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여러 이유로 와론 보고 싶어 하는 기린" 입니다.
*이 연성의 줄거리가 잡힌 것은 미리보기분으로 110화가 공개된 직후인 3월 20일경입니다.
따라서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10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니젤이나 기사 시스템에 대한 설정은 원작자인 환댕 님이 작품을 통해 공개하신 것에 기반하되
공백이 있는 부분을 제 맘대로 망상해서 채워넣은 것으로,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가독성 차원에서 화면을 125% 정도로 확대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4. 사흘째
지우스는 팔을 뒤로 돌려 포박된 채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눈을 떴다. 누군가가 머리에 자루 같은 걸 씌우고 어떤 액체라도 끼얹었는지 코와 입에 달라붙은 거친 직물 때문에 숨쉬기가 답답했고, 주위를 살피기는커녕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따금 여러 군데에 있는 좁은 틈으로 시린 바람이 웅웅거리며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통하는 만큼 환기는 나쁘지 않아야 할 텐데 사방에서는 온통 역한 기름 냄새가 풍겼다. 그러고 보니 자루만이 아니라 온몸이 끈적한 액체에 젖어있었다. 지우스는 지금 깨질 듯이 머리가 아픈 이유가 사람을 혼절시키는 가루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몸을 푹 절여놓은 기름 냄새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사가 아무리 강해도 내장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죠. 단련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기분은 어떻습니까?
이 목소리는 알았다. 지우스는 등불 같은 것을 들고 느긋하게 다가오는 인영을 거친 천 너머로 쏘아보았다. 조명이 그쪽에만 집중된 덕에 지우스는 시야가 막혀있음에도 티무드나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티무드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궤짝 같은 것을 끌어당겨 그 위에 걸터앉았다. 발치에 등불을 내려놓는 걸 보면 적어도 저 주변에는 기름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우스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이나 한 잔 주지 그래. 이거 꽤나 독한데.”
“죄송한데 그건 제가 다루는 품목이 아니라서요.”
“그 녀석이 어디서도 기사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게 당연했군. 범인은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왜 그러시죠. 준기사급이 기사를 죽이는 게 하늘이 뒤집혀도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습니까?”
티무드나의 말에는 빈정거리는 웃음기가 있었다. 지우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자신이 지금 준기사급인 용병 한 명에게 간단히 제압당해 인질로 잡혀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지우스의 침묵을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으로 여겼는지 티무드나는 느긋하게 잡담을 이어갔다.
“지붕 위에서 하신 연설, 대단했다더군요. 닭의장풀은 당신을 꽤 지겨워했겠죠.”
“우리가 서로를 꽤 지긋지긋해 하긴 해.”
“담청색 기린님은 그다지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분이라 알려진 게 많지 않은데 어제 일로 다들 당신이 영웅 힌셔님의 길을 따르는 기사인 걸 알게 됐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네 기사님들은 정말로 명예롭고 정의로운 영웅입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실 텐데요. 당신들이 ‘기사사냥꾼’을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는 얘깁니다. 적어도 새까만 닭님은 당신네의 실체가 뭔지 알고 혼자서라도 바로잡으려 애쓰는 쪽인 거 아닌가 싶어서요.”
이런 자들은 자신의 대의명분이 무엇인지를 누군가에게 떠벌리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지. ‘기사사냥꾼’과는 달리. 지우스는 티무드나가 있는 방향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사가 일개 용병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었는데도 기가 꺾이긴커녕 오만할 정도로 뻣뻣한 고개를 든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쯧 혀 차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지우스는 이 불안정한 자를 슬쩍 흔들어보기로 했다.
“네가 북부에서 푸르른 양과 주황색 두꺼비의 유해를 수습했지?”
예상대로 티무드나의 윤곽이 경직되면서 경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기사가 협력 상대를 기만하고, 일족을 몰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그 일족의 수장인 용병이 지우스의 실험에 참가하느라 수도에 몇 달째 머무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임무’의 목적은 검열되어 있어 알아낼 수 없었지만, 목적이 무엇이든 기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지우스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 실험에 와론이 참가한 직후 실험이 중단되면서 예정보다 일찍 귀환한 용병은 무엇을 마주하게 되었을까? 만일 지우스가 와론과의 대련 후에도 실험을 속행했더라면, 그래서 일족이 기사에게 학살당하는 동안 그 용병이 아무것도 모른 채 수도에 묶여있었다면, 그는 어떻게 ‘처리’당했을까? 일련의 과정과 우연 끝에 전사하고 -복수를 당하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그 두 기사의 유해를 수습하는 임무에 첨부된 계약서에는 티무드나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쪽에서도 생각을 하며 답변을 정리했던 것일까. 조금 시간을 두고 티무드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이상하군. 그런 일이라면 별천지에서 직원을 직접 파견할 텐데 용병을 쓰다니.”
“여차하면 쉽게 버릴 수 있어서 아닐까요? 전 제가 수습한 자들이 기사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어쩌다 그런 꼴이 됐는지도 전혀 몰랐죠. 이제는 제가 아는 걸 알고 위에서 절 없애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지만.”
“그래서 새‥내 동료를 경계한 거였군.”
“여자친구를 그렇게 부릅니까? 하긴 이제 와서. 그자는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감이 잘 안 잡히긴 하지만 이상하게 강한 느낌은 있었죠. 태도만 보면 그냥 닳아빠진 용병인데 묘한 데서 기사들이랑 비슷한 냄새가 난달지. 실제로 이렇게 당신이 엮여 있었잖습니까?”
“친구는 왜 죽인 거냐. 실수였나?”
갑자기 티무드나가 한쪽 다리를 탁탁 떨기 시작했다. 이 질문이 나오리라는 건 예상했을 텐데도 정작 질문을 듣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사실은 명예롭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짓을 태연히 저지를 수 있으며 그게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임무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서도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을까요? 그것도 사람들이 모를 뿐 한두 번이 아니라면? 저한텐 어려서부터 믿고 의지했던 세계가 박살난 겁니다. 그걸 제가 마음 깊이 믿는 친구한테 얘기했더니 도리어 저를 비난하며 당국에 신고하겠다고 하면- 전부터 그 자식은 부모 덕에 오랫동안 편안하게 기사지망생으로 지낸 주제 제가 용병질로 벌어먹으면서 보고 겪은 기사의 현실은 용병의 열등감 섞인 뻥 취급했죠. 네, 제 실수는 그런 놈을 친구라고 믿었던 겁니다.”
“너의 분노와 좌절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게 살인을 정당화하진 않아.”
“하! 그럼 기사란 존재도 정당화할 수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사가 하는 일이 살인인데요? 아니면 뭐, 기사 나으리들이 하는 살인은 명예롭고 정의롭지만 용병 나부랭이가 하는 살인은 범죄다 이런 겁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지우스는 자루 속에서 눈을 굴릴 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 지하실에서 티무드나가 지우스를 보자 느닷없이 수사를 돕겠다며 나서던 행동이 이해되었다. 보통의 상식이라면 수사관과 얽히는 것 자체를 꺼려야 할 범인이 대담하게도 범인 체포를 돕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고, 운 좋으면 조수 역할을 하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수사 방향을 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좋아. 네가 친구를 죽인 이유는 알겠어. 근데 네가 한 짓을 ‘기사사냥꾼’이 한 것처럼 돌린 건 좀 찌질하지 않아?”
“전 그런 적 없습니다. 죽은 기사에게 모종의 불명예가 있다, 그렇게 암시만 한 거죠. 그런 말에 반사적으로 ‘기사사냥꾼’을 지목한 건 기자들입니다. 어차피 근거 없는 비약이라 별천지에서 통제 들어가니 바로 잠잠해졌잖습니까? 새까만 닭님에게는 죄송하게 됐지만요.”
“그럼 나는 왜 인질로 잡은 거냐? 참고로 너희가 닭의장풀이라고 부르는 녀석이 곧 날 잡으러 올 거다. 나더러 방 깨끗이 비우고 꺼지랬는데 너 때문에 엉망진창이 됐거든.”
“불 지른 건 기린님인데요.”
“그거 구분하면서 사정 봐줄 놈 같아? 그 녀석은 반드시 온다.”
티무드나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바로 그게 중요한 부분이죠. 근데 이상하군요. 제 앞에서 그자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네요. 저 같은 놈은 들을 자격도 없는가 보죠.”
“내가 먼저 물었어. 난 지금 네 눈앞에 묶여있으니 어디 갈 일 없다. 말해봐. 그 녀석을 어쩌려는 거야?”
“말했잖습니까? 당신의 여자친구가 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요.”
“그러니까 그 녀석이 뭘 하고 다녔는데. 나도 알려달라고.”
“싫은데요.”
지금까지 잘 대답하던 자가 이 질문에는 갑자기 딴청을 피운다. 지우스가 제한서고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며 계획을 짜는 동안 와론도 티무드나가 현직 기사를 습격할 마음을 먹을 만큼 그를 구석에 몰아넣은 모양이었다. 중요한 증거를 찾아낸 것일까? 아니면 티무드나가 신경질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와론이야말로 기사들이 위험한 정보를 쥔 용병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던 것일까? 지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잔은 모기를 잡으려고 진검을 뽑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 와론이 기사의 치부를 숨기는 일에 적극 가담할 것 같지도 않았다. 뭐가 됐든 미리 얘기 좀 해. 난 변수 투성이인 게 진짜 싫어.
“하나만 더 묻자. 왜 닭의장풀이지? 그 녀석 별명.”
티무드나의 윤곽이 멈칫하더니 조금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살짝 콧노래까지 들리는 것을 보면 이것은 지금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안전한 이야기가 될 성싶었다.
“지난 여름 끝 무렵 쯤이었나…. 니젤까지 오는 길에 있는 마지막 역참에서 객들이 모여 비를 피하고 있었죠. 역참지기가 손님 대접한다고 닭을 잡으려 했는데 그놈이 진짜 앙칼져서 역참지기의 손을 작살내고 탈출했거든요. 문이 열린 통에 다른 닭들도 같이 도망쳤고요. 직원이든 손님이든 다들 비 맞으며 닭 잡는다고 쫓아다니는데 그자는 안에서 혼자 꼼짝도 안 하지 뭡니까. 그냥 이기적인 인간인가 했는데, 이유가 있긴 했더군요. 뭐였는지 아십니까?”
“글쎄, 내가 아는 그 녀석이라면 신나서 자기가 먼저 뛰어다녔을 것 같은데.”
“흠, 사귀는 사이라도 다 알진 못했군요. 그자는 닭을 무서워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겁쟁이죠.”
잠깐의 침묵 후 지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 녀석이 닭을 무서워한다고?”
“예. 눈도 못 마주치더군요. 그때 그 닭장 근처에 잔뜩 우거진 잡초가 닭의장풀이었죠.”
지우스는 허리를 꺾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온몸이 흔들리도록 마음껏 소리를 내는 웃음이었다. 숨이 차도록 웃어버린 끝에 가슴을 들썩이면서 지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 녀석, 무서워하는 게 있었구나. 하필이면, 닭이라고. 딴 놈도 아니고, 그 녀석이. 하.”
아까보다는 작은 소리로 여진 같은 웃음을 흘리면서 지우스는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맺히는 것을 느꼈다. 티무드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자세로 이쪽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긴장은 좀 풀리셨습니까? 잘됐네요. 시간이 별로 안 남았으니.”
지우스는 아직도 조금 아픈 가슴을 느린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지우스가 묻는 말에 범인이 술술 대답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티무드나는 ‘닭의장풀’ 뿐만 아니라 지우스도 이곳에서 죽일 작정이었다.
한참 전에 후각이 마비되다시피 했을 텐데도 기름 냄새는 구역질이 날 만큼 자욱했다. 이곳은 어디일까? 수도를 벗어난 곳은 아닐 것이다. 불이 붙으면서 소동이 일어나고 덩달아 사람들의 이목도 집중되었을 그 여관을 떠나 -당연하지만 지우스는 불길이 금방 잡혔기를 바랐다. 그 여관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의 눈을 피해 가며 의식을 잃은 성인 남자를 두 발로 옮기려 한다면 준기사급 정도의 힘이 있다 해도 그렇게 멀리 가기는 어렵다. 티무드나는 세상의 중심과도 같은 기사들에게 환멸과 증오심마저 품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그들보다 힘이 약했고 -지우스는 예외적인 경우이니 제외하자- 기본적으로 소심한 겁쟁이인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그가 지닌 분노에 미적지근한 듯했다. 지우스는 티무드나가 지금 벌이고 있는 행동이 와론에게 쫓기면서 심적으로 구석에 몰린 가운데 자신이 지붕 위에서 한 어떤 발언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고 즉흥적으로 일으킨 것이리라 추측했다. 그렇게 유도한 거지만.
그런 거라면, 이곳은 수도 안에 있으면서 티무드나 같은 용병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평범한 장소일 것이다. 단 이 지독한 기름 냄새로 보건대 싸움이 벌어진다면 가급적 누구나 볼 수 있는 구경거리를 만듦으로써 어떻게든 ‘기사’가 연루된 것을 알려 일이 잘못되더라도 혼자만 죽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어쨌거나 티무드나 자신은 불합리한 기사의 권력을 상대로 싸운다고 믿고 있을 테니까. 지우스는 인화물질이 가득한 듯한 이 건물이 부디 인구밀집지역에 위치하진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이곳이 수도인 이상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그래서 성공했다 치고, 그 다음은 뭘 어떻게 할 작정이지? 뒷감당이 되겠어? 아니면 자포자기한 거냐?
“넌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 너를 따르는 친구가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다만 이 정도 규모의 난리에도 동참하려 들 녀석이 많진 않을 것 같군. 안 그래? 너희 일과는 술에 취해 더러운 세상과 위선적인 기사들에 비분강개하고 술이 깨면 다시 그 기사들이 줄 일거리를 찾아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것일 테니까.”
조금 늦게 따라온 티무드나의 대답에는 노골적으로 노기가 드러나 있었다.
“아까부터 일개 용병 나부랭이한테 변변한 저항 한번 못 하고 잡혀 온 주제 혀는 잘 돌아가는군요. 아니면 기사쯤 되면 너무나 위대한 구름 위의 존재라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시나?”
티무드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저벅저벅 다가왔다. 짧게 숨이 턱 막히면서 턱이 돌아가는 충격, 그 다음 순간 지우스는 낡은 돌바닥에 모로 쓰러져있었다.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입안을 조금 베여 피를 흘리는 것까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신을 잃은 몇 시간 동안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면서 경직된 하체에 피의 흐름이 빨라지는 감각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경우에 흔히 따라와야 하는 쥐가 나는 증상이나 아플 정도로 찌릿찌릿한 느낌과는 좀 달랐다. 시험 삼아 손발 끝을 움직여본 지우스는 마비가 덜 풀린 것을 깨달았다. 혀는 잘 돌아가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몸의 말단은 아직 덜 회복된 상태였다. 쿵.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감각이 둔해져서 잘 못 느낄 뿐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돌면서 귓가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 것일까. 쿵. 쿵. 지우스는 이렇게 된 김에 그냥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저항을 포기한 모습이라기엔 지나치게 편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티무드나는 지우스의 멱살을 잡아 다시 무릎을 꿇렸다. 머리에 뒤집어쓴 자루의 성긴 직물 너머로 지우스는 녹색의 유리조각 같은 목걸이가 코앞에서 대롱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우스는 아직 멱살을 잡고 있는 티무드나에게 속삭였다.
“난 너희를 비난하지 않는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그보다 네가 ‘기사사냥꾼’을 존경한다고 주장하는 걸 보니 떠오른 게 있어서 말이야…. 넌 아직 기사가 되고 싶나?”
티무드나는 멈칫하다가 내던지다시피 손을 놓았다.
“당신네가 지닌 힘과 권력이라면 부럽긴 하지.”
“좋다. 너를 위해 특별히 기사론 수업을 해주마.”
“당신네 그 추악한 명예와 정의는 별로 안 부러운데.”
“명예와 정의는 기사의 초인적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것. 우리를 살인병기가 아닌 인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규범 가운데 하나.”
아까의 자리로 돌아간 티무드나가 신경질적으로 궤짝을 걷어찼다. 궤짝이 산산조각 나면서 고운 가루가 들어있는 조그만 주머니 같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티무드나가 등을 돌린 채 주머니 몇 개를 골라 드는 움직임을 보며 지우스는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상황에 따라서는 기사의 명예 같은 것보다 앞서는 규범과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걸 지키기 위해 명예를 등진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은 져야지. 그마저 각오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말이야…. 넌 왜 ‘기사사냥꾼’이 소문만 무성하고 체포되진 않는 것 같나?”
“당신네 그 위선적인 윗선에서 찔리는 게 있으니까 모르는 척해줘서 아뇨?”
“아니. 기사 사냥의 증거가 없는 이유는 사냥을 당한 걸로 의심되는 기사들이 모두 격렬한 전투 끝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 현장을 보면 누구라도 비열한 암습이 아니라 두 기사가 정면으로 맞붙은 결투였다는 걸 알 수 있어. 이유가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슨 말을 듣든, ‘새까만 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왔다.”
쿠웅. 티무드나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가까운 곳에서 천둥이 친 것처럼 벽과 바닥이 가늘게 진동한다.
“냉소하긴 쉬워. 그런데 냉소하는 치들은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일은 아무것도 안 하거든. 그러니 꾸준하게, 치열하게, 자기 피를 흘려가며 뭔가를 하려 애쓰는 자가 냉소적인 인간일 리 없지. 나는 녀석에게 동의하지 않고, 이것 때문에 언젠가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녀석을 싫어하지 않아.”
티무드나는 서둘러 검을 뽑아 들고 경계하느라 지우스의 고백 같은 혼잣말을 듣지 않았다. 티무드나가 검을 겨눈 방향은 바닥이었다. 이곳으로 통하는 출입구는 평범한 여닫이문이 아니라 위아래로 열리는 뚜껑문인 모양이었다. 지우스는 무릎 사이의 아래쪽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녀석은 적어도 자신이 사람을 죽인 걸 과시하는 짓은 안 해.”
‘기사사냥꾼’은 기사를 죽이고 나면 다른 이가 수습하거나 자연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떠났다. 그 행동에는 표적으로 삼은 기사를 죽이는 것에 전념할 뿐,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시신을 전리품마냥 인간의 눈앞에서 자랑하거나 전시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아마도 달잔은 검시보고서를 받아본 순간 범인이 ‘기사사냥꾼’은 아니라는 걸 거의 확신했을 것이다. 달잔도, 칸덴티아도, 지우스 자신도, 근거를 얻은 부분은 다 달랐지만 증거가 없음에도 와론은 범인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는 것에 지우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방향과 거리를 특정하기 어려운 어딘가에서 짧은 비명이 터지고, 뭔가가 요란하게 박살나는 둔탁한 소리가 발밑까지 가까워졌다. 티무드나는 뚜껑문이 열리는 방향으로 작살처럼 검을 겨눴다.
“드디어 당신 여자친구가 납셨군.”
그 ‘오해’는 이제 정정해줘야 했지만 지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럴 기회도 없었다.
움직이지 않아야 할 바닥이 기묘하게 부풀어 오르며 기우뚱해진 것 같던 순간, 돌과 나무와 흙이 간헐천처럼 솟구쳐 천장을 때렸다. 귀가 멍멍해지는 우렁우렁한 폭음과 동시에 크고 작은 돌멩이와 나뭇조각이 지우스를 덮쳤다. 반사적으로 충격에 대비하며 고개를 돌리는 지우스를 티무드나가 붙잡아 뒤쪽으로 내팽개치며 욕설을 뱉었다. 준기사급은 되는 자답게 발밑에서 온 예상치 못한 공격에도 바로 반응한 모양이었다. 거 봐. 라던가 네 꿍꿍이는 알겠는데 기왕이면 여기에 내가 잡혀있는 것도 고려해주지 않겠어? 같은 속엣말을 침입자에게 건네는 것과 동시에 지우스는 자신이 갇힌 장소가 어디인지 추측해냈다. 그 소방 망루로군. 거리로나, 높이로나. 그럼 이곳을 상시 지켜야 할 망꾼들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우스가 낸 불이 큰 화재가 되어 모두 급히 출동하면서 망루가 비워진 것일 가능성은 낮았다. 관계자도 아닌 자가 아무 때나 망루에 침입해 인질을 묶어놓고 이토록 사방에서 지독한 기름 냄새를 풍기는 일을 혼자 꾸밀 순 없었다. 함정이 있었어도 방금의 폭발로 상당수가 쓸모없게 되었겠지만 말이다. 아니, 앞서의 충격음을 생각하면 함정을 제거하면서 올라온 게 아닐까. 어쨌든 동조자가 있긴 있었군. 이 모든 생각이, 티무드나에게 겉옷의 두건을 붙잡혀 뒤로 내동댕이쳐지는 짧은 순간 쏟아지듯이 스쳐갔다.
자루를 뒤집어쓰고도 기침이 나오도록 풀풀 날리는 먼지구름 속에서 벽을 타고 불길한 불길이 번져나갔다. 바닥에 있던 등불이 깨지면서 벽에 뿌려둔 기름에 불이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돌과 벽돌로 쌓은 건물이지만 골조는 목재라 당장 눈에 보이는 불길은 위협적이지 않아도 이대로 두면 망루는 속에서부터 불에 타 무너져내릴 것이다. 도약 한 번으로 구멍 뚫린 위층으로 가볍게 올라선 인영이 그 불길을 등지고 주위를 휘 둘러보다가 빠르게 목을 젖혔다. 동시에 저편의 벽에 자그마한 날붙이가 콱 박히는 소리가 났다. 지우스는 외쳤다.
“집중해! 놈은 독을 쓴다!”
퍽! 등을 짓밟혀 금이 간 바닥에 턱을 부딪치면서 혀를 깨물 뻔했다. 자루의 입구가 묶여있는 뒷목 위로 칼날의 끄트머리가 지그시 눌리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쉽게 죽어줄 것 같아? 위선 떠는 기사 놈들한테 꼬리 흔들고 뼈다귀나 받아먹는 개새끼야! 그렇게 쉽게 죽어줄 것 같냐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파편 무더기 위에 올라선 채 와론은 어깨에 둘러멘 짧은 창 같은 물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와론이 말을 걸었다.
“꼴 좋다. 허락도 없이 나대더니.”
“내가 계획한 거 맘대로 해보라고 허락 받았는데.”
“여기가 본부냐? 그리고 너, 나 믿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 갈수록 가관이더라? 내가 못 참아서 틀어지면 어쩔 작정이었어? 손뼉이라도 치게?”
“그래도 안 틀어졌잖아.”
“하…. 저 막힘없는 주둥이를 어쩌면 좋을까.”
다 네가 잘 가르친 덕이지. 지우스는 할 수만 있다면 머리에 씌워진 자루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자신의 대거리에 짜증을 내고 어이 없어 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와론이 보고 싶었다. 철벽처럼 시선을 차단하는 금속 투구와 달리 그 안에 있는 인간의 부드러운 윤곽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두건과 복면으로 가려진 얼굴을, 그 몸짓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티무드나는 격분했다.
“사람 무시하지 마! 닭한테도 쪼는 얼간이가! 네 귀여운 애인은 지금 척수가 끊어지든가 불에 구워지든가 둘 중 하나라는 것만 알아라. 다 네 행동에 달렸다!”
“걔 그런 거 아닌데.”
“이쪽 생각은 다른 모양이더군. 그거 이리 넘겨!”
“이게 뭐라고 무려 기사를 인질로 잡은 거냐? 이 난리를 쳐서 얻을 게 뭐고? 살고 싶은 거 아니었어?”
“당연히 살려고 하는 짓이지! 네놈이 훔쳐간 거 얌전히 내놓으면 애송이는 보내주겠다.”
“이해가 통~ 안 되네~ 여기다 이름 써 놨냐? 잃어버린 가보라도 돼? 어디서 주운 작대기 따위에 무슨 무거운 값어치를 부여하셔서~”
티무드나는 대답 대신 칼끝으로 바닥을 빠르게 훑었다. 널브러진 파편 하나가 불타는 벽으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벽이 깨져나가면서 불붙은 파편과 불티가 지우스 쪽으로 도로 튕겨져 날아왔다. 기름으로 흠뻑 젖은 몸에 불씨가 닿기 직전 와론이 부러진 창을 부웅 휘둘렀다. 무거운 풍압에 불씨가 먼지처럼 날려가고, 저편의 벽이 터지고, 지우스의 목에 칼을 꽂으려던 티무드나가 기우뚱하며 뒤로 밀려났다. 티무드나는 곧바로 자세를 잡으며 바닥을 찼다.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 닿은 불길이 첨탑 하부를 지지하는 목재 구조물을 핥으면서 첨탑이 조금씩 내려앉는 듯 섬뜩한 파열음이 연달아 터지고 첨탑 밑에 매달린 종이 기울어지면서 둔탁하게 텅그렁거린다. 이제는 드러난 피부가 온통 홧홧할 정도로 공기가 가열된 가운데 두 인영이 쇳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얽히고 부딪쳤다.
공방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러진 창을 간격이 멀면 창처럼, 가까우면 칼처럼 변칙적으로 쓰며 퍼부어대는 무거운 공격을 받아내면서 급격히 체력이 소모되었는지 티무드나는 점차 방어만 할 뿐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이 십자로 무기를 얽은 채 대치했다. 정확히는 무기를 얽어 누르는 것은 와론이고, 티무드나는 반쯤 주저앉은 채 옷을 찢을 것처럼 근육이 팽창된 팔다리로 안간힘을 쓰며 지그시 눌러오는 무거운 창을 막고 있었다.
“이거 원래는 마스터피스였던 것 같은데 한번 부러진 거라 내구가 맛이 갔거든. 너 정도면 이걸 부수는 건 어렵지 않아. 내가 기회도 주잖아. 그런데도 못하네?”
“젠…장!”
“네 반응을 보니 역시 이건 내가 갖고 있는 게 낫겠어. 기사들한테 보여볼까나.”
티무드나는 어떤 결심을 했다. 가까스로 창을 막던 칼을 비스듬히 미끄러뜨리며 바닥으로 한 손을 뻗는다. 펑! 이미 화재로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작은 폭음이 터지고, 와론이 물러나며 기침을 했다. 티무드나는 그대로 지우스에게 달려가려 했다.
지우스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공방이 이어지면서 주의가 멀어진 잠깐 동안 바닥에 뚫린 구멍까지 꿈틀거리며 기어간 지우스는 티무드나가 도달하기 직전 그대로 몸을 굴려 허공에 자신을 던져넣었다.
빛 없는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아득한 추락감. 머리에 씌워진 자루 때문에 위아래가 뒤집혀도 알 수 없고 지면까지의 거리감도 모른다. 지우스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강철 같은 팔이 몸을 낚아챘다. 늑골이 눌려 폐가 쥐어짜이면서 숨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등이 대지처럼 단단한 품에 파묻힌다. 본능적으로 안전해졌다고 느끼고 마는 감각에 한순간 머릿속이 얼어붙는다. 생각을 멈추지 마! 아직 안도하면 안 돼! 콰가가각! 돌이 쇠에 긁히고 사방으로 깨져나가며 튀는 소리와 함께 추락하는 속도가 줄어든다.
“가끔 보면 나보다 더 미쳤다니까!”
“위! 위에!”
“알아!”
텅 빈 망루의 내벽을 따라 나선으로 붙어있는 계단을 박차면서 칼을 겨눈 티무드나가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공중에 떠 있을 땐 기사라도 움직임이 제한되니까. 더군다나 보호해야 할 인질도 데리고 있잖아. 지금이라면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지? 지우스의 대담한 행동으로 적의 도주 우려나 망루 부근의 건물에 싸움의 부수적 피해가 튀는 것을 최대한 방지한 건 좋았다. 하지만 망루는 충분히 높지 않았고 추락의 거리는 기사에게 터무니없이 짧았으며 두 사람은 적의 아래쪽에 있었다. 그래도 지우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내 의도는 짐작했겠지. 너라면 어떻게든 해낼 거잖아. 상황이 불확실한 전투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다음 순간 와론이 벽을 박찼다. 계단 위에 내동댕이쳐진 지우스는 온몸에 새로운 멍이 생기는 걸 느끼며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아는데, 꼭 이래야 하냐고. 중력을 걷어차고 위로 솟구친 와론이 중력을 실어 떨어지는 티무드나와 격돌했다. 공중에서 순식간에 수 합이 오갔다.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일어선 지우스는 자루를 뒤집어쓴 머리 위로 크고 작은 돌과 불타는 목재의 파편이 쏟아지자 기겁했다. 드디어 첨탑 꼭대기까지 닿은 불길이 종을 매단 상인방을 완전히 집어삼킨 듯했다. 화재나 기타 재난을 알리는 커다란 종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구멍으로 떨어졌다. 텅그렁! 텅그렁! 종은 건물벽이 허물어지면서 여기저기 튀어나온 골조에 부딪히며 요란하게 추락의 궤도를 바꿨다. 창칼을 나누던 두 사람이 종과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를 피해 잠시 떨어졌다. 그 종이 지우스가 선 계단을 쳐 허물어버렸다. 자루 때문에 시야가 막힌 데다 아직도 포박되어 있었던 지우스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무너지는 계단과 함께 다시 추락했다. 변수 진짜 싫다고… 망루 바닥에서 성문 앞의 녹각처럼 뾰족하고 날카롭게 부서져나간 부분이 위로 향한 채 쌓인 잔해 무더기와 거기에 엉겨 붙은 불길이 삽시간에 지우스를 덮친다.
그리고 지우스의 몸에 주먹이 툭 닿았다.
다음 순간 지우스는 아래쪽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주먹으로 전신을 강타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팟! 더 위쪽에선 벽이 박살나도록 박찬 누군가가 무섭게 육박해오고 있었다. 쿠당탕! 몸이 최고점까지 떠올랐을 때 지우스는 아래쪽에서 뭔가가 거세게 충돌하고 박살나는 소리를 들었다. 지우스는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와론!”
노골적으로 살의를 드러내며 찔러 들어오던 칼이 아주 조금이었지만 흔들렸다. 의아함과 혼란으로 눈을 크게 뜬 티무드나는 지우스를 보느라 그의 몸으로 시야가 가려진 아래쪽에서 도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닭의장풀’을 보지 못했다. 티무드나가 벽을 박찬 때부터 칼끝이 지우스에게 닿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바닥까지 추락해 온몸으로 땅에 부딪힌 자가 도로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져 올라온 속도는 마치-
왜. 겨우 닭 같은 걸 겁내는 놈이니까 절대로 기사는 아닐 것 같았어?
지우스의 목을 스치며 뻗어 올라온 창날이 지우스의 목에 닿기 직전이던 칼끝을 찍었다. 힘에서 밀린 칼이 저 위편 어딘가로 튕겨나가고, 힘을 견디지 못한 창날이 깨지고, 와론이 지우스를 잡아채고, 티무드나가 버둥거리며 지우스 위에 떨어졌다. 세 사람은 공중에서 뒤엉킨 채로 바닥에 충돌했다.
성대하게 피어오른 먼지와 파편과 불티가 휘몰아치는 상승기류를 타고 회오리치며 날아올랐다. 엎어진 채 온몸으로 기침을 하면서 지우스는 자신의 밑에 깔린 사람의 몸을 민감하게 의식했다. 와론. 거친 자루의 직물 너머로 맞닿은 와론의 목에서 전투의 흥분이 사그라들지 않은 거센 심장박동이, 지우스의 체중을 지탱하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흉통에서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심호흡이 느껴졌다. 와론은 약동하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곧바로 지우스는 자신의 등에 올라타듯이 앉아있는 사람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색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불안정하게 헐떡이는 호흡,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도 움직이려 하질 않아. 그리고 이건… 피로군.
“쿨럭! 무기가 내 거가 아니니까 빡세네. 이게 웬 망신이람~”
와론은 잔해 무더기 위에 뻗은 채로 오른 손목을 빙글 돌렸다. 티무드나가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풀썩 쓰러졌다. 와론의 손에서 벗어난 묵직한 금속이 바닥에 텅 부딪히는 소리가 뒤따랐다.
“새까만 닭, 저자는….”
“안 죽었어. 아직은. 쿨럭, 커험. 빨리 의사를 보지 않으면 죽겠지.”
“이거, 쿨럭쿨럭, 좀 풀어줘.”
“그냥 그러고 있지 그래? 보기 좋은데.”
“장난치지 말고.”
와론은 낄낄거리며 지우스의 몸을 떠밀어 적의 반대편으로 굴렸다. 단검이 한번 움직이자 드디어 자루가 벗겨졌다. 밧줄을 마저 끊어준 후 몸을 일으키며 두건을 눌러쓰는 와론의 모습을 보면서 지우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무리 피를 묻혀도 티가 나지 않던 새까만 망토와 달리 모래색 반망토는 적나라할 정도로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 자국이 대부분 등에 번진 것을 보면 계단에서 떨어지는 지우스를 구하기 위해 어떤 기술을 쓰고 자신은 균형을 잡지 못한 채 -어쩌면 등을 보인 대가로 티무드나에게 공격당해- 사람이 찔려 죽기 좋은 물체가 가득한 바닥에 충돌하면서 생긴 상처인 듯했다. 기름이 말라붙어가는 옷에 불티가 닿아 조그만 불길이 화륵 올라오자 번쩍 정신이 든 지우스는 오랫동안 피가 통하지 않아 후들거리는 손으로 겉옷과 모자를 벗어 집어던졌다.
와론은 피 묻은 단검을 쥐고 쪼그려 앉아 옆으로 누워 헐떡이는 티무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할 기력도 없었던 티무드나는 조금 흐려진 불안정한 눈으로 와론을 쳐다보았다. 그의 어깨를 관통한 창대는 내구가 다하여 수직으로 쪼개지고 잔금이 가 있었다. 의사가 처치하기 전에 창대를 뽑는다면 과다출혈로 죽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위험해 보였다. 지우스는 비틀거리며 와론의 옆에 섰다. 와론은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알아낼 건 다 알아냈나?”
“대충. 죽일 거냐?”
“딱히.”
“그럼 됐어. 그나저나 이거, 뭐였던 거야?”
“흉기.”
“그건 알아. 더 있는 거지?”
지우스는 그날 새벽 별천지 건물 뒤편에서 본 광경을 떠올렸다. 죽은 기사들의 유해는 돌아왔지만 무기는 돌아오지 않았고, 지우스는 그것이 다소 희한하다고 생각했더랬다. 내가 알기로 푸르른 양은 창을 쓰는 자였어. 와론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네가 난데없이 하늘색 너구리를 언급한 거랑 관련이 있겠지? 아니, 대답하지 마라. 어차피 난 알아낼 거다.”
지우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와론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와론은 부서져가는 창대를 턱짓했다.
“이걸 저놈이 최근 임무에서 빼돌린 모양이더군. 마스터피스는 부서진 거라도 비싸니까. 그러다 잘못 걸린 걸 깨닫고 딴에는, 쿨럭쿨럭, 살아보겠다고 자기 목숨값으로 이걸 넘겨받을 자를 물색했나 본데, 죽은 기사 친구가 그걸 못 봐줬던 거겠지.”
“그건… 거북이님이 원하는 물증은 아니겠지.”
“아니겠지. 어차피 박살나서 누가 알아보기도 어렵다. 이거나 갖다 줘라. 부검 허가 받았다며.”
와론이 던져준 것을 반사적으로 받은 지우스는 고운 가루 같은 것이 든 조그만 주머니를 알아보았다. 망루 위에서 티무드나가 부순 궤짝에 들어있던 주머니가, 그리고 싸움 중 와론이 갑자기 기침을 터뜨리던 것이 떠올랐다.
“범인의 특제 독이다. 이 동네에 재료수급처인 약방이 있는데, 내 이름 대고 물어보면 친절하게, 후, 불 거다. 약초는 네가 잘 알잖아.”
“처음부터 알았던 거냐?”
“그럴 리가. 혹시나 싶어서 약방을 찔러봤는데 대박 정보를 들은 거지. 이것도 저 위에서 아까 주운 거고. 이거야 원, 들쑤시는 건 내 역할이고 증거 줍는 건 네 역할 아니었어? 왜, 하아… 반대로 간 건지~ 참 나.”
지우스는 손바닥에 쥔 물증을 내려다보았다. 짐작한 대로였다. 티무드나는 친구였던 기사를 설득하려고 기사들의 치부의 증거를 가져왔다가 도리어 비난당하고 위협받자 그 자리에서 마비를 일으키는 독을 써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고는, 그것만으로도 안심하지 못해 뒤에서 찌른 것이리라.
“그보다 새까만 닭, 너-”
“일단 나가자고.”
와론은 단검을 어딘가에 휙 던져버리고는 티무드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잘못 봤나? 지우스는 와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파편을 피해 고개를 움츠린 채 뒤따랐다.
바깥으로 나와 고개를 든 지우스는 지상이 아직 새까만 밤에 잠겨있지만 하늘은 짙은 군청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색깔이 바뀌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망루 앞에는 생각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감시 용도로 세워진 망루는 주변의 건물로부터 거리를 두고 외따로 떨어져 있었기에 바람만 없다면 불이 번질 염려는 적었고, 그보다 그 안에서 요란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 주로 일반인으로 이루어진 의용소방대는 감히 안에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소동이 벌어졌지만, 날이 밝기 직전의 새벽 시간대라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대개 나와보기보다 그냥 출근할 때까지 베개로 귀를 막고 자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주춤 물러서는 틈으로 와론과 함께 범인을 데리고 이동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 지우스는 곧 기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그 대신 견습 정도로 보이는 자들 몇이 구경꾼 사이에 섞여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들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던 탓에 지하실에서 마주쳤던 자들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알아보는 것이 조금 늦었을 것이다.
“기린님! 무사하십니까!”
“저희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머뭇거리며 말을 거는 전현직 견습들을 보고 지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질렀다.
“돕고 싶다면 불을 끄고 기사 불러. 아무나 빨리!”
아무리 한새벽이라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망루 하나가 반파되고 불탈 정도로 소란스러운데 왜 아직까지도 기사가 출동하지 않는 것인가? ‘기사사냥꾼’의 죄를 묻겠다며 탑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기사들 중 하나만이라도 그때의 행동력을 다시 보여줄 수 없는 것인가? 그때 와론이 멈춰섰다.
“너네는 사람 죽이고 다니는 짓거리의 어디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던 거냐?”
지우스에게는 말을 걸면서 ‘닭의장풀’은 일부러 모른 척하던 자들이 흠칫 긴장했다. 차분하고 건조하며 조금 쉰 그 목소리로 말하는 이는 그들이 알던 가볍기만 한 괴짜 같은 ‘닭의장풀’이 아니었다. 대답이 없는 침묵 속에서 와론은 티무드나의 목에 아직도 매달려있는 가짜 목걸이를 잡아챘다.
“너네끼리 뭔 작당을 하든 그건 상관없는데. 그 가짜 목걸이는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와론의 손아귀에서 유리조각이 녹색의 가루로 바스라졌다.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목걸이 줄을 지그시 밟고 와론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우스는 와론의 가슴께에 숨겨져있을 광택 없는 녹색의 돌조각을 생각했다. 그거였군.
의용소방대는 싸움이 정말로 끝난 건지 몇 번을 되묻고서야 불을 끄러 달려갔다. 전현직 견습들은 우왕좌왕하다, 대부분 의용소방대에 합류하고 두 명이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 둘이 향한 곳과 다른 방향에 있는 건물의 지붕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려 지우스 앞으로 달려왔다.
“지우스씨! 방금 봤는데 웬 불- 엥 모자 어디 갔어요? 옆에 어깨 구멍 난 분은 누구-”
다랑을 본 지우스의 얼굴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너구리! 잘 와줬어. 기사 살인용의자야. 이자를 본부로 압송해. 그리고 저 소방망루의 망꾼 중에 범인의 동조자가 있어. 늦기 전에 잡아야 해.”
“네? 어, 살인용의자? 소방망루도 어, 살인요?”
“이자를 거북이님한테 데려가! 한 놈이 아니라고 전하고! 자세한 건 내가 가서 설명한다!”
다랑은 당황했지만 곧 범인의 상태를 한눈에 훑어보고는 어깨에 들쳐 맸다. 지우스에게 눈인사를 보낸 후 다랑은 가까운 건물벽을 밟고 올라가 기사만이 가능한 무서운 속도로 사라졌다. 다랑이 밟은 자리마다 포석과 벽돌과 기와가 폭발하듯이 깨져나간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지우스는 와론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저 멀리 어두운 골목길 가운데 하나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모래색 반망토의 끝자락이 언뜻 보였다.
티무드나의 동조자일 견습 출신의 망꾼은 범인이 잡히기 전에 먼저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도주한 동조자 및 연관된 여죄를 마저 추적하려면 기사급의 전력 한둘보다는 같은 견습 수준, 아니 평범한 일반인이라도 충분한 머릿수를 갖춘 조직의 지원이 필요했다. 지우스는 즉시 본부에 복귀해서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지우스는 다랑이 뛰어간 방향을 등지고 와론을 향해 달려갔다.
“잠깐만, 얘기 좀 해.”
와론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씩 흔들리고 조금은 비틀거리는 그 뒷모습은 지우스가 꿈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보던 와론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젠장. 젠장! 와론을 추월해 그 앞을 가로막고 선 지우스는 지체 없이 와론의 왼 손목을 붙잡았다. 와론이 잇소리를 냈다. 검은색 반장갑의 손바닥과 네 손가락의 마지막 마디에 나란히 그어진 칼자국 밑으로 검푸르게 변색된 피부가 보였다. 와론은 왼팔의 정맥이 지나는 자리를 오른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그 단검.
“어디 찔린 거 아냐. 손만 좀 긁혔지. 신경, 쿨럭, 꺼.”
“의사한테 가자.”
“됐네요. 작전상의 배역과, 현실이, 큭, 혼동되기라도 해? 답지 않게~”
“그런 게 아냐. 심상치 않아. 이건 너 혼자 다스릴 수 없어.”
“약방 갔댔잖아. 오기 전에, 해독제를 먹어뒀다. 후, 내 회복력 몰, 쿨럭, 라? 일시적인 거야. 저거 다, 잡아놓고, 놓칠 셈이냐?”
“그건 다른 자들에게 맡겨도 돼! 여긴 황무지 한복판이 아냐. 가다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쓰러질 일 있어? 넌 내가 필요해.”
낮보다 밤이 긴 계절이라 사위가 아직 컴컴해도 사람들이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일어날 시각이 가까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지역에서 아침 시간대의 골목길을 이미 경험해보았다. 와론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도착, 할 때까지만.”
지우스는 와론의 반망토 끝자락을 길게 찢어 팔을 압박한 후 옆에서 그의 상태를 주시하며 걸었다. 해독제를 먹었다면서 왜 심상치 않은 증상을 보이고 있지? 아까 그 기침. 그것도 독인가? 혹시 두 개의 독이 조합되어 해독제가 듣지 않게 된 것은? 어느 순간 와론이 휘청이며 벽을 짚었다. 와론의 팔을 어깨에 둘러 부축하면서 지우스는 와론이 식은땀에 푹 젖은 것을 깨달았다. 복면 틈으로 스며 나오는 허연 입김이 무색할 정도로 와론의 몸에서 열이 끓고 있었다. 지우스는 와론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식 언제 단검을 쓴 거야, 왜 그걸 맨손으로 잡냐고, 너처럼 조심성 많은 놈이… 어떤 깨달음이 지우스의 머리를 쳤다. 모든 독을 치유하는 해독제 같은 것은 없다. 와론은 상대가 독을 쓸 것을 알고 해독제를 준비한 후에도 날붙이에는 스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주의하며 싸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와론이 피하는 대신 맨손으로 칼날을 붙잡았다면, 그래야만 했던 상황이라는 것은- 젠장, 의사를 불러야…! 지우스는 이 부근의 지리를 잘 알지 못했다. 자연스레 지우스는 자신이 아는 길, 아는 건물로 미친 듯이 걸음을 서둘렀다.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소리에 자다 깬 모습으로 짜증을 내며 나온 여관 주인은 피 묻은 차림에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키 큰 사람과 그를 부축한 검댕투성이의 기사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지우스는 그대로 여관 주인을 밀치고 들어갔다.
“같은 방으로, 깨끗한 물과 약초 있는 대로 가져오고,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아니 기사님, 기사님이 불 질러서 못 쓰게 됐는데-”
“비용은 별천지 앞으로 청구하시오!”
계단을 오르다 와론이 반쯤 의식을 잃은 것을 깨달은 지우스는 그를 들쳐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방에서 욕설을 들어가며 달린 끝에 도착한 방은 다행스럽게도 불길이 일찍 발견되었던 건지 바닥의 1/3과 벽지 일부가 거무죽죽하게 그을린 것 말고는 큰 피해가 없었다. 불에 탄 탁자와 의자는 치워졌지만 침대는 끄트머리가 조금 타고 검댕이 묻어있는 채로 내버려둔 상태였다. 문도 멀쩡히 잠겼다.
잠시 망설인 끝에 지우스는 피가 말라붙어 거무죽죽해진 반망토를 벗겨냈다. 망토의 두건 아래에 꼼꼼히 감춰져 있던 어깨 길이의 회백색 머리칼이 잿빛을 띠어가는 새벽공기 속에서 힘없이 사락이며 쏟아져나왔다. 완전히 타고 남은 재 같기도 하고, 인적 없는 새까만 밤의 산야에서 발 앞을 비춰주던 달빛 같기도 한 색깔이었다. 그 머리칼이 식은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채 얕은 숨을 뱉는 와론을 침대에 눕히면서 지우스는 자꾸 얼어붙으려 하는 머릿속을 힘겹게 흔들어 깨웠다. 여관 주인이 가져다준 물품을 바닥에 늘어놓고 지우스는 먼저 와론의 손에 난 상처를 살폈다. 깨끗한 흐르는 물이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도시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직 독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반장갑을 조심스럽게 벗겨낸 후 급한 대로 공동우물에서 길어온 얼음 같은 물로 검고 진득한 피가 밴 상처를 씻어냈다. 다행히 여관 주인이 약효는 적어도 웬만한 독이면 조금씩 듣는 약초로 만든 환약을 몇 개 갖고 있었다.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준 후 한 손에 환약을 들고 복면에 손끝을 댄 채 지우스는 잠시 갈등했다. 새까만 닭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호흡을 보다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복면은 없는 편이 나았다. 어떻게 해야-
“가라.”
반사적으로 복면에서 위쪽으로 눈길을 끌어올린 지우스는 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 와론과 눈이 마주쳤다. 아.
“가라. 다가, 오지 마라.”
눈을 감은 와론은 고통스럽게 낯을 찡그린 채 가쁜 호흡을 이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손은 목걸이가 숨겨진 가슴 위에서 팔에 핏대가 돋도록 주먹을 쥔 채였다. 지우스는 망연히 와론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와론은 자주 다치긴 해도 죽는 광경만큼은 상상이 되지 않는 기사였다. 와론이 있으면 지우스는 동료를 잃을지도 모를 변수로 가득한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덜어졌다. 지우스가 한 달을 압축한 끝에 폭발시킨 ‘힘’ 앞에서도 와론은 버텨냈으니까. 설령 지우스의 계획이 잘못되더라도, 와론은 투덜거리고 짜증을 내면서도 어떻게든 감당해냈으니까. 와론이라면 절대 죽지 않을 테니까. 와론이라면…
아니, 너 역시 사람이야. 불멸자도 불가해한 재해도 자연물도 아닌, 그냥 사람일 뿐이잖아. 너는 도움이 필요하고 내가 지금 여기 있어. 나에게 의지해줘.
그러나 그 생각을 태도로 드러내는 순간 지우스는 와론이 눈앞에 그어 보인 선을 넘어서게 되며, 춤은 끝날 것이다. 와론은 지우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다.
떨리는 한숨을 뱉은 후, 지우스는 머리를 수그렸다.
“오늘 중에 진범 체포 사실이 발표되겠지. 그 시각에는 탑에 새까만 닭이 있어야 할 거다. 알겠어? 그때까지도 이 꼴이라면 강제로 의사한테 끌고 갈 거야.”
가쁘게 숨을 뱉으면서 와론이 소리 없이 웃은 것 같았다. 지우스는 일어섰다.
나중에 돌이켜본 지우스는 그 방에서 나온 이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똑똑히 기억할 수 없었다. 본부로 돌아가 눈 밑이 거무스름해진 달잔에게 증거를 넘기면서 사건의 경위를 간략히 보고하고, 범인의 심문과 조서 작성 등 자질구레한 일거리의 개요를 짜고, 마침 수도에 있던 기사들 몇을 소환해 일을 나눠 지시하고, 주로 견습 출신의 용병들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약재를 파는 약방을 수사하고, 몇몇 인물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고, 범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다른 전직 견습들의 협조로 숨어있던 망꾼을 빠르게 잡아내고, 소방망루가 불타고 파괴된 사건에 대해 질문하며 달라붙는 기자들을 따돌리고, 새까만 닭이 구금되었다고 알려진 탑에 잠시 들른 후, 달잔이 살인사건의 공식발표를 하기 위해 기자들과 만나러 출발하자마자 궁을 뛰쳐나와 그 골목으로 돌아갔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일이 더 있었던 것 같지만 지우스는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지우스의 머릿속에 선명한 것은 의사도 거부한 채 하루종일 혼자서 독을 견디고 있을 와론의 모습이었다. 방금 나온 빳빳한 석간신문-1면에는 기사를 죽인 진범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실린-을 펼쳐들고 있던 여관 주인을 지나쳐 한번에 대여섯 계단씩 뛰어 올라간 지우스는 닫힌 문 앞에서 숨이 멎는 것을 느끼며 멈춰섰다. 문을 살짝 두드리고 기다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문을 두드린 후 지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꺼냈다.
“새까만 닭?”
석양이 내리면서 창을 통과한 회적색의 각진 햇빛이 탄내가 가시지 않은 벽에 비스듬히 비쳐들고 있었다. 바닥에는 새벽에 지우스가 얻은 도구와 물품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군데군데 핏자국과 땀이 말라붙은 채 흐트러진 침대에는 갈색으로 바랜 모래색 반망토와 복면이 아무렇게 던져져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습기를 빼앗는 초겨울의 바람이 가만히 불어 들어왔다.
와론은 없었다.
0. 가는 날
“해서, 지우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애인과 요란하게 싸우고 차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며칠 전 그렇게 정신이 팔려있었던 이유가 그건가? 그 전에, 자네가 연애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도 난 처음 알았네만.”
“그런 사실 없습니다….”
책상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으면서 지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을 생각도 못 하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달잔의 집무실로 오는 내내 마주치는 기사마다 별다른 친분이 없는 자마저도 다 안다는 듯 비장하거나 애잔하거나 묘하게 흥분한 낯으로 힐끔거리고 혹은 말도 붙이려 들던 이유가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달잔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근엄한 낯으로 지우스의 안색을 살폈다.
“그럴 때 혼자 있는 건 좋지 않아. 이따 점심이나 같이하지.”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학여행 온 애들이랑요? 싫습니다.”
“눈치챘으면 그러지 말고 나 좀 살려다오….”
“저도 선약이 있어서요.”
근엄한 표정이 무너지면서 달잔이 앓는 소리를 냈다. 지우스는 단호하게 눈을 피했다. 기사단 몇이 각기 가르치는 유망한 기사지망생들을 모아 기사의 성지인 제국 수도 니젤에 단체로 수행여행을 보낸 것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는 것 이상의 이유가 있다. 기사단에서는 다음 기사 시험이 멀지 않은 지금 수도의 기사들에게 유망주의 얼굴도장을 찍어두고 싶을 것이며, 아이들을 인솔해 오랜만에 수도로 올라온 기사들은 중앙의 판단이 필요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등 아이들이 보지 않을 때 수도에서 처리해야 할 일거리를 함께 가져왔을 것이다. 다른 기사들이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탓에 거의 혼자 떠맡다시피 하는 달잔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우스도 그들과 엮이고 싶진 않았다. 기사단들은 위치한 지역의 정치적 기류에 따라 자신의 쓸모-분쟁에 대한 사전적 억지력이 됐든 일단 터진 전쟁의 주도자가 됐든-가 달라질 뿐더러 그 기사단에서 훈련 시켜 배출한 격기사의 수에 따라 위상이 바뀌니 한창 민감할 시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사를 절대적으로 동경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마주하는 것은 그보다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 진범, 갑자기 죽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우스는 책상 위의 얇은 보고서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보고서를 끌어당겨 첫 장을 넘기자마자 달잔이 홉뜬 눈으로 지우스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던데. 보고서 작성자가 아니라 자네가 나타난 데 특별한 이유라도?”
“별 이유 없습니다. 새까만 닭이 일방적으로 저한테 …전달을 위임했을 뿐이죠.”
아침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떠 보니 열어놓은 기억이 없는 열린 창문에 걸터앉은 새까만 무단침입자가 지우스의 벙찐 얼굴에 말없이 보고서를 툭 던지고 저벅저벅 떠나던 광경에서 느낀 기분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달잔은 간략하게 사실을 나열한 보고서를 빠르게 넘겨보았다.
“음. 의사 말로는 어깨에 박힌 부서진 무기의 아주 작은 파편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다 폐와 심장을 손상시킨 것 같다더군.”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나도 의학은 잘 몰라서 의사가 한 말을 그냥 전하는 거야. 생각해 보면 관통상이란 건 기사가 아닌 자들에게는 그 자리에서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이긴 해. 살아남아도 어떤 형태로든 후유증을 겪고. 그래도 준기사급이면 좀 더 버틸 힘이 있었을 텐데.”
“그럼 사건은 거기서 종결되는 겁니까?”
“그렇지.”
티무드나는 북부에서 기사들이 저지른 불명예를 알았다. 그가 죽어서 입이 영원히 봉해지는 편이 기사들에게는 유리하고 편리했다. 한편 기어스로 인해 발생한 이상한 ‘힘’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던 지우스를 위하여 실험을 계획하고 기사에게 속아 전멸당하게 될 그 일족의 수장을 수도로 불러들인 사람은 달잔이었다. 그 죽음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살릴 수 있었던 자를 일부러 죽게 방치한 것인가? 지우스는 달잔에게 차마 그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대답이 전자라면 자신은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 말을 의심할 것이며, 후자인 경우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달잔님을 어디까지 알지? 지우스는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처음부터 임무의 목적은 증거를 찾는 것이고 진범의 체포나 생사 같은 건 새까만 닭의 판단에 맡겨져 있었죠. 거북이님은 새까만 닭이 진범을 찾아내면 죽일 거라 예상하셨습니까?”
“새까만 닭은 이유 없이 죽이진 않아. 철저하게 지키는 자기만의 규칙이 있어. 자네도 알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그자에게 누군가의 생사를 놓고 심판할 권한이 있기라도 한 겁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친목모임은 처음부터 새까만 닭이 조사하고 있었다. 그 무리를 우리보다 잘 아니 적절하게 다룰 방법도 잘 찾아낼 거라 생각한 거지.”
“친목모임과 기사 살인은 별개의 건이죠.”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자네가 사람이 죽는 일에 민감한 건 아는데 이상하군. 죽은 범인을 개인적으로 알기라도 했나?”
달잔이 보고서 마지막 장을 덮으며 팔짱을 꼈다. 달잔은 다랑이 참가했던 그 임무를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지우스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달잔의 낯에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냥, 그자가 살아있었다면 더 많은 걸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애석한 노릇입니다.”
지우스는 그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달잔은 찌푸린 낯으로 지우스를 쳐다봤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어나간 지우스가 문손잡이에 손을 뻗었을 때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자네가 지붕에서 했다던 연설에는 꽤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 있었네. 특히 기사의 폭력에 대한 부분.”
“그렇습니까.”
“우리 기사들은 이 힘을 약자의 보호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누가 강자고 약자인 건지, 또 어떤 약함을 지닌 자가 정말로 폭력으로부터 보호가 필요한 입장인 건지는 그때 그때 상황을 봐야 알 수 있는 이야기지. 우리가 약자로 정의한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의 보호를 원하는지 물어본 적 없기도 하고. 확실한 건, 이 세상은 별 이유 없이도 지독하게 폭력적이란 거야. 우리 기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우스는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반쯤 몸을 돌렸다. 달잔은 한 손에 펜을 든 채 다른 두툼한 서류를 휘리릭 넘겨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멀쩡해 보이지만 어딘가에선 어른이 아이를 학대하고 개가 같은 개를 잡아먹는 세상이란 말일세. 자네의 신조처럼 폭력이 아닌 방법으로 그런 일들을 해결할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당장 폭력에 직면한 사람의 입장에선 말이 아니라 같은 폭력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어. 그게 이 세상의 상식이니까. 그런데 그 모든 일에 명예롭고 정의로운 기사가 끼어들어 시시비비를 가리고 악당을 물리친다? 불가능하지. 기사라 해봤자, 실상은 힘이 좀 센 놈들이 그때 그때 눈앞에 닥친 일을 꾸역꾸역 하는 것뿐이야.”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하는 거잖습니까.”
“당연하지. 나는 약자가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거든. 기사가 지금 흘리는 피는 그걸 위한 거라고 믿고 싶어.”
달잔은 서류의 끝에 서명을 하고 다음 서류를 집어 들다가 낯을 찌푸리며 일어서서 책장으로 갔다. 다른 서류를 뒤적이며 돌아선 등은 대화가 정말로 끝난 것을 알리고 있었다. 지우스는 문을 열었다. 그 피는 누구의 것입니까? 기사 자신입니까, 아니면 기사에게 죽임당하는 자들입니까? 그걸 결정하는 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지우스는 자신도 답을 아는 질문을 굳이 하지 않았다.
평소보다도 그늘이 짙어진 낯으로 건물을 나온 지우스는 기사 본부 앞의 뜨락으로 입장하는 문에 들어서면서 와글와글 떠드는 조그만 무리를 발견했다. 키도 아직 다 크지 않은 앳된 아이들은 볼이 발개진 채 크게 뜬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딴에는 최선을 다해 소리를 죽여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그래 봤자 흥분한 기사가 아니고선 감히 목소리를 높이는 자가 없는 황궁의 탁 트인 공간 한복판이라 아이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모든 방향으로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인솔하는 기사도 지나가던 근무자들도 수도와 기사 본부가 모두 처음일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 지나치게 소란하지만 않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원 없이 흥분을 표현했다.
“좋을 때다~ 인생에서 꿈과 희망을 믿을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시기잖아. 그치?”
그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가슴 속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동시에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얼굴 밖으로 티가 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고개를 돌려 뒤편을 올려다본 지우스는 와론이 3층쯤 되는 높이의 동상 위에 -너 하마님의 머리 위에 일부러 올라간 거지?- 쭈그려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리 같은 투구와 날개처럼 가볍게 펼쳐진 새까만 망토, 어떤 적수도 꺾을 수 없는 창을 어깨에 둘러메고 햇빛을 가리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어쩐지 가장 높은 횃대 위의 기고만장한 싸움닭 같았다. 한번 보기만 해도 잊기 어려운 강렬한 인상 속에서 언뜻 보면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광택 없는 녹색의 돌조각 같은 목걸이는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듯 와론의 가슴 한복판에 매달려있었다. 저런 불길한 위압감을 지닌 강력한 기사가 자신의 이명이기도 한 그 닭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불쑥 떠오르는 바람에 지우스는 정말, 정말 갖은 애를 써서 얼굴을 굳혀야만 했다.
“간 것 아니었어?”
지우스는 와론이 새벽부터 남의 집에 침입해 보고서를 던져놓고서 그대로 수도를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얼마 안 가 정오가 될 지금까지도 수도에 있는 것이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힌셔의 동상에서 뛰어내린 와론은 -영웅 검붉은 하마의 동상은 기사 본부의 바로 앞에 있었기에 아이들은 와론이 동상 위에 있던 것도, 3층은 되는 높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망토를 펄럭이며 뛰어내리는 것도 보았으며 인솔 기사는 뒷목을 잡았다- 집 앞에 산책을 나가는 사람 같은 느긋한 걸음으로 앞서갔다.
“그럴 작정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발을 잡혀버려서.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지.”
지우스는 새까만 닭의 간격 바깥에서 뒤처져 걸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새까만 닭이라고, 진한 색깔을 받은 강자라고, 저 창이 바로 나린기라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 아이들을 지나쳐 문을 빠져나가는 동안 아무도 지우스를 주시하지 않았다. 기사 중에서는 지우스를 모르는 자가 없지만,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어쨌거나 강함으로 유명세를 날리는 기사는 아니었고, 기행과 소문으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자도 아니었다.
황궁을 겹겹이 둘러친 담장과 성벽을 지나 거대한 정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궁 앞에서부터 니젤 시내를 둘러싼 거대한 성벽의 정문까지 쭉 뻗은 대로에 들어섰을 때도 일행이라기보다는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는 타인들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와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는 내내 지우스는 마음속에서 맴도는 소란한 생각들을 가라앉히고 가려내려 애썼다. 그래서 갑자기 와론이 멈춰섰을 때 지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야. 너 말은 안 해도 더럽게 시끄러워. 뒤통수 그만 째려보고 할 말 있으면 해.”
어깨너머를 넘겨다보며 투구의 턱부리가 짜증스럽게 까딱였다. 와론이 멈춰서 기다리는 동안 지우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간격 안으로 들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엷은 새털구름이 폭 넓은 베일처럼 흩어진 담청색 하늘 아래 수도의 대로는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간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잠시 일손을 놓고 점심을 먹으러 나오거나 음식을 배달 중인 일반인들이 건물에서 쏟아져나오고, 그만큼 보는 눈과 듣는 귀와 부딪칠 어깨가 가득했다. 그렇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겨줄 무장을 모두 갖췄기 때문일까. 인파 속에 있으면서도 와론은 그때처럼 긴장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 녀석이 그 새까만 닭이라는 걸 먼발치에서도 알아볼 수 있으니 다들 알아서 피하는 덕에 신경이 덜 쓰이는 것도 있겠지.
“벌써 새 임무를 받았나? 보통 임무 중에 부상 당하면 휴식기를 주잖아.”
“뭐, 금방 회복되기도 했고, 달잔 자식이랑 한판 하기도 했고. 한동안은 이 썩은 닭장 냄새 나는 동네에서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지우스는 와론이 무슨 일로 달잔과 다퉜는지 묻지 않았다. 무엇이 됐든 수도도, 기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머리를 식히려 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넌 다시 몇 달을 아무 소식 없이 떠나 있을 거잖아 라던가, 내가 네 생각을 궁금해해도 될까? 라던가, 이번에도 돌아올 거지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고르고 고른 끝에 지우스는 가장 무난해 보이는 것을 조용한 어조로 꺼냈다.
“그럼 지금 가는 건가?”
“그래.”
“한동안 또 소식이 끊기겠군. 사고는 적당히 치기 바라.”
“오호?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냐? 중앙에 오래 있더니 이제는 거북이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 같나?”
“그런 의도가 아닌 거 알잖아.”
이제부터 최소한 몇 달은 보지 못할 이에게 하려던 말도, 들으려던 말도 이런 것은 아니었다. 지우스는 차라리 입을 다물어버렸다.
“넌 어디 가던 길인데 날 따라 나온 거냐?”
그래서 와론이 먼저 조금, 아주 조금은 날을 눕힌 어조로 무난한 질문을 하자 지우스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친목모임을 하던 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피해자의 추모식을 열기로 했다. 저녁에는 교대근무를 하는 녀석들도 많아서 이 시간대밖에 맞는 때가 없었다더군. 나도 초대받았어.”
“그 녀석들, 빨간 머리가 죽은 건 알려나?”
“조만간 알게 되겠지. 너한테는 초대 이야기가 없었나? 닭의장풀.”
“그걸로 부르지 마. 들은 바가 없어. 그쪽에선 나를 완전히 기사 끄나풀로 찍었을 텐데 뭘, 나라도 안 불러~”
자못 경쾌한 어조였지만 지우스는 투구 밑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상상하고 있었다. 찌푸리고 있을까? 그냥 담담할까? 아마도 후자이리라. 젊은 기사가 살해된 사건의 해결에 와론의 공이 컸지만 그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고, 그것이 알려질 이유도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들 중 누군가를 잡아갈 목적으로 잠입하고 그들 앞에서 동료의 증표인 목걸이를 비난한 ‘닭의장풀’을 미워할 것이다. 와론은 선한 일을 하고도 오해 속에서 배척당하는 삶에 익숙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기사였다.
언젠가부터 세상이 와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이 알고 있으며 와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지우스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저것도 그 견학 온 애들인가 본데. 저거 당나귀 아냐?”
와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끝으로 눈길을 돌린 지우스는 먹을 것으로 자기들끼리 다투고 있는 청회색 머리의 소녀와 백발 머리의 소년 옆에서 유난히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의 기사가 크게 하품하는 걸 보았다. 소녀가 가차없이 소년의 턱을 올려치고 소년은 뒤로 넘어간 자기 머리를 그대로 앞으로 찍어 소녀의 코에 꽂아버리는 훈훈한(?) 광경 옆에서 일행이 아닌 척 조금 떨어져 있던 붉은 머리의 소년은 말리긴커녕 소녀의 교본에 실어도 좋을 훌륭한 돌려차기를 수줍게 훔쳐보고 있었다. 지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시험에 붙든 못 붙든 저 아이들에게는 ‘기사’라는 게 좀 더 다른 것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말을 뱉고 나서 지우스는 와론이 무슨 날 선 말을 하든 받아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의외로 와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이완된 와론의 몸짓을 엿본 지우스는 그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우스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기사의 어떤 부분에 대항해 혼자 싸움을 벌여온 와론에게는 품고 있는 생각과 하고 싶은 말이 한두 마디로 풀 수 없을 만큼 많은 듯했지만, 지우스는 아직 그런 본심을 들을 수 있는 간격까지 그에게 다가가 있진 않았다. 어쨌거나 기사로 사는 것은 기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고, 그 점에 있어서는 두 사람의 생각이 분명하게 일치했다. 지금은 서로에게 생각이 맞는 부분도 있다는 조그만 사실 하나에 의지해 느슨한 침묵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언젠가부터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들 대신 줄지어 물자를 나르는 수레와 우마차들이 대로의 한복판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조그만 점 정도로 보였던 정문이 이제는 문지기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뒷목과 등에 식은땀이 돋고 오한이 이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강해진다. 지우스는 걸음을 늦추고 싶었다. 아예 멈춰 서고 싶었다. 오늘 저곳은 와론에게는 출발점이었고 지우스에게는 선회점이었다. 하지만 누가 너를 붙잡을 수 있겠어?
“문지기,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두 기사를 알아본 견습 출신의 문지기들이 창을 꼿꼿이 세워 들며 부동자세를 취해 예를 표했다. 와론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 몇 걸음 더 나아간 후에야 지우스를 돌아보았다. 문 앞에 선 지우스는 와론이 자신의 간격이 끝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지점에 지우스를 둔 채 멈춰 선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그리고는 투구 뒤에 숨어 자신을 관찰하고 있을 눈동자를 생각했다. 지우스는 이제 그 눈을 상상할 수 있었다.
“간다.”
“그래.”
와론이 몸을 돌렸다. 정오의 햇볕 아래 둔한 회백색으로 빛나는 투구와 우쭐거리는 긴 붉은 투구깃, 거대한 날개 같은 새까만 망토가 성 밖 농토 사이의 포석이 사라진 흙길을 지나 언덕을 타고 점차 오르막이 되어가는 숲길로 멀어진다. 그 모습이 나무 사이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우스는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등 뒤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발생시킨 온갖 열을 실은 바람이 대로를 따라 성문을 빠져나가면서 급속도로 식혀지고, 가로막는 것이 없는 산야로 거침없이, 눈이 닿지 않는 저 멀리 뛰쳐나갔다. 지우스는 양팔을 가볍게 늘어뜨리고 손가락 사이로 바람의 결을 느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어깨를 조금 움츠린 채 돌아서서 끝이 없는 일과 온갖 골칫거리와 믿어야 하는 사람들과 지켜야 할 약속이 기다리는 도시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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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화룬샤전에서 와론의 경우 처음부터 상대가 심상치 않은 놈인 걸 (딱히 정정당당한 놈은 아닐 거란 걸) 눈치채고 몸을 사려 끝까지 별 일 없었지만 팅크는 영웅의 풍모로 나섰다가 중독당해 거품 물고 사경을 헤맨 걸 잊을 수 없습니다. 팅크가 약한 기사는 아닌데 의사의 치료를 받으면서도 힌셔와 와론이 가볍게 운동 한판() 하고 올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렇게 뻗어있었다는 데서 기사도 독에는 못 당하는구나 싶은 한편, 역시 나의 영악한 최애가 알면서도 당해서 그렇게 구르는 걸 보고 싶어진달지.(...)
여하간. 이 픽은 철저하게 지우스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이 픽이 전개되는 동안 지우스가 별 말 하지 않은 몇몇 장면들이 와론의 시점에서는 어떻게 보였고, 또 와론은 뭔 생각을 했을까요?^^
좋은 주제를 리퀘주시고 또 분량이 다소 과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기다려주신 현님께 감사드립니다. 업뎃 내내 트위터에서 즐거워하는 감상 들려주신 애잔 트친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마지막까지 재밌게 읽히는 팬픽이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