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님께서 주신 리퀘 주제는 "기린 쫓는 닭" 입니다.

 *이 연성의 줄거리가 잡힌 것은 미리보기분으로 126화가 공개된 후인 7월 11일경입니다.
  따라서 캐해 등 전체적인 구상은 <애늙은이> 전체와 <잔불의 기사> 이야기가 126화까지 풀린 내용에 기반합니다.
  단 마의 126화가 풀린 후로 2달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그간 잔불 연재분도 슬쩍 반영됩니다.;;
  그리고 애늙은이 후반부 주요 스포가 있습니다.

 *마법이나 마수에 대한 설정은 원작자인 환댕 님이 작품을 통해 공개하신 것에 기반하되
  공백이 있는 부분을 제 맘대로 망상해서 채워넣은 것으로, 원작과 캐릭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환댕 님에게 있습니다.

 *가독성 차원에서 화면을 125% 정도로 확대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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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화를 참는 것은 와론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와론은 언제나 기사에게 분노했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숭배하는 세상에 울분을 느꼈으며 끝내 그것이 와론을 쳐다볼 일도 없을 줄 알았던 길로 밀쳐 넣었다. 기사가 되기 전에도 가슴속에서 들끓었던 그 분노는 기사가 되기로 결심해야만 했던 날 이래 꺼진 적이 없었고, 잠잠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항상 분통을 터뜨리고 있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 -미칠 테니까- 뭔가에 요란하게 몰두하면서 심신의 기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노라면 어느 틈에 세상은 세상에서 상상한 새까만 닭을 손가락질했고, 그럼으로써 와론으로 하여금 왜 분노하는지를 잊지 않게 해줬다.

 

 지금 지우스가 준법사를 통해 전달한 지시를 곱씹으며 침묵에 잠긴 와론이 차분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분노를 터뜨려야 할 대상이 이 자리에 없기 때문이었다.

 

 “놈이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물려간 건 아니겠지?”

 

 말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모닥불가에서 이윽고 와론이 입을 열자 누군가가 참았던 숨을 몰래 뱉었다. 준법사는 자신을 흘겨보는 법사에게 소리 없이 억울하다는 몸짓을 해 보이곤 와론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 자세한 설명은 안 했지만 저더러 몇 가지 마법회로를 만들어 달라 해서 가져가셨습니다.”

 “어떤?”

 “위치발신마법, 진동마법, 소리차단 마법이요. , 위치발신마법은 제가 갖고 있는 이거랑, 한 쌍으로 연동되어서 서로 가까워질수록 신호가 빠르고 강해지고요. 돌아오는 동안에는 이동하는 방향이 같은지 계속 신호가 잡혔는데 지금은 범위 밖인가 봐요.”

 

 준법사가 건넨 종잇장에는 복잡한 마법회로가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마법이 발동될 때 나타나는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이 전혀 어려있지 않아 그저 정신 사나운 낙서처럼 보였다.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사용할 수 있도록 봉인이 되어 있긴 했지만, 아직 배우는 중인 준법사가 적절한 도구 없이 급조한 것이다 보니 큰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이나 횟수도 제한적일 것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와론이 비꼬거나, 빼앗거나, 훼손하거나 하는 식의 거친 행동 없이 평범하게 마법회로를 돌려주자 준법사는 조금 놀란 낯이 되었다.


 “범위는?”

 “최대 50미터 정도죄송합니다, 제가 역량이-”

 “됐고. 진동마법?”

 “, 진동마법은 마수를 쫓아내는 용도에요. 지하에서 사는 놈들이라 진동을 싫어하거든요.”

 “숲에서 백묵으로 표시해둔 것이 그런 원리인가? 왜 휴대용으로 만들지 않고?”

 “엇 그거 보셨어요? , 이런 종이쪼가리에 그린 건 임시변통이라 범위도 위력도 약하니까요. 기껏해야 3, 4미터쯤? 마수는 땅속 수십 미터 깊이에서 돌아다니다 갑자기 지상으로 튀어나오는걸요.”

 “그렇지만 기린은 지금 놈들 코앞에 있으니 범위가 짧아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쪽이 더 쓸모가 있다 이거지. 좋아. 소리차단은 알겠어. 우리 것도 만들어. 법사. 네가 만들면 위력이 더 강해지겠나?”
 “도구와 재료가 부실하면 누가 만들어도 비슷하오. 회로에 쓰는 식 자체는 같은 거니까.”

 

 그래도 미심쩍다는 듯 준법사가 아직 손에 들고 있던 마법회로를 흘끔 본 법사는 잠시 후 눈길을 돌리며 모른 척했다. 어쨌거나 준법사가 식을 그리면서 실수를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법사와 준법사가 종잇장을 늘어놓고 마법회로를 그리는 동안 칼잡이가 어딘가에서 드디어 물을 구해왔다. 각자 지닌 여행식량과 물로 간단하게 식사하며 짧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와론은 다시 한번 지우스의 그 짤막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전언을 되새겼다.

 

 - 나는 지금부터 직접 지하로 내려가 실종자의 위치를 탐색할 작정이다. 목표는 물론 구조다. 새까만 닭에게는 자기판단으로 지원하라고 전하도록.

 

 그 목표를 위해 지우스가 한 행동이 마수에게 스스로 잡혀간 것이었다. 와론은 지우스가 그런 결정을 내린 사고의 흐름까지는 쫓아갈 수 있었다. 이 계획의 전제는 미끼가 된 자를 나머지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말토 놈들이 통제되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한번 배신했던 놈들을 미끼로 보낼 수도 없었겠지. 그렇지만 마수와 지하세계는 모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변수 덩어리였고, 미끼가 된 자는 죽거나 크게 다칠 위험이 컸다. 미끼-먹이?-를 물어간 마수들이 개미가 그렇듯 지우스를 먼저 잡아간 세 번째 기사와 같은 공간에 모아두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기사에게 지우스가 이런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가? 물론 와론은 지우스 한 사람의 목숨이 다른 기사 한 명의 목숨보다 귀하다는 식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우스가 자신의 목숨에 대해 스스로 다른 기사의 목숨보다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와론은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이게 무슨 지휘냐. 이거 어디가 작전이냐고. 내가 거부할 것 같으니까 그냥 내 쪽에서 널 찾으러 갈 수밖에 없도록 일을 벌인 거잖아! 그동안 와론이 봐온 지우스는 약하기 때문에 보통의 기사들처럼 무력에만 기댈 수 없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막무가내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이런 황당한 짓을 벌일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할 일이 없었던 것뿐인가. 거북이는 녀석이 을 쓸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은근히 배려해줬으니까. 하지만 지휘든 작전이든 다음을 이어가기 위해 하는 거잖아. 너한테 중요한 건 미래가 아니었어? 살아있어야-

 

 “그 젊은 기사님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닌가 보구먼. 이제 어쩔 거요?”

 

 손에 쥔 마법회로 뭉치로 펄럭펄럭 부채질을 하며 말을 걸던 법사가 갑자기 우당탕 나자빠졌다. 법사의 두 다리 사이 땅바닥에는 다소 아슬아슬한 거리에 론누가 꽂혀있었다. 와론은 넘어진 법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팔랑팔랑 흩어지는 종잇장들을 빠르게 공중을 훑는 손짓 한 번으로 낚아챘다. 법사의 따귀를 치려던 것처럼 거친 동작이었지만, 와론의 손에 잡힌 종잇장들은 거기 그려진 식을 망칠 수도 있는 구겨진 자국 하나 없이 매끈했다. 와론은 마법회로 뭉치를 자연스럽게 건네받은 것처럼 손에 쥐고 쭈그려 앉아 법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이제 어쩌나~ 너네 목숨이 걔의 생사에 달렸는데 말야. 말토.”

 “, 이게 우리 잘못이오? 자발적으로 잡혀갔다잖소? 자기가 죽고 싶다는데-”

 “아까부터 쫑알쫑알 시끄러워. 넌 이제부터 내 허락 없이 혀를 놀리면 뽑아버린다. 혀가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있는 거. 알지?”

 

 와론은 마법회로 뭉치로 법사의 뺨을 툭툭 쳤다. 웃음기가 느껴지는 장난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누구도 와론이 정말로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법사는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패일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진짜 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구하긴 구해야겠지만, 아니 그건 그냥 제 생각이고 기사님이 안 구하신다고 하면 안 구하는 건데요, 근데 정말로 내려갈 건가요?”

 

 준법사가 눈치를 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질문하자 와론은 일어서서 론누를 뽑아 들었다.

 

 “이쪽의 수직갱에서 마수의 토굴을 따라 놈이 있는 방향으로 접근한다.”

 “근데 그게 우리가 기어 다녀야 할 크기밖에 안 되면-”

 “땅 파.”

 “?”

 “너네 마법사들이 토굴 크기를 확장하면서 전진하라고. 그게 싫으면 놈이 마수한테 물려간 지점까지 가서 수직으로 땅 파든가. 농담 같아? 그놈 찾아낼 때까지 해야 할 거다.”

 

 “새까만 닭의 끔찍한 소문들 중 어떤 것은 사실이라는 걸 잘 아는 말토의 마법사답게 법사는 튀어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킬 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반대로 준법사는 움츠린 어깨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눈도 맞추지 못하면서 꿋꿋하게 반발했다.

 

 “어쩌면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될 거예요. 아까 기린님이랑 탐지한 데선 토굴이 제법 컸거든요. 토굴의 전 구역이 기어 다녀야 할 만큼 낮진 않을 거예요. , 아마도 기린님이 생각이 있으신 것 같아요.”

 

 와론은 그 이상 대꾸하지 않고 고갯짓으로 마법사 무리를 동굴 안쪽에 몰아넣었다.

 

 마수 떼가 지상을 향해 쩍 벌린 아가리 같은 수직갱 앞에서 와론은 론누를 떨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와론이 신호하자 칼잡이가 불붙은 작은 횃불을 뒤따라 떨어뜨렸다. 불빛이 낙하하며 칠흑 같은 어둠 속 저 밑바닥으로 사라져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와론은 허공에 세워둔 론누로 벽에 난 구멍의 위치와 크기, 그리고 그 안쪽에서 하늘거리다 재빨리 사라진 더듬이 한 쌍을 보았다. 사슴이나 여우가 알면 녀석들이 알아서 기린을 반 죽여놓겠지? 몹시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래가 성사될 수 있으려면,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와론이 덩치가 더 큰 법사를 옆구리에 들고 칼잡이는 준법사를 업은 뒤, 두 사람은 수직갱으로 뛰어내렸다. 허공에 가로로 세워둔 론누를 내딛자마자 창날이 향하는 방향으로 뛰어든다. 토굴 입구-혹은 출구-는 준법사가 지하를 탐지하면서 느꼈던 대로 높이가 다소 낮아 와론은 하마터면 벽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그래도 10여 미터를 나아가자 토굴이 점점 높아져 곧 와론은 투구가 흙천장에 닿을락 말락 하는 것을 느끼면서 등을 펴고 설 수 있게 되었다. 좌우로는 여전히 좁아서 양쪽으로 두 팔을 뻗으면 손이 닿을 정도인 건 아쉬웠다. 역시 내 무기는 휘두를 수 없어. 가급적 전투는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무리는 새 횃불을 붙여 든 칼잡이가 앞장서고 후방에는 와론이 서서 일렬로 나아갔다. 토굴은 한동안 갈림길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법사가 든 마법회로에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다.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에서 무리는 신호가 더 강한 오른쪽으로 꺾었다.

 

 “기어 다녀야 할 크기의 작은 굴은 마수가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닌 데서 이동할 때 임시로 파는 건가 보오. 이런 높은 굴은 공들여 만든 길이오. 보시오, 벽과 천장이 단단하게 다져져 있소. 이런, 물도 새지 않겠는걸. 무슨 수지 같은 건가? 아니면 타액?”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갈라지는 두 번째 갈림길 앞에서 법사가 벽과 천장을 쓸어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토굴을 지나가는 것뿐이었지만 마수연구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보이는 것이 더 많았는지 한창 뛰노는 어린아이처럼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러다 와론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법사는 헙 하고 헛바람을 삼키며 두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와론은 코웃음 쳤다.

 

 “마수의 정보라면 얘기해도 된다. 짜증 날 정도로 떠들진 말고.”

 

 법사는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법사가 귀찮아하는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 못하는 준법사와 칼잡이한테 자꾸 말을 시키며 토굴의 공학과 마수의 생태에 대해 이런저런 자문자답을 늘어놓는 동안 와론은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투구-를 짚었다. 남들 앞에서 굳이 자랑하진 않지만 와론은 거리와 방향과 높낮이의 감각을 절대 틀리지 않았다. 지상이었다면 거의 자동적으로 머릿속에서 그들이 지나온 길의 입체지도가 그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오고부터 어째선지 그 작업에 무척이나 집중하기 어려운 데다 계속해서 길이 헷갈렸다. 머릿속 어딘가가 살짝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혼란스럽고 얼얼했다. 마치 자신의 몸속에 타고난 자석이 정북 방향을 가리키지 못하고 정신없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사라서 일반인들보다 몇 배는 감각이 예민한 것이 항상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이 싫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이런 공간은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와론은 마법사 무리가 떠드는 대화로 주의를 돌렸다. 마침 칼잡이가 법사의 말에 뭐라 대꾸하고 있었다.

 

 “은 여왕이 제일 덩치가 크지 않나요? 여왕개미, 여왕벌처럼요.”

 “무식한 놈. 마수가 개미고 벌이냐? 마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생물이 아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고문헌을 기록하신 옛 법사님께서는 인간이시잖습니까? 그분이 생각하시기에 가장 적당한 표현이 개미나 벌의 여왕 같은 거라 그 단어를 쓰신 게 아닌가 싶어서요.”
 “이 마수 떼한테 진짜로 여왕이 있고 개미나 벌의 여왕 개체처럼 덩치가 크다면 이런 큰 통로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렇지 않을까요?”

 “가설의 출발점으로는 좋다만 그 곤충들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 여왕이면 역할이 있는데 쓸데없이 사방을 돌아다니겠느냐? 바쁘게 돌아다니며 길을 사용하는 건 일꾼들이다.”

 

 내가 개미 등등에 빗댈 땐 되게 뭐라 했으면서 지는. 딴지를 걸고 싶어도 참는 것은 와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이 통로는 왜 이렇게 큰 겁니까? 놈들의 덩치와 맞지 않습니다.”

 “그걸 밝혀내야지! 너희는 아주 운이 좋은 놈들이다. 기사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있는 마수의 둥지에 들어가 생태를 연구할 기회란 게 절대로 흔한 게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여길 즐기고 있다니 거 다행이구만.”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던 와론이 빈정거리자 법사는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흥분을 완전히 숨기지 못해 콧구멍과 입매가 쉴새 없이 씰룩거렸다. 그쯤에서 칼잡이와 준법사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 나타난 갈림길에서 한쪽은 안쪽에서부터 무너졌는지 허물어진 흙더미가 쌓이고 바닥에 물이 흐르는 등 난리도 아닌 반면 다른 쪽은 최근에 정비한 것처럼 매끈하고 탄탄했다. 각각의 갈림길을 향해 마법회로를 내밀어본 준법사는 마법회로가 무너진 길 부근의 방향에서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것을 불안해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수들이 정말로 동면하고 있었던 거면 깬 지 얼마 안 됐을 테니 모든 길을 정리하진 못했겠죠? 수백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무너진 데도 많을 테고요. 어느 쪽으로 가죠?”

 “지금은 힘을 아끼는 게 좋겠지. 반대편으로.”

 

 본능적으로 위험신호가 깜빡이는 것을 느끼며 와론은 투구 밑에서 낯을 찌푸렸다. 길이 진행될수록 사방에서 누군가가 쳐다보는 것처럼 온몸의 피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상하군. 온 사방에 놈들의 낌새가 있는 느낌. 그런데 왜 더듬이도 보이지 않나. 다음에 나타난 세 갈래 갈림길에서는 두 군데가 무너져있어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 앞에서 위험신호를 공유하는 것처럼 모두가 침묵했다. 불안한 공기를 깨기 위해 와론은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내뱉었다.

 

 “동면에서 깬 동물은 보통 먹이부터 찾지 않아?”

 “이 마수들에게 정말로 섭식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소. 죽일 수 있으니까 생물과 유사해 보이지만 생물의 정의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으니까 마수인 거요. 당신네 기사들도 기사명에 동물명을 쓰지 마수의 이름을 쓰진 않잖소. 둘은 다른 존재요.”

 “흐음. 기사는 인간이지만 보통의 인간이랑 다른 존재잖아. 그럼 기사는 마수 같은 건가?”

 “! 그거 말 되네. 기사 싫어하는 기사라 그런가, 확실히 통찰력이 있으시구먼.”

 

 앞쪽에서 준법사 아니면 칼잡이가 기사와 일반인 사이에서 난 아이는 자손을 가질 수 있는데, 따위의 소릴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 꽤 걸어오지 않았나요? 근데 신호가 가까워지는 것 같지가 않아요.”

 “저쪽도 이동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기사님이 움직이시는 건지 마수가 발신기, 기사님을 이동시키는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누가 우릴 어딘가로 유도하려는 것 같다는 게냐?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다만 그냥 여기가 땅속이라 우리가 방향감각이 어지러워져서 착각한 걸 수도 있다.”

 

 마수가 지성을 가질 수도 있을까? 그 질문을 하려다, 와론은 재빨리 다른 말로 바꿨다.

 

 “그 고문헌이란 거. 저자는 마수들을 어떻게 관찰한 거지? 보아하니 지하까지 내려와 보진 않은 모양인데.”
 “맞소. 그분은 지상에 올라온 마수 떼를 관찰했소. 우기에 재앙일 정도로 큰비가 내리면서 토굴이 침수되는 바람에 마수들이 땅 위로 올라온 것 같다고 적혀 있었소.”

 

 그러고 보니 법사는 이 숲이 한때 대초원이었다는 말을 했다. 초원인 땅은 아무래도 숲으로 덮인 땅보다는 단시간에 쏟아지는 물을 감당하는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문득 와론은 으스스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거대한 숲은 물을 가득 머금는다. 며칠간 비가 내렸으니 지하수도 넘쳐나겠지. 법사가 발견했듯이 토굴에는 벽과 천장이 단단히 다져지고 안쪽에 수지 같은 것이 발라져 있어 물이 흐른 흔적은 없었지만, 지하 특유의 끈적한 습기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리고 토굴의 진행 방향이 위아래와 좌우 어느 쪽으로든 굽이쳐서 -더해서 내 방향감각이 흐트러진 바람에- 다소 혼란스럽긴 해도 그들을 부르는 길은 착실하게 조금씩 내리막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훌륭한 물길 아닌가?

 

 “마수도 숨을 쉬면 좋겠어요. 그럼 적어도 환풍구를 만들었을 테니까.”

 

 준법사가 호흡이 불편한지 크게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마법회로는 깜빡이는 간격이 빨라지고 빛도 더욱 환해지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용도를 알 수 없는 텅 비워진 공간과 갈림길 몇 개를 더 지나자 갑자기 토굴이 끝나고 커다란 솥처럼 움푹 파인 너른 공간이 열렸다. 칼잡이가 높이 쳐든 횃불빛이 공간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을 정도였다. 준법사의 손에서 마법회로가 미친 듯이 깜빡이며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렸다.

 

 “저거 사람 아닙니까?”

 

 구덩이 안쪽을 횃불로 비춰보던 칼잡이가 푹 꺼진 공간 한복판의 땅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쓰러져있는 사람 같은 흙투성이의 형체가 둘 있었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준법사가 흙이 무너져내리는 경사면을 딛고 주춤거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와론이 제지하지 않자 눈치를 살피던 법사도 곧 욕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칼잡이와 함께 뒤따랐다.

 

 마법사 무리가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는 동안 와론은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는 몸을 모든 의지력과 절제력으로 억제하면서 그들이 방금 지나온 토굴 앞에 버티고 선 채 공간 구석구석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횃불과 마법회로의 빛 때문에 암순응이 되지 않은 눈으로는 그 흐릿한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든 론누로 시야를 전환한 와론은 구덩이 같은 공간을 둘러싸고 그들이 걸어 나온 곳과 비슷한 높이에 같은 형태의 구멍이 서너 개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형이 아주 마음에 안 들어. 마수는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다. 저건 너무 보란 듯이 놓여있잖아. 통발 속에 든 미끼 같다고.

 

 “닭님! 기린님이에요! 큰 부상도 없고, 의식을 잃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분은

 

 . 혀를 차면서 가볍게 바닥을 박찬 와론은 한걸음에 마법사 무리가 모여 웅성거리는 곳에 도달했다. 법사와 준법사가 조심스럽게 똑바로 눕혀놓은 지우스는 아직 눈을 뜨거나 묻는 말에 대답하진 못했지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칼잡이가 바닥에 횃불을 꽂아놓고 목과 팔다리가 여기저기 기괴하게 꺾인 인물을 조심스럽게 수습하고 있었다. 직접 확인할 것도 없이,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마수가 직접 해친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지하로 끌려 들어오는 동안 좁은 토굴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다 재수 없게 목이 부러진 채 방치되었던 듯하다. 아마도 마비되었던 탓이겠지. 오랫동안 고통받다가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와론은 마법으로 응급치료를 받으면서 흙을 토하고 있는 지우스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 괴로워하는 흙투성이의 어린 얼굴을 본 와론은 갑자기 맥이 풀어지면서 언제나 가슴속 가득 들어차 있던 불길 같은 무언가가 잠잠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 공간에 진입하기 직전까지 투구와 새까만 망토 안에서 백열하는 불길에 연료를 공급하던 온갖 것들이 한순간 의미를 잃고, 그 텅 빈 자리로 슬그머니 들어온 무언가가 잠시 기세가 잦아든 불꽃을 둘러싼 채 끝없이 쌓인 잿가루를 한 움큼 허공으로 띄워 흩어 보내는 것 같았다. 네가 목숨을 던질 가치가 있는 일이길 바랐다. 하지만 사람이 간절히 원하고 애쓴다 해서 항상 바라던 결과를 얻는 것은아니다. 와론은 가슴께에 걸린 녹색 목걸이를 가볍게 쥐었다.

 

 “좋아. 치료는 나중에. 일어서.”

 

 와론은 말에 그치지 않고 직접 지우스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 일으키면서 주위를 경계했다.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마법사 무리는 와론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차리고 일어섰다. 언젠가부터 칼잡이의 발치에 꽂힌 횃불이 매서운 바람 속에 있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바람이 부네요? 이런 지하에서?”

 

 준법사의 말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즉시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론은 발을 뗄 수 없었다. 어느 굴로 나가야 지상에 갈 수 있지? 지금 나는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내려와 있는 건가? 공기가 웅웅거리는 가운데 발밑이, 아니 사방의 흙벽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폭포 아래쪽의 물안개 속에 들어가있을 때처럼 너무 많아 입으로 꿀꺽 들이마실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요? 굴이 넷이나 있는데!”

 “바람이 빠져나가는 쪽!”

 

 콰과과과과! 와론이 외친 것과 동시에 세 개의 굴에서 물이 들이닥쳤다. 횃불이 삼켜지면서 빛이 사라졌다. 와론은 구덩이로 쏟아져 소용돌이치는 세찬 물살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기사의 시신이 있던 곳을 일별하고는 한 팔에는 지우스를, 다른 팔로는 준법사를 낚아채 물이 쏟아지지 않는 단 하나의 굴로 내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법사를 업은 칼잡이가 벌써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고 가까스로 그 뒤를 쫓아 달렸다.

 

 “, 너구리몰이? 몰이는 우리가 당했잖아!”

 “, , 이거 발견이다! 크하하, 내가 발견, 흐앗차거!”

 “기사님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하고 있거든?!”

 

 세 군데의 구멍에서 쏟아진 물이 솥 같은 공간을 이미 가득 채웠는지 뒤편에서 퇴로를 차단하며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마수라면 이쪽도 진즉 무너뜨려서 길을 막았어! 물에 젖은 신발을 철벅이며 빛 한 톨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를 오르막을 무작정 달리는 가운데 절망감이 목구멍을 옥죄어온다. 그때 칼잡이의 어깨 부근에 푸르스름한 빛덩어리가 엉겼다. 법사가 마법식을 그린 것이었다. 와론에게 허리를 잡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숨넘어가는 소릴 토하던 준법사도 그걸 보고 와론의 투구에 손을 뻗어 같은 마법식을 그렸다. 빛이 생기고 길이 보이자 와론은 이를 악물었다. 시체도 찾을 수 없는 이런 데서 이딴 식으로 다 죽을 순 없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뒤편에서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느려지는 만큼 바람이 토굴을 빠져나가는 속도도 느려져 더는 길잡이로 삼을 게 없는 듯했지만, 와론은 마법의 빛덩어리를 흘끔 보고 미세한 먼지 입자가 소용돌이치듯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쪽으로 달렸다. 준법사의 입에서 죽는다고 울상인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처럼 지우스의 입에서는 힘겨워하는 신음이 드문드문 이어졌고, 와론은 그것으로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 녀석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져 있었다는 핑계라도 있지만, 넌 아니야. 넌 내가 잡고 있다고. 그런데도 지키지 못한다면 기사질 같은 거- “때려쳐야지!”

 

 좌우로, 위아래로 한순간의 판단에 의지해 길을 고르면서 나는 듯이 달리는 동안 토굴의 높낮이가 시시각각 변했다. 어딘가는 진입하던 곳처럼 적당히 높았지만 조금 지나보면 황소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낮아졌다. 상관없었다. 와론은 어느 순간부터 방향감각이 제자리를 찾은 것을 느꼈다. 아직도 깊은 지하에 갇혀 있었지만, 와론은 지하의 묵은 공기 속에 섞여든 지상의 신선한 공기 몇 톨을 감지하고 그것의 흐름을 쫓아 달리고 있었다.

 

 그 확신에 찬 걸음은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막다른 곳에서 그쳤다.

 

 “, 숨 좀 돌립시다. 너무, 너무 빠르세요.”

 

 조금 뒤처져 비틀거리며 걸어온 칼잡이가 와론의 멈춰선 뒷모습을 보고 덩달아 멈추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연스럽게 땅에 내려온 법사는 긴 로브자락을 휘날리며 덩실덩실 팔다리를 휘둘렀다.

 

 “대발견이야, 대발견! 으하하! 드디어 내가 이름을 떨칠 때가 왔다!”

 

 와론의 지시로 무너진 흙더미에 식을 그리고 저편에 길이 있는지 탐지하던 준법사가 어깨너머로 눈알을 부라리다가 법사와 눈이 마주칠 것 같자 얼른 다소곳하게 내리깔곤 다시 탐지 작업으로 돌아갔다. 아직 취한 사람처럼 반쯤 정신이 나간 지우스를 바닥에 앉힌 후 론누에 기대어 선 와론은 준법사가 하고 싶었던 것을 대신 해줬다. 그러니까, 법사에게 핀잔을 줬다.

 

 “어우 정신 사나워. 뭐가 그렇게 혼자 신났어?”

 “이 마수는 지성이 있는 게 틀림없소! 우릴 일부러 그쪽으로 유인하곤 지하수 수맥이라도 끌어들였나 보오. , 이런 큰 공사가 가능한 거 보니 혹시 자기들끼리 언어도 있는 것 아닌가? 아무도, 아무도 남들한테 소문내지 마시오. 내가 제일 먼저 논문 쓸 거니까!”

 “그래한 놈이라도 여길 즐기고 있다니 됐다.”

 

 자연스럽게 잠시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준법사는 주변을 탐지하고 법사는 마수에 관한 가설과 이론을 구상하는 동안 와론과 칼잡이는 숨을 골랐다. 어느 정도 숨이 돌아왔을 때 칼잡이가 손바닥으로 얼굴의 땀을 훑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물은, 더이상, 후우. 안 차오릅니다. 사실 그렇게 된 지 꽤 된 것 같습니다.”

 “이 위로 지상까지 딱 20여 미터 남은 것 같아요. 이 길 앞은 한 5, 6미터 막혀있는데 도중에 바위가 있어서그게, 기사님들은 바위쯤 주먹 한 방으로 부수시겠지만 여긴 지하잖아요. 굴이 무너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함부로 땅 파거나 부수면 안 되거든요. 어떻게 하실래요?”

 

 때맞춰 탐지를 마친 준법사가 손바닥의 흙을 털며 말했다. 와론은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키면서 지우스를 턱짓했다.

 

 “일단 이녀석 걸을 순 있게 만들어놔.”

 

 아직까지도 팔짱을 낀 채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느라 바쁘던 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와론을 돌아보았다. 준법사는 법사가 성질 나쁜 기사 앞에서 또다시 마법사의 만용을 부리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 근데 기린님이 사실 크게 다친 데는 없거든요. 치료마법으로 될 게 아닌 거 같아요. 그냥 체력이 너무 떨어지신 거 같은데요.”

 “하여튼 문외한들은 마법이 무슨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기적인 줄 안다니까. 치료든 뭐든 받는 쪽한테 체력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뭘 하지. 난 돌아다니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소.”

 “그게 내 잘못이냐? 쟤 깨워서 쟤한테 말해.”

 “, , 그보다 이제 어쩌죠? 어떡할까요 닭님?”

 

 와론은 허리에 손을 짚으면서 법사와 준법사를 흥미롭게 번갈아 보았다. 가만 보니 준법사는 기사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법사에게 소심하게나마 반항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제로 준법사는 와론이나 법사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지우스의 무모한 계획을 도왔고 그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와론의 시선이 말토의 마법사들로부터 어떤 악몽 속에 있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린 채 힘겹게 숨을 내쉬는 지우스에게 옮겨갔다. 하여튼 재밌는 녀석.

 

 “너네 그거 할 수 있잖아. 마수 조종. 마수 시켜서 지상까지 길 뚫게 할 수 있어?”

 “거 조종이 아니라니까 자꾸 이러시네. 그래도 발상은 괜찮구먼. 저쪽으로 비켜있으시오. 땅이 좀 흔들릴 텐데 놀라진 마시고.”

 

 법사는 팔짱을 풀며 준법사와 칼잡이를 손짓해 불렀다. 막힌 흙무더기 앞에서 법사가 준법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동안 와론은 왼팔로 지우스를 안다시피 부축하고 오른손으로는 론누를 비껴든 채 뒤로 물러났다. 어쨌거나 마법은 와론이 모르는 영역이었고 마법사들의 일에 와론이 참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와론은 점점 지우스의 상태에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몇 시간쯤 지났지?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회로를 제때에 사용했는지 마비된 것 같진 않고, 큰 외상도 보이지 않아. 그런데 왜 의식이 없는 거야. 동굴에서 마법으로 치료받는 동안 겉으로 보이던 것과 달리 체력이 거의 소진되었고 그나마 남은 힘도 마수에게 지하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바닥나버린 거라면, 조금은 눈을 붙여야 다시 움직일 수는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우스는 와론과 달리 약한 기사였고, 회복에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와론은 그동안 동행했던 몇 번의 임무에서 지우스가 이 정도로 체력이 고갈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건 네 역할이 아니다. 사령탑이 이런 꼴을 자초해선 안 되는 거다. 애송이가 대체 뭘 믿고-

 

 마수들이 접근하는지 토굴이 점차 진동하고 투구 안쪽이 다 울리도록 흙과 바위가 허물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와론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토굴의 측면이 무너져내렸다. 절묘하게도 길을 막은 흙더미 앞에 모여선 마법사 무리와 조금 뒤쪽으로 비켜나있던 기사들 사이의 중간 지점이었다.

 

 흙을 파헤치며 불쑥 머리를 디민 마수 두 마리가 토굴 안의 인간들을 헤아리는 것처럼 잠시 더듬이를 허공에 흔들었다. 법사가 손가락으로 와론을 가리키고, 마수들이 움찔하며 와론을 향해 머리를 돌린다.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섬뜩한 느낌이 솟구치면서 론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무언주문! 저놈 실력을 숨긴 거였나? 뭘 지시한 거냐! 축 늘어진 지우스를 자신의 몸 뒤로 숨기면서 론누를 잡은 팔의 어깨를 앞쪽으로 내민다. 준법사가 놀라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는 토굴과 토굴을 둘러싼 흙 모두가 우렁우렁 울리는 굉음에 파묻힌다.

 

 마수들이 들어왔던 구멍으로 물러나나 싶더니 짧고 납작한 뒷발에 차여 무서운 속도로 축축한 흙무더기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종 맞잖아! 제길, 이래서 마법사는- 와론은 반사적으로 토굴의 바닥에 론누를 꽂아 넣었다. 흙은 사태를 이루며 내리막 쪽에 위치한 와론과 지우스의 위로 끝도 없이 쏟아졌다. 파묻히거나 쓸려가지 않기 위해 론누에 매달리면서 와론은 아직 낫고 있는 왼팔로 지우스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곧 론누가 꽂힌 지점을 중심으로 바닥이 쩍쩍 갈라지더니 푹 꺼지고, 와론은 추락했다.

 

 “-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짝! 뺨을 후려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론은 눈을 깜빡였다.

 

 “입 막아. 마수들이 놀라잖나. , 기사 같은 것에 정이라도 들었나? 마법사가 되어가지고.”

 

 와론은 봉분처럼 높다랗게 쌓인 흙더미 아래에 깔려있었다. 온몸이 코끼리 떼의 발 아래에 지그시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기린은? 준법사가 투구에 붙여준 마법의 불빛은 다소 흐릿해지긴 했지만 아직 살아있어서 흙에 파묻힌 와중에도 눈앞을 밝혀줬다. 창백한 빛 속에서 자신의 밑에 깔린 채 괴로운 신음을 뱉는 지우스의 얼굴을 본 와론은 고개를 수그리는 것처럼 조금 움직였다. 자연스레, 지우스의 이마에 투구 아래쪽의 부리처럼 튀어나온 턱이 닿았다.

 

 “기사가 찾으러 올 줄은 알았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그것도 그 새까만 닭이 올 줄은 몰랐지만.”

 

 법사의 으스대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좋아. 추락한 거리는 짧다. 기껏해야 2, 3미터. 투구깃이 떨어지는 방향을 보니 거꾸로 처박히진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가. 두 사람은 함정 같은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온몸이 흙에 파묻히긴 했어도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이니 머리와 가까운 곳 어딘가에서는 쌓인 흙이 아주 얕은 듯했다. 어쩌면 위쪽에서 볼 때 와론의 투구에 어린 마법의 불빛 역시 흙 알갱이 사이에서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듣고 있소? 그렇겠지? 기사니까.”

 

 잠시 뜸을 들인 후 법사가 오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댁은 우릴 싫어하잖소. 뭐랬더라, 한 번만 더 따까리짓 시키려 들면 박살낸다고 했다던가? 그런 인물이 우리 마법사를 인질로 잡아가며 먼저 찾아왔다면 보통 일이 아닐 것 아뇨? 적어도 마수 사냥은 아니겠지. ‘기사가 목적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혹시 취미생활 중이신가 싶어 지켜봤는데, 흠흠, 놀랠 노자였다니까.”

 

 와론은 법사가 느물느물 웃으며 기사들이 산 채로 갇힌 흙무덤을 턱짓하는 걸 눈으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본 거 맞네. 론누의 창날은 흙 밖에 나와 있었군. 흙맛이 느껴지는 투구 밑에서 와론은 씨익 웃었다.

 

 “처음부터 애송이가, 목적이긴, 했어. 그래서 뒤통수를 칠, 최고의 순간까지, 몸을 낮추고 기다리셨다?”

 “저거 봐, 괴물 같은 놈. 생매장됐는데 말을 다 한다니까. 근데 이걸 뒤통수라고 할 수 있나? 지금 대륙 저편에서 당신네 기사들이 우리 마법사들을 학살하고 있는 주제.”

 “아닌데? 체포랑, 압수만, 하고 있을걸? 후우……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웃기긴 하다만, 너네는 힌셔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와론은 하마턱으로 자신의 번뇌를 부수려는 것처럼 땅을 내려치던 힌셔를 떠올렸다. 말토 때문에 500년 이상을 시간 속에 갇히면서 거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시간 속으로 돌아온 힌셔는 복수를 추구하지 않았다. 말토를 위해 복무하는 불명예스러운 기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말토에게 손을 빌려준 이상한 기사를 무작정 처단하려 하지도 않았다. 아무렴. 사방에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놈들이니 남들도 다 그럴 줄 알겠지. 얼마나 제 발이 저리겠어. 법사는 짧게 코웃음 쳤다.

 

 “당신은 검붉은 하마가 아니라 새까만 닭이잖소. 그 새까만 닭이 이런 데서 묘비도 없이 묻히리라곤 누구도 몰랐겠지만, 뭐 어떤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사사냥꾼이 등장했을 때처럼 소리소문없이 퇴장한다면 수미상관이지. 잘 가시구려. 회색 족제비에게 안부 전해주시고.”

 

 론누의 시야에서 구덩이를 내려다보던 법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땅 전체가 우르릉 진동하면서 흙과 바위가 조금 더 구덩이로 떨어져 무게를 가중한다. 얼마 안 가 투구에서 푸르스름한 마법의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말토 무리가 시전자의 마력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소리야. 하마? 족제비뭔데.”

 

 불빛이 사라진 새까만 어둠 속에서 지우스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리고, 그가 뱉은 더운 숨이 면갑의 틈새로 새어 들어와 얼굴에 닿았다. 얘도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야. 보통은 정신이 들자마자 하는 첫 번째 질문이 저런 건 아니거든. 와론은 두 팔꿈치와 무릎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며 등 위에 쌓인 흙을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돋으면서 온몸의 뼈와 근육이 후들거린다. 와론의 목에 걸린 둔탁한 녹색의 돌조각 같은 목걸이가 축 처지면서 지우스의 입가를 건드린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가 조금 사라지자 지우스의 호흡이 대번에 편안해진다. 지켜야 할 자가 있는 지금, 이 정도 무게의 흙을 혼자 떠받치며 감당하는 것은 와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8.

 

 “아무것도 안 보여. 인가? 우리 지금파묻혀있는 거야?”

 

 지우스의 목소리는 평소 같지 않게 조금 떨리고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긴 하지만 지우스는 아직도 소년처럼 보일 때가 있는 젊은 청년이었고, 눈을 뜨자마자 직면한 이 상황에 당혹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와론은 짧게 헛웃음을 삼켰다. 그나저나, 방심했어. 와론이 혼자 있었다면 법사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다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는 순간 론누로 손을 벽에 꽂아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와론은 지우스를 살피느라 법사에게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조종하는 마법이 중단된 순간 마수들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는 데다 지우스를 안고 있어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회로를 꺼낼 수도 없었기에 법사를 그 자리에서 공격할 수도 없었다. 중요한 건 상대의 적의를 미리 눈치채고 미리 차단하는 것이기에, 마법을 모른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지켜야 할 자가 있어 운신의 폭이 좁았던 것은 기사라면 변명조차도 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미 배신한 전적이 있는 놈인 걸 알면서 뭐 한 거냐. 나도 멀었다.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에 분통이 터지면서 와론은 뭐라도 당장 박살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살아오면서 와론은 무척 많은 것에 실패했고 그 경험들로부터 교훈은 얻되 감정은 오래 끌지 않는 법을 익혀야 했다.

 

 “죽은 거 아니지? 새까만 닭.”

 

 반성은 나중에. 지금은 지우스가 무사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다음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지금 와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이었다.

 

 “기린. 움직일 수, 있나?”

 

 빛이 사라진 지하의 진정한 새까만 어둠 속에서는 론누로도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아까 법사가 의기양양하게 떠들 때 본 것을 떠올려보면 와론의 등 위로 쌓인 흙의 깊이는 론누의 창대 길이에 거의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위쪽에 있을 때 와론이 쏟아지는 흙을 맞으며 론누로 버티면서 마수들이 퍼부은 흙의 상당량은 토굴의 내리막 저편으로 굴러떨어졌고 와론이 떨어진 구덩이 위로 쏟아진 건 그 중에선 얼마 안 된다는 것 정도였다. 얼마 안 되는 게 이 정도지만. 어우 숨쉬기 빡세네.

 

 “잠깐만. , 됐어. 손을 뺐어.”

 “머리 쪽, , 흙이 얕아. 손으로 파라.”

 

 지우스는 자신의 몸과 와론의 몸 사이에 있는 작은 틈에 방금 흙 속에서 빼낸 손을 두고 숨을 고르다가, 어둠 속을 더듬으며 천천히 들어 올렸다. 와론의 허리와 어깨를 지나 투구에 닿은 두 손은 잠시 어루만지는 것처럼 투구의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선을 따라 이동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팔을 치켜들듯 불쑥 뻗었다. 손이 흙을 뚫고 나갔다. 지우스가 뚫은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를 허겁지겁 들이마시면서 와론은 헐떡이지 않으려 애썼다. 지우스는 자신의 얼굴로 흙이 떨어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와론의 머리를 짓누른 흙을 밀어냈다.

 

 “이 위로 얼마나 쌓인 거야?”

 “너처럼 손으로 파도, 탈출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 사이 놈들이, 동대륙 가는 배도 탈 듯.”

 “또는 마수가 먼저 우릴 찾아낼 수도 있겠지.”

 

 지우스의 목소리와 어조에서 급격히 감정이 사라지자 와론은 긴장했다. 빛이 없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지우스의 시선이 흙이 사라진 와론의 투구 너머 위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등을 짓누르는 흙더미에 어떤 무게가 가중되는 것을 느끼면서 와론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와론의 손에는 론누가 없었고 팔다리는 흙에 깔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공격당하면 둘 다 죽는다. 대응할 수가! 그 때 지우스의 흙투성이가 된 두 손이 와론의 투구를 감쌌다.

 

 “잠깐만, 적대적이지 않은 것 같아. 일단은.”

 

 지우스의 침착한 어조와 손길을 느끼면서 와론은 자신이 한순간이었지만 몸을 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톤 단위로 측정해야 할 흙더미를 지탱하느라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허허, 애송이 앞에서 가오 떨어지게. 와론은 의식적으로 크고 느릿하게 심호흡하면서 눈을 감았다. 여전히 론누의 시야로도 볼 수 있는 게 없는 어둠 속이었지만 그 앞에서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하는 기척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론누를 건드리면서 툭 시야가 흔들리고, 머릿속이 통째로 핑 도는 멀미기가 느껴진 것이다.

 

 “새까만 닭?”

 “놈들이, 뭐 하는지 보여?”

 “보이진 않아. 너무 어두워. 내가 눈을 잃은 건 아니지?”

 “몰라. 아니야, 아마도. 근데 적대적이지 않다고? 어떻게 알아?”

 “왜냐면흙을 치우는 것 같아. 너는 엎드려있으니 잘 모르겠지. 위쪽에서 계속 흙이 떨어지고 있어. 흙을 쏟아부, , . 쏟아부어서가 아니라 옮기다가 조금씩 흘리는 느낌으로.”

 

 와론은 지우스의 추측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방금 전 마수들은 말토의 마법사가 조종한 대로 두 기사를 땅속에 처박고 그 위로 흙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흙을 치우고 있다니? 마수의 목적이 무엇일지 추측하려다 와론은 저 마수들을 사람처럼 사고하는 존재로 상정하는 것이 적절한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몸은 짊어진 흙의 무게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느릿했다면, 시간이 갈수록 조랑말이나 황소만한 자신들의 무게로 아래쪽에 깔린 인간들을 짓밟지 않도록 언저리로 피해 움직이면서 흙을 파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마침내 마수의 앞다리가 몇 겹 위의 흙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흙이 얕아지자 와론은 팔과 복근에 힘을 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마수의 톱니 달린 넉가래 같은 앞다리가 흙을 치우다 와론의 등을 스치면서 망토가, 그 밑의 등가죽이 주욱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와론은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겨우 흙 밖으로 상체를 내민 와론은 곧이어 두 손으로 지우스 주변의 흙을 파냈다. 아래쪽에서 지우스도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먼저 빠져나온 지우스가 와론의 팔을 잡아 흙무더기 밖으로 끌어냈다. 와론은 휘청거리며 반쯤 파묻혀있던 흙 속에서 일어섰다. 괴담에 나오는 무덤에서 일어선 시체가 이런 꼴일 거야.

 

 반쯤 넋이 나간 채 주저앉은 인간들을 앞에 두고 비교적 체구가 작은 마수 한 마리가 더듬이를 흔들었다. 더듬이는 와론의 투구와 등을 -따끔!- 건드려보다 지우스의 덥수룩한 머리털로 옮겨가더니 한참 동안 온몸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집게턱인지 앞다리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지우스를 떠밀어 일으켜 세웠다. 지우스의 어정쩡한 움직임을 느낀 와론은 긴 한숨을 뱉고는 구덩이의 벽을 짚으며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이거, 후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나?”

 “그렇지 않을까? 부르는 것 같은데.”

 “그 법사 자식 고분고분 협조하면서 우리한테 좀 더 붙어있었더라면 사상 최초로 마수한테 정중히 초대받은 인간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 기회가 날아갔잖아? 다시 보거든 놀려줘야겠는걸.”

 

 말토. 너는 기린이 건넨 자비로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거다. 우리의 다음 만남이 몹시 기대되는걸. 와론은 그 재회가 어떻게 끝날지는 굳이 독백하지 않았다.

 

 그때 마수에게 떠밀려 몇 걸음을 내딛던 지우스가 어둠 속 뒤편으로 손을 뻗다가 와론의 옆구리를 쳤다. 와론은 소리 없이 흡 숨을 들이켰다. , 하필이면 힌셔한테 뼈 맞은 곳. 지우스는 황급히 사과하는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와론의 옆구리에서 손등을 떼지 않았다.

 

 "두고 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와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와론은 지우스의 손이 닿아있는 곳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환한 대낮처럼 활보하고 심지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은 와론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저걸 익히기 시작하던 시절엔 엄청나게 욕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와론은 말없이 지우스의 손을 잡았다.

 

 지우스가 이끄는 대로 -아니, 마수가 이끄는 대로- 어둠 속을 더듬어 구덩이를 벗어나면서 와론은 마수들이 파낸 흙무더기 속에 아무렇게 처박힌 론누를 회수했다. 주위에 대기하던 마수들이 긴장한 듯 허공에 더듬이를 휘젓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와론을 제지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구덩이 밖으로 나온 지우스는 벽을 더듬으며 걷다가 마수가 더듬이로 건들자 그 방향으로 틀었다. 불빛이 전혀 없는 탓에 구덩이 위의 토굴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와론은 갑자기 여러 갈래의 갈림길이 생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까와는 다른 바람의 줄기를 느꼈다. 그 중에서 작은 마수가 그들을 데려간 길은 법사가 마수들을 불러내면서 토굴의 한쪽 벽에 구멍이 뚫린 그 방향인 듯했다. 법사가 추측했듯이 마수들이 이동하면서 임시로 판 굴이었기에 이쪽은 높이가 무척 낮았지만, 조금 지나가자 통상적으로 이용하는 높다랗고 매끈한 통로가 나와 와론은 겨우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이 녀석들, 역시 지성 비슷한 게 있는 것 같지. 우리 말을 알아들을까?”

 “글쎄어쨌든 자극이 될 소리는 안 하는 편이 좋겠지. 그보다 새까만 닭. 너는 을 어떻게 정의하지?”

 “싸워야 하는 상대는 모두 적이지. 꼭 적이어야만 싸우는 건 아니지만.”

 “그건 다들 마찬가지잖아. 됐어. 말하기 싫으면 하지마.”

 “삐졌냐? . , 나 쳐다봐. 삐졌어?”

 

 기사가 적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는 결국 자신의 초인적인 힘-폭력-을 누구에게, 왜 행사하느냐의 기준에 대한 질문이 된다. 기사의 명예가 각자 주관적으로 정의되고 해석되는 만큼 을 정의하는 방식과 이유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는 그러했다. 와론은 지우스가 기사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그 당연한 이론을 몰라서 묻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 녀석, 설마 을 어떻게 정의하는지가 기어스 같은 것과 관련 있기라도 하나.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무슨 이유로든 피할 수 없이 싸워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마수 떼였다. 보통의 경우 마수는 인간과 달리 대화나 소통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며 정서적 교감이 가능한 동물로 여겨지지도 않기에, 기사들은 누구나 길에서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마수를 죽이곤 했다. 어쨌든 무력을 지니지 못한 일반인에게 마수는 목숨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한 재난일 뿐이었고 기사는 약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설마 지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마수들을 죽이고 싶진 않다, 같은 건 아니겠지? 네가 하겠다고 한 건 이 녀석들을 토벌하는 거잖아.

 

 문득 와론은 자신이 서쪽 다리에 잠시 배치되었던 이유를 떠올렸다. 달잔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와론의 전임자였던 팅크는 마족 포로가 인간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그래서 좌천된 것이라 했다. 그랬던 녀석이 갑자기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범죄조직에 들어갔다니 어이가 없었지. 자신이 안전하고 상대보다 우위에 있을 때만 정의로울 수 있는 놈이었나, 아주 역겨웠더랬어. 와론은 면갑의 틈새로 길게 갈라지는 한숨을 뱉었다. 어쨌든, 그건 담청색 기린 너의 정의이다. 놈들이 먼저 나나 너를 해치려 한다면 나는 죽일 수밖에 없다. 내 우선순위는 분명하거든.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지우스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마법사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의아했던 게 있어. 그자들은 마수를 연구한다고 했지. 학자들은 보통 자신의 연구대상에 애정이든, 집착이든, 어떤 감정을 갖는 것 같아. 그런데 왜 그자는 내 임무에 적극적이었던 건가, 그게 이상해서.”

 “해충 연구하는 사람은 구충하는 연구도 하잖아.”

 “그거랑은 좀 다른데. 뭐랄까, 놈들에게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어. 마수들을 배제함으로써 달성하려는 다른 목적.”

 “그게 뭔지는 알아보는 중이었고?”

 

 와론의 목소리에서 놀리는 어조를 읽은 지우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와론은 와론대로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놈들은- 아니, 법사 놈은 기린과 만나 마수 토벌에 협력하기로 하고 공략까지 합의를 끝낸 후에 기사들의 말토 토벌을 알게 되었다. 기린 일행이 말토 잔당을 처단하러 여기까지 찾아온 걸로 간주하고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건 그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말토의 마법사들이 당초 기사들의 마수 토벌 임무에 협조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와론이 알기로 고대의 말토는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마법을 통해 널리 이로움을 전하려던 좋은 목적을 추구했다는 것 같지만, 지금의 말토는 그런 조직이 아니었다. 말토에 이득이 되니까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사는 말토에게든 자신에게든 어떤 이익이 되니까 마수 토벌에 참가하려 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어떤 마법적인 이익이라면 와론은 짐작도 할 수 없었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 마법은 와론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세속적인 이익이라면- 그때는 너흰 내 임무가 되겠지. 기린을 두 번 공격함으로써 이미 그렇게 됐지만.

 

 “네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거 알겠어. 이해한다.”

 

 갑자기 어둠 앞쪽에서 지우스의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와론은 손으로 연결된 지우스의 몸을 의식하면서 대꾸했다.

 

 “뭐가?”

 “마수의 지성 말이야.”

 “얜 또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적을 정의하는 문제 얘기인 거 알잖아. 네 대답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려는 거니까 그냥 내가 하는 말을 들어줘. 마수에게 지성이 있을지는알 수 없지. 놈들은 우리가 먼저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에 야수가 그렇듯 본능적으로 공격한 것뿐일지도. 하지만 애초에 인간이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놈들도 인간을 건드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뿐인 존재를, 외양이 혐오스럽고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죽여야 하나? 마수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조건 공격하고 죽이는 것은 오히려 인간 쪽인 것 아닌가?”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우리가 흙에 생매장당하기 전엔 물에 수장될 뻔한 거 벌써 까먹었나 봐?”

 “마수 입장에선 우리와 마법사들이 한편으로 보일 법해.”

 “마수가 마법사를 미워하고 기사 편을 들어줄 이유도 없는데. 난 가끔 네 머릿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네가 기사가 아니었다면 그런 발상도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게 기사의 문제다.”

 “그러게 말이다.”

 

 와론은 투구 밑에서 웃었다. 넌 서쪽 다리에 가본 적이 없겠지. 기사가 서대륙의 종족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꽤나 웃기는 얼굴이 되겠는걸. 와론이 보기에 인간이 마수를 대하는 태도나 기사가 적으로 규정한 집단을 대하는 태도나 본질은 같았다. 죽이는 것이 올바르다는 확신. 왜 죽여야 하는가, 방법이 그것뿐인가에 대해선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아. 죽이고 싶으니까 죽이고, 죽일 수 있으니까 죽인다. 그러고 나서는 약자 보호 같은 명분을 아무 말처럼 갖다 붙이며 명예롭고 정의로운 처단이었다고 정당화하지. 그것이 기사.

 

 그런 점에서 마수에게 목숨을 위협받고도 마수를 왜 죽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지우스는 분명 이례적인 기사였다. 그런 점이 와론을 즐겁게 하고 때로는 어떤 흥미도 일으켰지만, 대개의 경우 와론 자신은 골치가 아팠다. 지우스는 혼자 힘으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약한 기사였고, 결국에는 그가 힘을 빌리는 주위의 기사들에게 자신이 기사로서 홀로 감당해야 할 짐을 나눠 지우는 격이 되곤 했다. 지우스의 정의를 위해 지우스 대신 창을 휘두르면 그 결과는 와론이 아니라 지우스의 정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처음에는 사령탑이 설정한 목적과 수단에 자신이 설득되었고 동의한다고 생각해서 따르지만, 그것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지시가 내려지기만 기다리게 된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통은 지우스의 정의가 와론의 정의와 많은 부분에서 공통되기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기사로서는 자신이 아니라 남이 설정한 정의와 방법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고 실천한다는 것에 정체성 차원에서 스스로 경계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명령에 복종하는 건 개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기사거든. 지우스가 자신의 정의를 실천할 수단으로 지향하는 기사들의 사령탑이라는 상은 근본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었다. 다른 놈들은 거북이가 코끼리 다루는 걸 익숙해 해서 그런지 아무 문제를 못 느끼는 것 같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지우스를 혼자 내버려 두면 언제 어떤 식으로 그 약한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할지 알 수 없었다. 지우스는 그 새까만 닭이라는 강력한 기사가 옆에 있는데도 스스로 마수에게 잡혀가는, 아주 기묘한 고집을 지닌 기사였다.

 

 지우스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점점 부담스러워진 와론은 그가 자신의 날개 밑에서 떠나 생각이란 게 없어서 문제인 다른 기사들의 행보에 생각을 부여하는 사령탑으로 독립하길 바랐다. 하지만 바로 그런 마음을 품고 그 밖의 다른 상념들과 함께 환멸스러운 서쪽 다리를 떠나 잠시 자기만의 목적을 추구하며 황야를 방랑하던 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새까만 어둠 속에서 두 자루의 단검과 어두운 눈을 지녔던 어린 기사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와론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 녀석은 내가 알아서 해. 너는 힌셔한테나 가라고.

 

 “새까만 닭.”

 

 다시금 상념을 방해하며 끼어든 작은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와론의 손을 잡은 조금 작은 손은 긴장한 듯 차가워져 있었다. 와론은 지우스의 손을 한번 꽉 쥐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언젠가부터 그들이 걷고 있는 눈 먼 어둠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지켜보는 기척들이 늘어나 있었다. 마수의 몸에 달린 세 쌍의 발이 건조한 흙을 밟고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들이 전후좌우와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끊임없이 신경을 거스른다.

 

 어느새 그들은 지하에서 마주친 그 어느 방보다도 거대한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어찌나 거대한지 드디어 론누를 날리고 조종할 수도 있어 보였다. 시야가 확보되면서 두 기사가 지나갈 길만 남겨놓고 옹기종기 모여든 마수들의 윤곽도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의아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 와론은 곧 공간의 천장과 벽에 스스로 빛을 내는 이끼 같은 것이 군데군데 붙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빛은 반딧불이에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미약했지만 완전한 어둠 속에 오랫동안 묻혀있었던 기사들의 눈에는 밤하늘에 가득한 별이나 다름없었다. 가만 보니 이곳은 마수들이 조성한 게 아니라 지하수나 지진 등을 통해 지질학적으로 형성된 동굴의 일부인 듯했다.

 

 지우스를 이끌던 작은 마수는 모든 마수들이 둘러싸고 지켜보는 한복판에 그를 세우고는 다른 마수들 사이로 들어갔다. 지우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등을 맞대고 선 와론은 눈에 들어오는 마수의 수를 순식간에 헤아렸다. 어떻게 봐도 21마리의 두 배 이상이다. 이 숫자가 지표 가까운 곳에서 한꺼번에 움직인다면게다가 이 공간의 크기와 비교하면 이마저도 턱없이 적으니 전체 숫자는 훨씬-

 

 “새까만 닭, 진정해.”

 “난 지금 지극히 침착한데.”

 

 그렇게 대꾸하긴 했지만 와론은 스스로도 자신이 정말로 침착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 손에는 론누를 꼬나잡고 다른 손은 아직 연결된 지우스의 손을 힘주어 붙든 채, 와론은 언제 어디서든 공격하는 마수를 찌를 준비를 했다. 사실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기린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것을 머리로는 알고 이해했지만 와론의 몸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지우스 앞에 모여든 마수들이 지우스가 등 뒤로 숨기려 애쓰는 두 손을 더듬이로 살짝 건드렸다가 재빨리 떨어지는 동작은 호기심에 가까워 보였다. 반면 와론이 있는 쪽의 마수들은 더듬이를 빳빳하게 뒤로 눕힌 채 집게턱을 벌름거리고 있었다. 그 동작이 뜻하는 바는 누가 봐도 분명했다. 내가 놈들을 경계하고 놈들이 나를 경계하는 건 머릿수는 놈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내게는 놈들을 모조리 죽일 힘이 있기 때문이겠지. 실제로 나는 놈들 중 하나를 죽였고 놈들은 우릴 한번 수장하려 했어. 이건 본능 차원의 이야기다. 와론은 언어를 공유하는 같은 인간과도 대화를 통해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그다지 잘 못하는 편이었다. 하물며 마수가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여긴 너에게 맡겨야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것 같으면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와론은 어깨너머로 지우스를 곁눈질했다. 미약한 빛무리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난 지우스의 낯은 임무 중에 마주친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표정을 읽기 어려운 중립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는 잘 되고 있나? 기린.”

 

 와론이 가까스로 꺼낸 농담에 지우스가 이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말이 통할 거라는 소린 한 적 없어.”

 “어쨌든 놈들이 우릴 굳이 끄집어내서 여기로 데려왔다면 의도가 있을 것 아냐. 뭐인 것 같아?”

 

 와론이 투구를 까딱이자 지우스의 앞쪽에 있던 마수들이 꿈틀꿈틀 물러서며 길을 트기 시작했다. . 설마 내 말을 알아먹은 거? 지우스는 주저하며 와론을 돌아보다가 아직도 자신의 손이 와론의 손에 잡혀있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따라가자.”

 

 지우스는 말에 그치지 않고 두 손을 배 앞의 어딘가에 꽂으려다 뒤로 돌려 뒷짐을 지며 앞장섰다. 내키지 않았지만 와론은 론누를 어깨에 걸친 채 지우스를 뒤쫓아 걸었다. 이쪽에서 먼저 적대하지 않는 한 마수들도 당장은 공격할 것 같지 않았기에 와론은 조금 여유를 갖고 차분히 마수 떼를 관찰했다.

 

 그러고 보니 모여든 마수들의 중간 중간에는 아르마딜로처럼 둥글게 몸을 만 형상 같은 것이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질감이 생물보다는 풍화되고 있는 바위에 가까워 보였다. 그 근처에는 최근 깨진 것처럼 날카로운 단면을 드러낸 바윗덩이들이 있었다. 뭐지? 눈살을 찌푸리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구덩이에서 만났던 작은 마수가 무리 속에서 빠져나와 지우스의 앞으로 나섰다. 마수는 지우스를 이곳과 연결된 크고 작은 여러 출입구 중 하나로 안내했다. 그 너머의 빛 한점 없는 어둠을 들여다본 지우스는 말없이 와론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와론은 론누의 창대 끄트머리를 대신 내미려다, 생각을 바꿔 지우스의 손을 잡았다. 지우스는 그만의 이유로 마수들을 존중-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하고 있었지만, 와론은 론누를 사용해야만 하는 만일의 경우에 대한 찜찜한 상상이 뇌리 한구석에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토굴로 진입하고 잠시 후 뒤편에서 흙과 바위가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와론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론누를 콱 움켜잡았다. 다급하게 지우스가 말을 걸었다.

 

 “진정해. 저기로 돌아가는 길을 막은 것뿐이야.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우리가 공격당하는 건 아냐.”

 

 어둠 속에서 조랑말만한 것이 와론 쪽으로 다가와 지우스와 연결된 쪽의 팔꿈치를 톡 건드렸다. 하마터면 와론은 그것을 찌를 뻔했다. 자신의 손을 힘주어 틀어쥔 지우스의 손이 아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지우스의 다른 손이 자신의 손을 움켜쥔 와론의 주먹을 덮고 가만히 쓸었다. 긴장한 기색이 없는 따뜻한 손은 말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지우스의 생각을 전하고 있었다. 위험에 대비하며 온통 곤두서있던 신경이 시무룩하게 가라앉는다. 와론은 마지못해 창을 거두었다.

 

 “전설에서 기린이라는 신수는 뭍짐승들의 왕이라지. 이 마수들도 어떤 의미로 뭍짐승인가. 그래서 너랑 잘 통하나 봐? 기린.”

 

 일부러 짓궂게 내뱉은 말에 지우스는 와론의 주먹 위로 덮었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는 말없이 와론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는 것처럼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손을 놓아주지 않고 꽉 붙든 채, 와론은 입을 꾹 다물고 지우스를 쫓아 걸었다. 그냥 빈정거리려던 건 아니었어. 놈들이 네가 지닌 그 괴상한 을 감지한 것은 아닌가, 그런 이 있지만 쓰지 않았기에 너는 존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오해와 불신은 와론이 호흡하는 공기였다. 와론은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비열하고 폭력적으로 강탈해간 기사들의 세상과 타협하거나 화해할 -비굴하게 조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세상을 향한 변명이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와론이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하마나 기린 너라 해도 말이야.

 

 한동안 토굴에서는 작은 마수의 타박거리는 발소리와 지우스의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조심스러운 기척, 그리고 와론의 거침없이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만이 울렸다. 어느 갈림길을 지나온 때부터 길에서 급격히 흙이 줄어들고 바위와 잔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바윗길은 얼마 전까지 물이 흘렀는지 군데군데 웅덩이가 고여있었으며 미끄러웠다. 벽과 천장에서 반짝이끼가 다시 나타나는가 하면 어딘가에 지상까지 갈라진 틈이 있는지 흐릿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도 있었다.

 

 어느 순간 머리 위의 높다란 바위 천장에서 희멀건 햇빛이 분무기로 뿌리는 것처럼 쏟아졌다. 너비는 겨우 한 뼘 크기에 불과하지만 깔끔한 원형으로 뚫린 구멍은 지상까지 수직으로 뻗어 있었다. 그 좁은 통로를 타고 햇빛이 거꾸로 된 분수처럼 지하로 흘러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반으로 비스듬히 쪼개진 둥그런 바위가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아 자세히 본 와론은 곧 방금 전에 다른 곳에서 그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

 

 그곳에서 작은 마수가 멈춰섰다. 마수는 더듬이로 부서지고 깨져나간 동족의 바위-사체-를 더듬다가 지우스의 비어있는 손을 툭 건드린 후, 와론을 지나쳐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지우스는 잠시 마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꺾어 천장에 뚫린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저건자연적인 게 아니야. 마수가 판 것도 아니고. 저건 마치

 

 발을 디딜 때마다 최근에 깨지고 부스러진 잔돌이 채였다. 조용히 지우스의 손을 놓은 와론은 몸을 굽혀 구멍 아래에 놓인 마수 바위의 쪼개진 단면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짝이는 결정이 가득했고, 그 밑바닥에는 무엇인가가 나선형으로 파내려간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직경은 머리 위의 구멍과 동일한 게 분명했다. 마수 바위 주위의 바위 바닥과 벽은 그 밑에서 큰 폭발이라도 있었던 건지 거미줄처럼 쩍 갈라져 있었고 단층처럼 어긋난 채 위태롭게 맞물린 바윗돌도 보였다.

 

 “새까만 닭. 우리가 지금 어디 쯤에 있는지 알겠어?”

 “마수들의 회합 장소에서부터 쭉 동쪽이나 북동쪽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종합해보면, 아마도-”

 “마을이 있는 방향. 보다 정확히는 투자자들이 조사를 하던 곳이다.”

 

 주위를 돌아본 와론은 공간 곳곳에서 땅과 바위에 새겨진 지진의 흔적을 알아보았다. 그것이 마수가 목격되기 전부터 마수의 존재를 알았던 말토의 마법사들, 땅속에 있는 것들을 탐지할 수 있는 마법, 무너지고 허물어져 있던 토굴들, 마수들이 모여있던 장소 곳곳에 떨어져 있던 깨진 바윗돌과 이어지자 한순간 어떤 그림이 그려졌다. 지우스를 돌아본 와론은 투구 너머로 눈이 마주친 지우스를 바라보면서 젊은 기사가 자신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을 알아보았다. 지우스가 조심스럽게 정보를 선별하고 논리를 통해 차곡차곡 생각을 쌓아 올려 결론에 도달하는 쪽이라면, 예민한 감각과 오랜 경험에 기반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늘어놓고 그것들을 꿰뚫는 무언가를 직관적으로 찾아내는 것은 와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린. 여기서 광산 개발한다던 거. 그 얘기 좀 더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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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늙에선 와론이 자신을 향한 오해 앞에서 변명하려 하지 않고(ex 칸덴티아의 네가 죽였지? 에 대한 반응)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악을 떨던 모습(ex "나는 뭐~ ...지금 이 상황을 노린 거고~")이 한결같이 제시되면서 새까만 닭이라는 기사가 겉으로 꾸미는 모습 내지 소문은 실제 와론이라는 인간의 내면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죠. 이 챕터를 작성하던 때에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 후 귀신 같이 찾아온 134화... 긴 말 하지 않겄읍니다요. 동인인데 작가양반한테 맨날 패배한다...!

다음편은 금요일이나 토요일쯤에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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