 배치한 걸 봐. 기린. 자네 듣고 있나? 아까부터 생각이 계속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은데.”
지우스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달잔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신문 무더기에 깔린 종이뭉치를 뒤져 보고서 하나를 꺼냈다.
“검시보고서. 검시만으로도 사인이 명백해서 부검은 안 하기로 했네.”
보고서를 받아들면서 지우스는 놀라지 않았다. 달잔은 일에 있어서는 냉혹할 정도로 합리적인 기사였고, 당연히 기사가 저지른 암살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고서는 달잔의 말대로 시신의 상태를 묘사한 첫장에서 이미 결론이 명확했다.
“뒤에서 심장을 관통한 창…이외의 공격을 떠올리기 어렵군요.”
시신에서 발견된 유일한 상흔은 그 자체로 죽은 자의 사인이었다.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창이나 그 비슷한 형태의 물건이 아니면 불가능한 공격인 것도 분명했다. 이래서는 정식 결투였지만 압도적인 실력차로 시작하자마자 찰나에 끝난 것뿐인지, 아니면 비열한 암살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이런 깔끔한 일격으로 기사를 공격하고 죽일 수 있는 건 같은 기사뿐입니다.”
“동의하네.”
지우스는 보고서를 팔랑팔랑 넘겨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 대한 묘사를 찾았다. 글을 훑어보던 눈길이 한 대목에서 고정되었다. 살해된 기사는 지우스가 기사가 된 이듬해에 합격한 자로 20대 후반의 꽤 늦은 나이에 기사가 되었고 그 후로도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않던 조용한 자였다. 그의 시신은 여러 골목이 만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조그만 광장의 한복판에서 황궁, 다시 말해 기사들의 본부가 위치한 방향을 향해 죄인처럼 포박된 채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밧줄에 묻은 피의 양으로 보아 포박은 사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골목 자체는 슬럼에 가까운 주택가 지역에 속했지만, 거기서 두세 블록만 지나면 기사들의 훈련장까지 쭉 이어지는 대로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시신이 누군가에게 보란 듯이 전시되었다는 인상을 받은 지우스는 달잔을 살짝 찔러보기로 했다.
“그 소문은 사실입니까?”
“무슨 소문? 내가 찌라시나 뒤적일 만큼 한가해 보이나.”
“거북이님도 오늘따라 신경질적이시군요.”
“그만. 이건 새까만 닭 하나의 문제가 아니야. 소문이 너무 빠르다. 이상하지 않나?”
지우스는 보고서를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가 발견된 것은 오늘 새벽이었고 별천지에서는 충분히 신중하게 움직였는데도 이른 오후인 지금 벌써 수도의 온갖 언론이 인쇄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지경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새까만 닭의 기사 사냥 소문이 사실인가 여부는 중요하지 않죠. 기사는 명예롭고 정의로운 영웅이라는 것이 일반보편적인 믿음.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행태가 사냥으로 일컬어질 만큼 불명예스럽고 불의한 기사가 흔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소문’에 우리가 진지하게 대응하면 언론은 그게 사실인 것처럼 여론을 이끌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의혹만으로 기사에 대한 세상의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겠죠. 더 나아가, 어쩌면….”
지우스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달잔은 찌푸린 채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오나 보군. 임무를 주지. 새까만 닭의 ‘누명’을 벗길 증거를 가져와라.”
“새까만 닭은 한동안 수도를 떠나 있었다고 아는데요.”
“어제는 아니었거든. 닭은 보통 혼자 다니니 부재증명은 못 해.”
“누명이 아닌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할까요?”
“그때는 내가 녀석을 상대할 거야. 하지만 확실해지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 알겠나? 새까만 닭을 지키는 것이 기사를, 더 나아가 황제를 지키는 것이다.”
지우스의 입매가 욱하듯이 꿈틀거렸다. 달잔이 빤히 쳐다보자 지우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알겠습니다. 저 이외에 또 이 임무를 맡는 기사가 있습니까?”
“있지. 자네 뒤에.”
흠칫 뒤를 돌아본 지우스는 팔짱을 낀 채 하나뿐인 출입문에 등을 기대고 선 새까만 닭 와론을 발견했다. 이제 보니 바닥에는 달잔이 등지고 선 창문과 와론이 가로막은 문 사이에 거의 마른 물방울 자국이 줄지어 얼룩져있었다. 표정이 구겨지는 지우스를 보며 와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는데. 너 진짜 오늘 상태 별론가보다~”
그래, 너도 오랜만이다. 지우스는 입술을 깨물며 달잔을 쳐다보았다. 달잔도 어깨를 으쓱였다.
“일부러 말 안 한 건 아니야. 자네가 들어올 때부터 딱할 정도로 다른 생각에 빠진 게 보여서 말이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내가 일을 주는 게 무리시키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뿐입니다. 이 임무는 제가 맡겠습니다. 새까만 닭을 동행시키시는-”
“야. 넋이 나갔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이건 내 임무고, 네가 꼽사리 끼는 거다.”
“-이유는 짐작이 갑니다. 그렇다면 저희 둘이서 은밀히 움직여야 하겠군요.”
달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을 돌아 나왔다. 지우스와 와론까지 연결하면 정삼각형을 이룰 위치에 정확히 선 달잔은 뒷짐을 지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한 시간 뒤 새까만 닭을 구금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코끼리와 쓸데없이 시비가 붙어 난동을 벌임으로써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했기 때문이지. 단 새까만 닭은 상습범이니 이번 기회에 제발 조용히 머리 좀 식히라고 사흘은 잡아넣을 것이다.”
와론이 코웃음 쳤다. 달잔은 헛기침을 했다.
“알겠나? 사흘이다.”
그리고는 조금 주저하는 투로 와론을 쳐다보았다. 와론은 마주 빤히 쳐다보았다. 투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지우스가 보기에는 눈싸움이라도 거는 것 같았다. 침묵이 조금 길어지자 결국 달잔이 먼저 넌더리를 냈다.
“다 알면서 그러지 말고. 부탁 좀 하자.”
“뭐, 그렇게 나와주신다면야~”
와론은 키득거리며 고개를 까딱이곤 올 때처럼 창문을 통해 떠났다. 달잔이 창문을 닫고 돌아보았을 때 지우스는 또다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린, 정말로 괜찮은 건가?”
“그냥 생각 중이었습니다. 증거 확보가 최우선목표라면 진범 체포는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란 거로군요. 그래도 혹시 진범을 알아낼 경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도 새까만 닭과 합의가 된 겁니까?”
“그건 새까만 닭이 알아서 할 거다. 자네는 그저 증거 확보에만 주력해.”
요컨대 증거가 누군가의 증언뿐이라면 무조건 그자를 살려서 데려와야 하지만, 물증이 있다면 범인-단수일지 복수일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을 어떻게 처리하든 와론의 재량에 맡긴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달잔은 와론이 기사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물증만 확보된다면 그가 수도 한복판에서 기사일지도 모를 범인을 살해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지우스는 달잔을 조금 더 찔러보기로 했다.
“달잔님은 새까만 닭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두 손으로 넓게 책상을 짚고 선 달잔은 실내보다 훨씬 밝은 창을 등지고 있어 그늘져보이는 낯으로 지우스를 눈여겨보았다. 지우스는 주머니 속에서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잠시 후 달잔이 긴 한숨을 뱉었다.
“이건 원래 닭에게 단독으로 맡기려던 임무였다. 어떤 어린 친구들은 ‘기사사냥꾼’을 몰래 동경하기도 하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어제오늘 일도 아냐. 그런데 최근 그게 늦은 사춘기의 일탈 정도가 아니라 조직화되려는 움직임이 있는 듯해.”
“동경? 새까만 닭을?”
“새까만 닭이 아니라 ‘기사사냥꾼’. 그 정보를 가져온 자가 새까만 닭이야. 그래서 조사를 맡기려던 참에 오늘 이런 일이 터진 거지.”
불기가 없는 어둑한 실내에서 지우스의 눈이 번득였다.
“그것이 이 임무의 핵심이지만 제가 질문하기 전에는 알려줄 생각이 없으셨군요.”
“자네가 집중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두 사건이 연관됐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
“하나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만일 사흘 안에 범인이 새까만 닭은 아니라는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그 다음 계획은 무엇입니까?”
“아니, 반드시 찾아내야만 할 거다. 칸덴티아가 그 녀석의 어딘가를 진짜로 부러뜨리기 전에 말리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달잔은 의자에 앉아 신문더미를 구석으로 밀치고 다른 서류 뭉치를 끌어당겼다. 대화는 끝이었다. 묵례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온 지우스는 괜시리 안에 받쳐입은 목티를 잡아당겼다. 늘 입는 편안한 옷인데도 기도가 눌린 것처럼 갑갑했다.
그 기분은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자가 하늘색 너구리인 것을 확인한 순간 물리적으로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되었다.
“엇, 지우스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인사를 건네는 다랑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초췌했다. 지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 다랑을 지나쳤다. 지금은 어떤 얼굴로 다랑을 대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늘 인력이 부족한 기사들의 본부에서 철야 근무를 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러 나간 새벽녘에 텅 빈 거리에서 별천지의 건물 뒤편으로 조용히 뭔가를 운반하는 사람들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직원들은 말이 없었지만 이미 폭설이 시작된 먼 북부를 급히 다녀온 듯한 차림새와 유체를 수습할 수 없어 현지에서 바로 화장한 듯 두 개의 유골함만 돌아온 모습은 적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지우스가 오래전 참가하던 실험을 갑작스레 중단하면서 예정보다 앞당겨 북부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용병을 떠올린 것도,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서고에서 바로 그 무렵에 그 용병의 소속 집단과 장기간 협업 중이던 세 명의 기사 중 단 한 명만이 살아서 귀환해 올린 보고서를 꺼내볼 생각을 한 것도 우연이었다.
새까만 닭을 지키는 것이 기사를, 더 나아가 황제를 지키는 거라고.
지우스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진눈깨비에 가까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 감각을 느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발이 멈춰선 곳은 구경꾼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는 광장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벽 저편에서 지우스가 잘 아는 목소리들이 점점 소리 높여 부딪치고 있었다.
일을 할 시간이었다.
1. 첫째날 밤
“그렇게 신기하냐?”
지우스는 무심코 곁눈질하던 눈을 들어올리다 흠칫했다. 생판 초면인 타인에게 지우스가 허락하는 것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키가 큰 낯선이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부리에 잘못 채여 비틀거렸다간 어깨가 스칠 거리였다. 기사 관계자들이 흔히 고르는 옅은 모래색의 반망토를 두르고 코까지 눌러쓴 두건과 하관을 전부 덮는 큼직한 복면, 새까만 목티와 흰 바지까지, 수도에서는 너무 흔한 견습 출신의 병사 같은 모습이었다. 수년에 걸쳐 기억에 새겨진 익숙한 걸음걸이를 보고서야 지우스는 가까스로, 그리고 다시 한번, 이 낯선이가 와론이라는 것을 되새겼다.
칸덴티아에게 제압당해 ‘구금’되었다고 알려진 곳에서 빠져나온 와론은 투구와 망토와 완갑과 론누와 목걸이를 내려놓고 이런 모습이 되어 있었다. 단지 차림새가 바뀌었을 뿐인데도, 처음에 지우스는 와론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에서 드러난 팔뚝이 평소에 끼던 두터운 완갑 탓인지 아니면 창백한 피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객관적인 굵기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가늘게 느껴져 내심 당황했는데, 투구의 면갑 속에서 이중삼중으로 갈라지며 웅웅거리던 목소리가 복면 탓에 조금 먹먹하긴 하지만 본래의 음색으로 들렸을 때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자신은 은연 중에 와론이 태어날 때부터 얼굴 없이 무장을 갖추고 새까만 색을 두른 채 다가오는 모든 것에 론누를 겨눈 모습이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일까? 하지만 지우스가 지금 느끼는 기묘한 위화감은 단순히 와론의 옷차림이 바뀐 데서 오는 것은 아닌 듯했다. 지우스는 공연히 어깨에 떨어진 빗방울을 털었다.
“그냥, 누가 봐도 수상한 놈 같아서.”
“지금 가는 데선 얼굴을 드러내는 놈이 수상한 놈인데.”
“나더러 기사 티를 내라고 한 건 너잖아.”
“그렇지, 계속 그렇게 거만 떨라고.”
와론은 평소처럼 같잖은 농지거리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거만한 자들이라고 비꼬는 것인가? 대꾸하기도 귀찮아진 지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낡은 포석이 깨져나가 흙이 드러나 있거나 신선한 오물이 버려져 있거나 그냥 배수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탓에 길바닥은 곳곳이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굳게 걸어 잠근 덧창과 문 너머에는 사람이 살고 있겠지만 불빛이 새나가는 것조차 경계하거나 그냥 조명에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인지 발앞을 비추는 빛은 없다시피 했다. 이따금 스쳐 가는 자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피한 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인기척이 사라진 후에도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벽과 온갖 불법적인 구조물과 축축한 어둠에 시야가 가로막힌 채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빙빙 돌고 있었지만, 지우스는 오랫동안 훈련받은 감각에 따라 쉽게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들은 기사들의 훈련장을 기준점으로 잡으면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향하는 골목에 있었다. 지우스는 수도 곳곳에 비유적 의미로든 사전적 의미로든 햇볕이 닿지 않는 으슥한 뒷골목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자신이 그런 곳을 직접 헤매게 될 줄은 몰랐다. 하필 이런 수상쩍은 길을 동행하는 자가 새까만 닭일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 했다.
지우스가 속으로 몇 번째인지 잊어버린 한숨을 쉬던 무렵, 와론이 갑자기 멈춰섰다. 무의식적으로 와론을 지나쳐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우스는 어둠을 도려낸 것처럼 갑자기 쏟아지는 시린 빛에 진저리치며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기사의 날카로운 감각은 그들이 도착한 곳에 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판별했다. 지우스는 T자형 골목의 모퉁이에 서 있었다. 시궁창 물이 흐르는 창자처럼 굽어진 길에 칼을 찔러넣듯이 직각으로 꽂힌 낯선 길의 저편에서는 거리의 풍경이 달라졌다. 이편이 어둠이었다면 저편은 빛이었다. 이곳이 노후된 다세대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였다면 저곳은 저렴한 물건과 음식을 파는 자잘한 가게들이 모인 조그만 변두리 상권이었다. 지우스가 선 모퉁이는 뒷골목과 부도심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맞물리는 회색지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지우스는 목덜미를 잡힌 채 등 뒤의 어둠 속으로 끌려가 건물벽에 내동댕이쳐졌다. 벽에 뒤통수를 부딪쳐 눈에 불똥이 튄 다음 순간 메마른 숨결이 코끝에 닿았다. 지우스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터져 나오려던 거친 말들을 꾹 삼켰다. 벽과 자신의 몸 사이에 지우스를 가둔 채 와론이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려.”
입술을 내밀었다간 복면에 닿을지도 모르겠다는 퍽 한가로운 생각을 하면서 지우스 역시 와론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이는 소리로 화답했다.
“왜지?”
“있으라면 있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같이 하는 임무잖아.”
“왜? 내가 뭐 인멸이라도 할까 봐?”
뭔가 더 말하려던 와론이 입을 다물었다. 이미 불콰하게 취한 주정뱅이 몇이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와론의 등 뒤를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밀회 중인 한 쌍으로 여겼는지 들으란 듯이 그들을 가리켜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정뱅이들의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주택가로 빨려 들어가는 어두운 골목길에 삼켜지고서야 와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해 두지. 내 임무에 네가 난입한 거라 했다. 내 허락이 없으면 나대지 마라.”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는 건조한 경고를 들으면서 지우스는 확신했다. 언제나 예기치 못한 습격을 대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계를 내려놓지 않지만 태도만큼은 여유롭고 짓궂을 정도로 넉살 좋게 굴던 새까만 닭이 차림새를 바꾸고 그 방을 나온 때부터 긴장한 것에 가까울 정도로 예민했고 사무적인 것 이상으로 냉담했다.
아니, 예민하고 냉담한 거야말로 우리를 대하는 네 태도의 본질이지. 넌 우리를 동료로 여기지 않으니까.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를 자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니까.
무리의 대장은 임무의 완수는 물론이거니와 동료 기사들의 목숨도 책임져야 한다. 지우스가 보기에 와론은 바로 그것이 싫어서 단독임무를 선호하며, 어쩔 수 없이 협업을 해야 할 때면 자신이 납득하는 동안으로 한정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다른 기사의 -그러니까 지우스의- 대장 노릇을 순순히 따라주는 듯했다. 그럼에도 지금 와론은 자신이 이 임무의 대장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지우스는 반쯤은 농담 같은 기분을 느끼며 대꾸할 말을 골랐다.
“난 네 하급자가 아냐. 이건 내 임무이기도 하다. 혼자서 처리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날 찾은 것 아닌가? 너야말로 내 힘을 빌리고 싶다면 나한테 협력해.”
“너를 부른 건 내 의사가 아니거든? 거북이 놈의 쓸모없는 참견이지.”
“남의 말을 순순히 듣는 편은 아니잖아. 정말로 필요 없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 넌 내가 필요해.”
“이 임무에 대해 어디까지 알지?”
“‘기사사냥꾼’이 연루되었다는 점. 나는 조사하고 너는 날 경호한다는 점.”
“바보냐? 널 경호해야 하는데 내 창을 두고 나오게? 너 역시 어디서 머리라도 세게 맞은 거지?”
“하…. 너는 놈들을 들쑤시고 나는 놈들이 흘릴 증거를 줍는다는 점. 됐나?”
“하여튼 웃기는 놈이야. 알았으면 여기서 신호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
와론은 지우스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몸을 압박하던 체온이 떠나자 새삼스럽게 쌀쌀한 밤공기가 전신을 훑었다. 열없이 코를 훌쩍이며 눈을 뜬 지우스는 빛과 어둠이 혼탁하게 섞이는 골목의 모퉁이에서 어둠 속에 숨은 채 건물벽에 기대어 섰다. 건너편 건물의 담장에 너덜거리는 몇 개의 낡은 벽보 -아직 활자를 읽을 수 있는 상태인 건 창립 이래 격기사를 몇 명 배출했다는 실적을 내세운 어느 기사단의 견습 모집 공고 정도였다- 말고는 구경할 것도 없는 심심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기다려보니 이 모퉁이길은 생각보다 통행량이 있었다. 숨죽인 분위기여도 주택가는 주택가였고, 이곳에 빽빽하게 모여 살면서 방세를 내며 수도에 집 있는 자들이 기피하는 노동을 하는 인구는 가급적이면 좁은 방에 갇혀있기보다 바깥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이 길을 통해 두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컴컴한 골목길에서 키는 조금 작지만 건장한 남자를 느닷없이 맞닥뜨리고 흠칫하거나, 못 본 척하며 서둘러 지나쳐갔다. 담이 큰 자는 지우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지나쳐가는 사람의 수를 세면서 지우스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 임무에는 뭔가 와론을 개인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단순히 누군가가 ‘기사사냥꾼’을 암시하며 살인을 저지른 것 이상의 무언가 말이다. 와론이 그것을 공유할 생각이 없다면, 지우스는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외딴 곳에서 혼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와론이 일부러 지우스를 엿 먹이려고 따돌린 것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와론의 지시를 무시해 후환을 남기더라도 독자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와론의 뭔지 모를 계획을 믿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호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 신중하게 저울질을 하고 있는 지우스 앞에 와론처럼 망토에 달린 두건을 깊이 눌러쓴 10대 후반의 청소년 둘이 다가와 멈춰섰다.
“기사 담청색 기린님이시죠? 닭의장풀이랑 같이 온 분요.”
지우스는 낯선이가 자신을 알아본 것에는 놀라지 않았다. 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지간한 기사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대로를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실물을 종종 마주치는 데다, 중앙대륙의 그 어느 곳보다 기사의 그림이나 사진을 싣는 매체가 득시글한 도시에 사는 탓이었다. 지우스의 태도를 조심스럽게 만든 것은 아이들의 가슴께에서 말갛게 반짝이는 녹빛의 길쭉한 유리조각 같은 목걸이였다. 그런데 닭의장풀은 뭐야? 설마 너냐?
“내가 기린이다. 무슨 일이지?”
“진짜로 기사님이었네. 같이 가주시죠. 같이 온 사람을 아끼신다면요.”
아이들은 말로 그치지 않고 지우스의 양편에 선 채 걸음을 뗄 것을 말 없이 종용했다. 이것이 와론이 말한 신호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움직일 핑계로서는 적당했다. 지우스는 순순히 아이들을 따라나섰다. 어중간하게 강한 느낌이 드는 이 아이들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든 특정한 기사에게 개인적으로 배우는 것이든 기사 훈련을 받고 있는 견습인 듯했다.
이제는 폐점 시간대라 아직까지도 불을 밝힌 가게는 몇 없었고, 그 대부분은 주점이었다. 견습들이 지우스를 데려간 곳은 그런 주점 중 하나였다. 좁다란 바 앞자리와 몇 개 없는 빈 탁자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자 커다란 8인용 탁자 두 개를 중심으로 의자 여러 개가 아무렇게 놓인 큰 지하실이 나왔다. 두건이나 복면, 목도리 등으로 얼굴을 가린 체격 좋은 젊은이 넷이 일제히 지우스를 쳐다보았다. 지우스는 모퉁이에 있을 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지나간 자를 그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이들이 모두 목에 녹색 목걸이를 건 것은 우연일까. 지우스가 지하실로 한 발 내딛자 여기까지 동행한 아이들은 퇴로를 가로막듯 문간에 팔짱을 끼고 섰다.
와론은 안쪽의 탁자 끄트머리에 있는 2인용 소파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방만하게 앉아있었다. 태도는 그럴지 몰라도 와론의 위치 선정에는 공간 안의 모든 자들을 한눈에 두면서 여차하면 일직선으로 계단까지 박차고 내달리려는 계산이 엿보였다. 그 점은 지우스가 아니라도 노련한 자라면 누구나 눈치챌 터였다. 저 강력한 기사들 중에서도 대단히 강한 축에 드는 와론이라면 견습 수준인 자들 10명이 덤벼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 저런 식으로 경계하는 태도를 굳이 드러내고 있다면 어떤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두건과 복면 때문에 표정을 보일 수 없음에도 와론에게서는 지우스가 나타난 것에 언짢아하는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요즘 친하게 지내는 기사가 있다더니 사실이었군. 허풍선이인 줄 알았는데.”
말을 건 자를 힐끔 본 지우스는 소개를 받기도 전에 이자가 무리의 대장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자는 못해도 준기사급이었고 자신의 강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사방으로 뻗친 뻣뻣한 빨간 머리칼을 보며 지우스는 이자에게 혹시 티무드나 같은 별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비겁하게 굴면 너네가 손해라고 나 분명히 얘기했다? 야,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와.”
와론은 강아지라도 부르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였다. 젊은이 하나가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냈다. 지우스는 속으로 깊이, 정말 깊이 한숨을 참으며 와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와론이 앉은 소파의 팔걸이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이제 젊은이들은 모두 와론을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응? 기사들 반응? 얘한테 물어보지 그래? 얘가 기사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모르겠는데. 나한테도 알려주지 그래.”
“별 건 아니고, 오늘 아침에 기사 하나가 죽었잖아. 기사들은 뭐래?”
“좋아하지야 않지. 어쨌든 기사가 죽었으니까. 그래서 너는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난 기껏해야 기사들한테 일 조금씩 받아서 먹고 사는 처지인데 그런 연줄이 있다는 이유로 얘들이 내가 다 알 것처럼 귀찮게 굴잖아. 너야말로 여기 왜 왔냐? 내가 그렇게 걱정됐어?”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무릎을 짚는 손길을 느끼면서 지우스는 기사 티를 내보기로 했다.
“그래. 네가 말도 없이 떠나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자들이 널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건가?”
단숨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젊은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투태세를 갖췄다. 식은땀을 흘리며 지우스와 와론을 번갈아 보는 눈길에서는 어째선지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어찌 됐든 정식 격기사인 지우스보다는 일반인보다 몇 배는 강한 견습들을 대놓고 경계하며 여차하면 달아나려는 기색을 보인 와론을 먼저 치려는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빨간 머리가 서둘러 그들 사이에 끼어들 때까지 그러했다.
“담청색 기린님, 무례를 용서하시길. 저희는 수상한 자들이 아닙니다.”
“딱히 설득력은 없는걸.”
“하하,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죠. 어느 정도 눈치 채셨겠지만 저희는 견습 생활을 하고 있거나 한때 견습이었던 자들입니다. 여기 닭의장풀처럼요.”
지우스가 빤히 쳐다보자 와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왜 날 봐? 난 그냥 전현직 견습들끼리 식물 이름으로 별명 지어 부르는 친목모임 같은 건 줄 알았어. 얘네가 인질 잡고 무려 기사를 협박하는 놈들일 줄은 몰랐지.”
“닭의장풀, 네가 현직 기사들과 조금 아는 사이라니까 말 좀 물어보려 한 거지, 우리가 어떻게 기사님을 협박할 생각을 하겠나? 너야말로 어떻게 감히 기사님한테 반말지거리야.”
“기사가 뭐 별건가. 걔들도 그냥 빨간 피 흐르는 인간인데.”
“정말 겁을 상실한 소리만 하는군. 기린님, 용병 따위가 저래도 되는 겁니까?”
“태도가 이따위라도 내‥ 동료라서. 별 것 아닌 일이라면, 우린 그만 실례하지.”
지우스가 일어서자 빨간 머리가 앞을 막아섰다.
“친구분이 저희한테 오해가 좀 있는데, 하하, 기왕 오신 거 저희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보시죠. 기린님께서 사건을 조사하신다는 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빨간 머리의 발언은 합의되지 않은 돌발적인 내용이었던 것일까. 그의 친구들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빤히 쳐다보는가 하면 혹은 굳은 낯으로 지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빨간 머리와 무리 사이에는 미묘하게 긴장된 공기가 있었다.
지우스는 와론을 휙 돌아보았고 와론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 쫌 무서워서 말해버렸어. 어쨌든 너 혼자 임무 하게 생겼는데 도움받으면 좋잖아?”
그렇다면 이들은 그 새까만 닭이 이 임무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세상은 새까만 닭이 코끼리와의 싸움을 핑계 삼아 어딘가에 숨은 채 기사 사냥에 대한 추궁을 피하는 중이라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기사들의 수뇌부가 부랴부랴 동원된 그 연막과 더불어, 와론이 기사라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무시무시한 인상을 하나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서 이들은 이 가볍기만 한 괴짜가 문제의 그 위험하고 강력한 기사일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사라면 강함을 긍지로 여기고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을 명예로 아는데 누가 약한 척, 기사가 아닌 척을 하는 기사를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지우스는 와론의 교활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수사를 돕겠다는 마음에는 감사하지. 하지만 범인은 기사급의 강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 상관없는 이들이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군.”
한순간 빨간 머리가 기묘한 기색을 드러냈던 것 같다. 눈을 깜빡인 지우스는 빨간 머리의 낯에서 예의 바른 애매한 미소만 발견했다.
“죽은 이는 우리 일원이었습니다. 마침내 기사가 되어 그토록 기뻐하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합니다. 그랬던 우리 동료가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살해됐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기사님, 저희가 돕게 해주십시오.”
“이름이 뭐지? 괜찮다면 누군지 소개해주겠어?”
“기사님께서 아실 가치가 있는 이름은 아니고, 저희끼리는 티무드나라 부릅니다.”
지우스는 이자에게 정말로 그런 별명이 붙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자가 자신의 소속이나 하는 일 같이 자기소개에 으레 따라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을 유념했다.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였다니 조의를 표하지. 기사는 장례를 치르지 않으니 유감이겠군.”
“어쩔 수 없지요. 기사는 특별하니까요. 그것 때문에라도 저희 나름대로 죽은 이를 추모하고 싶은 겁니다. 기사님께서 수사하실 때 저희를 수족처럼 부려주십시오.”
티무드나의 발언과 지우스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견습들은 끼어들진 않았지만 열성적이기보단 불안한 태도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우스는 와론을 힐끔 돌아보았다. 어느새 곁에 바짝 다가온 와론이 손바닥으로 등을 슬쩍 밀며 귓가에 속삭였다.
“얘들이 찾는 건 너잖아~ 기대에 부응해주지 그래. 기사님이니까.”
목소리야 나직했지만 여기 있는 자들은 다 들을 정도의 크기였고, 그 어조는 은근했다. 지우스는 있는 힘껏 눈을 부라렸다. 진심으로 악의를 담아 한 행동이었지만 이들을 지켜보던 견습들에게는 다르게 보였는지 이 와중에도 두어 놈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딴 데를 쳐다보는가 하면 한 놈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장단 맞추기 힘들다… 지우스는 헛기침을 했다.
“생각은 해보도록 하지. 하지만 기대하진 않는 게 좋아. 이건 기사들의 문제니까.”
티무드나의 낯에 떠오른 미소는 이번에야말로 억지웃음이었다. 준기사급까지 강해져본 자들은 대개 그렇지만, 표정을 감추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더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지우스는 한 팔로 와론의 넓은 어깨를 감싼 채 계단으로 향했다. 등 뒤의 지하실에서 두 사람이 떠난 때부터 빠르게 지껄이며 소곤거리던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흩어진다.
한산한 상가 거리로 나오자마자 지우스는 와론의 어깨에서 팔을 풀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와론은 말없이 지우스의 느리고 좁은 보폭에 맞춰줬다. 그래도 와론이 반걸음은 앞섰기에 지우스는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아까의 모퉁이길로 돌아간 와론은 지우스가 기다렸던 길의 반대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봤자 그쪽 역시 어두컴컴하고 어수선한 주택가였지만.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군. 어젯밤 어디에 있었지?”
“왜? 내가 바람이라도 피웠을까 봐?”
“작작해. 넌 대체-”
“에헤이, 나 믿어~”
와론은 곰살궂게 어깨로 슬쩍 미는 시늉을 하면서 지우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앞에 봐. 계속 장단 맞추던가.”
“미쳤냐.”
“그치? 앞이나 봐.”
그래도 지우스는 주저하다 어설프게 와론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와론은 심술궂게도 맞잡아주지 않았고, 겨우 한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어설프게 미행하며 지켜보는 눈을 의식한 지우스는 손을 놓을 수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무뚝뚝한 어른의 눈치를 보는 주눅 든 아이처럼 일방적으로 와론의 손을 붙잡고 쫓아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지우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와론이 거점으로 잡아둔 여관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가장 높은 층의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방으로 올라가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마자 지우스는 와론의 손을 탁 놓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망토 두건으로 눈을 감추고 복면으로 얼굴을 숨겼는데도 그 뒤에서 와론이 히죽 웃는 모습은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제법이다? 예전엔 예상 못 한 상황에선 말도 동작도 엄청 뚝딱거렸는데. 잘 키웠네, 내가.”
발끈할 뻔했지만, 지우스는 혀끝까지 반사적으로 치민 말을 참을성 있게 도로 삼키고는 와론이 몇 마디 더 붙이는 비아냥 같은 칭찬을 잠자코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지우스가 듣지 않는 걸 아는 와론도 오래 끌지 않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와론의 혼잣말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임무 이야기로 대화가 넘어갔다.
“어쨌거나 녀석들을 들쑤셨군.”
“그랬지. 주운 건 있나?”
하나뿐인 창문 앞으로 가서 커튼 틈새로 주위를 경계하는 와론을 곁눈질하며 지우스는 문의 잠금쇠가 잘 잠겼는지, 바깥에 쓸데없이 머무는 기척은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몇 가지는. 식물명을 별명으로 삼는 식물애호가모임일 리는 없겠지. 기사가 아니기 때문인가?”
“그런 듯. 기사는 동물명을 이명으로 받으니까.”
“닭의장풀?”
“나한테 묻지 마. 쟤들이 멋대로 부르는 거야. 왜 그건지도 모르겠어.”
“조직원끼리는 식물 이름을 별명으로 쓰는 건가?”
“그 정도로 조직화된 놈들은 아니고. 친목모임이야, 일단은. 저 빨간 머리가 최근 이상하게 굴면서 분위기 흐리고 있지만. 흠, 너라면 역시 자미-”
“저건 뭐 하는 놈들이야?”
“재미없긴. 자기 입으로 소개했잖아. 견습 생활을 하고 있거나 한때 견습이었던 애들이라고.”
1인용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 의자 하나 같은 기본 가구만 갖추어져 있고 개인의 물건은 하나도 없는 살풍경한 작은 방을 두리번거린 끝에 지우스는 의자를 택했다. 잠시 후 와론이 손짓했다. 지우스는 탁자 위에 놓인 하나뿐인 등불을 껐다. 창밖을 조금 더 지켜 보고 나서 침대에 걸터앉은 와론은 후, 하고 길게 숨을 뱉었다. 문득 지우스는 상체를 앞으로 수그린 와론의 윤곽에서 어깨가 조금 굽어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와론이 고개를 들자 두건 아래에 감춰져 있던 안광이 번득였다. 지우스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갔나?”
“우리가 같은 방에 들어가 불을 끈 것까지 봤으니까. 그거 보고하러 갔겠지.”
“놈들이 기사 새까만 닭과 관련 있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설명해.”
“너 아는 척하는 거 잘하잖아. 날로 먹지 말고 아는 척 좀 해.”
“난 증거가 필요해. 뭘 주워야 하는지 알아야 줍든 말든 할 것 아냐. 너도 협조해야 할 이유는 충분할 텐데.”
이건 너를 위한 임무잖아. 어둠 속에서 지우스는 탁자 위에 얹은 두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목적이 명예로운가를 의심하게 되는.
“애초에 손꼽힐 정도로 강하고 유명한 기사가 왜 바보 취급을 감수해가며 정체를 숨기고 저런‥ 과거에 기사지망생이었던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어 자기 이름조차 밝히길 꺼리는 애송이들과 어울렸는가부터 묻고 싶군. 넌 친구 만드는 거 싫어하잖아.”
“응, 싫어해. 근데 네가 방금 애송이라고 부른 애들 중에 너보다 연상인 애도 있는 건 알지?”
“어쩌라고. 놈들은 녹색 유리조각 같은 게 달린 목걸이를 지니고 있었어. 아마도 동료의 징표 같은 것이겠지. 그런데 마침 너도 비슷한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나.”
지우스는 와론의 가슴께를 눈여겨보았다. 겉으로 봐선 알 수 없지만, 지우스는 와론이 모래색 반망토 속의 새까만 상의 안에 목걸이를 감추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사람들은 새까만 닭이라 하면 투구와 망토, 론누를 주로 떠올리지. 하지만 목걸이는 의외로 눈에 잘 띄지 않아. 네 차림새나 새까만 색이 주는 압도적인 인상에 비하면 광택 없는 그 녹색의 돌조각은 지극히 수수하니까.”
몇 번 임무를 함께하는 동안 지우스는 와론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매만지는 것을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어떤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지우스는 그런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와론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목걸이만은 몸에서 떼어놓지 않을 거라는 것이 지우스가 관찰 끝에 내린 결론이었고, 그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정도면 족했다.
“그럼에도 놈들은 새까만 색이나 투구 같은 것보다 그걸 택했다. 분명 새까만 닭을 흉내내는 거지만 그거 하나만으로는 남들에게 새까만 닭과 연관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진 않으니까. 진한 색을 받았고 같은 기사를 사냥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기사를 동경하지만, 대놓고 그랬다간 사회적 체면에 좋지 않다는 걸 알 정도의 눈치는 있는 거지. 놈들은 기본적으로 소심한 겁쟁이들이었다.”
“과거형이군. 좋아. 계속해봐.”
“그럼 무엇이 놈들의 태도를 바꿨는가…. 혹은, 태도가 바뀐 자에게 과연 모두가 찬동했을까, 라는 문제 아닐까 싶어지는데. 여기서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그 많은 기사 중 왜 하필 새까만 닭인 거지? 아니면, ‘기사사냥꾼’인가?”
“역시 백 마디 설명보다는 한번 겪어보는 게 나아. 그치?”
와론은 우둑 소리가 나도록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굳어있던 어깨를 풀었다. 자신이 이미 파악한 정보를 공유하는 대신 그것을 지우스가 직접 관찰해서 추측하도록 유도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우스는 와론의 꿍꿍이를 궁금해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관찰했던 ‘친목모임’ 무리의 언행을 되짚어보았다.
“그 빨간 머리, 오늘 아침 시신이 발견된 동료 얘기를 하면서 웃더군. 나한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면, 미친놈이야. 네 생각은 어때?”
“흠. 둘 다지 싶은데. 너 오기 전에 내가 미끼를 던졌는데 바로 입질이 오더군.”
“미끼?”
“응. 죽은 놈 죽인 거 너네 아니냐고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내 앞에서 분위기 잡다가 널 끌고 온 거지. 쟤들은 날 기사 끄나풀 정도로 의심하고 있었거든.”
티무드나의 무리에게 불려가기 전 그 쥐 죽은 듯이 음산한 뒷골목을 지나오는 동안 뒤통수를 지켜보던 눈들 중에도 거기 속하는 자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와론이 사전에 합을 맞추지도 않고 기사와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괴짜 용병 같은 연기를 한 의도도 짐작이 되었다. ‘끄나풀’ 같은 의심을 사고 있다면 한술 더 떠 뒤를 봐주는 듯한,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척 가까운 듯한 기사를 노출 시킴으로써 자신을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동시에 ‘기사’가 어떤 이유로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저들의 반응을 보려 한 것이리라. 눈앞에 진짜 기사가 갑자기 튀어나온다면 저들은 극도로 위축되거나, 오히려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두르다 틈을 보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지우스 앞에서 나머지 무리가 전자의 태도를 보였다면, 티무드나는 후자였다.
보통의 기사들은 어지간한 일은 힘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굳이 공들여가며 꾀를 쓰지 않는다. 지우스가 몇 번이고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와론은 보통의 기사가 아니었다. 물론 계획에 없는 행동이나 변수가 끼어들어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걸 매우 싫어하는 나를 그런 상황에 처박아놓고 구경해보겠다는 짓궂은 심보도 있었겠지. 그게 네 몇 안 되는 즐거움이잖아.
“동기는?”
“시기? 질투? 자기랑 같은 패배자인 줄 알았던 놈이 늦깎이나마 기사가 됐으니까?”
“놈이 용의자라고 보는 거야? 준기사급은 되어 보이긴 했지만 기사급은 아닌 듯하던데.”
“가능성 중 하나인 거지. 말했잖아. 걔가 요즘 분위기 흐린다고. 나머지 애들은 그냥 또라이 하나를 멋있어하고 끝이지만 걔는 애들 데리고 그 이상의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그게 뭔지는 알아보는 중이고.”
자신이 또라이로 보이는 걸 알긴 안단 말이지. 지우스는 이 사건이 어디까지나 ‘기사들’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을 때 티무드나가 보인 반응을 떠올렸다.
“그냥 친목모임이 아니라 사회불만세력인가.”
“흠. 세상에 불만 없는 사람이 있긴 한가. 내가 한 말을 부정하는 꼴이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 너도 봤듯이 그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소심한 겁쟁이야.”
“‘기사사냥꾼’을 동경하지만-”
“새까만 닭을 동경하지만.”
“-그자 같은 배짱과 힘은 없어서 기사처럼 서로를 이명으로 부르고 몰래 차림새를 흉내 내는 걸로 만족하던 자들이 왜 갑자기 살인에 연루됐을까. 지금 아는 것만으론 그 의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군. 정보가 더 필요해.”
“이게 씹네. 가끔 보면 내가 얘를 너무 잘 키워버린 것 같어.”
“거기 있던 녀석들이 모두 빨간 머리와 뜻이 맞는 건 아닌 듯했지. 그 틈부터 노려야겠어. 그 친목모임이란 것에 출석하는 자는 오늘 본 놈들이 전부인가?”
“몰라. 하지만 오늘은 엄청 적은 거야. 살인사건 때문인가? 내가 본 것만도 20명은 넘는데.”
“…어쨌거나 조그만 모임은 아니란 거로군.”
“인상 풀어라~ 걔들이 모두 ‘기사사냥꾼’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보단 마음 편하게 신세 한탄할 친목모임을 원하는 거니까. 생각해 봐. 기사가 되지 못한 기사지망생이 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아. 매년 쏟아져나오는 애들 머릿수에 비하면, 택도 없지. 기사가 된 놈들은 그런 것에 관심 없고.”
지우스는 뭐라고 대꾸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중앙대륙 곳곳에 있는 기사단과 각 기사단이 거느린 견습기사들, 은퇴했거나 사실상 현장에서 물러난 기사가 개인적으로 교습하는 기사지망생들, 그 밖에 유명한 무술 유파에서 기르는 잠재적 기사후보들의 숫자를 어림짐작으로 헤아려본 지우스는 잠시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부터 수년에 걸쳐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기술을 연마한 아이들 중에서 매 회차의 시험을 최종적으로 통과해 기사가 되는 자는 세계로부터 선택받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지극히 적었다. 결국 시험을 포기한 나머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완전히 뒤처지지야 않았지만 결코 가장 강한 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기사지망생 시절의 지우스는 그 차이를 벌충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느라 다른 생각을 거의 할 수 없었고, 기사가 된 후에는 기사들만 만나며 기사들의 일을 하느라 정신없는 탓에 역시 그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중요한 이런 문제를 보는 눈이 있으면서. 왜 너는 혼자만 알고 있는 거야. 그렇게 우리를 믿을 수 없어?
지우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지루해졌는지 와론이 지우스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지우스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쳐들자 와론은 말에 물릴 뻔한 것처럼 손을 슥 빼냈다.
“내 누명을 벗길 시간은 사실상 이틀 밖에 안 남은 거 알지? 자아성찰의 시간도 좋은데~ 효율적으로 써주면 더 좋을 거야.”
“내가 고생해서 네 누명을 벗겨주고 얻을 게 뭐지? 새까만 닭. 솔직히 너는 좀 따끔한 맛을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글쎄? 이름은 거북이면서 속은 능구렁이인 자식이 말했잖아. 나를 지키는 것이 기사를, 더 나아가 황제를 지키는 거라고.”
와론의 말투에 서린 빈정거림은 누구라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지우스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와론이 일어섰다.
“어디 가?”
“시간 효율적으로 쓰려고. 넌, 뭐, 어쩔 수 없으니 자고 있어라.”
“뭘 하든 네 맘인데, 계획이 있으면 제발 공유 좀 해. 이 임무에서 난 네 적이 아니야.”
나는 네 동료야. 지우스는 그 말을 눌러 삼켰다. 와론에게 밤인사를 들을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굳이 비웃음을 사고 싶진 않았다. 와론은 등을 돌린 채 한 손을 들어 보이곤 그대로 방을 떠났다.
스산한 바람이 좁다란 골목을 빠르게 질주하면서 낡은 창틀을 덜컹덜컹 흔드는 소리가 비로소 귀에 들어왔다. 혼자 남게 되자 지우스는 새삼스럽게 어둠 속에서 방을 둘러싸고 새어드는 온갖 낯선 소리들을 날카롭게 인식했다. 상대는 어쨌든 기사를 살해한 자였다. 기어스 탓에 평소에는 견습 수준의 힘밖에 지니지 못하는 지우스가 동료도 없이 도시라는 제약된 공간에서 범인과 맞닥뜨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꽤 뻔했다. 그래도 기사니까 호락호락 당할 생각은 없지만, 잘 안다고 생각했던 도시에서 거의 몰랐던 지역에 아무 설명 없이 혼자 뚝 떨어져 있자니 조금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와론이 자신의 체력을 따라올 수 없는 지우스를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니며 밤을 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우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정말이지, 잠이라도 자서 체력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결론을 내린 지우스는 조금 주저하다 와론이 앉아있었던 침대로 갔다. 아까 불이 켜져 있을 때 훑어본 바로 이 방은 빈대 같은 건 없어 보였지만 청소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닌 듯했다. 또는, 와론이 일부러 청소 서비스를 거절해서 불시에 들이닥칠지도 모를 종업원을 피한 것이거나.
지우스는 한숨을 푹 쉬고 겉옷을 벗었다. 아직 사람의 온기가 조금 남아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베개를 끌어당기다 길다란 머리카락 같은 것이 손끝에 걸렸다. 어두워서 색깔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최근에 떨어진 것은 분명했다. 와론은 칸덴티아에게 제압(?)당해 끌려간 때부터 몇 시간 전 지우스가 찾아갈 때까지 구금된(?) 장소에 얌전히 갇혀있었다. 이런 여관방은 언제 빌려둔 것인가? 달잔은 와론이 사건 이전부터 ‘기사사냥꾼’을 동경하는 어리석은 젊은이들을 조사 중이었다고 했다. 와론은 티무드나와 그 친구들을 조사하면서 쭉 이 방에 머물렀던 것일까?
최근 며칠을 기사 본부에 갇혀 야근하다 오랜만에 충분히 눈을 붙이게 됐지만, 까끌한 눈꺼풀 밑에서 지우스는 도무지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결국 누적되어온 철야의 피로가 덮쳤고,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얇은 커튼에 희푸른 새벽볕이 비쳐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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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가급적 수요일에 올릴 생각입니다. 뒷부분 작업 진행상황과 제 현생의 상태에 따라 업뎃 날짜에 변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후....... 오늘 공개된 미리보기분인 113화의 빠와가 넘나 강렬해서 안 잊히네요. 목와는 대폭발하고 기린닭(팬덤 망상 끼얹으면 지와도)은 연쇄폭발을 일으킨 느낌이랄지. 오늘 와론과 지우스의 대화 하나 때문에 맨 마지막편의 대화 하나를 엎어야 하게 되기도 했고.(물론 그래도 즐거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