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기린 쫓는 닭" 입니다.
*이 연성의 줄거리가 잡힌 것은 미리보기분으로 126화가 공개된 후인 7월 11일경입니다.
따라서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2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단 마의 126화가 풀린 후로 2달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그간 잔불 연재분도 슬쩍 반영됩니다.;;
그리고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마법이나 마수에 대한 설정은 원작자인 환댕 님이 작품을 통해 공개하신 것에 기반하되
공백이 있는 부분을 제 맘대로 망상해서 채워넣은 것으로,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가독성 차원에서 화면을 125% 정도로 확대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1.
와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알았다. 일반인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평균수명이 짧은 기사들 사이에서 얼마 안 되는 노련한 중견급 기사의 명단에 죽음을 자기 그림자처럼 끌며 살아온 그가 이름을 올린 것은 찰나에 생사의 가름을 예측하고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던 무수한 경험 속에서 그런 판단력과 감이 연마된 덕이었다.
지금 그 판단력과 감은 빗물에 젖은 흙을 헤집고 수풀을 뒤엎으며 숲 저편으로 몰려간 흔적들의 끝에서 맞닥뜨리게 될 것들이 상대하기 까다로울 거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곳곳에 듬성듬성 쌓인 흙더미의 행렬은 두더지 여러 마리가 흙 밑을 들쑤시며 바쁘게 돌아다닌 흔적과 비슷했지만, 규모 면에서는 그렇게 귀엽지 않았다. 흔적들이 수렴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와론은 둘레가 서너 아름은 되는 거대한 나무들이 무릎 높이까지 불룩 솟은 흙더미에 떠밀리면서 반쯤 뿌리가 들려 옆의 나무에 위태롭게 기대거나 아예 쓰러진 곳을 몇 군데 지나쳐왔던 것이다.
한숨을 뱉고 들여다보던 흙바닥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귓속 어딘가가 우렁우렁 울리는 느낌과 함께 머릿속이 핑글 돌았다.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헛구역질과 온몸 곳곳을 날카롭게 찔러대며 아우성치는 통증에 숨이 턱 막힌다. 뼈에 금이 간 채 몇 번이고 강력한 충격을 견뎌야 했던 왼팔과 적수의 모든 것이 실린 마지막 일격에 온몸을 크게 베인 상처가 특히 좋지 않았다. 급하게 이동한 부작용으로 아직도 속을 뒤집어대는 멀미는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망할 힌셔. 이마에 식은땀이 돋는 것을 느끼며 와론은 진통 작용이 있는 나뭇잎 뭉치를 꺼내 투구의 면갑 틈으로 쑤셔 넣었다. 씁쓸한 말린 잎을 질겅이며 땅에 꽂아둔 론누를 움켜쥐고 뚝뚝 끊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는다. 전신의 아직 낫지 않은 상처로 산산이 흩어지려는 의식을 느리고 깊고 규칙적인 호흡 하나에 집중시키려 애쓴다. 망할 놈의 명예. 그래도 기사라서 좋은 점이 있다면 몸의 회복이 남들보다 빠른 만큼 약효도 빠르게 돈다는 점 정도일까. 필요한 만큼 시간이 지나자 맹렬한 소나기를 온몸으로 뒤집어쓰는 것처럼 쏟아지던 고통은 곧 먼 산 저편에서 천둥이 치는 멍멍한 울림 정도로 무뎌졌다. 늘 그랬듯이. 론누에 기대어 천천히 몸을 늘리며 일어선 와론은 무릎과 망토자락에 들러붙은 젖은 낙엽과 흙을 툭툭 걷어내며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기감을 넓게 펼쳐 자신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에는 위협적인 생물의 기척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와론은 론누를 들어 머리 위로 던져올렸다. 아야야.
울창한 녹음과 빗방울과 물안개를 뚫고 치솟은 론누는 숲머리에 닿을 듯이 무겁게 내리깔린 구름덩어리를 헤치고 이리저리 사납게 꺾이며 질주하다, 적당한 지점에서 꼿꼿이 멈춰 서더니 빙글 돌아 지면을 향해 날을 겨누었다. 흙더미들이 몰려간 방향을 따라가자 곧 무성한 식물이 빽빽하게 지표를 덮은 온대림의 한복판에 기반암까지 드러날 깊이로 여기저기가 파헤쳐지고 수백년 수령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나간 공터가 론누의 시야에 들어왔다. 자연재해의 현장일 수는 없었다. 나무와 흙을 온통 망쳐놓은 것은 표토를 뚫고 여기저기서 비대칭적으로 솟아난 바위기둥과 돌처럼 단단하게 뭉친 흙이 송곳처럼 뻗어 나가다 부러진 흔적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구덩이와 흙무더기들이었다. 마법사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공중에서는 어딘가로 달려가는 흙더미의 행렬이 나무들의 덥수룩한 수관(樹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숲 곳곳에 쓰러지거나 기우뚱한 나무가 있어 그것이 흩어진 형태로 흔적을 그려볼 수 있었다. 사방에서 이쪽으로 몰려왔군. 최소 일고여덟 이상.
공터에 도착한 와론은 수 미터 깊이의 검은 흙을 뚫고 나온 거대한 바위기둥들의 틈새로 걸어갔다. 며칠째 이어진 호우로 흙이 쉽게 허물어지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공터에는 사람의 몸이 통째로 빠질 크기의 커다란 구멍과 구덩이가 너무 많았다. 그런 구덩이 중 하나 앞에서 멈춰선 와론은 주위에 남은 흔적을 보며 투구 밑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의 흙은 누군가가 구덩이까지 질질 끌려가면서 손발을 허우적대며 저항하기라도 한 것처럼 할퀴어져 있었다. 구덩이의 입구는 흙탕물이 그 밑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끌고 들어온 나뭇가지와 낙엽이 얼기설기 뒤엉켜 엉성한 덮개가 덮인 모양새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래로 제법 깊은 굴이 뚫린 걸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론누를 잡아챈 와론은 나뭇가지의 틈새로 창날을 비스듬히 찔러넣었다. 어디, 뭐가 있는지 봐볼까. 와론의 키보다 긴 창대가 거의 끄트머리까지 쑤욱 들어갔는데도 창날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갑자기 와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와론은 구멍 위에 덮인 장애물들을 허겁지겁 치우기 시작했다.
사람도 기어가면 충분히 드나들 크기의 토굴이 드러났다. 그 안쪽으로 다시 한번 팔을 끝까지 늘려 뻗었다가 회수한 론누의 끝에는 본래 희끄무레한 색깔이었을 진흙투성이의 천조각이 걸려있었다. 와론은 아직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조금 떨리는 왼손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찢겨진 천조각 안쪽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을 뽑아 빗물에 씻어내자 와론이 잘 아는 잡초를 닮은 색깔이 드러났다.
지저(地底)는 와론이 아는 세계가 아니었다. 와론만이 아니라 광산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면 대부분 일평생 그곳에 발을 들일 일조차 없었다. 땅 위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천성인 생물이라면 땅 밑의 세계는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토굴이 내가 상상하는 그런 거라면, 저 아래에서는 싸울 방법이 없어. 와론은 토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진흙투성이 모자를 그러쥔 주먹으로 차가운 투구를 짚었다. 본능적으로 가슴 앞에 매달린 목걸이로 향하려던 오른손을 의식하고 억지로 손바닥을 활짝 펼친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기 전엔 확실한 게 아니야.
와론은 손바닥을 들어 자꾸 면갑의 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훑어내렸다. 끊임없이 떨어지며 땅을 씻어내는 빗속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핏자국은 찾을 수 없었지만 축축해진 숲 특유의 기름진 흙 향기에는 이상하게도 신선한 피비린내가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형상을 한 땅의 가장자리에서, 아직 흙에 뿌리를 박고 서 있지만 때 이른 겨울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무성해야 할 이파리의 절반이 온통 벗겨져나간 나무가 피 냄새의 출처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와론의 눈길을 잡아챘다. 꺾이고 부러져 목책의 끄트머리처럼 뾰족해진 굵은 가지 사이에서 뭔가가 움찔거리는 것을 발견한 순간 와론은 이미 땅을 박차고 있었다. 아니어야 해. 저 헐벗은 나무를 닮은 부러진 칼날들이 꽂힌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미동도 하지 않던 어린 기사의 마지막이 눈에 달라붙는다. 기억에서 떨쳐내기엔 너무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일이었다. 울퉁불퉁한 구덩이를 잘못 딛고 구를 뻔하면서 참았던 신물이 혀뿌리까지 울컥 넘어온다. 시끄러워. 확실해지기 전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집중해! 와론은 욕설을 뱉는 대신 그럴 기력마저 속도를 높이는 데 보탠다. 흥분과 집중력은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온몸의 상처가 주장하는 아찔한 통증을 말라빠진 잎 따위보다도 효과적으로 억누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고 있는 희생자의 모습은 와론의 머릿속에 이미 새겨지듯이 박혀있는 모습에서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먹을 수 있는 잡초-동기인 기사들이 그렇게 놀릴 때마다 그는 잡초가 아니라 자미라고 끈질기게 대꾸하곤 했다-를 닮은 풀빛 머리칼처럼 보였던 것은 거무죽죽한 피가 엉겨 붙은 짧은 남색 머리칼이었다. 숲의 검은 흙물에 흠뻑 젖어 어두운 색이 된 옷-본인의 성격처럼 우중충한 색상의 옷만 입는다고 놀리던 그 기사들은 그가 대꾸도 하지 않으며 버티자 결국엔 재미 없어 하며 농담을 포기했다-은 본래 밝은색이었던 듯했다. 3층 높이는 됨직한 높다란 가지에 등부터 관통당한 채 축 늘어진 희생자의 발치에서 멈춰선 와론은 못된 어린애들이 표적으로 꽂아놓은 꼬챙이를 향해 개구리를 메다꽂다시피 집어던진 광경을 연상했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에게 그런 폭력을 행사했는가, 그것은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숨이 빠져나가고 있는 젊은 기사에게는 남은 시간이 거의 없었다.
가볍게 발을 굴러 나무 위로 올라간 와론은 기사를 찌른 가지의 끄트머리에 횃대 위의 닭처럼 쭈그려 앉았다. 문득 와론은 지금껏 목걸이를 꽉 쥐고 있다가 희생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은 아니라고 확신하자마자 손아귀를 풀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의 죽음이 일으키는 감정은 공평하지 않다. 와론은 그런 자신에게 오래된 혐오감을 느낀다.
“기린은 어디 있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질문에 기사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이 죽음에 임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감각은 시각이고 마지막까지 남는 감각은 청각이라 한다. 와론은 죽어가는 자에 대한 최소한의 자비로 기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길 바랐다.
“군청색 거북이가 지원으로 나를 보냈다. 담청색 기린은 살아있나? 살아있는 게 확실하다면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눈을 떠다오.”
기사가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면서 끈적이는 피거품이 한 웅큼 쏟아졌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끝에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일까. 기사는 마지막 힘을 다해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가 마지막 숨을 내쉬자 와론은 기사의 젊은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크게 벌어진 광채 없는 두 눈을 감겼다. 외롭게 죽어가는 기사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은 와론이 익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
목표물을 추적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하여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것은 와론이 숨을 쉬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사사냥꾼”이 혼자서 저 용에 필적한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을 상대로 사냥에 성공하고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재주를 익혀야만 했다.
와론은 흙탕물이 고인 진흙에 푹 빠지는가 하면 짐승이 다니는 길도 없는 빽빽한 수풀을 일부러 짓밟아 길을 내면서 숲 저편으로 걸어간 발자국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온통 전투의 흔적이 가득하던 공터에서 떠나간 발자국들을 따라가는 내내 와론은 제 발로는 걸을 수 없어 두 팔을 다른 사람들에게 잡힌 채 끌려간 이의 흔적을 눈여겨보았다. 부상자가 무리의 일원이거나 무리가 우호적으로 대하는 자라면 일찌감치 적절한 치료를 해줬거나 적어도 저렇듯 무거운 자루를 바닥에 질질 끌고 가는 것처럼 험하게 다루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상자는 기사이며, 무리는 기사들을 적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기린은 어느 쪽이냐? 와론이 알기로 이 임무에 투입된 기사는 세 명이었지만, 첫 번째 기사가 죽은 공터에서는 다른 기사들이 떠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붙잡히지 않은 세 번째 기사가 아직 살아있다면 숲 어딘가에 기척을 죽이고 숨어서 몸을 회복하며 지원을 -나를- 기다리고 있거나, 와론이 볼 수 없는 위치에서 저들을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 기사가 운이 더 나빠 토굴 중 하나로 끌려 들어간 거라면, 그 경우에는 와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살아있는 건 확실하다고 했으니, 그쪽은 아닐 가능성이 높지. 와론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세 번째 기사를 찾는 것은 보류하고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붙잡힌 두 번째 기사부터 추적하고 있었다.
발자국들 속에 자신의 발자국을 숨기면서 따라가는 동안 무리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드러났다. 어떤 발자국들은 주위의 풀과 키 작은 덤불의 잔가지가 망토나 긴 옷자락 같은 것에 휘감겨 부러지고 꺾여 있었다. 이들은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았고, 두어 명 정도는 되는 듯했다. 걸을 수 없는 인질을 끌고 가는 두 명은 칼이나 그 비슷한 무기를 지닌 듯 양쪽 발자국의 깊이가 달랐고 마법사들과 달리 지친 기색이 없었다. 세 명의 기사를 상대로 버텨내면서 한 명의 기사를 죽이고 다른 한 명은 운신이 어려워질 정도의 부상을 입히기까지 했다면, 이 칼잡이들은 최소한 준기사급의 수준은 될 거라고 상정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지도 모를 인질까지 잡혀있는데 나 혼자서 지금의 몸 상태로 저 무리를 상대하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란 말씀이야. 숲을 헤매며 이리저리 방향을 트는가 하면 때때로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서 멈춰 오랫동안 서성인 흔적들은 그들이 기사를 인질로 잡긴 했지만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확고한 목적과 계획을 정한 것은 아니라는 정보를 흘렸다.
아직도 단단한 질감으로 뭉쳐있는 비구름과 키 큰 나무들의 무성한 수관이 만든 두터운 천장 아래에서 빗방울이 점점 가늘게 부스러져 안개가 되어갔다. 곧 맑은 날보다 한참 이른 때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은 대개 와론의 편이었다. 어둠이 짙어지기도 전에 무리는 일찌감치 횃불을 붙여 들었고, 덕분에 와론은 자신도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진흙바닥 대신 높다란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숲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무리에게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리의 권력관계에 대한 정보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전투와 부상자 치료 때문에 힘을 완전히 소진했다 쳐도 빛을 내는 마법도구 한둘은 가지고 있을 법한데. 칼잡이들은 마법사에게 감히 뭔가를 요구할 수 없는 위치로군. 마법사가 고용주인 건가, 아니면… 무리는 모두 다섯. 인질을 제외하면 결국 와론의 추측이 비교적 정확했던 셈이다. 칼잡이들에게 잡혀 땅바닥에 두 발을 끌며 끌려가는 자는 기사시험을 앞둔 견습기사처럼 상하의가 모두 검은 단조로운 차림이었고 의식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교적 지형이 단조롭고 평탄한 숲에서 그런대로 동산처럼 보이는 아담한 높이의 둔덕이 나타났다. 그 아래쪽에는 두세 명이 나란히 서서 들어갈 크기의 조그만 동굴이 있었다. 무리는 기진맥진한 채 그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동굴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 확인한 후, 와론은 동굴을 감시할 수 있지만 동굴에서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적당한 가지를 찾아 줄기에 등을 기대고 걸터앉았다.
그곳에서, 와론은 투구를 벗어 쭉 뻗은 허벅지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온통 젖어 습도가 높은 데다 바람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공기가 정체된 숲에서 투구는 열과 땀을 가두는 찜통이나 다름없었고, 그 자체로 시야와 청력을 제한하면서 호흡마저 불편하게 만들어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성가신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머리에서 떼어내는 것만으로도 부상과 체력의 회복이 두 배는 빨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쩔 수 없잖아. 가볍게 한숨을 뱉은 후 와론은 이 비에도 용케 젖지 않은 여행식량을 꺼내 침으로 조금씩 녹이며 갉아먹기 시작했다. 투구가 없으니 이제는 얼굴과 목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성가시다. 손갈퀴로 무심하게 숱 많은 회백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와론은 시간대를 가늠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농부들은 슬슬 잠자리를 준비할 무렵이 되었을 것이다.
부상을 회복하는 과정은 결국 꾸준히 체력을 소모하는 과정이다. 곧 있을 싸움에 대비하려면 부상을 회복하면서 체력도 보존해야 하지만, 그 둘은 동시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과제였다. 의사나 마법사, 하다못해 믿을 수 있는 동료의 도움을 얻을 수 없고 비바람에 노출된 험지에서 휴식처를 구해야 한다면 그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와론에게는 이것이 일상이었고, 이런 환경에서 혼자 부상을 다스리며 체력을 회복하는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와론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릿속이 철저하게 단순해져야 했다.
혼자서 언제 움직일지 모를 상대를 감시하며 보내는 긴 밤에는 집중을 하려 해도 어느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 판단을 보류해두었던 생각들이 두서없이 불쑥 떠오른다. 잡념은 쓸데없이 감상적인 기분을 건드려 심력을 상하게 할 뿐이다. 머릿속의 상념들을 만지작거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차라리 지금 필요한 한 가지 주제를 집중해 생각하고 계획을 준비하는 편이 낫다. 지금 같으면 임무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좋으리라. 그래서 거북이가 뭐라고 했더라?
- …그 사이 뭘 하고 다닌 건지 묻진 않겠다. 하지만 네가 지금 수도에서 유유자적할 때는 아닐 텐데. …최근 자홍색 매가 시체로 발견됐다. 그 직후에 회색 족제비의 소식이 들어온 거다. 둘 다 네가 근처에 있었다는 정황이 있고 말이야. …그래? 코끼리가 그 정도면 이성적이었네. …새까만 닭. 매는 몰라도 족제비는 조용히 끝나지 않을 거다.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아낀 아이였어. 전설의 영웅님께서 지목하신 건 그 마법사 조직이지만 너를 의심하는 말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이런 때에 담청색 기린이 널 지원으로 요청해 수도 밖으로 피할 명분을 준 거다.
위하는 척은. 너 걔가 말토인 거 알았지? 기사의 미래라고 추켜올리던 때는 언제고, 걔가 가족을 인질로 잡혀 따까리짓 하는 동안 너네는 뭘 한 거냐? 걔를 죽인 애들이 어디서 솟아난 건지 모르겠어? 게다가 그 녀석의 불명예는 비난해야겠는데 무려 전설의 영웅이 비호해주니까 내가 제일 만만해 보이든? “이 역겨운 새끼들아.”
해묵은 피로로 갈라진 목소리가 누구도 듣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와론은 임무 생각에 집중하는 데 실패한 것을 인정하며 신경질적으로 나무줄기에 머리를 기댔다. 차라리 기린 녀석의 꿍꿍이가 뭔지나 생각해야 했나.
빈 물통을 달랑거리며 무거운 걸음으로 동굴을 벗어나 비탈길을 올라오는 자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며칠째 계속된 비로 숲 곳곳에서 조그만 실개울이 흙알갱이와 썩은 낙엽과 나뭇조각을 싣고 흘러다녔다. 이곳에 오기 전 와론이 지도와 론누로 확인한 풍경을 떠올려보면 기사를 기준으로 10여분쯤 -이라는 것은 직선거리고, 실제 숲속의 지형지물에 따라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겠지만- 더 간 곳에 벌목한 나무를 뗏목으로 엮어 떠내려보낼 만큼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 있었지만, 그 밖에는 비가 오는 동안 잠깐 나타나는 그런 흙탕물 말고는 눈에 띄는 하천이나 웅덩이가 없었다. 물론 기사가 아닌 자가 조그만 물통 하나를 채우겠다고 그 거리를 달리는 것은 시간과 기력의 낭비일뿐더러 숲은 물이 풍부한 지역이니 조금만 지혜가 있다면 어디서나 어떻게든 물을 구할 수 있겠으나, 물통을 든 자는 풀이 죽은 채 그저 막막해하며 계곡 쪽으로 무작정 떠나는 느낌이었다. 끊임없이 낮은 소리로 불평하고 이따금 발치의 키 작은 나무나 수풀을 거칠게 걷어차는 태도는 불량스럽다기보단 그냥 어리석고 서글퍼 보이기까지 했다. 무리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자일 거라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망토자락으로 론누를 대충 닦고 머리 위에 드리운 가지로 뻗어 이파리마다 고인 빗물이 창날 위로 모이도록 솜씨 좋게 수관을 뒤적인 후, 와론은 창대에 입술을 대고 딱 한 모금만큼 흘러내리는 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투구를 쓰면서 이번에야말로 집중해 빠르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와론이 론누를 고쳐잡으며 칼잡이의 머리 위에 드리운 가지 위로 올라선 순간 땅이 출렁였다. 지진? 저녁이 되어 나무에 깃들었던 새 몇 마리가 일제히 퍼덕여 도망친다. 칼잡이가 물통을 내던지고 근처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로 뛰어간다. 그 뒤를 쫓아 흙이 부풀어 오르면서 아직 십여 년도 자라지 못한 작은 나무 몇과 덤불이 뿌리째 넘어간다.
“미친! 여기서 이게 왜 나와!”
한달음에 나무 위로 도망친 칼잡이가 비명처럼 외친 소리는 세 군데에서 동시에 거대한 것들이 바위를 쪼개고 흙을 파헤치며 지상으로 솟구치는 소리에 삼켜졌다.
마수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시피 했다. 애초에 직업적인 모험가나 사람들이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는 오지까지 한량처럼 돌아다니는 기사들이 아니고선 마수를 만날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살아서 돌아온 자들만이 증언을 남기기 때문이다. 얼마 안 되는 목격담 속에서조차 크기와 생김새와 행동이 제각각인 데다, 이름이 붙여진 것도 실제로 세상에 존재할 마수의 수에 비하면 일부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단 눈으로 보면 그것이 마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론은 그것이 아르마딜로의 몸통에 땅강아지의 머리와 가슴을 붙여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랑말에서 황소 정도 되는 덩치로 땅속을 무리 지어 돌아다니다 갑자기 튀어나와 가만히 있던 인간을 먼저 공격하는 종이 땅강아지나 아르마딜로로 분류되는 동물 중에 존재한다면 말이다. 내 전문은 인간이지 마수가 아닌데. 뭐… 구경해볼까.
마수들은 지상에 반 이상 몸을 걸친 채 나무를 둘러싸고 더듬이 같은 것을 사방으로 바쁘게 뻗었다. 시각이 좋아 보이진 않는걸. 상대를 눈으로 찾는 게 아니야. 나무를 포위한 마수들을 헐떡거리면서 내려다보던 칼잡이는 이윽고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잡더니 온 힘을 다해 허공으로 칼을 휘둘렀다. 부웅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격이 저 멀리 위태롭게 기울어진 작은 나무에 적중했다. 나무줄기가 뚝 부러지면서 요란하게 옆으로 쓰러지고, 마수들의 머리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간다. 그 틈에 칼잡이는 반대 방향의 수백년 수령은 된 나무로 십수 미터는 되는 거리를 건너뛴다. 오, 싸우기보다 자기 목숨부터 챙기는 기민한 판단. 안타깝게도 힘은 그냥 견습 수준이지만. 거리가 다소 멀었던 탓에 칼잡이는 목표했던 가지에 닿지 못하고 떨어지며 그 아래쪽의 가지에 허둥지둥 두 팔을 뻗어 매달렸다. 그 요란하고 필사적인 움직임에 잔가지 몇이 부러져 땅바닥에 떨어지고 나무줄기가 가늘게 떨렸다. 마수 두 마리는 땅 위로 올라와 작은 나무가 쓰러진 방향으로 달려갔지만,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던 한 마리는 칼잡이가 버둥거리는 움직임을 감지했는지 더듬이를 흔들다가 방향을 돌려 그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가지 위에 안정적으로 올라선 칼잡이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나무줄기를 짚으면서 다른 손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발아래의 마수를 공격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칼이라도 들고 있는 편이 떨리는 손발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인 듯했다.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더듬이를 뻗어 한참을 더듬던 마수는 이윽고 공중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더니 집게턱처럼 생긴 입을 빠르게 떨며 맞부닥쳤다. 기사 정도의 동체시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빠르기였다. 귓구멍 속으로 모기가 날아들기라도 한 것처럼 신경이 곤두서는 지이잉 하는 소리가 들린 순간, 와론은 멍한 귀울림 속에서 머릿속 깊은 곳의 어딘가가 얼얼해지는 것을 느끼고 두 손으로 투구를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투구 때문에 불가능했다. 투구를 감싸 쥔 손가락도 얼얼한 느낌이 드나 싶더니 곧 감각이 무뎌지면서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와론이 있는 곳은 마수가 향한 방향의 반대편인 데다 중간에 나뭇가지와 무성한 이파리가 뭉쳐있어 소리가 조금은 흩어진 상태로 도달한 것이었다. 마수가 일으킨 어떤 공격을 사정거리 안에서 뒤집어쓴 용병은 기우뚱하게 세워놓은 나무토막마냥 뻣뻣해지더니, 그대로 땅 위에 털썩 고꾸라졌다. 소리? 마법? 뭐가 됐든, 상대를 마비시키는 공격이야. 그 녀석들, 마수한테 저런 걸 당한 상태에서 인간한테 습격당하기라도 했나? 공터에는 마수의 사체가 없었다. 저런 마수가 한 마리뿐이었다면 기사 셋이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고전하고서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공터로 향하는 마수의 흔적을 목격한 와론은 최소한 일고여덟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 수의 마수 떼가 한꺼번에 소리로 공격했다면 기사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일고여덟 마리나 되는 마수 떼가 왜 기사들을 공격했는가이다. 공터의 상태를 봤을 때 단순히 기사들이 마수 떼의 영역을 침범해서 공격당하거나 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기사들이 어떤 이유로 마법사 무리와 싸우고 있을 때 마수 떼가 난입했던 것일까? 아니면 기사들이 마수 떼와 싸우고 있을 때 마법사 무리가 기회를 노려 기사를 공격한 것일까? 또는, 혹시, 정말로 그냥 떠오른 가설일 뿐이지만- 인간이 마수를 길들일 수도 있을까? 마법사들이 탐구심이라는 명목으로 어떤 상식에 벗어난 발상을 하고 실행하는 사건이라면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일을 벌이는 목적이 기사에 대한 공격인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말토라 해도 말이다. 어느 경우든 이거 좀 뭐가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러는 사이 마수는 곰의 팔에 톱니를 붙인 것처럼 생긴 두터운 두 개의 앞다리로 칼잡이를 붙잡았다. 칼잡이가 반쯤 마비된 팔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내민 칼끝이 매끄러운 금속성의 갑각 위에서 허무하게 미끄러진다. 집게턱이 쩍 벌어지면서 끈적한 액체가 칼잡이의 몸 위로 주욱 떨어진다. 저게 내가 찍은 걸 가로채려고-
“-그건 안 되지!”
부러진 예가 알려진 적이 없는 하늘이 내린 무기가 인간이 만든 쇳조각으로는 뚫을 수 없었던 금속성의 갑각을 간단히 꿰뚫는다. 마수가 붙잡은 사냥감을 놓치며 힘없이 풀썩 주저앉는다. 좋아. 나린기 조종에는 영향 없고, 머리를 공격당하면 무력화되나. 뇌 같은 게 몸의 다른 곳에 흩어져있진 않나 보군.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마리의 마수가 그 자리에서 땅을 파내려가며 그 커다란 덩치를 숨긴다. 지상에서는 흙 한 겹 밑에서 마수가 움직이는 흔적이 희미해져간다.
마수가 완전히 떠났다는 확신이 든 후에야 와론은 땅 위로 내려왔다. 마수의 크고 육중한 머리와 앞발에 깔린 칼잡이는 마비된 몸을 때때로 발작하듯이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를 썼다. 와론이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머리맡에 서자 칼잡이는 얼어붙더니 눈알만 때구르 굴려 와론을 쳐다보았다.
“새, 새, 새, 새까만 닭?!”
“응 그게 나야~ 고맙지? 보답하고 싶지? 사양하지 않아~”
참과 거짓이 뒤섞인 흉흉한 소문과 어떤 소문에도 변명하지 않는 위압적인 태도가 자아내는 분위기에 기반하여 구축된 기사 새까만 닭의 명성은 -악명은- 그를 처음 보는 보통의 사람들로 하여금 평범한 말 몇 마디로도 긴장하고 겁을 먹게 하는 소품이 되었다. 그것을 써먹는 것은 와론이 재밌어 할 정도로 잘하는 일이었다. 마수의 머리에서 론누를 뽑아 든 와론은 반짝이는 체액과 벌써 딱딱해지고 있는 살점 조각이 뚝뚝 흐르는 창날을 누워있는 칼잡이의 머리 위에서 흔들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럼 우리 보답 얘기를 해볼까.”
3.
와론은 행운을 기대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그의 삶은 세상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상하리만치 운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와론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수고를 들여야 하거나 순전히 우연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았다. 불운과 변수란 그런 것이 발생하는 편이 오히려 안심이 될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었다. 지금처럼 말이지. 이게 무슨 꼴이냐, 기린. 하지만 불리하던 흐름이 무언가를 계기로 유리하게 바뀔 수는 있었다. 그렇기에 살아있기만 한다면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는 법이었고, 와론이 자신의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저 거대하고 냉담한 세계에 바라는 것은 그냥 그 정도였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와론은 기꺼이 보답을 장담할 수 없는 고생과 수고를 감수할 수 있었다.
와론은 재갈을 입에 문 채 벌벌 떠는 칼잡이를 높다란 나무 꼭대기에 묶고 있었다. 눅눅한 어둠 속에서 마침내 와론이 입을 열었을 때 튀어나온 어조는 명랑하기 그지없었다.
“걱정 마라. 내 일이 다 끝나면 풀어주마. 물론 네가 거짓말을 한 거라 걔가 아니거나 이미 죽은 사람이 돼 있으면~ 빨리는 못 오겠지?”
“으브읍! 읍읍으 읍!”
“어어, 줄기 약하니까 너무 흔들지 말고~”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와론은 곧이어 칼잡이의 칼과 신발 한 짝, 부서진 빈 물통을 작은 나무가 부러진 쪽으로 간 마수들이 뚫어놓은 구멍 근처에 흩어놓았다. 물을 찾으러 나갔다가 사라진 칼잡이의 발자국 끝에서 이 모호한 흔적을 발견한다면 칼잡이의 친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을 땅 밑으로 끌고 들어가는 괴물에 온통 주의가 쏠리게 될 것이다. 물론 십수 미터 거리에서 와론이 죽인 마수를 발견하기 전까지의 짧은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와론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고 미끼가 잘 내려다보이는 가지 위에 자리를 잡은 와론은 줄기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편안하게 쭉 뻗은 다음 팔짱을 꼈다. 투구는 벗지 않았다. 상대가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임무에 생각을 집중할 겸, 부상과 체력을 조금이라도 더 회복할 기회였다.
자, 정리를 해보자고. 마법사가 둘, 칼잡이가 둘, 인질이 하나. 내가 잡은 칼잡이는 아는 게 없어. 고용된 용병일 뿐이니까. 마수 사냥을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기사를 공격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지. 이자들이 처음부터 기린 일행을 적대했던 건 아니야. 한편 동굴에 남아있는 칼잡이는 기사양성소 출신. 하필이면 앞머리만 남기고 나머지 머리칼을 민 견습이라. 와론은 투구 밑에서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첫 번째 기사는 사망. 다른 녀석은 마수에게 잡혀 땅속으로 끌려가 생사를 모른단 말이지. 마법사들에게 붙잡힌 기사는… 묘사를 들어보면 그게 기린이다. 와론은 기린이 마지막으로 ‘힘’을 쓴 때로부터 흐른 개월의 수를 헤아려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압축되었을 ‘힘’의 규모를 상상했다. 그 녀석, ‘힘’을 쓰지 않았어. 그 사실을 곱씹으며 뱃속에서 천천히 번지는 것은 안도감인가, 아니면 실망감인가? 와론은 지금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핵심은 말토의 마법사들.
- 기린의 임무는 그 숲에서 마수 떼를 섬멸하고 지진과 산사태로 고립된 마을의 안전을 확보하는 거다. 그 지역에서는 지난 수백 년간 한 번도 지진이 보고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그때부터 누구도 본 적 없는 마수 떼가 출몰했다는군. …나야 모르지. 본인한테 들으라고. 어쨌든 기린은 처음부터 너를 임무에 동행시키고 싶어 했다. 네가 서쪽 다리를 떠난 후로 행방이 묘연했던 데다 그때는 단순한 마수 토벌 임무처럼 보였으니까 그냥 먼저 출발했던 거지. 그랬는데,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으니 연락이 닿는 대로 꼭 너를 파견해달라고 기린이 요청한 걸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긴 거다.
내키진 않았지만, 와론은 임무를 시작한 때부터 인질로 붙잡힐 때까지 담청색 기린 지우스가 지녔을 사고와 행동의 흐름을 쫓아보기로 했다. 출발점은 지우스의 동료 선택이었다. 달잔이 언급한 이름들을 듣자마자 와론은 두 기사가 지우스와는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자들인 것을 알아챘다. 지우스보다 1, 2년 먼저 기사가 된 그들은 약하진 않지만 강한 편도 아니었고, 제멋대로인 기사들 사이에서도 그럭저럭 튀지 않는, 그저 딱 평균적인 자들이었다. 그게 네가 그자들을 택한 이유였겠지. 지우스는 기사가 되고 처음 1, 2년 동안 주로 수도에서 달잔을 보조했고, 어쩌다 외부로 현장 임무를 나갈 때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기사나 와론, 그도 아니면 달잔이 추천한 믿을 수 있는 기사 정도만 대동하곤 했다. 그런 임무가 자주 있진 않았으며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았기에 대중에게는 아직 담청색 기린이라는 기사가 생소했지만, 기사들 사이에서는 와론이 관여했던 실험대련의 소문과 더불어 지난 2년간 지우스가 주축이 된 작은 임무들이 꾸준히 좋은 평가를 얻으면서 이름이 천천히 알려지고 있었다.
그랬던 지우스가 3년차가 된 금년에는 벌써 서너 번쯤 현장임무를 나갔으며 아직까지는, 와론이 아는 한, 친구들-은퇴한 사슴은 그렇다 치고-이나 와론을 한 번도 부르지 않고 있었다.
마수 토벌은 보통 어려울 것 없는 단순한 임무였다. 아마도 지우스의 목표는 서로 초면이나 다름없으면서 연차와 경력도 자신보다 위인 그 “평균적인” 기사들을 상대로 신뢰를 얻고 “사령탑” 노릇을 하는 경력을 쌓는 것이었으리라. 뭐, 녀석의 친구들은 녀석한테 너무 맞춰줬고 나랑 가면 전투는 그냥 구경만 해야 하니 전투지휘를 연습하는 맛이 안 나긴 했겠지. 용병의 말에 따르면 마법사 무리는 지진과 마수 떼 문제로 구조를 요청한 그 마을 부근에서 기사들과 마주쳤으며 처음엔 우호적인 분위기였다고 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바로 그날 어떤 연락을 받은 때부터 -힌셔 선배. 타이밍. 아니. 하…- 마법사들은 칼잡이들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고, 다음날 용병은 마법사들이 기사들과 만나 마수 토벌과 관련된 일을 하기로 한 곳에서 마수 떼와 마법사 일행이 기사를 공격하는 광경과 맞닥뜨렸다. 그들이 붙잡은 앳된 기사-기린-는 용병이 볼 때 마법사들이 일부러 인질로 잡았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마수가 잡아가려다 놓친 사람을 주워온 것에 가까웠다. 다른 두 기사는 외부인들이 보기에도 앳된 기사와 그다지 편안한 관계는 아닌 듯했고, 앳된 기사가 마법사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도 다소 못마땅해 보였다는 것이다. 좋아. 세 번째 기사가 기린을 구하러 합류할 가능성은 포기.
이번에는 지우스가 의식을 되찾고 나서 인질이 된 상황을 깨닫고 할 법한 생각과 행동을 추측할 차례였다. 지난 세월 동안 보고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과 현재 지우스가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마음가짐은 썩 나쁘지 않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는 그 애송이 녀석이라면- 보통의 기사였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했겠지만 나라면 이미 근처에 와있을 거라는 전제로 다음 행동을 계획하고 있겠지. 론누를 아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와론이 수도를 출발한 것은 황제의 명으로 말토 토벌에 나선 기사들이 핀타스에 도착해 작전을 개시할 무렵이었다. 말토의 마법사들은 자기들끼리 신속하게 연락을 취하는 방법이 있는 듯했으니, 아마도 여기에 뚝 떨어진 두 명의 마법사도 대륙 서쪽에 있는 본부가 기사들에게 습격당한 것과 거의 동시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스 일행이 수도에서 출발한 것은 와론과 힌셔가 결투를 끝내고 각자의 길로 흩어진 후 아직 수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었다. 지우스 일행은 서쪽에서 지금 한창 진행 중일 말토 토벌에 대해 모를 가능성이 매우 높을뿐더러, 그들의 임무는 마수를 토벌하고 고립된 마을을 구조하는 것이지 이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이비 마법사 조직의 잔당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 상황이 바뀌었단 말이야. 넌 변수가 끼는 걸 엄청 싫어하지만 세상사가 원래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이제 어떻게 할래? 상황이 바뀐 걸 얼마나 파악했나? 사실상 쓸 수 있는 패가 그 ‘힘’이나 나뿐이라면, 네가 취할 수 있는 계획과 행동은 뭐지?
물론 지우스가 무슨 생각을 하든 와론에게는 와론의 계획이 있었다. 세상이 그에 대해 지닌 선입견과 달리, 목적이 분명한 기다림이라면 와론은 얼마든지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하여튼 힘만 세고 무식한 칼잡이 놈들, 물 뜨러 진짜 거기까지- 엥?”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기다림은 보답을 받았다.
동굴이 있는 방향에서부터 끊임없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도 끝도 없이 툴툴거리는 젊은이는 이런 숲을 지나다니기에는 무척 성가신 긴 로브 차림이었고 손에 든 길쭉한 막대 끝에 자그마한 빛덩이를 띄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마법사는 구시렁거리던 입을 딱 다물고 풀잎이 이리저리 꺾인 땅바닥 위로 몸을 굽혔다. 젊은이의 머리 위에서 와론은 발밑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마법사는 발자국으로 짓뭉개져 지워진 어떤 흔적을 막대의 아래쪽 끝으로 다시 그려 넣고 있었다. 작업 중인 마법사의 주위를 눈여겨본 와론은 “그림” 바로 옆에 있는 나무의 줄기에 백묵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나무줄기에 핀 흰곰팡이처럼 보일 표식이었다. 이자는 두 마법사 중 서열이 훨씬 낮은 쪽. 그다지 움직임이 날렵해 보이지도 않는데 칼잡이의 호위 없이 혼자 나왔다는 것은, 그쪽에서 부상자일지언정 기사인 인질을 경계한다는 것. 그리고 마수에 대해선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것. 이 숲에서 마법사들이 위협으로 여길 존재는 언젠가 사라진 기사들을 수색하러 올 기사-그러니까 바로 나-가 아니라면, 마수밖에 없다. 마수에 대한 골치 아픈 가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자 와론은 투구 안에서 눈을 굴렸다. 그리고는 우둑 소리가 나도록 온몸의 관절을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한동안 백묵으로 표시된 나무를 따라 흙바닥을 확인하면서 걸어가던 마법사는 마수 두 마리가 땅속으로 파고들어 도망친 구멍 앞에 이르자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나뒹구는 신발과 부서진 물통을 걷어찼다.
“아놔, 이 똥멍청이가! 쌤통이다! 하여간 칼밥 먹는 것들은 진짜 더럽게 멍청하고 무식하고 말을 해줘도 못 알아먹어서 안 해도 될 일을 만들고-”
“안녕? 그거 누구한테 하는 말?”
뒤를 훽 돌아본 마법사는 숲의 새까만 어둠 속에서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높이에 창백한 회백색의 투구가 둥둥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법사의 지팡이 끝에 맺힌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든 투구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느낌마저 있었다. 마법사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은 것은 첫째로 과학과 이성으로 규명되지 않는 것에 현혹되지 아니함을 긍지로 삼는 마법사들의 신조 때문이었고, 둘째로 투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새까만 어둠 아래에 사람의 몸이라는 것을 주장하듯이 드러나 있는 녹색 목걸이와 흰 바지와 그 옆의 땅바닥에 꽂혀있는 창이 너무나 유명한 어떤 이름을 자동으로 마법사의 입에서 뱉어내게 했기 때문이었다.
“새, 새, 새, 새까만 닭?!”
“날 안다면 소개는 할 필요 없겠네. 근데~ 이 밤중에 혼자 이런 숲에서 뭐 해? 버섯이라도 따? 여기 마수가 나오던데.”
“마마, 마수요! 네!! 마수가 나오네요! 악!!”
이렇게 나오면 내가 마수 같잖아. 와론은 투구 밑에서 히죽 웃었다.
“내가 이래봬도 일단은 기사거든. 도와줘?”
너희 마법사들은 기사를 힘쓰는 것 이외의 일엔 관심도 없고 알려 하지도 않는 멍청한 무뢰배 취급하지. 보통은 맞는 말이야. 그러니 기사가 오밤중에 숲속에서 혼자 수상쩍은 마법식 같은 걸 손질하며 얼쩡거리는 마법사를 얕보기라도 하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아주 조금은 안심되겠지. 언제든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고. 안 그래?
마법사는 주춤 뒷걸음쳤다. 교묘하게도 가장 가까운 백묵 표시가 된 나무가 있는 방향이었다. 와론은 굳이 제지하는 대신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한가롭게 떠들었다.
“근데 혹시 파린이라고 알아? 어째서일까~ 네가 흙장난을 하고 다니는 걸 보니까 얼마전에 걔랑 잠깐 같이 다니던 때의 추억이 떠오르는걸?”
어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마법사가 우뚝 멈춰섰다. 눈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법사는 아직 젖은 흙 위에 두 무릎을 꿇으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숲에 존재하던 단 하나의 빛이 꺼졌다. 마법사의 눈앞에 있는 새까만 어둠을 두른 기사는 상대가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말토의 마법사라는 것을 아는 자였다.
순순히 저항을 포기한 마법사를 내려다보면서 와론은 이번만큼은 운이 조금 따라줬다고 생각했다. 찰나의 판단으로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는 아주 작은 운이라도 손이 닿는 대로 움켜쥐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목표로 삼은 것에 악착같이 들러붙는 거라면 와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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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성은 총 5편 예정이며 기본적으로 전설의 126화 o<-< 시점까지 풀린 이야기에 기반합니다.
다음 편이 업뎃될 날짜는 내일밤 공개될 미리보기분 134화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와론 또는 지우스 캐해나 이 친구들의 관계성 해석에 크게 수정을 가해야 할 일이 생길 것인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134화에서 제가 작가님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월요일 저녁쯤에는 다음 편을 업뎃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조금 더 걸리겠죠. 아무래도.^^;;
그리하여 와론과 지우스에 대한 저으 장황한 적폐날조왜곡망상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